장례예배·입관예배가 우상숭배인가?  

 

 


[신앙상담] 장례예배·입관예배가 우상숭배인가?

어떤 행사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어,‘장례예식’ ‘결혼예식’ 등으로 용어 바꾸면 돼


- 박종순 원로목사 (충신교회)

 

[Q]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교회의 위로와 보살핌이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설교 중에 장례예배 입관예배 발인예배는 우상숭배라고 하셨습니다. 왜 우상숭배가 되는지 궁금하고 바른 모범을 알고 싶습니다.


[A] 먼저 예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배의 사전적 의미는 섬기다, 경배하다, 최상의 가치를 돌려 드리다 입니다. 그리고 예배의 대상은 창조주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타 종교에도 예배행위가 있습니다. 그들의 예배대상은 사람이 만든 신이거나 교주이거나 사물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배대상은 경배와 찬양, 높임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도 사상도 조직도 건물도 예배대상일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의 예배는 제사였습니다. 정해진 제사법에 따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단 한 번도 사람을 제사 대상으로 정한 일이 없었습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 제물과 제사법은 다르지만 제사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한 후 세월이 지나면서 저들의 제사가 형식화되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이런 형식화된 제사를 책망하셨습니다.(사 1:11∼13, 미 6:7) 그리고 솔로몬 성전은 주전 587년 외침으로 무너졌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바른 예배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의 요점은 용어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목회자나 교회들이 생각 없이 사용했던 예배용례를 살펴보면 결혼예배 장례예배 회갑예배 학위취득예배 개업예배 등입니다. 문법대로라면 결혼이나 장례 같은 행사가 예배의 대상이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람도 행사도 그 어떤 것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용어와 표현을 바꾸면 됩니다. 결혼예식, 장례예식 그리고 개업이나 축하할 행사들은 감사예배로 용어를 바꾸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면 됩니다.

결혼예식의 경우는 결혼 당사자와 가족 하객 주례자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축복하는 예식입니다. 주례자의 예식진행과 주례사는 축하와 격려로 진행돼야 합니다.

그러나 장례식은 위로가 필요한 예식입니다. 집례자의 태도나 언어표현, 분위기가 장례식에 걸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조문하는 사람들도 절도와 예절을 지켜야 합니다. 죽은 사람을 신격화한다든지 예배대상으로 설정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죽은 사람을 신으로 떠받든다든지 숭배하는 것은 성경이 금하는 우상숭배입니다. 일본의 신사참배나 북한의 동상숭배 등은 분명한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용어 선택의 미흡 때문이라면 우상숭배라기보다는 개선해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일상용어도 바른 말을 사용해야 하지만 교회의 공적 용어들, 예배에 사용되는 용어들은 바로잡고 바로 쓰는 게 필요합니다.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쓰고 바로 살고가 중요합니다.


[출처] 국민일보
[원본링크]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55031&code=23111619&sid1=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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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무얼하시기에 세상이 이토록 불공평하냐?  

 

걸 림 돌 1 6

" 하 나 님 이 게 신 다 면 세 상 이 이 토 록 불 공 평 하 고 악 이 판 을 칠 수 있 는 가 ? 하 나 님 은 무 얼 하 고 계 시 는 가 ? " 하 는 남 편 ( 부 모 ) 을 어 떻 게 전 도 할 수 있 을 까 요 ?

가 이 드 1

서 승 동

총 신 대 신 대 원 졸 업 . 부 평 중 앙 교 회 목 회 . 현 재 예 수 전 도 단 의 목 회 자 예 수 제 자 훈 련 학 교 간 사 .

세상에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 질문도 그런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 째 로 , 하 나 님 은 죄 에 대 해 서 반 드 시 심 판 하 시 는 분 이 십 니 다 . ( 창 6 : 5 - 7 )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내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도록 버려두십니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각 개인에 대해서 선한 일을 한 자에게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에게는 심판의 부활로 심판하십니다.(요5:29).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 째 로 , 하 나 님 께 서 는 죄 에 대 하 여 심 판 하 실 때 를 연 기 하 시 면 서 사 람 들 이 회 개 하 고 돌 아 오 기 를 기 다 리 고 계 십 니 다 . ( 벧 후 3 : 3 - 7 )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성 도 는 이 럴 때 어 떤 삶 을 살 아 야 할 까 요 ?

반 드 시 심 은 대 로 거 두 게 되 리 라 는 ( 갈 6 : 7 ) 의 말 씀 앞 에 우 리 는 믿 음 으 로 살 아 야 합 니 다 .

또 성 도 는 무 너 진 사 회 의 도 덕 성 이 회 복 되 기 를 위 해 서 기 도 해 야 합 니 다 .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남편이나 부모님이 이런 질문으로 성도를 공격하는 일들을 자주 봅니다. 사실 이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만의 고민이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고통스러운 문제이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주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럴 때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 공의와 정직이 시행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가 이 드 2

이 춘 태

부 산 대 학 교 교 육 학 과 졸 업 . 현 재 I V F 전 북 지 방 회 간 사 .

이 문제로 하나님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세상의 부조리에 대하여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불행한 출생이나 가정환경, 그리고 살면서 억울하게 당해야했던 불공평한 대우들로 인해 생긴 피해의식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또 사회나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때문에 막연히 신앙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런 이유들을 고려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째 , 지 적 인 접 근 방 법 입 니 다 . 사회정의에 민감한 대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은 '세상은 이렇게 불의한데도 하나님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든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는 분명 나쁜 신이다'라고 추론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장하는 사변적인 생각에 불과합니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고 악이 판을 치는 이유는 하나님 탓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이기적인 선택(창1-3:선악과 사건)때문이며 또한 이를 뒤에서 부추긴 마귀 때문입니다. 세상의 부패와 타락은 인간들 스스로의 책임이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두 번 째 , 악 이 판 을 치 는 데 무 엇 하 고 계 시 는 가 ?

성경은 하나님이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악을 억제하고 계시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일반은총의 방식으로 인간정부를 통한 거입니다. 로마서 13장 1-4절을 보면 하나님은 권력을 가진 관리들을 세우셔서 사람들이 범죄하면 법을 통해 처벌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두려움을 갖고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더 이상 부패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안전장치였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특별은총의 방식으로서 교회를 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권력의 칼을 가진 관리들을 통해 범죄를 억제하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악을 없애고 선을 이루어 나가는 일을 하십니다.

세 번 째 는 " 하 나 님 게 서 악 을 억 제 하 시 고 불 의 를 고 치 시 는 일 을 하 고 있 다 지 만 여 전 히 악 한 사 람 들 은 들 끓 고 있 지 않 는 가 ? 하 나 님 은 이 런 자 들 을 한 꺼 번 에 해 결 할 수 없 는 가 ? " 하는 의문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미루고 계신 이유는 해결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악인들에게까지 구원받을 기회를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재림하시는 마지막날까지 회개치 않은 모든 악인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악과 정의의 문제에 대한 복음의 체계적인 답변입니다.

다음으로 당신의 가족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지금도 세상의 불의를 고치기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실제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시에 강남 근교의 기독교인들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던 일이나 한국선명회가 르완다난민을 돕기 위해 모금운동을 하는 것, 다일공동체가 청량리에서 무의탁노인이나 걸인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는 일과 같은 사례들을 알게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됩니다. 가능하면 믿지 않는 가족을 봉사활동에 직접 참여하게 해 보는 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또한 송명희 자매의 간증이나 김진홍 목사님의 간증테이프들은 자신의 불행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고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이 열리도록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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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할 때 왜 눈을 감고 기도하나요?


 


 

 질문
①공적인 예배시나 개인적인 예배시의 기도시간에 눈을 감고 기도하게 되는데 눈을 감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또한 성경적인 근거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②속으로 하는 기도보다는 더 솔직한 기도를 할 수 있어 소리를 내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럿이 하는 중보기도는 상관이 없는데, 혼자서 기도를 하면 무섭고 떨려서 기도를 중단하게 됩니다. 기도 중간에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 사탄을 물리치는 기도도 해 봤지만 누구라도 없으면 위축이 되어 기도에 방해를 받는데 어떻게 기도하면 좋을까요?
 

 답변1
그건 이렇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면 여러 기도의 자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머리를 숙이거나 엎드리어 기 도하는 자세(창24:26, 48, 52; 출4:31, 34:8-9),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왕상8:54; 눅22:41; 행 21:5), 손을 펴 들고 기도하는 자세(왕상8:22; 사1:15; 딤전2:8), 서서 기도하는 자세(막11:25; 눅 18:11-13), 가슴을 두드리며 기도하는 자세(눅18:13), 벽을 마주보고 기도하는 자세(왕하20:2), 하늘 을 쳐다보면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자세(요11:41) 등이 있습니다.


이중 유대인들이 행하였던 기본적인 기도의 자세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말하기도 합니다. 보 통의 기도 자세인 서서 하는 기도, 자복의 기도인 엎드려 하는 기도, 간곡한 기도의 자세인 꿇고하는 기도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또한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바른 자세는 순결한 마음으로(시66:18-19), 믿음으로(약1:5-8), 하나님의 뜻대로(요 일5:14), 겸손의 자세(대하7:14; 사57:15; 벧전5:5) 등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아울러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령과 진정한 마음의 자세가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받아 주실 수 있는 기도의 자세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대화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오히려 대화는 눈과 눈을 마주치며 행하는 대화가 바른 자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과의 대화도 하나님의 눈을 쳐다보는 자세가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기도의 자세는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열려져야 합니다.


이삭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24:63)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에 대하여 사도 요한께서는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오히려 이삭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눈을 뜨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이 자세는 바로 하나님의 눈과 눈을 마주하며 대화하시는 자세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서구 교회에서는 기도문을 작성하여 그 기도를 눈을 뜨고 읽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 눈을 감고 하는 자세는 잘못된 것일까요? 육신의 눈을 감고 행하는 이러한 자세는 결코 잘못된 자세는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을 집중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자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눈은 감고 있지만 마음과 영에 눈은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하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육신의 눈을 뜨고 기도하게 되면 제 자신도 쑥스러움을 느낍니다. 또한 오히려 마음과 영이 하나님을 향하기보다는 세상을 더 보게 되는 경향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이때 제자들은 피곤하여 잠을 자고 있습니다. "(마26:40-41)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잠을 자고 있는 것은 눈을 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이 감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염려하시며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묻고 계신 것에 직접적인 답변을 드린다면 눈을 감고 기도하는 자세에 대하여 성경적인 근거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힘들게 찾는다면 세리가 부끄러워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기도하였던 말씀이나(눅18:13) 엎드려 기도하였던 기도의 자세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눈을 감고 기도하게 되는 이 자세는 우리들의 정서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눈을 비록 감고 기도하지만 마음의 눈과 영적인 눈을 더 뜨고자 하는 자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육신의 눈을 감고 기도하거나, 또는 눈을 뜨고 기도하는 것 모두는 잘못된 자세는 아닙니다. 다만 모두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하는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답변2

기도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할 수 있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데, 성도는 모름지기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 선생은 기도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청구서를 내는 일 이라고 기도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도의 기도를 통하여 이 시대에 이루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뜻을 이루게 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강력한 성도의 무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탄과 그 졸개들은 어떻게 하든지 성도의 기도를 방해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질문의 내용은 기도에 대한 사탄의 방해를 어떻게 물리치면서 기도로 승리할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질문의 내용을 보면 혼자 기도할 때 무섭고 떨려서 더 이상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고 기도를 중단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흔히들 경험하는 사탄의 기도 방해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러한 방법 이외에도 사탄은 불신의 마음을 넣어준다든지 잡념을 넣어주거나 사람을 통하여 기도를 중단시키는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기도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산에서 혼자 기도드릴 때에는 당장이라도 사나운 짐승이나 괴물이 달려올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또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경우도 허다한데, 이것 역시 사탄의 기도 방해 공작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사탄의 방해를 물리치면서 기도를 계속할 수 있습니까?
몇 가지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말씀으로 재무장해야 합니다.
사탄을 이기는 무기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엡6:17, 마4:1-11) 사탄이 기도를 방해할 때는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을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눅10:19, 요12:31-33, 롬16:20, 롬8:31-39, 엡1:21-22, 약4:7

둘째로, 찬송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도의 심령에 기쁨을 주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사탄을 물리치는 강력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성도가 찬송할 때 하나님께서는 찬송하는 그 자리에 임재하시고, 그리하여 사탄은 찬송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 멀리 달아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의 이름으로 사탄을 물리쳐야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4:7) 말씀하신 대로 두려움없는 확고한 믿음으로 사탄을 물리치면 그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으면 말씀읽고 찬송하는 일을 다시 한동안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기도를 계속해야 합니다. 사탄이 방해한다고 기도를 중단하는 것은 사탄의 공격에 굴복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름지기 사탄의 기도 방해를 무릅쓰고 계속해서 기도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계속적인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을 체험하면서 사탄의 방해 공작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과의 영적인 싸움에서 언제나 기도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엡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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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상담] 목회자의 정치 관심 바람직한가

 

 

 

목회자가 설 곳은 교회이고 목회 현장… 강단을 정치도구로 사용하는 것 삼가야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Q] : 제 아버지는 목회자이십니다. 그런데 정치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복지시설도 운영하면서 정치인들과 교분도 두텁습니다. 특정 정치인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가 하면, 말이나 글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바람직한 자세일까요?

 
[A] : 사람마다 세계관, 역사관, 가치관, 신앙관이 다릅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른 것처럼 성격도 삶의 방법도 취미도 각각 다릅니다. 역사를 보고 사회를 보는 관점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양성 때문에 생존과 삶의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정치적 존재여서 정치를 하고,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호불호를 논하게 됩니다. 국가공동체는 물론 종교도 정치형태를 수용하고 제도화하고 있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정치지향적인 사람입니다. 직접 참여하고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정치마당을 기웃거리고 줄서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러면 안 됩니다. 목회자가 설 자리는 교회이고 목회현장입니다. 이해득실 때문이라면 더 삼가야 합니다. 정치권에 줄 대고 도움 받고 청탁할 일이 많다는 것 자체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둘째, 정치를 혐오하는 사람입니다. 정치를 세속집단의 퇴행으로 보고 혐오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정치인들을 싸잡아 오염인간으로 치부하고 정치적 관심을 외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머물고 살아가는 것은 정치의 힘과 역할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도 정치라고 했습니다. 신령공동체인 교회도 정치가 존재합니다. 물론 속물정치로 공동체를 타락시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정치인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치꾼이 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셋째,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국가나 교회도 정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의 의미는 바른 국가, 살기 좋은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이고 신령공동체인 교회의 질서와 건강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정치 때문에 국가가 사분오열된다든지 교회가 타락하고 중심을 잃는다면 그런 정치는 없는 게 좋습니다.


바른 정치의 모판은 바른 신앙입니다. 교회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목회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줄서기에 나서는 목회자라면 원위치를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강단을 정치구현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도 삼가야 합니다. 절묘한 균형과 조화 그리고 정치정도를 제시하고 지도하는 지도자가 돼야 합니다.


[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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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3)

 
원하는 것만 받는 게 신앙인가?

 

신앙은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하나님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것이라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의심 없이 받는 것이다.

간혹 일부 신자들은 모두 건강하고 부유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시련을 면제 받는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그 반대의 것을 때때로 약속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다”(요 16:33)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도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고난의 면제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돌보아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한다면, 그분을 닮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난을 환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제가 아무 해도 당하지 않고 복을 누리도록
이런저런 것들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것이 왜 어려운가?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구하느라고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선(善)을 구하지 못한다.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그것이 찾아왔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의심하며 분노와 원한에 사로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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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4) 


고통의 순간에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언제나 신앙은 우리를 궁극적 승리로 이끈다.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적으로 승리자의 편에 서 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시는 중에
하나님마저 그분에게서 등을 돌리셨다.

만일 당신이 그 자리에서 이것을 목격했다면,
그분이 궁극적으로 승리하실 것이라고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패배처럼 보이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탄에 대하여 승리하셨고,
우리의 구속이 성취되었다.

장차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위에 온전히 실현될 것이며,
고통과 눈물이 영원히 끝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타락하여 고통에 빠진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주위에 널린 죄의 결과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우리가 고난을 피할 수 없지만, 적어도 혼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소망 없이 고통당하거나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라고 말했다.

나는 감히 제안한다.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묻지 말고,
“고통의 순간에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고 묻자!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징표는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다.
이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없다면,
은혜와 진리 안에서 계속 성장할 수 없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힘을 얻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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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독에 빠졌다가, 예수에 빠지다! - 신앙스토리 5

 

예배를 통해 회심한 후 급속히 성장한 사람
술독에 빠졌다가 예수에 빠진 ‘노숙자 선교회’ 책임자 멜 트로터 이야기 


_ 제임스 헤플리  James Hefley

 

 
 ‘시카고 퍼시픽 가든 선교회’ (the Pacific Garden Mission in Chicago)는 시카고의 가난한 노숙자들을 아주 효과적으로 돌본다는
평을 받는 단체였다.
1897년의 어느 추운 날 밤 이 선교회 건물 안에서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찬송가를 인도하는 사람 해리 몬로(Harry Monroe)는 전에 위조 지폐를
만들었으나, 이 선교회에서 회심한 후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있는 중에 어떤 술 취한 젊은이가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게 되었다.
몬로는 찬송가 부르기를 잠시 중지시키고, 큰 소리로
“하나님, 이 불쌍한 젊은이를 구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 후 이 젊은이는 고개를 들고 설교와 간증을 열심히 듣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멜 트로터였다.

트로터는 19세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과음은 통제 불능이었으며, 그의 직장 업무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는 가는 직장마다 쫓겨났다.
 

일찍이 결혼한 그는 아내에게 착실히 살겠다고 여러 번 약속했지만 단 며칠뿐, 다시 술을 입에 대곤 했다.
술을 사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팔아치웠다. 심지어 그의 말(馬)과 약(藥)까지 팔았다. 
그의 아내가 아기를 낳은 후에도 그의 행동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술을 마셨다.

언젠가 집을 나가서 열흘 동안 술 파티를 벌인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아기가 아내의 품에서 죽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자기의 아기를 방치하여 죽게 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그는 자살을 결심했다.
그리스도인이던 그의 아내는 아기를 내려놓고 트로터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했다.
그녀의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다시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아기의 장례를 치른 후 그는 다시 취해서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결국 술에서 벗어날 수 없어 절망감에 빠진 트로터는 자기의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

1897년 1월 19일 그는 물에 빠져 죽겠다고 미시간 호수를 향해 걸었다.
그가 반 뷰렌(Van Buren) 거리를 따라서 걷고 있을 때 누군가 말 그대로 팔을 뻗어서
그를 ‘시카고 퍼시픽 가든 선교회’ 건물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때가 바로 선교회 안에서 해리 몬로가 찬송가 부르기를 인도하는 중이었다.
트로터가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을 때 몬로는 찬송가 부르기를 중지시키고,
그를 위해 큰 소리로 기도했던 것이다.

 

예배가 끝난 후 몬로는 트로터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마음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십시오”라고 말했다.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서서히 술이 깬 트로터는 몬로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렸다.

그날 이후 트로터는 몰래 술집으로 빠져나가는 대신 시간이 날 때마다 선교회를 찾았다.
그는 기타를 연주하고 찬송가 부르기를 인도하고 심지어 몬로와 함께 그 지역의 교회들을 방문했다. 
그의 신앙은 급속히 성장했다.

회심한 지 3년 후 그는 그랜드 래피즈(Grand Rapids. 미국 미시간주 서부 켄트 지역)의 ‘노숙자 선교회’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 후 40년 동안 그는 그 선교회를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었다.
그는 이 선교회를 발판으로 하여 전국에 66개의 다른 노숙자 선교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예전의 자기 모습처럼 삶의 목적과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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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주(主) 되심은 희생을 요구하는가? (1)

 

나는 나를 처음 그리스도께 인도한 여인에게 중요한 질문을 했었다.
그녀가 나에게 제시한 복음은 아주 매력적이고 멋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포기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잠깐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오직 당신의 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죄의 회개를 요구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들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만일 그녀가 “당신은 테니스, 당신의 친구들, 삶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대하여 어쩌면 다시 생각해보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당신은 당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 즉 당신의 삶을 망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에게 ‘희생’은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 의미로 다가왔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becoming a Christian)과 ‘그리스도인인 것’(being a Christian)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될 때 나는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성경은 우리가 희생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을 말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분의 희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는 사람은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그런 희생을
치르셨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에 동요를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게 된 사람은 그분의 생명을 희생하도록 만든 것들을 미워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많이 희생해야 하느냐를 놓고 고민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기의 죄들을 버리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당신은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을 방해할 수도 있는 것들을 희생(포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을 섬기는 종의 삶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이제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자신이 모든 것들을 잃어버린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서”라고 그는 분명히 밝힌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큰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귀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더욱 사랑을 느낄수록,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의 포기를 희생으로 여기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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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주(主) 되심은 희생을 요구하는가? (2)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려는 사람은 우선 시간 사용부터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려고 한다면 우리는 빈둥거리면서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때로는 돈을 버는 시간까지 제한해야 한다. 경건 생활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규칙적으로 시간을 내어 노력할 때 경건 생활이 이루어진다. 

교회의 일에 동참하려면 우리는 돈을 제대로 사용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찮은 것들이나 사치스러운 것들에 돈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때로는 필수품으로 간주했던 것들조차 포기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바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
다른 일들에 우리의 힘을 실컷 사용하고 나서 남은 힘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경건 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육체적 힘도 반드시 필요하다.
다른 일들에 육체적 힘을 다 써버린 다음 경건 생활을 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은 라이프-스타일(lifestyle),
즉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적절한 삶의 기준을 세워서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우리의 시간과 돈과 힘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소위 ‘출세 지상주의’에 빠져 있다.
예를 들어 진급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들은 차분히 앉아서
‘내가 진급하면 우리 가족에게 어떤 변화가 생길까? 그것이 나의 교회 봉사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까?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진급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더 중요한 영적인 일들을 위해 진급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그들은 그것들을 계속 추구할 때 어떤 결과가 찾아올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 달라야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희생은 그들이 선택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자기 절제’이다.
희생 곧 자기 절제는 이 세상의 삶을 풍요롭게 살게 해주고 영원한 상급을 받게 해준다.
사실, 우리가 포기하는 것들도 알고 보면 바울의 말대로 ‘배설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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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성 없는 훈련이 의미가 있는가? (1)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는 이 땅에서 가장 발전되지 못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과 달리 동물들은 출생 직후 아비와 어미를 잃는다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잘 발달된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인간이 되기를 배워야 하는 존재이다.

갓 태어난 인간은 엄마의 젖가슴에서 젖을 빨아먹을 수 있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삶의 많은 단계들이 이 본능 하나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듦에 따라 아이는 나이프, 포크, 그리고 스푼을 가지고 식사하는 법과 컵을 가지고
물을 마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식을 길러본 많은 부모들이 체험하듯이, 이런 배움의 과정은 길고 힘든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자식이 삶에 적응하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을 가르치는 데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방금 이야기한 육체적 출생과 양육에 관한 이야기는 영적 출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중생(重生)은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다.
하지만 중생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중생 다음에는 성장의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에게 믿음 안에서 부모, 형제 및 자매를 붙여주신다.
물론 그 목적은 그들이 새 신자의 영적 성장을 돕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런 영적 성장은 한번에 또는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나름대로 훈련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린아이가 밥이나 국을 쏟지 않고 식사하는 법을 배우고 넘어지지 않고 걷는 법을 배우듯이,
우리도 영적 성장을 위해 배워야 한다. 

훈련이 자발성을 말살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러나 포크를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자발성으로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단지 훈련이 안 되었을 뿐이다.
운동선수나 음악가들은 여러 해 동안 반복적이고 때로는 지루한 훈련 과정을 거치지만, 경기나 연주 중에는
매우 자발적으로 경기하고 연주한다.
즉, 경기나 연주 중에 그들의 근육과 감정과 생각은 매우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문제들에서도 우리는 훈련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영적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은 유혹의 순간에, 순종해야 할 순간에, 찬양해야 할 순간에,
증거해야 할 순간에 자발성이 발동하여 신앙적 선택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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