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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선악과에 대하여

 

 

 

제목 : 선악과의 의미

말씀 : 창2:15-17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의문이 생기게 마련이다. 의문과 의심은 다르다. 의심은 하나님 존재자체나 천국과 지옥 등의 신앙에 관한 중요한 주제들을 잘 믿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의문은 분명히 믿기는 믿는데 잘 알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왜 그렇까? 왜 그렇게 하셨을까? 과연 어떻게 될까?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 등등 신앙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궁금증들이 의문이다.

그리고 이런 의문들은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어떤 주제에 의문을 가질때 더욱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기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그런 과정을 거쳐 의문점들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해하게 될 때 신앙은 더욱 견고해지고, 전도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된다.

오늘은 우리 신앙인들이 가질 수 있는 의문점 중의 하나인 선악과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여러분들은 이런 의문을 가져보았는가? 나는 사실 처음 신앙생활 시작할 때에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이 선악과 문제다. 나뿐 아니라 이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의문점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독교를 공격하기도 한다.

선악과와 관련된 의문은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들어놓으셔서 사람들을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는 것이다. 선악과만 없었다면 사람이 그것을 따 먹지도 않았을 것이고,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죄를 짓지도 않았을 것이고, 죄를 짓지 않았으면 걱정 근심 고통없이 잘 살았을 터인데 왜 그걸 만들어서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하였느냐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실 때 사람이 결국 따 먹게 될 것을 알았느냐 몰랐느냐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따 먹을 줄을 뻔히 알고도 그것을 만드셨다면 결국 죄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 모르고 만들어놓으셨다면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못한 분이 아니냐는 것이다. 전지전능이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아는 것을 말하는데 그걸 모르셨다면 어떻게 전지전능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혹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우리 인간이 100%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우리의 한계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나 신앙에 관한 모든 것들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영원무궁하시고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유한하고 부족한 우리 인간으로서는 당연히 다 알 수 없다는 것이며, 더구나 영적인 세계는 이 세상의 이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이기에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데 그나마 성경이 태초부터 영원까지의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에 대하여 모조리 다 기록한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다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다 알려주어도 다 알지도 못하겠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같은 책들이 수백권, 수천권은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한권도 제대로 다 읽지 못하고 다 알지 못하는데 그 수백 수천권의 책을 어떻게 다 읽고 어떻게 다 알겠는가? 그래서 성경에서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죄와 구원의 문제에 집중해서 다루고 우리가 알고 싶은 모든 것들을 다 다루고 있지 않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 외에는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존 칼빈 선생은 말하기를 ‘성경이 가라는 곳까지 가고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라.’고 하였다. 무슨 말인가? 성경에 기록한 것 이외에 알 수 없는 부분은 억지로 인간의 이성대로 풀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연히 억지로 풀다가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켜 이단 삼단으로 가지말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은 알려 주신대로 말씀묵상하며 그 안에서 올바르게 알고, 비밀에 두신 것에 비밀에 두신대로 그저 하나님께 맡기고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는 우리가 얼마든지 은혜가운데 믿음생활하기에 충분한 만큼 하나님과 하늘나라에 대한 정보가 제공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은혜가운데 신앙생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악과의 의미는 무엇일까?

1.선악과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야말로 낙원 같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셔서 인간에게 주었다. 거기는 생명나무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실과나무를 비롯하여 각종 동식물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인간에게 주시며 그것들을 다스리며 누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모든 실과는 네 마음대로 먹어도 좋지만 단 하나 선악과만은 금지하셨다.

그렇다면 왜 그러셨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선악과는 인간이 범치 말아야 할 하나님의 영역의 표시하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만든 창조주이고 우리는 피조물이니까 이 선악과을 볼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선악과를 볼때마다 하나님이 인간의 통치자가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뜻대로 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복종의 표로써 하나님께서 금한 이 실과는 절대로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선악과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 규정이었던 것이다.

여러분, 사실 자식들도 똑같다. 자식들에게 금지조항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허용하면 결국 방자해진다. 버릇이 없어진다. 아버지나 자기나 똑 같은 줄로 안다. 그러나 일정한 금지조항을 두고 지키게 하면 무언가 자신이 부모의 영역을 침범할수 없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고 그러므로써 부모에 대한 공경과 순종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기억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때에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하시려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더욱 하나님의 통치권을 온전히 받아들여 그 안에서 살아갈때에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누리자.

2.인간의 삶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만약 선악과나 사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일도 없고, 사단의 유혹으로 죄를 지을 염려도 없이 평안하게 살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일이 있다. 과연 그러한 상태 즉 죄의 영향에서 100% 배제된 상태에서의 선이나 자유나 평안이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결론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결국 로봇과 같은 삶에 불과하고 로봇과 같은 삶이라면 오로지 선 속에 산다해도 참된 인생의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악에 빠질 유혹이 전혀없이 모든 것이 선인 상태라면 선을 선택하고 말고 할 필요도 없이 자동으로 선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자동으로 선을 행하며 산다면 그것은 결국 로봇에 불과한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로봇에 불과한 삶은 결코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자녀가 부모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처럼 그저 부모가 조종하는 대로 살아간다면 어떻겠는가? 설령 자녀가 오직 선(善) 가운데 산다고 할지라도 그 인생에 과연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자녀가 세상에 죄의 영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로써 선과 의와 진리를 선택하며 살아간다면 그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가 있겠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인격을 가지고 선과 진리와 의를 선택함으로써 진정 의미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악과라는 금지 규정을 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그 고귀한 인격을 선하게 활용하여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삶도 더욱 가치있고 의미있게하는 삶을 살아가자.

3.인간과의 계약관계 속에서 온전한 교제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다 임의로 먹으라하시고 선악과만은 먹지말라고 하신 것은 일종의 인간과 맺은 계약이다. 그래서 이것은 소위 행위언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러분, 부부가 어떻게 이루어지나? 그것은 계약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상대방을 사랑하며 도우며 협력하며 위로하며 격려하며 동반자로 살겠다는 약속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이 잘 지켜질 때 부부관계는 행복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쌍방이라도 이 약속을 어길 때는 자칫하면 부부관계는 깨지든지 아니면 함께 산다 해도 그 삶은 행복할 수가 없다.

부부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사회생활은 계약관계로 형성된다. 성문법이든 불문법이든 관습법이든 여하튼 모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계약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격 즉 생각과 감정과 이성과 지성과 영성을 가지고 일정한 계약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권리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인격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계약관계 속에서 우리와 교제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주신 지정의의 인격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은 그 언약을 충실하게 지키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며 살아갈때에 인간의 삶도 그 안에서 진정한 의미와 가치와 행복을 누리게 하신 것이다.

만약 이 계약이 없었다면 하나님과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제가 가능할까? 그렇지 못하다. 그러면 그냥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을 받아먹는 일방적인 관계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인생은 고귀한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사람과 사람사이도 그렇지 않은가? 나에게 주어진 의무는 없고 그저 맨날 받기만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무가치하겠는가? 그게 무슨 교제이겠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일부러 계약관계를 만들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것은 주시고, 인간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것은 드리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지고 우리 인생의 삶도 참된 의미와 가치를 누리는 삶이 되게 하셨던 것이다.

내용이 좀 어려웠는지 모르겠지만 이 선악과와 관련된 문제도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믿음도 온전해지고 이것을 가지고 공격을 한다든지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이해시켜 줌으로 저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한다.

선악과의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의미한다. 다른 많은 것을 주시고 단 하나 선악과만을 금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절대 다른 존재로 하나님은 다스리고 통치하시고 인간은 거기에 따라야 할 존재임을 명심하고 그 하나님의 통치를 분명히 받아들여 살아갈때에 더욱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삶을 가치있게 하시려는데 있다. 인간이 로봇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인격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선을 택하며 살아감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와 은총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다.

세 번째는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계약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으로 우리 인생을 창조하셨기에 우리와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모든 교제는 계약을 전제로 한다. 어떤 관계라도 어떤 형태라도 계약관계를 통해서 유지된다. 그리고 계약에는 언제나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이 지켜지지 않으면 계약관계는 파기된다. 계약이 파기되면 서로의관계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얻지 못하게 된다.

선악과는 바로 그런 계약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 계약에 충실할때에 하나님과의 계약관계가 늘 유지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유익한 것들을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인간도 가치있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선악과를 두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거기에 온전히 순복하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인격을 동원하여 선과 진리와 의의 편을 선택하며, 또 하나님께 주신 계약관계에 충실하게 임하여 살아갈때에 저와 여러분은 더욱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는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 드리고 우리에게는 더욱 생명의 은총과 인생의 참된 가치가 있는 삶이 될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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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저녁설교]말씀과 삶

 

 


말씀 : 잠7;1-5

제목 : 말씀과 삶

인간에게는 생존하기 위하여 혹은 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한 욕구가 있다. 인간의 욕구는 1차적인 생리적 욕구와 2차적인 사회적 욕구로 분류된다. 생리적 욕구는 경험이나 훈련이 필요치 않은 본능적인 욕구를 말하는 것으로 생욕, 식욕, 성욕과 같은 것이며, 사회적 욕구는 물론 본능적인 성격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로 사회생활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명예욕, 소유욕, 성취욕, 지배욕, 권력욕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욕구들은 인간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다. 그 모든 욕구들 하나하나가 모두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인간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들이 된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욕구들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 인간의 삶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할 우려가 있는 욕구는 소유욕과 성욕, 명예욕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모든 부조리와 갈등과 고통의 현상들이 바로 이러한 소유욕과 성욕과 명예욕에 의하여 발생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관련된 범죄에 대하여 많은 경고를 하고 있다.

물질적인 욕망으로 인한 범죄와 관련해서는 십계명중 제8계명에서는 “도적질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또 제10계명인 출20:17에서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하시면서 남의 물건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것을 족한 줄로 여기며 살 것을 말씀하고 있다.

또 성적인 범죄에 대하여 십계명중 7계명인 출20:14에서 “간음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레20:10) 이러한 내용들은 인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욕망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잘못 사용될 경우 인간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함으로 일어날 수 있는 죄악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씀안에 굳게 서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를 모든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것이다.

1.말씀이란 무엇인가?

먼저 1-4절에 나타난 ‘말씀’에 대한 표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절의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간직하며, 2절에서는 내 '법'을 눈동자처럼 지키라고 말한다. 그리고 4절에서는 '지혜'에게 누이라하고, '명철'에게 친족이라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물론 말이나 명령이나 법이나 지혜나 명철은 모두가 같은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곧 명령이고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명령이고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니까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여러 가지 각도에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다양한 기능을 말해준다. 즉 말씀을 법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삶의 법칙이라는 의미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의 기준, 행동의 기준, 준거가 곧 법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법이라고 표현할 때는 이 말씀이 인간의 행동의 모든 기준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말씀을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말씀이 인간에 참된 진리의 세계를 알려주는 올바른 지식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와 진리가 들어있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인 진정 지혜인가? 무엇이 진정한 지식인가? 물론 생명을 주고 더 나아가서는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지혜요, 지식이 아닌가?

생명을 주는 지혜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는 지식은? 오직 말씀, 오직 예수, 그러므로 그 지식을 알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그러면 그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곧 지혜가 되는 것이다.

또 말씀을 ‘명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인 규범으로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지혜 이것은 결코 단순한 권면이나 그럴듯한 종교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지시요 명령이라는 것이다. 명령이니까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1절에는 내 ‘말’이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씀이라는 말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혹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혹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등등의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임으로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감히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경홀히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 그것이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고 율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래서 정말 그것을 잣대로 삼자. 참지혜가 거기 있음을 알고 그 말씀을 따르자.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엄중히 다루자.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말씀의 인도를 따라 참 생명의 은총의 길을 걸어가자.

2.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요, 명령이요, 계명이요, 지혜인데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하는 것이다. 어쩌긴 어쩌겠는가? 그것이 법이고 지혜라면 그 말씀을 지켜야 하지. 지키면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1-4절에서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말씀을 간직하고(1절) 지키고(2절) 가까이하라(3절 上) 새기라(3절下) 친근히 여기라(4절)는 것이다. 여기서 ‘간직한다’는 것은 「숨기다, 비축하다, 저장하다」는 의미이다. 또 ‘지킨다’는 것은 「지키다, 보호하다, 망보다」는 의미이다. 가까이한다는 「곁에 두다, 떠나지 않다, 함께하다」라는 의미이며, 또 ‘새기라’는 것은 「기록하다, 명부에 올리다, 등록하다」는 의미이다. 또 친근히 한다는 것은 「가까이 하다, 좋아하다, 기뻐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우선은 말씀을 마음에 새겨넣고, 새겨 넣으려면 가까이하고 친하게 지내야 하며, 그 다음 다음에는 잘 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간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들이 침범하여 마음속에 들어 있는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말이다.

특히 지키라는 말씀속에서 2절 후반부에서는 눈동자처럼 지키라는 말이 있다. 눈동자처럼 지켜라. 사람이 어떻게 눈동자를 지키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민첩하게 지킨다. 반사적으로 지킨다. 눈에 무엇인가가 가까이 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깜박여져서 눈꺼풀이 눈동자를 덮어 보호하는 것이다. 눈은 그만큼 중요한 기관으로 반사적으로 지키는데 이와 같이 무엇인가가 말씀을 침범하려고 하면 다른 어떤 것을 지키는 것보다도 중요하게 잽싸게 지키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말씀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돈을 지킴보다, 내 육체를 지킴보다, 내 명예를 지킴보다 말씀을 지키는가? 돈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서 우리는 무엇을 택하는가? 육체의 생명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 선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명예이냐 말씀이냐하는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하나님은 무엇을 지키기를 원하실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지식보다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권력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욕심장이라서? 독재자라서? 폭군이라서? 물론 아니다. 그게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게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가장 풍요롭게 가장 가치있게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지키기를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기를 원하시는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래서 4절에서는 말씀한다.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하라.”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친근히 하라는 말이다. 가까이 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누이와 친족을 구별해서 말씀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친족처럼 형제처럼 그렇게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라는 것이다.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가까워지고 함께 있게 되고 떠나지 않게 된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함께 있으면 나의 삶에 은혜가 충만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 하라. 즐거워하라. 좋아하라. 사랑하라. 묵상해야 하라. 교회를 가까이하라. 예배를 가까이하라. 적용하기를 가까이하라. 그리하여 더욱 은혜 가운데 살아가자.

3.말씀을 지킨 결과는 무엇인가?

말씀을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고 가까이하라고 경계하신 다음에 5절에서는 그 결과를 말씀하고 있다. 왜 그렇게 말씀을 지켜 살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그 말씀들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5절 말씀을 보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즉 그 말씀을 네가 네 마음속에 지키면 이제는 반대로 그 말씀이 너를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너를 모든 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많은 시련들가운데서도 오직 말씀으로 승리한 사람이다. 형제들이 자신을 죽이려다가 팔아넘긴 악행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 들여 형들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원수를 갚지도 않았다. 또 물질적으로도 신앙양심에 입각해서 살았고, 육체적으로 성결한 삶을 살았다. 창39장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요셉은 말한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당신은 보디발의 아내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범한다면 그것은 물론 당신의 남편 보디발에게도 악이 되겠지만 그보다 앞서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니 난 그럴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가 그러한 유혹 앞에서도 결코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심령 안에 말씀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의 모든 순간 순간 속에서 말씀이 그를 인도했기 때문이다. 혹시 죄를 저지를 만한 상황이라고해도 그의 심비에 새겨져 있던 말씀이 즉시 그를 인도하여 그가 죄악 속에 빠지지 않도록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의로운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축복을 받았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인간에게는 많은 욕구가 있다. 생욕,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승부욕 등등.... 이러한 욕구들은 물론 건전하게 사용하면 인간에게 약이 된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들을 잘못 분출시키면 그것은 독이 된다.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들을 잘못 사용하면 결국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방법은 한가지다. 말씀을 심비에 새기고 사는 것이다.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다. 가까이하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그 말씀은 우리를 지킨다. 그러므로 말씀안에서 살아가자. 간직하고 살자. 새기고 살자. 가까이하며 살자.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용하여 복된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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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 항상 선을 따르라


 

 


제목 : 항상 선을 따르라

말씀 : 살전5:15-18

1.귀한 신분으로 사는 일은 힘들지만 보상이 따른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들이다. 거룩이란 다른 것이다. 다르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 목적, 방향, 의미, 영광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거룩한 삶은 영적으로만 아니라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모든 영역에서 동일하게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비그리스도인들보다 힘들게 여겨질 수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세상에 속한 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나라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쪽 나라의 법과 원리와 규례와 법도에 충실해야 한다. 세상의 법도와 율례와 규례를 따르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더 하나님 나라의 법도와 원리와 규범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걸 힘들게 생각하기 보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도 존귀한 자로 산다는 것은 마땅히 거기에 걸 맞는 삶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 의무도 있어야 한다. 거기에 걸맞는 규범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분명히 힘든 것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귀한 신분에 어울리는 삶은 다만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무거운 짐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귀하고 가치있고 옳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그만한 권리도 따르게 된다. 분명히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고 명예와 영광도 따르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야 얼마나 더 하겠는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이보다 더 귀한 신분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귀한 신분을 가졌으니 얼마나 더 귀하게 아름답게 가치있게 거룩하게 옳고 바르게 살아야 하겠는가? 또 그렇게 고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처럼 귀하게 살아갈 때에 얼마나 그 삶이 아름답고 귀하고 가치있고 의미있고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겠으며 얼마나 큰 상급과 영광이 있겠는가?

그래서 대하15:7절에서는 말씀한다.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너희의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라 하니라.” 또 잠13:13절을 보라.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성도라는 거룩한 신분을 가지고 거기에 걸맞는 삶을 살아갈 때에 때로는 힘든 일도 있겠지만 그러나 도리어 그것이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신분을 가진 자라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동시에 그런 고귀한 삶에는 반드시 그 이상의 보상도 뒤따른다는 것을 기억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라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감으로 주님의 은총 충만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2.항상 선을 좇으라.(15절)

살전5: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사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만해도 상당한 수준의 선이다. 남이 나에게 악을 행할 때 악으로 갚지 안고 그냥 참고 용서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러나 성경은 거기서 한 단계 더 나가서 선을 베풀라고 하신다.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란 가족이나 이웃이나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미워하는 사람이나 원수나 내 민족이나 다른 민족이나 권세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항상 선을 베풀라는 것은 조건이나 여건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선을 베풀라는 말씀이다. 어떤 상황, 조건, 여건, 환경들이 선을 베풀지 않는 것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시간이나 돈이나 여유가 있으나 없으나, 상황이 좋으나 나쁘나,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나 미워하나 선을 베풀라는 말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만해도 대단한데 한걸음 더 나아가 선을 베풀라는 것이다. 좋은 조건에서 선을 베푸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나쁜 조건 속에서 선을 베풀라는 말이다.

그래서 롬12:17에서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하셨다. 또 벧전3:9절에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또 마5:44에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과 멸시와 천대까지 참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또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자. 그래서 결국 나와 네가 함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3.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5:16 항상 기뻐하라 /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주님은 우리가 기쁨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거룩하고 깨끗하고 성결하고 진실한 삶은 힘들고 어렵게만 여기는데 그렇지 않다. 그런 삶을 살면서도 얼마든지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다. 아니 그런 삶에 진정한 자유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가 있다. 거룩한 진실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갈 때에 조건과 상황과 환경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종종 우리가 기뻐하며 살아갈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오늘 16, 18절을 보라.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또 요15:11을 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물론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제 우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도 하셨다. 그러나 이것도 애통하는 것,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십자가를 지는 것, 우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애통하기 위하여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애통하는 것이다. 힘들고 지치게 하기 위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죽고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애통하고 울고 해야 하는 것은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런 과정이 없으면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죄와 무지 속에서 무감각하게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부인하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동행해야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기쁨으로 사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다. 그러므로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일에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 형통하면 형통한대로 불통하면 불통한대로 그저 기뻐하고 그저 감사하라. 나같은 죄인 살려주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라. 나를 사랑해 주심에 감사하고 기뻐하라. 일용한 양식이 있음을 기뻐하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기뻐하라. 지금 내 모든 것을 가져 가신다해도 지금까지 누릴 수 있었음에 감사하라. 설령 지금 나를 데리고 가신다해도 천국이 있음에 기뻐하고 감사하라.

4.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5:17 쉬지말고 기도하라.

이것은 항상 선을 좇고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기 위한 조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늘 연결되어 있으라는 말이다. 그래야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과 은혜가운데 기뻐하고 감사하고 승리하며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맨 날 교회나 방이나 산에 올라가서 기도만하고 앉아 있으라는 말은 아니다. 세상 은 다 팽개쳐 놓고 맨날 예배나 드리고 찬송이나 하고 기도나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이 유지되겠나? 그러려면 뭐하러 육체를 주시고 지적인 능력과 감정과 의지를 주셨겠나? 그러려면 차라리 처음부터 그냥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지. 신령한 삶은 결코 세상을 멀리하고 그저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묵상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신령한 삶은 영적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생활에 균형을 잘 잡는 것이다. 일할 때 일하고 공부할 때 공부하고 돈을 벌 때 돈을 벌어야 한다. 건강을 위하여 육체적 활동도 해야 한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모든 일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즉 그 모든 활동들이 언제나 주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고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매사에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해야하는 것이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주님과 대화하는 정기적인 기도시간도 가져야 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매사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기도로써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자신을 지키고 주님 뜻대로 그나마 살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연약하다. 세상은 험하고 무수한 도전과 시험과 유혹과 핍박과 고난이 있다. 우리는 그런 시험들 앞에서 무기력할 때가 너무 많다. 내 힘으로 이겨나가기에는 너무나 벅찬 상대들이다. 또 우리가 늘 세상의 것만 보고듣고 하면서 영적 감각이 떨어지기 쉽다. 분별력이 떨어지기 쉽다.

따라서 깨어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삶을 통하여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그런 삶을 통하여 성화되어 가야 한다. 물론 구원은 이미 받았지만 우리는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천국백성이라는 확정 판결을 받았지만 아직은 세상 속에 있고 세상은 너무나 죄와 무지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26:41절에서 말씀하셨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물론 믿음을 따라 사는 일이 때론 힘들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이 진정한 생명의 은총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놀라운 신분을 가진 자로서 더 큰 은혜를 누리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주를 따르자.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약하고 부족하여 시험에 들기 쉬운 존재라는 것도 기억하며 깨어 기도하며 말씀으로 무장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과 주님의 은혜로 항상 기뻐하며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큰 상급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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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 성령의 열매

 

 


제목 : 성령의 열매

말씀 : 갈5:16-24

1.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제는 뭡니까? 성령의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니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명제는 성령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아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성령의 은총에 의해서만 주님을 믿을 수 있고,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지혜자나 능력자라해도 하나님을 알 수도 믿을 수도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 무한히 크고 넓고 깊은 하나님의 능력, 지혜, 권세, 사랑, 거룩하심을 인간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세상과는 전적으로 다른 차원의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인간이 스스로 생각해서 어떻게 알겠습니까? 인간의 너무나 미약하고 그 미천하기 짝이 없는 생각과 지식과 경험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알겠느냐는 말입니다. 게다가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그 심령은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경험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너무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깨달아 알 수가 없고, 믿고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녕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그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게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게 되고 참된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2:1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신령한 일은 신령한 영이신 성령의 조명하에서만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명령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을 받아 생명을 얻고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해서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여러분의 심령속에 성령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진정한 구원의 은총과 큰 기쁨과 감격과 은혜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은 받은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았으면 이제는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 능력이 온전히 우리가운데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을 받으면 당연히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하지만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는 우리 인생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그렇지 않습니까? 양심에서는 안된다 안된다하면서도 때로는 행동이 그 안되는 일을 좇아갈 때가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하면서도 행동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따라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고 싶습니다.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 살라야지 하면서 다짐도 해 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은 자꾸만 세상의 것을 좇아가려고 합니다. 말 그대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록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해도 아직도 우리에게는 연약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어 있는 부분이 남아 있어서 마음은 어두워졌고, 지혜는 제한되어 있고, 육신도 의지력도 연약해 졌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면서 세상적인 지식과 이성과 가치관들이 굳어져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그쪽으로 가려는 성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됩니까? 물론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비록 완성시키지는 못하겠지만, 하늘 나라에 가서야 완성되겠지만 어쨌든 주님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고민하며 이 문제를 놓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하나씩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조금씩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3:12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께서는 정말 하나님앞에 간절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수 있도록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 가실때에 구원의 은총을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하나님앞에 간절히 엎드려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즉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 자신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장사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옛것을 자꾸 십자가에 못박아야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오늘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앞부분 17~2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17절에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간단히 말씀드려 우리 육신의 욕구는 자꾸만 진리와 생명과 은혜와 영원한 영광의 나라보다 자꾸만 돈과 명예와 권력과 세상 즐거움 등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뜻대로 살기보다는 세상 뜻대로 곧 마귀의 뜻대로 살기가 쉽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의 정욕에 속한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 부분에서는 육체에 속한 것과 성령에 속한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왜 육체에 속한 것들을 거부하고 성령에 속한 것을 따라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육체에 속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19~21절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등이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명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육체의 요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의 모습속에서 이 중에 한가지라도 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겉으로는 아닌 것 같아도 그저 육신의 요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학식과 명예와 권세가 있는 것 같고 아주 대단한 것 같아도 그래도 별거 아닙니다. 다 이런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아직도 우리들 속에도 이러한 요소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못된 본성들이 남아 있어서 자꾸만 고개를 들고 세상 밖으로 나아오려고 하니까 우리는 어쩔 수없이 자꾸만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러한 죄된 본성들이 고개를 들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기도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하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세상적이고 마귀적인 것들은 자꾸만 쇠약해져가고, 성령께서 주시는 품성들은 날로 강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 열매는 사라지고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열매를 무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22,23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사랑과 의와 희락의 영이신 성령께서 주시는 이런 열매가 당연히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혼이 기쁨을 누리고 은혜를 누리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주는 복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들입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러한 것들이 우리 모든 인생들의 삶속에 나타나기만 한다면 어찌 세상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어찌 우리들의 삶이 빛과 빛는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세상의 고통과 아픔과 절망적인 상황들이 우리를 삼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따를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무릎 꿇으며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며,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린다는 것을 기억하며 끊임없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온 성도여러분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온전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실 때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서 여러분 자신도 구원의 은총을 온전히 충만하게 누리시고 여러분으로 인하여 이 땅위에 정오의 빛과 같이 빛나는 세상이 펼쳐지게 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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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주일오후예배설교

 

 

 

 

 

 

제목 : 그리스도의 군사

말씀 : 딤후2:1-6

우리가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생명의 능력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귀사탄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유혹하고 시기하고 비난하며 덤벼들기 때문이다. 때로는 강력하게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비열하게 때로는 고상하게 때로는 교묘하게 우리를 속이고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언제 당하는지도 모르게 당한다. 자칫 잘못하면 속임수에 넘어가 도리어 우리가 속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교묘한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당했던 것처럼. 그리고 세상이 지금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비진리가 혹은 거짓이 진리 행세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기에 속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분별력을 기르고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사탄에게 속지 않고 물리치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은혜를 충만하게 받아야 한다.(1절)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우리가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기려면 강해야 한다. 강하지 않으면 진다. 군인이 체력이나 정신이나 사기가 약해지면 진다. 그러므로 우리도 강해야 한다.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해야 한다. 그래야 마귀가 덤벼들어도 끄떡 않고 이긴다.

그러면 어떻게 강해지는가? 물론 많지만 일단 주님의 은혜로 충만해야 한다. 주님의 은혜란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모든 선물들을 말한다. 믿음, 구원, 감사, 사랑, 기쁨, 능력, 지혜, 선과 진리와 의 등...... 이 은혜를 받으면 천국에 대한 확신과 믿음, 소망을 갖게 된다. 유혹을 분별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상황 환경 고난도 이기게 된다. 그래서 사명감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를 덧입자. 더욱 충만한 은혜를 받자.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그러기 위해 깨어 기도하자. 그래서 주의 은혜를 덧입고 주의 능력을 덧입어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모든 유혹과 도전을 물리치고 힘차게 달려가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자.

2.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2절)

딤후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자신이 먼저 말씀위에 서서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고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쳐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게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말씀은 천국을 알게 된다. 인생의 갈길을 알게 한다. 선과 진리를 알게 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거짓되고 왜곡되고 잘못된 가치관 속에 있는 풍조와 양식과 습관과 모든 삶의 모습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말씀 위에 굳게 서면 능력도 얻게 된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확신과 소망과 위로와 힘을 줌으로 올바른 분별력을 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유혹과 도전과 고난과 조롱과 시기와 질투와 욕심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20:32절에서 말씀하셨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러나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천국과 진리의 길도 제대로 모를 뿐 아니라 마귀에게 속기 십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받았다고 하면서 말씀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산다고 말한다. 그럴 수는 없다. 모든 은혜와 능력과 지식과 판단은 반드시 말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면 설령 능력이 나타나도 사탄의 역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무장하라. 말씀을 묵상하라. 말씀을 잣대로 삼으라.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를 지킨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붙든다. 힘을 주고 능력을 준다. 마귀 사탄을 물리친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3.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3절)

딤후2: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렇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있다. 왜냐하면 세상이 진리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자연적인 세상은 결코 예수님께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다. 물론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하기도 하지만 오염되고 왜곡된 이성대로 자신들이 원하고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델을 찾는데 그친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도리어 예수님의 오신 참뜻을 왜곡시킨다. 십자가와 부활과 주되심을 거부하고 꾸며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기독교를 핍박하고 조롱하고 대적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른다. 고난을 피한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길을 회피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진리를 향해, 생명을 향해,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향해 달려가려면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고난 즉 희생과 수고와 섬김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빌1:29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무장하여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환경이나 상황을 이기고 유혹과 핍박을 물리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자.

4.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딤후2: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군사는 그를 모집한 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군사는 그 모집한 자의 뜻에 절대 순복해야 한다. 그래서 군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며 훈련받으며 적들을 물리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도 동일하다. 주님은 먼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부르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세우셨다. 그래서 세상 속으로 가서 마귀사탄과 싸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말씀 훈련, 기도훈련, 전도훈련도 해야 한다. 동시에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영광이나 즐거움 보다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 오직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해 가야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길이요 진리의 길이 인생의 목적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가는 길이요 동시에 우리 자신도 진정한 생명의 은혜와 능력과 자유가운데 살게 되는 길이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길을 택하며 주님의 나라 이루어가고 주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삶이 되자.

5.법대로 경기해야 함

딤후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그렇다. 모든 경기자는 법대로 해야 한다. 운동경기도 법대로 해야 한다. 시험도 법대로 치러야 한다. 인생도 법대로 살아야 한다. 신앙생활도 법대로 해야 한다. 물론 인생 최상위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법을 제정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또한 법을 주셨다. 그 법대로 살아갈 때에 가장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고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법대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7:21절에서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물론 이 말씀이 100%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하나님의 법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인정하고 그것을 최대한 따라가야 한다. 그럴 때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성공자가 된다.

오늘부터 사순절 집중전도. 오늘은 주님께 영광 돌리고 안식도 취하는 날. 그러므로 오후에 좀 편히 쉬면 좋은데 전도를 나가려니 솔직히 나도 좀 힘들다. 그러나 이 일은 사순절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길.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주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생명이 역사를 이루어가는 길,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라.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일.

그러므로 좀 힘들지만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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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   기쁨과 평안

 

 

 

제목 : 떳떳한 삶을 위하여

말씀 : 요일3:18~22

법이 왜 필요할까? 그밖에 무언가 인간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 같은 질서나 규범이나 관례나 이런 것들은 왜 필요할까? 물론 그런 것들은 결코 인간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고 자유를 제한하고 불편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런 것들은 인간의 삶을 평안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다.

물론 애당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굳이 그런 규제를 두지 않아도 자기 이성과 영으로 자신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은 필요치 않다. 아니 사실은 만약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구태여 스스로를 통제하고 제어할 이유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영성과 지성과 감성과 이성이 우리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진리와 선과 의를 따라 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를 못하다. 우리 모두가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올바른 분별력이 없다. 때로는 분별을 하면서 그 분별한 선과 의를 따라 살아갈 능력이 없다. 그래서 법과 규범과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법과 규례와 질서를 따라 살아갈 때에 우리는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세상에서 최대한의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두말할나위도 없다. 모든 인생이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죄와 무지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지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 자신과 인간과 세상과 영원한 나라에 대하여 계시해 주신 말씀이 성경인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과 진리 안에서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려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물론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따라 살아갈 때에 우선은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래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빛을 비춤으로 저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요, 또한 그럴 때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1.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 진리에 속한 자임이 나타남

요일3:18,19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우리가 정말로 사랑의 예수님, 구원의 예수님을 심령에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말로만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마음이 있다면 행위도 따른다. 물론 정말 마음은 원인데 여건과 상황이 안돼서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긴 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행동하지 않는 것은 사실은 마음에 별로 없다는 뜻이다. 마음이 있으면 서울이고 부산이고 단숨에 달려가지만 마음에 없으면 안강이라도 안 달려간다.

그래서 마6:21절에서는 예수님께서도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고, 약2장에서는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하셨다. 당연하지 않나?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실제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말로만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계속 말만 하면 위선이 된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혹은 상황과 여건이 안돼서 못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마음이 없는 것이다. 뭐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 마음에 있다는 것도 결국 자기 방어와 변명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수 있다.

안 그런가? 정말로 사랑하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면 결국은 한다. 주님을 위한 일도 그렇다. 주님을 위해 드릴 물질도 시간도 없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위한 것이나 자녀를 위한 것은 한다. 이웃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시간과 물질이 없고 여건이 안된다고 하지만 자녀를 위해서는 한다. 물론 다는 못하겠지만 주님을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는 못하는 일도 자녀를 위해서는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이렇게 믿음이나 사랑이 행위로 나타날 때에 우리가 주님의 자녀인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즉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진리에 속한 자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논리. 하나님께 속하였으면 하나님께 속한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마귀에게 속한 불법과 거짓과 악과 더러움 속에 살면 안 되지 않는가? 빛 가운데 왔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산다면 어떻게 빛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았는데 여전히 더러운 모습으로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요8:12절을 보라.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빛이신데 그 예수님을 따르면서 어둠 속으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예수님이 빛이시니까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오면 그 빛을 받아 당연히 빛의 은혜를 누려야 되지 않는가? 그래서 엡5:8,9절에서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빛과 진리와 생명과 의와 선과 사랑이신 예수님께로 나온 자로써 온전히 예수님을 따름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서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가자. 다만 따라 가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속에서 사랑과 의와 선을 실천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2.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굳세게 됨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주 앞에서 굳세게 한다는 것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행할 때에 마음에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침으로 더욱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모든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상황이나 환경이나 사람에 의하여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 등의 어둠에 속한 것들을 물리치고 빛과 같은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가 진실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선을 따르고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우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동시에 나도 평안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담대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주님의 능력도 덧입지 못하고, 그래서 마음에 기쁨이 없고, 스스로 위축되고, 당당하지 못하고, 불안하고, 부끄럽고 그래서 결국 능력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또한 이렇게 주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결국 마귀에게 끌려 다니는 형국이 됨으로 더더욱 빛의 은혜를 누리기 못하고 어둠의 세력들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신앙적으로만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으로도 그렇다. 깨끗하고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고 진실하게 살아가면 당당하다. 마음이 뿌듯하고 자존감이 있고 자랑스럽다. 그러나 죄와 향락과 불법과 불의에 빠지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다. 숨으려고 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범죄는 주로 어두운 곳에 이루어진다. 물리적으로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의미적으로도 숨겨진 곳, 은밀한 곳, 사람들의 이목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선하고 자랑스럽고 당당한 일이라면 왜 숨어서 하겠는가? 일부러 나보란 듯이 하지... 그래서 잠28:1절에서는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선과 진리를 따르되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을 주신다. 평안과 가쁨과 위로와 소망을 주신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당당하게 된다. 얼굴이 밝아진다. 그러나 죄가운데 있거나 하나님 앞에 뭔가 떳떳하지 못할 때는 얼굴에 생기가 없어진다. 뭔가 그늘진 모습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서, 특별히 사랑의 도를 따라서 그런 말씀들을 실천해 나아갈 때에 정말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자부심을 가지고 생기있게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3.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용서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우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의롭게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약하고 미련하고 부족하다. 그래서 실족할 때도 많다. 그러나 정말 믿음 안에서 선과 진리를 따라서,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기를 힘쓰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의기소침하고 위축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희망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핑계로 최선을 다해 힘쓰지 않는다면 그건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것과 같다. 정말 마음에 원이면 원하는 것을 향해 힘써 가야하고 그러다가 넘어지고 실족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별로 힘쓰지도 않는다는 것은 실상은 마음에도 그다지 없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된 육신이 약하다는 핑계로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고 열심히 사랑하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자. 그래도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들은 주님께 맡기고, 그저 하나님앞에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역사 감당하며 생기 넘치는 삶을 살아가자.

4.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에 구하는 바를 얻게 됨

요일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 그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에 기도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 계명을 지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씀이 아닌가? 앞의 2:2절에서는 계명을 지키면 그를 아는 줄 알 것이라고 하셨다. 2: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줄 알리라고 하셨다. 2:10절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있는 자라고 하였다. 2:29절에서는 의를 행하는 자라야 그에게서 난 줄 알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겠는가? 선을 행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의 뜻을 향하여 갈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면 흡족한 마음으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은 기도라고 해서 맨날 달라는 기도만 드리지도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를 기도한다. 그러니 응답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말과 혀로만하고 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니 어떻게 기도응답을 기대하겠는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정말 주의 율례와 법도를 따르자. 주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힘들고 부자유스럽고 어렵고 번거롭고 통제하고 제한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자유와 평안을 주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자. 물론 그래도 안되는 것이 있을지라도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용서해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힘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의기소침하지 말고 주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속에서 당당하고 생기가 넘치고 능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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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예수님의 전도방법

 

 

 

말씀 : 예수님의 전도방법

제목 : 요4:1-5

어느 날 목사님이 강단에서 성도들에게 전도에 대하여 힘주어 말했다. “여러분, 전도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의 사명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자 한 집사님이 말했다. “목사님, 우리는 지혜도 부족하고, 말씀도 잘 모르고, 성령의 능력도 부족해서 전도를 잘 못합니다. 그런 일은 아무래도 목사님이 전문가시니까 목사님이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대답했다. “양이 새끼를 낳지 목자가 새끼를 낳는 것 보았습니까?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고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해 주면 양들이 안전하게 꼴을 먹으며 성장하게 되고 그러면 자기들끼리 새끼를 낳아 양무리가 많아지는 것 아닙니까?”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목사는 전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은 아니다. 예수님도 전도를 하셨는데 감히 누가 전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전도는 목사만 하는 일이 아니라 성도라면 누구나 해야 할 가장 막중한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 오신 목적이고, 십자가를 지신 목적이다. 그것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고,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왕도는 없다. 전도에 대한 분명한 사명감 가운데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다. 물론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은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은 아니다. 기도하며 가르침을 받으며 훈련하며 하나씩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전도의 기본적인 사항들을 보았다. 오늘부터는 전도의 실제적인 측면으로 여러 가지 전도의 방법들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전도에 대한 태도와 방법을 배워보자.

1.전인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다.

예수님의 전도사역을 압축해서 말씀하고 있는 부분이 두군데 있는데 그것은 마4:23절과 9:35절이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즉 예수님은 가르치심과 전도와 병고침을 통하여 전도사역에 힘쓰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이 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은 기도나 하시면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복음전파와 가르침과 병고침을 통해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직접 복음을 전하시는데 전인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직접 말씀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고 나아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것이다.

그냥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하셨고,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였으면 실천해야 한다. 실천하되 한편으로는 직접 복음을 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일에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자.

2.사람들과의 충돌을 가급적 피하셨다.(1-3)

오늘 본문 요4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한 여인을 주님품으로 인도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은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셨다는 것이다.

오늘 1-3절에 보라.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와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하여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제자들보다 많아졌다는 사실이 바리새인들이 알게 된 것을 계기로 하여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출발하셨다는 말씀이다. 왜 그러셨을까? 한마디로 지금은 다른 할 일이 많으셨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변론하거나 충돌하여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 배경을 보면 이렇다. 당시 세례요한은 갈릴리지역을 통치하던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아내를 삼은 것에 대하여 부당함을 말하다가 헤롯에 의하여 체포되어 구금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유대인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서슴없이 독설을 퍼붓곤 했기 때문이다. “마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니까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자기들의 노력 없이도 다른 사람에 의하여 제거되었으니 얼마나 통쾌한 일이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세례요한이 제거되어 좋아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또 다른 정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그저 하나의 정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도 세례요한보다 더 강력한 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증거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그들에게 어떤 빌미를 제공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하신 예수님은 아직은 이들과 불필요한 마찰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셨기에 갈릴리로 가시기로 한 것이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아직 할 일이 많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는 가급적 세상의 일반 대중이나 지도자나 통치자들과 가능한 마찰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찰이나 갈등이나 대립관계는 복음의 역사를 방해하고, 시간과 열정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저 좋은 게 좋다고 그들과 어울려서 적당히 살라는 것은 아니다. 분명 아닌 것은 아니고,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에 우리는 정말 지혜가 필요하다. 자칫 그들과 갈등이나 대립 관계가 되면 복음의 역사에도 지장을 받게 되고, 공연히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한마디로 말하면 분명히 선을 그을 부분은 긋되 협력해야 할 부분은 적극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건전하고 유익한 일에는 우리가 더욱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적인 일이라도 선한 일, 의로운 일, 유익하게 하는 일들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그들보다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서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결국 우리를 인정하게 되고, 나아가 존경심마져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의 역사도 보다 효과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5:16절에서 말씀하셨지 않는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세상에서 어떤 영역에서든지 빛된 모습을 가지자. 세상과 갈등하고 대립하고 기피하고 정죄받지 말고 정말 옳은 일, 선한 일, 의로운 일, 정직하고 거룩한 일등을 통하여 세상에서 인정받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자.

3.사람들이 기피하는 장소를 찾아가셨다.(4,5)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이유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이 기피하여 들어가지 않는 사마리아땅으로 들어 가셨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기피하는 이유는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마리아는 옛날 남북분열왕국시대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북왕국이 B.C.722년 앗수르에 의해 먼저 멸망하면서 앗수르 사람들은 사마리아의 유력한 자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그 대신에 자기네 나라 사람들과 그들의 정복지에서 다른 많은 이방인들을 사마리아로 보내어 함께 생활하도록 하였다. 그러다보니까 자연히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혼인을 하게 되었고 결국 이방인을 죄인으로 취급하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로부터 남왕국 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아주 추하게 여기며 멸시하며 상종하는 것을 꺼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북쪽에 있는 갈릴리를 가려면 같은 나라이면서도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는 것을 기피하여 서쪽의 해변길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동쪽의 베뢰아 길로 돌아가든지 하여 그 땅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셨던 것이다.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시되 그냥 가깝기 때문에 가신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로 가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가신 것이다. 그곳에서 주님께서 하실 일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것은 오늘4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 “사마리아를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통행하여야 하겠다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KJV에서는 “He must needs go through Samaria.”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반드시 사마리아로 통과해야할 필요를 느끼셨고, 그래서 그 땅으로 일부러 들어가셨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사마리아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경멸하고 더럽게 여기는 땅이었지만 주님에게만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유대나 사마리아나 갈릴리나 주님에게는 모두가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고 있는 안타까운 땅이었다. 그래서 그곳에도 유대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를 느끼셨던 것이다. 아니 단순히 필요를 느낀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사실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멸시당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지 말고 그들에게도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우리가 된다안된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아무리 완고하고 추한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영혼이나 우리 영혼이나 똑같이 주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 생명이나 우리 생명이나 천하보다 귀한 것은 똑 같은 것이다.

그래서 딤전2:4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세가지 사실을 명심하자.

첫째는 예수님은 직접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시되 전인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다는 것이다. 기도만 하지 않고 발로 뛰셨으며 복음을 전함과 동시에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직접 전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두 번째는 세상과 가급적 갈등관계를 피하고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거룩히 성별된 삶을 삶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건전하고 유익한 일들을 위하여서는 발벗고 나서서 세상의 좋은 협력자가 되어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멸시당하고 소외당하고 추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다. 그 영혼과 우리의 영혼이 똑같은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쏟으며 복음의 역사를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편으로 기도하고 진리의 말씀을 전하며 다른 한편으로 선한 일로 사랑의 빛을 비출 때 교회가 세상에서도 인정받고 존경받으며 복음의 역사도 더욱 힘있게 이루어 가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같이 기도하며 힘쓸 때 정말 주님의 복음의 역사가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우리들도 잘했다 칭찬듣고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조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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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  Life's Word] 주일오후설교  / Sunday afternoon preaching

 

 

제 목 : 겸손한 자가 받는 은혜

본 문 : 벧전5:5,6

1.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좋아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물론 믿음은 기본이고 믿음과 더불어 가지고 있어야 할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덕목은 무엇이냐하면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예쁘고 재력있고 빽좋고 능력있는 사람 좋아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기준이고 하나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이 올바른 사람, 특히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경배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가 이루어지고 그러면 자신도 생명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남에게도 기쁨과 은혜를 주는 복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정말 낮은 자세로 자신을 한번 보십시오. 이 거대한 우주를 한번 바라보십시오. 저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십시오. 그전에 내 자신의 모습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얼마나 신비합니까? 얼마나 굉장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그 굉장한 것들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반면에 내 안에 얼마나 죄되고 아름답지 못한 것들이 많습니까? 우리 장로교의 창시자 존칼빈 선생은 “내 안에 들어있는 죄악의 1/100이라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롬3:10-12절에서는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또 렘13:23절에서는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상대적인 선을 행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온전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그 마음 한 구석에는 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겸손하게 엎드리지 않고 내가 다 안다고, 내가 의롭다고,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교만하게 자기 생각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기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겸손하게 엎드려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주님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그 은혜로 이웃과도 올바른 관계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5절 후반절에서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과 능력과 지혜를 생각하며, 반면에 우리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겸손하게 엎드려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의 은총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낮춥니다.

겸손은 자신의 죄와 무지와 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낮추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와 약함과 죄를 인정하지 않고 그래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도 바르게 섬기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올바르게 사랑하지 못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서 배제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 가보면 예수탄생교회가 있습니다. 이 예배당은 약400평 정도 되는데 출입구는 단 하나 뿐이고, 게다가 그 문은 높이가 1.2m, 폭은 80Cm에 불과 합니다. 그래서 좁은 문이라고 불리는데 그 교회는 허리를 최대한 굽히고 한 사람씩밖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구부려야 합니다. 낮아져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신의 이성 경험 지식 명예 권세 자존심 내려 놔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무지합니다. 나는 약합니다. 도와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받아주세요. 하면서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 만나고, 그렇게 예수님 만나면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4:6절에서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약함과 무지함과 한계와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림으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겸손한 사람은 열심히 기도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안 그래요? 기도가 뭡니까? 주님과 대화하는 거잖아요. 주님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요구하는 것이잖아요. 또한 주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주님,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정말 바르게 사는 것입니까? 라고 묻는 거잖아요. 지금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님 저는 무지해요. 어리석어요. 저는 약해요. 힘주세요. 능력을 주세요. 분별력을 주세요. 마귀사탄의 유혹을 이길 힘을 주세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다면 결국 주님의 도우심이 별로 아쉽지 않다는 거지요. 내가 할 수 있다는 거지요. 내가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내가 의롭게 살고 있다는 거지요. 선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거지요. 그러니 얼마나 교만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세요. 우리 약함을 인정하고 기도하십시오.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기도하십시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기도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도우심과 능력이 절대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마26:41절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약함과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엎드려 기도함으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 모든 약함과 무지를 이기고 은혜의 충만함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4.겸손한 사람은 말씀을 열심히 배웁니다.

겸손한 사람은 열심히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어찌 배우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지혜로우시고 그 안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는데 어찌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말씀을 열심히 배우지 않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다 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생명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나는 무지하고 연약한데 그래서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있는데 어찌 주님 앞에 엎드려 그 말씀을 경청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물론 세상의 지식이나 문화나 기술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과 능력과 분별력을 얻게 됩니다. 그래야 거짓에 속지 않고, 마귀에게 우롱당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우리 몸과 영혼과 마음을 지켜 주고, 힘과 평강과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행20:3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여러분, 열심히 배우십시오. 주님께 배우십시오. 그 말씀을 배우십시오. 그래서 지혜를 얻고 분별력을 얻고 능력을 얻어 그 말씀으로 승리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5.겸손한 사람은 순종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겸손한 자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순종하는 것이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냥 따라 가는 것입니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그냥 믿는 것입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나 경험이나 이성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순진하게 주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도 안되는 지시에도 그냥 순종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을 고침 받으려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이성적으로는 정말로 웃기지도 않는 지시를 따랐을 때 문둥병에서 고침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빙빙 돌라는 웃기는 지시를 받고 그대로 따랐을 때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적군 앞에 찬양대를 앞세워 찬양을 했을 때 적군이 전멸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내어 밀었을 때 홍해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백배 천배 만배 수입억배 더 지혜롭고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사55:8,9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개역성경)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냥 주님 따라 가십시오. 설마 하나님이 우리만 못하시겠습니까? 설마하니 하나님께서 우리 사정과 형편을 모르시겠습니까? 다 알고 계십니다.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그냥 따라 가십시오. 거기 생명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순진하게 주님의 지시를 따라 온전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의 은혜 가득한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6.겸손한 사람은 높임을 받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를 낮추시고 비천하게 하시고 멸시당하고 천대받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높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길이요, 행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정말 약하고 부족하고 죄많고 허물 많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지혜와 은혜와 사랑과 거룩과 선과 의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안에 거하면 그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 그 안에 거하게 됩니까? 겸손한 자입니다. 교만한 자는 제멋대로 합니다. 제 생각대로 합니다. 제 소견에 좋은 대로 합니다. 그래서 죄의 길로 갑니다. 무지한 길로 갑니다. 그래서 결국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지고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분별력을 갖습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습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능력을 받습니다. 그래서 죄의 권세를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습니다. 그래 존경 받고 그래서 높아집니다. 그래서 진정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23:1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 오늘 6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자신의 죄와 무지와 한계와 연약함과 부족함고 미련함을 기억하며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그 분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그 분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며 기도하며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중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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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 설교

 

 

 

 

제목 : 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말씀 : 마26:30-35

 

1.항상 찬양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신 다음에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는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것은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이제 이 세상 떠날 준비를 다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30절 말씀보세요.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여러분, 지금이 어떤 상황입니까?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피땀 흘리는 기도를 하러 가시는 상황입니다. 다시 말하면 몇 시간 후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찬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그걸 모르십니까?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아니 단지 알고 계신 것이 아니라 역사를 창조하시는 주님께서 그 죽음을 향하여 스스로 걸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로 앞의 말씀에 보면 성만찬을 하고 계신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떡과 잔을 나누시며 뭐라고 하셨습니까? 26절에서는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28절에서는 잔을 주시며 마시라고 하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45절을 보세요.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이제 때가 되었다. 인자의 때, 곧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죽음을 당할 때가 되었다. 따라서 너희들에게도 고통의 시간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좀 쉬어두어라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람산을 향하여 가셨습니다. 십자가라는 처절한 죽음을 앞두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그 참담한 상황 속에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죽음을 향하여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만이 인류의 죄를 속하고 마귀의 권세에서 속량하여 생명의 은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고 이제 공생애를 마치고 십자가의 그 처절한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비록 고통의 길이긴 하였지만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왜 입니까?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과 마귀와 지옥의 권세에서 건짐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지나가야 할 때도 있지만 찬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고통은 너무나 처절한 것이었지만 그래서 심지어는 주님도 그 고난의 잔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길임을 아셨기에 결국 찬양하여 그 길을 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가는 길이 비록 험하고 멀어도 이 길만이 생명과 진리와 영원한 승리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야하고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감사 찬양을 드리며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찬양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믿음을 보시고 더욱 힘주시고 은혜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더욱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험난한 전도자의 길을 가면서 늘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행16:25절 보세요.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때는 어떤 상황입니까?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그냥 감옥에 갇혀 있습니까? 아닙니다.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았습니다. 온 몸에 피멍이 시퍼렇게 들고,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온몸의 상처가 쑤시고 아팠습니다. 게다가 손과 발은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그렇게 참혹한 모습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찬양했고, 위대하심을 찬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찬양했고, 그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지금까지 사역을 감당케 하신 것에 찬양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옥터가 움직이고 감옥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들이 바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세례 받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찬양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려울 때 찬양할 수 있는 능력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거 어려운 거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됩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힘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이 능력을 받아서 잘되고 형통할 때 뿐만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도 찬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아니 오히려 무엇인가 문제가 있고, 해결이 안 날 때 더욱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구속의 은총을 기억하며 찬양하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찬양하고, 큰 능력으로 인도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 안에서 더욱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앞에서 본 30절의 말씀에 예수님은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하러 감람산으로 가셨습니까?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이곳에 처음 가신 것이 아닙니다. 이곳은 예수님이 늘 기도하러 가시던 장소였습니다.

 

눅22:39,40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여러분, 보십시오. 습관을 좇아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감람산으로 가셨는데 그곳은 생소한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습관적으로 늘 가시던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습관적으로 그곳에 뭐하러 가셨습니까? 바람쐬러 가셨던 것도 아니고 놀러 가셨던 것도 아닙니다.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너희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큰 일이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평상시에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 막1:35절을 보십시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어떤 젊은 목사가 새벽기도가 너희 힘들어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놈이 새벽기도를 만들어서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어떤 놈이라니요? 예수님이 만드셨는데요.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조차도 새벽 기도가 필요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필요할까요? 예수님조차 습관적으로 나가서 기도하는 일이 필요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필요할까요?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자나 깨나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과 사랑과 은혜와 지혜와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아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놀라운 능력과 구원과 사랑과 은혜와 지혜와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안다면 어찌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게 진정 하나님을 알고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어찌 은혜가 넘치지 않겠습니까?

 

물론 찬양만이 우리의 의무는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도 우리의 의무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주님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대화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도할때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게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됨으로 능력있는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때라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과 사랑과 은혜와 지혜와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기억하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과 구원과 지혜와 인도와 보호와 거룩과 선과 의를 덧입기 위하여, 그 하사님과의 뜻을 바르게 알고 능력있게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기 위하여 더욱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고 찬양하며 감사하며 승리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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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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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고난의 의미

 

 

 

제목 : 고난의 유익

말씀 : 롬5:1-4

17세기에 영국이 낳은 세계적 문학가이며, 거의 성자에 반열에 오를 큼 훌륭한 목사였던 죤 번연이라는 분이 있다. 이분은 사실 신학을 전공한 분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분도 아니었다. 처음에 그의 직업은 함석이나 쇠붙이 등을 붙이고 때우는 땜장이였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였고 수십번씩 성경을 읽으며 기타의 서적도 열심히 읽었다.

그리하여 세상적인 공부도 많이 하지 않았고, 신학도 공부하지 않은 그는 목사가 되었으며(침례교에서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신실한 신앙인으로 교회의 인정을 받으면 목사가 될 수 있음.) 기독교 교리서와 기도문 등의 많은 책을 썼고 그중에서도 천로역정은 지금까지 많은 신앙인들에게 읽혀져 많은 도전과 소망을 주고 있는 불후의 고전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파란만장했다. 그는 침례교의 설교자였는데 국교파의 모함을 받아 12년동안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너무 몸이 허약하여 병치레만하다가 그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찍 하나님품으로 가고 말았다. 큰 딸 메리는 시각장애인이었고, 두 아들은 번연만큼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는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고난과 그 고난으로 인하여 날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그로 하여금 더욱 신실한 신앙인이 되게 하였으며 결국은 「천로역정」이라는 기독교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해도 과언이 아닌 불후의 명작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많은 고난이 있다. 기독교인이라해도 별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이렇게 불행과 고통이 있는데 그대로 보고만 계시는가? 왜 홍수는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왜 많은 사람들이 고치기 힘든 질고로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가? 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가?”

물론 이러한 고통과 불행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아서 내버려 두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 인류가 고통가운데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렇다면 왜 고통의 현실에 직접개입하지 않으실까? 물론 무언가 인간의 삶에 필요한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게 뭘까?

1.하나님을 찾고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평안하고 부족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다. 자녀를 키워 봐도 그렇다. 어릴 때는 열심히 부모를 찾는다. 부모에게서 떨어지면 죽는 줄 알고 열심히 따라 다닌다. 그러나 점점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면 멀어지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벌써 서서히 멀어진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대학교 청년시절을 지나며 점점 멀어져 그때부터는 별로 찾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인생이다. 힘없고 빽없고 혼자 살기 어렵고 고통의 현실이 있으면 무언가 의지할 것을 찾는다. 그러나 아쉬운 게 없으면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한다. 고통과 어려움과 아쉬운게 없이 평안해지면 슬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쉽다.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평안히 거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부르짖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로 왕에게 학대를 당하고 고역으로 힘들어지자 그때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가정적으로도 평안할때는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가정에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울고불고하는 경우가 많다.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나 자녀에게 어려움이 오거나 여하튼 무언가 시련과 고통이 있을때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잘 아시기에 여러번 평안하고 형통할 때 조심 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신31:20,21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즉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 안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고 평안하게 거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결국 환난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 모세의 노래 즉 이스라엘의 배교를 경고한 노래를 통하여 비로소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인생은 어리석어서 평안할 때 주님을 멀리하기 쉽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환난과 고통으로 경고를 보내신다. 돌아오라는 신호이다. 엎드리라는 신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란과 고통이 그 당시에는 쓰리고 아프지 마는 이러한 고통은 인간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한다는 것, 인생이 연약하고 무지하고 어찌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만든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믿고 의지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써 고통을 허용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혹시 고난이 있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며 축복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그 앞에 더욱 엎드리자.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도리어 복의 기회로 만들어가자.

2.천국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칼빈(J.Calvin)은 “이 세상에 고통이 많은 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말했다. 사실 이 세상에 고통이 없이 편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다지 천국을 사모하지 않을 것이다.

안 그런가?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아무런 근심도 고통도 부족한 것도 없다면 천국이 무에 그리 그리워지겠는가? 그저 세상의 것에 빠져서 무사안일하게 거기서 만족을 추구하며 살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고 말씀 하신 것이다. 먹고 배부르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기면 천국이 그렇게 절실하게 요청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환란과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근심과 고통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편안하게 살때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돌아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압박과 고통을 당하게 될때 그제서야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우리 가운데 고통의 현실이 있다면 그것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욱 천국을 사모하게 하시고, 천국을 사모할때에 너무 세상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너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더욱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그 천국을 앞당겨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의 능력과 힘으로 고난의 현실을 이기고 천국의 은혜를 앞당겨 누리는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

3.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환란과 고통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내멋대로 살고 죄를 짓게 될 때 오는 수가 많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제 멋대로 살다가도 고통이 닥치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도 많이 보게 된다. 속된 말로 하면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때가 너무 많은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의 현실을 허용하신다.

그래서 시편119편 67절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하고 고백했고, 계속해서 71절에 보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 주의 율레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하는 질병이나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가 미워서 주시는 벌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인 것이다.

그래서 히12:6절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 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고 했다. 또 11절에서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환란과 고통과 실패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욱 그 앞에 엎드리자. 물론 그것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원망하고 불평하고 한탄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더욱 인생의 구렁속으로 몰아가는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의 현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는 도리어 큰 축복이요,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앞에 더욱 엎드려 살아갈때에 어떤 어려움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도리어 복의 기회로 삼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자.

4.인내와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미국의 어느 잡지에 5천년 묵은 나무가 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무가 살고 있는 땅은 결코 좋은 땅이 아니라고 한다. 산언덕에 바람이 부딪치고 바위가 많은 토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무는 땅도 나쁘고 모든 조건이 나쁘기 때문에 오히려 뿌리는 아주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무는 이 척박한 땅에서 성장하여 아주 단단하게 되었고 뿌리도 깊이 내려 그렇게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저 평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삶은 마치 온실 속의 화초와 같다. 온실 속의 화초는 뿌리도 깊지 않다. 단단하지도 않다. 더위나 추위나 습도에 대한 적응력도 부족하다. 그래서 조금만 조건이 맞지 않으면 금방 시들기 쉽다. 우리 인생도 동일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강하게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어떠한 환란과 시련과 역경이 오더라도 힘차게 이겨 나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종종 우리를 고통의 현장속으로 데리고 나가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3,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믿음으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감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늘 기뻐하며 살 수 있는데 심지어는 환난 가운데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환난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수 있는가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는 것은 비록 고통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결국 이겨내고 은혜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함으로 인내할때에 결국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격으로 훈련되어지고 그렇게 잘 훈련될때 우리는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게 되며 동시에 우리를 더욱 소망위에 든든히 세울 것이기 때문에 환난조차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고난의 현실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고난은 분명히 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도 쓴약이 몸에 좋다고 하지 않는가? 늘 평안한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고난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혹시 고난의 현실이 있다면 무언가 하나님의 필요가 있음을 기억하자.

더욱 우리의 신앙 인격을 다듬기 위한 것이든, 더욱 우리를 소망위에 세우시고 천국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것이든 아니면 혹시 우리의 죄로 인하여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순종케하기 위한 것이든 어쨌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에게 어떤 고난의 현실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리석게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그 시련과 고통을 통하여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더욱 주님 앞에 엎드리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을 통하여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누릴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조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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