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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후설교] 지혜의 유익

 

 

제목 : 지혜의 유익

말씀 : 잠3:21-26

여러분, 세상에서 정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귀한 것이 믿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유일한 방법인 이 믿음보다 귀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 아무 것도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큰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 아무것도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을 줄 수는 없다. 더 큰 위로와 소망을 줄 수는 없다.

그래서 지난시간에 같이 본바와 같이 15절의 말씀에 보면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지혜 즉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그 일이 진주를 갖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 지혜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지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지혜는 세상에서 우리가 바라고 사모하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값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정말 이 보다 귀한 것은 없다. 이것과 바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정말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가치관과 올바른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면 정말 하나님을 아는 지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지혜,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그 지혜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올바른 가치관이나 생각을 가지지 못한 정신 이상자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그렇고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이 지혜의 유익과 지혜의 가치를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시간에는 16절에서 지혜는 장수와 부귀를 준다고 하였고, 또 17절에서는 지혜는 즐거움과 평강을 준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18절에서는 지혜는 영생을 준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지혜를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이다. 장수와 부귀, 즐거움과 평강, 영생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 이상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지혜를 가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더나아가서는 그 지혜를 따라 살라야 한다. 공연히 세상 풍조에 이리저리 휩쓸리지 말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관이나 목표나 방향을 가지고 살것이 아니다. 우리의 방향, 우리의 가치, 우리의 목표는 하나다. 기준은 오직 지혜이다. 하나님안에 있는 지혜,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다. 그것을 따라 살면 반드시 영과 육이 은혜를 받는 풍성함을 누린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역시 계속해서 이 천하보다 귀한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1.지혜를 얻으려면

오늘 본문에서는 지혜의 유익을 말하기전에 먼저 지혜를 얻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혜를 얻으면 참 평안과 기쁨이 있을 것인데, 영과 육이 풍성함을 누릴 것인데 그렇다면 이러한 지혜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가하는 것을 먼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말씀을 읽고 묵상해야한다.(21절)

오늘 본문 21절 뒷부분에 보면 “이것들로 네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네 눈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항상 우리 눈앞에 말씀이 있게 하라는 이야기다. 눈앞에 성경말씀이 있게 하라는 것은 물론 성경책을 눈앞에 놔두고 구경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라는 이야기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지혜를 얻게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물론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다. 판사가 되려면 헌법, 민법, 상법, 형사소송법 등등의 법 서적을 부지런히 읽어야한다. 의사가 되려면 의학서적을 눈앞에 놓고 살아야 한다. 영어를 잘하려면 늘 영어책을 가까이 해야한다. 소설을 잘 쓰려면 늘 소설책을 가까이 해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해야한다. 생명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생명의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말할것도 없이 성경은 최대의 지혜서이다. 성경은 유일하게 생명의 구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다. 성경은 구원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비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책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지혜를 얻고, 생명의 비밀을 깨닫게 되고, 구원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비결을 알게된다. 그래서 최대의 지혜를 소유한 사람, 생명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밤낮으로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이 가장 복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2:1-3) 왜? 성경에는 생명에 이르는 길이 있으니까. 성경에는 기쁨과 은혜의 길이 있으니까. 성경에는 진리의 길이 있으니까. 그래서 결국 열매를 맺게 되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라. 묵상하라. 농촌에서 솔직히 농번기에는 읽기가 힘들다. 그러면 겨울철에 1독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한번 시작해 보시라. 그리고 모든 공적인 예배에도 부지런히 참석하라. 그냥 참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심비에 새기라.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적용시키라. 그러면 지혜를 얻는다. 풍성한 삶을 산다. 은혜의 삶을 산다. 반드시 복된 사람이 된다.

2)지혜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21절 전반절에 보면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삶속에서 적용시키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한번 그렇게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말씀을 올바르게 듣고 읽는 사람은 그 안에서 은혜를 받는다. 도전을 받는다. 새로운 용기가 솟아난다. 그것을 따라서 살게 될 유익을 확실히 알게 된다. 그 길이 얼마나 복된 길인지 분명히 보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결단이 생긴다. 그래서 실행하게 된다. 실행하면 은혜가 온다. 은혜가 오면 더욱 신이나서 말씀안에서 살게 된다. 그래서 그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는 자들은 반드시 복있는 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1:3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정말 복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바로 말씀안에 거하는 사람이다. 말씀을 묵상하며 읽으며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읽으라. 묵상하라. 그대로 행하라. 그리하여 은혜를 받으라.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을 살게 된다.

2.지혜를 얻는 자의 유익

지혜를 얻은 자의 유익은 이미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가 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도 또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왜 자꾸만 강조할까? 물론 먼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니까 그렇다. 중요하지 않은 사실을 강조할 리가 없다.

그리고 자꾸만 강조하는 이유가 또 하나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을 잘 안듣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한번 말해서 잘 들으면 두말할 필요가 무엇인가? 한번 말해서 잘 들으면 한번 말하면 그만이다. 우리 자녀들이 한번 말하면 알아서 하면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행이 안되면 했던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자꾸만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니까, 중요해서 말을 해도 잘 시행이 안되니까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은 성경에서 강조해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그만큼 중요한 말씀이다. 귀를 기울였으면 이제는 실제로 그 말씀안에서 살자. 그럼 정말 지혜자가 된다. 복있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오늘도 또 강조하고 있다.

1)생명을 얻는다.

이것은 이미 18절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다. 18절 전반절에서는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고 말씀하고 있고 오늘은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라고 또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적으로는 좀 다르지만 의미는 똑 같은 말이다.

그러니까 지혜를 얻은 자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고, 하나님 자신이기도, 예수님을 지칭하기도 한다. 즉 성경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여 거기서 생명의 말씀을 깨닫고, 구원의 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이 역시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 아닌가? 오직 성경안에만 생명의 도가 있다. 진리의 길이 있다. 영생복락의 길이 있다. 구원의 길이 있다. 물론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할때에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또 요20:31에서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기록 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게 하고 믿게하여 그 이름을 힘입어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까이 하라. 말씀을 묵상하라. 그러면 지혜를 얻는다.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영생복락을 누린다. 복의 길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길도 아니다. 다만 믿고 따르면 된다. 말씀을 하나님을 주님을 가까이 하면 된다.

2)아름다움과 은총을 누린다.

본문 22절 하반절에 보면 “네 목에 장식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장식이란 ?호의, 은총, 은혜, 매력, 아름다움?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혜의 말씀을 늘 가까이하며 그것을 지켜 살면 은혜와 은총과 아름다움속에 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자는 아름다워 진다. 그 말이 아름답다. 그 인격이 향기로워 진다. 그 마음이 넉넉해진다. 정말 그 마음 씀씀이가 아름다워진다. 심령의 평안함을 누린다. 모든 추하고 더럽고 허물많던 모습들이 사라진다. 모든 이기심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증오와 욕심과 저주가 사라진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관용하고 너그러워진다. 왜 진리와 사랑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님이 인도해주시니까. 성령님이 나를 이끌어가니까.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무엇인가? 가장 은혜로운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외양이 아니다. 능력도 아니다. 지식도 아니다. 권세도 아니다. 부귀도 아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아름다운 마음이다. 맑고 깨끗한 영혼이다. 가식도 미움도 증오도 질투도 거짓도 없는 해맑은 모습이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덮어주는 마음이며 그러한 아름다운 마음들이 밖으로 표출될 때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

갓난아기가 아름다운 것은 왜인가? 그야말로 어둠의 그림자가 없기 때문이다. 거짓이 없다. 미움도 증오도 없다. 순수하다. 깨끗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은혜로운 것이다. 그래서 모든 보는 이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사는 자는 바로 이런 은혜를 누린다는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살아가면 성령이 역사하신다. 말씀이 인도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속에 찌꺼기를 제거해 주신다. 태워주신다. 모든 세상적인 욕망을 없이 해 주신다. 그러면 그 영혼이 투명해진다. 정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은혜를 누려보지 않으려는가?

3)평안을 누리게 된다.(23-25)

오늘 23, 24절에서는 “네가 네 길을 안연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가 말씀안에서 진리안에서 살아갈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는 길을 평탄케 해주시고,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밤에 잠자리에 누울때에도 아무 근심걱정이 없어서 평안히 잠잘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잠을 잘 잘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은 근심걱정이 없다는 이야기다. 근심 걱정 불안 공포 미움 증오 욕심이 있으면 잠이 잘 안온다. 잠이 잘 안온다는 것은 무엇인가 평형이 깨졌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육적인 것이든 무엇인가 평안의 상태에 문제가 생기면 잠이 잘 안오는 것이다. 잠자리에 누워도 별로 편안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주신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평강을 주신다. 그래서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혹은 육체적인 것이든 세상의 조건과 무관한 평강을 채워주셔서 모든 근심 걱정 물리쳐 주시고 잠자리도 평안케 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시 127:2에서는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믿고 따르는 자들을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평강과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소망으로 채워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갖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죽음의 순간이나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오늘 25,26절에 보면 “너는 창졸간의 두려움이나 악인의 멸망이 임할 때나 두려워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말씀이다. 넘어지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뿐만아니라 설령 우리가 넘어질때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서 넘어지 않게 하심으로 평강을 누리고 설령 넘어져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것을 이기게 함으로 평강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순간에도 심지어는 멸망의 순간에도, 급작스런 위기의 순간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나님 역사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기에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죽음앞에서도 겁 낼 필요도 없고, 환난과 핍박속에서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정녕 나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기만 한다면 내가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순탄하며 순탄한대로 풍파가 있으면 풍파가 있는대로, 살면 사는대로 죽으면 죽는대로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요14:27에서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빌4:6,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씀을 정리한다.

여러분, 근심하지 마시라.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도 말라. 다만 주님을 믿으라. 말씀을 묵상하라. 기도하라. 맡기라. 다만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사랑하며 그것을 따르라. 그러면 반드시 주님이 역사하신다. 성령님이 인도하신다. 그러면 은혜를 누린다. 평강을 누린다.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우리 온 성도들은 이러한 사실을 새롭게 기억하며 오직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좇아 살때에 진정 지혜로운자로써 주님의 평강와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사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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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오후 설교] 주일의 의미

 

 


제목 : 주일의 의미

말씀 : 출20:8-11

 


1.주일 성수

주일(主日)성수(聖守)는 성도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의무이며 특권이며 사명이며 권리이다. 가장 복된 일이다. 그렇다면 주일을 지키는 것이 왜 특권이고 사명이고 복인가?

1)안식일의 의미

주일은 안식일을 기본으로하여 그 정신을 이어받아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지키는 가장 거룩한 절기이다. 그러므로 주일의 의미를 살펴보려면 먼저 안식일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안식일의 의미는 십계명의 말씀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십계명의 말씀 중 안식일의 규정을 말씀하고 있는 출20:8-10에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안식일은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다가 제 칠일에는 모든 것을 중단하고 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수고해서 이룬 것들을 누리면서 안식하게 하기 위하여 세우셨다는 것이다.

그 말씀 중 우리는 특별히 11절 후반절의 말씀 즉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즉 안식일은 다른 날과 전혀 다른 날이라는 것이다. 다른 날과는 완전히 구별하여 세운 날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따로 세워놓으신 아주 특별한 날이라는 것이다.

거룩하다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구별되다, 성별되다, 다르다 뭐 그런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그날은 다른 날과는 완전히 다른 날이라는 것이다. 그날은 다른 날과는 완전히 의미가 다르게 따로 구분해서 세워주신 날이라는 것이다. 구별해서 따로 세워놓으신 날이니까 다른 날과 구별해서 다르게 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른 날들과는 전혀 다르게 세상에서 하던 모든 일들을 완전히 중단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목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우리는 안식과 기쁨과 은혜의 충만함을 누림으로 복되고 기쁜 날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날은 가장 복된 날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세상의 모든 일, 근심, 걱정, 수고에서 벗어나 하나님 존전에 나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은총을 누리며 그 안에서 안식하는 그 복을 어디에다 비교할 것인가? 하나님도 알지못하고, 주님안에 있는 안식도 누리지 못하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도 누리지 못하고 그저 죽자사자 일만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란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가?

그렇다. 안식일을 따로 구별해서 주신 목적은 바로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 복을 주고 은혜를 주고 기쁨을 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날이 될 수 있느냐하면 그날을 특별하게 구별해서 보낼 때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날과 구별하지 못하고 다른 날과 별로 다르지 않게 보낸다면 그런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안식일 즉 주일의 의미를 기억하며 이 날을 거룩하게 보내기 바랍니다. 정말 특별하게 보내기 바란다. 일상적인 삶과 완전히 다르게 보내기 바란다. 정말 몸과 마음과 정신과 모든 것이 주님앞에 온전히 나아와 몸과 마음과 영혼에 온전한 쉼을 누리기 바랍니다. 진정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돌려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고 여러분 자신들은 주님 안에 있는 은혜, 그 기쁨, 그 안식, 그 평안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란다.

2)주일의 의미

먼저 주일(主日)이라는 말의 뜻은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그 날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날이다. 앞서 안식일의 의미에서도 보았지만 그날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은 날이므로 내 맘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그날 주님의 날이다. 물론 모든 날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이 날은 더더구나 더 그렇다.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여기서 오늘 말씀과 좀 다른 차원이지만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는 일요일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일요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냥 노는 날의 의미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공일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주일과 전혀 다른 의미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절대로 공일이 아니다. 이날은 주일이다. 주님의 날이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주님안에서 안식하는 날이다. 주님께 드려야할 날이다. 그러므로 꼭 주일이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라.

그렇다면 주일 즉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주의 날은 두가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다.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이기에 그 날을 주님의 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계1:10에 보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할때의 상황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계시를 받을 때가 주의 날 즉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안식후 첫날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주의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의미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날을 주의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살전5:2, 살후2:2, 벧후3:10 등에 나타나는데 벧후3:10절에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말씀하면서 주님께서 재림하셨을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주님의 날이라는 뜻인데 하나는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라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을 말한다. 그러니까 주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날인 주님의 부활과 재림의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이란 한마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날이다. 완전한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신 날이다. 동시에 이날은 모든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신 날이다. 사망의 권세, 즉 인간을 억누르고 있는 가장 무섭고도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신 날이다. 모든 어둠과 고통과 연약함과 허무함의 대표라고 볼 수 있는 죽음의 권세를 벗겨주신 날이다. 동시에 주님이 오셔서 완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실 날이다. 광야와 같은 세상속에서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실 날이다.

3)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이유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주일은 그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날이요, 은혜의 날이요, 안식의 날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이유를 분명하게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일은 진정한 생명의 날이요, 은혜의 날이요, 안식의 날이므로 안식일의 의미를 완성한 날인 것이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안에서 안식하며 평강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제정하신 날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완전한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죄와 연약함과 부족함과 허물과 어둠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온전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안식과는 완전히 180도 다른 영원한 고통속에 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서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서는 인간의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즉 십자가를 통하여 완전히 죄로부터 해방되고, 부활을 통하여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진정한 안식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곧 안식일의 완성인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안식일의 완성이기에 당연히 예수님께서 모든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이 안식일을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안식후 첫날 즉 주님이 부활하신 주의 날 에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먼저 요20:19에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제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는 말씀이다.

또 행20:7에 보면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떡을 떼려하여 모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애찬이 아닌 성찬을 겸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매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별히 매주일 정기적으로 모인 사실에 대해서는 고전16:2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에 보면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매주일 첫날에 예배드리러 모일 때마다 연보를 하여 그것으로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구제금으로 사용하라는 그러한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주일이 안식일을 대신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었고, 그 오신 목적을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안식일을 완성시키셨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약의 안식일의 의미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을 이룬 날이 바로 주일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것은 오늘 본문8절의 말씀인데 곧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안식일의 주인이라함은 한마디로 주님이 안식일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주님의 것이라는 말씀이다. 안식일의 주인은 주님이니까 그날은 주님의 것이고, 그분의 뜻에 의하여 움직여야 되는 날이고, 그 분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주일은 안식일의 뜻을 완성한 날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복을 주시려고 구별해서 주신 날이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은 그 안식일안에서는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안식일을 완성시키셨다. 그 안에 진정한 생명의 풍성함과 안식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한다. 그날은 주님의 날이다.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어야 한다.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날이어야 한다. 주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주님의 날이니까. 그러면 더 큰 생명의 은혜를 누린다. 축복을 누린다. 모두 주일을 거룩하여 지켜 복된 삶을 살아가자.


 

[주일오후설교] 주일의 의미

 


제목 : 주일의 의미

말씀 : 출20:8-11

 


1.주일 성수

주일(主日)성수(聖守)는 성도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의무이며 특권이며 사명이며 권리이다. 가장 복된 일이다. 그렇다면 주일을 지키는 것이 왜 특권이고 사명이고 복인가?

1)안식일의 의미

주일은 안식일을 기본으로하여 그 정신을 이어받아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지키는 가장 거룩한 절기이다. 그러므로 주일의 의미를 살펴보려면 먼저 안식일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안식일의 의미는 십계명의 말씀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십계명의 말씀 중 안식일의 규정을 말씀하고 있는 출20:8-10에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안식일은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다가 제 칠일에는 모든 것을 중단하고 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수고해서 이룬 것들을 누리면서 안식하게 하기 위하여 세우셨다는 것이다.

그 말씀 중 우리는 특별히 11절 후반절의 말씀 즉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즉 안식일은 다른 날과 전혀 다른 날이라는 것이다. 다른 날과는 완전히 구별하여 세운 날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따로 세워놓으신 아주 특별한 날이라는 것이다.

거룩하다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구별되다, 성별되다, 다르다 뭐 그런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그날은 다른 날과는 완전히 다른 날이라는 것이다. 그날은 다른 날과는 완전히 의미가 다르게 따로 구분해서 세워주신 날이라는 것이다. 구별해서 따로 세워놓으신 날이니까 다른 날과 구별해서 다르게 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른 날들과는 전혀 다르게 세상에서 하던 모든 일들을 완전히 중단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목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우리는 안식과 기쁨과 은혜의 충만함을 누림으로 복되고 기쁜 날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날은 가장 복된 날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세상의 모든 일, 근심, 걱정, 수고에서 벗어나 하나님 존전에 나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은총을 누리며 그 안에서 안식하는 그 복을 어디에다 비교할 것인가? 하나님도 알지못하고, 주님안에 있는 안식도 누리지 못하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도 누리지 못하고 그저 죽자사자 일만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란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가?

그렇다. 안식일을 따로 구별해서 주신 목적은 바로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 복을 주고 은혜를 주고 기쁨을 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날이 될 수 있느냐하면 그날을 특별하게 구별해서 보낼 때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날과 구별하지 못하고 다른 날과 별로 다르지 않게 보낸다면 그런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안식일 즉 주일의 의미를 기억하며 이 날을 거룩하게 보내기 바랍니다. 정말 특별하게 보내기 바란다. 일상적인 삶과 완전히 다르게 보내기 바란다. 정말 몸과 마음과 정신과 모든 것이 주님앞에 온전히 나아와 몸과 마음과 영혼에 온전한 쉼을 누리기 바랍니다. 진정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돌려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고 여러분 자신들은 주님 안에 있는 은혜, 그 기쁨, 그 안식, 그 평안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란다.

2)주일의 의미

먼저 주일(主日)이라는 말의 뜻은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그 날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날이다. 앞서 안식일의 의미에서도 보았지만 그날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은 날이므로 내 맘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그날 주님의 날이다. 물론 모든 날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이 날은 더더구나 더 그렇다.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여기서 오늘 말씀과 좀 다른 차원이지만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는 일요일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일요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냥 노는 날의 의미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공일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주일과 전혀 다른 의미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절대로 공일이 아니다. 이날은 주일이다. 주님의 날이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주님안에서 안식하는 날이다. 주님께 드려야할 날이다. 그러므로 꼭 주일이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라.

그렇다면 주일 즉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주의 날은 두가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다.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이기에 그 날을 주님의 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계1:10에 보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할때의 상황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계시를 받을 때가 주의 날 즉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안식후 첫날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주의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의미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날을 주의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살전5:2, 살후2:2, 벧후3:10 등에 나타나는데 벧후3:10절에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말씀하면서 주님께서 재림하셨을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주님의 날이라는 뜻인데 하나는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라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을 말한다. 그러니까 주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날인 주님의 부활과 재림의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이란 한마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날이다. 완전한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신 날이다. 동시에 이날은 모든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신 날이다. 사망의 권세, 즉 인간을 억누르고 있는 가장 무섭고도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신 날이다. 모든 어둠과 고통과 연약함과 허무함의 대표라고 볼 수 있는 죽음의 권세를 벗겨주신 날이다. 동시에 주님이 오셔서 완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실 날이다. 광야와 같은 세상속에서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실 날이다.

3)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이유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주일은 그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날이요, 은혜의 날이요, 안식의 날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이유를 분명하게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일은 진정한 생명의 날이요, 은혜의 날이요, 안식의 날이므로 안식일의 의미를 완성한 날인 것이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안에서 안식하며 평강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제정하신 날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완전한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죄와 연약함과 부족함과 허물과 어둠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온전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안식과는 완전히 180도 다른 영원한 고통속에 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서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서는 인간의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즉 십자가를 통하여 완전히 죄로부터 해방되고, 부활을 통하여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진정한 안식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곧 안식일의 완성인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안식일의 완성이기에 당연히 예수님께서 모든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이 안식일을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안식후 첫날 즉 주님이 부활하신 주의 날 에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먼저 요20:19에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제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는 말씀이다.

또 행20:7에 보면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떡을 떼려하여 모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애찬이 아닌 성찬을 겸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매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별히 매주일 정기적으로 모인 사실에 대해서는 고전16:2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에 보면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매주일 첫날에 예배드리러 모일 때마다 연보를 하여 그것으로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구제금으로 사용하라는 그러한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주일이 안식일을 대신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었고, 그 오신 목적을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안식일을 완성시키셨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약의 안식일의 의미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을 이룬 날이 바로 주일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것은 오늘 본문8절의 말씀인데 곧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안식일의 주인이라함은 한마디로 주님이 안식일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주님의 것이라는 말씀이다. 안식일의 주인은 주님이니까 그날은 주님의 것이고, 그분의 뜻에 의하여 움직여야 되는 날이고, 그 분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주일은 안식일의 뜻을 완성한 날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복을 주시려고 구별해서 주신 날이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은 그 안식일안에서는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안식일을 완성시키셨다. 그 안에 진정한 생명의 풍성함과 안식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한다. 그날은 주님의 날이다.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어야 한다.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날이어야 한다. 주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주님의 날이니까. 그러면 더 큰 생명의 은혜를 누린다. 축복을 누린다. 모두 주일을 거룩하여 지켜 복된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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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 찬송과 기도

 

 


제 목 : 찬송과 기도

말 씀 : 약5:13-18

여러분, 우리 인생의 여정에는 누구에게나 굴곡이 있습니다. 누구나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고, 평안할 때가 있으면 뭔가 좀 힘들 때도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릴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일이 자꾸 꼬일 때도 있습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것들을 누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보전되지 못하고 죄와 무지가 들어옴으로써 어렵고 힘들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혹시 인생의 여정에서 어렵고 힘들 때가 있더라도 너무 힘들어하거나 절망하거나 낙심하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고통스러울 때가 있으면 즐겁고 기쁠 때도 있으려니 하고 기도하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또 형통할 때에도 너무 자랑하거나 남 앞에 으스대지 마세요. 그저 겸손하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기쁠때나 슬플때나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승리하며 감사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바로 여기에 대한 답변을 주고 계십니다.

1.고난이 올 때 기도하라.

오늘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이 오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난 앞에서 아무 대책이나 노력도 없이 무작정 기도만 하고 앉아 있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고난이나 시험이나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문제 해결의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해 보세요.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습니다. 웬지 아세요. 그게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앞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앞에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힘과 지혜와 능력과 용기를 주셔서 그 고난에 넉넉히 대처해 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시든지 환경이나 상황을 바꾸어 주시든지 하여 결국 문제를 해결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면 그것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셔서 문제를 해결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혹시 고난이 온다해도 당황하거나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할때에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4-18절 까지는 우리 인생에게 다가오는 고난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인 질병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1)장로(교회대표자)를 청하여 기도하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5:14)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하라고 하니까 앞으로 아프면 목사님 부르지 말고 장로님 불러야 되나 생각하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 목사도 장로입니다. 가르치는 일과 치리하는 일 두가지를 다하는 장로를 목사라하고, 치리만 하는 장로를 일반적으로 장로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질병이 생겼을 때 먼저 교회의 대표자들을 불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병원에는 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먼저 해야 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반적인 고난도 먼저 기도하고 대책을 세우고, 질병도 먼저 함께 기도하고 병원도가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문제 해결의 길이 보입니다.

2)믿음으로 회개하며 기도하라.

약5:15,16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여기에 보면 질병의 원인이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이것은 질병이 자연적인 현상으로 온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것은 질병의 원인이 본인의 죄로 인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죄를 고하라. 서로 기도하라. 이것은 죄를 들어내는 것을 부끄러워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사람앞에서도 죄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자신의 죄를 내 놓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인만큼 죄를 철저히 회개한다는 의미와 함께 죄로부터 철저히 떠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서로 내 놓고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더욱 힘이 있는 것입니다.

3)간절히 기도하라.

오늘 17,18절을 보십시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엘리야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자신에게 무슨 신성이나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는데 그가 간절히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능력이 나타나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에 간절히 해야 합니다. 때로는 생명을 걸어놓고 매달려 부르짖어야 합니다. 히스기야도 죽음을 직면했을 때 벽을 향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죄를 범했을 때 눈물로 침상을 띄울 만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혔을 때 간절히 기도하며 찬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눅18장)를 통하여 낙망하지 말고 응답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질병이든지 어떤 다른 고난이든지 혹시 고난이 올 때 먼저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주님께 대한 믿음 가운데서 교회의 대표자들을 불러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회개하며 기도하고, 목숨을 내걸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즐거울 때는 찬송하라.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5:13) 그렇다고 고난당할 때는 기도만 하고, 즐거울 때는 찬송만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난당할 때는 특별히 더 기도하고, 즐거울 때는 특별히 더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즐거울 때 찬송하라는 것은 일이 잘되고 형통하고 경제가 풀리고 자녀가 잘되고 취업이 되고 병이 낫고 하여튼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찬송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내가 누리는 모든 형통함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인 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잘될 때 오히려 신앙을 까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되고 형통하니까 아쉬운 게 없다고 찬양도 기도도 예배 생활도 잘 안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그게 하나님의 은혜인 줄도 모르고 그저 자신의 능력이요 노력인 줄 알고 자기가 영광을 다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살아 숨쉬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노력했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머리가 좋아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를 잘 만났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원래부터 우리의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노력했다면 노력 할 수 있는 힘과 지혜는 어디서 왔습니까? 머리가 좋다면 그 좋은 머리는 어디서 왔습니까? 때가 좋았다면 그 좋은 때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여러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모든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일차적으로 근본적으로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이며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럴 때 감사와 기쁨과 은혜는 더욱 충만해집니다. 일도 더욱 잘 풀려갑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기쁠때나 즐거울 때나 형통할 때나 불통할 때나 먼저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고난 당할 때 먼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형통할 때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고난 받으면 받는대로 형통하면 형통한대로 어떤 여건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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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찬송과 기도

 

 

 

제 목 : 찬송과 기도

말 씀 : 약5:13-18

여러분, 우리 인생의 여정에는 누구에게나 굴곡이 있습니다. 누구나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고, 평안할 때가 있으면 뭔가 좀 힘들 때도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릴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일이 자꾸 꼬일 때도 있습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것들을 누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보전되지 못하고 죄와 무지가 들어옴으로써 어렵고 힘들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혹시 인생의 여정에서 어렵고 힘들 때가 있더라도 너무 힘들어하거나 절망하거나 낙심하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고통스러울 때가 있으면 즐겁고 기쁠 때도 있으려니 하고 기도하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또 형통할 때에도 너무 자랑하거나 남 앞에 으스대지 마세요. 그저 겸손하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기쁠때나 슬플때나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승리하며 감사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바로 여기에 대한 답변을 주고 계십니다.

1.고난이 올 때 기도하라.

오늘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이 오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난 앞에서 아무 대책이나 노력도 없이 무작정 기도만 하고 앉아 있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고난이나 시험이나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문제 해결의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해 보세요.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습니다. 웬지 아세요. 그게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앞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앞에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힘과 지혜와 능력과 용기를 주셔서 그 고난에 넉넉히 대처해 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시든지 환경이나 상황을 바꾸어 주시든지 하여 결국 문제를 해결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면 그것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셔서 문제를 해결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혹시 고난이 온다해도 당황하거나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할때에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4-18절 까지는 우리 인생에게 다가오는 고난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인 질병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1)장로(교회대표자)를 청하여 기도하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5:14)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하라고 하니까 앞으로 아프면 목사님 부르지 말고 장로님 불러야 되나 생각하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 목사도 장로입니다. 가르치는 일과 치리하는 일 두가지를 다하는 장로를 목사라하고, 치리만 하는 장로를 일반적으로 장로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질병이 생겼을 때 먼저 교회의 대표자들을 불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병원에는 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먼저 해야 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반적인 고난도 먼저 기도하고 대책을 세우고, 질병도 먼저 함께 기도하고 병원도가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문제 해결의 길이 보입니다.

2)믿음으로 회개하며 기도하라.

약5:15,16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여기에 보면 질병의 원인이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이것은 질병이 자연적인 현상으로 온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것은 질병의 원인이 본인의 죄로 인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죄를 고하라. 서로 기도하라. 이것은 죄를 들어내는 것을 부끄러워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사람앞에서도 죄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자신의 죄를 내 놓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인만큼 죄를 철저히 회개한다는 의미와 함께 죄로부터 철저히 떠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서로 내 놓고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더욱 힘이 있는 것입니다.

3)간절히 기도하라.

오늘 17,18절을 보십시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엘리야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자신에게 무슨 신성이나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는데 그가 간절히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능력이 나타나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에 간절히 해야 합니다. 때로는 생명을 걸어놓고 매달려 부르짖어야 합니다. 히스기야도 죽음을 직면했을 때 벽을 향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죄를 범했을 때 눈물로 침상을 띄울 만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혔을 때 간절히 기도하며 찬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눅18장)를 통하여 낙망하지 말고 응답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질병이든지 어떤 다른 고난이든지 혹시 고난이 올 때 먼저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주님께 대한 믿음 가운데서 교회의 대표자들을 불러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회개하며 기도하고, 목숨을 내걸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즐거울 때는 찬송하라.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5:13) 그렇다고 고난당할 때는 기도만 하고, 즐거울 때는 찬송만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난당할 때는 특별히 더 기도하고, 즐거울 때는 특별히 더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즐거울 때 찬송하라는 것은 일이 잘되고 형통하고 경제가 풀리고 자녀가 잘되고 취업이 되고 병이 낫고 하여튼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찬송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내가 누리는 모든 형통함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인 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잘될 때 오히려 신앙을 까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되고 형통하니까 아쉬운 게 없다고 찬양도 기도도 예배 생활도 잘 안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그게 하나님의 은혜인 줄도 모르고 그저 자신의 능력이요 노력인 줄 알고 자기가 영광을 다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살아 숨쉬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노력했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머리가 좋아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를 잘 만났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원래부터 우리의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노력했다면 노력 할 수 있는 힘과 지혜는 어디서 왔습니까? 머리가 좋다면 그 좋은 머리는 어디서 왔습니까? 때가 좋았다면 그 좋은 때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여러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모든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일차적으로 근본적으로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이며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럴 때 감사와 기쁨과 은혜는 더욱 충만해집니다. 일도 더욱 잘 풀려갑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기쁠때나 즐거울 때나 형통할 때나 불통할 때나 먼저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고난 당할 때 먼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형통할 때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고난 받으면 받는대로 형통하면 형통한대로 어떤 여건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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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가장 안전한 길

 

 

 

제목 : 가장 안전한 길

말씀 : 잠3:5,6

 


사람이란 어차피 돈이나 권력이나 건강이나 능력이나 젊음이나 사람이나 여하튼 무엇인가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여하튼 나는 그냥 내 존재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의지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고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어떤 참람한 사람은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미련한 중에 미련한 인생이요, 불쌍한 중에 불쌍한 인생이다. 그까짓 주먹이 세면 얼마나 셀까? 오래가면 얼마나 오래갈까?

대통령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기라야 고작해야 5년인데 5년 임기가 끝남과 함께 그가 의지하는 것도 사라진다. 돈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돈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까? 길어봐야 100년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도 돈과 함께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다. 지식이나 명예와 권세나 과학이나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까? 물어 보나마나다. 가장 큰 능력 자, 가장 지혜로운 자, 가장 사랑이 충만한 자, 가장 인자한 자, 가장 영원한 자 이런 자를 의지해야 가장 안전한 것이다. 그가 누구일까? 물어보나마나 하나님이시다.

1.하나님을 의뢰해야 한다.

오늘 5절 말씀을 보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네 길을 지도해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바라보며 사는 자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가장 안전한 길이요, 가장 복된 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인가?

1)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依賴하여야 한다.

본문 5절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그 방법론으로써 제시하고 있는 것이 마음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마음을 다하라고 했을 때 마음이란 아주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마음, 정신, 이해력, 의지, 중심」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또한 다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총동원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좀 풀어 말한다면 마음과 정신과 의지와 중심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 어느 한 영역이라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전인격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동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신, 우리의 감정, 우리의 지식, 우리의 이성, 우리의 육체, 우리의 능력 등 하여튼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부분을 총동원하여 그 어느 부분이라고 빠짐이 없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다.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맡기고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 인격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서로 믿고 의지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어떤 영역을 남겨놓고 어떤 부분은 맡기지 않는다면 이것은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돈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몸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시간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하면 이것은 무언가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부는 온전한 믿음의 관계속에 있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도 감정도 육신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다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런 오류속에 살때가 많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감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지적인 것과 이성적인 부분을 하나님께 의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긴 하면서도 세상에 나가면 자기의 지식과 이성과 감정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 많은 것이다.

이것은 사실은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은 아무튼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라는 것이다. 상황과 조건과 시대의 흐름도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영향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여하튼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그야말로 갓난아기가 하나님만 졸졸 따라 다니는 것 같이 우리의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온전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런 삶을 살자.

2)人間에 대한 信賴를 버려야 한다.

오늘 본문의 5절 말씀에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너무 지당한 말씀이 아닌가? 우리는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다. 마6:2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의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무엇인가를 반드시 의지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데 자기지식이나 자기의 지혜나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돈을 의지하고 권력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자기의 지혜와 경험을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둘 중에 어떤 것을 의지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그것을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비교해보면 너무나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인간은 무능하다. 하나님은 전지하시지만 인간의 지식은 한계가 있다. 하나님은 영화로우시지만 인간은 비천하다. 하나님은 권능자이시지만 인간은 약하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지만 인간은 미련하다.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인간은 죄로 오염되어 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시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세상의 것은 영원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 둘 중에 무엇을 따를 것인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보나마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 자기 지식과 자기 경험과 자기 능력과 자기 의지를 포기해야한다. 그래야만이 온전히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다. 그래야 만이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도 깊이 되새기며 나보다는 하나님 편을 택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3)凡事에 하나님을 認定해야 한다.

본문 6절에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했다. 이 말씀도 정말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한다. 모든 말씀이 다 그렇지만 정말 깊이 묵상해보자.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중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에 여기에 앉아 있다. 그러나 범사라는 말에 주목해 보라. 과연 범사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말을 따르는가?

여기서 범사라는 말이 우리말 성경에는 한단어로 되어 있지만 원문성경에는 범과 사가 각각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범이란 「모두, 전체, 완전함」을 의미하며 사는 「길, 도로, 여행, 태도, 습관, 인생행로, 행위, 일, 일의 방식」 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범사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걸어가야 할 모든 길, 인생항로의 전체, 인생길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인정하라고 하였는데 인정한다는 것은 「알다, 이해하다」라는 뜻으로 경험해서 이해하고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아는 것이란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해하고 경험해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완전히 이해하고 경험해서 안다면 그 아는 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안다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이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월등하신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와나 권력과도 비교 할 수 없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영역에서 완전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 나의 생명과 영원을 책임져 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정말 이해하는가? 이 사실을 정말 아는가? 정말 인정하는가? 그러면 맡기라. 정말 하나님을 알고 느끼고 깨닫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자. 어떤 부분은 인정하고 어떤 부분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자.

범사라는 말을 다시한번 주목하라.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가치기준이 어떻게 달라져도,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심지어는 교회가 어떻게 변해간다해도 우리는 범사에 그를 올바르게 알고 오직 그 뜻만을 좇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말씀만이 유일한 잣대가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2.하나님을 依賴하는 자가 받는 福

그래서 오늘 본문 6절 하에 보면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범사에 그를 인정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신다고 했다.

여기서 지도하다는 말은 「평탄하게 하다, 곧게하다, 똑바르게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지혜, 능력, 경험, 이성 의지하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지혜와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셔서 평탄케해 주신다는 것이다. 인생을 고통스럽게 하고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모든 울퉁불퉁하고 뾰족한 것들을 평탄하게 하셔서 그러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의 현실들을 이기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인생의 구부러진 것을 똑바르게 하여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오직 하나님만이 전능자이시다. 전지자이시다. 사랑과 능력의 은혜와 평강의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그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목자가 되신다. 그 분만이 완전한 목자요, 선한 목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완전한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가자.

우리의 알량한 명철도 의지하지 말라. 경험도 의지하지 말라. 지식도 의지하지 말라. 그런 것들은 다 불완전한 것들이다. 다 연약한 것들이 오직 주님을 의지하라. 주님을 의지하되 마음을 다하여 의지하라. 전인격을 다 동원하여 의지하라. 부분적으로 하지 말고, 취사선택해서 하지 말고, 어느 한 영역만을 맡기지 말고 전영역을 다 맡겨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라. 그리고 그를 따르라. 그리하여 선한 목자되시는 주님의 지도하심가운데 은혜와 평강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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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참 지혜자

 

 


제목 : 참 지혜자의 삶

말씀 : 엡5:15-18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시 잠시 들러 복음을 전한 뒤 다시 3차 전도여행시에 와서 3년간이나 눈물로 목회 하여 세운 교회였다.(행20:31) 그리고 당시 에베소는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 항구도시로 해상교통의 요충지기도 했고, 이 에베소에서 소아시아 전역으로 도로가 나 있어서 인근의 교통의 요충지기도 했다.

따라서 상업과 무역업이 발달하였고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어마어마한 아데미 신전이 있어서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에베소 교회도 소아시아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교회도 여타의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가 있는 교회이기도 했다. 물론 에베소교회만의 어떤 특별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교회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었고, 또한 신분적으로도 자유자와 종된 자들이 혼재해 있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아직도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었고, 이방인들은 헬라문화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세속으로부터의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말씀을 보면 1장에서 3장까지는 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적인 말씀을 한 다음에 4장에서 6장까지는 주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성도의 거룩한 삶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런 차원에서 주신 말씀이다. 우리가 이제 주님을 믿고 거듭난 존재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과연 이 악하고 혼탁한 세상속에서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세상 속에 살아야만 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세상 속에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세월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는 오늘 말씀의 첫 부분에서 우리가 세상 속에 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지혜롭게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15,16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그런즉」이라는 말은 이유접속사로써 바로 앞부분의 말씀들이 이제부터 논하고자하는 말씀의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즉 앞부분에서는 세상은 어두움이고 그리스도인은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에 참예한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런즉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는 것이다.

즉 이제는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살펴서 빛의 자녀처럼 살아가라는 말인 것이다. 세상을 따라 아무렇게나 살아가지 말고 참된 지혜를 따라 삶으로 말미암아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세상의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 빠져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1차원적인 욕구 속에 살아간다. 1차적인 욕구란 먹는 욕구이다. 좀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2차적인 욕구를 위하여 살기도 한다. 그것은 쉽게 말하자면 정신적,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사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좀더 고상한 사람들은 3차적인 욕구까지도 추구한다. 이것은 남을 위한 삶이다. 선을 베풀며, 남을 도우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충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거기에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이것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추구해야할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한가지 더 추구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과 관계이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할 부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죽음 이후에 우리가 가야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사람이 추구해야할 첫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만이 진실로 세월을 아끼는 삶인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의 생을 온전하게 준비하는 행위이다. 그것만이 인간으로써의 진정한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삶이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 얽매여 있는 삶이나 좀더 고상하게 문화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나 더 나아가서는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까지도 거기에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면 그것은 부족한 삶이다. 그것은 온전치 못한 삶이다. 반쪽 인생이다. 설령 돈과 명예와 부귀와 세상적인 영광을 누린다해도 그것은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삶을 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자. 물론 1차적인 욕구나 2차적인 욕구나 3차적인 욕구도 추구해야 되겠지만 거기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며, 살아가자. 그리하여 여기서 누려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가운데 미래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자가되자.

2.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주님의 뜻을 살피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지금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 주님은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시는가? 오늘의 시간들을 주님은 어떻게 보내시기를 원하시는가? 나에게 재능이 있다면, 나에게 물질이 있다면, 나에게 건강이 있다면, 나에게 지식이 있다면, 나에게 권력이 있다면 주님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시는가, 이것을 살펴서 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지 트루엣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만이 온전한 것이다. 변함없는 진리이다. 영원한 것이다. 그 곳에만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영생이 있다. 그러므로 그 뜻대로 살 때만이 진정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나와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온 우주까지도 진정한 기쁨과 영광을 받으며 만족을 누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한다.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깨어 기도해야 한다. 물론 주님 뜻대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외롭고 고독한 길일 때도 있다. 고난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살길이기에 그것만이 생명의 길이기에 그것만이 궁극적인 승리의 길, 축복의 길이기에 우리는 가야만 하는 것이다.

3.성령 충만하여 사는 것이다.

다음에 우리가 참된 지혜의 삶을 사는 비결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오늘 18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당시 에베소는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 소아시아의 중심적인 도시 중의 하나로 상업이 발달하고 농업 역시도 번창해 있었다. 아데미 여신의 커다란 신전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고, 그에 따라 향락의 문화도 번창해 있었다. 그래서 사도는 특별히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술이란 우리 인간의 정신을 빼앗아가는 대표적인 존재이다. 술은 인간의 윤리, 도덕성을 약화시킨다. 그래서 많은 죄악들이 술과 연관되어 있다. 또 평상시에는 얌전하던 사람도 술만 들어가면 떠들어대기도 하고, 난폭한 짓을 하기도 하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기도 한다.

또한 술은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육체적인 제어 능력도 상실하게 한다. 그래서 술은 인간의 혼미케하는 주범이다. 뿐만아니라 건강을 해치고 시간을 빼앗는다. 그래서 사도는 정상적인 인간의 활동을 방해하는 대표적인 존재인 술을 이야기하며 이러한 엉뚱한 것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한다.

물론 여기서 의도하는 것은 술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술은 사람을 어둠속에 빠지게 하는 주범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꼭 술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고 혼미케하며 육체와 시간과 건강에 해로운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 의미에서 배격하라는 의미이다. 여하튼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영혼을 엉뚱한 것에 빼앗기게하는 모든 것들을 다 배격하고 우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영생복락의 길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생명의 길을 걷게 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으라는 말씀이다.

세상에는 우리를 취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중에는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끄는 것도 많다. 술, 노름, 담배, 마약, 향락 등은 우리를 결국은 파멸의 길로 이끈다. 심지어는 그 자체로서는 건전한 것들이 거기에 취해버리면 우리의 삶을 파괴하기도 많다. 건전한 취미생활, 돈, 명예, 사랑, 지식, 문화, 과학 등등은 그 자체로서는 건전하고 유익한 것들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으니 그러한 것들에 취하게 되면 우리의 정신을 빼앗겨 버리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결국은 생명의 길을 가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요청해야 한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모든 악한 것들은 배격할 수 있고, 건전한 것들은 올바르게 사용하며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은 단 한번만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단일회적인 것이지만 성령의 충만은 지속적인 것이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면 다시는 성령의 세례를 더 이상 받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그렇지 않다. 지금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가도 내일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언제나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하신다.

그러나 아무리 성령께서 내주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의지가 성령을 외면하고 성령과의 관계에서 멀리가고자 할 때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허용하신다. 물론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성령께서 역사하시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보통의 경우에는 우리의 이성과 의지와 함께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를 힘쓸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고넬료의 가정은 베드로 사도를 초청하여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의 말씀을 따라 성령 충만함을 받기위하여 말씀을 묵상하며, 깨어 기도하자.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자.

이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이다. 이것이 진실로 승리하는 삶이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삶이요,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의 삶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우리 모두에게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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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진정한 종교

 

 


제목 : 참된 종교

말씀 : 요3:10-17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왜일까? 그것은 두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는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 심각한 죄와 무지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누구에게나 절대자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알든 모르든 어떤 절대자에 대한 갈급함으로 절대자를 찾게되고 그것이 종교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영적인 부분이 없다면 영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인간에게 도덕적인 관념이 전혀 없다면 도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영적 관념이 있기에 신을 생각하고, 도덕적 관념이 있기에 도덕적 삶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여러 가지 종교를 가지고 신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와 같이 영적인 존재이므로 무언가 절대자를 찾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참으로 올바른 것을 찾지 못하고 그저 나름대로 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찾아 섬기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하여 어둠과 무지 가운데 빠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쉽게 말하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말이다. 영적인 요소가 있어서 무언가 신을 찾기는 찾는데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엉뚱한 것을 찾아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죄와 어둠 속에서 나름대로 이것을 저것을 찾다보니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난립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신을 올바르게 만날 수 있는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 우리에게 참 생명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

1.참된 종교의 조건

1)인간을 찾아와 자신을 계시해주고 구원해주어야 한다.

앞서 말씀드린바와같이 인간은 죄와 무지로 인하여 스스로는 참신을 찾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신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신이 인간을 찾아와 신과 세상과 인간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해 줄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신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신을 만난다는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는 신은 무궁무진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히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이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능력과 지식과 지혜가 도저히 따라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죄 때문이다. 죄로 인하여 타락하고 어두워지고 캄캄해져서 도저히 인간 자신으로서는 참신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정말 무지하고 연약하고 한계가 있고 죄가 있는 인간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도를 닦는다고 알 수 있겠는가? 천만의 말이다. 백날 연구해도 모른다. 인간이 아무리 궁리해봐야 도로 그 자리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크기나 능력이나 지혜나 의나 선이 우리보다 더 작은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능력보다 훨씬 큰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갓난아기가 어떻게 인간이 달나라에 간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본래부터 인간은 지혜나 능력이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작은 존재였는데 거기다가 죄로 말미암아 그 영혼까지 어두워졌으니 어떻게 하나님을 스스로 알겠는가? 그러므로 신을 알려면 신이 우리를 찾아와서 신 자신에 대하여 알려 주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물론 구원도 동일하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기 위하여 백날 연구하고 도를 닦아도 헛수고다.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의 길을 알 수 없다. 설령 안다고 해도 나 혼자 그 길로 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럴만한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란 신이 직접 인간을 찾아와서 자신에 대하여 알려주시고, 또한 구원의 손길을 뻗어 인간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종교이다.

2)우주만물의 기원을 분명히 제시해 주어야 한다.

참 종교라면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분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작을 알지 못하면 돌아갈 곳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처음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원위치로 돌아가겠는가?

종교란 결국 근원에 관한 문제이고 시작과 마지막에 관한 문제이다. 물론 현재의 문제도 포함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한 세상이다.

그런데 만약 모든 우주만물의 근원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면 그 종교가 어떻게 인간을 궁극적인 행복의 길로 이끌어갈 수가 있겠는가? 인간을 궁극적인 행복의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참 생명의 종교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참된 종교는 인간을 비롯한 우주만물의 시작과 끝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3)인격적 만남과 올바른 윤리관이 있어야 한다.

신은 선을 전제로 한다. 물론 악신도 신은 신이겠지만 진짜 신은 절대 선과 절대 의와 절대 거룩과 절대 진실과 전능과 전지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신은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는 능력도 자격도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이라면 선이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하고 거룩해야 하며 따라서 진정한 종교라면 인류에게 진정한 선과 의와 거룩과 진실에 대해서 올바르게 말해주어야 한다.

또한 신은 인격적이어야 한다. 인격적이라 함은 영성과 지성과 감성 등을 말한다. 인격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 교제하는데 필요한 요소이다. 인격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교제가 가능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통할 수 있는 것은 이성과 지성과 감성이라는 인격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신과 인간이 교제하기 위해서는 신도 인격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영성과 지성과 감성을 가지고 인간과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감동시킬 수 있고 하면서 교제할 때에 비로소 인간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라면 인격적인 신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4)인간의 실상을 정확하게 진단해 주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시작과 더불어 현재의 상태에 대한 명확한 진단과 그 진단을 바탕으로 한 처방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병에 걸렸을때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일단은 그 시작점 즉 원인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고 또 예방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는 현재의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를 알아야한다. 그래야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단순히 약물로 할 것인지, 수술을 받아야 할 것인지, 입원을 해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제는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원인과 상태를 알아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도 동일하다. 인간 자체나 인간 속에 들어있는 죄의 기원이 어디서 온 것인지, 현재의 상태는 어떤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이것을 알아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종교는 인간의 실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그 해결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5)인간 생명에 관한 분명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세상에 있어서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중에서도 인간의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하셨다.

따라서 진짜 종교는 무엇이냐하면 결국 인간에게 진짜 생명을 줄 수 있는 종교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죄의 문제, 육체의 한계의 문제 등을 완벽하게 해결하여 진짜 생명을 얻게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진짜 종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윤리적인 종교라해도 이 문제를 해결하면 참종교라할수 없다. 아무리 인격적인 교제가 있다해도 마찬가지다. 천하보다도 귀한 인간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완전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그것은 결코 완전한 종교가 아닌 것이다.

6)내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다. 영은 죽지 않는다. 따라서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참된 종교는 이 영원한 세계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아무리 윤리적이고 조직적이고 선하다고 해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을 해주지 못한다면 그런 종교는 가짜이거나 불완전한 종교이다.

2.참된 종교의 모든 조건을 갖춘 종교는 오직 기독교뿐이다.

그렇다. 이 모든 조건을 100%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종교는 오직 기독교 뿐이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참종교의 조건중의 한 부분을 말씀하고 있다. 그중에 가장 핵심인 인간의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하여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오늘 13절에서는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심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또한 16절에서는 예수님이 내려오신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는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생명을 구원할 방법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말씀하신다.

그밖에 오늘 기독교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며, 하나님이 찾아오신 종교이다. 인간의 연구나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을 계시해주셔서 알게 하셨으며, 우리를 직접 찾아오셔서 구원해주신 종교다.

우주만물의 기원에 대해서 분명히 제시하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인격적 만남과 윤리관이 있다. 인간의 실상을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고, 그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결법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감히 타종교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는 방법으로 인간의 생명에 대한 분명한 해결점을 가지고 있다.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영광의 나라에 대하여 확실히 보장해주고 있다.

다른 종교들은 비록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건전하다고 해도 이러한 조건들 중 일부는 만족시킬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는 만족시키지 못한다. 또 미신이나 조상이나 자연을 숭배하거나 온갖 잡신들을 섬기는 행위는 이러한 참 종교의 조건들을 거의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종교들은 결코 참 생명의 종교라고 할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기억하며 오직 참된 생명의 종교인 우리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그 은총가운데 살게 된 것에 대하여 정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라. 누가 어떤 말로 미혹한다해도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흔들리지 말라.

인간 나름대로 생각한 것들은 다 부족하고 완전치 못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말씀위에 서라. 아무리 건전하고 윤리적인 고상한 종교라해도 인간이 스스로 고안해 낸 종교, 인간이 신을 찾아 올라가는 종교,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애쓰는 종교, 이런 종교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거기에 순복하고 그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때에 진정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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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제목 :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말씀 : 벧전4:1~6

제법 오래 전에 인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인도 북부의 ‘무자파르나가르’라는 작은 동네에 엄청난 땅을 소유한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미간척지도 많아서 이웃사람들에게 자신의 땅을 개간해 주면 1/3은 개간한 사람의 땅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땅을 개간하다가 엄청난 고대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 뿐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물을 발견하여 몰래 빼돌리기도 하고 주인도 부자가 되면 뭔가 자기 몫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인도의 문화재 관리국에서 당국자들이 나와서 100년 이상 된 유물은 개인소장이 불가함으로 집으로 가져간 모든 유물을 회수할 것이고 지금부터 유물을 유출하는 자는 엄단할 것이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과 주민들이 반발하며 유물을 내주지 못하겠다고 버텼고 결국 경찰이 출동하여 경찰과 주민 사이에 큰 충돌이 벌어졌는데 주민들이 과격하게 저항함으로 급기야 경찰이 실탄까지 발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주민들은 더욱 난폭한 폭도로 변하여 삽과 낫과 곡괭이와 총을 들고 저항하게 되어 결국 많은 경찰이 투입되어 수십 명의 주민이 죽거나 다치고 나서야 폭동이 진압되고 유물은 문화재당국이 몽땅 회수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아무 소득도 없이 수십 명이 죽거나 다치고 많은 사람들이 구금당하는 것으로 사태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황금유물이 발견되기 전에는 비록 부자는 아니었지만 평화롭게 지내던 마을이 황금유물이 발견된 후에 사람들이 그만 돈에 눈이 어두워 정부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감옥에 갇히고 남은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마을 떠나 유령마을처럼 번해 버렸던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만 황금에 눈이 멀어 마을은 황폐화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육체적 정신적 너무나 큰 상처와 아픔만을 남겼으니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론 돈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진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건 물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진실하게 선하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영원한 생명은 물론 이 땅에서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베드로전서는 바로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시 고난을 받는 한이 있어도 오직 유일한 우리의 소망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요,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여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따라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벧전4:1,2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너희도 마음으로 갑옷을 입고 즉 마음을 단단하게 무장하고 고난을 받을망정 죄를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도 더 이상 죄가운데 살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마음을 굳게 먹고 세월이 어떠하든 주님을 따라 진리와 선과 의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다시 죄가운데 살 수 있습니까? 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과가 사해진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이 죽으실 때에 우리도 같이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하여 죽으셔서 내 죄가 사해졌으니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내 죄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종노릇하던 옛자아가 죽고 예수님께 종노릇하는 새 자아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죄의 종노릇을 하겠습니까? 죄에게 종노릇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죄를 향해 호통을 치고 명령하고 물리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말 믿음과 선과 진리와 사랑과 의 가운데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게 새생명을 가진 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삶을 살려면 어쩔 수 없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죄와 적당히 타협하며 어울리며 친구삼아 살아가면 고난이 없습니다. 그저 세상 물결 흐르는 대로 남들이 사는 대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속한 사람이요, 죄에서 해방된 사람이므로 죄와 타협하고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도리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새생명을 가진 자의 당연한 삶이고 그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는 몰라서 그랬다 치고 이제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니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니까 더 이상 과거처럼 죄에 질질 끌려 다니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주님의 따라 선과 진리와 의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야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와 평강과 소망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죄와 무지와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가는 길이 혹시 어렵고 힘들어도 오직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서 모든 죄된 것들을 물리치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더욱 생명의 능력과 기쁨과 자유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죄가운데 사는 것은 과거로 충분합니다.

벧전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참 이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까? 무지 속에서 어둠 속에서 사탄에게 얽매어 사탄의 하수인 노릇하던 것은 지난 것으로 이미 넘치지 않느냐? 지나간 세월을 그렇게 살아간 것만 해도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 정말 무지해서 어리석어서 캄캄한 가운데서 어리석게도 바보같이도 미련하게도 마귀에게 속아서 그게 인생인줄 알고 그게 행복인줄 알고 그게 인생이 가야할 길 인줄 알고 그것을 바라보며 거기에 빠져서 죽자 사자 그런 것만을 따라서 세월을 허비하고, 돈을 허비하고, 육신을 허비하고, 정열을 허비하고, 능력을 허비하고, 아니 그냥 허비한 것이 아니라 악에게 바치고 마귀에게 바치고 살았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이냐, 얼마나 분한 일이냐, 얼마나 치욕적인 일이냐, 그러니 이렇게 지나간 죄악으로도 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아까운데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 않느냐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술취함과 방탕함과 호색과 향락과 우상을 섬기던 모습을 생각하면 얼마나 한스럽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의 필름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들 아닙니까?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서 추한 모습 들 싹 다 지워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습니까? 정말 안 그렇습니까? 마귀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세월입니다. 속고 살아온 세월입니다. 헛된 것을 위해서 살았던 세월입니다. 그냥 헛될 뿐 아니라 악하게 육신의 정욕을 따라 죄를 섬기며 세상의 온갖 우상들을 섬기던 세월이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지나간 세월로 족하지 않습니까? 지나간 세월만으로도 원통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계속해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죄와 무지가운데 살던 때는 지나간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아깝고 억울하고 분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이제는 정말 지나간 때에 죄를 따라 살던 삶의 모습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진리를 따라 생명의 길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주님과 동행할 때의 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세상 사람들의 조롱을 이겨야 합니다.

벧전4:4~6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지 않고 진리를 따라 주님을 따라 방탕과 음란과 향락 등의 온갖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갈 때에 세상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하고 심지어 힘있는 자들이 핍박을 하기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자들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지도 말고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우리 갈 길을 묵묵히 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는데 항상 조롱과 핍박과 그 밖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직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득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죄와 무지 속에서 그저 육신의 욕구만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우리를 시험에 빠트리고 구덩이 빠트리고 넘어지고 곤경에 처하게 하여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자기들이 가는 길과 다르다고 우리를 미워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천국만을 이야기하니까 자기들의 것을 헛것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더더욱 우리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이게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과 다르니까요. 우리는 진리이고 그들은 비진리니까요. 그래서 딤후3:12절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3:14절에서도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있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물론 당연히 그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자만이 영생복락을 누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인생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방탕하게 살아가며 심지어 의인을 핍박한 사람들은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6절의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이미 죽어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복음을 전했느냐?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나 영으로 살게 하기 위하여, 즉 육체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으나 영으로 하나님을 따라 삶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려면 물론 당연히 고난도 수반될 수 밖에 없으나 그러나 그게 생명의 길이므로 우리는 그 길을 달려가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비웃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핍박해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같이 대항하여 싸우지도 말고 그저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실직고 할 수 밖에 없고, 그 때에 믿음 안에서 산자는 영생복락이요, 불신 가운데 자기 마음대로 산 자는 영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에러도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참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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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예배설교] 악의 세력

 

 

 

말씀 : 잠9:13-18

제목 : 악의 유혹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서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오후 예배 시간에 예배당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것이냐, 아니면 좀 바쁜 일이 있는데 그것을 처리해야 할 것이냐, 지금은 매우 나른하고 곤한 시간인데 내 육신의 피곤함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앉아 졸 것이냐, 아니면 비록 나른한 시간이지만 주의 성령의 능력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것이냐 여하튼 우리는 언제나 선택 앞에서 살아가게 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정말 선택의 여지도 없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처럼 보이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실상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가 않다. 선택의 여지는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똑같이 나른하고 곤한 시간에 예배를 드려도 어떤 사람은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고, 어떤 사람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고개를 땅으로 떨군다. 똑 같은 설교를 해도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아 아멘으로 받아들이지만 어떤 무덤덤하게 앉아 있다.

사실 모든 선택의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 내가 선과 진리와 은혜의 선택을 했다면 그 결과는 은혜와 생명으로 다가올 것이요, 반대의 선택을 했다면 말할것도 없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어떤 상황이나 어떤 여건가운데서도 다른 어떤 것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내가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최선의 선택을 통하여 내 인생을 최선의 것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물론 정말 올바른 선택을 하기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죄된 육신의 본성과 무지로 말미암아 판단력이 흐려져 있다. 우리의 지혜나 지식이나 경험도 온전치 못하다. 더구나 지혜의 소리와 악의 소리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그리고 세상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참된 지혜의 소리를 버리고 악의 소리에 끌려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많은 착각과 혼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는 잠9장의 말씀도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교훈의 말씀을 주신다. 지혜의 소리와 악의 소리가 오늘도 바로 우리 곁에서 들려오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올바른 선택을 하여 어떻게 응답하며 살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지혜자의 초청을 살펴보았다. 지혜가 최상의 잔치상을 준비해 놓고 우리를 부른다는 것이다. 지혜안에는 최상의 잔치가 준비되어 있으니 모든 어리석은 초청을 뿌리치고 지혜의 초청에 응답하여 생명의 은총을 누리라는 말이다.

이렇게 지혜의 초청에 대하여 말씀한 다음에 오늘 말씀에서는 악의 초청을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13-1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미련한 계집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을 불러 이르되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1.우매자의 소리에 현혹되는 이유

먼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내용은 미련한 자의 특징이다. 미련한 계집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물론 직접적으로는 방탕한 여인을 말하지만 꼭 방탕한 여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유혹하여 죽음의 나락으로 몰고 가는 모든 악의 세력을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모습은 어떤가?

먼저 그들은 떠들며 어리석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떠든다는 것은 아무 생각없이 되는대로 천박하게 지껄이는 모습을 말한다. 그저 먹고 마시며 욕망의 노예가 되어 방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멋대로 생각없이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무지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심령속에 자리잡고 있는 심각한 무지 때문에 그 결과가 어떤지도 알지 못하는채 방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도무지 인생이 무엇인지,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명의 은총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인생의 결국이 무엇인지, 천국과 지옥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기에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죄로 인한 무지가 인생을 완전히 어둠의 나락 속으로 빠뜨려 아무런 죄의식이나 두려움이 없이 제멋대로 떠들어대며 먹고 마시며 방탕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먼저 무지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기억하자. 무지가 큰 죄다. 무지가 사람 죽인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진리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또 호6:3절에는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러므로 더욱 힘써 말씀을 상고함으로 진리의 길로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2.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악의 세력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미련한 인생들이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가 추구하는 쾌락적인 삶이 마치 자유나 즐거움이나 기쁨으로 생각하며 다른 사람까지도 그러한 방탕한 삶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할 수만 있으면 다른 모든 사람을 유혹하여 함께 향락을 누리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함정에 빠뜨릴 자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미련한 계집으로 대변되는 악의 세력이 집문과 성읍의 높은 곳에 앉아서 지나가는 행객들을 불러 유혹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집문 앞과 성읍의 높은 곳에서 부른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장소를 불문하고 혹은 대상을 불문하고 유혹의 손길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집 문은 자기가 기거하는 집을 말하고, 성읍 높은 곳은 모든 사람들이 다니는 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문에서 그리고 성읍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불러 유혹을 한다는 것은 자기 집 문앞으로 스스로 향락을 위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성읍의 대로를 다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유혹의 손짓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유혹의 소리는 장소불문, 인간불문이라는 것이다. 유혹의 손길은 모든 장소에 모든 사람의 곁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도시나 농촌이나, 교회 밖에나 교회안에나, 가정이나 학교나 여하튼 어느 곳에도 죄의 유혹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한다.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3.악의 달콤한 유혹

특별히 이 음녀의 유혹의 소리를 들어보라.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17절)“ 도적질한 물, 몰래먹는 떡, 이것은 물론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남의 이목을 피하여 행하는 악한 행동을 말한다. 악의 세력이 이런 표현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결국 악의 세력마져도 그런 행위가 옳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더 달고 맛이 있으니 같이 먹자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옳지 않은게 뭐 대수냐 달고 맛있기만 하면 되지, 진리가 다 뭐냐 선은 또 뭐냐 그저 내 육신 편하고 즐겁고 만족하면 되는 거지 뭐 그런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주 교묘한 사탄의 전술이다. 그야말로 양심에 화인 맞은 소리인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죄된 인간의 본성과 죄된 인간의 욕구를 부추기는 전형적인 사탄의 전략인 것이다. 달콤한 유혹으로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다. 죄의 욕망을 자꾸 부추겨서 결국은 죄의 나락 속으로 빠뜨리려는 것이다.

4.악의 초대에 응한 결과

정말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떳이 맛이 있을까? 물론 미련한 자의 소리다. 사탄의 소리다. 유혹의 소리다. 그 결과는 오직 죽음 뿐이다. 오늘 18절의 말씀을 보라.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가 그의 곳에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음부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무슨 말인가? 죽은 자가 그곳에 있다, 그의 객들이 그곳에 음부에 있다. 모두 같은 말이다. 한마디로 그곳에는 곧 그들이 좋다고, 즐거움이 있다고, 쾌락이 있다고 하는 그곳에는 오직 죽음의 그림자만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시체만이 즐비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객들 즉 그들과 함께 동료가 되어 함께 쾌락 속에 잠겨 있던 모든 사람들의 갈 곳은 음부 깊은 곳 곧 지옥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어리석은 자의 길은 오직 죽음뿐이다. 죄의 유혹은 달콤하게 다가오지만 그것은 오직 멸망뿐이다. 그런데 대단히 안타깝게도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육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죄의 소리에 너무 약하다. 그 길이 쉽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 길이 당장은 더 달콤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자의적으로 때로는 타의적으로 그러한 길로 간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죄는 지금도 우리에게 쾌락과 즐거움과 기쁨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사실 거기는 죽음뿐이라는 것이다. 거기는 후회와 절망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선택은 자유이나 결과는 결코 자유가 아님을 기억하라. 오직 진리의 소리, 생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따라 살아갈 때에 더욱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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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후설교 - 생명에 관한  과학

 

 


말씀 : 욥38:1-11

제목 : 신앙과 과학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크게 두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곧 무신론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모든 종교는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이 사람들은 다신론자들이거나 종교다원주의자들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신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에 또 어떤 이는 자신이 나름대로 섬기는 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다른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영이 완전히 죽어 있거나 조금 살아있다해도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이 죽어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오직 육체적, 정신적으로만 사고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영역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어서 올바르게 사고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인간이 만든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의 두가지 큰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그들의 영이 죽어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함으로 오는 오류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라야 교제가 가능한데 영이 죽어있으므로 더 이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과 교통이 안되니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고 그 은혜도 누리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알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오류는 과학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모습니다. 그러니까 영이 죽어 있는 인생은 인간의 모든 삶을 그저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이 완전히 죽어있으니까 그 영역은 부정하고 인간사의 모든 일들이 정신적, 물질적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그저 정신적인 측면으로 이해하여 그건 나약한 사람들이 마음에 위안을 받기 위하여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저 물질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하나님을 어디 있느냐, 보았느냐, 천국에 갔다 왔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과학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눈으로 보았느냐, 귀로 들어보았느냐, 천국에 다녀왔느냐고 묻는 것은 결국 그게 과학적으로 맞는 말이냐,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하는 질문이고 이러한 질문은 바로 과학지상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여러분, 과학이 뭔가? 과학(科學, science)에 대하여 사전에서는 이렇게 나와 있다. ‘자연세계에서 보편적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 지식.’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과학이란 자연에 관한 것 즉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경험 가능한 세계에 대한 어떤 법칙과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과학은 인간과 우주의 모든 영역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아닌 것이다. 과학은 우주와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도 아니고 그것을 다 밝혀낼 수도 없고 그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도 없다. 그러니 과학의 범위 밖에 있는 하나님을 과학의 범주 안에서 이해하고 증명하고 알아내려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마치 과학이 만능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과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으면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규명될 수 있는 사실만 인정할 수 있고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않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1.과학의 지식적 한계를 알지 못하는 오류

과학은 지식적으로도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말하면 과학으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죽음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류의 미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진정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선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은 무엇인가? 도덕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 과학은 이런 인간의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나 해결점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또한 그런 근원적인 문제 말고 일반적인 지식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지식이 과학의 법칙에 의하여 실험될 수 있고 증명되어 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국어 공부를 한다고 하자. 국어를 잘하려면 열심히 글을 많이 읽고 쓰며, 문법을 공부하고, 단어를 암기하고 하면서 하는 것이지 거기에 무슨 과학적 법칙을 적용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음악이나 미술 등의 예능 분야도 과학적 법칙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서로 만나서 교제하거나 사랑하는 일도 거기에 무슨 과학적 법칙을 적용해서 모든 것을 밝혀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분야들에도 부분적으로 과학을 도구로 사용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공부도 할 수 있고 좀더 긍정적인 발전을 모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원리가 과학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밖에도 설령 과학의 범주 안에 있는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과학으로 다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이 광활한 우주와 생명은 분명히 과학의 연구대상이지만 그러나 절대로 그 신비를 과학으로 다 밝혀낼 수 없다. 즉 과학이 결코 인간과 우주와 이 세계에 대한 모든 것을 밝혀 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과학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할 수 있는 학문도 아닐뿐더러 설령 과학이 연구할 수 있는 분야라고 할지라도 그것도 다 밝혀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2.과학의 능력적 한계를 알지 못하는 오류

그뿐이 아니다. 과학은 이런 지식적인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능력적으로 한계가 많다. 즉 지식적으로 다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령 과학이 알고 있는 문제라도 그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생명에 관한 문제를 보자. 생명에 관한 분명 과학의 연구대상이지만 그러나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도 없으며, 죽은 생명체에게 다시 생명을 부여할 수도 없다. 인간의 노화 현상을 조금 지연 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불로장생의 길을 열어줄 수도 없다.

물론 이런 근원적인 문제 말고도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너무나 많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를 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세상의 다른 학문의 문제도 과학으로 다 해결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나 혹은 과학 이외의 다른 분야에 대해서 모두 지식을 제공할 수도 없고, 그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도 없는 과학으로 알 수 없다고 하여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는 말이다.

3.과학을 말하면서 비과학적인 진화론을 믿고 있는 오류.

조금 공부를 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소위 진화론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우주만물의 기원에 대하여 성경의 말씀과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번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오늘은 간단히 언급한다. 진화론은 한마디로 우주 만물이 저절로 생겼다는 것이다. 땅도 바다도 하늘도 별도 나무도 동물도 사람도 저절로 생겼다는 것이다. 생물들은 처음에 무언가 단세포 생명체가 생겨나더니 자꾸자꾸 변화해서 마침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요, 가설에 불과한 이론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과학도 아니다. 증명된 것도 아니고 실험을 통해서 밝혀낸 것도 아니다. 무슨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과학의 법칙으로도 말도 안된다. 물리학적 법칙에도 위배되고, 생물학적 법칙에도 위배된다.

그들이 증거라고 내 놓은 몇몇의 증거들도 사실은 증거도 아니다. 전혀 연결고리도 없으며, 증거라고 말하는 화석이라는 것도 어떤 것은 조작된 것이고, 어떤 것은 처음부터 그냥 그런 동물일 뿐이다. 중간단계의 생명체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진화론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주장되고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비과학적인 허구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4.과학의 방법을 무시하고 신을 거부하는 오류.

과학지상주의자들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엄청난 모순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과학적 방법론은 관찰 ․ 가설 ․ 실험, 입증 ․ 정설, 응용 등인데 신이 없다는 주장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단순히 자신의 신념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이 없다고 과학적으로 말하려면 관찰과 가설과 실험의 과정을 거쳐서 신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데 실험도 입증도 하지 못하고 그저 단순히 자기의 신념으로 신이 없다고 주장하니까 과학적으로도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원래 과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감각으로 경험 가능한 세계만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과학은 인간의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고 정신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밝혀 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영역은 그 이상의 것이기에 과학적으로는 본래부터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을 과학적인 잣대에 의하여 판단하려고 하고, 그래서 당연히 과학적인 법칙으로 관찰하고 실험하고 증명할 수도 없는 영역임에도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이런 모순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여러분, 과학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과학적으로는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이나 과학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겸손한 태도이다. 그런데 마치 과학적으로 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무지와 교만과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일일 뿐인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라.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38:1-3)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을 퍼부어 대신다.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있었느냐, 네가 바다 속을 속속들이 다 알 수 있느냐, 광명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느냐, 누가 비를 만들었고, 누가 하늘의 일월성신을 만들었느냐, 너의 마음 속에 지혜는 누가 주었느냐, 네가 그 근원을 아느냐, 네가 거기에 있었느냐 하시면서 네가 알거든 한번 대답해보라고.....

그러니까 앞부분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아는 양, 마치 자신이 판단자가 되는 양 여기며 말했던 욥에게 그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며 그 무지와 어둠 속에서 함부로 말하지 말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과학을 맹신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마치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양 말하지만 실상 그들이 아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작은 지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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