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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참된 교회(마16:13-20)

 

 

 

 

 

제목 : 진정한 교회

말씀 : 마16:13-20

우리 한국교회의 이름은 중앙교회, 제일교회 등의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혹은 성경적인 좋은 뜻을 가진 소망, 충신, 사랑, 은혜 교회 등으로 사용합니다. 이처럼 교회 이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름이 좋다고 다 좋은 교회는 아닙니다.

진정으로 가장 모범적이며 살아서 역사하는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가장 좋은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가장 성경적인 교회가 바로 좋은 교회입니다. 바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가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좋은 교회의 모델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모범적인 초대 교회의 모델을 통하여 교회가 어떻게 해야 교회다워져 가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교회는 교회의 초석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이 모여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라면 두 세 사람이 모여도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의 강조점은 예수님께서 성도의 삶의 중심에 계시고 교회의 중심에 계신다면 숫자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들도 주님과 함께 하시는 성도요, 우리 교회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뿌리와 속성이 되는 것은 교회에 모인 무리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모였는가에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더 깊은 의미로 새겨 볼 때에는 2-300명 아니 2-3,000명의 숫자가 모여도 예수님이 그들 중에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참된 교회의 의미가 상실된다는 강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서적분야에서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재미있는 책 한 권이 있습니다. 그 책이름은 교회에 가기 싫은 일흔 일곱 가지 이유라는 책입니다. 교회 안 다니던 사람이던 다니던 사람이던 교회 가기 싫은 이유, 일흔 일곱 가지 있답니다.

교회에 나오기 싫은 이유 중 하나는 교회와 세상이 별다를 뜻이 없더라.하는 얘기입니다. 교인과 세상 사람들이 매한가지더라. 왜냐하면 교회에서도 보니까 학력, 신분 따라 대우하고, 경쟁심 많고, 공명심 많고, 자기 이름 내려고 하고, 시기, 질투가 많고,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더라.

교회는 똑같아야 되는데 이렇지 못하고 이걸 세상의 신분대로 또 돈 있는 대로 특별하게 대해주고 이런 다고 하면 이 교회가 교회 될 수 없다. 이런 것들이 거슬리더라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좋으나 교회 가기 싫다.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왜 교회를 교회답게 하지 못하는 할까요? 어떻게 하면 교회를 교회답게 할 수 있을까요?

1. 신앙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마 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에 대하여 제자들은 말하기를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답하게 되었고, 그 때에 제자중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본문 말씀에서 교회의 의미와 특징을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 위에 서 있어야만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둘째, 이 고백은 인간의 어떤 깨달음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신앙 생활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고백하는 교회에 사도적인 하나님의 축복권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 축복권은 개개인이 갖는 믿음과 기도를 통해서 받는 축복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자신의 몸된 교회에 부여된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교회와, 조직위에 축복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존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오늘 여러분은 교회에 왜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귀한 교훈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특별히 열 두 제자를 쭉 가르쳐 나가다가 아주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주시는 아주 소중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하는 도시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가이사랴 빌립보는 당시에 로마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지구를 지배하는 군사 본부가 있는 곳입니다. 번영지입니다. 거기에 로마 사람들의 군사령부가 있습니다. 이렇게 로마 군인들이 여기에 와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로마 군사기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제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합니다. 제자들이 이 길로 지나가며 이 로마 사람들의 그 군사기지를 보고 그 군인들이 훈련하는 모습이나 말을 타고 지나가는 모습 이런 걸 볼 때 지금 로마에 식민지 생활을 하는 자신들의 모습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나라가 독립하나? 언제나 우리는 이렇게 큰 소리를 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모습을 부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아, 참 좋다. 어떻게 우리고 저럴 수 없을까? 그리고 언제나 우리는 자유함을 얻고 식민지에서 자유 국가로 회복할 수 있을까? 이렇게 부러워하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이래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묻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열 세 사람뿐입니다. 열 두 제자를 앞에 놓고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을 할 때 고백하는 순간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 여기서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지금은 초라하게 보입니다. 적은 무리요 하찮은 사람들같이 보이지만 거기서 역사가 바뀝니다. 그래서 오늘의 역사가 이루어졌고 새로운 기원이 시작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믿음 생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한 교회를 세우는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나, 친교, 혹은 사람을 사귀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 목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귀며, 체험하고, 그 분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영생 복락을 누리며, 생명을 소유하여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항상 이것을 확인하고 신앙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고전 6: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처럼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서로 예수님을 배우고 알며, 예수님을 소개하고, 체험하며 또한 그 안에서 교제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도 이 같은 체험이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소유하였습니다.

교회가 교회되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자 부흥의 비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부흥의 비결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범적인 교회 모습으로 즉 초대교회와 같이 생동감 넘치며 살아 있는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는 사도들의 복음전파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에게는 복음 전파하는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고 묻게 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행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이처럼 모범적이며 살아 있는 교회는 신령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며 이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은혜의 신령한 양식을 공급받아서 영적인 풍성한 삶과 육적인 삶에 큰 활력을 얻어서 승리의 삶을 누려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부흥의 원리이며 결과인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으나 그 중에 하나는 내면에 영적인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흘러내리는 교회였고, 신령한 영적 힘과 강인한 생명력이 넘쳐 흐르는 살아 있는 교회였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을 의미하고 생명은 부단히 성장합니다. 이 생명은 모든 성도들에게서 넘쳐 흘러야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한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놀라운 역사가 우리 모든 성도들과 우리 교회에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당시의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이 가중되어서 성도들이 피신해야 했고 뿔뿔이 흩어져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신앙, 살아있는 신앙은 수리아 안디옥을 중심하여 아시아 지방과 더 나아가서 마게도냐와 로마 그리고 마침내 유럽과 세계로 향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진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생명력은 자라나서 마침내 세계를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국의 열쇠를 준다하는 말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천국을 건설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천국을 건설하라. 천국을 만들어라.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천국은 주께서 오심으로 이루어지고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천국은 들어가는 것이지 천국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 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천국은 전파되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을 건설한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이루신 천국을 전파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교회의 참된 모습이 어떠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성경적이며 초대교회 신앙으로 돌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성경적인 교회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해야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의 뿌리에 깊게 박혀서 천국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월리암 부츠는 어느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미래에 가장 큰 위협을 이야기할 때 교회가 이 세상에서 중생 없는 용서를 말하는 철학적 기독교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소개하는 것이며, 성령 없는 종교, 하나님 없는 정치, 지옥 없는 천국을 소개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은 이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성령의 역사가 있으며, 우리 중에 날마다 구원의 역사가 있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교회가 살아 역사하는 초대 교회의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말씀이 흥왕하며 성령의 신비로운 체험이 넘쳐 흘러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말씀의 역사가 있는 이 곳에 교회의 진정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초대 교회처럼 살아 움직이며 역사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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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등불 (A lamp of life ) (잠6:20-23)
 

 


제 목 : 인생의 등불

말 씀 : 잠언 6:20-23

잠언의 말씀속에서 정말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말씀안에서의 삶이다. 물론 성경 전체에서도 그렇지만 잠언서에서는 말씀을 더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씀에 대하여 지혜나 진리나 율법이나 법도 혹은 법이나 훈계나 명령 등의 여러 가지 표현을 쓰고 있지만 모두가 사실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지혜라는 말이 무려 122번이나 나오고, 훈계라는 말이 24번, 법이 8번, 진리가 8번, 명령이 8번, 율법이 4번, 그래서 말씀안에서 살것에 대한 말씀이 무려 176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잠언서가 31장까지 있으니까 한 장에 대략 여섯 번 정도 말씀을 언급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말할것도 없이 거기에 복이 있고, 거기에 은혜가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3: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즉 하나님의 법을 잊지 말고 그 명령과 규례를 따라 살면 평강과 장수의 복과 아울러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 그 말씀이 너를 인도하고 보호하며 너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는 죽으나 사나 말씀가운데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말씀안에서 살라.(20,21절)

1)말씀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20절)

본문 20절을 보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 어미의 법이라고하여 표현은 부모님의 명령과 법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명령과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 개인적인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법으로 훈계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소위 쉐마라고 불리우는 신6:4-9절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엡6:4에서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23절에서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명령, 법, 훈계가 생명의 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빛,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을 지키라고 했을 때 지킨다는 것은 [지킨다, 보호한다, 경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이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보호하고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돈이나 향락이나 권력이나 욕심이나 하여튼 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을 앞서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무엇이라고해도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가장 중요한 공간에 간직한 다음에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의 위치를 빼앗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했을 때 떠나지 말라는 말은 [~한 상태로 놓아두거나, 맡겨버리거나, 버리거나, 허락하지 말라는 말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예를 들면 이럴 때 사용한다. 즉 땅을 묵히거나(출 23:11) 농작물의 추수를 보류함으로써(느 10:31[32]) 땅을 버려둘 때, 혹은 동물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둘 때, 먹고 남은 음식이 버려질 때 등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은 말씀을 방치함으로써 그 말씀이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더라도, 말씀이 아무리 빛이라해도 내가 그 말씀을 좇아가지 않고 말씀 따로 나 따로 있으면 그 말씀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 좋은 음식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리 좋은 차라도 내가 이용하지 않고 들 한가운데 방치해 둔다면 그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꼭 기억하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이나 물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이성이나 향락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만들지 말라.

그리도 말씀을 방치해두지 말라. 말씀은 그저 교회속에서나 있고, 말씀은 성경책속에나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일상적인 모든 삶속에서 말씀이 나와 가장 가깝게 만들라.

2)말씀을 목에 매고 살라.(21)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고 말씀한 다음에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는 말씀보다 훨씬 더 강화된 말씀수호 명령이다. 그렇지 않은가? 새긴다는 것은 말그대로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철필로 새겨 넣으라는 말이다.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함께 매다, 묶다, 연합하다, 공모하다]는 의미로 완전히 말씀과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묶여져서 절대로 떠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네 목에 매라고 하셨는데 목에 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겉으로 완전히 들어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너와 함께 있음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네가 그 말씀을 떠나지 않게 되고 범죄의 유혹에서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에게 들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옆에서 갑자기 어떤 차가 끼어 들었다. 깜짝 놀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겨우 접촉사고를 면하기는 하였지만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다시 옆차선으로 가서 그 차옆에 대고는 [야! 이 놈아, 운전 좀 똑바로 해]!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운전석앞에 성경책이 놓여 있더란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추고 얼른 성경책을 치우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우리의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데는 외적인 요인들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행동들을 통제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외적인 요인들이 내적인 것을 통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양복을 쫙 빼 입었을때와 작업복을 입었을때의 행동이 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아무리 신사라고 해도 모두가 행동이 제멋대로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사실 교복이나 제복도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학생들도 아무래도 교복을 입으면 그 교복이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게 만들며, 군인도 멋진 군복을 쫙 빼 입으면 웬지 걸음걸이도 절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목사도 제복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나 승려는 제복이 있어서 언제어디서나 그 제복을 입고 있으면 자기 자신 스스로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보는 눈을 의식해서라도 아무래도 행동에 조심을 하는데 목사는 별도의 제복이 없어서 때로는 행동이 너무 자유스러운 것이 아니냐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말씀을 목에 매라는 의미는 그런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너의 목에 매달고 다님으로써 그 말씀으로 너의 행동을 제어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더욱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말씀을 목에 달고 다닌다고 해서 성경 말씀을 적어서 목걸이처럼 매고 다니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너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너를 보면서 바로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그런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새기고, 마치 목걸이를 목에 다님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하여 열심히 예배와 말씀과 찬양과 기도의 생활을 하여 그것이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2.말씀안에서 살아야 할 이유(23절)

본문 23절에서는 말씀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말씀이 곧 빛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명령은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율례를 말하며, 법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말한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는 말씀은 이웃 사랑에 대한 포괄적 말씀으로 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마5장에 나오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등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하나님의 명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하나 모두가 곧 등불이고 빛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삶에도 등불이요, 빛이며, 인간의 세부적인 삶의 모습들에 있어서도 역시 등불이요 빛이아른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만이 인간의 모든 영역을 환하게 비춰주어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가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등불이다. 유일한 빛이다. 완전한 빛이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인 성경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밝혀주는 유일한 빛인 것이다. 그것은 그냥 인간의 전체적인 삶의 틀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살아숨쉬면서 활동하는 개개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역시 빛이요, 등불인 것이다.

이것은 같은 이야기같지만 사실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며, 빛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개개의 삶을 통제하고, 인간 개개의 삶을 인도하는 빛이라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매우 둔감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맞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안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렇게는 인정을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 들어가면 그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나의 생각이나 나의 경험이나 나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마6: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구하지 않은 세상의 것들로도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그것을 인정을 하면서 막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속에서는 어떤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것인가하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것이 과연 나에게 실제적으로 얼마나 유익이 될 인가, 세상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할 때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하는 등등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말씀이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은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말씀을 우리의 삶을 조명해 주는 유일한 빛이니까 오직 그 말씀따라 살라는 것이다. 오직 말씀만이 모든 인간의 모든 영역을 비춰주는 진정한 빛이니까 모든 상황, 모든 조건, 모든 이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빛이니까 그 빛을 따라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3.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릴 은혜(22절)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리게 될 은혜에 대해서는 본문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율례이다. 그러니까 말씀안에서 말씀을 지키며 떠나지 말며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고 다니는 사람은 말씀이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도한다는 말은 이끌다, 인도하다, 안내하다는 의미로 말그대로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의 삶을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해 준다는 말이다.

말씀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말을 깊이 묵상해보라. 무엇이 나를 인도하느냐,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달라지게 만들 것인가? 도적이 나를 인도하면 도적이 된다. 사기꾼이 나를 인도하면 사기꾼이 된다. 마귀가 나를 인도하면 나는 어둠의 사람이 된다.

물론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면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을 통제하고, 나의 말을 통제하고, 나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여 나는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보호한다는 말은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간수)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우리의 삶을 보호하셔서 우리를 거짓과 어둠과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의미이다.

이 지켜준다는 것도 역시 중요한 말씀이다. 물론 인도한다는 말씀과 대동소이한 말씀이겠지만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하는 것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선한 것이 나를 지키면 나는 선한 사람이 된다. 진리가 나를 지키면 나는 진리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것이 나를 지키면, 거짓이 나를 지키면, 어둠의 세력이 나를 지키면 나는 보나마나 어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비록 선한 것이 나를 지킨다해도 별로 힘이 없는 것이 나를 지키면 그것도 별 것 아니다. 아무리 선하다해도 힘이 없으면 자기보다 더 강한 악이 덤벼들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키면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지키면 나는 가장 선한 길, 완전한 진리의 길, 완전한 생명의 길로 안전하게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닐 때, 잘 때, 깰 때는 꼭 문자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닐 때, 잘 때, 깰때는 인간의 삶의 모든 행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을 간섭함으로써 그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은혜의 길로 안내해 준다는 말씀인 것이다.

오늘 이러한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오직 유일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어떤 것이 유혹을 하고 공격을 해온다고 해도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판에 잘 새겨넣고, 그 말씀들이 항상 우리 안에 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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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인생의 완전한 보험

 

 


제목 : 인생의 완전한 보험

 

말씀 : 잠3:5~8

 

1.하나님만이 완전하고 영원한 보호자이시다.

사람이란 어차피 무엇인가를 의지하여 살 수 밖에 없다. 돈이나 권력이나 건강이나 능력이나 지식이나 사람이나 여하튼 무엇인가를 의지하여 산다. 이런 것들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을 찾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의지해서 산다. 돈만 있으면 아무 걱정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나 믿고 산다. 몸만 건강하면 문제없다고 여긴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믿고 산다. 그래서 권력을 추구하며 권력자를 가까이하며 그것을 든든한 백으로 여기고 산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의지해서 산다. 지식이 많으면 인생이 풍요로워 질 것이라고 여기며 죽자사자 지식을 추구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그런 것들이 우리를 얼마나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까? 얼마나 확실한 보험이 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그런 것들은 결코 완전한 보험이 될 수 없다. 우리를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 길어봐야 100년이다. 그나마 그 100년 동안도 우리를 완전하게 지켜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까? 물어 보나마나 하나님이시다. 완전한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생명이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 완전하고 영원한 보험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5절에서는 말씀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인간의 명철 즉 인간의 지혜, 지식, 능력, 과학, 돈 그 어떤 것이든 인간에게 속한 것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 온전치 못한 것을 의지하고 살면 그 온전치 못한 것과 함께 망한다는 것이다. 완전한 능력과 지혜와 구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때 영원한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의지하며 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말라. 진정한 생명과 길과 진리와 능력과 은혜와 구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라.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2.마음을 다하여 의지해야 한다.

앞서 말씀드린 5절을 다시보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어떻게 의지하느냐하면 마음을 다해서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마음은 「마음, 정신, 이해력, 의지, 중심」등의 의미이다. 또한 다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총동원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마음과 정신과 의지와 지식과 이성과 육체의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맡기고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 인격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서로 믿고 의지한다면 모든 영역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 만약 돈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몸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시간을 맡기지 않는다면 온전한 믿음의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동일하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영혼도 감정도 육신도 물질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이것이 마음을 다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그렇지를 못하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감정과 지식과 이성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할 때가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의 지식과 이성과 감정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물질적인 것은 맡기지 못하여 하나님께 올바르게 드리지 못할 때가 있다. 또 시간적으로도 온전히 맡기지 못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시간을 드리지 못할 때가 있다.

사실 이런 모습들은 어불성설이다.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이성과 지식과 상황과 조건과 세상풍조와 물질과 권세와 명예를 더 신뢰하며 그것을 따라 살겠는가? 정말로 믿는다면 그런 것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신뢰이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적으로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맛보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인생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믿고 따라감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풍성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3.오직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한다.

또 이 말씀 5절에서는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 아닌가? 우리는 결국 더 지혜롭고 더 유익이 되고 더 기쁨이 된다고 여기는 것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만약 내 명철을 의지한다면 내 명철이 하나님보다 더 현명하고 지혜롭고 생명의 기쁨을 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따르겠는가?

마6:24절을 보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만약 내 명철을 의지하여 산다면 내가 주인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 명철을 따라산다면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경히 여기는 행위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의지해야 한다. 자기 자신이냐 하나님이냐, 돈이냐 하나님이냐, 권력이냐 하나님이냐, 과학이냐 하나님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너무 극단적인 흑백 논리가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실제로도 만약 세상의 것을 더 섬긴다면 그건 분명히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한다. 이유는 당연하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인간은 무능하며, 하나님은 전지하시지만 인간은 한계가 있고, 하나님은 영화로우시지만 인간은 비천하며, 하나님은 지혜로우시지만 인간은 미련하고,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인간은 죄로 오염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시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며,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세상의 것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자기 지식과 자기 경험과 자기 능력과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께 매달리자. 그렇게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과 동행할 때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이 되자.

4.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본문 6절에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했다. 범사라는 말이 우리말 성경에는 한단어로 되어 있지만 원문성경에는 범과 사가 각각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범’은 ‘모두, 전체, 완전함’을 의미하며, ‘사’는 ‘길, 도로, 여행, 태도, 습관, 인생행로, 행위, 일, 일의 방식’ 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범사란 영적,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삶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을 말하는 것이다. 또 인정한다는 것은 ‘알다, 이해하다’라는 뜻으로 경험해서 이해하여 완전히 수긍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완전히 경험을 해서 아, 정말 그렇구나. 확실하구나 하고 온전히 수긍하고 그래서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해서 안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이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월등하신 하나님, 세상의 돈이나 명예와나 권력과도 비교 할 수 없는 완전한 능력이신 하나님, 모든 영역에서 완전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나의 생명과 영원을 책임져 주실 하나님, 이 하나님을 안다면 어찌 그 하나님을 따르지 않겠나?

그러므로 정말 하나님을 경험하여 알라. 그 앞에 진실로 엎드리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그래서 그 완전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 진리이신 하나님, 영원한 승리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만나 경험하여 알라. 그래서 모든 영역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인정하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 그 안에 생명과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라. 그 방법이 옳음을 인정하라. 그리하여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가치기준이 어떻게 달라져도,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심지어는 교회가 어떻게 변해간다해도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한 잣대로 삼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생명을 온전히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자.

5.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받는 복

오늘 본문 6절 하반절에 보면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하셨다. 인간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범사에 그를 인정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은혜로 우리의 길을 이끌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고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8절에서는 말씀한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 편을 택하여 주님과 동행할 때에 골수가 윤택해지는 즉 몸과 마음과 영혼이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즉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복된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당연하지 않는가? 하나님 앞에 생명이 있는데, 하나님이 길이요 진리인데, 하나님의 모든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의 근원이신데 그를 따르는 자에게 어찌 이런 은총이 없겠는가?

그렇다. 오직 하나님만이 전능하시며 전지하시며 생명과 사랑과 능력의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분만이 우리의 완전한 목자요, 선한 목자이시다. 우리의 명철이나 경험이나 지식이나 물질이나 과학이나 이런 것들은 다 불완전한 것들이다. 다 연약하고 부족하고 한계가 있고 곧 사라질 것들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의지하라. 전인격을 동원하여 의지하라. 부분적으로 하지 말고, 취사선택해서 하지 말고, 어느 한 영역만을 맡기지 말고 전영역을 다 맡겨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라. 그리고 그를 따르라. 그리하여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의 지도하심가운데 인생의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에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은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출처] 인생의 완전한 보험(잠3:5-8)|작성자 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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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대표기도문 (Sunday night worship service)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시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평소의 주일 보다 조금은 일찍 나서야 하고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는 부전기도원예배당에

 


오직 하나님을 쫓아 모이기에 힘쓴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 있기를 구합니다.

 


낯설게만 느껴졌던 임시 예배당 생활에 이제 천처히 적응 되어가매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곳에서의 작은 불편한 점 하나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겨나가는 시간이 되어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의 처소가 완성되어 비로소 들어가게 되었을 때

 


인내의 열매를 보며 행복하게 그 시간을 맞이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제 9월 부터는 삶공부가 시작 될 예정입니다.

 


잘 준비되어지고 잘  편성이 되게 하여 주셔서 은혜를 구하는 그 마음들이

 


그에 합당하게 응답받는 시간이 되기를 구합니다.

 


평신도 가정교회 세미나도 준비해갑니다.

 


은혜는 우리의 능력에 달린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을 믿고

 


준비하며 나갈때 우리의 맡은 역할을 잘 해내고

 


누군가에게 은혜의 통로가 되어질 수 있도록 사용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언제나 우리 자녀들을 기억하여주사 자녀들에게도 믿음이 온전히 들거가게 하시며

 


자녀들 스스로 예배를 지켜갈 수 있는 믿음까지 이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책임져 주시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이 모든것을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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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설교]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선을 행하다 낙심치 맙시다.

말씀 : 살후3:13-18

1.끝까지 선을 행합시다.

옛날에 수리시설이 잘 안되어 있어서 농사짓기가 힘들었던 시절에는 가뭄이 들면 논에 물을 대는 문제로 곧잘 싸움이 벌어지곤 하였다. 바로 그런 시절의 이야기인데 한 농촌교회의 한 집사님이 밤 늦게까지 수고해서 논에 물을 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 논을 나가보니 자기 논에는 물이 하나도 없고 바로 아랫 논에만 물이 있었다. 아랫논 임자가 자기 논의 물을 훔쳐간 것이다. 집사님은 당장 달려가서 멱살을 잡고 싸우고 싶었지만 예수님 믿는 사람이기에 한번 꾹 참고 다시 밤늦게 까지 논에 물을 대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논을 살펴보니 또 아랫논 임자가 논둑을 터서 물을 훔쳐갔다. 그래서 집사님은 화가 치밀어 당장 달려가서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그래도 꾹 참고 목사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목사님이 말했다. “집사님, 예수님께서는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이번에는 그 사람의 논에 먼저 물을 대어주고 그 다음에 집사님의 물에 대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집사님은 한번 더 참기로 하고 먼저 그 원수 같은 사람의 논에 몰을 대준 다음에 자기 논에 물을 대어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다음 날 아침 일찍이 그 고약한 사람이 이 집사님을 찾아와서는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달려와서 내 멱살이라도 잡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 논에 물을 대주다니 예수님 믿으면 그렇게 됩니까? 그러면 나도 예수님 믿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집사님의 선행으로 귀한 영혼을 구원하고 이후로 좋은 친구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게 되었다.

그렇다. 선을 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때론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아니 열매는커녕 도리어 손해를 보기도 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동시에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열매를 맺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정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는 길이라는 것이다. 물론 설령 열매를 맺지 못해도, 인정을 받지 못해도 해야 한다. 그게 선이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알고 계시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고 선을 택하여 선의 길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갈6:9절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셨고, 오늘 13절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고 하셨다.

오늘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 말씀을 주신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으나 여전히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전1:6절을 보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많은 환난 속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 사도 바울과 주님을 본받는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힘든 현실들이 계속되다 보니 점점 낙심도 되고, 심지어 회의가 생길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 어려움 없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도 어려운데 게다가 교회를 핍박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러니 낙심하는 자도 생기고 회의를 갖는 자도 생기지 않겠는가?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라. 믿음을 따르라.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하지 말라. 그것만이 살길이고 그럴 때 분명 열매가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선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진리다. 그러나 문제는 선을 따라 사는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어렵고 힘들고 당장에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어 낙심하기 쉽고 포기하기 쉽다. 그건 나나 세상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이다. 죄와 무지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어렵고 힘들고 당장에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어도 참고 기다리며 선을 따라야 한다. 그러면 분명히 그 열매를 누리게 된다.

아브라함은 아들의 약속을 받고 25년 만에 얻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사울에게 쫓겨 다니기를 10년 이상 도망 다니다가 결국 왕으로 등극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하여 애굽에 팔려가서 10년 이상을 노예와 같은 삶을 살며 온갖 억울한 일을 당했으나 참고 선을 따랐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주님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끝까지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며 선을 따랐다. 그럴 때 결국 전세계에 복음의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오직 주님의 말씀을 믿고 주님의 말씀따라 살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잘 몰라도 그저 기다리라.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2.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한 태도(14,15절)

그러나 이런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가운데 든든히 서 있어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교회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교회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하여 교훈을 주고 있다.

살후3:14,15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여기에 보면 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한 세가지 태도가 있다. ①지목하라. ②사귀지 말라. ③부끄럽게 하라.

지목하라는 것은 대상자를 밝히라는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밝히지 말아야 할 때도 있겠지만 대상자를 공개적으로 밝힘으로 그런 잘못된 사람이나 태도에 대한 분명한 경계심을 가지고 그런 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뜻이다. 사귀지 말라는 것도 결국 같은 의미이다. 그들과 절교하고 내치고 함께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함께 교제함으로 그들의 잘못된 태도에 물들지 말라는 뜻이다. 부끄럽게 하라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가 얼마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고 창피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게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사람과의 관계가 깨져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모든 과정에서 사랑을 전제로 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내치기 위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마음이 아프지만 이런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게 그 개인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 악을 그냥 묵인하고 감싸주고 내버려 두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분명히 악을 악이라 말하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이키게 만들어야 한다. 죄를 지으면서도 당당하게 수치도 모르고 살게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자신도 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복음의 문을 막는다. 교회 공동체에 죄를 누룩처럼 퍼지게 하여 교회 공동체마져도 어려움을 겪게 만든다.

우리는 그냥 무조건 감싸주고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감싸주는 것은 실수하고 부족하고 연약하고 지혜와 능력이 모자라는 것 등을 덮어주는 것이다. 고의적 악의적 의도적으로 행하는 악한 죄나 습관을 덮어주는 것은 감싸는 것이 아니라 악에 빠져 죽게 만드는 것이다. 용서도 그렇다. 죄와 악을 행하고도 아무런 반성이나 회개나 돌이킴이 없는데 무조건 없는 것처럼 여기라는 의미는 아니다. 누구나 죄와 허물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죄와 허물에 대하여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것을 벗어던지고 선을 따라 살아가기를 힘쓰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는 당연히 백번 천번이라도 용서해야 하지만 그런 과정도 없이 그냥 무조건 죄를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용서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를 징계하실 때는 징계하신다. 우리에게도 분명히 책망할 것을 책망하라고 하신다. 아이를 훈계할 때도 때로는 매도 들라고 하신다. 교회에서도 분명히 징계할 것을 징계하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다. 왜냐하면 이것이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계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잠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마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러므로 가족이든 교회 안에의 형제자매이든 진정어린 사랑을 가지고 대하되 그러나 윤리적 도덕적인 죄나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바로잡아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함으로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자.

3.하나님의 평강과 은혜를 기원함(16-18절)

살후3:16, 18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데살로니가 후서의 마지막 부분으로 교인들을 축복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축복의 내용인데 그것은 평강과 하나님의 은혜이다. 평강의 주께서 때마다 일마다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는 무슨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축복해 줄 때 가장 기쁜가? 물론 돈, 건강, 물질도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이다. 즉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기쁨, 위로, 소망, 믿음, 사랑, 보호, 인도 등의 인생에게 진정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주는 것들이다. 먼저 이것을 누려야 한다. 설령 세상의 것은 조금 못 누려도 이것만은 누려야 한다. 세상의 것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은혜를 받지 못하면 가장 불쌍한 인생이다. 세상의 것을 아무리 적게 받았어도 은혜를 충만히 받은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가장 행복하게 산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된다. 그러나 세상의 것을 다 가졌어도 은혜를 받지 못하면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다. 진짜 자유 평화 기쁨 은혜 소망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자. 그래서 모든 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자.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자. 사랑으로 책망할 것은 책망하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기도해주고 이끌어가자.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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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거룩한 칭호

 

말씀 : 요일3:1~6

 

1.가장 위대하고 놀랍고 영광스러운 칭호

 

여러분, 세상에서 뭔가 특별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칭호가 붙습니다. 성왕 다윗, 지혜의 왕 솔로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또 일반적으로도 음악의 아버지, 축구의 황제, 가왕 누구누구, 요샌 뭐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여신, 얼짱, 몸짱 그러면서 그럴듯한 칭호를 붙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복되고 거룩한 칭호는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칭호로서 하나님, , 그리스도, 구세주 등의 칭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인류의 구속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 인류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실 분 등등의 의미이지요. 세상에 이렇게 거룩하고 복되고 위대한 칭호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하고 능력과 지혜가 뛰어나고 인품이 좋고 엄청난 업적과 공로를 남겨 대단한 칭호를 얻어도 하나님께 적용되는 칭호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도 안되지요.

 

그런데 여러분, 인간에 붙여진 칭호 중에 그래도 어느 정도 하나님께 대하여 붙여진 칭호에 근접하는 칭호가 있습니다. 그게 뭐겠습니까?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성도라는 칭호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 누구누구, 성도 누구누구 이런 칭호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물론 하나님, , 그리스도, 구세주라는 칭호에는 어림도 없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는 세상의 다른 어떤 위대한 칭호나 타이틀이나 지위와도 비교도 할 수 없이 위대하고 아름답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칭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물론 이 땅에서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지만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갔을 때 어떻게 됩니까? 거의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됩니다. 물론 능력과 지혜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지만 거룩과 의와 선과 사랑 등의 영화로운 속성에 있어서는 거의 예수님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영화로운 몸을 입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영광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칭호가 얼마나 굉장하고 대단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도 뭔가 특출 나서 다른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멋진 칭호를 얻는 것도 귀한 일이고 복된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일진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칭호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가진 우리들은 얼마나 대단한 존재 들이냐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1절을 보십시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보라.’ 너무나 엄청난 일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감탄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것인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만 생각하면 감사와 기쁨의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칭호를 가지고 있는 자로서 늘 자부심과 긍지 속에 감사와 기쁨과 거룩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은총 풍성하게 누리는 삶이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우리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하나님의 자녀가 된 과정

 

1절을 다시 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컴을 받게 하였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엄청나고 놀랍고 경이로운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그 경이로운 사랑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만해도 엄청난 사랑인데 게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까지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일반적인 인간이라도 그런 일을 하면 대단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과 사람과는 그 비중이나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이 다릅니다. 물론 사람도 생명을 바쳐 다른 사람을 살린다면 대단한 일이고 칭찬과 상급도 받아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와 무지 속에 있고, 어리석고 무모하고 심지어 더럽고 추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숭고한 헌신도 그 가치가 줄어 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물론 그 결과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을 희생하여 몇 사람을 살린다해도 숫자적으로 얼마 안될 뿐 아니라 그 영혼을 살릴 수는 없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 못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없고 흠없으신 분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럴 이유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게다가 수적으로도 예수님의 헌신과 희생은 수억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사랑과 헌신과 섬김을 우리가 어디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놀랍고 크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사랑을 받은 자인지를 늘 기억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엄청나고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신분을 얻게 되었는지를 말씀하고 나서 2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여기서 그가 나타나시면 그와 같을 줄을 안다는 것은 마지막때에 주님이 오실 때 우리도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화되어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보게 됨으로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가를 확실히 보게 된다는 것이다.

 

장래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거룩하신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주님이 재림하시고, 어떤 모습으로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가게 될지는 확연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주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그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능력과 지혜와 권세가 주님과 똑같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신령하고 영화로운 몸을 덧입어 주님처럼 거룩하고 영화롭고 선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그 어떤 어둠의 그림자도 없는 빛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엄청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무슨 권세와 능력과 지혜가 이런 특권을 주겠습니까? 우리가 감히 주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특권이요, 주님처럼 되기 때문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온전하고 영원하고 영화로운 은총들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엄청난 사실을 기억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며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엄청나게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만큼 거기에 어울리는 삶 또한 있어야 합니다.

 

오늘 3~6절의 말씀이 그 말씀인데요, 한번 같이 보겠습니다.“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라는 것은 장차 주님과 같이 되어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영광을 누릴 소망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는 이 소망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물론 어느 정도 소망거리가 있긴 하지만 그건 별거 아니니까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죄는 불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결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 질 수 없다. 그래서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않고, 만약 범죄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고 있어야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무엇입니까? 물론 겸손 사랑 자비 긍휼 용서 의 선 지혜 등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입니다. 물론 거룩이란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께 받쳐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구별되고 분리되어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고 분리되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과 방법과 방향과 목적에 부합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은 그런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왜곡되고 혼돈된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을 버리고, 그래서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의 의미이고 그러면 세상에서 모든 욕심 욕망 미움 저주 시기 질투 불법 악 폭력을 버리고 그야말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날 우리가 힘이 없고,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도리어 비난을 받는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를 크게 짓고 시스템을 멋지게 하고 재미있게 유쾌하게 편안하게 해 준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봉사하고 선을 행해도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면 교회는 결코 신뢰성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가 존재해야 할 목적을 그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봉사하고 섬기는 것에 대하여 뭐 그렇게 칭찬하지 않습니다.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뿐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진실하게 깨끗하게 아름답게 살아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우선 자신의 심령속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게 되고,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래서 인정받고 신뢰받게 되고 그러면 복음의 역사도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서 섰을 때 큰 상급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랍고 귀한 특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로써 한편으로는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고 동시에 거룩하고 깨끗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으로 주님의 향기를 발함으로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고,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과 동행하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큰 상급도 받아 누릴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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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첫주일 오후찬양예배설교 September Sunday night worship


제목 : 본이 되는 믿음

말씀 : 살전1:2-8

1.감사가 나오는 교회

여러분, 데살로니가교회는 정말 아름답고 복되고 바람직한 교회였다. 얼마나 복된 교회인지 그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나오는 교회였다. 오늘 2절을 보라.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여러분, 보십시오. 이 교회를 생각 할 때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다. 물론 교회가 세워진 것이 감사요. 그곳에 성도들이 있다는 그 자체가 감사이다. 그런데 데살로니가교회는 단순히 그런 이유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생각할 때에 특별히 더 감사가 나오는 교회였다. 그 이유가 뒤에 쭉 나오는데 3절에서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라고 하였고, 6절에서는 많은 환난 속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주를 본받은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고, 7절에서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라고 하였으며, 8절에서는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교회라고 하였다.

여러분, 얼마나 복된 모습인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 많은 환난 속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주를 본받은 교회, 그래서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 그래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교회. 정말 부럽기도 하고 너무나 감사하고 복된 교회 아닌가?

여러분,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부모에게 감사와 기쁨을 주는 자녀, 부부간에 서로 감사와 기쁨을 주는 부부, 주님께 기쁨을 주는 성도, 성도와 성도 간에 서로 감사과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반대로 가정이나 학교나 교회나 마을이나 국가에서 근심 걱정거리가 된다며 근심 걱정하게 만든 본인이나 근심 걱정하는 사람이나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찌 하든지 주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주님을 본받아 삶으로 먼저 자신이 행복하고 주님과 가족과 이웃과 교회에 기쁨과 감사가 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란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감사거리가 된 이유는?

2.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은 교회.

오늘 6절을 보자.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여기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 인내 가운데 든든히 서 있어서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나오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그게 뭐냐?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말씀 그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로서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평안하고 형통하고 좋은 시절이 아니라 많은 환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시 말해 비록 상황은 많이 어려웠지만 그 환경과 상황과 처지나 혹은 세상의 가치관이나 자신의 욕망이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생각에 좌지우지 되지 않고 오직 성령의 감동감화하심을 따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그대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게 중요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상황과 환경이나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여 말씀그대로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축복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가는 자에게는 반드시 주님의 놀라운 은총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언제 어떤 상황이라도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축복의 말씀인 주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3.주님과 사도를 본받은 교회.

앞에서 보았던 6절을 보면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고 말씀한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았으니 그 말씀을 주신 주님을 본받는 것도 당연하고, 또 우리보다 먼저 주님을 본받아 살던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는 것도 당연하지 않느냐는 말씀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잘나고 대단한 사람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혹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류의 유일한 참 빛이시며 생명이시며 진리이신 주님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겸손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주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분들을 가까이 하며 그런 분들의 삶의 모습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잖은가? 거기 생명과 은혜와 소망과 축복이 있는데 왜 엉뚱하게 다른 것을 따라 살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안타깝게 자꾸 세상을 따라가려고 한다. 세상에서 잘나고 똑똑하고 많은 것을 누리는 사람들을 본받으려고 한다. 또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본받아 살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의 장난이다. 속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 모두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기 바란다. 세상 사람들을 본받지 말고 오직 주님을 본받으며,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본받으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믿음의 아름다운 모습을 세상 속에 보여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란다.

4.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

살전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와 같이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주님과 성도들을 본받았을 때 결국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운데 든든히 서는 교회가 되었다. 이것도 당연하잖은가? 말씀 위에 서서 주님을 본받으며 살아가는데 어찌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든든히 서지 않겠는가?

그러면 믿음의 역사가 무엇인가? 역사는 일, 행위라는 뜻으로 한마디로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래서 뭔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 사랑의 수고란 말그대로 사랑과 기쁨과 은혜로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겼다는 것. 소망의 인내란 힘들고 어려워도 소망으로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다는 뜻이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주님을 믿는다면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을 믿으니까,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영광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면 분명히 주님의 능력과 지혜와 은혜로서 복음의 역사도 일어나고 평안과 기쁨와 소망 속에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되니까.

사랑의 수고도 당연하다. 사랑한다면 수고가 있게 마련이지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를 위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마땅히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하고, 그럴 때 주님도 나도 사랑을 받는 대상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그 역사도 이루어가는 것이다.

물론 소망의 인내도 동일하다.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회는 만사형통해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환난과 핍박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소망,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에 그것을 넉넉히 이기고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이루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 대한 믿음과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믿음을 지키고, 사랑으로 주님과 교회와 성도를 서로 섬기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맛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5.믿는 자의 본이 된 교회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예수님을 본받고 사도들을 본받을 어떻게 되었는가? 7절을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그러니까 그들이 그렇게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주님을 본받고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았을 때 그들 자신도 다른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는가?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이 결정되지 않겠는가? 주님을 바라보고,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과 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결국 신실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변해 가지 않겠는가?

여러분, 우리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는 자에게도 본을 보이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본을 보여야 한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좋은 본을 보여야 한다. 특히 제직들 특히 중직들은 더욱 그래야 한다. 예배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기도와 찬송의 본을 보여야 한다. 아름다운 말과 행실에 본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아 신앙생활을 저렇게 하는 거구나. 믿는 사람들은 저렇게 살아야하는구나 하는 마음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반대로 장로도 그렇게 하던데, 권사도 이렇게 하던데, 집사도 그렇던데 하면서 나쁜 본을 보이면 안된다. 물론 본을 받는 사람들도 좋은 것을 본받아야지 나쁜 것을 보면서 저렇게 해도 되는구나 하면 안 되겠지만....

그리고 여러분, 우리는 특별히 믿지 않는 자들에게 더 좋은 본을 보여야 한다.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니까요. 너무나 영광스럽고 거룩하시고 사랑과 선과 의와 진실만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자녀이니까요.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거룩하고 진실하고 의롭고 선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깨끗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그런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빛나게 해야 한다. 마5:16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본받아 거룩하고 진실하고 선하고 의롭게 살아감으로 우리 자신이 주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 나아가 믿는 사람들에게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 좋은 본이 되어 저들도 주님 품으로 온전히 인도하여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6.믿음의 소문이 퍼진 교회

여러분, 물론 당연한 일이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나아가서 그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되자 믿음의 아름다운 소문을 퍼트리는 멋진 교회가 되었다.

여러분, 소문이 중요하다. 때로는 헛소문이 많아서 소문을 잘 분별해서 들어야 하지만 그러나 좋은 소문은 정말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음식점이 아무리 대대적인 홍보를 해도 맛이 없고 청결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나면 얼마 못가서 문 닫아야 한다. 그러나 청결하고 맛이 있다는 소문나면 그야말로 대박이 된다.

교회도 좋은 소문이 나야한다. 사랑의 소문이 나야 한다. 교회는 정직하고 깨끗하고 거룩하다는 소문이 나야 한다. 화목하고 아름다운 소문이 나야 한다. 교회에 다니면 새 사람이 된다는 소문도 나야 한다. 교회에 다니면 행복하고 감사하고 기쁨이 온다는 소문도 나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싸우고 헐뜯고 미워한다더라. 교회에 다녀봤자 별거 없다더라. 교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싸우고 거짓말하고 속이고 한다더라. 이런 소문이 나면 교회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한국교회가 이렇게 믿음의 아름다운 소문이 퍼트리지 못하고 도리어 좋지 않는 소문을 퍼트릴 때가 많다. 물론 경우에 따라선 억울한 소리를 들을 때도 많은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그러나 교회가 부족해서 그런 일도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더욱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오직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자. 오직 주님과 거룩한 성도들을 본받자. 그래서 세상에 본이 되어 빛을 비추. 믿음의 아름다운 소문을 퍼트리는 성도와 교회가 되자. 그리하여 이번 가을에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어 기쁨으로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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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제목 : 예수님의 사역

말씀 : 마4:23~25

 

오늘 말씀. 예수님의 사역. 물론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역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죄사함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예수님의 가장 근본적 사역.

그러나 그렇게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죄사함과 부활과 천국을 알리고 깨닫게 하고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천국을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3년간의 공생애를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끊임없이 전하시고 가르치심.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핵심 사역 세가지. 복음을 전하심. 가르치심. 병을 고치심. 즉 하나님과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알리심. 선포하심.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믿은 다음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심. 그 다음에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하여 세상에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심.

이것이 교회의 사역. 이것이 인간의 삶의 우선순위. 인간의 삶을 가장 풍요롭게,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게 하는 일.

오늘날 이런 의미가 많이 퇴색, 예수님의 오심, 성탄절의 의미가 상당히 왜곡. 인간적인 사랑,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하나됨, 서로 인정함. 물론 이런 의미도 있고 또 상당히 중요한 일이기도.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님. 예수님의 궁극적 관심은 생명. 하나님의 나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역에서 잘 나타남.

1.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천국 복음은 전하심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요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분명.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물론 섬기시고 사랑의 계명을 주신 것도 사실. 그러나 단순히 인간적인 섬김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결국 십자가까지. 사랑도 단순한 인간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동기는 생명. 인간에게 참된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풍요롭게 하려는 것.

그래서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회개 천국 모두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 그리고 사실 이 생명을 얻지 못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어도 소용없어. 그래서 또 말씀. 막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심.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러므로 성탄의 의미를 바르게 알자. 바르게 믿자. 바르게 영접하자. 그리하여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생명의 소식을 전하자.

2.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기 위해 가르치심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천국복음을 전하신 다음에는 가르치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정말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물질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 무엇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인가? 등 하나님의 형상, 천국시민으로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주심.

우선은 믿어야.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믿고 영생복락을 믿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믿고 심판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어야.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 현실적으로 우리 눈앞에 전개될 현실적인 세상. 단순히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이나 마음속의 소원이 아니라 실제적인 생활 공간.

그리고 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중요한 일인가? 무엇이 정말 행복하게 하는가? 무엇인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가를 가르치심.

그러므로 열심히 듣고 배워야. 그리고 그 말씀따라 살아야.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와 육체적인 건강이 우선시되는 삶에서 주님이 우선되는 삶으로 방향전환해야. 돈이나 명예보다 믿음과 진실과 성실과 거룩과 의가 우선시 되는 삶을 살아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생명과 기쁨을 은혜를 주는 삶. 주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는 삶. 이런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해야.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그럴 때 진정 참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풍성함 가운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됨.

3.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해 이웃 돌보심.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께서 하셨던 세 번째 일은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시는 사역.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 돌보심이다. 비단 몸 뿐 아니라 물질적인 필요도 채워주셨다. 그래서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시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셨다. 죽은 야이로의 딸, 어떤 과부의 청년 아들과 죽은지 나흘리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고(마14장), 칠병이어로 사천명을 먹이셨다.(마15장)

즉 예수님은 인간의 전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그 영혼과 육신과 물질의 필요를 채워주심. 물론 분명히 우선순위가 있었다. 먼저는 영혼을 살리는 것. 그리고 천국백성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천국의 백성의 삶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만은 아니다. 육체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도 거기에 포함된다. 그래서 육신과 물질적으로 돌보셨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균형적인 믿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이런 균형잡힌 믿음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 먼저는 영혼이 온전히 거듭나야 한다. 천국과 지옥을 믿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확실히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현실적인 것이 우선시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지를 바르게 알고 그 나라에 들어갔을 때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 주님의 뜻대로 몸과 마음과 영혼과 시간과 물질을 사용해야 한다.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한다.

성탄절주민초청잔치는 바로 이런 자리다. 복음을 전하는 자리이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리는 자리다.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선포하는 자리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리는 자리다. 동시에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시간이다. 어찌하든지 그들의 교회 마당을 밟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의 문을 조금이라도 열리게 하는 시간이다. 주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하는 시간이다.

그리하려면 한명이라도 더 오게 해야 한다. 관심을 갖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벤트나 홍보도 필요하다. 이벤트를 위한 이벤트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이벤트다. 한명이라도 더 관심을 갖게 하고 일단 오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뭐가 되어도 된다.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복음을 전할 수도 없고 전해도 튕겨나간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교회의 문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가고 뭔가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사랑을 베풀고 하다보면 결국은 조금이라도 교회에 대하여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될 것이다. 이미지가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이미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요즘 교회의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믿음과 삶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은 어쩌구저쩌구 잘하지만 행동은 전혀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오신 목적인 무엇인지 그 역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되새겨 보며 먼저 나 자신이 그런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자.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게 주님을 만났으면 진정 거듭난 자로서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자.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사랑을 나누는 일에 힘썼던 것처럼 우리도 그 일에 힘쓰자. 그 일환으로 실시하는 성탄절주민초청잔치에도 적극적인 자세로 홍보하고 참여 함으로써 많은 분들이 교회를 찾아오게 하자.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믿게 하자. 혹시 당장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해도 마음이 점점 부드러워져서 결국은 주님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고 힘쓰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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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 찬양예배설교


제목 : 가장 큰 능력

말씀 : 요20:24-31

 

1.가장 큰 능력은 믿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가장 큰 능력이고 무기이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다. 그렇다고 기도하면 산도 옮겨질 것이라는 믿음, 믿기만하면 죽은 자도 살아나고, 바닷물로 갈라질 것이라는 믿음 등의 뭔가 대단한 능력을 일으킬만한 믿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믿음도 포함되지만 믿음이 능력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있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은혜와 진리와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한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 먼저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지옥의 권세를 이긴다. 일단은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이다. 세상의 다른 무엇이 이런 능력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궁극적인 구원만을 가지고 믿음이 가장 큰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의 삶에 생명력과 기쁨과 은혜와 사랑을 준다. 근심 걱정 염려 불평 불만 낙심 절망 한탄욕심과 미움과 시기를 이기게 한다. 그래서 그야말로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가장 큰 능력인 것이다.

안 그런가? 이보다 큰 능력이 어딨나? 지옥의 권세 깨트리고 천국가는 능력이 세상의 다른 어디에 있겠나? 또 세상에서도 우리가 무엇으로 이런 생명의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겠나?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날 것이다.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평안을 주겠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주님을 믿는 자는 이런 은혜를 분명히 누리게 된다. 분명히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게 된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희망과 소망을 찾을 수 있다. 많이 갖지 못했어도 얼마든지 감사와 기쁨으로 살 수 있다. 우리는 비록 약하고 부족하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4:13절에서 말씀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또 고후6:10절에서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모든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가운데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세상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주님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2.무지와 불신가운데 있는 제자들(24,25)

그렇다. 믿음이 관건이다. 믿는 자는 반드시 승리한다. 상황을 이기고 환경을 이기고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 다만 자신만 주님의 은총을 누리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힘있게 사명을 감당함으로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영광의 도구가 된다. 그래서 믿음을 늘 강조하셨고, 부활 후에도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주님께서 부활 하신 후에 곧바로 승천하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신 것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며 믿음을 강화시켜 주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힘있게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여러 번 목격하기 전에는 아주 연약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눅24:11절에 보면 사도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였다. 또 마28:17절에 보면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 또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19절에 보면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굳게 닫고 숨어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오늘 25절 말씀이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그러니까 앞서 도마가 없는 사이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셨었는데 이 사실을 도마에게 말하자 그는 절대로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예수님이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 것이라고 그 만큼 말씀하셨는데... 또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리셨는지 보았는데... 그만큼 천국에 대하여 영광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게다가 방금은 열명의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고, 그 제자들이 모두 방금 예수님이 다녀가셨다고 말을 하는데 어떻게 손의 못자국을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보고, 창으로 찔린 그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아야 믿겠다고 하는가?

여기서 무엇을 생각하가? 철저하게 굳어져 버린 인생의 모습.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알지 못하는 인생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걸 경계해야 한다. 정말 주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한다. 정말로 철저하게 깨져야 한다. 그 알량한 이성 경험 논리를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력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우리의 그 작은 모든 이성과 생각과 논리를 내려놓고 오직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따름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3.진정한 믿음(26~29)

그러나 다행히도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면서 점차 주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회복하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자들은 주님 안에 있는 그 부활의 생명을 믿어 의심치 않고 사명을 감당하여 결국 복음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도마도 마찬가지다. 도마가 없을 때에 오셨던 부활의 주님께서 그 후 여드레가 지나서 이번에는 도마가 있는 자리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신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그때서야 비로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신앙 고백을 한다.(28절) 그때 주님이 다시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9절) 그렇다고 보고 믿는 자는 복이 없다는 말씀은 아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며 그러기에 그들이 더 복되다는 말씀이다. 즉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보지 못하고 믿는 마음이야말로 순수한 마음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이다. 물론 보고 믿는 것만해도 다행은 다행이지만 그건 어쩌면 온전치 못한 믿음이다. 안 그런가? 부모가 자녀에게 약속을 했는데 손에 쥐어 주지 않으면 안 믿겠다고 하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그러나 부모님이 약속을 했을 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는다면 얼마나 갓난아이와 같이 순전한 믿음인가?

그렇다. 우리는 이런 순수한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정말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가? 주님께 믿지 못할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가?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 아니신가? 주님은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시지 않았는가? 당신께서 친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마땅히 이런 주님을 믿어야 하고 믿었으면 믿고 따라가야 하지 않는가? 그럴 때 얼마나 생명과 감사와 기쁨과 능력과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자신의 그 무지, 경험, 이성, 고집 이런 정말 별거 아닌 것들 다 내려놓고 진정으로 갓난 아기같은 순전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의 약속된 축복을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4.성경의 기록목적(30,31절)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31절을 보라.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기록목적이 뭐냐? 예수님 믿게 하는 것, 그러면 왜 예수님 믿게 하려고 하느냐,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렇다. 성경의 목적은 이것이다. 예수님을 알게 하는 것. 믿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목적이며,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며,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는 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한 구원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믿는 것, 그것을 믿었으면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그게 교회생활이다. 이거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고상한 무슨 소리를 해도 헛일이다. 교회는 철학을 가르치는 곳도 아니고, 무슨 봉사단체도 아니고, 개화기관도 아니다. 그런 것은 주변적인 것이다. 핵심은 언제나 믿음이다. 히11:6의 말씀을 보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러므로 이 시간 더욱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셔 들이자. 정말 나 자신은 생각이나 경험이나 이성이나 지식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며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그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여 그 안에서 새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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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 / 하나님의 영광 Sunday Night Service
제 목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말 씀 : 고전10:31-33

 

1.인간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31절)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존재의 목적에 부합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아름답고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해도 만약 존재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컴퓨터가 있습니다. 컴퓨터의 목적은 정보를 잘 처리하는 것입니다. 사용자가 키보드나 마우스를 통해서 원하는 정보를 입력하면 중앙처리장치에서 정보를 처리하여 디스플레이어에 그 결과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고성능의 컴퓨터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여기 서서 마이크를 통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마이크가 여기에 있어야 할 목적은 여러분에게 제 음성을 보다 잘 전달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이 마이크가 저의 목소리를 여러분에게 잘 전달해 주지 못한다면 이 마이크는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사람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제아무리 인물이 훤하고 키가 크고 능력이 많아도 만약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그런 인생은 쓸모없는 인생이요, 무가치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그 지식과 능력을 합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과 능력은 죽은 지식입니다. 아니 그저 죽은 지식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43:7에서는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혼자 영광을 독차지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때에 인간은 최상의 가치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신과 자신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갖게 되고 그럴때에 결국 인간 자신도 진정한 생명과 은혜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물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한다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그것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조건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31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먹는 문제를 비롯하여 모든 삶의 행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여러분의 삶의 모든 부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하나님도 기쁘시게 해드리고 여러분의 삶도 참된 기쁨과 가치와 의미가 있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 좀전에 말씀드렸던 31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위 또는 욕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본능적인 욕구나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식을 먹는 일 조차도 그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아니면 단순히 식욕을 채우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무언가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식생활을 하나님보시기에 합당하게 영위하여 그래서 육신의 건강도 도모하고, 건강한 육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의, 식, 주 등의 모든 문제가 포함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볼때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유명한 음식점을 여기저기 찾아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한끼에 몇만원씩하는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몇십만 몇백만원짜리 옷을 입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넥타이나 티셔츠 하나에 몇십만 몇백만원 가는 것도 있습니다. 참고로 제가 지금매고 있는 이 넥타이는 오천원짜리입니다. 저는 이런 행위는 하나님께서 별로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특히 먹고 마시는 문제를 생각할때에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음주와 흡연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일부 한국교회의 성도들 특히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는 술과 담배를 개방해야한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제법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사단의 유혹에 불과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 술 담배가 그 해독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술과 담배로 인해 건강을 해치고, 심지어는 생명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술로 인하여 가정 폭력이 발생하고 심지어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모든 범죄의 80%이상이 술담배에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모든 퇴폐향락의 중심에는 언제나 술과 담배와 마약이 관계되어 있습니다. 또 술과 담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물질을 낭비합니까? 그 시간과 그 물질을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사용한다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습니까?

더군다나 술과 담배는 결국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들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생명체를 파괴하고, 죄의 길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허용하라고 한다는 이것이 마귀의 유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1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냐, 아니면 하나님께 누를 끼치는 일이냐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의식주 문제를 비롯해서 공부를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결혼을 하는 것도,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농사를 짓든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지위와 권력과 명예를 얻어서 대접받고, 호의호식하기 위하여 공부하고 힘쓰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쉬고 노는 일 까지도 그저 쉬고 놀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을 통하여, 직장을 통하여, 쉬는 것을 통하여, 권력이나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자신과 자신의 가정과 이웃에게 기쁨과 은혜와 행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께서는 언제 어디서 어떤 삶을 영위하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말 한마디 할 때도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공부를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직장을 구할 때나 결혼을 할 때나 무엇을 할 때나 언제나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대전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바로 그러한 삶을 통하여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과 사람앞에서나 인정받으며 남에게도 큰 유익을 주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는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32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거치는 자」라는 것은 물론 남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남의 진로를 방해하고, 장애물이 되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남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고, 진리의 길로 가는 것을 막고 하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은 한마디로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우리 교회나 남의 교회나 어쨌든 상대방이 그 누구라고 할지라도 남을 걸려서 넘어지게 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 자가 되지 말라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말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 보면 너무나 이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남이야 고통과 상처를 받든 말든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기치고 도적질하고 빼앗고 때리고 죽이고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남의 길을 가로막아서 자기가 앞서 가려고 합니다. 남을 넘어뜨려서 자기가 일어서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고 헐뜯고 난리입니다. 요즈음 너도나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와서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가관도 아닙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교회에서도 이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말과 행실을 바로 해야지 나보다도 못한데 내가 거기 가서 무엇을 배우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내에서도 많은 갈등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너무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거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빨리 청소를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나의 말 한마디가, 나의 잘못된 행동이 혹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말 한마디가, 나의 잘못된 행동이 남을 실족하게 하고,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교회에 누를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행동 하나 하나가 정말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를 늘 생각하시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여러분께서는 결코 남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남을 세워주고, 남을 위로해주고, 천국길로 인도해주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러분 자신에게도 정말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 펼쳐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려면 남에게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에게 상처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을 정말 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래야 결국 인간들의 삶이 풍요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남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남을 유익하게하는 삶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남을 위해서 할 일이 무한히 많을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입을 것이 없는 자에게는 입을 것도 주어야 합니다. 병든자를 고쳐주기도 하고, 좌절과 낙심 중에 있는 자를 위로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남을 위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천만금을 준다해도, 헐벗은 자에게 아무리 좋은 옷을 많이 준다해도, 병든자에게 아무리 병을 고쳐준다고 해도 만약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먹을 것을 주고, 입혀주고, 병을 고쳐주는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고, 또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것을 통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먹고 입을 문제가 해결된다고 할지라도 그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하면 결국은 다시금 절망 할 수 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진정한 유익을 끼치고자 한다면 먹고 입을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하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일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일에 보다더 관심과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의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가운데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누려야 할 영적,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은혜로 누리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인생을 전인적으로 행복하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러한 일에도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의 역사에 참여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이 주님품으로 돌아오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물론 직접 나가서 전도도 해야 합니다. 사랑도 베풀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학교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찬양단원으로, 차량운행 봉사로, 청소와 식사당번으로 모든 영역에서 열심히 봉사도 해야 합니다. 헌금에도 물론 당연히 감사함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요, 생명을 살리는 일이요, 남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존재의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인생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만이 먼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뿐만 아니라 자신과 남의 생명을 유익하게 하는 가장 아름답고 가치있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언제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마시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거치는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을 넘어지게 만들고 아프게 만들고 상처받게 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거룩한 역사에 적극 참여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결국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지고, 여러분의 삶에는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고, 여러분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유익을 주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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