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예수님의 전도방법
말씀 : 예수님의 전도방법
제목 : 요4:1-5
어느 날 목사님이 강단에서 성도들에게 전도에 대하여 힘주어 말했다. “여러분, 전도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의 사명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자 한 집사님이 말했다. “목사님, 우리는 지혜도 부족하고, 말씀도 잘 모르고, 성령의 능력도 부족해서 전도를 잘 못합니다. 그런 일은 아무래도 목사님이 전문가시니까 목사님이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이 대답했다. “양이 새끼를 낳지 목자가 새끼를 낳는 것 보았습니까?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고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해 주면 양들이 안전하게 꼴을 먹으며 성장하게 되고 그러면 자기들끼리 새끼를 낳아 양무리가 많아지는 것 아닙니까?”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목사는 전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은 아니다. 예수님도 전도를 하셨는데 감히 누가 전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전도는 목사만 하는 일이 아니라 성도라면 누구나 해야 할 가장 막중한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 오신 목적이고, 십자가를 지신 목적이다. 그것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고,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왕도는 없다. 전도에 대한 분명한 사명감 가운데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다. 물론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은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은 아니다. 기도하며 가르침을 받으며 훈련하며 하나씩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전도의 기본적인 사항들을 보았다. 오늘부터는 전도의 실제적인 측면으로 여러 가지 전도의 방법들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전도에 대한 태도와 방법을 배워보자.
1.전인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다.
예수님의 전도사역을 압축해서 말씀하고 있는 부분이 두군데 있는데 그것은 마4:23절과 9:35절이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즉 예수님은 가르치심과 전도와 병고침을 통하여 전도사역에 힘쓰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이 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은 기도나 하시면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복음전파와 가르침과 병고침을 통해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직접 복음을 전하시는데 전인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직접 말씀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고 나아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것이다.
그냥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하셨고,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였으면 실천해야 한다. 실천하되 한편으로는 직접 복음을 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일에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자.
2.사람들과의 충돌을 가급적 피하셨다.(1-3)
오늘 본문 요4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이라는 곳에서 어떻게 한 여인을 주님품으로 인도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은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셨다는 것이다.
오늘 1-3절에 보라.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와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하여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제자들보다 많아졌다는 사실이 바리새인들이 알게 된 것을 계기로 하여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출발하셨다는 말씀이다. 왜 그러셨을까? 한마디로 지금은 다른 할 일이 많으셨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변론하거나 충돌하여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 배경을 보면 이렇다. 당시 세례요한은 갈릴리지역을 통치하던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아내를 삼은 것에 대하여 부당함을 말하다가 헤롯에 의하여 체포되어 구금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유대인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서슴없이 독설을 퍼붓곤 했기 때문이다. “마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니까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자기들의 노력 없이도 다른 사람에 의하여 제거되었으니 얼마나 통쾌한 일이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세례요한이 제거되어 좋아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또 다른 정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그저 하나의 정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도 세례요한보다 더 강력한 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증거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그들에게 어떤 빌미를 제공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하신 예수님은 아직은 이들과 불필요한 마찰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셨기에 갈릴리로 가시기로 한 것이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아직 할 일이 많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는 가급적 세상의 일반 대중이나 지도자나 통치자들과 가능한 마찰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찰이나 갈등이나 대립관계는 복음의 역사를 방해하고, 시간과 열정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저 좋은 게 좋다고 그들과 어울려서 적당히 살라는 것은 아니다. 분명 아닌 것은 아니고,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에 우리는 정말 지혜가 필요하다. 자칫 그들과 갈등이나 대립 관계가 되면 복음의 역사에도 지장을 받게 되고, 공연히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한마디로 말하면 분명히 선을 그을 부분은 긋되 협력해야 할 부분은 적극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건전하고 유익한 일에는 우리가 더욱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적인 일이라도 선한 일, 의로운 일, 유익하게 하는 일들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그들보다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서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결국 우리를 인정하게 되고, 나아가 존경심마져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의 역사도 보다 효과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5:16절에서 말씀하셨지 않는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세상에서 어떤 영역에서든지 빛된 모습을 가지자. 세상과 갈등하고 대립하고 기피하고 정죄받지 말고 정말 옳은 일, 선한 일, 의로운 일, 정직하고 거룩한 일등을 통하여 세상에서 인정받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자.
3.사람들이 기피하는 장소를 찾아가셨다.(4,5)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이유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이 기피하여 들어가지 않는 사마리아땅으로 들어 가셨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기피하는 이유는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마리아는 옛날 남북분열왕국시대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북왕국이 B.C.722년 앗수르에 의해 먼저 멸망하면서 앗수르 사람들은 사마리아의 유력한 자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그 대신에 자기네 나라 사람들과 그들의 정복지에서 다른 많은 이방인들을 사마리아로 보내어 함께 생활하도록 하였다. 그러다보니까 자연히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혼인을 하게 되었고 결국 이방인을 죄인으로 취급하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로부터 남왕국 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아주 추하게 여기며 멸시하며 상종하는 것을 꺼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북쪽에 있는 갈릴리를 가려면 같은 나라이면서도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는 것을 기피하여 서쪽의 해변길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동쪽의 베뢰아 길로 돌아가든지 하여 그 땅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셨던 것이다.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시되 그냥 가깝기 때문에 가신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로 가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가신 것이다. 그곳에서 주님께서 하실 일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사마리아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것은 오늘4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 “사마리아를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통행하여야 하겠다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KJV에서는 “He must needs go through Samaria.”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반드시 사마리아로 통과해야할 필요를 느끼셨고, 그래서 그 땅으로 일부러 들어가셨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사마리아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경멸하고 더럽게 여기는 땅이었지만 주님에게만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유대나 사마리아나 갈릴리나 주님에게는 모두가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고 있는 안타까운 땅이었다. 그래서 그곳에도 유대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를 느끼셨던 것이다. 아니 단순히 필요를 느낀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사실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멸시당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지 말고 그들에게도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우리가 된다안된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아무리 완고하고 추한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영혼이나 우리 영혼이나 똑같이 주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 생명이나 우리 생명이나 천하보다 귀한 것은 똑 같은 것이다.
그래서 딤전2:4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세가지 사실을 명심하자.
첫째는 예수님은 직접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시되 전인적인 방법을 동원하셨다는 것이다. 기도만 하지 않고 발로 뛰셨으며 복음을 전함과 동시에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직접 전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두 번째는 세상과 가급적 갈등관계를 피하고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거룩히 성별된 삶을 삶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건전하고 유익한 일들을 위하여서는 발벗고 나서서 세상의 좋은 협력자가 되어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멸시당하고 소외당하고 추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다. 그 영혼과 우리의 영혼이 똑같은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쏟으며 복음의 역사를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편으로 기도하고 진리의 말씀을 전하며 다른 한편으로 선한 일로 사랑의 빛을 비출 때 교회가 세상에서도 인정받고 존경받으며 복음의 역사도 더욱 힘있게 이루어 가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같이 기도하며 힘쓸 때 정말 주님의 복음의 역사가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우리들도 잘했다 칭찬듣고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조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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