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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 주님의 역사, 은총의 빛   

 

이사야 49장 1~6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 평강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201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로운 역사의 문이 열렸습니다. 새 역사는 신앙인에게 주님이 이끄시는 역사, 주님이 계획하시는 역사입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었다”(엡1:11)고 했습니다. 주님이 이끄시는 역사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만나고 삽니다. ‘주님의 역사’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세상의 역사는 ‘은혜 없는 역사’의 반복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는 말씀이 있습니다. 은혜의 빛을 깨닫지 못하는 세상은 은혜 없는 역사의 반복입니다. 말씀에 의지하지 않는 시대, 믿음이 없는 시대, 죄의 본성을 따르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은혜입니다. 1800년대 인물인 조지 뮐러는 ‘고아의 아버지’로 불렸습니다. 60년이 넘도록 1만명의 고아들을 보살피는 위대한 사역을 했습니다. 이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기도였습니다. 은혜가 메마른 이 세상에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은혜 없는 악순환의 시대에도 우리에게 은혜의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주님의 역사에는 ‘은혜의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사49:5)

주님의 역사 안에서는 나의 능력, 나의 생각, 나의 힘, 나의 명예, 나의 지혜로 살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만으로 사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연약할지라도 주님의 은혜 안에 있고자 한다면 은혜의 능력과 힘이 믿음의 자녀들에게 역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했을 때 역사를 봅시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광야의 메마른 사막이었습니다. 그들은 40년을 그곳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와 능력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의 만나를 먹이시고,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반석에 생수를 내시고, 입히시고 돌보셨습니다. 광야같이 메마른 곳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주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사는 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우리가 광야에 놓인 것 같은 인생을 살면서도 불안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센 폭풍처럼 세상의 방해가 일어나는데도 왜 마음은 평안할까요. 주님 은혜의 능력 덕분입니다. 주님은 은총의 빛으로 역사를 이끄십니다.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 주님은 은총의 빛을 지금도 비추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바라고,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봤고, 증거로 얻었을까요. 주님의 은총의 빛입니다. 세상을 향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의 능력이 믿음의 선진들을 증거 받은 사람들이 되게 했습니다.

주님의 역사 가운데서 주님은 우리를 은혜의 빛의 증거자로 부르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은총의 빛,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시고 승리하게 하심으로 주님의 역사를 이끄십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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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 있는 사람   

  

마태복음 5장 3절

10여년 전 단기선교팀을 이끌고 아프리카 케냐의 해안가 무슬림 지역을 방문했던 때였습니다. 아프리카는 물 사정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해안가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물을 파도 얕게 파면 짠물이 섞여 있기 때문에 깊이 파야 해서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런데 무슬림 사원인 모스크에는 언제나 우물이 있습니다. 모스크에서는 이방인이나 이방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우물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고, 무슬림들만 이용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무슬림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바로 옆 모스크에 우물이 있어도 수㎞를 걸어가 물을 길어 와야 했습니다. 그 마을에서 우리가 전도를 시작하자 한 무슬림이 우리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알라는 이렇게 돈이 많아서 우리에게 우물도 파주고 한다. 그런데 너희가 믿는 예수는 가난해서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그를 믿어야 하는가.” 이 말이 오늘도 제 귓전을 때립니다. 돈이 없는 가난한 예수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해주지 못한 것인가. 가난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렇게 가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는가.

최근 한 선배 선교사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아프리카에 있었던 영적 부흥의 역사를 알았습니다. 아프리카 교회의 역사에도 선교사가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 영적인 변화를 통해 부흥을 일으킨 시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도 이 아프리카에 어느 대륙보다 큰 영적 부흥이 있고, 4억명 정도의 크리스천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선배 선교사께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가난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붙잡지 못하고 예수님만 붙잡을 수 있었다. 다른 것은 바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만 의지했다.”

가난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 가난이 우리의 인생과 삶을 진지하게 한다는 것을 저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고 하는 것이 가난함에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어느 인디언 추장이 미국 대통령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지요. “어떻게 하늘, 그리고 땅을 팔고 살 수가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아주 이상한 생각입니다. 신선한 공기와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팔 수 있습니까.”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존재할 때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유지하고 지킬 수 있습니다. 신앙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믿음도 돈으로 매겨보려 하는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주님의 귀한 가르침마저 뒷전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저는 무슬림의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더 많은 재정을 이곳 아프리카에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재정만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저에게도, 저의 자녀에게도 그리고 아프리카 형제와 자매들에게도 돈으로 살 수 없는 예수를 제대로 전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어느 시골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릴 때 그곳 목사님이 부르셨던 노래가 기억납니다. 지금도 그 노랫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그 노래를 부르며 울었던 그 시간을 기억합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잘 생겨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지식으로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이상윤 목사 (케냐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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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꿈꾸며 살아가야 할까?  믿음의 글  

 

마태복음 6장 19∼34절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가 무엇일까요? 상호 신뢰 없이는 살아가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사회를 신용이 필요한 사회, 신용사회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현금보다 편리한 카드 사용이 일반화되기까지는 개인과 기업의 신용이 담보되어 있습니다. 신용이 무너지면 부도가 나고 파산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같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나를 정말 신뢰하느냐?” 살아계시며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모든 일에 믿음이 없어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문제 대부분이 먹고사는 것과 관련된 게 아닐까요? 그러나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믿음 없는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고백한다면 먹고사는 일에 얽매이는 삶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분의 뜻대로 살아갈까를 고민하며 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을 향한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창 15:6, 롬 4:3).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게 가장 소중한 보물을 하늘에 쌓아 그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 가길 원하십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있기에 나의 마음과 순종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보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도록 요청하십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사로잡혀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의를 이루어가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내가 무엇을 바라보며 꿈꾸는가에 따라 보물의 위치가 결정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 하십니다. 눈이 나쁘면 어둠이요,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입니다. 무엇을 보며 꿈꾸는가에 따라 내 몸이 밝기도 하고 어둠에 갇히기도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마음을 빼앗기면 온몸이 어둠에 갇히며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온몸이 밝을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겨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히 11:26). 모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민족의 지도자로 출애굽의 큰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우리도 눈을 들어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상 주시는 하나님을 소망합시다(빌 3:14). 우리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온 몸이 밝아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같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내게 있어 보물은 무엇인가요? 출세입니까? 돈 명예 권력입니까? 나를 입히시고 먹이시며 필요를 채우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의 아버지로 믿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봅시다.

내 삶의 모든 것을 드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내 삶의 주인이 출세나 돈이나 명예와 권력과 같은 먹고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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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 예수가 빛이다  
 

마태복음 4장 12∼23절

이사야서의 전체적인 배경은 ‘흑암’과 ‘어둠’입니다. 이사야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흑암과 어둠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절망하는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실존하는 인간,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절망합니다.

‘믿음 없음’이 곧 절망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절망합니다. 절망은 곧 죄입니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흑암과 어둠은 믿음 없이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사야가 이들에게 비쳐올 것이라고 예언한 빛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가장 먼저 “빛이 있으라”(창1:3)고 하셨습니다. 그 빛으로 어둠을 밝히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보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그 로고스(말씀)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빛이 비치는 곳마다 생명이 싹트게 하는 참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캄캄하고 공허하고 절망적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정치 지도자들이 미덥지 못하거나 범죄자들이 들끓어서인가요.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지 않아서인가요. 그런 것도 한몫하겠지만 근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밝기는 달라집니다. 흑암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빛이고 소망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고,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가르치셨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수많은 무리들이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이후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성난 군중이 됐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돌변한 이유는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 위에 뿌려졌습니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잔인함은 흑암이라 말할 수 있으나 그들의 순교는 결코 흑암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 속에 감춰진 십자가의 영광이며, 그 영광의 빛은 지금까지도 우리를 강하게 비춥니다.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순교한 이들의 삶 속에서 빛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빛을 발했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주현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4:16)는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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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설교 / 어두운 시대의 희망  


 

사무엘상 3장 1∼10절

선민사상이 투철한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도 자기의 나라를 부를 때 거룩한 땅(Holy land)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보다 그 땅이 기름지고 윤택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라고 해도 실상 성지 순례에서 살펴본 바로는 의문점이 남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네 땅을 거룩한 땅이라 칭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땅은 불완전한 요소가 많아도 하나님께서 약속한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셨다는 이런 신앙의 기초 위에 나라가 세워지고 민족의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의 땅에서 말씀대로 살면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 말씀이 곧 형통이요.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는 시대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희귀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희망을 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소망이 없는 시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려고 아이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부름 받은 시대는 먼저 경제적으로 풍요를 구가하던 시대였습니다. 여인들은 포도주에 취하고 제물을 드리는데 황소 한 마리를 드릴 수 있었던 점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또 도덕적인 질서가 파괴된 시대였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처럼 성적으로 타락하여 여자들은 성소에서 주정하고 뇌물 받고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재판이 횡행하는 시대였습니다.

또 군사적으로는 주변 나라들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의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엘리 제사장에게서 보는 대로 늙고 무기력하였습니다. 어려운 시대에 제사장이 하나님의 정의를 바로 선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 자신의 편안함만 추구하였기에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오늘 이 땅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정치적으로 이념대결이 심화되어 있고 경제적으로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불균형이 심각합니다. 더구나 종교적으로는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은 증발되어버렸습니다. 살기 좋다는 말에 속아선 안 됩니다. 좋은 세상이라는 말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운 시대에 부름 받은 주의 종들이 일어나 외쳐야 합니다. 엘리야가 아합을 책망하며 백성을 권고하였듯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하며 백성들을 꾸짖듯,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진리의 말씀으로 힘껏 외쳐야 할 때입니다. 인간의 감각으로 이 시대를 보지 말고 이 시대를 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말씀이 홍수같이 쏟아져도 그 말씀이 인간의 감각으로 흐른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말씀은 아닙니다. 물량주의 축복의 말은 홍수인데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의의 외침은 희귀한 시대입니다.

이제 영적 침체를 걷어내고 이스라엘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사무엘 같은 주의 종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모두 두려워 떨리라 이는 엘리가 그의 아들들의 죄악을 엄히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이 이뤄질지도 모릅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영적 수준을 높여야 할 때임을 명심하는 신자가 바로 이 시대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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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 신앙과 삶이 만나는 자리  

 

야고보서 2장 14∼23절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념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입니다. 신념은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신앙은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고 믿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는 믿음을 세 부류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감정이 앞서는 믿음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효력을 가지지 못함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단순히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은 믿음입니다.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보면서 동정심만 느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17절)”라고 성경은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만으로, 말로만 하는 믿음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뜻입니다.

둘째, 지식이 앞서는 믿음입니다. 사탄은 성경에 대해 성도들보다 해박합니다. 광야에서는 성경 지식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신 줄 알고 그 하나님만 의지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생활화될 때 그 말씀의 씨앗이 자라나 30배, 60배, 100배의 기적을 맛볼 수 있습니다.

셋째, 따르고 함께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살아 있고 능력 있는 믿음을 가졌던 한 사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 말씀에 그는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하나님과 그 사랑, 그 능력을 믿고 따랐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루시고 채워주신 하나님, 불가능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체험하고 믿었기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절망하면서 드린 것이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드렸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이런 행동하는 믿음, 즉 신앙과 삶이 만나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님입니다. 예수님 열두 제자들의 삶이 변화된 것은 3년 동안의 제자훈련이 아니라 오순절날의 성령 체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충만해지면서 방언을 하게 됐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출발점이요 선교의 단초가 된 것입니다.

성경 공부를 하고 제자 양육을 받더라도 성령의 본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사역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오늘 이 시대에 복음화의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는 오직 성령님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와 기독인들이 전심으로 올라야 할 고지는 오직 성령 충만의 고지입니다. 심혈을 기울여 사모해야 할 주제 역시 오직 성령 충만입니다.

오늘날 세상 지식은 넘치고 넘치지만 초대교회가 보였던 능력을 쉽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은과 금은 점점 풍족해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할 만한 능력은 부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이라 착각하고 바른 믿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앙과 삶을 연결하는 성령님을 죽도록 사모해야겠습니다.

지식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의한 행함과 함께하는 진정한 믿음이 있을 때 그 자리가 신앙과 삶이 만나는 자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모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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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설교 /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베드로전서 3장 15~22절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들은 종종 자녀나 학생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생각을 올바르게 가져야 행동도 올바르게 나타난다.” 선한 생각은 선한 행동이 나타나도록 하는 뿌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대부분 이런 교육을 받은 우리들의 사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와 악이 만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 본문 말씀과 같이 “선한 양심을 갖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선한 양심을 갖게 해 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어떤 가르침을 주시는지 말씀을 통해 깨닫고자 합니다.

첫째,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를 ‘주’로 삼을 때 갖게 되는 마음입니다. 본문 15절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마음에 늘 그리스도 예수를 영적 주인으로 영접하고 우리 마음을 세상의 생각과 구별되는 성결한 마음으로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가정과 학교에서 선한 생각을 갖도록 교육하고 있으나 이 교육은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도록 하는 도덕적이고 이성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교육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인간 영혼의 문제에까지 세상 가르침은 침투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이 세상은 어지러운 것입니다. 인간 영혼에까지 선한 양심을 갖게 해 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모든 죄를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선한 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삼을 때만 가질 수 있는 것이요, 그러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둘째, 선한 양심에는 언제나 고난이 따릅니다. 여기서 선한 양심은 세상적 양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을 때 갖게 되는 마음입니다. 기독교적 선한 양심을 가질 때만 온전한 선한 행동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통해 나타나는 선한 행동에는 언제나 고통이 따릅니다. 본문 17절에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사도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선한 양심을 갖고 있다면 그 증거로 ‘고난이 따르는 선한 행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우리의 처지를 어렵게 하는 세상적인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통한 축복을 더욱 크게 받는 고난입니다. 기독교인의 선한 행동은 세상을 올바로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 원동력의 주인공입니다.

끝으로 선한 양심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이 됩니다. 기독교인의 선한 양심은 선한 행동으로 나타나고 선한 행동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열매로 결실을 맺습니다. 이 결실이 바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열매입니다. 선한 양심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선한 믿음입니다. 믿음을 올바르게 가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기독교인이 선한 양심을 가진 자들로서 올바르게 행동하고, 올바르게 주님을 증거한다면 아직까지 주님을 영접하지 못한 많은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길의 역할을 잘 수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선한 안내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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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설교 / 복음의 비밀은 영광의 소망

 

골로새서 1장 27절

세상의 소망은 꽃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헛된 영광을 좇아 시기하고 다투며 살아갑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이 세속화되는 이유는 하늘의 영광을 소망하지 않고, 이 땅의 재물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해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복음의 비밀은 그리스도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복은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광입니다. 사람은 죄를 범해 거룩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영광을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으로 받습니다. 이 유업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비밀입니다. 이 비밀은 복음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망은 믿음이 신실한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충성함으로 하늘에서 받는 아름다운 지위와 상급입니다. 이를 사모하는 사람은 거룩하고 흠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구약시대 믿음의 선진들은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큰 민족을 이루고, 가나안 땅을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번성해 왕들이 나올 것이며, 가나안 온 땅을 영원한 기업이 되리라 언약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일부는 여호수아시대에 이루어졌고, 왕들에 대한 약속은 다윗시대에 이루어졌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는 믿음의 선진들이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고 기뻐하며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증거합니다.

참 복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장막에 거한 것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 하늘에 새 예루살렘 성을 예비하십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명예는 달란트입니다.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됩니다. 구약시대는 복음의 빛이 희미했어도 믿음의 선진들이 하늘의 기업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의 소망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과 하나님 앞에 가서 상을 받기에 합당한 삶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장(22장)에서는 예수님 재림의 목적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얻게 되는 하늘의 기업은 생명보다 귀합니다.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이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신앙의 목적을 알지 못해 방황하거나 죄악에 얽매이면 안 됩니다. 주를 향한 소망을 분명하게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게 되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됩니다.

지극히 영화롭고, 아름다운 영광의 자리에 참여합시다. 이 영광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갈망하며 영광의 보좌에 계신 주님 앞에 흠 없는 자녀로 서도록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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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 / 어두운 시대의 희망   
 

사무엘상 3장 1~10절

선민사상이 투철한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도 자기의 나라를 부를 때 ‘거룩한 땅(Holy land)’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보다 그 땅이 기름지고 윤택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메마른 땅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땅을 거룩한 땅이라 칭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땅은 불완전한 요소가 많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약속한 축복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의 기초 위에 민족의 공동체가 이루어졌고,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 말씀대로 살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이 형통이요, 복이라는 증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는 시대였다고 증언합니다. 그것은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희귀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소망이 없는 시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려고 아이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이 부름 받은 시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를 구가하던 시대였습니다. 여인들은 포도주에 취하고, 제물을 드리는 때에 황소 한 마리를 드릴 수 있었음을 보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는 질서가 파괴됐던 시대였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처럼 성적으로 타락하였고, 관리들은 뇌물을 받아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재판이 횡행했으며, 군사적으로는 주변 나라들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힘을 잃었던 시대였습니다. 다 돌아보면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의 정의를 바로 선포하여야 함에도, 자신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며 살며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이 땅에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정치적으로 이념 대결이 심화되어 있고, 경제적으로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불균형이 너무도 심각합니다. 무엇보다 더구나 종교적으로는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은 증발돼 사라지고, 제 각자의 이권을 추종하는 작금의 현실은 암담할 따름입니다. 때가 이러한데도 겉보기에 그럴듯하여 살 만하다는 생각에 속기도 합니다.

어려운 시대에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이 일어나 외쳐야 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하며 백성을 꾸짖듯, 엘리야가 아합을 책망하며 백성에게 권고하였듯,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진리의 말씀으로 힘껏 외쳐야 할 때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이 시대를 보지 말고, 이 땅의 문제를 제대로 통찰해야 합니다. 말씀이 홍수같이 쏟아져도 그 말들이 사람에게서만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다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전해야 합니다. 넘쳐흐르는 축복의 말씀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정의의 말씀도 외쳐야 합니다.

이제 영적 침체를 걷어내고 이스라엘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사무엘 같은 주의 종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모두 두려워 떨리라 이는 엘리가 그의 아들들의 죄악을 엄히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주님의 음성이 다시 울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영적 수준을 높여, 어두운 시대의 희망이 되어야 할 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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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도마의 부활절 요20장24~29절

 

기독교에는 중요한 두 절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탄절이요, 또 하나는 부활절입니다. 성탄절은 이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절기요, 부활절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심으로 사망권세를 깨고 인간의 구속을 완성시킨 절기입니다.

 

즉, 성탄이 인류 구속의 시작이라면 부활절은 인류구속을 완성한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미를 바로 깨닫고 믿는다면 이 두 절기의 축복과 은혜는 한없이 나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 두 절기를 개개인에게 적용해본다면 또 다른 의미와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성탄절은 객관적인 주님의 탄생이지만 부활절은 주관적인 주님의 탄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계실 때는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지만 실제로 주님은 그 당시 만난 사람들 속에서만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아니 가까이 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절 이후에는 예수님이 부활한 후 성령으로 오시어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어느 때든지 믿을 수도 있고,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 개인으로 보면, 성탄절보다 부활절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나의 부활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부활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주님의 수난의 행사 등을 하며 기념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성령으로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런 행사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절은 나의 부활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도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마는 의심 많은 제자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도마가 의심 많은 제자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자리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은혜 받는 자리에 도마만이 빠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주님을 쫓아다닌다고 해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신앙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흔들리는 의심의 장벽을 넘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됩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20:25)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주님은 도마를 사랑하사 도마가 있는 장소에 다시 나타나시고 손을 내밀어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그때 도마에게 부활의 주님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의심 많고 피상적인 신앙의 장벽을 넘게 된 것입니다.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요20:28)

 

그제서야 예수님은 도마의 주님이 된 것입니다.즉 도마의 부활절이 온 것입니다. 도마가 그랬듯이 의심 없이 주님을 믿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오직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즉 나 자신의 성탄이 되는 부활절이 와야 합니다. 그래야 이 어렵고 힘든 세대를 믿음으로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의심은 했지만 도마처럼 자신의 부활절을 맞이하여 주님을 만난 자는 복된 자입니다. 보지 못하고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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