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나귀 타신 예수님(Wednesday Evening Sermon)

나귀 타신 예수님  
마태복음 21장 1∼11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과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주여, 나를 지금 구원하소서, 호산나!”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선장군처럼 정복자의 위엄과 힘을 상징하는 전차와 말을 타지 않으시고 보잘 것 없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사람이 왕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구원할 왕이 보잘 것 없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럽습니까. 누가 봐도 이 세상을 구원할 왕의 모습은 아닙니다.

스가랴 9장 9절 말씀은 예수님이 겸손한 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신의 힘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지위를 스스로 낮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한 왕으로 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시겠다는 것은 자신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포기하는 겸손과 섬김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의 무기력은 이제 곧 일어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희생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팬터마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예수님을 기대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결정됩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그 힘의 숭배,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고, 더 많은 성공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세속적 욕망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힘 있고 권세 있는 예수님을 기대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은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모습입니다. 이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겸손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신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패권을 가진 힘 있는 권력자의 모습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고 외쳤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융성했던 다윗의 시기를 회복할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끌려 다니고 채찍 맞는 모습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폭력적으로 돌변합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돌변’이 아닙니다. 그들 안에 잠재됐던 힘의 숭배가 드러난 것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예수님은 나귀를 타신 겸손한 예수님입니다. 나귀 타신 예수님을 우리 자신의 욕망의 투사로 변형시키면 안 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서 찬양하거나 예배하면 안 됩니다. 그건 예배가 아니라 우상숭배입니다. 적지 않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욕망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예배합니다. 나귀 타신 겸손한 예수님의 모습보다 능력과 이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모습만 보려 합니다.

여러분, 나귀 타신 겸손한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하고 호산나 찬양할 때, 우리가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힘으로 자기를 축적하는 인생이 아니라 겸손과 섬김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십자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환영하고 영접하는 예수님은 권력과 힘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겸손과 섬김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입니다. 자신을 제로로 낮추는 십자가 죽음을 향해 기꺼이 나귀 타고 가시는 예수님의 겸손을 깊이 묵상하고 받아들이는 사순절 기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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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복의 사람 아브라함 (Wednesday Evening Sermon)

복의 사람 아브라함
창세기 12장 1∼3절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 세상을 맡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고자 계획을 세우셨으나 인간이 죄를 범해 복의 사람이 저주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모이는 곳마다 죄악이 넘쳐나고 심지어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신다는 하나님의 탄식소리가 천지를 울렸습니다. 인류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 아래 노아의 홍수를 당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인류 구원의 계획을 세우셔야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인류 구원의 서막을 여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에는 복이라는 단어가 5번이나 계속해서 쓰여 있는데, 그 복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브라카’이며, ‘하나의 복’ ‘복 자체’ ‘복덩이’ 등으로 해석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복 대신 하나님의 저주가 아담에게, 가인에게, 함에게, 뱀에게, 그리고 자연에게까지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저주가 창세기 12장 1∼3절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복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불행과 저주에서 복과 생명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먼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천하 만민에게 복의 통로가 될 만큼 충분한, 차고 넘치는 복이었습니다. 천지창조를 마치시며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신 주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없는 넉넉한 복이시기에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어 ‘브라카’의 상태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한 복을 받아 그 사람 자체가 복덩이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복덩이가 되면 그가 머무는 곳과 일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넘침같이 하나님의 복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본문 3절은 브라카가 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선포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그 저주가 저주한 사람에게 되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복은 손자인 야곱으로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복으로 무장한 사람을 저주의 화살이 빼앗지 못했고, 저주와 불행도 그를 침범할 수 없습니다. 비양심적인 삼촌 라반도, 폭력적인 형 에서도 야곱을 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어 3절 하반절에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임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진 복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매개로 해 열방과 모든 민족과 모든 족속에게로 흘러간다는 의미입니다. 이 복이 우리에게까지 흘러 우리 모두가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모두 한 사람의 축복의 통로가 돼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브라카’가 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순종했나요. 갈 바를 알지 못했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갔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복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아브라함처럼 복의 사람임을 믿고 그 복으로 이웃을 주님의 사랑으로 나누며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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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좋은 마음과 복음의 열매(Wednesday Evening Sermon)

좋은 마음과 복음의 열매 

누가복음 8장 4-15절

 

본문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비유의 마지막인 1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본문의 씨앗과 밭 비유를 하셨을까요. 어느 사람은 복음을 듣고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잘 맺었는데, 어느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이것을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의 교훈은 씨앗과도 같은 하나님 말씀이 좋은 밭에 뿌려지면 열매를 맺지만 길가와 돌밭과 가시밭과 같은 곳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몇 십 년 믿어도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그것은 말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같은 상황에서 어느 무엇을 탓하기보다 자신의 마음이 문제인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본문 15절에서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을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 마음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좋은 마음과 성숙한 인격으로 옥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더욱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개인주의와 물질주의가 어느 때보다 팽배한 속에서 살아가기에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마음은 세상의 것으로 황폐화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복음의 열매를 맺는 데 본이 되시는 예수님 마음을 항상 바라보고 닮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때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고 물질과 명예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또한 온유하고 겸손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셨습니다. 우리도 세속적 영향 아래 있는 우리 자신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말씀이라면 죽기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 언어와 행실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성적과 결과는 말씀을 지성적으로 아는 것보다, 세상의 좋은 지위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우리 마음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목사님들이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한 원인을 후에 깨닫고 말씀하시기를 “나의 지식에 너무 의존했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는 삶을 살 때 교회가 성장했다고 증언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도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었지만 지성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세련되게 설교할 때는 영혼 구원에 실패했습니다. 비논리적이더라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설교할 때는 많은 영혼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 선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승리가 실현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은 다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떤 사람에게 풍성하게 임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복음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좋은 마음과 인격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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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풍성한 열매를 (Wednesday Evening Sermon)

 

풍성한 열매를 맺읍시다
요한복음 15장 5∼8절

 

광대한 성경 말씀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어떤 단어가 좋을까요. 바로 예수(복음)일 것입니다.

예수 복음의 내용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잘 요약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지만 이런 기쁜 소식이 있음에도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사람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까요.

십자가에 달린 독생자를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안에 생명의 주인으로 주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내가 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할 때 구원의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요 15:5).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받게 됩니다(고후 5:17). 그러나 우리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노아 당시에도 입으로는 “주여, 주여”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방주(예수 안) 안에는 거하지 않아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8명이라고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입으로 “주여, 주여” 부르고 그들의 목적(떡, 병고침 등) 때문에 주님을 따랐지만 정작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지 못하고 떠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요 6:66∼68).

입술로는 “주여, 주여”라고 부르짖을지라도 생명의 떡이며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노아 때 사람들처럼, 벳세다 들녘 예수님 당시 사람들처럼 입으로는 “주여, 주여” 부르면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썩은 가지처럼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 마당(성전 뜰)만 밟는다고 탄식하고 계십니다(사 1:12). 이처럼 성전 뜰(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부른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안에 거하지 않고 욕심 때문에 성전 뜰만 밟은 벳세다 들녘의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생명의 떡을 먹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 거룩한 영광의 빛이신 예수님 안에 거해야겠습니다.

예수의 부활 승천을 준비하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거룩하고 경건하게 지내는 교회 절기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야겠습니다. 우리의 정과 욕심 때문에 죄로 인해 어두워질수록 빛이신 예수님을 멀리하지 말고 그 영광의 빛 속으로 들어갑시다.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그 거룩한 영광의 빛 속에서 찬란한 부활의 풍성한 생명을 누립시다. 2014년 부활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풍성한 부활의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제자가 됩시다.

이천구 광명 행복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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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Wednesday Evening Sermon)

인생의 밑바닥에서

요나서 2장1∼10절

 

인생을 살다 보면 밑바닥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심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외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만 밑바닥 인생을 살 때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죄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죄와 상관없이 고난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1·4절).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내 고집 내려놓고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 환경과 내 운명에 매여 있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밑바닥 인생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 요나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고통이 자신의 죄로 인해 생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요나는 그 고통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모든 고통이 죄로 인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밑바닥 인생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점검해 볼 수 있는 영성을 지녀야 합니다.

둘째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감사로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9절). 하나님의 백성은 가장 크게 실패했을 때 가장 크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실패 속에서도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라고 했습니다.

지금 고난을 겪고 계십니까?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오셨습니까? 이제 환경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회복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오른손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 이 순간의 예배는 나의 눈물과 회개와 헌신이 담긴 최상의 예배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서원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9절). 요나는 자신이 지금 왜 배 밖으로 던져졌고, 물고기 뱃속에 처해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고요하던 바다가 왜 풍랑이 심하게 이는지, 선원들이 제비를 뽑았는데 왜 요나 자신이 뽑혔는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는데 왜 큰 물고기가 자신을 집어삼켰는지, 다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전도자로 쓰시려고 집요하게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이제 요나가 하나님의 그 명령에 순종할 때가 왔습니다. 9절에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요나서 3장을 보면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니느웨 백성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땅을 용서하셨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새 인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하여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감사하고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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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그리스도인으로의 삶

요한복음 12장 23~30절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깊이 되새기며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을 되돌아볼 때입니다.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큰 사랑을 깨달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을 앞두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통해 부활의 예고를 하십니다. 이어 12장에서는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뵙고자 제자들에게 요청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면서 밀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면서 주님을 따르는 길은 영광의 삶이지만 희생의 길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헬라 사람들, 즉 이방인들도 들어야 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물론이거니와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깊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입니다. ‘영광스러운 삶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훗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순교의 제물로 영광의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7∼28절에는 앞으로 지고 가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괴로운 마음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나 “내가 이때를 위해서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며 결국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결심하십니다. 그때 하늘에서는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천둥소리가 들렸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라며 진정한 영광의 삶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두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밀알의 썩어짐을 통한 희생보다는 세상의 영광과 권위와 자부심과 명예욕으로 군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위해 기대와 가치, 목표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한복음 12장 23절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는 그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믿음으로 사는 길에 고난이 닥치고 어려운 시련이 밀려와도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희생과 헌신으로 온전히 영광을 돌려드릴 때가 왔구나’라고 여기며 십자가의 희생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담대하게 주님의 길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는 귀히 여기시고 부활의 영광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주님을 따라가는 그 길이 영광의 길입니다.

전정림 목사(진도 칠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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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Wednesday Evening Sermons)

복음의 도구

마태복음 13장 31∼32절

 

열매와 씨앗은 본질상 같은 것이지만 기능은 분명히 다릅니다. 씨앗이나 열매는 모두 우리의 식단을 채울 수 있으나, 종자로 구분되는 씨앗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를 이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분명한 ‘종자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전 인류의 종자가 되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모든 백성의 종자가 되었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종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면 항상 택한 한 사람 혹은 택한 민족을 통해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마치 누룩 비유나 겨자씨 비유처럼 작은 것에서 시작해서 전체에게 확산되는 방법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태반이 되게 했으며, 신약의 선교 역사를 보면 로마와 영국, 미국 등과 같은 나라들을 통하여 선교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쓰임 받은 나라들은 처음부터 복음의 도구가 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국력과 경제력, 문화적 힘에 복음을 실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칼과 병거로 유럽과 아프리카를 지배했으나 그 지배력은 결국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대영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을 얻었던 영국은 제국의 힘에 복음을 실어 전 세계에 전파했습니다. 현재의 미국도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데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은 전 세계 175개국 중 726만명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8대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문화적으로는 한류라 불리는 드라마와 K팝이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확산되고 있습니다. 역사상 대한민국의 영향력이 이렇게 커진 때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우리 민족을 쓰시려고 만드신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해외선교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실제로 많은 성과도 보았습니다. 초기 선교의 경우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 경제력과 문화적 힘을 바탕으로 보다 공격적인 선교 역량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한국 교회는 선교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더욱 순전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도록 하는 데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동족이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한 북한 동포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북녘 땅은 우리에게 아직도 미전도 지역으로 남아 있는 ‘땅끝’입니다.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했지만 북한 상황은 결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비관적이라고 해도 우리는 동토의 땅 북한에도 복음이 전파될 것을 기대하며 파종해야 합니다. 그 종자는 탈북 동포들일 수 있고, 중국 국경에 살아가는 조선족일 수도 있으며, 북한 땅에 드나드는 경제인일 수도 있습니다. 대량의 종자가 아니라 단 한 알의 종자라도 좋은 땅에 뿌려지기만 하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종자의식을 갖고 북한 땅에 뿌려질 종자를 찾아 파종하는 데 우리의 역량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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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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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하나님의 구원 역사

마태복음 13장 31∼32절

 

열매와 씨앗은 본질상 같은 것이지만 기능은 분명히 다릅니다. 씨앗이나 열매는 모두 우리의 식단을 채울 수 있으나, 종자로 구분되는 씨앗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를 이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분명한 ‘종자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전 인류의 종자가 되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모든 백성의 종자가 되었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종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면 항상 택한 한 사람 혹은 택한 민족을 통해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마치 누룩 비유나 겨자씨 비유처럼 작은 것에서 시작해서 전체에게 확산되는 방법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태반이 되게 했으며, 신약의 선교 역사를 보면 로마와 영국, 미국 등과 같은 나라들을 통하여 선교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쓰임 받은 나라들은 처음부터 복음의 도구가 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국력과 경제력, 문화적 힘에 복음을 실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칼과 병거로 유럽과 아프리카를 지배했으나 그 지배력은 결국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대영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을 얻었던 영국은 제국의 힘에 복음을 실어 전 세계에 전파했습니다. 현재의 미국도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데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은 전 세계 175개국 중 726만명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8대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문화적으로는 한류라 불리는 드라마와 K팝이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확산되고 있습니다. 역사상 대한민국의 영향력이 이렇게 커진 때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우리 민족을 쓰시려고 만드신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해외선교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실제로 많은 성과도 보았습니다. 초기 선교의 경우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 경제력과 문화적 힘을 바탕으로 보다 공격적인 선교 역량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한국 교회는 선교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더욱 순전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도록 하는 데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동족이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한 북한 동포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북녘 땅은 우리에게 아직도 미전도 지역으로 남아 있는 ‘땅끝’입니다.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했지만 북한 상황은 결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비관적이라고 해도 우리는 동토의 땅 북한에도 복음이 전파될 것을 기대하며 파종해야 합니다. 그 종자는 탈북 동포들일 수 있고, 중국 국경에 살아가는 조선족일 수도 있으며, 북한 땅에 드나드는 경제인일 수도 있습니다. 대량의 종자가 아니라 단 한 알의 종자라도 좋은 땅에 뿌려지기만 하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종자의식을 갖고 북한 땅에 뿌려질 종자를 찾아 파종하는 데 우리의 역량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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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부활의 생명의 열매

요한복음 15장 5∼8절

 

광대한 성경 말씀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어떤 단어가 좋을까요. 바로 예수(복음)일 것입니다.

예수 복음의 내용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잘 요약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지만 이런 기쁜 소식이 있음에도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사람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까요.

십자가에 달린 독생자를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안에 생명의 주인으로 주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내가 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할 때 구원의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요 15:5).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받게 됩니다(고후 5:17). 그러나 우리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노아 당시에도 입으로는 “주여, 주여”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방주(예수 안) 안에는 거하지 않아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8명이라고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입으로 “주여, 주여” 부르고 그들의 목적(떡, 병고침 등) 때문에 주님을 따랐지만 정작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지 못하고 떠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요 6:66∼68).

입술로는 “주여, 주여”라고 부르짖을지라도 생명의 떡이며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노아 때 사람들처럼, 벳세다 들녘 예수님 당시 사람들처럼 입으로는 “주여, 주여” 부르면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썩은 가지처럼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 마당(성전 뜰)만 밟는다고 탄식하고 계십니다(사 1:12). 이처럼 성전 뜰(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부른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안에 거하지 않고 욕심 때문에 성전 뜰만 밟은 벳세다 들녘의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생명의 떡을 먹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 거룩한 영광의 빛이신 예수님 안에 거해야겠습니다.

예수의 부활 승천을 준비하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거룩하고 경건하게 지내는 교회 절기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야겠습니다. 우리의 정과 욕심 때문에 죄로 인해 어두워질수록 빛이신 예수님을 멀리하지 말고 그 영광의 빛 속으로 들어갑시다.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그 거룩한 영광의 빛 속에서 찬란한 부활의 풍성한 생명을 누립시다. 2014년 부활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풍성한 부활의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제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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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나귀를 타고 입성

마태복음 21장 1∼11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과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주여, 나를 지금 구원하소서, 호산나!”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선장군처럼 정복자의 위엄과 힘을 상징하는 전차와 말을 타지 않으시고 보잘 것 없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사람이 왕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구원할 왕이 보잘 것 없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럽습니까. 누가 봐도 이 세상을 구원할 왕의 모습은 아닙니다.

스가랴 9장 9절 말씀은 예수님이 겸손한 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신의 힘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지위를 스스로 낮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한 왕으로 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시겠다는 것은 자신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포기하는 겸손과 섬김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의 무기력은 이제 곧 일어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희생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팬터마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예수님을 기대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결정됩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그 힘의 숭배,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고, 더 많은 성공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세속적 욕망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힘 있고 권세 있는 예수님을 기대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은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모습입니다. 이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겸손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신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패권을 가진 힘 있는 권력자의 모습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고 외쳤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융성했던 다윗의 시기를 회복할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끌려 다니고 채찍 맞는 모습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폭력적으로 돌변합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돌변’이 아닙니다. 그들 안에 잠재됐던 힘의 숭배가 드러난 것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예수님은 나귀를 타신 겸손한 예수님입니다. 나귀 타신 예수님을 우리 자신의 욕망의 투사로 변형시키면 안 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서 찬양하거나 예배하면 안 됩니다. 그건 예배가 아니라 우상숭배입니다. 적지 않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욕망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예배합니다. 나귀 타신 겸손한 예수님의 모습보다 능력과 이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모습만 보려 합니다.

여러분, 나귀 타신 겸손한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하고 호산나 찬양할 때, 우리가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힘으로 자기를 축적하는 인생이 아니라 겸손과 섬김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십자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환영하고 영접하는 예수님은 권력과 힘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겸손과 섬김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입니다. 자신을 제로로 낮추는 십자가 죽음을 향해 기꺼이 나귀 타고 가시는 예수님의 겸손을 깊이 묵상하고 받아들이는 사순절 기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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