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예배설교(Wednesday Evening Sermons)

구원에 이르는 자

요한복음 6장 1∼71절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집회 후에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식사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는 신약 4복음서에 공통적으로 기록될 만큼 큰 기사이며 이적이었습니다. 남자만 5000명쯤 참석한 집회는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가 7만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성황리에 이뤄진 집회였습니다.

오병이어를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그 자리를 피해 홀로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15절).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아다녔고 왕으로 세우려는 자들은 다음날까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22∼25절).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시고, 개인의 문제와 더불어 대중에게 오병이어의 이적까지 베푸시는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이 기다리던 메시아임에 틀림 없었습니다. 이제는 정치적으로 입문해서 왕위에 오르는 일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바와 같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으로 왕권을 회복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먹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합니다.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그들은 계속해서 그런 기적을 바라고 있었습니다(31∼34절).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곧 세상에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먹고 배부르기 위한 것”이라고 꾸짖으십니다(26절). 이어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의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양식”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곧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달아 십자가의 삶을 따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는 이와 같은 토론이 긴 시간 이뤄집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를 경험한 그들은 예수님의 진의를 깨닫지 못합니다(60∼64절). 세상적인 복을 추구하는 신앙의 의식구조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66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기적을 체험한 많은 무리들은 결국 예수님을 떠납니다. 남은 사람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뿐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열두 제자들도 마음이 흔들립니다. 예수님께서 분위기를 아시고 질문하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67절)

이때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그러나 예수님은 열두 제자만 남은 상태에서조차 “너희 중에 한명은 나를 팔아넘길 자로서 마귀”라고 말씀하십니다(70절). 결국 제자는 열한명만 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써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광야에서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멸망시켰다”고 전했습니다(고전 10:4∼5).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장정만 60만명을 헤아렸지만 다 죽고 가나안에 입성한 이는 여호수아와 갈렙 둘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10가지 재앙을 목격했고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체험했으며,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셨지만 그들은 광야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 시대에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끝까지 참아 구원에 이르는 자는 과연 얼마나 되며 누구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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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설교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이사야 53장 1∼12절

 

이사야 53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을 주제로 그의 징계와 고난이 우리를 위하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징계를 당함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사 53:5).

그런데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의 모습은 초라합니다(1∼3절). 이사야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가 사람들이 기대하던 슈퍼영웅이 아니라 메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이 애처롭고 초라한 모습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풍채나 사회적 지위, 가문, 경제적 부유함, 학문적인 어떤 매력도 없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는 연약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은 700년 후 복음서에서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한 것처럼 멸시받는 지역 나사렛 사람으로 나셨습니다. 그가 친구로 삼고 제자로 부르신 사람들도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또한 비난 받던 세리와 장애인, 병든 자,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는 죄인의 친구”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허물 많고 초라한 인생들의 친구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또한 그 메시아는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4∼6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죄를 담당하도록 한 것입니다. 바로 대속주로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허물과 죄가 드러나지 않게 감추고 숨기고 의로운 척하며 살아갑니다. 같은 죄인들끼리 서로 정죄하며 판단하고 외면하고 멸시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메시아는 죄가 없었으나 대신 죗값을 받으셨고 형벌을 받고 죽으셨습니다(7∼12절). 바로 대속 제물로, 제물 된 어린양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십니다. 완전한 의인이시면서도 죄인 취급을 받으시며 곤욕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묵묵히 침묵하시며 재판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보리산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곧 나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대속의 제물이십니다.

그러면 하필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방법을 사용해 죄인들을 구원하셔야 했을까요.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계획이라면 훨씬 더 강력하고, 훨씬 더 수월하며, 훨씬 더 설득력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친히 죄인의 몸으로 오셔서 몸소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러한 방식을 피할 수는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창조자이신 하나님, 세상을 만드시고 세상의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께서 죄의 책임을 메시아에게 전가하시고, 대속하셔서 모든 인간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한 구속이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고전 1:18).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십자가의 대속을 능력으로 힘입는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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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Wednesday Evening Sermons)

예수님의 사랑

요한복음 13장 34∼35절

 

사전에 보니 ‘사랑’은 ‘어떤 상대를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의 희락이며 또 상대를 돕고 이해하는 마음’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성경에서 인간의 마음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요.

첫째,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며 우리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은혜와 축복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저 내려주십니다. 다음의 말씀을 묵상하기 바랍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6) 수고하는 농부는 축복을 먼저 받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먼저 많이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도 많이 받습니다. 불신자에서 신자로 변화된 사도 바울은 누구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내 몸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과 사랑에 빠져 보십시오. 사도 바울처럼 기적이 일어나고 천국이 열릴 것입니다.

둘째, 가족들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1∼8) 우리가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합니다. 권력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명예를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가족을 버리지 않고 잃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가정들이 사랑이 없어 불화로 해체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탈선하고, 깨어지는 세상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가족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가족 간 사랑 안에 용서와 희생과 헌신과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셋째,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 지파인 우리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웃 사랑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죽을 수밖에 없는 이웃의 영혼을 그 죽음에서 건져내준다면 이것처럼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2014년은 우리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과 가족과 이웃을 마음껏 사랑하고 섬기시길 기원합니다. 직장과 사업과 학교에서 하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넉넉히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미션스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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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고난의 길을 가라  

사무엘상 23장 1∼14절

 

사무엘상 23장에는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의 공격을 피해 도망다니던 다윗은 모압 땅 미스베로 달아납니다. 그러나 언약의 땅인 이스라엘 지경을 벗어난 그 피난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시고, 다윗은 순종합니다. 그가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땅은 유다 땅 ‘헤렛 수풀가’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포항의 호미곶이나 울산의 간절곶 같은 곳입니다.

사울이 찾아내기 힘든 외진 곳으로 도피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다윗은 숨 죽인 채 지냅니다. 그러다 돌발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일라 지역으로 블레셋이 침공한 것입니다. 정부군을 이끌고 나가서 이들을 물리쳐야 하는 몫은 당연히 사울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로 인식합니다. 다윗이 기도하자 하나님은 전쟁에 참여하라고 응답하십니다. 그일라 땅은 우리나라로 치면 청주나 대전 정도가 됩니다. 내륙지방인 것이죠. 다윗의 처지에서 이곳으로 가서 전쟁을 벌이는 일은 상식 이하의 선택입니다. 블레셋 민족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동시에 사울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하게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죠.

본문 3절을 보면 참모들이 반대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받은 응답에 확신이 있어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5절에서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하지만 그 뒤 참모들이 예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23장 7절에 보면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사울의 인식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순종의 결과가 참으로 비참합니다. 14절에는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고 나옵니다. 다윗에게 주어진 은혜는 ‘목숨 보존과 도망’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루시는 방식은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그일라 전투에 나갔지만 결국 사울에게 쫓기게 될 줄 알았을까요?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참모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윗이 몰랐을 리가 있겠습니까. 고난이 닥칠 것을 알고도 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 시대 많은 성도들은 예수를 진심으로 믿은 대가를 보상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고, 고난 받는 삶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요 복이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고난 받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사도행전 5장 41절에는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나옵니다. 사도들의 신앙의 자세를 보면 다른 것이 은혜와 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위해 죽기까지 수고하고 고난 받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복된 은혜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자리로 부름 받은 것 자체를 기뻐했던 것입니다.

다윗과 사도들이 보여주고 있는 ‘자원하여 고난 받는 삶과 신앙’의 자세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 여러분 모두의 현실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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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복의 근원
창세기 12장 1~8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저마다 해야 할 일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모든 삶의 의미는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며, 모든 사람이 깨달아야 할 사실입니다.

모든 삶의 의미는 소명의식에서 비롯돼야 합니다(창 12:1∼2). 물론 삶 자체에 의미가 있는지 묻는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고민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 사람은 어둡고 지루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삶의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를 성경에서는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 그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받은 복을 전해주는 통로가 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든 평범한 자리에 있든 반드시 힘써야 할 것이 바로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복을 누립니다(창 12:3∼8). 긴 삶 속에서도 삶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건강과 장수,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이 복인 줄 압니다. 그런데 이런 복은 마치 모래알을 손에 움켜쥔 것과 같아서 시간이 흘러가면 다 사라지고 맙니다. 오랫동안 붙잡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시 1:1∼6).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자신이 하는 일이 다 형통합니다. 또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자신의 의지나 욕망을 다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두 아들 비유’(마 21:28∼32)는 순종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제가 사는 서울 성동구의 구정 목표는 ‘사람 중심의 행복한 성동’입니다. 1910년대 러시아 혁명의 구호도 ‘인간이 주인인 세상을 건설하자’였습니다. 인간의 꿈과 의지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이런 사상은 창조 이래 계속돼 왔는데 하나님 중심의 세상과 맞선 주장입니다.

그래서 낙원에서 쫓겨났고, ‘바벨탑 사건’과 같이 계속 하나님께 반항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인간은 인간의 꿈과 욕망을 실현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인간이 주인인 세상을 만들고 싶어한다는 말입니다. 이 사상은 날이 갈수록 맹렬하게 불타오릅니다. 슬프게도 희망은 보이지 않고 절망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답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요 14:26)입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으며,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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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Wednesday Evening Sermons)

억지로 해야 하는 일 

마태복음 27장 27~32절

 

살다보면 하고 싶어서, 좋아서 하는 일도 있지만, 싫어도 억지로 해야 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밥,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공부,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효도,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직장생활,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운동도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누가 도와 달라고 하면 억지로라도 도와야 합니다. 사순절 고난주간입니다. 억지로 십자가 지다 축복받은 시몬을 통해 은혜 받으시는 고난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도 억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자원해서 십자가 지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원해서 십자가 지셨지만, 억지로도 지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려 세상에 오셨지만, 막상 지려니 끔찍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저주와 지옥의 형벌을 너무 잘 아시는 분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 지려 하니 고민되어 죽겠다. 나를 위해 기도 좀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를 “하나님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세요”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이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십니다. 결국 주님은 자원해서, 그리고 억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억지로 주님 지신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 받고, 천국을 얻었고, 성령 받았고, 죄용서 받았고, 병고침 받았고, 평강을 누리며, 지혜를 얻었고, 만 가지 은혜를 입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 지다보면 거기에 만 가지 축복이 임합니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집니다. 구레네 시몬은 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 근처 ‘구레네’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시다 너무 힘들어 쓰러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하시더니, 쓰러져 일어날 줄을 모릅니다. 로마 군인이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 힘 꽤나 써 보이는 시몬에게 “너 이리 와!” 해서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워줍니다. 시몬은 주님의 십자가 억지로 졌습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 덕분에 시몬의 가문이 대대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기쁨으로 살고 언제나 순종하면서 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기 싫을 때, 예배드리기 싫을 때야말로 억지로라도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가장 큰 축복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지고 골고다까지 갔습니다. 시몬은 그 덕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온 가족이 다 믿고, 두루 존경을 받았습니다. 시몬과 그 기족이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가하면,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보면 시몬을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합니다. 사도 바울은 시몬과 그 부인을 자기 부모로 모셨습니다(롬 16:13). 시몬이 억지로 진 십자가는 시몬의 온 가족이 구원받고 존경 받게 된 은총의 십자가였습니다. 이런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져야 합니다. 성도들은 날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가야 합니다. 자원해서 기쁨으로 하면 좋겠지만 억지로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내게 주시는 최고의 복입니다. 억지로 시작한 일이 우리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마음 상해도 중단해버리는 시대에, 억지로 교회 다니고, 억지로라도 봉사하다보면 그게 최고의 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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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부활절 사건에 대하여

마가복음 15장 11∼15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산헤드린은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적용해 처형했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절박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고집한 산헤드린의 속사정을 살펴봅시다.

마가복음 15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위해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산헤드린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1절). 산헤드린의 주된 구성원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입니다.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운 주동자라면 가룟 유다는 결정적인 공모자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한통속이 된 것은 그들의 속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를 도적이라 했습니다(요12:6).

산헤드린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위선자라 할 수 있습니다(마23:13). 재판장인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죽일 만한 그 어떤 죄,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할 만한 죄를 찾지 못하고 놓아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산헤드린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의 요구를 따라야 했습니다. 산헤드린의 목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을까요.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대접 받고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고, 부자들과는 억지로라도 친구가 되려 했어도 가난한 자들과는 눈도 마주치기 싫어했습니다.

누가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말뿐인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눅10장).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위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약한 자의 편이 되어야 할 저들은 오히려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은 어디를 가든 병자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한센병 환자도, 이방인도, 죄인이라고 비난받는 이들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유대인도 사마리안도 심지어 로마인도 찾아가 만나주시고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 곁은 언제나 인산인해였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감사하고 감탄하며 찬송하고 영광을 노래했습니다. 주님께서 감싸주시는 따스함은 저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산헤드린이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점점 커가는 데 자신들은 작아져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무엇이었습니까. 산헤드린은 군중을 충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님이 베푸신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완결판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요19:30)입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 부활입니다. 2016년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는 한국교회가 되길 소망하면서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한 주 되길 바랍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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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Wednesday Evening Sermons)

믿음의 대상 

디모데전서 2장 4절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믿음의 대상을 정하곤 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이나 부모를 믿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이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것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유는 영혼의 구원 문제가 기독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아는 것과 다릅니다. “믿습니다”라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도, 큰 믿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믿음은 반드시 그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른 믿음은 영혼을 구원합니다. 바른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육신을 쫓지 않고 성령을 따르게 합니다. 바른 믿음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영적 분별력을 갖게 합니다. 특별히 구원 얻는 믿음은 자기 생각이나 확신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정확한 자각과 함께 회개와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마음에 받아들일 때 이루어집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성경 지식이나 믿음의 크기가 아니고 ‘내용’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자각’과 ‘하나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는 구원 얻는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했다”고 사도행전 20장 21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하셨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기분 나쁘지만 인정해야만 합니다. 인정하면 구원의 길이 보입니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첫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나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9: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흘리신 그 피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는 성경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받아야 할 죄의 심판, 즉 죄의 형벌을 예수님께서 내 대신 받아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대가, 죄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대신 죗값을 치르신 것이죠. 그래서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지 않으신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마음에 영접하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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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Wednesday Evening Sermons)

십자가는 완성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

 

“다 이루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무언가를 완성했다는 의미입니다. 완성이라고 하면 자신이 볼 때 만족스러운 상태, 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도 힘든 십자가의 잔을 마시면서 다 깨지고 상하신 상태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이런 상태가 어떻게 다 이룬 상태가 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니 이 원리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을 생각해 보십시오. 에덴은 완전한 곳이었습니다. 그 에덴동산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것을 거기에 두었을까요. 에덴동산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어야 완성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이 동산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데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바로 이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제한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결국 완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것은 완전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만족과 제한이 없는 상황을 추구하라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바로 그 말에 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 온 세상이 그 말에 계속 속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내실 뿐 아니라 우리가 속은 거짓말에서 회복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진정한 완성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점 같아 보이는 것을 통해 나를 죽이면 그곳에서 완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약점과 아픔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약점이 도리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다가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당황합니다. 때로는 원망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님을 기억하라.”

만약 그것을 통해서 자아를 죽이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내 인생에 일어난 어려운 일들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내가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자아에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교회와 가정과 사회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모든 분쟁의 근원이 됩니다. 반대로 자기를 버리면 그곳에 평화가 생깁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그곳에 진정한 만족이 생깁니다. 당신은 십자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나요. 아니면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나요.

이경렬 부산 온천제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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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믿음으로 승리하는 길  

 

마가복음 5장 25~34절

 

오늘 본문에는 12년간 고통 속에 살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혈루증을 앓던 그녀는 수많은 의사들을 찾아다녔지만 치료 방법을 찾지 못했고, 재산을 다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병을 죄에 대한 형벌과 같이 생각했던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그녀를 철저히 고립시켰을 것입니다.

고통에 빠진 사람에게 처음 들리는 것은 사단의 음성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낙심시켜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만듭니다. 자아의 음성도 들립니다. 우리의 시선은 좁아져 겪고 있는 아픔과 슬픔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동안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다 잊고 마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성령의 음성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시선을 갖고 내 문제를 볼 때 고통을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이 여인이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27절을 보면 이 여인이 ‘무리 가운데 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이런 용기를 갖게 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에 퍼진 희망의 소식을 굳게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녀에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리들 틈에 끼어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혈루증의 근원이 마르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온전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모르시겠습니까. 모든 고통의 근원까지 마르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30절을 보면 능력이 예수님에게서 나갔다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지요. 제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예수님의 옷을 스쳤고 심지어 예수님의 몸에 접촉한 사람들도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찾으신 손은 소문을 자신의 믿음으로 발전시킨 사람의 손입니다. 믿음의 손이 예수님의 능력을 나타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찾자 여인은 엎드려 모든 사실을 고했습니다. 허락도 없이 옷자락을 만졌기에 그녀는 자신의 병이 고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잘한 일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모든 무리들이 여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녀를 바라보십니다.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요.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라고 말하십니다. 그제야 여인은 환하게 웃었고, 동시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의 정체성이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딸, 구세주의 딸, 예수님의 딸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평생 듣고 싶었던 말, 평생소원이 믿음으로 인해 해결되었습니다.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새로운 인생이 그녀에게 펼쳐진 것입니다.

혹시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 여인처럼 믿음을 회복합시다.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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