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무기력한 부활신앙

요한복음 20장 11~18절

 

본문의 주인공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축복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예수님의 부활 현장에서 울고 있습니다(요 20:11). 그녀는 왜 울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무덤 속에 있던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을 때 사람들이 주님을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13절)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끝까지 보살피고자 하는 여인의 착한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와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이 땅에 오실 때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는 고난에 참여하려고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한 것(막 10:4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곧 일어날 일들을 설명해 주셨습니다(마 20:18∼19).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속물이 되기로 작정하고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였고 죄악의 권세를 이기기 위해 부활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주님의 이러한 가르침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모두가 십자가 앞에서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부활의 현장에서도 여전히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성취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찬양하는 대신 울고 있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녀에게 찾아오셔서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십니다. 주께서 부활하셨다면 무덤이 비어 있어야 당연한 것 아닐까요. 만일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보았다면 안심하고 울지 않았을까요. 말씀이 이뤄진 현장에서 오히려 감격하고 기뻐해야 될 자리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불신앙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무엇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리에서도 낙심하여 울고 있는 여인처럼 부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고 무덤에 찾아와 그곳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면 만남은 환희와 감격의 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결코 우리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절망하던 제자들처럼 무기력하게 비춰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고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은 여전히 사람을 살리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울고 앉아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기 위해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우리들에게 빨리 그곳으로 오라고 명하십니다. 우리의 지난 허물을 들추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죄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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