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수요저녁예배설교 예수님의 십자가 (September,Wednesday Worship Sermon)

예수님이 베푸신 사랑

마가복음 15장 11∼15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산헤드린은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적용해 처형했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절박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고집한 산헤드린의 속사정을 살펴봅시다.

마가복음 15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위해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산헤드린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1절). 산헤드린의 주된 구성원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입니다.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운 주동자라면 가룟 유다는 결정적인 공모자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한통속이 된 것은 그들의 속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를 도적이라 했습니다(요12:6).

산헤드린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위선자라 할 수 있습니다(마23:13). 재판장인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죽일 만한 그 어떤 죄,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할 만한 죄를 찾지 못하고 놓아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산헤드린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의 요구를 따라야 했습니다. 산헤드린의 목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을까요.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대접 받고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고, 부자들과는 억지로라도 친구가 되려 했어도 가난한 자들과는 눈도 마주치기 싫어했습니다.

누가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말뿐인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눅10장).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위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약한 자의 편이 되어야 할 저들은 오히려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은 어디를 가든 병자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한센병 환자도, 이방인도, 죄인이라고 비난받는 이들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유대인도 사마리안도 심지어 로마인도 찾아가 만나주시고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 곁은 언제나 인산인해였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감사하고 감탄하며 찬송하고 영광을 노래했습니다. 주님께서 감싸주시는 따스함은 저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산헤드린이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점점 커가는 데 자신들은 작아져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무엇이었습니까. 산헤드린은 군중을 충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님이 베푸신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완결판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요19:30)입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 부활입니다. 2017년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는 한국교회가 되길 소망하면서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한 주 되길 바랍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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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러운 삶의 비결

요한복음 12장 23~30절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깊이 되새기며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을 되돌아볼 때입니다.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큰 사랑을 깨달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을 앞두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통해 부활의 예고를 하십니다. 이어 12장에서는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뵙고자 제자들에게 요청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면서 밀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면서 주님을 따르는 길은 영광의 삶이지만 희생의 길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헬라 사람들, 즉 이방인들도 들어야 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물론이거니와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깊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입니다. ‘영광스러운 삶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훗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순교의 제물로 영광의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7∼28절에는 앞으로 지고 가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괴로운 마음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나 “내가 이때를 위해서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며 결국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결심하십니다. 그때 하늘에서는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천둥소리가 들렸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라며 진정한 영광의 삶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두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밀알의 썩어짐을 통한 희생보다는 세상의 영광과 권위와 자부심과 명예욕으로 군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위해 기대와 가치, 목표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한복음 12장 23절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는 그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믿음으로 사는 길에 고난이 닥치고 어려운 시련이 밀려와도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희생과 헌신으로 온전히 영광을 돌려드릴 때가 왔구나’라고 여기며 십자가의 희생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담대하게 주님의 길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는 귀히 여기시고 부활의 영광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주님을 따라가는 그 길이 영광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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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인생에서

요나서 2장1∼10절

 

인생을 살다 보면 밑바닥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심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외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만 밑바닥 인생을 살 때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죄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죄와 상관없이 고난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1·4절).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내 고집 내려놓고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 환경과 내 운명에 매여 있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밑바닥 인생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 요나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고통이 자신의 죄로 인해 생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요나는 그 고통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모든 고통이 죄로 인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밑바닥 인생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점검해 볼 수 있는 영성을 지녀야 합니다.

둘째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감사로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9절). 하나님의 백성은 가장 크게 실패했을 때 가장 크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실패 속에서도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라고 했습니다.

지금 고난을 겪고 계십니까?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오셨습니까? 이제 환경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회복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오른손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 이 순간의 예배는 나의 눈물과 회개와 헌신이 담긴 최상의 예배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서원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9절). 요나는 자신이 지금 왜 배 밖으로 던져졌고, 물고기 뱃속에 처해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고요하던 바다가 왜 풍랑이 심하게 이는지, 선원들이 제비를 뽑았는데 왜 요나 자신이 뽑혔는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는데 왜 큰 물고기가 자신을 집어삼켰는지, 다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전도자로 쓰시려고 집요하게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이제 요나가 하나님의 그 명령에 순종할 때가 왔습니다. 9절에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요나서 3장을 보면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니느웨 백성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땅을 용서하셨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새 인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하여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감사하고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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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와 종자의식


마태복음 13장 31∼32절

 

열매와 씨앗은 본질상 같은 것이지만 기능은 분명히 다릅니다. 씨앗이나 열매는 모두 우리의 식단을 채울 수 있으나, 종자로 구분되는 씨앗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를 이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분명한 ‘종자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전 인류의 종자가 되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모든 백성의 종자가 되었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종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면 항상 택한 한 사람 혹은 택한 민족을 통해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마치 누룩 비유나 겨자씨 비유처럼 작은 것에서 시작해서 전체에게 확산되는 방법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태반이 되게 했으며, 신약의 선교 역사를 보면 로마와 영국, 미국 등과 같은 나라들을 통하여 선교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쓰임 받은 나라들은 처음부터 복음의 도구가 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국력과 경제력, 문화적 힘에 복음을 실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칼과 병거로 유럽과 아프리카를 지배했으나 그 지배력은 결국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대영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을 얻었던 영국은 제국의 힘에 복음을 실어 전 세계에 전파했습니다. 현재의 미국도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데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은 전 세계 175개국 중 726만명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8대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문화적으로는 한류라 불리는 드라마와 K팝이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확산되고 있습니다. 역사상 대한민국의 영향력이 이렇게 커진 때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우리 민족을 쓰시려고 만드신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해외선교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실제로 많은 성과도 보았습니다. 초기 선교의 경우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 경제력과 문화적 힘을 바탕으로 보다 공격적인 선교 역량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한국 교회는 선교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더욱 순전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도록 하는 데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동족이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한 북한 동포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북녘 땅은 우리에게 아직도 미전도 지역으로 남아 있는 ‘땅끝’입니다.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했지만 북한 상황은 결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비관적이라고 해도 우리는 동토의 땅 북한에도 복음이 전파될 것을 기대하며 파종해야 합니다. 그 종자는 탈북 동포들일 수 있고, 중국 국경에 살아가는 조선족일 수도 있으며, 북한 땅에 드나드는 경제인일 수도 있습니다. 대량의 종자가 아니라 단 한 알의 종자라도 좋은 땅에 뿌려지기만 하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종자의식을 갖고 북한 땅에 뿌려질 종자를 찾아 파종하는 데 우리의 역량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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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영광스러운 삶의 비결

요한복음 12장 23~30절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깊이 되새기며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을 되돌아볼 때입니다.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큰 사랑을 깨달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을 앞두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통해 부활의 예고를 하십니다. 이어 12장에서는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뵙고자 제자들에게 요청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면서 밀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면서 주님을 따르는 길은 영광의 삶이지만 희생의 길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헬라 사람들, 즉 이방인들도 들어야 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물론이거니와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깊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입니다. ‘영광스러운 삶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훗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순교의 제물로 영광의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7∼28절에는 앞으로 지고 가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괴로운 마음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나 “내가 이때를 위해서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며 결국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결심하십니다. 그때 하늘에서는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천둥소리가 들렸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라며 진정한 영광의 삶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두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밀알의 썩어짐을 통한 희생보다는 세상의 영광과 권위와 자부심과 명예욕으로 군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명예와 권위를 위해 기대와 가치, 목표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한복음 12장 23절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는 그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믿음으로 사는 길에 고난이 닥치고 어려운 시련이 밀려와도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희생과 헌신으로 온전히 영광을 돌려드릴 때가 왔구나’라고 여기며 십자가의 희생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담대하게 주님의 길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는 귀히 여기시고 부활의 영광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주님을 따라가는 그 길이 영광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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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수요저녁예배설교] 억지로 진 십자가의 신비 (Auguest, Wednesday Evening Sermon)

억지로 진 십자가의 신비

마태복음 27장 27~32절

 

살다보면 하고 싶어서, 좋아서 하는 일도 있지만, 싫어도 억지로 해야 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밥,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공부,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효도,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직장생활,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운동도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누가 도와 달라고 하면 억지로라도 도와야 합니다. 사순절 고난주간입니다. 억지로 십자가 지다 축복받은 시몬을 통해 은혜 받으시는 고난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도 억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자원해서 십자가 지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원해서 십자가 지셨지만, 억지로도 지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려 세상에 오셨지만, 막상 지려니 끔찍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저주와 지옥의 형벌을 너무 잘 아시는 분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 지려 하니 고민되어 죽겠다. 나를 위해 기도 좀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를 “하나님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세요”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이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십니다. 결국 주님은 자원해서, 그리고 억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억지로 주님 지신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 받고, 천국을 얻었고, 성령 받았고, 죄용서 받았고, 병고침 받았고, 평강을 누리며, 지혜를 얻었고, 만 가지 은혜를 입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 지다보면 거기에 만 가지 축복이 임합니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집니다. 구레네 시몬은 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 근처 ‘구레네’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시다 너무 힘들어 쓰러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하시더니, 쓰러져 일어날 줄을 모릅니다. 로마 군인이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 힘 꽤나 써 보이는 시몬에게 “너 이리 와!” 해서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워줍니다. 시몬은 주님의 십자가 억지로 졌습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 덕분에 시몬의 가문이 대대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기쁨으로 살고 언제나 순종하면서 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기 싫을 때, 예배드리기 싫을 때야말로 억지로라도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가장 큰 축복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지고 골고다까지 갔습니다. 시몬은 그 덕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온 가족이 다 믿고, 두루 존경을 받았습니다. 시몬과 그 기족이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가하면,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보면 시몬을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합니다. 사도 바울은 시몬과 그 부인을 자기 부모로 모셨습니다(롬 16:13). 시몬이 억지로 진 십자가는 시몬의 온 가족이 구원받고 존경 받게 된 은총의 십자가였습니다. 이런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져야 합니다. 성도들은 날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가야 합니다. 자원해서 기쁨으로 하면 좋겠지만 억지로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내게 주시는 최고의 복입니다. 억지로 시작한 일이 우리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마음 상해도 중단해버리는 시대에, 억지로 교회 다니고, 억지로라도 봉사하다보면 그게 최고의 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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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수요저녁예배설교] 복의 근원 (Auguest, Wednesday Evening Sermon)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라
창세기 12장 1~8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저마다 해야 할 일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모든 삶의 의미는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며, 모든 사람이 깨달아야 할 사실입니다.

모든 삶의 의미는 소명의식에서 비롯돼야 합니다(창 12:1∼2). 물론 삶 자체에 의미가 있는지 묻는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고민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 사람은 어둡고 지루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삶의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를 성경에서는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 그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받은 복을 전해주는 통로가 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든 평범한 자리에 있든 반드시 힘써야 할 것이 바로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복을 누립니다(창 12:3∼8). 긴 삶 속에서도 삶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건강과 장수,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이 복인 줄 압니다. 그런데 이런 복은 마치 모래알을 손에 움켜쥔 것과 같아서 시간이 흘러가면 다 사라지고 맙니다. 오랫동안 붙잡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시 1:1∼6).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자신이 하는 일이 다 형통합니다. 또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자신의 의지나 욕망을 다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두 아들 비유’(마 21:28∼32)는 순종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제가 사는 서울 성동구의 구정 목표는 ‘사람 중심의 행복한 성동’입니다. 1910년대 러시아 혁명의 구호도 ‘인간이 주인인 세상을 건설하자’였습니다. 인간의 꿈과 의지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이런 사상은 창조 이래 계속돼 왔는데 하나님 중심의 세상과 맞선 주장입니다.

그래서 낙원에서 쫓겨났고, ‘바벨탑 사건’과 같이 계속 하나님께 반항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인간은 인간의 꿈과 욕망을 실현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인간이 주인인 세상을 만들고 싶어한다는 말입니다. 이 사상은 날이 갈수록 맹렬하게 불타오릅니다. 슬프게도 희망은 보이지 않고 절망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답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요 14:26)입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으며,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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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고난의 길을 가라 (Wednesday Evening Sermon)

고난의 길을 가라  

사무엘상 23장 1∼14절

 

사무엘상 23장에는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의 공격을 피해 도망다니던 다윗은 모압 땅 미스베로 달아납니다. 그러나 언약의 땅인 이스라엘 지경을 벗어난 그 피난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시고, 다윗은 순종합니다. 그가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땅은 유다 땅 ‘헤렛 수풀가’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포항의 호미곶이나 울산의 간절곶 같은 곳입니다.

사울이 찾아내기 힘든 외진 곳으로 도피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다윗은 숨 죽인 채 지냅니다. 그러다 돌발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일라 지역으로 블레셋이 침공한 것입니다. 정부군을 이끌고 나가서 이들을 물리쳐야 하는 몫은 당연히 사울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로 인식합니다. 다윗이 기도하자 하나님은 전쟁에 참여하라고 응답하십니다. 그일라 땅은 우리나라로 치면 청주나 대전 정도가 됩니다. 내륙지방인 것이죠. 다윗의 처지에서 이곳으로 가서 전쟁을 벌이는 일은 상식 이하의 선택입니다. 블레셋 민족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동시에 사울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하게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죠.

본문 3절을 보면 참모들이 반대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받은 응답에 확신이 있어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5절에서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하지만 그 뒤 참모들이 예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23장 7절에 보면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사울의 인식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순종의 결과가 참으로 비참합니다. 14절에는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고 나옵니다. 다윗에게 주어진 은혜는 ‘목숨 보존과 도망’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루시는 방식은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그일라 전투에 나갔지만 결국 사울에게 쫓기게 될 줄 알았을까요?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참모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윗이 몰랐을 리가 있겠습니까. 고난이 닥칠 것을 알고도 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 시대 많은 성도들은 예수를 진심으로 믿은 대가를 보상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고, 고난 받는 삶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요 복이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고난 받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사도행전 5장 41절에는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나옵니다. 사도들의 신앙의 자세를 보면 다른 것이 은혜와 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위해 죽기까지 수고하고 고난 받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복된 은혜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자리로 부름 받은 것 자체를 기뻐했던 것입니다.

다윗과 사도들이 보여주고 있는 ‘자원하여 고난 받는 삶과 신앙’의 자세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 여러분 모두의 현실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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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사랑합시다 (Wednesday Evening Sermon)

사랑합시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

 

사전에 보니 ‘사랑’은 ‘어떤 상대를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의 희락이며 또 상대를 돕고 이해하는 마음’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성경에서 인간의 마음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요.

첫째,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며 우리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은혜와 축복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저 내려주십니다. 다음의 말씀을 묵상하기 바랍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6) 수고하는 농부는 축복을 먼저 받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먼저 많이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도 많이 받습니다. 불신자에서 신자로 변화된 사도 바울은 누구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내 몸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과 사랑에 빠져 보십시오. 사도 바울처럼 기적이 일어나고 천국이 열릴 것입니다.

둘째, 가족들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1∼8) 우리가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합니다. 권력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명예를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가족을 버리지 않고 잃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가정들이 사랑이 없어 불화로 해체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탈선하고, 깨어지는 세상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가족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가족 간 사랑 안에 용서와 희생과 헌신과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셋째,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 지파인 우리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웃 사랑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죽을 수밖에 없는 이웃의 영혼을 그 죽음에서 건져내준다면 이것처럼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2017년은 우리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과 가족과 이웃을 마음껏 사랑하고 섬기시길 기원합니다. 직장과 사업과 학교에서 하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넉넉히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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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대속하러 오신 메시아 (Wednesday Evening Sermon)

대속하러 오신 메시아

이사야 53장 1∼12절

 

이사야 53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을 주제로 그의 징계와 고난이 우리를 위하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징계를 당함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사 53:5).

그런데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의 모습은 초라합니다(1∼3절). 이사야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가 사람들이 기대하던 슈퍼영웅이 아니라 메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이 애처롭고 초라한 모습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풍채나 사회적 지위, 가문, 경제적 부유함, 학문적인 어떤 매력도 없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는 연약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은 700년 후 복음서에서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한 것처럼 멸시받는 지역 나사렛 사람으로 나셨습니다. 그가 친구로 삼고 제자로 부르신 사람들도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또한 비난 받던 세리와 장애인, 병든 자,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는 죄인의 친구”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허물 많고 초라한 인생들의 친구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또한 그 메시아는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4∼6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죄를 담당하도록 한 것입니다. 바로 대속주로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허물과 죄가 드러나지 않게 감추고 숨기고 의로운 척하며 살아갑니다. 같은 죄인들끼리 서로 정죄하며 판단하고 외면하고 멸시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메시아는 죄가 없었으나 대신 죗값을 받으셨고 형벌을 받고 죽으셨습니다(7∼12절). 바로 대속 제물로, 제물 된 어린양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십니다. 완전한 의인이시면서도 죄인 취급을 받으시며 곤욕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묵묵히 침묵하시며 재판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보리산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곧 나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대속의 제물이십니다.

그러면 하필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방법을 사용해 죄인들을 구원하셔야 했을까요.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계획이라면 훨씬 더 강력하고, 훨씬 더 수월하며, 훨씬 더 설득력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친히 죄인의 몸으로 오셔서 몸소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러한 방식을 피할 수는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창조자이신 하나님, 세상을 만드시고 세상의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께서 죄의 책임을 메시아에게 전가하시고, 대속하셔서 모든 인간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한 구속이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고전 1:18).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십자가의 대속을 능력으로 힘입는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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