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타락
요즘 교회에 대한 시비가 많다. 엄격해진 잣대는 교회에 대한 기대와 책임 때문이다. 교회가 가난할 때는 우호적이지만 힘이 있어 보이는 지금 더 이상 양해받을 여지가 없어 보인다. 많은 교회는 여전히 가난하지만 교회는 마치 부자처럼 인식되고 있다.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말을 했다. "초대교회에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교회는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은과 금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 많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잃었다."
교회의 타락은 거룩함보다 물질이 평가의 기준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연약함보다 힘을 숭상하고, 가난보다 부유함을 선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홀히 여기게 된 까닭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빌 2:5)
신경하 감독회장(기독교대한감리회)
광풍을 잠재우는 리더
바울이 로마로 압송될 때 탔던 배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다. 모두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바울은 일어나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라"고 외쳤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로마까지 안전하게 인도될 거라는 확신을 얻었던 것이다. 바울은 도망가려는 사공들을 제지했고, 사람들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며 거듭 구원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다. 배에 탔던 사람들 또한 바울을 믿고 따르며 안심하고 음식을 받아 먹었다. 결국 바울의 확신처럼 모두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전세계적 경제 위기라는 광풍을 만났다. 이러한 때일수록 바울처럼 위기를 돌파해나갈 지도자와 지도자를 향한 국민들의 신뢰가 필요하다. 위기 속에서도 살 길을 찾아 희망을 제시하는 지도자와 그를 믿어주는 구성원들이 있는 공동체는 망하지 않음을 광풍을 만난 바울과 배에 탄 사람들을 보며 배워야 하겠다.
손인웅 목사(덕수교회)
마음의 재벌
얼마 전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가수 션과 탤런트 정혜영 부부의 아름다운 기부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결혼 후 매일 1만원씩 모아 결혼 일주년이 되던 날에 365만원을 노숙인들에게 기부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며 섬겼다. 첫 동반 광고 수입도 전액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내놓았다고 한다. 현재 100명의 해외 빈곤 아동들에게 꿈을 주기 위해 매달 한 어린이당 3만5000원씩 보내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많은 기부를 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은 '재벌이라 돈이 많아서 그러겠지'하고 생각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들 부부는 아직 자기 집도 없고 미래를 위해 적금도 든 게 없다고 한다.
방송 진행자의 말처럼 "재벌은 재벌이되 마음의 재벌"인 셈이다. 우리 사회에 흉흉한 소식들로 마음이 점점 얼어붙어가는 요즈음, 따뜻한 남풍같이 느껴지는 '마음의 재벌'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렸으면 좋겠다.
정승룡 목사(대전 늘사랑침례교회)
불안이 쌓아올린 유산
인류 역사상 유명한 건축물들은 불안 해소를 위해 세워진 경우가 많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죽음에 대한 불안해소를 위해 세워졌다. 만리장성은 황제의 정치적 불안해소를 위해 세워진 건축물이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도 흩어짐에 대한 불안해소를 위해 쌓기 시작한 탑이다. 내 주변에 누군가가 모여 있어야 하고, 무언가를 모아 놔야 안심할 수 있는 인간의 뿌리 깊은 불안 때문이다.
흩어짐은 두렵다. 외롭고, 불안하며,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불안감이 강해질수록 모아 놓은 것을 지키기 위한 성벽도 비례해서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불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마음의 현상이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하지만, 제대로 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하다. 무언가 쌓아 놓을 생각 대신 하나님과 화평 하는 게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강대일 목사(안양성결교회)
삼 세번의 미덕
한국인들은 수많은 숫자 가운데 특히 '삼'자를 좋아한다. 작심삼일, 삼천리, 삼척동자, 3부작, 삼총사, 삼종지도, 3등칸, 일일이 여삼추 등. 삼은 통합과 균형을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한다. 석 삼, 셋, 세 번째란 수가 주는 안정감은 마치 세 개의 다리를 지닌 솥발의 균형을 연상시킨다. 압축된 요점을 손쉽게, 간단히 전달할 때도 세 가지로 요약하길 즐겨한다. 3대 과제, 3대 지표, 3대 정신, 3D 산업, 3S의 삶의 방식, 21세기 3F 특징들이 좋은 보기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형제가 잘못했을 경우에 일곱 번을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했다. 당시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했고, 외경 집회서에도 두 번까지 관용을 베풀도록 한 점으로 미루어 베드로의 물음은 파격적이다. 그런데 언감생심,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고 하셨다. 우리 속담에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 사회에도 세 번쯤 참아주는 '삼 세 번의 미덕'이 필요한 시절이다.
신경하 감독회장(기독교대한감리회)
이름값
최근 교황청에서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여호와)'를 공식 예전이나 공공예배에서 함부로 쓰지 말도록 지침을 내렸다. 대신 '주님'이라는 표현을 쓸 방침이라고 한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는 이름이 없다.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나다"라고 하신 뜻을 히브리어로 모음 없이 자음으로만 쓴 게 'YHWH'인데 이것을 각국어로 조금씩 달리 발음하다 보니 우리말로 '여호와'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그런 발음조차 삼가며 "아도나이(주님)"라고 부르고, 헬라어로 쓰인 신약에서는 "키리오스(주님)"라고 일컫는다.
인간의 욕심을 채우려고, 자기 정당화를 위해 신의 이름을 도용하거나 예배의 주인을 도구로 삼는 것은 큰 죄악이다.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실명으로 대고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 값을 매기게 하자. 차명과 가명을 버리고 진실하고 투명하게 '나는 나'임을 밝히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화이부동
가정이든 나라든 구성원간에 갈등이 팽배한 사회는 결코 발전할 수 없다. 반면 서로를 존중하고 화합하는 모습은 성숙한 가정, 선진국의 조건이 된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말이 있다. 남과 화합은 하지만 흔들리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진리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취할 태도 중 하나가 바로 이 화이부동적 삶의 자세이다. 진리를 만난 사람은 결코 유아독존적인 자세에 머물러 있지 않다. 포용과 관용으로 상대방을 품는 여유와 깊이가 풍겨난다.
이번주 서울 성북동에서는 필자가 섬기는 교회와 길상사, 성북동성당이 연합으로 이웃돕기 바자회를 개최한다. 서로 다르지만 사랑으로 함께할 수 있는 봉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마음을 품고 온 교우들이 참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더 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할 것으로 기대하며 지역사회에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를 기도하고 있다.
손인웅 목사(덕수교회)
탐욕의 무덤
광야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공급을 경험하며 기적과 더불어 살았다. 하늘양식 만나를 매일 아침 공급받았고 반석에서 터져나온 생수를 마셨다. 하지만 그들은 만족하며 감사하기보다 고기를 요구했다. 더 나아가 과거의 애굽 종살이를 미화하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대로 광야의 메추라기를 몰아주었지만 결국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도 전에" 그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욕심을 내었던 자들이 그 광야에서 장사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장소를 '기브롯 핫다아와', 즉 탐욕의 무덤이라 칭하게 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넉넉한 자들이 작은 것을 탐하다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는 말씀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
정승룡 목사(대전 늘사랑침례교회)
빈곤 퇴치는 사명
세계경제가 향후 몇 년 동안 지금보다 악화될 것이라는 보도가 연일 이어진다. 미국 집값의 거품 피해가 당사자들을 넘어서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의식주 문제(마 25:37∼38)로 더 고통을 받게될 것이 분명하다.
오늘은 세계빈곤퇴치의 날이다. 서울 덕수궁 돌담길에서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천사의 손을 의미하는 '화이트 밴드 감기' 모임이 열린다. 국민 소득의 0.7%를 가난한 나라에 원조하자는 세계적인 합의가 있지만, 우리나라 원조수준은 0.06%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양 손을 만드신 이유는 한 손으로는 열심히 벌고, 다른 손으로는 열심히 베풀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넘치는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모든 착한 일도 넘치도록 해야 할 때이다(고후 9:8).
권오성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하나님이 쓰시는 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이 매스컴에 소개된 적이 있다. 정말 흉측하게 생겼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겨진 이유를 듣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하루 10시간 이상씩 연습으로 발레신발 150여 켤레를 닳아 떨어뜨린 연습벌레의 발이었다. 연습과 공연 때면 그녀의 발가락은 갈라지고, 물집 잡히고, 곪는단다. 그렇게 흘러내린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2ℓ짜리 생수병을 들고 다닌다고 했다. 뭐가 이토록 그녀를 발레에 미치게 만들었을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발 모양이 따로 있다. 먹거나 희생 제물로 쓸 수 있는 정결한 짐승을 구분하는 기준이 바로 발의 모양에 있었다(레11장). 굽이 갈라진 발이었다. 그것은 자기중심의 삶과 구분된 헌신의 발을 뜻한다. 여호와 앞에 갈라진 발. 갈라지고 물집 잡히도록 전적으로 헌신하며 뛰어다니는 열정이 만든 발. 그런 발을 필요로 하신다.
강대일 목사(안양성결교회)
인생의 진화
인간은 갓난아기 때 단맛을 먼저 알고, 짠맛, 신맛을 배운 후에야 비로소 쓴맛을 배운다고 한다. 독성이 있는 물질에 들어있는 쓴맛을 가장 늦게 배우는 이치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가장 늦게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되는 셈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잇값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자기의 책임의식보다 남의 탓을 하는 사람에게 잘 드러난다. 그들은 자기 마음에 불평이 쌓일 때 그것을 남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에 기쁨과 평화, 희망이 사라졌다고 해서 남을 탓하는 것은 유치한 태도이다.
옛 말에 화복동문(禍福同門)이라고 했다. 화와 복은 모두 자신이 불러들인다는 말이다. 사실 내게 쌓이는 불평과 불만은 바로 내 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기 안에 뿌린 사랑의 결실 때문에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랑 때문에 인생은 나이가 들수록 진화한다. "믿음은 살아 있고 배우는 공동체 속에서 영속된다."(알브레히트 쉔헤르)
신경하 감독회장(기독교대한감리회)
위기와 신앙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는 세계 금융시장의 산실이다. 철옹성 같고, 무소불위의 금권을 자랑하던 현대판 레비아탄(악마, 또는 괴물)이 휘청거린다. 거대 강국인 미국이 7000억달러의 금융구제안을 내놔도 정상을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야단법석이다.
뉴욕의 금융위기 강풍이 전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하고 있다. 한국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하지만 강풍을 가라앉힐 만한 묘약이 안 보인다. 구제금융 금액이 적어서도 아니고, 돈이 없거나 물건이 없어서도 아니다. 심리적 불확실성 때문이다. 신뢰의 부족 또는 불신 탓이다. 다시 말해 신뢰의 상실이 가장 큰 문제다.
삶의 진정한 행복은 몸과 영혼을 맡길 수 있는 신뢰의 힘에서 나온다. 인간세계 가운데 역사하시면서 동시에 역사를 초월해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확고한 신앙만이 살길이다. 하나님을 진실로 찾고, 구하고, 그 문을 두드리면 된다. 지체할 필요가 없다.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하나님의 경제
성경은 물질을 배척하지 않는다. 대신 그 물질을 다루는 사람의 자세를 중요시 여긴다. 하나님 대신 물질을 의지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물질을 추구하는 사람에 대해 성경은 '어리석은 부자'라고 정의한다(눅 12:20). 모든 재화(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청지기일 뿐이다. 제 아무리 그럴 듯해 보이고, 잘나가는 듯해도 주인을 속일 수 있는 청지기는 아무도 없는 법이다.
월가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며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그들의 철옹성은 주저앉았다. 그들을 향한 세계인들의 '믿음' 역시 무너졌다. 분수를 넘어선 부(富)의 독점과 대다수 사람들의 가난과 굶주림을 외면한 월가와 자유방임주의 경제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다. 이제는 모래 위에 집을 쌓는 허사를 버리고 진실과 신용의 반석 위에 새 집을 지어야 할 때다. 제3의 길을 모색할 때인 것이다.
손인웅 목사(덕수교회)
작고 사소한 죄
빈 건물의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면 연이어 옆 유리창도 깨진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그 건물은 범죄의 온상이 되고 인근에 범죄가 속출하면서 일대가 무법천지로 변하게 된다. 이것을 소위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이라 한다.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1982년 발표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작은 무질서를 가볍게 여기다 보면 더 심각한 범죄가 생겨난다는 것, 사소한 실수를 제때 고치지 않으면 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내면의 사소한 죄를 가볍게 여기다보면 큰 죄를 불러오게 된다. 이 원리는 미시적으로 대인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며, 거시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통용된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9)는 성경의 경고에 귀기울여야 할 것 같다.
정승룡 목사(대전 늘사랑침례교회)
천하보다 귀한 생명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되느냐를 두고 수정란, 배아줄기 세포 생성, 인간 형체 형성, 출산 이후라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다. 하나님의 것인 생명을 나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제 마음대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는 한 인간의 생명을 세상 천하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소중하게 여기셨다(막 8:36). 내 생명이든, 남의 생명이든 죽여선 안된다. 생명은 일단 훼손되면 인간 능력으로는 회복시키거나 대체하거나 돌이킬 수 없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기 연예인의 자살로 지난 주간 내내 마음이 무거웠는데 아직도 세상은 테러와의 전쟁, 범죄에 의한 죽음이 여전하다. 빛도 못보고 죽는 낙태아 때문에 안타깝고, 세계 사형폐지의 날(10월10일)인 오늘도 사형수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생명이 공학의 대상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평화의 세상이 오기를 기원한다(요 10:10).
권오성 목사(한국기독교회협의회 총무)
감사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감사다. 감사는 한 마디로 '과분한 마음'이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공을 자신의 투자나 능력이 아닌, 다른 이유로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고백에서 감사의 정신은 출발한다. 그러기에 갑작스러운 횡재나 행운은 감사의 요건이 못된다. 오히려 감사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러 나간 이들에게 적절한 덕목이다.
성숙한 영적 열매는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운동선수는 연습량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고 기능공은 훈련의 반복에 따라 성취 여부가 결정되듯, 그리스도인의 감사 역시 훈련이 필요하다. 특히 행복에 겨울 때보다 시험과 어려움 속에서 더 잘 연단된다. 그러기에 감사는 자기 자신의 고마움으로 그칠 수 없다. 내 가정은 물론 이웃과 세상을 향해 그 기쁨을 나누는 것이 감사다.
신경하 감독회장(기독교대한감리회)
만족할 수 있는 길
6·25 직후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70달러에 불과했다. 그런데 현재는 거의 2만달러로 300배 가까이 잘 살게 됐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300배의 만족을 느끼며, 마음이 풍요로울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300배의 풍요는 있어도, 오히려 마음은 더 빈곤해진 것 같다.
자살로 죽는 인구가 교통사고로 죽는 인구보다 더 많다는 통계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내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다. 자기가 필요한 정도를 적당 선에서 정해놓지 않으면 우리의 소유욕은 끝이 없이 자란다고 한다. 많이 벌어 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다. 비천과 풍부는 절대적으로 내가 정한 기준에 달려 있다. 고무줄같이 늘어나는 가변적인 기준이 문제다. 채워서 만족하려 들지 말라. 나만의 기준을 빨리 정하는 게 만족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강대일 목사 (안양성결교회)
죽음의 죽음
마르틴 루터는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을 만들어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켜 '죽음을 죽이고' 이긴 것이라고 했다. 십자가와 부활은 '죽음을 죽인' 사건이다. 따라서 '죽음의 죽음'은 강력한 부활의 메시지임에 틀림없다.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은 뒤 약속받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교두보일 뿐이다. 다시 말해 죽음은 이 땅의 생명과 하늘의 생명을 연결하는 다리다. 그 다리는 안전해야 한다. 이 땅에서 복되게 사는 웰빙(well-being)과 함께 하늘 생명을 향한 복된 죽음(well-dying)이 값진 삶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불안이다. 요즘에는 우울증으로 통한다. 불안이나 우울증은 홀로 살면서 걸리는 질병이 아니다. 함께 살지만 잘못 살기에 생긴다. 우울증을 죽일 수 있는 약은 기쁨의 상생이다. 신앙은 상생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우리도 함께하는 복음이다.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생명사랑 밤길 걷기 운동
2006년 한국은 OECD 국가들 중 헝가리에 이어 세계 2위 자살국이 됐다. 한해 1만688명이 자살을 한다니 하루 28명, 51분에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셈이다. 이 같은 높은 자살률은 이제 자살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섰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마디로 자살은 우리 사회 전체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풀어야 하는 공동체적 과제가 된 것이다. 심각한 자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없다면 한국 사회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는 영원히 잊혀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10월10일 저녁 7시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리는 생명사랑 밤길 걷기 운동은 좋은 캠페인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밤길을 걸으며 동이 트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인생의 밤길을 헤치고 희망의 새아침을 맞는 생생한 경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캠페인과 운동이 사회 곳곳에서 펼쳐져 자살 예방과 함께 생명존중의 문화가 확산되었으면 좋겠다.
손인웅 목사(덕수교회)
거룩한 투쟁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톱스타가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감당했어야 할 삶이 얼마나 무거웠으면 사랑하는 아이들과 가족들을 뒤로 한 채 세상을 떠나야 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한편으론 우리 사회에 독버섯처럼 펴져가고 있는 자살 문화에 분개를 느낀다. 심리사회적으로나 경제사회적 요인으로 자살의 증가를 분석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려는, 생명 경시의 배후에 역사하는 악한 영의 세력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공동체는 자살 문화에 정면으로 맞서는 거룩한 투쟁을 해야 한다. 지치고 힘든 영혼들이 마실 수 있는 생명의 맑은 샘물을 보다 적극적으로 흘려보내는 신성한 노력을 해야 한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 36:9)
정승룡 목사(대전 늘사랑침례교회)
구세군 선교 100년
120여년 전, '영혼을 찾아 세상으로 가라. 그것도 가장 악한 사람에게 가라'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구원에 대한 열정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이 뜨거운 마음은 영국 전역에 부흥회와 전도집회를 불러 일으켰고, 빈민가의 고통받는 자들을 섬기는 데로 향했다.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군대'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구세군(Salvation Army)이 탄생하게 된 계기다.
구세군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자선냄비'부터 떠올린다. 그래서 구세군을 복지기관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교회 수보다 구세군 산하 사회봉사기관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구세군은 교회다. 진정으로 건강한 교회다.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라고 고백하며 부흥과 봉사라는 두 바퀴로 고통받는 자들을 향한다(딤후 2:3). 우리의 신앙을 풍성하게 만들어 온 구세군대한본영의 100주년을 축하한다.
권오성 목사(한국기독교회협의회 총무)
안전이라는 미신
인생에서 위험은 어디에든지 있다. 만일 살면서 어떠한 위험도 당하고 싶지 않다면 다음의 것을 꼭 지켜라.
①자동차를 타지 마라-사망 사고 원인의 20%나 된다. ②비행기나 기차나 배로 여행하지 마라-모든 사고의 16%를 차지한다. ③거리를 걸어다니지 마라-모든 사고의 15%가 거리에서 일어난다. ④집에 있지 마라-모든 사고의 17%가 집에 있는 중에 발생한다. 인생에서 안전한 장소는 아무데도 없고 위험 부담이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안전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미신이다. 위험을 피하는 것이 감수하는 것보다 안전하지 않다. 인생은 대담하게 모험을 하든지, 아무것도 아니든지 둘 중 하나다." 당신의 지금 목표가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는 것인가? 만약 있다면, 그 다음은 걱정하지 마라. 그냥 움직여라. 나머지는 주님께서 책임지신다.
강대일 목사(안양성결교회)
출처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