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권 사역자가 이슬람에 대해 알아야 할 것

모하메드 칼리프 카리지파 쉬아파 순니파 무타질라 메카 히즈라 / 알라위파 드루즈파

 

"이슬람교"는 모하메드의 종교를 가리키는 정확한 이름으로 아랍어의 동사"복종하다"의 부정사(不定詞)이고, "무슬림"은 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정확한 이름으로 같은 동사의 현재분사이다. 이슬람교는 역사의 주목할 만한 현상들 중의 하나이다. 이 종교의 창시자가 죽은 지 일세기 이내에 무슬림 제국은 남부 프랑스로부터 스페인, 북 아프리카, 레반트,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국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 이것은 동유럽, 아프리카, 인도, 동남 아시아 그리고 대서양에서 필리핀, 코카서스 산맥(Caucasus)에서 케이프 타운까지에 널리 퍼져 있고, 유럽인들로부터 하우사 폴라니족, 아리안 인디언족으로부터 필리핀 종족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다양한 인종들로 이루어진 약 12억의 신자들을 가지고 있다.


※ 이슬람교의 기원


1. 모하메드의 초기 삶


이슬람권 사역자가 이슬람에 관해 알아야 할 것들에 관하여


A.D.570년 메카에서 태어난 모하메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아버지의 유복자였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겨우 6세였을 때 죽었다. 그의 소년 시절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그는 홀로 떨어져서 묵상하기 위해 동굴에 들어가곤 했다. 그는 자주 금식을 했고 쉽게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는 그의 고향 메카의 다신교와 조잡한 미신들에 대해서 대단히 불만족했으므로, 한 참된 하나님의 존재와 초월을 열정적으로 확신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가 이러한 확신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기독교나 유대교에 힘입고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 당시 핫산의 아랍 왕국에는 단성론적 기독교리가 널리 퍼져 있었다. 동방 정교회는 히자즈의 주변에 흩어져 있던 은자들로 대표되었는데, 그가 그들과 접촉했을 것은 당연하다. 네우토리우스 교인들은 알 히라와 페르시아에 자리를 잡았고, 유대교 신자들은 알 메디나, 예멘 아랍 공화국 그리고 그 밖의 곳에서 강세를 보였다. 더구나 그의 삶의 어떤 시기에 탈무드적인 원천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흡수했고 모종의 기독 교리와 접했다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의 계시


코란의 첫번째 계시가 그에게 온 것은 약 40세 때이었다고 한다. 한 목소리가 세 번 그에게 "그대의 주(主)의 이름으로 낭독하라......."고 명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상당 기간 동안 아무런 계시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깊은 영적 우울, 불확신의 기간을 지난 후에 갑자기 천사 가브리엘의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카디야에게서 위로를 받고 숨기 위해 떨면서 집으로 갔지만 한 목소리가 "오 망투를 두르고 있는 그대여, 일어나서 외치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아랍의 시인들과 점장이들의 경우와 같이 자신이 귀신에 들리지 않았나 두려워했다. 그러나 카디야와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는 곧 점점 더 자주 신의 계시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정통적인 무슬림에게 코란에 있는 모든 구절은, 천사장 가브리엘에 의해서 예언장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코란의 가장 초기 수라(계시)들은 개념의 현저한 단순성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알라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의 도덕적 반응을 촉구하고, 심판의 날을 예언하며, 저주받은 자들의 고통과 처음 보기에는 대단히 감각적인 것 같은 낙원의 즐거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3.헤지라


모하메드에 대한 메카에서의 반응은 여전히 미미한 것이었고, A.D 622년에 모하메드는 그의 추종자 약 200명과 함께 알 메디나로 철수하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순례 동안에 그를 만났었고, 그의 주장들을 받아들였으며, 그들의 동료 시민들에게 그가 올 것에 대해 일단의 그 곳 주민들이 그를 초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도피(혹은 헤지라)는 모하메드의 경력에서 전환점이 되었고 적절하게 회교 기원의 시작으로 선택되었다. 메카에서 그는 그의 동향인들에게 참된 한 하나님을 가르쳤으며 앞으로 올 심판에 대해서 경고했던, 거부당한 예언자이었다. 알 메디나에서 그는 곧 정치가, 입법자, 재판관-즉 새로운 신정 정치의 대변인뿐만 아니라 행정관이 되었다.


모하메드가 처음에는, 유대인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그의 메시지를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는 점은 거의 의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메시지는 아브라함과 모든 가부장들과 선지자(예언자)들이 설교해 온 유일한 참된 종교로서, 계속 부패해 온 것을 단지 새로이 선포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초기에 성경의 백성들에 대해서 언급한 것들이 한결같이 우호적이었고, 그가 처음에 유대인의 몇 가지 관습들을 받아들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메디나에서 그는 곧 유대인들이 그의 주장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더구나 그들은 구약 사건들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 설명했었고, 그가 그것들을 인간적인 근원에서 배웠다는 것을 부인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코란의 수라들은 그가 전에 믿을 만한 것이라고 확정했었던 동일한 사건들에 대한 구약의 기록들과 일치하지 않음이 명백히 드러났을 때, 그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경을 개악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잘못 인용했었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이 때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비난, 유대인 종족들에 대한 그의 추방 혹은 대학살 그리고 그의 가르침에서 분간할 수 있듯이 유대적인 것들로부터 아라비아와 메카로의 결정적인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무슬림 공동체가 기도 할 때 향해야 하는 곳은 예루살렘보다는 차라리 카바가 되었고 이교도의 순례 의식이 순화되어 이슬람교속으로 통합되었다.

 

4. 모하메드의 인격


(한때 유럽에서 널리 퍼졌던) 모하메드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기꾼이었다는 사상은 다행히도 없어졌다. 그리고 최소한, 그의 초기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초기 계시들을 희망적 관측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즉 그들은 다음과 같이 그에 관해서 묘사한다. 그의 초기 삶의 불행과 좌절, 아랍인들도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처럼 신의 사자와 경전이 필요하다는 그의 깊은 확신, 그를 그들의 예언자로 특징지어 줄 어떤 계시의 혜택을 받고자 하는 그의 갈망 그리고 다양한 내외적 자극이 그의 잡재 의식적인 마음에 불러일으킨 생각들과 이야기들이 이러한 연속되는 계시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그의 확신이 그 설명이다. 그는 때때로 간질 환자, 히스테리 환자, 병리상의 환자, 혹은 계시에 대한 에비온적- 마니교의 상속인으로 간주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따금 대단히 비판적인 견해를 취함으로써 계시의 징후들이 때때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해 왔다. 물론 그 현상들은 현대의 교령술 무당들이 주장하듯이, 간헐적으로 영에 사로잡힌 증후들로 설명될 수 있다. 코란의 초기 수라들에서 볼 수 있는 날카로운 스타카토 스타일은 이러한 가정들 중의 어느 하나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에 그의 선지자적 주장들에 대한 기적적인 증거를 보여 달라는 자연적 요구를, 이야기들에 대한 그의 지식이 오로지 신의 계시에서 나온 것으로 함으로써 충족시키고자 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은 너무 세밀하게 탈무드와 일치하여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유대적인 원천에서 나왔음은 거의 의심할 수가 없다.


그는 다른 신자들과는 다르게 네 명 이상의 아내를 소유할 권리를 인정받았고, 그의 시간을 그 여자들 사이에서 균등 분배해야 하는 정상적인 의무로부터 면제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그의 양자의 이혼한 아내와 결혼했을 때 아랍의 관습에 상관없이 비판을 모면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그의 첩 메리와 더 이상 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맹세로부터 면제되었고, 그럼으로써 그의 몇몇의 아내들 사이에서 야기될 문제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들은 베일을 쓰도록 명령받았고 부정한 행위에 대해서는 이중 벌을 받는다고 위협받았으며 그의 사후에는 재혼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다른 학자들은 모하메드의 본질적인 진실성에 대해서 깊이 확신하고 있어서, 그가 어떤 의식적인 사기도 하지 않았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것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나이가 좀 든 후에 그는 그가 신의 계시를 받은 자라고 지나치게 확신하고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지나치게 믿게 되어, 주위 상황과 그 자신의 성향이 일으킨 협박을 그가 너무 자주 들었다고 믿는 신의 목소리로 진지하게 오해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선적으로 심리학자의 문제이지 역사는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다.


그 밖의 점에 대해서 말해 보면, 그의 성격은 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혼성물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신학자라기 보다는 시인이었고 조직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뛰어난 즉흥 시인이었다. 그가 취향에 있어서는 주로 단순했고 기질에 있어서는 상냥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는 관대하고 단호했으며 친절하고 빈틈이 없었다. 또한 그는 날카로운 심판관이었고 타고난 지도자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그는 잔인해지고 깊은 앙심을 품은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수치를 무릅쓰고 암살할 수도 있었으며 관능적인 경향을 띠기도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의 하림(후궁)의 규모는 솔로몬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다윗의 것에 비하면 좀더 나은 것이다. 그의 덕망은 그의 동시대인들의 것보다 뛰어났으며 그의 결점은 거의 시대에 이런저런 비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참된 개혁들을 도입하기도 했다. 만약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그가 자신에 대해서 내린 평가대로 받아들였다면, 그의 성격에 대한 다른 견해는 대부분 적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코란은 그의 예언자적 존엄성에 대해서 확실한 용어로 주장하고 있지만, 반면에 그의 소멸성과 불완전성에 대해서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전설들에서 보이는 그의 언행에 대한 반 신성화와 양립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언행은 곧 이론상으로는 코란 다음 가는 중요성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5. 전설들

 


그 종교의 창시자가 그리스도에게 존경심을 바치는 것은 나쁘다고 가르쳤고 그 자신은 단순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솔직하게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가 마침내 기독교나 그 박의 다른 것에서 그와 유사한 것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창시자의 개인적인 습관들에 대한 노예적인 모방을 주창한 것은 이슬람교의 여러 모순들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호가르드(D.G.Hogarth)의 다음과 언급은 정당하다.


중요한 것이건 사소한 것이건 간에, 그의 일상적인 행위는 오늘날까지 수백만이 의식적으로 흉내내서 지키는 법규가 되었다. 인간에 의해서 완벽한 인간으로 간주되어 온 사람들 중에 아무도 이처럼 세밀하게 모방되어 본 적은 없었다.


잘 알려진 전통주의자 아마드 이븐 한발은 결코 수박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예언자가 수박을 먹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껍질 채 먹었는지 혹은 그가 부수어서 깨물어 먹었는지 혹은 잘라먹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가 말했고 행했던 것에 대한 전설들을 모으는 것이 곧 신앙 고백이 되었고, 그의 흩어진 동료들이 여러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털어놓았다고 하는 것을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무슬림 세계 전체를 여행했던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것은 영감 받은 말들과 행위들에 대한 영감 받지 않은 기록으로 간주되었고, 많은 일련의 서술자들에 의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 서술자들의 이름은 주제의 진실성에 대한 보장으로서 전설의 첫 부분에 항상 기록되었다. 그러나 날조된 전설들이 범람하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그가 죽기 전까지 약4,000개의 전설들을 꾸며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모든 엉뚱한 정치적 철학적 혹은 신학적 사상은 예언자의 진술이라고 함부로 주장된 것에서 그것의 증거를 찾곤 했다. 나중에 위대한 전통주의자들은 전설들은 모아서 정리하였고, 그들 중의 몇 명은 위조된 것과 참된 것을 구별하려고 무척 노력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들의 비평을 실제의 전설이 그럴 듯한가 하는 것보다는 그 전설에 있는 이름들의 신빙성을 검토하는 데에 한정했다. 오늘날 서로 다른 수집물들이 이슬람교의 다른 분파들에 의해서 각각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지만, 모든 경우에 그러한 전설들은 무슬림 신학, 율법, 관습의 1차적 원천으로서 코란 곁에 위치하고 있다.


6. 기독교에 대한 모하메드의 관점

 


모하메드는 기독교의 교의에 대해서 대단히 피상적인 그리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틀린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의 초기 삶에서 그는 유대교인들에게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후기 삶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보다 덜 심한 비난을 받았던 것처럼 보인다. 예수에 대한 코란의 이름인 이사(I'sa)는 메시아이었고 처녀에게서 태어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이라고 불리었다. 그는 위대한 기적을 일으키는 자이었고, 가장 위대한 예언자들 중의 하나이었다. 그러나 코란은 명백하게 그의 신성을 부인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고 그가 십자가상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에 코란은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졌다."(혹은 "그는 그들을 속이기 위해서 위조되었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그를 자신(하나님)에게로 끌어올렸다고 말하고 있다. 정통적인 무슬림들은 항상 이것은 실수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예수 대신에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오고 있다


※ 이슬람교의 발전


1. 칼리프(Caliph)의 직위

 


가장 잘 입증된 견해에 의하면, 모하메드는 어떤 후계자(Caliph)도 지명하지 않고 죽었다고 한다. 물론 예언자들 중의 마지막이고 가장 위대한 자인 그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웠던 공동체는 정치와 종교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없는 신정국이었고 그러므로 누군가가 법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행하기 위해서, 전쟁시에 이끌고 평화시에 인도하기 위해서 확실하게 계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칼리프가 임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고, 마침내 우마르 이븐 알 하타프(자신은 제 2대 칼리프가 됨)가 최초의 신자들 중 하나인 나이 지긋한 아부 바크를 급히 뽑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칼리프 직위의 문제는 이슬람교의 어떤 다른 문제보다도 많은 분열을 일으켰고 유혈이 나게 했다. 그리고 거의 처음부터 최소한 미발달의 상태에 있던 3개의 적대 파가 구분될 수 있었다. 우선 코라이쉬족 가운데 적절한 "초기신자"가 적임이라고 믿은 예언자의 동료들이 있었고, 칼리프직을 우마이야가에 주고 싶어한 메카의 귀족들이 있었다. 그리고 선거는 필요 없고 예언자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가 신에 의해서 그의 후계자로 지명 받았다고 믿는 "합법주의자들"이 있었다.


아부 바크르의 2년간의 짧은 통치는 주로 "탈퇴의 전쟁들"과 코란의 첫 편찬으로 유명하였다. 예언자가 죽자 많은 종족들은 세금낼 것을 거부했으나, 아부 바르크는 칼로써 순종케 했다. 죽기전에 아부 바크르는 우마르를 그의 후계자로 지명했고, 그의 선출은 아무 탈없이 통과되었다. 그는 이슬람교의 제 2의 창시자로 불리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칼리프로 있을 때에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이집트 등이 무슬림의 무력 아래 함락되었고 많은 중요한 결정적 조치들이 취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계승자를 임명하지 않고 죽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투만이 선출 되었다. 그 자신은 나이든 신실한 "초기 신자"이었지만, 거의 끝까지 예언자를 반대했던 우마이야의 귀족 집안 자손이었다. 그의 명령으로 현재의 개정판 코란이 준비되었고 모든 상이한 판들은 제거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그의 파멸의 원인으로 증명되었고 그는 암살자의 칼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2. 카리지파(Kharijis)

 


사실상 최초의 분열은 "올바르게 인도된" 칼리프들 중 네 번째이며 마지막으로 우트만을 계승했던 알리('Ali)가 칼리프 직위에 있는 동안 일어났다. 두 지도급 동료, 탈하(Talha)와 알 주바이르(al-Zubayr)는 예언자의 과부인 아이샤('A'isha)의 지지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일만 명의 무슬림들이 생명을 잃은 카멜(Camel) 전쟁에서 패하였다. 이 사건은 경건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코란은 정당한 이유 없이 형제 무슬림을 살인한 사람들은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리는 곧 훨씬 단호한 적을 만났다. 왜냐하면 시리아의 통치자 무아위야가 그의 친족 우트만의 암살에 대해 복수한다는 구실로 그에게 쳐들어 왔기 때문이다. 알리는 우트만의 죽음에 공모했다는 비난을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알리가 다시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전쟁의 중요한 때에 무아위야는 교묘하게 알리로 하여금 칼리프 직위의 문제를 중재에 붙이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알리 자신의 추종자들은 대단히 화가 났다. 그들은 알리가 그렇게 되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저버렸다고 느꼈다. 그리고 무아위야에게는 더욱이 충성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탈퇴했고 자신들은 "배교적인" 이슬람교로부터 분리시켰다(따라서 그들의 이름이 카리지파가 되었다).

 


3. 쉬아파(shi'a)

 


칼리프직의 말썽 많은 문제는 곧 훨씬 더 중요한 분열을 일으켰는데, 쉬아파(알리의 "추종자들" 혹은 "종파")가 순니 이슬람교로부터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알리를 신이 임명한 예언자의 후계자로 간주한 합법주의자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중재하려는 시도가 불행하게도 거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고, 알리가 한 카리지의 칼에 죽을 때까지 무아위야와 칼리프직에 관해서 계속 논쟁했는데도, 혹은 심지어 그의 장남 알 하산이 왕자의 연금을 받는 교환 조건으로 알리를 계승할 권리를 포기하고 물러나서 알 메디나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 죽었는데도, 그들은 헌신적으로 그들의 주장을 밀고 나갔다. 그들은 알 하산이 무아위야의 명령으로 독살되었다고 주장했고, 그에게 "순교자자들의 주"라는 명칭을 주었으며 그의 동생 알 후세인에게로 그들의 충성심을 옮겼다. 동생은 좀 더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 1세에 반대하여 일어났을 때, 그는 그의 가족의 대부분과 함께 카르발라에서 살해되었다. 그러나 예언자의 집안에 대한 이러한 도살의 참사는 쉬아파의 교리에 대한 많은 뒷받침이 되었고, 점차 증가하는 수가 하나님은 결코 경건치 못한 지도자들에게 그의 백성을 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고 항상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맘(Imam), 즉 지도자가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


이후에 칼리프직은 우마이야가에서 세습되었고, 무아위야와 그의 계승자들은 대부분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구식의 아랍 왕들처럼 다스렸다. 그런 상황에서 쉬아파의 선전은 극히 성공적었다. 특히 페르시아인 "예속민"들 가운데에서 더욱 성공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그것에서 아랍의 거만함으로부터 도피할 길이 발견했고 이맘직의 교리가 이슬람교 시대 이전에 왕에 대해 가졌던 태도에 좀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많은 반란이 진압되었지만, 쉬아파의 지지자들은 마침내 우마이야조를 몰락시키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왕위는 알리나 예언자의 자손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예언자의 삼촌 압바스에게 돌아갔다. 따라서 쉬아파는 압바스조하에서 막대하고 부분적으로는 비밀적인 공동체로서 지속되었고, 여러 책략들은 유혈이 낭자한 반란의 형태로 간헐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쉬아파는 무수한 아류 종파들로 갈라지는 경향 때문에 계속적으로 약화되었다.


대다수의 쉬아파는 코란의 해석에 있어서 흔히 순니파와 다르고 심지어는 칼리프 우트만이 알리에게 유리한 많은 절들을 삭제했다고 그를 비난하기는 하지만, 코란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것을 지지하는 순니파의 수집물을 거부하기는 하지만, 전설의 권위를 받아들인다.


4. 4개의 순니파들


논쟁이 불붙은 것은 칼리프직에 관해서만이 아니었다. 이성의 제자들과 전통의 제다들 사이에 영원한 갈등이 이슬람교에서도 법과 신학의 분야에서 가차없이 나타났다. 순니파 이슬람교가 압바스조 시대 초기에 지금처럼 4개의 정통 법률학파들로 나뉘어 진 것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갈등 때문이었다. 그 네 학파를 살펴보면, 전설적 창시자가 아부 하니파이고 오늘날 대부분의 구 오토만 제국, 북인도에서 지지받고 있는 하니파 혹은 이라크 학파, 이름은 말리크 이븐 아나스에서 나왔으며 북 아프리카와 서 아프리카, 상부 이집트 그리고 수단에서 우세한 말리키 혹은 히자즈학파, 무슬림 법률학의 "아버지"인 알 샤피에 의해 창시되었고, 하부 이집트, 동 아프리카, 남 아라비아, 동남 아시아에서 추종되는 샤피학파, 주로 중앙 아라비아의 와하비족에게 국한되어 있는 한발리 학파 등이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론적인 법학자들(그들의 적들이 하나피 학파를 그렇게 불렀다)과 전통주의자들(그들에게 이 이름을 어느 정도 붙일 만한가 하는 것은 그들간에 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밖의 모든 다른 학파들이 자기들에게 붙여진 명칭이라고 주장한 용어)사이에 쓰라린 갈등이 발전되었다. 실은 아부 하니파와 말리크의 시대에는 그러한 갈등이 발전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체계를 세울 때 후자가 전통에 약간 많이 의존하고 전자가 이론에 의존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즉 말리크는 예언자의 바로 그 도시와 환경에서 살았지만, 아부 하니파는 이라크에서 예언자의 선례가 없는 상황들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에 의해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리크는 상황에 따라서는 공공복지에 관한 자신의 견해나 판단을 자유롭게 따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것은 극단적인 전통주의자들이 제거하고자 한 바로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시된 말씀 자체가 밑바탕이 되는 원리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인간이 이성이 구체적인 명령이나 금지 사항으로부터 일반적 법칙을 추론해 낼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간은 추론하지 않고 순종해야 한다. 마침내 중도 노선이 우세하게 된 것은 알 샤피파의 영향이었다. 이 학파는 예언자로부터 온 "믿을 만한" 전설들의 가장 중요한 권위를 인식했지만, 항상 변하는 일상 생활의 예측 못할 사건들을 포함시키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정의된 유추법에 의해 신성한 말씀의 의미를 확장해야 한다는 필요를 충분히 받아들었다. 마침내 네 학파는 모두 코란, 순나 즉(전설들 속에 보존되어 있는) 예언자의 관습, 이즈마 즉 무슬림 공동체의 동의 그리고 키야스 즉 이러한 세 가지로부터 유추적으로 연력한 것을 법의 주용한 네 원천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피 학파는 필요에 따라서 유추의 엄격한 적용을 통해 이르게 된 결론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들이 "좀더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생각한" 해결책을 취할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였다.


5.무타질라(The Mu'tazila)


이성과 전통간의 동일한 갈등이 신학의 영역에서 훨씬 더 가열되었다. 회교 기원2세기 초에 벌써 무타질라라고 알려진 어느 정도 뚜렷이 구분되는 사상가들이 집단이 있었는데, 그들은 전통적인 견해들에 반대하고 코란의 교리에 이성의 완화제를 적용시켰다. 그들은 신앙과 불신 사이에(그러므로 축복과 멸망 사이에도) 중간 단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보다 앞선 카다리파의 영적 후계자들읜 그들은 인간 의지의 자유를 주장했고 신이 인간이 악과 불신을 예정했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신이 반드시 정의에 따라 행동하여야 하고 항상 그의 피조물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행애야 한다고 가르쳤다. 반면에 정통파는 어떠한 중간 상태도 부정했고 인간이 모든 행동들은 영원부터 "간직되어 있는 서판"에 정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신이 정의를 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고 그가 행한 모든 것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더군다나 그들은 인간 사색의 기초를 부인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지성으로 선악을 감지하거나 구분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선악의 본질은 단지 신이 뜻에서만 나왔고 그의 명령과 금지에 의해서만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로부터 벗어난 신학이나 윤리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신적인 속성들(아는 것, 의지를 갖는 것, 말하는 것 등)과 신이 본직간의 관계에 관한 문제의 논쟁 그리고 코란이 창조된 것인가 혹은 영원한 것인가에 관한 유사한 논쟁이 불붙었다. 무타질라는 그러한 속성들이 신의 본질에 내재해 있지 않고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분리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코란은 확실히 창조된 것인데, 그 이유는 이와 다른 주장은 어떻든 코란을 제 2의 신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철학자들


이성의 옹호자들로서 무타질라의 위치는 알 킨디, 알파라비, 이븐 시나, 이븐 러쉬드 등과 같은 철학자들이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진지한 무슬림의 위치에서 출발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또한 전심으로 그리이스 철학을 그것의 모든 모순적인 이론들과 함께 진리의 형식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었다. 그들의 근본적인 태도는 매우 단순했다. 코란은 진리였다. 그리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모두 진리를 설명했다. 그러므로 코란과 철학은 모두 서로 조화시키는 일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대 희랍의 철학 및 지식이 보존되고 유럽으로 재도입된 것은 주로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7. 사변 신학자들


그러나 무타질라 견해의 후기 발전과 함께 정통파 가운데에서도 한 집단이 성장해 갔는데, 그들은 코란의 진술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어떤 의문도 없다라고 주장하는데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비정통파와 칼람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칼람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교의 사변 신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물론 학문적 체계는 점차적으로 발전해 나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알 아샤리가 전통적으로 주요 공적을 이룩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무타질리로 자라나고 약 40세까지 그들의 견해를 주장했지만, 갑자기 다른 편으로 급회전했다. 그리고 무타질라의 합리주의와 좀더 극단적인 한발리 학파의 조잡한 신인동형론에 반했다.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발전된 아야리 체계는 극단적인 원자 형이상학을 신학에 응용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공간은 수많은 단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 각각의 단자는 부피가 아닌 위치를 가지고 있으며 다음 단자와는 절대 공간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와 유사하게 시간은 무수한 연결되지 않은 시간 단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과 관계에 대한 어떤 사상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에서 분간할 수 있는 한 사물과 다른 것과의 조화 및 명백한 연관 관계를 어느 정도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어떤 법이나 필연성에 의해서도 제한 받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서 이러한 해명의 길을 발견했다. 즉 하나님은 계속으로 원자들과 여러 특징들을 창조하고 제거하며, 그럼으로써 모든 움직임과 모든 변화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8. 신비주의자들

 

신비주의는 이슬람교에서 처음부터 어느 정도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처럼 보인다. 모하메드 자신은 비록 신비주의적인 면이 가장 적은 사람들 중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때때로 고독과 단식에의 욕구에 강하게 이끌렀다. 그리고 그가 세운 종교에서 신비주의가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금욕주의, 세상 및 세상 악에 대한 부정의 맥락에서였다. 아라비아에 흩어져 있던 기독교 은둔자들은 그러한 태도를 고무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원시 이슬람교의 근본적 요소인 지옥에 대한 두려움의 발전과 먼저 어떤 경건한 사람들이 우마이야조 칼리프들에게서 분명히 나타난 불경함과 그리고 나서 압바스조의 매우 제한된 경건함으로부터 물러선 것도 그러한 태도를 대단히 고무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초창기부터 방랑하는 금욕주의자가 그의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은 비교적 흔히 보는 광경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모두 단순한 모직 의복을 입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궁극적으로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자들 즉 수피파의 이름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곧 좀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맥락에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발전에 있어서 그것은 희랍의 교회로부터 많은 힘을 입었고 참으로 페르시아와 인도의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플로티누스와 신플라톤 학자들에게 많은 힘을 입었다. 무슬림 철학자가 코란의 어떤 가르침들과 희랍 철학의 추상적 개념들을 조화시킬 수 있었고, 사변 신학자들이 아샤리 형이상학의 전면 부정으로부터의 도피처를 발견할 수 있었으며, 보통의 순니 무슬림이 자기의 종교에서 시와 따뜻함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비주의에로의 도피를 통해서만이 가능했다. 사변 신학자들이 그러한 학문적 업적을 달성하여 영향을 미치게 되자, 정통파에게는 이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통해서가 아니면 "자연법칙"도 인과 관계도 없어지고, 신학과 윤리학의 가능성도 없어진다. 그들은 코란과 전설들의 예언적 계시에 철저히 의존하는데 만족하거나, 아니면 신이 그를 진실로 찾는 자들에게 계속적으로 내려주는 "보다 작은 영감"에 의해서 그것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진실한 수피는 이것에 확고 부동하게 헌신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비록 흐릿하고 희미하기는 하지만 신이 거울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신비주의자의 의무는 감각의 세계로부터 그 자신을 근절하여, 이 거울을 깨끗하게 하고 그것을 신 쪽으로만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신의 비추임을 받게 될 것이다.

 

 

※ 모하메드를 중심으로 본 이슬람교의 성립 배경과 과정


이슬람교 와 코란


-<셈>계 일신교 계통의 종교로 추종자인 모슬렘은 약 12억정도이며 발흥시기는 7세기 초이다. "이슬람"의 뜻은 "복종"이며 "모슬렘"의 뜻은 "복종하는 사람"이다.


경전은 "코란"이며 114장, 6239절로 되어있다. 코란의 내용은 신관념(神觀念), 천지창조, 인류의 역사와 이에 대한 신의 지배, 종말(終末), 부활과 심판, 천국과 지옥, 예배등 의례 적인 규범에서부터 법적 규범까지 포함한다. 또 코란은 알라에 대한 신앙을 언제나 인간 의 구체적인 윤리적 행동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전이라 할 수 있다.

 


1. 이슬람 이전의 아랍부족사회

 


이시기를 자할리야시대 또는 무명시데, 영웅시대라고하며 6~7세기초 까지를 지칭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아랍 유목부족의 생존경쟁, 부족적 혈연집단의 연대의식으로 요약할수 있다.


이당시 아랍인은 까흐탄및 아드난이란 두 조상에 기원을 둔다고 여겼다. 까흐탄은 구약의 요그탄에, 아드난은 이스마엘의 자손으로 여겨지며 전자는 남아라비아의 예멘의 여러부족으로 아라비아의 서남부, 후자는 북부 아라비아 출신이라 한다. 그러나 이런 인종상의 차이는 현실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아라비아 반도의 주민은 크게 유목민과 정주민으로 나뉜다. 유목민(베드윈)은 방목생활과 수렵, 전투, 약탈등으로 생계를 꾸려갔고, 반면 정주민은 중부 아라비아의 오아시스나 해안가에 살며 농업과 상업으로 생계를 꾸렸다. 당시의 부족은 대개 경우 생각하는 그런 커다란 집합체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비교적 작은 집단이었다. 집단의 기본은 혈연을 유대로 하며, 노예와 해방노예가 있었고 차별을 받고있는 비 자유민인 미왈리, 그리고 다른 부족 출신의 자유민인 할리프가 있었다. 즉 혈연이 바탕이나 그 내부에는 동족이외의 자유민이 스스로의 의사로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유목부족은 풀과 물을 찾아 이동하는 데다 때때로 인근의 다른 부족과 싸우기도 했다. 그들에겐 약탈을 받았다 생각되면 받은 만큼 되갚는 동해복수(同害復讐)가 행해졌다. 부족내에는 뚜FUT한 정치적제도나 조직이 없었고 정치적 권력을 가진자도 없었다. 물론 부족장이 있긴하나 그의 영향력은 그가 부족민에게서 어느 정도의 존경을 받는가에 의존하며, 자국민인 부족민은 부족내의 중요문제를 부족집회를 개최하여 결정했다.


그러나 같은 부족민은 같은 조상을 갖고있다는 강한 부족의식인 아사비야-집단 연대의식-를 갖고있어 부족내에선 서로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혈연은 모든이가 복종해야하는 유일절대의 권위로 여겼다. 이것이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과 연계되어 부족정신을 이뤘다. 이런 부족정신은 자신의 부족민이 살해당하면 가해자가 속한 부족에게 같은 수의 복수를 행하는 것-피의 복수:이를 피하기 위해선 배상금으로 낙타 100마리-을 의무로 여기게 했다. 한편 그들에겐 지와르란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찾아온 손님을 환대하는 유목 베드윈의 관습으로, 보통의 경우 부족밖의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약탈하는 것을 허용하나 이 지와르관계에 있는 사람의 재산에 손을 대는 것은 수치스런 행위로 여김으로 그의 재산을 보호하게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 유목부족은 방목과 약탈로 생계를 유지했으므로 재산에 대한 소유권도 극히 유동적이었고 (강한 부족은 언제든 약한 부족의 재산을 뺏을 수 있다.) 따라서 그들에겐 빈부격차도 크지않아 부족내 개인은 평등하고 상당한 정도의 자유를 누렸다.

 


2. 이슬람 발흥시기의 메카

 


그러다 이슬람이 발흥하기 직전, 6세기 후반 히자즈 지방의 메카에 경제적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메카는 대상 교역의 교통 요로에 위치했고 또 성소 카바신전-오늘날 이슬람이 가장 신성한 신전. 코란에 의하면 카바의 건설자는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로 되어있다. 카바란 입방체를 의미-이 있어 아라비아의 유목민은 매년 일정시기 이곳을 순례했으며 순례기간인 신성월에는 성역으로서의 메카 및 그 주변에서 모든 전투행위가 금지되었다.


이시기(6세기 후반)아라비아 반도의 각 부족사회는 각기 숭배하는 우상신 갖고 있었는데 이들은 메카이 카바신전에 두고 매년 특정 달에 희생을 바치고, 또 매년 많은 사람들이 순례했기 때문에 메카는 언제나 축제의 분위기였다. 이런 신앙은 (우상신) 메카의 중요 소득원이었다. 즉, 땅이 척박해 농사를 할 수 없는 메카는 목축을 했는데 양, 산양, 낙타 등을 순례자에게 팔고, 가축의 생산물, 양모, 가죽등 제사에 남은 것은 상품화하여 타지방의 특산물과 교환하는 것이다.


메카는 교통요충지였기 때문에 상업의 중심뿐 아니라 금융의 중심으로 경제활동이 왕성해졌고, 이결과 유목내지 반유목경제에서 상업경제로 이행하게되며 급기야 6세기후반엔 아라비아의 최대도시로 성장한다. 그러나 사회조직 및 그들의 의식면에서는 부족적 연대성이나 동해복수와 같은 유목생활에 적합한 사회제도나 의식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다.

메케의 대다수 주민은 쿠라이쉬라는 부족에 속해 있었다. 쿠라이쉬부족은 스스로 대상을 조직하고 교역을 하면서 전에 가졌던 유목부족적인 부족연대의식은 희박해지고, 개인주의적 이기주의의 풍조에 물들어 부족내 유력자들은 약소자를 돕는 부족적 의무를 망각해갔다. 부족적 집단 지향형에서 개인적 이익 지향형으로의 이런 변화는 유목적 의식구조와 새로운 상업경제적 환경의 모순과 갈등을 가져와 이슬람이 발생하는 사회적 경제적 요인이 된다.

 

3. 모하멧드

 


모하멧드는 쿠라이쉬부족의 일원으로 570년경 메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역시 6살 때 잃은 그는 할아버지의 보호하에 있다가 그의 숙부 아부 앗딸리브에게 위탁되어 성장한다. 그의 청년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않으나, 메카의 대상활동에 참가하여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25세엔 약 15세 연상의 거부 미망인 카디자와 결혼한다. 그후 40세 정도되었을 610년경 그는 처음 알라의 계시를 받아 최초의 3년간은 그에게 찾아오는 특정인을 상대로 전도를, 614년에는 대중전도에 나서게된다. 그는 예언자로서의 스스로를 자각한 후 13년간을 메카에서 10년을 메디나에서 지냈는데 코란의 2/3가 메카에서, 1/3메디나에서 받은 계시이다.


코란은 예언자 모하멧드에게 계시된 유일신 알라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그가 처음 계시받은 610년경에서 623년 타계할 때까지 약 23년에 걸쳐 간헐적으로 계시된 장구(章句)를 모은 것이다.


그가 처음 계시를 받은 것은 라마단(9월)말 히라동산에서 명상을 하다 대천사 가브리엘로 부터라고 전승-모하메드의 언행록-은 전한다. 초기계시는 ①신의 은총과 권능. ②부활과 최후 심판. ③절대자에 대한 감사와 예배. ④베풂과 너그러움으로 요약된다.

 

4. 박해

 


모하메드에 대한 메카 반대자들의 주된 이유는 이 종교와 교리를 수락함으로 발생되리라 예상되는 정치 경제적 영향 때문이었다.


코란은 내세에 궁극적 가치를 둠으로 현세적인 것을 상대화하면, 부의 적대적 가치를 부정하고 신앙과 선행을 강조했다. 이 선행은 부족적 연대의식의 발로가 아닌 오히려 종교적 개인주의의 가치기준에서 나온 것으로, 비록 메카가 변화과정에 있었다해도 부족조직은 여전히 강했던 당시로선 종족의 전통을 파괴한다고 여겨 반발이 더했다. 그러나 어떤의미에선 코란의 상부상조원리는 사라져가는 옛 부족적 윤리의 좋은점의 재생이라 할 수 있다. 암튼 코란의 종교적 개인주의는 부족적 집단주의와 정면으로 대립하게 됐고, 코란의 내세주의는 아랍부족의 현세주의를 부정하며 지상의 모든 권위를 상대화하고 대상인(大商人)층을 정점으로하는 메카 사회 체제의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중대사였다. 모하메드와 대상인층은 사이가 나빴지만 당시 그를 양육한 숙부의, 족장으로서의 비호로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615년경 자신들이 제시하는 교리를 첨가하면 입교하겠다는 메카 대상인층의 제안을 거절함으로 둘 사이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게다가 그를 비호하던 숙부 아부 앗딸리브가 619년 별세하고, 잇달아 부인 카디자도 사망한데다, 또다른 숙부 아부 라하브가 씨족장으로서의 그의 보호를 취소하자 모하메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메카 동쪽 약 60㎞ 떨어진 고원도시 띠아프로 가나, 거기서도 배척당한다.

 


5. 히즈라

 


620년경 야스리브-현재 메디나-에서 메카를 방문한 여러명의 순례자들이 모하메드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다음해엔 다른 동료를 데려와 아까바에서 모하메드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맹세했다.-아까바의 맹세.


야스리브, 즉 메디나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농업을 주요생업으로 삼은 도시이다. 경제적 실권은 유태족이 장악했고, 그외 두 아랍부족 아으스와 하즈라즈가 있었는데 둘의 계속적인 상쟁으로 메디나의 정국은 불안정했다. 즉, 여기서도 새로운 정주사회에 적합치 못한 관습에 대치할 새로운 윤리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이를 확립치 못하는 괴로움이 있었다. 모하메드는 그의 이상을 실현코자 알라를 궁극의 주권자로, 자신을 지상의 대리인으로 인정하는 공동체인 움마를 현실세계에 건설해야한다고 생각하여 메디나로 이주(이를 히즈라라고 함)한다.


한편 그를 초청하는 메디나 사람들은, 물론 그를 예언자로 인정하는 자들이지만 또한 모하메드가 아랍부족간의 분쟁조정자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다. 메디나출신은 공정한 입장을 취하기 힘들며, 보통사람으로는 사람을 설득시키기 힘들것이나 모하메드는 메카의 망명자이고, 알라의 사도이므로 적격자란 생각에서였다.


이렇게 모하메드의 히즈라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한 메카의 이슬람교도들은 무하지룬, 메디나의 아랍인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한 자를 안사르라 불렸으며 이들은 하나의 신앙 공동체 움마를 형성했다. 또 메카에 삶의 기반을 다 두고 와야했던 무하지룬을 위해 모하메드는 안사르의 자택에 무하지룬을 생활하도록 했다.

 


6. 바드르 전투와 우후드 전투

 


안사르의 도움으로 생활하던 무하지룬은 그들의 생활보장 방법으로 "대상 습격"을 택한다. -당시 아랍 유목부족에게있어 대상 습격은 합법적이며 명예로운 생활수단이었다.


모하메드는 메카의 쿠라이쉬 부족이 파견하는 대상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메카측과의 전면대결을 의미한다. 메카측에선 상업활동이 방해받는 것은 사활의 문제이고, 쿠라이쉬 부족의 체면과 권위에 관한 일이기도 했다. 반면 메디나의 이슬람교도측에선 약탈은 경제적 자립의 토대가 될 수있고, 또 그들을 박해했던 불신앙자들에 대한 성전(聖戰-지하드)이라는 대의명분도있었다. 유목민이 아닌 모하메드가 약탈을 결의한 것에는 경제적 이익뿐이 아니라 쿠라이쉬 부족의 세력을 약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습격은 무하지룬이 주를 이루나 곧 안사르의 참가도 늘어나 바드르 전투에선 무하지룬 86명 안사르 238명이 참여했다 한다. 이 전투는 두배에 달하는 쿠라이쉬 부족의 대군을 완전격파하여 이슬람 교도에겐 자심감을 심어주고, 모하메드는 예언자적 위치가 고양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 실제로 "예언자"란 칭호는 바드르 숭리의 후로, 바드르 전투에 관한 코란 계시인 8장에 처 음 나온다. 그 이전까진 "알라의 사도"로 칭한다.)


코란 8장 전리품의 장에선 이날을 "구제의 날"로 부른다. 이 승리로 이슬람교도들은 알라가 모하메드와 이슬람교도의 편임을 확신하게 된다. 더구나 전리품의 1/5을 모하메드의 집안의 경비와 이슬람교도의 궁핍한 자의 구제비로 모하메드가 취할 수 있게한 것은 그가 일반 신도와는 다른 특수한 지위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으로,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긴 하나 교단국가(교단國家)의 통치와 비슷한 정치가 시작됐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르드 전투의 승리로 이슬람 세력은 메디나에서 자리를 굳히고 모하메드와 그의 공동체는 확고부동해지나, 메카는 전쟁에서 패배한 후 잃어버린 위신 회복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625년 3월 유목민을 포함하는 메카군 약 3천명이 메디나를 공격해왔다. 이에 대응하기위해 이슬람군은 메디나의 교외 우후드 언덕에 진을 치나 전투가 개시되기 얼마전 일부의 신자들이 전열을 떠나고, 또 메카 기병대의 활약으로 이슬람군은 이 우후드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다.


메카의 이전투의 중요목적은 모하메드가 메디나에 건설한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파괴하고, 바드르 전투에서의 손실의 몇곱을 갚아주는 것이었다. 이런 메카군은 우후드 언덕에서 돌연 전투를 중지하고 메디나로의진격 대신 메카로 회군한다. 이것은 메카의 사상자도 많았거니와 메디나의 이슬람군 이탈자인 사이비 이슬람 신자의 세력증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드르 전투의 승리로 알라의 도움을 확신하던 이슬람교도둘은 우후드 전투의 결과를 자신들의 불신앙에 대한 알라의 처벌과, 신앙의 견고함을 확인하기위한 수단으로 내린 시련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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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개요] 이슬람 by 무슬림-3


조직

 

움마(공동체)는 신자들로 구성된다. 심판의 날 무함마드가 "움마티 움마티"(저의 공동체를, 저의 공동체를(구해주소서))라고 외치면서 공동체를 위한 샤피(중재자)로 나설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슬람의 확산

 

무함마드 사후 예언자의 지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예언자들의 '봉인'으로서 마지막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후계자 Caliph는 무함마드로부터 예배와 전쟁에서 공동체를 이끄는 일, 계시에 따라 판결하는 일을 집행한다.

 

아부 바크르와 아라비아의 통합

 

무함메드 사후 칼리프 선정 문제 논란이 있었다. 무함메드의 가까운 동료들인 Muhajirin(이주자) 또는 Ansar(돕는자)들은 자신들이 칼리프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통주의자들은 계승의 세습 원칙 지지하며 파티마와, 사촌이며 사위인 Ali지지했고, Ummayads(무함메드 부족의 지도자들)는 자신들이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Ansar 들이 주도권 잡고 아부 바크르를 칼리프로 선출했다. 무함마드 사후 자유분방한 베두인들이 이슬람의 조세제도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아부 바크르가 진압했다. 아부 바크르(632-634 재임)는 2년간 칼리프로 있다가 사망했다.

그 후 전투를 통한 부족 통합이 이루어졌고, 통합을 기반으로 외부 세계 공격이 이루어져 시리아를 공격하고, 이라크와 팔레스틴 남부까지 진출했다.

 

우마르와 정복

 

두 번째 칼리프 우마르(634-644 재위, 이븐 알-하탑)는 Khalid ibn al-Walid를 보내 635년 시리아 다마스커스를 정복했다. 이 정복은 헬레니즘 지배체제에 불만 가졌던 지역민의 협력에 힘입었다. 638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640년에는 가이사리아를 정복했다. 639-641년에는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1세기 후에는 스페인까지 진주했다. 동쪽으로는 사산조의 페르시아까지 정복(640-649)했다.

승리의 원인은 우선 피정복지 거주자들이 전쟁을 싫어하고 내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능수능한한 기마술과 재빠른 기동성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전사들의 강한 열성과 종교적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리품의 5분의 4는 전사들의 몫이며, 전투에서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믿음이 있었다.

 

권력투쟁

 

정복으로 인한 아라비아의 무슬림들은 경제적 부를 누렸다. 이에 따라 권력 투쟁이 가열되었다. 우마르가 기독교인 포로에 의해 644년 살해된 후 정치적 분쟁이 시작된다. 무함메드의 동료이자 사위인 우스만 Uthman(우스만 이븐 아판)이 칼리프로 선정(644-656)된 후 대다수 고위직에 자기 부족원(우마이야 가 : 원래 우마이야가는 무함마드 탄압에 앞장섰던 가문) 임명으로 물의를 빚어 반대파 무슬림들에 의해 메디나에서 656년 쿠란 읽고 있던 중 살해된다. 이 우스만은 쿠란의 편집 완결지었다.

Ali(무함마드의 백부 아부 탈립의 아들이자 파티마의 남편)가 656년 다음 칼리프에 선출되었다. 그는 우미이야가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와 대결에서 피동적 자세를 취하다 반대파들에 의해 살해 되었다. 시핀 전투에서 승리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무아위야가 제의한 평화협정을 수용해서 격분한 무슬림 일파(이들이 하와리즈파(이탈자들))가 분리하고, 661년, 하와리즈파 무슬림이 알리 살해한 것이다.

 

개괄적 정치사 661-1900

 

알리 살해 후 우마이야 부족이 칼리프직 장악하고 무아위야가 자신을 알리의 계승자라고 선포(661)하고, 우마이야조 the Ummayad caliphate를 설립했다. 이것은 아랍적 통치술과 기사도 정신이 주도한 왕조였다. 우마이야조 통치자들은 시리아에 거주했으므로, 메디나는 독실한 신자들이 모이는 도시가 되었다. 691년 우마이야조 무슬림 군대는 대서양 해안까지 진출했고, 711년에는 지브랄타 해협을 건넜다. 그리고 같은 해 트란스옥시아나 지방(파키스탄 남부)과 인더스 계곡 하구 신드 지방을 정복했다.

680년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 즉위한다. 이에 알리의 아들 후세인이 패권에 도전했다가, 정월 10일 이라크 남부 카르발라 전투에서 살해 되었다. 쉬아파는 오늘날까지 그의 기일을 추모하고 있고, 이 전투에 대한 추모에서 마르티야(悲歌)가 생겨났다. 쉬아파는 자기 몸 채찍질하며 행진하는 추모행렬, 수난극 공연을 하고 있다.

한편 우마이야조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같은 시기 메카에서 칼리프 도전자 나타났는데, 무함마드의 동료 주바이르의 아들 압둘라(684 사망)가 우마이야조에 반기를 들었다. 알리의 당파(쉬아트 알리)가 강력한 정치세력 형성하고 있던 이라크에서는 새로운 교리가 나타났다. 알리 가문의 인물이 장차 돌아올 것이라는 사상이다. 아랍 정복자들과 마왈리(비아랍계 무슬림)들 사이의 갈등이 이라크에서 싹텄다. 쿠란이 보장한 신자들 사이의 평등을 요구했고, 이러한 흐름이 하나의 정치적 운동 형성하고, 칼리프 위는 무함마드 가문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라크, 이란 지방의 친 알리 정서를 이용한 혁명을 성사시킨 이 운동의 주도자들은 예언자의 삼폰인 압바스의 한 후손에게 넘김(749년)으로써 압바스조 the Abbassids가 우마이야조를 스페인으로 몰아내고 바그다드 천도를 단행한다. 이에 알리 가문 추종자들은 다시 실망하게 된다.

스페인에서는 움마야드 후손들이 독자적 칼리프제를 확립했다. 우마이야 가의 마지막 생존자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도주하여 756년 그곳에 왕국을 세우고 아랍문명을 꽃피웠다. 스페인 우마이야 왕국은 압두르 라흐만 3세 재임시(921-961)에 전성기를 이룬다. 이 시기 무슬림, 그리스도인, 유대인 사이의 문화적 협력 이루어졌으나, 그 후 수많은 소왕국으로 분열된다.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 이곳을 지배했다. 존속할 수 있었던 유일한 무슬림 왕국은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한 바누 아흐마르 왕국뿐이었다.

압바스조는 종교적 율법에 충실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 노력했다. 우마이야조가 아랍적었다면, 이들은 이슬람적 제국을 지향했다. 756년 바그다드 천도 이후 페르시아 문명의 영향이 침투했다. 9세기 말 칼리프 권력 쇠퇴하게 되자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터키 출신 용병과 전쟁 노예(맘룩)이 정부를 보호하다 결국 각기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 바그다드의 전성기는 천일야화로 알려진 하룬 알 라쉬드(786-809) 재임시였다. 하룬의 아들 마문(813-833)은 그리스 철학서와 과학서적의 번역 사업을 장려했다. 후에 이 학문적 유산이 스페인 번역사들의 소개로 다시 유럽으로 역수출되었다.

압바스 제국 변방 영주들이 독립하여 각각 통치 지역을 차지했다. 이들은 술탄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처음 사용한 통치자는 페르시아계 쉬아파 왕조인 부이조를 건국한 무이즈 앗-다울라로 945년 바그다드의 실질적 통치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칼리프는 상징적 존재로만 명목을 유지했다.

이집트에서는 두 개의 터키계 왕조가 압바스가의 지지자가 되었다. 그러나 쉬아파 파티미조에 의해 969년 멸망했다. 동쪽에서는 터키계 술탄 가즈나의 마흐무드가 인도, 아대륙으로 확장되었다. 1026년 라호르는 인도 가즈나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이로써 페르시아 문명이 벵갈, 데칸 지역까지 진출했다.

아랍어가 이슬람 세계의 신학 용어로서 지위를 유지했지만, 발칸반도에서 벵갈만에 이르기까지 주로 페르시아어가 의사소통 수단으로 통용되었다. 그후 무슬림 제국이 여러 자치지역으로 분열되며 쇠잔 시작했다. 팔레스틴과 이집트 인근에서는 무함메드의 딸 파티마에 연원을 둔 시아파 Shiite의 파티마조 Fatimid가 909에서 1171까지 통치했다. 11세기에 셀주크 터어키인들 Seljuk Turks가 페르시아, 이라크, 시리아 장악 후 이집트, 비잔티움 국경까지 진주했다. 1055년 셀주크족 영주 투그룰 벡은 쇠퇴한 압바스 칼리프의 수호자로 군림했다. 이들은 철저한 순니 무슬림으로 근동에서 가장 중요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1071년 비쟌틴군을 대파하여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진출할 길을 열었다.

비슷한 시기 십자군이 침입하여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무슬림의 반격이 이어졌다. 순니파 Sunnute 살라딘 Saladin이 이집트 파티마조를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1187)했다.

1220년 몽골인들이 침입 이슬람 문명 파괴하고, 압바스 제국을 굴복시켰다. 마지막 칼리프는 1258년에 목숨을 잃고, 바그다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몽골인들은 이집트의 맘룩조 the Mamelukes에 의해 추방되고, 이들은 1세기 남짓 이라크와 페르시아 등지에서 살다가 주로 수피즘을 통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몽골 세력 쇠퇴 후 4개의 이슬람 제국이 출현했다. 옥서스 Oxus 강 분지의 우즈백조 Uzbek, 페르시아의 사파이조 Safawi, 인도의 무갈조 Mughal, 소아시아의 오토만조 Ottoman가 그것이다.

13세기 소아시아에서 흥기한 오토만 터어키인들은 1453년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점력후 16세기에는 비엔나까지 진격하였다가 퇴각,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장악한 후 1차 세계대전까지 존속했다.

 

초기의 무슬림 사상

 

Hadith의 편찬

 

하디스는 무함메드 자신, 또는 동료들이 보고한 무함메드의 언행 수집한 것이다. 이 외에 여러 가지 전승들이 무함메드 생존시 확립된 관습, 관례, 선례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무함메드 사후 2세기가 지나면서 신빙성 있는 전승(순나) 편찬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기준은 전승의 전달자가 지닌 권위에 의해 순수성, 정당성, 빈약성 판단이 이루어진 것이어었다. 이스나드(연결고리)는 전승 자료 전하는 사람들의 연결고리가 무함마드나 그의 동료까지 연결되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이를 통해 여섯 개의 전승집 편찬 후 보편성을 인정했다. 예언자의 전승은 그 자체로 일종의 쿠란 해설서가 되었다. 이중 가장 권위있는 것은 페르시아 무슬림 알-부크하리 al-Bukhari(870 사망)의 전승집이다. 7,300여 편을 선별했는데 실제 숫자는 약 3000편이었다. 부크하리와 동시대 인물 무슬림(875 사망)도 비슷한 작업을 했다. 이 두 학자가 작성한 하디스 모음은 사히흐(건전한, 흠없는) 하디스로 불리우며 쿠란 다음가는 권위를 누렸다. 이 외에도 귄위있는 전승집들이 다수 존재(Ahmad ibn Hanbal의 [무스나드]Musnad 등)했다.

하디스는 '일화', '이야기'의 뜻으로 다양한 하디스가 나왔다. 9세기에는 수만 편의 하디스가 유통되었다. 현대 무슬림 중 일부는 쿠란의 절대적 권위 강조하며 하디스를 부정하기도 한다. 순나에 반하는 것은 비다(혁신)로 불리우며 공동체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한 것으로 사고되었다.

 

첫 번째 논쟁

 

확고한 정통의 기준이 없음으로 인해 생겨난 질문들이 있었다. 죄를 짓고도 여전히 무슬림일 수 있는가? 신앙과 행동 사이의 괴리는 허용될 수 있는가? 정치적 동기로 편법을 사용해도 괜찮은가? 이슬람의 원칙을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겨야 하는가, 알라의 뜻에 맡기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등이다.

분리자들, 암살자들 the Kharijite은 칼리프는 꼭 어떤 집단에서 나올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움마야드 부족은 극단적 청교도 운동을 탄압했다.

the Murjites는 추후의 판정을 옹호한다. 진정한 무슬림과 그렇지 않은 무슬림의 판단은 알라만이 할 수 있다. 이들의 입장이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Sunnis와 Sharia

 

이슬람의 확산으로 인해 주로 아라비아 이외의 지역에서 복잡한 상황에 자주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원칙을 수립하게 된다. 우선 메디나에서 무함메드가 했던 행동, 실천 sunna, 언행을 기록한 하디스에 의존하고, 이것이 불충분한 경우 무함메드 죽은 직후의 sunna와 메디나 공동체의 의견 ijma 참조하며, 그래도 결정이 안 날 경우 쿠란이나 하디스의 선례에 명시된 원칙에서 유추 qiyas해서 적용하거나,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사유(라이)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 아래 행동하는 무슬름들을 순니파 Sunnis라고 부른다. 일반적 입장 결정시 순니파들은 알라의 가르침에 근거하는 한 법과 종교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법을 지칭하는 sharia는 종교의 진정한 길을 의미한다. 대신 일반적인 법 지칭은 fiqh 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ulama (학자들)는 법 준수를 감시한다. mufitis (법학자)는 재판관(qadis)의 법적 견해를 조정한다. 쿠란에 합당한 법적 결정 불가능할 경우 이성과 상식 ijtihad에 의해서 결정한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계시와 전승을 연구하고 이것을 논리적으로 체계화시키는 것이다.

 

이슬람 법학파

 

하니파학파 the Hanifite

 

법학적 측면에서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다. 페르시아인 Abu Hanifa(767 사망)가 이라크에서 창시되었다. 이라크의 상황이 무함메드가 살던 상황과 유사한 경우 쿠란 그대로 적용하고, 다를 경우 유추해서 적용했다. 다른 학파에 비해 인간의 사유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 더 넓게 열어놓았다. 유추에 의한 결정이 일반적 정의에 어긋날 경우 공공이익을 위한 판단 istihsan에서 나오는 '신중한 의견' 또는 '인정된 정의'를 참고로 다시 결정했다. 압바스조, 오스만 터어키가 이들의 입장을 따랐다.

 

말리크 학파 the Malikite

 

메디나에서 말리크 이븐 아나스 Malik ibn Anas(753-795)가 창시했다. 쿠란과 하디스에 의해 법, 의식 해석하고, 애매한 경우 메디나의 '합의된 의견' ijma에 의존했다. 하디스의 정밀한 분석과 엄정한 비판을 통해 신뢰성을 고양시켰다. 해석이 어려운 경우 유추법 사용하고, 이것이 ijma와 상충할 경우 공공이익을 감안하여 결정했다. 이 학파는 보수적 성격을 가졌으며, 꾸란에 배치되는 예언자의 관행을 과감히 배척했다. 현재 북아프리카, 남부 이집트, 동부 아라비아에서 지지되고 잇다.

 

피 학파 the Shafiite

 

법학을 체계화한 학파로, 페르시아 출생 아랍인으로 쿠라이쉬 부족 출신 알-샤피이 al-Shafii가 창시했다. 그는 말리크의 제자로, 독자적인 법률과 전통 관습의 조화로운 절충을 통해 합리적 법학 이론의 토대를 형성했다. 이 학파는 법의 네 근원을 구분한다. 알라의 계시 쿠란, 예언자의 언행 하디스, 법학자들에 의해 표명된 무슬림 공동체의 여론 ijma, 이성에 의한 유추 qiyas가 그것이다. 그중 끼야스 적용에 명백한 규정과 한계를 두었다. 네 근원의 배열에서 이성의 사용을 부차적 요소로 두었다. 쿠란과 하디스에 동등한 권위를 부여했는데, 때로는 하디스에 더 권위를 부여하기도 했다. 불충분한 증거에 기반한 '독자적 해석'도 거부했고 이즈티흐산(선호)을 부정한다. 현재 동부 인도, 북부 이집트(카이로), 동부, 남부 아프리카, 남부 인도에서 지지되고 있다.

 

한발리 학파 the Hanbalite

 

아흐마드 이븐-한발 Ahmad Ibn Hanbal(855 사망)이 창시했다. 그는 알-샤피이의 제자이지만 '독자적 해석'에는 스승보다 더 비타협적인 순수한 전통주의자였다. 꾸란과 예언자의 관행, 즉 순나에 전적으로 의존했으며, 현재까지도 샤리아의 원칙에 가장 충실한 신앙공동체로 지속되고 있다. 끼야스를 샤리아 법원으로 수용하는 문제에 가장 배타적 입장을 취했다. 무타질라파에 반대했는데, 무타질라파가 쿠란의 창조성을 주장할 때, 이에 단호히 맞서 쿠란의 영원성을 주장했다. 첫째는 쿠란, 둘째는 하디스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Hijaz와 사우디아라비아 전역에서지지되고 있다.

 

기타

 

자히르 법학파

 

4대 법학파에는 들지 못하나 중요한 학파이다. 쿠란의 외면(자히르)적 의미를 강조했다. 법률해석에서 꾸란과 순나의 언어적 의미에 크게 의존한다. 다른 학파의 견해를 전혀 참조하지 않는 고립적 해석태도 견지한다. 그러나 이성, 유추, 유효 istishab, 모방 taqlid 반대한다. 이 학파는 이라크에서 무함마드 이븐 다우드(909 사망)가 창시했고, 이븐 하즘(1064)이 발전시켰다. 이븐 하즘에 의해 유독 스페인에서 성행했다. 후에 신지학적 수피즘의 대가 이븐 아라비(1240)에도 영향을 미쳤다.

 

법학파들에 대한 무슬림의 태도

 

마드하브(법학파) 통합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견의 존재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징표라는 하디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법학파 간 차이는 대부분 사소한 것이었다.

 

이즈마

 

11세기에 마드라사(신학교) 설립하여 네 개 법학파 모두에게 공간을 제공했다. 이즈마(공동체의 합의) 정신에 따랐는데,이즈마는 쿠란, 전승, 유추에 이어 네 번 째 法源이 되었다. 초기 이즈마는 다른 지역의 관례나 전통 받아들여 새로운 방안 모색하는 창조적 역할 했으나, 10세기 말, 11세기 초에 경직화되어 변화 억제 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이즈티하드(法源)의 문은 닫혔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 결과 이즈마가 고착되며 적응력울 잃기 시작했다.

 

샤리아(넓은 길, 곧은 길)

 

하느님과 동료 인간에 대한 신자들의 의무조항으로, 이것의 유일한 입법자는 알라이다. 이 샤리아는 법전화된 적이 없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종교적 가르침이 지닌 실천적 면을 형성하며, 또 공동체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세세대대로 전수되었다. 종교판사(카디)는 그 이행여부를 감독했고, 무프티는 어떤 행위가 율법에 준하는지 여부에 대한 법률적 소견서(파트와)를 제출했다.

 

피크(통찰)

 

샤리아를 다루는 학문으로 신학에 바탕을 두고 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샤리아 중 사법적인 부분은 1869년 오스만 제국의 메젤레 속에 법전화되었다. 모든 행위를 다섯 범주로 분류했다. (의무적 행위, 바람직한 혹은 추천할만한 행위, 아무래도 상관없는 행위,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 금지된 행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쿠란은 동정녀 출산을 인정힌다. 예수는 무함마드 이전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이자 인류의 병을 고치는 치유자였고, 신성한 지위를 탐하지 않는 사랑과 가난과 겸손의 사표였다고 여긴다. 마리아는 지상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네 여인 중의 하나로 믿는다. 그러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쿠란은 인정하지 않는다. 원죄의 개념이 없으므로 대속의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의 예수 본성에 대한 문제는 이슬람의 교리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예수의 호칭 로고스는 쿠란에 대해서 영향을 미쳤다. 즉 쿠란을 창조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적으로는 쿠란은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와 같은 지위를 차지한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말씀이 책이 되었다'는 것과 상통한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무함마드를 움미(이교도들에게 보내진 예언자 라는 의미의 용어인데, 문맹이라는 의미로 해석)라는 칭호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외부적 지식으로 때묻지 않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쿠란에 대한 존경이 무함마드의 지위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와리즈파(하라자-떠나다,이탈하다-에서 유래)

 

알리에 대항했던 집단이다. 알리가 하느님에게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술책을 받아들였다는 점에 반발했다. 행위가 없으면 신앙도 없다는 입장 고집하는 윤리지상주의자들로 선행에 의해 신앙이 커질 수 있음을 주장했다. 중죄를 범한 사람은 무슬림이 아니라고까지 주장했다.

 

순니파(순나와 자마아의 백성들, 신자들의 무리)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집단으로 주로 무르지아파(판단을 유예한 사람들)에 의해 견지되었다. 이 집단은 신앙심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에게 맡겨야 한다고 믿었으며, 신앙은 행위를 통해 증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상태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중죄인이라 할지라도 불신자가 아니며, 따라서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타질라파 the Mutalzilites

 

무타질라파는 히즈라 1세기 경 하와리즈파와 무르지아파 사이에서 생성했다. 이 집단은 헬레니즘의 철학적 요소를 도입하여 정의와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이슬람을 해석했다. 압드 알 자바르 Abd al-Jabbar(936-2035)에 의해 체계화되었는데, 중죄인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즉 중죄인은 신자도 불신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신학적 문제에서는 이성에 호소했지만, 윤리적 문제에 있어서는 카다리야파(결정하다, 카다르에서 유래)와 입장을 같이 했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주된 관심사는 이란으로부터 들어온 이원론적 영향 막아내는 것이었다. 특히 마니교의 침투에 저항했다. 이러한 이원론에 맞서기 위해 하느님의 유일성(타우히드) 믿음을 공식화했다. 타우히드는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도 절대 불가함을 의미한다. 쿠란의 신인동형적 용어(예 : 하느님의 얼굴) 등은 비유적으로 해석했다.

이들은 하느님의 정의(아들)를 강조했다. 즉 "하느님은 정의롭게 행위할 수 밖에 없다. 인간에게 선을 악으로 되갚으시지 않는다. 동물조차도 이 세상에서 당한 부당함을 다른 세상에서 보상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정의는 인간의 이성을 기준으로 했으므로 인간은 자유로운 반면, 하느님은 자신의 정의에 발목이 잡혀 자유롭지 못하다는 신학적 위험에 직면했다.

무타질라파는 움마야드 칼리프 시기 시리아, 이라크에서 출현했다. 이들은 그리이스,유대교,기독교,조로아스터교의 사상에 친숙했던 무슬림들이다.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합리적 논증 kalam을 수행했다. 쿠란에 나오는 알라의 "약속과 위협"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알라의 도덕적 요구에 대해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측면을 강조했다.

무타질라파는 이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쿠란에 근거한 신학적 교리도 이성의 시험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이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어떤 교리도 이성적 논리에 적합하지 않으면 진리일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성은 알라의 정의에 대한 통일성을 주장하게 하며, 알라는 인자하고 정의롭고 자비로와야 한다는 내적 필연성 보여준다. 그러나 쿠란이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았다는 점는 부인

했다. 무타질라파는 따뜻한 인격적 신앙을 지적 사변으로 대체했다고 평가됨

그후 무타질라파는 정치적 이유로 압바스조 칼리프 al-Mamum의 지원을 받았다. 827년 알-마뭄은 쿠란의 영원성 주장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특히 아흐마드 이븐 한발이 박해받았다. 그러나 20년 뒤 새로운 칼리프는 오히려 무타질라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성적 해석방법으로 쿠란의 신인동형론을 비판했고, 알라의 시도나 특성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알라의 통일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쿠란의 묘사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합리적 설명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결과였다.

무타질라파는 10세기에 종말을 맞이했다. 그러나 시아파를 통해 이들의 사상 이어지고, 진보주의자들은 무타질라파의 입장을지지했다. 이들의 쇠퇴는 보수적인 순나의 옹호자들이 무타질라파 논박을 위해 합리주의적 방법을 채택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븐 한발의 강력한 전통주의의 가르침과 아샤리를 정점으로 한 새로운 신학이론의 발전이 있었다. 아샤리는 '논리적 원칙' ilm al-kalam에 근거한 이성적 논쟁 방식은 많은 법학자들에 의해 수용되면서 확산되었다. 무타질라파는 쉬아 신학의 형성에 공헌한 반면, 순니 세계에서는 영향력이 소멸했다.

 

알-아샤리 al-Ashari의 사상

 

아불 알-하산 알-아샤리 Abul al-Hasan al-Ashari는 히즈라 후 250년 경 바그다드에서 출생했다. 그는 샤피 학파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무타질라파의 가르침 배우며 옹호하다 40세 경 갑자기 이들과 결별했다. 그의 사상적 의의는 신학과 법학의 접목이지만, 이슬람권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알라의 일곱가지 신적 속성을 주장했다. 그것은 모든 삶, 모든 지식, 힘, 의지, 듣고, 보고 말하는 것은 알라의 행위라는 것이었다. 이를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일의 원인은 알라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전통 교리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다. 내면과 외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 알라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쿠란에 명시되어 있는대로 알라를 생각하에 결정한 것도 알라이다. 쿠란의 천국,지옥 표현도 실재에 대한 기술이라고 주장했다. 즉 천국을 믿는 사람은 실제로 옥좌에 있는 알라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 말고"bi-la kayf 그저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알라의 모습을 피조물의 모습과 비유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쿠란의 말은 영원하나 그 글자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알라는 선과 악에 모든 책임이 있다는 관념에 대해서는 심각히 여기지 않았다. 인간의 행위는 미리 예정되어 있지만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죄나 정의를 얻으며, 그리하여 좋건 나쁘건 미리 예정된 행위를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 중 하나는 '획득이론'이다. 인간의 행동은 비록 신의 뜻으로 창조된 것이지만, 그 책임은 인간이 획득한다는 주장이다.

알-아샤리는 이븐 한발의 신학이론에 토대하여 순니 교의를 확립했다. 첬제, 자구나 음성으로 표현되는 경직된 꾸란 해석에서 벗어나 그것이 담고 있는 신의 속성과 영혼의 말씀으로 꾸란을 해석했다. 이는 이성보다는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둘째, 인간의 자유의지와 숙명론과 관련하여 획득이론을 제시했다. 이는 定命 사상 개념이다. 그 외에도 중재를 위한 신학의 전형을 제시했고, 하느님은 인간적 사고의 범주를 통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샤리파의 견해에 따라 신앙의 강령은 점차 딱딱해졌고, 신학적 용어도 스콜라식으로 세련되어 갔다. 이런 입장에 대해 한발리 학파와 샤피이 학파 일부가 반대했고, 말리키 학파는 신학적 논쟁을 경원시했으며, 알 모라비 왕조는 신학의 가르침을 금지하기도 했다.

 

알-마투리디 Al-Maturidi(944 사망)

 

알-마투리디는 인간의 죄는 알라의 뜻에 의해 생기지만 알라는 이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알라는 불신앙을 창조하였고, 그것을 '불특정적'으로 의도했다. 그러나 알라는 인간에게 불신앙을 명령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교도로 하여금 신앙을 갖도록 명했지만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물론 자유의지가 신의 전능과 정의와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한 의문 을 제기했다. 인간의 행위가 신의 권능에서 비롯되지만, 인간의 죄악조차도 신의 즐거움이나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쿠란의 비창조설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인간의 발음은 창조된 것이지만 그 안의 내용은 창조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하나피 학파를 중심으로 수용되었고, 셀주크조 세력의 서진과 함께 크게 확산되었다.

 

아샤리 신학과 마투리디 신학의 관계

 

경쟁, 적대관계는 형성되지 않았고, 후일 양자는 순니의 틀 속에서 조화롭게 수용되었다.

 

메디나 학파의 공헌과 순니 신학의 형성 배경

 

신학의 확립과정에서 아립 이념의 우위를 확고히 하는 정치적 요소가 크게 작용했다. 메디나 학파는 교회와 국가가 하나라는 종교이론과 초기 칼리프들이 추구했던 도덕적, 종교적 결속을 바탕으로 이슬람 신학의 주류로서 정통성을 보존했다. 한편 세속적 노선에 대한 종교적 반대와 정치적 저항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메디나 학파는 초기 이슬람 교회 조직에 실용적이고 경건한 기풍을 심어주고, 이것이 교회의 근본적 성격으로 굳어지게 했으며, 이슬람 종교를 정치조직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종교를 정치권의 상위에 두게 했다.

 

무타질라파의 성장과 이븐 한발의 신학적 논쟁

 

무타질라파는 신학적으로는 이슬람에 헬레니즘적 해석주의를 접목했고, 정치적으로는 히즈라 1세기 말경의 극단적 두 사상적 조류의 중도를 표방하고 등장했다. 극단적 교조주의와 무조건적인 실천주의를 주장하던 카와리즈파의 지나침과, 정치적으로 순응하면서 행위보다 내적 신앙만을 고집하는 무르지아파의 윤리적 방종에 대한 반작용에서 시작한 것이다. 무타질라파는 이성을 이슬람 신학에 처음 도입했으며 압바스조 칼리프들의 비호를 받으며 발전했다.

무타질라파의 신학은 호교론적 입장이다. 신의 개념에서 신인동성론의 요소를 제거했는데, 이 입장은 알라의 인격적 모습에 대한 설명에서 실패하여 신자들의 지지 얻지 못했다. 한편 이성과 정의의 개념을 통해 알라의 절대성에까지 이 개념을 적용시켰다. 그것은 신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가치를 인간 이성의 산물과 일치시키는 결과였다. 이 때문에 정통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또한 꾸란의 창조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꾸란은 신이 창조한 말씀이고, 태초부터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의 예언자와 함께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순니 학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순니학자들은 꾸란을 신의 본질적 속성으로 이해하면서 꾸란의 절대적 우위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이븐 한발(780-835)은 꾸란의 영원성 설파하며 무타질라파를 비판했다. 그는 합리적 방법, 그리스철학의 영향 받은 이원론적 철학을 거부했으며, 하디스를 추종하는 보수적 노선을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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