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개요] 이슬람 by 무슬림-3
조직
움마(공동체)는 신자들로 구성된다. 심판의 날 무함마드가 "움마티 움마티"(저의 공동체를, 저의 공동체를(구해주소서))라고 외치면서 공동체를 위한 샤피(중재자)로 나설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슬람의 확산
무함마드 사후 예언자의 지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예언자들의 '봉인'으로서 마지막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후계자 Caliph는 무함마드로부터 예배와 전쟁에서 공동체를 이끄는 일, 계시에 따라 판결하는 일을 집행한다.
아부 바크르와 아라비아의 통합
무함메드 사후 칼리프 선정 문제 논란이 있었다. 무함메드의 가까운 동료들인 Muhajirin(이주자) 또는 Ansar(돕는자)들은 자신들이 칼리프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통주의자들은 계승의 세습 원칙 지지하며 파티마와, 사촌이며 사위인 Ali지지했고, Ummayads(무함메드 부족의 지도자들)는 자신들이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Ansar 들이 주도권 잡고 아부 바크르를 칼리프로 선출했다. 무함마드 사후 자유분방한 베두인들이 이슬람의 조세제도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아부 바크르가 진압했다. 아부 바크르(632-634 재임)는 2년간 칼리프로 있다가 사망했다.
그 후 전투를 통한 부족 통합이 이루어졌고, 통합을 기반으로 외부 세계 공격이 이루어져 시리아를 공격하고, 이라크와 팔레스틴 남부까지 진출했다.
우마르와 정복
두 번째 칼리프 우마르(634-644 재위, 이븐 알-하탑)는 Khalid ibn al-Walid를 보내 635년 시리아 다마스커스를 정복했다. 이 정복은 헬레니즘 지배체제에 불만 가졌던 지역민의 협력에 힘입었다. 638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640년에는 가이사리아를 정복했다. 639-641년에는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1세기 후에는 스페인까지 진주했다. 동쪽으로는 사산조의 페르시아까지 정복(640-649)했다.
승리의 원인은 우선 피정복지 거주자들이 전쟁을 싫어하고 내적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능수능한한 기마술과 재빠른 기동성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전사들의 강한 열성과 종교적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리품의 5분의 4는 전사들의 몫이며, 전투에서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믿음이 있었다.
권력투쟁
정복으로 인한 아라비아의 무슬림들은 경제적 부를 누렸다. 이에 따라 권력 투쟁이 가열되었다. 우마르가 기독교인 포로에 의해 644년 살해된 후 정치적 분쟁이 시작된다. 무함메드의 동료이자 사위인 우스만 Uthman(우스만 이븐 아판)이 칼리프로 선정(644-656)된 후 대다수 고위직에 자기 부족원(우마이야 가 : 원래 우마이야가는 무함마드 탄압에 앞장섰던 가문) 임명으로 물의를 빚어 반대파 무슬림들에 의해 메디나에서 656년 쿠란 읽고 있던 중 살해된다. 이 우스만은 쿠란의 편집 완결지었다.
Ali(무함마드의 백부 아부 탈립의 아들이자 파티마의 남편)가 656년 다음 칼리프에 선출되었다. 그는 우미이야가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와 대결에서 피동적 자세를 취하다 반대파들에 의해 살해 되었다. 시핀 전투에서 승리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무아위야가 제의한 평화협정을 수용해서 격분한 무슬림 일파(이들이 하와리즈파(이탈자들))가 분리하고, 661년, 하와리즈파 무슬림이 알리 살해한 것이다.
개괄적 정치사 661-1900
알리 살해 후 우마이야 부족이 칼리프직 장악하고 무아위야가 자신을 알리의 계승자라고 선포(661)하고, 우마이야조 the Ummayad caliphate를 설립했다. 이것은 아랍적 통치술과 기사도 정신이 주도한 왕조였다. 우마이야조 통치자들은 시리아에 거주했으므로, 메디나는 독실한 신자들이 모이는 도시가 되었다. 691년 우마이야조 무슬림 군대는 대서양 해안까지 진출했고, 711년에는 지브랄타 해협을 건넜다. 그리고 같은 해 트란스옥시아나 지방(파키스탄 남부)과 인더스 계곡 하구 신드 지방을 정복했다.
680년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 즉위한다. 이에 알리의 아들 후세인이 패권에 도전했다가, 정월 10일 이라크 남부 카르발라 전투에서 살해 되었다. 쉬아파는 오늘날까지 그의 기일을 추모하고 있고, 이 전투에 대한 추모에서 마르티야(悲歌)가 생겨났다. 쉬아파는 자기 몸 채찍질하며 행진하는 추모행렬, 수난극 공연을 하고 있다.
한편 우마이야조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같은 시기 메카에서 칼리프 도전자 나타났는데, 무함마드의 동료 주바이르의 아들 압둘라(684 사망)가 우마이야조에 반기를 들었다. 알리의 당파(쉬아트 알리)가 강력한 정치세력 형성하고 있던 이라크에서는 새로운 교리가 나타났다. 알리 가문의 인물이 장차 돌아올 것이라는 사상이다. 아랍 정복자들과 마왈리(비아랍계 무슬림)들 사이의 갈등이 이라크에서 싹텄다. 쿠란이 보장한 신자들 사이의 평등을 요구했고, 이러한 흐름이 하나의 정치적 운동 형성하고, 칼리프 위는 무함마드 가문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라크, 이란 지방의 친 알리 정서를 이용한 혁명을 성사시킨 이 운동의 주도자들은 예언자의 삼폰인 압바스의 한 후손에게 넘김(749년)으로써 압바스조 the Abbassids가 우마이야조를 스페인으로 몰아내고 바그다드 천도를 단행한다. 이에 알리 가문 추종자들은 다시 실망하게 된다.
스페인에서는 움마야드 후손들이 독자적 칼리프제를 확립했다. 우마이야 가의 마지막 생존자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도주하여 756년 그곳에 왕국을 세우고 아랍문명을 꽃피웠다. 스페인 우마이야 왕국은 압두르 라흐만 3세 재임시(921-961)에 전성기를 이룬다. 이 시기 무슬림, 그리스도인, 유대인 사이의 문화적 협력 이루어졌으나, 그 후 수많은 소왕국으로 분열된다.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 이곳을 지배했다. 존속할 수 있었던 유일한 무슬림 왕국은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한 바누 아흐마르 왕국뿐이었다.
압바스조는 종교적 율법에 충실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 노력했다. 우마이야조가 아랍적었다면, 이들은 이슬람적 제국을 지향했다. 756년 바그다드 천도 이후 페르시아 문명의 영향이 침투했다. 9세기 말 칼리프 권력 쇠퇴하게 되자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터키 출신 용병과 전쟁 노예(맘룩)이 정부를 보호하다 결국 각기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 바그다드의 전성기는 천일야화로 알려진 하룬 알 라쉬드(786-809) 재임시였다. 하룬의 아들 마문(813-833)은 그리스 철학서와 과학서적의 번역 사업을 장려했다. 후에 이 학문적 유산이 스페인 번역사들의 소개로 다시 유럽으로 역수출되었다.
압바스 제국 변방 영주들이 독립하여 각각 통치 지역을 차지했다. 이들은 술탄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처음 사용한 통치자는 페르시아계 쉬아파 왕조인 부이조를 건국한 무이즈 앗-다울라로 945년 바그다드의 실질적 통치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칼리프는 상징적 존재로만 명목을 유지했다.
이집트에서는 두 개의 터키계 왕조가 압바스가의 지지자가 되었다. 그러나 쉬아파 파티미조에 의해 969년 멸망했다. 동쪽에서는 터키계 술탄 가즈나의 마흐무드가 인도, 아대륙으로 확장되었다. 1026년 라호르는 인도 가즈나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이로써 페르시아 문명이 벵갈, 데칸 지역까지 진출했다.
아랍어가 이슬람 세계의 신학 용어로서 지위를 유지했지만, 발칸반도에서 벵갈만에 이르기까지 주로 페르시아어가 의사소통 수단으로 통용되었다. 그후 무슬림 제국이 여러 자치지역으로 분열되며 쇠잔 시작했다. 팔레스틴과 이집트 인근에서는 무함메드의 딸 파티마에 연원을 둔 시아파 Shiite의 파티마조 Fatimid가 909에서 1171까지 통치했다. 11세기에 셀주크 터어키인들 Seljuk Turks가 페르시아, 이라크, 시리아 장악 후 이집트, 비잔티움 국경까지 진주했다. 1055년 셀주크족 영주 투그룰 벡은 쇠퇴한 압바스 칼리프의 수호자로 군림했다. 이들은 철저한 순니 무슬림으로 근동에서 가장 중요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1071년 비쟌틴군을 대파하여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진출할 길을 열었다.
비슷한 시기 십자군이 침입하여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무슬림의 반격이 이어졌다. 순니파 Sunnute 살라딘 Saladin이 이집트 파티마조를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1187)했다.
1220년 몽골인들이 침입 이슬람 문명 파괴하고, 압바스 제국을 굴복시켰다. 마지막 칼리프는 1258년에 목숨을 잃고, 바그다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몽골인들은 이집트의 맘룩조 the Mamelukes에 의해 추방되고, 이들은 1세기 남짓 이라크와 페르시아 등지에서 살다가 주로 수피즘을 통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몽골 세력 쇠퇴 후 4개의 이슬람 제국이 출현했다. 옥서스 Oxus 강 분지의 우즈백조 Uzbek, 페르시아의 사파이조 Safawi, 인도의 무갈조 Mughal, 소아시아의 오토만조 Ottoman가 그것이다.
13세기 소아시아에서 흥기한 오토만 터어키인들은 1453년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점력후 16세기에는 비엔나까지 진격하였다가 퇴각,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장악한 후 1차 세계대전까지 존속했다.
초기의 무슬림 사상
Hadith의 편찬
하디스는 무함메드 자신, 또는 동료들이 보고한 무함메드의 언행 수집한 것이다. 이 외에 여러 가지 전승들이 무함메드 생존시 확립된 관습, 관례, 선례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무함메드 사후 2세기가 지나면서 신빙성 있는 전승(순나) 편찬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기준은 전승의 전달자가 지닌 권위에 의해 순수성, 정당성, 빈약성 판단이 이루어진 것이어었다. 이스나드(연결고리)는 전승 자료 전하는 사람들의 연결고리가 무함마드나 그의 동료까지 연결되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이를 통해 여섯 개의 전승집 편찬 후 보편성을 인정했다. 예언자의 전승은 그 자체로 일종의 쿠란 해설서가 되었다. 이중 가장 권위있는 것은 페르시아 무슬림 알-부크하리 al-Bukhari(870 사망)의 전승집이다. 7,300여 편을 선별했는데 실제 숫자는 약 3000편이었다. 부크하리와 동시대 인물 무슬림(875 사망)도 비슷한 작업을 했다. 이 두 학자가 작성한 하디스 모음은 사히흐(건전한, 흠없는) 하디스로 불리우며 쿠란 다음가는 권위를 누렸다. 이 외에도 귄위있는 전승집들이 다수 존재(Ahmad ibn Hanbal의 [무스나드]Musnad 등)했다.
하디스는 '일화', '이야기'의 뜻으로 다양한 하디스가 나왔다. 9세기에는 수만 편의 하디스가 유통되었다. 현대 무슬림 중 일부는 쿠란의 절대적 권위 강조하며 하디스를 부정하기도 한다. 순나에 반하는 것은 비다(혁신)로 불리우며 공동체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한 것으로 사고되었다.
첫 번째 논쟁
확고한 정통의 기준이 없음으로 인해 생겨난 질문들이 있었다. 죄를 짓고도 여전히 무슬림일 수 있는가? 신앙과 행동 사이의 괴리는 허용될 수 있는가? 정치적 동기로 편법을 사용해도 괜찮은가? 이슬람의 원칙을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겨야 하는가, 알라의 뜻에 맡기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등이다.
분리자들, 암살자들 the Kharijite은 칼리프는 꼭 어떤 집단에서 나올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움마야드 부족은 극단적 청교도 운동을 탄압했다.
the Murjites는 추후의 판정을 옹호한다. 진정한 무슬림과 그렇지 않은 무슬림의 판단은 알라만이 할 수 있다. 이들의 입장이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Sunnis와 Sharia
이슬람의 확산으로 인해 주로 아라비아 이외의 지역에서 복잡한 상황에 자주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원칙을 수립하게 된다. 우선 메디나에서 무함메드가 했던 행동, 실천 sunna, 언행을 기록한 하디스에 의존하고, 이것이 불충분한 경우 무함메드 죽은 직후의 sunna와 메디나 공동체의 의견 ijma 참조하며, 그래도 결정이 안 날 경우 쿠란이나 하디스의 선례에 명시된 원칙에서 유추 qiyas해서 적용하거나,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사유(라이)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 아래 행동하는 무슬름들을 순니파 Sunnis라고 부른다. 일반적 입장 결정시 순니파들은 알라의 가르침에 근거하는 한 법과 종교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법을 지칭하는 sharia는 종교의 진정한 길을 의미한다. 대신 일반적인 법 지칭은 fiqh 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ulama (학자들)는 법 준수를 감시한다. mufitis (법학자)는 재판관(qadis)의 법적 견해를 조정한다. 쿠란에 합당한 법적 결정 불가능할 경우 이성과 상식 ijtihad에 의해서 결정한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계시와 전승을 연구하고 이것을 논리적으로 체계화시키는 것이다.
이슬람 법학파
하니파학파 the Hanifite
법학적 측면에서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다. 페르시아인 Abu Hanifa(767 사망)가 이라크에서 창시되었다. 이라크의 상황이 무함메드가 살던 상황과 유사한 경우 쿠란 그대로 적용하고, 다를 경우 유추해서 적용했다. 다른 학파에 비해 인간의 사유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 더 넓게 열어놓았다. 유추에 의한 결정이 일반적 정의에 어긋날 경우 공공이익을 위한 판단 istihsan에서 나오는 '신중한 의견' 또는 '인정된 정의'를 참고로 다시 결정했다. 압바스조, 오스만 터어키가 이들의 입장을 따랐다.
말리크 학파 the Malikite
메디나에서 말리크 이븐 아나스 Malik ibn Anas(753-795)가 창시했다. 쿠란과 하디스에 의해 법, 의식 해석하고, 애매한 경우 메디나의 '합의된 의견' ijma에 의존했다. 하디스의 정밀한 분석과 엄정한 비판을 통해 신뢰성을 고양시켰다. 해석이 어려운 경우 유추법 사용하고, 이것이 ijma와 상충할 경우 공공이익을 감안하여 결정했다. 이 학파는 보수적 성격을 가졌으며, 꾸란에 배치되는 예언자의 관행을 과감히 배척했다. 현재 북아프리카, 남부 이집트, 동부 아라비아에서 지지되고 잇다.
피 학파 the Shafiite
법학을 체계화한 학파로, 페르시아 출생 아랍인으로 쿠라이쉬 부족 출신 알-샤피이 al-Shafii가 창시했다. 그는 말리크의 제자로, 독자적인 법률과 전통 관습의 조화로운 절충을 통해 합리적 법학 이론의 토대를 형성했다. 이 학파는 법의 네 근원을 구분한다. 알라의 계시 쿠란, 예언자의 언행 하디스, 법학자들에 의해 표명된 무슬림 공동체의 여론 ijma, 이성에 의한 유추 qiyas가 그것이다. 그중 끼야스 적용에 명백한 규정과 한계를 두었다. 네 근원의 배열에서 이성의 사용을 부차적 요소로 두었다. 쿠란과 하디스에 동등한 권위를 부여했는데, 때로는 하디스에 더 권위를 부여하기도 했다. 불충분한 증거에 기반한 '독자적 해석'도 거부했고 이즈티흐산(선호)을 부정한다. 현재 동부 인도, 북부 이집트(카이로), 동부, 남부 아프리카, 남부 인도에서 지지되고 있다.
한발리 학파 the Hanbalite
아흐마드 이븐-한발 Ahmad Ibn Hanbal(855 사망)이 창시했다. 그는 알-샤피이의 제자이지만 '독자적 해석'에는 스승보다 더 비타협적인 순수한 전통주의자였다. 꾸란과 예언자의 관행, 즉 순나에 전적으로 의존했으며, 현재까지도 샤리아의 원칙에 가장 충실한 신앙공동체로 지속되고 있다. 끼야스를 샤리아 법원으로 수용하는 문제에 가장 배타적 입장을 취했다. 무타질라파에 반대했는데, 무타질라파가 쿠란의 창조성을 주장할 때, 이에 단호히 맞서 쿠란의 영원성을 주장했다. 첫째는 쿠란, 둘째는 하디스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Hijaz와 사우디아라비아 전역에서지지되고 있다.
기타
자히르 법학파
4대 법학파에는 들지 못하나 중요한 학파이다. 쿠란의 외면(자히르)적 의미를 강조했다. 법률해석에서 꾸란과 순나의 언어적 의미에 크게 의존한다. 다른 학파의 견해를 전혀 참조하지 않는 고립적 해석태도 견지한다. 그러나 이성, 유추, 유효 istishab, 모방 taqlid 반대한다. 이 학파는 이라크에서 무함마드 이븐 다우드(909 사망)가 창시했고, 이븐 하즘(1064)이 발전시켰다. 이븐 하즘에 의해 유독 스페인에서 성행했다. 후에 신지학적 수피즘의 대가 이븐 아라비(1240)에도 영향을 미쳤다.
법학파들에 대한 무슬림의 태도
마드하브(법학파) 통합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견의 존재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징표라는 하디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법학파 간 차이는 대부분 사소한 것이었다.
이즈마
11세기에 마드라사(신학교) 설립하여 네 개 법학파 모두에게 공간을 제공했다. 이즈마(공동체의 합의) 정신에 따랐는데,이즈마는 쿠란, 전승, 유추에 이어 네 번 째 法源이 되었다. 초기 이즈마는 다른 지역의 관례나 전통 받아들여 새로운 방안 모색하는 창조적 역할 했으나, 10세기 말, 11세기 초에 경직화되어 변화 억제 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이즈티하드(法源)의 문은 닫혔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 결과 이즈마가 고착되며 적응력울 잃기 시작했다.
샤리아(넓은 길, 곧은 길)
하느님과 동료 인간에 대한 신자들의 의무조항으로, 이것의 유일한 입법자는 알라이다. 이 샤리아는 법전화된 적이 없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종교적 가르침이 지닌 실천적 면을 형성하며, 또 공동체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세세대대로 전수되었다. 종교판사(카디)는 그 이행여부를 감독했고, 무프티는 어떤 행위가 율법에 준하는지 여부에 대한 법률적 소견서(파트와)를 제출했다.
피크(통찰)
샤리아를 다루는 학문으로 신학에 바탕을 두고 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샤리아 중 사법적인 부분은 1869년 오스만 제국의 메젤레 속에 법전화되었다. 모든 행위를 다섯 범주로 분류했다. (의무적 행위, 바람직한 혹은 추천할만한 행위, 아무래도 상관없는 행위,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 금지된 행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쿠란은 동정녀 출산을 인정힌다. 예수는 무함마드 이전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이자 인류의 병을 고치는 치유자였고, 신성한 지위를 탐하지 않는 사랑과 가난과 겸손의 사표였다고 여긴다. 마리아는 지상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네 여인 중의 하나로 믿는다. 그러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쿠란은 인정하지 않는다. 원죄의 개념이 없으므로 대속의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의 예수 본성에 대한 문제는 이슬람의 교리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예수의 호칭 로고스는 쿠란에 대해서 영향을 미쳤다. 즉 쿠란을 창조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적으로는 쿠란은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와 같은 지위를 차지한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말씀이 책이 되었다'는 것과 상통한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무함마드를 움미(이교도들에게 보내진 예언자 라는 의미의 용어인데, 문맹이라는 의미로 해석)라는 칭호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외부적 지식으로 때묻지 않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쿠란에 대한 존경이 무함마드의 지위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와리즈파(하라자-떠나다,이탈하다-에서 유래)
알리에 대항했던 집단이다. 알리가 하느님에게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술책을 받아들였다는 점에 반발했다. 행위가 없으면 신앙도 없다는 입장 고집하는 윤리지상주의자들로 선행에 의해 신앙이 커질 수 있음을 주장했다. 중죄를 범한 사람은 무슬림이 아니라고까지 주장했다.
순니파(순나와 자마아의 백성들, 신자들의 무리)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집단으로 주로 무르지아파(판단을 유예한 사람들)에 의해 견지되었다. 이 집단은 신앙심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에게 맡겨야 한다고 믿었으며, 신앙은 행위를 통해 증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상태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중죄인이라 할지라도 불신자가 아니며, 따라서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타질라파 the Mutalzilites
무타질라파는 히즈라 1세기 경 하와리즈파와 무르지아파 사이에서 생성했다. 이 집단은 헬레니즘의 철학적 요소를 도입하여 정의와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이슬람을 해석했다. 압드 알 자바르 Abd al-Jabbar(936-2035)에 의해 체계화되었는데, 중죄인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즉 중죄인은 신자도 불신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신학적 문제에서는 이성에 호소했지만, 윤리적 문제에 있어서는 카다리야파(결정하다, 카다르에서 유래)와 입장을 같이 했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주된 관심사는 이란으로부터 들어온 이원론적 영향 막아내는 것이었다. 특히 마니교의 침투에 저항했다. 이러한 이원론에 맞서기 위해 하느님의 유일성(타우히드) 믿음을 공식화했다. 타우히드는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도 절대 불가함을 의미한다. 쿠란의 신인동형적 용어(예 : 하느님의 얼굴) 등은 비유적으로 해석했다.
이들은 하느님의 정의(아들)를 강조했다. 즉 "하느님은 정의롭게 행위할 수 밖에 없다. 인간에게 선을 악으로 되갚으시지 않는다. 동물조차도 이 세상에서 당한 부당함을 다른 세상에서 보상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정의는 인간의 이성을 기준으로 했으므로 인간은 자유로운 반면, 하느님은 자신의 정의에 발목이 잡혀 자유롭지 못하다는 신학적 위험에 직면했다.
무타질라파는 움마야드 칼리프 시기 시리아, 이라크에서 출현했다. 이들은 그리이스,유대교,기독교,조로아스터교의 사상에 친숙했던 무슬림들이다.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합리적 논증 kalam을 수행했다. 쿠란에 나오는 알라의 "약속과 위협"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알라의 도덕적 요구에 대해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측면을 강조했다.
무타질라파는 이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쿠란에 근거한 신학적 교리도 이성의 시험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이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어떤 교리도 이성적 논리에 적합하지 않으면 진리일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성은 알라의 정의에 대한 통일성을 주장하게 하며, 알라는 인자하고 정의롭고 자비로와야 한다는 내적 필연성 보여준다. 그러나 쿠란이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았다는 점는 부인
했다. 무타질라파는 따뜻한 인격적 신앙을 지적 사변으로 대체했다고 평가됨
그후 무타질라파는 정치적 이유로 압바스조 칼리프 al-Mamum의 지원을 받았다. 827년 알-마뭄은 쿠란의 영원성 주장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특히 아흐마드 이븐 한발이 박해받았다. 그러나 20년 뒤 새로운 칼리프는 오히려 무타질라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성적 해석방법으로 쿠란의 신인동형론을 비판했고, 알라의 시도나 특성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알라의 통일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쿠란의 묘사도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합리적 설명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결과였다.
무타질라파는 10세기에 종말을 맞이했다. 그러나 시아파를 통해 이들의 사상 이어지고, 진보주의자들은 무타질라파의 입장을지지했다. 이들의 쇠퇴는 보수적인 순나의 옹호자들이 무타질라파 논박을 위해 합리주의적 방법을 채택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븐 한발의 강력한 전통주의의 가르침과 아샤리를 정점으로 한 새로운 신학이론의 발전이 있었다. 아샤리는 '논리적 원칙' ilm al-kalam에 근거한 이성적 논쟁 방식은 많은 법학자들에 의해 수용되면서 확산되었다. 무타질라파는 쉬아 신학의 형성에 공헌한 반면, 순니 세계에서는 영향력이 소멸했다.
알-아샤리 al-Ashari의 사상
아불 알-하산 알-아샤리 Abul al-Hasan al-Ashari는 히즈라 후 250년 경 바그다드에서 출생했다. 그는 샤피 학파의 영향을 받기도 했고, 무타질라파의 가르침 배우며 옹호하다 40세 경 갑자기 이들과 결별했다. 그의 사상적 의의는 신학과 법학의 접목이지만, 이슬람권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알라의 일곱가지 신적 속성을 주장했다. 그것은 모든 삶, 모든 지식, 힘, 의지, 듣고, 보고 말하는 것은 알라의 행위라는 것이었다. 이를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일의 원인은 알라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전통 교리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다. 내면과 외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 알라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쿠란에 명시되어 있는대로 알라를 생각하에 결정한 것도 알라이다. 쿠란의 천국,지옥 표현도 실재에 대한 기술이라고 주장했다. 즉 천국을 믿는 사람은 실제로 옥좌에 있는 알라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 말고"bi-la kayf 그저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알라의 모습을 피조물의 모습과 비유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쿠란의 말은 영원하나 그 글자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알라는 선과 악에 모든 책임이 있다는 관념에 대해서는 심각히 여기지 않았다. 인간의 행위는 미리 예정되어 있지만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죄나 정의를 얻으며, 그리하여 좋건 나쁘건 미리 예정된 행위를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 중 하나는 '획득이론'이다. 인간의 행동은 비록 신의 뜻으로 창조된 것이지만, 그 책임은 인간이 획득한다는 주장이다.
알-아샤리는 이븐 한발의 신학이론에 토대하여 순니 교의를 확립했다. 첬제, 자구나 음성으로 표현되는 경직된 꾸란 해석에서 벗어나 그것이 담고 있는 신의 속성과 영혼의 말씀으로 꾸란을 해석했다. 이는 이성보다는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둘째, 인간의 자유의지와 숙명론과 관련하여 획득이론을 제시했다. 이는 定命 사상 개념이다. 그 외에도 중재를 위한 신학의 전형을 제시했고, 하느님은 인간적 사고의 범주를 통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샤리파의 견해에 따라 신앙의 강령은 점차 딱딱해졌고, 신학적 용어도 스콜라식으로 세련되어 갔다. 이런 입장에 대해 한발리 학파와 샤피이 학파 일부가 반대했고, 말리키 학파는 신학적 논쟁을 경원시했으며, 알 모라비 왕조는 신학의 가르침을 금지하기도 했다.
알-마투리디 Al-Maturidi(944 사망)
알-마투리디는 인간의 죄는 알라의 뜻에 의해 생기지만 알라는 이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알라는 불신앙을 창조하였고, 그것을 '불특정적'으로 의도했다. 그러나 알라는 인간에게 불신앙을 명령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교도로 하여금 신앙을 갖도록 명했지만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물론 자유의지가 신의 전능과 정의와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한 의문 을 제기했다. 인간의 행위가 신의 권능에서 비롯되지만, 인간의 죄악조차도 신의 즐거움이나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쿠란의 비창조설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인간의 발음은 창조된 것이지만 그 안의 내용은 창조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하나피 학파를 중심으로 수용되었고, 셀주크조 세력의 서진과 함께 크게 확산되었다.
아샤리 신학과 마투리디 신학의 관계
경쟁, 적대관계는 형성되지 않았고, 후일 양자는 순니의 틀 속에서 조화롭게 수용되었다.
메디나 학파의 공헌과 순니 신학의 형성 배경
신학의 확립과정에서 아립 이념의 우위를 확고히 하는 정치적 요소가 크게 작용했다. 메디나 학파는 교회와 국가가 하나라는 종교이론과 초기 칼리프들이 추구했던 도덕적, 종교적 결속을 바탕으로 이슬람 신학의 주류로서 정통성을 보존했다. 한편 세속적 노선에 대한 종교적 반대와 정치적 저항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메디나 학파는 초기 이슬람 교회 조직에 실용적이고 경건한 기풍을 심어주고, 이것이 교회의 근본적 성격으로 굳어지게 했으며, 이슬람 종교를 정치조직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종교를 정치권의 상위에 두게 했다.
무타질라파의 성장과 이븐 한발의 신학적 논쟁
무타질라파는 신학적으로는 이슬람에 헬레니즘적 해석주의를 접목했고, 정치적으로는 히즈라 1세기 말경의 극단적 두 사상적 조류의 중도를 표방하고 등장했다. 극단적 교조주의와 무조건적인 실천주의를 주장하던 카와리즈파의 지나침과, 정치적으로 순응하면서 행위보다 내적 신앙만을 고집하는 무르지아파의 윤리적 방종에 대한 반작용에서 시작한 것이다. 무타질라파는 이성을 이슬람 신학에 처음 도입했으며 압바스조 칼리프들의 비호를 받으며 발전했다.
무타질라파의 신학은 호교론적 입장이다. 신의 개념에서 신인동성론의 요소를 제거했는데, 이 입장은 알라의 인격적 모습에 대한 설명에서 실패하여 신자들의 지지 얻지 못했다. 한편 이성과 정의의 개념을 통해 알라의 절대성에까지 이 개념을 적용시켰다. 그것은 신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가치를 인간 이성의 산물과 일치시키는 결과였다. 이 때문에 정통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또한 꾸란의 창조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꾸란은 신이 창조한 말씀이고, 태초부터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의 예언자와 함께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순니 학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순니학자들은 꾸란을 신의 본질적 속성으로 이해하면서 꾸란의 절대적 우위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이븐 한발(780-835)은 꾸란의 영원성 설파하며 무타질라파를 비판했다. 그는 합리적 방법, 그리스철학의 영향 받은 이원론적 철학을 거부했으며, 하디스를 추종하는 보수적 노선을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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