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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주일설교] 성령이 충만 할 때

 

 


제목 : 성령이 충만할 때

말씀 : 행7:54~60

 


1.왜곡된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인도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러디어드 키플링이라는 사람의 작품 중에 정글북(The Jungle Book, 1894)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만화영화로 제작(1967년)되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인데요,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인도의 정글을 탐사하던 한 부부가 아기를 잃어버려 정글 속에 혼자 남겨지게 되었는데 흑표범 바기라에게 구출되어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게 됩니다. 늑대들은 이 아이에게 모글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정글의 법칙을 가르치며 양육하여 모글리는 늑대인간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모글리가 소년이 되었을 때 평화롭던 정글에 인간을 극도로 싫어하고 포악하기 짝이 없는 호랑이 쉬어칸이 나타납니다.

그러자 늑대들은 모글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인간 마을로 돌려보내려고 하지만 이미 동물과 같은 삶에 익숙해져 있었던 모글리는 정글에서 살고 싶어서 도망쳐 버립니다. 그러자 쉬어칸이 모글리를 해치려고 찾아다니는데 다행히 회색곰 발루의 도움으로 모글리는 위험에서 벗어나 결국 인간 마을로 돌아가 부모를 만나 한동안 살게 됩니다.

그러나 정글에서는 폭군 쉬어 칸이 횡포가 점점 심해져 동물들이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마을까지 내려와 가축과 사람을 물어가는 만행을 저지르자 모글리는 다시 정글로 돌아가 쉬어칸을 해치우고 정글의 영웅이 되어 평화로운 정글을 만듭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다시 인간마을로 돌아와 인간의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서로 속이고 빼앗고 싸우고 죽이는 등 힘 있는 자들의 탐욕에 의하여 저질러지고 있는 사회악에 대한 경종을 울리며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협력하는 곳에 행복이 있음을 보여주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이러한 일반적인 교훈 말고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글리는 왜 늑대인간으로 살아야 했는가 하는 것과 왜 인간들은 그렇게 끊임없는 탐욕 속에서 서로 속이고 빼앗고 죽이고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유는 간단합니다. 환경 때문입니다. 모글리는 늑대와 함께 늑대들이 생활하는 것을 보고 듣고 배웠기 때문에 늑대인간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속이고 싸우고 빼앗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와 무지 속에서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기쁨과 행복이 있는 양 착각하며 살아가는 왜곡된 세상에서 그러한 어둡고 왜곡된 세상을 보고 듣고 배우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물질만능주의적인 왜곡된 인생관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인생의 초점을 맞추고 살고 있기 때문에 온갖 부조리와 불의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너무나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도 자칫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이 옳은 것인 양 착각하며 그 쪽으로 끌려가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롬12:2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상이 너무나 왜곡되고 부패되고 혼동 속에 빠져 있으므로 그것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성령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고, 온전하게 하여 하나님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에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주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오직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 있는 그 영원하고도 진정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성령충만하면 모든 것을 이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해야 죄와 무지가운데 육신의 욕망을 끌려 살아가지 않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축복의 길을 바르게 알고 그 길로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은 생명의 영, 진리의 영, 은혜의 영, 능력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받으면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을 바르게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더 나아가서 그 길로 갈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생명의 길로 갔던 스데반집사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55절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여러분,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하나님 우편 서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그 우편에 계신 주님을 보았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굉장한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때가 언제입니까? 행7:58절을 보겠습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러니까 이때는 스데반집사가 복음을 전한다고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붙잡아다가 공회에 세우고 거짓 증인들을 세우고 모함하여 이 사람을 죽이려고 할 때였습니다. 그러자 스데반이 변론을 하였으나 그들은 도리어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며 죽이려고 덤벼들어 결국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고 맙니다. 이와같이 복음을 핍박하고 대적하는 자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이 때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었고, 자기를 죽이려고 돌로 치는 자들에 대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순교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행6:15절을 보면 이 변론이 있기 전에 그가 공회에 앉아 있을 때에 보니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스데반 집사님은 공회에 붙잡혀 와서 자기를 죽이려고 협박하는 상황에서도 얼굴이 천사처럼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하늘을 우러러보며 천국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자신을 죽이기 위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도리어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의 전 인격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명의 영, 진리의 영, 은혜의 영으로 가득 차니 근심이나 걱정이나 불안도 사라졌습니다. 눈 앞에 다가온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도 없었고, 자기를 죽이려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도 사라지고 도리어 그들이 불쌍하고 가련해져 그들을 향해 저주나 욕설을 퍼붓지 안하고 도리어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유혹도 미움도 원망도 증오도 불평도 다 이기게 됩니다. 환경도 상황도 마귀사탄도 핍박도 다 이기게 됩니다. 자신의 약하고 부족한 것도 이기게 됩니다. 세상의 어둡고 더러운 것들이 덤벼들지도 못하고 설령 덤벼들어도 성령의 능력으로 단번에 물리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행1: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비겁하게 숨고 부인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목숨을 바쳐 주의 복음을 전하는 능력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묵상하며 주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약하고 추하고 더럽고 악한 것들과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고 승리하며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성령충만하면 밝게 빛나는 인생이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능력있는 삶이 될 뿐 아니라 그 인생이 밝게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행6:15절을 보겠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성령충만한 스데반은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얼굴이 어떻습니까? 아름답고 밝게 빛나고 깨끗하고 순진하고 선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당시 스데반집사님은 만사형통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도리어 공회에 잡혀 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생명의 영, 진리의 영, 은혜의 영, 평강의 영, 능력의 영, 기쁨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그렇습니다. 성령이 그를 사로잡음으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시고 모든 상황과 환경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고 그 심령속에 평안과 기쁨으로 채워주셨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도 얼굴에 빛이 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밝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얼굴에 웃음이 있고, 말도 밝고 긍정적이어야 하고, 찬송도 기왕이면 밝고 힘차게 하고, 여하튼 모든 영역에서 밝게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들은 속으로 ‘아이구 목사님 뭐 좋은 일이 있어야 기쁘게 살지요. 촌에서 무슨 그렇게 좋은 일다고 기쁘게 즐겁게 삽니까? 형편도 상황도 조건도 뭘 그렇게 좋다고 항상 웃으며 삽니까?’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오늘 말씀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님만 하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어도 사도바울만 하겠습니까? 스데반 집사님과 바울 사도나 우리들의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바울은 수없이 매를 맞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하고 감옥에 갇히고 바다와 강에서 고난을 당하고 강도를 만나고 춥고 배고프고 헐벗고 질병까지 있었지만 항상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빌2:17절에서는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살전5:16~18절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15:11절에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영광의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까? 주님이 기뻐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성령님이 인도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땅히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갈때에 주님이 얼마나 흡족해 하시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탄식하고 원망하고 슬퍼하고 뭔가 그늘진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이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축 쳐져서 감사와 기쁨도 모르고 탄식하고 원망하고 무언가 한이 맺힌 것처럼 살아간다면 그런 자녀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얼굴이 밝아야 합니다. 성령안에서 얼마든지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런 삶을 살 수 있고, 그런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내가 행복합니다. 내 가족이 행복합니다. 이웃에게 기쁨을 주고, 교회를 밝게 만들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전도도 저절로 됩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면서, 불평 불만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져서, 사람이나 사회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얼굴이 사나와져서 전도를 한다면 누가 그 전도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 자기 자신이 기쁨이 없는데 무슨 천국을 말하겠어요. 원망과 불평 탄식 비판하면서 무슨 하나님 나라를 말하겠습니까? 평안과 기쁨도 없이 살아가면서 무슨 천국이 있다고 전도를 하겠습니까? 여러분, 먼저 내가 기쁘게 밝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면 입으로 전도하지 않아도 전도가 됩니다.

여러분, 정말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하는 삶은 결코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면 상황과 조건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삽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조건이 좋고 환경이 좋아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짐으로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하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여러분도 행복하고 남에게도 행복을 주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만드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성령충만하면 위를 바라보는 인생이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위를 바라보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5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그가 성령이 충만하였을 때 어디를 보았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 그 영광스러운 나라를 바라 본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영광스러운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다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여주셨다니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빛나는 모습이었습니까? 이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셨으니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세상에 무슨 미련이 그렇게 남겠습니까?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 대한 무슨 미운 감정이 생기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죽이려고 이를 갈며 덤벼들었지만 스데반은 너무나 평안하고 행복했습니다. 이제 곧 이 죄많고 어둡고 혼탁한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저 영광스러운 품에 안길 것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할 것 뿐이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나라를 보지 못하고 죄와 무지와 미움 속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이 동족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너무나 안타까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면서 기뻐하면서 영광스러운 주님 품으로 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위를 바라보면 문제는 끝납니다. 문제는 아래를 바라보기 때문에 생깁니다. 실상 따지고 보면 정말 별거 아닌 땅엣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바라보고, 땅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래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땅엣 것은 본래 문제가 많습니다.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죄와 무지 가운데 있습니다. 나도 너도 상황도 환경도 조건도 인간도 동물로 식물도 자연도 다 온전치 못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많습니다.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점점 우리를 옭아매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시기와 질투를 유발시키고 서로 속이고 빼앗게 만듭니다. 그래서 행복은커녕 점점 더 갈등과 고통과 아픔과 불평을 야기 시킬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골3:1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는 죄와 무지속에 있는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망과 목적과 위안거리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망과 낙심과 불평 밖에 남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 안에, 영광의 나라에 우리의 진짜 소망과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상황이 꼬이는 것처럼 여겨질 때 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좀 미운 마음이 생기려고 할 때 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절망감이 찾아오려고 할 때 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세상이 원망스럽고 불평 불만이 찾아오려고 할 때 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위로와 평강과 기쁨과 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금 힘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고 기쁨이 생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소망가운데 즐거워하면 영광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밝게 기쁘게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죄와 무지속에 있는 세상, 약하고 부족하고 허물 많은 인생, 썩어 없어질 것들이 있는 땅엣 것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총과 소망과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여건을 이기고, 모든 부정적이고 칙칙하고 어두운 세력들과 모든 미움과 원망과 불평도 이기고 주님 안에 있는 빛과 같은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진정으로 생기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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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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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성령을 따라 행하라

 

 


제목 : 성령을 따라 행하라

말씀 : 갈5:16-24

1.육신의 지배 속에 사는 인생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살인사건, 성폭행사건, 폭력사건, 강도사건... 또 국가 간에도 전쟁과 억압과 착취와... 심지어 옛날에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노예를 삼아 짐승처럼 부려 먹기도 하고.... 하기야 요즘에 보니까 어떤 섬에서는 외국인들을 데려다가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임금도 제대로 안주고 부려 먹기도 한다는 군요. 하기야 남나물 콩나물 할게 뭐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편이 갈라져 쌈박질이나 해대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왜 비 인간적이고 비 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육체에게 지배당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신과 영혼이 심각하게 병이 들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 육신의 소욕의 노예가 되어 인간이하의 삶을 영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19-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마땅히 영혼이 마음과 몸을 다스리며 아름답고 가치있게 살아가야 하는데 정신과 영혼이 죽어 있어 육신의 지배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온갖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체’라는 단어입니다. 이 육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savrx(사르크스)인데 이 말은 단순히 육체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몸과 더불어 거기에 깃들여져 있는 어떤 육체적, 정신적 욕망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라고 말할 때 육체의 일이란 단순히 몸으로 하는 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육체의 정욕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바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한 것 등등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인생에게 발생되는 문제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일들이 저질러지고 있느냐하면 우리 인간이 육신의 정욕에 지배당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마땅히 육신과 정신이 영혼의 지배를 받아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되는데 영혼이 죽어 있어 육과 정신이 미쳐서 엉뚱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인간으로서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기쁨과 고귀함을 누리지 못하고 무가치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인생은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21절 하반절 보세요.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어떻게 된다고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영혼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다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로봇은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 안에서 움직일 때만이 올바른 기능을 하게 됩니다. 로봇을 구성하고 있는 몸체들이 제작자가 구성한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때에 로봇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가 고장나 로봇의 몸체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이 로봇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고쳐서 쓸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끝까지 말썽을 부리면 폐기처분 당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몸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 움직일 때 인간은 올바르게 제 기능과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되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고장난 로봇과 같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음행과 술수와 우상숭배와 원수 짓는 것과 분쟁과 술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수많은 죄악들이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시대의 이 문제의 핵심이 육체의 소욕이 영혼의 지배를 떠나 제멋대로 움직이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결코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삶이 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이 주셨던 그 순수한 영혼이 여러분을 지배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혼이 우리의 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올바르게 이끌어 감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주님이 주시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복을 가져다 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영혼의 지배를 따라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16,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우리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죄된 본성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를 끊임없이 죄의 길로 내 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에게도 죄된 육신의 소욕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음으로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이 죄된 육신의 소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끊임없이 자신 쳐서 복종시켜 성령의 소욕을 따르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지요. 죄된 본성이 우리에게 있고, 그것이 우리를 자꾸만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게 하는데 그러기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하겠는데 그 놈의 죄된 본성 때문에 그게 잘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어찌하든지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을 채워서 죄된 본성을 쫓아내서 그것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는 무엇이 나를 사로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내 안에 가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전자에 맑은 물이 들어 있으면 맑은 물이 나오고, 흙탕물이 들어 있으면 흙탕물이 나옵니다. 단물이 들어 있으면 단물이 나오고, 쓴 물이 들어 있으면 쓴물이 나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들어 있으면 사랑이 나오고, 미움이 들어 있으면 미움이 나옵니다. 원망과 불평이 들어 있으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감사가 들어 있으면 감사가 나옵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으면 성령의 행실이 나오고, 세상의 영이 가득차 있으면 세상의 행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5:17,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육체를 따라 세상의 엉뚱한 것을 따라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님이 충만하니까 당연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잘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성령을 좇아 행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려면 어찌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생활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지배 속에서 의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갈 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과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의 모습.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지배가운데 들어가면 이제는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전에 육체의 지배를 받던 삶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존재, 새로운 가치, 새로운 목표, 새로운 방향, 새로운 방법을 가지고 인생을 영위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삶인 것입니다.

고후5: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나를 억누르고 있던 옛주인 마귀사탄이 쫓겨나가고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새 주인이 되므로 육신의 소욕을 따르던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임하시면 전혀 새로운 인생이 전개됩니다. 과거에는 사탄의 권세 아래서 내가 주인 노릇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사탄이 주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속아 내 이성과 지성과 경험대로 살면 내가 왕노릇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대로 행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길로 갔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습니다. 내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했습니다. 세상이 가는대로 갔습니다. 세상의 조류를 따라 흘러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고 죽어라고 그 길이 맞다고 여기며 고집을 피우며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게도 도리어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멸시하며 심지어는 핍박하며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인 바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죄의 노예로 살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생명의 영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은혜의 영이신 성령이 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쫓겨가고 죄의 권세가 물러갑니다. 마귀사탄의 역사로 내 안에 들어와있던 죄와 어둠과 죽음과 권세가 물러갑니다.

그런 죄와 어둠과 마귀의 권세가 물러가니 영혼과 마음과 눈과 귀가 밝아집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바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 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추악한 모습들이 밝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천국과 지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광이 나라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드디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됩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 집니다. 그래서 드디어 생명의 열매,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육신의 소욕을 물리치면 세상의 온갖 죄되고 잡다한 것들이 물러가고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령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열매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거듭남입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알고 믿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면 죄사함과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이 핵심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은 결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새생명을 얻게 되면 그 새생명을 가진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함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바랍니다.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묵상하며 열심히 찬양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빛의 은혜를 받으려면 빛을 가까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물을 마시려면 물가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곳으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어디에 임재하십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하는 곳에 임재하시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기를 힘쓸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았습니까?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말씀을 전할 때에 그 가정에 성령이 임재하지 않았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을 정말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성령충만함을 받아은 생활과 열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임과 동시에 어버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충만 받은 것을 방언받고, 병고치는 은사받고, 예언하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만약 거기서 끝난다면 그건 성령 충만 받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지배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당연히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마땅히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부모님 공경이 인간에 대한 계명 중 첫 번째 계명입니다.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러므로 부모님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제아무리 기도 잘하고 찬양 잘하고 예배 잘 드려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 관계에 대하여 주신 첫 번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며 어찌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다시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성령 충만함은 결코 기도와 찬양과 말씀과 예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의 삶속에 접목시켜야 합니다.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가정생활, 사회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이며 동시에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며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래로 사람들을 잘 섬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충만히 맺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웃을 사랑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함께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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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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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의 중요성 및 각 절기의 기원과 의미 

 

I. 교회력의 중요성

 

기독교는 시간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독교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시간을 벗어나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하늘에서 떨어진 어떤 특별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이 살아가는 그 시간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시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일반적인 구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났던 하나님의 특별한 행동에 의해 성취된 구원을 증거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체적인 시간에,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바로 그 시간 안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시간을 중시하는 기독교의 태도는 예배에도 반영된다. 예배의 구조는 하루, 한 주, 혹은 한 해 동안의 리듬을 갖는다. 기독교 예배는 시간으로부터의 회피가 아니라 시간을 자신의 기본 구조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에 일어났던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행위와 만남의 장이 된다. 우리가 예배에서 경험하는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시간적 사건들에 근거된 실재이다. 시간을 구성하는 방식은 구원의 근거가 되는 행위들을 상기하고 다시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한마디로 기독교 예배는 시간 위에서 설립된다.

 

교회력은 이처럼 시간을 중시하는 기독교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즉 교회력은 특정한 시간 안에서 발생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일정한 주기에 따라 반복함으로써 그 구원사건을 회상1)할 뿐 아니라 다시금 새롭게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력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위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교회력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II. 각 절기의 기원과 의미 

 

절기는 교회력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회상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 그러므로 각 절기들이 어떻게 만들어 졌으며, 또한 그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교회력의 중요성을 더욱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1. 주의 날

   

교회력은 주의 날(the Lord's day; 1:10)부터 시작된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이 6일간 창조하시고 7 일째 날 안식하셨다는 것에 근거하여 율법이 제시하는 안식일을 지킨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한 주의 첫 째 날을 예배를 위한 특별한 날로 제시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주의 첫날을 연보를 위한 날로 성별 시키라고 말했다 (고전 16:2). 바울은 또한 트로아에서 토요일 자정까지 설교한 뒤에 일요일 새벽까지 기독교인들과 대화하였다(20:7, 11). 계시록의 저자도 자신이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힌 날이 주의 날이라고 말한다(1:10). “주의 날1세기 말엽 한 주의 첫째 날로 이미 기독교인들에게 친숙해 져 있었다. “주의 날을 지키는 것은 초대교회가 자신의 신앙을 증거 하는 방식이었다. 복음서는 모두 빈 무덤이 발견된 날이 안식 후 첫날 아침이라고 증언한다(28:1-6, 16:2-6, 24:1-3, 20:1-8). 안식 후 첫날은 창조의 첫째 날로써 하나님이 어두움과 빛을 갈랐던 바로 바로 그 날이다.2) 복음서는 또한 부활한 그리스도가 한 주가 시작되는 첫째 날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증언한다(28:9이하, 24:13이하, 20:14이하).

 

AD 115년경 익냐시우스(Ignatius)는 매그네시아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식일을 금하고 주의 날을 기준으로 사는사람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2세기 초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디다케(the Didache) 역시 기독교인들에게 주의 날에 함께 모여서 떡을 떼며 성만찬을 행하라고 권고한다. 심지어 이교도들도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날(주의 날) 동트기 전에 성만찬을 위해 모이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또 주의 날의 다른 용어인 “Sunday"(태양의 날)2세기 중엽 등장했다. 순교자 저스틴은 155년 경 이교도 청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Sunday에 함께 모인다. 그 날은 하나님이 어두움을 물리치고 우주를 창조한 첫 날이며,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일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곧 이교도 용어이지만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로 해석하여 Sunday를 받아들였다. 바나바 서신은 Sunday8, 즉 그리스도가 죽은 자 들에게서 부활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날이라고 불렀다. 초대 교인들은 Sunday를 창조의 제 8일로 생각했다. 8일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뒤 새로운 창조를 시작한 날이란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의미가 여기에 들어 있다 (고후 5:17). Sunday는 휴식의 날이 아니라 예배의 날이었다.

 

Sunday는 다른 날들보다 상위의 개념을 지녔다. 그 날은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에서 Sunday는 주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회상하는 날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구세주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터툴리안은 기독교인들은 Sunday, “주께서 부활한 날에 무릎 꿇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Sunday는 부활의 신앙을 입증한다. 따라서 Sunday는 매주 지키는 부활절이라고 볼 수 있으며, 부활절은 한해의 가장 큰 Sunday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부활절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는 그가 유월절에 십자가형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을 에집트에서 구하여 안전하게 홍해를 건너게 하고 자유로운 백성으로 만들어 준 사실을 기억(historical anamnesis)하는 절기였기 때문이다. 초대 교인들은 자신들 역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으며, 따라서 더 이상 죄와 죽음의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자유로운 백성이 되었다고 확신했다. 유월절에 잡는 어린양을 가리키면서, 바울은 다음과 말한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으로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전 5:7-8). 이 말씀은 옛날 유대인의 구원 사건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노예와 구원의 도식은 같지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사역에 의해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대 교인들이 매 주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기념했지만, 연중 최고의 주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유월절3) 때가 적절했다. 한 주의 초점이 주의 날에 맞추어진 것처럼, 한해의 초점은 파스카(유월절)에 맞추어 졌다.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2세기까지 이 파스카를 지켰다.

 

2-3세기 교회 역시 이 파스카를 준수했는데, 이때 세례와 안수 그리고 첫 성찬을 통해서 새롭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예배를 드렸다. 파스카가 홍해를 건넘으로써 노예로부터 해방된 것을 회상하는 절기였던 것처럼, 교회 역시 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4-5). 처음 3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은 파스카때 함께 회상되었다. 터툴리안은 유월절은 세례예식이 행해지는 날 보다 훨씬 더 엄숙하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우리의 세례의 근거가 되는 주의 수난이 이루어진 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초대 교인들 사이에서는 기독교의 파스카가 유월절에 대한 유대력을 좇아야 하는가에 대한 긴 토론이 있었다.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은 유대력으로 닛산월 14일에 일어났는데, 유대력은 음력이기 때문에, 유월절은 보름날 시작되었다.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교회는 결국 유대의 유월절과 달리 교회의 파스카는 항상 Sunday에 지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는 Sunday의 상징적 의미를 인식한 결정이었다. 나중에 서 유럽에서는 파스카가 보름 이후 혹은 춘분인 321일 이후의 Sunday로 고착되었고, 로만 캐톨릭과 개신교회는 부활절을 이 방식으로 설정하였다.4) 이것이 부활절이 매년 다른 날(322일부터 425일 사이)로 된 이유이다.5)

 

4세기 무렵, 예루살렘에서 지낸 예수의 마지막 사건들 전체를 회상했던 파스카는 몇 개로 구분되었다. 이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각각의 거룩한 장소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분리해서 예배할 필요 때문이었다. 유게리아(Eugeria, 스페인여성으로 384년 순례자중 한 명)의 노트가 한 예로 제시될 수 있다. 그녀의 순례 노트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수난/종려 주일, 혹은 수난 주간(Holy Week, Great Week으로 불려지기도 함)의 시작은 부활절의 시작이었다. 이 주일에 모든 사람들은 시편과 교창 성가집(antiphone)을 들고 감독 앞에 가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축복 있으라라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다음 3일 간은 작은 예배들이 있었는데, 수요일은 예외적으로 장로(평신도가 아닌 목회자를 가리킴)가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음모에 관해서 읽을 때, 사람들은 신음하며 한탄했다. 목요일은 성만찬을 행한 후 모두가 감독을 겟세마네로 이끌어 갔다. 금요일에는 골고다에서 예배가 이루어 졌는데, 거기서 모든 이들이 행진하면서 나무 십자가에 입 맞추었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와서 이런 방식의 수난주간 행사는 중단되었다. 어거스틴은 예수가 어느 날 십자가에 달렸고 어느 날 묻혔는지 그리고 어느 날 부활했는지 복음서에 분명하게 나온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날들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했고, 이때부터 고대의 파스카는 다음과 같이 분리되어 지키게 되었다: 성 목요일(Holy Thursday), 성 금요일(Good Friday), 성 토요일(Holy Saturday), 그리고 부활주일(Easter eve and Day), 또한 수난주간에 앞선 수난/종려 주일과 수난주간의 작은 날들.

 

  

3. 성령강림절(오순절)

 

 

파스카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절기는 오순절이다. 오순절은 레위기 23:15-16에 나오는 유대교의 추수 절기였다: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 일을 계수 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러나 1세기에는 때때로 오순절이 시내 산에서 토라를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기도 했다. 기독교인들에게 오순절은 성령이 강림하여 교회가 탄생된 기념일로 여겨졌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성령이 유대절기인 오순절날 강림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토라를 받은 것과 성령 받은 것이 대비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시내 산에서 완성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순절날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계약을 맺었다고 그들은 믿었다. 적어도 2세기까지는 오순절이 세례를 위해 적절한 날로 여겨졌다. 미쳐 준비를 못해 부활절날 세례 받지 못한 자들은 오순절날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교회의 탄생 기념일인 오순절날 새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4세기까지는 오순절이 성령의 강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했다. 터툴리안은 그리스도가 오순절날 승천하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이르러 성령강림과 그리스도의 승천은 분리되어 기념되었다. “사도헌장”(Apostolic Constitution)에는 그리스도의 승천 기념일이 부활절 후 40일째 되는 날이 적절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을 40일간 가르쳤다는 사도행전 1:3에 근거한 것이다.

 

파스카(수난절/부활절)와 오순절(성령강림절)은 교회력에서 가장 오래되고 최고로 중요한 절기의 시작이며 마지막이다. 오순절은 부활주일부터 50번째 날을 지칭할 뿐 아니라 부활주일부터 시작하는 50일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유대력에서는 오순절, 첫 열매의 날”(the Day of First Fruits)을 유월절부터 시작된 한 주기의 결론으로 여겼다. 이 주기 동안 출애굽 자체와 그것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이 기념되었다. 오순절은 추수의 성별에서 시작되는 추수시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오순절이란 용어는 50일 주기의 마지막날과 50일 주기 전체를 지칭했다.

 

기독교인들 역시 오순절을 오순절의 날 하루 뿐 아니라 부활절에서 시작된 50일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즉 오순절은 예수의 부활에서 시작하여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교회가 탄생된 때까지의 50일을 가리켰다. 어거스틴은 주의 부활후 이 날들은 평화와 기쁨의 기간이다. 그러므로 금식해서는 안되고 부활을 상징하여 서서 기도해야한다. 이는 매 주일 지켜져야 하고, 알렐루야 송을 불러야 한다. 알렐루야 송은 장차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위치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오순절은 부활절기의 일환으로 지켜졌고, 성령강림과 교회의 탄생은 부활절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니케아 공의회(AD 325)Lent(사순절)“40로 정했다. “40은 금식하고 사역을 준비했던 예수의 광야 40일과 비교될 수 있다. 어거스틴의 시대에 사순절은 세례를 위한 준비 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주의 수난에 동참할 준비를 하는 기간이었다. 사순절은 회개의 기간이었고, 영적인 훈련의 수단인 금식은 사순절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에도 매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했다. 주의 날은 사순절 기간보다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순절 기간 중 6번의 주일은 40일에 포함되지 않았다. 사순절은 따라서 재의 수요일(부활주일 전 7번째 수요일)에서 시작되어 부활절 바로 전날까지 총 46일이 되었다.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일러서 부활절 기간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교회력의 중심이다. 이 기간은 교인들이 재로부터 정화에 이르는 순례의 행진을 하는 동안 도전 받고 갱신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4. 성탄절과 주현절

   

 

또 하나의 중요한 절기는 성탄절이다. 성탄절은 부활절보다 오래되지 않았고, 또한 구약의 절기에서 유래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탄절은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주현절(epiphany, 16)은 오늘날 성탄절만큼 중요하게 취급되지는 않지만, 성탄절보다 오래되었고, 초대 교회력에서는 주현절이 부활절과 오순절 다음으로 중요한 절기였다. 주현절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2세기 후반 에집트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piphany"현현”(manifestation)을 의미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현현한 것을 지칭한다. 주현절은 예수의 탄생, 그의 세례, 그리고 갈릴리의 가나에서 행한 첫 기적 등을 기념하는데, 이 모든 사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종종 이날을 “The Theophany"(하나님의 현현)라고 명명했는데, 이 명칭은 지금도 동방 정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부활절과 마찬가지로, 주현절은 4세기에 몇 개로 나뉘어 졌다. AD 354년부터 그리스도가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날이 1225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날짜가 인정된 것은 아프리카에서는 312년 보다 앞서고, 로마에서는 336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점진적으로 크리스마스가 주현절의 일부로 지켜지게 되었다. 386년 크리소스톰은 안디옥에서 성탄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날은 최근 빠른 시간 내에 발전되어 절기로 지켜지게 되었다.” 뒤에 오는 주현절에 관하여 그는 왜 이날을 주현절이라고 부르는가? 예수가 모두에게 알려진 것은 탄생된 때가 아니라 세례 받은 때이기 때문이다. 세례 받기 전까지 그는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16일 지켜지는 주현절이 동방전통에서는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는 날로, 서 유럽에서는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각각 지켜지고 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현현 하셨다는 사실을 이방에 알렸기 때문이다. 주현절과 성탄절을 분리해서 기념하게 된 이유는 예수의 생애 동안 발생한 사건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기념하려는 초대교인들의 열망 때문이었다. 성경에는 예수가 언제 태어났고, 어느 날 세례 받았는지, 또 동방박사들이 어느 날 방문했는지 등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16일과 1225일은 고대 이집트와 줄리안(로마) 달력에 따라 동지를 기념하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됨에 따라, 성탄절은 동지를 표시했던 이교도의 정복되지 않는 태양의 축제를 대신하게 되었다. 어두움을 정복하는 빛이라는 주제는 항상 주현절과 성탄절의 주된 개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날들은 예수가 죽은 날과 그가 잉태된 날을 일치시키는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부활절 준비를 위해서 사순절이 필요 했던 것처럼, 성탄절과 주현절 역시 준비기간을 필요로 했다. 스페인의 한 공의회는 1217일부터 주현절(16)까지 교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치 않았는데, 이는 대강절(Advent)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5세기에 가울(Gaul) 에서는 주현절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40일을 두었는데, 이것은 Lent 기간이 40일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고, 그 시작은 지금의 대강절 즈음이었다. 결국 로마는 1225일 보다 4주 앞선 주일부터 대강절로 정했다.

 

대부분의 중요한 기독교 절기들은 4세기에 마무리되었다. 존 크리소스톰은 386년 행한 설교에서 예배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리스도가 육체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을 것이고 (주현절), 그는 십자가에서 죽고 또한 부활하지도 않았을 것이고(파스카), 성령을 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오순절).” 4세기에 세 개의 중요한 초대 절기들-주현절, 부활절, 오순절-은 다시 다음과 같이 나뉘어 졌다: 성탄절, 성금요일, 승천일, 그리고 대강절, 사순절 같은 절기들. 4세기 이후 생긴 중요한 절기 가운데 하나는 삼위일체 주일(Trinity Sunday)이다. 삼위일체 주일은 오순절 후의 주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약 1000년 경 도입되었다. 여타의 절기들과 달리, 이 절기는 역사적 사건과는 무관한 신학적인 교리를 나타낸다

 

III. 성서일과 (Lectionary)

 

  

성서일과는 교회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lectionary” 란 말은 넓은 의미에서 교회력에 있는 특별한 절기의 예배를 위해 선택된 본문들의 체계를 지칭한다. 이러한 성서일과에는 lectio continualectio selecta의 두 원리가 있다. 전자는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 까지 읽든지, 성서의 어느 특정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가는 방법을 가리키고, 후자는 절기에 따라 선택해서 읽는 것을 말한다. 유대교의 회당에서는 각 절기에 해당하는 성서의 본문들을 규정해 놓고 일상적인 안식일에 lectio continua의 원리에 따라 선택된 성서 본문을 읽는다. 이 원리는 개인적으로 성서를 꾸준히 읽을 때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성경의 각 구절들의 맥을 찾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더욱이 교회력에 따라 성서의 본문을 찾을 때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에 반하여 lectio selecta는 성서의 본문을 선택하여 읽는 방법이므로 교회력과 관련해 볼 때 유용한 원리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의 성서일과에 대한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유대교의 유월절에 읽었던 출애굽기 12장은 로마에서 200년 경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325년 이전에 이미 기독교의 주요 절기들을 위해 특별히 지정된 성서 본문이 있었고, 일반적인 주일에는 lectio continua의 원리에 의해 성서의 본문을 읽었다. 서 유럽에서는 다양한 성서일과들이 발달되었다. 9세기 초 성서일과들이 표준화되어 최근까지도 로만 캐톨릭, 성공회, 루터 교회 등에서 사용되었다.

 

   

성서일과는 3년 주기로 되어 있으며 그 본문의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강절

 

1) 첫주: 122 (1, 4, 7), 80:1-7 (2, 5, 8), 25:1-10 (3, 6, 9)

 

둘째주: 72:1-8 (1, 4, 7), 85:8-13(2, 5, 8), 126 (3, 6, 9)

 

셋째주: 146:5-6 (1, 4, 7), 1:46b-55 (2, 5, 8), 12:2-6 (3, 6, 9)

 

넷째주: 24 (1, 4, 7), 시편 89:1-4, 19-24 (2, 5, 8), 80:1-7 (3, 6, 9)

 

2) 첫주: 24:36-44 (1, 4, 7), 13:32-37 (2, 5, 8), 21:25-36 (3, 6, 9)

 

둘째주: 3:1-12 (1, 4, 7), 1:1-8 (2, 5, 8), 3:1-6 (3, 6, 9)

 

셋째주: 11:2-22 (1, 4, 7), 1:6-8, 19-28 (2, 5, 8), 3:7-18 (3, 6, 9)

 

넷째주: 1:18-25 (1, 4, 7), 1:26-38 (2, 5, 8), 1:39-55 (3, 6, 9)

 

2. 성탄절

 

1) 9:2-7 (매년), 시편 96 (매년), 디도서 2:11-14 (매년), 2:1-10 (매년)

 

2) 62:6-7 (매년), 시편 97 (매년), 디도서 3:4-7 (매년), 2:8-20 (매년)

 

3) 52:7-10 (매년), 시편 98 (매년), 1:1-12 (매년), 1:1-14 (매년)

 

3. 주현절

 

구약: 42:1-9 (1, 4, 7), 1:1-5 (2, 5, 8), 61:1-4(3, 6, 9)

 

복음서: 3:13-17 (1, 4, 7), 1:4-11 (2, 5, 8), 3:15-17 (3, 6, 9)

 

4. 재의 수요일

 

시편 51:1-12, 고후 5:20b-6:2, 6:1-6, 16-21 (매년)

 

5. 사순절

 

1) 첫 번 주일: 2:4b-9, 15-17, 3:1-7; 5:12-19; 4:1-11 (1, 4, 7)

 

9:8-17, 25:1-10, 벧전 3:18-22, 1:9-15 (2, 5, 8)

 

26:1-11, 91:9-16, 10:8b-13, 4:1-13 (3, 6, 9)

 

2) 두 번째 주일: 12:1-4b(4b-8), 33:18-22, 4:1-5(6-12), 13-17, 3:1-17 혹은 마 17:1-9 (1, 4, 7)

 

17:1-10, 15-19, 105:1-11, 4:16-25, 8:31-38 혹은 막 9:1-9 (2, 5, 8)

 

15:1-12, 17-18, 127, 빌립보서 3:17-4:1, 13-31-35 혹은 9:28-36 (3, 6, 9)

 

3) 세 번째 주일: 17:3-7, 95, 5:1-11, 4:5-26[27-42] (1, 4, 7)

 

20:1-17, 19:7-14, 고전 1:22-25, 2:13-22 (2, 5, 8) 3:1-15, 103:1-13, 고전 10:1-13, 13:1-9 (3, 6, 9)

 

4) 네 번째 주일: 삼상 16:1-13, 23, 5:8-14, 9:1-41 (1, 4, 7)

 

역대하 36:14-23, 137:1-6, 2:4-10, 3:14-21 (2, 5, 8)

 

5:9-12, 34:1-8, 역대하 5:16-21, 15:1-3, 11-32 (3, 6, 9)

 

6. 종려주일

 

50:4-9b, 31:9-16, 빌립보 2:5-11 (매년)

 

수난 이야기: 26:14-27:66 (1, 4, 7); 14:1-15:47 (2, 5, 8); 22:14-23:56 (3, 6, 9)

 

7. 성금요일

 

52:13-53:12 (매년), 4:14-16, 5:7-9 (매년)

 

8. 부활절

 

28:1-10 (매년), 16:1-8 (매년), 24:1-12 (매년)

 

9. 성령강림절

 

2:1-21 (매년), 고전 12:3b-13 (1, 4, 7), 8:22-27 (2, 5, 8), 8:14-17 (3, 6, 9)

 

20:19-23 혹은 7:37-39 (1, 4, 7), 15:26-27, 16:4b-15(2, 5, 8),

 

14:8-17, 25-27 (3, 6, 9)

 

10. 삼위일체 주일

 

4:32-40 (1, 4, 7), 6:1-8 (2, 5, 8), 8:22-31 (3, 6, 9)

 

33:1-12 (1, 4, 7), 29 (2, 5, 8), 8 (3, 6, 9)

 

고후 13:5-14 (1, 4, 7), 8:12-17 (2, 5 8), 5:1-5 (3, 6 9)

 

28:16-20 (1, 4, 7), 3:1-17 (2, 5, 8), 16:12-15 (3, 6, 9)

   

이상과 같이 살펴본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는 무엇보다도 설교와 예배를 준비하고 주관해야하는 목회자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교회력에 따르는 성서일과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일정한 기준 없이 설교자의 주관에 따라 본문이 선택되므로, 설교자 자신의 편견과 선입관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이런 경우 일관된 말씀의 진수를 맛보고 싶어하는 교인들의 불만을 살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예배의 경우에도 찬송가, 교독문 등을 임의로 선택하지 않고 교회력에 맞추어서 선택함으로써, 교인들이 미리 준비하여 생동감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성서일과에 따라서 설교하고 예배할 경우, 정장복 교수는 그 장점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첫째, 설교자의 개인적인 의도보다는 말씀 중심의 사역이 가능해 진다. 설교자 개인의 편견과 선입관을 배제하고, 일관된 말씀의 사역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교인들이 말씀의 맥을 짚을 수 있게 된다. 둘째, 교회력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그분의 구속의 은총을 실감하는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신앙생활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바, 교회력에 따라 설교할 경우,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갖는 깊은 의미를 새기게 되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재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셋째, 모든 교회가 성서일과를 사용할 경우, 동일한 말씀을 들을 수 있음으로써 교회 일치에 많은 도움이 된다. “모든 교회는 하나이다라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모토인데, 어디서나 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교인들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넷째, 설교자들이 일정한 주기로 말씀을 연구할 수 있어서 말씀에 질서가 형성될 수 있다. 사실 설교자들의 최대의 고민은 이번 주에는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하는 가라는 것이다.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서 성서의 여기저기를 살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교회력에 따라 설교하게 되면, 이런 고민이 해소될 수 있다. 다섯째, 설교 뿐 아니라 목회의 전반적인 계획 수립에 도움이 된다. 교회력이란 일정한 기준이 주어지기 때문에, 임의로 목회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섯째, 교인들이 설교의 방향을 미리 알 수 있게 되어 준비할 수 있다.

 

교회력에 따라 목회계획을 세우고 설교하게 되면, 현장성이 약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할 수도 있다. 이는 목회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따라서 말씀을 준비하기가 어렵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탄절, 수난절, 부활절, 오순절 등 중요한 절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목회자가 현장에 맞게 설교의 주제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력은 결코 교회가 서 있는 자리, 즉 문화, 사회, 환경을 제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력은 목회자가 목회 환경에 맞게 자유로이 목회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이점에서 성서일과와 목회현장의 갈등은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력에 따라 예배하고 목회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목회와 설교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최승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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