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사순절 주일예배 설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위하여(요21:1-6)


제목 :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위하여

본문 : 요21:1-6

여러분, 영어를 가장 빨리 가장 쉽게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직접 부딪치는 것입니다. 직접 부딪쳐서 되든 안되든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미국을 가든 영국을 가든 아니면 미국인 친구를 사귀든 한국에 있는 미국인 가정에 가서 함께 생활을 하든 어쨌든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계속 접촉하는 것입니다. 접촉하면서 큰소리로 말하고 듣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실수를 하든 말든 잘하든 못하든 그냥 막 부딪치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어는 저절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기들이 어떻게 언어를 배웁니까? 그냥 같이 살다보니까 배우는 거예요. 늘 듣고 그냥 따라서 하다보니까 알게 되는 거예요. 실수하면서 잘못 표현하면서 그러면서 배우는 거예요. 처음에는 서투르지만 그래도 자꾸 따라 하다보면 결국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어를 배울 때도 하여간 부딪쳐서 하다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맨 날 책상 머리에 앉아서 무슨 부정사, 조동사, 동명사, 관계사, 시제, 가정법이니 하면서 씨름을 해봐야 백날 가도 외국인과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문법이 훤해도, 아무리 토익 시험에 만점을 맞아도 직접 해보지 않고는 대화를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해봐야 합니다. 부딪쳐야 합니다. 처음에는 잘 되어도, 서툴러도, 실수를 해도 자꾸 따라 하다보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이치가 똑 같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책상 머리에 앉아서 종자는 어떤 것이 좋고, 언제 밭을 갈고, 파종은 언제하고, 어떤 병에는 어떤 약을 쳐야하고, 거름은 어떻게 주고 아무리 연구를 하고 훤히 안다고 해도 직접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면서 농사를 지어 보지 않으면 절대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단은 부딪쳐 봐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딪치기 전에 사전 준비도 필요하겠지요. 연구도 필요하겠지요. 정보도 수집해야 되지요.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부딪치는 거예요. 안 부딪치면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괴테는 [참다운 지식은 경험밖에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어떤 이론이든 지식이든 그것이 경험을 통하여 실제로 적용되었을 때, 그 이론이나 지식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이 올바르게 현실화 되어질 때에 비로소 그것은 가치가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론과 행동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올바른 이론없는 행동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기 쉽습니다. 설령 잘못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론적으로 무지하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고 열심히 수고한 것만큼 좋은 결과를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반대로 행동 없는 이론은 공허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고 해도, 아무리 훌륭한 논리라고 해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행동화 되어 어떤 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무언가 가치 있는 무엇을 만들어 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지식과 아울러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행동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이론이 있어야 하고 다음에는 그 이론을 실제로 적용하는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좋은 가치를 만들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신앙생활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선은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길을 알아야 합니다. 과연 어디에 생명이 있는 어디에 참된 진리가 있는지 천국과 지옥이 무엇인지 왜 믿지 않으면 안 되는지 우선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좌우지간 먼저 알아야 그것을 하든지 말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알아야 믿든지 말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그렇습니까? 모르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모르면 생명도 지키지 못하고 은혜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모르면 심지어 독약도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 옆에는 독약병을 놓아두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그걸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옆에 있으면 무조건 입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호6:3절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17: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선은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물론 세상의 지식적으로도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세상의 초등학문을 아는 일에 힘쓰는 것 더 이상으로 주님을 아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진정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생명의 길이 어디인지 아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알기 위하여 예배에 참석하는 일과 찬양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안에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바르고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바르게 달려갈때에 여러분의 삶에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물론 우선은 알아야 하지만 그러나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알고 난 다음에 그 아는 바를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경험해 봐야 합니다. 짜장면 맛이 어떻고 저떻고 아무리 설명을 들어서 지식적으로 안다고 해도 진정한 짜장면 맛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먹어봐야 하는 것입니다. 먹어봐야 맛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박사 학위가 몇 개씩 있어도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 전체를 다 안다고 해도 그것을 삶속에 올바르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는 일에 힘쓰는 것과 더불어 그 아는 것을 우리의 삶속에 적용시키는 일에도 더욱 힘을 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의 의미도 사실 이러한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순절이란 일단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가가 달려 돌아가신 사건을 기억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새롭게 알아보는 기간입니다. 희미해진 기억을 분명하게 되새겨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새겨서 새롭게 분명하게 알고 느낀 사실들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아니 그냥 생각해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 적용시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향하여 나아가며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누려야 할 은혜들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며 그 사명을 감당해 보자는 취지에서 제정된 것이 바로 사순절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한 마음의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새롭게 가다듬은 마음을 우리의 삶속에서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진정 많은 열매를 맺으며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제자들이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주님을 떠나 자기 생각대로 물고기를 잡을 때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패한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의 말씀대로 행동했을 때 제자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실패한 삶에서 성공한 삶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요지인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볼때 참으로 안타까운 제자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다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이제 모든 것이 끝장 나 버렸으니 난 다시 가서 고기나 잡으련다하고 떠나자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그렇게도 여러 번 이르고 또 일렀건만 그들은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너희 죄를 위하여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야 너희에게 진정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갔다고 다시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거라. 걱정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 맡겨준 일들을 감당하거라. 그러면 성령께서 인도해 주실 것이다. 너희들은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느니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거라.」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게도 일렀건만 돌아가신지 며칠 되지 않아서 옛날로 돌아가서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랬을까요? 왜 예수님과 함께 3년간이나 동고동락을 하면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주님의 삶을 보았고, 주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했지만 그들은 왜 주님을 떠날 수 밖에 없었을까요?

물론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주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주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고, 소경을 보게하고, 앉은뱅이 걷게 하고,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등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 기적의 의미가 무엇인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주님 자신과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도 여러번 당신의 죽음의 의미를 말씀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에 대하여 말씀하셨건만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을 그저 정치적 육체적 세상적인 메시야로만 이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돌아가시자 이제는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옛날로 돌아가서 열심히 그물을 던졌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지만 그들은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고기잡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그저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좀 얻어보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입니다. 밤새도록 그렇게 무엇인가 좀 얻어보려고 그물을 던지고 또 던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게 되었습니까? 밤이 맞도록 즉 밤이 새도록 쉬지 않고 그물을 던졌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미 새벽이 되었건만 그들 손에는 피라미새끼 한 마리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손은 여전히 빈손이요, 배는 빈 배요, 그물은 여전히 빈 그물뿐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고 그저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한번 얻어보려고 발버둥을 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 좀 얻어서 좀 행복해보려고, 무언가 좀 만족한 삶을 살려고 열심히 수고하고 힘쓰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리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해도, 아무리 평생 동안 발버둥을 쳐도 주님 없는 인생에게 남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을 결산 할때에 그들의 손은 빈손이요, 머리는 빈 머리요, 그들의 삶은 공허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없는 인생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무엇이 자신과 영원히 함께 하겠습니까? 젊음이 남겠습니까? 아름다움이 남겠습니까? 재산이 남겠습니까? 건강이 남겠습니까? 권력이 남겠습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남는 것이라곤 공허 뿐이요, 남은 것이라곤 영원한 형벌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주님을 온전히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임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행여라고 아직 주님을 모르는 분들께서는 주님앞에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여, 주님을 보게하소서. 생명의 길을 나도 알게 하소서.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로하여음 생명의 생명의 길로 가게 하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에 진정 세상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진정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후반부에는 바로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실패를 하고 한 마리도 못잡고 실망과 좌절과 공허감에 빠져 있을때에 바닷가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바로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없나이다」하면서 그저 기계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그물을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들이 그물을 들어 올리려고 했을 때 그들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그물을 쉽게 끌어올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잠도 자지 못하고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는데 피래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마지막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디 다른 바다로 이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멀리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방향만 조금 바꾼 것이었습니다.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는 위치를 약간 수정한 것뿐이었습니다. 사실 배 하나 사이에서 왼편과 오른편은 큰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배 밑에는 왼편이나 오른 편이나 서로 가까이서 통해져 있습니다. 그러니 왼편이나 오른편이나 거기서 거깁니다. 그런데 왼편에 던졌을때는 밤새도록 잡았지만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오른편에 던졌을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습니다.

요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기술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이성과 경험에 의지했을때는 한 마리도 못잡았습니다. 밤새도록 헛수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을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생명인지 무엇이 참된 가치인지를 올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그 주님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을 알았으면 이제는 주님의 말씀에 좇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여러분의 삶의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지시에 의하여 손을 펴고, 발을 뻗고, 삶의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참 생명의 도, 진리의 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는 바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올바르게 알고 깨닫고 고백하고 그리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새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피조물이며,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부활한 존재로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 변화가 없고, 우리의 삶속에 기쁨이 없고, 우리의 삶속에 진정한 생명의 환희가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우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있겠습니까?

이 땅의 전국 방방곡곡에 십자가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리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천 만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산다는 이 나라가 이처럼 불의가 넘치고,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이처럼 많은 혼란을 겪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와 주님 사이에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따로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거나 혹은 앎에도 불구하고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우거나 아니면 주님의 뜻이 있음에도 따라가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면서 더욱 주님을 아는 일에 힘쓰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더욱 올바르게 온전하게 알기 위하여 주님의 음성에 늘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앞에 엎드려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드리는 일과 찬양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주님을 올바르게 알고 올바르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만난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지시와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행동화시키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세상속으로 여러분의 삶의 현장속으로 나아가서 적용시키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물을 던지라는 곳에 던지고, 주님께서 거두라는 곳에서는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온 성도 여러분께서 진정 주님만이 진정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오직 그 안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그 주님의 말씀을 내 삶에 적용시키며, 그 말씀들을 우리의 일상생활속에 행동화하며 살아갈때에 주님안에 있는 그 생명의 은혜를 더욱 넘치도록 충만하게 맛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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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사순절설교 : 섬기는 자가 되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20:28, 막10:45)이라는 것은 예수님 스스로 밝히신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내기 위한 유월절 양이 되어야 함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맞춰 대제사장들과 유대교의 지도층이 당신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잔과 떡을 나누어주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22:15-16).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 유월절 식사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눌 마지막 식사이며, 그 식사 후에는 잡히셔서 고난과 능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며, 그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실 마지막이고 결정적인 일이며, 그 뒤에 남는 것은 완성될 하나님나라에서 잔치를 즐기는 것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 후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잔을 돌리시고 떡도 떼어 나누어주셨습니다(눅22:17-20).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는데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눅22:21-22)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놀라며 서로 묻기를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다고 오늘 본문 직전의 23절은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당신께서 붙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바 있었지만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에게는 보통 충격적인 말씀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시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을 뿐 그들의 관심은 곧 다른 문제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문제란 다름 아니라 열두 제자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첫 절에서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한 것이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정말로 당신의 죽음이 가까웠고 당신과 함께 그 자리에 있는 제자 중에 하나가 당신을 곧 팔아넘길 것이라고 심각하기 그지없는 말씀을 하시는데도 그 시점에서조차 제자들은 “또” 그 자리다툼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동고동락해온 제자들에게서 드러난 주되고 궁극적인 목적이 동료들의 우두머리가 되거나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한심스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사람들의 사고나 가치관과는 정반대로 확립되어야 할 주님의 제자들의 사고와 가치관을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25-26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경우와 “너희” 즉 제자들의 경우를 대비시키신 데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세계에서는 임금이 권력을 쥐고 백성을 다스리며 스스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로 칭송을 듣는 것이 당연시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세계에서는 “큰 자” 즉 존경과 대우를 받을 자격이 더 많은 이들이 오히려 “젊은 자” 곧 존경과 대우를 받을 우선순위에서 뒤에 와야 할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잘 섬길 줄 아는 이가 다스리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섬길 줄은 모르면서 남 위에 올라 다스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가르침을 다른 말씀으로 한 번 더 반복하셨습니다. 27절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여기서는 세상사람들과 예수님 자신을 직접 대비시키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당연히 자리에 앉아서 날라다 바치는 음식을 받아먹는 사람이 음식을 나르는 사람보다 크다고 여기겠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마땅히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시면서도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제자들도 마땅히 주님을 본받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일러주셨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길에서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구하기를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한 사실을(마20:20-21)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그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는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 했습니다(마20:24).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일러주신 말씀이 바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될 사람, 교회의 중직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철저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앞서서 유다의 배신을 보았습니다.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서로 묻기를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자신이 모두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들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만 주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열두 제자 모두가 배신자들이었습니다. 유다는 돈 때문에 배신했다면 나머지 제자들은 권력욕과 명예욕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겸손과 섬김을 가르치셨는데도 서로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고 다투고 있었다면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배신이 아니고 무엇이 배신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반복된 가르침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던 제자들은 붙잡히신 예수님을 보고 그를 부인하거나 버리고 도망치기 이전에 이미 다 배신자였던 것입니다. 그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도 섬길 줄은 모르면서 남보다 위에 서려고 하는 사람은 다 배신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절을 앞두고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는 지난주일 장로 열 분을 선출하기 위해 공동의회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거조례가 금지하고 있는 부정선거운동이 적발되어 긴급히 모인 당회에서 의논 끝에 이번 공동의회를 무기연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는 “뭐 그 정도 일 가지고 기껏 모인 공동의회를 유회시키느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분도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이번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용하고 깨끗하게 치러질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문제 삼은 일은 세상에서라면 문제꺼리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교회 안에서라 해도 보기에 따라서는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사에 한국교회의 본이 되고 무엇을 하든 교과서같이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이고 의지이기에 우리에게서는 용납되지 않은 것입니다. 깨끗한 선거풍토를 다지고 과열선거운동의 재발을 막자고 모든 장로님들이 몇 달 동안 주일예배 때 대표기도도 스스로 삼가고 장로로 선출되신 분들은 임직을 육 개월 이상 미루는 아픔을 감내한 역사를 지닌 우리 교회이기에 그런 일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의지를 짓밟고 지지하는 특정 인물들의 명단을 만들어 다량으로 복사해서 버젓이 교회마당에서 돌리는 일은 당회에 대한 정면도전이고 교회에 대한 심대한 배신행위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과 그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주님의 제자들의 사고와 가치관은 세상사람들이 갖는 사고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가르치셨는데 세상에서 하는 행태를 그대로 교회에 가지고 들어오겠다는 것이 주님에 대한 배신이며 주의 몸 된 교회에 대한 도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당회에 들어온다 한들 어떻게 당회원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 표를 던진다면 어떻게 주님의 제자이며 주님의 공동체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평소에 겸손하게 열심히 섬기고 항존직을 선출하는 때가 되면 조용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일꾼들이 되고, 또 그런 사람들을 항존직에 세울 줄 아는 성숙한 교인들이 되어야 한국교회와 이 나라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희망을 꺼뜨리는 일체의 행위는 한국교회에 대한 배신행위로 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일을 통해 한국교회와 이 나라의 장래가 우리 한 사람 사람의 의식과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모두가 성숙한 교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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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별설교] 사순절예배 설교 (Lent Preaching sermon)

 

 

 

제목 : 십자가의 도
성경 : 고전 1:18-24

 

주님은 오늘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호산나 만세를 부르며 열광적으로 주님을 환영하였다. 이렇게 예루살렘에 입성한 주님은 참으로 바쁜 한 주간을 지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해서 5일간의 바쁜 한 주간의 수난주간의 일정을 마치고 성금요일 십자가를 지시고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가진 고통을 다 겪으시고 말할 수 없는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시고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7마디를 남기시고 운명하셨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요 기독교 복음의 진수요 핵심이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말씀하였다. 그럼 십자가가 어떻게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지 묵상해 보려고 한다.

1)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이요 표이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몸으로 나를 위해 내가 죄 값으로 고통을 당하고 매를 맞고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할 것을 대신 짊어지시고 대속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셨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멸시와 천대는 말할 수 없이 컸다. 그가 당하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과 영적 고통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주님이 당하신 육체적 고통을 살펴보면 금요일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6시간동안 아니 그 이전부터 많은 고난을 당하셨다. 주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다 당하셨다. 주님이 당하신 고통은 육체적인 이상으로 정신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던 베드로까지도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이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자 뿔뿔이 흩어지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는 아픔이 더 컸다.
한 걸음 더 나가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영적 고통과 절대고독을 체험하셨다. 우리의 죄 값을 한 몸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상에서 당하시는 고통이 너무나 괴로워 '내가 목마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울부짖었다. 왜냐하면 잠시 동안이지만 그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고 계셨기 때문이다.


2)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극치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우시며 공의를 원하시는 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불의를 미워하시고 죄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죄를 반드시 벌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신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죄에 대한 엄한 심판과 진노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십자가는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셨는가를 보여주신다. 만일 하나님이 공의로 다스리시고 심판한다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한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이다. 아담 이브가 지은 죄성이 우리에게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어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모순없이 다 이루셨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도 사랑하시고 우리가 원수될 때도 사랑하시며 우리가 죄인될 때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 사랑은 내가 건강하고, 잘 살고, 성공하고, 부귀영화를 누릴 때 사랑하지만 내가 병들고, 가난해지고, 힘이 없고, 버림받게 될 때는 뒤돌아서는 냉정한 사랑이다. 변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부모가 못나고 병약한 자녀를 더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듯이 우리가 연약하고 병들었을 때도 더욱 사랑하시는 사랑이다.


3) 십자가는 인류 구원의 승리였다.

히브리서에 보면 '피흘림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고 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참 소망을 주셨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요 지혜이다. 월남전에서 살아 남은 미공군장교 프레드 체리(Fred Cherry)는 그의 수기 피(Bloods)에서 이런 이야기를 썼다. 그의 비행기가 격추되어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자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로병들은 '하노이 힐튼 호텔'이라 불리는 수용소에서 날마다 심한 심문과 고문을 당하면서 죽음의 날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러한 가운데서 누군가가 고안해 낸 벽을 두들기는 통신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날마다 그들이 주고받은 신호가 있었는데 그것은 C자였다. 그것은 Christ, Cross 또는 Church의 첫 글자가 되는 것으로써 주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교회를 바라보라는 말이었다. 이 신호를 주고받으며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뱀을 쳐다보았을 때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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