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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기본교리] 교회론(敎會論:ECCLESIOLOGY)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약성경이 씌어진 당시에 교회들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신약성경의 교회의 원리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성경의 모본이 오늘날에는 "실제적"인 것이 못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교회는 어떻게 조직되는 것이며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일반적인 원칙으로서) 신약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지침을 주셨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대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형성

신약성경에서 "교회"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불러낸 무리" 혹은 "모임"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에베소에 있는 이교도들의 모임이나(행19:32) 애굽에서 불려나온 무리인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을 가리킬 때도 쓰이고 있습니다만(행7:38),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 대해 사용되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믿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교회는 세 가지 면에서 분명히 구별되어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혹은 아직 세상에 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 사용되는데, 이 사람들은 오순절부터 휴거 때까지의 기간 중 믿었거나 믿게 될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오늘날 영어권에서 이러한 뜻으로 사용될 때 "교회"라는 단어는 지역교회와의 구분을 위해 종종 대문자(Church)로 쓰여집니다.


이 단어는 특정 시기에 이 땅에 살았던 신자들에 대해 사용됩니다(가령 "16세기 교회"처럼). 이 단어는 어떤 지역에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공부하며, 전도도 하는 어떤 지역의 신자들에 대해 사용됩니다. 한 지역에 여러 개의 교회가 있는 경우에는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갈1:2), "마게도냐 교회들"(고후8:1)과 같이 복수형인 "교회들"(church)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건물을 가리켜 "교회"라 부르지 않으며, 교회협회나 특정 교파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모두는 다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 와서 만들어낸 개념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흔히 추상적인 개념이 분명하게 이해되게 마련인데, 바로 성경에는 이런 식의 설명이 가득해서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를 몇 가지 보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엡1:22,23). 그리스도는 머리로서 하늘에 계시고, 교회는 그 몸으로서 이 땅에 있으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2:12,13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한 건물입니다(엡2:20-22). 그리스도는 이 건물의 모퉁이 돌이시며, 이 건물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3:9,16도 보십시오. 교회는 한 새 사람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엡2:15). 전에 원수가 되어 서로 싸움을 벌이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 하나님은 한 새 사람을 만드셨는데, 이는 새 피조물이요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엡5:25-27, 고후11:2).여기서 교회는 사랑의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이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신부인 점과 비슷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곳을 보면 교회를 나타내는 예들이 또 있는데 가령 양무리(요10:16), 하나님의 밭(고전3:9), 하나님의 집,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 등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에게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한 새로운 몸이 언젠가 생길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고 감추인 바 되었기에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비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교회는 거룩한 비밀로서 하나님께서 신약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이제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엡3:4,5,9. 골1:26. 롬16:25,26). 그리스도는 마태복음16:18에서 미리 장래를 내다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미래 시제) 하셨고 사도행전1:5에서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시기를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5:11은 교회가 현재 존재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고, 고전12:13은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의 세례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미리 예언하신 말씀과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교회에 대한 언급(이 언급은 바울이 성령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사 한 몸이 되게 하신다고 한 묘사와 부합됩니다) 사이에 오순절이 있었습니다(행2:4). 그러므로 오순절은 그리스도인의 교회가 탄생한 날입니다. 유대교의 특성 일부가 기독교에 남아있긴 하지만, 그 기원과 목적, 운명에 대해서는 이스라엘과 교회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이렇게 상이한 두 무리를 혼동하면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각자에 대한 성경의 특별한 가르침 중 많은 것을 혼동하게 되며 그리하여 기독교에만 있는 은혜와 복들을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함께 퇴색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믿는 자들이 모이는 각 지역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의 진리를 반영해야 합니다. 그 특징이라 하면 ① 하나됨(엡4:4 참된 교회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② 머리에 순종함(그리스도께 엡5:23, 골1:18. 같은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를 대표하시는 성령님께 요14:16, 26), ③ 보편성(행2:47, 고전12:12-26 모든 믿는 자들은 이 한 몸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는, 정결한 삶을 살고 심각한 과오를 계속 저지르지 않는 모든 믿는 자들을 영접해야 하는데, 이는 이들이 우주적인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④ 거룩함(고전3:17 하나님은 이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구별하셨으며 이는 전 성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지역교회의 성도 각자는 순결하고 선한 삶을 유지함으로써 이 사실을 나타내고 또한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⑤ 성장(엡4:11,12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에게 주신 은사들로 말미암아 굳게 세워져[덕이 세워져]갑니다), ⑥ 믿는 자의 만인 제사장(벧전2:5,9 이것은 모두가 설교한다는 것이 아니며 모두가 예배하는 제사장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입니다) 등이 있습니다.

 

모든 신자는 믿음을 전파하는 일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각자가 가진 은사를 통해서 하게 됩니다. 숫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우주적인 교회와 지역 교회들은 에베소서4:12,13에 그려져 있는 대로 일종의 연쇄반응에 의해 세워져 나갑니다. 은사를 주신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입니다. 그래서 은사 있는 인도자들은 성도들이 자라서 섬김으로 몸을 세우는 일을 하도록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지역교회에는 각각의 은사를 발휘할 분야가 있는데, 이러한 은사를 쓰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로 하여금 권리를 잃게 하는 것입니다. 국내와 해외에서 여러모로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고, 돕는 일을 할 때 우주적인 교회가 사도행전에서와 같이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행1:8).

 

신약교회가 어떻게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왜 교회를 만드셨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여기에 대해 에베소서가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엡3:10,21)고 답을 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복음 전파와 그리스도로 충만된 신자들의 삶을 통해 세상 뿐만 아니라 천사들의 세계에도 하나님의 지혜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역교회에서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 그분께 예배하고 찬양할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교회가 온 세상을 다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데 성공할 것이라는 사상은 말세에 배도가 있을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과 상반되는 것입니다(딤전4:1-3,7, 딤후3장, 4:1-4, 벧후2 장, 유3,4).

 

교회의 기능

 

하나님께서 지역교회로 하여금 그분의 지혜와 은혜를 영광스럽게 증거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분은 자기 성도들에게 능력과 은사, 조직, 예식, 징계, 여자들의 섬김, 재정지원 수단을 주셨습니다.
참 교회의 능력은 한 위격 안에 있습니다. 그분은 다름 아닌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1:8). 교회는 기도모임 가운데 탄생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능력은 기도를 통해서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2:42에서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기록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흔히 기도모임은 교회의 여러 집회들 중에서 참석자가 가장 적지만 그리스도는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합심기도와 연관된 특별한 약속도 주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어떤 누구도 아닌 바로 성령님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십니다. 공적인 사역을 결정함에 있어서나, 헌금을 적절히 분배해 사용하는 일에나, 예배와 집회를 준비함에 있어서나, 범죄한 신자를 징계함에 있어서나, 또 그 외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있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인위적인 계획을 구상하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성령 하나님께 여쭙고 그분의 답을 구하는 데는 영적인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는 고정된 규제사항들을 가지고 성령을 "소멸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아담하고 질서 있게" 그리고 신약성경의 원리라는 틀 안에서 일을 처리하기만 한다면, 예배나 공중 집회, 혹은 기타 다른 부분에서 모든 지역교회가 똑같아야 될 의무는 전혀 없습니다. 은사 있는 형제들과 성경적으로 인정받는 장로들의 인도는 일의 질서를 유지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승천하실 때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엡4:8-16). 여기에는 은사로 일컬어지는 다섯 가지 유형의 사람들 즉,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가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12:8-10에도 그가 목사나 교사 혹은 전도자이든 관계없이 어느 신자에게든지 성령께서 주시는 재능적인 "은사"의 목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임 전도자가 되지 않고도 사람을 구주께 인도하는 전도자의 일을 할 수 있는 은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 장에서는 에베소서4장에 나오는 주요 은사 다섯 가지를 상고할 것입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터를 세우는 일을 위해 있었습니다(엡2:20). 이들은 우리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었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구원받을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뵈었습니다). 오늘날 사도라는 이 낱말이 지닌 의미에 완전히 걸맞는 사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선교사들이("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모두 이 사도들과 비슷한 일을 하지만 이들에게는 바울이나 베드로가 가졌던 놀라운 은사나 권능은 없습니다. 오늘날 자기가 사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도의 권위를 도둑질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피해야 합니다. 사도들에게는 "후계자"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 신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고 장차 올 사실들을 예언하였으며 지역교회에 전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누구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성된 신약성경이 신앙과 실제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자기가 신약의 선지자들과 동등한 수준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속은 자들이거나, 아니면 속이는 자, 혹은 둘 다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항상 전도자가 필요하며 또 항상 전도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널리 알려졌든 아니면 지역교회 안에만 알려졌든지 간에 이들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여기 저기 다닙니다. 그래서 주님께 돌아온 자가 여럿 되면, 목자들과 교사들이 이 새신자들을 가르쳐서 새로운 모임을 세우거나 이미 그곳에 모이는 모임에 더해지게 합니다. 진정한 전도자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하게 합니다. 성경적이지 않거나 정직하지 못한 "전도" 때문에 교회가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단지 몇 달이나 혹 그보다 더 짧은 기간에 끝나버리는 거짓 신앙고백 보다는, 차라리 "결신자"가 적거나 없는 것이 더 낫습니다.

 

목자는 목자장 밑에 있습니다. 목자장은 그리스도십니다. 목자들(신약에서는 언제나 복수형으로 나옴)은, 일반적으로 잘못된 생각처럼 지역교회의 통치자가 아니라 은사입니다. 목자들은 장로나 감독의 책무를 맡은 자들과 동일한 사람인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원문에서는 목자들이 교사들과 너무나 긴밀히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목자와 교사가 한 가지 은사의 양면이라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가르침의 은사가 없다면 결코 진정한 목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 목자들은 가르침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적인 양식을 자기 양떼에게 먹이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부탁하신 양떼를 돕기 위해 다른 일들도 해야 합니다. 격려의 말을 해주고, 병이 든 자들과 방황하는 자들을 심방하고,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상담해 주는 일들은, 이들이 해야될 많은 일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성도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됩니다. 은혜를 입은 여러 목자들이 있는 지역교회는 실로 복된 것이며 큰 교회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을 돌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있고 성심성의껏 일하는 사람이라 해도 마땅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교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즉 정보를 전달해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교사는 이런 수준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왜냐하면 가르침의 은사는 자기가 가르치는 내용을 삶으로 실천해야 하고 또 그가 가르치는 것이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교리(Doctrine)"(행2:42)는 단지 사도들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성령님 없이는 어떠한 가르침도 성경적 수준에 미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구체적인 사실이나 건전한 교리를 학문적으로 배울 수는 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인간의 교만만 부추기고 영적 성장을 저해합니다. 성경을 배우기에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지역교회에서 가르침의 은사를 가진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한 번에 조금씩 배우기 때문에 이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건전한 기독교 학교에서 정식으로 성경을 배우면 체계적인 가르침으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지역교회에서 안 가르칠지도 모르는 어떤 배경지식들을 습득하는 데도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교회 안에서 목회하기 전에 정식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은 없습니다. 말씀으로부터 훈련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특별히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늘 신령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 점 때문에 파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전도하고, 성도를 돌아보며(목회하며),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모든 사람들을 존경하고, 귀히 여기며,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고,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은 조직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닙니다(고전14:33). 지역교회 안에는 질서가 있어야 하는데, 사람의 질서가 아닌 하나님의 질서이어야만 합니다.
빌립보에 보낸 편지는 그 받는 대상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성도들과 감독(지키는 자)들과 집사들이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신자들 가운데에는 감독들과 집사들이 포함되지만, 이 감독이나 집사에 속하는 사람들은 지역교회 안에서 특별한 조직상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는 신약성경 곳곳에 나타난 질서인 여러 명으로 된 각 부류가 있었습니다. "직분을 맡은 자들"(굳이 용어를 사용하자면)이 중요하지만 사도들의 문안 편지에서 첫 번째 자리에 놓인 부류는 예배하는 제사장인 모든 지체가 놓여 있는데, 이것은 소위 "성직자"가 첫째 위치에 있고 "평신도"가 두 번째 위치에 있는 오늘날 널리 퍼진 일부 제도와는 매우 다릅니다.

 

감독(bishop)이란 낱말은 "지키는 자" 혹은 "감독관"이란 뜻의 낱말을 그저 영어로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권위를 지닌 한 사람의 성직자(즉 "주교" - 역주)가 여러 개의 교회를 주관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적으로 볼 때 한 교회 안에 감독들이 몇 명씩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20장(17절과28절을 비교해보십시오)과 디도서1장(5절과7절을 비교해 보십시오)은 "감독"과 "장로"가 같은 뜻임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두 용어의 차이점은 이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의무(감독하는 일)와 위엄(장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장로가 되기 위한 자격기준은 매우 높으며 또 영적인 것입니다. 사업을 성공적으로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장로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전서3:1-7과 디도서1:7-9은 장로가 되기 위한 분명하고도 세밀한 자격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누가 이 높은 직위를 맡기에 합당한지 보여주실 수 있을 뿐입니다. 그분은 양떼를 주인이 아닌 목자처럼 돌볼 사람들, 자신과 자기 가족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을 대하여 믿음을 지키고자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실 것입니다(벧전5:2, 행20:28). 비록 장로들의 의무이기 때문에 양무리를 꾸짖고 권고하더라도(이로 인해 마음이 상한 자들이 그들을 인기 없는 자로 만들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가장 귀히 여기며(살전5:13), 잘 다스리는 자를 또한 "배나 존경"해야(이 낱말은 흔히 재정적으로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됩니다(딤전5:17). 성실히 일한 충성된 감독들은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벧전5:4).

 

헬라어 디아코노스( )는 단지 종이라는 뜻입니다. 때로 이 낱말은 신약에서 전혀 비전문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번역되고, 어떤 때는 빌립보서1:1에서처럼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 영어로 표기할 때 단순히 집사라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마도 사도행전6:1-7은 집사들을 언급한 최초의 말씀일 것입니다. 이 단락에서는 실제로 집사에 해당되는 단어가 아닌 연관된 동사("섬기다")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집사들의 봉사는 그저 식탁에서 시중드는 것보다 더 범위가 넓어서, 온갖 일을 다 포함하되 장로들이 직접 책임 맡고 있는 일은 포함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집사의 자격 요건은 높으며(딤전3:8-13), 장로들의 자격요건과 비슷합니다. 또한 집사들은 정식으로 섬김을 허락 받기 전에 다음 사항들이 증명되어야 합니다(10절). 즉 단정하고, 신앙이 건전해야 되며, 이(利)를 탐내지 않는 것 등이 그 자격요건 중 일부입니다. 11절은 집사들의 아내(흠정역) 혹은 여자 집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로마서16:1은 뵈뵈를 여자 집사로 부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를 교회 안에서 섬기는 종으로 부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잘 섬기는 집사는 아름다운 지위를 얻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습니다(딤전3:13).

사람들은 예식 혹은 성사(聖事)를 많이 만들어 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두 가지 예식을 언급합니다. 즉 물 침례와 떡을 떼는 것 두 가지입니다. 이 예식들이 참여자들에게 무슨 "은혜"를 주는 것은 아니며 다만 구주께 대한 사랑과 순종의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침례식은 한 사람에게 단 한 번 베푸는 것이 옳습니다. 성찬은 자주 빈번하게 베풀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례를 지역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에 필수요건으로 삼습니다. 이상적으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침례를 받아야하지만 성경 어디에서도 침례를 교회지체가 되는 것과 연관 짓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 지역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대한 성경말씀은 있지도 않습니다. 침례가 마음속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표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침례에 대한 논란은 많이 없어질 것입니다. 침례는 죄를 씻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침례는 사람을 구원할 수도 없고 또 구원하는 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례가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가리키며, 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에 있어 그분과 한 몸으로 여김받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성령으로 침례받는 것을 상징한다"고 여깁니다. 요컨대 모든 전도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은 침례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위요, 한 사람을 공적으로 구별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오늘날도 단순히 믿음을 고백하는 것보다 침례를 받는 것이 더 큰 핍박의 신호가 되고 있습니다.

"침례를 주다"는 단어에는 헬라어로 "물에 담그다" 혹은 "물에 잠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이차적인 의미는 "동일한 것으로 여김"인데,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는 것은 침례에 있어 중요한 개념입니다. 물에 완전히 잠겨야 침례를 올바르게 받는 것입니다. 침례요한은 "물이 많은"(요3:23) 장소를 골라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만일 물을 뿌리거나 붓는 것이 옳은 방식이면 이렇게 많은 물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침례받으실 때 "물에서 올라오셨으며"(마3:16),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는 둘 다 "물에 내려갔습니다"(행8:38).


침례의 의미나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침례의 대상입니다. 구원받지 못했으나 종교적인 사람이 기독교 내에서 조직을 갖춘 어떤 무리에 의해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침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여전히 침례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신약에서는 구원받은 사람만이 침례를 받습니다. 침례받는 사람이 다 어른이라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받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아기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게되면 자기 영혼의 안전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갖게 됩니다. 사람은 너무나 쉽게 종교의식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순서를 보면 언제든지 "믿고 세례를 받더라"며 결코 그 반대가 아닙니다. 가끔 빌립보 간수의 경우를 예로 들며, 진실한 믿음과 관계없이 온 집안 사람이 다 침례를 받아야 된다는 주장을 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행16:34)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가서 모든 족속을 가르치고 세례를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가르침이 성경적이라는 것과 또한 침례 자체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마28:19,20).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은 "성찬식"이나 "주의 만찬", 또는 사도행전에서처럼 "떡을 떼는 것"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성찬식은 단순한 예식으로서 침례와 마찬가지로 복음서에 명령되어 있고 사도행전에서 실천되고 있으며 서신서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잡히시던 날 밤 주 예수님은 떡을 떼고 잔을 나눔으로써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을 기억해야 할 예식을 제정하셨습니다(고전11:26). 주님의 분부이기 때문에 이렇게 주님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람의 연약을 알고 계신 주님은 자비롭게도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상징을 주셨는데, 곧 우리를 위해 주신 주님의 몸을 나타내는 떡과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나타내 주는 포도열매를 주신 것입니다. 이런 상징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최고의 증거로서 우리의 기억을 생생하게 소생시켜 주는 것입니다.
믿는 자인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함께 모여 죽으신 주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주의 상에 둘러앉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존전에 직접 나아감을 얻습니다(히10:19-22). 성찬식은 오랜 세월을 내려오며 변함없이 믿음을 고백하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예배의 중심이 되어왔습니다. 현대에 들어와 일부에서 의식주의(儀式主義)를 두려워한 나머지 성찬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도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만일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예배를 드리게 하실 수 있다면, 떡을 떼는 것이 단순한 의식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기억하는 모임은 믿는 자들에게 놀라운 영적 유익을 주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막아주는 보루가 되어줍니다.

우리가 주의 만찬을 기념하기 위해 얼마나 자주 모여야 하는지에 대한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 주일마다 주의 만찬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행20:7). 분명 연보도 이 날 드렸을 텐데, 그 이유는 매주일 첫날에 자기들의 헌금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고전16:2). 본성적으로 우리는 대부분 너무나 냉담하고 고마움을 모르는 자들이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영적으로 자주 돌이켜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는 데에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의 간증은, 복음집회나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각종 집회에 참석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손상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찬에 참여하도록 허락을 받자마자 함께 믿는 신자로서 성도들과 교제가운데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는데, 그것은 부도덕하거나 경솔하게 살도록 잘못 인도하는 자나 혹은 잘못된 교리를 퍼뜨리는 자를 징계하는 교회의 다스림을 받을 의무도 됩니다. 오늘날 교인을 잃을까 염려해서 징계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또한 어떤 지역이나 무리 중에서는 징계 가운데 있다가도, 다른 곳에 가면 아무 잘못도 범한 적이 없는 사람인양 영접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징계의 온전한 목적은 잘못한 자를 바로 잡아 다시 교제를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에 있어 지혜와 은혜가 절대 필요하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교회가 거룩하려면 규모없는 자에게는 반드시 경고가 주어져야 합니다(살전5:14). 규모 없는 자들은(살후3:11,14, 15)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과 더불어 피해야 될 대상입니다(롬16:17). 또 이단은 딱 잘라서 거절해야 합니다(딤3:10). 신약에서 이단은 중요한 교리상의 문제에 있어 잘못된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징계의 최종적인 형태는 출교입니다(고전5:11,13). 출교는 신중하게 해야되며, 음행하는 자와, 탐람하는 자와, 우상 숭배하는 자와, 후색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는 자들이 그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징계는 공정해야 되며 교회문제는 그 교회 성도들만 알게 하고 교회 밖으로 나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앞에서와 같이 자격을 전적으로 상실한 사람들 중 일부가 어느 다른 건전한 모임에 교제를 요청할 때 통제되어진다면 아마 우리는 복음증거에 있어서 더 많은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섬김은 대단한 것이지만, 강단 사역은 그들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는 동등하지만(갈3:28),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해서는 안되며(고전14:34,35) 남자들을 가르치거나 남자의 권위를 빼앗아 주관하려 해서도 안됩니다(딤전2:12). 여자는 다른 여자들과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지만 남자가 섞여있는 무리를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는 표시로 머리를 가려야 하는데, 이것은 교회의 질서를 지켜보고 있는 천사들에 대한 간증이기도 합니다(고전11:10). 여자들이 순종해야되는 이유는 여자가 나중에 지음 받았고 죄는 먼저 범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자가 설교자나, 공적인 교사나, 혹은 장로가 될 수 없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여자는 자기의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눅8:3), 손 대접을 할 수 있고(롬16:1), 자기보다 나이 어린 여자들을 또한 가르칠 수 있습니다(딛2:4). 교회 밖에서는 여자도 브리스길라가 남편 아굴라를 도와 아볼로를 가르쳤던 것처럼 남자들을 비공식적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행18:26). 여자는 모든 사람을 격려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수세기 동안 헌신된 여인들은 구제나 해외선교, 또 그 밖에 셀 수 없이 많은 봉사를 활발하게 벌여 왔습니다. 여자들은 성경의 제한 안에서 쉽게 머무를 수 있으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봉사가 결코 적은 일이 아닙니다.

 

지역교회의 모임 장소를 준비하거나 선교사와 장로들, 과부와 가난한 자, 설교자와 전도자를 지원하는 데는 비용이 듭니다. 이 돈들은 다 어디서 오는 걸까요? 즐겨내고 사랑으로 하는 성도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 의무였지만,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은 수입에 비례해야 하며(고전16:2), 은밀해야 하며(마6:1-4), 즐겨 내야 합니다(고후9:7). 우리 모두는 할 수 있는 한 많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즐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할 수 없는 은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고후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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