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믿음이냐 행함이냐

 

찬송 : ‘구주 예수 의지함이’ 542(340)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갈라디아서 216, 야고보서 217

 

말씀 : 아득한 옛 추억입니다. 교회학교 고등부 시절, ‘믿음이냐’ ‘행함이냐’ ‘바울이냐’ ‘야고보냐하는 주제를 놓고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섞어가며 밤늦도록 토론하던 일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믿음행함을 상호 대립 관계로 보고 양자택일을 강요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바울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평가절하했습니다.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에서 야고보서는 유다서 히브리서 요한계시록과 함께 정경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알고 보면 루터가 종교개혁의 근간으로 삼았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씀도 4복음서와 히브리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입장은 중세 가톨릭의 공로신학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그의 신학적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 우리는 믿음행함’, 그리고 바울야고보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충적 관계임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상호 보충적 관계라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선 바울은 선교사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선교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 얻는 믿음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그의 목회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사랑의 행함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믿음과 행함이 야고보가 주장하고 있는 믿음과 행함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예수를 믿어 구원 얻는 믿음입니다(2;16). 반면 야고보가 주장하는 믿음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유일신관을 말합니다(2:19). 또한 바울이 부정하고 있는 행함은 구원을 위한 율법의 행위입니다(2:16).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구원을 얻기 위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인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 문제에서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랑의 행위는 무의미합니다. 또한 사랑의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공허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위해 상호 보충적 관계여야 합니다.

 

기도 : 거룩하신 주님, 믿음과 행함이 조화를 이루는 온전한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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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수요저녁설교 (September,Wednesday Worship Sermon)

제목/절대기쁨을 누리는 방법

성경/빌1:15-18

 

● 신앙생활 하다보면 늘 즐겁고, 늘 기쁘고, 늘 은혜 속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저런 일 때문에 교회 안에서 상처를 입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하느냐 마느냐 고민하기도 하고, 심하면 교회를 떠나야 하느냐 마느냐 갈등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상처의 대부분이 사람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드리고 은혜를 받고 봉사하면 문제 될 것이 없는데, 그런 일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그것도 같이 신앙생활하며 예배 하는 가까운 사람들 때문에 신앙에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의 평정심을 잊지 않고 기쁨을 누리며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본문을 통해서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 오늘 본문 속에서 바울이 어떤 상황 속에 놓인 것을 알게 됩니까? 15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바울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사람들의 반응과 바울을 좋아하고 따르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바울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 했겠습니까?

 

▶ 바울을 좋아하고 따르던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16절에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하여 세우심을 입은 사람임을 기억하고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욱더 애정을 갖고 바울이 하던 복음 사역에 더욱 열심을 냅니다.

 

▶ 반면에 바울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17절에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힘으로 바울의 명성이 크게 손상되고 위축되었다고 생각하고 이 틈을 타서 자신들의 명성과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복음 사역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바울과 같은 상황 속에 놓인다면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불쾌하게 생각하고, 이들로 인해서 마음이 많이 언짢을 겁니다. 왜냐하면 나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나를 넘어서는 지지를 받기 위해 애를 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울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도 그런 사람을 보게 된다면 그 열심히 순순하지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볼 것입니다.

 

▶ 선배 목사님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부교역자를 선택할 때는 설교를 못하는 사람을 선택하라고 말씀합니다. 부교역자가 담임목사님보다 설교를 잘하면 성도들이 담임목사님 보다 부교역자를 더 좋아하고 따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혹여 교회에 문제라도 생기면 그 부교역자를 따라 교회를 나가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그런 마음으로 부교역자를 선택했을 때 마음 불편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 쓰이고, 눈에 거슬릴 것입니다. 혹여 집사님들이랑 모여 웃으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부교역자는 미운털이 박히게 됩니다. 그 속에서 기쁨이 있겠습니까? 어렵습니다.

지금 바울이 그런 상황입니다. 자신의 입지는 좁아지고,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던 사람들이 이 일을 틈타 복음 전파 사역에 열심을 냅니다. 그 속에서 바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18절 말씀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 바울은 자신을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하던, 혹은 자신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하던 복음에 대해서 열심을 품고 전파하는 일에 대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복음 사역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 사역을 중단하지 말라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사람들 때문에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어떤 이유로든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은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성도들을 시험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중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배를 중단하게 만들고, 기도를 중단하게 만들고, 헌신을 중단하게 만들고, 주일성수를 중단하게 만들고, 십일조를 중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들과 핑계 거리를 만들어서 지금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을 중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이유들이 합당할 수 있습니다. 아파서 못한다, 바빠서 못한다, 멀어서 못한다. 없어서 못한다. 그러나 중단하게 되면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의 기쁨은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역을 중단하면 안됩니다.

 

▶ 느헤미야서를 보면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할 때에 반대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성벽 재건을 방해합니다. 회유를 하기도 하고, 조롱을 하기도 하고, 협박을 하기도 하고,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벽 재건을 중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성벽재건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한 손으로는 일을 하면서 끝까지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느4:17)

 

▶ 고린도전서15:6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오백여형제가 있었음을 말씀합니다. 누가복음24:49에서는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하시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정작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무리는 120명입니다. 나머지 380명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들은 기도하며 기다리면서 마귀의 숫한 공격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 기다리는 것을 중단했을 것입니다. 중단하므로 그들은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경험할 수가 없었습니다.

 

각자 모양은 다르지만 중단하게 하는 것이 마귀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고 말씀합니다. 중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하다보면 반드시 열매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2. 복음에만 집중하라

 

더불어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사람들 때문에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복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자존심도 있고, 우리의 체면도 있고, 우리의 이익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복음에만 집중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내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고, 우리의 어떤 유익들을 구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에만 집중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절대기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 18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놓치지 않고 누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한 사도 바울의 모습 속에서 먼저는 “복음을 전파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정과 욕심을 내려놓고 “복음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바울과 같이 “복음에만 집중하여 복음전파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므로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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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기고, 따라가고  

로마서 11장 36절

 

2017년 하면 왠지 모를 아쉬움과 후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2017년 새해에는”이라고 하면서 각오를 다집니다. 새해에는 후회하기보다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했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라는 말씀은 창세기 1장 1절을 증거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돼 있습니다. 피조물의 근원과 인류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또 ‘주로 말미암고’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뜻입니다. 나 그리고 나와 관련된 모든 분야를 하나님이 관리하십니다. 나, 가정, 사업장, 직장, 교회를 하나님이 운영하십니다.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마무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없어졌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에서 ‘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면 하나님도 일을 끝냅니다. 기독교 역사관은 분명합니다. 타 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 방향으로 달려갑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인간의 삶을 통해 역사를 운영하십니다. 우리가 한 해를 시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이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욕심에 아등바등할 뿐이지 결국 하나님의 이끄심에 순복하게 돼 있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큰 자가 되기 위해 아등바등했습니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장자권과 축복권을 움켜쥐었습니다. 외삼촌 집에서도 자기 방식대로 살았습니다. 자기 왕국을 세우기 위해 세겜으로 갔습니다. 그 결과 형 에서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고, 외삼촌에게 죽을 뻔했고, 가나안 사람들에게 온 가족이 원수가 돼 몰살당할 위험에 빠졌습니다. 권모술수로 얻고자 하는 것을 얻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재산을 모았지만 대가가 너무 컸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야곱의 인생은 종지부를 찍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나그네로 이 땅을 산 지 백삼십년 밖에 안 되지만 험한 세월을 살았노라” 산전수전 다 겪은 후 하나님께 순복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후 그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벧엘로 올라갔고, 지팡이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세 번째, 내가 하나님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요. 우리의 마음이 온통 하나님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 손이 저절로 갑니다. 말씀이 가슴에 채워집니다. 설교가 들립니다. 자연스럽게 깨닫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집니다.

환경을 초월하고 손에 쥔 것이 없다 할지라도 감사합니다. 방법이 없는데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이끌리는 삶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복입니다. 아무쪼록 올 한 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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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앞에서는 ‘그 나라’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지금부터는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신약한글성경에 나타나는 교회라는 단어


교회라는 단어가 신약 한글개역성경에 110번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복음서에는 마태복음에만 2번 나오고 있다. 사도행전에 20번, 로마서에 5번, 고린도전서에 20번, 고린도후서에 9번, 갈라디아서에 3번, 에베소서에 10번, 빌립보서에 2번, 골로새서에 5번, 살전에 2번, 살후에도 2번, 딤전 3번, 빌몬 1번, 히브리서 2번, 약 1번, 벧전 1번, 요삼 3번, 계시록에 19번이 기록되어 나오고 있다.


2. 복음서 중에 처음으로 ‘교회’라는 용어


이중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교회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마태복음 16장에서 하셨다. 이때 교회라는 말씀의 배경으로 시몬 베드로에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복음서 중에 마태복음서에만 나오는 교회라는 단어인데 두 번째는 교회 안에 죄 문제가 있을 때 교회에 말하고 라고 했다. 여기서 ’교회에 말’하고 라는 의미는 건물이 아니고 전통적으로 율법에 속한 유대교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라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3.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물론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사역자들이나 일반 신자들이 표현하는 교회라는 단어에 대해서 무의식적으로 건물에 대해서 교회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면 건물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한곳도 없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 에베소, 골로새, 데살로니가 등 지역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을 교회라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고유명사인 지역명을 따서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신앙지도자를 새워 놓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중에 대표적으로 바울이나 초대 교회 일곱 집사들 중에 빌립이나 혹은 디모데나 빌레몬 등 사역자로 지역에서 사역하였다는 것을 알 수있다. 예를 들어 에배소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을 교회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도 어느 도시 어느 지역에 흩어진 모든 성도들을 가리켜 교회라고 생각지 않는다. 어느 어는 교회라는 간판을 말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어느 교회 누구에게 세례 받고 누구에게 신앙의 지도를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교회를 건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라는 구조는 건물을 말한 것이 아니고 복음을 받은 성도들을 가리켜서 성전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것을 바울을 고린도교서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즉 성전에 대한 개념이 전혀 다른 것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고 했다. 


4. 교회는 성도들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래에 더 구체적으로 성전인가?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을 구분해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역자들과 신자들은 건물을 성전이라는 용어를 생각 없이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회당’이라는 용어와 같이 현대어로 교회당, 혹은 예배당으로 가르치고 생각하도록 해야 할 책임이 사역자들에게 있지 않은가? 수십 년 전에는 예배당, 혹은 교회당이라는 간판을 보기도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당(堂)‘이라는 글자가 빠지고 건물을 교회라고 부르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결코 성경적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교회라는 원어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름 받은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하도록 가르치고 있지만 일반 사회인들이 보는 것은 건물이 교회라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 거룩한 무리들이 모인 것이 교회다.

 

분명히 교회(church)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셔서 이전과는 달리 구별된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며, 하나님의 약속에 그 근거를 둔 구원의 공동체를 말한다. 그리고 개역성경에 교회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로 ‘부름받아 나온’, ‘부르심’, ‘택함 받은’ 등의 뜻이다. 이 말은 공적인 목적으로 모이는 모임을 가리키기도 했기 때문에 ‘모임’이라고 번역되기도 했다(행 19:32, 41).


6. 교회라는 원어의 뜻


70인 역에서는 히브리어 ‘카할’(qahal)이라는 단어를 에클레시아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주로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회중을 의미했다. 때로 ‘쉬나고그’(synagoge)라고도 불렀지만 ‘쉬나고그’는 유대인의 모임이나 건물을 가리키는 회당이라는 의미 때문에 사용되지는 않았다.


신약에서의 교회란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 말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 예수님께서 교회가 세워질 것을 말씀하실 때 처음 사용되었다(마 16:18). 실제로 공동체로서의 새 교회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에 예수님의 보혈에 근거하여(고전 3:11; 엡 2:20-23)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세워졌던 것이다(행 2장). 여기서 교회는 건물이나 기관이 아닌 사람들의 모임인 회중이었다. 이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행 2:42).


7. 신약성경에서 표현된 교회란?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교회는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의 피로 사신 것’(행 20:28), ‘보이지 않는 교회’(롬 6:3-5; 고전 12:12-13), ‘그리스도 지체로서의 교회’(롬 12:4; 엡 4:3), ‘하나님의 가족’(엡 2:19), ‘하나님의 교회’(딤전 3:15), ‘예수 그리스도를 토대로 한 건물’(고전 3:10-11),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고후 11:2),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하는 양떼’(요 10:11-16), ‘촛대’(계 1:20) 등이라고 했다.


8.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의 모습


또한 바울이 이해한 교회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갈 1:2) 등으로 지역이나 구성원에 따라서 부르거나 ‘아굴라와 브리스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고전 16:19) 등으로 불렀다. 때로 ‘하나님의 교회’(고전 1:2), ‘그리스도의 교회’(갈 1:22)라고도 불렀다.


9.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교회관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백성들을 불러내시고 모으셔서(롬 8:3, 29-30) 그 안에 거하시고 다스리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고 이해했다(고후 6:16-18). 또한 성도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지적하며 성전이 거룩하듯 거룩할 것을 권면했다(고전 3:16-17). 특별히 그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와 그리스도의 모퉁이 돌로 세워진 교회(엡 2:20)를 이루어가기 위해 성도들이 받은 은사를 잘 활용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엡 2:21-22).


10. 신약에 나타난 교회에 대한 이름들


신약에 나타난 교회에 대한 특별한 이름들 중에 그리스도의 몸인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의 연합을 강조한 이름이다(고전 12:27; 엡 1:23; 골 1:18). 그리고 하나님의 전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고후 6:16)이라 불렀고,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엡 2:22)가 되기 위해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했다. 또한 베드로는 신자들이 ‘신령한 집’(벧전 2:5)으로 세워진다고 말했다.


신령한 교회인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교회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도 했다(갈 4:26; 히 12:22; 계 21:2, 9-10). ‘예루살렘’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 장소로 언급되었는데, 신약에서는 교회를 구약의 예루살렘과 유사하게 여겨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으로 여겼다.


그리고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진리를 수호하는 곳이라(딤전 3:15)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가 초대교회처럼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의 기도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도하기 위해 모였고, 하나님께서는 이곳에 함께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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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      


베드로전서 5장 5∼11절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한 자는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복된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해 깨닫고 알아가는 축복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의 ‘팡세’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자기의 비참함을 모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만을 자아낸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앎으로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알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또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깨닫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남으로 구원받고 은혜 나누는 진실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교만함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이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드려 축복받는 차이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함으로 나 자신을 인정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비움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삶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그분의 때를 기다리며 잠잠히 바라보는 것, 주신 은혜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 곧 겸손이요, 비움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말씀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입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겸손할 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가슴 벅찬 감격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겸손할 때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겸손으로 인해 축복받은 인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래서 겸손케 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축복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통해 내게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고백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나를 겸손하게 하시고 그 은혜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겸허히 받아들이는 겸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 대항해 사람들을 이끌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얼마든지 대항할 수 있었지만 다윗은 하지 않았습니다. 정처 없이 떠나는 피난길에서 시므이가 저주를 해도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던 다윗은 하나님께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정받을 만큼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을 통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오늘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를 때에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시며 겸손의 은혜로 말미암아 축복의 삶을 사시길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전정순 목사(대전 주안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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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소원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각자 소원이 있을 줄 압니다.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솔로몬이 왕이 되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의 소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그에게 주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위대한 신앙인 사도 바울의 소원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는 것”(빌 1:20)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작사한 찬송가가 450장 1절입니다.

이 찬송가는 “내 평생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 왕처럼, 사도 바울처럼, 어떻게 하면 성경에 나오는 이들처럼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4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장 먼저 주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영어 성경 굿뉴스 바이블에는 “Seek your happiness in the LORD, and he will give you your heart’s desire”(시 37:4)라고 돼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대신에 “주 안에서 여러분의 행복을 찾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나의 행복을 찾는 일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또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 길을 그에게 맡겨야 합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5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이 무조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소원은 사람에게 있지만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시 145:19).

하나님은 당신을 기뻐하는 자들의 마음의 소원을 묵살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악인이 형통하며 번영하도록 방치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의 소원에 따라 공의로 불의한 자들에게 갚으십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실 것입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의 소원은 남북통일입니다. 평화로운 통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가이오를 향한 마음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요한3서 1:2).

진정 우리 성도들의 소원은 재림하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종찬 목사(수원성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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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  ‘오직 믿음’의 사람 바울, 율법 완성의 길을 말하다

 

 

바울이 기독교와 교회에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그는 예수님이 왜 구세주가 되시는지, 십자가와 복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어떻게 가능한지, 교회가 무엇인지, 은사와 직분은 무엇인지 등 기독교 교리는 물론, 그리스도인의 교회 및 신앙생활의 기둥들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도리를 로마서만큼 잘 말하고 있는 책도 없을 것이다.

 

믿음의 길, 새로운 삶의 길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인 구원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가장 선명하게 말하는 로마서에서 바울은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을 말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까지 바울은 그야말로 율법 전문가였다.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로서의 전문가일 뿐 아니라 율법을 지켜내는 의지와 행함에 있어서도 최고의 전문가였다(행 22:3; 갈 1:14; 빌 3:6 등). 그런 그가 ‘율법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는 자가 됐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그런데 바울의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얻기도 하지만, 종종 행함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 채 엉거주춤해 할 때가 적지 않다. 이런 이해와 상황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직 믿음’이기 때문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다는 방종이라는 극단적 입장에서부터, 그래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요구되는 행함을 지켜야 한다는 새로운 율법주의적 입장까지 그 중간 어디쯤에 서 있게 하곤 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이번 호 묵상 본문에서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명쾌하게 가르친다. 율법이 무엇인지를 가장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완성을 말한다.

 

그것은 ‘사랑’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13:8). 바울은 이 가르침을 반복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3:10).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율법의 전문가로 있을 때조차 찾지 못했던 율법 완성의 길을 ‘오직 믿음’의 복음 안에서 발견한 것이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주로 전반부에서는 복음의 진리를 서술하는 교리를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행동해야 할 것들을 명령하는 윤리를 다룬다. 종종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는 오래된 신학적 난제로 지금도 첨예한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바울에게 이 둘은 하나다. 로마서에서 이른바 윤리에 관한 내용을 시작하는 12장은 11장까지의 ‘이신칭의’ 교리에 기초해 있으며, 동시에 필연적 지향점이다. 이 윤리는 율법으로부터는 나올 수 없는 윤리다. 즉 교리는 윤리를 위한 것이고, 윤리는 교리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바울은 오직 믿음의 위대한 교리에서 율법의 완성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

 

바울은 그 자신이 이신칭의의 복음을 통해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12:1)를 드린 인물이었다. 이 영적 예배는 로마서 12~15장을 통해 잘 드려진다. 이 4개의 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영적 예배란 한마디로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것’(15:5)이다. 바울은 누구보다 이 예수를 본받으려 한 사람(고전 11:1; 엡 5:1; 빌 3:17 등)이었다. 이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자랑하는 것’이 주된 관심이기도 했지만 이것조차 오직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인물이었다(15:17~19).

 

결국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는 ‘사랑으로’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말이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울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로마교회 성도들의 이름을 적어도 30명 이상 외울 뿐 아니라, 그들의 형편들까지 속속들이 나열하면서 목자의 심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로마서를 마무리한다. 로마서의 남은 본문 묵상을 통해 이신칭의의 은혜가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길로 나타나기를 기도한다.

 

- 박삼열 목사 : 날마다 솟는 샘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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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 디모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가 됐는가?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없는 신약의 교회를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위대한 사도 바울과 함께했던 여러 동역자들을 고려하지 않고는 충분히 그는 사역을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가운데 디모데는 단연 앞선 동역자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을 볼 때 바울의 사역에 디모데가 없었다면 신약의 교회는 세워질 수 없었다. 바울의 사역에, 또 초대 교회가 세워지는 데 있어 꼭 필요했던 인물인 디모데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달에 묵상하는 디모데전·후서를 중심으로 디모데를 탐구해 보고자 한다.

 

디모데, 성경을 만나다

 

바울에게 ‘아들’로 불리는(딤전 1:2, 18; 딤후 1:2, 2:1; 참조 고전 4:17) 디모데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16장이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 루스드라에 갔을 때, 거기서 ‘디모데라 하는 제자’(행 16:1)를 만났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의 등장에 대한 첫 기록이다. 첫 기록에서 그를 ‘제자’라고 호칭한 것은 의아할 정도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이 본문에서 디모데에 관해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기록을 보는데, 그것은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행 16:2)라는 것이다. ‘제자’라는 호칭에 이어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자’로 기록됐다는 점도 눈에 띈다. 디모데는 과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릴 수 있었을까?

 

첫 번째는 그가 성경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흔적을 디모데후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는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에게 영향을 받았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의 중심 메시지이자 모든 사역자에게 매우 중요한 지침인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는 말씀으로 디모데에게 교훈한다. 영적 부담이 큰 이 도전을 바울은 디모데가 어머니와 외할머니로부터 믿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디모데가 받은 영향을 한마디로 말하면 바로 ‘구약’이다. 구약성경이 디모데에게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갖도록 할 뿐 아니라 제자요, 칭찬받는 자로 변하도록 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라고 쓴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디모데가 ‘제자’요, ‘칭찬받는 자’가 될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디모데, 바울을 만나다

 

두 번째는 그가 사도 바울을 만났기 때문이다. 바울이 디모데를 동역자로 부른 곳이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들린 루스드라였는데, 이때 이미 디모데는 ‘제자’로 불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디모데는 언제 제자가 됐을까?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기록한 사도행전 14장을 보면, 바울이 루스드라를 방문해 복음을 전한다. 이때 제자들이 많이 생겨났는데, 디모데도 그 가운데 있었음이 틀림없다.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행 14:21~22). 그러므로 디모데가 ‘제자’요, ‘칭찬받는 자’가 됐던 것은 바울을 만나 그를 통해 복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전·후서에서 디모데에게 십자가 복음을 반복해 강조할 수 있었고(딤전 1:3~20, 2:5, 6:3; 딤후 1:10, 2:8~13 등), ‘내게 들은 바’ 혹은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딤후 1:13~14), 곧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라고 도전할 수 있었다. 이 도전을 받아들여 디모데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딤후 2:3)로 섰던 것이다.

 

우리는 디모데를 통해 말씀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영적 지도자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발견한다. 복음은 반드시 사람, 그리스도의 제자 된 믿음의 사람을 통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 교회는 바울과 디모데처럼 복음을 받고 전하는 일꾼들을 통해 세워지고 이어진다. 디모데전·후서를 묵상하는 동안 성경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일어날 뿐 아니라, 복음을 모르는 또 다른 사람이 제자 되도록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 날마다 솟는 샘물 박삼열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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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

 

어느 견지에서 보든지 간에, 사도 바울을 날카롭게 분석하면 할수록 그의 모습은 점점 더 위대하게 나타난다. 선택된 하나님의 그릇(행 9:15)으로서, 바울의 생애는 무한한 솜씨와 지혜로 이루어졌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였다. 오늘날로 비유한다면 중국의 북경에서 맹자와 공자를 인용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영국으로 치자면, 기가 막힌 신학을 논하며 옥스포드에서 그것을 강의할 수 있는 사람, 러시아에서는 소련 과학 학술회(Soviet Academy of Science)에서 자기 주장을 옹호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바울은 그 당대에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토저(A. W. Tozer) 박사는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이며, 세계 사상 가장 그 이력이 놀라운 사람이다. 그의 업적을 생각해 보라. 나는 그가 한 분야에서 이룬 업적을 생각해 볼때, 어떻게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게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기이하게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한 분야 이상 전공할 수 없으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을 흡수할 정도의 위대한 인물로 보인다. 그가 한 모든 일은 모두 뛰어난 것이었다. 로마 감옥에서 처형될 때까지 그는 그러했다.

교회에 대해 가장 공격적이고 강력한 적이며 가장 가혹한 박해자인 그를 택하여 그가 파괴하려고 하던 교회의 가장 위대한 사도, 심오한 신학자, 설득력있는 변론가, 지칠 줄 모르는 선교사로 바꾸어 놓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배경

 

그의 부모는 베냐민 족속으로서, 유명한 조상 사울왕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그는 아버지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에 바울루스(Paulus)라는 이름이 덧붙여졌다. 훌륭한 바리새인으로서, 바울의 부친은 매우 엄격하게 율법의 모든 의식을 지키고자 했으며, 그를 바리새인의 훌륭한 전통에 따라 세심하게 그를 훈련시키고자 했다(빌 3:4-8). 그 가정은 다소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을 보아 매우 유복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거의 전 세계적인 언어인 헬라어 외에도, 팔레스타인의 아람어도 사용했다. 훌륭한 집안의 다른 소년들처럼,바울도 알리시안(Alician) 염소의 털로 천막을 만드는 일을 배웠다. 바울은 다소의 시민권을 상속받았다.

약 15세쯤 되었을 때에 그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그는 주도적인 학문의 도시였던 고향 다소에서 이미 학문적 분위기에 젖어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일곱 명의 율법 박사 중 한 사람인 가말리엘(행 22:3) 문하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그 위대한 랍비 가말리엘은 담대히 “율법의 미“라고 불리우는 사람으로, 고매한 인격과 박식한 학문으로 유명했다. 그에게서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 율법의 엄한 규율에 따라 교육을“ 받았다(행 22:5).

바울이 대제사장에게 접근할 수 있었으며 또 신임을 받았던 것을 볼 때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는 산헤드린 회원이었고 순교자들을 정죄하는 데 찬성표를 던졌다고 한다. 그의 예리한 정신력은 학문에서 동료들을 능가하게 했다. 그는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던 자“(갈 1:14)였다고 간증했다.

그의 서신 중에 나타난 자서전적인 이야기에서 바울은 개종 이전의 자신을 매우 자기 확신적이며 내세를 믿고 청결한 생활과 율법을 준수하고 존경할 만하고, 하나님 앞에 책망받을 것이 없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결코 탕자였던 일이 없으며, 정죄함없이 자신을 하나님의 표준에 따라 평가할 수 있었으며, 자기 의무를 이행하는 데 실패한 일이 없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지나친 열심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역사의 페이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도말해버리고자 한 노력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이와 같이 회심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완전성을 굳게 믿고 있었고 그의 신앙이 타당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한 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복잡다단한 사람이었다. 사도들은 각기 어떤 한가지 뛰어난 장점이나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있었다. 그는 아마도 교회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극단주의자였고, 안드레는 보수주의자였다. 그런데 바울은 그 두 가지르 다 가지고 있었다. 즉 베드로처럼 모험주의자이면서 안드레처럼 조심스러웠다. 그는 원칙에 있어서는 보수주의적이었으나 방법에 있어서는 급진적이었다. 원칙이 걸려 있을 때에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으나(갈 2:5), 방법론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전 9:22).

회심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회심을 교회사상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보시고 성령의 영감에 의해 그 사건을 세 번이나 상세하게 보충적인 이야기를 기록하게 하셨다. 이 획기적인 사건에 대해 가장 완벽하게 연구한 사람 중의 하나는 리틀톤(Lyttelton)경인데, 그는 의회의 의원으로서 영국의 모든 정치적 토론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내각에서 재무성 장관을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는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문학가이기도 했다.

그와 그의 친구인 변호사 길버트 웨스트(Gilbert West)는 성경은 사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사기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리틀톤경은 바울의 회심을, 웨스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택하여 비판하기로 했다. 두 사람 모두 완전한 편견에서 각자가 맡은 분야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긴 세월에 걸친 연구 결과,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뒤집어 엎으려는 그 노력을 통해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하게 되었다.

멜도(F. J. Meldau)는 말하기를 그들은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사기를 폭로하게 된 것이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발견하게 된 것에 서로를 축하했다고 이야기한다. 리틀톤은 그가 펴낸 논문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바울의 회심과 사도직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어져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기독교신앙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충분히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그의 논문이 굉장한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사무엘 죤스톤(Samuel Johnston)박사는 그것은 “불신앙이 그럴 듯한 답변을 날조하는 것이 불가능한“ 논문이라고 단언하였다.리틀톤경은 그 경우에 있어서 모든 가능성을 남김없이 연구하여 네 가지 명제를 세웠다.

바울은 거짓인 것을 알고 또한 그것을 말하는 사기꾼이거나,

너무 과열된 상상으로 인한 열광자이거나,

다른 사람의 사기에 속았거나,

그가 선포하는 회심의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고, 따라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인 경우다.

성경의 기록을 가지고 그는 바울이 사기꾼이 아님을 논증하였다. 어떤 동기가 이 새로운 종파를 몹시도 증오하는 다메섹 도상에 있던 그를 돌이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하였던 것일까? 동기는 없었다. 거기에는 분명히 부와 명예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 그는 권력도 추구하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는 자기 추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동기는 다른 열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서신을 보면 가장 엄격한 도덕성이 숨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증오와 멸시와 박해를 받게 되는 일이었다. 과연 그는 자신이 사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기뻐하며 모든 것을 잃어 버리는 것을 감수하였겠는가?

그것이 위험할 뿐만 아니라 무익한 사기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리틀톤은 그 이론을 자체적으로 모순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울이 아그립바왕에게 자신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가 진실인 것을 알지 않느냐고 호소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행 26:16).

“이것은 매우 뚜렷한 증거이다. 그 사실이 유명하다는 것과 재판석에 앉아 자기를 재판하고 있는 왕을 향하여 담대하게 자기 증인이 될 것을 부탁할 수 있는 것이 확실한 증거이다.“

만일 회심에 대한 이야기가 꾸며낸 이야기라면 아나니아가 어떻게 다메섹에 있는 자기의 적을 만나러 갈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은 논증을 거쳐, 리틀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바울은 사기꾼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회심에 대해 꾸며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회심과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인 헌신 후에 아라비아에서의 격리 기간이 뒤따라왔다(갈 1:17).


고든(S. D. Gordon) 박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이 좋은 교육을 받기를 열망하신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모든 사람은 다 아라비아나 대학에서 광야의 훈련이라는 과정을 밟았다. 요셉과 모세, 엘리야, 밥티스마 요한, 바울, 번연, 모리슨, 져드슨,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 자신도 육신으로 계시는 동안 그러하셨다. 이들은 우수한 졸업자 중에 몇 명일 뿐이다. 그러나 등록금이 매우 비싸고, 그 과정이 극히 어려우며, 훈련은 너무 엄격하므로 많은 사람이 견디지 못하고 탈락하고 만다. 그 현저한 결과는 넓은 시야와 강한 담력과 예리한 시각과 통찰력 등이다. 철저한 하나님 신뢰와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 것과 어린 아이같은 단순함, 따뜻한 동정심과 깊은 겸손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가장 최고의 것은 인내로서, 이것은 가장 진귀한 특성으로, 가장 하나님을 닮는 것이요, 가장 어렵고 긴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훈련에는 지름길이 없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을 만난지 3년 만에 거룩한 성으로 가서(갈 1:8), 베드로와 처음 교제를 갖고, 랍비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고자 애를 썼으나, 그 희망은 쓰디쓴 좌절로 돌아가고 말았다(행 22:17-20). 그 다음 몇 해 동안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명확치가 않다. 그는 분명히 시리아와 길리기아에서 수 년을 설교하며 지냈을 것이다(갈 1:21). 이러한 복음 사업을 위한 준비 기간은 안디옥교회에서의 일 년간의 풍부한 경험으로 끝난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한다(행 11:25, 26/13:1-4).

 

특성

 

바울을 복합적인 사람으로 만든 몇 가지 특성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성실성/ 구약의 명령인 “너는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성실(완전)하라“(신 18:13)는 말씀은 바울 안에서 명료하게 예증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에도, 그리고 나중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 박해를 받을 때에도 똑같이 성실하였다. 그가 슬프게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가 의식적으로 불성실한 일은 없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고전 4:4).

성실은 자기를 드러내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열심/ 그는 그가 착수한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였다. 그는 예절의 모든 열심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았다. 이제는 성령님에 의해 새로운 통로로 인도되어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의 범주에 들어왔다. 빌립보서 3장 16절에 나오는 “핍박“(persecute)이라는 말은 빌립보서 3장 14절의 “좇아 가노라“와 같은 말이다.

결단/ 야전 사령관인 몽고메리(Montgomery) 경의 지도자로서의 필수적인 자질 일곱중의 하나가 분명한 결단력이다. 이것은 확실히 이 사도의 뛰어난 특징이었다. 예수님 앞에 완전히 엎드려질 때에도, 그는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질문을 하였다.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진심으로 하는 이 질문 가운데 그는 이미 절대적인 순종과 충성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그의 단호한 성품은 망설이는 것을 몰랐다. 임무를 알면 바로 행했다.

겸손/ 바울은 위대한 회개에서 나오는 겸손으로 살았고, 그 겸손은 점점 깊어갔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전 15:9).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그러나 캠벨 모간이 말한 것처럼, 거짓 겸손이 없는 것보다 더 분명한 겸손의 증거는 없다. 그의 사도직과 사역에 대해 도전받았을 때,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특권과 업적을 자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도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후 12:11).

그는 모순된 자신을 보이지 않았다.용기/ 그는 놀라울 정도로 헬라인들이 높이 평가하는 이상적인 마음의 균형을 드러내주었다. 위험을 찾거나 무모하게 거기 뛰어들지 않은 반면에, 주님의 일이 걸려 있기만 하면 한 순간도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위기와 위험과 반대로부터 조그마한 움추림도 없었다. 그의 도덕적 용기는 육체적 용기와 조화를 이루었다. 그의 서신들은 그가 얼마나 충성스럽게 인사 문제와 교회의 어려움을 가지고, 어지러운 상황 가운데서 두려움없이 온유하게 처리했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는 훈계나 책망을 해서 자신의 마음이 상하는 것을 피하려고 일들을 태만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의 용기는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는 아니었다(고전 2:3/고후 7:5). 그러나 그는 두려움에서 일어나 승리하는 법을 배웠다.

너그러움/ 좁고 답답한 사람 사울에서 가장 아량이 많고 관대한 사람 바울로 바뀐 변화는 회심의 기적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은 그의 마음을 넓혔을 뿐아니라 그의 마음을 크게 하고 시야를 확대시켜 주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 사랑의 넓이를 점점 더 많이 반사시켰다. 다른 이의 성공에 대한 그의 순수한 기쁨이 그가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입증해 준다. 그러나 그는 도량있고 인내심이 있다고 해서 중요한 문제에 대해 타협하지 않았으며, 위대한 베드로가 관계되어 있을 때조차도 그러했다(갈 2:11).

독립심/ 독립심은 소년에게는 파괴를 가져오나 훈련되고 성장한 사람에게는 위대한 자산이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 4).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그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에 대해 깊이 고려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이와 같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여 함이라“(고후 8:21).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갈 1:10)라고 묻지만 또한 이렇게 말한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되“(고전 10:33).

이 말들은 서로 모순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자기에게 청지기 직분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았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 기독교 사역의 독소인 개인주의와 무책임한 독립을 벗어날 수있었다. 그의 독립에 있어서 바울은 다른 이들의 양심적인 거리낌을 조심스럽게 존중하였던 것이다(고후 4:2).

친밀함/ 바울은 비이기적인 우정의 천재였다. 많은 다른 위대한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고립된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친구들을 사로잡고 열정적인 사랑과 충성을 받는 독특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와 디모데와의 우정은 나이 든 사람과 청년사이의 우정의 모범이 된다. 사랑받는 의원 누가와의 우정은 비슷한 나이와 취향의 사람들끼리의 우정의 좋은 예가 된다. 그는 사교적인 사람이었으며 친구들과 떨어져 있을 때는 철저하게 외로움을 느낀 사람이었다. 요한 마가에 대한 문제로 바나바와 결렬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불일치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가 「발작」(paroxysm)이란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언제나 바나바를 충심으로 생각하였으며, 그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그를 칭찬하였다. 그들 서로의 사랑이 시험을 이겨냈다. 이러한 우정의 역량이 바울이 그리스도인 지도자를 재생산해 낸 능력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감사/ 그의 서신은 자기가 받은 친절과 베풀어 준 호의에 대한 뜨거운 감사가 숨쉬고 있다. 그는 결코 “감사“ 편지를 쓰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칭찬에 후했으며 동정심이 많고 행동은 사려깊었다. 그의 서신의 어조를 볼 때, 세월이 지나갈수록 이러한 자질들이 점점더 두드러져 갔다.

형제 자매의 사랑을 얻었으니

빠른 세상에서나, 땅 속에 묻혀서나,

보라, 그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흠없는 하나님의 가족, 주님께서도 나를 기다리시네.

영혼에 대한 열정/ 마이어스(F. W. H. Meyers)는 그의 위대한 시에서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위대한 영혼에 대한 부담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설교자

 

종종 전할 말씀이 내게 임하면

환상은 떠나가고 진실이 드러나네.

사막이나 무리나 성읍이나 강이나

밝은 낙원의 공기 속에 녹아들고

영혼처럼 나는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보는도다.

정복자가 되어야 할 묶인 자들, 왕이 되어야 할 노예들을

공허한 경이 속에 그들의 한 가지 소망을 들으며,

슬프게 보이는 것들에만 만족하고 있는.

견딜 수 없는 갈망의 용솟음 속에

트럼펫 소리처럼 내 전신을 흔들고

오-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죽기 위해!

그들의 생명을 위해 죽으리.

그들 모두를 위해 바쳐져서!


만일 설교를 그 결과에 따라 평가한다면, 바울이야말로 설교자의 왕이었다. 그는 디모데에게 한 그의 말에 대한 바로 그 본보기였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그의 설교는 공공 강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웅변하지 않았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말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그는 호언장담을 하거나 자기 확신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그는 세상의 궤변에 의지하지 않았다.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고전 2:4).

그는 오직 성령만 의지하였고 “성령과 그의 능력의 나타남“으로 설교하였다.그의 설교 방법은 경우에 따라 다양했다.

때로는 논쟁적이기도 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느니라“(행 9:22).

그는 논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하여 그들의 이성을 만족시켰다. 그는 늘 사색과 기도로 분명한 확신을 얻었고 어떤 논쟁도 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지적인 겁장이가 아니었고, 그의 신앙에 대한 도전에 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나 지당하다고 믿었으므로, 그것을 증명하였다.

-아덴에서: “회당에서는... 날마다... 변론하니“(행 17:17).

-고린도에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행 17:4).

그러나 그는 단지 이기기 위해서 논쟁을 좋아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자기사람이나 청중을 잃는 희생을 치루어 가면서까지 논쟁을 이기지 않았다. 참으로, 그는 많은 반대자들을 감동시켰으며, 아덴에서는 몇몇 철학자들까지 감동시켰다.

동시에 그의 설교는 설득력이 있었으며, 간청과 호소가 넘쳤다.

그는 단지 사실과 논쟁만을 제시하지 않았다.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앎으로 사람을 권하노니“(고후 5:11).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 18:4).

다가올 심판에 대한 믿음이 그의 호소에 긴박감을 더해 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한없이 좋으시기만 한 분이 아니었고, 죄를 묵인하실 수 없으시며 온세계에서 죄를 말살시키셔야만 하는 분이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오도록 설득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또 어떤 때는 그의 설교는 교훈적이어서, 청중들의 특별한 욕구를 채워 주었다.

그는 설교가인 동시에 교사였다. 그는 3년 동안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쳤던 것이다(행 19:9). 그는 고린도에서 18개월 동안 살면서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행 18:11) 지냈었다. 사람들은 텅빈 머리로는 믿을 수도 자랄수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해 조직적으로 가르치는 데 투신했다. 그는 종종 가르침의 결론을 내리면서 질문을 던지는 교육 방법을 사용하였다.그의 다양한 접근 방법에서 그의 융통성을 볼 수 있다.

고정된 방법이 없었다. 그는 청중에 따라 메시지를 적절하게 전했다. 그는 로마통치자들이나, 헬라 선생들이나, 아시아의 관원이나 히브리 율법사들에게나 능숙하게 전했다. 그는 회당의 유대인들에게나, 아크로폴리스의 헬라 철학자나 루스드라의 이교도 군중이나 베스도 앞에서 법정의 회의 때에나 자신을 쉽게 적응시켰다.

그의 설교의 어조는 그의 말을 가장 잘 전달하는 것이었다.

“내가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행 20:31)은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흔치 않은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눈물없는 기독교 신앙의 저주“라는 이름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계의 신학 체계가 그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주님께서 아직 미발달의 형태로 주신 진리를 하나님의 영감 아래서, 체계적인 신학과 철학과, “모든 기독교 운동에 답하는“ 윤리로 발전시켰다.

 

기도의 사람

 

기도만큼 그 사람의 영적 생활의 질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없다. 그의 서신 가운데 나타나는 꾸밈이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바울의 기도에 우리는 감사해야만 한다. 곳곳에서 기도가 그의 영적 생활에 보조적인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것이었던 것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놀라운 사실은 바울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기도가 없는 심령 때문에 슬퍼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기도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실패 때문에 자신을 책망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기도의 확신을 빼앗아가는 정죄감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의 기도는 어떤 형식적인 형태를 따르지는 않았으나 결코 흐트러지거나부주의하지도 않았다.

그는 어디에서도 기도의 정당성을 설명하거나 옹호하지 않았다. 그는 기도를 그리스도인의 타고난 태도요, 영적 생활의 정상적인 표현으로 생각했다. 그의 기도는 때로는 조용하고 명상적이었고, 때로는 타오르는 열정으로 하늘까지 불타 올랐다. 그의 기도는 감사로 충만했으며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우리가 그의 서신 가운데서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아마도 그의 설교보다는 기도에서였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기도는 “계속 되풀이된다“는 의미에서 끊이지 않았다.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롬 1:9/고전 1:4/엡 1:15, 16/골 1:3/살전 1:3).

이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그에게는 모든 일이 찬양과 기도의 제목이었다. 또 그것은 사심이 없었다. 그의 기도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필요에 관한 것이었다. 중보 기도는 그의 영적 경험의 활력소였다. 회심자들과 그가 세운 교회를 위한 그의 기도는 모든 세대의 본이 된다. 그 기도들은 그가 그들의 성장과 발전에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는지 나타내 준다. 골로새서 2장 1절에서 3절까지의 그의 기도의 간구는 새신자들과 새로이 세워진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요약하고 있다.

그의 기도는 꿈꾸는 몽상이 아닌, 분투적인 것이었다.

그는 그 특성을 가장 생생하고 강한 모습의 언어로 사용하여 그리고 있으며, 사람이 일상적인 노동을 하듯 지칠 때까지 수고하면서, 상을 얻기 위하여 경기장에서 다투는 운동 선수처럼, 생명을 걸고 싸우는 군사처럼 가장 꾸밈없이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응답을 크게 확신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응답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그의 기세를 조금도 꺾지 못했다. 끊임없이 초자연의 영역에 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과 지속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기도하면서,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중재를 기대했다. 기도가 부적당한 환경이란 없었다.

어쨌든 바울은 자족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열망하였다. 그는 교회 안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할것을 권면했다. 그는 새로 회심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요청하고 있다(살전 5:25).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후 1:11).

그는 자기를 위한 그들의 기도를 예의상 추가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자기 사역에 결정적인 요소로 보았다.

“이것이 너희 간구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빌 1:9).

그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엡 6:19), 전도할 문이 열리도록(골 4:3), 또 구원을 위하여(갈 1:4) 기도해 주기를 바랬다.

바울의 기도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으며, 그 정신은 겸손하고 경건하며, 형식면에서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드러내고 있으며, 표현에 있어서는 열렬하고 확신에 가득차 있다.

다음 장에서는 선교사의 본으로서의 바울을 다루고자 한다.

바울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

 

바울이 갖고 있었던 로마 시민권은 오늘날 기독교 선교사들이 선교 사업 가운데 겪는 두 가지 어려움을 면제해 주었다. 그 당시에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치외법권이 없었다. 그리고 외국 땅이 없었다. 바울이 가는 곳은 어디나 그의 정부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나 스페인에 가서 외국의 사법권에 순종해야 하는 외국인으로 일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 제국의 어디에서나 자유로웠다. 그가 빌립보나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호소했을 때, 그는 외국 나라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역은 실제적으로는 모두 다 국내 선교 사역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선교 사역은 자기 나라 국기 아래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로는, 바울은 자기 문화권으로 갔다는 점이다. 그가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그와 거리가 없었다. 기독교는 19세기 동안 동서를 멀리 떼어 놓았다. 확실히 동서는 서로 떨어져 있고 선교사들은 다양한 습관, 생활방식, 소비 규모, 사상, 전통에 있어서 큰 간격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우리들처럼 그런 간격을 뛰어 넘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자기와 똑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많은 집단들에게 동료 시민으로 갔다. 하나로 통일된 제국 안에서는 오늘날의 선교사들이 직면하는 문제점들, 즉 자립 문제, 선교사와 자국 교회와의 관계, 선교자금의 사용 등의 문제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시민 선교사는 이러한 문제가 아닌 그들 자체의 어려움을 안고 사역을 하였다.

-스피어(R. E. Speer)

 


이 그러하며, 그의 모습은 2,000년간 점점 더 높이 우뚝 세워지고 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그의 선교적 열심의 뿌리가 되는 원인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이론도 있다.

맥기퍼트(McGiffert) 교수는 다음과 같이 썼다.

“회심 전부터 바울은 랍비뿐만 아니라 선교사가 되기를 소원했다. 그것은 자기생애를 참된 의를 전파하는 데 헌신하기 위해서였으며, 의가 발전되는 것을 막는 모든 것과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율법을 실천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모든 것을 타도하기 위해서였다“(행 22:3/빌 3:5-6).

그의 회심은 이러한 선교적 열정을 없애기보다는 그 열정을 더욱 강화시키고 그 방향을 바꾸었을 뿐이다.

첫 번째 기독교 선교사인 바울의 가르침과 모범은 모든 세대를 위한 성공적인 사역의 원리를 세워 놓았다. 그는 세상의 어느 선교사보다도 하나님의 패턴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왕국의 이익을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되고 독특한 자질을 갖추고 있던 그리스도의 도구였다. 다른 선교사들은 한 대륙에 복음의 문을 열어 놓았으나, 바울은 온 세상에 열어 놓았다.

 

소명

 

그의 소명은 매우 독특하고 분명한 것이어서 잘못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이에 대해 증거하였다.

“주께서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행 22:21).

이 악명높은 핍박자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맞아 들인다는 것이 아나니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두려운 일이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16).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가 평생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받아야 할 훈련에 대해 덧붙여 말씀하셨다.

그의 소명이 그를 선교사로 만든 것이 아닌 반면에, 소명은 그의 선교적 열정의 방향을 명확하게 해 주었다. 그는 이제 바리새인의 선교사가 아닌 그리스도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충성은 율법이 아닌 자기를 사로잡으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바쳐졌다. 점차적으로 그는 이 부르심이 자기 삶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목적이 아니라 자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의 절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획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행 13:46/ 18:6/ 22:18-21/ 26:16-18).

 

훈련

 

바울은 종교적, 지적으로 우월한 독특한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가장 쓸모있게 사용받기 위해서는, 그 영혼의 열심이 꺼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 불타오르는 영혼이 단련을 받아야만 했다. 이것을 위해 물러나 고독한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그의 생애에 변혁이 급작스럽고 완벽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의 사고를 재조정하고 신학을 정립할 시간이 필요했다.

스피어(Robert E. Speer)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역은 스릴이 있는 것이었으나 그는 새로운 사역 가운데 즉시 뛰어들지 않았다. 그는 물러나 오랫동안 조용히 묵상 가운데 있었다. 핍박의 뜨거운 흥분이 그가 냉정을 잃도록 하지는 못했고, 그는 지혜롭고 고요한 하나님의 영에 인도되어 물러가 내적인 준비를 하였다. 따라서 그가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돌아왔을 때에는 남의 것을 빌려온 것이 아닌, 독창적이고, 하나님께 받은 신선한 자기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다.“

영적 학교에서의 이 특별 훈련은 아라비아에서 지낸 3년 내지는 그 이상의 기간이었다(갈 1:17-18). 무한히 한적한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복음을 가지고 나갈 자기 사자를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다. 선교사 후보자들에게는 항상 그들의 조급한 열정에는 지루한 예비 훈련을 단축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그러나 초기의 훈련을 충성스럽게 받을 때에 더 큰 기회에의 엄숙한 위임을 위해 준비가 될 수 있다. 바울은 사역을 위해 더 넓은 지역으로 떠나기에 앞서 자기 고향 다소에 가서 자신이 사역자임을 입증했다(행 11:25).

 

야망

 

바울이 영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불가능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사정없이 자신을 몰아치는 일들이 있었다. 그는 중생하기 전의 야망과는 정반대가 되는 이 새로운 야심에 대해 세 번 이야기하고 있다. 예전의 그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그리스도인들을 근절시키고 교회의 영향력을 뿌리뽑으려는 것이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며“(행 9:1).

이 야심은 그가 하늘의 환상에 사로잡히기까지, 새로운 정복지로 그를 몰아 넣었다.

그의 야심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야심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의 왕국의 발전속에서 새로운 중심을 찾았다. 바울은 항상 현상 유지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힘을 다하여 새로운 목표를 향해 분투하였다. 이제 그는 자기가 근절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영적 축복을 가져다 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라“(롬 1:11)고 그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야심의 특징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어떠한 고난이나 사역도 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그는 이 야심을 갖고 충성스럽게 사역하였다.

그의 야심은 행동면에서 볼 때 냉정하고 근면하고 자립적이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살전 4:11, 12).

그는 항상 자기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하였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님의 재림을 바라는 것이 생업의 의무를 면제해 주거나 부적당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훈계하였다. 그는 경건한 게으름뱅이가 될 시간이 없었다.

그의 야심을 업적면에서 여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5:20, 21).

바울은 예민한 영적 폐쇄 공포증으로 고통받았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는 전진을 향한 만족할 줄 모르는 정열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울타리 안에 있고자 하지 않았다. 그가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행 22:21)하신 부르심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럴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 임무에 충실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국경선을 모르는 세계 시민으로서 끝없는 비젼을 가지고 나라들을 넘나들었다. 필요를 채워주어야겠다는 것이 그에게는 억제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고린도로, 로마로, 스페인(서바나)으로 가장 멀리 있는 로마 제국의 경계와 알려진 세계를 다 돌아다녔다.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서바나로 가리라“(롬 15:24, 28).

이것은 다른데서와 마찬가지로 오늘 세대의 교회에 대한 본이 된다. 오늘날의 교회는 마땅히 모든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 복음을 전할 야심을 가져야 한다. 이 세상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케 하는 것만큼 고상한 목표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와 유사한 야심이 모든 위대한 선교사의 상상과 마음을 불태워 왔다.

 


무언가 숨겨져 있다. 가서 그것을 찾으라.

멀리 가서 찾아 보라.

무엇인가 잃어 버려진 그 먼 곳에 가서.

잃어버린 바 되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가라!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 백성이 준비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감추어 놓으셨으나

그 때에 주께서 나를 전파자로 택하셨고

나는 그것을 찾았노라.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것이라.

-키플링(Kipling)

 


바울의 야심은 본질적으로 헌신적인 것이었으며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그는 그 자신이 사욕이 없는 사랑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 대한 가장 좋은 실례였다. 바울의 전통을 따라서 헨리 마틴(Henry Martyn)은 “탐욕이나 야심이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의 세계를 위해 온전한 번제로 드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우기를“ 열망한다고 말했다.

 

동기

 

이러한 불타오르는 야심은 오직 가장 강력한 동기에 의해 점화될 수 있었는데, 바울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그의 선교적 노력을 자극시켰던 요소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가장 강한 요소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끄는 힘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다메섹 도상에서 그의 반항적인 마음을 깨뜨려 사로잡으셨던 사랑이 그가 육체밖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그 때까지 그를 사로잡으셨다. 바로 이것이 그로 비할데 없는 수고와 고난을 감당하도록 용기를 북돋우었다.

그리고 또한 피할 수 없는 의무감도 있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바울은 자기가 발견한 것을 나누고자 하는 진정한 선교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두를 포용하는 의무감이 모든 인종적인 장애와 문화적 차이를 뛰어 넘었다. 그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의 목적 안에 포함이 되며 모두가 구원을 받을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느꼈다. 사회적 지위, 부와 빈곤, 문명이 그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는 그의 빚을 갚아야만 했다.

 

유리한 입장

 

헬라 도시에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살고 있는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세계 선교사로서 독특한 조건을 갖추었다. 그는 로마인의 실용성, 헬라인의 융통성, 히브리인의 강인성 등 세 민족의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로마 시민권은 오늘날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당하는 압력을 면제시켜 주었다. 로마시민에게는 외국땅 같은 것이 없었다. 치외법권이라는 곤란한 문제가 결코 제기되지 않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그의 나라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제국은 모두 같은 문화권이었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극복해야 할 장애는 없었다. 기록되어 있는 세번의 경우에 그는 자기의 로마 시민권에 대해 하나님을 송축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행 16:37/25:10/27:24).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바울은 유대인의 복잡한 입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주의자들을 그들의 경전을 가지고 논박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당시 가장 유명한 랍비인 “가말리엘 문하“(행 22:3)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율법 지식과 학문을 논란할 수 없었다. 그는 또한 그 당시의 철학 체계에도 능통하였기 때문에 그 추종자들을 그들의 이론에 근거하여 논박할 수 있었다.

그가 소년 시절에 배운 장막을 만드는 일이 생계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새로 태어난 교회들에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게 권면하고 책망까지도 할 수 있었다. 즉 종종 재정 원조에서 오게 되는 부담이 없었던 것이다.

 

불리한 조건들

 

이러한 장점들이 그의 선교 사역에 크게 도움이 되었던 반면에, 바울은 몇 가지 심한 핸디캡으로 괴로워하였다. 그는 자신과 때로는 동역자들을 위해, 종종 밤낮으로 일해야 했다. 놀라운 일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가 효과적인 선교 사역을 위한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주 설교할 마땅한 장소조차도 없었다. 말썽꾸러기로 회당에서 바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는 동역자들의 배반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바나바, 후메내오, 빌레도, 부겔로, 허모게네 등의 일이다. 쓰디쓴 경험을 통해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느니라“(딤후 1:15).

그는 그를 따라다니며 사역을 방해하려고 하는 거짓 선생들과 율법가들의 괴롭힘을 당했다. 그들은 그의 권위를 업신여기며, 그의 사도직에 도전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택하심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 방어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그의 회심자들이 항상 견고했던 것은 아니었다. 육체적인 고난은 일상적인 경험처럼 보였다. 지치고 고통을 당하고 배고프고 목마르며 춥고 벌거벗으며 매를 맞고 옥에 갇히며 돌에 맞고 배가 파선을 당하며 땅에서와 바다에서 위험을 당하는 것은 선교사로서의 체험의 한 부분이었다(고후 11:23-28).

이러한 곤경과 고난에 대한 그의 태도는 본보기가 된다. 그는 수동적으로 그것들을 견디어 낸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그것들을 사랑하였다(고후 11:30). 그는 그것들을 순전한 악으로 생각하는 대신에, 겸손케 하는 도구로 여겼다(고후 12:7). 그것들은 그에게 은혜의 통로였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제거하시기보다는, 그것들을 슬기롭게 견디어 내기에 충분한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고후 12:9). 그것들조차도 자랑과 기쁨의 제목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인도하심

 

그가 회심하는 즉시, 하나님의 선교 사역으로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사역은 그가 안디옥 교회에서 여러 해 동안 사역을 한 후에야 시작되었다. 그 교회는 여러 인종의 지도자가 있는 세계주의적인 교회였다. 지도자들이 기도하고 금식하는 동안 성령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 13:2).

바울은 자기가 받은 부르심이 그가 협력하고 있는 교회에 확인되고, 그들이 그 부르심을 확인해 줄 때까지 선교 사역을 시작하지 않았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3).

교회 지도자들의 협조적인 지도자 또한 바울이 받은 개인적인 인도하심을 확인시켜 주었다. 안디옥 교회는 이와 같이 다른 교회들이 다투어 따를만한 좋은 본을 보여 주었다. 선교사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그가 협력하고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인준을 받는다는 것은 교회와 선교사 모두에게 대단한 의미를 주는 것이다.

바울이 교회가 파송한 자기보다 더 경험이 많은 동역자와 함께 얼마동안 동역했다는 것은 의미깊은 일이다. 제 1차 전도 여행 때뿐만 아니라 제 2차 전도 여행 때에도 얼마동안 함께 동역했다. 위로의 아들인 바나바, 선배 선교사 밑에서 함께 일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의심할 바 없이 이 경건한 사람은 이 훈련 기간 동안 바울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다. 그의 후배가 급속히 성장하여 마침내는 팀의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되었을 때 바나바가 그를 질투하였다는 흔적을 찾아 볼 수있다.

마게도니아에서 소명받은 경험(행 16:6-10)은 최초의 선교적 소명을 받은 예가 아니고, 이미 최초의 소명에 응답한 사람을 특정한 사역의 분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사역의 시기와 장소를 선택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아시아와 비두니아에는 나중에 말씀이 전파되었다. 이 시기에는 메시지가 서방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이었다. 유럽은 추수를 위해 무르익어 있었던 것이다. 영적으로 민감한 바울은 성령의 막으심에 순종하여, 자기 뜻대로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드로아에 머물러 기도 가운데 그의 동료 사역자와 함께 의논하며 하나님의 지리적인 뜻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먼 미래의 결과가 그의 순종에 달려 있었다.

바울이 지상 명령(마 28:19-20)에 순종한 후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았다. 이것이 그를 인도해 주는 유일한 한 가지 요소였다. 그는 첫 번째 임무를 끝마치고 아직 복음에 접한 일이 없는 광대한 지역을 향해 나아갔다. 환상을 본 후에도 그는 동료들과 함께 그가 받은 인도하심을 점검해 보았으며 그 때의 모두는 성령의 역사로 한 마음이 되었다.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라.“

 

이와 같이 그는 마게도니아로 출발하기 전에, 그 환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며 성령의 증거가 있으며, 형제들에게 동의를 받으며, 그의 판단에도 인정이 가는가를 확신하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이렇게 재확인하였기 때문에 그는 대적당하거나 채찍맞아 등에 피를 흘리며 빌립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방법

 

바울이 마게도니아 사람의 부름에 응답하여 유럽에 들어갔을 때, 이 세상을 포위하게 될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에 그가 택하였던 방법들은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 그 이후 수 세기 동안 비슷한 결과를 맺어 왔다.

사도 행전은 최초의 선교 입문서로 선교의 역사와 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사도행전에는 전형적인 설교의 장면과 사건들이 풍부하게 들어 있으며, 모든 세대를 위한 선교 사역의 훌륭한 지침을 제공해 주고 있다. 실패도 있는 그대로 기록하면서 원리와 방법을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세계 복음화에 흔히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논평이다. 이 책은 의미깊게도 평균 한 세대인 30년 간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새 시대 여명기에 불쌍할 정도로 약한 일군의 남녀들을 통해 그들의 일생 동안 어떠한 일들이 성취될 수 있었는가를 하나님께서 보여 주고 계시다. 이 영감된 기록과 오늘날의 선교 현실을 비교해 볼 때, 놀랍게도 모든 종족가운데 부딪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전면적인 전략에 그의 책략을 택했다. 그의 행동을 살펴 볼 때 그는 점차적으로 대도시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문화와 관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도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장 유력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계속적인 교회 성장을 확보했다. 그는 신자 각자가 자신을 복음 전파의 중심으로 생각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는 집중적인 개인 전도와 더불어 멀리 순회하며 복음 전도에 힘썼으며, 언제나 새 지역이 주님의 주권 하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롬 15:19, 20). 그는 그리스도 이전에 세계를 저주했던 세 가지가 그리스도안에서 제하여졌다는 것을 전파했다(갈 3:28). 복음은 모든 종족과 계급,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위한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전 9:22)는 말은 결코 헛된 자랑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복음 전파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비젼은 그 자신이 세계를 복음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도구가 되어 세운 교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 일을 성취시키시는 데 있었다.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그는 진리에 응답하는 남자와 여자들을 발견했다. 그들의 신앙 고백 위에, 그는 단순하고 융통성있는 조직을 가지고 있는 자립 공동 사회를 세웠다(행 14:23/ 딛 1:5). 그는 복음의 씨만 뿌리고 떠나 버리는 것에 만족치 않고, 복음의 가치를 들고 나갈 영구적인 기관을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 목표를 위해 아직은 초기 상태인 하나님의 진리를 조심스레 소개했다. 일단 이 교회들이 세워지면, 그는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거나, 돌아가서 방문을 하거나, 동료 사역자를 보내어 그들의 증거를 도움으로써 계속적인 교제를 유지해 나갔다. 그의 생명이 그들의 생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한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일이 있다.

“너희가 주 안에서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 3:8).

그의 사랑의 열정이 이와 같았다.

그는 죄의 보편성과 그에 대한 십자가의 충족성에 관한 보편적인 복음을 전했다(롬 1:3-5/3:29-30/5:7-8). 그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절대적인 주인이 되신다는 것과 그가 확실히 세상을 승리하실 것이라는 것을 역설하였다(고전 1:24/빌 2:9-11).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회심한 직후에 그들에게 준 그의 폭넓은 교훈은 인상적이다. 그가 불과 한 달도 못되는 짧은 기간 동안 함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가 다룬 교리의 기초는 놀라고도 남음이 있다.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들의 행실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는 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자기보다 자질이 덜 갖추어진 사람들에게 책임을 위임하는 데 대가였다. 다른 이들을 훈련시켜 그들에게 일을 맡기곤 했다. 그의 동료 사역자들은 종종 다른 민족, 다른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들이 기꺼이 돕고자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그러한 기대가 그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격려가 되었다. 그는 장래성있는 청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가르쳐서, 그들을 책임감있는 위치에 세웠다(행 16:1-4/엡 6:21-22/빌 4:3).

그의 깊은 우정은 동료 사역자들을 그에게 묶어 놓았고, 그가 도울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들은 그들의 젊음과 경험의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들을 용기있게 직시할 수 있었다. 그는 재정적인 동기를 주지 않았고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일반적으로 후원을 받지 않은 반면에, 후한 대접은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이러한 유리한 위치에서 그는 자유롭게 희생적인 헌금을 강하게 권면할 수 있었다. 그는 그의 회심자들에게 자신의 것과 같은 기준을 세웠다.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며, 얼마나 훌륭한 선교사인가! 파라(Farrar) 학장은 바울의 자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바울은 베드로처럼 정력적이고 요한처럼 명상적이었다. 바울, 그는 이기심이 전혀없는 영웅, 바울, 종교적 자유의 위대한 옹호자, 바울, 크리소스톰(Chrysostom)보다 더 위대한 설교자, 사비에르(Xavier)보다 더 위대한 선교사, 루터(Luther)보다 더 위대한 개혁자이며,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보다 더 위대한 신학자, 바울, 그는 이방인을 위한 영감받은 사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오스왈드 샌더스 / 충분히 훈련시키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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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출발은 기도하는 것이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지금은 많이 부르지 않지만 예전에 참 많이도 부르며 위로를 얻었던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복음 찬송이다.

이 찬송의 가사 내용에서처럼 때때로 힘들어 지쳐 있을 때, 그래서 기도할 힘조차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을 때,

다른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큰 위로와 힘이 된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어려운 일들을 해쳐 나갈 용기를 얻는다. “내가 형제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매님을 위해 새벽마다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어요.”

이런 말 한마디는 듣는 자로 하여금 영적 기력을 회복하게 하는 보약이 된다.

 

그래서 사도바울 선생님은 핍박과 박해 가운데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가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에베소서1:16, 빌립보서1:3,9, 골로새서1:3, 데살로니가전서1:2)는 사실을 늘 확인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신앙 생활의 현장 속에서 믿음을 지키기에 버거워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을

목자의 심정으로 위로하고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한 사도로서의 배려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도바울 선생님은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고만 하시지 않고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에베소서6:19)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요청하셨다.

이것은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사도 바울의 요청인 것이다.

이처럼 기도는 “기도로 교통합시다!”라고 우리가 서로 인사하듯이 서로를 향한 위대한 영적인 교제의 고속도로를 여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를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내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해 주는 것을

성경에서는 ‘도고’(禱告), 영어로는 ‘Intercession’(NIV)라고 부른다.

이 ‘도고’라는 기도 용어는 사도바울 선생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인 디모데전서에 등장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2:1)

그런데 요즘에는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타자를 위한 모든 기도를 ‘중보기도’라는 용어로 통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어서 그렇지 ‘중보기도’라는

이 용어는 기도신학적으로나, 중보사역에 대한 기독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신학적인 혼란을 야기 시킬 수 있어서 좀 더 성경적으로 용어정리를 제대로 하고 사용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용어이다.

 

어쨌든지 그것이 ‘도고’이든 ‘중보기도’이든 간에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한 기도의 요청이다.

‘리차드 포스터’는 그가 쓴 ‘기도’라는 책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중보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기도하게 된다.

기도야 말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 또한 “자기를 위한 간구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로 기도를 바꾸는 것은

우리의 무게 중심을 우리 자신의 필요에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관심사로 옮기는 것이다.

그것은 이기심이 없는 기도이며, 심지어는 자신을 내어 주는 기도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계속적인 사역 가운데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라고 했다. 그의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중보기도)에 대한 이 표현은 공감을 갖기에 충분하다고 생각 한다.

그가 말한 ‘하나님 나라의 계속적인 사역’을 다르게 표현 한다면 그것은 그냥 ‘선교’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선교의 계속적인 사역 가운데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고쳐서 직역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선교의 출발은 기도하는 것이다. 영혼 구원을 위해 간절히 그리고 뜨겁게 기도하는 것이다.  
출처 : 이동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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