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거 스 틴

 

중세 교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어거스틴은 354년 누미디아(오늘날의 알제리아)의 타가스테(Tagaste) 에서 로마화된 베르베르(Berber) 가문의 아프리카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그는 세례 지원자였고 진지한 어머니 모니카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배웠으나 그의 세례는 그의 오랜 종교적, 철학적 순례에 의해 387년이 되어서야 순례를 그의 참회록에서 서술하였다.

그는 헬라어를 제외하고는 당대의 문학적 교육에 있어서 탁월하였고 칼타고에서 수사학을 강의하였다. 373년 키케로의 한 작품에 감동을 받아 그는 신적인 지혜를 사랑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성경의 잔인한 내용은 그에게 반감을 일으켰다. 그는 마니교의 추종자가 되었다. 마니교는 금욕주의와 그리스도를 향한 철저한 헌신을 고무시킨 이원론적 신화를 가진 종교였다. 그는 9년 동안 마니교를 고집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합리적 방법에 의해 진리를 논증하는 그 주장들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환멸을 느끼면서 어거스틴은 로마로 갔고 거기서 잠시 동안 어떤 확실한 것에 도달하기를 단념한 철학자들과 사귀었다. 그는 심지어 향락주의(Epicureanism)의 즐거움을 맛보려는 유혹도 받았다. 그러나 384년 그는 밀라노에서 제국의 수사학자로 임명을 받았고 암브로우스 주교의 영향과 신플라톤주의 사상아래 있게 되었다. 이 양자는 함께 그를 정통 신앙에서 소외시켰던 장애물의 뿌리를 침식하였다.

암브로우스로부터 그는 기독교가 웅변적일 수 있고 지적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구약성경의 어려운 이야기들이 풍유로서 취급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영적 완전성을 밝혔고 내적명상을 통한 통찰력을 추구하였다. 어거스틴은 항상 그의 마음을 빼앗았던 악의 원인이 마니교도들이 믿는 것처럼 그러한 세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의 부재에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육신과 세상”을 포기하라는 도전을 받았다. 그는 10년 이상 내연의 처와 살았으며(모니카를 기쁘게할 만한) 고상한 직분을 얻기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세상으로부터의 회심”에 대한 도전은 안토니와 빅토리누스(Victorinus)의 경우 같은 영웅적인 포기에 관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왔다.

 

결국 그가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로마서 13:13-14을 읽을 때 그 속박의 사슬을 끊어졌다.

세례에 앞서서 어거스틴은 카시키아쿰(Cassiciacum)으로 물러갔는데 그곳에서 그의 소수의 동료들은 기독교 철학자로서 그들의 훈련의 여가를 보냈다. 모니카 사후에 388년 아프리카로 돌아와서 그는 타가스테에 연구와 명상을 위한 수도원적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391년 그는 해안의 합포에서 사제직에로 강요받았고 396년에 그는 카톨릭 주교가 되었다. 여생을 보내는 동안 그는 설교자와 목회자, 성례전의 집례자, 재판관과 중재자, 자선 단체의 관재인과 조직가, 또한 카톨릭 정통 신앙의 지칠 줄 모르는 방어자요 다작의 저술가였다. 힙포의 반이교적 카톨릭 교도와 완고한 도나투스파는 급속히 그를 기독교적 신플라톤주의자의 자신 만만한 인본주의로부터 인간의 본성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보다 성경적이고 비관적인 견해에로 돌아서게 하였다. 참회록은 이러한 새 전망에서 나온 초기의 결실이었고 하나님의 도성은 보다 더 성숙한 결실이었다.

어거스틴은 그가 마니교도의 합리주의에 반대하면서 “이해하기 위하여 믿으라”는 그의 영향력 있는 원리를 발전시켰다. 그는 그 원리를 수많은 저작에서, 무엇보다도 그의 삼위일체론(The Trinity)에서 사용하였다. 도나투스파에 대항하여 그는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 즉, 신자와 불신자가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는 서로 섞여 있는 밭이라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가 성례의 최고 집례자이며 따라서 만일 합당치 않은 사람이 집례하는 경우라도 그것은 여전히 참된 성례라고 주장함으로써 도나투스파의 재세례를 철저히 반박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연합과 사라의 울 밖에 성례를 받는 자들이 남아 있는 한 그 성례는 아무런 유익도 전해주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또한 의견을 달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강제를 사랑의 교정 행위라고 정당화하였다.

약탈당한 로마로부터 피난해 온 펠라기우스파는 411년부터 어거스틴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는 켈레스티우스가 유아 세례(어거스틴은 유아세례가 평범한 관례가 되도록 도와 주었다)에 도전한 후에 그들을 공격하였다. 서방의 페라기우스파에 대한 정죄는 주로 어거스틴에 의해 주도된 아프리카의 압력의 결과로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그를 자극시켜서 부패와 죄책으로서의 타락 과 원칙에 대한 그의 교리를 더 발전시키게 했다. 또한 그들로 인해서 하나님께 돌아가는데 있어서 의지를 자유케 하는 은혜의 필요성, 예정과 “활정된 수의 택자”의 보존 같은 교리도 발전하였다.

 

어거스틴이 430년에 죽었을때 아리우스파 반달족 침입자들은 힙포를 포위하고 있었다. 붕괴되는 로마제국의 충격과 분열의 한가운데 어거스틴은 이겨 내기 어려운 악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견뎌 내야 한다고 가르쳤고 하늘의 도성의 평화를 구하라고 했다. 그는 라틴 기독교의 창조적 시대가 막을 내리는 시기에 살았고 중세와 종교개혁의 성직자들의 마음을 좌우하는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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