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에서귀감이 되는 주남선 목사님  


 

주남선 목사는 오직 한 길,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겸손하게 일하여 참된 목회자의 귀감이 되었다. 그의 생애 여정은 선한 목자의 길이었다. 그는 부드럽고 겸손한 목회자였지만 동시에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분명한 표준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기에 그는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기억되어야 할 목회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주남선 목사는 여러 면에서 우리의 흥미를 끌고 있다. 그는 기독교 전래 초기에 호주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권서인(勸書人)으로 부르는 매서 전도자로 일한 바 있다. 또 독립 운동에도 가담해 3·1 운동 당시 투옥을 마다하지 않았고, 일제 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해 5년 동안 옥중에서 지내기도 했다. 해방 후 김구 선생으로부터 제헌 국회에 출마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사명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그리고 독립 유공자로 포상하려 했을 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는 것은 국민의 당연한 도리인데 ‘그것이 어찌 상 받을 일이겠는가’라며 포상을 사양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주남선 목사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훌륭한 점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오직 한 길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겸손하게 일하고 참된 목회자의 귀감이 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의 인생 여정은 선한 목자의 길이었고, 세상적인 명예나 명망에는 무관심한 삶이었다. 그는 부드럽고 겸손한 목회자였지만 동시에 옳고 그름에 대해서 분명한 표준을 갖고 살았던, 이름 그대로 ‘선한 목자’였다. 따라서 그는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목회자로 남아 있다.

가정 배경과 입신 및 신앙 활동
주남선(朱南善) 목사는 1888년 9월 14일 경남 거창에서 한학자 주희현(朱喜賢)과 최두경(崔斗卿) 사이에서 3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어릴 때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으나 아버지는 그가 15세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효성이 지극해 거창 군수로부터 ‘효자상’을 받기도 했다. 17세까지 한학을 공부하며 농사를 돕던 그는 경남 안의에 있는 잠업 실습소를 수료하고, 한때 지방 관청에 등용돼 군수의 비서로 일한 적도 있다.
농업에 종사한 주남선은 1908년 친구 오형선(吳亨善), 조재룡(曺在龍)과 함께 호주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에 입신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지역 교회를 설립키로 하고 죽전(竹田)에 위치한 초가 한 채를 매입했는데, 이것이 1909년 10월 10일 설립한 거창교회였다. 1911년 12월에 호주 선교사 맹호은(Rev. F. J. L. Macrae)에게 학습을 받고, 이듬해 1912년 6월에 역시 맹호은에게 세례를 받았다. 1913년에 권서가 되어 1916년까지 활동했는데,1 그 기간 동안 약 6,000여 권의 성경을 거창군 일대에 반포했다.2 그 기간 중에도 거창교회 집사로 활동했다. 즉 1914년 4월에 집사로 임명되었는데 그것이 거창교회의 첫 집사 임명이었다. 그해 5월 10일에 의령 남병현 씨의 2녀인 남술남(南述藍)과 혼인했다.3 그는 집사로 임명 받은 후 교회에서 봉사하던 중에 복음을 더욱 깊이 깨닫기 위해 1917년 3월 진주에 있던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해 2년간 수학하고 1919년 졸업했다. 이 학교는 호주장로교 선교부가 주관하던 신학 교육 기관이었다. 그해 2월 28일에 오형선에 이어 거창교회 제2대 장로로 장립되었는데, 그때 그는 31세였다.

 

독립 운동에 참여함
그가 경남성경학원을 졸업하고 장로가 되던 해 3·1 운동이 일어났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도 남달리 깊었던 그는 지방의 독립 운동에도 가담했다. 즉 거창 지방에서 3월 20일 만세 운동이 있었는데 오형선, 고운서 등과 함께 독립 시위를 주도하면서 그때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주남선은 형인 남재(南宰)와 동생 남수(南守)와 함께 만세 운동에 가담했는데, 그 형제들은 그해 8월에 있었던 국권회복운동(國權恢復運動)에도 관여했다. 1919년 8월에 이덕생(李德生), 김태연(金泰淵), 오형선 등과 함께 독립군 자금과 의용병 모집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일로 주남선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에 1921년 12월 29일 부산감옥 진주분감(晋州分監)에서 가출옥했다.4
그의 출생과 성장기는 우리나라 역사의 변혁기였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기독교가 소개되는 역사의 길목에서 그는 당시 민족과 신앙의 강(江)에 두 다리를 적시고 한반도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가 독립 운동에 관여한 것은 기독교에 입신해 집사, 장로가 되고 경남성경학교를 수학한 후였는데, 그는 민족 공동체에 속한 일원으로서 독립 운동은 당연한 의무로 여겼고 그것이 신앙 운동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점은 독립 운동이나 민족 운동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한상동과 큰 차이를 보여 준다. 그는 출옥한 후 1922년에도 짧은 기간 동안 권서로 일한 것으로 보이지만, 성서공회 측 자료에 기록이 없다.

 

신사참배 반대와 해방 후 활동
주남선은 만세 운동과 군자금 및 의용병 모집 건으로 체포되기 전에 이미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재적하고 있었고 1930년에 평양신학교를 제25회로 졸업했다.5 그가 학교에 재적하고 있던 동안 거창교회 전도사(1922. 1~10), 거창 지방 권서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이홍식 목사 후임으로 거창교회 교역자로 부르심을 받고, 1930년 10월에 경남노회에서 목사 장립을 받았다. 1931년 2월에 거창교회 위임 목사가 되었을 때6 그는 43세였다.
주남선 목사의 목회 생활은 길지 못했다. 1935년부터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주 목사는 1938년 이래 거창 지방에서 신사 불참배 운동을 주도했다. 그 일로 그는 거창교회를 사면하게 되었다. 동 교회 제223회 당회록에 “회장이 부득이한 사졍에 의지하야 본교회 시무 사면을 졔출한고로 회중회에셔 쳐결하는 되로 하기로 가결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7 여기서 ‘부득이한 사정’이란 신사참배 반대로 인한 외부의 압력이었다. 주 목사는 1940년 7월 16일 소위 일제 검거 때 체포돼 약 5년간 투옥되었다가 1945년 8월 17일 해방과 함께 출옥했다. 그의 이름은 원래 주남고(朱南皐)였으나 옥중에서 주남선(朱南善)으로 개명했다.
주남선 목사는 거창교회 담임 목사로 다시 청빙을 받고 1945년 12월 거창으로 부임했다. 해방 후 경남 지방에서 교회 쇄신 재건 운동이 전개되었을 때도 그는 바른 교회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그는 한상동과 함께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개혁주의적 신학 교육 기관으로 고려신학교 설립에 동참했다. 주남선은 고려신학교 운영과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고려신학교의 험난한 항해에 설립자로서의 짐을 회피하지 않았다.

 

목회와 목회 활동
앞서 언급한 대로 주남선은 1908년 기독교에 입신한 후 권서인, 집사, 장로로 봉사했다. 그리고 1930년 6월 거창교회에 목사로 부임한 이후 1938년 말까지 약 7년과 1945년 말에서 1951년 3월까지 약 6년을 합해 총 13년 동안 거창교회에서 목회했다. 그동안 주 목사는 목회 활동을 통해서도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주남선 목사는 여러 일들에 관여했으나 자신은 오직 순전한 목회자이기를 원했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려는 욕심뿐이었다.

 

기도 생활
주남선 목사는 영적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기도는 그의 목회를 이끌어간 힘의 원천이었다. 영적 지도력과 감화력 그리고 신앙과 삶의 일치는 다른 목회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해 싸울 때는 특별히 인간적 공명심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한다. 기도를 통해 시련을 이겼고, 출옥한 후에 한 번도 자신의 신앙 투쟁을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1945년 12월 경남노회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단상에 오른 주 목사는 신사참배한 사람들을 향해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이 사람은 형무소에서 바깥 세상 일을 생각지 않고 주님만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6년이 지났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그 포용과 여유도 그의 신앙적 인격을 보여 주는 단면이었다.8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일제와 맞서 싸운 그 자체로 자기 의에 빠지지 않았다.
주 목사는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기도는 본래 아성을 세워 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아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는 목회 활동에서 기도 생활의 모범을 보였고, 새벽 2시에 교회에 가면 오전 9시나 10시까지 기도했다고 한다. 그를 가까이 대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 진실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배어 있었고 그가 앉았던 자리는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고 한다.9 그는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지 않고 실로 기도에 의지한 목회자였다.

설교
주남선 목사는 성경에 대해 부분과 전체가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과 무오성 그리고 최종적 권위를 확신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이고 전폭적인 순종을 생활화했다. 그런 신앙이 신사참배에 대항했던 힘이었고, 목회와 설교의 바탕이었다. 그에게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성경 전부’(tota scriptura)였다.
그의 설교는 요란하거나 잡다하지 않았고 오직 성경을 ‘단순하게’ 가르치려고 했다. 구변이 능하지 않았고 인간적 기교도 없었다는 점에서 ‘평범한 설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의 설교는 자신의 신앙적 삶에 근거한 진실한 것이었기에 많은 은혜를 끼쳤다고 한다. 한때 거창교회에서 함께 섬겼던 전성도 목사는 주 목사에 대해 “생활로 모범을 보여 주는 무언의 설교자”라고 평했다.10 그의 설교는 웅변적이지 않고 열변도 아니며 단순하고 조용한 선포였다.11 그저 자신이 믿고 깨달으며, 체험한 바를 전하려 했다. 오병세 박사는 주 목사의 설교에 대해 “그의 설교에 많은 사투리가 섞여 나오고 웅변도 아니었으나, 한 가지 특징이 있고 무기가 있었으니 곧 진실이었다. 그에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 등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어른에게 시원스럽다든지, 훤하다는 것은 없어도 참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있었다”12고 회상했다.

 

목회 일반
주남선 목사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따뜻한 인간미를 지녔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될 때 한 치의 타협도 없는 외유내강한 사람이었다.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현실 초월적인 도량과 신앙적 인격을 겸비했다. 따라서 그의 삶의 여정이 목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그는 목회 활동에서 심방을 중시했다. 1946년 8월 당시 거창교회의 주일 평균 출석수는 270명이었는데,13 그는 성도들의 가정을 알뜰하게 보살피고 성도들의 가정 문제를 자신의 일처럼 해결하려 힘썼다. 어느 해 여름 장맛비가 심하게 내려 수해가 나고 집이 침수되는 등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한밤중에 등불을 들고 성도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위험에서 구했다고 한다. 자녀 없이 살던 한 노파가 친정에 가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사 세 분과 함께 먼 길을 찾아가 손수 장례를 치러 주고 오기도 했다고 한다.14
6·25 동란이 발발했을 때 자신의 생명은 아랑곳없이 피난을 가지 않고 교회를 지키며 성도들을 돌보았다. 박손혁 목사는 주남선 목사의 장례식에서 “1950년 6월 25일 사변이 발생하자 일주일간 금식 기도를 드린 후 피난을 단념하시고 동역자들을 역방(歷訪)하시면서 교회와 양떼를 사수하기를 권장하시며, 폭탄과 총탄이 비오듯 하는 때라도 아직 남아 있는 교인이 있지나 않나 하여 집집이 찾아다니셨다”고 추도했다. 또 그는 이와 같은 성도들의 심방을 위해 “8월 29일 함양 지방으로 순회하시던 중에 개평교회에서 복음 진리를 힘써 증거하시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혀 구금을 당하셨지만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놓임을 받으셨다”고 일화를 소개했다.15 이처럼 그는 성도들을 보살피고 교회 일에 관심이 많았던 자상한 영적 아버지였다.
그는 공사석에서 남을 비방하거나 헐뜯는 일이 없었고, 자신과 생각을 달리한다고 남을 비방하거나 험담하지도 않는 성숙한 신앙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상한 아버지같이 교회를 돌보고 치리했다. 평소 한복을 즐겨 입었던 그는 선비적 자태로 교회를 섬겼다.

 

목회자적 신앙과 인격
주남선 목사의 생애를 살펴볼 때 그의 삶의 태도, 신앙적 면모, 인격 등을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주 목사는 무명(無名)에의 의지로 산 사람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기에 자신의 명예나 영광에 관심이 없었다. 자신을 위해 사진 한 장, 글 한 편 남기기를 원치 않았다. 그 약한 몸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해 숱한 고초를 겪고도 해방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후유증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될까 봐 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지요” 혹은 “나 같은 죄인이 그런 귀한 체험을 하였지요”라고 말했는데, 이처럼 자신의 이름을 내고 업적을 드러내고자 하는 일이 없었던 사람이다.
둘째, 주 목사는 건실한 교회 건설자였다. 그의 생애에서 궁극적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다. 신사참배 반대,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 고려신학교 설립, 목회 활동 등 모든 것은 한국 교회를 정화하고 바로 세우려는 일념에서 행한 일이었다. 그의 노력은 결국 하나님의 교회 건설의 일환이었다.
셋째, 역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분명한 확신의 소유자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대해 확신을 갖고 살았던 사람이다.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겸손히 의지하는 자에게 승리를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고 신실하게 살고 가르치며 실천했다.
거창 지방의 불신자들에게도 존경과 신뢰를 받았던 주남선 목사의 영적 지도력, 신앙적 인격, 겸손하고 자상한 성품,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의 유혹에서 자유했던 분명한 목회자적 철학 등은 오늘날 목회자들이 본받아야 모범이 되고 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목사다운 목사’라고 회상한다. 비록 좋은 목사에 대한 기준이나 표준은 다를 수 있어도, 자신의 것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며 겸손히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선한 목회자 상은 우리 시대의 귀감이 되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으로 인해 어둠의 세월을 보냈던 중세에 나온 유명한 경구가 더욱 마음 깊이 다가온다. “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이다”(Vita clerici est evangelium laice).
불행하게도 주남선 목사의 봉사의 날은 길지 못했다. 민족상잔의 가슴 저미는 전화(戰禍)의 와중인 1951년 3월 23일(금요일) 오후 6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였다. 그는 생시에 끝까지 거절했으나 사후 1977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고, 1996년에 대전의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됐다. 하지만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 말씀의 겸손한 사역자였다는 사실이다.

주석
1) 「대한성서공회사 Ⅱ」(유대영,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 1994), p.408.
2) 위의 책 p.593. 이 책에 주남선의 권서 활동에 대한 켈리(J. T. Kelly)의 1915년 기록이 소개돼 있다. 장희근은 주남선이 거창 지방 권서인으로 5년간 활동한 것 외에 진주 지방에서 권서인으로 8년간 일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근거는 없는 상태다. 「한국장로교회사」(장희근, 아성출판사, 1970), p.285.
3) 후일 슬하에 경중(璟重), 경도(璟道), 경효(璟孝), 경세(璟世) 4남과 경순(璟順), 경은(璟恩) 2녀를 두었다. 부인은 1973년 7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4) 釜山監獄晋州分監長 朝鮮總督府典獄補 布村茂隆명의의 大正 10년 12월 29일자로 발행된 <假出獄證票>에 근거한다. 「해와 같이 빛나리」(심군식), p.304 참고.
5) 「장로교신학대학 70년사」, p.193.

 

- 출처 : 두란노 빛과 소금(http://www.duranno.com/sl/detail.asp?CTS_ID=36040)

[출처] -이달의 인물- 주남선 ' 한국 교회사에서 찾는 좋은 목사님'|작성자 더세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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