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로교회의 개척자 서상륜(徐相崙) 피택장로
 

 


  하나님은 우리나라 복음화를 위해 두 번째 나라로 스코틀랜드 선교사를 동원하셨다. 이에 동역자로 활약하신 분이 서상륜(徐相崙)이었다. 그는 기독교인이자 성경 번역의 협력자였으며, 메서인 권서인으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피택 장로가 된 인물이다.


   1848년 7월 26일 평북 의주에서 양반의 가문에서 출생했으나 13세 때 조실부모하고 만주에서 홍삼장사를 하였다. 31세 때 봉천 영구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 장티프스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의 메킨타이어 선교사(Mc Intyre)를 만나 구호를 받은 후 완쾌되었으며 이 기간 복음을 전해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후 로스 (J.Ross)목사를 만났는데 두 사람은 첫 눈에 의기 투합하여 서상륜을 어학선생으로 삼았으며 로스는 서상륜에게 믿음을 가르치고 1897년 세례를 주어 최초의 기독교인이 되게 하였다.


   세례를 받은 서상륜은 중생의 체험에 감격하였고 로스목사의 권유로 성경번역과 출판 사업에 참여 하였다.


   그는 고향 친구인 이성하(李成夏) 이응찬(李應贊) 백홍준(白鴻俊)과 함께 신약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1882년 가을 쪽복음 형태로 <예수 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출간하였다. 이어 1884년에는 <예수셩교젼셔 마태복음>과 <말코복음>을 봉천(심양)의 문광서원에서 발행하였고 1887년에는 <로스역셩셔> (Ross Version )라 불리우는 <예슈성교젼셔>를 간행하였는바<누가복음젼셔>는 장로교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입국하기 2년 전에 이미 출판하였다.


   이 성경들을 번역한 교재는 중국어 성경이었고 성경을 출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국내에 반포하는 일을 시도하였다. 1883년 번역 된 성경을 가지고 입국하려다 성서가 금서로 규정되어있던 상황에서 성서반입이 중국관원에 적발되어 의주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의주부 집사요 교인이었던 김효순(金孝順)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출옥하였다. 서 장로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으나 성서와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아시고 성경 10권을 돌려받아 밤중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귀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의주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동생 경도와 함께 고향을 떠나 삼촌이 살던 황해로 장여군 솔래(松川)마을로 이주 하였다. 이때는 1884년 봄이었다. 한국 최초의 의료선교사 알렌이 입국하게 5개월 전이요 18885년 4월에 내한한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입국하기 1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이곳에 정착하여 교회를 세우고 전도활동을 시작하여 한국장로교회의 최초의 교회로 자리 매김을 하였다. 이리하여 1887년 서울 새문안 교회가 설립될 때 교인 14명 중 13명이 서상륜의 전도로 교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몇 달 뒤 로스 목사가 당시 인천세관 고문관으로 일하던 뮐렌도르프를 통하여 보내준 6천권의 성서를 받았으며 만주에서 귀국한 이성하와 함께 힘을 다해 복음과 성경을 전했다.


   서상륜 장로는 백홍준과 함께 최초로 장로 피택을 받았다. 그는 피택된 장로마저 사양하고 평신도로 복음 전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1891년 게일, 마펫 등 선교사들이 서울을 떠나 의주, 심양, 강계, 함흥 등지의 오지 여행을 하게 되었을 때 길 안내자로 동행하였으며 단독으로 여행할 때는 권서인 답게 휴대품 중에 반드시 쪽복음, 금계람, 감자씨 등을 휴대하였으며 그의 전도로 의주, 선천, 평양을 비롯하여 장연, 서울, 경기도 일원에 복음의 씨를 뿌려 교회가 설립되자 언더우드는 자신이 “복음의 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거두러 왔다”고 말할 정도였다. 만년에는 솔래 교회로 내려가 전도하다가 1926년 1월 별세하였고 장로교 총회장으로 엄수되었다. 1936년 9월 제 25회 장로회 총회에서 기념 사업비 건립이 결정되어 1938년 그의 묘지에 기념비가 세워져 그의 전도사업의 공로를 기리게 되었다.(2004. 2. 14. 한국장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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