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교회 / 조덕삼장로와 이자익목사 이야기
이자익은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탑정리 출신으로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세살때 아버님을 잃고 여섯살때에는 어머님도 잃었다.
친척집에서 늘 쇠꼴베러 나가는 삶이 싫어 열 두 살때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배를 타고 하동을 거쳐 순천에 이르고 금산까지 오게 된다.
금산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라는 것을 이자익도 듣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금산에서 거상으로 유명하면서도 넓은 땅을 가진 조덕삼 댁을 우연히 찾게 되는데
그 곳에서 자신을 마부로 받아주어 생활하게 되었다.
이자익은 머슴으로서의 삶이지만 집안 아이들이 한문공부하는 것을 들으며 천자문을 익힐정도로 명석했다고 한다.
이런 때에 테이트의 방문으로 조덕삼과 이자익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금산교회를 함께 섬기게 된다.
'한명은 주인'이라는 이름으로, '한명은 머슴'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바로 '유명한 일화인 금산교회 장로선출' 이 있게 된다.
교회의 장로를 세우는 선거였다.
조덕삼은 김제에서 두번째라면 서러울만큼의 부자였고 금산교회 운영에도 많은 후원을 하고 있었다.
조덕삼은 이자익보다도 15살이나 많았고
금산교회의 설립자였으며 인격적이나 신앙적으로도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장로로 선출된 사람은 주인 조덕삼이 아니라 마부 이자익이 된 것이다.
아마 이 결과에 조덕삼과 이자익도 놀랐겠지만 선출에 참가한 선교사들도 놀랐다.
갑오년(1894)에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강한 신분제를 유지하고 있던 우리나라에서 주인이 떨어지고 종이 장로가 되었으니
"이를 어쩐다?" 걱정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또 한 번 일어났다.
그 때 조덕삼이 선교사에게 발언권을 얻어 이렇게 말했다.
"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
어떻게 이런 표현이 나올 수 있을까?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충격적인 발언이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행동인 것이다.
집에서는 주인과 종으로 교회에서는 교회를 책임지고 나아가는
장로와 평신도로서 반대되는 모습을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한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이자익도 훌륭한 분이지만 나는 조덕삼도 참 훌륭하고 멋진 분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신분문제로 서울 승동교회는 아픔( 양반들이 북촌 안동교회를 세워 분리해 나감 )을 겪기도 했고
여전히 신분제, 권위적인 유습들로 인해 교회내의 차별이 여전하던 때였다.
그런데 조덕삼은 15살이나 자기보다 어린 이자익을 장로로 잘 섬기는 것은 물론
후일 이자익의 목회를 위해 평양신학교에 보내고 학비 전액을 지원해주기까지 한다.
그리고 훗날 본인이 장로가 되었을때
자신의 종 마부 출신 이자익을 목사로 초빙해
금산교회의 담임목사와 장로로 함께 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한 없이 다시 되새기도 또 되새겨도 지나치지 않는 삶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이자익목사는 시골 금산교회 목회자이면서도 한국교회 총회장을 3번이나 역임했다.
이자익목사님 같이 그렇게 한국교회 총회장을 3번이나 하신 분은 다시는 없었다.
혹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만약 이자익 목사님이 조금만 더 오래 사셨다면 한국교회의 분열은 없을 수도 있었다.
그 만큼 그 분이 한국교회에 미치는 영향과 위치는 높았던 것이다.
(김제 금산교회 종탑)
(금산교회 입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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