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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교회사] 초기 종교 개혁 운동

 

 

 

 

1.​중세기 종교 개혁 운동의 선봉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1). 정치적 배경

14세기에 민족주의가 일어나자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지역은 로마 교황청의 장기간 통제에 대해 불만이 높아갔고, 국왕과 교황청 간의 권력 다툼은 갈수록 증가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은 당시 천주교 내부의 부패 상황에 불만을 갖고 있던 개혁가들에게 좋은 정치적 보호를 제공하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on Wycliffe)이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뛰어난 개혁가로서 성경의 권위를 높인 인물이다. 그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영어를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아들 존은 위클리프의 좋은 친구이자 지지자였고, 위클리프도 국왕과 교황의 권력 다툼에서 영국 왕을 지지하였다. 위클리프는 교회가 재산을 모으는 것과 교황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참된 교회는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며 하나님께 선택받고 부름받은 사람들로 구성된다고 여겼다. 또한 부름받은 믿는 이들은 모두 제사장이며 성경을 읽을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고 복음과 진리를 영어권 세계에 널리 전파하였다. 위클리프가 전한 말은 교황청에 매우 불리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1377년 교황은 위클리프를 잡아오라는 명령을 다섯 번이나 내렸다. 그러나 왕자 존과 다른 귀족들의 보호로 위클리프는 안전을 보장받았다. 위클리프는 말년에 귀족과 평민이 손을 잡고 교회를 공격하는 농민 운동(1377-1381)이 일어났다. 교황청은 모든 파괴와 손실을 위클리프 파에게 돌렸다. 그러나 정치 세력의 보호로 인해 위클리프는 살아 있을 때 어떠한 박해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천주교는 교회를 새롭게 정비한다는 명분으로 위클리프에게 이단이라는 죄명을 씌우고 그의 시신을 파내어 불살랐으며 그의 추종자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하였다. 15세기 초에 위클리프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얀 후스(Jan Huss)라는 학자가 보헤미아(오늘날 체코의 서부지방)에서 또 다른 개혁의 움직임을 전개하였다. 1347년 카를 4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임되었고 프라하를 주교 관할 지역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중부 유럽의 첫 번째 대학인 카를 대학을 세워 유럽의 학술 사상이 발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동시에 천주교 교황청의 부패와 보헤미아에서 독일어를 게르만족과 체코어를 사용하는 체코인의 충돌은 얀 후스가 보헤미아에서 전개하는 개혁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위크 리프처럼 후스는 성경을 평민이 사용하는 체코어로 번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체코어로 말씀을 전하여 체코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교황청의 부패에 대한 후스의 비판은 천주교의 강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천주교는 영국의 위클리프 파를 진압한 뒤 즉시 보헤미아로 방향을 전환하여 후스파를 계속해서 진압하였다.

 

2). 영적인 방면의 개혁

위클리프와 후스의 '믿음'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신은 마르틴 루터보다 백 년 빠른 것이었다. 그들은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믿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였다. 이 두 관점은 그 뒤에 나온 "오직 성경으로" , "오직 믿음으로"라는 주장의 출발점이 되었는데, 이는 16세기 종교 개혁의 주된 내재적 본질이었으며 또한 주님의 회복 안에서 회복된 진리의 한 항목이다. 교회 간의 방면에서 위클리프는 교회는 결코 인위적인 조직이 아니라 선택받은 믿는 이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했다. 후스는 천주교의 낡은 관습을 통렬하게 비판하였으나 교회의 진일보한 의미를 제시하지는 못 했다. 그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지 결코 교황이 아니며 신약만이 교회의 법규라고 주장하였다. 후스의 다른 개혁은 평신도들도 미사에서 거룩한 잔을 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천주교의 미사 규정에 따르면 오직 성직자 계급만이 거룩한 잔을 취할 수 있었다. 평신도는 다만 떡만 먹을 수 있었을 뿐 잔은 마실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우둔한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의 피'를 흘러넘치게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에게 잔을 주는 '잔의 개혁'은 후스 운동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3. 후스 운동의 발전 및 영향

민족의식의 고양을 위한 현실적 필요로 인해 후스의 개혁은 보헤미아 국왕의 지지를 얻었다. 1409년에 교황 요한 23세는 체코에 사람을 보내 면죄부를 팔게 하였다. 후스는 대학의 변론회에서 담대하게 면죄부의 사기성을 폭로하였는데, 이것은 천주교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1411년에 교황청은 후스를 제명하였으나 그는 문서와 언론으로 교황과 교황청의 부패 행위를 계속 공격하였고, 심지어 교황을 주님을 팔았던 "유다"라고 책망하였다. 1414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는 교회의 분열, 교황들의 분쟁, 이단 등의 무제를 처리하기 위해 특별히 로마 교황을 청하여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를 열었다. 당시 다른 두 명의 교황은 자신의 안전을 고려하여 대표만 파견하였다. 후스는 독일 황제에게서 그의 안전을 보장하고 신변을 보호한다는 문서를 받은 뒤 회의 장소로 갔다. 후스는 군중들의 환호 가운데에 콘스탄츠에 도착했다. 그러나 회의에서 교황은 후스에게 발언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으며 그가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회의 소집인 인 요한 23세는 죄들이 너무 많아 이 회의에서 면직되었다. 1415년에 법정은 후스가 위클리프와 왈도 파의 이단이므로 반드시 화영에 처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형이 집행되기 전 후스는 자신의 신앙을 다시 한번 공표하며 마지막 연설을 하였다. 교황청은 후스의 시신이 사람들이 숭배하는 성물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후스의 뼛가루를 그를 화형 한 장소의 흙과 함께 라인강으로 뿌려 버렸다. 후스가 화형 당하였다는 소식이 프라하로 전해지자 체코인들의 감정이 격화되어 교황의 폭행과 황제의 실언을 원망하였고 국가 전체가 폭동으로 휩싸였다.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봉기한 체코인들은 두 파로 나뉘었다. 귀족들은 주로 프라하에서 프라하의 통치권을 탈취하여 네 가지 항목의 "프라하 신앙 고백"을 채택하였다. 이 신앙 고백에서 전도와 성만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떡과 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자유를 요구하였고, 또한 체코의 종교 독립을 요구하였다. 농민과 노동자를 위주로 한 다른 파는 남부의 타보르(Tabor)에서 봉기를 시작하였다. 1419년에 농민 운동이 폭발하여 귀족과 평민은 손을 잡고 군대를 일으켰으며 보헤미아 왕은 그 충격으로 죽었다. 봉기 군의 지도자 시즈카(John Zizka)는 "전차 보루"라는 전술을 사용하여 적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켰다. 지즈 카가 죽은 뒤에도 봉기 군은 계속해서 싸워 독일 국경까지 공격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승전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봉기군 내부는 세 파로 분열되고 있었다. 한 파는 타협을 주장한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시의 관리권을 얻는 목적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에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하였다. 1433년 독일의 봉건 제후들과 이들 귀족들은 프라하에서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의 주 내용은 체코의 평신도들이 거룩한 잔을 취할 수 있으며 귀족도 이미 취득한 재산을 보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한 파는 계속해서 전쟁을 하자는 타 보르 파이다. 그들은 귀족의 배반과 많은 사상자로 인하여 일부분은 지하로 숨어 민족주의 저항 운동을 계속 진행하였다. 나머지 한 파는 무력 항쟁을 하지도 않고 천주교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들은 왈도 파를 본받아 신앙과 간증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받고자 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독립적인 집회를 시작하여 보헤미아의 형제단(Bohemian Brethren)이 되었다.

 


 2. 독일의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  

​16세기 초, 유럽의 정치와 경제 및 학술 사상은 변화를 도모하고 있었고, 이러한 변화는 종교 개혁 운동을 배양하고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 당시 성경의 권위가 갈수록 높아져 신약의 초기 교회 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망을 더욱 자극하여 유럽 곳곳에서 종교 개혁 운동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마르틴 루터는 그 당시 종교 사회의 황당무계한 미신을 타파하고, 성경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도록 최선을 다하여 믿는 이들과 교회에 강한 충격과 영향력을 주었다.

 

1). 마르틴 루터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서술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독일 작센(Sachen)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광부였다. 루터는 젊었을 때 종교에 대한 시골 사람들의 미신을 보았는데, 이것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루터는 일찍이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 있는 공동생활 형제단의 학교에서 학문을 닦았고, 후에 아이제나하(Eisenach)에서 고급 라틴어를 배웠다. 1502년에 루터는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의 뜻을 따라 계속 법률을 공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잇달아 일어나는 돌발적인 사건들 때문에  그는 계획을 바꾸었다. 1505년에 스토테른하임(Stotternheim) 근처를 지나고 있던 그는 거의 벼락을 맞을 뻔했다. 그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그는 부친의 수호성인인 성 안 나(St, Anne)에게 자신이 죽지만 않았다면 수사가 되겠노라고 서원했다. 2주 뒤 부친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당시 수도원 가운데 가장 엄격하고 청빈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가입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미신과 연옥에 대한 공포로 루터의 수도생활은 고통스러웠다. 그는 수련과 속죄 가운데에서 발버둥 치며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를 소망했다. 1510년부터 1511년까지 루터는 종교의 중심지인 로마를 방문하여 이곳에서 진정한 평강을 얻고자 하였으나, 성직자들의 허례허식과 부패는 그에게 더욱 실망만 안겨 주었다. 그는 독일로 돌아온 뒤, 그의 은사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n von Staupitz)의 소개로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동시에 신학 박사 학위 공부를 계속하였다.

 

2). 종교 개혁의 과정

1512년부터 1516년까지 루터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 성경을 강의하였다. 어느 날 그가 로마서를 연구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나님 말씀이 그를 비추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이에 대하여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때부터 나는 나 자신이 새로운 생명을 얻었음을 느꼈고, …성경 전체가 내게 완전히 새롭게 열렸으며, 성경 곳곳에 이와 유사한 말씀이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사람의 구원이 결코 행위에 의항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모든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발견하였다. 루터의 이러한 관점의 근원은 성경 자체로부터 온 것이지만 이외에도 공동생활 형제단과 은사인 스타우피츠의 영향도 있었다. 그들의 저서와 가르침은 루터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외적인 두려움에서 은혜의 주관적인 쳬험으로 전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오직 성경으로(solascriptur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종교 개혁이 중요한 두 가지 관점들을 발전시켰다.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프레드릭(Frederick the Wise)의 보호 아래 그곳에서 장기간 거주하며 강의했다. 1517년 루터와 천주교의 충돌이 일어났다. 테첼(Tetzel)이 비텐베르크에서 수치심도 없이 면죄부를 팔며 재물을 축적하자, 이를 반대하기 위하여 루터는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의 성당 대문에 못 박았다. 그는 각 계층을 초청하여 면죄부의 매매와 교황의 죄를 사면하는 권위 그리고 교회의 보물 창고, 이 세 가지의 의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쟁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당시 인쇄술의 발달과 보급으로 인해 유럽 전체를 흔들었고, 교황의 권위와 교회의 재원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518년 루터는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에서 추기경 카에탄(Cajetan)과 회담을 가졌으며, 그다음 해에는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에크(Eck)와 변론했다. 루터는 양보하는 것을 재차 거절하였고 오직 성경의 권위만을 내세웠다. 1520년 루터는 문서의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독일의 귀족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 <바벨론으로 포로 된 교회>,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고 수백 권의 독일어 소책자를 출판하였다. 이러한 소책자들은 유럽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환영받았고, 그와 동시에 교황의 분노를 일으켰다. 교황은 루터에게 60일 내에 회개하라는 조서를 내렸으나 루터는 오히려 이 조서를 공개적으로 불살랐다. 다음에 1월에 교황청은 마르틴 루터의 교적을 파면한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이로 인해 루터와 천주교는 정식으로 결별하였다. 1521년 교황의 재촉으로 새로운 황제 카를 5세는 보름스에서 회의(Diet of Worms)를 개최하였으며, 루터에게 출석하여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루터는 황제의 의회 앞에서 성경의 권위를 재천명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성경과 진리에만 굴복합니다. 나는 교황과 의회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항상 자기모순적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는 달리할 수 없고 또한 어떠한 신념도 바꿀 수 없습니다. …제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루터는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친구들에게 납치되어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갇혔다. 회의 끝나고 한 달 뒤에 황제는 루터를 우둔하고 완고하며 융통성이 전혀 없는 이단자라고 선포하였고, 그를 체포하고 그의 간행물의 발간을 금지하라고 명령하였다. 바르크부르크에서 루터는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문서를 집필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9개월 동안 그는 열두 권의 책을 썼고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그리하여 성경이 독일 국민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크부르크에 머므는 동안 개혁 운동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1521년 루터의 동료 안드레아스 칼스타트(Andreas Carlstadt)는 성 안에서 성찬을 거행하였고, 고해성사와 신부의 의복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떡과 잔을 평신도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정부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도록 하였고, 성당에 있는 그림과 성상들을 파괴하였다. 같은 해 말에 '츠비카우의 선지자들(Zwickau Prophets)' 이 비텐베르크로 와서 말세의 메시지를 전했는데, 이것은 당시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1522년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요청에 따라 돌아와서 그 국면을 장악하였다. 루터의 출현으로 칼스타트는 파면되어 그곳을 떠났고, 루터가 다시 종교 개혁 운동의 핵심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동료 필리프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은 뛰어난 인문주의 학자로서 시종 루터의 개혁을 뒷받침해 주었고, 그의 유능한 조력자가 되어 루터의 개혁 정신을 계승하였다.

 

3). 루터와 그 개혁의 논쟁

비록 루터가 주님께 쓰임 받아 천 년이라는 암흑시대를 종결하였지만 그의 사람됨에는 부족이 있었고, 종교 개혁 운동에서는 논쟁거리를 남겼다. 마르틴 루터는 일찍이 자신을 '거칠고, 광폭하고, 격렬하고, 호전적'이라고 묘사한 바 있었다. 말년에 비텐베르크에 있었을 때 그는 불안정하였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를 좋아했으며, 항상 겸허와 용맹 사이를 오갔다. 루터가 비록 '오직 믿음으로'와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 개혁의 두 기둥을 세웠지만 그는 '성모 마리아의 노래"에 주(註)를 달면서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칭했고, 성모와 성인의 중보기도의 효력을 인정했다. 루터와 츠빙 그리의 성찬 논쟁에서도 그의 외고집과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루터와 츠빙글리가 대면했을 때, 츠빙글리가 루터에게 악수를 청했으나 루터는 그의 악수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성찬 의식에 대한 두 사람의 인식이 일치하지 않자, 루터는 화를 내며 협상을 거절하고 탁자 위에 "이는 내 몸이니"라는 성경 구절을 남기고는 나가버렸다. 이로 인해 종교 개혁에서 성찬 의식이 로마 천주교회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재침례파를 박해하는 일에서 루터는 그때까지도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천주교와 손을 잡았다. 그 당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던 통속적인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침례를 원하는 사람들로 물에 빠져 죽게 하라"라는 것이었다. 결국 재침례파의 많은 인도자들이 강물에 익사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1540년, 루터를 계속 지지해 왔고 츠빙글리와의 성찬 논쟁에서 그에게 협조했던 헤센의 필리프 공(Phillip of Hessen)의 중혼(重婚)은 독일의 종교 개혁 운동에 새로운 풍파를 불러일으켰다. 이 일은 공개적인 반대에 직면하였으나 루터는 필리프와의 사적인 친분으로 인해 그의 중혼에 찬성하였다. 이것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종도 인성의 연약함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의 연약함을 초월하여 그를 사용하시지만 이러한 개인적인 어려움들은 결국 일에 어려움이 되고,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전진하시는 데 제한이 된다.

 

3. 츠빙글리와 스위스 독일어권의 종교 개혁 운동

 1).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 운동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스위스의 빌트 하우스(Wildhaus)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바젤(Basel)과 베른(Bern)에서 교육받으며 고전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스승인 토마스 비텐바흐(Thomas Wyttenbach)의 영향으로 츠빙글리는 면죄부의 오류를 인식하게 되었고, 또한 이로 말미암아 믿음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517년(마르틴 루터가 95개 조의 선언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내걸은 해)에 츠빙글리는 아인지델른(Einsiedeln)의 신부로 임명되었으며, 그곳에서 중세 천주교의 미신적인 것들을 체험하게 되었다. 1519년 츠빙글리는 취리히로 왔고, 그곳에서 한 전염병을 앓게 되었다. 그는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려 주시면 반드시 일생토록 그분을 위해 일하겠다고 서원하였다. 1520년에 츠빙글리는 사상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교황청의 수당을 포기하였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높였고, 또한 신부가 직접 성경에 의거하여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자유를 줄 것을 정부에 촉구하였다. 동시에 그는 성경 각권의 모든 단어를 조금씩 연구하기 시작했고, 1525년에 신약 전체를 완전히 강해하였다. 어느 날 츠빙글리는 말씀을 전하면서 천주교의 절기(사순절) 중 금식하는 규례를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것은 당시 콘스탄츠(Constanz) 주교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취리히 의회는 츠빙글리를 지지하였고 모든 종교적인 관습은 반드시 순수한 말씀에서 기인한 것이어야 한다며 콘스탄츠 주교의 권리를 박탈했다. 이 사건은 취리히의 종교 개혁의 도화선이 되었고 수차례의 공개 변론을 촉발했다. 1523년에 시 정부 청사에서 열린 제1차 변론에서 츠빙글리는 "67개조(Sixty-Seven Articles)"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교회의 전통적인 권위가 아닌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며 교황 제도, 성인 숭배, 미사, 성지 순례, 성직자 독신제, 면죄부, 고행, 연옥 등과 같은 실행들을 비판했다. 이 변론에서 츠빙글리는 대승리를 거두었으며, 연방의회의 지지로 전면적인 개혁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제2차 공개 변론에서 츠빙글리는 천주교의 미사 형식을 공격하고 예배당 안에 있는 모든 진열품과 장식들을 일제히 제거하였다. 츠빙글리가 취리히에서 순조롭게 개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위스 연방제도의 힘이 컸다. 연방에 소속된 각 지방이 정치적으로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 지방 의회는 개혁을 받아들일 것인지의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이 있었다. 얼마 후 츠빙글리는 베른(Bern)으로 갔고, 또한 동역자들을 바젤과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등, 기타 스위스의 독일어권으로 보내 종교 개혁 운동을 확산했다. 1529년에 스위스의 산골짜기에 있는 자치 정부들은 거의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 진영에 합류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을 진행할 때, 츠빙글리와 여전히 로마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던 연방 정부 사이에는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비록 양측이 담판과 화해를 시도했지만 1531년에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천주교의 연방 정부 연맹은 신속하게 승리하였고, 츠빙글리 자신은 군대를 따라 출정하였는데, 카펠(Kappel) 성에서 사망했다. 스위스의 종교 개혁 운동은 여기에서 일단락을 고했다. 그 뒤 일어난 칼뱅 운동으로 인해 츠빙글리의 운동도 더 방대하고 영향력 있는 개혁 운동에 편입되었다.

 

2). 츠빙글리와 마르틴 루터

츠빙글리는 마르틴 루터의 저서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그의 초기의 저술들 곳곳에서 루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상이 루터의 교리의 산물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비록 두 사람이 성경의 권위와 이신칭의 방면에서는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이 있었지만, 성찬의 교리에서는 견해가 같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필리프 공(公)은 특별히 두 사람이 마르 부르크에서 공개적인 변론을 갖도록 하였다. 두 사람은 루터가 기초한 "마르부르크 조문(Marburg Article)" 가운데 있는 성찬 교리에 대해 공통된 인식을 가질 수 없었다. 츠빙글리는 성찬은 단지 주님을 기념하는 의식이며 떡과 잔은 하나의 상징일 뿐, 결코 실질적으로 주님의 몸과 피가 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을 발표하고 성찬 시 주님의 몸과 주님의 피는 확실히 떡과 잔에 임재한다고 여겼다. 양측은 각각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였고 결국 루터가 회의장을 나가버림으로써 회담은 결렬되었다.

 

3). 츠빙글리와 재침례파

츠빙글리가 스위스에서 개혁 운동을 전개했던 초반기에 그와 매우 가까웠던 두 명의 동역자, 그레벨(Conrad Grebel)과 만쯔(Felix Manz)는 츠빙글리의 개혁이 철저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츠빙글리에게 신약 교회의 모형을 빨리 회복하라고 자주 재촉하였으며 특별히 유아 세례를 폐지할 것을 자주 언급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정치적인 고려 때문에 급진적이기를 원치 않았고, 그 때문에 개혁 운동 초반기의 지지자들에게 심한 비평을 받기 시작하였다. 역사는 이들을 재침례파(Anabaptists, 그들 자신은 이 명칭을 받아들이지 않았음)라고 칭했는데, 그들은 유아 세례를 반대했고 참되게 회개한 성인(成人)들에게 침례를 주었다. 츠빙글리는 처음에 그들을 동정하고 이해하였으나 그들의 급진적인 말과 행동을 점차 인내할 수 없게 되었다. 재침례파가 교회와 정치의 연합을 강력하게 비판하자 정치 세력에 계속 의지해 온 츠빙글리는 그들에게 불만을 표시하였고, 결국 재침례파 믿는 이들을 공격하는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1520년부터 1530년까지 수 천명의 침례파 믿는 이들이 피살되었고, 천주교와 개혁주의자들은 이 일에서 예상외로 같은 진영이 되었다.

4. 칼뱅과 스위스 불어권의 종교 개혁 운동

 

1). 스위스와  제네바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간략한 서술

​스위스 건국의 역사는 독일어 권의 세 연방이 1291년에 결성한 '계약 공동체'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위스는 지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부근의 지역들이 연맹을 맺어 외부의 침략에 함께 대응하였다. 16세기 초에 스위스는 원래 알프스 산맥에 있던 독일어권으로부터 서쪽의 불어권 지역으로 확장되어 총 13개 지역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지역들은 각각 독립적이었고 자치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스위스의 종교 개혁 운동은 부근의 프랑스, 독일의 방식과는 확연히 다르게 전개되었다. 제네바는 스위스 서남부에 있으며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와 인접한 곳이었다. 1533년에 제네바는 사보이(Savoy) 왕조의 통치에서 벗어나 연방국 가로 독립하였다. 스위스에서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 운동으로 전통 천주교를 신봉하는 지역과 종교 개혁 사이에 긴장 상태가 조성되었다. 제네바는 정치적 고려에 기초하여 1536년에 종교 개혁 대열에 가입한다고 선포하였고, 같은 해에 장 칼뱅(Jean Calvin)도 윌리엄 파렐(William Farel)의 초청으로 제네바에 와서 복음파의 개혁에 힘을 다하였다.

 

2). 스위스의 종교 개혁

마르틴 루터가 독일 지역에서 개혁을 진행하고 있을 때, 다른 종교 개혁 운동이 동일한 시기에 스위스에서 일어났다. 그중 가장 유명한 두 지도자는 츠빙글리와 칼뱅이다. 츠빙글리는 스위스에서 태어났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또한 루터의 저서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루터의 성경에 대한 권위와 믿음에 대한 주장에는 찬성하였으나 성찬 문제에 있어서는 그와 다른 의견을 가졌다. 그는 주로 스위스의 독일어권 지역과 취리히에 영향을 주었다. 칼뱅은 1509년에 프랑스의 노용(Noyon)에서 출생하였고,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536년에 칼뱅은 제네바로 와서 그가 계획한 일련의 개혁을 시작하였고, 개혁 운동의 가장 완전한 교리서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를 완성하였다. 1541년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23년 동안 칼뱅은 정교일치의 방식으로 제네바의 사회와 종교 업무를 전반적으로 지도하였다. 칼뱅주의는 제네바가 프랑스 개혁파의 피난처가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등의 종교 개혁에 전반적인 영향을 주었다.

 

3). 칼뱅의 종교 개혁 운동

칼뱅은 원래 로마 천주교를 떠날 의도가 결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뜻하지 않게 그의 친구인 니콜라스 콥(Nicholas Cop)의 종교 개혁 운동에 연루되어 지명수배를 당하게 되었다. 이후로 칼뱅은 로마 천주교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개혁 운동가들과 같은 전선에 서야 될 필요를 스스로 느끼게 되었다. 1536년 26세의 칼뱅은 신학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출간하였고, 개혁 운동가들의 신앙을 분명하게 표명하였다. 이 책이 출판된 지 얼마 안 되어 칼뱅은 파렐의 요청으로 제네바로 와서 거주하였다. 1537년에 칼뱅은 제네바 의회에 개혁을 부추기는 일련의 문건들을 제출하여 그의 마음에 품은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성찬 실행의 논쟁으로 칼뱅과 파렐은 의회에 의해 국경 밖으로 쫓겨났다. 1540년의 선거에서 칼뱅을 반대하던 당파가 정권을 잃게 되자 칼뱅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 그가 제기한 조문들에 기초하여 교회 법규(Eecclesiastical Ordinances)를 제정하였고, 시민들이 종교 교육을 받도록 강압하였다. 그는 열두 명의 덕망 있는 장로로 구성된 교회 법정(Consistory of pastors and elders)을 설립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한 모범적인 사회를 창조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진행된 칼뱅의 개혁도 장애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급진 종교 개혁자인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는 항상 칼뱅의 교리에 반대하였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의 오류를 논한다"라는 글을 발표하여 삼위일체의 교훈을 부인하였다. 1533년에 세루베투스가 저술한 <기독교 강요를 재고함>이라는 책은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전면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칼뱅의 재촉으로 세루베투스는 체포되었다. 제네바 의회는 그를 이단으로 결정하고 화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렸다. 칼뱅은 인정에 호소하며 자비로 처우해 줄 것을 희망하였으나 세루베투스는 결국 1553년 기둥에 묶어 화형 당했다. 세루베투스를 사형에 처한 사건은 반대자들에게 공격의 명분을 주었으며 칼뱅의 일생에 오점을 남겼다. 1550년부터 1564년까지 칼뱅은 성경 해석에 관한 저술에 전념하였는데, 성경에 대한 그의 인식과 성경의 영적인 의미에 대한 통찰력으로 그의 성경 해석 저술들은 매우 큰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1549년 츠빙글리파는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년)의 인도로 칼뱅파와 연합하였다.

 5. 재침례파

1). 재침례파의 기원

츠빙글리가 스위스에서 개혁을 추진할 때, 그는 유아 세례라는 매우 민감한 문제에 봉착했다. 당시 츠빙글리의 동역자였던 그레벨과 만쯔는 오랫동안 실행해온 유아 세례를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들은 성경에는 유아 세례에 관한 가르침이 전혀 없었으며, 마음과 지성이 성숙한 사람이 스스로 침례 받기를 원한다면 그에게 침례를 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들의 의견을 츠빙글리에게 표명하였고, 츠빙글리는 유아 세례를 폐지할 것을 의회에 촉구하였다. 그러나 의회의 많은 의원들은 유아 시기에 세례를 받았고 일단 새로운 법령을 반포하면 그들은 즉시 교회에서 축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고려로 츠빙글리는 시간을 끌며 행동을 늦추었는데, 이것은 그레벨 등과 같은 사람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1525년 취리히 의회는 유아 세례에 관한 공개 변론을 열었다. 의회는 유아 세례를 계속 실행하기로 결정을 했을 뿐 아니라, 아이들은 출생한 날로부터 8일 안에 세례를 받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부모를 교회에서 축출할 것이라고 명령했다. 이뿐 아니라 의회는 그레벨과 만쯔 등과 같이 개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집회도 정지하라고 명했다. 의회의 결정이 공포된 그날 저녁 그레벨과 만쯔는 함께 모여 대책을 강구하였다. 기도하는 중에 블라우로크(Blaurock)라는 형제가 성령에 감동되어 땅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그레벨에게 자기를 위해 침례를 베풀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레벨은 그 요구에 응하여 정식으로 그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그들이 성인 침례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제 침례파"라고 불렀다. '재침례파' 는 사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비웃고 놀리던 명칭이었으며, 그들 스스로는 결코 이것을 그들의 명칭으로 취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유아 세례는 결코 효력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직 성인의 침례만이 첫 번째 침례였던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몸을 굽히는 한 무리"라고 칭하며 초기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모든 그림과 형상을 제거하며 단순하고 소박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전심으로 성경, 특히 신약을 연구하였고, 이른바 신경(Creed)과 교회의 조직에 대해서는 관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루터와 츠빙글리가 주장한 정교 연합을 반대하였고, 또한 형식화된 조직과 성직자 계급을 반대하였다. 믿는 이들 사이에는 오직 은사와 사역의 분별이 있을 뿐이었다. 교목의 책임은 성경을 연구하고 믿는 이들을 감찰하며, 집회를 인도하고 있는 믿는 이들의 영적인 상황 등을 관심하는 것이었다. 침례 방면에서는 오직 참된 마음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향하여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었다. 성찬 방면에서 그들이 떡을 떼는 것은 주님의 죽음을 위하는 것이었고, 또한 형제자매들이 함께 누리는 애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부분 집에서 떡을 떼면서 한 면으로는 가정의 따뜻함을 누렸고 또 한 면으로는 형식이 가져온 미신적인 것을 피했다. 이 외에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믿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위임을 중시하였는데, 특히 복음 전파에 적극적이었다.

 

2). 재침례파가 받은 박해

16세기에 정교 연합의 상황은 매우 보편적이었으므로 대다수 정치가와 종교 지도자들은 교회와 정치가 연합하는 것에 반대하는 재침례파에 대하여 매우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천주교와 신교에게 공동의 공동의 적이 되었으며, 번 전통적이고 반질서적인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1525년에 그레벨과 만쯔, 그리고 20명의 재침례파 믿는 이들이 체포되었다. 그레벨은 감옥에서 탈출하였으나 흑사병으로 사망하였다. 만쯔는 1527년에 리마트(Limmat) 강가에서 수장당했다. 블라우로크는 취리히에서 피신한 뒤, 도처에 다니며 전도하다가 1529년에 천주교에 체포되어 화형 당하였다. 1524년부터 1525년까지 독일 지역에서 농민 운동이 폭발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은 재침례파가 그 배후라고 여겼다. 츠빙글리파, 루터파, 칼뱅파 그리고 천주교는 함께 손을 잡고 재침례파를 유럽 대륙에서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였다. 재침례파의 믿는 이들은 감금, 벌금, 수장형, 화영, 학대, 등과 같은 각종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당시 '정부 교회'에 위반되는 모든 죄, 예를 들면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 집회에 불참하는 것, 가정 성경공부에 참가하지 않는 것, 전도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 등을 재침례파의 믿는 이들에게 돌렸다. 1529년 슈파이어 회의(Diet of Speyer)에서 천주교와 루터파는 공통된 의견을 갖고 신성 로마 제국 국경 내에 있는 모든 재침례파 믿는 이들을 처형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짧은 수년 사이에 수천 명의 재침례파 믿는 이들이 세속 정권과 교회가 손을 잡고 행한 박해로 순교하였다.

 

3). 재침례파의 발전 및 영향

16세기의 재침례파는 당시 유럽 전체의 정치 및 기독교의 주류인 츠빙글리, 루터, 칼뱅파의 일치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정교 연합, 유아 세례 등과 같은 논쟁 외에도 또 다른 주된 원인이 있었는데, 바로 소수의 재침례파 믿는 이들이 극단적인 개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수의 급진주의자들이 일으킨 사회적인 사건들로 인하여 재침례파는 역사적으로 이단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사람들과 단체들은 농민 운동을 일으킨 뮌처(Muenzer), 쯔비카우(Zwickkau)의 선지자들과 호프만파(Hofmannites)와 마티스(Jan Matthys)의 뮌스터 왕국 등이 있었다. 뮌처는 사회 운동에 심취하여 자신에게 성령의 인도가 있다고 선포하고, 신권 단체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는 폭동을 선동하여 신교도와 천주교를 쫓아내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여 유럽 사람들에게 재침례파에 대해 매우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호프만은 원래 루터파의 신도였는데, 루터파의 성찬 교리에 동의하지 않아서 덴마크로 쫓겨났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프랑스로 가서 재침례파의 무리에 가입하였고, 말세 사상을 제창하였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지도자이므로 자기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은 멸망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1533년에 슈트라스부르크로 강림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호프만의 충성된 신도인 마티스는 일찍이 스스로를 에녹이라고 칭하였다. 1533년 호프만의 예언이 실현되지 않자 마티스는 호프만의 예언이 틀렸다고 하면서 참된 새 예루살렘은 슈트라스부르크가 아니라 네덜란드의 뮌스터라고 선포하였다. 마티스는 무리를 이끌고 뮌스터를 무력으로 공격하여 성도의 왕국을 세우려고 기도하였으나 루터와 천주교에 의해 제지 당하였다. 뮌스터 사건으로 재침례파는 정부, 사회, 도덕 및 종교 각 방면에서 악명을 얻었다. 허술한 이러한 사람들이 결코 모든 재침례파의 믿는 이들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재침례파 믿는 이들은 여전히 초기의 개혁 정신을 유지하였다. 참되게 재침례파를 대표하는 단체들은 스위스 형제단(Swiss Brethren), 모라비아의 후터파 형제단(Hutterites), 메노나이트(Mennonites) 및 아미시파(Amish) 등이다. 스위스 형제단은 취리히에서 그레벨과 만쯔를 따르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가장 초기의 재침례파로 성인들의 침례와 소박한 성찬을 준비하였고, 재침례파가 원래 가지고 있던 진정한 개혁 정신을 계승하였다. 후터((Jacob Hutter)는 아우 스피츠(Auspitsz)에서 브루더 호프(Bruderhof)라고 불리는 공동체를 세우고 물건을 통용하는 것을 실행하였다. 후에 많은 재침례파 믿는 이들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모라비아에 많은 '브루더 호프' 가 세워졌다. 이로 인해 "모라비아의 후터파 형제단"이라고 불렸다. 후터는 1536년에 기둥에 묶여 화형 당했다. 재침례파의 또 다른 분파는 메노파이다. 메노(Menno Simons)는 원래 천주교의 신부였으나 1530년에 로마 천주교를 떠나 재침례파에 가입하였다. 그의 주된 활동 범위는 네덜란드, 독일 북부 일대였다. 메노의 관점과 스위스 형제회의 관점은 유사하여 유아 세례 및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군 복무를 하지 않았고 선서하는 것을 거절하였으며 또한 정부의 어떤 자리도 거절하였다. 16세기 말에 메노파는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는데, 보수적인 아만(Jakob Amman)과 그의 추종자들은 매우 엄격한 교파를 스스로 형성해 아미시 파라고 칭했다. 그들은 똑같은 복장을 했고 수염을 자르지 않았으며 사회에서 스스로 분리되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아미시파 신도들은 지금도 여전히 중세기 농장의 생활 방식으로 유지하고 있고, 어떠한 전기용품도 사용하지 않으며 사진을 찍지 않고, 또 마차를 자동차 대신 사용하고 있다. 비록 그들은 경건한 외모를 유지하고 있으나 영적 실재는 잃어버렸다. 16세기의 재침례파는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유럽의 기독교, 예를 들면 영국의 독립 교회, 침례교, 퀘이커교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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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Q,A] 교회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서 참석하기 벅찹니다


과하면 매너리즘 빠져… 필요한 것만 선택을… 교회도 한꺼번에 많이 가르치려 해서는 안돼

 

[Q] : 저는 초보신자입니다. 주일 청년부 예배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파, 성령수양회, 인카운터, 포스트 카운터, 금식기도, 셀 모임, 창세기 공부 등 숨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프로그램이 많은지요. 다 따라하자니 숨 막히고 힘이 듭니다. 부담도 되고요. 빠지면 믿음 없는 사람 취급당합니다.
 

[A] : 바울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온갖 유혹과 도전에 노출돼 있습니다.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선 다각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군에 입대하는 군인은 곧바로 일선부대로 배치되지 않고 훈련소에 입소합니다. 일정기간 여러 분야의 훈련을 받은 후 부대로 배치됩니다. 운동선수도 예외가 아닙니다. 경기장에 나가기 전 다양한 훈련을 거칩니다.


교회가 실시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은 교회 자체를 위한 게 아닙니다. 교인들의 신앙과 삶의 성장, 건강성을 위해 실시하는 훈련입니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만 선택하면 됩니다. 대부분 교회들은 다양한 훈련프로그램을 연속적으로 진행합니다. 그 모든 프로그램에 다 참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훈련의 의미는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모 교회 교인을 만났습니다. 출석하는 교회에서 제자훈련, 전도훈련, 알파, 셀 훈련 등을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지방에 내려와 있는데 갈 교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설교, 교인들 수준, 교회 분위기 그 어느 것도 맘에 드는 교회를 찾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전전한다고 했습니다. 그 교인이 받았다는 제자훈련은 사범훈련이었고 귀족훈련이었습니다. 제자훈련은 나만 못한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을 씻기신 주님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인은 선생 대우받을 교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책임도 있습니다. 강한 병사는 강한 훈련을 통해 태어납니다. 그러나 과부하가 걸린 프로그램들, 직수입한 외래 상품같은 프로그램들, 교회 현실과 상황에 대한 고려나 검토 없이 아무개가 성공했다면 따라하고 기우는 쏠림 현상, 네가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무분별한 프로그램 등은 사려 깊은 점검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능력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각종 이벤트나 프로그램이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살리는 도구나 장치로 사용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주객이 바뀌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프로그램이나 이벤트가 주가 되고 복음이 그 뒤에 놓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성령과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기본정신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행사만 벌이다가 본질을 놓칠까 걱정됩니다. 교회 프로그램 참여는 선별하고 선택하십시오. 교회는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먹이려 하지 마십시오.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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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약사

  
1. 초기 교회(사도시대와 그 후 시대의 교회)

 

가톨릭 교회의 역사는 30년경 유대교의 축제일인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베드로를 중심으로 군중 앞에 나아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러한 복음 선포를 경청하여 받아들인 이들이 사도들을 주심으로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할손례, 정화례, 안식일등의 유대인의 종교적 의무를 성실하게 준수하는 유대교 종파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특수한 공동체를 이루고 고유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베드로를 대표로하는 사도단과 그 밑에 야고보를 중심으로하는 장로단과 스테파노를 지도자로 하는 부제단이 구성되었다. 사도들의 열성적 선교활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루살렘 밖으로 전파되었다. 이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두그룹이 공존하였는데, 하나는 아직도 엄격한 유대사상을 보존하면서 실천하던 유대지방의 에루살렘교회, 갈릴래아교회, 사마리아교회, 요르단 서안지방의 교회등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이며, 다른 하나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교회와 안티오키아의 교회, 로마교회 등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 이는 개종한 그리스인, 헬레니스트, 기타 비유대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과격한 유대 민족주의의 등장과 그로 인한 반감, 바울로 사도의 선교활동으로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급속히 성장하였고,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 유대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쇠퇴하였다.

 

2세기에 이르러 12사도들이 모두 사망함으로써 계시의 사도시대가 끝나고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후 시대에 전하는 사도 후 시대 (100-300)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다시 사도 교부시대(100-150), 초대 교부시대(200-300)로 구분되고 있다. 이 시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관습은 아직도 유대교적 또는 유대교 그리스도교적 색체를 띄고 있었다.

둘째, 교계제도가 최종적으로 확립되어 주교, 장로, 부제등의 세 성직계급이 등장하였다.

세째,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리스도교 영지주의 이단과 투쟁하면서 성립하기 시작하였다.

네째로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로마 제국의 영토확장에 따라서 널리 전파되어 교세가 급속적으로 성장하였다.

다섯째로 이러한 교세확장으로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황제들에게 정치적불안감을 안겨주어 200년간의 박해를 받았다.

  

1) 교회에 대한 박해

 

가. 박해의 원인

 

첫째 원인 : 유일신교와 다신교의 충돌이었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국가의 이교적 경신예식에 참석하고 황제 숭배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즉,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교 로마인들에게는 무신론자와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둘째 원인 : 로마 시민이 그리스도교와 그 신도들에게 갖고있던 오해와 증오심이다. 자연의 재해, 패전등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국가의 신들에게 제사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군중들은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미움을 폭발시켰다. 또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등 인간의 육신을 먹고 그들이 서로 형제 자매로서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세째 원인 : 황제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감과 국가위기의식이다.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은 범세계적이고 초국가적인 확장의 그리스도교는국가를 전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2) 교회의 승리와 신앙의 자유

 

311년에 갈레리오 황제(305-313)는 그의 박해가 효과 없음을 인정해야 했고, 죽음을 앞둔 병석에서 관용의 칙서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313년 신앙의 자유를 얻고 콘스탄틴대제의 옹호아래 국교로서 급성장하게 된다. 이후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황제들의 호의적 도움을 받으며 세계적 종교로 성장하였다. 국교시대를 맞이하여 그리스도교는 여러 분야에서 발전하였다. 첫째로 수도원이 창설되어 발전하면서 수도생활은 일반신자들의 영성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둘째로 공의회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조직으로 등장하여 교회의 모든 현안문제를 해결하거나 결정하였다. 세째로 신앙생활의 활성화와 함께 전례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밖에 국교시대에 그리스도교는 정통과 이단 사이의 격렬한 교리 논쟁으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교리논쟁은 일련의 공의회를 통해서 해결되었고 그 결과 정통 가톨릭 교리가 정립되는 역사를 가져왔다.

 

5세기 중반기에 국경지대의 게르만 민족이 이동하면서 로마제국을 멸망시키자 그리스도교 자체도 붕괴될 위험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속에서 교회는 본래의 사명인 선교의 사명을 잃지 않고 유럽세계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는 게르만 민족을 개종시켰다. 특히 서부 게르만 계통의 프랑크족의 개종은 유럽사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문화권과 게르만 민족이 융합하여 새로운 중세문화를 탄생시켰고,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고유한 민족적 특성을 지니면서 같은 신앙 위에서 일치된 중세기 그리스도 교회의 기원이 되는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2. 중세 시대 전·후기의 교회

 

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프랑크왕국과 교황청의 융합이라는 과도기(450-750)를 거쳐서 시작되는 중세기(750-1300)는 시대적으로 양분될 수 있다. 중세 전기(750-1054)에는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이 창설되었고 종교적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 교세의 확장과 교황령 탄생 등의 외적 발전이 이룩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로부터 물질적 혜택을 받은 반면에 황제의 내정 간섭을 받아 교회의 세속화와 교권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교회와 국가가 밀착된 관계로 프랑크 제국의 정치적 붕괴는 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권한이 쇠퇴하는 교회의 암흑기(880-1046)를 탄생시켰다. 암흑기 동안에 그리스도교는 처음에(880-962) 로마 귀족의 지배를 받았고, 후에는 (962-1046) 독일 신성 로마 제국황제의 교회 내정간섭으로 자율권을 상실하였다. 아울러 교리 논쟁이후로 서방 라틴교회와 동방 비잔틴 교회가 각기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였다. 8세기에 동방 교회는 성화상 파괴 논쟁을 통해서 서방교회와 신학적 충돌을 하였고 1054년에 두 교회는 완전히 결별하였다.

 

 

1) 성화상 파괴 논쟁

 

약 725년부터 842년 사이에 비잔틴 교회가 격론하게된 성화상 논쟁을 말한다.

 

이 논쟁의 주요 쟁점은 종교적 문제, 즉 그리스도교 교리와 전례에 대한 것이었다. 성화상 파괴는 모든 종교 예술품에 대한 적의에서 비롯되는데, 이러한 자세는 구약성서에 야훼가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숭배에서 구하고 신의 영적 본성을 살리기 위하여 어떠한 형태의 모상도 공경하는 것을 금지한 사실에 기인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신이 가시적 인간의 모습을 갖춘 이후로 신약에서 모상금지는 더 이상 구약에서와 같은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교회는 오랫동안 모상에 대해 경고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모상보다는 상징을 택하였다. 그러다가 5세기에 성화상의 공경이 시작되어 7세기 비잔틴 교회에 있어서는 대중신심으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후 시대에 이르러 소아시아에서 성화상 공경에 대한 반대가 일어났다. 그것은 일반대중이 모상과 그것이 뜻하는 대상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서 이러한 신심행위가 우상숭배에 떨어질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육화한 그리스도의 모상은 그 신성과 인성을 내포해야 하는데, 신성은 나타낼 수 없었고 또 인간 모습만의 표현은 네스토리우스 사상과 같은 이단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동 로마 제국에 있던 단성론의 이단자들도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참된 인성을 부인하였기 대문에 성화상 공경을 배격하였다. 아울러 동방교회의 주교들을, 이슬람교도인 아랍인들이 시리아와 에집트에 침입하면서 성화상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어서 이들의 개종에 이 신심행위가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제 2 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92)는 성화상 공경에 찬의를 공표하였다. 또한 8세기 초에 신학자인 다마소의 요한은, 성화상은 "침묵의 설교, 하느님 설교"에 대한 기록일 뿐 아니라 성화한 물질의 표상은 그리스도의 육화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다고 신학적 설명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육화가 신학과 성화상의 의미를 연결시켰고 신에게만 바치는 흠숭과 피조물에게 드리는 공경을 구분하였다.

  

2) 동, 서방 교회의 결별

 

비잔틴 교회와 성방의 라틴교회의 견해는 오랫동안 각기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였다. 정치, 신학, 전례, 규율에 있어 상호간에 많은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우기 샤를르 대제와 오토 대제의 서방 제국 건설과 이탈리아 진출, 서방 교회의 개혁 정신등은 두 교회 사이의 대립, 또는 적대감정을 격화시켰다. 결국 두 교회의 충돌은 북구의 노르만 민족이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남부 이탈리아를 점령하였을 때에, 교황 레오 9세(1049-1054)가 그의 정치세력을 이 점령지역까지 연장하였을 때에 일어났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9세(1042-1055)가 점령자들을 축출하기 위해 교황과 동맹을 맺고자 하였다. 이때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미카엘 체프랄리우스(1042-1058)가 그의 관할지역인 남부 이탈리아에서 교황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내의 충돌을 일으킴으로서 비잔틴 제국과 교황청의 상호이해를 저지시켰다.

 

가) 교회분규의 내용

로마 교황청은 남부 이탈리아의 비잔틴 교회를 라틴전례로 통일하고자 시도하고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였던데 반해, 비잔틴 교회는 관할지역에 있는 라틴전례 성당에서 비잔틴 전례를 사용하고, 미사성제에서 누룩없는 빵의 이용금지 및 사용을 단죄하였으며 전통적인 자치권을 고수하려고 함으로써 분규과 확대되었다.

 

나) 교황특사의 파견과 상호 파문

레오 9세는 두 교회의 협력관계를 도모하기 위하여 추기경 훔베르트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하였으나 교황사절단은 고자세의 입장에서 총대주교를 대하였고, 교황의 절대적 권한에 의거하여 체프랄리우스에게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서방교회의 관습이 유효하고 유일한 것임을 주장하였다. 총대주교가 이와같은 요구를 거절하자 훔베르트는 체프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에 대한 파문서를 작성하여 1054년 7월 5일 성 소피아 성당 제대위에 놓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는 이 파문서를 소각하였고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교회회의는 훔베르트와 그의 일행을 파문하였다. 이로써 두 교회는 결별하여 그리스도교 세계는 양분되었다. 오늘날에 와서 이 문제는 홈베르트의 월권행사로 간주된다.

  

3) 중세 후기 교회

 

중세 후기(1054-1300)에는 클뤼니 수도단체의 개혁과 교황 그레고리오 7세(재위:1073-1085)의 교회쇄신으로 교회는 세속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할뿐 아니라 세속권을 지배하는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두 가지 개혁운동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각성시켰고 평신도의 영성강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는 11세개에서 시작된 십자군 운동과 청빈운동에서 나타났다. 십자군 운동은 기사 수도회의 탄생과 서구의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접촉을 가능케 함으로써 학문, 특히 스콜라 철학과 신학과 예술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청빈 운동은 교회의 생활 혁신을 불러 일으켰으나 지나친 주장은 이단으로 변질되었으며 이러한 이단운동을 저지하기 위해서 부정적 방법으로 종교재판이 생겨났고 긍정적 입장에서 탁발수도회가 창설되었다. 탁발수도회는 이단자의 개종과 선교활동 이외에 13세기에 설립되기 시작한 대학에서 학술활동을 통해서 문화 발달에 공헌하였다.

 

3. 종교개혁의 원인과 배경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중세교회(476-1517)를 마감하고, 새로운 교회쇄신의 계기를 마련하여 준 사건은 종교개혁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교회가 속된 모습을 보였을 때마다 그 내부에서는 개혁의 외침과 쇄신의 움직임이 있어 왔었다. 그런데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교회쇄신 운동으로서의 종교개혁은 1500여년 동안 전승, 보존되어온 그리스도교 신앙을 근본적으로 파괴하였고 1504년의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결별이후 다시 한번 그리스도교 세계를 오늘날까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갈라 놓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불상사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사실 종교개혁의 원인에 대한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쟁점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간접적 원인으로서 14-15세기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의 역사적 환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으며, 직접적 원인으로서는 탁발 수도회인 성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의 신부이며 수사였던 마틴 루터(1483-1546)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원인만으로 일어난 것도 아니며, 거기에는 종교개혁의 타락 외에 인문주의의 대두라는 사상적, 정치적, 사회적인 여러가지 원인들이 겹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1) 인문주의의 대두

 

인문주의는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고 모든 속박과 권위에서 해방시키려는 사조이다. 따라서 종교, 도덕의 모든 계명에서 벗어나 오직 자기의 의지와 감정의 명령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고자 하였다. 진리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나아가 교회의 교리상의 원칙을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조는 새로 발명된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 광범위하게 민중 속에 퍼져 갔다.

  

2) 정치적 원인

 

신성 로마 제국의 무력화와 모든 구속으로부터 국가의 절대권위를 가능하게 하는 로마법의 채택은 신앙분열의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제후들의 세력은 커졌고, 교회에 관한 일에서부터 자기 백성의 신앙생활에 까지 지배하기에 이른다. 한편 그들은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성당, 수도원의 재산을 노리게 되고, 이러한 중에 교회에 대한 반항운동을 성공시키게 되는 바탕을 마련하게 된다.

 

 3) 사회 경제적인 원인

 

중세 말기의 서구사회는 경제적으로 볼 때 도시와 지방 사이에 빈부격차가 극심하였다. 당시 몰락과정에 있었던 기사계급과 농민계급의 빈곤화도 하나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불안과 불평, 불만족에 있었던 그들은 반교회운동에 휩쓸리게 된다. 여기서 그들 속에 뿌려진 후기 인문주의자들의 소책자는 민심을 점차로 교회로부터 이탈하도록 만들었다.

  

 

4. 종교 개혁 시대의 교회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성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의 수사 신부이며, 성서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대사남용에 대해 항의하면서 대사교리의 재정립을 제의하기 위해 그의 교구장과 동료 교수, 신부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유명한 '95'개 조항의 신학 명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전통신앙의 기저를 뒤흔들어 놓았으며 그리스도교계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분열시키는 종교 개혁시대(1500-1650)을 열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독일의 루터 종교개혁을 위시하여 스위스에서는 즈빙글리의 종교개혁과 칼빈의 종교개혁, 그리고 재세례파의 급진적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국교회가 탄생하였다. 여기서 마르틴 루터와 '대사논쟁'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1) 마르틴 루터

 

루터는 1483년 10월 10일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아이슬레벤에서 빈농 출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서 부친의 소망에 따라 법학부에 등록하였으나, 2개월 후에 스토테른하임이란 마을 근처에서 뇌우 속에 번쩍이는 번개불에 놀라 죽음이 임박하였다는 위기 위식에서 수도자가 되기로 다짐하고 에르프르트의 성 아우구스틴 은수사회에 들어갔다. 그는 1506년 수도서원을 하였고 1년 후에 사제 서품을 받고 신학연구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의 초기 생애 속에서 그 나름대로 경건한 신앙인, 모범적 수도자, 열성적 사목자로서 생활하였던 루터는 '성베드로 대성전 전대사'의 시행과정에서 드러난 남용에 충격을 받았다. 여기서 그는 1517년에 교회 관습대로 그의 교구장과 독일의 대사시행을 책임진 고위 성직자에게 항의하는 편지와 대사 남용을 논박하는 신학명제인 '95개항' 명제를 작성하여 보내어 대사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개신교의 기운을 루터의 종교개혁에 두고 있다면, 그 시발점은 바로 이 대사논쟁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문제의 촛점이 되었던 대사논쟁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2) 대사 논쟁

 

루터에게 항의의 구실이 된 것은 대사문제이다. 당시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는 1506년 로마 대성전 개축에 착수했다. 규모가 컸던 만큼 막대한 비용이 들어 율리오 2세와 레오 10세(1513-1521)는 전대사를 반포하고 신도들의 재정적 도움을 청햇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 대사의 반포가 너무 자주 있었고, 그 위에 대사 선전자들 주변에는 흔히 탐욕이 뒤따랐다. 그들은 이 대사를 기회로 잡아 돈벌이로 이용하였고, 그 폐단이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거리가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대사는 교회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오용되어 설교가들은 모금의 성공을 위하여 대사의 효과를 과대하게 설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죄의 잘못과 죄의 벌 사이의 구분이 불투명해졌고 무지한 신자들은 대사를 구원과 혼동하여 대사 부여를 약속하는 고해성사표를 곧 천국 통행증으로 오해하였다. 신자들은 고해성사표에서 강조하는 대사를 얻기 위하여 필요한 내적 정화를 등한시 하여 돈이면 구원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교리가 중세말기의 지배적인 견해였고 여기에 근거한 대사 시행과 대사 판매의 행위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러한 과장된 교리를 밝힌 적이 없다. 이제 교회 안에서는 잘못된 대사 시행에 대한 개혁의 소리가 높았고, 대사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재확인하여 공식적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루터가 대사교리에 대한 토의를 제기하기 위해 '95개항' 명제를 공표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건이라고 하겠다. 이같은 대사논쟁으로 인하여, 결국 루터는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 당하게 되었으며, 교회는 구교(가톨릭)와 신교(프로테스탄트)로 나뉘게 되는 역사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5. 교회의 쇄신운동

 

한편 가톨릭도 15세기 초부터 교회 쇄신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그 실현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던 중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자극을 받아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콘스탄스 공의회(1414-1417)와 바젤 공의회(1431-1491)에서 교회 쇄신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었고, 르네상스 교황들도 산발적으로 교회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모두 좌절되거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교황들과 교황청에 이를 시행할 만한 내적 및 종교적 역량이 결여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우기 교회 쇄신을 위한 공의회 개최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1523-1534)는 공의회 소집을 주저하였다. 그 이유는 교황이 공의회주의, 즉 공의회 우위사상의 재등장을 우려하였고 교황령에 대해 더욱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여러가지 이유로 몇 차례의 연기를 거쳐 1545년 12월에 가톨릭의 교회 쇄신 공의회는 트리엔트에서 개최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퇴락된 교회에 대해 반성하면서 신앙과 교리를 재정리하고 교회 규율을 혁신하였다. 공의회 이후에 가톨릭 교회는 교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되면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지방 교회와 수도원에서 교회 쇄신에 착수하였다. 트리엔트 개혁정신은 선교 활동에서도 나타났다. 종교개혁이전까지 '유럽의 종교'로 머물러 있었던 가톨릭 교회는 교회쇄신의 일환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신대륙 탐험을 통해서 세계 선교에 나섰다.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등의 수도회와 예수회는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에서 선교활동에 종사하였다. 이제 가톨릭 교회는 동서양에 걸쳐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적 종교가 되었다.

  

6. 근대 공의회 이전 교회(19세기)

 

19세기를 사로잡았던 사상인 계몽주의는 외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켜 가톨릭 교회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일부 유럽지역에서 그 권위를 상실하였고 세속화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세속화는 교회가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교황청과 지방 교회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교황청의 승리를 안겨 주었다. 교회는 반가톨릭적 교회에서 단결하였고 국가 지상주의와 국교회 사상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운동(교황지상주의)을 일으켰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기에 일어난 가톨릭 자유주의는 교회를 내적 혼란 속에 휩싸이게 하였으나 신앙 오류표(Syllabus)의 반포로 인해 외적으로 평온에 들어 갔다. 또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에 대한 신조 결정으로 분열되어 독일에서는 '구가톨릭 교회'가 떨어져 나갔으며 이른바 '문화투쟁'으로 교회는 일시적으로 난관에 봉착하였으나 가톨릭인의 단합으로 결국은 승리하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상처받은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였으며 가난해진 교회는 근로 대중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1891년에 '가톨릭 사회주의 대헌장' 또는 '노동 헌장'이라 불리는 칙서(새로운 사태)를 발표하여 근로 대중을 위한 사회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이 칙서는 널리 유포되기 시작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운동을 어느 정도 저지하고 그리스도교 노동조합을 창설, 발전 시키며 가톨릭 정신이 구현되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정당을 탄생시켰다.

 

 7. 현대 공의회 이후 교회(20세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우선 성직자 중심의 교회 체제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이 부각되었으며 '평신도 신학'이 정립되어 성직자와 평신도가 교회에 대해 함께 책임을 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20세기 가톨릭 교회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교황 요한 23세(1958-1963)가 소집하여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가 마무리 지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1962-1965). 1959년에 교황 요한 23세는 교회를 내적으로 쇄신하고 외적으로는 문호를 개방하여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치를 촉진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하고 교회법을 개정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 계획은 3년 동안의 공의회에서 진지하게 논의 되었으며, 1983년에 새로운 교회법이 선포되어 1984년에 발효하게 되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급변하는 현대 세계에 적응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하는 동시에 다른 그리스도교와의 일치를 위해서 계속 노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도 폭넓은 대화의 길을 모색, 진행하고 있다.

  

8. 참고문헌

 

1.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서울, 1985.

2. 요트 마르크스, 가톨릭 교회사 上下, 김창주 편역,

3. 김성태, 세계교회사 I,
 

(출처 : '세계 교회사 약사'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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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년,마르틴 루터의 운명


하나님께서 교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때에 들어 쓰신 하나님의 사람, 마르틴 루터의 생애와 신학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 의지해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관행을 뒤집어엎는
『95개조 반박문』을 공개함으로 종교 개혁의 불꽃을 쏘아 올린 한 수도사의 위대한 발자취
그릇된 가르침과 횡포에 맞선 두려움 없는 영혼의 이야기

미국 명문 예일대에서 40년이 넘도록 교회사를 강의한 저자 롤런드 베인턴 박사는 진리에 대한 굳건한 믿음만으로

부패한 세상과 교회를 뒤엎은 루터의 일생을 다각적인 시선으로 살펴보고 더할 나위 없이 입체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남을 것이라는 칭송이 무색하지 않게 우울질인 동시에 감성 깊고 열정적이었던 한 수도사로

하여금 목숨을 내놓고 투쟁하게 했던 하나님의 권능과 말씀의 위력을 어느 전기나 역사서보다도 생생하게 이해하게

해준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한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복종이 얼마나 위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 새삼 탄복하게

되며, 우리의 약한 것과 부족한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시대의 길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를 다시금

돌이켜 볼 수 있다.

 


마르틴 루터가 내세운 목표는 3가지. '오직 은총(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서(solo Christo)'

이며, 루터가 겨냥한 목표는 원점(原點)이었다.

 

"올해는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당시 성행하던 면벌부(면죄부) 등에 의문을

품고 비텐베르크 교회 외벽에 개혁을 향한 95개 조의 반박문을 게시한 것을 기념한다."

 


“내가 너희를 자유하게 했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라.”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1절을 마르틴 루터가 가장

좋아했던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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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는 순진한 혁명가였다

 

마르틴 루터가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에 붙인 것이 1517년 10월 31일이었다. 사람들이 죄를 용서해주는 대가로 돈을 바치던 세상에서 그의 사상은 급진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혁명가가 되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에서 목격한 여러 문제를 그저 토론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에서 일어난 일로, 독일이, 유럽이, 나머지 기독교 세계가 영원히 바뀌어버렸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으로 봉인 해제한 대격변을 이해하려면, 그가 살았던 시대로 가봐야만 한다.

 

때는 바야흐로 중세 말, 그리고 근세의 시작이었다. 이때 기독교 신앙을 장악한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였다. 기독교 교의와 규칙이 민중의 삶을 통제했고, 하나님이 잘못을 그냥 놔두지 않는 도덕의 판단자였다.

 

설명할 수 없는 사건, 가령 개인의 비극, 흉년, 전쟁 따위는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결과로 이해되었다. 이런 거래를 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흔히 화형주에 세워졌다.

 

마르틴 루터는 1483년 아이슬레벤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501년 그는 에르푸르트 대학교에서 학업을 시작한다. 4년 후 석사 학위를 마친 그는 계속해서 법 공부를 이어갔다.

 

그런데 인생의 행로가 바뀌는 일이 루터한테 일어난다. 1505년 7월, 그가 큰 폭풍우에 갇혔는데, 재수없게 벼락까지 맞은 것이었다. 앞에서 사신이 어른거리자, 그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하나님을 영접해야 하는 상황이 두려웠다. 루터는 광부들의 수호 성인 세인트 안나를 부르짖었고, 수도승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2주가 채 안 돼서 루터는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문을 두드리고, 교단에 입교시켜주기를 요청했다.

  

그는 자애로운 하나님을 구했고, 사후의 삶을 놓칠 것이 두려웠으며, 마침내 수도원에 피정하면서 충만한 삶을 누렸다.

 

젊은 수사는 처음부터 아주 말을 잘 들었다. 그는 하루 여섯 시간씩 기도를 올렸고, 단식을 했다. 그는 자기 반성, 고행과 금욕, 고백 성사를 실천했다. 루터는 후에 수도원 생활을 이렇게 회고한다. "수도사가 돼서 천국에 간 사람이 과연 있다면(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그러고 싶었다."

 

교단 입교 후 2년이 채 안 돼, 루터는 가톨릭 사제가 되었다. 1507년. 신학 교육이 그의 활동에서 핵심이었고, 그는 열정적으로 연구에 매진했다.

 

면벌증 판매를 지켜보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가 1510년 임무를 주고 그를 로마에 파견했다. 그 여행이 결정적이었다. 성 베드로 교회 건축 비용이 만만찮았고, 로마 교황청은 재정적으로 상당히 힘든 상황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기금 조성을 위해 면죄부를 팔기로 했다. 신자들은 선행을 하거나 교회에 돈을 갖다 바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소득에 따라서 가격이 정해졌다. 친척이 돈을 내면 죽은 사람도 지옥불에서 구제받을 수 있다고도 했다.

 

루터가 목격한 사태와 관련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게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루터의 구원 탐색

 루터는 1512년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가 됐다. 동료와 상관 들이 그를 폭넓게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틴 루터는 여전히 자애로운 하나님을 추구 중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의 승인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회의 의식이나 규칙은 그 어느 것도 이 질문의 답변이 되지 못했다.

 

루터는 계속해서 열심히 성경을 읽었다. 사도 바울이 초기 로마 교회에 써보낸 서한이 특히 감동적이었다. 그는 이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피로 인간이 죄를 사함 받고, 의로워지는 것을 보고 읽었다.

 

이 신학자는 뭐가 종교 개혁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지를 점점 더 깨달았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판관일 뿐만 아니라, 당신이 창조한 백성을 사랑해, 아들을 보내서 당신과 그들을 나누고 있던 죄의 값을 치르도록 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루터는 성경에서 다음을 발견하고 깨달았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라도 전능한 신 앞에서 의인됨이라는 공짜 선물을 받는다고 말이다. 수도사 루터는 드디어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했다.

 

루터 신앙의 네 기둥

 

마르틴 루터는 거듭해서 성경을 궁리 연구했고, 핵심적인 신학의 대계 네 가지를 개발했다. 첫째가 신성한 문서인 성경이다. 그는 성서가 진리의 유일한 규준이라고 보았다. 당시의 교회는 교황과 종교 회의가 작성한 추가 문서도 활용했다.

 

둘째,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 선행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믿음을 채택하면, 면죄부 판매가 무용해진다.

 

셋째, 루터의 결론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모든 죄를 대속했고,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가교이다.

 

넷째, 우리가 신앙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 그것이 루터의 믿음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 교인의 삶은 전적으로 신앙에 바탕을 둔다. 신앙해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한다. 신앙해야, 그리스도가 우리와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를 믿어야, 그리스도의 바름과 정의로움이 우리의 바름과 정의로움이 된다. 그리스도의 것이 우리의 것으로 화한다."

 

이 믿음의 체계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사람들은 은총과 신앙 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음을 깨달으면서, 사제란 중재자의 도움 없이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수 있었다.

 

루터의 가르침 때문에, 로마 가톨릭은 권위를 잃었고, 교단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의 노력과 활동이 대단히 혁명적임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자신이 그저 고래의 잊힌 원칙들을 재천명해 복귀시키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낯설고 달갑잖은 신앙을 표명한 것이 아니라 말이다.

 

루터는 신학 교수였고, 하여 학생들에게 자신의 신학 견해를 가르쳤고, 미사 중에는 그 내용을 설교했다. 처음에 그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의 비성경적 신학을 교정해, 기독교 신앙의 시원으로 복귀시키겠다는 루터의 결의는 확고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면죄부 판매를 끝장내고 싶었다. 독일에서도 면죄부 판매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95개조 반박문

 

1517년 10월 루터는 면죄부 판매 관행을 논쟁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반박문을 브란덴부르크의 알베르트 추기경, 선제후, 마인츠의 대주교에게 직접 보낸 이유다. 그가 이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만성 교회 문짝에다가 붙였다고도 한다. 그 시절의 게시판이었던 셈이다.

 

이 행동으로 봉인이 해제됐다. 교회 조직의 토대를 뒤흔든 논쟁이 촉발된 것이다. 여전히 비교적 새로웠던 인쇄기의 도움 덕택에,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메시지를 신속하게 전파할 수 있었다.

2017년 10월 31일은 루터가 세상을 바꾼 행동에 나선 500주년 기념일이다. 2017년 한 해 동안 각종 전시회와 행사가 무수히 열릴 예정이다. 리포메이션, 곧 종교 개혁에 불을 당긴 그 날과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신교가 탄생했다.

출처 : Pyong-Son Chong님이 14th March에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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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라마단 금식(Muslim Fasting Month)

 

 이슬람교의 교리 중에 신앙고백, 기도, 금식, 자선 그리고 순례가 있다. 이슬람교를 연구하고 있는 비 무슬림 학자들은 그것들을 일컬어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이번호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 기둥인 금식과 자선에 대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무슬림은 일년 중 이슬람력(Hegira)으로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에 금식을 한다. 한달동안 계속되는 금식의 시간은 동트기 전부터 해가 질 때까지이다. 병자, 여행자, 임산부, 아기 엄마 그리고 어린아이를 제외한 모든 남녀 무슬림이 그 시간에는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면 안되고 흡연도 삼가 해야 한다. 그 금식을 일명 ‘라마단 금식’이라고 한다.

필자가 사우디에 가서 처음 목격하게 된 라마단 금식은 아주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러나 12년이 지나는 동안 라마단 금식이 봄철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되었다. 헤지라(Hegira)의 계산 방식이 음력인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음력과는 달리 윤달이 없어서 매년 라마단 달이 9일씩 빨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헤지라는 계절에 무관한, 오직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달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매년 라마단 달에 15억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 금식의 유래는

무함마드가 히라 동굴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명상을 하다가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게 된 것을 기념하고, 예언자의 고행에 동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 후 이슬람 신학자들은 금식의 12가지 의미를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반포하였다.

1. 금식은 사랑의 원칙을 가르쳐 준다. 2. 창조적 희망감과 낙천적 인생관을 갖게 해 준다. 3. 진정한 덕을 심어 준다. 4. 건전한 양심을 배양한다. 5. 인내심과 비 이기심을 고취시킨다. 6. 절제와 의지력의 효과적인 실습이다. 7. 투명한 영혼으로 초월의 경지에 들게 하고 맑은 정신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하여 경쾌한 몸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한다. 8. 현명한 저축과 건전한 가게 예산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9. 노련한 적응 기술을 터득시킨다. 10. 심신 단련과 건전한 생존의 기초를 닦아준다. 11. 사회적 귀속, 화합과 형제애, 알라와 법 앞에서 참다운 평등의 정신을 진작시킨다. 12. 자기 안정과 자제,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 보존, 승리와 평화를 위한 알라의 처방이다.

 

필자는 이슬람 신학자들이 라마단 금식을 통해서 구도자가 체험하게 될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훈련과 공동체에 미칠 장점들은 언급하고 있으나 매년 행하는 라마단 금식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매년 라마단 금식에 참여하는 사우디 무슬림들에게서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라마단이 오면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금식에 참여한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음식과 물을 금하고 담배를 피지 않는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열심히 모스크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

규칙적으로 하루 세끼의 식사를 하던 사람이 음식을 금하니 얼마나 배가 고프고 힘이 들겠는가?

특히 현장에서 뜨거운 태양을 온몸에 받으며 중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주로 삼국인들임)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금식기간에 몸이 야위고 건강을 상실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식에 참여하는 그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그들은 알라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알라를 기쁘게 하고 그분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 금식한다. 오직 알라를 생각하여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웃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을 할 때에 박탈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인내한다. 그들은 금식을 통해 자신의 정욕을 훈련하고 육체적인 유혹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숙해 간다.

그러나 성서적인 관점에서 바라 볼 때 라마단 금식은 바른 금식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금식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저녁(해가 지면서 해가 뜨기 전까지)에 두 세 차례의 식사를 한 후 아침 예배를 드리고 낮에 잠을 자는 식으로 생활 패턴이 바뀐 것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금식 기간에 식품이 더 판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둘째, 금식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데 라마단 금식은 강제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 기간에는 비 무슬림도 무슬림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 신고가 되면 구속이 되고 추방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찰학교를 짓던 공사 현장에서 한 미국인이 라마단 금식 기간에 담배를 피우다가 자기 수하에서 일하던 사우디인이 신고하므로 추방되는 일이 있었다. 셋째, 외도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라마단 기간에 많은 현지인이 해외 여행을 한다. 그들은 주로 유럽과 동남아를 여행하며 즐긴다. 그 기간에 각 항공사의 비행기 표를 구하기가 어려운 사실이 이를 묵시적으로 증명해 준다.


축제의 향연

 라마단 금식이 끝나면 그들은 ‘이드’ 축제를 가진다. ‘이드’ 축제는 금식을 무사히 끝낸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향연이다. 3일 동안 계속되는 축제를 위해 집집마다 수양을 잡아 요리(갑싸)를 해 놓고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은 초청하여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우애를 다진다. 때로는 외국인을 자기 집에 초청하는 경우도 있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현지인과의 이런 유대 관계는 사역에 아주 중요한 교량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나심이라는 동네에서 살 때에 마음씨 착한 30대 초반의 현지인이 앞집에 살고 있었다. 그는 부인 둘을 거느리고 있는 가장이었는데, 어느날 필자의 대문을 두드려서 나가보니 그가 큰 고기 덩어리를 하나 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필자에게 건네 주며 ‘이드’ 축제를 위해 잡은 양고기인데 먹으라고 했다. 그가 준 고기는 값으로 환산하면 얼마 되지 않는 것이었으나 그 선물에는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정이 배어 있었다. 그 후 우리는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그날 선물 받았던 고기는 냉동고에 잘 보관해 두었다가 양고기 요리를 잘하는 유집사님(지금은 한국에서 목사로 사역하고 있음)께 드렸다.

축제 기간에 무슬림들은 연 수입의 2.5%를 구제금으로 사회에 환원을 한다. 이를 자카트(Jacket)라고 한다. 자카트는 종교성을 통해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이웃에게 구제금으로 전달되기도 하고 개인이 이웃을 돕기도 한다. 그들의 자카트는 단순한 구제나 자선이 아니라 의무 사항으로 되어 있다. 무함마드가 자카트를 종교적인 의무로 강조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터넷 한국일보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에 거지가 많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러나 필자는 사우디 아라비아에 체류하는 동안 거지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다만 라마단 금식이 끝난 후 이드 축제 기간에 구걸을 하는 사람들은 목격한 적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이드 축제 기간에 구걸을 하고 돕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가난한 여인들이 차도르를 쓰고 가가호호 방문을 하며 구걸을 하고, 길거리에 좌판을 벌려 놓고 장사를 하기도 한다. 그 여인들은 가난한 과부들과 대부분 성지 순례를 왔다가 사우디에 체류하고 있는 아프리카인 들이라고 알려 지고 있다.

자카트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 현지인 인데, 경제 사범으로 장기 복역 중에 있던 한국 사람(무슬림)이 자카트의 혜택을 입고 출옥하여 귀국한 경우도 있었다.

무슬림들이 자카트를 죄 사함과 심판 때에 구원을 받는 수단으로 믿고 행하지만,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기독교인의 금식 기도는 어떠한가? 현대 크리스천들은 금식 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 문화적인 경향이라고 본다. 현대 문화가 사람들을 편하고, 급하게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한번 클릭하면 자기가 원하는 모든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무엇 때문에 금식 기도를 하겠는가? 그들은 물질이 필요하면 하나님보다 먼저 파워 볼 티켓을 생각할 것이다.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영적으로 부패하고 어둡던 시대(중세)에 “금식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 금식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

만약 루터가 지금 우리 가운데 살아 있다면, 물질 문명은 이루었으나 중세기보다 더 영적으로 무질서하고 도덕적으로 타락되어 재난과 질병과 사고가 많은 이 시대에 금식하지 않는 성도들을 바라보며 장 탄식을 할 것이다.

성경에는 금식에 대한 교훈과 실례가 많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소원과 재난이 있을 때마다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예를 들면, 에스더는 유대민족의 구원을 위해 3일 동안 금식 기도를 했고(에4:16), 다윗은 병든 아들의 회복을 위해 7일을 금식 기도했으며(삼하12:16-18), 다니엘은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21일을 금식 기도했다(단10:2-3). 그리고 모세는 언약의 돌판을 받기 위해 40일을 금식 기도했고(신9:9), 예수님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 40일 금식 기도를 하셨다(마4:2).

성경은 금식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천명했다(사58:6). 어떻게 금식 기도를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첫째, 금식 기도의 대상이 분명해야 한다. 금식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기도의 대상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소개하셨다(마6:9).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금식 기도의 목적은 영적인 승리여야 한다. 이사야는 금식의 목적을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고 했다. 성도는 매일 매일 영적 전쟁에 직면하며 살고 있다.

성도는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 이면에 자신을 억압하고, 넘어뜨리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사탄이 진을 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금식 기도하여 영적 권능을 힘입고 강력한 진들을 파하며, 삶 속에서 빛의 영역, 자유의 영역을 넓혀 가야 한다. 셋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사야는 “또 주린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7)라고 했다. 금식 기도를 하면서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공복의 아픔과 박탈의 경험을 통해서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이웃의 아픔을 이해하고 감싸 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금식 기도를 드리는 구도자에게 너무나 귀한 축복들을 약속하셨다(사58:8-11)

금식 기도의 목마름과 갈증을 갖자. 금식 기도를 통해 영성을 회복 받자. 그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자(고전10:31).

조완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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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타락

 

요즘 교회에 대한 시비가 많다. 엄격해진 잣대는 교회에 대한 기대와 책임 때문이다. 교회가 가난할 때는 우호적이지만 힘이 있어 보이는 지금 더 이상 양해받을 여지가 없어 보인다. 많은 교회는 여전히 가난하지만 교회는 마치 부자처럼 인식되고 있다.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말을 했다. "초대교회에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교회는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은과 금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 많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잃었다."

 

교회의 타락은 거룩함보다 물질이 평가의 기준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연약함보다 힘을 숭상하고, 가난보다 부유함을 선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홀히 여기게 된 까닭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2:5)

 

신경하 감독회장(기독교대한감리회)

 

광풍을 잠재우는 리더

 

바울이 로마로 압송될 때 탔던 배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다. 모두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바울은 일어나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라"고 외쳤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로마까지 안전하게 인도될 거라는 확신을 얻었던 것이다. 바울은 도망가려는 사공들을 제지했고, 사람들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며 거듭 구원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다. 배에 탔던 사람들 또한 바울을 믿고 따르며 안심하고 음식을 받아 먹었다. 결국 바울의 확신처럼 모두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전세계적 경제 위기라는 광풍을 만났다. 이러한 때일수록 바울처럼 위기를 돌파해나갈 지도자와 지도자를 향한 국민들의 신뢰가 필요하다. 위기 속에서도 살 길을 찾아 희망을 제시하는 지도자와 그를 믿어주는 구성원들이 있는 공동체는 망하지 않음을 광풍을 만난 바울과 배에 탄 사람들을 보며 배워야 하겠다.

손인웅 목사(덕수교회)

 

마음의 재벌

얼마 전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가수 션과 탤런트 정혜영 부부의 아름다운 기부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결혼 후 매일 1만원씩 모아 결혼 일주년이 되던 날에 365만원을 노숙인들에게 기부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며 섬겼다. 첫 동반 광고 수입도 전액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내놓았다고 한다. 현재 100명의 해외 빈곤 아동들에게 꿈을 주기 위해 매달 한 어린이당 35000원씩 보내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많은 기부를 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은 '재벌이라 돈이 많아서 그러겠지'하고 생각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들 부부는 아직 자기 집도 없고 미래를 위해 적금도 든 게 없다고 한다.

 

방송 진행자의 말처럼 "재벌은 재벌이되 마음의 재벌"인 셈이다. 우리 사회에 흉흉한 소식들로 마음이 점점 얼어붙어가는 요즈음, 따뜻한 남풍같이 느껴지는 '마음의 재벌'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렸으면 좋겠다.

정승룡 목사(대전 늘사랑침례교회)

 

불안이 쌓아올린 유산

 

인류 역사상 유명한 건축물들은 불안 해소를 위해 세워진 경우가 많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죽음에 대한 불안해소를 위해 세워졌다. 만리장성은 황제의 정치적 불안해소를 위해 세워진 건축물이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도 흩어짐에 대한 불안해소를 위해 쌓기 시작한 탑이다. 내 주변에 누군가가 모여 있어야 하고, 무언가를 모아 놔야 안심할 수 있는 인간의 뿌리 깊은 불안 때문이다.

 

흩어짐은 두렵다. 외롭고, 불안하며,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불안감이 강해질수록 모아 놓은 것을 지키기 위한 성벽도 비례해서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불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마음의 현상이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하지만, 제대로 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하다. 무언가 쌓아 놓을 생각 대신 하나님과 화평 하는 게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강대일 목사(안양성결교회)

 

삼 세번의 미덕

 

 

한국인들은 수많은 숫자 가운데 특히 ''자를 좋아한다. 작심삼일, 삼천리, 삼척동자, 3부작, 삼총사, 삼종지도, 3등칸, 일일이 여삼추 등. 삼은 통합과 균형을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한다. 석 삼, , 세 번째란 수가 주는 안정감은 마치 세 개의 다리를 지닌 솥발의 균형을 연상시킨다. 압축된 요점을 손쉽게, 간단히 전달할 때도 세 가지로 요약하길 즐겨한다. 3대 과제, 3대 지표, 3대 정신, 3D 산업, 3S의 삶의 방식, 21세기 3F 특징들이 좋은 보기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형제가 잘못했을 경우에 일곱 번을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했다. 당시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했고, 외경 집회서에도 두 번까지 관용을 베풀도록 한 점으로 미루어 베드로의 물음은 파격적이다. 그런데 언감생심,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고 하셨다. 우리 속담에 "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 사회에도 세 번쯤 참아주는 '삼 세 번의 미덕'이 필요한 시절이다.

신경하 감독회장(기독교대한감리회)

 

이름값

 

최근 교황청에서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여호와)'를 공식 예전이나 공공예배에서 함부로 쓰지 말도록 지침을 내렸다. 대신 '주님'이라는 표현을 쓸 방침이라고 한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는 이름이 없다.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나다"라고 하신 뜻을 히브리어로 모음 없이 자음으로만 쓴 게 'YHWH'인데 이것을 각국어로 조금씩 달리 발음하다 보니 우리말로 '여호와'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그런 발음조차 삼가며 "아도나이(주님)"라고 부르고, 헬라어로 쓰인 신약에서는 "키리오스(주님)"라고 일컫는다.

 

인간의 욕심을 채우려고, 자기 정당화를 위해 신의 이름을 도용하거나 예배의 주인을 도구로 삼는 것은 큰 죄악이다.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실명으로 대고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 값을 매기게 하자. 차명과 가명을 버리고 진실하고 투명하게 '나는 나'임을 밝히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화이부동

 

가정이든 나라든 구성원간에 갈등이 팽배한 사회는 결코 발전할 수 없다. 반면 서로를 존중하고 화합하는 모습은 성숙한 가정, 선진국의 조건이 된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말이 있다. 남과 화합은 하지만 흔들리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진리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취할 태도 중 하나가 바로 이 화이부동적 삶의 자세이다. 진리를 만난 사람은 결코 유아독존적인 자세에 머물러 있지 않다. 포용과 관용으로 상대방을 품는 여유와 깊이가 풍겨난다.

 

이번주 서울 성북동에서는 필자가 섬기는 교회와 길상사, 성북동성당이 연합으로 이웃돕기 바자회를 개최한다. 서로 다르지만 사랑으로 함께할 수 있는 봉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마음을 품고 온 교우들이 참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더 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할 것으로 기대하며 지역사회에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를 기도하고 있다.

손인웅 목사(덕수교회)

 

탐욕의 무덤

 

광야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공급을 경험하며 기적과 더불어 살았다. 하늘양식 만나를 매일 아침 공급받았고 반석에서 터져나온 생수를 마셨다. 하지만 그들은 만족하며 감사하기보다 고기를 요구했다. 더 나아가 과거의 애굽 종살이를 미화하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대로 광야의 메추라기를 몰아주었지만 결국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도 전에" 그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욕심을 내었던 자들이 그 광야에서 장사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장소를 '기브롯 핫다아와', 즉 탐욕의 무덤이라 칭하게 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넉넉한 자들이 작은 것을 탐하다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는 말씀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

정승룡 목사(대전 늘사랑침례교회)

 

빈곤 퇴치는 사명

 

세계경제가 향후 몇 년 동안 지금보다 악화될 것이라는 보도가 연일 이어진다. 미국 집값의 거품 피해가 당사자들을 넘어서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의식주 문제(25:3738)로 더 고통을 받게될 것이 분명하다.

 

오늘은 세계빈곤퇴치의 날이다. 서울 덕수궁 돌담길에서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천사의 손을 의미하는 '화이트 밴드 감기' 모임이 열린다. 국민 소득의 0.7%를 가난한 나라에 원조하자는 세계적인 합의가 있지만, 우리나라 원조수준은 0.06%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양 손을 만드신 이유는 한 손으로는 열심히 벌고, 다른 손으로는 열심히 베풀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넘치는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모든 착한 일도 넘치도록 해야 할 때이다(고후 9:8).

권오성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하나님이 쓰시는 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이 매스컴에 소개된 적이 있다. 정말 흉측하게 생겼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겨진 이유를 듣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하루 10시간 이상씩 연습으로 발레신발 150여 켤레를 닳아 떨어뜨린 연습벌레의 발이었다. 연습과 공연 때면 그녀의 발가락은 갈라지고, 물집 잡히고, 곪는단다. 그렇게 흘러내린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2짜리 생수병을 들고 다닌다고 했다. 뭐가 이토록 그녀를 발레에 미치게 만들었을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발 모양이 따로 있다. 먹거나 희생 제물로 쓸 수 있는 정결한 짐승을 구분하는 기준이 바로 발의 모양에 있었다(11). 굽이 갈라진 발이었다. 그것은 자기중심의 삶과 구분된 헌신의 발을 뜻한다. 여호와 앞에 갈라진 발. 갈라지고 물집 잡히도록 전적으로 헌신하며 뛰어다니는 열정이 만든 발. 그런 발을 필요로 하신다.

강대일 목사(안양성결교회)

 

인생의 진화

 

인간은 갓난아기 때 단맛을 먼저 알고, 짠맛, 신맛을 배운 후에야 비로소 쓴맛을 배운다고 한다. 독성이 있는 물질에 들어있는 쓴맛을 가장 늦게 배우는 이치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가장 늦게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되는 셈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잇값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자기의 책임의식보다 남의 탓을 하는 사람에게 잘 드러난다. 그들은 자기 마음에 불평이 쌓일 때 그것을 남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에 기쁨과 평화, 희망이 사라졌다고 해서 남을 탓하는 것은 유치한 태도이다.

 

옛 말에 화복동문(禍福同門)이라고 했다. 화와 복은 모두 자신이 불러들인다는 말이다. 사실 내게 쌓이는 불평과 불만은 바로 내 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기 안에 뿌린 사랑의 결실 때문에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랑 때문에 인생은 나이가 들수록 진화한다. "믿음은 살아 있고 배우는 공동체 속에서 영속된다."(알브레히트 쉔헤르)

신경하 감독회장(기독교대한감리회)

 

위기와 신앙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는 세계 금융시장의 산실이다. 철옹성 같고, 무소불위의 금권을 자랑하던 현대판 레비아탄(악마, 또는 괴물)이 휘청거린다. 거대 강국인 미국이 7000억달러의 금융구제안을 내놔도 정상을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야단법석이다.

 

뉴욕의 금융위기 강풍이 전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하고 있다. 한국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하지만 강풍을 가라앉힐 만한 묘약이 안 보인다. 구제금융 금액이 적어서도 아니고, 돈이 없거나 물건이 없어서도 아니다. 심리적 불확실성 때문이다. 신뢰의 부족 또는 불신 탓이다. 다시 말해 신뢰의 상실이 가장 큰 문제다.

 

삶의 진정한 행복은 몸과 영혼을 맡길 수 있는 신뢰의 힘에서 나온다. 인간세계 가운데 역사하시면서 동시에 역사를 초월해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확고한 신앙만이 살길이다. 하나님을 진실로 찾고, 구하고, 그 문을 두드리면 된다. 지체할 필요가 없다.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하나님의 경제

 

성경은 물질을 배척하지 않는다. 대신 그 물질을 다루는 사람의 자세를 중요시 여긴다. 하나님 대신 물질을 의지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물질을 추구하는 사람에 대해 성경은 '어리석은 부자'라고 정의한다(12:20). 모든 재화(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청지기일 뿐이다. 제 아무리 그럴 듯해 보이고, 잘나가는 듯해도 주인을 속일 수 있는 청지기는 아무도 없는 법이다.

 

월가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며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그들의 철옹성은 주저앉았다. 그들을 향한 세계인들의 '믿음' 역시 무너졌다. 분수를 넘어선 부()의 독점과 대다수 사람들의 가난과 굶주림을 외면한 월가와 자유방임주의 경제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다. 이제는 모래 위에 집을 쌓는 허사를 버리고 진실과 신용의 반석 위에 새 집을 지어야 할 때다. 3의 길을 모색할 때인 것이다.

손인웅 목사(덕수교회)

 

작고 사소한 죄

 

빈 건물의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면 연이어 옆 유리창도 깨진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그 건물은 범죄의 온상이 되고 인근에 범죄가 속출하면서 일대가 무법천지로 변하게 된다. 이것을 소위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이라 한다.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1982년 발표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작은 무질서를 가볍게 여기다 보면 더 심각한 범죄가 생겨난다는 것, 사소한 실수를 제때 고치지 않으면 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내면의 사소한 죄를 가볍게 여기다보면 큰 죄를 불러오게 된다. 이 원리는 미시적으로 대인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며, 거시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통용된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5:9)는 성경의 경고에 귀기울여야 할 것 같다.

정승룡 목사(대전 늘사랑침례교회)

 

천하보다 귀한 생명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되느냐를 두고 수정란, 배아줄기 세포 생성, 인간 형체 형성, 출산 이후라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다. 하나님의 것인 생명을 나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제 마음대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는 한 인간의 생명을 세상 천하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소중하게 여기셨다(8:36). 내 생명이든, 남의 생명이든 죽여선 안된다. 생명은 일단 훼손되면 인간 능력으로는 회복시키거나 대체하거나 돌이킬 수 없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기 연예인의 자살로 지난 주간 내내 마음이 무거웠는데 아직도 세상은 테러와의 전쟁, 범죄에 의한 죽음이 여전하다. 빛도 못보고 죽는 낙태아 때문에 안타깝고, 세계 사형폐지의 날(1010)인 오늘도 사형수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생명이 공학의 대상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평화의 세상이 오기를 기원한다(10:10).

권오성 목사(한국기독교회협의회 총무)

 

감사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감사다. 감사는 한 마디로 '과분한 마음'이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공을 자신의 투자나 능력이 아닌, 다른 이유로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고백에서 감사의 정신은 출발한다. 그러기에 갑작스러운 횡재나 행운은 감사의 요건이 못된다. 오히려 감사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러 나간 이들에게 적절한 덕목이다.

 

성숙한 영적 열매는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운동선수는 연습량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고 기능공은 훈련의 반복에 따라 성취 여부가 결정되듯, 그리스도인의 감사 역시 훈련이 필요하다. 특히 행복에 겨울 때보다 시험과 어려움 속에서 더 잘 연단된다. 그러기에 감사는 자기 자신의 고마움으로 그칠 수 없다. 내 가정은 물론 이웃과 세상을 향해 그 기쁨을 나누는 것이 감사다.

신경하 감독회장(기독교대한감리회)

 

만족할 수 있는 길

 

6·25 직후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70달러에 불과했다. 그런데 현재는 거의 2만달러로 300배 가까이 잘 살게 됐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300배의 만족을 느끼며, 마음이 풍요로울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300배의 풍요는 있어도, 오히려 마음은 더 빈곤해진 것 같다.

 

자살로 죽는 인구가 교통사고로 죽는 인구보다 더 많다는 통계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내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다. 자기가 필요한 정도를 적당 선에서 정해놓지 않으면 우리의 소유욕은 끝이 없이 자란다고 한다. 많이 벌어 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다. 비천과 풍부는 절대적으로 내가 정한 기준에 달려 있다. 고무줄같이 늘어나는 가변적인 기준이 문제다. 채워서 만족하려 들지 말라. 나만의 기준을 빨리 정하는 게 만족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강대일 목사 (안양성결교회)

 

죽음의 죽음

 

마르틴 루터는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을 만들어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켜 '죽음을 죽이고' 이긴 것이라고 했다. 십자가와 부활은 '죽음을 죽인' 사건이다. 따라서 '죽음의 죽음'은 강력한 부활의 메시지임에 틀림없다.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은 뒤 약속받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교두보일 뿐이다. 다시 말해 죽음은 이 땅의 생명과 하늘의 생명을 연결하는 다리다. 그 다리는 안전해야 한다. 이 땅에서 복되게 사는 웰빙(well-being)과 함께 하늘 생명을 향한 복된 죽음(well-dying)이 값진 삶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불안이다. 요즘에는 우울증으로 통한다. 불안이나 우울증은 홀로 살면서 걸리는 질병이 아니다. 함께 살지만 잘못 살기에 생긴다. 우울증을 죽일 수 있는 약은 기쁨의 상생이다. 신앙은 상생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우리도 함께하는 복음이다.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생명사랑 밤길 걷기 운동

 

2006년 한국은 OECD 국가들 중 헝가리에 이어 세계 2위 자살국이 됐다. 한해 1688명이 자살을 한다니 하루 28, 51분에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셈이다. 이 같은 높은 자살률은 이제 자살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섰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마디로 자살은 우리 사회 전체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풀어야 하는 공동체적 과제가 된 것이다. 심각한 자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없다면 한국 사회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는 영원히 잊혀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1010일 저녁 7시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리는 생명사랑 밤길 걷기 운동은 좋은 캠페인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밤길을 걸으며 동이 트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인생의 밤길을 헤치고 희망의 새아침을 맞는 생생한 경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캠페인과 운동이 사회 곳곳에서 펼쳐져 자살 예방과 함께 생명존중의 문화가 확산되었으면 좋겠다.

손인웅 목사(덕수교회)

 

거룩한 투쟁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톱스타가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감당했어야 할 삶이 얼마나 무거웠으면 사랑하는 아이들과 가족들을 뒤로 한 채 세상을 떠나야 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한편으론 우리 사회에 독버섯처럼 펴져가고 있는 자살 문화에 분개를 느낀다. 심리사회적으로나 경제사회적 요인으로 자살의 증가를 분석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려는, 생명 경시의 배후에 역사하는 악한 영의 세력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공동체는 자살 문화에 정면으로 맞서는 거룩한 투쟁을 해야 한다. 지치고 힘든 영혼들이 마실 수 있는 생명의 맑은 샘물을 보다 적극적으로 흘려보내는 신성한 노력을 해야 한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36:9)

정승룡 목사(대전 늘사랑침례교회)

 

구세군 선교 100

 

120여년 전, '영혼을 찾아 세상으로 가라. 그것도 가장 악한 사람에게 가라'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구원에 대한 열정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이 뜨거운 마음은 영국 전역에 부흥회와 전도집회를 불러 일으켰고, 빈민가의 고통받는 자들을 섬기는 데로 향했다.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군대'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구세군(Salvation Army)이 탄생하게 된 계기다.

 

구세군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자선냄비'부터 떠올린다. 그래서 구세군을 복지기관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교회 수보다 구세군 산하 사회봉사기관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구세군은 교회다. 진정으로 건강한 교회다.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라고 고백하며 부흥과 봉사라는 두 바퀴로 고통받는 자들을 향한다(딤후 2:3). 우리의 신앙을 풍성하게 만들어 온 구세군대한본영의 100주년을 축하한다.

 

권오성 목사(한국기독교회협의회 총무)

 

안전이라는 미신

 

인생에서 위험은 어디에든지 있다. 만일 살면서 어떠한 위험도 당하고 싶지 않다면 다음의 것을 꼭 지켜라.

자동차를 타지 마라-사망 사고 원인의 20%나 된다. 비행기나 기차나 배로 여행하지 마라-모든 사고의 16%를 차지한다. 거리를 걸어다니지 마라-모든 사고의 15%가 거리에서 일어난다. 집에 있지 마라-모든 사고의 17%가 집에 있는 중에 발생한다. 인생에서 안전한 장소는 아무데도 없고 위험 부담이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안전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미신이다. 위험을 피하는 것이 감수하는 것보다 안전하지 않다. 인생은 대담하게 모험을 하든지, 아무것도 아니든지 둘 중 하나다." 당신의 지금 목표가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는 것인가? 만약 있다면, 그 다음은 걱정하지 마라. 그냥 움직여라. 나머지는 주님께서 책임지신다.

강대일 목사(안양성결교회)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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