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교회의 역사

 

 

 

인류의 역사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어 많은 이들이 그들의 일생을 역사를 연구하는데 바쳤지만 역사의 기본적인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질 수 없었다. 역사를 인식하려면 반드시 기본 원칙과 노선을 정해야 한다. 먼저 우리는 역사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이 인류의 모든 생존과 행동을 지배하고(행 17:26), 그 목적이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완성하기 위한 것임을 보아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셨으며, 또한 그분의 승천 안에서 면류관을 얻으셨고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인류와 만유의 주가 되시어 온 우주를 관리하고 계시며(행 10:36),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경륜을 완성하시고(행 2:36), 또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시어(계 1:5), 세상의 정세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의 환경을 안배하시어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계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위대한 일을 완성하시도록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배경이 되는 로마 제국을  예비 하셨다. 열국은 바벨론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한편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득죄 함으로써 결국 주전 600년경에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헤파하고, 많은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아가게 되었고 그들은 조국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바벨론의 패권은 메대 바사 왕조로 넘어갔다. 주전 300년경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메대 바사를 정복하고 그 당시의 통치자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삼십여 세의 나이에 불과하였다.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그의 제국은 분열되었다. 지중해 주위의 열국을 지배했던 제국이 없어지자 로마 제국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쟁과 동란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점진적으로 로마 제국은 특별히 줄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통솔 하에 주위에 있는 열국들을 패배시켰다. 줄리우스 카이사르의 생질의 아들이면서 양자였던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anus)는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이로 인하여 지중해 주변 모든 땅이 로마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주전 27년에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얻고 로마의 제1대 황제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아우구스의 통치기에 출생하였다. 누가복음 2장 1절은 "이때에 가이사 아우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라고 말한다. 주 예수님은 첫 번째 정식 황제의 통치 하에 출생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로마가 난동을 일으킨 지역에 내린 명령은 주 예수님이 인류 가운데 평탄하게 출생하실 수 있게 하였다. 당시 흉악범에 대한 로마의 사형 방식인 십자가도 주님의 죽음에 대한 성취되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복음의 개척은 동일한 언어와 단일화된 통치, 그리고 사방으로 열린 도로와 로마가 세운 질서로 말미암아 매우 편리하게 진행되었다. 비록 신약은 거의 모두가 유대인이 쓴 것이었지만(누가만 유일하게 예외였음.) 헬라어로 쓰였지 히브리어로 쓰이지 않았다. 심지어 로마 제국이 일어나기 이전, 주전 3세기경에 히브리어로 쓴 구약도 이미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헤라어 70인 역(the Septuagint)"으로 불리는 이 번역본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70명의 학자들이 번역한 것이다. 주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수차 인용하신 성경 말씀이 바로 헬라어 70인 역이다.

                 

로마가 정복한 영토는 주 단위로 구분되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 주, 아시아 주, 아가야 주와 마케도니아 주이다. 이러한 주들은 로마에 예속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한받지 않고 자유롭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선박이 지중해를 오갈 수 있었다. 내륙의 운송 방면에 있어서도 로마인은 제국 전체를 관통하는 도로를 건축하였다. 동시에 약탈을 통제하였기 때문에 여행은 매우 안전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타 지역으로 복음을 개척하러 나가는 것은 매우 편리하였다. 로마 시민들도 법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일찍이 이러한 권리를 표명한 적이 있었다. 그는 채찍질을 당할 상황에서 백부장에게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행 22:25)라고 정중하게 물었다. 이에 천 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 줄 알고는 그를 결박해 놓은 것을 두려워하였다(행22:29). 후에 바울은 자신의 동포인 유대인들이 베스도 앞에서 그를 고소할 때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권리를 내세워 황제에게 상소할 것을 요구하였다(행 25:11). 그는 이것으로 인해 보호를 받았다.

 

세계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설령 인류의 역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세상의 정세와 하나님의  움직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세계정세는 바로 하나님의 안배 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민족이든 그 민족의 시기를 정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 일을 하거나 저 일을 하도록 정하시며, 각 나라의 영토를 확정하시고(행 17:26) 왕조를 흥왕 시키시고 멸망시키신다. 이것은 성경에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환경을 안배하시는 이유는 그분의 경륜을 완성하기 위한 것으로,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다음 네 가지를 위한 것이다. (1) 구속을 성취함, (2) 복음을 확산함, (3) 신약의 완성된 사역을 전파함, (4)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함.

 

1). 초기 교회의 배경-고대 로마 제국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은 주님의 위임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다 온 땅과 사마리아에서부터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그중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에 맛디아가 사도 직분을 잇게 되었다(행 1:26). 초대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사도들은 후에 세 조로 분류되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마태와 바돌로매는 흑해 일대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도마와 시몬과 다대오는 중앙아시아의 파티아로 갔으며, 요한과 빌립은 소아시아로 갔다.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교회사도 도마가 파티아로 갔고 안드레는 수구디아로 갔으며 요한은 아시아에 남아 있다가 얼마 안 있어 에베소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비두니아 및 아시아로 돌아다니며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고 마지막에 로마로 돌아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고 한다.

2).간략하게 본 로마 제국사

로마는 이탈리아의 중부에 있으며 주전 753년에 티베르(Tiber) 강에 연접한 일곱 개의 언덕 위에 세워졌다. 교회사에서 로마는 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천 년 동안 로마의 수도였던 이 도시의 구석구석에는 초기의 사도들, 믿는 이들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복음과 진리의 전파를 위해 흘린 피와 땀으로 얼룩져 있다. 주전 7세기에 에트루리아인들(Etrurians)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로마를 점령하고 왕국을 세워 왕정을 실행했는데, 역사는 이를 "왕정 시대"라고 칭한다. 왕정 시대의 사회는 귀족과 평민, 두 계급으로 나누어 있었다. 명의상 왕은 사법과 행정의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권은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Senate)이 쥐고 있었다. 주전 509년 경에 라틴인들이 에트루리아인들의 통치를 물리치고 왕정을 폐지한 뒤 공화정이 수립되었는데, 역사는 이를 "공화정 시대"라고 칭한다. 주전 264년부터 146년까지 로마는 계속해서 카르타고, 시리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을 정복하였고 빠른 속도로 영토를 확장하여 대제국이 되었다. 주전 54년에 줄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브리튼을 평정하고 훗날 제국의 전제 정치의 기초를 닦았다. 줄리우스가 죽은 뒤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일어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ukus Antonius)를 물리치고 혼란스러운 삼두정치(三頭政治)를 마감하였다. 또한 주전 27년에 원로원에서 명명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귀한 사람)"라는 칭호 하에 옥타비아누스는 정식으로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3). 로마 제국의 세 시기

로마 제국 시대는 세 시기, 곧 전반기 로마 제국, 위기의 3세기, 후반기 제국 시대로 나뉜다.

(1) 전반기 로마 제국(주전 30년~주후 193년)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주전 30년~주후 14년), 클라우디우스 왕조(주후 14년~68년), 플라비우스 왕조(주후 69년~96년), 안토니우스 왕조(주후 96년~193년)를 포함한다. 전반기 로마 제국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였다. 상업이 발달하고 통상 범위도 확대되었다.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한 대농장 제도는 후퇴하였고 대지주의 대농장이 소작인에 의해 경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유 농의 수가 줄면서 변동이 심하여 사회 불안의 요인이 잠재되어 있었다. 이때 제국의 국경은 동으로는 유프라데스 강으로부터 서로는 스페인, 브리타니아(Britannia)까지 이르렀고 남으로는 북아프리카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다뉴브 강과 라인 강까지 이르렀다.

(2) 위기의 3세기(주후 193년~284년)

세베루스 왕조(주후 193년~235년) 및 그 후 분열된 시기를 포함한다. 이 당시 제국의 위기는 경제 방면에서 충분히 표출되었는데 농업과 수공업이 쇠락하고 상업과 도시경제가 불황이었다. 정치 방면에 있어서 통치계급 내부에 분열이 있었고 백성들이 봉기하였으며 이민족이 침입하였다. 기독교가 신속하게 발전하였다는 것은 위기가 사람들의 정신세계에까지 깊게 침투하였다는 것을 반영한다.

(3) 후반기 제국 시대(주후 284년~476년)

​이러한 제국의 위기는 결국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당시 로마제국은 원수제(Princeps)에서 군주(Dominus)로 전환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약 주후 243년~313년)와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약 주후 280년~337년)의 통치 시기에 황제의 권력은 강화되었고 두 사람은 노예제도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개혁에 힘을 다했으나, 노예제도의 위기는 날이 갈수록 더하였고 백성들의 봉기는 전국으로 퍼졌다. 395년에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주후 346년~395년)가 죽은 뒤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할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로마를, 동 로마 제국은 비잔티움(Byzantium)을 각기 수도로 정하였다. 4세기 이후 게르만 민족이 대대적으로 로마를 공격하였고 국내에서는 백성들의 봉기의 물결이 더욱더 높아졌다. 410년에 게르만 민족의 서고트족(Visigoths)이 지도자 알라리크(Alaric)의 인도 하에 이탈리아로 들어와 로마 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다. 성 내부에서 봉기를 일으킨 서고트족의 노예들이 성문을 열어 서고트족이 로마성을 공격해 들어왔다. 육일 밤낮 동안 서고트족이 로마 성을 약탈하여 즉시 모든 거리가 피로 물들었다. 일찍이 전 세계를 장악하였던 이 성이 이제는 오히려 약탈당하였다. 그 후 게르만 민족이 로마의 영토에서 많은 왕국들을 계속해서 세웠다. 이와 동시에 노예를 핵심으로 하는 백성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로마 제국은 멸망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게르만 출신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Odoacer)가 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mulus Augustulus)를 축출하여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고 이후로 서유럽은 봉건사회로 들어가게 되었다. 동 로마 제국은 다른 역사적 조건 하에서 1453년까지 존속하였다.

4).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 제국의 열 번의 주된 박해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의 잔혹함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바이다. 5세기의 교회 역사학자인 오로시우스(Orosius)는 로마 제국의 박해를 네로(Nero),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트라얀(Trajan), 아우레리우스(Aurelius), 세베루스(Severus), 막시무스(Maximus), 데키우스(Decius),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us),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로 나누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네로 황제의 박해는 매우 잔혹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동물의 가죽을 입혀 원형 경기장에서 야수에게 갈기갈기 찢기게 하거나 그리스도인을 건초와 함께 묶어 야외 파티 장소를 밝히는 횃불로 삼았다. 교부 클레멘트(Clement)의 기술에 따르면 바울과 베드로는 네로의 박해로 순교하였다고 한다. 네로가 죽은 뒤, 도미티아누스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는 동시에 백성들에게 자신을 주와 신으로 존칭할 것을 요구하였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도미티아누스의 재위 시에 밧모 섬으로 유배되어 계시록을 썼다고 한다. 그 후에 트라얀 황제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을 처형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의 통치기에 예루살렘의 감독인 시메온(Symeon)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안디옥의 감독인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사자에게 물려 죽었다. 서머나의 감독인 폴리캅(Polycarp)도 피우스(Antoninus Pius)의 재위기에 순교하였다. 161년부터 222년까지 교회는 매우 큰 박해를 받았는데,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이 시기에 살해당했다. 그 후 30년 동안 박해가 잠시 중단되어 그리스도인들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250년에 데키우스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포기하고 로마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명을 내렸을 때, 많은 이들이 느슨하고 안일하게 되어 참된 믿음을 버렸다. 그러나 260년부터 303년까지 교회는 다시 급속히 발전하였고 인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303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로마 시민에게 통일된 신앙을 요구하였다. 그는 성경을 불태우라는 명을 내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거나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을 것을 강요하였고, 또한 제사에 드린 술을 시장에서 파는 음식에 뿌려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배반하든지 굶어 죽든지 한 가지를 선택하게 하였다. 이 박해 기간에 살아남은 교회 역사학자인 에우세비우스는 박해자의 폭행과 순교자의 사적을 친필로 기록하였다. (한국복음서원 교회사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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