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사] 로마 천주교의 형성
로마 천주교의 형성
1). 콘스탄티누스 대제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 AD 274-337)는 원래 태양신 헬리오스(helios)를 숭배하였으나 그의 어머니 헬레나(Helena)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퇴위한 뒤 로마는 내전의 혼란 가운데로 빠져들었다. 306년에 브리타니아의 로마 군대는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옹립하고 브리타니아와 골(Gaul) 그리고 스페인을 통치하였다. 막센티우스(Maxentius)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다스리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를 공개적으로 적대하였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 기록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312년에 막센티우스와 싸우기 전, 정오에 "이 기호 안에 승리하리라!"라고 쓰인 불타는 십자가를 보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를 그의 군대의 깃발로 삼아 물비안 다리(Mulvian Bridge)에서 막센티우스를 대패시키고 로마 제국 서쪽의 새로운 맹주가 되었다.
그다음 해인 313년에 콘스탄티누스는 밀란 칙령(Edict of Milan)을 반포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큰 신앙의 자유를 주었고 또한 박해받던 시기에 강제로 빼앗겼던 재산을 돌려주었으며 그가 통치하던 영토 내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제재와 박해를 금지하였다. 밀란 칙령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교를 이긴 이정표를 세웠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극소수의 유대 민족 단체와 그 구성원이 대부분 교육을 받지 못한 가난한 백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삼백 간의 공포와 피비린내 나는 박해와 이단의 사악한 공격을 거친 뒤 이러한 성장과 결과를 갖게 되었다. 많은 방면에서 그 요인을 해석할 수 있는데, 그 주된 요인은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라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분명한 해답은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평강의 보호였다.
324년에 콘스탄티누스는 천하를 통일하고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였고, 또한 그다음 해에 신하와 백성들에게 기독교를 신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교회는 '양'에 있어서는 증가가 있었지만 '질'에 있어서는 손실이 있었다. 밀란 칙령의 반포는 비록 교회사의 전환점이 되었지만 그것이 가져온 좋지 못한 영향은 수문을 열어 놓은 것과 같이 세상의 부패한 조류가 이 수문을 통하여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한 것이다. 과거에 교회는 묵묵히 고난을 받으며 승리하였으나 이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을 복음 전파의 수단으로 삼아 목적을 이루었다. 오늘날까지 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가 회심한 동기에 대해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있다. 한 측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옹호한 것은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었다고 여긴다. 다른 한 측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그의 어머니 헬레나와 물비안 다리 전투의 영향으로 스스로 개종한 것이라고 믿는다.
2).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인정함으로 가져온 영향
(1). 기독교가 국교가 됨
콘스탄티누스의 지지로 기독교는 합법적인 종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어 교회와 성직자들은 각 방면에서 특권을 누렸다. 이로 인해 많은 사병과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교회에 가입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새롭게 가입한 회중들 가운데에는 옥석(玉石)이 함께 섞여 있어서 교회는 점진적으로 세속화되어 계시록에서 언급된 세상과 연합한 버가모 교회가 되었다. 동시에 믿는 이들의 수가 증가됨으로 인해 교회는 대규모의 공개적인 집회 장소를 찾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성전이나 신전 같은 건물을 집회 장소로 사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인들이 평상시 장사를 하거나 기타 집회를 하던 장소와 원래 법정이 소재하였던 정부의 건축물(Basilica)을 그리스도인들이 집회하고 예배를 드리며 세례를 베푸는 큰 예배당으로 개축하였다.
(2). 정치와 교회의 혼합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후, 정부는 교회에 대하여 정치적인 기대를 갖게 되었고 이러한 기대는 특별히 백성들을 통합하는 구심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수도 주의, 도나투스 주의(Donatus), 아리우스 주의 등의 신학적 논쟁이 교회에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사회에 영향을 미쳐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황제는 325년의 니케아 회의, 아리우스의 논쟁에 관한 회의 등 논쟁을 해결하는 회의의 소집인 이 되었다. 이것 외에도 주교는 더욱 많은 권리를 부여받았고, 로마 백성의 정신과 생활의 실질적인 인도자가 되었다.
(3) 잘못된 교훈으로 인해 교회 안에 누룩이 생김
기독교가 국교화됨으로 말미암아 이교의 신앙과 풍속이 점진적으로 교회 생활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이교의 절기와 사악한 교훈은 마치 마태복음에서 언급된 여인이 가루 서 말속에 몰래 집어넣어 그 전체를 부풀게 한 누룩처럼 교회를 부패하게 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원래 태양신을 섬겼으나 주님을 믿은 후에는 매주의 첫째 날을 '태양일(Sunday)'로 정했으며, 또한 원래 태양신 탄일인 12월 25일을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이라고 하였다. 초기 교회에서의 떡 떼는 실행은 번거로운 의식이 되었고 경배의 실재가 없는 '미사'와 '성찬'의 의식이 되었다. 게다가 성인(聖人)에 대한 숭배와 성인의 유물에 대한 미신적 신앙, 그리고 외적인 종교 의식은 점차 믿는 이들로 하여금 기존의 순수한 신앙과 경건한 생활을 잃어버리게 하였다. 이때 국교가 일어나고 초보적으로 신학이 발전된 것 이외에 로마 교회의 조직 구조와 교황 제도도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니케아 회의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의 주교는 교구를 초월하는 성(省)의 주교로 지정되었다. 로마 교회와 주교는 계속해서 천하를 호령하였는데, 그들은 로마 교회가 사도 베드로가 친히 세운 교회로서 사도 베드로의 주교 직분을 계승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로마 교회는 수차례 그노시스파, 아리우스파, 몬타누스파 등의 이단에 맞선 경험이 있었다. 더구나 로마의 지리적, 정치적 우월로 인해 로마 교회는 초기 교회들 가운데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로마 주교도 스스로 기타 주교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다. 451년에 네 번째 대공 의회가 니케아 부근의 칼케돈에서 소집되었는데, 육백여 명의 주교들이 참가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께 완전한 신성이 있음을 재차 확인한 것 외에 다시 그리스도께 온전한 인성이 있음을 인정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께 신성과 인성이 있으나 이 두 본성은 서로 혼합되지 않고 서로 교환되지 않으며 나누어질 수도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 회의는 로마 주교의 우월한 권위를 더 견고하게 하였다.
3).니케아 후반기의 저명한 교부와 저서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까지 서방 교회의 세 명의 뛰어난 교부는 암부로 시우스(Ambrosius), 제롬(Jerome),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이다. 그들은 "라틴 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니케아 신경의 전폭적인 지지자였던 암브로시우스는 박사로서 저술한 활동을 활발히 하였고 성시(聖詩) 보급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숭고한 도덕적인 생활의 간증을 용감하게 강조하였고 심지어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의 폭력 행사에 대해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공개적으로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성찬을 받을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하였다. 제롬은 340년에 달마티아(Dalmatia)에서 태어났고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행적은 로마 제국 전체에 미쳤다. 말년에 그는 예수님께서 출생하신 베들레헴으로 와서 죽기까지 동굴에서 은거하며 수도생활을 하였다. 제롬은 서방 교회에서 히브리어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불가타(Vulata)"라고 불리는 이 라틴어 성경 번역본은 후에 로마 천주교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354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북아프리카 타가 스테(Thagaste)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 모니카(Monica)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 16세 때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의 가장 큰 도시인 카르타고에서 공부하였으나 타락한 생활을 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위해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였다. 그가 밀란에서 수사학과 연설학의 교수로 있을 때 밀란의 주교는 암브로시우스였다. 그는 새로운 마음으로 암브로시우스의 말씀을 듣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수도사들이 성결한 생활을 하는 간증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 어느 날 그가 로마서 13장 13절과 14절을 읽을 때 성령께서 그를 감동시키시어 회개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밀란 주교의 교의 기초반에 신청하도록 이끄셨다. 이로부터 그는 430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온 마음으로 교회 봉사에 참여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 가운데에서 정하신 구원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참회록>과 <하나님의 도성>이다. 전자는 초기의 그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삶에 대한 고백과 구원에 대한 심령의 깊은 곳의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후자는 이교도들의 고소에 대항하기 위해 저술한 것으로 후대의 기독교의 가장 뛰어난 교리 변호 서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신학은 중세기 로마 천주교의 기본 틀이 되었고, 마르틴 루터와 기타 개신교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일깨움을 얻었다.
4). 교회가 점진적으로 부패됨
계시록에서 요한이 일곱 교회에 쓴 일곱 서신으로부터 교회가 이미 부패되기 시작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 시대는 약 1세기 말에 끝났고 사도 시대 후반기의 교부들의 저서로부터 교회가 부패되었다는 상황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후 사백 년 동안 상황은 갈수록 심해졌다. 5세기 말에 이르러 성경에 부합하지 않는 많은 교의와 활동들, 예를 들면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 연옥, 순교자 및 성인 숭배, 마리아 숭배, 성직 계급 등이 이미 교회에 뿌리를 내렸다. 숭배 의식은 갈수록 복잡해졌고 말씀은 갈수록 감소되었다. 그 원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화되어 응당 가져야 할 생활의 간증을 잃어버리고 죄 가운데 있는 즐거움을 찾는데 있다. 또 다른 원인은 그리스도 및 사도에 대한 교회의 무지와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게다가 당시 이교의 실행과 사상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각 방면에 침투하였다. 특히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은 수많은 이교도들을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세상의 조류가 교회 안의 생명을 삼켜버리게 하였다. 교회가 표면적으로 승리한 그때가 오히려 교회가 크게 시험받은 가장 위험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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