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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사] 초기 교회의 역사

 

 


초기 교회의 역사

 

1). 로마에서의 바울과 베드로의 발자취

오순절 이후로 교회들이 세워지고 복음이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일대에서 로마의 전 영토로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예루살렘의 큰 박해로 인해 제자들이 각지로 흩어졌는데, 먼저는 시리아의 안디옥에 이르렀고 이어서 시리아, 길리기아, 아시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등으로 확산되었고 결국 이탈리아의 로마에까지 이르렀다. 사도행전 18장은 아굴라와 부리스길라가 원래는 로마에 거했는데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의 박해로 인해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거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일찍이 두 번 로마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62년에서 64년 사이에 유태인의 고소로 인한 것이었다(행 28:17-20). 그 기간에 그는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그리고 빌레몬서를 썼다. 자신을 위한 변호에서 승리를 거두고 석방된 뒤 바울은 다시 에베소와 마케도니아를 방문하였고(딤 전 1:3) 그곳에서 디모데전서를 썼다. 바울은 67년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할 때 두 번째로 투옥되었고,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순교하기 전에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후서를 썼다. 교회사에 있어서 바울은 진리 방면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가 쓴 열네 서신은 하나님의 뜻을 매우 안전하게 계시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하는 그의 사역은 요한의 보수하는 사역과 베드로의 사람을 얻는 사역과 함께 신약의 3대 사역이다. 진리를 변호하고 신성한 계시를 전파하는 사역에 있어서 바울의 일생은 향기로운 전제와 같이 후세 사람들의 믿음의 일에 부어졌다. 그리하여 주님의 일이 더욱 힘차게 전진하게 되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도 일찍이 로마를 방문하였고 또한 바울과 거의 동일한 시기인 네로의 제위기에 로마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클레멘트, 오리게네스(Origenes), 이그나티우스 등과 같은 많은 초기의 교부들은 그들의 서신 가운데에서 이 일을 언급하고 있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는 더욱 분명하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클라우디우스가 통치할 때 하나님의 인자와 은혜로운 안배로 위대하고도 능력 있는 사도 베드로가 로마 성으로 가도록 인도 받았고, 그는 그곳에서 용감하게 앞장서서 이 악한 무리들(사기꾼 시몬을 가리킴)을 대항하였다. 베드로는 신성한 군복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존귀한 장군과 같았고 당시 동방에서 서방으로 놀라운 계시의 빛을 가득 가지고 온 사람이었다. 그는 빛과 유익한 교훈을 전했고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였다."

 

 


2). 초기 교회의 신앙과 실행

초기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통 안에 견고히 머물며 지속적으로 이집 저집에서 떡을 떼며 기도하였다. 박해로 인해 믿는 이들은 대부분 소규모로 집에서 집회를 하였다. 바울이 교회에 쓴 서신에서 우리는 이미 "경륜', "분배" 등의 단어와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성화(聖化) 의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후반기의 교부들의 저서에서 이러한 진리들에 언급이 점차 적어졌으며  심지어 사람들에게 잊히게 되었다.   초기 교회가 보편적으로 준행한 "12사도 유훈(遺訓)"에는 단지 생명을 얻는 길과 사망에 이르는 길, 그리고 침례, 금식, 만찬 등의 실행 상의 규례만을 기록하고 있고, 곳곳에서 그 당시 경건에 대한 가르침과 도덕을 중시한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12사도 유훈"의 제14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일에 여러분이 집회에서 떡을 떼고 축사할 때 여러분의 죄를 자백해야만 그 후에 여러분의 제물이 정결케 될 수 있다. 무릇 동반자와 다툰 자는 그들이 다시 화목하게 될 때까지 다른 이들과 집회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그러나 침례, 금식, 떡을 떼는 것등의 실행은 세부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의문과 형식에 치우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3).초기 교회의 내부적인 어려움

외부의 압력 이외에도 초기 교회는 이단의 해를 입었고 논쟁으로 인한 분열의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 두 방면은 교회의 생명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반드시 과거의 이단을 인식함으로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하고, 동시에 과거에 있었던 분열이 가져온 피해를 경계로 삼아 하나의 간증을 유지하는데 노력을 다해야 한다. 교회가 가장 초기에 직면한 이단은 에비오니즘(Ebionism)이다. "에비오니"의 원문의 뜻은 '빈궁'이라는 뜻이다. 교부 터틀리안(Tertullian)의 해석에 따르면 그들이 에비오니파로 불린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너무 빈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에비오니파에 있어서 주된 것은 유태인의 신앙이었는데, 그들은 기독교를 유태화 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강조하였는데, 비록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으나 그분이 육체가 되신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종으로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수복과 성결함으로 인해 그분을 아들로 인정하셨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단지 신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지 실제적으로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도세티즘(Docetism)은 에비오니파와 거의 동시에 출현하였다. 이 파는 물질세계가 악하다고 믿었기에 성결한 본체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물질에 속한 육체를 취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육신에 대하여 매우 다른 견해를 가졌다. 그들은 성육신이 진정으로 발생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육신은 단지 하나의 환영(幻影)으로 사람들에게 일종의 환각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분이 실제적으로 물질세계 가운데 출현한 것과 세상 사람들이 본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환영에 불과하며,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고통받은 이는 실제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단지 환영일 뿐이라고 여겼다. 사도 요한이 쓴 복음서와 서신서에서도 항상 이들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이들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이상의 두 이단보다 더 체계적이고 깊게 영향을 미친 것은 그노시스주의(Gnosticism, 영지주의)이다. 그노시스주의는 기본적으로 동방의 이원론과 신비 신앙 및 헬라 철학의 혼합체이며, 후에 다시 기독교의 외투를 걸친 것이다. 바울 시대에 고린도와 골로새 교회에는 이미 그노시스파가 출현하였다. 그노시스파는 주후 80년에서 150년 사이에 형성되었으며 마지막에는 교회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스스로 한 계파가 되었다.

교회가 그노시스파의 해를 처리하는 데 분주할 때 또 다른 극단주의가 출현하였다. 이 극단주의는 몬타누스주의(Montanism)이다. 몬타누스주의는 140년 경에 일어났는데, 성령의 능력과 선지자의 강론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예수님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끊임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선지자를 통해 인류에게 계시하고 있다고 여겼다. 성령의 실재성을 특별히 중시하였기에 그들은 스스로 완전한 성결의 생활을 살아야 된다고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거의 고행에 가까웠다. 그들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항상 금식하였으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열렬히 기다렸고 또한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주님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단의 출현에 대응하기 위하여 교부들은 기독교의 기본 신앙을 체계적으로 표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세하게 해석하였다. 이처럼 교회의 정통 신학은 점진적으로 형성되었고 성경의 정경(正經)도 동시에 확립되었다. 약 1세기의 발전을 거친 뒤 정통 신학은 주후 325년에 이전에 없었던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하였는데, 이는 바로 아리우스주의(Arianism)의 출현이었다. 그것은 가장 격렬한 신학 논쟁 가운데로 빠지게 하였고, 신학도 이로 인해 이성화되고 분석화되었으며 논쟁으로 가득한 색채를 띠게 되었다. 당시 교회는 이로 인해 분열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논쟁을 거치면서 그 정기는 크게 손상받았다. 아리우스(Arius, 256년~336년)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는데, 그는 그리스도가 자존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며, 성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에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시지 않았다고 믿었다. 이러므로 성자와 성부의 본질은 차이가 있기에 신성한 삼일성의 진리는 이로 인해 동요되었다. 이 이단을 처리하기 위하여 교회는 이전에 없었던 큰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는 325년에 니케아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적지 않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리우스를 지지하였으나, 결과는 정통 신앙이 승리를 거두었고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은 그 본질이 같고 동등하며 동일한 영광을 갖고 있다는 진리도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풍파가 가라앉자, 또 다른 풍파가 일어났다. 논쟁의 초점은 삼일성의 위격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로 이전되었다. 먼저 문제를 일으킨 이들은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s)였는데, 이들은 *경교(景敎)의 선구자였다. 네스토리우스파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분별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나누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성을 단지 신성을 담는 용기로만 여기는 데 있었다. 교회는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고, 그들의 신성과 인성이 나누어질 수 없으며 또한 이 둘이 연합한 것임을 믿는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리스도는 참된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참된 사람이시다. 네스토리우스파가 불러일으킨 논쟁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 대한 각종 논쟁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에는 그리스도께서 육체가 되신 후, 그분이 한 분이신가 두 분이신가, 단지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사람이신가, 하나님과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논쟁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교회는 많은 정력과 시간을 쏟아부었고 수많은 회의를 소집하였으나 논쟁할수록 더 복잡해졌다. 451년에 교회는 칼케돈(Chalcedon)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논쟁을 철저하게 해결하였다. 회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절대적으로 진실된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는 오직 한 인격이며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은 서로 함께 연합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 후에 정통 신앙은 더욱 분명한 표현을 얻게 되었고 또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져 논쟁이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4).초기 교회의 유명한 교부와 저서

이 시기의 교부들은 사도 후반기와 니케아 전반기의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사도 후반기의 비교적 유명한 교부들은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서머나의 폴리캅(Polycarp), 로마의 헤르마스(Hermas) 그리고 순교자 저스틴(Justin)을 들 수 있다. 니케아 전반기의 유명한 교부들은 이레니우스(Iranaeus), 터툴리안(Turtulian),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그리고 오리게네스(Origenes)을 들 수 있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제3대 로마 감독을 역임하였는데, 일찍이 고린도인들에게 서신을 보내 그들 가운데에서 장로를 내쫓고 당파를 결성한 혼란을 책망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클레멘트 서신"이라고 칭했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순교하러 가는 길에 일곱 서신을 써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높였고 믿는 이들이 자신들의 감독과 장로를 존중해 주기를 희망했다. 폴리캅은 일찍이 사도 요한의 제자였는데, 사도 시대와 니케아 전반기 사이에 있는 작가들 간의 중요한 교량이 되었다. 폴리캅은 견고하게 기독교를 보호한 사람으로 항상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당시 그노시스파의 이단인 마르키온(Marcion)과 논쟁을 벌였고, 주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86세의 고령으로 순교하였다. 로마의 헤르마스는 계시록의 형식으로 <헤르마스의 목자(The Shepherd of Hermas)>를 썼는데, 그 내용은 이상과 교훈 그리고 비유를 포함하면서 죄의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외에도 <바나바 서신(Catholic Epistle)>,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도들 서신>등이 널리 읽혔다. 폴리캅의 제자인 이레니우스는 로마 천주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이단에 반대하며(Against Heresies)>인데, 그는 여기에서 그노시스주의의 교훈에 반박하였으며 하나님의 삼일성에 관한 선구자가 되었다. 터툴리안은 북아프리카의 교부로 교리를 보호하는 수많은 작품들을 썼으며, 당시의 <아버지 하나님의 고난받음>이라는 이단에 반박하는유명한 <프락세아스에 반박하며(Against Praxeas)>라는 책은 삼일 하나님의 과점을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의 <인간론(De Anima)>은 성경 심리학에 관한 첫 번째 저서였다. 오리게네스는 교회 역사에 있어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신학자로서 그의 성경관과 삼일 하나님의 관점은 그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다. 오리게네스의 영혼론은 신비주의와 금욕주의의 영향을 받아 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543년 콘스탄티노풀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한국복음서원 교회사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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