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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사

로마교회의 전성기 (1073-1303)

이 시대는 일반적으로 그레고리우스 7세가 등장한 1073년경부터 보니파키우스 8세가 죽은 1303년까지의 기간에 해당하는데 로마교회가 최고의 영화와 번영을 누리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사상면에서나 제도면에서 교회지상주의가 구가되었고 십자군 전쟁 등으로 유럽 역사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1.서임권 논쟁

 

(그레고리 7세의 교황권 회복 투쟁)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세기의 교회정치가 퇴폐 일로를 걷고 있을 때 등장하여 교황권과 로마교회를 개혁한 인물이다. 그는 중세 교황 중에서는 가장 탁월한 인물이었다. 당시 교회 상황을 보면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매우 복잡하고 암담했던 상황이었다. 외부 사정을 볼 것 같으면, 독일 황제는 권력을 이용하여 로마 교회의 내정을 간섭하였으며, 교황 및 감독의 임명을 좌우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국내 정세는 카를 대제의 사후 국왕의 권력이 약화되어서 사실상 대제후(영주)들이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교회는 영주의 손에서 그 흥망이 결정되었다.

 

또한 교회의 내부 사정을 볼 것 같으면, 교회는 부패하여 탐욕과 모략과 음모가 끊이지 않았고 폭력과 암살이 난무했다. 축첩 시대에 잇달아 일어난 교황 폐위 사건 등으로 인해 11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교황청의 권위가 완전히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1044년에서 1046년 간에는 대단히 보잘것없는 세 사람의 교황 베네딕트 9, 실베스터 3, 그레고리우스 6세가 동시에 교황이 되어 서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교회의 부흥과 교황권의 회복을 위한 개혁파가 일어났는데 그 대표자가 나중에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이 된 힐데브란트(1015-1085)였다. 그의 등장을 기준으로 로마교회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로 그는 로마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획기적으로 올려놓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 명의 교황이 서로 다투다가 황제의 간섭으로 세 사람 모두 교황직에서 쫓겨났을 때 힐데브란트는 그 중 한 명인 그레고리우스 6세를 따라서 독일로 추방되었다. 그레고리우스 6세가 죽자 그의 백부가 원장으로 있었던 클뤼니 수도원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각지를 순회하며 교황권 확립을 위해 힘썼는데, 투르의 감독 부르노가 황제 하인리히의 간청으로 교황직에 오르려고 로마로 가게 되자 그도 함께 가게 되었다. 로마인들의 환영 속에서 부르노가 로마에서 교황직에 오르자 헬데브란트는 교황청 부집사가 되었다. 그 자리는 외형적으로는 크게 유력한 자리는 아니었으나 힐데브란트는 그의 인격과 수완으로 교황과 다름없는 실질적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1054년 교황 레오가 죽은 후 몇대의 교황을 모두 그가 선정하다가 드디어 1073년에 힐데브란트는 자신이 직접 교황이 되어 그레고리우스 7세라 칭하였다.

 

교황에 취임하자 힐데브란트는 교회의 지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혁명적 조치를 취하였다. 그는 교황인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리고 베드로의 대표로서 제국과 왕국, 공국(公國), 후작령, 심지어 모든 사람의 소유까지도 다 취할 수 있으며 다시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땅에 사는 사람이면 황제로부터 비천한 농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권위에 순종하도록 만들려고 하였다.

 

또한 모든 성직자로 하여금 독신 생활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성직자들이 누리던 모든 세습적 특권을 빼앗고 오직 모든 것을 교황에게 의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횡행하고 있던 성직 매매를 엄금하였다. 당시 파렴치한 고위 성직자들은 영적 자격 유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최고 입찰자에게 성직을 팔아버리는 일을 빈번히 행하였다.

 

그러나 힐데브란트의 최대 싸움은 평신도의 성직자 임명권(Lay Investitue)을 둘러싼 것이었다. 봉건법에 따르면 봉신(封臣, 騎士)은 토지를 소유하는 대가로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법률적 권리를 인정받는 의식을 행했는데 이것을 서임식(敍任式)이라 하였다. 이런 원칙은 성직자에게도 적용되어 고위 성직자가 땅이나 영토를 취득할 때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임식의 절차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힐데브란트는 클뤼니 수도원의 원칙에 따라 교회 일에 대해 세속 권력이 간섭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여, 성직자는 세속 통치자의 재가 없이(즉 서임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취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성직자를 임명하거나 교회에 속하는 토지나 재산을 감독하는 권한을 국왕이나 제후에게서 빼앗아 교황의 권한 아래에 둔 것이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는 교황은 국왕을 지배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태양과 달이라는 두 빛을 세우신 것처럼 땅에도 교황과 국왕이라는 두 권세를 세우셨는데 그 중 교황은 태양과 같고 황제는 달과 같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그는 당시 독일 황제(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독일 왕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황권 확장 정책을 크게 반대했다. 만일 그레고리우스의 뜻대로 모든 교회 재산 감독권이 교황에게로 넘어가게 되면 당시 독일 제국 토지의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던 교회 감독들과 신부들의 땅은 교황 수중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이는 곧 황제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하며 독일 제국의 주권은 크게 침해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는 교황의 반대파와 결탁하여 보름스 종교 회의(1076)에서 교황의 폐위를 결정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 역시 그해 6월에 회의를 소집하여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파문을 당한 황제를 돕는 자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이렇게 되자 영원한 형벌을 두려워한 민중들이 아무도 황제를 섬기려 하지 않았으며 음식이나 피난처조차 제공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어려움과 아울러 제후들의 권고 등으로 인해 하인리히 4세는 결국 굴욕을 참고 일년 이내에 교황과 화해하기 위해 그해 겨울 부하들을 거느리고 알프스를 넘어 교황이 머무르고 있는 카놋사로 찾아갔다. 황제는 맨발과 참회자의 초라한 복장을 하고 눈덮힌 궁전 뜰에 3일을 서 있어야 했다. 4일째 되는 날에 비로소 교황은 그를 받아주었다. 황제는 교황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며 자비를 구하여 사면을 받았다. 이것이 소위 {카놋사의 굴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카놋사의 굴욕은 표면상으로는 교황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하인리히 황제의 정치적 승리였다. 황제는 독일의 정적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교황이 주재할 아우스부르그 회의를 못하도록 막아버렸고 교황의 다른 계획도 좌절시켰다. 그러나 이 카놋사 사건은 독일 제국이 교회의 권위 앞에 심한 굴욕을 받았다는 인상을 남겨주게 되었다. 교회의 출교 해제가 있자 황제의 정적들은 10773월에 루돌프 공을 세워 내란을 일으켰으나 하인리히 4세는 루돌프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황제에게 반대했던 제후들에게 보복을 가했다. 그러자 교황은 10803월에 로마 회의에서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에 처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독일 국민의 동정이 국왕에게로 쏠려 파문이 효과를 내지 못했고 황제는 이 기회를 타서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하고 클레멘트 3세를 교황에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아예 교황을 죽일 생각으로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3년이나 걸려서 로마를 점령했고 10855월 남부 이탈리아 살레르노의 한 산성에 숨어 있던 교황을 찾아내어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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