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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운동

 

A.십자군 운동이 일어나게 된 근본 동기

 

중세 기독교의 십자군 운동은 매우 특이한 사건으로서 신앙적 정치적 경제적 원인이 복합되어 일어난 것이다.

우선 신앙적 원인을 살펴보면, 이전부터 기독교 신자들은 신앙적 돌파구를 찾고자 할 때 그 한 수단으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등의 성지를 순례하였는데 638년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점령된 후로는 그 순례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고 1071년 터키군이 소아시아의 대부분과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부터는 아예 성지 순례가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불만이 고조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정치적 원인을 살펴보면, 이전에 동방에서 이슬람교도에게 패했던 기독교인들은 그 무렵 이슬람교도들과 싸워서 이기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1060-1090년 간에 남부 이탈리아이 노르만족은 시실리아를 빼앗았고 페르디난드 1세는 이슬람교도들에게서 스페인을 되찾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서유럽 국가들의 국민들 간에는 이슬람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으며 그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험심과 약탈 욕망, 영토 확장욕 등의 세속적 충동과 합쳐져서 십자군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경제적 원인을 살펴보면, 11세기 유럽의 곤고한 상황을 주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970-1040년 간의 48년이 흉년이었고 1085-1095년 간에는 사정이 더 악화되어 사회적으로 불안과 참상이 널리 퍼졌다. 이런 상태를 벗어나 보려는 욕망이 민중들 가운데서 팽창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러한 경제적 곤란은 종교적 열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수도 생활과 금욕 생활을 추구하였고 현세보다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간절히 가지게 되었으며 그 종교적 열정으로 교황청을 개혁하고 성직 매매와 성직자의 결혼 등과 같은 타락을 제거하고 교회와 국가 간의 권력 싸움에는 교회 쪽에 힘을 불어넣는 작용을 하였으며 더 나아가 십자군 운동과 같은 명분 있는 신앙적 투쟁에 기꺼이 몸을 바칠 수 있도록 만들었다.

 

 

B.십자군 운동의 직접적 발생 동기

 

 

동로마 황제 미카엘 7(1067-1078)는 셀주크 투르크족의 소아시아 점령을 두려워하여 로마의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당시 로마 교황권 확장에 열중이었던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이 동방교회(헬라 정교회)가 서방교회(카톨릭)와 연합하려는 시도인 줄 알고 1074년에 하인리히 4세에게 파병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서로의 임직식 관계로 좌절되었고 나중에 교황 우르반 2세가 시행했다. 그는 동방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터키 군대의 위협을 감당할 능력이 없음을 자인하고 원조를 요청했을 때 원조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10953월 북부 이탈리아의 피아쎈짜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그해 11월에 클레르몽에서 다시 회의를 열어 십자군 원정을 호소했다. 이에 신자들은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참여키로 했고 교황은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자의 모든 죄를 사면해 준다고 선언했다.

 

  

C.십자군 운동의 진행

 

 

1차 원정 때는 어느 나라도 왕은 직접 가지 않았다. 은둔자 베드로가 인솔한 오합지졸이 먼저 출발하고 브와롱의 고드프리, 뚤루즈의 레이몽 백작, 노르만디의 로베르, 벨망드와의 위고 같은 지도자들이 30만의 십자군을 이끌고 큰스탄티노플을 거쳐서 10976월에 니케아를 함락시켰고 에뎃사와 안디옥을 점령했다. 그리고 10996월에는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격전 끝에 715일 드디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812일에는 이집트의 이슬람교 원정군을 격퇴시키고 성지 회복에 성공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장기적 방어를 위해 일종의 신정 국가 형태의 예루살렘 왕국을 수립하고 보와롱의 고드프리(Godefroy of Bouilon)를 성묘보호자(聖廟保護者;Protector of the Holy Sepulachre)라는 이름의 왕좌에 앉혔다. 고드프리는 11007월에 죽고 그의 동생 볼드윈이 예루살렘 라틴 왕국의 공식적 첫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1146년 에뎃사가 이슬람군에 의해 함락되었으므로 예루살렘 왕국은 매우 위험하게 되었다.

 

 

2차 십자군은 당시 명성 높던 베르나드(St. Bernard)가 모집하고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드 3세의 협조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1147년 원정을 떠났으나 전과 같은 열정이 없는 대부분의 군인들은 소아시아에서 죽고 소수의 남은 십자군은 1148년 다메섹을 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그들은 이 참패가 동로마제국의 제후들 탓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동방에 대한 서방의 감정만 악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왕국은 약 40년간 명맥만이라도 유지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슬람교도들 간의 내분 때문이었다. 그러나 1171년 아시아 남서부의 쿠르드 출신 이슬람 장군인 살라딘이 일어나서 1174년 다메섹을 점령하고 1183년에는 그의 영토가 예루살렘 라틴 왕국의 동쪽과 북쪽, 남쪽을 두르게 되었다. 그리고는 11877월 드디어 하틴에서 라틴 군대를 격파하고 예루살렘과 성지 대부분을 점령하고 말았다. 이 재난의 흉보를 들은 유럽인들은 민심이 크게 흥분되어 제3차 십자군을 일으키게 되었다.

 

 

3차 십자군은 1189년에 조성되었다. 3차 십자군은 이전의 어느 십자군보다 많은 준비를 하였다. 당시 용맹한 군인 출신의 독일 황제 프레드리히 1(1152-1190 재위)와 프랑스 왕 필립(1179-1223), 그리고 영국 왕 리차드(1189-1199)가 대군을 거느리고 성지를 향해 떠났는데 독일 황제는 소아시아까지 가서 이코니엄 강에서 목욕을 하다가 익사를 하고 말았다. 가장 용맹한 지휘관을 잃은 군대는 사기가 떨어졌고 기타의 문제들로 인해 군대는 예루살렘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프랑스와 영국 왕은 서로 점령지에 대한 분쟁 문제로 싸웠고 그러던 중 프랑스 왕은 본국에서 자기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도중에 돌아가 버렸다. 그런 가운데서 영국 왕은 살라딘과 싸우다가 3년간 휴전 협정을 맺었고 살라딘으로부터 성지 순례자는 괴롭히지 않는다는 약조를 받아내고는 전쟁을 끝내고 말았다.

 

 

4차 십자군은 1202년에 있었는데 그 병력의 숫자는 보잘것없었지만 그 정치적 종교적 결과는 중요하였다. 이 십자군은 인노센트 3세가 주장하여 프랑스 북부 샴페인, 블로와, 프랑드르 지방에서 모집되었는데 그들은 예루살렘 점령의 첩경은 이집트 정복이라고 확신하고 베니스 상인들과 그곳으로의 군대 수송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 운임을 조달할 길이 없어서 교활한 베니스 상인들의 제안대로 도중에서 헝가리로부터 짜라라는 도시를 빼앗아 베니스인들에게 주게 되었다. 그 후에도 십자군은 동방 제국의 왕위 찬탈에 개입하여 알렉시우스 3세를 폐위시키는 등 성지 회복이라는 본연의 목적과 거리가 먼 정치적 술책에 휘말리게 되었다.

 

 

4차 십자군은 엉뚱하게도 동방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교회의 보물을 탈취하여 서방으로 가져왔으며 거기에 라틴제국을 세워 볼드윈을 왕으로 삼았고 큰스탄티노플 대주교를 로마 교회 계통으로 세워서 로마 교회에 예속시켰다. 이로 인해 동서방제국과 교회간에는 증오감만 쌓이게 되었다.

 

 

5차 십자군 운동은 소위 [소년 십자군]으로서 매우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목동 스테반과 독일 소년 니콜라스가 수만명의 소년들을 모아 출전했으나 이슬람군대에 의해 크게 참패하고 이탈리아로 흩어졌으며 많은 숫자가 기아로 죽거나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다.

 

 

6차 십자군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 때 독일 황제 프레드리히 2세가 인솔하여 원정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원정을 계속 미루다가 마지못해 잠시 떠났다가 금방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이에 교황은 황제를 파문했으나 그는 1228년 다시 출전하였고 이슬람군대와는 싸우지 않고 이집트의 술탄과의 협상을 통해 향후 10년간 휴전한다는 약속을 받았고 예루살렘과 나사렛, 베들레헴을 얻고 1229년 귀환했다.

 

 

그러나 잠시 기독교도 손에 들어왔던 예루살렘은 1244년 다시 이슬람교도 손으로 돌아갔고 이 때문에 프랑스왕 루이 9세는 제7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군사들 대부분은 살해되고 루이 자신은 많은 속전을 내고 살아 돌아오는 신세가 되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온 루이는 1270년 다시 군대를 이끌고 튜니스로 향했으나 그곳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와 동시에 영국의 에드워드 1(1272-1307년 재위)가 아직 황태자 시절인 1271-1272년 사이에 원정을 하여 아크레(Acre)로 진군하고 나사렛을 점령하였다. 그는 협상으로 약 10년간의 휴전을 얻어내고 돌아왔다. 그후 십자군 운동은 없어지고 결국 기독교는 성지를 회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1291년 예루살렘은 완전히 이슬람교도들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그후에도 십자군 운동에 대한 약간의 거론이 있었으나 십자군 운동은 완전히 포기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교황을 제외한) 모든 유럽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수한 열정으로 이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불순하고 복합적인 이유로 이 운동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이 운동은 그럴듯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갖은 부도덕과 약탈과 살육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 운동은 분명한 성령의 인도를 따른 것이 아닌 것으로 증명되고 말았다. 이 일은 영적 일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일이었으며 종교적 일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D.십자군 운동이 실패한 원인들

 

 

첫째,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일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일어난 순리적이고 영적인 일이 아니라 당시 유럽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세속적 요인들로 말미암아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 운동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실패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교황에서 군사통솔권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일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주도한 일이었는데 그 책임자인 교황에게 군대와 군사권과 지략과 같은 전쟁 수행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병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도 없었고 이해가 상반된 각 나라의 군대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할 수도 없었다.

 

 

셋째, 출전한 귀족들과 기사들 간에 전쟁 참여 목적이 다르고 이해 관계가 상반되었기 때문에 온전한 원정이 될 수 없었다.

 

 

넷째, 복음을 위한 헌신적 정신으로 성지 회복을 주장했던 초기의 종교적 열정은 곧 식어버리고 계속적인 내분과 재물을 약탈하고자 하는 불순한 동기, 거칠고 저속한 군대의 행동들로 인해 군대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다섯째, 소년들로 구성된 5차 십자군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십자군 병력이 마음만 있을 뿐 훈련은 거의 되지 않은 오합지졸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잘 훈련된 기병과 지리에 익숙한 원주민들로 구성된 이슬람 군대를 근본적으로 상대할 수 없었다.

 

 

 

E.십자군 운동이 남긴 것

 

 

십자군 운동은 처음 목표와 관련하여서는 실패한 운동에 지나지 않았으나 중세 유럽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첫째, 이 운동은 유럽 각 국민의 단결을 촉진시켰고 기독교회가 하나의 목적 아래 단합과 통일이 되는 기회를 가지게 만들었다.

 

 

둘째, 십자군 운동은 적어도 이슬람교가 더 이상 서방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셋째, 이 전쟁으로 인해 많은 귀족들이 죽거나 재산을 잃음으로써 봉건제도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대신 중산 사회가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재정적 정신적 인적 손실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었다.

 

 

넷째, 대규모의 군대와 물자를 장기간에 걸쳐 수송하는 가운데서 해운의 발달이 촉진되고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지중해 연안 도시가 번영하게 되었다.

 

 

다섯째, 서방 출신 십자군이 동방으로 왕래하는 가운데서 유럽 사회가 동방 문화에 깊이 접촉하게 되었고 서방 세계의 정신적 지적 시야가 크게 넓어지게 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야만인들이 동방의 고대 문화와 훌륭한 도시들을 보고 크게 각성함으로써 서구의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의 발전 계기가 마련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전후하여 중세기 신학의 최고봉인 스콜라신학이 나오게 되었다.

 

 

여섯째, 십자군 운동의 결과 로마 교회의 수입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것은 상공업이 발달하게 됨으로써 도시 상인 계급들이 점점 부유하게 되어 교회를 위해 많은 헌금과 그릇, , 비단, 금은을 기증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십자군 원정 때 교회가 면죄부를 많이 팔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교회는 부해졌고 교황권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세속권을 많이 흡수하여 이전보다 많이 강화되었다.

 

 

일곱째, 십자군운동은 후대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에 의하지 않고 인간의 정치적 세속적 필요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한 종교적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고 부수적 유익을 준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은 가져오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십자군 운동은 이교도로부터 하나님의 세계를 지켜 보호하자는 기치 아래 일어났으나 실제로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지나 확장에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신자들의 영적 각성과 진보에도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사탄이 요소 요소에 개입하여 살육과 협잡과 혼란을 일으키도록 만든 점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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