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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 운동

 

스콜라 철학 제1기와 때를 같이하여 일어난 것이 중세의 신비 사상이다. 유럽 중세기의 사상계는 스콜라 철학과 신비주의 사상이 두 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 이 두 사상은 근본적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었다. 스콜라 철학의 뿌리는 신비 사상에 두고 있다. 둘의 대표적 차이는, 스콜라 철학은 추리를 중히 여기고 신비 사상은 직관을 중히 여기는 것과 스콜라 철학에는 객관적인 요소가 많고 신비 사상에는 주관적인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비적 사상가들 중에서도 차이가 있었으니 독일의 신비주의자와 프랑스의 신비주의자의 특성이 달랐던 것이다. 독일은 철학적이고 프랑스는 감정적, 시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A.독일의 신비주의 운동

 

 

독일 신비주의 사상가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신통주의(神通主義)]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강조하였으며 따라서 상대적으로 인간의 공허성(空虛性)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들의 약점은 영감으로 오는 체험을 성경보다 중히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1.에크하르트(Johannes Meister Eckhart, 1260-1327)

 

 

독일과 네델란드에는 거의 범신론에 가까운 쪽으로 기울어진 신비주의자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 근원이 된 사람은 독일의 에크하르트였다. 에크하르트는 중세 말기의 신비주의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로 꼽히며 독일 최대의 신비주의자로 꼽히기도 한다. 그는 15세에 엘푸르트에 있는 도미니코파의 수도원에 들어갔고 1293년 파리에 유학하여 1302년에는 신학석사가 되었다. 1311년에 파리에 교사로 파견되었다가 나중에 슈트라스부르크와 쾰른에서 교사와 전도자로 봉사했다. 생애 말년에는 그는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 혐의를 받았다. 그가 죽은 후인 1329년에 교황 요한22세는 그의 저서들에 나타난 28개의 전제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에크하르트는 도미니코파로서 스콜라적인 신념을 가졌던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에게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측면보다는 신플라톤주의적 측면을 받아들였다. 그가 정죄를 받게 된 것도 주로 신플라톤주의에서 나온 일련의 경솔한 진술들 때문이었다. 그는 철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승을, 신학에서는 아퀴나스는 따랐으나 강조점이 달랐다. 그는 또 어거스틴에게서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추상을 빌었으며, 플로티누스, 가짜 디오니시우스,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등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에크하르트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관계였다. 그는 만물에 있는 참 실재는 하나님이요, 사람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불꽃'(spark) 또는 '근저'(ground)가 들어있다고 했으며, 사람의 영혼은 그 속에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께서 완전히 거하시는 곳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안에 있는 이 참 실재 곧 하나님의 성질만 남기고 나머지 개성적인 인간적 특성들은 다 버려야 한다고 했다. 사람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살려내고 나타내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것이 곧 사람이 하나님과 완전하게 사귀는 것이요 내재하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노력의 모범이시며 그러한 예수 안에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성을 입으시고 거하였다고 했다. 하나님이 영혼을 주장하시면 영혼은 사랑과 의로 채워지며, 선행을 통해서가 영혼이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의로워진 영혼이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 생명을 충분히 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하기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아의 의지이며 우주에 편만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주관을 성부(聖父), 객관을 성자(聖子), 사랑을 성령으로 보았다. 그의 이러한 신비적 경험은 신플라톤주의의 용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범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에크하르트는 후에 자신이 과장된 표현을 쓰는 잘못을 범했다고 인정하였고 어거스틴주의와 아퀴나스주의의 교리에 근거한 정통적 설명들을 제공함으로써 논란이 되는 그의 주장들을 다른 방법으로 옹호하였다.

 

 

2.타울러(John Thauler, 1300-1360)

 

 

에크하르트의 가장 유명한 제자는 타울러였다. 독일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출생한 타울러는 도미니코파의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가 되었으며 에크하르트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1348년 영국에서 흑사병(임파선 페스트)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병자 구원에 전력을 기울여 더욱 유명해졌다.

 

 

타울러 역시 에크하르트처럼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내주(內住) 장소인 '불꽃' 또는 '근저'를 영혼 속에서 파악했다. 그러나 그는 조심스럽게 이 근저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영혼의 본래적 속성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영혼이 그 원천으로 돌아감은 은혜의 활동이며 인간 의지와 신적 의지의 연합을 동반하는 것이지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로 흡수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루터는 훗날 타울러의 설교를 순수 신학의 샘이라고 찬양했다. 루터의 찬탄을 자아낸 것은 타울러의 독특한 신비적 가르침이 아니라 고난과 자기 부인, 은혜 의존이라는 내적 신앙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었지만 루터의 이러한 판단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은 종종 타울러를 종교 개혁의 선구자로 본다. 이런 말을 들을 만큼 그는 신앙의 내적 생명력을 매우 강조하여 기독교 신앙이 외적 의식에 의존하는 것을 비난했다. 그의 설교는 하나님의 내재(內在), 내적 조명(照明)에 대해 많이 말했으며 복음적 사상이 강했다. 또 그의 사상은 실제적이어서 죄의 관념이 강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회개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또한 사랑과 자기 희생을 강조했다.

 

3.로이스부르크(Jan van Ruysbroeck, 1293-1381)

 

 

신비주의 신앙은 네델란드 플랑드르의 가장 탁월한 신비주의자 로이스부르크에 의해 더욱 커져갔다. 그는 오랫동안 브뤼셀에서 교구 사제로 지냈는데 은퇴 후 친구들과 제자들을 모아 그룬엔달에 어거스틴주의적 표준의 명상 공동체를 세웠다. 거기서 그는 그의 첫 저술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를 제외한 모든 책을 썼다. 그의 사상의 많은 부분은 신비주의자 하데비치(Hadewijch)에게서 나온 것으로, 하데비치는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관계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로이스브루크의 교훈과 신앙에 관한 체계적인 개요는 에크하르트의 저작들이 보이는 내성적인 성격과 대조적이다. 그의 대표작 [영혼의 결혼](1350)은 삼위일체에 관한 견해를 전개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찾는 영혼들을 위한 안내서이다. 그의 많은 저작들은 당시의 어거스틴주의자를 위해 씌어졌으나, 라틴어 번역서를 통해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는 15세기의 '데보티오 모테르나'(devotio moderna공동생활형제단의 창시자인 헤라르트 흐로테가 시작한 신앙운동)의 출현을 예고했는데, 그 운동을 대표하는 저술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리스도를 본받아]이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의 철학적 업적 때문이 아니라 그의 깊고 순수한 정서 때문이었다. 다른 신비주의자처럼 그 역시 내면 생활과 명상을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일치와 연합을 강조했다.

 

4.주조(Heinrich Suso, 1295-1366)

 

 

주조는 독일 베르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콘스탄스에 있는 도미니코파 수도원에 들어갔다. 쾰른에서 공부할 때 타울러와 만났고 에크하르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후에 그는 콘스탄스로 돌아와 수도원장이 되었다. 주조는 대개 신비적 연합을 신체의 연합보다는 의지의 연합으로 묘사하고 피조된 존재와 피조되지 않은 존재의 지울 수 없는 차이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구약의 잠언 가운데서 여성화(의인화)[영원한 지혜]를 상상과 동경의 대상으로 이후 일편단심 그것을 섬기는 생활과 명상의 생활을 하였다. 그는 수도자들의 정신적 지도자로도 이름이 나 있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명상집으로 지은 그의 저서 [진리의 소책자](The Little Book of Truth)는 후대의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보다 더 인기를 얻었다.

 

B.신비주의적 단체들

 

 

신비주의 사상은 비단 사상가들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들에 의해서 고취된 독일과 네델란드의 여러 영적 공동체들에 의해서도 널리 보급되었다. 특히 에크하르트, 타울러, 주조는 14세기 라인란트와 스위스에 있는 성직자들이나 평신도 신비주의 단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단체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친구](Gottesfreunde)라고 불렀는데 이런 단체들로부터 14세기 후반 익명의 신비주의 논문인 [독일 신학]이 나왔다. 이 책은 1516년과 1518년에 자신이 서문을 써서 발행한 젊은 루터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16세기의 재세례파와 영성주의자들(Spiritualist)은 이 책을 개혁의 기본 서적으로 애용하였다.

 

 

베긴회(Beguines)11세기 경에 이미 존재한 여자 독신 단체인데 공동 생활을 하였으며 검소한 옷을 입고, 함께 기도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힘써 돌보았다. 베가르드(Beghards)는 베긴회와 같은 성질의 남자 단체로서 방적업자를 비롯한 평신도들이 많이 속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견실한 생활과 자선사업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이들은 나중에 과도하고 과격한 성향을 띠게 되어 기성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했다. 그들이 정죄된 것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됨으로써 영적인 완성 상태를 누릴 수 있다는 것, 둘째, 이 거룩하고 온전케 된 사람은 성례적 은혜와 선행을 포함하여 종교의 모든 형식들을 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셋째, 그런 사람은 더 이상 교회법이나 심지어는 하나님의 도덕법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자가신론(autotheism;영혼과 하나님이 하나됨), 반율법주의, 급진적 영성주의(신앙 생활에서 모든 외적 도움을 제거함)를 주장한 것으로 정죄된 것이다. 성령의 인도에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이러한 주관적 신앙 태도는 결국 기성 교회와 교권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성직제도를 반대했으며 예배와 예식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마거리트 포레테라는 한 베긴회원 여성은 1310[순박한 영혼의 거울]이라는 책에서 위와 같은 이단적 생각을 개진했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다. 특히 자유신령파라고 불린 극단적 성향의 신비주의파들은 그 경향이 매우 급진적이어서 일반 신비주의자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다. 그들은 자가신론(自家神論)을 주장하였고 종종 해방된 영혼은 전통적인 구원 방식이 필요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인들과는 달리 완전에 이르는 길에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철저한 자기 부인이 필요하며, 완전케 된 사람들이 무절제한 생활을 하는 경우는 없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친구들]이라는 단체는 공동 생활을 하는 단체는 아니었다. 서로 인맥을 통하여 경건한 생활과 봉사를 위해 서로 돕고 장려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1348년 흑사병이 유럽을 돌 때 이들은 병자를 돌보고 위급과 혼란의 상태를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중세 말에 가장 널리 퍼지고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운동은 네델란드 동부에서 로이스부르크의 제자 헤라르트 흐로테(Geert Groote Gerhard, 1340-1384))와 흐로테의 제자 플로렌티우스 라데빈스(Florentius Radewijns, 1350-1400)에 의해 시작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곧 현대신심(現代信心, Devotio moderna)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1370년대와 1380년대에 흐로테와 라데빈스의 사역으로 설립된 세 공동체들 곧 데벤터에 설립된 [공동생활 자매회][공동생활 형제회](Bretheren of the Common Life), 빈데샤임에 설립된 [어거스틴 참사회(社會) 공동체]을 통해 펼쳐졌다.

 

 

데벤터 출신의 흐로테는 파리대학교에서 법학, 의학, 신학을 공부하였고 그 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그는 성직자가 아니면서도 많은 성직록을 보유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다가 1370년 회개를 체험하고 모니쿠이첸 수도원으로 들어가 생활하는 중에 라인란트의 신비주의자들 특히 로이스부르크의 저서들을 공부하였고 그 제자가 되었다. 그는 본격적인 수도 생활과 신비주의자 생활을 다 원치 않았기 때문에 부제로 임명받은 위트레흐트 교구에서 선교사와 설교자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당대의 부패, 특히 성직자들과 수도원들의 부도덕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1383년 설교 자격을 박탈당했다.

 

 

흐로테가 원래 지녔던 이상은 세속 사회를 떠나지 않은 채 신앙을 실천하는 공동 생활이었다. 이 이상에 가장 가까이 남은 사람들이 바로 라데빈스가 데벤터에 있는 자신의 총사제관에서 조직한 평신도 [공동생활 형제단]이었다. 이들은 주로 필사본을 베끼는 가난한 학자들로 구성되었다. 공동생활 형제단의 주요 활동은 네델란드와 독일의 도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신앙적으로 돌보는 일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그들은 특히 수도 생활 또는 성직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일부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고 형제단원들이 그들에게 신앙 교육을 할 수 있는 숙소들을 건립하였다. 형제단원들 자신들은 거의 대학 교육이나 신학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학교를 설립하거나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필사를 통해 유익한 서적을 보급함으로써 청년들의 신앙 교육에 힘썼다.

 

 

이 단체의 대표적 인물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와 요한 벳셀(Johann Wessel, 1420-1489)이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켐펜에서 태어났는데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12세부터 교육을 받고 1399년 형이 원장으로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 1413년 신부가 되어 이후 70년간 아그네스 산에 있는 빈데샤임파 수도원에서 수도하며 전도와 저술, 사본 정서(淨書), 수도사 지도에 힘썼다. 그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하였으나 사교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애를 거의 서재에서 혼자 조용히 책을 쓰며 보냈다. 그는 39권의 책을 썼으며 그 중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흔히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고 큰 영향을 미친 경건 서적으로 꼽힌다.

 

요한 벳셀은 흐로닝엔 출신으로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배웠다. 그는 토마스 아켐피스의 책을 읽고 또한 그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파리, 로마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그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교리를 이해하였으며 이를 가르치는데 명쾌하고 열심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데벤터에서, 루터는 마그데부르크에서 각각 공동생활 형제단원들이 교사로 있던 학교들에 다녔다. 그러나 형제단원들이 기독교 인문주의 또는 종교개혁의 직접적 선구자라고 볼 수는 없다. 공동생활 형제회와 자매회, 그리고 빈데샤임 수도회원들이 실천한 '새로운 경건'은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 관계에 대한 각성에 그 기초를 두었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을 강조하였으며,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의식들로부터 자양을 얻었다. '데오티보 모데르나'(현대신심) 운동가들은 비록 진보적이기는 했지만 반()성례적이거나 반제도적(反制度的)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경건을 가르침으로써 신앙의 형식주의와 교회의 부패를 극복하는 데에만 목표를 두었다. 더욱이 이러한 경건은 신부주의가 아닌 묵상을 그 성격으로 삼았다. 데오티보 모데르나 운동가들은 본격적인 신비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라인란트와 플랑드르 지방의 신비주의자들이 쓴 책들을 대체로 무시하였다. 이 보수주의적 경건이 남긴 가장 큰 열매는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고 할 수 있다.

 

 

C.프랑스의 신비주의 운동

 

 

12세기에 신비주의 신앙을 고취시키고 신비주의를 발전시킨 사람 중 대표자는 씨토(Citeaux) 수도원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이다. 프랑스 디종 근처의 퐁탱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22세에 그는 30명의 동지들을 데리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엄격하다는 씨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행한 3년간의 극도의 고행으로 그는 평생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로 지냈다. 그는 111512명의 수도사를 데리고 클레르보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워 원장이 되었고 거기서 평생을 지냈다. 그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비적 명상이 최고의 영적 기쁨이라고 생각하고 오직 극단적 금욕 생활을 근간으로 하는 경건 생활에 힘썼다. 그는 수도원에서 평생 지냈지만 대중 설교가로 나섰고 전도 여행을 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생활과 신앙의 영향력은 교황을 능가하기도 했고 1130년 추기경들은 그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분열된 교황청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제2차 십자군을 일으키는 제창자가 되기도 했다.

 

 

신학에 있어서 베르나르는 전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아벨라르의 자유사상과 싸웠다. 그의 사상은 신비적이었지만 단지 무한자(無限者)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그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사모하여 그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는 신앙적 신비였다. 그의 신학의 근본적 윤리적 원리는 겸손과 사랑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먼저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사랑하고 다음에는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일이 거듭되면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마침내 하나님을 위하여 만민을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베르나르의 이 신비적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명상함으로써 영혼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고 갈보리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명상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비적 사랑을 일으키고자 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고난은 베르나르의 철학과 신학의 총체이며 정수였다.

 

 

이러한 베르나르의 정신을 계승한 씨토(일명 Cistercian) 교단은 놀라운 확장력을 가지고 뻗어나가 13세가 중엽에는 1800개의 수도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가르침이나 목회 사역에는 비교적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금욕적인 경건의 모범을 끼친 것을 제외하면 그들이 사회에 끼친 주된 공헌은 광대한 황무지를 열성적으로 개간하여 농업에 종사한 것이었다. 그들의 수도원은 의도적으로 거친 벽지나 기독교 세계가 팽창하는 변경에 세워졌다. 그들은 농노 고용을 거부하였고 주로 평신도 형제들(conversi)을 이용하여 토지를 경작하였다. 그들은 또한 이교도 전도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그들의 금욕적인 성실함은 자연히 물질적인 번영을 가져왔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이 그들의 정신적 쇠퇴를 가져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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