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사] 중세의 교회사-교황제도의 확립
중세의 교회사
1. 교황 제도의 확립
1). 로마 교회의 배경
초기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발원하여 복음의 전파를 따라 확산되었다. 각지에서 일어난 교회들은 서로 수평적 관계에서 동등한 지위를 가졌다. 그러나 점차 로마 교회가 모든 교회들 위에 군림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모두 로마로 왔고 또한 모두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로마 교회로 하여금 영향력을 갖게 하였다. 당시 로마는 서방의 정치, 문화 그리고 경제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2세기 말에 소아시아 및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기독교의 세력은 갈수록 미약해지는 반면, 로마 교회의 세력은 갈수록 확장되었다. 이것 외에도 로마 교회가 이단에 성공적으로 대항했던 사실도 그들의 지도적인 위치를 크게 강화시켰다. 또 다른 방면에서 로마 교회는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난한 이들과 각종 재난에 처한 이들을 구제하는 것을 매우 중시했고 아낌없이 베풀었기 때문에 그들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러므로 각지 교회가 로마 교회를 교회의 머리로 받들지 않았지만 로마 교회는 그들 자신에게 권위가 있다고 자처하였다.
2). 로마 교권의 확립과 확장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제국을 통일하고 교회를 육성하는 각종 조치를 취했다. 먼저 319년에 법령을 발표하여 성직자들의 병역 및 납세 의미를 면제하였고, 321년에 다시 법을 세워 교회에게 유산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교회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은 330년에 수도를 동쪽 지중해와 흑해의 통로에 있는 노바 로마(Nova Roma, 새로운 로마)-콘스탄티노플-로 옮긴 것이다. 395년에 이르러 테오도시우스가 임종하기 전에 다뉴브 강과 아드리아 해역을 경계로 영토가 동과 서로 나뉘었다. 동쪽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였는데 역사는 이를 동 로마 제국이라고 칭하고, 서쪽은 로마를 수도로 정하였는데 역사는 이를 서 로마 제국이라고 칭한다. 동 로마 제국은 종교를 황제의 통제 아래에 두는 이른바 '황제-교황 일치 제도(caesaropapism)'를 확립하여 교회를 국가 교회로 발전시켰고 성상 파괴 논쟁 등을 거치면서 서방의 로마 천주교와 대립하였다. 동 로마 제국은 비잔틴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서 로마 제국은 라틴어를 주로 사용하였고 정치적 혼란과 이민족 침입이라는 상황 하에서 로마 주교가 백성들의 의지처가 되면서 실질적인 정치 지도자 역할을 했으며, 후에 교황으로 변하게 되었다. 452년에 훈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였고 455년에 게르만의 반달족(Vandals)이 로마를 공격하였는데,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교황 레오 1세의 간곡한 부탁으로 군대가 철수하였다고 한다. 476년 동고트족(Ostrogoths)의 오도아케르(Odoacer)가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서 로마 제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 후 수많은 이민족 왕국이 일어났다. 예를 들면 서 고트족(415-711), 동 고트족(493-554), 부르군 디족(443-542), 프랑크족(586-774), 롬바르드족(586-774) 등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 당시 이탈리아는 이민족 침입과 정치권력의 무질서로 로마 주교가 백성들을 보호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590년 교황이 된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가 로마의 공공사업을 정리하고 군대를 조직하여 롬바르드족을 몰아냈다. 야만족이 침입한 시대에 교회는 침략을 완충해 주는 주된 역할을 하였고, 동시에 긍정적인 영향을 더욱 발휘하여 야만족의 신앙을 바꾸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로 인해 로마 교황청은 갈수록 이탈리아의 가장 강하고 유력한 권력기구가 되었다. 그레고리 시대는 로마가 이미 고대 왕국에서 중세기의 로마 천주교가 통일한 기독교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임을 나타낸다. 그레고리는 로마 교회의 마지막 주교였을 뿐만 아니라 중세기의 첫 번째 교황이었다. 우리는 로마 교회의 지위와 교황의 세력이 서로 협력하면서 점진적으로 성장하였음을 볼 수 있다. 정치권력을 얻은 교회는 행정의 효율성을 강화하기 위해 국가와 유사한 조직을 만들 필요성을 점점 느끼게 되었다. 또한 이단의 침해를 방지하고 교리 상의 논쟁으로 일어나는 분열을 막기 위해 최고 권위를 가진 이가 교회의 신앙을 보호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로마 교회는 '사도들의 계보'를 강조하여 교황 권력의 이론을 점진적으로 형성하였다. 로마의 수위권을 확보하게 하고 베드로 좌에 등극한 최초의 실제 교황은 레오 1세인데, 그는 베드로가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대표이기 때문에, 교황은 베드로의 직접적인 계승자이고 모든 사도들의 머리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므로 그레고리 시대로부터 로마 교회는 서유럽과 북유럽의 각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교회를 세웠고 각지의 주교는 교황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졌고 교황의 명령을 들었다. 이러한 것들은 교황의 권력을 대대적으로 강화시켰다.
2. 수도원 운동이 일어남
3세기 말 4세기 초에 교회가 세곡화됨에 따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세속을 떠나 은둔하며 성결과 금욕의 수도 생활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을 통일하고 기독교로 귀의한 뒤, 시류에 편승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왔기 때문에 교회는 세속적인 것들과 혼합되었다. 당시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갈수록 형식화됨에 따라 많은 믿는 이들이 그러한 상황에서 나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영적 생활을 추구하였고 또한 은둔 생활을 하였다. 초기 교회의 가장 유명한 수도자는 안토니(Anthony)이다. 이집트 중부의 코마(Koma)에서 태어난 그는 285년경에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는데, 많은 이들이 그의 세속을 벗어난 생활에 매혹되어 그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그 후 파고 마우스(Pachomius)가 수도 생활을 더욱 개선하였고, 315년에서 320년 사이에 이집트 남부에 첫 번째 수도원을 세웠다. 수도원 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베네딕트(Benediict of Nursia)이다. 그는 480년 경에 태어났으며, 529년에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카시노(Caassino) 수도원 및 베네딕트 수도회 규칙을 세웠다. 수사들은 수도원에서 단체적으로 엄격하고도 청빈한 수도 생활을 하였다. 11세기까지 모든 수도원은 이 규정을 채택하였다.
3. 교황 제도의 발전과 부패
콘스탄티누스 이후 로마 천주교는 점차 그틀을 갖추었고, 그레고리가 교황에 오른 뒤 종신 교황제가 시작되어 중세기 교황 제도의 시작이 되었다. '교황(Pope)'은 원래 '아버지'라는 뜻이다. 로마 천주교는 마태복음 16장 18절을 근거로 베드로를 성경 가운데 첫 번째 교황으로 인정하였다. 이후 "교황 조서"와 교황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교황무오 론(無誤論)"으로 교황의 말이 성경의 권위와 동등할 정도로 높아졌고 교황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위가 부여되었다. 중세기의 교황 제도는 매우 부패하였는데, 교리적으로 사악한 이교의 실행으로 인해 누룩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타락의 극치에 이르렀다. 중세기의 교회사 가운데 많은 교황들이 음행을 범했다. 일부 소수 교황만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대다수의 교황들은 믿기 어려운 죄악을 범하였다. 뇌물을 받고 성직을 매매하고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암살하고 성경을 불태우고 성도들을 학살하는 일들을 수없이 저질렀다. 일부 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성직자들의 성적 타락을 빗대어 "포르노 크라시(pornocracy, 도색 정치)"라고 칭한다. 9세기에서 10세기의 교황 선출은 이탈리아의 몇몇 가문의 수중으로 떨어져 교황의 직위가 특정 가문에 세습되었고 결국 지위가 매매되는 상황으로 변했다. 심지어는 동일한 시기에 세 명의 교황이 출현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교황의 위신이 일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것 외에도 그들은 바빌론의 수많은 이교적 우상 숭배를 들여왔다. 로마 천주교는 '어머니와 아들', 즉 마리아와 예수를 숭배하였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들은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와 성모 그리고 성자를 숭배하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단지 어머니와 아들 만이 그들의 진정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교훈은 마귀에게서 온 것으로서, 그 목적은 이 교훈을 사용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고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교훈에 주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딤 전 4:1). 이는 마치 계시록에서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계 18:3)라고 말한 것과 같다. 어머니와 아들의 우상을 숭배하는 것 이외에 수많은 비밀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사후에 연옥에 들어가 겹겹이 쌓인 죄를 씻을 수 있다는 것과 무수한 성례를 지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등이다. 동정녀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은 381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마리아를 '하늘의 황후(天后)'로 숭배하였다. 4세기 말에 이르러 이러한 우상 숭배는 더욱 보편화되었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를 뛰어넘었다. 수많은 이방의 신전들이 대대적으로 복원되었고 보수되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의식도 새롭게 제정되었으며 여성 우상의 이름이 '마리아'로 개명되었다. 로마 성내 기독교 예배당이라는 곳에서 사람들이 엎드려 절하는 대상은 사실상 바빌론 교의 천후이다. 이는 천후가 주 예수님의 지위를 완전히 점유했음을 말할 수 있다.
4. 천주교 체제 하의 개혁
1), 교황청 자체의 개혁
11세기에는 교회가 타락하여 성직을 매매하고 정욕을 방종한 상황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교황 레오 9세(Leo IX, 1049-1054년 재위)는 개혁을 추진하여 초기 기독교의 성결함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레고리 7세(Gregory VII, 1073-1085년 재위)도 교황의 자리에 오르자 전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는 성직 매매를 엄격하게 금하였고 성직자 독신 제도와 교황의 권리를 확고하게 확립하였는데 이를 일컬어 "그레고리 대개혁"이라고 한다. 로마 교황청은 자체 개혁으로 위신을 다시 한번 높였다. 그 가운데 언급할 만한 일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카노사(Canossa)의 사건이다. 1075년 교황 그레고리 7세는 하인리히 4세(Heinrich, IV)에게 독일 국경 내에 있는 각 교회의 주교 임명권을 포기하라고 명령함으로 성직자 서임권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교황은 하늘로부터 성직자 서임권을 받았다는 말로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내고 하인리히 4세를 파면했다. 1077년에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Canossa)로 찾아가 눈 덮인 성 뜰에서 맨발로 3일 동안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며 자비를 구하여 비로소 사면을 받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당시 교황의 권력이 황제의 권력을 압도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수모를 당한 황제는 세력을 키워 로마를 공격하였고 숨어 있던 그레고리 7세를 찾아내어 죽였다. 12세기 때 교황청은 세속 정권과 계속적으로 권력 다툼을 해 왔는데, 몇 명의 뛰어난 교황으로 말미암아 교황청의 권력이 점차 우세해졌다. 인노 켄티우스 2세(Innocentius Ⅱ)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성공적으로 대항하였고, 에우게 니스(Euegenius) 3세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황제에게 교황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후에 교황이 된 알렉산더 3세는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하면서 영국 왕 헨리 2세로 하여금 자신의 명령을 따르게 하였다. 교황의 권력은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Ⅲ, 1198-1216년 재위) 때 극에 달하였다. 그는 어린 황제의 후견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 노르웨이, 영국을 포함하는 전 유럽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그의 재위기에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월권이 확고해졌다. 그는 또한 종교 재판소를 세우고 제4차 십자군 원정을 조직하여 비잔틴 교회의 통치권을 탈취하였으며, 제4차 라테란 회의(Lateran Council IV)를 거행하여 영적인 일과 세속적인 일, 양자에 있어서 무한한 권리를 지닌 교황이 되었다.
2). 수도회의 개혁
이때 교황청의 자체 개혁 이외에, 수도원에서도 개혁의 풍조가 일어났다. 10세기에 클루니(Cluny) 수도원이 주도한 수도원 개혁 운동은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11세기에 그레고리 7세가 추진한 전면적인 개혁과 10세기에서 12세기에 있었던 모든 개혁은 클루니 개혁 운동이라고 칭할 수 있다. 클루니 개혁 운동이 달성하고자 했던 목적은 베네딕트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을 회복하여 개인의 영적 생활을 배양하고 수사의 노동량을 가볍게 하며 예배 의식을 발전시키고 자체적으로 토지를 경작하여 자립함으로써 세속 군주와 제후 세력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수도원에서 나와 각지를 돌아다니며 전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몸에 금전이나 재물을 전혀 가자고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구제를 의지해야 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탁발 수도회(Mendicant Orders)"라고 불렸다. 이렇게 돌아다니며 전도하는 수도사의 무리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무리는 프란체스코회(Ffrancisans), 도미니크회(Dominicants). 가르멜 회(Carmelites),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Augustinian Orders)이다. 마르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였다. 이러한 수도회들은 모두 청빈하고 순복하는 생활을 하고 자선 사업과 기도를 중시했으며 엄격한 단체 생활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세기 개혁의 선구자가 되었다. 수도원 운동에는 은둔을 강조한 수도원과 각지를 돌아다니는 탁발 수도회가 포함된다. 이어서 몇 개의 유명한 수도 단체를 소개하겠다. "서방 수도 주의의 족장"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베네딕트 수도회는 열두 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성 베네딕트 회칙(Rule of St Benedict)" 을 세워 수도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의 수도 생활은 비교적 중용을 시켰는데, 흑암의 시대에 이민족에 대한 문화 전파에 매우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909년에 창립된 클루니 수도회는 지방의 영주나 주교의 통제를 받지 않고 로마 교황청의 직접적인 보호를 받는 것을 쟁취하였다. 그들은 각종 사회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많은 수도원들이 이러한 모형을 따라 세워지거나 혹은 서로 연합하였다. 그들이 비교적 부유하고 사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더 소박하고 원시적인 생활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시스터시 안 수도회(Cistercians)는 클루니 수도원 운동에 대한 반응으로 고행하며 수행을 한 수도원으로 유명하였다. 그들은 권력보다 선지자의 정신을 중시했다. 그들은 일을 신성시 했기 때문에 학술보다 노동을 강조하였으며 심지어 농업 발전의 선구자가 되었다. 시스터시 안 수도회는 12세기 말에 총 530곳에 수도원을 세웠고, 그 후 백 년 동안 계속해서 150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가장 유명한 수도사는 베르나르디 클레르보(Bernard de Clairvaux)이다. 그는 중세기 신비주의의 대표자인데, 성경에 익숙하였고 자신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그는 품행과 도덕 수준이 높았고 사랑이 많았으며 악한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유럽의 양심"이라고 불렸다. 1144년에 새로운 회교 세력이 일어남에 따라 베르나르는 그의 제자였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위임을 받고 성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십자군을 모집하였다. 이러한 원정은 후에 프랑스와 독일 두 국왕이 서로 협력하지 않아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자 민중들은 베르나르를 원망하였다. 베르나르는 구약의 모세를 예로 들면서 실패의 원인을 십자군의 정욕의 방임과 비잔틴인들의 약속 위반으로 돌렸다. 또한 더 나아가 콘스탄티노플을 응징해야 한다고 제의하였는데 이 제의는 제4차 십자군 원정을 촉발시켰다. 탁발 수도회의 수도 단체 중 가장 유명한 두 파가 있었는데, 한 파는 프란체스코회(Francisans)이고 다른 한 파는 도미니크회(Dominiciants)이다. 프란체스코(Francis Xavier)는 1209년 아시시(Assisi)에 세워진 소규모의 구걸 수사단에 있었다. 그들은 마태복음 10장 7절부터 9절까지의 교훈을 준수하고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했으며 또한 사도의 청빈 생활과 유사한 단순한 규율을 정하였다. 그들은 절대적인 청빈, 재산을 소유하지 않음, 주교의 허락을 거치지 않고 개인적으로 선교하지 않음, 신학 문제의 논쟁에 관여하지 않음, 원수와 화해함 등의 사상들로 세상 사람들에게서 칭송을 받았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교황에 대한 절대적인 순복은 교황의 인정을 받았으며 후에 교황의 권위의 중요한 버팀대가 되었다. 프란체스코는 1182년 이탈리아 중부의 한 촌에서 태어났는데, 초년기에는 세상을 사랑하며 실속 없이 겉만 화려한 생활을 했다. 후에 그는 계시를 받고 주 예수님의 본을 따라 살기를 결심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기본 방침은 자아를 버리고 가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며 주님의 제자들을 본받아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자신은 청빈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였는데, 만약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친구가 아니라고 하였다. 한동안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인수는 급격히 증가하여 5천 명이 넘기도 하였다. 프란체스코는 항상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했는데, 그의 행적은 이탈리아를 거쳐 이집트와 시리아에 이른다. 프란체스코는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여 라틴어에 대항 이해는 그다지 깊지 않았으나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재산을 모으지 않았다. 그는 이웃을 사랑하고 선행을 하는 것이 학문을 연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후에 신학을 말하였고 조직을 개편한 이후에는 점차 학술에 중점을 두었는데, 후에 배출된 몇몇 영국의 뛰어난 철학자들은 프란체스코회 출신이었다. 탁발 수도회의 또 다른 유명한 수도 단체는 도미니크회로서, 창설자는 스페인 사람 도미니크(Dominic)이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신앙을 지키고 이단인 알비파(Albigenses)의 믿는 이들을 다시 돌이키게 하는 것이었다. 도미니크는 오직 청빈하고 소박한 생활을 해야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유사한 체제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만 이 수도하는 이단자들의 신앙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지식과 학문을 추구하는 이들과 이단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부담을 가진 이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종교 재판소의 전신(前身)이 되었다. 그의 주장은 대학에서 인정을 받았고 학술계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233년에 교황 그레고리 9세는 도미니크회에게 알비파를 소멸할 것을 명령하였고, 그 결과 아비 파는 14세기 말에 멸절되었다. 이상에서 언급한 수도 단체 이외에 카르멜 수도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병원 기사단(Kinghts Hospitals), 성전 기사단(Knights Templars) 등과 같은 소형 단체들이 있었다. 1154년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카르멜 수도회는 극단적인 고행에 중점을 두었고 청빈과 독신 그리고 채식을 지켰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는 "아우구스티누스 규례"에 근거로 하여 세워진 수도회로서 규례의 집행에 있어서 비교적 융통성이 있었다. 종교 개혁 운동의 주된 인물인 마르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속했었다. 병원 기사단은 원래 11세기 말에 병자를 돌복 여행객과 십자군을 접대하기 위하여 조직된 기사 단체였으나 나중에 정규군대로 발전되었다. 성전 기사단은 1118년에 예루살렘을 보호하고 회교도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사 수도 단체였다. 영향력이 매우 컸던 그들은 각자에 보루를 많이 세워 수도원과 기병대가 주둔하는 이중 용도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지지자들에게서 많은 기부금을 받았는데, 이를 파리와 런던의 '성전'에 보관하였다. 이로 인해 그들은"믿을 만한 금융가"로 불렸다. 그러나 그들은 1312년에 부도덕하고 미신적이며 이단을 신봉한다고 고소되어 진압당하였다.
5. 천주교 체제 외의 개혁과 교황청의 박해
12, 13세기는 교회의 정치권력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특히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위기에 교회의 정치권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정치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그는 당시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로마에서 제4차 라테란 회의(Lateran Council IV)를 개최하여 건전한 교회 조직과 성직자들의 생활에 관한 혁신적인 방안을 세웠다. 대다수 교황의 주된 개혁은 모두 정치적 위기로 인하여 뿌리를 내리지 못 했다. 그러나 일반 믿는 이들은 도덕성의 회복과 사상의 변혁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검소한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개혁 단체들이 계속해서 출현하였다. 그들이 바로 왈도파와 알비파이다.
1). 왈도 파
중세기의 로마 천주교가 교황의 권리를 확장하고 정치권력을 쟁취하고 부를 축적하려고 힘을 다하고 있을 때, 프랑스 서부와 이탈리아 북부 산악 지역에서는 성경으로 돌아가 사도의 교훈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고결한 단체인 왈도파가 출현하였다. 창시자 피터 왈도(Peter Waldo)는 리옹의 시민으로서 원래 사교와 상업 그리고 정치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부상이었다. 1173년부터 1176년 사이에 그에게 큰 변화가 있었다. 먼저 그는 라틴어 성경을 그 지방 언어로 번역했다. 그다음 그는 마가복음 10장 21절의 말씀에 따라 모든 가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고 공공장소와 사방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왈도의 전파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매혹하였는데 이들은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각지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물건을 공용하였고 소박한 생활을 했는데, 후에 왈도파라고 불렸다. 이 운동은 프랑스의 남부로부터 이탈리아와 독일 라인 강 지역으로 퍼졌고 심지어 스페인, 보헤미아, 폴란드까지 확장되었다. 왈도 파는 13세기 때 두 파로 분열되었는데, 보수적인 한 파는 로마 교회로 돌아갔고 비교적 진보적인 파는 자신의 주장을 계속해서 견지하였다. 왈도 파는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그리스도를 신앙의 유일한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에게는 주교나 교황이 없었다. 그들은 모든 인위적인 신조를 거절하였으며 또한 평신도들에게 성경에 따라 복음을 전파할 권리가 있음을 견지하였다. 그들은 맹세를 하지 않았고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취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연옥의 교리와 미사를 부정하였고 세례와 떡 떼는 것 이외의 모든 성례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성인과 성상 그리고 생물을 경배하기를 원치 않았고 십자가도 경배하지 않았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반대하고, 종교 재판소, 십자군과 사형 등 성경에 위배되는 실행에 반대하였다. 그들은 청빈하게 생활했고 집에서 집회를 했으며 거리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성경을 가르쳤다. 그들은 성경에 계시하는 예수님과 사도의 본을 최선을 다해 따랐다. 그들은 교회가 사도들의 발자취를 쫓아갈 때 주님의 부르심에 충성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반대로 교회가 세상의 권세와 부를 포기하기를 원치 않을 때 교회는 세속적으로 변하고 교회의 실재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믿었다. 또한 그들은 4세기 때 로마 천주교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정권이 연혼(連婚) 한 것으로부터 교회가 타락하게 되었다고 간주했으며, 성직자들의 세속화와 사치스럽고 음란한 생활은 성경이 계시하는 사도의 생활을 위반한다고 여겼다. 왈도 파는 로마 천주교와 적이 아니었으며 또한 자신의 파벌을 세울 뜻이 없었다. 그들은 심지어 어떤 사람이 자신을 교회밖에 있는 또 다른 단체라고 느끼거나 스스로 영적이라고 자인하면서 교회에게 대적하는 것은 스스로 멸망이 길을 취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는 오히려 평신도들(성직자 계급이 아닌 사람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오직 사도 직분을 계승한 성직자만이 복음을 전파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 '가난하고 학식 없는 이단'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13세기의 종교 재판소의 보고로부터 왈도 파에 대한 당시의 교황청과 정권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왈도 파가 무지하고 무식한 백성들이며 각 성과 각 가정, 심지어 각 회당에 가서 잘못된 교훈을 전파한다고 여겼다. 리옹의 주교는 일찍이 왈도 파에게 그들의 행동을 금지하라고 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도에게 피조물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이미 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는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직자들의 생활이 부유하고 나태하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로 인해 성직자들을 멸시한다는 죄명으로 고소당했고, 또한 빈궁한 옷과 성결의 가면을 쓰고 사도의 추종자라고 거짓되이 일컫는 자들이라고 조소당하였다. 상술의 원인으로 인해 왈도의 믿는 이들은 로마 천주교와 권력 다툼을 하는 정치인 그리고 난폭한 병사들에게서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그중 가장 혹독한 박해는 1655년에 왈도 파가 대량으로 학살당한 것이었다. 퀄번(L, P, Qualben)은 <교회사(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라는 책에서 "왈도 파는 후스파와 보헤미아 형제회의 미리 예비한 선봉"이라고 언급하였다. 얀 후스는 개신교에서 종교 개혁의 선봉과 정통이라고 간주되며, 개신교 역사학자들도 왈도 파를 개신교의 주류 사상 층의 하나인 칼뱅주의와 함께 자매로 간주하였으나, 13세기의 로마 천주교회는 왈도 파의 신앙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배척하였다. 왈도와 동시대에 있었던 프란체스코도 청빈을 주장하고 실천하였으나 로마 교황청은 그를 교회의 성인으로 추앙하였다. 이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왈도 파에 대한 개신교와 천주교회의 견해가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왈도 파가 가졌던 복음 이상(理想)은 사실상 비난받을 만한 것이 없었으나 로마 교황청에 의해 이단으로 단정되었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연루되어 심한 박해를 받고 대학살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박해 속에서도 살아남아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난 뒤 신교의 일부분으로 편입되었다. 왈도 파의 충성과 깨끗한 마음 그리고 성경에 대한 그들의 순종 및 사도들의 가르침을 바싹 쫓아간 것은 실로 중세기 교회의 흑암의 역사에서 한줄기 서관이었으며 종교 개혁의 선봉이 되었다.
2). 알비 파
알비 파(카타리파)는 1145년부터 1244년 사이에 존재했다. 카타리(Cathari)의 수많은 신도들이 프랑스의 알비(Albi)d에 거주 했기 때문에 알비파라고 불렸다. 프랑스 남부의 랑그도크(Languedoc) 주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풍속과 습관은 북부와 매우 달랐으며 오히려 이탈리아와 매우 유사하였고 또한 프랑스어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유럽 사람들과는 달리 로마의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았고 별도로 발칸 반도에서 일어난 비교적 독특한 기독교를 믿었다. 당시 로마 천주교가 권력을 탐하고 뇌물을 받는 등 부패했기 때문에 이러한 순수하고 소박한 기독교가 랑그도크에 신속하게 퍼졌다. 현지 주민들은 로마 교회의 성직자들을 축출하고 그들의 수도원과 성당을 탈취하였으며 이러한 시설물들을 접수하고 관리하였다. 이 파의 분포는 매우 광범위하여 로마 천주교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그들은 참된 교회는 영원하며 고압적인 수단으로 그 존재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엄격하게 고행하며 수도하는 것을 실행하였는데, "커타리(Cathari)"라는 단어는 '정결하다'라는 뜻으로 고행으로 수도하며 영혼의 불결함을 벗고자 갈망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들은 혼인과 출산 그리고 전쟁을 반대하였고 십자가와 성례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였으며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고 신약을 연구하였으며 또한 신약을 지방어로 번역하였다. 알비 파의 신도들이 로마 천주교를 반대함으로 인해 교황으로부터 이단이라고 선고받았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재위하는 동안 알비파가 유럽에서 전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랑그도크에서 세력이 가장 큰 레이몽 백작에게 알비 파를 영지 내에서 쫓아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레이몽은 교황의 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교황의 특사를 죽였다. 이에 분노한 교황은 1208년에 칙령을 공포하여 각 나라를 불러 십자군 원정대를 조직하여 이단을 정벌하고자 했다. 사실 박해는 1145년에 시작되었는데, 몇 명의 알비 파 신도들이 쾰른(Keoln)에서 화영 당하였고 그 후 1209년 교황청은 알비 파를 공격하라고 분명히 명을 내렸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황제는 십자군을 조직하여 알비 파를 처리하였고 심지어 이단을 신봉하는 것을 사형 죄에 해당한다고 선포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동으로 프랑스 남부는 20년 동안 대대적으로 유린되었다. 인노켄티우스 3세 후에 교황이 된 아들은 모두 알미 파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였으며 또한 종교 재판소가 정식적인 기구가 되어 이러한 '이단'을 소멸하는 직무를 계속해서 집행하였다.
3). 종교 재판소
종교 재판소(Inquisition)는 교회 역사 가운데 있어서 가장 어두운 한 페이지이다. 로마 천주교는 '이단을 소멸하는 것'을 목적으로 1233년에 이단을 전문적으로 심판하는 교회 법정을 세웠다. 법정에서 이단으로 고소된 사람은 변호사를 둘 수 없었고 원고의 신분을 알 수 없었다. 일단 이단으로 고소되면 어린이나 범죄자의 증언, 심지어 확인되지 않은 소문까지도 모두 정식 증인으로 받아들여졌다. 무고함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피고는 유죄로 간주되었다. 법정에서 회개한 자는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면되었다. 무릇 피고의 변호자도 공범으로 간주되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당시의 종교 재판소가 채택한 가혹한 형벌이 그 당시 일반 범법자들에게 자백을 강요할 때 사용한 방법이었음을 발견하였다. 로마 천주교는 무력의 수단으로 가라지를 뽑으려고 기도하였으나 오히려 수많은 생명의 밀알을 잔해했고 주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믿는 이들을 살해하였다. 이단에 대한 종교 재판소의 징벌은 스페인에서 극에 달하였다. 그러나 종교 재판소의 구성원은 대다수 본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종교 재판소에서 박해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복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단의 가르침'을 거절하였다가 오히려 '이단'이라는 누명을 받고 치욕을 받았으며 결국 신앙을 위해 순교하였다.
6. 십자군 원정
오랜 세월 동안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등의 성지를 순례하였다. 그러나 터키인들이 일어남으로 인해 성지 순례를 하는 사람들의 안전에 문제가 생겼으며 게다가 터키인들은 비잔틴에 대한 무형의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1095년 동 로마 제국 황제의 요청 하에 교황은 믿는 이들을 모아 십자군을 조직하였고 회교도의 수중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려고 기도하였다. 1074년부터 1270년 동안 유럽에서는 여섯 차례 주된 십자군 원정이 있었다. 십자군의 부름은 열열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교황은 십자군에 가입하면 죄를 사하여 줄 뿐만 아니라 사후에 천당에 갈 수 있다고 확신을 주었다. 그러나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한 십자군이 오히려 성지인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점령한 뒤 살육과 노략질을 하여 로마 교황청의 위신을 크게 떨어트렸다. 게다가 원정 군대의 대부분이 오합지졸이어서 유럽을 불안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원도 소모하였다. 1212년에 교황청은 심지어 수 천명의 어린이로 조성된 어린이 십자군을 불러 모았는데 그들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렸다. 십자군 원정은 유럽의 사회의 구조를 철저하게 바꾸었고 또한 동서무역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귀족의 지위는 하락하였고 새로 일어난 상인과 지주가 세력을 떨쳤다. 방직품과 식물 그리고 향료의 수입은 유럽의 경제 발전을 자극하였고 십자군이 가져온 부도 화폐의 제조와 유통을 촉진하였으며 자유사상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과거에 잃어버렸던 그리스 고전 문학과 철학의 문헌이 이 시기에 다시 발견되어 서방 교회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서방 교회는 이러한 새롭게 들어온 사상에 맞서거나 응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종합해서 말한다면 십자군 원정은 비록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을 명분으로 하였으나 그 목적은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의 원정으로 말미암아 유럽의 상업과 경제에 가져온 혁명적인 영향은 동서 문화의 교류를 촉진하였고 향후 르네상스의 발생을 자극하였다.
7. 교황 제도의 몰락과 종교 개혁의 선구(先驅)
1). 교황 제도의 몰락
14세기에 민족주의가 일어나고 교황청과 군왕 사이에 충돌이 빈번하게 되었는데, 교황 보니파시오 8세(Bonifacio VIII)와 프랑스 왕(Phillip) 사이에 세금과 권력의 문제로 인해 일련의 투쟁이 발생하였다. 보니파시오 8세와 베네딕트 11세(Benedict XI) 두 명의 교황이 잇따라 죽은 뒤 새로 임명된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V)는 프랑스 왕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로마의 불안한 정세 때문에 1309년에 프랑스 남부 아비뇽(Avignon)으로 교황청을 옮겼다. 아비뇽 교황청은 70년 동안 그곳에 있었는데, 역사는 이 기간을 "교회의 바빌론 유수 시기"라고 한다. 프랑스 왕의 지지 하에 아비뇽의 교황은 서유럽의 가장 권위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교황청 자신의 부패는 결코 개선되지 않았고 교황은 정치에 예속되었다. 이로 인해 교황도 그의 권위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잃어버렸고 서방의 교회도 영적인 인도가 부족함으로 인해 더욱 부패되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교회에 대해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 주된 원인은 교회의 부패함 때문이다. 십자군 원정을 위하여 교회는 책임질 수 없는 영적인 구호로 사람들의 참가를 격려하였고 십자군에게 참여한 사람들에게 하늘의 보상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교회는 영적인 약속을 남용하여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게다가 원정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그 재원을 충당해야만 했다. 1300년 보니파시오 8세는 그 해를 희년으로 선포하고 단지 로마로 성지 순례를 와서 세례를 받으면 죄가 청산된다고 하였다. 또한 무릇 로마로 오지 못한 이들은 금전으로 대치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로 인해 교황청에 재화가 쌓이게 되었다. 이후로 성당을 보수하려 하거나 재정이 군색해질 때면 교황청은 속죄 증명서를 대량으로 찍어 파는 면죄부 제도를 세웠다. 또한 부패한 성직자들 사이에 성직을 매매하고 사람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이용하여 재물을 거두어들이는 일들이 수없이 발생했다. 성인의 유물, 뼈, 아론의 지팡이, 예수가 심판받을 때 걸었던 계단 등이 모두 사람들이 자신 혹은 연옥에 있는 가족의 속죄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나오게 되었다. "금화와 은화가 헌금 통에 떨어지며 딸랑 소리를 낼 때 영원히 즉시 연옥 가운데에서 나온다." 이것 이외에 중세기의 로마 교황청의 허례허식과 음란함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교황청은 거의 매춘부들의 거처와 같았다. 심지어 어떤 교황은 간음하는 현장에서 정부의 남편에게 살해되었다. 교황 피우스 2세(Pius II)가 "로마는 사상자가 관리하는 유일한 성이다."라고 말한 것도 전혀 이상한 말이 아니었다. 이처럼 영성과 도덕이 타락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은 교회를 개혁하고자 수차례 시도하였다. 그들은 면죄부 제도를 반대하였고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의 노력으로 결국 개혁의 거대한 흐름이 모이게 되었고,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이 종교 개혁 운동을 전면적으로 열게 되었다.
2). 르네상스 시기의 사보나롤라(Savnarola)의 개혁
르네상스(Renaissance)는 1400년에 이탈리아의 피렌체(Firenze)에서 발원하였다. '르네상스'라는 불어의 뜻은 '재생'이라는 뜻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재발견하는 것을 뜻하며 예술과 문학 그리고 정치적인 부흥을 가리킨다. 이 시대의 주제는 개인주의, 세속주의, 이상주의였으며, 사회의 중심도 봉건제도 아래의 군왕 귀족으로부터 점진적으로 경제적인 실권을 가지고 있던 상인과 평민에게로 전환되었다. 이 당시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가문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통치로 인하여 피렌체의 경제는 활기차게 발전하였고 정치도 안정되었기 때문에 문예 부흥의 중심이 되었다. 원래 귀족이었던 이 가문은 13세기에 금융업으로 가문을 일으켰고 거대한 부를 쌓았다. 14세기에 이 가문의 경제와 정치의 영향력은 갈수록 증가되어 살 베스트로(Salvestro)는 피렌체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1382년에 살 베스트로는 독재와 잔혹함으로 인해 축출당하였고, 그 뒤를 이은 조반니(Giovanni)가 가업을 재정비하였다. 그리하여 이 가문은 이탈리아 심지어 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 되었고, 1421년에는 피렌체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아들 코시모(Cosimo)는 평민들의 세금을 가볍게 하여 하류층 지지를 얻었으나 정적들의 불만을 사 정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적들에게 정권을 빼앗긴 후 코시 모는 비록 정국에 주동적으로 간여하지는 않았지만 메디치 가문은 이미 정권의 유일한 핵심이 되었다. 더욱이 코시 모는 피렌체 사람들에게 "국부"로 존칭 되었다. 16세기에 메디치 가문은 자유주의를 제창하였다. 그들이 정부 관직을 통제하지는 않았지만 재력과 권세로 여전히 피렌체의 정치를 조정하였다. 그들의 인도 하에 피렌체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고 1530년에 이 가문은 피렌체를 세습 왕국으로 바꾸고 군주라고 자임하였다. 카트린 드 메이 시스(Catherine de Medicis)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결혼하여 프랑스의 실제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이것 외에도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 당시의 두 명의 교황을 산출하였는데, 한 명은 조반니(Giovanni Angelo)이고 다른 한 명은 알레산드로(Alessandro)이다. 르네상스 당시의 유명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라파엘(Raphael),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등은 초기에 모두 이 가문의 경제적인 지지를 받았다. 도미니크회(Dominicans)의 수사였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는 1481년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설교 시에 사보나롤라는 항상 교황과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였고 메디치 가문의 잔혹한 통치를 폭로하였으며 부자들의 교만과 사치스러움 그리고 음란과 방탕함을 반대하였다. 그는 새롭게 사회적인 도덕을 세우자고 주장하며 경건한 수도 생활을 주창하였는데 그의 언행은 평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1491년에 사보나롤라는 산 마르코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491년에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메디치 가문은 투항하였으나 사보나롤라는 평민들이 일으킨 봉기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평민들을 인도하여 메디치 가문을 추방하고 공화 체제를 회복하였으며 피렌체를 신권 통치 하의 경건하고 소박한 도시로 개조하고자 하였다. 1497년에 사보나롤라는 종교 개혁을 주도하여 시 중심 광장에서 보석과 의복과 화려한 것들과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서적 등을 모두 불살랐다. 그는 세속적인 음악을 금지하고 성가를 보급했으며 행정과 조세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교황 알렉산더 6세를 "사탄의 대표"라고 비방하여 같은 해 교황으로부터 파면을 당하였다. 1498년 4월에 알렉산더 6세와 메디치 가문은 기근이 일어난 상황을 이용하여 산 마르코 수도원을 공격하도록 군중을 선동했다. 사보나롤라는 분열을 일으키는 이단이라는 죄명으로 광장 한가운데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시신은 광장에서 불태워졌다. 1438년에 로마 천주교회는 피렌체에서 제17차 회의를 소집하여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1054년 이래로 분열된 상황에 대해 화해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 회의는 바로 동방과 서방 교회의 분열에 영향을 준 "필레오 퀘(filioque, '… 와 아들로부터'라는 뜻임)"를 의제로 삼았다. 이 논쟁은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씀은 단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성령은 주로 아버지로부터 나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7세기 때 서방 교회는 "필레오 퀘"라는 단어를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그리스도에 관한 신조 가운데 집어넣어 "나는 성령이 …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 것임을 믿는다."가 되었다. 동방 교회는 이것을 엄중하게 반대하였는데 이는 "필레오 퀘"라는 논리는 일종의 이단의 관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끊임없는 논쟁과 향후 교회 분열의 도화선이 되었다. "필레오 퀘"라는 논점의 논쟁 이외에 이 회의는 연옥의 교리 및 기타 교황의 권력에 관한 성명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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