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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 운동 후 독일의 발전

 

 

 


각지 종교 개혁 운동의 발전과 성형(成形)

1. 종교 개혁 후 독일의 발전

 

1). 슈파이어 회의와 아우크스부르크의 회의

보름스(Worms)에서 회의가 있은 후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마르틴 루터를 이단자로 판정하고 그의 모든 저작을 없애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외국과의 전쟁이 빈번하여 그 명령은 철저하게 이행되지 못 했다. 독일 남부의 제후들은 모두 제국과 천주교에 순종했고 북부의 제후들은 루터를 지지했다. 종교 개혁 인사들과 제후들의 촉구로 1526년에 제1차 슈파이어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회의가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에 제후들은 스스로 신앙을 선택할 수 있고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황제에게 책임진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보름스에서 루터에게 내린 처벌은 잠시 유보되었다.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회의가 열렸다. 카를 5세의 지지 아래, 천주교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보름스에서의 왕명을 단호하게 관철하고 개혁파의 지역을 천주 교화하려고 하였다. 루터파는 이것에 대하여 신랄하게 항의했다.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하는 자)는 여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1530년 카를 5세가 국경을 침범한 오스만 터키 군대를 격파한 후에 제국 내의 종교 문제를 다시 자세하게 파악하려고 아우크스부르크 회의(Diet of Augsburg)를 열어 천주교와 루터파에게 회의에서 신앙을 진술하도록 했다. 루터는 당시 불법자의 신분으로 제재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필리프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을 대표로 출석하게 했다. 멜란히톤은 회의에서 그 유명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 고백서"를 발표했다. 그것은 종교 개혁의 중요한 문헌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에 루터파의 신앙을 성명하는 표준이 되었다. 로마 천주교 측은 즉시 그 성명을 반박하는 "반박문" 을 발표하였으며 카롤 5세에게 그것을 금지해 줄 것을 요구함으로 양쪽의 협상은 다시 깨졌다. 루터를 지지한 제후들은 카를 5세가 군대로 진압을 할까 두려워서 1531년 2월에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c league)을 조직하였다. 그때 오스만 대군이 다시 국경을 침범하여 쌍방은 휴전을 체결하고 협력하여 외적을 막기로 하였다. 후에 몇 차례의 협상 회의를 열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2). 동 시대의 다른 개혁자들

제2차 슈파이어 회의가 끝난 후 헤센의 란트 그라프 필리프(Landgraf Philip)는 독일과 스위스 지역에 있는 종교 개혁 세력과 루터, 츠빙글리 그리고 다른 개혁자들을 마르부르크(Marburg)의 협상에 초청했다. 그러나 성찬에 대한 교리의 관점이 달라서 합일하려는 헤센 공의 목표는 달성되지 못 했다. 당시 출석한 사람들 중에는 헤센 공의 친한 친구인 프랑수아 랑베르(Francois Lambert)도 있었다. 그는 프랑스와 독일과 스위스 일대에서 교회 개혁의 청사진의 기초를 세우고 교회는 마땅히 회중이 다스려야 하며 정치 세력이 개입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루터가 개입하여 허사가 되었다. 루터는 당시의 개혁파와 천주교가 서로 대립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귀족의 지지가 필요하지 시민들의 뜻을 논의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귀족 세력을 구슬리기 위해 루터는 정치권력으로 교회의 성직과 성례의 일을 결정하였다. 동시에 한 개혁자가 있었는데, 그는 슐레지엔(Schlesien)의 귀족 슈벵크펠트(Kaspar von Schwenckfeld, 1489~1561)이다. 그는 로마 천주교에 동조하지도 않았고 루터파나 재침례파도 함께하지 않았다. 슈벵크펠트는 성경을 연구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성경 전체의 총합은 그리스도'라고 하였으며, 성경을 읽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나오면 "상하 문맥을 연구하여 성경으로 성경을 풀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교회는 신약의 교회를 모형으로 하여야 하며 각 지방에서 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성령께서 다스리시게 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살아 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침례에 대하여 '믿고 침례를 받는 것' 은 한 실체에 양면이 있는 것처럼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재침례파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슈벵크펠트는 성찬의 교의에 있어서 루터와 다른 관점을 가졌고, 그가 성경을 근거로 세운 교회가 갈수록 흥왕하였기 때문에 루터파와 당국의 공격과 박해를 받아 30년 동안 유랑하였다. 그가 자기가 세운 단체를 감히 교회라고 인정하지 못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파가 되어 주님을 사랑하는 더 많은 믿는 이들을 섬길 기회를 잃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슈벵크펠트와 그의 무리는 또한 잠시 침례와 떡을 떼는 것을 멈추고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도록 성령의 부으심을 위해 기도하고 기다렸다. 그들의 소임은 사람을 주께 돌려드리는 것이었고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진리와 생명을 공급하고 장래의 영광을 소망하는 것이었다.

 

3). 농민 혁명

중세기의 농민들은 교회와 귀족들에게 장기적인 착취를 당했기 때문에 자주 항의하고 난을 일으켰다. 루터의 종교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이었고 그들 가운데는 종교 개혁을 빌미로 사회 혁명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농민을 압박하는 정치와 종교 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루터의 신학은 믿음과 자유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이 사회 운동을 하는 기초로 이용되었다. 1524년 6월 독일 남부의 제후들이 루터파를 박해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농민 폭동이 일어났다. 농민 폭동은 다음 해에 더욱 스위스와 독일의 각지에 확산되어 하층 계급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삼십만 명이 동참하였다. 이어서 혁명 단체가 출판한 <12 조항(Twelve Articles of the Peasantry)>은  루터가 '믿는 이는 모두 제사장'이라는 관점을 근거로 하여 강제 노역 규제와 십일조의 세금 징수 면제, 그리고 정치 개혁 등을 요구하였다. 또한 루터가 수도 주의를 몹시 배척한 것을 근거로 수도원을 모조리 약탈하고 재물을 몰수하여 공유화하였다. 농민 폭동의 지도자인 토마스 뮌처(Thomas Muenzer)는 원래 신부였으며 루터의 권유와 원조를 받아 복음 전도자가 되어 루터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점차 루터와 마찰을 일으키다가 결국 루터를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루터가 교황의 권위를 뒤집고 성경을 권위로 삼지만 절반만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더 나아가 성경의 도움 없이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직접 성령을 받을 수 있으며 이상한 꿈이나 상상을 통해 얻은 내적 말씀(Inner Light)으로 말미암아 계시를 얻는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선택된 이들의 단체에 가입하여 세상에서 분별되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계시록을 인용하여 무력으로 불신자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세워 하나님의 왕국을 지상에 가져올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신령한 것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는 개신교에 영향을 주었고 농민들을 격동시켜 폭동에 종교적인 색채가 깊어지게 했다. 루터는 초기에 농민에게 동정을 표하며 "나는 농민의 아들이며,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선조들은 모두 진정한 농민이다."라고 하며 자신의 출신을 자랑했다. 폭동 초기에 그는 <평화의 충고: 12조 항에 대한 답변>을 쓰고, 농민을 '사랑하는 형제', '친구'라고 부르며 불합리한 영주들을 질책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그리스도인은 천부의 권리에 호소하여 사회적 정의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며 농민들에게 정부를 존중할 것을 훈계하였다. 그러나 폭동은 갈수록 잔혹해져서 살인과 방화를 하는 등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서로 주장하는 신앙과 개혁에 대한 견해가 다른 상황에서 뮌처가 뮐하우젠(Muelhausen)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진압자를 살해하고 그 위협이 비텐베르크에 이르게 되자 루터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루터는 즉시 "농민들의 집단 약탈과 대량 학살을 반대함"이라는 글을 썼는데, 거기에서 그는 농민들의 약탈, 살인, 복음의 명분으로 행한 것에 대하여 응당 엄벌해야 하며 제후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폭동을 제지해야 한다고 했다. 제후들은 루터의 '권고'를 근거로 농민들을 대량 도륙하여 십만여 명이 살해당했으며 수많은 사람이 중상을 입었다. 윈처도 그때 참살되었다. 루터는 귀족들의 흉악함과 잔인함에 매우 상심하여 자신이 모든 농민들을 죽였으니 농민들의 피가 자신에게 돌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악몽과 같은 농민 폭동은 루터와 농민 사이에 큰 간격을 가져왔다. 원래 농민들은 루터의 종교 개혁에 충실한 지지자였으며, 루터가 자신들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도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루터가 관심했던 것은 물질적인 사회 개혁이 아니라 종교와 신학적인 면에서의 개혁이었다. 루터는 사회는 부패하여 사람을 구원할 수 없으며 좋은 사회도 사람을 개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받으신 것이 고난이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사회로부터 분별됨으로 겪는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농민 폭동으로 루터와 농민은 상호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다. 농민이 자유와 평등을 구호로 한 폭동을 일으켜서 복음이 왜곡되자 루터는 즉시 로마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을 신성한 권력에 대한 가르침으로 인용하여 세상의 권위를 통해 평화와 질서가 있는 사회를 세우고 복음이 전파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각 국왕 하에 있는 제후 정권은 루터의 말을 빌미로 영주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농민 혁명 후 독일의 북부는 루터파에, 남부는 천주교에 속하게 되었다. 귀족과 지주 계급들은 다시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워서 제후의 권력을 강화하기 원했고 루터를 지지하여 독일의 국교의 형성을 촉진하였다.

 

4). 천주교 내부의 개혁

초기에 루터가 종교 개혁하기 전에 천주교 내부에서는 영성을 고양하자는 소리가 높아졌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의 저자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 인문주의 학자 에라스무스(Erasmus) 등이 성경과 초기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내세운 해에 "신성한 사랑의 모임(Oratory of Divine Love)" 이 로마에 세워졌고, 후에 서로 돕고 선행을 강조하는 조직과 수도회가 계속해서 세워졌다. 그리고 순회하는 수도사는 도시와 시골에서 부흥되도록 격려하며 기도와 영성에 관한 작품을 열람하고 교의를 비판하지 않고 생명 방면에서 부흥을 가져올 것을 기대하였다. 이 시기에 세워진 수도회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수도회는 '예수회(Society of Jesus)'이다. 예수회의 창립자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는 스페인의 군인이었는데, 1521년 중상을 입어 퇴역하였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것과 초기 성도들에 관한 서적을 읽고 깊이 감동을 받아 예수의 군병이 되어 규율을 엄수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할 것을 맹세했다. 후에 그는 계속 공부를 하고 여행도 하면서 저술 활동을 하였다. 1528년에 그는 파리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놀랍게도 같은 시기에 칼뱅도 같은 학교에 다녔으나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으며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길을 갔다. 1533년에 칼뱅은 종교 개혁 운동에 참여하였고, 1534년에 로욜라는 룸메이트 프란체스코와 다섯 명의 동반자들과 함께 빈궁한 생활을 하며 자비를 베풀고 선교를 하며 교황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1540년에 교황은 정식으로 예수회를 인정했다. 예수회의 규정은 로욜라에 의해 제정되고 수정되었다. 예수회의 세 가지 주요 임무는 신교를 대항하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여 선교 활동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예수회 수도사들은 하나님의 땅에서의 왕국이 로마 천주교에 있다고 믿고 교황을 대표 권위로 여겼다. 그리고 교황청을 떠난 모든 조직이나 교의는 이단으로 여겼다. 그들의 세력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으로 신속하게 확장되었다. 그들은 종교 재판소의 지지 하에 개신교를 공격하고 천주교를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로 전파하였다. 중국 명나라 때 중국에 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아담 샬(John Adam Schallvon Bell) 등도 예수회의 선교사이다. 개신교의 위협 때문에 천주교의 신분이 낮은 성직자들과 더불어 학술계는 개혁을 위해 대공 의회를 열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즉위한 후에 신속히 교회를 개혁하려 하였다. 초기에 그는 루터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으나 루터는 너무나 급진적이었다. 1521년 교황 레오 10세가 갑자기 죽자, 카롤 5세의 압력으로 교황청에서는 카롤 5세의 스승이었던 하드리안(Hadrian)을 후임으로 선출하였다. 하드리안은 매우 경건하였으며 이전의 성경을 연구하고 성직자를 교육하며 설교하는 방식으로 개선하는 등 많은 개혁을 하였다. 그는 사람들을 감원하여 경비를 절감하는 일련의 개혁을 실행하였으며 날마다 미사를 주관하였다. 그는 재위한 지 20개월 만에 과로로 죽었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불행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바오로 3세는 1534년 교황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구체적인 개혁 조치로써 성직자의 불량한 소행을 엄중하게 처리하고, 예수회의 성립을 동의했으며, 개혁에 진력한 걸출한 인사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반대하는 추기경들과 맞서기 위해 그는 카를 5세와 프랑스 국왕 1세(Francois 1)가 대공 의회를 열 수 있도록 협조할 것을 재촉했다. 결국 1545년에 트렌트 공의회(Council of Trent)가 열렸다. 천주교의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해 회의는 장장 18년 동안 스물다섯 차례 열렸다. 그 회의는 400년 동안 천주교의 조직과 교의에 영향을 미쳤다. 회의에서는 쟁론을 일으키는 교의에 대하여 상세한 토론이 이어졌으며 개신교의 모든 관점들은 거절되고 전통과 교황의 권위가 거듭 표명되었다. 그리고 공재설 이외의 모든 입장을 반대하고 성례의 효능을 강조하고 연옥과 선한 일을 하여 공덕을 쌓는 것에 관한 관념을 확고히 하였다. 회의에서 '벌 게이트' 번역본 성경을 천주교의 표준 번역본으로 하였으며, 성경의 진정한 의미와 해석을 결정할 권리는 로마 천주교회에 있다고 선포하였다. 트렌트 회의에서는 천주교의 교의를 확정했을 뿐 아니라 성직자의 규율에 대하여도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교황청의 수많은 악정을 하나하나 제거하였으며 중세기 후의 로마 천주교에 한줄기 부흥의 기운을 가져왔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의 불참으로 동시대의 천주교회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잘못된 체계가 더욱 분명하게 세워져 "반종교 개혁 운동(Counter Reformation)"이라 불렸다.

 

5). 루터파의 형성

천주교의 압박으로 루터는 세상 정권과 타협하고 성직을 받는 의식을 채택하였다. 1536년 12월에 루터는 고심 끝에 슈말칼트 조례(Schmalkald Articles)라는 한 편의 신경(Creed)을 구상해 내어 다음 해 2월에 승낙을 받았다. 루터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따랐던 사람들 사이에 신학적 관점에서 불일치가 일어났다. 루터의 조력자 멜란히톤은 성품이 온화하여 로마 천주교와 화해할 것을 주장하는 동시에 칼뱅파의 교의(敎義)도 감상했다. 천주교와 타협하기 위해 멜란히톤은 독일 주교와 "라이프치히 잠정안" 을 체결하였다. 그 조약에서는 루터파의 기본 교의를 견지하는 동시에 천주교의 전통의 일부도 고수하였다. 이것은 루터를 충성스럽게 따르는 사람들을 '필리프 파'(Philippisten)라고 하였으며 자신들을 '정통 루터파'라고 하였다. 쌍방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조가 만들어진 지 50년이 지나도록 계속 싸우다가 1577년 "협약 신조(Formula of Concord)" 가 만들어진 후에 잠시 휴전하면서 많은 루터파의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내었다.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 신조와 비교해 볼 때 협약 신조는 경직되고 활력이 부족했으며 스콜라 철학 사상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루터파 고등 신학이 그것으로 인해서 발족되었다. 1622년 예나(Yena) 대학의 요한 게르하르트(Johann Gerhard)는 루터파의 전형적인 스콜라 철학적 이성 신학이 되는 "신학대전(神學大全)" 을 발표하였다.

 

6). 루터파의 발전

슈말칼덴 동맹이 성립되었을 때 독일의 북부만이 아니라 남부의 일부 대도시도 그 동맹에 가입하였다. 이후에 카를 5세가 프랑스와 함께 오스만을 향해 전쟁을 일으켜 루터파의 발전을 간섭할 겨를이 없었다. 츠빙글리파의 사람들이 죽자 독일 남부는 더욱 루터파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1546년 통계에 따르면 독일 지역의 90%가 루터파에 속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인구의 삼분의 이 이상이 루터파 신자였다. 보헤미아, 모라비아, 폴란드를 포함한 대부분의 지역이 개신교에 속했으며 그들도 주위 나라들에 개신교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이때 루터파는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되었다. 1544년에 카를 5세는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고 쌍방이 국경 내에 개신교를 제거할 것을 동의하였다. 다음 해 10월에 또 오스만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12월에 트렌트 공의회가 열렸을 때 루터파는 대표를 파견하지 않아서 황제와 교황의 무력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되었다. 1546년 12월 18일 새벽, 루터는 그가 태어났던 곳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비텐베르크 성당의 강단 오른쪽에 안장되었다. 오래지 않아 교황은 십자군을 일으켰는데 십자군에 가입하는 사람마다 모두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으며 카를 5세에게 군자금을 원조했다. 다음 해 슈말 칼텐 동맹이 실패하고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헤센 공 필리프는 갇히게 되었으며 종교 개혁 운동의 활활 타오르던 성화는 거의 소멸되었다. 교황 카를 5세는 결탁하여 개신교를 분쇄하였으나 서로의 세력을 견제하더니 결국은 상극의 관계가 되었다. 1552년 카를 5세는 오스만, 프랑스와 다시 교전하였다. 새로 직입한 작센 공능 전쟁 전에 카를 5세를 위협하여 평화 조약을 맺게 하였다. 이로써 종교적 상황은 1545년 당시로 복귀되었다. 3년 후에 아우크스부르크의 회의에서 루터파의 종교개혁 운동은 천주교에게 인정되었으며 '지배자의 신앙이 곧 지배자의 신앙'이라는 원칙을 세웠다. 각 제후들은 하나의 신앙을 선택해야 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츠빙글리 파나 칼뱅파, 그리고 소수 급진파는 배제되었다.

 

7). 30년 전쟁

16세기의 유럽에서는 종교적인 영토의 재정립으로 여러 차례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주로 천주교가 무력으로 개신교를 진압하여 그 교권을 견고하게 하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일로 개혁자들은 반기를 들고 항의하였다.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조약 후에 천주교는 창끝을 다른 개신교에 돌렸다. 당시에 가장 강했던 스페인과 천주교의 신앙을 가졌던 프랑스, 천주교의 신앙을 회복하려는 영국 등은 모든 지역을 대규모로 박해하였다. 예를 들면 스페인 통치 아래 있던 네덜란드는 수만 명이 종교 재판소에 의해 해를 입었다. 영국의 메리 여왕도 "피의 메리(Bloody Marry)"을 얻었다. 이 전쟁은 최후에는 개신교가 승리를 거두었다. 1598년 프랑스 앙리 4세는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고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을 반포하여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으며 개신교에게 정치적 권리를 주었다. 1558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면서 종교에 대하여 유화 정책을 취했다. 1582년 네덜란드 공화국은 스페인에 독립을 선언하였고 칼뱅파의 신앙이 국교가 되었다. 그렇지만 종교 분쟁은 끝나지 않았다. 독일 지역에서는 천주교와 칼뱅파가 아우크스부르크의 협정에 대하여 불만을 가졌다. 예수회는 개신교 파의 수중에 있는 재산을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고 날로 강해지던 칼뱅 파는 자신들이 여전히 종교법을 위반하는 사람들로 여겨지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품었다. 거기에 제후들의 정치적 원한이 더해져서 결국 중요하지 않고 의미 없어 보이는 대전쟁이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전쟁은 네 단계로 나뉜다. 전쟁은 보헤미아, 모라비아(오늘날의 체코 동부지방)에서 오스트리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대부분의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그 피해가 극심했다. 중부 유럽 지역의 인구는 삼 분지 이가 감소하였고 들판은 황무해졌으며 상공업은 거의 다 파괴되어 1세기 동안 피폐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이 체결되어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영토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고, 개신교의 각 종파를 포함해서 '지배자의 신앙이 곧 지배자의 신앙'이라는 원칙을 거듭 천명하였다. 또한 제후들은 신앙을 바꾸어서는 안 되고 천주교는 각 제후의 영지 내 종교의 일을 간섭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개신교는 천주교와 대등하게 맞서게 되었으며 독일 지역의 지지를 받았다. 쌍방의 지리적 경계는 지금까지 큰 변화가 없다.

 


2. 북부 유럽의 종교 개혁 운동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 1397년 연합 왕국으로 통합되었고 주로 덴마크가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때,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도 자신의 권위로 그의 관활에 속한 교회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는 스웨덴에서 스웨덴 애국정당이 천주교를 보호한다는 것을 이유로 이 정당을 분쇄하였다. 1521년에 스웨덴은 독립하였고, 1

523년 11월에 교황청 주교의 선거 비준과 교회세 납부를 거절하였으며 천주교와 갈라서고 개신교에 가입하여 1531년 첫 번째 개신교 대주교를 선출하였다. 크리스티안 2세는 주교의 권위를 제한하는 등 개혁 운동을 찬성하는 법을 제정하였으나 특권층의 반발로 1523년 결국 퇴임당했다. 후임 덴마크 왕으로 선출되는 조건은 반드시 귀족의 권리를 옹호하고 개신교의 이단의 전파를 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후임 왕은 교묘하게 대주교를 질투하는 귀족 세력을 키우고 이들이 천주교의 권리와 재산을 공격하는 것을 지지하여 이들에게서 자신의 종교 개혁 정책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내었다. 일반 평민들은 면죄부 등을 지나치게 판매하는 천주교의 악행을 혐오하여 국왕의 조치에 동의하였다. 1527년 국왕은 주교의 직위가 국왕 아래 있어야 함을 명령하고 루터교와 천주교의 위치가 동등함을 인정하였다. 1532년에 덴마크는 슈말칼덴 동맹에 가입하는 비준을 얻어 정식으로 루터회의 신앙을 받아들였다. 노르웨이는 덴마크와 동맹하였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 루터파의 신앙을 받아들였다. 아이슬란드를 관할하는 두 명의 주교 가운데 한 명은 루터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간 후 1540년에 주교가 되어 곧 종교 개혁 운동을 일으키고 아이슬란드어 신약 성경 번역본을 간행하였다. 1554년에 아이슬란드는 루터파의 신앙을 국교로 삼았다. 스웨덴의 종교 개혁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던 두 명의 학자가 귀국하여 대대적으로 루터교를 전파해서 일어났다. 1521년 독립운동의 지도자 구스타브 바사(Gustav Vasa)는 일찍이 이 두 사람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국왕으로 당선된 후에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자 종교 개혁 운동을 통해 천주교의 재산을 몰수하고 대주교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1526년 스웨덴어 신약 성경이 출판되었다. 다음 해 의회는 국왕이 스웨덴 교회의 최고 지도자이며 루터파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결의를 하였다. 이 운동이 핀란드에 신속하게 전파되자 북유럽 전체가 루터파의 세상이 되었다. 30년 전쟁 중에 덴마크가 가장 먼저 개신교 파에 참여하였다. 1629년 개신교 파가 대패하자 천주교 측은  개신교 수중에 들어간 교회 재산의 반환 등을 내용으로 하는 "반환령" 을 공포하고 전 유럽을 천주교 제도 가운데로 복귀시키려고 압박하였다. 1630년 스웨덴 왕 '북방의 사자' 구스타브 아돌프(Gustav Adolf)는 스웨덴이 천주 교화되는 것을 막고자 먼저 개신교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독일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음 해에 천주교 동맹군을 격파한 뒤 거침없이 라인강으로 진격하였다. 그다음 해에 구스타브는 천주교 측의 명장 발렌슈타인(Wallenstein)과 라이프치히(Leipzig) 부근의 뤼첸(Luetzen)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인 후 승리하였으나 전사하였다. 프랑스는 당시에 천주교를 신봉하였지만 합스부르크 왕조(Habsburg)의 세력이 계속 팽창하는 것을 보고 먼저 스웨덴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후에 군대를 보내어 전쟁에 참전함으로 결국은 스웨덴과 함께 승전국이 되었다. 스웨덴의 세력이 강해져서 발트 해가 스웨덴의 영해가 되었다. 개신교는 이러한 전쟁을 통해 종교적 영역을 온전히 확립하게 되었다.

 

 
3. 17세기의 경건주의 운동

​30년 전쟁 후 독일은 정식으로 개신교 지역이 되었으나 교회가 점차 국교화되자 정부의 관섭과 관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성직자들이 공직자들과 같아지면서 영성이 보편적으로 하락하였다. 루터 자신은 개인이 하나님과의 주관적인 체험을 갖는 것을 중요시하였으나 점차로 체험보다는 교의를 강조하는 멜란히톤의 조례식 신앙으로 대치되어 스콜라적 루터교가 발전하였다. 멜란히톤의 조례는 명목상으로는 성경을 근거로 하였지만 실제적으로는 진부하고 유통성이 없고 정체된 교리 해석이었다. 백 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루터교는 원래 주의했던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한 주관적인 믿음에서 다시 죽은 교리와 의식으로 떨어졌다. 믿는 이들은 단지 세례를 받고 성례와 교의를 지키며 시간에 맞추어 예배를 드리면 좋은 신도가 되었다. 그래서 더 깊고 의미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추구하는 한 무리의 개혁자들이 일어났다. 생명의 체험을 중요시하는 경건주의 운동은 17세기의 유럽에 보편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들이 경건한 생활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경건파(The Pietistas)"라고 불렸다. 이러한 믿는 이들은 루터교를 뒤집거나 떠난 것이 아니라 루터가 주장한 '이상(理想)'을 하나하나 실행해 냈다. 그들은 자주 가정에서 함께 모여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였다. 집회에서는 한 사람만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원칙 아래서 함께 누림을 나누었다. 그들은 성경 읽기를 다만 지식 만이 아닌 생명과 양육을 얻는데 중점을 두었다. 성경을  반드시 실제 생활 가운데 적용해야 하며 성결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살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체험 방면에서 그들은 믿는 이들이 회개하고 거듭나는 주관적인 체험과 그리스도가 그들의 중심이 되며 그분의 은혜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이외에 그들은 사회 구제를 실행하여 가난한 사람과 과부를 돌보고 해외 선교에 쏟았으며 당시 정체되어 있던 루터회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1). 경건주의 운동의 시작-슈페너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은 필리프 야코프 슈페너(Philip Jacob Spener)이다. 그는 1635년 알자스(Alsace)에서 태어나 35세에 프랑크푸르트(Frankfurt)의 루터교 목사가 되었다. 그는 스위스에서 라바디(Labadie)의 영향을 받았다. 라바디는 원래 천주교 수사였는데, 당시의 천주교와 개신교의 부패함을 보고 성경에 있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경건한 생활의 능력은 하나님과의 교통에 근거하며, 사람은 성령의 빛 비춤을 통해서만 비로소 성경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라바디는 제네바에서 목사를 담임하다가 후에 네덜란드의 미델부르크(Middelburg)에서 개혁을 실행하였다. 암스테르담에서는 '가정 집회'를 시도하였으나 개혁을 성공시키지는 못 했다. 슈페너는 요한 아른트(Johann Arndt)의 <진정한 기독교(True Christianity)>의 영향을 받았다. 30년 전쟁이 가져온 동란과 영성의 하락으로 인하여 슈페너는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깊이 느꼈다. 그는 거듭남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을 갖도록 격려하였으며, 개인적으로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습관을 세울 것을 말했다. 1675년 그는 '경건한 소원'을 뜻하는 <피아 데시데리아(Desideria)>라는 책을 출판하여 루터파를 소생시키기 위한 여섯 가지의 건의 사항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개인이 성경을 정독하고, 둘째는 믿는 이들이 모두 제사장에 관한 진리와 실행을 회복하고, 셋째는 성경 지식 만이 아닌 살아 있는 믿음과 사랑이 있어야 하며, 넷째는 성경을 읽을 때 신학적인 쟁론을 줄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 중점을 두며, 다섯째로 숭고한 도덕적 표준으로 신학 교육이 개혁될 필요가 있으며, 여섯째는 복음 강연을 부흥시켜 복음을 널리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슈페너는 가정 집회에서 믿는 이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누림을 나누는 등, 사도 시대와 같이 모든 사람이 기능을 발휘하는 상호적인 집회 방식을 회복하기 바랐다. 슈페너는 시종일관 경건한 루터회의 회원이었지만 그의 개혁은 루터회 신학자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슈페너가 지나치게 영적 수양을 중요시하고 교의를 소홀히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슈페너의 개혁은 경건한 생활을 추구하는 많은 믿는 이들을 매혹시켜 17세기의 독일 기독교에 맑은 물을 주입하였다.

 

2).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발전과 흥성-프랑케

슈페너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청년 강사 아우 구스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가 있다. 그는 1687년 주관적인 회개와 거듭남을 체험했다. 후에 프랑케는 드레스덴에서 슈페너와 2개월 동안 함께 머물면서 경건주의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그는 라이프치히에 돌아온 후에 대학에서 강의하여 열열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루터파의 선제후에게 불안한 마음을 일으켰고, 선제후는 '소그룹 집회' 실행을 금하였다. 프랑케는 에르푸르트로 가서 목회를 하였다. 1697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빌헬름 3세는 할레에 대학을 세웠다. 이 빌헬름 3세가 바로 후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이다. 슈페너의 추천으로 프랑케는 할레 부근 글 라우 카우(Glauchau)에서 목회를 하며 할레 대학의 교수직을 맡았다. 30년간의 그의 영향으로 할레 대학은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아동 교육원, 성경학교, 라틴어 학교, 고아원, 구제 센터, 진료소, 성경 인쇄 출판소를 경영하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교육 기관을 창설했다. 그가 임종할 즈음, 그의 고아원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이 2200명에 달했고, 134명의 고아들이 합당하게 돌봄을 받았다. 친젠도르프 역시 이전에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이렇게 방대한 비용은 프랑케의 믿음과 기도로 말미암아 유럽 각지의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할레 경건주의 운동의 주목할 만한 또 다른 특징은 해외 선교에 대한 열정이다. 1705년 덴마크 국왕이 소집하여 인도에 복음을 전하러 간 선교사 중에는 두 명의 할레 대학생이 있었다. 18세기 동안 할레와 그 교육 기관은 육십 명의 해외 선교사를 보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일생 동안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주님 품으로 간 슈바르츠(Schwartz)이다. 교회사 가운데 경건주의는 아주 큰 공헌을 하였다. 경건파 믿는 이들 중 고트프리트 아르놀트(Gottfried Arnold)는 1699년 "중립 교회와 이단 사관" 을 발표하였다. 그는 당대의 조류에 따라 믿는 이들을 이단으로 판단해서는 안되며 반드시 그 사상을 깊이 살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심지어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이단자들' 이 천명한 진리가 소위 '정통'이라고 하는 단체들이 천명한 진리보다 많다고 여겼다. 당시 보편적으로 주류 교회와 부합한 교회사의 논점과 비교하여 말할 때 이러한 관점은 진보적인 것이었다.

 
4. 연합 형제단과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

(Johann Amos Comenius)

1) 연합 형제단에 관한 간단한 소개

1415년 얀 후스(Jan Hus)가 이단이라는 죄명으로 천주교에 의해 화형 된 후, 그의 추종자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다. 후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 파로 나뉘었다. 그중 한 파는 정치와 타협하지 않고 무력으로 대항하지도 않으며 오직 신앙을 위해 기꺼이 고난받기를 원했다. 그중 한 사람인 페터 첼시 스키(Peter of Chelcicky)는 자신의 저서에서 교회를 건물로 비유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건물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무너지고 불태워져 폐허 더미가 되었다. 그들의 목적은 붕괴된 건물의 잔해 속에서 진정한 터를 찾아 무언가를 회복하려는데 있었다. 박해를 받은 이 믿는 이들은 보헤미아의 한 농촌 쿤네발트(Kunewald)에 은둔하였다. 1457년에 그들은 성경의 원칙에 따라 교회를 세웠는데, 그들 자신을 "연합 형제단(United Brethren)"이라 불렀다. 이들이 모라비아 교회의 전신이다.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을 섬기고 범사에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피차 권면하고 안정되고 경건한 생활을 했다. 생활에서나 봉사에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했다. 그들은 50년 동안 이러한 평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1501년에 그들은 성 시집(聖詩集)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후에 그들은 루터와 칼뱅과 연결됨으로 교리에 있어서 더욱 완전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개신교가 막 일어난 때인 1517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이 연합하여 개신교를 공격했을 때에 이러한 무리들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들을 진멸하려 했고 그 후에도 지속적인 박해가 있었다. 1548년에 황제가 그들에게 나라를 떠나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에 그들은 폴란드의 한 지역 오스트로로크(Ostrorog)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복음을 널리 전파하여 교회를 세웠다. 1556년에 신임 보헤미아 국왕의 통치 하에서 그들의 귀국이 허용되자,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그들의 모임을 다시 시작하였다. 교회의 큰 부흥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와 폴란드 세 곳으로 확산되었다. 1571년에 한 폴란드 귀족이 그들의 모임에 와서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영생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여, 제 마음에 기쁨이 충만합니다. 제가 보고 들은 것으로 인해 저 자신이 에베소와 데살로니가 혹은 다른 사도 시대의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저는 신약 서신에 읽었던 모든 것들을 친히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습니다." 1579년부터 1593년 사이에 그들은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하였는데, 이 번역본은 오늘날 체코 성경의 근간이 되었고 현대 체코 문학의 기초가 되었다. 연합 형제단에 가입한 이들 중에는 귀족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연합 형제단의 신앙을 보헤미아 국교로 삼을 것을 구상했다. 1609년에 귀족들의 무력적인 위협으로 보헤미아 국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의 헌장에 서명하고 정부가 종교 보호 위원회를 설립하고 개신교의 신앙을 보호해 줄 것을 서명했다. 1617년에 천주교를 신봉하고 예수회의 교육을 받았으며 개혁 운동을 반대한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Ⅱ)가 보헤미아 왕이 되자 그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신하와 결탁하여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장을 폐지했다. 그러나 개신교를 믿는 귀족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국왕을 선택할 주장이 있다고 선택하며 1616년에 두 명의 천주교에 속한 정계 인사를 창밖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군사를 소집하여 페르디난트 2세를 폐하고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팔라티나트(Palatinate)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Fredrick Ⅴ)를 국왕으로 선출하였으며 예수회 수사들을 모두 축출하였다. 쌍방의 충돌은 갈수록 격렬해졌고 불행하게도 페르디난트 2세가 1619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됨으로 지역적인 전쟁이 전체 신성 로마 제국으로 확대되어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것이 30년 전쟁의 막을 올리게 된 것이다. 1620년에 프라하 근처에서 벌인 백산 전투(the battle of the White Mountain)에서 천주교 연합군이 대승하자 종교 개혁을 부축했던 귀족들이 참수당하고 국내에는 폭동이 일어났으며,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이끌고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 떠난 가구가 3만 6천여 가구에 달했다. 17세기에 연합 형제단의 믿는 이들은 다만 은밀하게 하나님을 경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인도자였던 코메니우스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감추어진 씨앗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을 격려하였다. 1660년 코메니우스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체험에서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들이 잔해당하게 하시고 또 어떤 교회들이 일어나게 하시거나 혹은 그들이 다른 곳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로 하여금 그 지방에서 살아남을지 죽게 될지 혹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게 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복음은 항상 하나님의 다룸을 받은 그리스도인을 통해 이 땅에 있는 다른 민족에게 전파됩니다. 그러므로 … 우리의 손실이 세상 사람들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1707년에 조지 제슈케(George Jaeschke)도 83세의 임종 직전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현재 형제회 무리들은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여러분은 남아 있는 모든 이들의 분깃이 될 큰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구원이 모라비아 지방에 임하게 될지 아니면 여러분이 바빌론의 땅에 떠나야 할지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러한 구원이 곧 실현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여러분을 위한 한 피난처가 예비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아무 두려움 없이 주님의 거룩한 말씀에 따라 그분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훗날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은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친젠도르프의 영지에 발을 내디딘 첫 번째 무리의 모라비안 믿는 이들이 되었다.

 


2) 코메니우스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소개

요한 코메니우스(Johan Comenius, 1592~1670)는 모라비아의 니브니츠(Nivnitz)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코메니우스는 연합 형제단의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요한 코메니우스가 열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 후 2년 동안 코메니우스의 어머니와 두 여동생도 잇달아 죽자 의지할 데가 없게 된 코메니우스는 슈트라스니츠(Strassnitz)에 있는 숙모의 집에 거하면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1618년에 코메니우스는 모라비안 형제회에서 운영하는 프레라우(Prerau) 라틴어 학교에 들어가 정식으로 중등교육을 받았다. 2년 후에 독일 낫사우(Nassau)에 있는 헤르본(Herborn) 대학에 들어가 공부했다. 1618년부터 코메니우스는 풀네크(Fulllneck)에서 연합 형제단을 목양하였다. 1620년에 스페인군이 풀네크에 진군하여 대대적으로 파괴하므로 제로틴의 찰스(Charles of Jerotin) 성으로 피난하여 그 지방의 형제들의 인도자가 되었다. 그는 오래된 그 성에서 <세상의 미로와 마음의 낙원(The Labyrinth of the World and the Paradise of the Heart)>이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의 성격은 <천로역정>과 비슷한데, 사람이 세상에서 평강을 찾을 수 없고 오직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만이 사람들의 진정한 평강이라는 것을 우화의 방식으로 묘사했다.

후에 코메니우스는 박해를 받자 다시 피신하였는데,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무리의 모라비안 성도들을 이끌고 갔다. 그 노정에서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그의 아내와 아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담대하게 성도들을 격려하였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위해 감추어진 씨앗을 남길 것이라고 믿었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폴란드의 리사(Lissa)에 정착하였다. 코메니우스는 그 지방에서 교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또한 영국과 스웨덴에도 가게 되었다. 1650년에 코메니우스가 쓴 <위험에 처한 어머니의 간증(The testament of the Dying Mother)>이라는 책에서 믿는 이들을 잉태한 어머니인 교회가 술 취한 딸들의 피를 빨아먹는 마귀가 되었기 때문에 모든 자매들, 곧 복음주의의 교회가 마땅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모독한 바빌론에서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성실히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 안에서 서로 연합하고 하나 되며, 무지한 사람들의 열심에서 나와 성경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진리의 터 위에 돌아가 교통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님의 보배로움과 성령의 은사를 얻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1660년 폴란드에서 천주교의 박해를 받자 그곳에서 그는 <애통의 소리(Voice of Mourning)>와 <한 가지 부족한 것(One Thing Needful)>을 저술하였다. 1670년에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그는 이미 전 유럽에 알려졌고 교육계에 위대한 선구자 중의 한 사람으로 공인되었다.


5. 네덜란드 지역의 종교 개혁 운동의 발전

 

1). 종교 개혁 운동의 간단한 역사

16세기의 네덜란드는 스페인 통치 하에 17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범위는 오늘날의 벨기에, 네덜란드 땅에 걸치며, 도합 350개의 도시를 포함한다. 농업과 공업과 상업이 발달한 네덜란드는 점차적으로 인재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고 인문주의의 창시자 에라스무스가 바로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인쇄술의 발달로 각종 성경 번역본과 이에 관련된 서적들이 대량 출판되고 발행되었다. 그러므로 루터파, 왈도파, 신비주의, 인문주의, 칼뱅파 등 새로운 종파들이 다 이곳에서 발전되었다. 출신이 같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수도사들은 일찍부터 루터파의 교의를 받아들였고 선교 기관을 조직하여 독일 국적을 가진 모든 상인들이 네덜란드 각 성에서 종교 개혁 사상을 확산하는 중심이 되게 하였다. 후에 천주교의 압박으로 인해 칼뱅 파는 무력으로 대항할 것을 주장하여 대세를 잡게 되었다. 1555년에 이르러 카를 5세가 물러나고 스페인과 폴란드와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경내에 있는 스페인의 통치권이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가자 네덜란드의 대부분 사람들이 칼뱅 파이고 그다음이 재침례파이며 루터파는 오히려 적은 무리의 단계가 되었다.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와 스페인으로 하여금 정치와 종교에 있어서 일치되게 하였고 추기경의 추밀원(Privy Council)이 실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스페인의 종교 재판소가 이곳에서 이단을 소멸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했으며 군대를 파견하여 반항자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1567년부터 6년 동안 1만 8천 명이 처형되어 전국이 공포의 분위기로 가득했다. 또한 대대적으로 재산을 몰수하고 모든 업종에 10%의 세금을 부과하여 심각한 경제난을 초래했다. 이것은 귀족들과 중산계급의 불만을 쌓이게 하여 반대 운동을 야기했다. 1572년에 알바공의 잔악한 통치에 대항하여 오렌지 공 윌리엄(William of Orange)은 군중들을 이끌고 브릴(Brill)을 다시 빼앗다. 그러자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인 셸란(Zealand)과 프리슬 란드(Friesland), 위트레흐트(Utrecht) 지방들은 이에 반기를 들고일어났다. 장기전을 거치면서 북부의 7개 주로 구성된 네덜란드 연방(United Provinces)이 1581년에 성립되었다. 윌리엄은 1573년 칼뱅파 신앙을 받아들였다. 1584년 윌리엄이 피살되자 올덴 바르네 벨트(jan van oldenbarnevelt)가 군중들을 인도하고 칼뱅파의 신앙을 받아들일 것을 선포하였다. 네덜란드의 승전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의 군사적인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게다가 장기적인 정치적 원한 관계가 가증되자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로 영국을 공격한 후 다시 네덜란드를 평정하려고 하였다. 스페인 무적함대가 칼레(Calais)에 도착하자, 플리머스에서 출발한 영국의 해군이 강력한 공격을 가함으로 스페인은 패전하고 말았다. 그러나 스페인과 네덜란드 간의 전쟁은 지속되었고, 1609년에 네덜란드 연방은 사실상 독립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이 네덜란드에 공식적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한 것은 30년 전쟁이 끝난 때인 1648년에 이르러서였다. 혁명 기간에 무력으로 자기 나라를 지킬 것을 주장한 칼뱅파 교회가 점차적으로 네덜란드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얻게 되었다. 그들은 장로 제도, 하이델베르크 교의 문답(Heidelberg Catechism), 1562년에 결의했던 벨기에 신조(The Belgic Confession)을 채택하였다. 1571년에 전국 의원회의가 네덜란드 국경 밖의 엠덴(Emden)에서 거행되었다. 원래 네덜란드는 통상과 무역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또한 독립 과정에서 이웃 나라들의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네덜란드 개신교는 각종 다른 신앙에 대해 매우 너그러웠다. 심지어 천주교 신자들이 자유롭게 거주하며 생활할 수 있고, 재침례파 믿는 이들이 공개적으로 집회를 가질 수 있는 등 그곳이 종교의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게 했다. 하나님께서 그곳을 축복하셔서 17세기 초에는 해상 강국이 되었고, 심지어 한때 대만과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기까지 했다.

 

2). 메노파(Mennonites)의 간단한 역사

메노 시몬(Menno Simons, 1492-1599)은 본래 천주교 신자였다. 그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24세에 천주교 신부가 되어 네덜란드 북쪽의 한 농촌에 있었는데, 그때까지 성경을 접해 본 적이 없었고 떡과 잔에 대한 인식도 없었다고 한다. 성경을 연구한 후부터 그는 천주교의 많은 전통적인 관습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1530년에 로마 천주교를 떠나 자유주의 복음파의 전도자가 되었다. 후에 메노 시몬은 재침례파가 박해를 받는 것에 대해 듣고서 재침례 받는 것을 이상하게 느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고 성경에는 전혀 유아 세례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1536년에 메노 시몬은 재침례파 믿는 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결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들 재침례파 믿는 이들은 뮌스터의 폭력 사태를 위험한 일로 여기고 우려를 표했다. 이들은 종교 분쟁에 염증을 느끼고 단순하게 복음을 전파하며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을 살고자 했다. 메노 시몬은 이러한 모습에 대해 감동을 받고 매료되었다. 그들의 요청 하에 메노 시몬은 다시 침례를 받고 그들과 합류하여 양 무리를 목양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1537년부터 메노 시몬은 사방을 다니며 각지에 흩어진 믿는 이들을 심방하고 그들을 강화함으로써 그들을 다시 모이게 하고, 교회를 세우며 25년 동안 수고했다. 메노 시몬은 스스로 이렇게 설명했다. "제 몸과 영혼을 모두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따라 침례를 주고 저의 작은 은사를 다하여 주를 위해 일하며 그분의 거룩한 성과 성전을 건축하여 떨어져 나간 돌들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놓기 원합니다."  메노 시몬은 폭력으로 박해를 대항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믿는 이들이 마땅히 혹독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야 한다고 여겼다. 이것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신학자들과 사람들의 피를 흘렸던 폭군들을 부끄럽게 하고 설자리가 없게 하였다. 1543년에 메노 시몬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로 무고당하여 네덜란드 각지로 유랑하게 되었다. 몇 년 후에 덴마크의 알레 펠트 백작(Count Alefeld)의 보호를 받아 홀슈타인(Holstein) 령 프레젠부르크(Fresenburg)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재침례파의 신앙을 보호하는 문서를 출판하였다. 이러한 출판물을 통하여 당시 위정자들은 재침례파의 신앙에 대해 어느 정도 바로 알게 되었다. 이로써 그들에 대한 박해가 누 그려졌고 믿는 이들은 집회의 자유를 어느 정도 얻게 되었다. 1559년 메노 시몬은 프레젠부르크에서 평안히 잠들었다.

3). 칼뱅파와 아르미니우스파의 신학적 분쟁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독립운동이 종결되자 신학적 분쟁이 즉시 개신교 교회 듣 가운데 전개되었다. 중요한 쟁점은 신학자들의 선택과 구원의 진리에 대한 견해가 다른데 있었다. 칼뱅을 주동으로 한 학파는 무조건적인 선택과 제한적인 구속을 이룬 그리스도(그리스도께서 선택받은 사람만을 위해 죽었음)를 주장하였다. 또 한 무리는 라이덴(Leiden) 대학의 신학 교수인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를 주동으로 한 학파로서 칼뱅의 관점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또한 "항변파(Remonstrants)"라고 불리기도 했다. 아르미니우스는 1576년부터 1582년까지 라이덴 대학에서 공부한 후, 제네바에 가서 신학을 더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158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목사직을 맡았고 후에 라이덴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신학 교수로 있을 때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의 뜻과 선택의 방면에 관한 많은 신학적 질문에 관해 답변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칼뱅 신학에서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구원에 대한 사람의 책임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쟁론은 라이덴 대학에서 이루어졌고 뒤이어 네덜란드 개신교 전체로 확산되었다. 칼뱅 파는 인간이 타락하여 죄의 억압 아래 있으므로 구원에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겼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 이미 어떤 사람들을 선택받도록 예정하셨고, 사람이 타락한 후에는 구원의 은혜를 그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주신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는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연약하게 되었지만, 영적인 일을 선택하는 것에 있어서 자유 의지를 가진 것으로 여겼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 선택받은 사람들을 예정하지 않으셨고, 사람의 타락은 자유 의지의 결과이고, 타락한 후에야 하나님께서 선택하러 오셨다고 그는 주장했다.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후에 요하네스(Johannes)가 그의 관점을 발전시켰다. 1610년 정부 관원의 지지 아래 그는 "항변 선언" 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 예수의 구원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2)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3)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이 참된 선을 행하도록 도우신다.

(4)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할 수 있다.

(5)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잃을 수 있다.

두 학파의 쟁론은 정계로까지 번졌고 주지사는 항변파를 지지하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의 정적인 칼뱅 파는 국가회의를 소집하여 정점을 해결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주지사는 각 주별로 종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1618년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주지사는 체포되었고 그다음 해에 처형되었다. 칼뱅 파는 도르트 종교회의(The Synod of Dort:1618~1619)를 소집하였는데, 그것은 개신교 역사 이래 가장 큰 회의였다.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온 개신교 대표들이 모두 출석하였다. 그 회의에서 아르미니우스의 결의를 일제히 거절하는 안을 통과시켰고, 벨기에 신조와 하이델베르크 교의 문답을 승인하여 네덜란드 개혁파의 공동 교의로 삼았다. 아르미니우스는 감리교 주의(Methodism)의 선구자가 되었다.
 
 

6. 영국의 종교 개혁 운동     

1). 종교 개혁의 서막

일찍이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100년 전(14세기)에 옥스퍼드 대학 출신 신학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제3장 참고)는 천주교에 대해 각종 비판을 한 바 있다. 위클리프의 종교 개혁 운동은 루터보다 100년 앞섰지만 개혁의 중점은 루터와 뜻하지 않게 일치하였다. 논문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된 신앙의 진정한 원천'이라는 것과 '오직 성경만이 진리'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모든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고 권세 잡은 이들은 반드시 권위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점은 교황의 절대 권위를 부인하고 성직자의 중보의 위치를 부정해 버렸다. 위클리프는 또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모든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큰 영향을 주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신앙과 행동의 원칙으로 삼도록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교회의 타락과 우상숭배를 통분히 여겼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당시 영국인 가운데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위클리프 파 신자들이었다고 한다. 위클리프의 개혁은 자연히 로마 천주교의 불만을 낳았는데, 다행히 영국 귀족의 보호로 살아 있는 동안 위클리프는 어떤 심판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사후에 몇몇 종교 회의에서 교황청은 이단이라는 죄명으로 그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내어 불태우고 그의 저서를 불살랐을 뿐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로 구성된 복음 단체인 롤러드파를 박해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 학파는 영국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일반인들의 사랑을 더 많이 받게 되었고 반(反) 성직 계급 사상이 일반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인문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대량으로 유입된 루터의 저작들이 영국 종교 개혁의 주된 원동력이 되었다.

 

 

2). 종교 개혁 과정

영국은 일찍부터 로마 교황청에 대해 진절머리를 냈다. 1215년 영국이 대헌장(Magna Carta)을 제정할 때부터 교황청의 권위 하에 있는 귀족의 기본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후에 교황이 아비뇽(Avignon)에 있을 시기에 의회가 법을 통과시켜 교황청에 소송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또한 국왕만이 국내 종교적인 안건을 처리하는 최고 권위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영국의 종교 개혁의 실제 도화선은 영국 국왕 헨리 8세의 혼인 분제였다. 헨리 8세의 아내 케서린(Catherine)은 스페인의 공주로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겸 스페인 국왕 카를 5세의 고모였다. 케서린은 결혼한 지 십여 년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 했다. 헨리는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없으면 영국에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핑계로 교황에게 왕비와 이혼하고 다른 아내를 취하는 것을 허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교황은 카를 5세를 두려워하여 헨리 8세의 요구에 즉각적인 답을 피하고 시간을 끌었다. 헨리는 궁녀인 앤 불린(Anne Boleyn)과 열애에 빠져 이혼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때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라는 케임 부리지 대학교수가 이 문제에 대해 각 대학의 신학자들에게 의견을 구해 볼 것을 건의하였다. 헨리는 한 면으로 학자들의 지지를 구하고, 한 면으로 성직자들을 압박하여 국왕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게 하고 교황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중단하였으며 교황에게 소송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승인하게 하였다. 일반인의 지지를 얻기 위해 1529년 부활절에 개혁파의 서적이 유포되는 것을 허락하고 1532년에 열성적인 개혁파 믿는 이인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을 우두머리로 세웠다. 1533년에 헨리는 앤 불린을 왕비로 취하고, 크랜머를 대주교로 세워 그의 혼인을 승인케 하였다. 그다음 해 교황은 헨리 8세의 교적을 파면하고 영국 의회는 "수장령(首長令, The Act of Supremacy)"을 통과시켜 영국 국왕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며 "반란 법(Act of High Treason)" 을 통과시켜서 영국 왕을 이단자라고 칭하거나 헌법에서 헌법에서 국왕에게 부여한 권한을 부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반란죄의 명목으로 사형에 처한다고 선포하였다. 곧이어 헨리는 영국 교회의 기도 책에서 교황의 이름을 삭제할 것을 공포하였다. 이로부터 영국은 로마와 완전히 분리되었다. 1535년에 헨리는 왕국의 권위를 부정하는 유명인사들을 처형하였다. 그중에는 케임 부리지 대학 전(前) 학장이 자 추기경인 존 피셔(John Fisher)와 과거 헨리의 친한 친구이자 <유토피아>의 저자인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포함된다. 그는 또한 각지 수도원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고 학교를 세우고 새로운 교구를 형성하는 데 이를 부분적으로 사용했다. 결국 378곳의 수도원이 해체되고 645곳의 수도원은 이로 인해 파산하여 영국에서 수도 주의가 완전히 근절되고 청교도주의로 그 지위가 대치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헨리의 복잡한 혼인 관계에서 헨리를 지지했던 대주교 크렌 머는 루터파의 관점에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는 위크 리프의 사상을 받아들여 국가가 종교 개혁의 책임을 감당하고 성경을 제창하는 주된 책임을 감당하게 되기를 원했다. 1536년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 근거하여 "10개 신조(Ten Articles)"를 작성하였는데, 그것은 개신교에 대한 최대의 양보였다. 거기에서는 성경과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이 세 가지 신경을 신앙의 원칙으로 삼았고 세례와 장례식과 성찬식을 필수적인 성례로 남겨 두었다. 그런데 헨리는 성찬의 변질성, 죽은 자의 미사, 우상 숭배 등의 전통을 여전히 고수하였다. 개혁파의 문답집인 <그리스도인의 수양(The Institution of a Christianman)>이 편저되었고 각종 성경 번역본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535년에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의 번역본을 골격으로 한 마일스 커버데일(Miles Coverdale) 틴들 영어 성경이 간행되어 크랜머와 크롬웰의 허락 하에 모든 예배당이(틴들의 번역본을 골격으로 한) 영어 성경을 한 권씩 비치하여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하였고 영어로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가르쳤다. 그렇지만 성례의 예식은 여전히 라틴어를 주된 언어로 사용하였다. 1539년에 크랜머가 서언을 쓴 <대성 경(The Great Bible)>이 간행되었다. 헨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을 살 것을 명하였고 모든 성직자들도 사람들에게 성경을 부지런히 읽도록 권해야 한다고 명했다. 헨리는 천주교와 결별하였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여전히 교의(敎義)와 예식을 정통으로 삼았다. 헨리가 원했던 것은 성질에 있어서는 국가에 속하고 엄격히 국왕의 통제를 받는 개혁적인 로마 천주교였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헨리는 독일 지역에 있는 루터파 제후들의 협력을 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루터교의 교의에 근거를 두지 않은 어떤 맹약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헨리는 크게 노하여 프랑스와 스페인과의 협정을 바꾸어 1539년에 "6개 조항(Six Articles)"을 강제로 통과시켰다. 그 조항들은 어느 누구도 영국 내에서 루터파의 교의를 전수하는 것을 루터파를 포함한 모든 개혁파 믿는 이들을 공격하였으며 천주교의 교의를 다시 새롭게 제창하여 공재설에 대해 이의를 가진 사람들을 다 처형할 것을 언급하였다. 1540년 헨리는 천주교 신자인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를 아내로 취하고 개혁파를 거절한다는 뜻으로 카를 5세와 군사 동맹을 매었다. 1543년 그는 또 중혼하는 동시에 틴들의 번역본을 포함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번역본을 한 권도 남기지 말고 모두 불태워 없애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모두 엄벌에 처하였다. 정부 관원들과 귀족들만이 가족들과 성경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상인들도 혼자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이외의 사람들은 다른 책들은 읽을 수 있었지만,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성경은 읽을 수 없었다. 이처럼 천주교를 반대하는 것에 대한 헨리의 잔혹함은 그로 "영국의 네로"라는 칭호를 얻게까지 하였다. 1547년에 헨리가 죽자 그의 세 번째 아내가 낳은 아들인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가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가 아홉 살이었으므로 그의 고모부인 에드워드 시모어(Edward Seymour)가 섭정하였다. 이때 와서야 비로소 총명한 크린 머가 대외 정책에 있어서 개신교의 방식을 대대적으로 채택하였다. 이것이 결국 영국 종교 개혁 운동과 문화에 있어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에드워드는 어려서부터 개혁주의자들에게서 훈련받았고 시모어도 소작농들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기 때문에 개신교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1547년에 의회는 과거에 제정한 6개 조항을 폐지하고 사상과 출판의 자유를 어느 정도 허용하였다. 크랜머의 환경하에 유럽에 있는 개혁주의에 관련된 저서들이 잇달아 영국에 들어왔다. 이것이 개신교의 일을 강화하였고 많은 우수한 성직자들을 배출시켰다. 1549년에 의회가 "통일령(Act of Uniformity)"을 실시하여 각지에 있는 교회가 크랜머가 편집한 공동 기도문을 사용하도록 명하였고, 주교와 장로와 집사의 계급을 보류하였으며 형식의 간소화를 실행하며 영어로 예배를 보고 성경과 성경 읽는 것을 예배의 기본으로 삼았다. 1553년에 크랜머는 여섯 명의 신학자들과 함께 "42개 조항의 신조(Forty-Two Articles Religion)"를 완성하였는데, 후에 39개 조항으로 고쳐서 영국 교회의 규범을 제공하였다. 1553년 에드워드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누나 메리(헨리의 첫 번째 아내 캐서린의 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메리는 에드워드 재위 기간에 있었던 모든 종교 법령을 폐지하고 영국을 다시 천주교로 돌이키고자 하였다. 1554년에 의회의 각료들을 무릎 꿇게 하였고 로마 천주교가 이교(異敎)라는 죄명을 벗기고 영국이 다시 천주교로 돌아오게 했다. 또한 그의 삼촌 카를 5세의 안배로 카를의 아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것은 영국 국민들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게 하였고 외국 세력의 개입을 두려워하게 하였다. 메리는 각지의 폭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주교로 돌아가게 하는 데 온 힘을 쏟았고 크랜머 등 300여 명의 개신교 지도자들을 처형하였다. 이러한 박해로 많은 사람들이 스코틀랜드와 유럽 대륙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메리는 "피의 메리"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당시의 순교자들이 나타낸 용기는 영국 국민들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고 애국주의와 개신교는 그들 마음속에 동의어가 되었다. 1558년에 아들이 없는 메리는 병으로 죽고 그의 동생(헨리의 두 번째 아내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올랐다. 엘리자베스는 온건한 정책을 채택하여 모든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1559년에 의회가 "수장령(The Acts of Supremacy)" 을 통과시켜 교황의 권위를 폐지하고 영국 왕을 교회의 최고 통치자(Supreme Governor)로 세웠다. 그러나 많은 신부들이 이것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동시에 주교들이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자 거의 모든 주교들을 폐하였다. 천주교의 강력한 반발은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더욱 개신교로 돌이키게 하였다. 그녀는 "35개 조항의 신경"을 다시 제정하여 영국 의회의 신앙의 선언문이 되게 하였고 1571년에 의회의 동의를 얻었다. 1563년에 의회는 "심사령(The Test Act)" 을 통과시켜 모든 정부 관료들에게 여왕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하게 하고 천주교 신자들이 하원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동시에 존 폭스(John Foxe)의 <순교 열전(Books of Martyrs)>이 세상에 알려지자 국민들은 천주교에 대한 반감을 더욱 갖게 되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는 천주교 신자였고 엘리자베스의 조카였으며, 그의 남편은 프랑스 국왕이었다. 1559년에 칼뱅파가 된 존 녹스(John Knox)는 제네바에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종교 개혁을 일으켰는데, 그때 프랑스가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려고 했다. 다음 해에 엘리자베스는 칼뱅파와 맹약을 맺고 프랑스의 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였다. 1567년에 칼뱅파 장로회가 득세하자 메리는 그 세력에 밀려 퇴위하고 런던으로 도망하였다. 그 후 20년 동안 메리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영국을 반대하는 구실로 삼았던 중심인물이 되었다. 1569년의 엘리자베스의 개혁이 북부에서의 천주교 신자들의 폭동을 일으키자 로마에서도 예수회 수사들을 비밀리에 영국에 침입시켜 음모를 꾸미고 무력으로 정권을 전복하여 그녀의 조카인 메리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1587년 메리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을 받았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의 맹공격을 받아 패배하자 영국 종교 개혁은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영국 교회는 "성공회"라고 불리게 되었다. 
 
 

3) 청교도주의의 일어남과 발전

영국의 종교 개혁이 교회의 개혁을 제창함에 따라 잔재하는 천주교의 독소를 제거하는 개혁주의자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그들이 소위 청교도들이다. 메리 여왕이 통치하던 기간에 많은 청교도들이 세력에 밀려 외국으로 유리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자 그들은 분분히 강렬한 칼뱅주의 사상을 가지고 귀국하여 교회를 개혁하기를 바랐다. 당시 엘리자베스가 온건 정책을 시행하여 천주교의 형식과 개혁주의의 신학을 혼합하였기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의 불만의 소리가 날로 높아졌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국교회에 남아 있으면서 점진적으로 개혁하는 방식을 주장하였다. 비교적 급진적인 한 파는 정교의 분리를 요구하였는데, 그들은 "비 순응 주의자들(Non-Conformists)"이라고 불렸다.

국교회에 남아서 개혁에 힘쓰는 청교도들과 영국 성공회 사이의 가장 큰 쟁점은 성례 의식과 성직자 의복에 관한 문제였다. 1563년에 엘리자베스가 성공회 성직자는 평일에 특별히 지정된 복장을 입어야 한다고 내린 명령은 청교도들의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믿는 이들이 모두 제사장이므로 복장으로 구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믿는 이들이 무릎을 꿇고 성찬을 받는 것과 세례를 받을 때 성호를 긋는 행동을 반대했다. 비록 교회의 총회에서 한 표차로 패배하였지만 그들은 거대한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1572년에 케임 부리지 대학교수인 토머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는 한걸음 더 나아가 청교도들의 회의에서 믿는 이들의 평등에 대한 논점을 제시하였고 주교 제도를 포기하고 믿는 이들이 장로를 추천하고 세우는 것을 요구하였다. 의심할 것 없이 이것은 성공회의 주교에 대한 큰 도전이었으므로 그는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카트라이트는 한 무리의 청교도들과 여러 강습회와 종교회의를 조직하여 영국 장로교를 창시하였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했던 또한 무리의 청교도들은 '회중 주의(Congregationalism)'를 창시하였다. 1580년에 케임 부리지를 졸업한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e)은 노리치(Norwich)에서 첫 번째 독립 회중 교회를 세웠다. 그는 교회가 참된 믿는 이들로 구성되고 믿는 이들이 자체적으로 교회를 치리할 것을 주장하였고 지방이나 지역에 있는 교회만이 교회 행정의 진정한 단위이며 신약에 따라 믿는 이들이 스스로 표준을 제정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청교도들에 대해 엘리자베스는 1577년에 강경파에 속한 사람들이 대주교를 맡도록 위임하였고 천주교로 하여금 청교도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1593년에 의회는 믿는 이들이 자체적으로 모일 수 없다는 법령을 통과시켰고 발각되면 즉시 강제로 추방하였다. 라이트와 브라운을 포함한 유랑했던 청교도들은 모두 유럽의 네덜란드에 거점을 갖고 그곳에서 신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에 신대륙으로 가기 위해 메이플라워호를 탔던 승객들은 대부분 이때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은 후 조카 메리의 아들인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가 즉위하여 영국 국왕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때 청교도들은 연명하여 상소를 올려 성공회의 예식 조항을 고치기를 바랐다. 제임스는 청교도들과 회의를 통해 토론할 것을 승낙하고 1604년에 햄프턴(Hampton) 궁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였다. 유일한 결론은 바로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었다. 54명의 학자들이 참여하고 5년에 걸쳐 완성된 이 성경이 바로 훗날 가장 광범위하게 알려진 영국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이다.

제임스는 왕권 신수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성공회의 조항을 고칠 마음이 없었고 모든 교회가 주일 예배 후에 스포츠, 게임, 춤 등을 즐길 것을 명했다. 경건한 생활을 추구했던 청교도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땅을 떠났다. 1607년에 한 무리의 청교도들이 존 로빈슨(John Robinson)과 존 스미스(John Smyth)의 인도 하에 종교의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먼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그들은 메노파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스미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침례를 받는 메노파의 주장에 동의하여 그곳에서 침례교를 세웠고 또한 메노파와 연합할 것을 계획하였다. 1612년에 반대자들이 영국으로 돌아와서 런던에서 침례교를 세웠다. 그러나 그 입장이 아르 미니 안파에 가까웠기 때문에 일반 침례교라 불리었다. 그리고 칼뱅의 주장을 찬성했던 일부 믿는 이들은 분리되어 나가 칼뱅파 침례교를 세웠다.

로빈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라이덴에 정착해 독립교회를 세웠다. 이 양쪽에 있는 믿는 이들은 후에 신대륙으로 가야 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로빈슨의 축복의 송별로 스피드웰(Speedwell, 식물의 한 종류임) 호는 네덜란드를 출발하게 되었고 메이플라워호는 영국에서 한 무리를 태우고 그들과 합류하였는데, 스피드웰 호가 파선하여 배에 물이 들어오자 그들은 프리머스에 닻을 내렸다. 그 후에 메이 플라워호가 다시 출항하였지만 폭풍이 너무 심해 사람들은 모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앞으로 나아갈 것을 굳건히 결심하여 결국 9주 후에 신대륙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칼뱅파에 열심히 있는 믿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미주에 도착한 후에 그들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관리했다. 이것은 훗날 미국의 민주 정치 체제의 기초를 세웠고 새로 일어난 강대국의 흥왕과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4) 청교도 혁명-정교의 분리, 신앙의 자유

찰스 1세가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고 나서 독재와 학정은 더욱 심해졌다.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었고 외적인 형식을 중요시했으며 또한 그가 아르 미니 안파로서 영국과 스코틀랜드 지역의 구교(성공회)를 따르지 않는 모든 믿는 이들을 있는 힘을 다해 압제하자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와 의회와의 불화로 인해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회주의자들은 '원두당(圓頭黨, Rroundheads)'이라고 불렸고, 교황 주의자들은 '기사당(騎士黨, Cavaliers)'이라고 불렸다. 의회가 스코틀랜드에 원조를 요청하고 스코틀랜드의 요구에 응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등을 제정하며 장로교 방식의 교회 행정을 채택하였다. 피의 전쟁이 있은 지 4년이 지난 후 찰스 1세는 1646년에 포로로 잡혔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은 원두당의 지도자로서 참전하지 않은 전투가 없었고 사람들은 그의 부대를 "철기대(Ironsides ) " 불렸다. 전쟁 후에 한때 그는 명망을 떨쳤다. 그는 국왕에 버금가는 최고 지휘자로서 의회를 통해 실권을 잡기 바랐고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근거하여 국가교회를 세우기를 주장했으며 또한 침례파와 독립파를 수용하였다. 크롬웰 자신과 그의 군대 장교 중에 독립파에 속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 문에 칼뱅파와 충돌이 일어났다. 칼뱅 파는 의회를 장악하여 군대를 해산할 것을 제시한 후 양식을 쌓아두고 군인들에게 제공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군사들은 아일랜드로 보냈다. 찰스 1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스코틀랜드 사람들과 비밀 협정을 체결하여 그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크롬웰은 6개월 내에 반대자들을 한 사람씩 모두 공격하였다. 그는 국가 반역죄로 국왕을 처형하고 의회를 해산시키고 공화국(Common Wealth)을 세웠으며 스스로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으로 취임하였다.

크롬웰은 종교의 자유를 구실로 봉기하였지만, 대권을 잡은 후에는 교인들과 유대인들에게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그가 베푼 은혜는 천주교와 성공회만 못 했다. 평등주의자들(Levellers)이 그에게 자유를 요구했을 때 그는 "그들에게 호흡할 자유는 있다."라고 대답했다. 한 군병이 평화주의자의 전단을 군모에 부착했을 때 그는 그것을 떼어 낼 것을 명하였고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 그의 "이곳에 한 귀족이 필요하고 또한 신사가 필요하다. 한 농부가 필요하며 하인이 필요하다. 이것이 일을 합당하게 처리하는 방법이다."라는 말에서 그에게 계급적인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은혜를 잘 베풀 줄 모르는 잔혹한 성격의 소유자이고 그의 부하는 포로를 죽이는 적이 있었다. 그는 아일랜드에 진군하여 같은 신교를 믿는 아일랜드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였고 또한 천주교를 신봉하는 프랑스와 함께 스페인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크롬웰이 1658년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이 뒤를 이어 2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때 찰스 1세의 장자는 외국으로 유랑하면서 국왕을 죽이는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이들은 추궁하지 않겠다고 선포하자 군대의 장군들은 찰스 1세의 장자가 영국으로 돌아와 복귀하는 것에 호응하였다.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자 크롬웰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내어 군중 앞에서 6시간 동안 나무에 달아놓고 또한 머리를 잘라내었는데 후에 그것이 개인의 소유물이 되어 심지어 골동품으로 수차 거래되었다. 1960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시드니 서삭스 단과대학(Sidney Sussex College)에서 그것을 받아 예배당 옆에 안장하였다. 그것은 크롬웰이 1616년과 1617년까지 이 대학의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찰스 2세는 천주교 신자였지만 옹호자들의 반대로 인해 성공회를 조금밖에 개혁할 수 없었다. 그의 동생 제임스 2세는 왕위에 오르자 즉시 천주교 적힌 숭배를 회복하는 데 힘썼고 결국 이것이 1688년의 명예혁명을 불러일으켰다. 개신교를 신봉하는 그의 딸과 사위, 네덜란드 국왕 윌리엄이 왕위에 오르자 영국인의 과거의 자유인권을 보호하는 법안을 다시 통과시켰으며 "관용 법(Toleration Act)" 을 시행하여 이단에 속하지 않은 모든 개신교 파가 자유롭게 예배를 볼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 주었다. 이러므로 장로교, 독립파. 회중 주의. 침례교, 퀘이커회, 성공회 등의 단체들이 정식으로 조직을 만들어 훗날 해외 선교를 위한 견고한 기초를 닦게 되었다.

 

5). 생명 노선을 지켜 온 증인들

영국 역사에서 가장 환영받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작가는 존 번연(John Bunyan)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칼뱅파 침례교 신자라는 이유로 붙잡혀 12년간 투옥되었다. 그 기간에 그는 <거룩한 성(Holy City)>, <넘치는 은혜(Grace Abounding)>, <천로역정(Pilgrim’ s Progress)>을 저술하였는데, 그것들은 영적 전쟁을 묘사하고 구속의 확고함을 회고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그는 신앙을 위해 순교했다. 또 한 사람은 존 밀턴(John Milton)이다. 그는 시각장애자였지만 <실낙원(Paradise lost)>, <복낙원(Paradise regained)>을 저술하여 인류의 타락과 구속받음을 설명하였다.

<순교 열전>의 저자인 존 폭스는 퀘이커 회의 선구자로서 당대의 유명한 성경학자였다. 그는 외적으로 복잡한 형식과 호화로운 교회 건물에 대해 극력 반대하였다.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믿는 이들의 생활은 영적인 것에 대한 필요성을 가린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만족케 할 수 있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그리고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참된 기쁨을 맛보아 한다고 말했다.

폭스는 복음의 전파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였고 직업적인 전도인 이 되는 것을 거절하였으며 어떤 성례(聖禮)도 찬성하지 않았고 오직 영적 실재만을 주의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모이게 되었다. 비록 당국의 박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붙잡히고 심지어 감옥에서 죽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유럽과 북미와 서인도제도 등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윌리엄 펜(Sir. William Penn)이라는 한 귀족이 그들과 합류하였는데, 영국 국왕이 그의 아버지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북미에 있는 한 조각의 땅을 그에게 주었다. 그것이 오늘날 미국의 펜실바니아(Pennsylvania) 주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이주하는 것을 도와주었고, 1624년에 필라델피아(Philadelphia, '형제 사랑'이라는 뜻임) 시가 세워졌다. 당시에 믿는 이들이 가정에서 자유롭게 모일 수 있다는 법령이 통과되어 이집 저집에서 모이는 것이 합법화되었고 믿는 이들의 무리는 더 확장되게 되었다.

이들 외에 아이작 왓츠(Issac Watts)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경건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주님에 대한 충성 때문에 투옥되었다. 어머니는 주님을 매우 사랑하는 청교도로서 순교자의 영을 가지고 있었고 자주 그를 데리고 남편을 면회하였다. 아이작 왓츠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총명했기 때문에 장차 성공회 목사가 되도록 명망 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옥스퍼드 대학에 가서 공부할 것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성령의 부어짐으로 인해 그러한 권유를 거절하고 부모의 발자취를 따를 것을 굳게 결심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해 주님의 길을 가기 원했다. 일생 동안 그는 육천 곡의 시를 작사하였는데 그 찬송들은 느낌이 섬세하고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준다. 그 유명한 찬송으로는 "십자가를 생각할 때", "내 사랑 나의 하나님" 이 있다. 이러한 찬송들은 지속적으로 전해져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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