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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교회사] 초기 종교 개혁 운동

 

 

 

 

1.​중세기 종교 개혁 운동의 선봉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1). 정치적 배경

14세기에 민족주의가 일어나자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지역은 로마 교황청의 장기간 통제에 대해 불만이 높아갔고, 국왕과 교황청 간의 권력 다툼은 갈수록 증가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은 당시 천주교 내부의 부패 상황에 불만을 갖고 있던 개혁가들에게 좋은 정치적 보호를 제공하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on Wycliffe)이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뛰어난 개혁가로서 성경의 권위를 높인 인물이다. 그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영어를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아들 존은 위클리프의 좋은 친구이자 지지자였고, 위클리프도 국왕과 교황의 권력 다툼에서 영국 왕을 지지하였다. 위클리프는 교회가 재산을 모으는 것과 교황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참된 교회는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며 하나님께 선택받고 부름받은 사람들로 구성된다고 여겼다. 또한 부름받은 믿는 이들은 모두 제사장이며 성경을 읽을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고 복음과 진리를 영어권 세계에 널리 전파하였다. 위클리프가 전한 말은 교황청에 매우 불리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1377년 교황은 위클리프를 잡아오라는 명령을 다섯 번이나 내렸다. 그러나 왕자 존과 다른 귀족들의 보호로 위클리프는 안전을 보장받았다. 위클리프는 말년에 귀족과 평민이 손을 잡고 교회를 공격하는 농민 운동(1377-1381)이 일어났다. 교황청은 모든 파괴와 손실을 위클리프 파에게 돌렸다. 그러나 정치 세력의 보호로 인해 위클리프는 살아 있을 때 어떠한 박해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천주교는 교회를 새롭게 정비한다는 명분으로 위클리프에게 이단이라는 죄명을 씌우고 그의 시신을 파내어 불살랐으며 그의 추종자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하였다. 15세기 초에 위클리프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얀 후스(Jan Huss)라는 학자가 보헤미아(오늘날 체코의 서부지방)에서 또 다른 개혁의 움직임을 전개하였다. 1347년 카를 4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임되었고 프라하를 주교 관할 지역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중부 유럽의 첫 번째 대학인 카를 대학을 세워 유럽의 학술 사상이 발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동시에 천주교 교황청의 부패와 보헤미아에서 독일어를 게르만족과 체코어를 사용하는 체코인의 충돌은 얀 후스가 보헤미아에서 전개하는 개혁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위크 리프처럼 후스는 성경을 평민이 사용하는 체코어로 번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체코어로 말씀을 전하여 체코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교황청의 부패에 대한 후스의 비판은 천주교의 강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천주교는 영국의 위클리프 파를 진압한 뒤 즉시 보헤미아로 방향을 전환하여 후스파를 계속해서 진압하였다.

 

2). 영적인 방면의 개혁

위클리프와 후스의 '믿음'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신은 마르틴 루터보다 백 년 빠른 것이었다. 그들은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믿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였다. 이 두 관점은 그 뒤에 나온 "오직 성경으로" , "오직 믿음으로"라는 주장의 출발점이 되었는데, 이는 16세기 종교 개혁의 주된 내재적 본질이었으며 또한 주님의 회복 안에서 회복된 진리의 한 항목이다. 교회 간의 방면에서 위클리프는 교회는 결코 인위적인 조직이 아니라 선택받은 믿는 이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했다. 후스는 천주교의 낡은 관습을 통렬하게 비판하였으나 교회의 진일보한 의미를 제시하지는 못 했다. 그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지 결코 교황이 아니며 신약만이 교회의 법규라고 주장하였다. 후스의 다른 개혁은 평신도들도 미사에서 거룩한 잔을 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천주교의 미사 규정에 따르면 오직 성직자 계급만이 거룩한 잔을 취할 수 있었다. 평신도는 다만 떡만 먹을 수 있었을 뿐 잔은 마실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우둔한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의 피'를 흘러넘치게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에게 잔을 주는 '잔의 개혁'은 후스 운동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3. 후스 운동의 발전 및 영향

민족의식의 고양을 위한 현실적 필요로 인해 후스의 개혁은 보헤미아 국왕의 지지를 얻었다. 1409년에 교황 요한 23세는 체코에 사람을 보내 면죄부를 팔게 하였다. 후스는 대학의 변론회에서 담대하게 면죄부의 사기성을 폭로하였는데, 이것은 천주교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1411년에 교황청은 후스를 제명하였으나 그는 문서와 언론으로 교황과 교황청의 부패 행위를 계속 공격하였고, 심지어 교황을 주님을 팔았던 "유다"라고 책망하였다. 1414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는 교회의 분열, 교황들의 분쟁, 이단 등의 무제를 처리하기 위해 특별히 로마 교황을 청하여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를 열었다. 당시 다른 두 명의 교황은 자신의 안전을 고려하여 대표만 파견하였다. 후스는 독일 황제에게서 그의 안전을 보장하고 신변을 보호한다는 문서를 받은 뒤 회의 장소로 갔다. 후스는 군중들의 환호 가운데에 콘스탄츠에 도착했다. 그러나 회의에서 교황은 후스에게 발언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으며 그가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회의 소집인 인 요한 23세는 죄들이 너무 많아 이 회의에서 면직되었다. 1415년에 법정은 후스가 위클리프와 왈도 파의 이단이므로 반드시 화영에 처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형이 집행되기 전 후스는 자신의 신앙을 다시 한번 공표하며 마지막 연설을 하였다. 교황청은 후스의 시신이 사람들이 숭배하는 성물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후스의 뼛가루를 그를 화형 한 장소의 흙과 함께 라인강으로 뿌려 버렸다. 후스가 화형 당하였다는 소식이 프라하로 전해지자 체코인들의 감정이 격화되어 교황의 폭행과 황제의 실언을 원망하였고 국가 전체가 폭동으로 휩싸였다.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봉기한 체코인들은 두 파로 나뉘었다. 귀족들은 주로 프라하에서 프라하의 통치권을 탈취하여 네 가지 항목의 "프라하 신앙 고백"을 채택하였다. 이 신앙 고백에서 전도와 성만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떡과 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자유를 요구하였고, 또한 체코의 종교 독립을 요구하였다. 농민과 노동자를 위주로 한 다른 파는 남부의 타보르(Tabor)에서 봉기를 시작하였다. 1419년에 농민 운동이 폭발하여 귀족과 평민은 손을 잡고 군대를 일으켰으며 보헤미아 왕은 그 충격으로 죽었다. 봉기 군의 지도자 시즈카(John Zizka)는 "전차 보루"라는 전술을 사용하여 적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켰다. 지즈 카가 죽은 뒤에도 봉기 군은 계속해서 싸워 독일 국경까지 공격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승전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봉기군 내부는 세 파로 분열되고 있었다. 한 파는 타협을 주장한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시의 관리권을 얻는 목적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에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하였다. 1433년 독일의 봉건 제후들과 이들 귀족들은 프라하에서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의 주 내용은 체코의 평신도들이 거룩한 잔을 취할 수 있으며 귀족도 이미 취득한 재산을 보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한 파는 계속해서 전쟁을 하자는 타 보르 파이다. 그들은 귀족의 배반과 많은 사상자로 인하여 일부분은 지하로 숨어 민족주의 저항 운동을 계속 진행하였다. 나머지 한 파는 무력 항쟁을 하지도 않고 천주교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들은 왈도 파를 본받아 신앙과 간증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받고자 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독립적인 집회를 시작하여 보헤미아의 형제단(Bohemian Brethren)이 되었다.

 


 2. 독일의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운동  

​16세기 초, 유럽의 정치와 경제 및 학술 사상은 변화를 도모하고 있었고, 이러한 변화는 종교 개혁 운동을 배양하고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 당시 성경의 권위가 갈수록 높아져 신약의 초기 교회 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망을 더욱 자극하여 유럽 곳곳에서 종교 개혁 운동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마르틴 루터는 그 당시 종교 사회의 황당무계한 미신을 타파하고, 성경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도록 최선을 다하여 믿는 이들과 교회에 강한 충격과 영향력을 주었다.

 

1). 마르틴 루터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서술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독일 작센(Sachen)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광부였다. 루터는 젊었을 때 종교에 대한 시골 사람들의 미신을 보았는데, 이것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루터는 일찍이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 있는 공동생활 형제단의 학교에서 학문을 닦았고, 후에 아이제나하(Eisenach)에서 고급 라틴어를 배웠다. 1502년에 루터는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의 뜻을 따라 계속 법률을 공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잇달아 일어나는 돌발적인 사건들 때문에  그는 계획을 바꾸었다. 1505년에 스토테른하임(Stotternheim) 근처를 지나고 있던 그는 거의 벼락을 맞을 뻔했다. 그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그는 부친의 수호성인인 성 안 나(St, Anne)에게 자신이 죽지만 않았다면 수사가 되겠노라고 서원했다. 2주 뒤 부친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당시 수도원 가운데 가장 엄격하고 청빈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가입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미신과 연옥에 대한 공포로 루터의 수도생활은 고통스러웠다. 그는 수련과 속죄 가운데에서 발버둥 치며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를 소망했다. 1510년부터 1511년까지 루터는 종교의 중심지인 로마를 방문하여 이곳에서 진정한 평강을 얻고자 하였으나, 성직자들의 허례허식과 부패는 그에게 더욱 실망만 안겨 주었다. 그는 독일로 돌아온 뒤, 그의 은사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n von Staupitz)의 소개로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동시에 신학 박사 학위 공부를 계속하였다.

 

2). 종교 개혁의 과정

1512년부터 1516년까지 루터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 성경을 강의하였다. 어느 날 그가 로마서를 연구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나님 말씀이 그를 비추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이에 대하여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때부터 나는 나 자신이 새로운 생명을 얻었음을 느꼈고, …성경 전체가 내게 완전히 새롭게 열렸으며, 성경 곳곳에 이와 유사한 말씀이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사람의 구원이 결코 행위에 의항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모든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발견하였다. 루터의 이러한 관점의 근원은 성경 자체로부터 온 것이지만 이외에도 공동생활 형제단과 은사인 스타우피츠의 영향도 있었다. 그들의 저서와 가르침은 루터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외적인 두려움에서 은혜의 주관적인 쳬험으로 전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오직 성경으로(solascriptur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종교 개혁이 중요한 두 가지 관점들을 발전시켰다.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프레드릭(Frederick the Wise)의 보호 아래 그곳에서 장기간 거주하며 강의했다. 1517년 루터와 천주교의 충돌이 일어났다. 테첼(Tetzel)이 비텐베르크에서 수치심도 없이 면죄부를 팔며 재물을 축적하자, 이를 반대하기 위하여 루터는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의 성당 대문에 못 박았다. 그는 각 계층을 초청하여 면죄부의 매매와 교황의 죄를 사면하는 권위 그리고 교회의 보물 창고, 이 세 가지의 의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쟁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당시 인쇄술의 발달과 보급으로 인해 유럽 전체를 흔들었고, 교황의 권위와 교회의 재원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518년 루터는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에서 추기경 카에탄(Cajetan)과 회담을 가졌으며, 그다음 해에는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에크(Eck)와 변론했다. 루터는 양보하는 것을 재차 거절하였고 오직 성경의 권위만을 내세웠다. 1520년 루터는 문서의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독일의 귀족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 <바벨론으로 포로 된 교회>,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고 수백 권의 독일어 소책자를 출판하였다. 이러한 소책자들은 유럽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환영받았고, 그와 동시에 교황의 분노를 일으켰다. 교황은 루터에게 60일 내에 회개하라는 조서를 내렸으나 루터는 오히려 이 조서를 공개적으로 불살랐다. 다음에 1월에 교황청은 마르틴 루터의 교적을 파면한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이로 인해 루터와 천주교는 정식으로 결별하였다. 1521년 교황의 재촉으로 새로운 황제 카를 5세는 보름스에서 회의(Diet of Worms)를 개최하였으며, 루터에게 출석하여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루터는 황제의 의회 앞에서 성경의 권위를 재천명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성경과 진리에만 굴복합니다. 나는 교황과 의회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항상 자기모순적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는 달리할 수 없고 또한 어떠한 신념도 바꿀 수 없습니다. …제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루터는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친구들에게 납치되어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갇혔다. 회의 끝나고 한 달 뒤에 황제는 루터를 우둔하고 완고하며 융통성이 전혀 없는 이단자라고 선포하였고, 그를 체포하고 그의 간행물의 발간을 금지하라고 명령하였다. 바르크부르크에서 루터는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문서를 집필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9개월 동안 그는 열두 권의 책을 썼고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그리하여 성경이 독일 국민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크부르크에 머므는 동안 개혁 운동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1521년 루터의 동료 안드레아스 칼스타트(Andreas Carlstadt)는 성 안에서 성찬을 거행하였고, 고해성사와 신부의 의복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떡과 잔을 평신도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정부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도록 하였고, 성당에 있는 그림과 성상들을 파괴하였다. 같은 해 말에 '츠비카우의 선지자들(Zwickau Prophets)' 이 비텐베르크로 와서 말세의 메시지를 전했는데, 이것은 당시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1522년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요청에 따라 돌아와서 그 국면을 장악하였다. 루터의 출현으로 칼스타트는 파면되어 그곳을 떠났고, 루터가 다시 종교 개혁 운동의 핵심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동료 필리프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은 뛰어난 인문주의 학자로서 시종 루터의 개혁을 뒷받침해 주었고, 그의 유능한 조력자가 되어 루터의 개혁 정신을 계승하였다.

 

3). 루터와 그 개혁의 논쟁

비록 루터가 주님께 쓰임 받아 천 년이라는 암흑시대를 종결하였지만 그의 사람됨에는 부족이 있었고, 종교 개혁 운동에서는 논쟁거리를 남겼다. 마르틴 루터는 일찍이 자신을 '거칠고, 광폭하고, 격렬하고, 호전적'이라고 묘사한 바 있었다. 말년에 비텐베르크에 있었을 때 그는 불안정하였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를 좋아했으며, 항상 겸허와 용맹 사이를 오갔다. 루터가 비록 '오직 믿음으로'와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 개혁의 두 기둥을 세웠지만 그는 '성모 마리아의 노래"에 주(註)를 달면서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칭했고, 성모와 성인의 중보기도의 효력을 인정했다. 루터와 츠빙 그리의 성찬 논쟁에서도 그의 외고집과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루터와 츠빙글리가 대면했을 때, 츠빙글리가 루터에게 악수를 청했으나 루터는 그의 악수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성찬 의식에 대한 두 사람의 인식이 일치하지 않자, 루터는 화를 내며 협상을 거절하고 탁자 위에 "이는 내 몸이니"라는 성경 구절을 남기고는 나가버렸다. 이로 인해 종교 개혁에서 성찬 의식이 로마 천주교회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재침례파를 박해하는 일에서 루터는 그때까지도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천주교와 손을 잡았다. 그 당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던 통속적인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침례를 원하는 사람들로 물에 빠져 죽게 하라"라는 것이었다. 결국 재침례파의 많은 인도자들이 강물에 익사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1540년, 루터를 계속 지지해 왔고 츠빙글리와의 성찬 논쟁에서 그에게 협조했던 헤센의 필리프 공(Phillip of Hessen)의 중혼(重婚)은 독일의 종교 개혁 운동에 새로운 풍파를 불러일으켰다. 이 일은 공개적인 반대에 직면하였으나 루터는 필리프와의 사적인 친분으로 인해 그의 중혼에 찬성하였다. 이것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종도 인성의 연약함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의 연약함을 초월하여 그를 사용하시지만 이러한 개인적인 어려움들은 결국 일에 어려움이 되고,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전진하시는 데 제한이 된다.

 

3. 츠빙글리와 스위스 독일어권의 종교 개혁 운동

 1).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 운동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스위스의 빌트 하우스(Wildhaus)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바젤(Basel)과 베른(Bern)에서 교육받으며 고전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스승인 토마스 비텐바흐(Thomas Wyttenbach)의 영향으로 츠빙글리는 면죄부의 오류를 인식하게 되었고, 또한 이로 말미암아 믿음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517년(마르틴 루터가 95개 조의 선언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내걸은 해)에 츠빙글리는 아인지델른(Einsiedeln)의 신부로 임명되었으며, 그곳에서 중세 천주교의 미신적인 것들을 체험하게 되었다. 1519년 츠빙글리는 취리히로 왔고, 그곳에서 한 전염병을 앓게 되었다. 그는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려 주시면 반드시 일생토록 그분을 위해 일하겠다고 서원하였다. 1520년에 츠빙글리는 사상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교황청의 수당을 포기하였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높였고, 또한 신부가 직접 성경에 의거하여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자유를 줄 것을 정부에 촉구하였다. 동시에 그는 성경 각권의 모든 단어를 조금씩 연구하기 시작했고, 1525년에 신약 전체를 완전히 강해하였다. 어느 날 츠빙글리는 말씀을 전하면서 천주교의 절기(사순절) 중 금식하는 규례를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것은 당시 콘스탄츠(Constanz) 주교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취리히 의회는 츠빙글리를 지지하였고 모든 종교적인 관습은 반드시 순수한 말씀에서 기인한 것이어야 한다며 콘스탄츠 주교의 권리를 박탈했다. 이 사건은 취리히의 종교 개혁의 도화선이 되었고 수차례의 공개 변론을 촉발했다. 1523년에 시 정부 청사에서 열린 제1차 변론에서 츠빙글리는 "67개조(Sixty-Seven Articles)"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교회의 전통적인 권위가 아닌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며 교황 제도, 성인 숭배, 미사, 성지 순례, 성직자 독신제, 면죄부, 고행, 연옥 등과 같은 실행들을 비판했다. 이 변론에서 츠빙글리는 대승리를 거두었으며, 연방의회의 지지로 전면적인 개혁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제2차 공개 변론에서 츠빙글리는 천주교의 미사 형식을 공격하고 예배당 안에 있는 모든 진열품과 장식들을 일제히 제거하였다. 츠빙글리가 취리히에서 순조롭게 개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위스 연방제도의 힘이 컸다. 연방에 소속된 각 지방이 정치적으로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 지방 의회는 개혁을 받아들일 것인지의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이 있었다. 얼마 후 츠빙글리는 베른(Bern)으로 갔고, 또한 동역자들을 바젤과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등, 기타 스위스의 독일어권으로 보내 종교 개혁 운동을 확산했다. 1529년에 스위스의 산골짜기에 있는 자치 정부들은 거의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 진영에 합류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을 진행할 때, 츠빙글리와 여전히 로마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던 연방 정부 사이에는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비록 양측이 담판과 화해를 시도했지만 1531년에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천주교의 연방 정부 연맹은 신속하게 승리하였고, 츠빙글리 자신은 군대를 따라 출정하였는데, 카펠(Kappel) 성에서 사망했다. 스위스의 종교 개혁 운동은 여기에서 일단락을 고했다. 그 뒤 일어난 칼뱅 운동으로 인해 츠빙글리의 운동도 더 방대하고 영향력 있는 개혁 운동에 편입되었다.

 

2). 츠빙글리와 마르틴 루터

츠빙글리는 마르틴 루터의 저서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그의 초기의 저술들 곳곳에서 루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상이 루터의 교리의 산물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비록 두 사람이 성경의 권위와 이신칭의 방면에서는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이 있었지만, 성찬의 교리에서는 견해가 같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필리프 공(公)은 특별히 두 사람이 마르 부르크에서 공개적인 변론을 갖도록 하였다. 두 사람은 루터가 기초한 "마르부르크 조문(Marburg Article)" 가운데 있는 성찬 교리에 대해 공통된 인식을 가질 수 없었다. 츠빙글리는 성찬은 단지 주님을 기념하는 의식이며 떡과 잔은 하나의 상징일 뿐, 결코 실질적으로 주님의 몸과 피가 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을 발표하고 성찬 시 주님의 몸과 주님의 피는 확실히 떡과 잔에 임재한다고 여겼다. 양측은 각각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였고 결국 루터가 회의장을 나가버림으로써 회담은 결렬되었다.

 

3). 츠빙글리와 재침례파

츠빙글리가 스위스에서 개혁 운동을 전개했던 초반기에 그와 매우 가까웠던 두 명의 동역자, 그레벨(Conrad Grebel)과 만쯔(Felix Manz)는 츠빙글리의 개혁이 철저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츠빙글리에게 신약 교회의 모형을 빨리 회복하라고 자주 재촉하였으며 특별히 유아 세례를 폐지할 것을 자주 언급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정치적인 고려 때문에 급진적이기를 원치 않았고, 그 때문에 개혁 운동 초반기의 지지자들에게 심한 비평을 받기 시작하였다. 역사는 이들을 재침례파(Anabaptists, 그들 자신은 이 명칭을 받아들이지 않았음)라고 칭했는데, 그들은 유아 세례를 반대했고 참되게 회개한 성인(成人)들에게 침례를 주었다. 츠빙글리는 처음에 그들을 동정하고 이해하였으나 그들의 급진적인 말과 행동을 점차 인내할 수 없게 되었다. 재침례파가 교회와 정치의 연합을 강력하게 비판하자 정치 세력에 계속 의지해 온 츠빙글리는 그들에게 불만을 표시하였고, 결국 재침례파 믿는 이들을 공격하는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1520년부터 1530년까지 수 천명의 침례파 믿는 이들이 피살되었고, 천주교와 개혁주의자들은 이 일에서 예상외로 같은 진영이 되었다.

4. 칼뱅과 스위스 불어권의 종교 개혁 운동

 

1). 스위스와  제네바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간략한 서술

​스위스 건국의 역사는 독일어 권의 세 연방이 1291년에 결성한 '계약 공동체'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위스는 지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부근의 지역들이 연맹을 맺어 외부의 침략에 함께 대응하였다. 16세기 초에 스위스는 원래 알프스 산맥에 있던 독일어권으로부터 서쪽의 불어권 지역으로 확장되어 총 13개 지역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지역들은 각각 독립적이었고 자치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스위스의 종교 개혁 운동은 부근의 프랑스, 독일의 방식과는 확연히 다르게 전개되었다. 제네바는 스위스 서남부에 있으며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와 인접한 곳이었다. 1533년에 제네바는 사보이(Savoy) 왕조의 통치에서 벗어나 연방국 가로 독립하였다. 스위스에서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 운동으로 전통 천주교를 신봉하는 지역과 종교 개혁 사이에 긴장 상태가 조성되었다. 제네바는 정치적 고려에 기초하여 1536년에 종교 개혁 대열에 가입한다고 선포하였고, 같은 해에 장 칼뱅(Jean Calvin)도 윌리엄 파렐(William Farel)의 초청으로 제네바에 와서 복음파의 개혁에 힘을 다하였다.

 

2). 스위스의 종교 개혁

마르틴 루터가 독일 지역에서 개혁을 진행하고 있을 때, 다른 종교 개혁 운동이 동일한 시기에 스위스에서 일어났다. 그중 가장 유명한 두 지도자는 츠빙글리와 칼뱅이다. 츠빙글리는 스위스에서 태어났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또한 루터의 저서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루터의 성경에 대한 권위와 믿음에 대한 주장에는 찬성하였으나 성찬 문제에 있어서는 그와 다른 의견을 가졌다. 그는 주로 스위스의 독일어권 지역과 취리히에 영향을 주었다. 칼뱅은 1509년에 프랑스의 노용(Noyon)에서 출생하였고,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536년에 칼뱅은 제네바로 와서 그가 계획한 일련의 개혁을 시작하였고, 개혁 운동의 가장 완전한 교리서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를 완성하였다. 1541년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23년 동안 칼뱅은 정교일치의 방식으로 제네바의 사회와 종교 업무를 전반적으로 지도하였다. 칼뱅주의는 제네바가 프랑스 개혁파의 피난처가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등의 종교 개혁에 전반적인 영향을 주었다.

 

3). 칼뱅의 종교 개혁 운동

칼뱅은 원래 로마 천주교를 떠날 의도가 결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뜻하지 않게 그의 친구인 니콜라스 콥(Nicholas Cop)의 종교 개혁 운동에 연루되어 지명수배를 당하게 되었다. 이후로 칼뱅은 로마 천주교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개혁 운동가들과 같은 전선에 서야 될 필요를 스스로 느끼게 되었다. 1536년 26세의 칼뱅은 신학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출간하였고, 개혁 운동가들의 신앙을 분명하게 표명하였다. 이 책이 출판된 지 얼마 안 되어 칼뱅은 파렐의 요청으로 제네바로 와서 거주하였다. 1537년에 칼뱅은 제네바 의회에 개혁을 부추기는 일련의 문건들을 제출하여 그의 마음에 품은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성찬 실행의 논쟁으로 칼뱅과 파렐은 의회에 의해 국경 밖으로 쫓겨났다. 1540년의 선거에서 칼뱅을 반대하던 당파가 정권을 잃게 되자 칼뱅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 그가 제기한 조문들에 기초하여 교회 법규(Eecclesiastical Ordinances)를 제정하였고, 시민들이 종교 교육을 받도록 강압하였다. 그는 열두 명의 덕망 있는 장로로 구성된 교회 법정(Consistory of pastors and elders)을 설립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한 모범적인 사회를 창조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진행된 칼뱅의 개혁도 장애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급진 종교 개혁자인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는 항상 칼뱅의 교리에 반대하였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의 오류를 논한다"라는 글을 발표하여 삼위일체의 교훈을 부인하였다. 1533년에 세루베투스가 저술한 <기독교 강요를 재고함>이라는 책은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전면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칼뱅의 재촉으로 세루베투스는 체포되었다. 제네바 의회는 그를 이단으로 결정하고 화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렸다. 칼뱅은 인정에 호소하며 자비로 처우해 줄 것을 희망하였으나 세루베투스는 결국 1553년 기둥에 묶어 화형 당했다. 세루베투스를 사형에 처한 사건은 반대자들에게 공격의 명분을 주었으며 칼뱅의 일생에 오점을 남겼다. 1550년부터 1564년까지 칼뱅은 성경 해석에 관한 저술에 전념하였는데, 성경에 대한 그의 인식과 성경의 영적인 의미에 대한 통찰력으로 그의 성경 해석 저술들은 매우 큰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1549년 츠빙글리파는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년)의 인도로 칼뱅파와 연합하였다.

 5. 재침례파

1). 재침례파의 기원

츠빙글리가 스위스에서 개혁을 추진할 때, 그는 유아 세례라는 매우 민감한 문제에 봉착했다. 당시 츠빙글리의 동역자였던 그레벨과 만쯔는 오랫동안 실행해온 유아 세례를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들은 성경에는 유아 세례에 관한 가르침이 전혀 없었으며, 마음과 지성이 성숙한 사람이 스스로 침례 받기를 원한다면 그에게 침례를 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들의 의견을 츠빙글리에게 표명하였고, 츠빙글리는 유아 세례를 폐지할 것을 의회에 촉구하였다. 그러나 의회의 많은 의원들은 유아 시기에 세례를 받았고 일단 새로운 법령을 반포하면 그들은 즉시 교회에서 축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고려로 츠빙글리는 시간을 끌며 행동을 늦추었는데, 이것은 그레벨 등과 같은 사람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1525년 취리히 의회는 유아 세례에 관한 공개 변론을 열었다. 의회는 유아 세례를 계속 실행하기로 결정을 했을 뿐 아니라, 아이들은 출생한 날로부터 8일 안에 세례를 받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부모를 교회에서 축출할 것이라고 명령했다. 이뿐 아니라 의회는 그레벨과 만쯔 등과 같이 개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집회도 정지하라고 명했다. 의회의 결정이 공포된 그날 저녁 그레벨과 만쯔는 함께 모여 대책을 강구하였다. 기도하는 중에 블라우로크(Blaurock)라는 형제가 성령에 감동되어 땅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그레벨에게 자기를 위해 침례를 베풀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레벨은 그 요구에 응하여 정식으로 그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그들이 성인 침례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제 침례파"라고 불렀다. '재침례파' 는 사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비웃고 놀리던 명칭이었으며, 그들 스스로는 결코 이것을 그들의 명칭으로 취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유아 세례는 결코 효력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직 성인의 침례만이 첫 번째 침례였던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몸을 굽히는 한 무리"라고 칭하며 초기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모든 그림과 형상을 제거하며 단순하고 소박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전심으로 성경, 특히 신약을 연구하였고, 이른바 신경(Creed)과 교회의 조직에 대해서는 관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루터와 츠빙글리가 주장한 정교 연합을 반대하였고, 또한 형식화된 조직과 성직자 계급을 반대하였다. 믿는 이들 사이에는 오직 은사와 사역의 분별이 있을 뿐이었다. 교목의 책임은 성경을 연구하고 믿는 이들을 감찰하며, 집회를 인도하고 있는 믿는 이들의 영적인 상황 등을 관심하는 것이었다. 침례 방면에서는 오직 참된 마음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향하여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었다. 성찬 방면에서 그들이 떡을 떼는 것은 주님의 죽음을 위하는 것이었고, 또한 형제자매들이 함께 누리는 애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부분 집에서 떡을 떼면서 한 면으로는 가정의 따뜻함을 누렸고 또 한 면으로는 형식이 가져온 미신적인 것을 피했다. 이 외에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믿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위임을 중시하였는데, 특히 복음 전파에 적극적이었다.

 

2). 재침례파가 받은 박해

16세기에 정교 연합의 상황은 매우 보편적이었으므로 대다수 정치가와 종교 지도자들은 교회와 정치가 연합하는 것에 반대하는 재침례파에 대하여 매우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천주교와 신교에게 공동의 공동의 적이 되었으며, 번 전통적이고 반질서적인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1525년에 그레벨과 만쯔, 그리고 20명의 재침례파 믿는 이들이 체포되었다. 그레벨은 감옥에서 탈출하였으나 흑사병으로 사망하였다. 만쯔는 1527년에 리마트(Limmat) 강가에서 수장당했다. 블라우로크는 취리히에서 피신한 뒤, 도처에 다니며 전도하다가 1529년에 천주교에 체포되어 화형 당하였다. 1524년부터 1525년까지 독일 지역에서 농민 운동이 폭발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은 재침례파가 그 배후라고 여겼다. 츠빙글리파, 루터파, 칼뱅파 그리고 천주교는 함께 손을 잡고 재침례파를 유럽 대륙에서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였다. 재침례파의 믿는 이들은 감금, 벌금, 수장형, 화영, 학대, 등과 같은 각종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당시 '정부 교회'에 위반되는 모든 죄, 예를 들면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 집회에 불참하는 것, 가정 성경공부에 참가하지 않는 것, 전도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 등을 재침례파의 믿는 이들에게 돌렸다. 1529년 슈파이어 회의(Diet of Speyer)에서 천주교와 루터파는 공통된 의견을 갖고 신성 로마 제국 국경 내에 있는 모든 재침례파 믿는 이들을 처형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짧은 수년 사이에 수천 명의 재침례파 믿는 이들이 세속 정권과 교회가 손을 잡고 행한 박해로 순교하였다.

 

3). 재침례파의 발전 및 영향

16세기의 재침례파는 당시 유럽 전체의 정치 및 기독교의 주류인 츠빙글리, 루터, 칼뱅파의 일치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정교 연합, 유아 세례 등과 같은 논쟁 외에도 또 다른 주된 원인이 있었는데, 바로 소수의 재침례파 믿는 이들이 극단적인 개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수의 급진주의자들이 일으킨 사회적인 사건들로 인하여 재침례파는 역사적으로 이단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사람들과 단체들은 농민 운동을 일으킨 뮌처(Muenzer), 쯔비카우(Zwickkau)의 선지자들과 호프만파(Hofmannites)와 마티스(Jan Matthys)의 뮌스터 왕국 등이 있었다. 뮌처는 사회 운동에 심취하여 자신에게 성령의 인도가 있다고 선포하고, 신권 단체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는 폭동을 선동하여 신교도와 천주교를 쫓아내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여 유럽 사람들에게 재침례파에 대해 매우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호프만은 원래 루터파의 신도였는데, 루터파의 성찬 교리에 동의하지 않아서 덴마크로 쫓겨났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프랑스로 가서 재침례파의 무리에 가입하였고, 말세 사상을 제창하였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지도자이므로 자기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은 멸망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1533년에 슈트라스부르크로 강림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호프만의 충성된 신도인 마티스는 일찍이 스스로를 에녹이라고 칭하였다. 1533년 호프만의 예언이 실현되지 않자 마티스는 호프만의 예언이 틀렸다고 하면서 참된 새 예루살렘은 슈트라스부르크가 아니라 네덜란드의 뮌스터라고 선포하였다. 마티스는 무리를 이끌고 뮌스터를 무력으로 공격하여 성도의 왕국을 세우려고 기도하였으나 루터와 천주교에 의해 제지 당하였다. 뮌스터 사건으로 재침례파는 정부, 사회, 도덕 및 종교 각 방면에서 악명을 얻었다. 허술한 이러한 사람들이 결코 모든 재침례파의 믿는 이들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재침례파 믿는 이들은 여전히 초기의 개혁 정신을 유지하였다. 참되게 재침례파를 대표하는 단체들은 스위스 형제단(Swiss Brethren), 모라비아의 후터파 형제단(Hutterites), 메노나이트(Mennonites) 및 아미시파(Amish) 등이다. 스위스 형제단은 취리히에서 그레벨과 만쯔를 따르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가장 초기의 재침례파로 성인들의 침례와 소박한 성찬을 준비하였고, 재침례파가 원래 가지고 있던 진정한 개혁 정신을 계승하였다. 후터((Jacob Hutter)는 아우 스피츠(Auspitsz)에서 브루더 호프(Bruderhof)라고 불리는 공동체를 세우고 물건을 통용하는 것을 실행하였다. 후에 많은 재침례파 믿는 이들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모라비아에 많은 '브루더 호프' 가 세워졌다. 이로 인해 "모라비아의 후터파 형제단"이라고 불렸다. 후터는 1536년에 기둥에 묶여 화형 당했다. 재침례파의 또 다른 분파는 메노파이다. 메노(Menno Simons)는 원래 천주교의 신부였으나 1530년에 로마 천주교를 떠나 재침례파에 가입하였다. 그의 주된 활동 범위는 네덜란드, 독일 북부 일대였다. 메노의 관점과 스위스 형제회의 관점은 유사하여 유아 세례 및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군 복무를 하지 않았고 선서하는 것을 거절하였으며 또한 정부의 어떤 자리도 거절하였다. 16세기 말에 메노파는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는데, 보수적인 아만(Jakob Amman)과 그의 추종자들은 매우 엄격한 교파를 스스로 형성해 아미시 파라고 칭했다. 그들은 똑같은 복장을 했고 수염을 자르지 않았으며 사회에서 스스로 분리되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아미시파 신도들은 지금도 여전히 중세기 농장의 생활 방식으로 유지하고 있고, 어떠한 전기용품도 사용하지 않으며 사진을 찍지 않고, 또 마차를 자동차 대신 사용하고 있다. 비록 그들은 경건한 외모를 유지하고 있으나 영적 실재는 잃어버렸다. 16세기의 재침례파는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유럽의 기독교, 예를 들면 영국의 독립 교회, 침례교, 퀘이커교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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