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교회사]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 교회
근대 교회사
1.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 교회
1). 친첸도르프의 초기 생활
친첸도르프(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는 1700년 5월 독일 드레스덴(Dresden)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모두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오스트리아 귀족인 그의 아버지는 친첸도르프가 태어난 지 6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 시에 그는 자신의 아들을 주님께 드렸다.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가 재가했기 때문에, 친젠도르프는 게르스도르프(Gersdorf) 남작 부인과 고모 헨리에타(Henrietta)의 손에 양육되었다. 게르스도르프와 헨리에타는 매우 경건하며 주님을 사랑했다. 그들은 성경을 자주 읽었을 뿐 아니라 가정을 열어서 필립 야콥 슈페너(Philip Jacob Spener),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ke)와 같은 경건 주의자들을 접대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가르침을 받은 친첸도르프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주님께 헌신했고 그리스도 예수의 충성된 노예가 되기를 사모했다. 네 살 때 그는 주님께 이렇게 서원했다. "사랑하는 구주여, 당신은 제게 속하고 저는 당신께 속하기 원합니다!"
열 살 때 친첸도르프는 당시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던 패다고기움(padagogium)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친첸도르프는 다른 몇몇 급우들과 함께 "겨자씨 선교단(The Order of the Grain of the Mustard Seed)" 을 결성하여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할 것을 약속하였다. 단원들은 모두 작은 배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보라, 이 사람을!",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또한 그들의 반지에는 "누구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리,"라는 글이 헬라어로 새겨져 있었다.
졸업 후 친첸도르프는 원래 할레(Halle) 대학에 진학하려 했지만 정통 루터파에 속해 있던 백부가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백부의 강권으로 친첸도르프는 루터파의 본거지인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많은 영적인 서적들을 읽고 기도 집회를 인도했다. 그는 자주 철야로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였다. 기도를 통하여 그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했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십자가의 못 박힘 아래 두었다.
대학 졸업 후 친첸도르프는 학위 이수의 일환으로 관례에 따라 유럽 각지를 여행하였다. 그는 독일 뒤셀도르프(Duesseldorf) 미술관을 관람할 때 예수의 수난을 그린 "보라, 이 사람을!"이라는 그림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 그림 밑에는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너를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버렸건만 너는 무엇을 버렸느냐?" 그는 자신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너무도 깊은 감동을 받아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생토록 주님을 위해 살 것을 결심했다.
1721년 5월에 친첸도르프는 고향 작센에 돌아와 국왕의 변호사 직을 담당하였다. 그는 가정을 열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 즉 귀족들이나 평민들이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간증하고 찬송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4월에 그는 자신의 영지인 베르텔스도르프(Berthelsdorf)에 돌아가 에르트무트 도로테아(Erdmuth Dorothea)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귀족 신분을 버리고 한마음으로 끝까지 충성을 다해 그리스도를 섬기기로 결심하였다.
2). 모라비안 형제들
중세기 때 모라비아와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서북부의 두 개의 주(州)로 독일 작센 지방에 인접한 곳이다. 7, 8세기에 그리스 정교와 로마 천주교가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 그리스 정교가 그들에게 본토 어로 말씀을 전하고 성경을 번역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에 많은 학파들이 일어나 변론을 벌였다. 이런 계기로 로마 천주교는 점차 세력이 우세해졌다. 15세기 초 보헤미아 종교 개혁의 지도자, 얀 후스는 천주교에 의해 처형을 당했고(1415년), 일부 추종자들은 즉시 보헤미아와 이웃 연방인 모라비아 일대에 혁명을 일으켰다. 복음과 후스의 가르침에 충성하는 또 다른 무리들은 보헤미아 동북쪽 쿤네발트(Kunewald)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50년 동안 평화롭게 지냈다. 그들은 "연합 형제단"이라고 불렸다.
연합 형제단의 가장 귀한 점은 교의(敎義) 방면이 아니라 생활의 실제적인 간증이다. 칼뱅은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교회에게 순결한 교리뿐만 아니라 뛰어난 은사를 주신 것을 축하합니다. 여러분은 좋은 품행과 질서와 가르침을 잘 지켰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조직의 가치를 알고 있었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루터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들을 붙잡고 또한 그들의 조직과 가르침을 포기하지 말라고 형제들에게 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 가르침은 '그들의 생활의 모든 일, 즉 그들의 사업과 오락과 그리스도인의 봉사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책임에서 모두 주님의 산상수훈을 발 앞의 등으로 삼는 것' 이었다. 그들의 생활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장로와 동역자들은 모두 성도들을 돌보고 서로 사랑하고 돕고 권면하며 경건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1517년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켰을 때,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이 결탁하여 연합 형제단에도 큰 박해를 가하였다. 1548년 교황은 수 천명의 사람들을 폴란드로 추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1556년 새 교황이 등위한 후 그들은 조금이나마 화평을 누리며 새롭게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와 폴란드 등지에 교회를 세웠다. 16세기 말 그들의 손에는 모두 성경이 있었다. 그들의 교육 수준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그들의 학교는 전 유럽에서 매우 유명했다. 1609년 "보헤미아 헌장" 은 국민의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좋은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고 '30년 전쟁'(1618-1648년)이 일어났다. 1620년 11월 8일 천주교 연합군이 보헤미아 군대를 공격했고 6년 동안 대대적으로 파괴하여 3만 6천여 가구가 독일 북부로 피난을 떠났다. 결국 보헤미아의 인구는 3백만여 명에서 1백만여 명으로 감소되었다. 100년 동안 연합 형제단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나긴 밤뒤에 찾아올 여명을 기다렸다.
1722년 크리스티안 데이비드(Christian David)의 소개와 인도 아래 200명가량의 모라비안 형제들의 후예들은 작센에 있는 친첸도르프의 영지로 왔다. 그들은 친첸도르프가 안배해 준 새로운 피난처를 "헤른후트(Hernhut, 주님의 보호)"라고 이름 짓고 그곳에 정착하였다. 초기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모라비안 형제들이었고 점차적으로 루터파, 경건파, 칼뱅파, 츠빙글리파, 슈벵크펠트 파 등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 분분히 이곳에 와서 정착하며 살았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자 만찬, 침례, 종파 등 교리 상의 분쟁이 갈수록 격해졌다.
1727년 5월 12일 친첸도르프는 헤른후트의 모든 이들을 불러 모아 성경 진리에 근거한 공약을 세웠다. 그는 한 면으로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이키게 하였고, 다른 면으로는 그들에게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성령의 가르침에 자신을 맡기라고 권면하였다. 친첸도르프의 믿음과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은 영 안에서 자신을 비우고 한마음 한뜻으로 공동 협약을 지키기 원했다. 공약이 시행된 후 믿는 이들의 기도와 교통이 많아졌고 그들은 자주 모여 기도하고 찬양을 하였다. 2개월 뒤 친첸도르프는 뜻밖에도 슐레지엔 도서관에서 라틴어로 쓰인 오래된 형제단의 공약을 발견하였는데, 내용은 그들이 맺었던 협약과 유사하였다. 헤른후트로 돌아온 후 친첸도르프는 그것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8월 4일 모든 사람들이 읽게 하였는데, 읽는 이마다 성령의 확증에 놀라워하였다. 다음날 저녁 친첸도르프는 열네 명의 성도들과 함께 철야 기도를 하였다. 10일 주일 집회 때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기쁨 안에서 깊은 밤까지 기도하고 찬양하였다. 집회를 마치 고서 사회자가 13일 집회부터 주님의 만찬을 가질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교통을 가진 후에 처음으로 거행한 만찬이었다. 그날 베르텔스도르프 예배당으로 가는 길에서 서로 간격이 있었던 형제자매들은 모두 서로 죄를 자백하였다. 집회 가운데 온 회중 위에 부어져 그들은 한영 안에서 침례를 받았다. 이로써 모라비아 교회는 전무후무한 부흥을 경험하였다. 모든 이들이 자신을 주님께 헌신했고 기꺼이 세계 각지에 전파하기 원했다.
약 4년 뒤, 친첸도르프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의 대관식에 초대를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서인도제도에서 온 흑인 노예 안토니 올리히(Anthony Ulrich)를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복음의 필요가 절박함을 들은 친첸도르프는 안토니를 헤른후트로 초청하여 복음의 부담을 교통하도록 하였다. 그 즉시 두 형제들이 그 부름에 반응하여 성 토머스(St, Thomas) 섬으로 건너갔다. 그 다음에 두 명이 그린란드(Greenland)로 갔고, 또 다음 해에 열여덟 명이 산타크루즈(Santa Cruz)섬으로 갔고, 또 1년이 지난 후 열두 명 이상이 외지로 나갔다. 30년이란 짧은 기간에 그들이 전파한 복음의 발자취는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심지어 아프리카에 미쳤다.
친첸도르프의 해외 선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 선교사는 높은 곳에 있어서는 안되고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서 낮추어진 생활을 해야 한다. 둘째,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복음을 직접 전해야 한다. 셋째, 최종 목적은 바로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가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들의 해외 선교는 19세기의 선교사 파송 운동보다 반세기 빨랐다. 그들이 20년 동안 파송한 해외 선교사와 믿는 이들의 비율을 초과했다. 동시에 부흥의 물결은 그들로 말미암아 각지로 확산되었고 영국 전역에 영향을 주었다.
1735년 10월 영국 성공회 성직자 존 웨슬리(John Wesly)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y)는 배를 타고 미국 전도 여행에 나섰다. 배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하려는 모라비안 형제들도 함께 타고 있었다. 웨슬리 형제는 그들의 행동이 장중하고 부지런하고 겸손하고 온화하며 영국인들이 하기 싫어하는 천한 일들을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기꺼이 하는 것을 보고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항해 도중 큰 풍랑을 만나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모라비아의 해외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평온하게 찬송을 불렀다. 존 웨슬리는 그 광경을 보고 깊이 감동을 받았다. 육지에 다다른 즉시 웨슬리는 그들의 감독들의 도움을 구하였다. 영국에 돌아온 뒤 그는 영국에서 전도하는 모라비안 성도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인도를 받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근거와 그 진리에 대해 분명해졌다. 헤른후트로 돌아온 그는 영적인 온전케 함을 받아 더욱 풍성한 은혜를 얻게 되었다. 훗날 그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일생을 이곳에서 보내기 원한다. 그러나 나의 주님께서는 그분의 포도원의 다른 곳으로 가서 일하라고 부르신다." 후에 그는 영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그릇으로서 영적인 능력이 가득하여 18세기의 전무후무한 대부흥을 가져왔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 라 불리는 위리암 캐리(William Carey)도 모라비안 형제들의 출판물에서 격려를 받고 인도로 가서 전도했다.
3). 친첸도르프의 만년
모라비아 교회가 세속 정원과 기타 종파의 인정을 받게 하기 위해 취했던 친첸도르프의 방법은 상당히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1734년에 그는 루터교의 목사로 안수 받았고 또한 교회 제도를 '주교제'로 바꾸었다. 1737년에 그는 주교로 임명되어 영국과 후스파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그는 작센과 루터교의 신임을 잃었고 결국 10년 넘게 추방되었다. 그 기간에 그는 서인도제도와 영국과 미국으로 갔다. 1748년 추방령이 해제되어 돌아온 그는 교회 안에서 믿는 이들을 목양하는 일로 여생을 보냈다. 1760년 5월 9일 그는 주님의 품에 안식했다. 그의 장례식에 각지에서 온 사천여 명이 참석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여기에 쇠하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잠들어 있노라.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나태하지 않은 봉사로 인하여 평범한 형제들을 18세기의 새로운 교회가 되게 하였다. …그는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항상 남아있게 하도록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다."
4). 모라비아 교회의 특징
1727년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안 무리들은 협약을 세웠는데, 그 안에는 세 가지 중점이 포함된다. 첫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큰 사랑을 중시하는 것이고, 둘째는 성령 충만을 중시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성령의 인도 아래 사는 것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후에 모라비안 형제회의 부흥의 주된 특징이 되었다. 그들은 성령의 주권을 존중하였고, 거듭남과 회개의 주관적인 체험을 중시했으며, 복음을 위해 불탔다. 그들은 또한 기도와 찬송을 매우 중시하였다. 같은 해 8월 26일 마흔여덟 명의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헌신하여 주야로 쉬지 않고 전 세계의 전도의 일을 위해 중보기도하였다. 그 후로도 그 수는 계속 증가하였다.
그들은 기도 외에도 찬송을 매우 중시하였는데, 친첸돌프가 쓴 찬송가는 약 2천 곡으로 모두 경건하고 영적이었다. 그는 독일 지역에서 "찬송의 왕"이라고 불리기까지 하였다. 찰스 웨슬리는 이러한 찬송 곡을 대량 번역하여 수많은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 나의 의"라는 찬송은 친첸토르프의 작품이다. 종파가 난립하던 18세기에 모라비안 형제들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간증을 위해 종파의 의견을 내려놓기 원했는데, 이것은 시로 하나님의 회복의 하나의 큰 항목이었다. 그들의 합일은 외적인 연합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였다. 그들의 교회 생활은 매우 소박하였다. 그들은 서로 형제자매라 불렀으며 계급의 구분이 없었다. 그들은 모든 우상을 거절하고 단순하게 주님을 앙망하며 기도하고 복음을 위해 자신을 드리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렸다. 그들은 어린이와 청소년의 일을 매우 중시하였다. 미혼의 청년 형제자매들은 각각 형제의 집과 자매의 집에 거하며 온전케 함을 받았다. 주님을 갈망하고 서로 사랑한 모라비아 교회는 계시록에 있는 "빌라델피아 교회" 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들은 18세기의 주님의 회복의 움직임을 주도하는 주된 흐름이 되었다.
2.웨슬리와 감리교 운동
1). 존 웨슬리의 생애
18세기의 영국은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했고 사회 분위기는 우울했다. 성공회의 성직자들의 영적 상태는 보편적으로 하락했는데. 특히 술을 마시는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 개혁과 부흥의 필요가 날로 증가하게 되었다. 1728년 윌리엄로(William Law)는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위한 진지한 부르심(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ly Life)>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목적은 교회의 영적 질서를 다시 세우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으며 영성 훈련을 격려하는 기관들이 많이 세워졌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진정한 부흥은 웨슬리 형제와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의 감리교 운동에 이르러서야 하나의 강한 흐름으로 모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존 웨슬리(John Wesley)는 1703년에 새뮤얼(Samuel Wesley)과 수잔나(Susanna) 사이에서 열다섯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엡워스(Epworth) 지방의 성공회 교구 목사로서 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경건하고 비범한 여성으로서 열아홉 명의 자녀들을 엄격하게 가르쳤다. 1720년에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 대학(Christ Church College, Oxford University)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는 링컨 대학(Lincoln College)에 들어가 연구했으며, 22세 때 성공회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형제 찰스 웨슬리도 1726년에 크라이스트처치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면서 성결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동호회를 만들었다. 후에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에 돌아와 이 동호회의 인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하고 항상 죄인과 병자들을 돌보러 다녔으며 기꺼이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삶을 살았다. 웨슬리와 그의 동급생들은 "홀리 클럽(the Holy Club)"이라는 모임을 결성하였고,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메서디스트(Methodists, 엄격한 종교주의자라는 뜻-역자 주)"라고 불렀다. 이것은 이상적인 영적 생활에 대한 그들의 추구를 묘사한 것이다. 1735년에 웨슬리 형제는 북미의 새로운 식민지에서 선교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조지아로 건너가 복음을 전했다. 그들이 타고 있던 배가 대서양에서 심한 폭풍우를 만났을 때, 존 웨슬리는 동승한 모라비아의 믿는 이들이 생명의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전혀 동요되지 않고 찬송하고 찬미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것은 그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웨슬리 형제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였지만 조지아 주에서의 그들의 선교 활동은 이상적이지 못 했다. 그다음 해에 찰스 웨슬리는 건강 문제로 영국으로 돌아갔고 존 웨슬리만 남게 되었다. 조지아에 머무는 동안 존 웨슬리는 모라비안 형제들과 자주 접촉하였다. 1738년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계속 그들과 왕래하였다. 모라비안 형제회의 페터 뵐러(Peter Boehler)의 도움으로 존 웨슬리는 거룩함이나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738년 5월 24일 존 웨슬리는 엘더스 게이트(Aldersgate) 가(街)에 있는 한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답답하고 메마른 심정으로 앉아 있을 때, 한 평신도가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주해> 서문을 읽는 것이 들려왔다. 그것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믿고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그의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이 되었다. 3주 후에 존 웨슬리는 독일로 건너가 헤른후트를 방문하여 친첸도르프를 만났다. 오늘날 유명한 런던 박물관 입구에는 존 웨슬리의 일기가 새겨진 조형물이 있다. 그것은 1738년 5월 24일 자 일기로서, 존 웨슬리가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참석한 엘더스 게이트 가의 모임에서 받은 느낌을 기록한 것이다.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분의 구원과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인해 내가 그리스도 안으로 믿었다고 느꼈다. 그분께서 내 죄를 제해 주셨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 조지 휘트 필드의 초청으로 브리스틀(Bristol)에 선교하러 가게 되었다. 휘트 필드는 뛰어난 전도사로서 어릴 적에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친구의 도움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는 기간에 그는 웨슬리 형제를 알게 되었고 또한 홀리 클럽(the Holy Club)에 가입하였다. 휘트 필드의 강한 감동을 주는 설교는 보수파의 불만을 야기했고, 결국 많은 교회들이 그를 거절하였다. 1739년 2월에 휘트 필드는 킹스 우드(Kingswood)에서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수천 명이 눈물을 흘리며 예수를 믿었다. 처음에 존 웨슬리는 야외에서 설교하는 것을 매우 주저하였지만, 후에 자신의 신분을 내려놓고 야외로 나가 수만의 믿는 이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비록 존 웨슬리의 설교가 휘트 필드의 설교만큼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웨슬리가 전한 복음은 성령의 능력이 가득하였다. 이로 인해 영국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 웨슬리 형제와 휘트 필드의 수고와 전도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각지에 복음이 전파되어 영국 복음의 대부흥을 가져왔다. 옥외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 외에 존 웨슬리는 예배당을 적극적으로 건립했다. 1739년에 존 웨슬리는 런던에 있는 폐쇄된 주조(鑄造) 공장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팔천 명이 말씀을 들으러 왔다. 이것은 그에게 예배당을 건립할 생각을 갖게 하였다. 후에 그는 폭발로 인해 폐쇄된 주조 공장을 매입하여 천칠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으로 개축하였다. 예배당 위층에는 과부들을 위한 거처, 약국, 웨슬리의 저작을 파는 서점, 그리고 어린이들을 무상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 이 건물은 1740년에 완공되어 런던 감리회의 본부(1740-1778)가 되었다. 1777년 웨슬리는 시티 로드(City Rord)에 땅을 빌려 새로운 예배당을 짓고 본부를 이곳으로 옮겼다. 새로 만든 예배당은 런던 교외에 있는데, 그곳은 본래 성 바울 예배당이 건립될 때 폐기물을 쌓아두는 장소였다. 예배당 맞은편의 작은 산에는 유명한 묘원이 있는데, 그곳은 영국 국교회를 따르지 않은 신교에 속한 사람들을 전적으로 안장하던 곳이었다. 1899년 이 예배당은 큰 화재로 불탔었지만 후에 원형 그대로 복원되었다. 예배당 앞뜰 중앙에는 존 웨슬리의 기념상이 있다. 그의 집은 1779년 예배당 바로 옆에 세워졌는데. 그것은 18세기의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존 웨슬리는 외지로 여행하지 않을 때에는 거의 여기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곳에는 그의 기도실, 가구들 그리고 많은 유품들이 보존되어 있다. 존 웨슬리의 묘지는 예배당 바로 뒤쪽 작은 묘원에 있다.
2). 감리교 운동이 일어남
봉사에 있어서 존 웨슬리는 조직력과 관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믿는 이들이 구원받은 후에 한걸음 더 나아가 반드시 온전케 하기 위해 1739년에 첫 번째의 감리회 조직을 설립했다. "회단(Society)" 은 당시에 보편적으로 유행했던 제도로서 믿는 이들이 온전케 되는데 용이하도록 믿는 이들을 작은 그룹들로 나누었다. 웨슬리는 이러한 회단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감찰과 규율의 집행을 책임졌다. 인수의 증가로 회단에서 목양하는 일은 갈수록 가중되었다. 1742년부터 웨슬리는 평신도들이 말씀을 전하는 것을 허용했다. 회단이 발전함에 따라 재물을 관리하는 사람, 학교를 돌보는 교사. 그리고 병자를 심방하는 사람 등 비공식적으로 직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1744년 존 웨슬리는 런던에서 제1차 연회(The Annual Conference)를 소집하였고, 그 후에 모든 회단을 몇 개의 교구로 나누어 전도사들이 순회하며 돌보도록 하였고, 교구장을 세워 교구의 사무를 관리하게 하였다. 회단이 크게 성장했지만 존 웨슬리는 성공회를 떠날 뜻이 없었고 오히려 그러한 회단들이 국교 회의 일부로 여겨지기 원했다. 그러나 감리교 운동이 독립된 체제를 갖춘 단체로 발전했고 또한 성공회의 신학의 관점과 달랐기 때문에 결국 그 둘은 나뉘게 되었다. 이외에 존 웨슬리와 휘트 필드는 선택과 구원의 진리에 관하여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휘트 필드는 칼뱅파의 관점에 동조하여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시고 은혜를 베푼 것으로 여겼다. 그 반면에 존 웨슬리는 성공회의 영향을 받아 아르미니 안파의 관점에 동조하여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므로 믿는 사람은 모두 구원받는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자주 변론하였지만 우정은 깨지지 않았고, 또한 그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을 함께 전할 부담에는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의와 조직 방면에서는 서로 다른 노선을 취했다. 1748년에 휘트 필드는 부요한 헌팅턴 백작 부인의 후원으로 감리교의 '헌팅턴 부인 계열'의 단체를 발전시켰다. 결국 이것이 발전하여 칼뱅파 감리회가 되었다. 1770년에 존 웨슬리는 감리교 연회에서 아르미니 안파를 위하여 강하게 변호하였고 스위스 신학자, 존 윌리엄 플레처(John William Fleycher)의 지지를 얻어 내었다. 그리하여 존 윌리엄 플레처도 점차적으로 감리교 운동의 중요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1799년 헌팅턴 부인 계열의 단체는 영국 성공회로부터 독립하여 웨슬리 감리교를 설립했다. 1784년에 존 웨슬리는 선언서(Creed of declaration)를 제정하여 자신이 죽은 후에 백 명의 의원을 선출해서 그의 회단 업무를 이어서 감당하게 했다. 같은 해에 북미 선교회의 필요 때문에 웨슬리와 성공회 몇몇 장로들은 미국 감리교의 장로와 감독들을 임명했다. 그러나 감리교는 웨슬리가 죽은 후, 1795년의 평정 조약(Plan of Pacification)으로 인해 정식으로 영국 성공회에서 독립하였다. 존 웨슬리는 매우 근면하게 일하였다. 50년 동안 그의 선교 여행은 25만 마일을 초과하였고, 그 발자취는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에 이르렀으며, 그가 전한 메시지만도 4만여 편이 되었다. 그가 죽을 때 감리교는 영국에서 이미 8만 명의 회중이 있었고 미국에서도 6만 명이 넘었다. 오늘날 감리교에는 전 세계에 4천만 명의 믿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영국과 미국의 첫째, 둘째가는 복음주의 단체이다. 1791년 존 웨슬리는 런던에서 죽었다. 그가 남긴 것은 적지 않은 한 무더기의 서적들과 낡은 목사 가운과 사람에게서 받은 악평과 감리교회(웨슬리교)이다.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는 비록 형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아이작 왓츠(Isaac Watts), 패니 크로즈비(Fanny Crosby)와 함께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다. 일생 동안 찰스 웨슬리는 7천여 곡의 찬송가를 창작했다. "천사 노래 들려온다", "천만의 입이 있어도", "어디부터 말하리오". "주 예수 승리의 사랑", "고요히 감춘 근원인 주님은 ", "예수 내 사랑" 등은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찬송가이다. 18세기 감리교 운동이 가져온 신선함과 부흥은 그 당시 부패와 흑암 중에 있던 영국을 흔들어 깨웠다. 그들은 공의를 추구하고 악습을 버리며 빈민을 구제하는 사회 혁신의 역량이 되었다. 이러한 역량은 훗날 영국의 사법제도에 영향을 미쳐서 유혈 혁명을 피하게 했고, 또한 영국의 각 복음주의 단체가 전반적으로 부흥되게 했다. 이것은 18세기 말, 19세기 초 대대적인 해외 선교 운동의 견고한 기초가 되었다.
3.해외 선교 운동
1). 해외 선교 운동이 일어남
영국 복음주의 대부흥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19세기 대대적인 해외 선교 활동을 가져온 것에 있다. 그중 일찍이 18세기 초,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인 할레 대학과 모라비아 교회와 퀘이커 회 등의 단체들이 잇달아 일어나 유럽과 미주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로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선교 조직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보편적인 해외 선교 활동이 정식으로 시작된 때는 18세기 말, 19세기 초엽이었다. 해상여행이 성행하고 영국의 해상권 장악과 감리교 운동이 영국에 가져다준 영적 부흥은 결국 모든 민족을 복음화하는 위대한 위임이 되었다. 그 위임은 바로 왕국 복음을 사람들이 거하는 모든 곳에 전파하는 것이다. 1768년부터 영국 정부가 제임스 쿡(Jamse Cook) 선장에게 태평양을 항해하도록 위임하여, 그는 새로운 지역을 많이 발견하였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항해 체험을 <쿡 선장의 최후 여정>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는데, 그 가운데에는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캐리(William Carey)도 있다. 캐리는 1761년에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구두 수선공이었는데, 독학으로 라틴어와 헬라어, 히브리어와 불어를 배웠다. 후에 그는 미국의 유명한 전도사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그가 편저한 <데이비드 브라이 너드의 생애( The Life of David Brainerd)>라는 책에서 영향을 받아 해외 선교 운동이 보편적으로 전개되게 하였다. 1792년 그는 <선교 의무 및 실무 상담(Enquir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에서 해외 선교의 책임, 역사, 현황 그리고 전망이라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상세하게 제시하였다. 같은 해 10월에 14명의 믿는 이들은 캐리와 <모라비안 선교회 정기 간행물>의 격려로 선교사 파송 단체를 설립하였을 뿐 아니라 그다음 해에 인도로 이주하였다. 캐리가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환경은 매우 열악하였다. 그의 아내는 압력을 감당하지 못 해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 그러나 캐리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경을 인도의 20여 종류의 방언으로 번역하였다. 캐리는 1834년에 인도에서 죽었는데, 그는 인도에서 40년 동안 거주하면서 한 번도 영국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영국으로 보낸 보고서는 많은 선교회의 설립을 자극하여 해외 선교 운동이 보편적으로 전개되게 하였다.
2). 선교회의 설립
캐리의 격려에 힘입어 1795년,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가 설립되었다. 그 다음 해에 그들은 타이티(Tahiti)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29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1807년 첫 번째로 중국에 간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과 1840년 남미로 선교하러 간 의사 데이비드 리빙스턴(Dr, David Livingstone)은 모두 런던 선교회에서 보낸 사람들이다. 런던 선교회는 원래 종파를 초월한 연합 선교회였으나, 후에는 오히려 점차적으로 조합 교회의 부속 조직으로 변하였다. 그 후에 영국 성공회도 1799년에 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를 설립하였는데, 워치만 니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마거릿 바버(Margaret E. Barber)가 한때 이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국에 갔었다. 1818년에 감리회도 감리 선교회(Methodist Missionary Society)를 조직하여 활동 범위를 확대하였다. 이것이 훗날의 웨슬리안 교회(Wesleyan Church)이다. 이와 유사한 선교사 파송 조직은 계속해서 미국, 독일 ,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에서 생겨났으며, 거의 각 종파가 독립된 선교회를 세워 특정 지역의 복음의 일을 전담하여 추진하였다. 이러한 선교회 조직들 중 가장 큰 국제 선교회는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가 창설한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였다. 테일러는 1832년에 영국의 요크셔(Yorkshire)의 반슬리(Barnsley)에서 태어났다. 그는 1853년에 중국 복음회(China Evangelization Society)의 파송으로 중국으로 갔다가 후에 독립하여 자유 전도사가 되었다. 당시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연해 일대에서 사역하였는데, 테일러는 내지의 더 큰 필요를 보고 1865년에 중국 내지 선교회를 설립했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선교 원칙을 세웠다. 그는 대외적으로 경제적인 지원을 구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앙망하였으며 옷차림과 생활방식을 현지의 풍습을 따랐다. 그는 본부를 중국에 직접 설립하였는데. 이것들은 선교활동에서 새로운 본보기가 되었다. 1885년 일곱 명의 케임 부리지 대학 졸업생이 내지회에 가입하여 중국으로 갔다. 그들의 헌신은 다른 영국인들을 크게 격려하여 결국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내지회의 선교사 수는 기존의 163명에서 800명으로 증가하였고, 전체 복음주의 선교사 총 인수의 삼분의 일을 차지했다. 1893년 내지회는 중국 선교에 갈망이 있는 선교사들을 훈련하기 위해 뉴잉턴 그린(Newington Green)에서 서른 개의 방, 회의실, 접대실을 갖춘 선교 센터를 구입했다. 이로써 그들의 선교 규모는 크게 학장 되었다.
3). 성서공회의 설립
19세기는 각종 선교 조직 외에도 수많은 성서공회가 설립되어 선교회의 일을 도왔다. 1802년 12월에 성경의 대량 보급을 격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런던에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를 계기로 러시아, 네덜란드, 독일,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에 성서공회가 속속히 세워졌다. 1816년 뉴욕에서 설립된 미국성서공회(American Bible society)도 전선에서 개척을 하고 있는 이들과 인디언 부락과 유럽에서 들어온 수많은 이민자들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선교사들이 가는 곳마다 곧 성공회가 설립되어 성경이 그 지방 언어로 번역되었다. 중국어 성경 번역 작업에서 개신교 선교사 모리슨의 업적이 뛰어났다. 모리슨은 1782년 영국의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에서 태어났다. 그는 1807년 중국 광저우(廣州)의 난강(南港)에 도착하여 중국에 온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가 선교를 엄격하게 금했기 때문에 모리슨은 27년 동안 성경 번역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첫 번째 영어- 광둥어 사전을 완성하였을 뿌만 아니라 신구약의 번역을 완성하여 출판했다. 1946년 세계에서 주된 성서공회들이 영국에 모여 연합 성서공회(United Bible Societies)를 설립하여 번역과 출판 및 성경 발행의 일을 강화하였다. 선교 사업의 대대적인 발전은 복음이 이른 곳에 교육을 보편화하고 의료 수준을 높였을 뿐 아니라 유럽 기독교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많은 젊은이들을 격려하여 헌신하도록 하였고 각지에 부흥이 일어나게 하였다.
4.케임브리지 7인
케임브리지는 원래 캠 강(River Cam)의 소택지(沼澤地) 옆에 있던 조그만 시장으로 로마 제국 시대인 70년에도 이미 존재한 곳이다. 13세기 때 이곳에 케임브리지 대학이 설립되었고, 이곳은 인문이 집결된 대학 도시가 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은 영국의 최고 학부이다. 19세기 때 케임브리지 대학에 일곱 명의 졸업생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내지회에 가입하여 선교를 위해 중국에 갔다. 그들이 유명한 '케임브리지 7인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영국에 퍼지자 수많은 대학생들이 격려를 받고 개척의 대열에 들어서서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다.
1) 찰스 토머스 스터드(Charles Thomas Scudd)
찰스 토머스 스터드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 크리켓(cricket)팀의 주장으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오의 태양처럼 그의 인생이 가장 빛나는 전성기에 크리켓을 내려놓고 중국으로 건너가 주님의 이름을 전파할 것을 결심했다. 그의 결심은 전교생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생각할 때 자신이 그분께 속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자 했다. 중국에 도착한 그는 티이위엔프(太原府), 상하이(上海), 핑양(平陽), 롱안푸(隆安府)에서 복음을 전했다. 1888년에 톈진(天津)에서 그는 다른 선교사 프리실라 스튜워드(Priscilla Steward)와 결혼하였고 슬하에 자녀를 네 명 두었다. 1894년 스터드는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가족들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후에 성령의 인도로 그는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1908년에 기묘하게도 하나님은 아프리카의 필요를 그의 마음에 두셨다. 그리하여 그는 아프리카를 개척하여 세계적인 복음 선교회를 설립하고 더 많은 일꾼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곡식을 수확하도록 도왔다.
2)몬테규 빈 챔프(Montague Beanchamp)
몬테규 빈챔프는 남작 집안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 활동과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지만 영적인 실재가 부족했다. 무디의 전도로 참되게 주님을 믿은 후 그는 최상의 누림을 내려놓았을 뿐 아니라 많은 재산까지도 포기했다. 그의 형은 그가 중국 선교를 포기한다면 많은 재산을 남겨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기꺼이 촌촌마다 다니면서 전도를 하기 원했다. 아주 뜨거운 날씨에 그는 테일러와 천 마일을 걷기도 하였다. 중국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의 아들까지도 감동시켰다. 후에 장성한 그의 아들도 중국 내 지 선교회에 가입하여 아버지의 선교의 일을 이었다. 몬테규 빈쳄프는 중국 바오닝(寶寧)에서 생애를 마쳤다.
3)스탠리 스미스(Stanley P, Smith)
스탠리 스미스의 아버지는 유명한 외과 의사였다. 스탠리는 열세 살 때 주님을 영접했지만 부흥되지는 않았다.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각종 운동에 열심이 있었고 뛰어난 조정 선수였다. 그렇지만 그의 생활은 무료했고 깊은 속에 만족이 없었다. 그가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렸을 때 그의 생명의 변화가 있게 되었다. 부흥된 후에 그는 즉시 봉사에 참여하고 심방하며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후에 그는 해외 선교에 부담을 갖게 되었고, 중국을 일생 섬길 선교지로 정했다. 그는 어떤 것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종신토록 중국 북방에 머물며 중국어로 유창하게 말씀을 전하면서 사람들을 목양했다. 심지어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에도 그는 말씀을 전했다. 1931년 1월 31일 쓰저우(蘇州)에서 그는 세상을 떠나 그의 목숨을 한 알의 씨와 같이 중국에 묻었다.
4) 터너(Turner) 형제
터너 형제는 부유한 집 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계급이 높은 군인이었다. 세실 폴힐 터너(Cecil Polhill- Turner)는 둘째로 태어났고, 아서 폴힐 터너(Arthur Polhill- Tuener)는 셋째로 태어났다. 당시 영국의 전통에 따르면 둘째 아들은 기마병이 되어야 하고 셋째 아들은 가정 목사가 되어야 했다. 아서는 자신이 장차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습관에 빠져서 무절제하게 생활했다. 그러나 무디의 복음 집회를 참석하고 나서 그는 옛 생활을 철저하게 청산할 것을 결심했다. 케임브리지 7인 중에서 아서는 가장 먼저 부르심 받아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계속적으로 쓰찬성(四川省)에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경자권란(庚子拳亂)과 신해혁명(辛亥革命) 기간에도 그는 중국에 있었다. 세실은 기마병으로서 장래가 촉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중국에 선교하도록 보내실 것에 대해 매우 분명했다. 그는 자신을 드려 복음을 전파하는 이레 동생 아서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중국 선교사 대회'에 참가한 후에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을 결심했다. 한 장로가 그에게 기마부대를 따라 인도에 갈 것을 강하게 권했고, 백작인 그의 숙부는 그가 해외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실은 승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단호히 내려놓고 중국 산시성(山西省)으로 원정하였다.나중에는 심지어 출입이 금지된 지역인 티베트(Tibet)까지 가서 주님을 위해 선한 간증을 하였다.
딕슨 호스트(Dixon Hoste)
딕슨 호스트는 허드슨 테일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선교활동을 고려하고 있을 때 테이러가 쓴 소책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중국에 대한 부딤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 그의 아버지는 그가 해외로 나가서 선교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였지만 나중에는 그에게 편지를 써서 다시는 그를 말리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증해 주었다. 테이러는 그에게 중국에서의 위험과 외로움에 대해 분명하게 말했지만 호스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후에 그는 테일러를 이어 중국 내지 선교회의 책임자가 되었다. 대일 항전 시기에 그는 일본인들에게 구금되기도 하였다. 60년 넘게 중국에 살았던 그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서야 런던으로 돌아갔다.
윌리엄 캐슬스(William, W, Cassels)
윌리엄 캐슬슬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영국 국교 회의 부목사가 되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드렸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해외 사역의 필요를 보여 주셨고, 그는 점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중국에 대한 부담을 주셨다는 것에 대해 분명해졌다. 그의 결심은 얼마 안 되어 즉시 시험을 받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직접 허드슨 테일러를 만나서 캐슬스를 선교사로 받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원래 캐슬스의 어머니는 일곱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캐슬스가 유일하게 영국에 남은 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어머니의 마음을 만지셨고, 결국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결심에 동의하게 되었다. 캐슬스는 먼저 상하이로 간 다음 중국 서부 내륙 지방으로 깊이 들어가 일했다. 그리고 1925년 세상을 떠났다.
5. 조지 밀러와 영국의 형제회
19세기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은 냉담하고 침체되고 형식화된 종교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유럽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각국의 영토가 재편성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언, 특히 주님의 재림에 관한 진리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영국 내에서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성공회의 죽어 있는 상태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잇달아 자유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성경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해외 선교에 열심을 냈으며 각지에 성서공회를 설립했다. 1827년 에드워드 크로닌(Edward Cronin)과 한 무리의 형제들이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떡을 떼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영국 형제회의 시작이다. 점차적으로 이 모임은 더 많은 사람들을 더블린에 오도록 매혹했다. 그 가운데에는 앤서니 노리스 그로브스(Anthony Norris Groves)와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가 포함된다. 치과의사인 그로브스는 주님에 대한 갈망을 가졌기 때문에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한 금액을 모두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헌신(Christian Devotedness)>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글을 썼다. 그 글은 조지 뮐러의 봉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1). 조지 뮐러(George Mueller, 1805-1898)
조지 뮐러는 프로이센의 한 농촌에서 태어나 후에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젊었을 때 뮐러는 불신과 죄악 속에서 살았다. 회심한 후 그는 고아원에 헌신한 것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일은 브리스틀에서 시작되었다. 브리스틀은 천 년의 역사를 지닌 선박 수송의 항구 도시이다. 뮐러는 1836년, 여기에 집을 세내어 첫 번째 고아원을 세웠다. 1849년 그는 다시 브리스틀 교외의 산에 여러 층으로 된 집을 직접 지어 새로운 고아원을 세웠다. 처음에는 스물여섯 명의 고아들이 있었는데, 2년 뒤 그의 돌봄 아래 있는 고아들은 삼백 명에 달했고 그의 일은 크게 확장되었다. 지금 영국의 브리스틀 시의 가장 큰 고아원은 그가 실제로 기도하여 얻은 기념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아원을 건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일생 동안 뮐러가 받은 헌금은 125만 파운드가 넘는다. 이 헌금의 전액은 뮐러가 사람들에게서 모금한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모두 자원하여 보내어온 것이다. 이러한 기적에 대해 뮐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은 …모두 때에 맞추어 공급되었습니다. 아무도 제가 누구에게 한 푼이라도 요구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어떤 위원회나 모금을 권면하는 사람이 없고 어떤 결의안이나 이자를 불려서 생긴 자금도 없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이 모든 헌금을 믿음의 기도로 말미암아 얻은 것입니다." 뮐러의 믿음은 그의 꾸준한 기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항상 기도 안에 살았다. 그는 길을 걸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무엇을 하든지 항상 기도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천 번, 만 번 뿐이겠습니까? 저는 어떤 일이 옳다고 확신하면 결코 그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으며 기도가 응답받는 것을 하나의 영적인 율로 여겼다. 뮐러는 기도로 고아원을 돌본 것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경건한 성경학자이자 전도인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다른 어떤 책보다 성경을 더 중요시했다. 그는 매일 새벽에 들판을 한두 시간 거닐면서 성경을 읽고 각 구절을 묵상하였는데, 그것은 그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이끌었다. 이로 인해 그는 새 힘을 얻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이제까지 그의 고아원에 수용된 고아들은 만 명이 넘는다. 그들은 교육받고 훈련받은 후에 세계 각지로 보내어져 유용한 일을 하였다. 이것 외에 그는 남은 힘을 기타 자선 사업에 썼다.
2). 형제회가 일어남
1827년 에드워드 크로닌과 한 무리의 형제들이 더블린에서 집회를 시작한 것이 형제회의 시작이다. 본래 천주교 신자였던 크로닌은 건강 문제 때문에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이주하였다. 혼란한 종교의 상태에 대해 곤혹스러웠던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함으로 그 원인을 알고자 했다. 그는 성경에서 교회가 오직 하나라는 것을 보았고 모든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며 주님께서 주신 은사 있는 사람들이 그분의 사역을 수행한다는 것을 보았다. 비록 그들의 모임이 당시 기독교계의 비평과 공격을 받았지만 그들의 인수는 날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시작 단계에 대해 크로닌은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는 계속적으로 자기 마음을 비운 형제들을 우리에게 더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피츠 윌리엄(Fitzwilliam)의 집이 더 이상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어서, 주일날에 안기어(Aungier) 가의 회의실로 장소를 옮겨 모여야 했습니다. 존 파넬(John Parnell), 윌리엄 스톡스(William Stocks) 등, 여러 형제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 저녁 집회 장소를 정리하고 떡과 잔을 소박한 테이블 위에 둘 때에 제 마음이 매우 기뻤습니다. 이러한 기쁨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모임의 시작에는 주님의 임재뿐 아니라 주님이 얼굴빛도 있었습니다." 후에 다비가 이러한 모임에 매료되었다. 다비는 1800년에 태어나 15세에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한 수재였다. 당시에는 법학을 전공한 학생들은 졸업 후 바로 아일랜드의 법원에서 일할 수 있었으나 다비는 성공회의 성직자의 길을 선택하였다. 다비 자신은 이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교회를 찾아다녔습니다. … 저는 온전히 사도직분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는 유일한 통로가 되기 원했습니다. 당시 다비는 오직 천주교만이 사도 직분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그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마르틴 루터와 칼뱅과 그의 추종자들을 '교회에서 제명했다. 1827년 겨울, 다비는 형제회의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국교 회의 직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두 척의 배에 발을 각각 두고 있었으나 점차적으로 교회에 관한 진리를 보게 되었다. 1828년 다비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질과 합일에 대한 탐구>라는 한 편의 글을 썼는데, 그것은 형제회에서 출판된 첫 번째 문서가 되었다. 2년 후에 그는 정식으로 성공회를 떠났다. 다비의 인도로 형제회 모임은 잉글랜드 등지로 확장되어 '형제회 운동'이 되었다. 이것은 유럽과 미주 각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브리스틀에서의 '형제회 운동'으로 조지 뮐러와 헨리 크레이크(Henry Craik)를 얻었다. 잉글랜드의 플리머스에서 다비는 벤저민 뉴턴(Benjamin Wills Newton)을 얻었다. 뉴턴의 부모는 퀘이커교 신자였고 뉴턴은 옥스퍼드에서 공부하는 기간에 다비를 만났다. 그가 다비의 '형제회 운동'에 참여한 후에 플리머스에 있는 그의 집은 잉글랜드에 있는 형제회의 첫 번째 거점이 되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플리머스 형제회(Plymouth Brethren)"라고 불렀다. 플리머스에 있는 형제회 모임은 얼마 되지 않아 인수가 천 명이 넘을 정도로 확장되었다. 이 기간의 형제회 생활에 대해 뉴턴은 "땅 위에 있는 것이 하늘에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묘사했다. 그들 가운데 한 믿는 이는 당시의 광경을 이렇게 말했다. "그곳은 집에 있는 것처럼 평안했고 사랑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저를 깨우쳤고 그들의 기쁨은 저를 격려했습니다. 그들의 교통은 저를 위로했고 그들의 보살핌은 저를 강화시켰습니다. 그들의 단일하고 순수함은 저로 하여금 달콤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곳은 성령의 열매가 흘러넘쳤습니다."(갈 5:22) 비록 프리머스 모임을 다비와 뉴턴이 함께 주관했지만, 다비가 런던에 가서 집회를 하고 메시지를 전해야 했기 때문에 주된 인도 직분이 뉴턴에게 있었다. 런던에서의 다비의 일은 매우 효과적이었고 인근에 있는 도시들에서도 앞다투어 그에게서 성격 안에 있는 예언에 대한 해설을 들으러 왔다. 그중의 한 사람이 나중에 형제회에 가입하여 《성경 헬라어 콘코던스》와 《성경 히브리어 콘코던스》의 발행을 도왔던 위그램(G, V, Wigram)이다.
다비가 인도한 모임에는 계급 제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서로를 형제라 불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형제회"라 칭했다. 형제회는 몇 가지 주된 관점과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1). 주의 상을 세우기 위해서 성직자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고 성직자가 없을 경우에도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일 수 있다. (2). 어디에서든지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신다. (3). 모든 믿는 이들에게 다 제사장 직분이 있고 성직자 계급은 조금도 성경에 부합하지 않다. (4),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믿는 이들은 서로 교통할 필요가 있다. (5). 성경 안에 있는 예언들, 특히 아직 성취되지 않은 부분들을 연구한다. (6). 주님께서 받은 모든 사람들을 받고 그들과 함께 떡을 떼고 모임을 갖는다. (7). 다른 단체에 가서 말씀 전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성경 해석에 대한 차이점 때문에 형제들 가운데 점차적으로 분열이 드러났다. 이 분열은 주로 성경 예언에 대한 다른 해석에서 비롯되었다. 다비는 믿는 이들이 대환난 전에 전체가 휴거 될 것으로 여겨졌고, 뉴턴은 믿는 이들이 반드시 대환난을 거쳐야 하고 대환난이 끝나기 전에 모두가 휴거 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로브스는 오직 이기는 믿는 이들 만이 천년왕국에 참여하고 그것을 상으로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뿐 아니라 그들은 교회 본질과 부르심 받음과 교회 치리(治理)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다비는 한 지방 교회에 대한 책임과 징벌은 전체 교회가 결정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고, 그로브스는 교회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다스림을 받아야 하며 서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뉴턴은 각지 교회가 자체적으로 장로를 세우고 각 지방별로 행정적인 사무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46년 다비는 "사건의 진상(A Narration of Facts)" 을 발표했는데, 그 안에는 뉴턴을 질책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듬해 2월에 다비를 주동으로 한 잉글랜드 각지 형제들은 런던에서 모여 같은 목소리로 뉴턴의 가르침을 '프리머스에서 나온 악한 교훈'이라고 질책하면서 그들과 절대 분리를 주장했다. 이때에 뮐러와 크레이크의 인도 하에 있는 베데스다(Bethesda) 형제회는 플리머스의 가르침이 이단이라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면 그들을 거절할 이유가 없고 교리적인 차이 때문에 그들을 격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다비는 베데스다 형제들이 뉴턴의 무리와의 교통을 즉각 단절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도 격리하겠다고 말했다. 다비의 강한 주장 때문에 형제회는 다비를 주동으로 하는 '폐쇄파 형제회(Closed Brethren)', 뮐러와 크레이크를 주동으로 하는 '공개파 형제회(Open Brethren)' 로 나뉘었다. 분열된 후 형제회는 각각 자신의 노선을 발전시켜 나갔다. 공개파 형제회는 푸저우(福州)에서 복음 전파에 힘을 쏟았고 그 범위는 중국, 인도, 아프리카. 뉴질랜드 등에까지 미쳤으며, 그들에 의해 전도지를 배포하는 많은 문서 기관이 세워졌다. 폐쇄파 형제회도 <구원, 기쁨, 확신>의 저자인 조지 커팅(George Cutting)과 같은 소수의 능력 있는 전도자가 일어났지만, 대부분 그들의 주된 일은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었다. 그들 가운데 윌리엄 켈리(William Kelley)와 매킨토시(Mackintosh)와 같은 몇몇 저명한 성경 교사들이 나왔다.
3). 왕국 진리에 대한 회복
형제회 가운데 많은 유명한 해설가들이 일어났는데, 그중 한 사람이 로버트 고벳(Robert Govett)이다. 고벳은 1813년에 태어나 1830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졸업 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44년 그는 유아 세례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성공회를 떠나 서리 채플(Surrey Chapel)을 세웠다. 모이는 인수가 점차 많아지자 부득불 빅토리아 홀(Victoria Hall)을 집회 장소로 삼게 되었다. 1854년에 서리 채플은 다시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고 고벳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목회하였다. 고벳은 뛰어난 사고 능력과 진리에 대해 항상 깊이 연구하는 성격을 가졌다. 그는 세상 끝 날의 심판과 천년왕국의 관계를 연구하다가 천년왕국이 하나님께서 충성된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보상이라는 것을 보았다. 비록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생활로서만 하나님 앞에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은 생명의 문제이지만 보상은 생활의 문제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천년왕국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충성을 다하고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과 대환난 전에 모든 믿는 이가 휴거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기고 충성된 믿는 이들만이 천년왕국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벳에게는 데이비드 팬톤(David M, Panton)이라는 조력자가 있었다. 팬톤은 자메이카(jamaica)에 있는 성공회 가정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고 케임 부리지(Cambridge)에서 법률 학위를 받았다. 팬톤은 매우 뛰어난 성경 교사였으므로 많은 이들이 매료되어 그가 인도했던 기도 모임이나 성경 연구반이나 주일 학교에 참석했다. 그는 또한 《여명(The Dawn)》이라는 잡지의 편집자 중 한 사람으로서 그 잡지에 성경 해설에 관한 많은 글들을 발표했다. 형제회에 고벳과 동시기에 저명한 또 한 사람의 성경 교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펨버(G, H, Pember)이다. 성경의 예언에 관한 많은 저작을 펴낸 그는 백여 년 동안 가장 위대한 성경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휴거에 대한 그의 관점은 고벳과 팬톤의 관점과 일치했다. 그는 오직 이기는 믿는 이들만이 대환난 전에 공중으로 휴거 되어 주님을 만날 것으로 여겼다. 일찍이 폐쇄파 형제회에 가입했던 조지 랭(George H, Lang)은 후에 공개파 형제회에 가입하여 펨버와 스펄전과 조지 뮐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조지 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노르웨이, 독일,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이집트, 수리아, 파키스탄, 인도 등지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다. 성경의 예언에 대한 형제회의 해석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그 시기의 사람들은 왕국의 예언에 대해 중요시하게 되었다.
6.속 생명파
1). 속 생명파의 기원
17세기에 천주교에서 한 무리의 영적인 사람들이 일어났는데, 그때로부터 그리스도인의 내적 생명을 중요시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매우 영적인 한 사람이 바로 몰리노스(Molinos)였다. 그가 저술한 <영적 노정의 안내서(Spiritual Guide)>라는 책은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을 가르쳤는데,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동시기의 귀용(Madam Guyon, 1648-1717) 부인은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것과 자신을 부인하는 것 등에 대해 더 전진된 인식을 가졌다. 그녀가 저술한 전기 <향기로운 몰약(Sweet Smelling Myrrh)>은 생명의 체험을 깊이 다룬 책이다. 귀용 부인에게서 큰 도움을 받은 존 웨슬리는 모든 믿는 이가 마땅히 귀용 부인의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귀용 부인과 동시기의 또 한 사람은 페넬롱(Fenelong) 신부이다. 그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고난받기 원했고, 귀용 부인과 함께 많은 영적인 말씀을 해방하였다. 이들은 당시 속 생명을 가장 주의하는 무리였다. 19세기에 이르러 또 한 무리가 일어나 속 생명의 노선을 이어갔다. 1875년 하나님께서는 도자기 상인이었던 스미스(Pearsall Smith)를 얻으셨다. 스미스는 사람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헌신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보았다. 이러한 거룩하게 됨은 웨슬리가 말한 거룩하게 됨과 달랐다. 스미스는 믿음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다고 보았고, 웨슬리는 사람이 헌신한 후에 점진적으로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고 보았다. 사실 이 둘은 모두 진리의 양면이다. 한나 스미스(Mrs, Hannah Smith)는 스미스의 노선에 이어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비결(The Christian`s Secret of Happy Life)>이라는 책을 펴냈다. 동시에 에번 홉킨스(Evan Hopkins)와 앤드루 머리(Andrew Murray) 등이 일으켜져 자기를 부인하라는 귀용 부인의 메시지를 계속 이어갔다. 그들은 독일, 영국 등지에서 연도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 회의가 케스윅 총회의 전신이다. 케스윅 총회의 주 강사였던 홉킨스는 스미스와 귀용 부인에게서 영적 도움을 받고 당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비록 귀용 부인이 전한 진리들이 교회 역사에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깊은 영향을 주었다. 17세기의 이 귀용 부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19세기에 회복의 흐름을 가져오셨다. 홉킨스 외에 티엄벌(H, C, Tiumbull)도 케스윅 총회에서 이기는 생명에 관한 메시지를 전했다. 이 메시지들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갖게 된 이기는 생명에 대한 인식과 이 생명을 체험함으로 살아낸 생활은 큰 부흥을 가져왔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제시 펜 루이스(Mrs, Jessie Penn-Lewis)를 일으키셨다. 펜 루이스는 초기에 몸이 매우 연약하여 자주 병상에 누어 있었는데, 병을 앓는 동안 귀용 부인의 저작을 읽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완전한 자기 부인과 신뢰와 완전한 사랑이 실행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하나님과의 씨름 가운데서 그녀는 주님께서 그러한 진리의 실재 안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했다. 주님은 그녀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때로부터 그녀는 진정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체험으로 말미암아 많은 믿는 이들이 매료되어 십자가의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살아 있는 간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의 중심이 십자가인 것을 알게 하셨다. 십자가는 모든 영적인 것들의 기초이며, 십자가의 역사가 없다면 사람은 결코 죽음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수많은 영적인 사람들이 펜 루이스에게서 큰 도움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전파한 메시지들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하셨다.
2). 웨일스 대부흥
1904년에 영국 웨일스(Wales) 지방에 대부흥이 일어났다. 블래나네르치(Blaenanerch)와 로우골(Loughor), 두 도시는 웨일스 부흥의 발원지이다. 이러한 부흥으로 어떤 지방에서는 도시 전체가 구원을 받아 더 이상 복음을 전할 대상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복음 외에도 오순절의 많은 외적인 현상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부흥의 인도자는 에번 로버츠(Evan Roberts)이다. 그는 아무런 학식이 없는 22세의 광부였다. 구원받은 후 그는 자주 광산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그의 기도는 오직 한 가지였는데, 그것은 바로 "주여, 교회를 굴복시키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게 하소서!"였다. 주의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기이하게 느끼면서도 깊은 감동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 점차 그의 기도에 합류하여 곧 모두 광부들이 함께 기도했다. 이로써 이러한 잉글랜드 남부 전역에 퍼졌다.
3). 케스윅 총회(Keswick Convention)
케스윅 총회는 1875년에 북아일랜드 케스윅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복음주의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매년 여름 이곳에서 총회를 가졌다. 그 이전에는 스미스가 잉글랜드 각 지방에서 이와 흡사한 특별 집회를 개최했다. 1874년과 1875년 사이에 옥스퍼드와 브라이톤(Brighton) 등지에서도 대형 집회를 가졌다. 1875년에 성공회 주교 하포드 배터세이(Harford Battersey)가 케스윅에서 한 주간의 집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케스윅 총회는 성경 지식을 저술하는 기타 성경 해석 집회와 달랐는데, 그 총회의 중점은 믿는 이들의 영적 생명의 진보를 돕고 그들의 영적 상태를 회복하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그 총회에서는 어떤 종파의 신학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케스윅 총회의 주제는 매우 확실했다. 역대로 전해진 메시지의 순서는 대강 이러했다. 첫날에는 믿는 이들의 타고난 생명 안에서 죄가 낳은 결과(죽음)를 해석했고, 둘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죄와 죄의 권세를 처리한 것을 말했다. 셋째 날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봉사, 특히 해외 선교의 방면을 강조하였다. 케스윅 총회의 두 강사는 대부분 영국에서 왔고 소수는 다른 나라에서 왔다. 이 강사들 중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앤드루 머리와 허드슨 테일러도 있었다. 워치만 니(Watchman Nee)도 이 총회에서 기도해 줄 것을 요청받았었다.
4). 마거릿 바버(Margaret. E. Barber)
마거릿 바버는 1866년에 영국 남부에 서퍽(Suffolk) 주의 피젠홀(Peasenhall)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타이아 수리공이었고 가정형편은 아주 어려웠다. 1890년 24세였던 바버는 중국에서 개최된 개신교 선교 집회에서 허드슨 테일러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이 땅의 기독교 영토에 있는 개신교 교회들이여, 향후 5년 내로 천 명의 선교사를 중국에 보내어 이 부르심에 응하십시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3억이나 되는 이교도들을 위해 간구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광활한 대륙의 일과 그 책임은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진지하게 간청합니다." 이러한 부르짖음이 있고 나서 5년 뒤인 1895년 영국 성공회 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의 보내심과 지원으로 바버가 중국에 오게 되었다. 그녀는 선교회의 책임자인 베링 굴드(Baring Gould)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어떠한 기쁨인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니! 그분은 자신을 우리에게 감추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곳에 처음 발을 내디딜 때 전에 없었던 어떤 느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 제 일생 가운데 가장 즐거운 날은 바로 제가 중국에 도착한 때입니다." 중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바버와 두 명의 여선교사는 푸저우(福州) 부근에 있는 한 시골에 가도록 안배되었다. 바버는 선교를 위한 모든 필요를 돌보는 책임이 주어졌다. 후에 그 지방 환경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푸저우 시로 돌아오도록 안배되었고 타오수(陶恕) 여자 중학교에서 7년간 교직에 있었다. 그녀에게서 생명의 풍성함이 넘쳐흘렀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매료되었다. 이것을 시기한 그 학교 교장은 열 가지 죄명으로 그녀를 선교회에 고발하였다. 선교회에서는 바버에게 영국에 귀환하여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오랜 기간 심문 받을 때 그녀는 잠잠했으며 자신을 위해 어떤 것도 변호하지 않았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여명》잡지의 편집자인 팬톤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팬톤은 종파의 오류에 대해 분명히 보았고 성경 안에 있는 왕국의 예언에 대해 깊이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팬톤의 영향으로 그녀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런던에서 2년간 머무는 동안 한 면으로는 주님께서 다시 중국으로 보내주시기를 기도했다. 마침내 바버는 1909년 노리치 서리 채플(Norwich Surrey Chapel)에서 사역하던 팬톤과의 교통으로 중국에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이번에 그녀는 선교회의 후원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공급의 근원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푸저우 부근에 있는 한마을에 거하면서 그녀는 십자가의 공과를 계속 배웠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어떻게 주님을 위해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는데, 그녀는 "먼저 자신의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한 알의 생명의 씨와 같이 중국 땅에 심겼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 위대한 업적도 없는 것 같지만 그녀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워치만 니(Watchman Nee)이다. 바버가 1930년에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여러 깊이 있는 찬송들이 있다. 다음 찬송가는 그중 하나이다. 고난받는 것이 내 길이라면 간고의 길 주가 정하셨다면 주님과의 교통 더욱 친근해 순간순간 간격 없기 원하네 땅의 즐거움이 감소될 때에 주여 내게 하늘 더욱 주소서 내 마음은 상해 아플지라도 영은 주를 향해 찬송하도록 님 자신 더욱 얻기 위하여 이 땅과의 연결 끊어진대도 주님과의 사이 더 달콤하게 연결되어 주의 향기 누리리 외로운 이 길에 주 내 동반자 웃는 얼굴로 날 격려하소서 주 은혜로 자아 벗어 버리고 생명 분배하는 그릇 되도록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보호와 그분의 뜻 안에서 새로운 세기를 향해 계속 전진하고 있다.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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