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교회사

 

1. 교회사 개관

(신32: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무릇 우리가 어느 한 특정 분야에 대하여 포괄적 이해를 얻고자 할 때 필히 요청되는 요소의 하나가 그 분야에 관련된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특히 교회사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 땅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어 온 과정의 적나라한 기록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성경과 교리가 선포하는 구원의 진리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 숨쉬다 간 인물들과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숱한 사건들을 통하여 영원히 현실화 되어 가고 있는 살아있는 진리임을 재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교회사를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성경과 기독교 교리가 선언하는 구원의 신실성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교회사 연구는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성경과 교리의 최종 결론인 구원의 확실성을 거듭 입증해 줌으로써 실로 전인격의 영원한 존재론적인 구원이라는 솟아오르는 대망에 젖게 하는 원천인 것이다.

 

교회사는 성경적으로 정의할 때 먼저 교회사는 신약에서 시작하는 지역교회들의 역사라 할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 ‘기독교의 기원, 발전, 그리고 기독교가 사람에게 미친 영향을 조직화하고 해석한 기록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 강림으로부터 시작된 교회가 오늘날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어떻게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여 왔는지, 또한 그 속에서 복음은 어떻게 변질되어 세상과 타협의 역사를 걸어왔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교회사이다.

 

우리가 교회사를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보다 교회사의 흐름을 통해 하나님 섭리와 역사하심과 거기에 도전하는 마귀의 간계와 계교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앞서 간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올바른 삶을 본받고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으며, 교리논쟁을 통하여 올바른 교회관을 가지고 말씀을 분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사 안에서 과거 자신들이 각각 처했던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신앙과 현실, 교회와 사회, 핍박과 유혹 사이에서, 때로 순교하고 변절하며 또 고뇌하고 좌절하면서도 끝내는 신앙의 환희로 약동하던 과거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발견케 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처하고 있는 신앙 현실의 원인과 과정의 일면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사수와 타협, 분리와 관용의 기로에 서기를 끝없이 강요하는 이 세상에서 끝내 지켜야 할 절대적 본질과 시대와 문화에 맞추어 적응해야 할 상대적 문제를 구분하고 이에 부드럽고도 굳건히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회사는 성경의 예언이 일점일획의 착오 없이 실현되어 가고 있음과 기독교 교리가 단 한점의 오류도 없음을, 역사적 기록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입증하여 주는 최선의 장이다.

 

교회사를 연구함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설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범하기 쉬운 잘못을 미리 막을 수 있고, 삶의 올바른 지침도 마련할 수 있다. 또한 교회사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도들의 행적들과 우리에게까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피흘림으로 복음을 사수한 앞서 간 성도들의 삶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본받을 수 있다. 그리고 앞서 간 성도들이 범한 잘못을 통하여 그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교회사는 성경이 배척당하거나 무시되거나 의문이 제기되거나 변질될 때마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인 재앙들이 뒤따랐음을 보여준다(갈6:7).

 

우리가 교회의 역사를 구분할 때 주로 초대, 중세, 종교개혁, 근대, 현대로 구분한다. 그것을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1)초대교회사(AD27-590)

가)사도시대(AD27-100) : 교회 건설기

나)속사도시대(AD100-313) : 교회핍박기

다)공인종교시대(AD313-590) : 신학조성기(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100(?) : 사도요한의 죽음

313 :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칙령(기독교 공인)

392 :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기독교 국교선언

395 : 동서로마의 분열

476 : 서로마 멸망

590 : 그레고리 1세 즉위

 

2)중세교회사(AD590-1517)

가)과도기(AD590-800)

나)로마교회 성장시대(AD800-1073) : 동서교회 분리기

다)로마교회 전성시대(AD1073-1303) : 그리스도교 실생활기

라)로마교회 쇠퇴시대(AD1303-1517) : 개혁전초기

※622 : 이슬람교 발흥

800 : 프랑크왕국 설립(칼 대제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대관식을 받음)

1054 : 동, 서교회 분리

1073 : 그레고리 7세 즉위

1309 : 아비뇽유수

1453 ; 동로마제국 멸망

 

3)종교개혁사(AD1517-1648)

※1517 :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제기

1545-1563 : 트리엔트 종교회의

 

4)근대교회사(AD1648-1800)

 

5)현대교회사(AD1800-현재) [03년 1월호]

   

2. 초대교회사

 

Ⅰ. 사도시대(AD27 - 100)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교회사에 대한 모든 논의는 태초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궁극적으로 ‘구원 받은 자들의 무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가 구약 선민 이스라엘의 범위를 넘어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확대된 개념으로서의 교회로 본격 등장한 것은 신약 시대 이후였다. 더욱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와 구원 행동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직후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였다. 따라서 본 기고도 이 모두를 염두해 두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의 교회사를 고찰하도록 하겠다.

 

1)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요건

기원 전 4세기경에 알렉산더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패망시킴으로 팔레스타인의 주인이 되었다. 그는 헬라문명으로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고 그가 정복한 각 지역은 헬라적 요소가 매우 강했다.

헬라적 이념은 서로 다른 국가들의 신들을 동일시하여 혼합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들은 결국 그 신들은 다 똑같은 신이라고 말했다. 헬라의 이념을 그대로 답습한 로마제국은 지리적 통합 뿐 아니라 보다 완전한 통일을 위해 종교적 통합을 준비하였다.

당시 로마제국의 종교적 행태를 보면,

① 여러 종교를 무차별 혼합하는 종교적 혼합주의

▶ 로마의 만신전(萬神殿)이 있었고

▶ 혼합 절충주의는 당시에 유행이었다

▶ 로마정부는 각 지방의 신들이 결국은 같은 존재라고 가르쳤다

② 황제 숭배

▶ 로마 제국은 이를 통일과 충성의 방법이나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2) 유대인들 사이의 분파

가) 바리새파

바리새주의는 경건한 사람이 특히 빠지기 쉬운 자기도취나 영적 자만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해 주는 실례이다. (행26:5, 눅11:45, 요7:7)

바리새란 분리주의라는 뜻이다. 그들은 신앙의 열심은 있었으나 율법의 문자에 대하여 집착하였고 마음이 좁고 배타적으로 점점 되어 갔다.

▶ 바리새주의의 등장 배경

- 율법에 근거한 분리주의

남은 자의 귀환 후에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일에 있어서 먼저 다른 나라들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중요시되었다.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2000여명이 먼저 행한 일은 분리였다. 잡혼은 해소되고, 규칙위반이 바로 잡혀 갔다.

- 대제사장의 세속적 영향력의 증가에 대한 반사작용

왕이 없는 상태에서 세습에 의해 거룩한 직무를 담당한 제사장의 영향력은 점차 커지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파사정부도 총독을 임명하는 대신에 유대인 대 제사장에게 파사의 공세(公稅)의 책임을 위탁하기도 했다. 결국 대제사장직이 영적인 책임보다는 정치적인 이점을 취하려는 정치적 야심의 도구가 되었다. 이로인해 유대교의 최초의 이상을 엄밀하게 지키고자 하는 운동이 점점 일어나기 시작했다.

- 두개의 대립하는 단체의 출현

중간 시대 초기부터 유다에는 두개의 지배 계급이 있었다. 제사장들은 그들의 직무상의 지위를 근거로,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권위를 근거로, 각기 자기 계통이 더 큰 영향력을 갖도록 열망했다.

제사장들은 세속적 욕망을 위해 점점 율법의 기본 원칙을 버리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율법을 열심히 수호하는 경향의 그룹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점 종교적인 배타주의와 외면적인 형식을 중시하는 모습으로 변질되어져 갔다.

이들 두개의 분파적 모습은 결국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으로 결정화해 갔다.

BC 2세기 초두에 가장 엄격주의적인 경건한 유대인이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기 위하여 헬레니즘에 반대하고 종교의 자유를 위하여 마카비우스의 해방전쟁에 적극 모여들어 참여 했다. 바리새파, 에세네파,쿰란종단등은 이 차시디임운동에 기원을 둔다.

※ 참고 : 차시디임(CHASIDIM: 히브리말로 HASIDIM이라고 하며, 신앙깊은 사람들이란 뜻임)

▶점진적인 타락

성문화된 율법과 구전 율법을 지킴으로 분리와 성결에 이르는 일은 바리새인의 최고의 목표였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복잡한 규칙을 지킬 수가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외면상 그 모든 일을 실현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외면적인 복종만을 보이는 위선에 점점 빠져 들기 시작했다. 음지에 숨어서는 죄를 범하고 외면적으로는 신앙이 깊은 척하는 모습이 습관화되고 결국은 최악의 위선자가 되여 갔다. 이것이 주님이 오셨던 시대의 정황이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엔, 헤롯 시대의 바리새인이 약 6,000명 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들은 당시 대중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었다

나) 사두개파(Sadducees)

사두개인은 다윗의 치세 때부터 마카비아 시대까지 대제사장직을 담당한 사독의 자손에서 유래된것으로 여겨 진다. (삼하8:17)

대제사장직이 하시몬 왕조로 옮긴 때에 자신이 진정한 사독의 후손임을 새로운 형태로 강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제사장직은 영적 권력을 갖고 의식을 주관하고 정치적 권력도 함께 누림으로 세상적 측면도 열중하게 되었다.

알렉산더가 죽은 이후에도 희랍문화는 널리 펴져 나갔는데, 제사장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희랍적인 자유를 즐기면서도 유대교를 함께 지지하는 타협적인 모습으로 점점 변화되어 갔다.

사두개인은 주로 예루살렘의 귀족들과 대제사장의 가문들로 구성되어져 폐쇄적 체제를 갖고 있었다. 이는 바리새인이 누구든지 바리새파로의 개종을 환영한 것과는 대조된다.

사두개파는 수적으로 바리새인보다는 적은 그룹이고 귀족계급인 부자, 의회의 의원, 군대의 장교, 정치가등 대부분은 제사장 가정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고 천사도 영도 믿지 않았다. (마22:23, 행23:8)

바리새인은 민중에서 위로 향하여 국가에 영향을 주었고, 사두개인은 지도자계급에서 아래를 향하여 국가에 영향을 주었다.

예수님의 공생애동안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는 모두 사두개인이었다.

그러나 모든 제사장이 사두개인은 아니었다. 타락된 이 무리 속에도 하나님의 사람은 있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있었고, 초대 교회 시대에 많은 제사장들이 구원을 받기도 했다. (행6:7)

다) 엣세네파

신약성경에는 엣세네파로 알려져 있는 유대교의 일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엣세네파는 율법을 고수하며 철두철미하게 율법정신으로 살고 이것을 행하기 위하여 인간 사회에서 떠나서 자기들의 은둔지에 거주하며 수도원적인 생활과 신비적인 유대교를 실천했다.(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결코 은둔자가 아니다) 그들은 영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자기들이 보다 순수하고 거룩함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여 성전의 희생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 그들은 독립된 공동체를 만들고 엄격한 사람은 결혼마저도 포기했다. 이것은 모세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한 금욕주의였다. 그러나 수도원적인 생활로 형식주의라는 잘못을 가져 왔다. 비록 동기는 좋았다 하나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 결국 그들은 형식의 노예가 되었다. 또한 이들은 은둔 생활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진실한 영향을 주지 않고 결국은 신약성경에 그들의 존재조차 나오지 않게 만들었다.

라) 열심당원 (THE ZEALOTS)

12사도 가운데 한 사람인 시몬은 열심당원으로 불리우고 있다. 가나안인으로 번역된 것은 인종으로서의 가나안인이 아니고 "열심스러운 사람"이란 의미의 아람어를 음역한 것이다.

희랍어로는 제로테스 (ZEALOTS)와 같은 뜻이다.

열심당원은 철저히 유대민족주의자로, 로마와의 충돌을 초래케 하였다. 그 결과 AD70년 로마 장군 타이투스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붕괴하게 되었다.

중간시대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구주가 오셔서 백성을 구원할 것을 대망하고 있었고 이 시대는 외국지배에 대해서 싸울 용가가 있는 백성에게만 기적은 일어난다고 하는 주장이 일어났다. 율법에 대해서는 바리새적인 열광성은 같았으나, 민족주의적 기질이 더해져 있었다. 이들은 무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도래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행5: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

갈릴리 유다는 이 같은 배경을 가지고 폭동을 일으킨 사람이었다. 유다의 자식들은 그 운동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결국, 두 아들은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고, 자기가 구주라고 선전하던 마지막 아들은 폭도에게 살해 되었다. 이들 열심당의 반항은 차츰 동포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되고 국토를 위협하는 산적으로 되었다.

 

3) 디아스포라 유대교

예수그리스도 탄생 몇 세기전부터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 전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 유대인들은 선조의 조국에 대한 강한 감정적, 종교적 유대감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흩어진 유대인들은 헬레니즘 특히, 희랍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집트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프톨레미 필라델푸스(Ptolemy Philadelphus, B.C285-246) 치하 때에 알렉산드리아에서구약이 희랍어로 번역되었는데, 이를 70인역(Septuagint)이라 부른다. 동방에서는 아람어, 서방에서는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이로 인하여 전혀 낯선 언어 속에 유폐되어 있던 구약성경에의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구약의 종교 개념이 희랍철학, 특히 스토아 철학과 플라톤의 사상에 혼합되었다. 이들 알렉산드리아의 해석자들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필로(Philo, B.C20?-A.D42?)였다.

그는 구약을 모든 책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책이며 하나님의 참된 계시의 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유적 해석 방법에 의해서 플라톤의 사상과 스토아 철학에서 구약과 일치되는 요소를 찾아냈다. 구약과 희랍 철학이 기본적으로 일치한다는 견해는 기독교 신학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하나이신 하나님이 그의 선하심을 표현하시려고 세상을 창조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팔레스타인에서 그들은 헬레니즘과 더 이상 대립하는게 아니라 그들과의 타협을 고려하고 있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대인들 사이에 그들의 고유신앙과 헬라문명과 가장 뛰어난 부분이 서로 상응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헬라적 역사 기술 방식에 의해 진술하기도 하였다. [03년 3월호]

 

 

4) 오순절 성령강림과 예루살렘 교회의 태동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 7주가 지난 후, 오순절(pentecost)날 예수님의 제자 120명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보내시기로 약속한 성령의 강림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실로 이는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이는 성령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성취로 성도들의 심령에 영원히 내주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신 첫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곳에 모였던 어떤 이들은 신비하고도 강한 바람이 집 안으로 불었다고 생각했으며 혹자는 혀 모양의 불꽃이 제자들의 머리 위에 머물렀다고 증언하였다.(행2:1-3)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후 그들은 예루살렘에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모인 군중들 앞으로 쏟아져 나아갔다. 사도들 가운데 시몬 베드로(Simon, the Peter)가 군중 앞에 나섰다. 베드로는 놀한 군중들에게 그들이 현재 목격하고 있는 성령 강림의 기적은 구약의 요엘 선지자를 통해 주어졌던 약속, 즉 ‘마지막 날’에 쏟아 부어질 하나님의 영에 관한 약속의 성취라고 설교하였다.(욜2:28) 그리고 이처럼 놀라운 예언의 성취는 최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사건으로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죽음으로부터 살려내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만드셨음을 과감히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베드로는 순례자들에게 결론적으로 외쳤다. 그리하여 순례자들 중에 많은 이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그리스도요 주로 고백하였다. 약 3000명의 사람들이 그날로 세례를 받고 예수 공동체에 합하였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태동되는 위대한 사건이었다.(행2:38-41)

 

5)환란과 복음의 전파

(행8: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오순절 성령강림 후 교회의 시작과 동시에 하나님의 크신 역사로 믿는 자의 수가 날로 더하자 그리스도인에 대한 유대인의 핍박은 더하여 갔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초기 박해가 로마인들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로부터 가해졌다는 사실이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 예루살렘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자 사도 외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루살렘을 떠나 모든 땅으로 떠나면서 세계를 향한 복음의 전파가 시작되었으며 또한 전 세계로의 교회의 확산이 시작되었다.

처음 로마 관리들은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을 잘 분간하지 못하여 로마의 법 아래에서 보호받아 온 유대인의 종교적 특권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베풀어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로마관원들은 그리스도가 최고의 존재로서 왕들과 황제들까지도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의 여러 가지 관습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거부했으며 관중들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우는 검투 경기과 관중들의 오락을 위해 무죄한 죄수들을 사자에게 던져 주는 공개 경주를 정죄하였다. 그들은 공직을 거절했으며 또한 이방 신들에 대한 분향 혹은 헌주 등의 공적 의무를 이교도와 관련된 일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 결과 그들은 까다롭고 편협한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주후 64년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 불을 질렀다고 누명을 집어 씌움으로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중의 감정은 매우 나빠서 그들은 도처에서 욕을 먹었다.

네로의 박해에 있어서 로마에서 자행된 잔인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으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짐승의 가죽으로 뒤집어 씌워져서 잔인하게 개들에게 물어 뜯겨졌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어떤 사람들은 역청은 담은 통에 처넣어졌고 혹은 그들이 그 역청을 몸에 발라서 불을 놓았고 이러한 횃불은 네로가 이렇듯 무시무시한 광경을 즐기며 산책하는 정원을 밝혀 주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환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흩으셨고 이로 말미암아 복음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지는 도화선으로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셨던 것이다. 만약에 초기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러한 핍박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예루살렘 교회로만 제자들은 안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환란과 핍박을 통해 전 세계로 전해져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었다.


 
■로마와 근교 부근에서 박해를 가했다.

■로마시 대화재 재난의 혐의를 재난의 그 리스도인에게 전가시켰다.

■네로의 궁전을 밝히기 위한 소위 ‘인간 횃불’로서 그리스도인을 화형에 처하는 광란을 벌였다.
 
■바울

■베드로

 
 

90-96년
 
도미티아누스
 
로마와 소아시아 지역에서 일시적이고 산발적인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의 황제숭배 거부로 비롯되었다.
 
■로마의 클레멘트

■사도요한
 

98-117년
 
트라야누스
 
점차 박해가 강화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비애국적인 집단으로 규정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은 발견 즉시 처형되었다.
 
■이그아티우스

■시므온

■조시므스

■루프스
 

117-138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숭배는 계속되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하는 자는 처벌 되었다.
 
■텔레스포루스
 

161-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독교를 사상적으로 배격한 스토아주의자인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자연재해의 장본인으로 규정하였다.
 
■순교자 저스틴

■포티누스

■블란디나
 

202-211년
 
셉티무스

세베루스
 
기독교로의 개종을 금지시켰다.
 
■레오니다스

■이레니우스

■피르페투아
 

235-236년
 
트라키아의

막시미누스
 
기독교 성직자를 처단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황제가 암살한 전임황제를 지지하였다는 사실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아르술라

■히폴리투스
 

249-251년
 
데키우스
 
최초로 제국 전체에 박해의 손길을 펼친 그는 황제숭배의 향기로운 제물을 요구하였고 기독교의 완전한 파멸과 더불어 이교신앙으로 복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파비아누스

■예루살렘의알렉산더
 

257-260년
 
발레리아누스
 
그리스도인의 재산을 몰수하며 그들의 공민권을 박탈하였다.
 
■오리겐

■씨프리아

■식스투스 2세
 

303-311년
 
디오클레티아누스

갈레리우스

 
 
가장 혹독한 박해로서 교회는 파괴되었고 성서는 불태워 졌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박탈 위기에 처했으며 로마신들에 대한 숭배가 강요되었다.
 
■마우리티우스

■알바누스
 
6)로마제국의 10대 기독교 박해사건
 


사 도
 
성 경
 
전 승
 

시몬 베드로
 
▶오순절날 설교를 함

▶성문곁의 앉은뱅이를 고침

▶산헤드린의 박해를 받음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꾸짖음

▶죽은 도르가를 살림

▶하나님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 남

▶안디옥에서 바울로부터 비난 받음

▶2개의 신약서신을 기록
 
▶브리튼(영국)과 고올지방(프랑스)을 방문

▶네로황제 박해때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 가 형을 당함(AD64-68)
 

안 드 레
  
▶스구디아,소아시아 희랍에서 복음전도

▶아가야의 파트라에서 십자가형 받음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
 
헤롯 아그랍바 1세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순교함
 

요 한
 
▶성전에서 앉은뱅이 치료시 베드로 와 함께 있음

▶빌립의 사마리아 사역 계승

▶노년에 밧모섬으로 추방당함

▶요한복음, 3개의 서신서, 계시록 을 기록
 
▶에베소에서 사역

▶초기 영지주의자 케린투스와의 논쟁

▶약100년경 에베소에서 늙어 죽음
 

빌 립
 
 
소아시아 히에라폴리스에서 십자가형을 받아서 순교함.
 

마 태
 
마태복음서 기록
 
이디오피아, 파르티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등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
 

도 마
 
 
 
▶바벨론 복음전도

▶인도에서 교회를 세웠고 그곳에서 순교 당함
 

바돌로메

 
▶빌립과 함께 히에라폴리스로 감.

▶아르메니아 지방사역 후 순교당함.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초기 전승에 보면 예수님의 동생 야고 보와 계속 혼동되었음

▶시리아 복음전도
 

다 대 오
 
 
 
▶예수님의 형제 유다와 혼동됨

▶에뎃사 복음전도
 

열심당원

시 몬
 
 
 
페르시아, 애굽, 카르타고, 브리튼 등지에서 다양하게 활동
 

가롯유다
 
예수님을 배반한 후 목메어 자살
 
 
 
7)예수님 사후 12사도의 행적
 

2. 속사도시대(AD100-313)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요한의 사후(死後)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대는 복음의 확산과 이것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순교의 시대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셨고 이 복음은 순교의 피로 지켜졌다. 주님의 제자들은 받은 사랑을 순교로서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였으며, 그들의 제자들 또한 그러했다. 순교는 이교도들을 향한 가장 확실한 변증이었으며 그렇기에 속사도 시대의 교부들에게 이 순교의 문제는 생활의 문제였다. 그들에게 순교는 목숨을 잃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새롭고 영원한 삶으로의 비약, 바로 그것이었다.

이 시대에 박해 상황을 잘 나타내는 비시니아의 총독 플리니와 황제 트라잔의 서신을 보도록 하자.

※플리니와 트라잔황제 사이의 서신

111년 플리니는 비시니아 총독에 임명 되었다. 플리니는 로마 법률과 전통을 깊이 숭상하던 인물이었다. 비시니아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어서 플리니는 이들의 처리에 대해서 고민을 하였다. 플리니는 기독교인들에게 세 번 개심할 기회를 준 후에 계속 고집하는 자들은 처형을 하였다.

플리니가 당면했던 문제는 과연 기독교신자들은 뚜렷한 범죄 사실이 있을 때에만 처벌받아야 하는지 , 아니면 '기독교신자'라는 사실 자체가 범죄를 구성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던 플리니는 일체의 법적 절차를 일단 중지시키고 트라잔 황제의 지시를 받기 위해 서신을 띄웠다.

황제의 답변은 간단했다. 그들에 대한 일반적인 규칙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고 밝히고 신고가 들어오면 그들을 처벌하되 배도하면 용서해 주고, 익명의 신고는 받지 말라고 하였다. 이러한 트라잔의 정책들은 비시니아의 경계를 넘어서, 그리고 트라잔이 죽은 오랜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 성행되었다. 제2세기, 그리고 제3세기 일부에 이르기까지 제국 전체에 걸쳐 기독교 신자들을 솔선하여 색출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당국자들 앞에 소환 되었을 때에는 이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이 제국의 공식적 정책이었다.

 

1. 로마제국의 박해 이유

1)종교상의 이유

그리스도인에게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배타성으로 인하여 많은 핍박이 주어졌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으며 또한 인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신교의 상황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젖어 살아온 로마인들의 미움을 사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박해가 주어진 것임.

2)비밀결사로의 오해

핍박을 피하여 한 밤중에 모여서 집회를 해야만 하는 환경이었으나 로마인 들은 이를 음란 집단으로 오해하여 핍박함.

3)사회생활의 부조화

성찬식을 오해하여 어린이를 잡아서 그 피와 살을 먹는다고 생각함.

기독교인은 남녀가 함께 모여 형제, 자매라고 부르며 음행한다고 오해함.

4)황제숭배 거부

로마제국은 황제를 신격화 하여 신으로 숭배토록 하였으나 그리스도인은 이를 거부했다. 당시 황제숭배거부는 곧 반역죄로 사형에 처함.

5)사상의 부조화

로마제국은 영원하다고 믿고 있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은 언제인가 멸망한다고 가르침으로 박해를 가함.

 

  
클레멘트 1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제4대 교황으로 추대함

▶성서에는 빌립보서 4:3에 언급된 것으로 추정함

▶도미티아누스황제 박해시 순교함

▶그의 서신은 사도의 계승원칙을 강조함
 

이그나

티우스
 
117년 사망
 
시리아 안디옥
 
에베소 서신

마그네시아 서신

트랄레스 서신

로마 서신

빌라델비아 서신

서머나 서신

폴리갑 서신
 
▶그의 서신은 로마에 순교하러 가는 중에 기록되었으며 그는 순교를 당연한 기쁨의 운명으로 받아들임

▶주교와 장로직의 구분을 최초 역설함

▶이단사상인 영지주의를 배격함

▶트라야누스황제의 박해로 순교함
 

헤르마스
 
1세기말엽

~2세기초엽
 
로마
 
목자서(牧者書)
 
▶클레멘트와 동시대 인물임

▶환상과 비유에 관한 많은 저술이 있음

▶아마도 유대인이었으며 노예 출신의 신분을 지닌 것으로 추정함
 

알렉산드리아의

바나바
 
1세기 말엽

~2세기초엽
 
알렉산드리아
 
바나바서
 
▶알렉산드리아의 법률학자임

▶필로의 알레고리 방법에 능통함
 

파피아스
 
60-130년경
 
히에라볼리
 
우리 주의 말씀 강해서
 
▶사도 요한과 깊은 친교를 나눈 자임

▶종말론에서 전천년설을 주장함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어록집에 기초하여 저술되었으며 마태복음은 원래 아랍어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함
 

폴리갑
 
69년경-160년
 
서머나
 
빌립보 서신
 
▶사도 요한과 깊은 교제를 나눈 자임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을 편집하고 보존함

▶영지주의자 말시온을 "사단의 맏아들"로 규정함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하에 순교당함 
 


2. 속사도 시대의 교부들
 

▶클레멘스( Clement of Rome) 클레멘트는 베드로와 바울의 제자였다(빌4:3 '글레멘드'). 로마교회의 감독(92-101년까지). 그는 로마의 귀족 출신으로 당대의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나, 당시의 학문과 철학에 만족하지 목하고 진리를 찾아 여기저기 여행하던 중 팔레스틴에서 베드로를 만나 신자가 되었다. 그는 베드로의 선교여행에 동행하며 그의 책 저술을 돕고,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바다에서 파도에 잠기는 상태로 순교한다. 96년경에 쓴 그의 글을 통해서 그의 신앙의 일면을 본다. "그러므로 그의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나 우리의 지혜로나 우리의 통찰로나 종교적 헌신으로나 우리의 충심으로 행하였다고 보여지는 거룩한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향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나이다. 아멘

▶ 이그나티우스

107년 맹수의 밥이 됨

이그나티우스는 순교의 자리를 향하여 가면서 일곱 개의 서신들을 남겼는데 이는 초대 기독교역사를 살펴보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록이 되고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30 - 35년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사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의 편지들을 살펴보면, 안디옥 교회내에 몇 개의 분파가 있었으며, 감독은 그가 이단적이라 생각한 교리들을 맹렬히 반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이교도들에 고발되었는지, 혹은 그를 미워하였던 분파의 기독교신자에 의해 고발 되었는지도 확실치 않는 것이다. 어쨌든 이그나티우스는 체포되고 유죄 판결을 받아 로마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그나티우스는 압송되어 가는 도중 여러 신도들을 만나 대화할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그가 구술하는 편지를 받아 쓸 비서까지도 대동할 수 있었다. 그 편지를 통해 당시 로마 전체에 걸친 기독교신자들에 대한 일반적 박해는 없었으며 단지 법원에까지 소환된 자들만 재판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이그나티우스가 기독교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라 할 수 있다.

 

이그나티우스의 일곱 편지는 이러한 면회의 결과 였다.

1.서머나에서의 집필

가.에베소 - 에베소 감독 오네시모가 보낸 사절단과의 만남

나.마그네시아 - 마그네시아 교회에서온 감독과 두 장로

다.트라리아 - 폴리비우스 감독

라.로마인에게

2.드로아에서의 집필

가.빌라델비아 - 빌라델비아교회에 보낸 글

나.서머나 - 서머나 교회에게

다.폴리캅에게 - 폴리캅에게

 

▶ 폴리캅 (Polycarp)

폴리캅은 서머나의 감독이었다. 폴리캅이란 이름은 "열매가 풍성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는 소년시절에 사도 요한을 자주 보고 들었다. 그는 사도 요한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고 서머나의 감독으로 "사도 요한에 의하여 세움을 받았다" . 그는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폴리캅은 155/6년에 80세라는 고령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폴리캅의 순교에 대하여는 그의 순교 직후에 기록된 "폴리캅의 순교사"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이레니우스도 폴리캅의 순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를 한다: "그는 대단히 오래 살았는데, 결국 아주 노년에 이르러 참으로 영광스럽고 장려한 순교를 하였다"

폴리캅은 처음에는 성도들이 강권을 이기기 못하여 도피를 하였으나 순순히 체포를 당하였고 불과 단검으로 고귀하게 순교를 하였다. 그의 순교장면을 살펴보자.

IX 3. 그러나 총독은 윽박지르면서 "맹세하시오. 그러면 내가 그대를 놓아주리다. 그리스도를 모독하시오"라고 말하였을 때 폴리캅이 말하였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기고 있소. 그런데 그분은 한번도 나에게 불의를 행하지 않았소.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한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소?"...

XI. 그러나 총독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에게는 맹수가 있소. 만일 그대가 돌이키지 않는다면 이것들에게 그대를 내주겠소". 그는 말하였다. "부르시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더 좋은 것들로부터 더 나쁜 것들로의 돌이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악한 것들로부터 의로운 것들로의 변화는 좋은 일이오". 그러나 그가 다시 말하였다. "만일그대가 맹수들을 우습게 여기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내가 불로 그대를 삼켜버리게 할 것이오". 그러나 폴리캅이 말하였다. "그대는 잠시동안 타다가 조금 후에는 꺼지고 마는 불로 위협을 하고 있소. 왜냐하면 그대는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장차올 심판의, 영원한 형벌의 불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왜 머뭇거리시오? 그대가 원하는 바를 보내시오".

XII. 이것들과 더 많은 것들을 말하면서 그는 담대함과 기쁨으로 가득 찼고, 그의 얼굴은 은혜로 충만했다. 그리하여 그는 결코 그에게 말해진 바에 의해 동요되어 연약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역으로 그 총독이 당황하여 자신의 전달자를 경기장 가운데로 보내 세 번 전달하게 했다. "폴리캅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승인했다 [2003.05]

 

3. 2세기 변증가


이 름
 
연 대
 
목회지
 
주 요 저 서
 
주 요 사 실
 

쿠아드라투스
 
2세기 초
 
아테네
 
변증서(전해지지 않음)
 
○아테네교임.

○그의 저서는 황제 하드리아누스 에게 보낸 변증서였음

○기독교를 유대교와 이교도의 예 배와 대조하여 구별시켜 놓음
 

아리스티데스
 
2세기 초
 
아테네
 
변증서(전해지지 않음)
 
그의 저서는 황제 하드리아누스에게 보낸 변증서로 사도 바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
 

순교자 저스틴
 
100-165년경
 
팔레스틴

에베소 로마
 
제1 변증서 제2변증서

유대인트리포와의 대화

말시온이교반박서(전해지지않음)
 
○철학적인 훈련을 받음 ,

○순회 평교사로 영지주의자 말시 온을 반박하며 로고스(logos) 개 념정립을 위해 헌신함

○예언, 이적, 윤리의 근본인 기독 교에 대한 토론에 열의를 보였고 그후 로마에서 순교함
 

타티안
 
110-172
 
앗시리아

시리아 로마
 
공관복음서, 그리스인들에게 보내는 서신
 
저스틴의 제자로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르 주장함, 그는 최초로 복음서들간의 공통된 기사를 정리하였으나 말년에 영지주의에 심취되고 말았음 ,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켜 "극단적 금욕주의자"로 간주함
 

아데나고리스
 
2세기
 
아테네
 
변증서 ,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플라톤주의자로 고전적인 형태의 저술을 남김
 

데오필루스
 
181년 사망
 
안디옥
 
아우톨리쿠스 서신
 
안디옥의 주교로 이교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인 엄격한 변증가임
 

멜리토
 
190년 사망
 
사르디스
 
약 20여권의 저서(대부분 소설)
 
시르디스의 주교로

Quartodecimans(14일주의)을 지지함 , 구약성서 가운데 최초로 그리스도인 목록을 작성함
 

헤게시푸스
 
2세기
 
시리아 그리스

로마
 
연대기(전해지지 않음)
 
유대교에서 개종한 자로 초대교회의 순수성과 사도성을 증명하기 위해 각종 문헌정보를 수집하였고 모든 이단사상의 책임을 유대교에 돌림
 

 

▶순교자 저스틴

저스틴은100년경 팔레스틴의 Flavia에서 출생. 로마에서 163-167년경 순교. 그는 이방인이었으나, 출생지인 팔레스틴에서 유대교 전통에 접했고, 희랍세계를 여행하면서 스토아학파, 피타고라스학파, 플라톤학파등 희랍 철학과도 접하였다. 135년경 에베소에서 만난 그리스도인에 의해서 기독교 신앙에 귀의한다. "철학의 의미와 목적은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며, 그 실재(Wirklichkeit)를 중재하는 것이고, 이러한 인식으로 인하여 행복을 선사하는 것이다." 변증가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합리적인 사고로 대체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는 모든 철학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계시의 진리는 이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신적인 근원에 있는 것이다."(Cohortatio ad graecos, Schlu worte-B.H gglund, 21). 개종후 로마에서 활동하며 로마황제 Antonius Pius, M. Aurelius, Lucius Verus에게 변증서를 보내어 기독교를 변증했다.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Dialog mit dem Juden Tryphon)이 유명하다.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입장
 
변증가들의 답변 내용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빗나간 형태의 분파
 
유대교의 법은 본래 한시적이었기에 새 계약을 지향하는 것을 표방한 것
 

십자가에 달린 목수의 아들 예수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아님
 
구약성서는 메시야의 영광과 고난을 예언하고 있음
 

그리스도의 신성은 하나님의 일체성과 모순되는 것임
 
구약성서는 삼위일체 안에서 인간의 양면성을 나타내고 있음
 

변증가들의 유대교에 대한 반박 내용
 

●구약성서의 예언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음

●구약성서의 전형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

●예루설렘의 멸망은 유대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자 기독교에 대한 입증을 말함
 

기독교에 대한 이교(異敎)의 입장
 
변증가들의 답변 내용
 

부활의 교리는 불합리한 것임
 
복음서마다 수많은 증거가 있고 제자들에게 끼친 영향이 크며 자연계의 순환 (예를들면, 계절)에도 그 비유가 있음
 

성서는 모순투성임
 
타티안의 공관복음서처럼 모순된 내용들이 조화와 일치를 이루고 있음
 

무신론은 폭넓게 전파되고 있음
 
플라톤조차도 보이지 않는 신(神)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음
 

기독교는 범죄자들의 예배처소임
 
예수의 의도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함에 있었음
 

기독교는 흔히 발생하는 종파에 불과함
 
기독교는 모든 이들의 영생을 준비하고 있으며 모세는 이교 철학자들의 등장을 예견함
 

기독교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함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한모든 법에 순종함
 

기독교는 근친상간(近親相姦)관 만행을 저지르는 등 도덕상의 문제가 있었음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자의 정신을 본받고 있듯이 그들의 삶의 방식을 준수할 따름이었음
 

기독교는 천재로 인한 사회질서 파괴의 주범이었음
 
자연의 재해는 그릇된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
 

변증가들의 이교(異敎)에 대한 반박 내용
 

●이교 철학작들은 자신들의 주요 이념을 모세와 예언자들로부터 도용한 표절자에 불과함

●다신교는 철학의 불합리리성과 비도덕성을 특징으로 삼고 있음

●이교 철학자들은 서로들 간에는 물론 그들 자신조차도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음
 

변증가들의 기독교에 대한 옹호 내용
 

●참된 진리는 이교 철학자들이 기독교에 개종함으로써 입증되었으며 이로써 기독교의 진리 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되었음

●그리스도, 사도들, 그리고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발생된 기적들이 기독교 의 진리됨을 증거함

●수많은 시련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발전은 그 자체의 진리성을 확증하고 있음

●기독교만이 인간 존재의 참된 행복을 발견케하는 종교임
 
▶변증가들의 주요 논쟁
 

[2003년 6월]

4. 3세기 교부


이름
 
연 대
 
목회장소
 
대표저서
 
주요내용
 

이레니우스
 
2세기 후반
 
서머나

고올
 
-이교에 대한비판

-악의기원과신(神) 의 일체성에 관하여
 
폴리갑에게 공부한 그는 선교사요 변증가였으며 영지주의에 강력한 반대를 표방하였고 전천년설을 옹호하였으며 리용의 주교로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클레멘트
 
150-215년경
 
알렉산드리아안디옥, 예루살렘
 
-그리스인들에게 보내는 교훈집

 

-기질론

 

-교육론
 
철학 수업을 쌓았던 그는 성년에 이르러 개종하였으며 로고스이론을 강조하였고 성서를 은유적 해석방법으로 접근하였다

 

고전적인 그리스도인 찬양시인 "선한목자"를 저술하였다
 

터툴리안
 
160-220년경
 
카르타고
 
-이교에 대한 규정 -말시온 이교반박서 -프락세우스 이교 반박서
 
로마군대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한 그는 중년의 시기에 몬타누스파로 개종하였으며 그의 업적은 그가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시켰다는 데에 있다.
 

히폴리투스
 
170-236년경
 
로마
 
`
 
이레니우스에게서 공부한 그는 당대 로마의 주교들에게 배척받았는데 그 이유는 알레고리적인 방법으로 성서를 해석하였기 때문이었다.

후에 사르디니아지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
 
160-240년경
 
팔레스틴
 
-연대 사료집
 
오리겐에서 공부한 그는 천지창조로부터 서기 221년까지 역사적인 자료연구서를 발간하였다.
 

오리겐
 
185-254년경
 
알렉산드리아 -가이사랴
 
-6개국어 대역성서

-켈수스 이교반박

-제1원리(신학)
 
그의 아버지 레오니다스는 202년에 순교하였고 그는 클레멘트에게서 공부하였다. 203년 클레멘트 사후(死後) 교리문답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성서의 알레고리적인 해석의 주목할만한 업적을 이루었으며 극도의 수도생활을 하였고 교회내 반대세력을 피해 망명생활한 후 로마인의 손에 의해 고문 끝에 순교하였다

 
 

씨프리안
 
200-258년경
 
카르타고
 
-교회의 통일성 -실수에 대하여
 
수사학을 공부한 그는 245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247년부터 카르타고의 주교 일을 담당하였고 터툴리안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감독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박해시 배교자들의 문제에 엄격한 입장을 취하였고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시 순교하였다.
 

 

▶터툴리안 --------- 라틴교부

터툴리안은 155년과 160년 사이에 카르타고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모는 이교도였으며 그는 부패한 극장과 잔인한 검투사의 경기가 열리는 도시에서 교양있는 이교도의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는 법률가로서의 훈련을 받았는데, 이것은 후에 그의 신학 표현의 방법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사상 형태와 교회의 신학용어 전반에 걸쳐서 깊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신격을 나타나는데 있어서 삼위일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카르타고의 교회와 알렉산드리아의 교회는 서로 반대되는 경향을 나타냈다. 하나는 철학을 불신하고 기독교의 교리를 강조했으며, 다른 하나는 철학을 사랑하고 사색을 좋아하고 신학사상을 철학적 용어로 표현했다.

우리가 그의 정력과 추진력과 대담성을 생각해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의 뛰어난 변론적 재능은 기독교를 보호하는데 최대한으로 사용되었다.

그의 저술은 여러 권이 있는데 우리에게 전해오는 30여 편의 논문 외에도 여러 작품들이 있었다. 197년에 쓴 그의 변증서(Apology)는 아마 그때까지의 글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법률가로서 그는 다른 기독교 변증가들이 결코 다루지 못했던 결정적인 영향력이 있는 논지들을 발표했다.

매우 널리 알려졌으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책은 그의 취득시효론(De Praescriptione)이었다. 여기서 그는 전통은 성경과 일치해야하며 결국 그것은 성경과 동등하다는 잘못된 주장을 제기했으며, 또한 이 주제에 관한 이레니우스의 관점을 발전시켰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로마 카톨릭의 권위 및 전통 교리가 완전하게 발전되어 갔다.

 

▶키프리안 -------- 라틴교부

그는 주후 200년 경 교양있고 부유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46세 되던 해 그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는 실천적 신앙으로 세례를 받은지 2년후에 장로가 되었으며 곧바로 그는 대중의 환호를 받아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최근에 개종한 사람이 대중에 의해 감독으로 선출된 사건은 장로가 된 지 오래 된 사람들에게 쓰라린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분파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교회사에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1. 감독의 위치를 높이는 그의 줄기찬 주장

이것은 그가 직면했던 분파주의자들의 심각한 반대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했고 또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말한 감독에게 복종하지 않은 죄를 비난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임명하신 교회의 통치자로서의 감독의 절대적 우월성에 대해 굉장한 주장을 내놓았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이 주장은 널리 채택되어 거의 완전한 독재적인 교회정치가 이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2. 제사를 드리는 사제로서의 그의 성직자 개념

그는 기독교교회에 이러한 관념의 구체적 유형을 제시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주의 만찬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제단에 바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 변화는 중대한 것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체설의 교리와 미사 희생의 남용을 초래케하였다. 키프리안 이전에는 제단이나 제물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교회는 계속해서 이교도들에게 자랑했었다.

3. 감독 각자의 자치권에 대한 그의 강한 신념

로마의 감독 스테판은 이단들의 세례에 대하여 다른 모든 교회들이 자기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음을 알게 되자 자기를 반대한 다른 교회들이 자기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음을 알게 되자 자기를 반대한 다른 교회들 특히 카르타고와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의 복종을 요구하는독재적인 교령을 발송하였다. 키프리안은 전에 폴리갑과 이레니우스의 경우와 같이 힘을 다해 로마의 권리 침해 행위에 대항해서 싸웠다.

258년 발레리안 황제의 박해에서 그는 카르타고에서 40마일 떨어진 곳에서 목베임을 당하였다.

 

▶클레멘트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지적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클레멘트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연구하고 가르쳤으므로 그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 특유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레니우스와는 달리 목회자가 아니라 사상가요 연구자였다. 그가 학문을 탐구했던 목적은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을 돕고 이교도 지성인들에게 기독교가 절대로 불합리한 미신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클레멘트는 이교신자들에게 기독교 교리의 많은 부분이 플라토의 철학에 의해 증명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클레멘트는 이 세상에 오직 한 가지 진리만이 존재한다고 확신하였으므로 플라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진리는 다름 아닌 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바로 그 진리라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주어졌듯이 헬라인에게는 철학이 주어졌다.

저스틴과 클레멘트의 차이점은, 저스틴이 이교도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로고스의 교리를 사용했던데 반해, 클레멘트는 같은 교리를 이용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철학을 진리에 관하여 보다 개방적 태도를 취하도록 촉구했다는 점이다

 

 

클레멘트는 190년경에 유면한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교리문답학교의(Catechetical School) 교장이 되었다. 202년 셉티무스 세베루스황제 박해로 안디옥 피난, 저술과 강론으로 교회에 봉사하였으며, 213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죽었다.

터툴리안과는 달리 그는 교회는 이교의 철학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철학은 매우 가치가 높은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모든 참된 지식은 결국 사람을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인 성경에로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클레멘트는 모든 자료로부터 이 지혜와 지식의 보고를 쌓아서 그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하려고 했다. 또한 그는 영지주의의 거짓된 지식을 기독교의 진실하고 성서적인 지식으로 바꾸고자 하였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us Severus)의 혹심한 박해를 받아 202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당했으며 220년 가이사랴에서 죽었다.

 

▶오리겐 Origen(Origenes Adamantius)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185-254년경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이다. 그는 이집트엣 태어나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자랐고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학교에서 클레멘트에게서 배웠다.

202년 세베루스(Septimus Severus)의 박해때 아버지 레오니다스가 순교를 당할 때 그도 함께 순교하려 하였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후에 그는 교리문답학교의 교장이 되어 28년간 재직하였고, 그동안 금욕적이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성년 초기에 마태복음 19:12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스스로 거세한 것으로 알려진다.

215년 카라칼라 박해 때 팔레스타인으로 가자 가이사랴와 이일리아의 주교들이 그에게 설교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평신도 신분으로 설교 부탁을 받은 것에 대해 불쾌하게 여긴 알렉산드리아 주교 데메트리우스는 그를 알렉산드리아로 소환하였다. 그 뒤 그는 집필에 전념하였다. 230년에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사서 처음에 자기를 초대했던 두 주교에세 사제 임명을 받았다. 그러자 데메트리우스는 오리겐의 사제직을 폐위하고 알렉산드리아의 교장직을 박탈한 뒤 추방하였다.

그뒤 그는 가이사fi에 학교를 세웠고, 이 학교는 곧 유명해졌다. 250년 데키우스의 박해 때 체포되어 사슬에 묶여 고문을 당하였고, 쇠목걸이를 차는 고통을 당하였으며, 지하 감옥에 갇혔다. 이런식의 시죄법(試罪法)을 당하고 풀려났지만 얼마 못가서 죽었다.

오리겐은 희랍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최초의 성경 본문 비평가들 가운데 한 사람, 최초로 체계적인 신앙 진술을 제시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 그리고 최초의 성경주석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 받는다. 또한 유력한 변증가이기도 하였다.

그가 남긴 저서의 수는 유세비우스가 전하는 6,000권에서부터 밤빌리우스가 전하는 2,000권, 그리고 히에로니무스가 전하는 800권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대부분의 저서는 없어졌고, 다만 단편들로만 현존하며 최근에 일부가 발견되었다. 가장 유명한 저서들 가운데는 <헥시플라 Hexapla>와 최초의 조직신학 저서들 가운데 하나인 <원리에 대하여 De Principiis>, 주기도에 대하여 다룬 <기도에 관하여 On Prayer>, 그리고 가장 유명한 변증서인 <켈수스 논박 Against Cel년>등이 있다.

기독교교리를 철학으로 해석하고 조화시키려 하였다. 그는 성경의 신적 영감을 강하게 믿으면서도 알렉산드리아에서 매우 전형적이었던 풍유적 해석이라는 올무에 빠졌다. 그는 현대의 *유니테리언파와 비슷한 여러 이단들을 대항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를 주장하였다.

사변적인 면에 있어서 오리겐의 상상은 자유 분방하였다. 그는 교회에 의하여 공인된 신앙의 규칙에 충실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수납된 신조에 포함되지 않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충분히 행사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계속되는 창조 행위는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이다. 일련의 피조된 세계가 있었으며 영혼들도 태초부터 창조 되었다는 영혼 선재설을 주장하였다.

 

*유니테리언주의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성교리를 배척하고 교리 일치 없이도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음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종교사상체계, 성경의 권위를 이성과 체험의 기초로 강조하는 데서 발전하였다. 유니테리언 교도들은 인간 본성이 선하다고 믿고 타락, 속죄, 영벌 교리를 비판하며 오직 신적인 영감에 마음을 열 것만을 요구한다.

 

내세관은 연옥설과 지옥 유한설 주장

우주관은 플라톤의 영향을 입어 이데아세계와 물질 세계가 있음을 주장

구원관은 만인구원설 주장

 

▶이레니우스 ----- 소아시아의 신학자

이레니우스는 소아시아에 있는 서머나에서 출생했다. 폴리캅의 제자였으며, 178년 이후로 리용의 감독으로 문서활동, 목회 및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교회안에 있는 이단들을 논박하느라고 전력을 다했지만, 그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감독으로 있는 동안 리용의 모든 주민들을 믿게 하였으며, 유럽각지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논쟁에 있어서 그는 항상 성서를 자유롭게 인용하였으며 기록된 말씀 뿐만 아니라구전, 특히 구약을 많이 사용하였다. 202년경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박해때에 순교를 당했다.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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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니케아 이전의 이단종파

속사도 시대를 마지막으로 정리하면서 우리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성령의 역사와 함께 마귀의 역사도 동시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경고한 말씀대로 어떤 사람들이 교회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려는(갈1:7) 이단의 가르침을 우리는 교회사를 통하여 다시금 살피고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얼마나 말씀으로 철저하게 무장하여야 할지를 스스로 생각해 보도록 하자.

먼저 속사도시대의 대표적 이단을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단
 
지도자
 
역사적 사실
 
가르침의 특징
 

에비온파

(엘케파, 만데파
 
 
 
1세기 후반 팔레스틴 지방에서 발생한 후 소아시아에 전파되었고 대부분 유대인계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었으며 히브리적인 마태복음을 중시하였다
 
구원에 필요한 부분인 모세율법의 보편성을 가르쳤으며 바울에 대한 반감을 지니며 예수는 메시야이지만 단지 세례시 성령이 임한 인간일 뿐이라 하였다.

특히 천년왕국의 임박함을 기대한다
 

노스틱파(영지주의
 
마술사 시몬

(1세기)

케린투스

(1세기 말엽)

바실리데스

(2세기 초엽)

사투르니누스

(2세기 초엽)

말시온

(160년경 사망)

발렌티누스

(160년경 사망)

타티안

(110-172)
 
특히 그리스철학인 플라톤철학에 기초하여 동방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일반대중에 대한 포교는 미흡했고 교회지도자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제국 전체에 걸쳐 다양한 종교운동형태를 보여주었으며 이들의 가르침 때문에 교회는 신앙과 신약성서 정경화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교회는 진리의 보고(寶庫)로서 사도의 계승원칙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들은 독특하고도 탁월한 "영지"(gnosis)를 지닌 자로서 신성(神性)이 어떤 "영적인"개인들의 몸 안에 주입되었다고 믿는다. 물질적인 것은 악으로 규정하며 영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철저한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Pleroma). 따라서 성(性)과 결혼에 대한 극단적인 금욕주의 현태를 일반적으로 취하여 유대교와 구약성서를 거부하며 성서를 알레고리(은유)적으로 해석하고 세계는 조물주(=여호와)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그리스도의 육체는 한갖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믿는다
 

몬타누스파
 
몬타누스(2세기)

브리스길라(2세기)

막시말라(2세기)

터툴리안

(160-220년경
 
브루기아 지방에서 발생하여 후에 로마와 북아프리카에 널리 성행하였다
 
금욕적이며 천년왕국을 고대하였고 정통 기독교 교리에 비교적 충실하였으나 그들 자신을 성령의 대변자로 간주하며 예언자적인 계시를 믿고 방언을 하며 신자들의 만인사제직을 주장하였고 어떤 류의 오락 및 여흥도 생활 속에서 배격했었으며 오로지 순교자의 길을 추구하였다
 

마니교파
 
마니(215-277)
 
페르시아에서 발생, 배화교의 영향으로 성장하였고 마니는 그의 육체를 벗고 환생했으며 그의 시체는 페르시아 거리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어거스틴이 젊은 시절 심취한 바 있으며 후대 바울학파, 보고밀파, 카타리파, 알비겐파와 유사한 성격을 지녔었다.

엄격한 계급조직에 의해 형성되었다
 
창조의 이원론적(빛과 어두움) 견해를 지니며 그리스도는 빛으로, 사단은 어둠으로 묘사한다.

이들에 의하면 사도들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 것이며 마니가 올바른 가르침을 주도록 계시받은 자이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허구에 불과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추종세력들은 극도의 금욕생활을 표방하였다
 

 

1)영지주의

(1)영지주의(Gnosticism)란 무엇인가?

영지주의 종파는 1세기 말부터 2세기에 걸쳐 지중해 동해안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영지주의란 헬라어 "지식"을 의미하는 '그노시스' 에서 온 말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지식을 높여 신앙 위에 두었다. 그들은 헬라의 철학과 동양의 세계관과 기독교 교리를 절충하여 하나의 혼합적 종교 철학을 세우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의 중요한 문제는 우주의 기원, 죄의 문제, 죄악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인 분석이었다. 또한 신앙을 경시하고 당시 유행했던 신 풀라톤주의를 바탕으로 기독교의 종교적 명제들을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여러 가지 사상을 혼합한 것으로 지역과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원 맥은 동일하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시몬도 초기 영지주의자로 보이며, 이미 요한 당시에 에베소의 세린더스라는 영지주의 거짓 교사가 출현하여 교회를 크게 어지럽혔다. 계시록의 니골라당은 이런 영지주의의 한 무리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전통적으로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인 안디옥 사람 니골라(행 6:5)에게 돌린다.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가 오류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요한 1, 2, 3서를 기록하였다.

 

(2)영지주의의 주장과 특성

▶세상은 최고의 신이 지은 것이 아니라, 낮은 신(the Demiurgus)인 구약 성경의 하나님이 창조했다. 또한 물질계와 영계로 나누고 물질을 죄악시 하고 창조를 부인했다.

▶낮은 신의 계시인 구약 성경은 자신들이 최고의 신에게서 받은 계시인 신령한 지식(靈知, gnosis)보다 낮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약의 하나님 아들인 그리스도의 사도들보다 최고 신의 사도인 자신들이 더욱 월등하다고 주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는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요, 그의 몸은 보통 육신이었는데 침례 시에 참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메시야의 직분을 수행하다가 십자가에서 떠났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무리는 가현설(Docetism), 즉 예수는 육체로 탄생한 것이 아니요 오직 육체를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어떤 파에서는 메시야가 공적인 사역을 하는 동안 잠정적으로 육체를 빌려 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물질과 육신은 악하고 영(spirit)은 선하다. 그러므로 육체는 선하지 않기 때문에 학대하고 방종해도 좋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사상은 페르샤의 조로아스터교(拜火敎)의 이원론에서 온 것이다.

▶율법은 폐지되었으므로 이제 사람은 아무 법이나 규례 또는 규정에 얽매일 필요가 없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요 그들이 얻은 지식을 통하여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3) 신학

▶ 신론

영지주의에서 "신은 완전히 초월적인 존재로서 우주를 창조하거나 통치하거나 하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이다" (Hans Jonas, The Gnostic Religion, Boston 1963, 2. Aufl. 42). 그는 우주와 완전히 반립되며 "초월적인 신 그 자신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감추어져 있으며 자연적인 개념들에 의하여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에 관한 지식은 초자연적인 계시와 조명에 의하여 얻어진다" (42f).

▶우주론

신으로부터 하급의 신적인 존재들이 나왔다. 이들은 통치자들(Archons)이라고 불리우며 우주를 만들었고 그것을 거처로 삼는다. 우주는 이들이 거처하는 일곱 영역으로 겹을 이룬다 (바실리데스에게서는 365 하늘). 이들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을 지닌다(Iao, Sabaoth, Adonai, Elohim, El Shaddai). 아르콘들은 우주를 다스리는데 그들의 사명은 인간을 신으로부터 격리시키고 그리하여 지구를 감옥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들의 폭군적인 세계통치를 운명 (heimarmene)라고 부른다. 아르콘들의 지도자는 데미우르그 (demiurg)이다.

▶인간론

인간은 아르콘들에 의하여 감옥에 갇힐 뿐 만 아니라 그 자신에 의하여도 감옥에 갇힌다. 인간을 몸, 혼, 영이라는 세 요소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서 영은 위에서 말한 원광의 불꽃이다. 이 불꽃이 몸과 혼에게 갇혀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우선 영이 혼과 몸을 벗어나는 것이며 이어서 아르콘들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구원론

그러나 이러한 구원은 인간 스스로가 이룰 수가 없다. 신이 구원자를 보내어 인간에 대한 지식을 건네줄 때 구원이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이 이 지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미 그가 원광의 불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꽃이기에 원광의 지식을 전달받을 수가 있다. 이때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에 의하여 안다" (Gleiches wird durch Gleiches erkannt)는 것이 중요한 원칙이 된다. Corpus Hermeticum에서는 신지식을 위하여 이 원리가 사용된다. Poimandres 17에서 "原人은 생명으로, 빛으로부터 혼과 정으로 되었다. 생명으로부터는 혼으로, 빛으로부터는 정으로"라고 말한다. 이때 안트로포스는 원인 (原人)을 가리키지만, 원인의 유래에 대한 정의는 일반인에게도 적용된다. 빛과 생명은 만물의 아버지인 신 곧 누스를 가리킨다. Poimandres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신적인 본질의 씨가 있다. 인간에게 누스가 있기 때문에 神인 누스를 인식할 수가 있다. 이 사실이 CH Tract. XI 20에 아주 분명하게 언급된다: "만일에 네가 네 자신을 신과 동등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너는 신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같은 것은 같은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윤리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악한 것으로 여겨 금욕적 (Rigorsm)이거나, 방종적 (Libertinism)이 된다.

▶비판

영지주의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을 혼합주의 (Synkretismus)이다. 바빌론의 점성술, 이란의 신비주의, 유대의 용어, 그리이스의 철학 등이 혼합되어 있다. 신론, 우주론, 인간론이 보여주듯이 영지주의는 삼원론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원론을 주장). 신은 세상과도 인간과도 격리되며, 인간은 신과도 세상과도 격리되어 있다. 우주론과 인간론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세상과 인간에의 부정적인 세계관이다. 인간론에서 인간의 한 구성요소를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인간의 구원을 신격화 (Vergoettlichung)로 여기는 것에 반하여 재신화 (Wiedergoettlichung)이다. 인간의 영은 본래 신적인 존재였는데 물질세계에 갇혀있다가 지식 (Gnosis)를 가짐으로써 다시 신이 된다는 것이다. 유유상식 (類類相識) 이론에 의하여 구원자와 피구원자가 동일시된다. 인간론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윤리이다. 영지주의는 물질적인 몸을 악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것을 금욕을 통해 제어하든가 (Askeptismus) 아니면 어차피 몸은 썩어질 가치없는 것이라는 생각하에 방탕한 생활로 빠지거나 (Libertinismus) 하였다.

 

 

 

 

 

사도후 시대 (101 - 313년 )

: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 까지의 기간

제 2세기부터는 박해에 관한 문제를 다룬 기록들이 증가하며, 순교에 관한 기독교 신자들의 태도가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플리니와 트라잔 사이의 서신

111년 소 플리니는 비시니아 총독에 임명되었다.플리니는 로마 법률과 전통을 깊이 숭상하던 인물이었다. 비시니아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어서 플리니는 이들의 처리에 대해서 고민을 하였다. 플리니는 기독교인들에게 세번 개심할 기회를 준 후에 계속 고집하는 자들은 처형을 하였다.

플리니가 당면했던 문제는 과연 기독교신자들은 뚜렷한 범죄 사실이 있을 때에만 처벌받아야 하는지 , 아니면 '기독교신자'라는 사실 자체가 범죄를 구성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던 플리니는 일체의 법적 절차를 일단 중지시키고 트라잔 황제의 지시를 받기 위해 서신을 띄웠다.

황제의 답변은 간단했다. 그들에 대한 일반적인 규칙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고 밝히고 신고가 들어오면 그들을 처벌하되 배도하면 용서해 주고 , 익명의 신고는 받지 말라고 하였다. 이러한 트라잔의 정책들은 비시니아의 경계를 넘어서, 그리고 트라잔이 죽은 오랜 후에도 계속 성행되었다. 제2세기, 그리고 제3세기 일부에 이르기까지 제국 전체에 걸쳐 기독교 신자들을 솔선하여 색출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당국자들앞에 소환 되었을 때에는 이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이 제국의 공식적 정책이었다. 이는 이그나티우스의 일곱 서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서론

1)시기 - 사도 요한이 죽은 후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기 까지의 기간

2)카톨릭 교회 - 보편, 공동의 의미를 지님

3)사상의 발달

가.온갖 박해중에도 전도활동 완성

나.이 시대는 사상의 발효시대이다

다.헬라(그리이스 철학), 동방종교, 유대의 율법주의의 이입으로 사상적 혼란이 옴

라.그노시스주의, 신플라톤주의등 절충 조화의 사상이 형성

 

2.기독교의 전파

1)성장원인

성령의 역사. 전도열, 왕 상류계급의 입신,구제, 봉사와 상부상조, 인내, 고상한 도덕적 생활

 

3.박해

1)원인

가.우연한 원인

가.오해

기독교인은 부도덕하다 - 동굴속에서 남녀가 음행한다

기독교인은 불의한 자 - 자식을 먹음

나.미신

나.진정한 원인

가.사상의 부조화 (로마,기독교)

국가지상주의 -- 신본주의

나.사회생활의 부조화

사치,쾌락,오락 -- 금욕

다.로마의 정책

황제 예배 강요 -- 다신교 반대

기독교인은 군복무 안함

 

2)박해의 결과

가.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임을 확인

나.하나님의 아들임을 더 확인

다.신약 정경 촉진, 진리를 세계에 알림

라.사도,교부들의 순교로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임을 증명

마.교회와 국가의 구별을 명확히 함

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하에서의 박해

161년 황제의 자리에 오르다

그의 재위기간 초기에는 야만족들의 침략과 홍수와 전염병과 기아 자연 재해들이 그치지 않았다. 곧 신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제국에 이러한 재해를 가져다 준 인물들은 다름 아닌 기독교신자들이라느 설명이 나타나게 되었다.

과부 펠리시타스와 그의 일곱 아들의 순교기가 있다. 펠리시타스는 특별회 교회에 의해 구별된 과부였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당신에게 승리할 것이며, 나를 죽인다면 죽음을 통해서 더욱 큰 승리를 거두리라" 이에 총독은 그들을 마르쿠스에게 보냈으며 마르쿠스는 이들을 각각 다른 구역에서 처형시켰다. 저스틴 마터도 이때 죽었다.

쌍투스라는 소년은 갖은 악형 하에서도 단지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고문을 당하면 당할수록 계속 이 말만 되풀이 하였다. 이 광경과 또한 다른 이들의 용기를 지켜본 신자들 몇명이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자의 최후를 맞았다.

 

4.사상적 공격

1)루키아누스 lucianus of samosada

기독교인 생활 풍습 비방. 저서 '페레그리누스의 죽음'

2)켈수스 celsus (셀수스)

저서 '참말'로 기독교 공격. 오리게네스가 '켈수스를 반대한다'로 반박

예수는 마리아와 로마 병사사이의 사생아라고 말했다

3)신플라톤 학파

시조 - 암모니아 삭카스 ammonius saccas

중요 학자 - 플로티누스 plotinus

포르피리우스 perphyrius

 

5.교부 fathers

1)정의

가.사도들의 직계제자

나.교리의 정통성을 가진 자

다.교리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자

2)구분

가.속사도교부 apostolic fathers

나.변증가 apologists

다.헬라교부 greek fathers

라.라틴교부 latin fathers

 

6.사도교부

1)이름과 저서가 같이 전해오는 교부

가.로마의 클레멘트 clement of rome

일세기말의 로마의 유명한 장로

 

나.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ignatius

107년 맹수의 밥이 됨

이그나티우스는 순교의 자리를 향하여 가면서 일곱 개의 서신들을 남겼는데 이는 초대 기독교역사를 살펴보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록이 되고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30 - 35년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사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의 편지들을 살펴보면, 안디옥 교회내에 몇 개의 분파가 있었으며, 감독은 그가 이단적이라 생각한 교리들을 맹렬히 반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이교도들에 고발되었는지, 혹은 그를 미워하였던 분파의 기독교신자에 의해 고발 되었는지도 확실치 않는 것이다. 어쨌든 이그나티우스는 체포되고 유죄 판결을 받아 로마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그나티우스는 압송되어 가는 도중 여러 신도들을 만나 대화할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그가 구술하는 편지를 받아 쓸 비서까지도 대동할 수 있었다. 그 편지를 통해 당시 로마 전체에 걸친 기독교신자들에 대한 일반적 박해는 없었으며 단지 법원에까지 소환된 자들만 재판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이그나티우스가 기독교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라 할 수 있다.

 

이그나티우스의 일곱 편지는 이러한 면회의 결과 였다.

1.서머나에서의 집필

가.에베소 - 에베소 감독 오네시모가 보낸 사절단과의 만남

나.마그네시아 - 마그네시아 교회에서온 감독과 두 장로

다.트라리아 - 폴리비우스 감독

라.로마인에게

2.드로아에서의 집필

가.빌라델비아 - 빌라델비아교회에 보낸 글

나.서머나 - 서머나 교회에게

다.폴리캅에게 - 폴리캅에게

 

다.폴리캅 polycarp

서머나 교회 감독. 사도요한의 제자. 이그나티우스의 친구

155년 경까지도 플리니에게 준 트라잔의 지시는 아직 유효하였다. 기독교신자들을 구태어 색출하지는 않았으나 일단 고발되고 로마의 신들에 예배하기를 거부할 경우에는 반드시 처벌하였다.

재판관은 폴리캅이 황제를 두고 맹세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석방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폴리캅은 답변하기르 "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겼으나 나를 한번도 저버리신 적이 없다.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할 수 있겠는가"하고 응답하였다.

재판관이 그를 산채로 태워 죽이겠다고 하자 폴리캅은 대답하기를 재판관이 붙인 불은 순간이지만 지옥의 영원한 불길은 꺼지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라.파피아스 papias

 

2)저서만 전해지고 저자가 전해지지 않는 교부

가.헤르마스의 '목양자' - 천로역정과 비슷

나.바나바서 - 히브리서와 비슷

다.디오그레투스에게 주는 편지 - 황제를 양해시키려는 변증서

라.열두사도의 교훈 - 신자의 생활과 습관 교훈

 

7.변증가

1)대표적 변증가들

가.저스틴 justinus

저스틴은 기독교신자가 되면서 철학자의 직분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과업을 계승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 작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름 아니라 기독교와 고전적 지혜사이의 관계를 증명하고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저스틴은 기독교와 이교 철학 사이에 몇 가지 접촉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저스틴의 주장에 의하면 비록 이교도들에 의해 생성되었다 할 지라도 고전 문화 속에서 발견되는 모든 선한 것들과 진리들은 기독교에 속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 속에서 영감을 받아 곧 이어 그들의 신앙과 고대 문화 사이에 계속 다리를 놓고자 시도하는 기독교인들이 나타났다.

나.아리스티데스 aristides

다.콰드라투스 quadratus

라.타티아누스 tatianues

마.아테나고라스 atenagoras

바.멜리토 melito

2)변증의 내용

신자들이 불공평한 재판을 받는 억울한 형편을 변호

'비난'

가.기독신자는 무신론자이다 -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나.세상과 별다른 왕국을 세우려 함 - 기독교인은 세상에도 충실하다

다.부도덕한 자 - 성찬에는 세례교인만 참여, 서로근친상간한다. 아기를 먹는다

라.예수는 요술쟁이

마.황제숭배를 거부함 -

바.최후 부활을 믿는다.

 

'변증'

가.이교도들이 우상 섬기는 데 비해 신론자라고 할 수 있겠으나 사실 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

나.신자는 신앙을 위해 순교한다. 이것은 세상 왕국을 세우려 함이 아님을 증명

다.예수의 도덕적 교훈을 이용하여 도덕적 탁월함을 설명

라.예수는 신이다.

 

8.그리이스교부

1)소아시아의 신학자

이 시기는 대략 주후 171년경으로 변증가시대의 끝으로 삼는다

가.이레니우스 irenaeus 115 - 119년 출생

130년경 소아시아지방에서 출생하였다. 폴리캅의 제자

무엇보다도 목회자였다. 그는 사람들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신비스런 문제에 대해서 사색하기 보다는 그의 교인들을 기독교 생활과 신앙 속에 이끌기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역사를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일부로 보다

소아시아 신학자로 고을지방의 감독

나.힙폴리투스 hippolitus

이레니우스의 제자

2)알렉산드리아 학파 alexandria school

가.....판테누스 pantaenus

나. 클레멘스 flavius clemen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랜 여행끝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만족할 만한 스승을 만나다. 바로 판테누스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지적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클레멘트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연구하고 가르쳤으므로 그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 특유의 특징을 보여주고있다. 그는 이레니우스와는 달리 목회자가 아니라 사상가요 연구자였다. 그가 학문을 탐구했던 목적은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을 돕고 이교도 지성인들에게 기독교가 절대로 불합리한 미신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클레멘트는 이교신자들에게 기독교 교리의 많은 부분이 플라토의 철학에 의해 증명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클레멘트는 이 세상에 오직 한 가지 진리만이 존재한다고 확신하였으므로 플라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진리는 다름 아닌 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바로 그 진리라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주어졌듯이 헬라인에게는 철학이 주어졌다.

저스틴과 클레멘트의 차이점은, 저스틴이 이교도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로고스의 교리를 사용했던데 반해, 클레멘트는 같은 교리를 이용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철학을 진리에 관하여 보다 개방적 태도를 취하도록 촉구했다는 점이다

 

202년 셉티무스 세베루스황제 박해로 안디옥 피난, 저술과 강론으로 교회봉사

213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죽음

 

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

오리겐은 아직 10대 였을때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디미트리우스의 명을 받아 당시 카테쿠멘 , 즉 세례 지원자들의 훈련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일을 훌룡하게 처리함

후에 시기를 포함한 여러가지 이유로 디미트리우스와 분쟁이 생기게 되었다. 그 결과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가이사랴에 정착하게 되었다.

오리겐의 신학에 쓰는 정신은 그의 스승 클레멘트의 그것과 매우 비슷하다. 즉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유행하던 철학사조였던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

데시우스 치하에서 박해받음. 모진 감옥생활로 출옥후 죽음

185년 알렉산드리아 출생

아버지는 202년 대 박해시 순교

18세부터 클레멘트 후계로 신학교수가 됨

청년시에 수술하고 고자가 됨

명성이 높아지자 시기하여 군인들이 감시하고 그 문하생 7명이 사망

이단설을 주장한다고 추방되어 가이사랴에서 신학교교장이 됨

244년 옥중에서 사망

(신학)

기독교교리를 철학으로 해석하고 조화시키려 함

육신.정신.영이 있는 것처럼 성경에도 문의적, 도의적, 심령적 3종이 있다고함

부와 자는 하나이다. 동질이며 같은 인격이다

영혼 선재설을 주장

내세관은 연옥설과 지옥 유한설 주장

우주관은 플라톤의 영향을 입어 이데아세계와 물질 세계가 있음을 주장

계시관은 성경을 은유적으로 해석

구원관은 만인구원설 주장

<요약>

.극기 생활(천국위해 고자, 청년시절 금주)

.업적많음(기독교 학자, 변증가, 저술가)

 

9.라틴 교부

1)터툴리안 tertullian

터툴리안은 클레멘트와는 매우 다른 인물이었다.

성경은 교회에 속해져 있는 것이므로 이교도들이 성경에 대해서 논할 자격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계승은 형식적 계승뿐만 아니라 교리의 계속성도 포함된다.

몬타누스운동에 참여

 

2)시프리안 cyprian

200년에 칼타고의 부자집에서 출생

40세쯤 개종. 248년 카르타고의 교회 감독이 됨

250년 박해로 사막에 피난가서 서신으로 교회를 격려 - 방대한 서신 왕래를 통해 교인들을 계속 지도하는 것이 자기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몇년후 순교함

데시우스의 박해후 변절자들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이 때 시프리안은 지역감독들의 모임인 감독회의를 소집하여 , 동 회의에서는 실제 제사에 참여함이 없이 증명서를 구입, 혹은 취득한 신자들을 아무런 조건없이 교회로 다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실제 제사에 참여한 자들은 임종시에나 혹은 새로운 박해가 일어나 이들의 신앙의 회개의 진실성을 증명할 수 있을때에 비로소 성도의 교제를 회복시켜 주기로 했다. 물론 제사에 참여하고 그 후 회개의 정이 보여지지 않는 자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 올수 없었다.

<교회론>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

교회를 버린자는 외인이고, 속인이며 적이다

교회를 어머니라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없다.

노아 방주 밖의 사람이 멸망함 같이 교회밖의 사람은 멸망당함

교회는 단일, 즉 카톨릭교회 외에 다른 교회는 있을수 없다.- 당시는 이백년대이다. 이시대에는 개혁교회가 없었다. 여기서 카톨릭은 정통 보편교회를 말한다.

교회는 감독에 의해 세워졌으니 감독 없으면 교회도 없다.

분리한 교회나 이단자의 세례는 무효이다

교회 통일을 주장한 카톨릭 사상의 시조이다.

<요약>

교회만이 구원이 있고 감독권을 높임. 교회를 방주 등으로 표현

최초의 카톨릭 성직제도 계급 지도자

 

10. 이단과 분파들

1)유대교적 이단

가. 에비온파 ebionites

바울 교리 배척

율법 고수 - 할례금함. 안식일 지킴, 금식, 율법의 문자적 해석

기독관 - 동정녀 탄생 부인, 인성 주장, 수세시 직분 받음을 거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됨

나. 엘카이파 elkesai

예수는 아담이 다시 사람이 되어 나왔고 앞으로도 다시 육신을 입을 수 있다고 주장

할례를 행함, 안식일 지킴, 금식한다

다.....그노시스파 gnostism

말뜻 - 헬라어 '지식'에서 나옴. 지식은 초자연적 지식

당시 유행하는 점성, 마술, 페르시아의 이원적 우주론의 혼합체에 기독교 교

리를 혼합해서 일종의 종교철학을 구성하려고 한 것이다.

인간의 삼분 - 물질적 인간, 심령적 인간, 정신적 인간

가.그들의 새 교리

.구약에서 유대교적 요소를 거절할 것

.예수의 육체적 고난, 부활등의 실제를 부인

.금욕과 방랑생활을 시인

나.그들이 해결하려는 문제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에 어떻게 죄가 있고 재해가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신/구약의 관계에 관한 것

다.여기에 대한 이들의 해명

 

.신으로 유출된 아이온(영원히 존재하여 자라는 뜻)이 신에게서 멀어져 최

하급에 달함

.우주는 하급신이 창조한 것이므로 불완전한 죄가 있다

.구약성경의 신은 하급신이다

.그리스도는 최고 아이온이며 가현하였다

.구원은 물질을 구속을 해탈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감이니 소수이다

.속죄는 지식을 통해 완수한다

라.....마르시온

시노페 감독의 아들로 출생

유대교와 물질세계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의 아버지, 즉 성부이신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인 여호와

와는 다른 존재라고 했다. 바로 여호와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그는 무지 혹은 악

한 동기로서 이 세계를 만들고 그 속에 인류를 배치시켰다.

여호와는 모든 인류가운데 특별한 민족만을 선택하였던 독선적인 신이었다.그

는 또한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자들을 기억하고 반드시 복수하고야마는 모진 신이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가 여호와의 영역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마르시온은 히브리 경전을 부인하였다.만약 구약이 열등한 신의 말씀이라면

교회에서 읽어서도 안되고, 기독교 교육의 기초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마르시온

은 이러한 공백을 메꾸기 위하여 그가 진정한 기독교경전이라고 생각하였던 책들

의 목록을 작성하였다. 이 속에는 마르시온이 보기에 예수님의 메시지

를 진정 이

해했던 몇 명 안되는 인물들 가운데 하나인 바울의 서신들과 누가복음이 들어있

다. 그외의 모든 기독교 경전들은 유대인들의 관점에 의해 훼손되고 오염되었다고

간주하였다.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속에 들어있는 수 많은 구약의 인용들을 마르시

온은 후대의 삽입이라고 보았다.즉 원래의 메시지를 훼손시키기 위한 유대주의자

들의 조작이라는 것이다.

2)교회의 분파

가.....몬타누스파 montanism

교리 - 구교와 일치함 (성경은 전부 정경)

목적 - 원시 기독교의 부흥

지식보다 신앙이 우선 (그노시스 반대)

엄격한 규율. 교회의 계급주의 반대 (만민 제사장주의)

금욕, 고행을 장려. 재혼금지. 금욕주의

세례후 범죄는 무서운 것이다.

몬타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의 운동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교회는 몬타누스주의자들이 예언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을 통하여 역사의 마지막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주장때문에 이들을 반대하였다.

나.....노바티아누스파 novatianists

데카우스황제 (249 - 251)시 박해때 변절자 처리를 용납안 함

신앙을 배반한 치명적인 범죄자도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칠세기 자취를 감춤

다......도나투스파 donatism

박해시 성경을 버린 자들 용납안함

엄격한 교회의 규칙과 교인의 순결 주장

세속적 교직자 배격

감독정치.. 세례받아야 구원을 얻을수 있다

개인주의로서 편협, 완고, 광신 상태로 흘러감

3)마니고

로마제국 동방에서 3세기에 일어난 종교로서 그노시스파와 비슷한 점이 있으나

그 근원이 동방이며 서방으로 들어와서 기독교와 접목하고 기독교적 요소를 흡수

하였다.

가.교조는 마니이다

나.교리

- 인류는 악마가 광명국에 침입하므로 생겼다

- 그러므로 인생이 돌아갈 곳은 해탈이다

- 해탈하기 위해서는 금욕생활을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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