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강좌>
한국인들의 이슬람에 대한 이해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신약의 코이노니아
아랍 이슬람 국가에 적은 수효의 선교사들이 나가 있다. 그렇지만 정작 아랍 이슬람 세계를 잘 알고 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현실적으로 국내 사정상 교회와 신학교가 이슬람과 아랍을 잘 공부할 수 있는 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간혹 이슬람 강좌를 선교단체나 신학교에서 듣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이슬람 전체의 모습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혹자는 충분하다고 할지 모르나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아랍 무슬림의 세계관을 아는데 상당한 세월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국내에서 이슬람에 대한 이해 역시 아랍 국가에서 이슬람과 편차가 있다. 사실 이슬람에 대한 이해에서도 아랍 무슬림끼리 서로 시각 차가 있다 2012년 이집트에서 이슬람주의자 무함마드 무르씨 대통령이 취임한 뒤 이집트는 이슬람주의자 무슬림과 비이슬람주의자 무슬림 간에 “무엇이 이슬람이냐”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달리하였고 이슬람주의자 무슬림 형제단과 이슬람주의자 살라피 간에는 “무엇이 이슬람 율법(샤리아)이냐”를 두고 의견이 달랐다.
한국도 여전이 무엇이 이슬람이냐와 무슬림에 대한 태도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갖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이해에서 무엇이 서로 다른가?
첫째, 이슬람의 뜻은 평화peace이다. 이슬람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복종을 드러내는 것”을 가리키고 전문용어로는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내려준 종교”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이란 말에는 평화라는 의미가 없다.
둘째, 이슬람은 삶의 양식 a way of life이다. 이슬람은 법과 정치, 경제,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무슬림들이 믿는다. 그러나 실제 이슬람 국가에서 무슬림들의 삶은 이슬람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 무슬림들이 더 많다. 일부 이슬람학자들은 오늘날 무슬림들의 행태를 보면 무함마드가 기겁을 할 것이라고 했다.
셋째, 이슬람은 종교이고 국가이다. 이 부분에서는 무슬림들끼리 의견이 갈린다. 이슬람주의 무슬림은 이슬람이 종교와 국가가 포함되어 있어서 이슬람은 종합적인 제도nizām shāmil라고 한다. 그러나 비이슬람주의 무슬림은 “종교는 알라에게, 조국은 모두에게”라는 구호를 내걸어 종교와 정치를 구별 지었다.
넷째, 이슬람은 영적인 종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을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꾸란에서 성령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고 본질상 하나님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3위로서 인격을 가진 분이다. 그래서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섭리하고 운행한다. 이런 정의에 따른 성령은 꾸란과 이슬람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무슬림이 이슬람을 spiritual이라고 쓴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성령과 다른 개념이다.
실제 꾸란과 성경간의 연속성은 없다. 특히 유대인들은 무슬림들이 무효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이전의 경전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알라”라면 “알라”는 유대인들의 신은 아니라고 했다.
다섯째, 이슬람교는 인간완성의 정점이다.[1] 이슬람은 이 땅에 이슬람 국가를 세우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인간 완성에서 가장 좋은 종교는 이슬람이라고 했다.
이슬람은 알라- 무함마드를 빼놓고 성립이 되지 않는 종교이고
전 세계 무슬림들이 아랍어로 기도를 해야 하므로
세계 무슬림들은 아랍인 무함마드의 사상을 꾸란과 하디스에서 배우게 된다.
아랍어를 모르면 이슬람을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언어와 종교가 밀접하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한데 그러면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신약에서 partnership이란 말에 해당하는 키워드는 코이노니아koinonia이다. 코이노니아는 공동 참여joint participation, 교제fellowship, 커뮤니티community, 동역partnership 등으로 번역되었다. J.Y. Campbell은 “코이노스koinos로 표현된 주요 개념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참여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코이노니아는 단순히 다른 사람과 연결된다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70인역에는 코이노니아가 3번 나오는데 그 의미는 개인과 개인 간의 교제로서 수평적 관계를 가리켰으나
사도 행전 2:42 등 신약에 나오는 코이노니아는 인간과 하나님 간의 수직적 관계를 자주 나타낸다.
그 예로서 고후 6:14절의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에서 사귐은 코이노니아인데 교제(파트너십)과 동일어이다.[2]
그리고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에서는 communicate라는 말인데 “다른 사람과 가진 것을 나눈다”는 의미다.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삶과 봉사와 재산을 남과 나누는 것이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에서 코이노니아는 교제fellowship이다. 이 교제는 초대 기독교인들 간에 있었던 영적 교제이었다. 또 요한 1서에 나오는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와 공동참여와 다른 사람과 공동 참여를 가리켰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란 내적인 태도가 밖으로 나타나려면 희생이 요구된다.
그 동안 대개는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전도부터 해야 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무슬림과의 새 패러다임은 먼저 그들과 좋은 관계를 열어간다는 것이다. 아랍인들은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 혹은 좋은 이웃이 되면 서로 허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이야기도 포함되고 꾸란과 성경의 공통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대화를 전개하면 좋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가 계속 이어지면 아랍인들의 문화와 세계관에 적합한 성경의 이야기들을 미리 준비하여 두었다가 대화 상황이 적절할 때 그들과 나누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코이노니아가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전에 우리들이 무슬림과 수평적인 관계에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전도의 첩경이 된다. 신약의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인 간의 신앙 교제를 말하지만 우리와 종교가 전혀 다른 무슬림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밖으로 표현되어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 공주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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