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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권 선교 전략(2) 이슬람권 선교를 위한 제안

 

1. 이슬람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모슬렘과 이슬람은 어떻게 다른가? 이슬람은 종교이며 모슬렘은 이슬람의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모슬렘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믿는 이슬람 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이슬람에 대해서 배우는 것조차 꺼려해서는 그들에 게 복음을 전할 길이 없다. 이슬람권에서 사역하며 복음전도 하는데 직접 영향이 있는 방법 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이다. 예수님이 12살때 회당에서 대화하셨는데 대화는 그들을 진정 으로 이해하고, 나누기 위함이다. 무엇을 얘기하는지 들어야하고, 대화가 수단이 되어 그들 에게 복음을 나누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슬람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하며 이러한 지식이 없이 대화 할 경우 그들로부터 일방적인 설득만 당하게 된다. 대부분의 모슬렘들은 아주 적은 이슬람에 대한 지식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에 대한 깊은 이 해는 복음 전하는데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결국 이슬람교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그들 에 대한 막연한 편견과 오해를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이슬람세계에 대한 균형 잡힌 안목이 필요하다.


2. 코란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코란을 터부시하며 코란에 대한 지식 없이 이슬람권 선교를 계획 한다. 코란은 성경에 대해 긍정적으로 소개하는 내용이 많이 있으며, 특히 예수님에 대해서 는 더욱 그렇다. 우리가 코란을 안다면 그에 대한 지식은 코란과 성경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서 코란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인정하며 오히려 성경과 비 슷하다(코란, 수라19:16~21). 코란에는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쓰고 있다. 코란 어느 곳에도 예수님외에 메시야 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다(코란, 수라3:45). 이 한 구절 뿐 아니라 여러 구절이 있다. 또한 코란은 복음서를 인정할 뿐 아니라 그 신빙성까지 증거하고 있다(코란, 수라5:71).

 


또한 코란은 주님의 재림을 분명히 얘기하고 있다. “실로 예수의 재림은 심판이 다가옴을 예시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일러 가로되 그 시간에 대하여 의심치 말고…(코란, 수라43:61)” 예수님은 죄없음 뿐 아니라 심판자로서 나타난다.(코란, 수라19:71) 무수한 코 란의 구절들은 복음을 전하는데 유용하게 쓰인다. 실제로 필자가 만난 이란인 개종자는 영 국 신학교에서 성경과 코란을 배웠는데 “왜 모슬렘들이 코란을 읽지 않느냐?” 는 필자의 질 문에 “만일 모슬렘들이 코란을 제대로 읽는다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물론 기독교인이 된 한 사람의 의견이기는 하지만 코란을 안다는 것이 이슬람 선교에 얼마 나 도움이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3. 이슬람권 선교는 반드시 팀 사역과 연합사역 이여야 한다.

 


 성경은 단독적인 사역을 지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로써 각 지체를 관장하며, 지체는 상호 유기적으로 은사에 연관되어, 머리되신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연결되 어 있는 것이다. 모든 선교가 그러하겠지만 이슬람권 선교는 분명히 서로 연합하여 각자의 은사를 인정하며 팀을 이루어야만 한다. 선교지에서의 상호간에 비방 중상하면서 용서할 줄 모르는 약육강식의 경쟁체제는 아무리 합리적인 변명이 있다하더라도 성경적인 기준과는 상 반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탁월한 선교사였다. 그는 최초로 파송 될 때부터 동역자와 팀 사 역을 하였다. 교회 역사의 중요한 인물인 그레고리가 로마의 주교로 임명되고 영국 선교 운 동이 시작되는데 그는 AD 596년 어거스틴을 지도자로 하여 40여명의 팀이 처음으로 영국 켈트족으로 파송되어 많은 열매를 맺었다. 팀 사역은 1793년 근대 선교 아버지로 불리우는 월리웜 케리의 삶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선교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스스로 세람포스 삼총사(Serampore Trio)라고 불리는 마쉬먼(J.Marshman)과 워드(W.Ward)와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며 철저히 팀 사역의 모범을 보였다. 이슬람권 선교는 같은 교단이나 선교단체 뿐 만 아니라 서로 다른 단체와도 연합사역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팀 사역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좋은 팀은 팀 전략가, 중보 기도자, 잘 섬기는 사람, 행정가와 좋 은 일꾼들이 있어야 한다. 협력하는 팀이 아닌 개인에게 이슬람선교는 성공을 기대할 수 없 다.

 

4. 개인 전도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이슬람권에 접근해서 복음을 증거하는 방법은 그 지역과 성격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서 부 아프리카와 모리타니야에서부터 필리핀 남부까지 골고루 퍼져있는 모슬렘들은 그 조직이 다양한 만큼 복음을 전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그러나 우정전도를 통한 일대일 전도 방법은 어느 곳에나 적용되는 것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슬람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 중심 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예수님이 밤에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수가성 여인에게 복음을 전했듯이, 예수님 당시 와 같은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이기에 개인전도의 경험이 없으면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만 할 뿐 활용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개인전도 경험은 모슬렘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큰 도움 이 된다. 복음에 대한 반론과 자세 그리고 받아들이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개인 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우리 복음의 능력은 곧 십자가이며 그 십자가가 곧 선교의 동기고 출발점이여야 한다. 늘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찿을때 우리의 선교와 삶이 승리하는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 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라고 부탁한 것처럼 이슬람권에는 잘 정비된 프로젝트와 거창한 계획보다 개인전도를 필요로 하고 있고 그 개인전도는 여전히 모 슬렘들을 변화시키고 있다.

 

유해석 목사 총신대학교 졸업, 총회신학교 졸업, 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파송 선교사, 현 F.I.M.국제선교회 대표로서 영국본부 사역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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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거 스 틴

 

중세 교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어거스틴은 354년 누미디아(오늘날의 알제리아)의 타가스테(Tagaste) 에서 로마화된 베르베르(Berber) 가문의 아프리카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그는 세례 지원자였고 진지한 어머니 모니카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배웠으나 그의 세례는 그의 오랜 종교적, 철학적 순례에 의해 387년이 되어서야 순례를 그의 참회록에서 서술하였다.

그는 헬라어를 제외하고는 당대의 문학적 교육에 있어서 탁월하였고 칼타고에서 수사학을 강의하였다. 373년 키케로의 한 작품에 감동을 받아 그는 신적인 지혜를 사랑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성경의 잔인한 내용은 그에게 반감을 일으켰다. 그는 마니교의 추종자가 되었다. 마니교는 금욕주의와 그리스도를 향한 철저한 헌신을 고무시킨 이원론적 신화를 가진 종교였다. 그는 9년 동안 마니교를 고집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합리적 방법에 의해 진리를 논증하는 그 주장들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환멸을 느끼면서 어거스틴은 로마로 갔고 거기서 잠시 동안 어떤 확실한 것에 도달하기를 단념한 철학자들과 사귀었다. 그는 심지어 향락주의(Epicureanism)의 즐거움을 맛보려는 유혹도 받았다. 그러나 384년 그는 밀라노에서 제국의 수사학자로 임명을 받았고 암브로우스 주교의 영향과 신플라톤주의 사상아래 있게 되었다. 이 양자는 함께 그를 정통 신앙에서 소외시켰던 장애물의 뿌리를 침식하였다.

암브로우스로부터 그는 기독교가 웅변적일 수 있고 지적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구약성경의 어려운 이야기들이 풍유로서 취급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영적 완전성을 밝혔고 내적명상을 통한 통찰력을 추구하였다. 어거스틴은 항상 그의 마음을 빼앗았던 악의 원인이 마니교도들이 믿는 것처럼 그러한 세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의 부재에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육신과 세상”을 포기하라는 도전을 받았다. 그는 10년 이상 내연의 처와 살았으며(모니카를 기쁘게할 만한) 고상한 직분을 얻기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세상으로부터의 회심”에 대한 도전은 안토니와 빅토리누스(Victorinus)의 경우 같은 영웅적인 포기에 관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왔다.

 

결국 그가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로마서 13:13-14을 읽을 때 그 속박의 사슬을 끊어졌다.

세례에 앞서서 어거스틴은 카시키아쿰(Cassiciacum)으로 물러갔는데 그곳에서 그의 소수의 동료들은 기독교 철학자로서 그들의 훈련의 여가를 보냈다. 모니카 사후에 388년 아프리카로 돌아와서 그는 타가스테에 연구와 명상을 위한 수도원적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391년 그는 해안의 합포에서 사제직에로 강요받았고 396년에 그는 카톨릭 주교가 되었다. 여생을 보내는 동안 그는 설교자와 목회자, 성례전의 집례자, 재판관과 중재자, 자선 단체의 관재인과 조직가, 또한 카톨릭 정통 신앙의 지칠 줄 모르는 방어자요 다작의 저술가였다. 힙포의 반이교적 카톨릭 교도와 완고한 도나투스파는 급속히 그를 기독교적 신플라톤주의자의 자신 만만한 인본주의로부터 인간의 본성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보다 성경적이고 비관적인 견해에로 돌아서게 하였다. 참회록은 이러한 새 전망에서 나온 초기의 결실이었고 하나님의 도성은 보다 더 성숙한 결실이었다.

어거스틴은 그가 마니교도의 합리주의에 반대하면서 “이해하기 위하여 믿으라”는 그의 영향력 있는 원리를 발전시켰다. 그는 그 원리를 수많은 저작에서, 무엇보다도 그의 삼위일체론(The Trinity)에서 사용하였다. 도나투스파에 대항하여 그는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 즉, 신자와 불신자가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는 서로 섞여 있는 밭이라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가 성례의 최고 집례자이며 따라서 만일 합당치 않은 사람이 집례하는 경우라도 그것은 여전히 참된 성례라고 주장함으로써 도나투스파의 재세례를 철저히 반박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연합과 사라의 울 밖에 성례를 받는 자들이 남아 있는 한 그 성례는 아무런 유익도 전해주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또한 의견을 달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강제를 사랑의 교정 행위라고 정당화하였다.

약탈당한 로마로부터 피난해 온 펠라기우스파는 411년부터 어거스틴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는 켈레스티우스가 유아 세례(어거스틴은 유아세례가 평범한 관례가 되도록 도와 주었다)에 도전한 후에 그들을 공격하였다. 서방의 페라기우스파에 대한 정죄는 주로 어거스틴에 의해 주도된 아프리카의 압력의 결과로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그를 자극시켜서 부패와 죄책으로서의 타락 과 원칙에 대한 그의 교리를 더 발전시키게 했다. 또한 그들로 인해서 하나님께 돌아가는데 있어서 의지를 자유케 하는 은혜의 필요성, 예정과 “활정된 수의 택자”의 보존 같은 교리도 발전하였다.

 

어거스틴이 430년에 죽었을때 아리우스파 반달족 침입자들은 힙포를 포위하고 있었다. 붕괴되는 로마제국의 충격과 분열의 한가운데 어거스틴은 이겨 내기 어려운 악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견뎌 내야 한다고 가르쳤고 하늘의 도성의 평화를 구하라고 했다. 그는 라틴 기독교의 창조적 시대가 막을 내리는 시기에 살았고 중세와 종교개혁의 성직자들의 마음을 좌우하는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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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의 구원론


제1장 서론


  1-1 문제 제기

  현대 사회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최첨단의 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은 모든 인류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가장 뛰어난 이지적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의 관심도 최상의 지적 성찰을 하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그 무엇을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개인의 독특한 사고방식에 더욱 집착되어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이기적인 가치관에 따라 자유로이 행동하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최첨단 문명은 또 다른 면에서 인류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대중 매체를 통해서 산간 벽지 뿐만 아니라 타문화권에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다원주의적 다변화 사회이다. 또한 종교에 있어서도 다원주의 경향이 팽배하고 있으며, 특히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신사조가 기독교에 도전을 하고 있다. 즉 다원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을 추구하는 신학자들이 기독교 전통인 구원의 유일성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수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신앙인에게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된 것은 이미 신앙의 선진들이 살아왔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은 땅끝까지 복음을 선전하여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도록 구속사적인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는 일이다.

  그런데 현대 문명은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종교적인 심성을 파괴하고 있으며, 극도의 이기주의, 개인주의를 창출해 냄으로써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적지 않은 위기감을 고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사람들의 종교적 가치관마져 전자 문명에 의해서 위기를 맞고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첫째로,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중심으로 구속을 성취해야 할 인류가 현대 문명에 의해 심각한 위기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즉 미래보다는 현실에 집착되어 종교적 사색과 사고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로, 중요한 또 하나의 문제점은 현대인들에게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핵심인 구속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즉 성경을 현대인들은 하나의 좋은 양서 정도로 이해하고, 그 속에 담겨진 깊은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경험하기에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 신앙 공동체 안에 내재되어 있다. 즉 신앙 생활을 통하여 구속을 성취해야 할 신도들이 구속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의례히 신앙 생활을 하면 복을 받거나, 병을 고치거나, 사업에 성공한다는 식의 계산적인 안목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구속사적 구원의 복음이 잘못 전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 점이다. 넷째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원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 풍조에 의해서 기독교 전통이 파괴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만 구원을 얻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 이제는 모든 종교 안에도 그 나름대로 그들의 신앙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신학 풍조는 예수의 동정성, 빈 무덤, 부활 등을 부정하기에 이르렀으며, 기독교의 정통성을 송두리체 부정하는 모순을 가져왔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구속사적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논자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성서로 돌아가 성서가 말하는 구속사의 의미를 파악하고 기독교 복음의 우월성을 피력함으로써 금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올바른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고자 한다.


  1-2 연구 목적

  본 연구의 목적은 금세기의 최첨단 문명 사회를 살고 있는 인류에게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구속에 관한 이해를 바울의 로마서를 통해서 폭넓고 깊이 있게 연구함으로써,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들려지고 적용되었던 복음의 보편성, 즉 구속에 관한 개념과 구속사를 오늘의 문명 사회를 살고 있는 인류와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게 어떻게 적용하고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그 목적이 있다.


  1-3 연구 방법 및 범위

  본 연구의 방법은 현재적 종말을 살고 있는 인류와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구속에 관한 이해, 삶에 적용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는 성서를 기본 택스트로 하고, 구속에 관련된 문헌들을 통해서 다양한 신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복음주의 입장에서 그리고 자유로운 견지에서 비교, 분석, 정리하고, 논자의 견해를 구속의 현재성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연구 범위는 제1장에서는 서론으로 현대 사회와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앉고 있는 당면 문제를 제시하고, 연구 목적, 방법, 범위를 다룬다. 제2장에서는 구 속의 개념과 구속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먼저 어원적 고찰을 통해 명확한 의미를, 그리고 성서를 통해서 예수 이전의 구약; 언약을 중심으로 한 구속사적 개념을, 그리고 신약; 언약의 성취를 중심으로 초기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선포된 구속의 개념을, 그리고 신학자들의 구속(구원)에 대한 이해를, 그리고 구속사란 무엇인지를 역사와 구속사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구속사 이해에대해서 다룬다. 제3장에서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본 바울의 구속사를 죄의 선언, 칭의, 성화, 정죄 없음, 영광의 교리 순으로 깊이 있게 다룬다. 제4장에서는 실천적 측면에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에 대하여 먼저 세상에 속한 백성으로서 세상 권세에 대한 의무와 책임, 개인의 삶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루고, 다음으로 천국 시민으로서 교회 중심의 의무와 책임을 예배, 봉사, 교육, 연보 등을 다루며, 끝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다룬다. 제5장에서는 결론으로 이제까지 내용을 간략하게 먼저 요약, 비판, 그리고 제언을 함으로써 본 논고를 맺고자 한다.


제2장 구속의 개념과 구속사란?


  2-1 구속의 개념

  구속이란 무엇인가? 구속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구속의 개념부터 고찰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구속은 "성경의 주제이다. 그래서 성경을 구속의 책 이라 할 수 있다. 구속에 대한 설명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구속이란 단어는 그 자체가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이해를 못하는 말이다. 그리고 기독교 밖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설령 사용한다 해도 기독교가 말하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구속이란 말은 필요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그 개념이 달라지는데 특히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과 종교적으로 사용되는 말, 그리고 성경에서 사용하는 말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개념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어원적으로 말하는 구속의 개념을 이해하고 그리고 성경적 구속의 개념과 교회사적인 교부 및 신학자들의 구속의 개념을 고찰하고자 한다.


    2.1.1 어원

  구속의 일반 통념상 개념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비에서 도와주고 건져주는 것", 혹은 "위험에 빠져있는 사람을 구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여러 종류의 어려움과 문제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 정신적이고 각종의 사고,질병,재앙,절망에서 생명을 보호하고 구출해 주는 것 등을 의미한다.

  구속의 종교적인 개념은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구속은 여러 종교에 따라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기는 하나, 모든 종교는 어느 의미에서 일종의 "구원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구속은 영어로 Redemption이다. Redemption은  N.I.V Holy Bible 신.구약 전체에 15회(민3:49,시49:8,111:9,렘32:7,8,눅2:38,롬3:24,8:23,고전1:30,엡1:7,14,4:30,골1:14,히9:12,15) 사용되었는 데, 특히 바울 서신에서 주로 구속이란 용어가 앞도적으로 쓰여졌다. Redemption의 뜻은 "다시 사들이기, 되찾기, 약속의 이행, 구조, 구출, 몸값을 주고 빼내기, 범죄에 대한 대가, 예수의 희생에 따른 죄의 갚음, 속죄, 구원, 변제, 상환"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한 구속(救贖), 구원(Salvation)의 뜻으  로 사용되고 있다.

  구속은 히브리어로 여러 가지 단어가 있다. 즉  (名) 사63:4절에 사용 되었는데, 그 의미는 "되찾음, 저당물찾기, 상환, 회수, 보상, 이행, 면제,구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動) 구약에  21회 사용되었는 데, 그 의미는 "더럽히다, 상징적으로 신성을 더럽히다,  모독하다" 등의 뜻으로  쓰여졌다. 또한 (名) 시111:9,130:7,사50:2절에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를  살펴보면 "구별, 구원, 분리, 시간의; 간격, 장소의; 간격, 거리 분할, 구출, 구속"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특히 시49:9절에 (名)는 동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속전, 속량된 것, 속량, 구속"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 성경에서 이 구속의 개념은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의 압박으로부터의 해방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의 해방은 그들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대의 개입이었다.

  "내가 편 팔로 너를 구속하리라""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셨다." "여호와께서 너를 그 종되었던 집에서 속량 하셨다." 거듭 거듭 이러한 본문은 똑같은 형태로나 또는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Salvation 으로 신.구약 성경에 545회가 사용되었는 데, 그 중에서 신약에 쓰인 것은 163회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N.I.V Holy Bible에는 구원(Salvation)이 390회 쓰였는데, 그 중에 신약에는 40회나 사용되었다. 또한 구약 성경에서 히브리어로 가장 중요한 단어를 어근으로 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 파생어와 함께 353회나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지니고 있는 뜻은 "자유, 해방, 번영, 구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희랍어로 구속은 (名) 로 롬3:24,8:23절에 쓰였는데, 이는 "구속 행위, 벗어남, 속전의 지불에 의해 해방을 가지게 되다, 또  기독교에서 구원, 해방, 구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피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불법, 죄와 사망의 법에서 풀어 놓아 주신 것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어원적인 고찰을 통하여 구속의 개념을 살펴보면서 구속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구속은 우리를 대신하여 속량해 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어원적 개념을 넘어 언약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구약의 구속 개념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2.1.2 구약; 언약을 중심으로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림자와 같은 역할을 해 왔다. 다시 말해서 구속의 완성인 메시야에게 초점이 마추어져 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연결되고 있다. 논자는 바로 이런점에서 구약 성경을 이스라엘의 선택된 백성의 역사에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초점을 두고 구속사적인 견지에서 구약 성경에 약속된 언약을 중심으로 구약에 흐르고 있는 구속의 개념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언약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을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들과 언약 관계를 자주 맺으셨는데, 그 예로는 노아(창6:18), 아브라함(창15:18), 이스라엘(출24:8), 다윗(시89:3)과의 언약 수립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새로운" 언약(렘31:31)이 성취될 날을 예언했으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최후의 만찬을 언약적인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눅22:20).

  그리고 O.Palmer Robertson은 언약이란 "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 관계를 수립할 때 주권적으로 삶과 죽음의 약정을 세운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은 피로 맺은 약정, 또는 주권적으로 이루어지는 삶과 죽음의 약정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구약에서의 구속의 개념은 주로 물질적인 구출 또는 구체적인 구출을 말한다. 즉 구속은 개인이나 백성이 처해 있는 환경속에서 영위하는 생활과 관계가 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재난이나 곤긍이나 환난이나 대적이나 질병이나 사망의 위험이 있는 형편 가운데서 벗어나 안전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구약에서의 구속은 신약과 달리 죄로부터 구원이라는 의미가 매우 약하다.

  그러나 죄로부터 구속을 받는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속의 본질적 차원은 근본적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인류는 첫 사람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죽음을 선사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첫 인류에게 인애를 베풀어 주셨다. 죄의 결과로 부끄러워 수치를 가리기 위해 나뭇잎을 사용한 인류에게 언약의 상징인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부끄러움을 가리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시고, 타락한 인류와 첫 번째 언약을 맺으신다. 인류의 가장 비극적인 상태가 창3장 1절로 24절까지에 잘 묘사되어 있다. 창3장15절은 인류에게 소망을 주고 그리고 구약에 전반적인 메시야적 약속에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두 번째 언약은 인류가 온갖 죄악으로 가득차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된 상황에서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신다. 노아는 순종의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를 건조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에 약 일년 동안 임하였으며 노아는 방주에 갇혀 있었다. 죄로 가득찬 인류를 멸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었다. 당시 심판의 척도는 국지적인지, 세계적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방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인간은 새로워진 세상에서 새로운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그리고 노아와의 언약은 모든 혈육 있는 자와의 언약으로 매우 일반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단지 자연적인 축복이므로 흔히 자연의 언약 또는 일반 은총의 언약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홍수 이후의 인류의 문명은 인종적으로 언어적으로 하나의 단일체였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없는 어느 기간 동안 한 지역에 머물러 있었으며(창11:1-9), 이 문명은 희생 제물로부터 시작된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노아와 그 후손에게 항구적인 무지게 언약을 맺으신다. 그리고 인류에게 온 땅에 편만할 것을 축복한다.

  그러므로 노아 와의 언약은 창조 언약과 구속 언약의 면밀한 상호관계 즉 창조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구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연합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의 특이성과 언약 관계에서 가족을 말하고, 보편적인 면과 언약의 은혜로운 특징을 강조하면서 보존하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제 세 번째 언약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으신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상대는 먼저 이스라엘 민족이다. 하나님은 족장들을 불러 그와 언약 맺음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여호와 자신이 족장들 곁에 나타나셨다는 것인데, 후에 신의 현현(顯現)으로 칭하였다(창18:1).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의 실재는 그의 언약의 말씀과 위로와 지시의 중요성과 신빙성을 뒷받침하였다. 그리고 세 사람의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가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였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언약의 형식적인 확립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언약은 구약의 특수한 통치의 시작인데 이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만 국한한다. 그리고 신앙은 뚜렷하게 언약의 필연적인 요구로 나타나며, 할례는 언약의 백성이 되는 증표로 행하여진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번성하며, 애굽의 종이 되어 430년 동안 종살이 한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의 백성들이 부르짓는 고통을 들으시고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애굽으로부터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통해 장자의 재앙으로부터 구속하여 출애굽 하게 한다.

  그리고 40년 광야 길에서 네 번째 언약을 하나님은 모세와 시내산에서 맺으신다. 이 언약은 여호와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로 시작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신4:37, 7:7-9, 10:15절외 여러 곳).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던 사람들에게 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여호와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시다(출34:6)"는 진리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국가적으로 형성시킨 후로,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돌보고 도우시며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구원의 하나님이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구원에 이르는 자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성막 또는 성소를 중심으로 생활하였으며, 시내산에서 받은 제사법을 따라 제물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속량받는 의식을 행하였다. 제사법에는 크게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소제가 있으며,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였고, 삼대 절기로 칠칠절, 초막절, 속죄일을 지켰으며, 율법은 이스라엘을 하나의 행동 방식으로 이끌어 주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이스라엘이 주변의 이방 문화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언약 국가라는 구별을 짓게 했다.

  이처럼 모세 언약을 신학적 배경에서 보면 세 가지 면을 강조할 수 있다. 먼저 율법 언약은 하나님의 구속 목적의 전체와 유기적 기능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즉 구속역사 전체에 걸쳐 율법이 존재했음을 인식해야 한다. 법은 모세 이전에도, 이후에도 중요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모세 언약은 하나님의 구속 목적에 있어서 전체와 점진적으로 관련된다. 즉 하나님의 뜻이 점진적으로 전개된 하나님의 율법 계시의 특징은 각 시대에 하나님의 진리가 점점 더 명백해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새 언약의 법의 특징은 내부적 성격에 있다.

  인류를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구약에서는 다섯 번째 언약으로 하나님과 다윗과 맺은 왕국의 언약이다. 언약의 관점에서 다윗 언약의 수립은 그리스도 자신이 실제로 나타나기 이전의 구속 역사에서 최고의 완성적인 면을 나타낸다. 다윗 왕권은 새 기원을 끌어들였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왕권을 전형적으로 예언한다. 그리고 다윗 언약의 수립에서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 사이에 세워진 관계는 메시야가 올 때 완성된다. 그리고 다윗 언약들의 규정들은 두 가지 약속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한 가지는 다윗의 계열에 관한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예루살렘 땅에 관한 것이다. 백성을 구원하는 데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다윗의 계열과 예루살렘의 왕권, 이 두 가지에 모이게 된다. 그리고 다윗의 나라는 영원하리라는 선포가 여섯 차례에 걸쳐 사무엘하7:13,16,24,25,26,29절에 나타난다. 다윗은 이와 동일한 언약을 삼하23:5절에서 회고하여 그것을 "영원한 언약" 이라 하였다. 그리고 시89:28-37절에서 또한 이 영원한 언약의 불변성에 대하여 말한다. 그것은 영원하며, 하늘의 날과 같으며, 해와 같고, 궁창의 확실한 증인 달 같이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조건성에 대한 문제는 남아 있다. 여기서는 무조건적이니 조건적이니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충분한 통찰은 구약 성경 자체에 나타난 다윗과 그 후손의 왕권을 검토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의 진정한 성경적 통찰이 이루어지려면 이스라엘 왕권과 하나님 왕권의 실제적인 통일성을 인식해야 한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다윗 계약의 중심이 되는 두 가지 양상은 이스라엘 왕권과 하나님 왕권을 곧바로 연결한다. 다윗 혈통과 예루살렘 지역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과 상호 관계한다.

  이제 우리는 이상의 다섯 개의 언약 뭉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는 개념들을 살펴보았다. 구속이란 말은 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구원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고, 구원이란 모든 종류의 "악한 운명과 국가적인 불운""역병, 사망과 공포, 사자의 입"또는 전쟁과 악한자 환란 죄 그리고 모든 종류의 재난으로부터 놓임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속이란 말은 가족법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써 환란에 빠진 친척을 구원하는 책임있는 말로써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속해 낸 분 이라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시며, 온 인류의 구속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구조적인 통일성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의 언약에서 잘 나타난다. 먼저는 역사 경험에서 언약 수립의 내용이 통일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언약 아래서의 백성들의 삶의 역사에 통일성이 있다.

그리고 혈통적인 민족적 사역에서 통일성을 찾아 볼 수 있으며, 새 언약을 연합시키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 의해 약속된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앞선 사역과 무관한, 구별된 언약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새 언약은 먼저 수립된 언약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이다. 창조 당시 세워진 언약과 하나님의 구속 언약과의 관계가 문제시 되기는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로써 창조주에 대한 의무를 가지는 것으로 존재해 왔다. 이처럼 창조자에 대한 피조물의 계속적인 관계를 볼 때 인간에 대한 최초의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언약적인 구성은 놀라운 통일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아담부터 그리스도까지 언약적 구속 사역의 통일성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구속사를 나타내 준다.


    2.1.3 신약;언약의 성취를 중심으로

  이제 예언자들이 예언한 새 언약 즉 완성된 언약을 신약 성경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계시는 근본적으로 일치되며 서로 구속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진리를 수납하시고 이것을 모든 교훈의 전제로 삼으셨다. 구약의 어떤 진리는 신약에서 성취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며 신약의 어떤 진리는 구약의 어떤 진리를 더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신약의 진리는 구약에 예언된 진리를 선행적(先行的)인 진리에 비하여 생각할 때에 신약에서 성취되거나 혹은 더 풍부하게 하는 관계를 가짐이 분명하다. 구약의 교리적 진리가 신약에 성취된 것은 구속의 대진리를 생각할 때에 더욱 명백하다.

  구약의 구속 경험은 언약 관계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율법을 순종하는 것도 언약의 관계와 분리할 수 없다. 이 언약의 관계는 사람의 죄와 허물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신자들은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마음의 평화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구약의 구속의 경험은 성질상 선행적이며 예상적인 것이다. 장래의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고 성령으로 인하여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구주를 바라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은 신약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중대한 의의를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은 그의 인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으심에 더욱 관계된다.

  신약 성경에서 구원을 나타내는 단어는 주로 헬라어 동사(구원하다)와 명사 (구원)인데 약150회 이상(동사가 106회, 명사가 45회)쓰였다.

      는 육체적인 의미에서의 구원뿐만 아니라 영원한 의미에서의 구원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는 육체의 질병(마9:27,눅8:36)과 위험(마8:25,14:30), 미혹(눅19:10), 죄와 분노(롬5:9)로부터의 구원을 뜻한다. 특히 이 말은 종말론적 의미를 함의하는데, 그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에 비로서 실현될 것이다(롬13:11,고전5:5,히9:28).

  이상에서 본 것처럼 신약에서 구원 용어는 매우 다의적으로 사용되었다. 곧 병, 자연의 위험, 귀신의 압박, 죽음 등에서의 해방, 치유, 구조, 구출, 해방을 의미하며 또한 죄와 멸망으로부터 영적 구원을 뜻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제시하는 구원은 주로 죄로부터, 그리고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징벌로부터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었다.그리고 구약에서의 구속의 경험은 민족이라는 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약의 구원은 개개인이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에서의 복음의 선포는 개인의 영혼을 대상으로 하며, 복음을 받아 들이면 사회적 민족적 상황과 관계 없이 개인적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게 된다. 이런 점에서 역시 역사적이다. 그리고 신약의 성도들은 종말적인 구원을 지향하고 대망한다. 그리고 이 구원의 역사는 구약에서, 신약에서 모두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시대에 구원은 오직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게 된다. 즉 구약의 백성들이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믿음으로 희미한 구원을 받았다면, 오늘날의 성도들은 계시의 빛 아래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신약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신 업적과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예수께서 강조한 것은 하나님 중심의 생활이다. 산상수훈 역시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교훈은 하나님 중심의 생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랑으로 충만한 생활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인간의 구속을 바탕으로하여 전개된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하여 예언의 말씀의 성취로 이 땅에 오셨고 죄인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하늘나라의 축복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교훈을 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민족이나 집단이 아니라 개인을 중심으로 한 구속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중심 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특별한 의미를 강조한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구속 사회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영역이다. 구속 사회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를 말한다.

  구원 사건 안에 도래하는 통치자는 사랑하는 아버지로써 현재속으로 들어온다. 예수에게는 모든 윤리적 요청 안에 언제나 하나님 중심이 된다. 예수의 윤리는 구원 시대의 윤리적 혹은 새로운 언약의 윤리로 적절하게 표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구속사적인 힘은 예수의 인격 안에 시작되고 그의 완성을 기대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대한 신앙적인 승인에 달려 있다.

  새 언약의 수립은 그리스도께서 저주의 희생 제물로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쪼개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복음서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수립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검토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잔을 주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한다. 바로 예수께서 피를 흘리는 것은 구약에서의 희생 제물의 언어를 반영하여 언약의 저주가 대속물 위에 얹져지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을 죄사함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는 언약의 저주로부터 구원을 마련하기 위해 그의 피를 흘리셨다.

  그리고 누가복음서는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는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언급 함으로써 더 깊은 차원을 나타낸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피의 이런 이중적 의미는 구원의 언약이 처음 세워질 때 아담에게 하신 하나님 말씀의 이중적인 역할을 반영한다.

  그리고 구약 성경의 상징이 신약 성경에서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과 맺은 상징적 표징이 신약 성경에서 성취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의식이다. 영광스러운 새 언약이 시작되면서 옛 언약들이 쓸모 없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율법 아래 동정녀 탄생을 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죄를 몰랐다. 그러나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그는 정결하게 하는 규정된 예식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는 할례를 받고 후에는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그리고 그는 천국 복음을 선포했으며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선험적으로 사시며 증언하였다. 그리고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 동안 약속된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을 주었다. 바로 새 언약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며, 그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다. 인류의 시조 아담이 죄로 말미암아 죽음을 가져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인류에게 언약의 성취자로써 선물로 주신 것이다.

  보른캄은 " 예수가 그의 말과 행동에서 이미 일어난 신의 나라의 시작을 선포하는 반면 부활절 이후의 소식에서는 그의 죽음과 부활, 승천에서 세대의 전환과 구원의 개시, 신의 도래와 지배가 이미 사건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자의 경험은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며, 신자가 죽어서 다시 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  

  이제까지의 내용을 통하여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개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결국 신.구약성경의 구속의 교리는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언약적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으며, 완성된 것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육체, 정신, 생활, 사회, 그리고 영혼 등 인생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특히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 영역의 구원은 구체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 형벌적 사망으로부터의 구원, 영혼의 구원, 장차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서의 구원 등이다. 따라서 성경적 의미의 구원 곧 기독교적 구원이란 죄로 인하여 멸망할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통하여 죄의 사함을 받고, 죽은 영혼이 살림을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우고, 심판과 형벌에서 모면되고, 영생을 얻고, 장차 천국의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본질적인 의미에서 구속이며 참 구원이라 할 것이다.


   2.1.4 신학자들의 구속(구원) 이해 

앞에서 논자는 구속의 개념에 대하여 어원적인 접근을 통해서 그리고 성경적인 접근을 통해서, 깊이 있게 다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구속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기에는 충분할 만큼 구속에 대한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면 신학자들은 구속에 대하여 어떻게 그 개념을 파악하고 이해하며 주장하는지에 대하여 고찰함으로써 구속에 대한 개념을 한층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한다.

  Pelagius는 하나님의 창조 정신을 강조하고 인간의 타락 및 죄를 가볍게 본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했으며, 인간은 이 자유를 통해서 선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펠라기우스는 타락한 후에도 원죄는 문제되지 않으며 자범죄도 인간에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남아 있으며, 아담의 범죄나 마귀까지도 이 능력을 파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전 인류가 정죄되었다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공정하기 때문에 아담의 죄는 결코 인류의 죄악이 될 수 없고 또한 아담의 죄로 인해서 그 후손들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그리고 아담의 타락은 그의 후손의 영혼과 몸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것은 타락 후에도 인간의 본성과 능력이 계속되어지는 한 태초의 아담과 같이 자유로이 善惡을 택할 수 있다.펠라기우스는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죽음이 죄의 형벌이 아니라 아담이 죽을 운명으로 창조되었고,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당연한 귀결이라고 한다.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축소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인간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구원은 율법과 복음이 없이 얻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것들은 구원을 얻는데 크게 도움이 되며 그리스도는 구원을 얻은 좋은 모범을 인간에게 보여주었을 뿐이라고 한다.

  Augustinus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아담이 타락한 후에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악에 대해서만 자유롭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이 후손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아담의 타락으로 그의 후손들이 전체적으로 침해를 보았으므로 인간에게 완전한 의지의 자유란 더 이상 지닐 수 없게 된 것이다.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아담으로부터 유전되는 원죄를 주장한다. 그래서 원죄의 결과로 인간은 저주의 덩어리로 전락했으며, 사망과 무지와 현세욕에 얽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이 유실되어 자신에게 열려 있는 모든 선택도 결국 죄가 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불가항력적인 은총을 베푸셨다.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선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총이 일단 인간에게 주어지면 은총이 의지 안에서 활동하여 의지가 선을 이루도록 움직인다.

  또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인간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과 더불어 구원한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의지와 일치하게 응답하여 행동하도록 만들어 준다.그리고 어거스틴은 이런 은총은 세례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하였으며, 유아도 세례를 통해 죄책이 제거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은혜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죽는 날까지 신앙을 신실하게 지켜 나갈 때 최후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고하였다. 그것은 은총으로 주어진 견인의 선물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은총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하였다.즉 선택된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서 저주받는 무리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Vitalis는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배격하고 어거스틴의 이론을 옹호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이론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어거스틴에게 인간이 행하는 모든 선행은 하나님의 은총이지만, 구원을 받는 첫 걸음 즉 은총을 받아들이는 행위-신앙의 시작-은 순전히 인간의 것으로 하나님도 이것을 간섭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하여 은총이 인간의 공로와 관계없이 주어진다고 하는 어거스틴의 이론과 의견을 달리한다. 이 개념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후대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Thomas Aquinas는 아담의 범죄로 인간이 부패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원의를 잃어버렸으며, 인간의 자체 힘만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타락한 인간성의 희복은 하나님의 거져주시고 공로 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 점은 어거스틴과 같다. 이 은혜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은 최초의 은사를 희복하고 죄사함을 받고 선을 행할 수 있게 된다. 토마스에 의하면 이 은혜는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 인간의 영혼속에 창조된 사랑이며 참으로 인간적인 자비의 기질 혹은 습성이다. 그리고 토마스는 구원의 출발점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들고 있으나 이는 보편적인 것이고 성례전을 통해 얻는 사랑의 습성을 시행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영생을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사랑의 활동에 의하여 형성된 믿음이고, 이 믿음이 없으면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토마스는 세례 이후에 지은 죄에 대해서 고해성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제의 사죄를 통해 고백하는 자에게 죄에 마땅한 죄과와 영원한 형벌을 사하지만 어떤 잠정적인 형별이나 보속은 죄의 결과로 고백자에게 계속 남는다. 그리스도의 대표자인 사제가 고백자의 통회, 고백, 보속을 기꺼이 치르려는 마음을 증거로하여 사죄를 선언해야 죄사함을 받고 사죄의 용서가 없이는 세례후 치명적인 죄를 지은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중세의 면죄부는 이 잠정적 형벌의 일부 혹은 전부를 없애 주는 보속행위로 성행했던 것이다.

  John Duns Scotus는 구원이 오직 개인들과 그들의 공로에 대한 자유로우신 용납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들의 영혼에 어떤 자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하여 토마스의 교리를 반대한다. 스코투스는 계시를 통하여 알려진 하나님의 작정하신 의지에 따라 교회의 성례 활동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그들 자신의 구원에 충분히 협력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스코투스에 따르면 영원전부터 선택된 자들은 한 번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입으면 계속하여 참되고 가치있는 선행을 수행하고 따라서 영원한 구원을 보상 받게 된다.

  William Ockam은 인간은 그 자신의 자연적인 능력이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하여 도덕적으로 선행을 할 수 있는데, 이 선행은 적합한 공로로서 하나님의 은총의 주입을 일으키고 하나님은 다시 이 공로를 거룩하게 하는 은총으로 보상해 주셔서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공로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로 선택이 조건지워졌다고 하였다. 즉 예정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John Calvin은 스콜라 철학자들을 비난하면서 그들은 회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회개를 마음의 통회와 입술의 고백과 행위의 보속으로 나누어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가르쳤다고 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죄사함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므로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칼빈은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죄에 대한 진정한 보속을 제공하며 양심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고 한다. 그리스도 이 외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 만한 다른 보속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시켜 주시는 영원한 대언자이시며,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는 영원한 화목 제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인간의 공로나 보속에 의한 구원을 부인했고, 중세 캐돌릭교회의 면죄부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면죄부가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구원의 진정한 길을 벗어나게 하려는 악마적 간계라고 혹평했다. 그리고 연옥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들며, 하나님의 자비에 참을 수 없는 경멸을 가하며, 우리의 신앙을 뒤집으며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지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이 칭의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것이며, 우리의 행위의 어떤 공로도 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하여 공로에 의해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이전의 모든 학설을 부인한다. 인간의 마음은 불결하기 때문에 인가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이 볼 때 근원부터 부패된 것이다. 인간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을 수 있으며, 그 의를 덧입고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서 나타날 때에 구원이 가능하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영원한 선택 교리를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사망을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이 예정을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은총은 선택된 제한된 소수만이 받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오캄의 주장과는 달리 선택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공로를 미리 아시고 그것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칼빈은 세례를 우리가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축복에 참여하는 표징이지, 은혜의 수단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세례는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되고 용서되고 소멸되어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기억되거나 그 때문에 우리가 고발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하는 인을 친 문서와 같다.

  Jacobus  Arminius는 예정 교리를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는 타락전 예정론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들었다고 비난하고, 하나님은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죄로부터의 구속주와 구원자로 임명하시고 신자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으로 예정되게 하셨다고 가르쳤다. 개개인의 예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느냐 거부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 안에서 견인 할 것을 미리 아신자들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지를 예정의 기초로 본 것이다. 알미니우스는 인간의 선택에 예지를 두었다. 그러나 믿는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지 공로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은총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도덕적 에너지라고 하였고, 수동적인 사람에게 부과되는 하나님의 의지적 독단적인 강요가 아니라고 하였다.    

  John Wesley는 인간의 완전 타락을 주장하는 점에서 어거스틴이나 칼빈과 같다. 그러나 웨슬레는 타락한 인간이 어느 시점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부분적으로 회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는가? 타락한 인가는 아담 이후로 전혀 선행을 할 수 없었는가? 인간의 양심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는 알미니우스의 선재 은총 개념을 발전시켜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분적으로 회복시켜 주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완전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선을 행할 수도 없으나, 아담에게 하나님이 여인의 후손을 통해 구원의 은총을 약속하셨고, 그 은총으로 인하여 인간이 광명의 세계를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웨슬레는 선재 은총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인간이 응답하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구원과 영원한 죽음으로 갈라지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응답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한 것이라 했다. 따라서 인간은 선재 은총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점에서 칼빈과 같다. 그러나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에 의한 믿음에 반해, 웨슬레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해 인간이 응답함으로써 믿음을 가지게 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은총이 주어지는 방법에 대해서 웨슬레는 선재적 은총의 경우 타락 직후에 주어졌고, 구속의 은총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에 주어진다. 유아의 경우는 선재 은총으로 태어날 때 원죄가 사해지며, 세례로 의롭게 된다. 그러나 자의지로 죄를 지은 사람은 회개를 통해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 즉 칭의와 동시에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세례를 받았다고 모두가 거듭난 것은 아니라고하여 실제적인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한다. 그리고 세례 후에 자범죄에 대해서 웨슬레는 성결 교리를 주장한다. 웨슬레는 거듭남에 의해 성화가 시작되고 점진적인 성결 과정을 통하여 영화로 성화가 완성된다고 한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도 죄성이 남아 있으므로 거듭 죄를 짓게 되나 회개와 내적인 체험을 통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죄성을 깨끗이 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성화의 결과는 사랑과 봉사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웨슬레는 하나님의 선행 은총으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 해도 만일 계속해서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하면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함으로써 성결의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Karl Barth는 기독론 전개에 있어서 "만인구원론"적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현대 신학에 만인구원론적 경향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르트 자신은 어느 곳에서도 보편적 구원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구원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로 구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모든 사람들은 버림받고 동시에 구원받은 자로 간주한다. 모든 사람은 유일한 선택자인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선택되었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바르트의 견해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결론을 피하지 못한다.

  Rudolf Bultmann은 비신화화의 신학으로 유명하다. 그는 실존주의적 구원 해석을 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 있는 영원한 긴장속에 존재하며, 항상 구체적 자연 세계에 사로잡혀 그 자신의 개성을 상실하여 버리든지 아니면 모든 외적인 안전을 포기하고 미래를 향하여 용감히 투신함으로 참사람다운 존재가 되든지 결단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죄의 본질이며, 육신에 속한 삶의 결과는 불안뿐이다. 고로 인간은 이런 불안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인간 스스로는 여기서 해방될 수 없다. 다만 인간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육신에 매여 사는 불안의 삶이 변하여 자유로운 삶, 곧 참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곧 구원이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에서만 얻어지는데, 이 구원의 은혜는 구원의 메시지, 즉 케리그마가 전파되고 믿어질 때에만 얻어질 수 있다.

  Jurgen Moltmann은 과거와 현재보다 미래에 관심을 둔다. 그 미래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종말 및 천국이 아니라 변혁과 혁명으로 이루어지는 종말이요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이다. 그는 특히 구속론에 있어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일어나는 수직적인 측면에서 화해가 아닌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면적이고 역사적인 화해를 강조한다. 화해는 오직 역사적 평면 위에서 계급간의 투쟁이 끝나고 눌린자가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 실현되는 날 이루어지며, 이런 사회적 구원이 곧 오늘의 구원이며 이 구원이 성취될 때 만인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몰트만에게 있어서의 구원은 미래가 아닌 오늘에, 천국이 아닌 이땅에서,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이루는, 개인적이 아닌 사회적이요 만인의 구원이다.

  Paul Tillich는 인간의 실존의 문제를 그리스도와 결부한다. 곧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새로운 실재인데, 불완전하고 허무한 존재인 인간은 실재인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짐으로써 새로운 실재에 참여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만인에게 구원을 가져왔는데, 그 구원은 새로운 존재 속의 참여로서의 구원-중생, 새로운 존재를 수용하는 구원-칭의, 새로운 존재에 의한 변화로서의 구원- 성화 등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방 신학과 민중 신학 및 다원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에서 말하는 구원관은 여기서는 간과 하도록 한다.  

  이상에서 신학자들의 구원에 관하여 여러 가지 주장들을 살펴보았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며, 인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대속물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속죄주 즉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임을 볼 수 있다. 결국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메시야 한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의 구원관은 성경의 가르침과 전통 신학에서 크게 벗어나 있으며, 성경적인 구원의 진리를 간과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이제까지 구속의 개념에 대해서 이해를 촉진했다. 이제 구속사란? 무엇인가를 고찰함으로서 바울의 구속사를 준비하고자 한다.


  2-2 구속사란?

  구속사는 모든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위대한 사건들과 직접 결부되어 있다는 신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그리스도 안에 집약되어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속에서 전개 되고 있다. 따라서 역사와 구속사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고, 구속사 이해를 통해서 본 논고의 주제에 자연스런 접근을 하고자 한다.


2.2.1 역사와 구속사 사이의 관계

  역사란 우리의 언어로 구별이 분명하지 않으나 독일어에 있어서는 역사란 말이 두 가지 낱말이 있다. Historie와 Gechichte이다. 여기서 Historie는 세계사나 민족사, 정치사나 경제사와 같은 사람이 관찰하여 헤아릴 수 있는 "사학적 역사"요, Gechichte는 사람이 관찰하거나 헤아릴 수 없으되 실제에 있어서는 깊은 데에서 엄연히 일어나고 있는 "사건"으로서의 역사이다.

  인류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원년으로 하고 그 이전과 그 이후로 역사를 구분한다. 서구 사회에서는 18세기 이후, 우리 나라도 단군을 기원으로 하지 않고 서기를 쓰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에서 역사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된 결과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불신자에게도 역사의 의미가 주어졌다"고 한 브룬너의 말이 적용된 셈이다. 기독교적 역사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는 준비의 시대요,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는 역사의 의미를 받아들여서 그것을 실현할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속사는 현대 신학의 논쟁에 있어서 중요한 신학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여러 가지 "역사들 속에" 속해 있다. 즉 가문의 역사, 민족의 역사 등에 속해 있다. 우리는 신앙의 결단으로 이 특별한 역사인 구속사와 관련되어 있다. 즉 일련의 신적 사건을 우리는 더 좋은 표현이 없어서 구속사라고 부른다 . 그것은 또한 죄와 심판 때문에 멸망사(Unheilsgeschichte)일 수도 있다.

  불트만 학파는 신약의 실존적인 문제를 구속사 문제와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관과 객관의 분열을 미숙하게 폐기시킨 이 학파는 이렇게 해서 잘못 오도되어, 신약의 사실상의 본질을 인격이 자기의 실존 이해에 있어서 오늘날 자기가 말씀을 듣는다고 여기는 점에서 보게 된 것이다.

  성서적 사신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가장 최근에 반대한 사람 중의 하나였던 Fichte는 자기의 저서를 이렇게 끝맺었다. "형이상학적인 것만이 축복하는 것이지, 결코 역사적인 것은 축복하지 못한다. 후자는 이해만을 줄 수 있을 뿐이다." 형이상학이란 말 대신에 실존적이라는 말이 현대적 사고에 적합할 것이다.

  우리는 2세기에 있었던 영지주의와의 싸움의 의미를 바로 이해해야 한다. 즉 기독교의 계속성의 문제이다. Marcion과 영지주의는 상호종속적이다. 공통된 점은 구약에 대한 공격이다. 마르키온은 계시와 구원을 점적인 사건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복음도 하나의 점적이고 속박되지 않는 사건이며, 수직적이기는 해도 수평적이 아니다. 그리고 영지주의는 구약을 부인하고 기독교의 영역 안에서 신약을 해석하여 구속사를 제거한다. 즉 예수의 역사적 실존을 가현설의 희생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계시와 구원의 사건을 일관성 있는 구원의 발생사에서 찾아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구약을 인계 받았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신앙이 구속사를 믿는, 즉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믿는 신앙이지. 점적인 구원의 사건을 믿는 신앙만이 아니라는 것을 지시한다. 구속사는 시종일관 발생사로서 가장 내적인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역사학적으로 추적이 가능한 가장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며, 예수의 탄생과 그의 복음의 선포가 그 당대의 역사적 인물들, 가령 헤롯대왕, 아우구스트황제, 로마 총독 등과 관련된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구속의 행동은 역사적 컨텍스트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역사학적 예수와 케르그마적 그리스도 사이에 연속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삶과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사건이 역사적 Context에서 말해질 수 있다고 본다. 즉 구속사가 역사에 속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불트만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 즉 그리스도만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적인 예수는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없고 예수의 Kerygma만이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전인 예수의 처녀 탄생기사나 부활, 승천같은 기사는 예수를 숭배하는 초기 신앙 공동체가 만든 신화적 이야기며 이같은 신화는 비신화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바르트학파의 계시 중심 주의는 역사비판 논구의 홍수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원역사(原歷史)의 영역으로 도피한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원역사의 범주로 해석, 본래의 역사가 초기의 사역 내지 원역사의 반영으로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Pannenberg의 역사 신학과 라이너학파의 보편구속사 신학은 신의 계시와 동시에 객관적 역사 과정을 진지하게 다루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파넨베르크는 구원을 계시의 종속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파넨베르크 자신이 지나치면서 계시와 구속사와 관계를 인정했듯이 두 개념은 거의 구별할 수 없다. 논자가 보기에는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주요 개념은 구원의 개념인 듯하다.

  따라서 구속사는 신앙적으로 구원의 사건으로 인정된 사건들을 단순하게 첨가함으로써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에 그 때마다 과거의 구원의 사건에 대한 해석을 새로운 사건에 조명하여 수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이 계시에다 귀속시킨 해석의 행위는 구속사 자체에 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계시의 중개자는 구약에서는 예언자이고 신약에서는 사도가 된다. 계시의 중개자는 그가 맡은 계시를 새롭게 해석하고 구속사와 결부시킨다. 우리는 이처럼 구원의 사신을 구원 사건에다 포함시키는 것이 신약을 위해 본질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구약에도 현재적이다. 계시의 역사와 해석의 역사는 구속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나, 구속사는 여전히 양쪽을 건너짚는 개념이다. 그리고 사실상 성서의 역사 전개는 사건과 사건 사이에 간격이 있고, 비합리적인 도약에 의해 이루어진다. 창조, 선민의 선택, 남은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으로 좁아진 구속사의 선은 다시 제자들, 신앙 공동체, 세상으로 확대된다. 그러므로 성서적 구속사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원 섭리의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구속사에 접근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2.2.2 구속사(Heilsgeschichite)의 이해

  많은 신학자들은 구속사"라는 표현에 대해 비동정적이다. Heilsgeschichite란 말을 다른 말로 번역할 수 없고 그리 좋은 표현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신약 어디서도 "구속사"라는 표현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신약에 나오는 희랍어          는 세속적인 용법에서 계획, 관리, 가사(家事)라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능동적인 뜻으로 "집안 일을 돌봄"이란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말은 더 좋은 표현이 없어서 "구속사"라고 부르는 것에 가깝다.그리고 영어로 번역 하면 management  of  a household; task, work,  responsibility; (divine) plan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 말은 바울이 로마서와 고린도서에서 구원의 신적인 계획에 대하여 그가 받은 초자연적 계시에 대해서 말할 때 사용한 신적인 신비의 개념과 관련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바울 사도 자신과 그의 직분이 이에 속한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9장 17절에 "나는 를 위임받았다"는 구절 및 골1:25절과 엡3:2절 등에 지적되어 있다. 사도에게 나타난 신적 계획의 계시 및 그에게 맡겨진 위임은  그 계획에 속하고 따라서 구속사 자체 안에 속한다. 사도는 하나님의 신비의 청지기이다(고전4:1).

  구속사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구원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말한다. 성경은 단순한 말씀이나 진리를 담은 것이 아니라 창조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근원으로하여 재창조의 완성에 도달하기까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기록한 것으로 보는 구원사 신학이라 할 것이다. 구원사 신학이라는 말은 교회사적으로 Ireneaus가 최초로 주장했다. 그는 주로 노스틱 이단을 반박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세계 창조, 그리스도의 성육신, 천국재림을 주장했다. 그리고 17세기에 와서는 Cocceius가 그의 계약 신학에서 세 가지 계약 시기 즉 아담과의 행위 계약, 모세와의 은혜 계약, 그리스도와의 새 계약으로 나누어 구약 시대의 죄사함과 신약 시대의 죄사함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세기 신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서 뿐만 아니라 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까지도 구속사의 개념을 가지고 해석하기에 이른 것이다. 19세기의 구속사 학파를 대표하는 Hoffmann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함과  동시에 약속과 성취에서 성서의 통일성을 구속사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20세기에 Oscar Cullmann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단순한 점으로서가 아닌 선으로 이해하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되는 사건으로 보았다. 또한 Hunter는 구속사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메시야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구원의 방편을 삼아 구속 사업을 완성하신다는 일관된 이야기이다"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유의해야 할 점은 신약의 구속사가 생길 때 과거와 현재의 모든 사건과 장차 일어날 것으로 기대되는 사건이 그것들의 장점과 중심적인 하나의 사건속에 요약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리고 구속사에 대한 구성적인 역할을 하는 사실은 구속사의 발로를 성경에서 그 자신의 저자들이 특별한 사건 및 그 사건과 다른 사건의 관계에 대한 영적으로 파악된 계시에 귀속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구속사는 역사의 예언과 관계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 섭리 가운데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의 공포와 장래의 유혹에서까지 극복할 수 있는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며, 그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영벌이 제거되고, 죄의 세력이 타파되고, 영원한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온 인류에게 선재 은총의 선물로 주신 것이다.


제3장 로마서를 중심으로 본 구속사


  이미 앞에서 구속사의 개념과 구속사 이해를 통해서 개괄적인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외형적인 측면보다는 구체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구속사를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죄의 선언과, 칭의, 성화, 정죄 없음, 영광 순으로 다루려 한다.

  바울은 기독교 신도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복음이 계시하는 義를 주제로 제시한 후에 전 인류가 보편적으로 또는 절실히 이같은 의를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먼저 義를 입기 전에 죄를 회개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3-1 죄의 선언(In Sin)

  구속이란 긍정은 죄악이란 부정에서 시작된다. 신적 부정이 없는 곳에 신적 긍정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1장 18절-3장20절에서 인류가 죄 아래 놓여 있음을 선언한다. 먼저 그는 이방인의 죄를 종교적인 죄와 도덕적인 죄로 나누어 역설한다. 그리고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고, 전 인류의 죄에 대하여 선언을 한다.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있다. 자연의 빛과 율법의 빛 모두가 죄에서부터 죄에 이르는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따르는 대조법이 흥미롭다. 인간들의 죄악성의 묘사를 "경건치 않음과 불의"라는 끔직한 두 가지로 간추리고 있는 것이다. 곧 율법에 대한 불경건과 불의인 것이다. 이러한 죄악성의 근원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데 있다. 즉 하나님의 존재와 선악간의 차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는 있으면서도 그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죄인들에 대한 심판으로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즉 인간들은 피할 수 없이 참혹하고 불가피한 상황에 놓여지게 되는 것이다.  Brunner는 하나님의 진노란 "하나님을 반역하여 돌진하는 자가 느끼는 하나님의 의지의 역풍이다"고 말했다. 인간의 진노는 개인의 발동적인 경우가 보통이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공의성과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라고 하였다. 박윤선 박사는 하나님은 분명히 상선벌악의 심문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지 못하고 다만 그 진로 아래서 그들의 심령이 늘 불안한 중에 있다고 하였다. 이상근 박사는 하나님의 진노란 "인간에게 경건과 의를 요구하시는 그의 깊은 사랑의 표현이다"고 하였으며, Meyer는 "하나님의 진노란 악에 대해 역사하시는 거룩하신 자의 사랑과 선이다"고 하였다. 강병도 목사는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과 의의 계속적이고도 불변한 반응을 의미한다"고 하였으며, 우찌무라 칸조우는 사람의 노는 허다한 경우에 있어서, 감정의 흩어짐을 의미하는 매우 싫은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노하심의 상태가 사람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노하심의 표현은 사실로서 이 세상에 임하는 것을 우리들은 인정한다. 그리고 "불의로써 진리를 막는 사람들"은 즉 이른바 죄인이다. 선을 선으로 알고, 이것을 행해야 할 것인줄 알면서, 굳이 이것을 억지하여 불의에 행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알면서, 마음 가운데 실험되는 이 진리를 막고 그 발동(發動)을 억제하는 자이다. 환언하면, 진리를 진리로서 알면서 이에 따르지 않고, 불의를 알면서 이에 따르는 자가 바로 죄인이다.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노는 하늘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찌무라는 18절이 이방인만을 가리키는 것인지, 또는 인류 전체를 가리킨 것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는 바울은 먼저 인류의 전부를 멀리 넓게 보고서 이 총괄적인 단정을 내리고, 그런 후에 인류를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2분하고, 19절 이하에서 이방인의 죄를 지적하고, 다음으로 2장에서 유대인의 죄를 지적한 것으로 말한다. 조두만 교수는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부정당(不正當)한 행위 즉 도덕적 결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석한다. 즉 불의 곧 부도덕한 일들을 행하느라고 진리,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눌러 둔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상훈 박사는 바울이 경험한 죄는 악한 영향 악한 분위기 따위로 외부에 단순히 머물러 있는 것이 나니라 인간의 내부를 향하여 침입한 세력이라고 하였다. Murray는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거룩한 진노로 죄를 다스리신다. 이 말은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죄로부터의 구원이란 속죄와 화목제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이제 성경으로 돌아가 율법 아래놓여 있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Bornkamm은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그들이 신 앞에서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의 파멸은 어디에 있는가? 로마서1장18절-3장20절이 이 물음에 "신의 진노의 계시"라는 주도어(主導語)로 대답하고 있다. 즉 파멸은 인간이 신을 모른다는 데 있지 않고 신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불법 중에 가두어 두는"(롬1:18)데 있다. 그리고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이 바로 바울에게는 죄에 갇혀 있는 자의 좋은 표본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건에 대한 환상에 의해, 의에 대한 추구에 절망적으로 막힌 신을 향한 길을 여 수 있다고 오해한다. 율법이 전해 주는 인식은 오직 죄의 인식 뿐이다(롬3:20). 죄는 바울에게 있어서 분명히 개인적인 도덕적인 과오일 뿐 아니라, 행위와 노예와 세력의 일치에 있다.큄멜은 바울이 모든 인간의 죄의 타락성(롬3:23,갈3:22)을 현재적인 것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한때 인간적인 존재의 시초에 관해 말한적이 있다(롬5:12-19). 그리고 이 구절의 목표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온 죄의 보편성에 하나님의 크신 은사로서 한 사람 예수를 통하여 온 생명을 대조시키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죄의 시작이 중심 문제이다(롬5:12).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다. 결국 아담이 죽음의 형벌을 받은 이래로 모든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한편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죄로 죽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의 결합은 모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단지 유대적인 표상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이 유대적인 표상에 의하면 아담이 죄와 형벌의 결합에 책임을 지지만,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죄를 통하여 이러한 벌을 받는다. 따라서 바울은 죽음의 사상은 철저하게 주장하지만 결코 원죄는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유대적인 사유와 전적으로 일치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행위에 대한 모든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자는 이제 신약 성경에서 차지하는 죄에 대한 통계를 살펴보고, 이방인의 죄와 유대인의 죄를 구체적으로 열거해 보고자 한다.

  우리말 신약 성경에는 죄에 관한 기록이 342회나 언급되어 있다. 그 중에서 바울이 쓴 일곱 개의 서신에는 81회나 언급 되었는데, 그 중에 로마서에는 57회, 고린도전서에 12회, 고린도후서에 5회, 갈라디아서에 6회, 데살로니가 전서에 1회가 죄에 대하여 직접 말하여졌다. 특히 바울은 로마서에서 집중적으로 죄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1장 18절 - 32절에서 이방인들의 죄상을 면밀하게 지적하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우상 숭배를, 도덕적으로는 성적으로 타락한 죄상과 제반의 악덕을 지적하고 있다.

  우찌무라 칸조우는 로마서1장18-32절을 3단으로 나누어 말한다. 제1단 19-23절 오성의 혼란-우상 숭배, 제2단 24-27절 정성의 혼란-더러움, 제3단 28-32절 의지의 혼란-불의, 즉 바울은 이방인의 죄를 오성, 정성, 의지 삼자의 혼란으로 본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9절-21절에서 육신의 죄를 열거한다. 즉 불품행, 더러움, 호색, 우상 예배, 마술, 적의, 분쟁, 시기, 분노, 당파, 분열, 분파, 질투, 살인, 술취함, 연락 등이다. 그리고 그는 로마서 1장 29절-31절에서 하나님이 없는 제반의 추악상을 폭로 하는데, 이상근 박사는 이것을 표로 나타낸다.

    a.근본적인 죄 : 불의, 추악, 악의, 탐욕

    b.사람에 대한 심적인 죄 : 시기, 살인, 분쟁, 악독, 교만

    c.사람에 대해 표현된 죄 : 수군수군함, 비방,하나님의 미워하심, 능욕,자랑

    d.비인간적인 죄 : 악을 도모, 부모를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등.

  우찌무라 칸조우는 마가복음 7장 21,22절과 갈라디아서 5장19-21절을 로마서1장 29-31절을 비교하여 죄의 목록을 설명하는데, 마가복음은 예수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서 가장 조직적인 것으로 본다. 그리고 여기서 제시한 죄의 수는 13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죄의 수는 16이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21의 목록을 싣고 있다. 이것을 우찌무라 칸조우는 표로서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 죄의 총칭=불의

   * 죄의 총체=악의, 악, 탐욕

   * 질투의 죄=투기, 살인, 분쟁, 사기, 악념

   * 참무의 죄=참언, 욕(훼방)

   * 교만의 죄=불손, 교만, 대언장어, 악사를 도모함

   * 불신의 죄=불효, 무지, 불성실, 무정, 무자비 등.

  이 목록 중에 마가복음에 있어서 예수께서 주신 죄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살인, 탐욕, 악의, 사기, 투기의 다섯이다. 그리고 다른 16개의 죄상은 모두 바울이 새로이 든 것임에 주의할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의 죄에 대하여는 로마서 2장 1-29, 3:9-20절에서 말하고 있는데, 대체로 보아 유대인의 죄는 심리적인 것들이다. 즉 이방인의 죄가 육체적이요 외형적인 것임에 비하여, 유대인들의 죄는 심적이며 내적인 죄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죄를 공격함에 있어서 먼저 그 죄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을 지적한다. 첫째로, 종교적 우월감에서 남을 판단하는 유대인을 하나님은 심판한다. 둘째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은 심판한다. 셋째로, 표준은 유대인에게는 율법이며, 이방인에게는 율법을 떠난 양심에 따라서 하나님은 심판한다. 그리고 반율법적인 죄 즉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 율법을 범한 할례를 질책한 다음, 로마서 3장 9-20절에서 전 인류의 죄를 다룬다. 바울은 이처럼 개별적으로 유대인의 죄상과 이방인의 죄상을 구체적으로 논한 후에 그 결론으로 전 인류가 죄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단정한다. 바울은 먼저 구약을 인용하여 인간의 죄성을 신랄하게 규명한다. 그리고 이미 전 인류는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Meyer은 로마서 3장10-18절의 배합은 "죄의 일반적 상태(10-12), 말의 죄(13-14), 행위의 죄(15-17), 죄의 전체적인 원천(18)으로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는 말씀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20절과 2장 1절은 죄에 대하여 아무도 핑계 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전 인류가 죄 아래 멸망의 대상임을 전제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기대하면서 로마서 3장 21절-8장 39절까지에서 구체적으로 구속의 교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 2단계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의의 기초를 세우심을 살펴 보고자 한다.

  3-2 칭의(Justification)

  바울은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선언을 하고, 율법을 떠나서 하나님의 義가 나타난 것,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그리고 이 의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義니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 義를 구별 없이 누구에게나 주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의는 아니다. 즉 사람의 자력으로서 달성한 의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義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믿는 자에게 주셔서 그를 의롭다 인정하시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Augustin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의를 율법의 일이나 율법의 도움을 떠나서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을 가리킨다"고 했다. 즉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義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바울은 신적인 칭의에 관한 복음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상세하게 논술하고 있다. 로마서 전체의 주제에 대한 상론을 로마서 3장 21-30절에서 찾게 된다. 그리고 믿음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의인이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롬5:9,18, 8:30,33, 10:4,10, 고전1:30, 6:11) 그리고 하나님의 의(롬3:5, 5:17, 10:3, 고후5:21)에 관해서 여러번 간단하게 언급한다.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義가 주어진다는 역설적인 표현은 바울이 인간적인 율법의 행위 대신에 인간의 믿음을 신의 의롭다 함을 위한 인간의 선행동으로 요청한다는 오해를 언제나 일으킨다.

  그러나 황현숙 박사는 이 믿음이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응답, 승인, 인정, 포기이며,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는 것을 수용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재 행위에 반응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구원의 은혜에 응답할 뿐이다"라고 정의 하였다. 논자의 견해도 전적으로 동의 한다.

  로마서3:21-26절은 믿음에 의한 칭의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의 중심이다. 로마서1:16절은 하나님의 義의 계시의 필요성을 나타내고, 로마서3:21절은 하나님의 義의 역사적 현현의 본질과 의미를 밝힌다. 

  그러면 이제 좀더 깊이 있게 하나님의 義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義의 계시의 맥락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또한 의인과 신앙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관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義란 무엇인가? 바울은 "하나님의 義" 개념을 비교적 드물게 사용하고 있으나(롬1:17, 3:5,21-22, 25-26, 10:3, 고후5:21, 빌3:9은 다르다) 언제나 하나의 규정된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그 의미는 바울의 의인론의 맥락에서 합성어의 전승된 의미에서 생긴다. 하나님의 義라는 합성어는 묵시문학적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義"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진술이다. 이러한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롬3:21-22,26-27) 하나님의 義는 나타났다. 이러한 진술을 근거로 하나님의 義는 현재에 나타나게 된 하나님의 행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를 밝히시는 분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그리고 이 행동은 선포되어진다. "행한 것이 없지만 불경건한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인정된다"(롬3:26, 4: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를 의로운 자로서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는 일어난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義"가 죄있는 인간을 현재적인 종말에서 의롭다고 선포하시며 그럼으로써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뜻한다면, 이러한 신의 행동이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할 때에 좀더 명확해 질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하나님의 義"는 명백하게 율법의 의에 대립시켜 하나님의 의를 가르치고 있다(롬3:20-21). 즉 율법의 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여 이루는 의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신이 이루신 의니 절대로 완전하고 또한 믿는 자에게 거져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義는 의가 없는 자에게 임하여 그로 하여금 그 의 때문에 영생과 하늘나라의 영광을 누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른캄은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죄인에게 즉 스스로 의롭지 못한 인간에게 제공한다. 하나님은 의롭기 때문에 믿는 자를 의롭게 하면서 자신의 의를 제시한다(롬2:26). 그리고 하나님의 義는 언제나 능동적이며 반면에 인간은 수동적이다. 즉 인간은 의롭다는 선언을 받고 의롭게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율법 없이 나타났다(롬3:21)고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신앙을 위한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속죄제물에 근거를 두고 율법 없이 계시되었다. 이러한 바울의 사상은 율법의 행위 없이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롬3:27-28).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그는 단순히 일반적인 하나님의 마음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의 사건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를 지적한다. 은혜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언약을 세워 준다. 구원하는 하나님의 행위는 구원의 분신, "우리가 처해 있는 은혜"에 근거를 제공한다(롬5:1-2).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와 의인의 관계에 관하여 하나님의 의롭다 인정하시는 행동을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일어난 사랑의 행동이라고 표현한다(롬5:6, 8-9). 즉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죽게하신 것이며, 이러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포되었으며, 그래서 우리는 종말에 있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믿음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의 결과로 분명하게 이해한다. 믿음은 설교자의 설교와 보냄에 근거하여 완성된다(롬10:14-16, 고후5:18-19). 그러므로 우선 믿음은 들은 설교에 대한 동의이다. 그리고 믿음은 본질상 복종이다(롬6:17). 따라서 믿음은 복음의 선포 안에서 하나님의 義를 만들어 내는 구원의 복음과 마지막 날에 만났으며, 복종으로 붙잡힌 바된 인간의 응답이다. 즉 선포된 의롭다 함에 대한 모든 감사의 신앙고백에서 종국적인 의롭다 함은 하나님의 선물의 희망으로 남아 있다.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은 이미 일어났으며, 믿는 자에게 받은 바 은혜의 선물로서 확실한 현재이다. 그리고 Murray는 "칭의는 응답이며 또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행위이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중생은 우리안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위와 판사의 행위와 흡사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칭의는 신앙 때문에 되어지는 일은 아니다. 성경은 언제나 "신앙으로 말미암아(by Faith)" 혹은 "신앙을 통하여(through Faith)" 또는 "신앙 위에서(upon Faith)"의 칭의를 말하나 결코 "신앙 때문에(an account of Faith)" 혹은 "신앙을 이유로 해서(because of Faith)"를 말하지 않는다.

  칭의는 영생에 대한 주제이며 또한 영생을 확보하는 것이다. 또한 칭의는 우리에게 있어서 실행의 義로서가 아니고, 그것이 행위에서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의롭다 함을 은혜로 얻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신앙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은 곳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또한 칭의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속적 사업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보른캄은 신앙은 복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순종적인 신뢰와 신뢰적인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롬1:5, 6:16, 고후10:5). 그리고 신앙은 구원의 조건이지만 미리 인간적인 결심에 의해 믿고 그후에 구원에 참여하는 양식에 속하지 않는다. 바울은 신앙이 뜻하는 것을 아브라함에 의거해서 설명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에게 의로  간주되었다"(롬4:3, 갈3:6)에 한정시킨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한 아브라함의 의인은 경건의 최고의 증거를 위한 적절한 보상이다. 바울은 이것을 "은혜의 보상"으로 이해했다(롬4:4-5).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다(롬4:19이하). 이 신앙이 하나님에 의해 의로 간주되었는데 이것이 아브라함이 미래의 언약을 대망한 신앙이고 이것으로 믿는자들은 지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의 그 언약의 성취에 자신의 근거를 둔다(롬4:23이하). 그러므로 신앙은 공격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공적의 포기이고, 결코 '자랑' 즉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주장의 근거일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옛 실존의 마지막인 동시에 새로운 실존의 시작이다.

  그리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따라서 결정되는 사실을 보아 온 대로 믿음은 하나님이 그의 도움을 찾는 이들에게 제시한 하나의 조건으로 이 조건을 수락함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서게 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히브리에서 義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고 움직이는 관계 개념이었듯이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한 것 뿐 아니라 우리안에서 의로운 행동을 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는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의롭다고 선언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계속적으로 지켜 나갈 힘을 주신다. 성령은 신자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성취시키고 지속시키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칭의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해 십자가의 죽으심을 취하셨다 .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다. 죄로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이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으로 화목된 것이다. 이 화목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실존의 삶을 살게 하였으며,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영원한 선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화평을 얻으며, 은혜의 생활을 누린다. 생활이란 환란에서 인내로, 인내에서 연단으로, 연단에서 소망으로 진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5장 1절-11절에는 삼위일체 교리 및 믿음 소망 사랑 신앙의 삼요소 및 은혜 평강 기쁨 등 은혜의 세 방면의 중요한 사실들이 나타나 있다. 이같은 결과는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현재의 구원과 미래의 구원이 대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해 그를 믿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현재의 구원이며, 신령한 구원이다. 그리고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면 아담은 범죄 함으로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는 은사로 많은 범죄에서 의인으로 영생을 가져왔다. 우리는 여기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하심을 받고 은혜로 구원을 받아 영생의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제 윤리적인 면에서 의는 점점 전진하여야 한다. 이것을 바울은 성화(Sanctification)라 했다.


3-3 성화(Sanctification)

  성화는 구속 적용의 한 부분이다. 성화는 구속 적용의 첫 단계는 아니다. 즉 성화는 유효적 소명, 중생, 칭의, 양자와 같은 다른 단계를 전제로 한다. 이 중에서 성화와 관련된 두 가지 단계는 소명과 중생이다. 성화는 "우리 안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소명과 중생은 그들의 즉각적인 효과를 "우리 안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소명은 우리 의식을 향하여 우리의 의식에서 응답을 끌어낸다. 중생의 그 자체가 우리 의식 속에 신앙과 회개, 사랑과 순종을 일으키게 하는 갱신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소명이며, 실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은 성화에 의해서다. 중생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 지고, 백성들은 성령에 의해 살게 된다.

  성화는 사람의 마음속에 이룩되는 성결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즉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심령속에 역사하여 죄와 더러움을 지적하고 이것을 제거하는 길을 가르치며, 죄의 뿌리, 죄의 세력, 죄의 결과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갖추어야 할 모든 덕과 하나님의 능력을 채우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우리 속에 완성하시려는 은혜의 일이다.

  성결에 대하여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성결해지는 상태와 다른 하나는 성결케 되는 과정이다. 성결로 역되는 영어의 Sanctification과 희랍어 명사         는 깨끗함, 성결, 성, 상태와 과정의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Wesley는 성결이란 사람의 내심의 문제이다. 성결해진 사람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워진 사람이다"(살전5:16-18). 그리고 웨슬레는 그리스도의 완전 중에, 성결해졌다는 사람에게 특질이 있다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가 실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다"고 하였다.

  우찌무라 칸조우는 성결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며, 인심의 속 깊은데 있는 본원이며, 자녀가 받을 수 있는 절대적인 은사이다"라고 하였다.

  Murray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중생했다 하더라도 신자에게 아직도 죄가 있다(롬6:20, 7:14-25 참조). 신자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하리 만큼 그렇게 거룩하고 악이 없고 순결한 것도 아니며, 또 죄인들로부터 분리된 것도 아니다. 성화는 모든 죄를 감소시키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완전 일치가 되는, 즉 주님이 거룩하심 같이 거룩하게 되어야 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성화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모든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모순된 것이다. 신자 안에 있는 죄는 그의 마음과 생활의 싸움을 의미한다(롬7:14). 비록 죄가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그 죄가 왕노릇하지는 못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죄가 왕노릇하지 못하게 되는 이 신앙은 우리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게 하며 마지막은 영생을 얻게 하려고 하나님과 의에게 종노릇하게 하는 힘이 된다(롬6:17,22)고 말하였다.

  그리고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의 방식은 신비에 싸여 있다. 우리가 성령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명령적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면서 또 죽은 자 가운데 그리스도를 살린 영이신 성령이 성화시킨다(고후3:17,1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만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며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시게 하나니"(빌2:12,13).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이미 소유된 구원이 아니라 종국적인 구원이다(살전5:8,9).  

  성화의 구속 교리는 로마서 6:1-8:17절에서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을 대체로 삼대분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성화의 생활의 기초로서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같이 사는 중생을 말하고 있다(롬6:1-11).

    둘째는 성화의 생활 형태로 새 주종 관계와 새 혼인 관계를 말한다(롬 6:12-7;6).

    셋째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 길을 장려한다(롬8:1-17).

  성화의 기초인 중생은 세례와 관련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하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세례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부활하심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Denny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인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화의 형태는 새 주종 관계와 새 혼인 관계로 나타난다. 새 주종 관계는 성도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것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다. 여기서는 두 가지 종을 대조하고 있다. 그것은 불신때의 죄의 종과 현재의 義의 종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종은 또한 사망과 영생이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거룩함에 이르라" 바로 성화를 표시하는 낱말이다. Calvin은 "성도는 현세에서 성화를 향해 노력하나, 그 완성은 죽은 후에나 되어진다"고 말한다. Wesley도 칼빈과 성화론에서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세에서 그리스도의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면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도들이 계속해서 성화의 삶을 살 것을 권고한다. 논자의 견해도 웨슬레의 입장을 지지한다.

  바울은 로마서 6장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선언한다. 사망과 영생은 모두 영적인 것이며 영원한 것이다. 단순한 존재적 의미에서는 양편이 다 영생이다. 그러나 전자는 참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단절된 저주의 생의 영속이요, 후자는 하나님과 결합에서 축복의 생의 영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후자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서 7장1-6절에서 결혼관을 은유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법적인 부부가 그 어느 한 쪽이 죽거나, 이혼한 경우에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처럼,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로 연합하여 자유인이 될 때에 이 생활을 성화의 생활이라 할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가 변화 받기 전에는 율법 아래 죄 가운데 있어서 육신은 죄의 법을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성화의 과정을 가는 성도는 이제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을 밝혀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하여 새로운 남편인 그리스도를 섬기는 길이 곧 성화의 길이다. Barth는 로마서 6장 22절을 들어 "네 자신을 성결케 하라! 하나님의 종이 되라! 이것이 은혜의 명령이다."고 말했다.

  이제 바울은 성화에 이르는 길이 율법에는 없다는 것을 단정하고, 나아가서 성령 안에서 비로서 성화의 길이 있음을 로마서 7장7절 - 8장17절에서 옛 길과 새 길 두 가지로 제시한다. 전자는 율법을 말한다. 율법은 그 본질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 살게 하려는 율법은 결과적으로 죽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전에는 내 육신에 선한 것이 있지 아니하여 죄가운데 행하였으나 한 법을 통하여 죄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은 죄의 법을 섬긴다"고 고백 함으로써, 한 마디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로는 성화에 도달할 수 없음을 실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옛 길은 율법으로 정죄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 마음과 육신,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대립된다. 이 두 가지 계통과 역사가 내 자신 속에서 실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령 안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 하는데 이 새 길은 정죄함이 없는 생명의 길인 것이다.

 


  3-4 정죄 없음(No Condemnation)

  "성서를 한 개의 지환으로 본다면 로마서는 그 보석이고 제8장은 그 보석의 반짝이는 첨단이다"(Philip Jacob Spener)고 하였다. 이제 7장을 통과하여 8장에 들어서는 사람은 이미 고뇌의 밤이 지나고 광명한 찬란한 아침을 맞이하는 신선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느듯 바울의 구속사의 정점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논자는 모든 사람이 죄 아래 놓여 있다고 하는 선고로 인하여 참으로 인류의 실존이 참으로 비극이라고 생각하고 참으로 무겁고 우울함 속에서 출발했는데, 어두운 긴 터널을 지나 오는 동안 이 어둠의 겁풀을 하나씩 제거하는 작업을 통하여 영화를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의 빛에 도달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로마서 8장1절의 이제는 다시 정죄 없다고 하는 이기는 자들이 받게 되는 선언을 통하여 본질적인 자유함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연약하여 육신으로 말미암아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정죄는 칭의의 반대 개념이다. 칭의는 정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본 서신의 주제인 칭의는 불경건한 자를 완전히 그리고 다시 취소할 수 없이 의롭다 한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칭의는 모든 정죄가 취소된 사실을 내포한다. 이것이 1절의 사상이다. 부정적인 표현은 강조를 띠고 있다. "그러므로"라고 하는 말이 이렇게 완벽하게 정죄가 없는 이유는 이미 앞에서 말한 문맥에서 나온 추론임을 뜻한다. 만일 사도가 죄책에서부터와 죄책이 부과하는 정죄에서부터의 자유만을 단지 칭의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 땐 우리는 특별히 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서신 중에서 그런 추론의 기초를 발견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정죄에서부터의 자유가 죄책에서부터의 구출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부터의 구출까지 포함된다고 본다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바로 앞의 문맥과도 아주 적절하게 관계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장의 투쟁에서 명백히 나타난 것과 같이 죄 및 육신의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는 만큼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까닭에 신자의 소유물이 되어진 승리를 감상해 보는 것은 더욱더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찌무라 칸조우는 로마서 8장을 구원의 완성으로 보고 구속사의 절정이라고 한다. 우찌무라 칸조우도 앞에서 인용된 Spener의 말을 인용하면서 실로 이는 성서의 최고 점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죄되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은혜이다. 그리고 그는 로마서 권위의 한 사람인 고데의 분해 법을 소개한다.

      제1단 1-4절 죄에서 해방되는 일

      제2단 5-11절 죄와 그 결과인 죽음에서 해방되는 일

      제3단 12-17절 하나님의 아들로 되는 일

      제4단 18-30절 후사로 되는 일

      제5단 31-39절 대찬미

  제1단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고 단정하고, 그 근거로 2,3,4절을 기록하고 있다. "살리시는 영의 법"으로 율법을 대신하고, 성령의 역사에 무게를 둔 것이 특징이다.

  제2단은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행복을 말한다. 이것이 성령에 의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이의 영, 너희에게 거하면,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이는, 너희안에 거하시는 바의 영으로서,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다"(11절)라고 한다.

  제3단은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되는 것을 주안으로 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되는 자는, 이는 즉 하나님의 아들이다"(14절), 또한 "성령께서 친히 우리들의 영과 함께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한다"(16절)  인류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흔히 듣는 일이다. 하지만 바울에 의하면 어떤 특별한 상태에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어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는 특별한 은혜에 접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제4단은 상속자가 된 것을 말한다. "우리가 만약 자녀라면 또한 후사로 될 것이다"(17). 하나님의 아들로서 머물러 있는 이상은, 반드시 어떤 실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로 되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는 것은 새로운 우주-전세계 만물-모두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된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어 받게 되는 것이다. 이에 이르러 바울의 신앙, 사상, 희망은 절정에 달한 것이다. 신자들은 부활하여, 영광을 입고서, 새로 완성된 우주의 주인공으로 된다. 이것이 신자들을 기다리는 최고의 영예 또한 구원의 완성이다.

  제5단은 대희망 대감사가 가득 넘치는 마음에서 자연히 흘러 나온 대환희의 토로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 한 가지를 짚고 넘어 가야 한다. 그러면 7장 이전의 전부와 8장과의 상위점 문제이다. 비교해 보면, 7장까지의 구원은 대체로 외부적인 것이다. 물로 구원을 영혼에 받는 점에서 말하면 내부적이지만, 그래도 8장이 아주 내부적임에 비하면, 7장까지의 구원은 사람의 겉에 주로 있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속량을 믿는 것이다. 예수를 우러러 보고, 그것을 원형으로하여 성결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으로 구원은 완성케 되는지? 아니 보다 더, 내부적인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하여, 우리들의 영과 합체하고, 그리하여 우리를 도와 주고,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시키는 일, 이것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실로 8장의 주제인 것이다. 하나님은 내외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7장까지는 죄로부터 칭의 사건을 통하여 성화의 과정을 통해 구속을 바라 본다면, 8장의 시작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다시는 정죄함이 없는 본질상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회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거룩의 최종의 목적지인 영화의 단계를 마지막으로 준비하는 단계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 역할을 8장이 해주고 있는 것이다. 8장은 단순히 취급되기에 가장 난해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바울의 실존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생을 고난과 함께 십자가를 중심을 살아온 바울의 경륜을 쉽게 이해 한다고 하는 것은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정죄없음의 특성과 특권을 살펴봄으로서 그 의미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바울은 여기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특권과 함께 강론을 시작하면서 그 특권을 받은 자들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것은 우울한 한탄과 갈등에 뒤따라 오는 그의 승리이다. 이제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큰 특권인 것이다. 그리고 특성은 생활 전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연합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특권을 얻으며 이 특성에 부합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이 특권들 즉 칭의와 성화의 특권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율법으로는 할 수 없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했을 때 행위 언약인 율법은 아무런 대책을 마련해 주지 못했다. 율법은 우리를 유죄 판결을 내린 채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 일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언약은  은혜와 공로의 보고인 것이다. 여기서 그 일은 우리를 "죄의 권세로부터 곧 죄와 사망의 법"에서부터 우리를 구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에 실패한 인류를 구출할 방법을 간구하신다. 그것은 바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이 결과로 우리에게 미치는 일의 복된 결과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율법을 어긴 보상을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전가로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순종하심으로 불완전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에 새겨질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러한 특성에 부합될 수 있는가? 먼저는 우리의 마음을 살핌으로써 할 수 있다. 우리가 육신의 일을 따르는지 영의 일을 따르는지. 하나님의 은총, 영혼의 복지, 영원에 대한 관심 등은 영의 일이다. 따라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즉 영혼의 죽음인 것이다.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신적인 영혼은 비참이며 철저하게 죽은 영혼이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다시 말해서 성화된 영혼은 살아 있는 영혼이며 영원한 생명과 평안의 시작인 것이다. 또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그래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Murray는 "하나님을 향해 원수가 되는 것은 육신의 생각의 실제적인 원리이며 지배적인 경향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적의의 기질을 드러내 보이는 구체적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상근 박사는 육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의 차이에 대하여 지적하는데 "유혹의 육체는 그가 살아 있는 한 범죄의 그릇이  되고 영혼의 싸움은 계속된다. 그러나 육 본위의 생활 원리에서 영 본위의 생활 원리로 결단의 선을 넘어선 자에게는 문제가 달라진다. 이 선 이전에는 육의 일을 생각하고 이후에는 영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 육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박윤선 박사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곧 사람이 마땅히 위할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함을 말함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 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하는 짓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적성행위를 하는 이유는 아주 부패하여 악의 근성이 된 까닭이다.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도 부패의 잔재가 있으나 그것의 지배는 받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진노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우리가 이 두 원리 중 어느 한쪽에 정복되고 굴복 한다는 의미이다. 만일 우리가 육을 택한다면 앞에서 살펴본 결과에 도달할 것이고, 만일 영에 속한다면 하나님의 성령에 인도함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다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 이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성격을 말함이니,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성화의 도상에 있는 자들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사는 참된 신자들에게는 탁월한 두 가지 은혜가 있는데 그것은 생명과 양자의 영이다. 몸은 죽은 것이다. 몸은 생리적 신체를 의미하지 않고 부패의 총체를 의미한다. 신자의 몸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러나 영은 부패한 사람 속에서 생명의 역사를 한다. 그리고 영은 신자의 마음을 의미하며(10절), 그것은 義 때문에 생명을 얻는다. 여기서 義는 그리스도의 칭의의 의와 성화의 운동을 말하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의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13). 여기 "영"은 성령을 의미한다. 성령의 사람은 악행을 떠나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다. 마침내 생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새로운 관계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는 영이 존재한다. 여기 영은 성령을 의미한다. 성령의 인도에 대한 신자의 순응에 대하여,  Luth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감심으로 옛 사람을 버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라도 유쾌하게 거부함이다. 그것은 죽음, 혹은 죽음에 소속된 것들 앞에서도 놀라지 않음이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땅에 속한 기쁨이나 보배까지도 경히 여김이다. 그것은 보배를 자발적으로 내어버리며 재앙을 환영하며 포응함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신자의 속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그리고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신다. Calvin은 말하기를 "성령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하여 주심과 함께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담력이 생긴다"고 하였다(Commentary upon the Epistle to the Rommans,p.313).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의 생활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죄함이 결코 없다고 하는 것이 영광이라고 하는 정점을 향해 전진하는 신자들에게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총의 수단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언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서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인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며, 하나님의 인간에 기대하는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3-5 영화(Glorification)  

  바울은 신자의 다섯 번째 행복 곧 미래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자격 요건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는 생명이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는 말로 정의되고 있다. 하나님의 후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 자신께서 그들을 위해 세워 놓으신 유업의 후사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치만 유업의 범위는 더 광대하다. 그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곧 유업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런 사상을 지지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보상은 무엇보다 그가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받은 사실이며, 여호와께서 그의 유업의 몫이 된 사실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위에 부여된 유업을 그리스도와 함께 소유하게 된 것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및 친교를 통하여 영광의 상태에서 바라본 측면이다.

  이 세상의 상속에 있어서는 이 법칙은 적용되지 않는다. 장자만 상속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상속자로서 누리는 유산이다. 그들은 무슨 공로이든지 자기들의 공로로 천국을 상속하는 것이 아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상속자로서 그것을 누리는 것이다. 그들의 현재 상태란  상속을 받기 위한 교육과 준비의 상태이다.

  그리고 현재 그의 형제로서 그리스도의 영에 참여한 자들은  장차 그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이 장래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의 보상이며 현재의 소망의 성취인 것이다. 바울은 로마의 형제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았으니 또한 틀림없이 그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는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을 비교하는데 저울을 사용한다. 그리고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현재 상태에서 그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그 영광은 장차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대립적 개념을 역설한다. 즉 그의 고난에 동참이 없이는 영광에의 동참도 없다. 고난과 그 후의 영광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해 정해 놓은 순서이다.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계획과 고안에는 이런 순서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에게도 적용된다. 그리고 이런 연합적 참여는 영광의 경우처럼 고난의 경우에도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속죄, 화해, 화목, 그리고 구속의 달성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죄과를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지우셨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은 세상을 자기 자신과 화해케 하셨다. 즉 그리스도만이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다.

  박윤선 박사는 로마서8:17절은 "우리가 현세에서 고난을 받은 값으로 장래에 영광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우리가 일체임으로 동고동락하게 되는 사실을 가리킨다."

  Butler는 말하기를 "우리의 이 세상 생활이 캄캄할수록 영생은 더욱 명랑해진다."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통을 많이 당하면 당할수록, 성령의 위로와 감화의 역사가 더욱 강화된다. 그런데 여기서 "그와 함께 영광을 받는다" 함은 부활의 영광을 가리키지만 죽은 후의 천국 생활도 가리키는 것이다. 이유는 바울은 자기가 별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영광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여기에서 "생각건대." 이 말의 헬라어 원어          는 상상이 아니고 구체화한 확신을 말한다. 이것은 이 세상 고난보다 내세의 영광이 말할 수 없이 큰 사실을 확실성 있게 여긴다.

  그러나 Murray는 로마서8:18절의 "현재"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와는 대조를 이루는 "이 시대" "현 세대"인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시기는 부활과 영광이 나타날 시기이다. 여기서의 대조는 죽음에 앞서 이생에서의 한 신자가 격어야 하는 고난과, 그가 죽어서 들어가는 지복과의 대조가 아니다.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영광은 부활의 영광이며 장차 볼 세상의 영광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소망의 목적을 의미한다. 즉 피조물이 해방되는 소망이다. "썩어짐의 종노릇"은 부패의 종노릇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 안에 존재하는 자유이다. 따라서 이 자유는 썩어짐의 종노릇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여기 "영광"은 17,18절에 제시된 그 영광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여될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은 피조물도 포함하는 영광이며, 우주적 갱신과 무관하게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광은 만물의 회복과 관계된 것이다. 그리고 기대와 소망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라는 목적을 기대한다. 그리고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하나님의 백성들을 현재의 고난과 탄식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영광을 바라보는 신자들의 필요를 따라 구체적으로 간구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8:28,29절은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초현세적인 경륜을 다루고 있다. 28절의 뜻은 29절에서 예지(豫知) 및 예정(豫定)의 용어로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예정은 구원 경륜의 최종 목표를 정의하고 있다. 30절은 우리에게 현세적인 영역을 소개하며, 그 영원한 경륜이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실제로 결실되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에 세 가지 행위가 언급되는데 소명, 칭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구속사의 정점적 표현으로 로마서8:31-39절에서 영광에 대한 개가를 부른다. Godet는 이것을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찬미"라고 격찬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의인, 그리스도의 중보를 들어 신자들의 미래의 구원의 확실성을 댓귀법을 사용하여 고조시키고, 확고한 구원의 개가를 부른다. 결국 이 사상은 로마서8:18절로 돌아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을 비교하고, 현재의 가지가지의 고난이 미래의 영광을 빼앗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논자는 이제까지 구속의 개념과 구속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성숙에 도달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그런 관점에서 본 연구를 진행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제4장에서 다루게 될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은 본 연구와 무관한 느낌을 주는 듯 하지만, 논자는 죄로부터 구원 받았다는데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진보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의 실천적인 삶의 방식을 통하여, 결실하는 바울의 구속사를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구속사의 연장선에서 제4장을 다루고자 한다.

 


제4장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

 


  바울은 앞에서 신앙의 본질적인 구속의 측면을 다룬 후에, 이어서 신자들의 실천적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신앙과 현존의 삶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떠난 삶, 삶을 떠난 신앙은 현재라는 현존에서 서로에게 필요 충분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존의 삶의 현장에서 즉 현재의 시점에서 이미 구원을 선취하셔서 살았던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원은 이미 성취된 것이며, 우리는 이 구원의 은총 안에서 하나님의 신민으로써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존 세계에서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며 열매 맺는 생활인 것이다. 따라서 먼저 세상 백성으로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살펴 보고, 다음으로 천국 시민으로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고찰하므로써, 현존에서의 신앙인의 삶의 자세를 확고히 하는 기초를 제공하고자 한다.

 


  4-1 세상 백성으로서

  우리는 지금이라는 현재에 존재하는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를 벗어날 수 없으며, 세상의 권력의 주체이며, 우리의 삶의 울타리인 국가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속해 있는 현실이 설령 참혹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부인 할 수 없으며,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환경에서 신앙을 통하여 이와 같은 요소들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라고 하는 영역에 속해 있으며, 지역적으로 국가라고 하는 민족의 공동체 속헤 존재하며, 작개는 가정이라고 하는 환경속에 내(吾人)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세상 권세에 대하여, 개인의 삶에 대하여 신자로서 뿐만 아니라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며, 특별히 신자로서 빛과 소금의 삶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신자로서, 세상에 속한 백성으로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다.

 


    4.1.1 세상 권세에 대한 의무와 책임

  우리는 이제 관원들과 우리를 다스리는 권세자들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 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시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Murray는 말하기를 "바울은 합법적인 권위에 대하여 복종할 것을 말한다. 우리가 정부 당국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무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13장 1절-7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행정관의 손에 의해서 고난을 받거나 또는 행정관에 의해 적절하게 보복당하는 문제 등을 다루고 있는데, 앞에 기록된 본문이 나타난 이유를 이런 것들과 관련해서 인위적으로 찾아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13:1-7절은 신자들의 생애와 증거에 영향을 끼치는 매우 중대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바울이 이러한 관계를 다루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당시 로마 교회의 신자들에게 관원의 대권과 백성의 의무에 대해서 교훈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고 하였다. 박윤선 박사는 로마서13:1-7절은 "정부에 순종할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원리는, 신본주의 윤리이다. 곧 정권 순종의 이유는,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이다(1절). 물론 정권만이 하나님이 정하신 바는 아니다. 신약 성경에 의하면, 인류 사회에 모든 필요한 제도는, 모두 다 하나님의 제정하신 것이다. 만일 침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침해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권세에 대한 순종의 요청은, 모든 다른 사회 생활 분야의 자유를 무시하는데까지 이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정권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을 명령할 때에도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과 위배되는 정부의 시책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순종을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 문제에 있어서는 신자가 개인적으로 폭군이나 정권을 반역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Calvin은 "다만 공무원이나 혹은 부속 관원들이 폭군이나 혹은 기타 집권자의 방종을 막으려고 합법적으로 운동할 때에, 기독 신자도 가담할 수는 있다" 그리고 "우리 국가를 폭군에게서 건져내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정치 권력이 하나님 앞에서 신성하고 정당할 뿐만 아니라 유한한 인생에게 있어서 모든 면중 가장 존중할 만한 것임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와 은혜와 인애와 공의의 어떤 형상을 자신에게 再現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은 집권자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알고 저들의 권세를 존중히 여기며 정부가 합법적으로 하는 일에 대하여 정부가 국무를 정당하게 집행하는데 있어서 국민이 반드시 순종해야 하며 정부를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근 박사는 "사회생활의 첫째 문제는 역시 국가적 권세에 대한 의무이다. 먼저 원리적으로 권세에 복종할 것을 권하고 그 이유로서 권세가 하나님의 정하신 바인 것과 하나님의 인간 지배의 사자로서 상성벌악하는 것을 든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국가에 대한 각종의 의무를 열거하며 권장하고 있다. 같은 사실은 웨스터민스터 신경에도 계승되었고 그것은 모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마22:21) 하신 그리스도의 교훈에 입각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국가에 대한 태도는 흔히 좌우에 치우쳐 성서의 근본 정신을 그룻 반영하였다. 바울 당시에도 헤롯당 같은 것이 있어 권세에 아부하며 타락한 것은 그 한가지였고, 정면 항거했던 열심당, 소극적으로 도피했던 옛세네파 등은 다른 한 경향이다. 이런 태도에는 참된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있지 않다.

  Matthew Henry는 "우리 머리 위에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을 가리켜 '위에 있는 권세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왕과 그 밑에 따르는 모든 권력자들의 권위와 위엄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공의로운 권세는 복종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임무 부과의 이유는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에서 사회 안녕과 질서, 정부에 원수요, 가이사의 원수요, 공적 권세에 대해 달리 생각을 품기 쉬운 유혹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공적 권세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율법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임무 실천의 이유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앙 때문에 권세자들의 칼을 받기가 쉬웠는데 그들의 반역으로 이걸 더 악화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양심을 위해서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일반 공공 임무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유이다.

  이제 우리의 신앙의 양심으로 하여금 세상의 권세에 복종케하는 의무와 책임을 위한 몇 가지의 이론을 전개하면 다음과 같다(로13:1-6).

  첫째로, 권력의 제도적 측면에서.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권세'라는 말은 보다 문법적인 번역으로서, 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속하는 통치권을 가리키며 또 백성들편에서 요청되는 순종을 가리킨다. 바울이 편지를 쓴 당시에는 정부의 통치권은 로마 정부에 의해 행사되고 있었으므로 따라서 여기서는 정부의 집행자를 직접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기되는 문제는 '권세'가 인간 정권자 배후에 있는 불가시적 천사의 능력을 가리키고 있느냐는 것이다. Oscar Cullmann은 이 경우에서 권세라는 말은 이중적인 언급, 즉 천사적 능력과 인간적 집행자 양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이상근 박사는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이 어조는 현정권을 부정하려는 경망한 태도에 대한 경계조가 보인다. 권세가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는 것은 성경에 일관된 사상이다. 그러므로 주권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신자의 가장 신성한 의무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또한 박윤선 박사는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이것을 구약의 인용절 단2:21, 4:25, 사10:5-6절 등을 보면, 모든 정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 확실하다고 주석한다.

  그리고 우찌무라 칸조우는 로마서13장1절은 이 세상의 정치적 권능에 복종하라는 권면이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정치적 권능이라 해도 모두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께만 복종하고 세상 권세에는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을 경계하기 위한 권면이다. 그리고 이 권능에 복종은 질서이며 평화이다. 따라서 이 국권 복종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그리스도적 사랑의 대정신이다. 바울의 로마 정부에 대한 태도는 복종을 권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박애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제국도 하나님의 섭리중에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로, 권력의 의도적인 측면에서.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이 말씀은 복종의 대상이 되는 정권의 성격을 밝혀 준다. 우리가 복종할 만한 정권은 그 원칙에 있어서 악을 방지하고 선을 장려하기 위하여 보복을 정당하게 실시하는 정권이다. 그리고 권력은 악한 행위와 악인들에게 무서운 존재이며,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칭찬이다. 그리고 여기서 집중되고 있는 사상은 악행에 대한 형벌이며, 정부 관원들의 행위이며, 우리가 국가의 구성원으로 봉사에 의해 취할 수 있는 선에 대한 중대한 정의를 마련해 준다. 즉 국가 관원이 촉진하고 있는 선은 경건의 유익에 도움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양심을 위해서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런 것으로부터 얻는 유익의 측면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우리는 정부의 혜택을 받고, 보호를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부에 충성을 하고 복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책임인 것이다. 우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6절). 곧 양심에 따라 복종과 감사의 표로 바치는 것이다. 우리가 공세를 바치는 것은 마치 축복과 혜택을 돌려 받을 것을 알고 빌려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배워서 실천해야 한다.

  박윤선 박사는 "국가의 명령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닌 한, 신자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내신 제도인 줄 알고 관원의 감시가 있든지 없든지 성의 있게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공세는 인구세로, 국민으로서 나라의 유지를 위해 세금을 잘 바쳐야 한다." 그리고 권세에 복종하는 구체적인 길은 공세를 바치는 것이다. 즉 국가에 대한 양심적 순종의 증거로 납세의 의무와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기 대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한 현존을 경시하지 말고 세상의 권세와 정치를 무용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공의와 평화를 보증하는 자로서, 확립된 정부를 존중하고, 성실로써 사랑하며 복종해야 한다. 이 복종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의 자세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국가의 권력이 부패한다면 인내하며,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중보하고, 감사함으로 복종해야 한다.

 


   4.1.2 개인의 삶에 대한 의무와 책임

  바울은 로마서 12장 9절-21절에서 모든 신자들이 준수해야 하는 공통적인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개인이 실천해야 할 사랑 (우애, 열심, 소망, 인내, 기도, 자선, 관용, 미덕)을 중심으로 개인의 삶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살펴보려고 한다.             

  사랑. 이것은 도덕에 있어서 요긴한 것이다. 사랑만 있다면 그것은 계명 전부를 지킴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제일 결핍된 것은 참된 사랑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남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남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닌 거짓 사랑이다. 세상을 향한 신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있다면 논자는 서슴치 않고 거짓이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 말할 것이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12:9절) 같은 교훈이 고린도 후서 6장 6절에는 "거짓이 없는 사랑"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랑은 그리스도교 전체의 윤리를 표시하는 낱말이다. 일역 성경에는 "사랑은 거짓이 없도록 하라. 악은 미워하고, 선은 가까이 하며, 형제의 사랑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예의로써 서로 양보하라"(롬12:9-10)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사랑은 전적인 사랑이다. 가면적 또는 얕은 사랑은 악을 증오할 줄을 모른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깊고 참된 사랑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열애를 품고, 또 사람에 대하여서도 깊은 사랑을 가졌던 것이다. 참된 사랑은 악을 미워하고 선을 강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시하는 "믿음"과 대응된다. 그리고 이 사랑 "     "는 그대로 믿음의 이면을 말한다. 아가페는 부단히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사람에게 주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되는 사랑 "    "는 인간적인 것으로 이웃 관계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서로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의무는 달콤한 한 마디 곧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말을 제일 먼저 언급한다. "사랑에 거짓이 없나니" 진정한 사랑은 거짓이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아첨이나 겉치레가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사랑에는 "벗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과 원수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이 있다.

  첫째로, 우리의 벗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서로가 빚지고 있고 갚아야 하는 상호간의 사랑이 있다. 정다운 사랑은 "형제애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라(새번역), 육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표준새번역), 이것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같은 것이니 더 없이 부드럽고 더 없이 자연스런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더없이 겸손하고 공손하게 말과 행동으로 우리 자신을 나타내게 한다. 그리고 존경하는 사랑은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이것은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에, 그의 재능이나 소유물에 의하여 그를 잘못 평가한다. 사람의 가치는 그의 재능이나 그의 소유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영혼에 있다.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피 흘려 주신 것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 예의를 겸전한 사랑만이 오래도록 지속하며 결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란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는 생활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풍성한 사랑으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한다. 여기에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 두 가지 제시되어 있다. 교회 내부의 어려운 교우를 돕는 일과 지나가는 나그네의 대접이다. 유무상통은 초대 교회의 미덕이다(행2:44). 시대와 생활 방식의 변천에 따라 그 방법은 변할지라도 그 사실만은 지속되어야 한다. 특히 "공급하며(        )"는 ' 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가진 자들은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공급"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이 자신에게 베푼 사랑을 그는 자신의 고통에의 동참이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능력과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궁핍한 자들을 도와주고, 짐을 덜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과 동거동락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조적인 사랑, 연합된 사랑 또는 통일된 사랑, 공손 또는 겸손한 사랑,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사랑이다.

  둘째로, 우리의 원수에 대한 사랑을 보면,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 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라." 결론적으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는 우리가 선한 것에 대한 선택과 진지한 애착 그리고 그 안에서의 부단한 인내를 표시한다. 그리고 우리가 감정을 이길 때에, 원수의 악독이 역시 감소되고, 그 원수는 점차로 친구로 변화 되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논자는 세상 백성으로서 실존의 삶의 문제를, 그것도 현재라는 시점을 염두에 두고 구속 받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현존 세계에 속해 있다고 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사랑의 실천적인 덕목을 중점에 두고 성화의 길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어 가는 한층 성숙한 삶의 차원을 심층적으로 고찰하여 보았다.      다음으로 천국 시민으로서 교회 중심의 성숙한 신앙의 삶에 대한 의무와 책임,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 성령의 열매 등을 살펴보려고 한다.   

 


4-2 천국 시민으로서

  논자는 앞에서 구속받은 성숙한 신앙의 삶에 대한 세상 백성으로서의 실천적인 삶의 태도로서 사랑을 실천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취급하였다. 여기에서는 현존의 삶 속에서 미래의 천국 시민으로서의 선취된 실존의 삶의 모형으로써 교회 중심의 의무와 책임,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 성령의 열매 등에 대하여 천국 시민으로서의 기본 자세에 대하여 논하려고 한다.

 


4.2.1 교회 중심의 의무와 책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신앙 공동체에 속하여 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노력을 한다. 그리고 가시적인 교회 또는 불가시적인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봉사와 교육과 연보로 신자의 교회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수행한다.

  첫째로, 예배에 대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신자들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이 여기서는 우리의 신앙의 모든 의무와 순종의 원천으로 강조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롬12:1). 이 몸은 희랍어     인데, 이 몸은 인간의 생리적 신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영혼 없는 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말이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신자들이 이상으로만 하나님 봉사를 꿈꾸지 말고, 몸으로 거룩되이 구체적 생활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몸은, 과거에는 더러움의 기계가 되었으나(롬1:24), 이제는 성결의 생활을 위한 기능을 한다. 이제 이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의 전으로서, 거룩한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거룩한 산 제사"인 것이다. '산 제사'는 구약의 죽은 제물, 즉 레위기의 규례를 따라 제단에 죽여 바친 제물의 상대되는 것이다. 신자의 생애가 그대로 하나님께 제사가 되리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몸이 곧 산 제물이다. 그리고 몸을 산 제물로 만드시는 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 속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갈2:20). 거룩한 사랑이 제물을 불태우며 의무에 활기를 불어 넣어 준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다는 말이다(롬5:11절). 그리고 제물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에 상대적인 거룩이다.그러나 우리 마음과 생활이 강직하며 마음과 몸이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일치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그러한 진정한 거룩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성전의 그릇들이 하나님께 바쳐져 거룩하듯이 하나님께 구별되어야 한다. 거룩의 주체는 영혼이다. 그러나 성화된 영혼은 몸에 거룩을 가져다 준다. 몸의 행동이 거룩하면 그 몸도 거룩한 것이다. 이 몸은 "성령의 전"(고전6:19)이니 만큼 "몸을 성결하게 간직해야 한다"(살전4:4,5). 우찌무라 칸조우는 이것을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산 제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희생 제물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거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희생 제물은 산 것이라야 한다. 이 점에서 신약의 희생 제물은 구약의 그것과 다르다. 구약에 있어서는 소나, 양이나, 염소는, 잡아 화제로서 여호와 앞에 드려졌으나 신약에 있어서는, 신자는 그 몸을 산채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즉 신자는 살아서 선행의 선한 열매를 맺는 희생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그릇으로 쓰이기 위한 희생 제물인 것이다. 성화된 몸과 영혼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John Murray는 바울은 '몸'이란 말을 온 인격을 대표하는 데에 쓰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산 제사로 바쳐야 할 것은 죄의 몸이나 범죄한 몸은 아니다. 로마서6:13절은 이것의 부록으로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라." 신자가 드려야 하는 것은 죽음에서 살아난 몸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죄의 몸이 멸했기 때문에 죽음에서 살아난 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려야 할 몸은 그리스도의 한 지체며 성령의 전이다(고전6:15,19).

  그리고 예배는 영적인 것이다. 이 예배는 이성의 행동이 요구된다. 몸을 바치는 것은 영혼이기 때문이다. 너희의 영적 예배란 말씀은 희랍어인데, 이것은 '말씀에 입각한 너희의 예배'라고 읽을 수도 있다. 말씀에 입각한 예배라야만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만한 예배인 것이다. 이것이 복음적인 예배요 영적인 예배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성적인 피조물로서의 우리를 상대하고 계신 만큼 우리 또한 그런 신분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다른 곳에서는 결코 사용하지 아니했고, 여기서만 이 분명한 용어를 쓰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다. 여기서 말한 예배는 경배적 예배이다. 바울은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특징짓는다.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정신과 지성을 열거하고 사실로 보아 하나님께 합당한 성질을 이끌어 오고 있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이 예배는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것과는 대조적인 합리적인 예배이다. 이처럼 우리의 몸과 영혼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이것이 천국 시민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신자들의 의무이며 동시에 책임인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응답하며 그 응답에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둘째로, 봉사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후에 그분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오직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롬12:3),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롬12:6-8),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해야 한다.

  그런즉 우리는 이제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재능, 은혜, 직분, 믿음에 관한 다양성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성화에 관련된 지침(指針)을 보게 된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임에서 그에게 수여된 특별한 은혜를 언급하고 있다(롬1:5, 15:15,16, 고전3:10, 15:9,10, 갈2:9). 바울은 적절하게 이 은혜를 활용했다. 그리스도의 몸의 통일성 안에서 다양성을 인식케 하며, 질서와 조화 유지 및 맡은 바 직분을 행해 내는 지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하나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는 많은 지체가 존재한다. 인간의 몸은 지체 자체의 특수한 기능을 지닌 많은 지체를 소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개념이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지체는 많으나 그 지체들이 동일한 기능을 이행해 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신자의 공동체 속에 투입하려는 것이다. 지배적인 사상은, 곧 피차 의존의 조화 속에서 믿음의 분량에 따라 역사되어지고 있는 은사와, 직분의 다양성이 표현양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분배해 주셨던 성령의 모든 은사들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봉사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들은 피차간의 은사 및 은혜를 공유하고, 다양성은 각 지체들을 부요하게 한다. 초대 교회의 공동체는 철저하게 분배가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그리고 신도들은 자신이 받은 은사에 따라서 교회를 중심으로 봉사하는 생활을 통해서 자신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헌신적으로 참여 하였다. 그러므로 시대와 환경은 다르다 할지라도 현재를 살고 있는 신자도 자신이 받은 은사와 믿음의 분량 대로 천국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중심으로 봉사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자율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거절하는 것은 내 속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문제는 믿음의 분량이다. 어떤이는 5달란트, 혹은 2달란트, 혹은 1달란트의 분량이다. 교회생활에서 빠지기 쉬운 과오는 자기의 받은 은사를 과대시하고 남의 것은 무시하는 데서 일어나는 신앙적 교만이다. 여기에서 교회의 분규와 혼란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품지 말고 -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를 가지고, 각자가 자기의 본분을 지키는 겸손의 미덕이 필요하다. Augustine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첫째 중요한 것은 겸손이요, 둘째 중요한 것도 겸손이요, 셋째 중요한 것도 겸손이다"고 했다. 진정한 아름다움 봉사는 자기를 나타내지 않는 겸손에 있다.       

  셋째로, 교육에 대하여.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오직 한 번 교육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디모데 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신자들의 교육을 위한 택스트를 바울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교육의 홍수 시대라할 수 있을 정도로 각종 교육이 다양성을 띠고 이루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학 교육에 있어서도 다양하게 폭넓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통하여 교육하는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다양성을 띤 교육이 학교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우리의 신앙 생활에 새로운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 등을 말하면 잘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오직 자기와 직접 관련이 없으면 접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택스트로하여 신앙의 질적인 성장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교육을 받을 권리로서의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만큼 믿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화의 성숙은 교육적인 과정을 통해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교육은 우리의 신앙을 윤택하게 하며 하나님의 구속받은 자녀로서 하나님의 목표에 도달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기초 교육은 매우 바람직하며, 신자들은 더 나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넷째로, 연보에 대하여. 바울은 연보에 대하여 고린도 전서에 2회, 후서에 5회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성도를 위한 연보에 대하여 언급한다. 바울은 유대에 있는 교인들의 고난과 빈곤을 도울 특별한 연보를 걷도록 권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 권면을 하면서 신중하게 갈라디아 교회를 언급한다. 이것은 교회 간의 경쟁을 피하면서 그들이 자유롭게 연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연보하는 방법은 모든 각 사람이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는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축복의 결과이다. 따라서 연보금은 하나님께서 축복 하신 대로 하면 된다. 그리고 연보를 하는 때는 매주일 첫날에 즉 주의 날에 한다. 이 날은 거룩한 안식일이다. 이 날의 모든 일은 자비의 실천에 집중된다. 자비의 일은 하나님께 대한 참 사랑의 열매이다. 바울은 그가 갈때까지 모든 것이 준비 되기를 원했다. 이처럼 준비된 연보는 고난 당하는 형제에게 사랑을 더 잘 전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바울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연보에 동참할 것을 권면한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마게도냐 교회들의 관대함을 알개 한다. 마게도냐 사람들은 그들이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사랑으로 구제하는데 동참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넘치게 연보를 하였다. 마게도냐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연보를 드렸다. 이 교훈을 들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은 거액의 연보를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드렸다. 그리고 바울은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로 알고 미리 준비케 한다. 이것은 연보가 억지가 아니라 참 연보답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논자는 연보의 본래적 의미를 바울 서신을 통하여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연보는 시대를 초월하여 현재 우리 시대에서도 장려되어야 한다. 교회가 고난 당하는 자기 민족을 외면하고,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참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자교회 성장에만 관심을 치중하지 말고, 이제라도 바울 서신을 통하여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고난 당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연보를 하고, 우리 주변에 소외된 민중들을 구제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 천국 시민의 의무이며 책임이 아닌가? 이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속받은 천국의 시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실천이 요구된다.

  이제까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천국 시민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 실천적인 측면에서 예배의 기본적 의미와 봉사와 신앙 교육 그리고 연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에 대하여 선교적인 측면에서 다루어 보려고 한다.

 


    4.2.2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 

  "성경은 전 세계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설명한다. 또한 하나님이 전 세계     의 창조주 사상과 하나님이 전 세계의 통치자이기에 하나님을 숭배한다. 그     리고 이스라엘의 구별은 만민에 대한 관심을 배제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의 주변 이방인들은 그들의 신들이 자기 나라 속에 성육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이스라엘 역사는 주변 국가들의 눈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표     본적으로 역은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적이다.

  바울이 선교를 시작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세계화다. 유대교가 유대 지역적 한계를 가지고 또 유대 문화적 한계를 가지고 그것을 고집하고 있었지만, 바울은 그것을 과감하게 탈피하여 복음을 세계화하려고 했다. 원그리스도 교회의 어떤 선교자도 자신의 목표를 그렇게 넓게 정하고 복음을 사람이 사는 세계의 끝까지 전하려고 하지 못했다. 바울은 그의 희심 이후 선교사로서 이방인들 사이에서 활동을 했었다. 바울은 아직 그 자신의 활동은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기미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늦어도 소아시아 지방 이래 또는 마게도냐 지방을 통해 데살로니가에 이르는 도중에서 로마가 먼 목표로 그에게 떠올랐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시사해 주는 것은 후에 쓴 로마서에서의 자신의 진술이다. 즉 그는 이미 오래 전에 로마에 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선포할 것을 계획했으나 방해를 받아 왔다(롬1:13, 15:22)는 것이다. 바울의 기본 신념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미 전해진 곳에서는 설교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롬15:20, 고후10:15,16). 그러나 로마는 그에게 서방을 향한 그의 더 넓은 선교 여행을 위해 주요한 곳으로 남아 있었다(롬15:24,28). 바울의 선교 계획들은 스페인에 이르는 전세계를 자신의 선교에 맺어 놓으려는 의도가 있다. 그는 반복해서 '온 땅'(롬10:18), '땅 끝'(롬10:18), '모든 백성'(롬15:11)에 관해 말하고 있다. 바울로 하여금 이 거대한 구상을 하게 한 근거는 십자가에 달린 자,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 그가 도래하여 그의 주권을 신에게 넘겨줄 때 신은 그를 만물의 主로 높이고 그의 주권은 임박한 종말까지 지속된다는 신념이 있었다(롬15:16, 고전15:24, 고후2:14). 바울의 독특성은 철저한 종말 의식과 위기의식을 가지고 복음의 세계화를 추구한 것이다. 바울이 主에 관해 말할 때는 언제나 그는 예배에 모이는 개체 교회의 主일 뿐만 아니라 전 우주의 세력들의 主이기도 하고(빌2:6-11), 부활하여 올리움으로 죽은 자와 산 자들의 主가 되었다(롬14:9)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복음의 세계화를 추구하면서 당장 부딪치게 된 것이 바로 토착화의 문제이다. 유대 문화권에서 출발한 기독교가 이질 문화권에 들어가서 그들의 문화에 복음을 이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바울은 전통적, 묵시적 사상 체계로 복음을 해석하지만, 문화의 이질적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 복음을 해석학적으로 변용하여, 그 지역의 사람들이 가장 잘 수용하면서도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는 것으로 복음을 해석한다.

  논자는 바울의 해석학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문화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토착화는 필연이다. 문제는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복음의 본질이 변화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세계를 향해 선포되어야 한다. 바로 바울의 토착화에 대한 복음 선포의 전략은 그 시대의 문화권에 적절하게 본질을 유지하면서 가장 쉬운 의미가 전달되도록 복음을 재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토착화 과정에서 바울은 두 가지 반대에 직면한다. 예루살렘에서는 복음의 유대적 근원을 무시한다고 비난하고, 헬라 지역에서는 지나치게 복음을 자신들의 에토스로 해석하는 어려움이다. 그러나 복음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역시 영광 중에 오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박한 출현의 기대 속에서 그의 생전에 종말의 구원을 희망한다. 그러므로 그는 "현재적인 약한 세대"와 현재적인 "구원의 날"에 관해서 언급한다. 그의 임박한 출현의 기대는 바울에 따르면 현재가 종말 이전의 구원의 때임을 보여주며, 이러한 구원의 현실에 의해서 믿는 자들의 실존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바울도 역시 현재를 구원의 시대와 구원 완성의 희망의 병행으로, 그 둘을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사건과 결합시키고, 잠정적이며 또 완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바울은 - 원시 공동체의 체험과 관련하여 - 구원의 현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공동체의 실존에서와 개개 그리스도인의 영의 체험에서 본다.

  또한 바울의 복음 선교에 대한 전략은 먼저 헬라 세계의 도시를 축으로 하는 도시 중심의 선교 전략을 펴 나갔다. 그리고 그는 복음의 세계화의 마지막 중요 거점 도시로 로마의 역할을 분명히 하기 위해 로마서를 집필하게 된다. 그리고 바울은 재정 문제에 대해서는 선교지마다 적절하게 자기의 입장을 정리한다. 대표적인 교회는 빌립보 교회이다.

  바울은 시대의 문제를 직시하는 능력과 기존 종교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안목을 가진 인물이었다.

  21세기를 바라보고 세계 복음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식시키려는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선교 현장을 통해 오늘의 선교에 대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위임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여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제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구속을 위한 준비로서 성령의 열매를 살펴보고자 한다.

 


    4.2.3 성령의 열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가 되신다. 또한 성령은 인격자로서 지적인 요소와 정적인 요소 그리고 의지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은 유일한 영이시다. 성령은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의지적 행동과 정신적 활동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신다. 그리고 구원받은 천국 시민으로서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격려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 참 신앙은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성령 안에서의 삶을 통하여 신령한 열매 및 윤리적 열매를 보아 가늠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자는 무엇보다 성령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 성령의 열매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째로, 성령의 인격성에 대하여. 이단자 Arius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령의 인격에 관한 성경적 교훈에 대하여 성령은 단지 피조된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에네르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영원성과 성령의 인격성을 부정했다. 그러나 성령의 교리와 변천은 실로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었지만 복음주의 정통 기독교 신앙의 주류는 성경에 나타난 계시에 따라 성령은 한 인격자이심을 주장한다. 즉 성령의 속성이 그의 인격성을 증거하며, 성령의 사역이 그의 인격성을 증거한다. 또한 인칭 대명사의 사용이 그의 인격성을 증거한다. 이처럼 성령은 인격자이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행동하게 하며, 성령의 의지에 따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성숙한 천국 시민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다.

  둘째로, 성령의 신성에 대하여. 정통적인 기독교는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함께 긍정하여 왔다. 핫지는 "제4세기 이래 성령의 참된 신성은 그의 인격성을 받아 들이는 사람들에 의해 부정된 일이 결코 없었다"고 말했다.

  Cummings는 "구약에 성령에 관한 언급이 86회, 신약에 261절수 중에서 복음서에 56구절, 사도행전에 57구절, 바울서신에 103구절, 그밖에 다른 곳에 36구절에, 성령에 대한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거룩한 성경에는 성령의 신성의 증거가 넘치도록 풍성하다.

  셋째로, 성령의 속성에 대하여. 성령의 속성에 대한 성경적 계시는 완전한 신성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오류없는 결론으로 인도한다. 바울에 의하면 성령은 생명을 소유하고 계신 것으로 계시되어 있다. 또한 인격의 속성에 대한 증거는 이미 열거한 바 있다. 성령은 무소부재하시며(시139:7), 전지하시며(고전2:10-11). 전능하시며(창1:2), 거룩한 영이시며, 영원하시다(눅11:13, 히9:14).

  논자는 앞에서 성령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이제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한다.

  바울은 로마서 8장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다. 죄로 말미암는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생명의 성령이라고 말한다. John Murray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 안에 역사하며 작용하는 하나의 권세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하며, 지배적인 사상은 죄책에서의 구출보다는 죄의 권세, 곧 "죄와 사망의 법"에서부터 우리의 구출이라고 주석한다. 이러한 사상은 내적인 작용의 영역에서 움직이는 것이지, 객관적인 성취의 영역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작용이 바울에게서 멀리 떨어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 구절에서 분명해 지기 때문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3절)을 하나님은 생명의 성령을 통하여 행하셨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생명의 성령의 내적인 작용에 의해서 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우리를 억압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죄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구체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의 열매이다. 이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신앙의 덕목들이다. 바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은 열매를 맺도록 내성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를 논한다. 인간이 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신자에게 있는 자유는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사랑으로 종노릇하며, 이웃을 사랑하기를 자기 몸"같이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는 성령의 소욕을 덧입어 내성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그 결과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행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 안에서 새 생활의 정정당당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맺는 삶의 열매를 가리키며 또 그러한 열매들을 맺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들을 대적할 율법도 없으며, 어느 누구도 성령의 열매를 소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맺는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하여 성령을 힘입고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숙한 신자에게 남겨진 의무이며 책임인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어떤이는 영벌에, 어떤이는 영생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제 논자는 긴 여행을 마치고 결론으로 나가고자 한다.

 


제5장 결론

 


  5-1 요약

  본 논고는 몇 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출발했다. 현대 사회의 특성상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중심인 구속에 대한 위기의식, 구속에 대한 일반적인 보편적 이해 결여, 특히 기독교 신앙 공동체 속에 있는 성도들의 구속에 대한 본질적 의미의 이해 결여, 현대 종교의 특징인 종교 다원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범신론적 구원관에 의한 기독교의 구원관의 유일성 파괴 등이 논제로 제시 되었다.

  구속의 개념 및 구속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먼저 어원적 접근을 통해 구속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고, 성경적으로 구약 성경에서는 인류의 시조,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과 맺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구속사의 맥락에서 보았으며,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예언의 성취로서의 구속사를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에서 그 개념을 파악, 통일성 있게 구속에 대한 개념을 이해했으며, 다양한 신학자들의 구원관을 폭넓게 약술함으로서 보다 깊이 있게 구속에 대한 개념을 이해했으며, 본 논고의 주제에 자연 스러운 접근을 위하여 역사적인 측면에서 구속사란 무엇인지를 일반 역사와 관계해서 역사와 구속사 사이의 관계를 언어적으로 역사적 예수에 초점을 두고 불트만 계열을 중심으로 접근해서 실존적인 문제에 취급했다.

  그리고 본 논고의 주제문으로 로마서 본문을 중심으로 바울이 제시한 구속의 교리를 구속사의 흐름에서 접근하여 논자의 견해가 투영된 점층적 구조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하는 유죄 선언 즉 죄의 선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롭다 하심 즉 칭의,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하심에 의하여 중생한 신자들이 나아가야 할 성결의 생활 즉 구원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성화, 성화의 삶을 통해서 얻게 된 무죄 선언 즉 정죄 없음, 구원의 완성을 통하여 얻게 될 최종의 목표인 영광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본문을 중심해서 여러 신학자들의 주석을 참고하여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바울의 구원 선포가 종말의 미래의 현재성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이렇게 구속 받은 성도들이 성숙한 신앙의 삶을 위해 나아가야 할 실천적인 문제를 세상 백성의 입장에서 국가에 대한 구성원으로서의 의무와 책임, 개인으로서의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그리고 천국의 시민권자로서 교회 중심의 예배 생활, 봉사 생활, 교육을 통한 제자의 생활, 연보를 통한 구제하는 생활 등을 살펴 보았으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위임령을 실천하기 위한 복음 선포와 성령 안에서 열매 맺는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성경을 중심으로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을 다루었다.

 


5-2 비판 및 제언

  바울의 구속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난해한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바울이 희심한 후, 그의 사역 말기에 로마에 있는 신앙 공동체의 신앙 훈련을 위하여 이 서신이 구속의 교리를 중심으로 쓰여졌는데, 그 핵심은 바울 자신의 경험에 의한 신학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시대도 다르지만 바울과 똑 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바울이 본래 의도했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는 방향성을 가지게 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종말의 미래의 현재성에서 이 구속사 교리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자는 객관적이면서도 어느 정도의 주관적인 입장에서 본 논고를 종말의 미래의 현재성을 염두에 두고 다루었다고 생각을 한다.

  이제 본 연구를 통해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성을 두 가지만 제시한다.

  첫째는, 많은 신학도들이 바울의 구속사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관점에서 좋은 논문을 많이 남겨서 후학들이 바울을 이해하고 성서 전체의 주제인 구속사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면 한다.

  둘째는, 실천적인 측면에서 구속사를 이해하는데 머무르지 말고 실존의 삶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세계화가 실현되도록 오늘의 신학도 및 신자들이 바울의 영성과 신학을 새롭게 정립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사건이 아닌, 미래의 사건이 아닌 현재의 사건으로 이 시대의 언어와 환경에서 바울의 구속사가 재해석 되어야 한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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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이야기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신국론)

 어거스틴이 기록한 '하나님의 도성'은 총 22권으로서 방대한 분량과 방대한 주제와 내용, 그리고 어거스틴의 신학과 철학과 사상, 그리고 해박한 지식이 총망라되었다고 볼 수 있고, 또한 그의 통찰과 지혜가 드러나는 책이다. 이책의 저술 기간만 해도 14년이 걸린 어거스틴의 역작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총 22권으로서 1-10권 까지는 기독교에 대한 변증에 관련된 것이고, 그리고 11-22까지는 두 도성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

로마제국의 강력함이 주후 410년 얄라릭이 이끄는 야만족(고트족)에 의해 맥없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심한 혼란과 회의를 느끼고 로마제국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절대에 가까운 신앙을 가지고 있던 그가 지사의 나라는 영원 할수 없다는 것을 크게 인식하고 '하나님의 도성'을 기록하게 된다.

로마에 쳐 들어돈 야만족들의 침입과 약탈에 대한 로마 자체 내의 책임론이 심하게 일어나고, 또한 그 책임이 부당하게 기독교인들에게 돌려지는 것들에 대해서, 기독교를 변호하고 로마의 위기는 야만족의 침입 이전 부터 선재되어 있음과 로마의 도덕적인 타락이 원인이고 그것은 또한 로마의 참된 종교의 부재가 원인이라고 변증함으로 기독교를 보호하고 또한 로마의 자체의 우상숭배와 무지함을 비판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로마의 종교와 문화,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은 기독교인들에 비난이 돌려져서는 안될 것들에 대해서 명확히 선을 긋고 있다.

야만인들에게 공격을 당한 후 로마인들은 기독교에 대해 비난을 했는데, 기독교인들은 로마가 부당하게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그때 기독교인들이 베푼 관용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교회로 피신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품어주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비난하는 그들은 어리석음과 무지와 착각의 산물인 것이. 로마는 이미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종교와 도덕의 타락이다. 그것은 로마 전역의 문제이다. 이것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비기독교적이고 반 기독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설명하는 것과 또한 기독교인들에게는 힘과 위로를 주었다.

그리고 나서 어거스틴은 2에서는 두 도성을 구별한다. 이 두 도성은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지상의 도성(civitas terrena)인데 라틴어의 키비타스(civitas)라는 단어와 개념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이 도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또한 이 도성의 혼합되어 있는 지상의 삶의 실상과 또한 교회에 대한 인식과 실재들을 다루고 있다.

어거스틴은 이 지상의 현실 정치에 대한 입장과 그리스도인의 입장들을 명확히 했는데, 그것은 이전의 현실 도피적인 신앙과 내지는 현실 적응주의나 타협과 동화주의를 배제하고 균형잡힌 사상을 갖는다. 현세정치 제도는 죄의 산물로 생겨난 것이고 인간의 타락 이후에 인간의 이기심과 죄, 지배욕에 대해서 이것을 어거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성이 이루어지기 전에 나타나는 과정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또한 그것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거나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닌 입장을 견지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사람들도 이 세상의 도성의 정치에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에서 살고 있는 한 이 땅의 유한하지만 선인 것을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하다거나 절대적인 성격을 갖지 않기 때문에 이 땅의 선한 것일 할지라도 안주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에서의 행복한 결말에 대해서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지막 최고의 선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채워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철저히 나그네적인 삶이요, 순례자의 삶이다. 시간과 영원의 관점에서 지상의 도성과 삶을 조명하고 또한 영원의 관점에서 상대적이고 시간적인 세속의 삶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상대화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가 사용하는 키비타스(civitas) 개념과 그로 인하ㅏㄴ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차이점은 신플라톤주의 영향과 플라톤의 영향이 있다. 플라톤은 참된 이데아와 이 세상이 참된 이데아의 그림자라고 생각했다. 이데의 세계는 영원성과 불변성, 그리고 존재론적인 특징을 갖는 반면, 물질 세계는 시간성, 그리고 변하는 속성과 비존재적인 특성을 갖는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도성과 신의 도성을 성격을 구별하여 정의 한 것이다.

두 도성의 기원에 관해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은 아벨에서 기원을 찾고 지상의 도성에서는 가인에게서 기원을 찾는다. 그리고 가인은 지상의 도성인 "에녹성"을 지은 최초의 지상의 도성을 건축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보고 바른 사랑을 카리타스로, 그릇된 사랑을 큐피디타스로 구별한다. 하나님의 도성의 사람들은 전자로, 지상의 도성의 사람들은 후자로 본다. 어거스틴은 국가적 개념에는 키케로의 것을 따고 있지만 국민의 개념은 바로 사랑으로 특징 짓는 것으로 나누고 있다.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기원과 전개는 바로 그것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연결되어 나타나고 또한 그 결말은 확연하게 나누어 진다. 지상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이 지금 혼재되어 있으나 결말은 확연하게 나누어 질 뿐 만이 아니라 결말의 차이가 있다. 이 땅에 있는 지상의 도성을 절대화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심판에 이른다. 그러나 이 세상의 상대성과 유한성을 알고 이 땅 지상의 도성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도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참되고 영원한 행복을 얻게 되고 참된 정의와 하나님과 이웃과의 영원한 교제에 이른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교회를 가장 최고의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영역으로 보고 있다.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이 혼재되어 있고 하나님의 도성의 사람과 지상의 도성의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떠나 존재할 수 없으며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영원한 종말의 완전한 하나님의 도성과는 다르기 때문에 동일시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도성의 표지판이요 안내판이다.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과도 구별되고 세속의 지상의 도성과도 구별되는 곳이요, 또한 순례자와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된 권위이다. 어거스틴은 결코 저 세상의 피안만을 지향하는 태도를 갖지 않고 또한 세계 내에서의 변혁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그리고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역사철학은 하나님의 도성의 기원과 발전 그리고 결말을 통해서 그리고 두 도성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사랑에 의해서 역사를 형성하고 또한 두 도성의 역사의 차이를 낳게 한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은 이 세상의 현실 정치와 제도에 대한 완전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성 개념을 통하여서 역사를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도록 하는 중요한 통찰과 안목을 주고 있다.

어그스틴은 이를 위해 바람직한 사회와 타락한 사회, 즉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비교를 통해 사회의 정치, 문화, 윤리적 이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암시한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역사에 두 도성의 실재를 통해서 진리를 따르고 윤리적 성숙을 지향하는 도성, 그리고 탐욕과 명예에 집착한 나머지 진리를 외면하고 윤리를 상실한 도성, 이 두 도성의 차이가 바로 역사의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믿은 로마가 야만족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시간 안에 있는 지상 나라의 불완전성과 한시성과 상대성을 바라보고, 또한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과 또한 행복한 종말론을 내리고 있다.

어거스틴은 신학만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도성을 통해서 믿는자나 믿지 않는자의 역사철학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주고 또한 그것이 성경을 기반으로 한 역사철학이라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성경과 세상 학문, 성경의 세상의 역사, 성경의 삶과 이 세상에서의 삶, 그리고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이런 포괄적인 주제와 내용을 통해서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통찰과 역사에 대한 안목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이 저술을 통해서 고대 세계는 중세라는 역사의 전환점을 갖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말씀과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며 경천동지의 경험이다. 그것은 이 세상이 쌓아 놓은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삶의 방정식, 삶의 원리와 내용에 대한 전혀 새로운 안목과 통찰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성경을 연구하고 법학과 수사학을 공부하고 라틴 문화와 서적들을 통해서 전 영역을 넘나들며 펼쳐가는 그의 신학적 작업은 지금의 첨단의 발전을 가져온 신학자들에게도 혀를 내둘게 한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신학과 서적은 나중에 종교개혁자들의 필수 교과서가 되었고, 이것은 다음의 신학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한 사람의 능력과 영향력은 바로 이런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도성 전체에 대한 글을 언젠가는 한번 써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면 그 때 한번 더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도성' 전문을 읽기를 원하는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읽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고하실 것은 하나님의 도성 전문을 읽고 이해하는 시간이 성경을 적어도 5-6 번 읽을 수 있는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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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예정(豫定)과 인간(人間)의 자유(自由)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이 자유라고 하는 개념과 예정이라는 교리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의 경륜이 깊어 갈수록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혼자서 생각하기에는 벅찬 주제라고 생각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 있는 학자들의 가르침을 따라 이해 할 수 있는 데까지 이 문제를 알기 쉽게 정리함으로 우리의 믿음의 터를 더욱 돈독하게 하려고 한다.
자유(ejleuqeriva, Freedom)라는 말은 매우 흔하게 쓰이고 있는 말이면서도 우리가 잘못하면 오해할 수 있는 말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자유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자유가 어디까지 자유한 것인지를 밝히 앎으로써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예정(豫定)

예정론은 신학적인 교리로서 무엇보다도 칼빈주의와 연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정해 놓으셨는데 그 중에는 궁극적인 구원과 인간의 유기(遺棄)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예정 교리는 수많은 복음적 교회들의 신조들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교회와 국가에 현저한 영향을 끼쳤다. 아마도 예정에 대한 가장 완전한 표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에 나타나 있는데,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란 전세계 대부분의 장로교회들과 개혁교회들에 있어서는 권위 있는 신조(信條)이다. 또한 영국 국교회와 미국의 감독 교회는 39개항의 온건한 칼빈주의 신조(信條)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침례교회와 회중교회는 일반적으로 공식적인 신조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교회들의 수많은 대표적인 신학자들의 저서들 속에는 이 예정교리가 나타나 있다.
기독교회의 처음 3세기 동안에 교부들의 글 속에는 이 예정교리가 주로 미 개발된 상태로 되어 있었다. 이 예정 교리는 어거스틴에 의해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는데,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 구원의 유일한 근거라고 했다. 중세 시대에 안셀름(Anselm)과 롬바르드(Peter Lombard)와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다소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랐으며,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만물을 개괄적으로 섭리하고 통치하는 것과 어느 정도 동일시됐다.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인 위클리프(Wycliffe)와 후스(Huss)는 엄격한 예정론적 견해들을 주장했다.
개신교 종교 개혁 시대에는 이 예정 교리가 루터(Luther)와 칼빈(Calvin)과 쯔빙글리(Zwingli)와 멜랑크톤(Melanchthon)과 낙스(Knox)와 그 당시의 모든 탁월한 지도자들에 의해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그런데, 멜랑크톤은 이후에 자기의 견해를 수정하였고, 그의 지도를 받은 루터 교회는 이 예정 교리를 반대하게 되었다. 루터의 주요한 저서인 [의지의 굴레](The Bondage of the Will)와 [로마서 주석](the Commentary on Romans)에는 루터가 칼빈과 같이 이 예정 교리를 충성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예정 교리를 분명한 논리로써 강조한 사람은 칼빈이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이 교리는 '칼빈주의'라고 명명되었으며 개혁 신학 체계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교리가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들과 미국에 처음으로 이주한 사람들, 그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계약파들(the Covenanters)과 불란서의 위그노들(the Huguenots)도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근래에 이 예정 교리는 휫필드(Whitefield), 핫지(Hodge), 댑니(Dabney), 커닝햄(Cunningham), 스미드(Smith), 쉐드(Shedd), 스트롱(Strong), 카이퍼(Kuyper), 워필드(Warfield)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는 이 교리가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지극히 거룩하신 계획에 따라 장차 되어질 모든 일을 자유롭고 변함없게 예정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죄의 창조자라는 것도 아니요, 모든 피조물들의 의지가 강압을 받는다는 것도 아니요, 제 2인자(因者)들의 자유나 우연성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성립하는 것이다".
예정 교리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목적이 모든 유한한 피조물에 대해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고 독자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오직 그 뜻의 영원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하나님은 자연의 운행을 지시하시며 역사의 진행을 가장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뜻은 영원 불변하고, 거룩하고 지혜로우며, 주권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미래 모든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豫知,foreknowledge)의 근거가 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은 미래 사건에 대한 지식이나 미래 사건들 자체에서 비롯되는 어떤 것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면, 그 이전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결정을 했던 것이 분명하고, 우리의 예지(豫知)는 우리의 결정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결정에 뒤따르는 것임이 분명하므로, 우리의 예지는 우리의 결정에 근거한 것이 확실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미래를 예지하고 계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미래를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이 예정 교리가 나타나 있는 몇몇 성경의 참고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 .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 . .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1), ". . .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성에 모였나이다"(행4:27, 28), ". . .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행2:23)등이다. (행13:48; 롬8:29, 30; 9:11, 12, 23; 고전 2:7; 엡2:10; 시139:16참조)
심지어는 인간의 범죄 행위조차도 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인간의 범죄 행위도 예견되고 허용되어 정확한 곳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통제되고 다스려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못박히심은 인류역사상 최악의 범죄임에 틀림없지만,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정확히 꼭 필요한 곳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행2:23; 4:28)
선택(選擇)교리는 특정한 사람들의 선택과 관련된 것으로서, 일반적인 예정 교리를 특별하게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마치 예정의 교리가 죄인의 구원과 관계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성경은 일차적으로 죄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 선택의 교리는 자연히 특별한 곳에서만 언급되는데, 이 선택이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만 약 48회 나온다. 이 선택을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데,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차이점과 공로보다 앞선 것으로서 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류는 두 부류로 나뉜다. 즉 그 한 부류는 영생을 얻도록 선택된 자들이며, 다른 한 부류는 영원한 사망에 버려지게 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뜻은 아담 안에서 구원 얻을 만한 절대적인 호기(好機)를 가졌지만 그것을 놓쳐 버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가리킨다. 이런 자들은 타락의 결과로 죄책에 사로잡혀 있고 부패해 있다. 따라서 그들의 동기는 그릇되어 있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모든 권한을 상실해 버려서, 모든 타락한 천사들처럼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당연히 받게 될 것이다. 그 반면에 인류의 한 부류인 선택받은 자들은 죄와 죄책의 상태에서 구원을 받고 거룩함과 축복의 상태에 들어간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단지 파멸된 그들의 이전 상태대로 그냥 남아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근거 없는 처벌은 아무 것도 받지 않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단지 사람으로 취급하실 뿐만이 아니라 죄인들로 취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 선행(good works)이란 구원에 종속되어 나타나는 것이고,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 . "(요15:16)라고 했다. 그리고 바울도 말하기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행은 구원의 열매요, 증거이다.
칼빈주의자들 간에도 신적 계획 속에 있는 사건들의 순서에 관하여 서로 다른 몇 가지의 견해들이 있어 왔다. 그 문제점은 이것이니,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피조물들을 그 섭리의 대상으로 생각하셨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 창조하신 인간들을 모두 동등한 섭리의 대상으로 생각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타락 후 선택설 학자들(Infralapsarians)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의 일부분만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건들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기를, (1)창조하시고, (2)타락을 허용하시고, (3)이 타락한 사람들 중의 일부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시고, 나머지 타락자들을 그대로 버려두시며, (4)선택자들을 위해서 구속주를 예비하시며, (5)성령을 보내사 이 구속을 선택자들에게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의하면 선택은 타락에 뒤따르는 것이다.
타락 전 선택설 학자들(supralapsarians)의 견해에 의하면, 그 사건들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기를, (1)창조될 인간들 중 일부는 생명을 주시기로 선택하시고 다른 일부는 파멸하기로 선택하시고, (2)창조하시고, (3)타락을 허용하시고, (4)선택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5)성령을 보내사 이 구속을 선택자들에게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의하면 선택은 타락에 앞선다.
그리고 토기장이는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리가 있다고 했다(롬9:21). 즉 선택받은 자와 선택 받지 못한 자가 원래는 동일하게 불행에 처한 존재들로 간주되었다.

예정(豫定)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예정을 하셨다고 하면 인간의 자유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고 묻고싶어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정하시는 폭이 두 사람도 피할 수 없이 좁은 예정이라면 거기에는 아무런 자유도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유가 없다면 거기에는 책임도 물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하면 인생은 그야말로 숙명론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협소하고 협착한 예정을 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예정(豫定) 즉 제한(制限)은 극히 작은 부분이고 인간에게 주신 자유(自由)는 충분(充分)하게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넘치도록 부여받은 자유를 누릴 때에는 그 후에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진리로 인도하는 문은 언제나 좁아 보인다. 그리고 그 길이 협착해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다.
그러나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우선 보기에 넓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에 보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에는 자유가 있고 갈수록 넓어지고 자유롭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많이 찾는 그 넓어 보이는 문은 들어갈 때는 넓어 보이나 갈수록 협착해서 나중에는 돌이킬 수도 없는 곳에 이르게 되고 마지막에는 막힌 곳에 당도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 밑이 빠지면서 밑이 없는 갱속(無低坑)으로 들어가게 된다.
처음에 좁은 문으로 들어온 우리가 걸어 갈 수 있는 길의 폭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당히 자유롭고 넓다. 우리가 허락하신 길 위를 걸어가면서도 좌편으로 걸어 갈 수도 있고 우편으로 걸어 갈 수가 있다. 결코 선택의 여지가 없이 비좁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면서도 천천히 갈 수도 있고 부지런히 갈 수도 있다. 열심히 일하면서 갈 수도 있고 빈둥빈둥 놀면서 갈 수도 있다. 사치하면서 갈 수도 있고 근검 절약하여 남을 도와 가면서 갈 수도 있다. 겸손히 걸어갈 수도 있고 교만한 걸음으로 갈 수도 있다. 불평 불만과 원망을 토로하면서 갈 수도 있고 찬송하면서 갈 수도 있다. 위를 쳐다보면서 걸을 수가 있고 땅만 보고 걸을 수도 있다. 앞을 보고 걸을 수도 있고 계속하여 뒤를 돌아다보면서 걸을 수도 있다.
진리를 따라 살수도 있고 욕심을 따라 살수도 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살수도 있고 유행을 따라 살수도 있다. 주님의 뜻을 따라 계명을 따라 살수도 있고 기분대로. 제멋대로 살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 예정하셨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없이 속박되거나 억압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로 인한 책임 때문에 오히려 너무 많은 자유가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솔로몬의 일생을 보면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예정과 솔로몬이 걸어갔던 자유로운 길과 그 결과로 말미암은 타락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고 회개하게 하시는 은혜의 구원을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사람이었다.
사실 솔로몬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솔로몬을 사랑하셨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란 말도 있듯이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類로 전과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8-16)
다윗이 무슨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솔로몬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에게. . . . . . . 하리라"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作定이며 예정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을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는 반드시 이루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예정 속에 포함되었는지는 사람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作定속에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6:37. 요6:44. 요6:65)
이 말씀들은 다 요한복음 6장에서 하신 말씀이다. 벳새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후에 제자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으려고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원치 않으셨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을 잘 새겨서 들어보아야 한다.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44절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올 수 없으며
65절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올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다시 이를 정리하면 아버지께서 주시고. 이끄시고. 오게 하여 주시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바울은 말하기를 "원하는 자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롬 9:16)
원하는 자라고 되는 것이 아니오 힘쓴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구원하시는 것이어서 구원의 문제는 인간이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서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구원받게 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잠16:33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作定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29:26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作定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단05:23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作定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눅22:22 인자는 이미 作定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행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作定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작정하신 사람은 우리가 전도하기 전에 이미 작정되어 있다. 바울이 처음 고린도에 가서는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나나셔서 말씀하시기를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18:9-10)
아직은 바울이 전도를 하지도 않아서 주를 영접한 사람들이 별로 없는 때였다 누가 아직 중생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는 때도 아니다. 그런데 이미 주님은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다. 물론 바울은 누구누구가 주님의 백성으로 예정되었는지를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에는 주님의 백성이 많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시고 있다. 우리가 전도하러 가는 것은 지옥 가기로 작정된 사람들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전도해야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전도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은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전도를 통하여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지옥 가기로 작정된 사람들이 아니라 천국의 백성으로 예정되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가 선포하는 교리들 중에 예정론은 많은 사람들의 찬성과 반대의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교리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은 거의 이러한 교리적인 논쟁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신앙의 경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예정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거의 공통적인 것 같다.


이 논의는 본래 에베소서 1장3-14과 로마서 8장29-9장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연구되어진 이론이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예정이 확실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예정론의 원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절대적인 주권자이셔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하게 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전지성(Omniscience)과 전능성(Omnipotence)은 미래에 이루실 모든 일을 예정하셨다는 필연적인 결론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이론은 귀납법적인 방법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요. 성경의 선포는 연역법적인 방법으로 드러나게 된다. 초기에 이 예정을 말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논의하기 시작한 학자는 어거스틴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앙적인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정을 깨닫게 되었고 학문적인 이론으로 주장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다.
이 예정론이 다시 보강되어 완성된 것은 그 후 천년의 세월이 지나서 칼빈에 의하여 완성된 이론이다. 그러나 근대를 넘어서 현대인들은 거의 관심을 가지고 이 문제를 논의하는 사람들이 없다. 그러나 보수적인 입장에서 신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양보 없이 예정론을 고수하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예정론을 고수하려는 사람들도 예정론에 대하여 깊이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교리를 신봉하려는 자세는 마치 바리새인들의 교리와도 같았다. 율법의 참 의미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고수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다. 예정이라는 말만 듣고 그 내용을 진지하게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이 교리에 대하여 거부하는 자세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수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다 잘못되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조용히 덮어둔 교리처럼 되었다. 이러한 교리는 사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교리라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대체로 까다로운 것은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단들이 성도들을 독특한 교리를 조작하여 유혹하면서 자기들을 추종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할 때는 예정론과 같은 교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교회사적으로 경험된 대부분의 이단들은 예정을 부인하여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의 예정론에 기초한 신학은 네델란드와 스코트랜드에서 정착되었고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그 기초가 닦아졌기 때문에 대부분 이 예정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일반적으로 예정론을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는데 그 중에 극단적인 예정론을 슈프라랖싸리안(Supralapsarians)이라 한다. 이 주장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이 모든 일들이 이미 예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구원받을 자와 멸망될 자가 이미 다 예정되었다고 본다. 죤 칼빈이 이러한 극단적인 예정론자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칼빈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이 이론을 신봉한다. 에베소서의 경우는 바로 이러한 예정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유명한 도르트 회의(Synod Of Dort 1618-1619)의 결정은 이러한 교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를 요약하면.
1. 무조건적인 선택
2. 제한된 속죄
3. 완전 타락
4. 불가항력적인 은혜.
5. 보존의 확실성 등으로 정리할 수 있는 교리였다

다소 온건한 입장의 예정론은 예정의 시기를 타락한 후라고 본다. 이를 인프라랖싸리안(Infralapsarians)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은 타락을 허용은 하셨으나 그것까지 하나님이 예정하셨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타락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멸망을 예정하신 것은 아니고 단지 함께 타락한 후에 그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뿐이다.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미 정죄 된 그대로 버려 두신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 이론의 핵심이 되는 예정된 자의 경로는 .
1. 타락 2. 선택 3. 부르시고 4. 의롭다 하시고 5. 영화롭게 하신다. 이러한 이론은 다 로마서 8장29절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인데 이들은 이 경로는 변경할 수 없는 황금사슬(Goldn Chain)이라고 부른다.
어거스틴은 이 이론의 대표자가 된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 중에서도 많이 수용하는 이론이다.
제 삼의 예정론(Predestination)은 위의 예정론과 자유의지를 조화시켜서 수정한 이론인데 이를 수브랖싸리안(Sublapsarin)이라고 한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타락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구원받을 자를 예정하신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들 중에서 믿는 자들만 선택을 입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세 가지의 예정론이 다 성서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느 한 편만이 진리라고 잘라서 확정하기는 어려운 난제에 속한다. 이 신비는 인간의 이성으로 다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자가 감격 속에서 충성하는 자세로서만 이해 될 수 있다.
사람이 구원되는 것은, 사람의 의지, 능력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기초한다는 성서의 교리를 예정론이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 은혜로 구원하실 모든 사람들을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구약에는 예정이라는 말이 쓰여 있지 않으나, 신약에는 로마서 8:29-30 과 에베소 1:5, 11에 나와 있다.
예정의 예(豫, 이전)란 어떤 논리적, 시간적 이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로마서 9:11-13에 이 하나님의 선택, 선행규정에 대한 의미가 나타나 있다.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출생 이전에, 선도 악도 행하기 전에, 에서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동생 야곱 아래 종속되어야 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칼빈의 신학에도 보여진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예정론은 미리 예정되어 도저히 변경할 수 없다는 관점이 아니라, 창조 이전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영원한 목적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계획과 가장 세밀한 점까지 그 마음 속에 미리 결정하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까지 미리 내다보셨다는 것이다. 시간은 이 계획을 온전히 실행시킬  뿐이다.
성경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선택한다는 견해가 나온다. 상벌간 그 결과는 각 사람의 영혼에 돌렸다. (롬 2:1-16)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은 것은 그 원죄 때문이 아니라 선택과 신뢰가 관계되는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 (갈 1:15)에 대한 순종 (고전 9:26)과 구원을 위한 노력 (빌 2:12)을 권하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며 그 사랑 안에서 행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은 무조건이 아니다. (엡 1장, 골 1장)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인간의 역사도 예정을 넘어서 그 사랑 안에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불행한 운명은 조상의 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를 거절하는 불신앙으로 결정된다.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고유의 권한이다.
(사 29:16)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사 30:14) 그가 이 나라를 훼파하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훼파함같이 아낌이 없이 파쇄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취하거나 물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사 41:25)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방백들을 회삼물같이, 토기장이의 진흙을 밟음같이 밟을 것이니
(사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사 64: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렘 18: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렘 18: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렘 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렘 18: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인간(人間)의 자유(自由)
처음에 주신 자유
창조하신 후에 우리를 에덴에 두실 때부터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격으로 창조하시고 그 인격의 기초를 자유 위에 세워 주신 것을 알 수 있다. 거기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 주의하면 완전하고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거기는 선악과 외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우리가 알 것은 거기 한가지 제한이 있었다는 것을 잘 유의해야만 한다. 그 후에 인간은 뱀의 유혹을 받아 결국 그 제한의 선을 넘어서고 말았다. 사람들은 제한의 선을 넘어 설 수 있는 자유를 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한된 선을 넘지 않은 쪽이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요 제한의 선 건너편은 훨씬 좁은 자유밖에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 할 수만 있다면 남은 이론은 아주 쉽게 넘어 갈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제한 된 선 너머에 있는 자유를 탐내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제한의 선을 넘어서 보고야 깨닫는 것은 그 선을 넘지 않았을 때가 훨씬 더 자유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본래의 곳으로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처음에 우리에게 주어졌던 자유가 충분한 자유였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자유가 주어졌음을 깨닫는 마음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셨고 임의로 행할 수 있게 하였다. 다만 한 가지의 제한을 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넘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다. 완전한 자유란 제한이 없는 자유가 아니라 제한이 최소화된 자유였다. 어떤 사람들은 "선악과의 제한마저도 없는 완전한 자유를 주실 수 없었을까?. . . 하고 묻는 사람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된 자유가 주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관계에서는 제한이 따른다. 만약 아무런 제한이 없는 자유라면 거기에는 서로 아무런 간섭도 할 수 없고 또한 아무런 책임도 없다. 그러한 존재는 인격도 아니고 방향도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만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위하여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의지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였다. 의지의 자유를 다른 말로는 자유의지라고도 한다. 그리고 선택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수도 있고 뱀의 말을 믿고 순종할 수도 있는 완전한 선택의 자유였다. 선택의 자유를 가졌을 때는 신중에 신중을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택을 하고 난 후에는 결과에 대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자유선택(自由選擇)의 한계(限界)
1.내가 나의 아버지를 선택할 수 없다
2.내가 나의 어머니를 선택할 수 없다.
3.내가 나의 형제 자매를 선택할 수 없다.
4.내가 사의 성(性)을 선탤할 수 없다.
5.내가 태어나는 시대(時代)를 내가 선택할 수 없다.
6.내가 나의 태어나는 민족(民族)과 장소(場所)를 선택할 수 없다.
7.나를 나되게 하는 선생님을 대학가기 전까지는 선택할 수 없다.
8.내가 나의 성격(性格)을 어느 정도 교정할 수 있지만 선택할 수 없다.
9.내가 나의 환경(環境)을 약간 개선할 수 있지만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는 없다.
10.내가 나의 외모(外貌)를 성형수술을 할 수 있지만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
11.음성(音聲)도 내가 선택할 수가 없다.
12.지능(知能)이나 예능(藝能)이나 체능(體能)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가 없다.
13.체질(體質)도 어느 정도 개선이 가능하지만 제한적이다.
14.직업(職業)은 선택할 수 있지만 그것도 내가 하고싶은 대로 다 되지 않는다.
15.배우자(配偶者)를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상대가 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허사다.
16.친구(親舊)를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친구가 나를 친구로 받아줘야만 가능하다.
17.취미생활(趣味生活)은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성격자체가 이미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별로 의미가 없다.
18.종교(宗敎)는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제한적이다.
19.나의 죽는 날도 자살(自殺)을 하지 않은 한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
20.천국(天國)과 지옥(地獄)도 내가 선택할 수 없다.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에는 의지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 있지만 이미 결정되어 버린 것이 많고 실제로 우리가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을 시작하신 분이 나 자신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시되 때에 따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겸손이란 내 멋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젊은 날에 나를 지으신 창조주와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와 나를 종신토록 인도하시고 도와주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겸손이다.

예수님이 주신 자유
우리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제한된 선을 넘어가서는 결국 제한 없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권세 아래 팔리게 되었다. 죄 아래 팔린 인격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는 제한되고 있었다. 죄는 우리에게 오직 한 가지를 제한한다.
"모든 것을 임의로 하되 하나님을 믿지는 말아라!"
믿는 날에는 정녕 살아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사탄은 우리에게 무슨 일이든지 제한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슨 종교든지 제한하지 않는다. 다만 생명을 알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지 않으면 만사가 자유이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가르쳐서 기독교인들 보다 더 선하다는 소문을 들을 수 있도록 살게 하여 마치 광명의 천사와도 같이 가장하게도 한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고 사탄의 열심을 보게 되면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탄은 그야말로 열심이 특심하고 또한 그 끈기와 인내와 뻔뻔스러움에 있어서는 추종도 모방도 불허한다.
그리고 변신과 둔갑의 천재여서 온 천하를 꾀는 자다. 사탄이 젊은이들을 꾀이는 기상천외의 방법들이 많이 개발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性 自由'(Free Sex)라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그러한 올무에 걸려들면 성 자유가 아니라 성의 노예. 죄의 종이 된다. 사탄은 그것을 '성 자유'라는 용어로 미화시켜서 젊은 영혼들을 타락시키고 있다.
그러한 사탄의 올무와 죄의 장벽에 사로잡혀 일생을 종노릇하는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우리가 이 비밀을 알게 되면 어렵던 성경이 그냥 보이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1-36)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구세주 되신다는 뜻을 우리가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은 상당히 포괄적인 말씀이다. 단지 죄 용서 받고 천국 가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이었다.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게 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우리가 범죄 한다는 것은 죄의 종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죄를 범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나쁜 놈이라고 정죄하기가 쉽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의 종이 되어 죄에게 눌려서 죄를 이길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는 인간을 보실 때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그러한 죄의 종노릇하는 데서 우리를 자유케 하사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고 의에 대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셨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많은 길이 있는 것 같아도 결국은 두 가지 길이 있다. 우리의 육신적인 생각 속에 숨어 있는 사욕. 즉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그러한 사욕을 죽이고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성경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길이 있다.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멸망을 받게 된다. 그 멸망은 처음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삶으로 출발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뱀이 말하는 것을 잘 들어야 한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이 말은 잘 들어보아야 한다. 뱀은 서투르거나 어리석은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뱀이 말하기를 "그 열매를 따서 나에게 제사를 지내라! 이는 내가 먹고 하나님처럼 되어야겠노라!"하고 말했다면 하와가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을 그렇게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사탄은 말하기를. "네가 따서. 네가 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서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자면 "네가 너 자신을 위하여 살아라"고 했다. 사탄은 지금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살도록 가르치고 있다. 사탄은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 그래서 때로는 人本主義. 人道主義. 人間主義의 탈을 쓰고 나타나게 된다. 휴매니즘이라는 이념 뒤에서 사탄이 무슨 장난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고 사람을 위하는 척 하면 거기 쉽게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 소위 말하는 지성인들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삶. 즉 사욕을 좇아 육신대로 사는 것이 곧 실질적으로 현명한 삶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 성경은 그러한 인간을 두고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람이 利己主義에서 벗어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결국은 죽음만이 사람들을 욕심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실 죽음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젖소가 만약 우유를 짜서 자기가 다 마셔버린다면 그런 소는 푸주간으로 끌려가게 된다. 암탉이 달걀을 낳아서 번번이 자기가 깨어 먹어버린다면 그런 닭은 그날로 폐계 처분해버릴 것이다. 인간도 자신만을 위하여 살려고 한다면 그런 인간은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13-15)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신다. 그 길이 곧 죄의 종으로부터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16-23)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시지 않았다면 소유는 고사하고 목숨이 붙어 있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바르게 안 후에야 비로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을 위하여 살게 된다. 그리하여 비로소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와지게 되고 욕심에서 해방되면 죄로부터도 자유 하게 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한 자유를 주시고 진리를 알아야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욕심과 죄로부터 자유 하게 하시는 반면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신다. 우리가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과 함께 있다.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누리는 자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보장되는 자유이다. 우리가 만사에 자유하다가도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게 되면 우리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만 하면 우리는 필요한 자유를 충분하게 누릴 수 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1-3)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진리의 말씀을 배우는 나라는 모든 면에서 자유로와 지고 선진국이 되며 문명과 문화가 창달되고 예술의 꽃을 피우게 되고 윤리가 바르게 세워지며 범사에 복을 받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이치적으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개관적으로도 확인 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거하시는 생명의 성령께서 자율(自律)이라는 양심의 법을 부활시켜 문자적이거나 제도적인 타율에 저촉을 받지 않는 존재로 변화되기 때문에 자유를 주어도 사고가 생기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 참 자유란 결코 정치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진정한 자유는 진정한 자율(自律)이 그 자신의 가슴속에서 제 기능을 발휘 할 때만 주어진다. 만약 자율이 없는 곳에서 제한 없는 자유가 주어지면 그것은 자유한 상태가 아니라 무법천지(아노미아=ajnomiva)가 되고 말 것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3:4)

 

예정과 책임
예정(Predestination)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마땅히 자유에 대한 책임도 이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으로 지으시고 의지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 예정 속에서도 우리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실제로는 매우 자유롭게 예정하셨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고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욕심이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예정되신 대로)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에 우리 자신의 몸과 재능과 재물을 드려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이 교리를 잘못 해석하여 예정 자체를 부정하거나 아니면 예정을 숙명론과 혼돈하여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특별한 경륜을 위한 하나님의 예정을 인간이 다 알려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매우 불경스러운 자세라고 한다. 우리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 속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선택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염려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점은 우리가 염려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옳지 않으심이 없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실 절대적인 권리가 있다. 토기장이는 진흙 한 덩어리를 가지고 귀하게 쓸 그릇을 얼마든지 만드실 수 있다. 반면에 임시로 당분간만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있다.
목수가 한 나무를 가지고 어떤 부분으로는 문짝을 짜고 어떤 부분으로는 기둥을 다듬고 다른 부분으로는 거푸집을 제작하여 임시로 쓰다가 불태워버릴 권리가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불공평에 대하여 불신자들이 항의 할 것이라고 염려를 한다. 그러나 염려할 것이 없는 것은 불신자들은 예정은 고사하고 하나님이 계신 것 마저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불평은 전혀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불신자가 목사를 찾아와서 "왜 하나님은 나를 예정하지 않았느냐?"고 시비를 걸어 온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진정한 토기장이가 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 때에 인간의 몸으로 쓰이지 않은 남은 흙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왜 우리들만 소외시키십니까 ?!"하고 항의하지 않은 것과 같은 원리다.
그리고 우리는 실로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수도 있고 천하게 쓰실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적인 권리가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일이다. 하나님의 목적이 곧 나의 사명이며 그 사명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인하여 실수하지 않도록 지혜를 구한다. 사람이 아무리 육체적으로 장성해도 영적인 성장이 없이는 지혜가 없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채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인생의 실패는 예정하신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어리석고 게으르고 불충한 사람의 잘못이기 때문이 일생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파탄된 사람은 구제불능이다.
1.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
2.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불가능한 사람
3.믿음이 생기지 않는 사람
4.거듭나지 못하는 사람
5.영적으로 죽어서 전혀 감각이 없는 사람
6.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
7.끝까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사람
8.전도자의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사실은 어떤 사람이 예정과 선택을 받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사람이 죽음 직전에 회개하고 구원받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우리 성도들이 명심할 일은 아무런 기초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이러한 깊은 교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오해만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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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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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지금은 울어야 할 때입니다!  

 
스위스의 내과의사 폴 투르니에(1899∼1986)는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었고

6개월 만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외삼촌 집에 맡겨졌으나

외삼촌은 알코올 중독, 외숙모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투르니에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성장해 옥스퍼드대에 입학했습니다.

다행히 거기서 폴란드 경제학자를 만나 두 사람은 서로 자신들의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고 실컷 울었습니다.

이후 그들의 마음의 병이 치유됐습니다. 마음의 병이 치유되자 육체의 질병도 치유됐습니다.

이때부터 투르니에는 “질병을 치유하지 말고 인격을 치유하라.

모든 질병은 비뚤어진 인격에서 온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엘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눈물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돌아오면

여호와께서 마음과 뜻을 돌이키셔서 재앙을 내리시지 않고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보고 계시며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눈물이 얼마나 간절한가를 보시고 우리에게 내리실 재앙이나 형벌을 멈추시고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움직이게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합니다. 다윗 역시 사람 앞에서는 용맹한 장수였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늘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시편 56편 8절에서 다윗은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눈에 눈물이 메마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눈물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은 방탕한 아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매를 통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눈물을 통해 변화됩니다.

우리의 눈물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어머니의 눈물이 자식을 변화시킵니다.

아내의 눈물이 남편을 변화시킵니다.

성도의 눈물이 교회를 변화시킵니다.

지도자들의 눈물이 공동체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눈물에는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진실하고 간절한 눈물에는 육체의 병과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울지 못하는 것은 정서와 감정이 메말라 버렸기 때문입니다.

눈물의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잃어버린 눈물을 회복해서 눈물의 능력과 기적을 경험해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과 교회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눈물이 메말라 모든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며, 상대를 죽이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을 찢으며 회개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울어야 합니다.

거짓의 눈물이 아닌 진실한 눈물과 통곡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진실하고 간절한 눈물은 능력이며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심령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은철 목사(강화 임마누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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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적인 시각에서 본 신약의 영성
1.영성에 대한 정의
복음주의 진영의 대부분은 어거스틴과 칼빈의 영성을 지지하며, 영성이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새 사람이 된 신자가 일상생활에서 성령을 쫓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지칭한다. (막 12:30-31)
2. 균형적인 시각에서 본 영성
최근 영성개념의 혼란은 신약성경 교훈에 기초한 '균형성'을 상실하고 부분적인 진리를 극대화하거나 왜곡하여 그것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데 원인이 있다. 이런 영성개념의 왜곡 현상은 역사적으로 심령부흥회의 감정적 열광주의, 상속이원론, 은사제일주의, 말씀객관주의, 차가운 지성주의, 금욕적 세상도피주의, 개인영혼 구원사상, 신비주의 등의 요인들에 의해 야기된다.
1) 삼위일체 신론에 기초한 영적 균형성
참된 영성 개념은  삼위일체 신론에 함당하게 기초하여 정립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신론 중에서 한 분만을 강조하는 영적 생활은 영성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2) 회심 경험과 영적 균형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의 출발점은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제2축복' 경험에서 시작하지 않고 '믿음의 들음으로'(갈 3:2,5) 성령을 받는 일에서 시작된다.
3) 윤리와 은사 사이의 균형성
영적인 사람은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성령의 내면적 사역이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은혜의 외면적 작용이다.
4) 올바른 신앙과 바른 실천 사이의 균형성
정통신앙(Orthodoxy)와 정통실천(Orthopraxy)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영적 생활은 참된 영적 생활이 아니다.
5)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의 균형성
현실 교회들이 영적 균형을 잃기 쉬운 또 다른 영역은 '영과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 사이의 균형성이다. 후자없는 전자만을 강조하는 신앙 자세는 영적 생활의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
6) '이미' 와 '아직' 사이의 균형성
기독교의 영성 구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already) 이루어진 것과 '아직' (not yet) 이루어 지지 않은 것 사이를 살아가는 종말론적 긴장 구조와 관련이 있다. 영성 두축들 가운데 '이미' 쪽만을 강조하게 되면 위에서 말한 영과의 신학이나 변영의 신학을 추구하게 되고 교회의 영성은 쉽사리 현세지향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7) 감성주의와 지성주의 사이의 균형성
현실 교회들 가운데서 영적 균형을 잃기 쉬운 또 다른 영역은 감성주의와 지성주의 사이의 균형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9) 사랑과 공의 사이의 균형성
기독교인의 영성은 사랑과 공의 사이에도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죄인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태도를 나타내야 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을 은혜롭게 넘어가면서 불의에 눈 감으려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10) 결어
오늘날 한국교회 속에서도 성령운동이나 은사집회 같은 것들이 교회나 기도원 마다 수없이 유향하고 있지만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재현하고자 하시는 십자가의 형상은 잘 나타나 않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복음이 없이 영광의 신학만을 추구하는 세속화의 위기이며 십자가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위기이다.  참된 기독교 영성은 십자가 신학을 회복하는데서 발견되어야 한다.

출처 : 총회목회대학원,총회 목회대학원,개혁신학,개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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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생명 축제 설교 / 10초전도 /  


당신은 하나님께 최고의 VIP   (요한복음 3:16)
요한복음 3장 16절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익숙하게 아는 성경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M. Luther는 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축소된 복음』(Gospel in miniature)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에센스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말씀을『최고(greatest)』라는 표현으로 해석하는데 참 의미가 깊습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애인(greatest lover)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고로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을”… 최고의 숫자(greatest number)입니다. 모든 민족과 인종을 다 포함합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최고의 수준(greatest degree)입니다. 생명을 희생시킨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최고의 선물(greatest gift)입니다. 더 이상은 없는 최상, 최대의 선물입니다.

“주셨으니”… 최고의 행동(greatest act)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다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최고의 초청(greatest invitation)입니다. 제한 없는 우주적 초청입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최고의 단순함(greatest simplicity)입니다.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됩니다.

“멸망하지 않고”… 최고의 해방(greatest deliverance)입니다. 죽어야할 죄수가 석방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으리라”… 최고의 소유(greatest possession)입니다. 영생, 그 이상의 재산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은 “모든 사람의 성구” 또는 “기독교 복음의 심장”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축복과 혜택을 줄 수 있을까요?

 

 

1. 당신도 놀라운 사랑의 VIP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요일 4:8,16)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은 나라와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여 나 같은 죄인까지도 기꺼이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대상임을 믿고 건강한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가 좋대요! 나를 사랑하신대요! 이 얼마나 황홀한 행복인가요? 할렐루야!

어떤 신학자는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3S Love」로 정의해줍니다.

①주권적인 사랑입니다.(Sovereign Love)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자격밖에 없는데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입니다.”(프린스톤의 B.B.Warfield)


②희생적인 사랑입니다(Sacrificial Love)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르십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십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신 것입니다.

③구원하는 사랑입니다(Saving Love)

하나님의 사랑의 원인과 목적은 오직 구원입니다. 오늘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나의 선행이나 공로나 업적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어느 훌륭한 기독교 의사(윌터 윌슨)가 군대 생활하다가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군부대에는 이따금 위문품이 오지요. 어느 날 한 기업체로부터 위문품을 받았습니다. 선물은 포켓용 거울이었습니다. 그런데 표면에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쓰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는 이렇게 부연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지 알고 싶으면 뒷면을 보세요.”

그는 궁금한 마음으로 작은 거울 속에 비치는 자기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남이 그처럼 지극히 사랑하는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황홀한 감동을 받습니다. 나 같은 죄인까지도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구나!

그날로 그는 거듭난 사람이 되어 몸만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하는 훌륭한 의사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최고의 VIP입니다.


저는 언제 읽어도 감동이 되는 인간 승리자 송명희 자매의 시가 가슴을 뿌듯하게 해줍니다.

그는 어거스틴의 신앙고백을 토대로 이 시를 지었습니다.

나 하나

나 하나만 있더라도

세상을 지으신 주


나 하나가 죄를 짓더라도

십자가에 죽으신 주


나 하나가 있더라도

천국을 마련하신 주


사랑하는 여러분,

나도 하나님께 최고의 VIP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2. 당신도 놀라운 선물의 VIP입니다.

 

사랑은 sentimental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기꺼이 내어줍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승화될수록 가장 비싼 것을 줍니다.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할수록 모든 것을 다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출로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주셨습니다.(로마서 4:25. 8:32)

여기 “주셨다.”는 말은 ‘넘겨준다, 양도한다, 희생시킨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을 위한 최고의 선물은 국가나 정부, 권력이 아닙니다. 돈도 아닙니다. 재능도 아닙니다.

인류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4장 10절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표명합니다.

우리는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하사품을 받았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미국의 훌륭한 설교가 Chuck Swindoll은 이렇게 감동적인 설명을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보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육자를 보내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기술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과학자를 보내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제학자를 보내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쾌락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연예인을 보내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용서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주신 것이다.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주실 자,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짊어지실 자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당신은 바로 그 구원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으신 최고의 VIP입니다.

 

3. 당신도 놀라운 믿음의 VIP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참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십자가만 쳐다보는 믿음으로도 억만 가지 죄로부터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벅찬 가슴으로 간증합니다.(에베소서 2: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내가 예수 믿고 교회 다닌다는 것이 신기하잖아요?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 구원을 위해 더욱 간절하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제 남편에게도 믿음을 선물로 주옵소서. 우리 부모형제에게도 믿음의 선물을 주옵소서.

우리 자녀들에게도 구원의 확신에 이르는 믿음을 선물로 주옵소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중심주제는 『믿어야 할 예수』입니다. 요한은 믿음이라는 명사를 사용하는 대신에, “믿어야 한다.”(pistuo)는 동사를 씁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98번이나 반복합니다. 특히 3장에서 만도 7번이나 거듭거듭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결론에서도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고 거듭 강조합니다.(20:31)


그래서 오늘 아침 우리는 이런 소박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 저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저에게도 큰 믿음을 주옵소서!”

 

 

4. 당신도 놀라운 생명의 VIP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죄로 죽게 된 인간을 살려주시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영생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의 결론은 명료합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생,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최상의 선물입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죽습니다. 다 죽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므로 살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원히 삽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심판에서 면제를 받습니다. 그리고 영생복락을 누립니다.(15, 16, 17, 18)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우리의 호적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적하는 것입니다.(5:24)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온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그래서 요한복음의 또 하나의 주제는『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23번 강조)

예수님은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에 죽음의 현장에서도 이렇게 선포하십니다.(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믿으십시니까?


기독교는 단순한 도덕종교가 아닙니다. 인격 수양의 종교 정도도 아닙니다.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복락을 누립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 풍성한 인생을 누리게 하십니다.(10:10)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인생이 풍성해집니다. 생기가 넘치고, 활력이 넘치고, 역동적인 인생을 삽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것과 같은 기쁨이 있습니다. 소위 분에 넘치는 초과분의 인생을 삽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얼마든지 누릴 수 있습니다.


몇 해 전 전 세계인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 책「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를 쓴 Spencer Johnson이 또 한 권의 책을 써서 우리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책의 제목은 「선물」(The Present)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한 노인이 어린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줄거리를 소제로 합니다. 그 노인은 소년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선물을 주겠다는 대화를 펼쳐가지만 그 선물의 내용을 냉큼 얘기해주지 않습니다. 그 선물을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고 암시만 줄 뿐입니다.

어느덧 소년은 성인이 되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아가다가 아주 오랜 만에 옛날 그 노인을 만나 그분이 가장 행복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다시 인생의 진지한 대화를 나누다가 인생 최고의 선물을 찾습니다. 그 선물은 바로 「현재」(The Present)라는 단순한 진리입니다.

영어 단어의 뉴앙스에 따라 오늘이야말로 가장 큰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The Present는 곧 The Present입니다.

 

현재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선물은 구원과 영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공짜 선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셔서 그 비싼 선물을 그냥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께 최고의 VIP입니다.

이 얼마나 황홀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최상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혹시 아직까지도 그 예수님을 모르는 분이 계신가요? 아직도 믿지 않는 분이 계신가요?

오늘 아침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놀라운 선물되시는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접하세요.


어떤 분이 이런 소박한 간증 시를 들려줍니다.

“주님, 빈 잔을 들고, 황야를 지나, 당신에게로 기어갔습니다. 기운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한 방울이라도, 얻을 수 있을지 의심하면서....

제가 당신을, 단지, 좀 더 잘 알았더라면, 양동이를 들고 달려 왔을 텐데.”

예수님은 바로 오늘 그 선물을 당신에게 주고 계십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최고의 VIP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영접하십시오.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셔 들이세요.

(기도 초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누구신가요?

하나님께 최고로 사랑받는 VIP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아침 당신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거울을 들여다보십시오.

그분은 마치 나 한 사람밖에는 사랑할 대상이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까지 나를 위해 놀라운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제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각박하고도 삭막한 이 세상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최상의 사랑과 축복을 누리는 최고의 VIP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출처:지구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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