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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관하여 알아야 할것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한다. 이는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을 주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 묵상하며 경건히 보내고자 하는 절기이다.

 

40이란 수는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심, 40일간 시내산에서의 모세의 금식, 이스라엘의 40년간의 광야 생활, 예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경에 여러 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등장한다. 이에 고난 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의 구속을 위해 수난을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의의를 살펴보며 자신의 신앙을 재 각성하고자 비교적 긴 40일간의 절제 기간을 갖는 것이 바로 사순절이다. 사순절은 항상 수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이 날은 재의 수요일, 성회 수요일, 속죄일 등으로 불리워진다.

 

사순절의 유래

 

사순절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준비하며, 주님이 겪은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진 금식을 행하던 것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유월절 전에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님께서 제공하신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했던 것이다. 또한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되는 성도의 성례식이 있게 되는데, 세례 예비자들은 이때 세례와 입교(入敎)를 받기 위하여 두 주간의 준비기를 두고 금식과 기도로 신령한 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사순절의 식사로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 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가면서 이 규정은 많이 완화되기 시작해 14세기에는 금식 기도 대신에 절식 기도가 행해졌으며 ,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관습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collation)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 해위는 여전히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 것,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 호화 생활 등도 자제되었다. 대신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이 권장되었다.

  

사순절의 풍습
 
 

▶ 종려나무의 재로 이마에 십자가 그리기

 

종려나무를 태운 재 혹은 숯으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풍습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에 행해지던 풍습이다. 이때 사용되는 재는 지난해 종려 주일에 사용했던 종려나무를 태워 만든 것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대속의 죽음으로 이끌었던 인간의 죄에 대한 참회의 표시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이는 또한 아름다운 풀과 꽃이 잠깐 후면 마르고 시들 듯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잠시 잠깐 후면 사라지고, 한 줌의 흙에서 왔던 우리도 또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엄숙한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다. 또한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우리의 삶의 자세를 정비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 금식 기도

 

금식은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금식의 기간과 그 엄격성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기리고 하늘나라의 백성됨을 감사하며 그 백성 된 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돌이키게 하는 금식 기도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행해졌었다. 오늘날 행해지는 금식 기도는 엄격했던 초기의 형태에서 많이 변형되어 절식(節食) 기도의 형태로 행해지고 있다.

  

▶ 구제와 선행 베풀기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위한 구제와 자선이 행해졌다. 특히 사순절에 행해지는 금식 기도를 통해 주님의 고난에의 동참, 불의한 자신에 대한 회개뿐만 아니라 불우한 이웃의 배고픔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실천에 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을 본받아 이를 실천함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 할 것이다.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의 금요일에 죽어 장사되신 주님은 삼일만인 일요일, 곧 주일날 스스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하셨다. 부활절은 이를 기념하는 주일날을 가리킨다.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절을 '파스카'(Psacha)로 불렀다. 이는 구약의 유월절(Passover)을 뜻하는 히브리어 '페사흐'( j s p )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구약의 초대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유월절 양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구속 희생을 당한 사실에 근거하여 구약의 유월절을 예수의 부활 기념일로 변용시켜 기념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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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혜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예배 드리게 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우리들에게 진실한 마음을 주사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옵소서,

우리들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

목자되신 주님의 인도따라 살게 하옵소서, 날마다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기 원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배에 함께하옵소서, 주님 홀로 영광과 찬송을 받아 주옵소서,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성령충만으로 인도하사

놀라우신 주님의 능력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이 땅 곳곳에서 부흥이 일어나게 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사랑이 메마른 시대에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사 생명수가 흐르게 하옵소서,

이 시간 모든성도들에게 은혜로 함께하옵소서,

우리의 삶 속에 기도와 전도와 말씀의 문이 활짝 열려지기를 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오늘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셨으니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도 힘차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열정도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기를 원합니다,

성령충만으로 복음을 능력 있게 전하게 하옵소서,

오늘날 갖가지 소리는 수없이 많고 많지만 생명의 소리는 적고 적으니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소식을 전하는 하늘 나팔수가 되게 하옵소서,

이 땅에서 수없이 많은 길이 있지만 우리로 좁은 길일지라도

생명의 길 주님의 길로 인도하옵소서,

또한 복음의 안내꾼이 되기를 원합니다,

넉넉히 이기게 도우시는 주님으로 인해 행복합니다,

우리의 에배를 받아 주옵소서,

지금도 참된 예배자를 찾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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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주일예배설교 /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October,Sunday Sermon)

 

제목 :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 

말씀 : 2:42-47 

 

1.올바른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스위스 영성가 프란시스 쉐퍼가 한번은 미국교회를 방문하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미국교회는 모두 자기 행복, 자기 만족에 빠져 있다. 미국교회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나 거룩한 삶이나 사명이나 헌신이나 하나님의 뜻이나 이런 것들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세상에서 누릴 만족이나 기쁨이나 뭐 이런 것들만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신앙의 목적이 지극히 이기적이고 육체적이고 세상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교인을 소비자교인이라고 불렀고, 그런 교회를 상품가게라고 하였습니다. 소비자 교인이란 사람들이 자기 구미에 맞는 음식이나 상품을 찾아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원하는 것을 얻고 만족하는 것처럼 교인들도 자기 구미에 맞는 것을 찾아다니는 소비자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어떻게든지 신자들의 구미에 맞는 상품을 열심히 개발하여 사람들을 끌이들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예배자로 교회에 오는 게 아니라 자기 구미에 맞는 것을 얻기 위해 찾아온 소비자요, 교회는 교인들의 원하는 상품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미국 교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미국 국민의 55% 주일에 교회에 나가는데 왜 나가느냐고 물었더니 45%는 삶에 유익한 말씀이나 교인들과의 친교를 통하여 뭔가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답했고, 26%는 마음의 평화와 정신적인 안정을 얻기 위해서라고 응답했고, 20% 정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나머지 9%는 기타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55% 중에 20%만이 올바른 목적으로 왔으니 결국 고작 약11%만이 제대로 된 교인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에 와서 친교나 유익한 이야기나 인간적 만족을 구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만족과 기쁨과 정신적 안정과 안식을 주십니다. 이것도 신자가 누릴 수 있는 복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그런 인간적 만족과 행복이 교회의 존재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 캠브리지대학교 교수를 지내면서 하나님을 부정하다가 중년 이후에 주님 품으로 돌아와 순전한 기독교, 나니아 나라 이야기 등 수많은 기독교 저술을 남긴 C.S 루이스라는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행복해지려고 교회를 찾은 것이 아니다. 그런 행복은 와인 한 병으로 얻을 수 있다.”

 

교회에 와야할 진정한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우리가 인간적으로 원하는 만족이나 행복을 찾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크고 아름답고 진정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뭡니까? 그건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와 무지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것입니다. 2차적으로는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림으로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인생의 목적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올바르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가운데 바르게 아름답게 정직하게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주며 자신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와 의미가 넘치는 삶을 살다가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6: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는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 그 뜻대로 삶으로써 이 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이 분명한 의미를 바르게 알고 올바른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주님의 역사이루어가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올바른 믿음위에 서서 생명력있는 삶을 살려면 가장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올바르고도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로써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구세주라는 사실에 대한 올바르고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확고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단순히 인간적 교제를 위한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단순히 세상에서 인간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소망을 두고 위로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은 고상한 인격과 정신적 수양을 하는 곳도 아닙니다. 교회는 단순히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곳도 압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단순히 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나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생명의 공동체요, 진리의 공동체요, 이 땅위에서 천국을 건설하는 공동체 인 것입니다.

 

여러분, 16장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 주님,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또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중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16:1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너는 복된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16:18절을 같이 읽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러분, 이 대화의 요지가 뭡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너희는 나를 무엇으로 알고 따라 다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선지자나 선생으로 알고 있는데 너는 어떠냐? 나를 메시야로 알고 따르느냐 아니면 너희들도 그냥 선지자중의 한사람으로 아느냐, 아니면 나를 통해서 무슨 부귀영화라도 얻으려고 따라 다느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시오, 메시아라고 고백을 하였고, 그런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며 바로 그런 너의 그러한 신앙고백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와 같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믿고 고백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의 터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이 없으면 교회의 겉모양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교인들이 아무리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그냥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는 있어도 진정 생명력이 넘치는 성도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세상의 위대한 성인이나 영웅이나 선생이 아니라 그리스도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나에게 평안이나 위로나 기타 여러 가지 복이나 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분명히 알고 오직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나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분명한 신앙고백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와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새생명의 은총이 내 안에 온전히 역사함으로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주님께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가운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는데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믿음은 영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 속에 오셔서 우리의 죽었던 영을 살려 주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가르쳐주시고 믿게 하실 때만이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습니까? 1:13,14절을 보겠습니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무슨 말씀이냐하면 열두제자를 비롯한 120여명이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보내드리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분부를 따라 마가의 다락방으로 돌아와 오로지 기도하는데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기를 힘쓸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인 것입니다. 좀 길지만 같이 보겠습니다. 2:1~4절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러니까 120여명의 문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로지 기도에 힘 쓴지 열흘만에 강한 바람소리 같은 것이 방안에 가득하고, 마치 혀가 날름거리는 듯한 불길이 임하더니 거기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자들은 온전히 주님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래서 과감히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게 되고,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며 초대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이 창립52주년 기념주일이면서 성령강림주일인데 바로 이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였던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초대교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을 기념하여 오늘 우리와 우리 교회도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우리 자신이 먼저 풍성하게 누리고 나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다짐하고 힘쓰자는 취지에서 지키고 있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알게 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게 됩니다. 능력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와 기쁨으로 주를 섬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왜곡되고 죄되고 무지한 것들을 분별하게 되고, 모든 연약하고 부족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창립기념주일과 성령강림주일을 보내며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들을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가운데 모든 도전 세력들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모든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사랑과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려면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함으로 바로 이런 사랑과 은혜가 충만함으로 더더욱 힘있게 발전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얼마나 사랑과 은혜가 충만했던지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44,4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자기 재산과 소유를 다 팔아 교회에 바치고 니꺼 내꺼 따로 없이 각각 필요한 만큼 가져다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모습입니까? 이것은 사랑과 은혜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과 은혜가 없으면 이런 일은 시작도 못하고 만에 하나 어떻게 시작을 했다 해도 날마다 온갖 시비와 갈등과 다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과 은혜가 충만했기에 자신의 것을 다 드려서 함께 사용했습니다. 날마다 함께 모여였습니다. 음식을 함께 나누며, 말씀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사랑과 은혜가 충만했고,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니 믿는 자의 숫자는 날마다 더해갔고, 더욱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가정이든 교회이든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다른 어떤 공동체라도 사랑과 은혜가 있으면 반드시 흥합니다. 망할래야 망할 수가 없고, 흥하지 않을래야 흥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요, 잘나고 못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배우고 못배우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번영과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면 서로 귀히 여깁니다. 서로 이해하고 용납합니다. 서로에 대하여 성실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합니다. 원망 불평 시기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런 공동체가 어찌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공동체에 하나님이 어찌 복을 주지 않겠습니까? 그런 공동체가 어찌 사람에겐들 인정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런 공동체가 어찌 든든히 세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런 공동체 안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더욱 깨어 기도하고 말씀을 들음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라니다. 그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어 서로 사랑하며 은혜를 끼치며 도우며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과 평안을 주고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사랑이 충만하여 생명력있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열심히 모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선은 그들은 열흘동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러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니까 더더욱 기쁨이 충만해서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게 되었습니다. 오늘 46절을 보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여러분, 보십시오.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주일이나 수요일만 아니라 매일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은 늘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는 정말 아름답고 바람직한 순환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를 힘쓸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니 사랑과 은혜가 넘쳤고, 그러니까 더욱 모이기를 힘쓰게 되었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니 더더욱 은혜와 사랑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성령충만함을 받고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삶을 살려면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들을 때에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사랑과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그러면 더 교회가 오고 싶습니다. 말씀이 그리워집니다. 그래서 더욱 교회를 찾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충만한 성도의 선순환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모이지 않으면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기도와 말씀과 찬양하는 일을 게을리 하면 은혜는 멀어져 갑니다. 은혜가 멀어지면 교회는 더 멀어집니다. 교회가 멀어지니 은혜는 더 다운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활력이 충만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0:25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모이기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대가 갈수록 사람들이 점점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영광돌리고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일을 멀리하고 그저 먹고 입고 자고 놀고 하는 세상 일에 바빠지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서는 성령으로 말씀으로 은혜로 사랑으로 충만함을 입고 은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지 않으면 우리가 맨 날 하는 일이 뭡니까? 그저 맨날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들이 먹고 입고 자고 돈벌고 일하고 뭐 그런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맨날 그런 거만 생각하는데 어찌 영성이 풍요로워 지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교회창립52주년 기념주일과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곳에 너무나 귀한 교회를 세워주셔서 생명 주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기초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위하여 모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도간에 더욱 사랑과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함을 받아 더욱 사랑과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갈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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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역사 1장 장로회의 기원과 교회의 조직

Chapter 1

1장 장로회의 기원과 교회의 조직

장로교회란 무엇을 말하는가? 장로교회란 장로회 정치제도하에 유형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는 교회 형태를 말한다. 이 제도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것처럼 칼빈이나 낙스에 의해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구약성경에 이미 나타나 있는 제도였다.

1. 성경에 나타난 장로회의 기원

A. 구약에서의 사용: 구약에서는 장로라는 말이 백번 이상 사용되었다. 그 중 모세 오경에만 절반 이상이 사용되었는데 그 어의들을 보면 두 단어로 집약된다.

 

) 손윗사람, 형이란 뜻으로 원래는 큰, 위대한, 대단한, 등의 의미를 지닌 말로서 나이가 많은 사람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 )10:21, 27:42, 삼상18:17, 왕상2:22, 16:64, 61, 23:4

 

)연장자, 장로, 수염 있는 등의 뜻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말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한정적인 형용사로 쓰일 때 주로 젊은 자와 구별되는 늙은 사람을 지칭 할 때 사용되었다. (19:32, cf. 렘애 5:12). 이렇게 성경은 노인을 존중하며, 백발은 노인의 영화요 자녀들은 그의 면류관이라고 하였다(20:29, 17:6).

 

그러나 자켄이 실명사로 쓰일 때는 전문적인 용어로서 그 문맥에 따라 한 사람의 장로를 가리키기도 하며 또 장로회라는 지역통치기구를 지칭하기도 한다. 50:7, 시편 105:22, 삼하1 2:17, 22:4,7, 9:11 등에 나타난다.

 

모세 오경에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는 것을 목격한 증인들이었고(2:16,18:12,17:5-6). 광야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70인의 장로들을 데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일이 있는데(24:1-9) 이러한 현상들은 장로회란 바로 통치기구의 성격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증거인 것이다.

 

장로들은 바벨론 포로기간 중에서도 계속하여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29:1, 8:1, 14:1, 20:1). 또 포로 이후에도 장로의 권한은 여전히 존재하였다(10:8, 14). 그들의 역할은 회당에서도 존재하였고 신약시대 까지도 존재하고 있었다. 구약에서의 장로회제도는 민의(民意)를 수렴하는 의회제도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래의 장로직은 구약에서 종교적인 제사제도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고시행정과 관계있는 것으로 언제나 민의(民意)를 표현하는 자치 (또는 代議)기구의 대의원의 역할을 하였다. 이스라엘에서의 장로직의 존재와 그 영향은 자치성의 원리와 습성을 배양시켰던 것이다.

   

B. 신약에서는 70인역이 번역되면서 구약의 자켄을 πρεσβύτερος 번역하여 사용하였는데 그 의미는 손윗사람, 공직에 있는 사람, 영광을 얻을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장로라는 말은 주로 교회와 연관되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교회직분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여기서 장로 혹은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라는 말이 파생된 것이다. 장로의 기능을 의미하는 말은 έπίσκοπος라는 말로 이것은 감독하다또는 치리한다는 의미이다. 이 단어에서는 감독교회 (Episcopalian Church)라는 말이 나왔다.

 

2. 초대 교회의 시작과 조직

 

초기 기독교의 시작은 이미 앞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유대교회 배경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구약시대부터 유대인들이 대망하여 온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로부터 시작된 교회는 오순절 사건을 통하여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 우리는 예수의 사역의 시작과 더불어 기독교가 이방에까지 진출하는 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초기 기독교의 출현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유대교로부터 기독교의 분리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바른 해석과 아울러 불순종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였다. 무엇보다도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입으로만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라야 하며 또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초기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수의 이러한 새로운 가르침을 유대교적인 틀 안에서 어디까지 수용해야 되는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대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교훈이 가장 훌륭한 유대교회의 진수와 다른 것이 아닌 윤리적 근본원리들로 받아들였고 또 예수 자신도 율법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려 왔다고 선언하심으로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인 이 예수를 다른 유대인들에게 전해 주어야 할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은 단순히 순교자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순종을 보이는 자에게 충만한 생명을 주시는 구속의 죽음이었고, 이 죽음을 통하여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게 해 주는 길을 연 것이다. 또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며 무릇 살아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함을 전하는 것이다(cf. 3:16, 11:25-26). 그러므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종교적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두가 다 하나인 것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 사이의 다툼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오순절 사건은 해리보더가 그의 책 초대교회사에서 지적하고 있는 대로: 신약의 교회는 성전과 회당에서 모였던 엄밀한 이스라엘의 성전중심에서 벗어나 회중 중심의 색채를 띠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국수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국제적이고 우주적이어야 함을 보여주었으며, 설교자가 제사장을 대신하였고 강단은 제단을 대신하여 선포의 사역을 강하게 부각시킨 것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핍박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교회에 가해진 핍박이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신자들을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것이 복음의 확장을 꾀하게 된 것이다. 빌립은 사마리아로 베드로는 욥바와 가이사랴지역에까지 갔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유대의식을 버리지 못하였고 또 이방교회를 자기들 수하에 두려고 했다.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의 태도는 결국 팔레스타인 안에서 기독교회의 쇠퇴를 가져왔다. 유대의식을 과감하게 떨쳐버리지 못한 그들의 모습은 복음의 능력을 제한시켰고 교회의 힘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단호히 선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66년경에 벌어진 독립운동과 같은 유대인들의 반란은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것이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를 크게 갈라놓은 것이 되었다.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기독교인들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독립을 위한 반란에 가담해 주지 않은 기독교인들을 유대인 국수주의자들은 저주하였으며, 결국 이것이 기독교회와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갈라서게 된 원인이 되었다.

 

2) 초대 교회의 생활과 조직

 

오순절 사건 이후 초대교회의 생활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도들의 지도 하에 성장해갔다. 이 때는 어떤 특별한 조직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매일 늘어감에 따라 조직의 필요성이 교회 안에 부각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7명의 대표선출이다. 이들은 집사들이 아니었다. 후에 바울이 목회서신에서 교회 직분자들에 대한 자격을 논할 때 언급한 부분이 7명의 평신도 대표들이 한 역할과 유사한 것 때문에 대부분 집사라고 부르지만 스데반이나 빌립과 같은 사람은 집사로서 역할을 한 것보다 도리어 전도자로서 사역을 감당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외적 성장에 따라 사도들의 명령과 인준에 의한 직분자 선출 문제는 오늘날 사도들이 없는 현실 교회에서는 사도들이 남겨놓은 신약 성경을 통해서 직분자 세우는 근거를 가져야 하며 반드시 주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선출되어야 한다는 대원칙이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초창기의 예루살렘 교회에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움직여져 특별한 조직의 형태는 갖추지 않았으며 오직 7명의 대리인들을 선출하여 사도들이 감당해왔던 구제의 임무를 맡겼을 뿐이다.

 

그러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명을 망각하였기에 예루살렘교회에 일어난 핍박이 그들을 사방에 흩어지게 만들었고, 각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지교회에 필요한 직분자들을 임명하게 되었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각 서신에서 언급한 직분자들을 고찰하면서 성경에 명시된 초대교회의 조직과 직분자들의 기능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3) 교회의 직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일과 관련하여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교회의 직분(Office)이다. 직분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직임에 해당되는 기능(Function)’ 문제가 자연스럽게 대두된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여 유기체적인 측면에서 볼 때 기능적인 차원을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기능적인 측면에서 신약성경에 의거한 교회의 직분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전통적으로 개혁교회가 언급해온 직분은 크게 목사, 장로, 집사 세 가지이다. 사도는 초대교회의 특별직으로 보로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의 항존직(桓存職)1)에 해당하는 장로와 집사직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1)장 로(presbyter or elder)

 

초대 교회에서의 장로직은 사도행전 11:30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예루살렘교회 형제들의 기근 문제로 말미암아 구호품을 전달하고자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에게 보냈다. 또 사도행전 14:23절 이하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교회에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 장로들을 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초대교회의 기록을 보면 예루살렘교회에서부터 장로직은 교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해당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장로직이 어떻게 하여 생기게 되었는가? 신약성경은 그 시작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처음부터 교회의 대표격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 회당제도에 근거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유대인의 장로들은 회당에서 주로 행정적인 업무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신약교회가 설립된 이후 사도들의 설교사역을 통해서 제사장들을 비롯하여 허다한 무리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었는데(6:7) 그 중에는 회당에서 행정적인 업무들을 맡아보았던 장로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명칭이 신약에서 공직에 있는 자 손윗사람, 존귀한자의 뜻을 지닌 πρεσβύτερος이고 이들의 기능을 의미하는 말은 έπίσκοπος이다. 이 뜻은 감독한다또는 치리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장로들은 감독들이었고 감독은 치리하는 일을 맡은 장로였다.

 

신약교회에서 장로를 말할 때 다음 다섯 가지 직무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장로는 하나님의 교회의 목자들이다(20:28, 벧전 5:2), 이 용어 사용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내 양을 치라"(21:15절 이하)명령하신 말씀에 그 근원을 둔다.

 

둘째, 장로는 감독자이다(20:28 cf. 1:1, 딤전 3:2).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를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셋째, 장로는 감독직과 더불어 치리자이다(딤전 3:5, 5:17, 벧전5:3, cf. 13:7), 그러므로 장로란 잘 다스리는 자격을 요구하는 것이다.

 

넷째, 장로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다(1:7). 청지기직이란 하나님의 것을 위임받아 수행하는 자를 말한다. 위의 세 가지 기능은 성도들을 돌보는 직책에 더 초점이 있다면 청지기직은 하나님의 자산을 잘 관리하는 임무에 더 강조점이 있다.

 

다섯째, 장로는 그의 직임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잘 가르치는 교사이며 권위자이다(딤전 3:2, 5:17, 1:9). 모든 장로는 잘 다스려야 하며 잘 가르쳐야 하되 모든 장로가 다 잘 가르치는 장로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목사와 장로라는 구분은 역할분담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직위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목사와 장로는 다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위치에 서 있으며 단지 기능면에서만 서로 주된 업무가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초대교회에서 7명의 대표인들을 선출했을 때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사도들이 구제하는 일까지 취급했었던 것처럼 목사는 잘 다스리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다.

 

바울도 장로회에 대하여 언급하였다(딤전 4:14). 이렇게 장로들을 임명할 때 장로회에서 그들을 안수하여 세웠다. 안수행위는 신령한 은혜와 복을 내리며, 은사를 수여할 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cf. 9:18, 19:13, 6:5, 7:32, 8:23, 13:13, 8:17, 9:12, 17, 13:3, 19:6, 딤전 5:22). 초대교회의 7명의 대표들을 뽑을 때도 그들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함으로 확정지었다. 그들은 회중에 의하여 선출되었고, 사도들 앞에 세워졌을 때 사도들이 안수하였다. 사도행전 20:28에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서 엄숙히 장로직, 감독직에 대하여 말한 것을 보면 교회를 돌보고 감독하는 임무야말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장로들이 명심해야할 것은 그들 역시 대 목자장인 그리스도의 감독과 지도를 날마다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집 사 (deacon)

 

집사라는 말은 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12:26, 13:4, 고전 3:5, 고후 6:4, 11 :23, 3:7, 살전 3:28, 딤전 4:6). 집사직은 διακονία 라는 추상명사에서 독특성을 찾는다. 이 단어는 집사로서 잘 섬기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딤전 3:10, 13). 교회의 처음 조직이 생긴 사도행전 6장에서 구제하는 일과 먹이는 일을 7명의 대표들을 통해서 집사란 용어를 사용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양들을 돌보는 일, 특히 가난한 성도들을 돌보는 일은 교회의 가장 중점 되는 사업 중 하나였기 때문에(15:25-26, 2:10), 자연스럽게 집사직이 교회 안에 형성된 것 같다. 따라서 바울은 장로직을 말하면서 집사의 의무를 말하기보다는 집사의 자격을 언급하였다. , 장로직과 집사직이 이미 초대교회에서 명확히 구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집사직의 자격은 무엇보다도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딤전 3:9)여야 했다.

   

3. 교회 정치 형태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교회조직이나 직분자들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세움을 입은 자들이며, 주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은 자라야 회중들이 은사의 됨됨이와 신앙인격을 보고 선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 우리는 현존하는 각 교파의 정치 제도를 살펴보려고 한다. 현존하는 각 종파의 정치형태는 교리적인 차이와 성경 해석적인 이견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서 크게 나누어 감독정치, 회중정치 또는 독립정치및 장로정치이다.

 

1) 감독정치

 

흑자는 교황정치와 감독정치를 구분하지만(장로교화사 오덕교저, pp. 14) 교황정치는 감독정치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감독정치란 대주교, 주교 사제, 부주교, 집사 등의 여러 직분자들에게 교회를 통솔하게 하는 권력기반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통 로마 카톨릭과 성공회 등에서 유지하고 있는 정치제도이다. 다만 이 둘의 차이는 전자는 모든 권력이 교황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그가 지상의 모든 카톨릭교회를 통치하는 것이요 후자는 교회의 수장권이 군주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감독정치는 한 사람의 최고 통치권자 밑에 여러 계층의 직제에 의하여 움직이는 교회정치이다. 이러한 정치제도는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인본주의적 정치인 것이다. 교회의 모든 직분자는 위치상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며 다만 기능상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며 직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운 자들이요 회중들의 선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2) 회중 정치 또는 독립 정치

 

독립정치를 지향하고 있는 회중교회의 정치인 회중정치는 교회의 계층구조에 대한 반발로 생긴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성경적인 교리나 가르침을 그들의 공식문서에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하며 회중에 의한 목사 청빙과 교회운영 및 지교회의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내세운다.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장로회’(딤전 4:14)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든 외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일에 개교회의 결정이 최고의 결정이 최고의 결정이기 때문에 이것은 곧 개 교회의 무흠한 능력으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 소지가 많은 것이다.

 

3) 장로 정치

 

이것은 지금까지 앞에서 직분자들을 다루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장로정치라고 본다. 장로정치제도는 교회와 교회 및 직분자들과 직분자들 사이에 계급구조를 인정치 않으며 회중교회의 정치의 자율과 평등사상을 수용하지만 모든 지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는 연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장로회주의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 정치형태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감독주의나 교황의 통치권에서처럼 교회가 성경을 판단하고 인정하는 원리가 아니라 성경에 의하여 교회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다스리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장로회주의는 개교회의 당회와 지교회의 연합을 이루는 노회, 일정 지역권의 노회를 의미하는 대회와 전국적인 총회로 나누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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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과 성도의 교제에 관하여

 

성찬에 대한 피상적이해는 교회의 쇠퇴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성찬에 대한 몇가지 단상을 쓰고자 한다. 이 글을 통해서 성찬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

 

1.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사귐[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원문으로는 communio sanctorum이라고 표기되는데 이것은 성도의 사귐이라고 번역될 수 있고 "거룩한 것에 참여"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초대 교회에는 거룩한 것에 참여라는 것이 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참고:여기에 대한 최고의 권위서는 Werner Elert, Eucharist and Church Fellowship in the First Four Centuries] 따라서 성도의 사귐은 단지, 친교의 의미를 넘어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며, 이것은 그 자체가 구원이다. 그렇다면, 성찬을 지금보다 현저하게 자주 시행하는 것은 한국 개혁교회의 과제라고 볼 수 있다.

 

2. 세례와 성찬. 우리는 이 2가지 성례만을 인정하는데, 세례는 한 번만 시행하고 성찬은 계속적으로 시행한다. 왜 그럴까? 세례는 칭의에 성찬은 성화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세례가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주어진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성찬은 이 언약에 참여한 성도가 계속적으로 누리는 복이라고 할 수 있다.

 

3. 왜 목사만 성례를 집행할 수 있는가? 목사를 말씀의 종이라고 한다. 말씀은 들리는 말씀인 설교와 보이는 말씀인 성찬과 세례로 구별할 수 있다. 따라서 보다 구체적으로 목사는 말씀과 성례의 종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목사들은 명백하게 직무 유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성도들이 1년에 2-3번 정도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영적으로 부요한 삶을 누릴 수 있겠는가? 이제 말씀의 사역자들은 보이는 말씀에 보다 관심을 많이 기울여야 한다. 세례 교육을 강화하여야 하고 성찬식을 자주 시행하여야 한다. 성찬식을 자주 시행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을 돌아보는 것, 즉 심방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생각해보라. 예식 만을 따진다면, 일반 성도들도 세례나 성찬을 베풀지 못할 이유가 없다. 몇번만 연습하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세례나 성찬이 목사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성찬과 세례가 단지 그 예식 자체 뿐만 아니라 그 예식을 위한 목양, 즉 세례문답교육과 심방(권징)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3. 떡과 포도주가 각각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유월절에는 떡(무교병)만 사용된 반면 신약의 유월절인 성만찬은 포도주를 첨가시키고 있다. 주로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와 연결이 되고 따라서 포도주는 생명과 쉽게 연결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물이 아니라 포도주를 사용했을까? 또한 포도주가 생명을 지칭한다면 생명을 지칭하는 빵과 포도주의 궁극적인 차이점은 무엇일까?

 

최근에 Bread of Life, Cup of Joy라는 책이 나왔는데, 말 그대로 떡은 우리의 생명을 지칭하고 포도주는 기쁨을 지칭한다. 즉 빵과 포도주는 각자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성찬 설교 때, 우리는 단지 성찬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본문만을 다룰 것이 아니라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 오병이어의 사건, 시편에 나오는 "구원의 잔을 들고"라는 구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축사하시는 장면, 등등을 통해서 얼마든지 성찬을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기쁨을 회복시키는 메시야로 나타내셨다. 그리고 이것은 이사야 55장에 나오는 "너희는 와서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말씀의 성취로 볼 수 있다.

 

4. 기쁨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오늘날 장례식과 비슷한 성찬식은 또한 극복되어야 한다. 주로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성찬식이 제정된 사실때문에 한국교회는 너무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것은 구속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성찬식은 십자가 전이지만, 우리는 부활 이후를 살아가는 성도이다. 제자들 역시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에 성찬식을 하지 않고, 부활하신 날 성찬식을 베풀었다. 그렇다면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동시에 고려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신약 교회에서, 성찬식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누릴 식탁 교제를 지금 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영적 임재설에 대한 오해. 많은 사람들이 개혁파 성찬론은 영적 임재설이라는 것은 알면서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기념설과 비슷하게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영적 임재설은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떡과 포도주에 임한다는 말이 아니다. 영적 임재설을 풀이한다면, 예수님의 참된 몸과 피가 성령에 의하여 떡과 피에 임한다는 뜻이다. 다시말하면, 영적 임재설은, 성령적 임재설, 혹은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의 참된 임재를 뜻한다.

 

여기서 다른 견해들과 비교를 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카톨릭: 떡과 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완전하게 변함. 이것은 사제(신부)의 중보적 역할의해 가능함. 보라! 사제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 떡을 예수님의 살로 변화시킨다.

 

루터란: 예수님의 진짜 살이 떡 "위에, 아래에, 그리고 떡과 함께" 임한다고 본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루터란의 독특한 기독론에 근거한다. communicatio idiomata라고 부르는데 그리스도의 양성, 즉 신성과 인성이 교류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실제 몸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 때문에 어느 곳에나 편재(ubiquity)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 루터교의 성찬론의 핵심은 기독론에 있다.

 

쯔빙글리 및 복음주의: 성찬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시키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실천적인 면에서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6. 다른 교리들과 비교해 볼 때, 개혁주의 성찬론은 성령론이 핵심인 것을 그대로 알 수 있다. 개혁주의 성찬론의 최고의 이론가는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예수님의 참된 살과 피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성찬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인간이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하시면, 우리 육신의 입은 떡을 먹지만 우리의 영혼은 그 양식을 영혼의 입인 믿음을 통해서 먹는다고 말하였다. 그야말로 성찬은 spiritual meal인 것이다. , 성찬식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참되게 혹은 정말로 참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다.

 

7. 카톨릭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과 루터란의 공재설[consubstantiation]은 서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지상으로 끌어내린다는 것이다. 반면, 개혁파 이론은 우리의 영혼을 예수님이 계신 하늘로 올리는 이론이다. 그래서 개혁파는 오랫동안 교회의 성찬에서 사용된 성찬용어 Sursum Corda [내 마음을 들어 올립니다]를 핵심적인 위치에 놓았다. 엄밀히 말해서 떡과 포도주에 주의 살과 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들어 올려져서 하늘에 계신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다.

 

8. 참고로 루터란과 카톨릭은 Altar[제단]라는 말을, 개혁파는 table[식탁]이라는 말을 쓴다. 이 점에서 한국교회의 성찬은 카톨릭을 더 닮았다. 이것 또한 극복되어야 한다. 성찬은 카톨릭의 미사가 아니라 식사(Lord's Supper)이다. 식사의 시간은 즐거운 교제의 시간이다.

 

카톨릭이 성찬을 주로 sacrifice [희생제]로 보는 반면에 개혁파는 eucharist [감사제]로 본다. 성찬에 있어서, 카톨릭은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개혁파는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받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카톨릭에 있어서 성찬은 공로 [무엇을 드리는 것]이라면, 개혁파에 있어서 성찬은 은혜 [우리가 받는 것]로 이해된다.

 

9. 우리는 정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가? 아니면 주일날 앵무새 처럼 외우기만 하는가? 더 나아가 우리의 삶과 예배 속에서 이 고백이 어떻게 실천되고 경험되고 있는가? 성찬론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의 교회를 다시 회복시키고 부흥시킬 수 있는 실천적인 이론이다. 우리의 고백이 실천으로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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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기

 

2세기의 초반 70년은 교회 역사상 가장 모호한 시대이다. 주후96년 도미티안 황제가 죽음으로 박해는 점차 줄어들었다. 도미티안은 말년에 의심이 많아지고 포악해 져서 그를 가리켜 제 2의 네로라고 하였다.

 

♡♡ 초대교회의 문서들 ♡♡

 

* 로마의 클레멘트 서신.. 이레니우스의 글에 의하면 클레멘트는 로마의 제 2대 감독이었다고 한다. 그의 편지 내용에는 자신의 교회 이외에는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가톨릭에서 말하는 것 같이 전 세계의 교회를 관할하는 권위를 내세우고 있지 않다는 점이 특이하다.

 

열두 사도의 교훈집=디다케.. 유대적 관점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비영적이며 육체적인 욕망을 억제하는 금욕적 관습과 금식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 시대부터는 선지자들이 점차로 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선지자를 사칭하는 사기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 그가 보낸 7교회의 편지에는 가현설이라고 불리우는 초대교회의 이단과 관련하여 반박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현설에 의하면 세상에 사실 때의 그리스도는 참 육신이 아니라 환상적인 육신을 가졌으며 그러므로 그의 고난도 환각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그나티우스는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감독의 권위에 순종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그나티우스는 여러 감독들의 대표격인 장로를 감독(bishop)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감독은 한 사람의 장로이지만 영구적인 목회자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 서머나의 폴리갑.. 2세기에 알려진 최고 성자요 순교자이다. 그는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었으며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 때에 서머나에서 화형을 당하였는데 그의 인내와 유명한 말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한 지방총독에게 한 그의 답변이다. "86년 동안 나는 그 분을 섬겨왔으나 그 분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없으시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한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는가?"

 

* 져스틴 마터.. 그는 초기 변증가라고 한다. 그의 변증서에는 철학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의 사상체계는 아주 독특하였다. 그의 글을 통한 예배의 형식을 보면 아주 간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경낭독,사회자의 강론 그리고 "자신의 능력에 의한" 즉석기도로 이루어져 있다.

지방장관 쥬니우스 루스티쿠스에 의하여 사형성고를 받았는데 "너희들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살 줄로 상상하느냐?"라는 질문에 져스틴은 "나는 그것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다."고 답변하였다.

 

♡♡ 초기 이단들 ♡♡

 

2세기에는 여러 이단들이 일어났다.

 

* 나사렛파.. 이들은 바울을 몹시도 괴롭히던 초기 유대주의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예루살렘 멸망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관습을 버린 후에도 끝까지 집착하던 자들이다. 4세가경 까지 존재하였다.

 

* 에비온파.. 나사렛파와 유사하나 훨씬 더 급진적인 사람들이다. 유대의 율법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는 단지 세례시에만 성령이 함께하였으며 십자가상에서는 성령이 떠났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으로 죽었다고 생각했다.

 

* 영지주의.. 이들의 영향력은 광범위하여서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많이 퍼졌다. "영지"라는 말은 지식을 뜻하는 헤라어 그노시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비의적이고 신비한 영적인 사람들만이 이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물질을 악으로 여겼다. 이들의 도덕적인 생활은 처음에는 엄격하였으나 종종 방종과 방탕으로 빠져들곤 하였다. 이들중에 유명한 이들로는 발렌티누스와 바실리데스가 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는 시노페의 말시온이다. 그는 열심있는 사람이었으며 어떤 면에서는 정통 기독교의 입장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구약성경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그는 구약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였다. 구약의 신은 비토스라고 하는 말로 다 할수 없는 거룩한 존재로 부터 유출되어지는 30개의 유출물이 있는데 그중에 제일 마지막에 해당되는 물질의 창조의 신 데미우르지라고 한다.

 

* 몬타누스 주의.. 몬타누스 주의가 나타날 때의 교회적 상황은 최악이었다. 사도와 선지자들이 없었고 교회는 안이한 형식주의에 빠져들고 있을 때였다. 몬타누스는 성령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열광적인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천년왕국시대는 감각적인 쾌락이라고 말하여 교회의 재림교리를 부인하게 되었다. 점차로 감정주의로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시보다 인간의 사색과 감정에 치우치게 되었다.

 

3. 초기 교부들

 

2세기의 교회는 영지주의에 의한 환상적인 사변과 다른 편으로는 반지성적인 환상적 극단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 시기를 이끌고 나간 여러 교부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에게는 세 가지의 과제가 부과되어 있었다.

1) 신약의 정경..당시까지는 신약의 목록이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서신들도 정경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많은 편지들이 사도가 썼는지 아니면 사도와 적어도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이 썼는지를 알아 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레니우스는 이러한 글들을 가리켜 "성경"이라고 불렀으며 터툴리안은 구약의 위치에 신약을 올려놓았다.

2) 신앙의 규범.. 영지주의자들이 가짜 복음서와 가짜 서신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이런 것들로부터 보호하여야만 했다. 이렇게해서 간략한 신조 혹은 신앙의 규범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사도신경이다. 이레니우스는 참된 교리의 발견을 위해 사도시대에 있었던 교회들의 신앙에 의존하였다. 이 것이 교회들의 "전통"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가자 이 전통은 모호한 것이 되었고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3) 사도권 계승..이레니우스는 전통의 거룩한 수탁자로서 사도직 계승 사상을 강조하였다. 이 식부터 점차로 장로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감독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3세기에 이르러 터툴리안과 클레멘트에 이르면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교회가 감독직 아래서 그 통일성을 발견하게 되고 전해내려오는 전통에 비중을 두게된다. 그 결과로 전통이 성경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 골의 이레니우스 ♡♡

 

180-250 년경의 위대한 교부들 중에 첫째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의 제자이다. 그는 영지주의자와의 논쟁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것은 그가 전통에 호소할 수 있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로는 가장 유명한 이단논박이라는 책을 남기고 있다.

 

♡♡ 카르타고의 터툴리안 ♡♡

 

복음이 북아프리카에 전해진 이후 유명한 이들로는 바로 터툴리안과 키프리안 그리고 어거스틴을 들 수 있다. 여기서 기독교 라틴 문학이 발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크고 아름다운 도시 카르타고가 라틴 문화의 뛰어나나 중심지 였기 때문이다.

그는 법률가로서 훈련을 받았다. 그후 그의 신학세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신격을 나타내는데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있다. 그의 변증서는 그야말로 걸작이다. 그는 이단을 물리침에 있어서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닥호 주장하였다. 이 이론은 더 나아가 사도권의 계승과 전통의 강조와 접목되어져 로마 가톨릭의 권위와 전통을 주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사상에는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 카르타고의 키프리안 ♡♡

 

그는 감독직에 대한 폭넓은 주장때문에 그리고 성직자 개념을 도입함으로서 교회의 예배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이유로 유명해 졌다.

1) 감독의 위치를 높이려는 그의 줄기찬 주장.. 박해때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자를 어떤 회개의 증거없이도 다시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문제로 크게 두 파벌이 나뉘어졌는데 키프리안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감독의 위치에 대한 절대적 우월성에 대한 굉장한 주장을 하였따. 그후 그의 이 주장은 받아들여져서 거의 완전한 독재적인 교회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2)제사를 드리는 사제로서의 성직자 개념.. 그는 주의 만찬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제단에 바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 변화는 중대한 것으로 후에 화체설과 미사희생을 남용을 초래한다. 당시까지 이교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제단이나 제물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랑이었으나 이후로는 그렇지 않게 되었다.

 

3) 감독 각자의 자치권에 대한 그의 신념.. 로마의 감독이 자신의 의견에 자신의 반대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복종을 요구하는 교령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키프리안은 전에 폴리갑과 이레니우스의 경우처럼 로마의 권리침해에 대하여 싸우게 된다.

 

여기서 아프리카의 다른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로 우리의 관심을 옮겨보자!알렉산더에 의해 세워진 도시로 인구 250만에 달하는 세계 최고의 도시였다. 헬라문화가 아테네 다음으로 꽃피운 도시이다. 여기서 구약성경이 번역되었으며 이곳의 교회에서 배출한 지도자로는 판타이누스,클레멘트 그리고 오리겐을 들 수 있다. 이 곳에서는 교리문답학교가 있어 신학뿐 아니라 과학과 철학의 교육도 이루어졌다.

 

♡♡ 클레멘트 ♡♡

 

클레멘트는 문답학교의 교장이었다. 그는 철학을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 그는 모든 참된 지식은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인 성경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 오리겐 ♡♡

 

당시까지 교회가 알고 있던 가장 위대한 인물은 오리겐이다. 그는 18살에 교장이 되엇다. 또한 학교의 이름을 최고로 높여놓은 것도 그였다. 그는 성경의 신적인 영감을 강하게 믿으면서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전형적인 풍유적 해석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단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의 교리를 강조하였다.

2세기말에 나타난 단일신론(Moanrchianism)이 있다. 이 말은 헤라 신학자에게는 하나님의 신성에는 하나의 위격만이 있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1)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 예수에게 임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게 했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역동적 단일신론이라고 한다.

2) 하나님의 충만함이 그리스도안에 거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양태의 표현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 주장을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고 한다. 즉 어떤 때는 성부로 성자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항상 같은 위격이라는 것이다.

이들 이론에 의하면 성부계서 십자가에서 수난당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들을 성부수난설자라고 한다.

 

이 상들에 대한 오리겐의 역할은 중요하였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그는 성부와 성령과 구별되는 인격을 가졌으나 그들과 하나라는 것이다. 오리겐의 성자의 영원출생에 대한 해설은 325년의 니케아 회의의 결정과 4세기의 교회 공의회의 선언에 기초가 되었다.

 

4. 시련과 승리

 

교회에 대한 박해가 250-260 정도 다소 완화되기는 했지만 데키우스(249-251)와 발렌시안(254-260)의 통치기간에는 가혹한 박해가 있었다. 이 시기는 로마에 있어 큰 재난의 시기이다. 사방에서 침입해 오는 야만족들의 침입이 심각했는데 그중 고트족의 침입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박해의 대표적인 희생자는 키프리안을 들 수 있다. 3세기로 접어들기까지 교회는 삶의 모든 영역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다 디오클레티안때에 기독교의 예배장소와 모든 종교서적을 파괴하는 칙령을 내리게 된다. 이들이 아름다운 교회당에 들어갔을 때 아무런 신상이 없다는 것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서방황제 막시미안도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이 칙령을 준수하였는데 그의 부제로 골과 브리테인 그리고 스페인을 다스리던 콘스탄티우스는 하나님의 성전인 육체가 그렇게 가혹하게 학대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종교박해로 인헤 사람을 죽이는 일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그의 아들 콘스탄틴이 여러 경쟁자를 물리치고 황제가 되었다. 그는 밀비안 다리에서 막센티우스를 격파하기전에 특이한 영적체험을 하게 된다. 헬라어 문장이 새겨져 있는 불타는 듯한 십자가를 본 것이다. 그는 공동황제였던 리시니우스를 물리치고 전 지역의 황제가 되었으며 3133월 밀라노에서 칙령을 발표하였다. 기독교에 몰수되었던 재산을 돌려주고 무조건적인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그는 후에 매우 사치해져서 이교도의 예복중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감독에게 주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교회에서 예복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4세기말에 이르러 거의 모든 이교도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자체내에서도 미래에 대한 불길한 전조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성직자의 세속적인 야심과 성례가 사상 그리고 수도원 제도등이 자라나고 있었다.

 

5. 주요 회의들,주요 인물들,주요 사건들(325-500)

이 시기는 단적으로 격렬한 신학적 논쟁의 시기다.

 

아리우스 논쟁 ♣ ♣

 

아리우스의 견해에 의하면 아들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앞서고 고귀하기는 하지만 본성과 위엄에 있어서 아버지보다 열등하다는 것이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던 알렉산더는 동일본질임을 주장하였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더와 싸우게 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틴 황제의 노력이 실패하자 324년 니케아에서 회의를 소집한다.

토론의 내용은 그리스도가 동일본질(Homousius)인가 유사본질(Homoiousius)인가였다. 결국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 의해 그리스도는 동일본질임이 주장되었고 아리우스는 파문당하였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사벧리우스 주의에 반대하여 성령의 신성을 특별히 주장한 회의였다.

431년 에베소 회의는 콘스탄티노플의 웅변가적인 감독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여 내쫓았다. 그가 단성론자들에 반대하여 지나치고 양성론을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 인격이 아니라 두 인격을 가진다고 본 것이다. 당시 마리아에게 데오토코스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이 뜻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이다. 여기에도 반대하여 그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지 그의 신성의 어머니는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회의는 불공종했으며 그는 유배되었다. 그후 네스토리안 교회는 페르시아와 아르메

니아에서 확장됴으며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에베소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하던 유티케스가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의 본성 신성만을 가르친다고해서 정죄당하였다.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으며 449년 에베소회의에서 그를 인정하였으나 이 회의는 난장판이었으며 일명 강도회의라고 부른다. 그후 칼케돈회의에서 다시 정죄당하였다.

그리하여 최종적인 결론은 이렇게 났다. "그리스도가 변화나 혼합됨없이 두 본성을 지니고 있으나 한 위격속에 연합되있다고"고 확인되었다.

 

탁월한 인물들 ♣ ♣

 

1) 포이티어스의 힐라리.. 아리우스에 대항한 서방의 위대한 투사

2) 밀라노의 암브로스.. 황제 발렌티니안2세의 어머니가 아리우스파를 위하여 예배처를 요청했을 때 거절한 사람이며 서방제국의 왕좌를 탈취한 막시무스에게 성찬정지시켰고, 데살로니가의 반란군에게 학살을 명한 데오도시우스대제에게 8개월간의 교회출입을 금지시킨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감독이었다.

3)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 그의 신학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며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다.

4) 세 사람의 카파도기아인.. 가이사랴 감독 대 바실, 그의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 그들의 친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를 들 수 있다. 동방교회의 위대한 인물들이다.

5) 존 크리소스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가로 이름나 있으며 "황금 입의 존"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6) 제롬..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역을 내 놓은 사람이다. 그는 은둔생활을 하며 수도원주의와 독신주의자이다.

7) 레오대제..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그와 로마의 그의 계승자에게만 "교황"이라는 명칭을 쓰기로 합의했다. 그후 그는 로마의 감독이 세계의 감독권을 갖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칼케톤회의에서 그의 주장은 거부당했다. 그러나 교황 지상권에 대한 주장은 후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격변하는 세계(400-500) ♣ ♣

 

이 시기에 야만족들의 침입이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서고트족의 알라릭은 410년 로마를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다행인 것은 이 야만족들이 아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이란 점이다. 그래서 다행히 기독교의 피해가 적었다고 할 수 있다. 410년 로마의 마지막 군단은 골과 이탈리아를 방어하기 위해 영국을 떠났다. 그러나 쥬트족,앵글족,색슨족등이 북부독일로부터 건너와 동부 잉글랜드와 남부 스콜틀랜드의 교회를 파괴하였다. 서부의 켈트 교회만이 살아 남았다. 이로서 로마 문화는 크게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꿋꿋한 튜튼족은 무력한 문명을 대체하기 위하여 새로운 힘과 활력을 심었다. 이 시기가 기독교에 있어서는 어려운 시기였다. 비록 이교도들이 개종을 하기는 했지만 각종 미신과 오류가 유입된 시기였다.

그럼에도 로마의 감독들에게는 개인적인 위치를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교도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귀족들은 도망갔으며 감독의 도덕적인 권위가 크게 증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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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교회의 시작과 기원(행2:1-13)

성경/행2:1-13    제목/교회의 시작과 기원

● 오늘 본문은 성경의 역사가운데 참으로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입니다.

-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며

- 교회가 탄생했으며

- 예수님의 약속대로 믿는 자들의 육체와 성령이 하나 되는 역사가 있었고

-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전무후무한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몇 군데 기록 되어 있습니다. 행4:8, 24-31. 행8:15-17, 행9:17, 행19:6에 기록이 있지만 본문과 같은 성령의 다이내믹한 역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순절과 같은 역사는 교회의 역사 가운데 또다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본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오순절에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중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현상에 대해서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이러한 현상 속에 일어난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 3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방언의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5절부터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이하게 8절을 보면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각자 자기가 태어난 곳의 말로 듣게 됩니다. 그런데 무엇을 듣습니까? 11절 “(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하고)”그런데 이러한 성도들의 모습을 보니 어떤 힘에 붙들려서 행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13절 말씀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 이러한 성경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시작과 기원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두 가지의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변화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는 하나님이 들어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행동하는 곳입니다. 본문 2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교회의 출발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행동에서부터 교회는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에 대해 권세자들이 배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했는가? 행4:13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다가... 무식하기 짝이 없는 보통사람들이다. 무시하는 발언.

초대교회 당대의 제자들, 믿는 성도들의 특징 - 배운 것이 없다. 영향력도 없다. 권세도 없다. 돈도 없었습니다. 그저 평범하고, 학문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는 곳마다 변화되고 뒤집히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3천명, 오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에게서 원인을 찾으면 안 되고, 하나님이 그들 속에서, 그들을 통하여 일하셨기 때문이다.

강조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교회의 출발이고,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계신다. 주역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사람인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행동,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동이 없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왜?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느냐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임재가 있느냐입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모습입니다. 비록 120명의 성도들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역사하신 곳이고, 하나님이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까?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두 번째 요소는 변화입니다.

● 교회는 변화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변화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사람을 변화 시킵니다. 제자들을 변화 시키셨습니다. 본래 제자들은 겁 많고, 소심하고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의 용사로 변화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이 쓴 팡세에서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줄 아느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철학자들의 하나님, 사상가들의 하나님, 점쟁이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 이삭에게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 야곱에게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지금 나를 변화 시키고 있다.”라고 고백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데 어찌 사람이 변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생명을 만나는데 어떻게 변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미국에 가면 데스밸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어떤 생명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덤가에 가더라도 그곳에 풀이 있는데, 데스밸리에는 풀 한포기 없을 정도의 죽음의 지역입니다. 그래서 데스밸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곳에 비가 왔습니다. 비가 오니 풀들이 돋아납니다.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들이 몇 개월, 몇 년 동안 묻혀 있다가 물을 만나니 싹을 내며 자라며, 꽃을 피우기도 합니다. 이게 변화 아닙니까?

아무것도 없는 죽은 곳 같은 곳에서도 생명을 만나니까 살아나고, 꽃을 피우게 됩니다. 우리 심령이 데스밸리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 심령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게 변화입니다. 예수 믿고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한사람 한사람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생명은 변화의 힘이 있습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변화가 없다는 것은 내 안에 아직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숙함이 없이 늙어 가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기전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며 문을 걸어 잠근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니 그들은 변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걸어 잠그었던 문을 열고 나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안에 하나님이 활동하십니까? 우리는 얼마나 변회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들을 살펴보면 살아게신 우리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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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명목 신자'의 비극 

 

오늘 말씀은 최후 심판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보여주시며 자기착각과 자기기만에 빠졌던 거짓 선지자와 명목 신자들의 최후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22절은 ‘그날’은 바로 최후 심판의 날로 인간의 최대 성공과 실패, 저주와 축복이 갈리는 날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최후 심판자로 등장하셔서 그 사람의 신앙과 삶을 평가하십니다. 여러분의 신앙 평가는 예수님이 하시므로 예수님께 인정받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21절에는 심판의 기준이 나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충격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 구성원이 되고 신앙고백을 하고 기도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 받지 못한 명목 신자, 가짜 신자, 나그네 신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자’여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는 죄를 회개하고 오직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를 신뢰하여 순종하는 자를 말합니다.

 

명목 신자들은 이렇게 항변할지 모릅니다. “주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 쫓고 권능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조건은 봉사, 헌신, 직분의 의무수행, 종교적 특권 같은 자기 공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엡 2:8∼9). 이들은 잘못된 구원관을 갖고 자기착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엇을 했느냐를 묻지 않고 무엇을 받아들였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23절에서 재심 청구도 번복도 할 수 없는 예수님의 판결이 내려집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렇게 최후의 판결을 받은 자는 가장 불행한 자요, 가장 실패한 자입니다. 100번 성공해도 마지막에 실패하면 패배자입니다. 세상만사는 끝이 중요합니다.

 

이들의 비극과 실패는 첫째 자기기만 때문입니다. 중생하지 않았는데 중생했다고, 은혜 받지 못했는데 은혜 받았다고 자기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이는 사탄의 최대 전략입니다. 둘째는 자기유익을 위한 잘못된 신앙 동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 자기 뜻과 기분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자기공로를 주장했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수고는 했으나 충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고는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충성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불행한 자는 예수님을 모르는 자요 또한 쓰임 받지 못하는 자이며, 더 불행한 사람은 쓰임 받고 버림받는 자입니다. 여섯째는 주님과 교제가 없었고 주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신앙의 선택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소수의 진실한 신앙인들을 통해 기독교는 역동적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결단 없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통계상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미국과 호주에서 문서선교활동을 했던 아더 핑크는 “오늘날처럼 명목상 기독교인이 많았던 시대도 참된 기독교인들이 적었던 시대도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는 “역사상 오늘날처럼 사탄에게 속은 영혼들이 교회에 많았던 때가 있었는가.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고 있는데도 영혼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오늘처럼 많았던 때가 있었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주님 앞에 어떻게 평가될지 점검하고 더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조홍영 목사(인천 하늘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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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어야 하는 열 가지 이유


1. 창설자에 대한 신빙성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그를 믿는 자들을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려는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그는 거짓말쟁이, 정신병자, 전설의 인물, 혹은 하늘의 주님이십니다.

1세기에 그 분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결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분께서 물위로 걷고, 폭풍을 잠잠케 하고, 중풍병자를 고치고, 몇 개의 빵과 물고기로 오 천명을 먹이고, 죄 없는 삶을 사셨을 뿐 아니라, 아주 무서운 죽음을 죽으셨고, 다시 사신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분의 공생애 기간 동안 몇 명의 추종자들이 심각한 문제를 들은 이후 떠나버렸을 때, 그 분은 그 분을 가까이에서 따르던 사람들에게 그들도 가겠는가를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말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요 6:68-69).

2. 성경의 실제성
약 1천 6백년 동안 40 여 명의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기독교의 믿음에 관한 이 책은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영원의 문턱에 까지 이르는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이고 지리학적인 무오함은 이미 고고학을 통해서 입증된 바입니다. 우리에게 전달되기 까지 사람의 손에 의해서 베껴진 정확성은 쿰란의 사해사본으로 인해서 확인되었습니다. 동쪽도 아니고 서쪽도 아닌 문명의 요람인 중동지역에서 기원한 성경은 영적인 능력 뿐 아니라, 예언의 정확성을 가지고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3. 삶에 대한 이해
모든 종교 체제들이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모두가 차이점에 대한 우리의 갈망, 고통의 문제, 그리고 죽음의 불가피함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모든 종교들은 우주의 설계를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적용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믿음은 자연 세계의 종(種)과 생태계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관심들을 반영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마 10:29-31). 그리스도께서는 만드신 모든 것에 대해서 깊으 사랑을 보이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느끼는 바를 느끼시기 위해서 친히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우리 자리에서 고통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연 세계의 설계와 세부적인 사항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창조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십니다 (시 19:1-6; 롬 1:16-25).

4. 과거와의 연속성
기독교의 믿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깊은 조상적 근원과의 연속성을 제공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아담, 아브라함, 사라와 솔로몬이 섬겼던 같은 창조주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의 과거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요 1;1-14). 그 분께서 우리들 중에 사셨을 때, 원래의 계획대로 사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분께서 죽으셨을 때, 그 분은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를 완성시키셨습니다. 또한, 죽음에서 일어나셨을 때, 그 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의 자손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생겨진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행 2:22-39; 고전 15:1-8).

5. 근본적인 주장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혹은 종교적 이견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은 도덕적이거나 사회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정평이 난 신학자들이나 사회적 철학가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증인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무고한 한 사람이 죽었다가 죽은지 삼일 만에 기적적으로 자신들 사이에서 걸어다시신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고 세상에 전했습니다 (행 5:17-42). 그들의 주장은 아주 강경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의 몸은 장사되고, 남의 무덤에 누워서 봉해졌습니다. 아무도 무덤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간수들이 배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삼 일 후, 그 무덤은 텅텅 비었고 증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내놓고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6.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
초대 교회의 제자들은 극적인 변화를 가졌을 뿐 아니라, 그들 중 한 명은 아주 심한 원수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을 잡아 죽이는 사람에서 기독교에 대해서 가장 열심히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갈 1:11-24). 이후에, 그는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변화가 일어났음을 증거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전 6:9-11).


7. 인간 특성에 대한 분석
성경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문제들이 마음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보와 과학기술 세대에 살면서 인격의 실패는 곧 가정, 정부, 과학, 산업, 종교, 과학, 그리고 예술의 체면을 손상시켜 왔습니다. 인종 차별, 마약 중독, 학대, 이혼, 성병 전염 등은 우리 사회의 평판을 완전히 망쳐 놓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문제가 무지, 음식, 그리고 정부로부터 기인한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세대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 15:19-20).

8. 인간 공로에 대한 관점
세대를 지내면서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바랍니다. 우리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전쟁을 벌였습니다. 아이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그들을 비폭력적으로 키우기 위해서 교육 이론들을 개발시켰습니다. 우리를 일의 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기술 개발에 힘을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재 난리와 난리의 소문, 처처에 지진과 기근, 사랑의 결핍,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등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말세의 징조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마 24:6-7; 딤후 3:1-5).

9. 사회에 끼친 영향
나사렛으로부터 온 한 목수 랍비가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달력들과 날짜가 적힌 문서들이 조용히 그 분의 탄생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붕 꼭대기들로부터 목걸이, 귀걸이 등에 있는 십자가들이 그 분의 죽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서구 사회의 관점은 사회 도덕의 기본, 과학적 방법론, 그리고 직업 윤리에 대한 기반을 통해서 산업을 가속화 했는데 이는 철저하게 기독교의 가치를 뿌리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서를 막록하고, 사회 구호 단체들은 결코 힌두교, 불교, 무교, 혹은 세속적인 불가지론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성경의 가치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10. 구원의 제공
다른 종교는 여전히 무덤에 있는 구세주들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다른 체제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죽음을 정복한 구세주를 의지하는 이들에게 영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도움을 구하면서 구조원의 도움에 의지하는 것처럼 그들의 신을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용서의 확신, 영생,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는 특권 등을 주는 체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롬 10:9-13).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우리가 그 분을 위해서 한 일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해주신 일을 받아들임에 달려 있습니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수고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 구원은 다만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죄에 대한 고백을 요구할 뿐입니다. 개인적인 신앙의 업적보다는 실패의 고백을 요구합니다. 신앙의 다른 선택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 분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구원하신 분에 대한 감사, 사랑, 그리고 신뢰을 표현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엡 2:8-10).

 


1. 창설자에 대한 신빙성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그를 믿는 자들을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려는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그는 거짓말쟁이, 정신병자, 전설의 인물, 혹은 하늘의 주님이십니다.

1세기에 그 분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결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분께서 물위로 걷고, 폭풍을 잠잠케 하고, 중풍병자를 고치고, 몇 개의 빵과 물고기로 오 천명을 먹이고, 죄 없는 삶을 사셨을 뿐 아니라, 아주 무서운 죽음을 죽으셨고, 다시 사신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분의 공생애 기간 동안 몇 명의 추종자들이 심각한 문제를 들은 이후 떠나버렸을 때, 그 분은 그 분을 가까이에서 따르던 사람들에게 그들도 가겠는가를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말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요 6:68-69).

2. 성경의 실제성
약 1천 6백년 동안 40 여 명의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기독교의 믿음에 관한 이 책은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영원의 문턱에 까지 이르는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이고 지리학적인 무오함은 이미 고고학을 통해서 입증된 바입니다. 우리에게 전달되기 까지 사람의 손에 의해서 베껴진 정확성은 쿰란의 사해사본으로 인해서 확인되었습니다. 동쪽도 아니고 서쪽도 아닌 문명의 요람인 중동지역에서 기원한 성경은 영적인 능력 뿐 아니라, 예언의 정확성을 가지고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3. 삶에 대한 이해
모든 종교 체제들이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모두가 차이점에 대한 우리의 갈망, 고통의 문제, 그리고 죽음의 불가피함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모든 종교들은 우주의 설계를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적용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믿음은 자연 세계의 종(種)과 생태계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관심들을 반영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마 10:29-31). 그리스도께서는 만드신 모든 것에 대해서 깊으 사랑을 보이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느끼는 바를 느끼시기 위해서 친히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우리 자리에서 고통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연 세계의 설계와 세부적인 사항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창조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십니다 (시 19:1-6; 롬 1:16-25).

4. 과거와의 연속성
기독교의 믿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깊은 조상적 근원과의 연속성을 제공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아담, 아브라함, 사라와 솔로몬이 섬겼던 같은 창조주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의 과거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요 1;1-14). 그 분께서 우리들 중에 사셨을 때, 원래의 계획대로 사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분께서 죽으셨을 때, 그 분은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를 완성시키셨습니다. 또한, 죽음에서 일어나셨을 때, 그 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의 자손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생겨진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행 2:22-39; 고전 15:1-8).

5. 근본적인 주장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혹은 종교적 이견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은 도덕적이거나 사회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정평이 난 신학자들이나 사회적 철학가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증인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무고한 한 사람이 죽었다가 죽은지 삼일 만에 기적적으로 자신들 사이에서 걸어다시신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고 세상에 전했습니다 (행 5:17-42). 그들의 주장은 아주 강경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의 몸은 장사되고, 남의 무덤에 누워서 봉해졌습니다. 아무도 무덤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간수들이 배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삼 일 후, 그 무덤은 텅텅 비었고 증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내놓고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6.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
초대 교회의 제자들은 극적인 변화를 가졌을 뿐 아니라, 그들 중 한 명은 아주 심한 원수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을 잡아 죽이는 사람에서 기독교에 대해서 가장 열심히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갈 1:11-24). 이후에, 그는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변화가 일어났음을 증거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전 6:9-11).


7. 인간 특성에 대한 분석
성경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문제들이 마음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보와 과학기술 세대에 살면서 인격의 실패는 곧 가정, 정부, 과학, 산업, 종교, 과학, 그리고 예술의 체면을 손상시켜 왔습니다. 인종 차별, 마약 중독, 학대, 이혼, 성병 전염 등은 우리 사회의 평판을 완전히 망쳐 놓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문제가 무지, 음식, 그리고 정부로부터 기인한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세대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 15:19-20).

8. 인간 공로에 대한 관점
세대를 지내면서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바랍니다. 우리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전쟁을 벌였습니다. 아이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그들을 비폭력적으로 키우기 위해서 교육 이론들을 개발시켰습니다. 우리를 일의 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기술 개발에 힘을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재 난리와 난리의 소문, 처처에 지진과 기근, 사랑의 결핍,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등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말세의 징조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마 24:6-7; 딤후 3:1-5).

9. 사회에 끼친 영향
나사렛으로부터 온 한 목수 랍비가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달력들과 날짜가 적힌 문서들이 조용히 그 분의 탄생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붕 꼭대기들로부터 목걸이, 귀걸이 등에 있는 십자가들이 그 분의 죽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서구 사회의 관점은 사회 도덕의 기본, 과학적 방법론, 그리고 직업 윤리에 대한 기반을 통해서 산업을 가속화 했는데 이는 철저하게 기독교의 가치를 뿌리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서를 막록하고, 사회 구호 단체들은 결코 힌두교, 불교, 무교, 혹은 세속적인 불가지론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성경의 가치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10. 구원의 제공
다른 종교는 여전히 무덤에 있는 구세주들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다른 체제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죽음을 정복한 구세주를 의지하는 이들에게 영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도움을 구하면서 구조원의 도움에 의지하는 것처럼 그들의 신을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용서의 확신, 영생,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는 특권 등을 주는 체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롬 10:9-13).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우리가 그 분을 위해서 한 일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해주신 일을 받아들임에 달려 있습니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수고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 구원은 다만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죄에 대한 고백을 요구할 뿐입니다. 개인적인 신앙의 업적보다는 실패의 고백을 요구합니다. 신앙의 다른 선택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 분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구원하신 분에 대한 감사, 사랑, 그리고 신뢰을 표현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엡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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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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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 예수부활


 나는 왜 예수부활을 믿는가?  
 
  부활 신앙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1.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1)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맹목적(盲目的)으로 믿지 않았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맹목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의심하고, 충분히 불신하고, 충분히 거리를 두고 예수의 부활을 검토한 뒤에 믿기 시작한 것이다. 사기꾼들은 처음부터 믿음을 주려고 노력한다. 성경은 제자들의 믿음을 그렇게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부활의 날 아침 신문 속보에 실린 1면 기사는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아다닌 사람들 이야기’가 정작 부활하신 주님보다 더 많이 다루어졌다. 부활 아침에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았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찾지는 않았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 16:6).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와서 제자들에게 이야기 했을 때 마가복음 16:11은 이렇게 반응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듣고도 믿지 않았다. 누가복음 24:11은 좀 더 강하게 묘사한다.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 심지어 마태복음 28:17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말씀을 하실 때의 반응도 보여 준다.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제자들은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 이야기나 덥석 믿어버리는 맹목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어리석은 촌뜨기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부활에 목숨을 건 제자들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도 나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2)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신앙을 날조(捏造)하지 않았다.

  ‘날조’란 없는 일을 있는 일처럼 조작하는 것이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완전히 날조하여 퍼트리려고 작정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처 실패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검찰이 론스타 회사의 불법을 조사하기 위해 700상자 분량의 서류를 검토한 적이 있다. 불법을 저지르려면 철저하게 잘못을 감춰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위해서 어떤 안전장치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부활 사건을 보호하려는 어떤 인간적인 시도도 하지 않았다. 부활을 음모하려면 모든 제자들이 모여서 입을 맞추고, 모든 사건 순서와 모든 내용을 똑같이 증언해야 하며, 부활에 대한 대단한 확신도 보여주어야 하고, 부활에 대한 모든 증언이 일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성경은 지난 수천 년 동안에 오류를 바로 잡을 기회가 있었으나 한 번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왜? 부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부활 사건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꾸밀 필요가 없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류나 인간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사건이 오류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도 잡혀가 죽을 까봐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부활신앙을 믿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 같았다. 얼마나 겁이 났던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주변에는 요한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 달아났던 제자들이다.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례를 치른 것은 의외의 인물들이다. 예수 믿는 신앙을 감춰왔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서서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런 정황으로 보건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꾸미거나 부활을 확신하는 척하거나 목숨을 걸고 군인들이 지키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보기엔 너무 무리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예수 믿는 신앙을 후회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끝이 났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을 듣고 오히려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마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는 실패한 사업가와 같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황우석 박사의 추종자들만도 못했다. 목숨을 건 제자도 없고, 나서서 데모하는 제자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위하여 어떤 인위적인 시도조차도 할 수 없었을 만큼 부활을 믿지 않았던 자들이다.

  

3) 예수 부활은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증언되었다.

  예수님이 처음 태어나셨을 때 그의 증인은 목동들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목격하고 전한 사람들은 여성들이었다. 목동이나 여성들은 1세기 유대사회에서 별 볼일 없는 그룹이다. 그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증언으로 채택되지도 않는다. 만일 사람들을 믿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좀 더 그럴싸한 증인을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부활소식을 전하게 하려고 초대교회는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서 사기극(詐欺劇)을 연출할 필요가 없었다. 하찮은 여인들의 증언이야 말로 초대교회가 부활을 날조하지 않았다는 좋은 증거다. 노예해방의 전기를 가져온 엉클 톰의 이야기를 쓴 사람을 만났을 때 링컨은 놀랐다. 이렇게 키도 작은 여성이란 사실에. 부활의 증인은 위대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이면 족한 것이다.

  

  4) 예수 부활 사건 기록은 수정되거나 보완되지 않았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음모나 날조로 부활이야기가 생겼다면 시간이 흘러 부활 이야기는 좀 더 완벽한 시나리오로 고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교회 한만오 목사님이 미국에서 논문 초고를 제출하면서 지도교수에게 물었다. “이 논문이 지금 어느 정도 평가를 받겠습니까?” 슈미트 박사는 말하기를 “이 논문은 B급이라”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한만오 목사님이 실망하여 내게 전화를 했다. “목사님, 어떡하면 좋지요? 내 논문이 B밖에 안 된데요.”

  내가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격려해 드렸다. “목사님, 논문 초고(first draft)를 내면서 B라면 아주 잘한 겁니다. 논문 수정을 한 번 거치면 B가 B+이 되고, 두 번 거치면 B+이 A-가 되는 겁니다.  졸업할 때까지 논문 방어를 하고 나서 한 번 더 수정하면  A-가 A가 됩니다. 틀림없이 A 받으실 겁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부활 점수를 A로 받기 위해 박사 논문을 수정하듯 손대지 않았다. 수정할 필요도 없다. 성경은 누구의 변호도 필요치 않는다.

 

  데이빗 스티브스는 1957년 공군 중위로 공군 훈련 제트기를 타고 훈련받다가 비행기가 추락, 실종 된지 54일 만에 캘리포니아 주 시에라 산중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이미 시종 사망 처리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스티브스가 말하는 것처럼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찾지 못해 사건 조작 혐의로 강제 전역 당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뒤에 그 비행기 잔해가 캠프 하던 보이스카우트 소년들에게 발견되어 20년 만에 그의 이야기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마치 부활이 조작이라고 말하도록 만들게 되지 않을까? 그의 청중을 위해 예수님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나타나셨다고 수정하고 싶지 않은가?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왜 실망하여 예루살렘을 떠나려했고, 그들은 예수님이 대화에 끼어들어 한 동안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뭔가 부족한 듯 보이는 이 이야기를 좀 더 완벽하게 수정하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성경은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도무지 변증하거나 잘 보이려고 애쓰거나, 보다 완벽한 구성을 해서 제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부활 사건을 경험했던 충격 그대로 우리에게 기록하여 전해준다.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2. 나는 부활의 역사적(歷史的) 사실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프랑스의 한 신문사가 세계의 저명인사 100명에게 ‘지구의 파멸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안전하게 반출해야 할 지구상의 보물이 무엇이냐?’고 설문조사를 했다. 2위는 인간예술의 극치로 평가받는 미로의 비너스상이다. 1위는 무엇일까? 폭 1m, 길이 4m 20cm인 세마포,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하찮은 삼베 수의천이 인류 최고의 보물로 간주되었다. 수년 전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 화재가 일어나 완전히 전소되었을 때 그 역사적 성당 안에 수많은 보물들이 불에 타 한 줌 재가 되어버렸다. 그 당시 가장 큰 관심은 토리노 성당 안에 있던 세마포였다. 화재 신고를 받은 소방대원들은 화염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 3층으로 된 방탄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트린 뒤 그 세마포가 담긴 상자를 안고 나왔다. 왜 세마포롤 첫 번째 보물로 여기고, 소방관은 자기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면서도 세마포를 가지고 나왔을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것을 보라”(마 28:6). 

 무덤은 비었고, 수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요한복음 20:3-08을 보면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수의는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처럼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향유를 바르고, 미이라를 만들어 놓았던 바로 그 모양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1) 빈 무덤과 빈 수의는 부활의 큰 증거다.

  2) 유대 지도자들은 부활에 관한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3) 유대 종교와 로마의 통치 속에서 기독교가 탄생했다.

  4) 주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시작한 것은 부활의 역사적 부산물이다.

 

3. 나는 부활 신앙을 인해 변화된 사람들 때문에 예수부활을 믿는다.

 

  의심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믿으라고 하면 쉽게 믿어지겠는가? 믿기 어려워서, 믿을 수 없어서 고민한 사람들이 많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누가 돌을 치웠는가?」(Who Moved the Stone?)이라는 책을 쓴 영국의 저널리스트 프랭크 모리슨이다. 모리슨의 의도는 부활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려던 것이었는데 쓰다 보니 결론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영국의 두 젊은 무신론 변호사 길버트 웨스트(Gilbert West)와 리틀톤(Lyttleton)은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기독교를 무너뜨릴 궁리를 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역사성(歷史性)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입증만 하면 기독교는 모래성처럼 허물이 지게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길버트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리틀톤은 사울의 회심에 대한 책을 각각 쓰기로 했다. 성경을 포함한 많은 책을 읽고 연구를 하던 중 얼마 후에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들의 결론은 놀라웠다. 아무리 보아도 예수는 부활하셨고, 사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조사하고 연구한 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과「사울의 회심」(The Conversion of St. Paul)이다. 「벤허」라는 영화의 원작을 쓰기 전까지 월러스(Wallace)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예수를 믿는 것을 우습게 여겼던 작가이다. 그의 친구의 말을 믿고 있었다.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월러스가 소설을 쓰기 위해 성경을 읽고, 역사적인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영화 속의 불신자 벤허처럼 그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앞에 무릎을 꿇어다. 영화 속의 벤허는 복수심에 불타 칼과 창으로 민족을 해방시키겠다는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자 그는 딴 사람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자 그는 딴 사람이 되었다.  


   1) 부활을 받아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다.

  숨어있기에 급급했던 이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40일 동안 11번 넘게 만나면서, 순교도 마다않는 겁 없는 전도자들로 변했다. 그들의 변화를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진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진다.  


  2) 예수의 육신적인 형제며 불신자인 야고보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야고는 부활 사건 전까지는 예수의 주님 되심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 사건은 그의 형을 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3) 의심 많은 제자 도마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요한복음 20:25을 보면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던 제자이다. 도마에게 감사하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의심해 준 것, 우리가 거쳐야 했을 고민을 그가 먼저 해 준 것을 감사하자. 요한복음에서 가장 감격적인 신앙 고백은 도마의 입술에서 나왔다. 그는 먼저 회의론자, 의심 많은 자로서 고통스런 시간을 먼저 보냈다.  그런 뒤에 이런 위대한 고백을 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


  4)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울은 부활의 증인으로 변했다.

  사울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던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교회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는데 힘썼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다. 그것은 사울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사건이었다. 그는 3일 간을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그리고 나서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그는 왕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고, 이방인들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다. 그의 변화는 마치 아인슈타인이 예수를 믿은 것보다 더 큰 사건이다.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노후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남겼다.

 

“나는 평소에, 특별히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했습니다. 교회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내 조국 독일이 어두워 졌을 때, 그리고 나치의 핍박 아래 있었을 때 내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교회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사람들의 안식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노후에 인생의 석양녘에 나는 교회 이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교회로 다시 돌아옵니다. 내 영혼의 안식처인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진짜 똑똑한 사람들이 예수도 잘 믿는다.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이유와 근거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 소크라테스는 하나님을 믿었다. 갈릴레오, 베이컨(Bacon), 과학자 아이삭 뉴톤 경(Sir Isaac Newton), 파스테르(Pasteur) 같은 뛰어난 과학자, 철학자, 사상가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들이 바보라서 믿었을까? 아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해답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삶과 죽음에 의미를 주시기에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죄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에 삶을 의탁하는 것이다. 이별의 아픔에서, 무덤의 그림자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예수님만이 구원하시며 희망이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아멘.

  예수님만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부활의 보증이시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이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이시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과 부활에 관한 희망을 주신다.

 

4. 나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 때문에 예수 부활을 믿는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요 20:20). 왜 우리를 향한 대속(代贖)의 상처는 낫지 않았을까? 사라지지 않은 채 주님 몸에 남아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상처에서 희망(希望)을 본다. 그 상처는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을 이어주는 중요한 표시이다. 구원과 구원의 보증(保證)의 표시이다. 상처가 준 고통은 사라졌지만 상처의 흔적은 남아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1) 나를 위해 어떤 사랑의 희생(犧牲)도 치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나를 구원할 능력이 충분(充分)함을 보여준다.

  3) 나의 죄 사함과 구원이 영원(永遠)함을 확증한다.


  언젠가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며 그 손에 난 상처를 보실 것이다. 부활신앙이란 우리가 흘린 눈물, 우리가 당한 비극,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치른 모든 희생을 주님이 기억하여 주시는 것이다. 예수 몸에 난 상처가 그렇듯이 나와 여러분의 마음과 몸에 난 상처는 새로운 몸을 입어도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님에게 증거가 된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증거가 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나는 어머니의 굵게 파인 주름살을 기억한다. 나는 어머니의 거치러진 손의 느낌이 가슴에 남아있다. 나는 그 손을 만져보고 싶고, 그 주름진 얼굴이 보고 싶은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인도에 썬다씽이라는 유명한 성자가 있다. 그거 어느 해 영국을 방문해서 국회에서 연설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강연을 경청하였다. 참석자 중의 유명한 교수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당신은 뿌리 깊은 힌두교의 유명한 학자이고 철저한 힌두교인인데 어떻게 해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까?”

  썬다씽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 부활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이 있다. 힌두교나 불교는 인생무상이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생명을 준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 많은 내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다가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의 돌을 굴려버리시고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주님께 감사하자. 슬픔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우리들 때문에 다시 무덤까지 찾아주시기 때문이다.  주님께 감사하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실망의 길을 걷는 우리들을 따라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종종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낯선 방법으로, 낯선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기뻐하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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