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설교
본문 : 마태복음 1 : 18~25
제목 : "임마누엘"
오늘날 남아선호사상이 많이 퇴색했습니다만,
예전에는 유난히 아들을 많이 낳기를 소원하는 가정들이 흔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많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가정에서 아들을 낳기 위해 계속 임신을 하다보니
어느덧 딸이 많은 가정이 되었습니다.
연이어 세 딸을 낳고 네 번째 임신을 했을 때에 틀림없이 아들이라고 믿었지만,
낳고 보니 또 딸이었습니다.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산모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않고 죽든지 말든지
방 한 구석에 밀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죽지 않고 울기만 했습니다.
이 어머니는 “그래도 죽지 않고 빽빽거리는 것을 보니 명줄이 긴가보다” 생각하고
아기에게 젖을 물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춘기에 들어선 딸아이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다는 것과 아무도 기뻐해 주는 사람도 없었으며
죽기만을 바랐던 아이였다는 사실이 당사자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때부터 마음에 병이 생겼습니다.
엄마를 극도로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엄마가 아무리 사랑해주고 잘해주려고 해도 그 사랑이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는
마음이 삐뚤어진 불행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상처를 많이 받게 됩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아도
상처 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큰 상처는 버림받은 결과 얻은 상처로,
특별히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크게 상처를 입습니다.
요사이 이혼률이 높아지면서 내버려지는 아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 아이들 중에는 6~7세의 아이들도 있지만 갓 태어난 아이들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평생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 해서 범죄한 인간은 노아 때에 와서 극도로 타락하여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렀습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후 노아의 여덟 식구를 제외한 모든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것도 불행한 일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10~12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들이 다 타락하여 악해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사람을 한 명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따라 우리를 멸하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의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지어주신 그 이름에는 ‘구세주’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름 자체가 예수님의 사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실을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전하면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 2:1~5).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8~9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14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가장 저주스럽게 죽으신 것입니다.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주스럽게 죽으셨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법을 어기므로 해서
저주를 받게 된 저와 여러분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까지도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받은 복 가운데 가장 큰복은 “언제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여 주시는 복”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절대주권을 가지신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복을 다 받습니다.
범사에 형통하는 복과 전화위복의 복을 받습니다.
고난이 오고 손해를 보고 누명을 쓰고 노예가 되고 감옥에 가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지나고 보면 더 잘되고 더 큰 축복을 받으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전화위복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창세기 21:22을 보면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라고 했고,
창세기 26:28에서 이삭에게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조차도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고 고백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뿐만 아니라 야곱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있었으며,
요셉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범사에 형통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고
그곳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지만,
그 일 때문에 오히려 총리가 되고 축복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8:28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범사에 형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후로부터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갈 3:14,29).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면 구원을 얻은 그 사람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6~18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은 성령을 알뿐만 아니라
그 성령이 그 사람 안에 계시며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 3:16).
옛날 러시아에 지혜롭고 선한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매우 사랑해서,
과연 이 나라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 종종 노동자나 거지
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가난한 백성들의 집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가 방문한 사람들 중에 아무도
그가 황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황제를 잘 대접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문전박대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황제가 오두막에 사는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얼마나 극진히 대접을 잘하는지 음식만 먹고 가려고 했으나
주인이 간곡히 붙잡는 통에 하루 밤을 함께 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왕복을 입고 다시 그 사람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아니, 어제 밤에 나와 함께 잔 분이 이 나라의 황제였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황제는 "그대는 지난밤에 나를 정성껏 대접했노라.
이제 내가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가 말해보라."
그러자 이 사람은 허리를 굽히고 "황제께서는 궁궐과 그 영광을 떠나
이 어둡고 비천한 장소에 저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제가 먹는 초라한 음식을 함께 드셨고,
저와 거처도 함께 하셨습니다.
황제께서 저와 함께 거하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달리 아무런 소원이 없습니다." 라고 겸손히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이 땅의 황제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 주님은 하루 밤만 주무시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떠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축복이야말로 축복 중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을 때,
이 사실을 모르고 낙심이 되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과 함께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셨으나
이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지 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여주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중에 외로움을 느끼시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홀로 있을 때에도 혼자가 아닙니다.
언제나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요한복음 5:24의 말씀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순간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다시는 정죄함을 받지 않게 되었고, 결단코 심판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하나님이 함께 하여주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임마누엘의 복을 받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기독교 외에 유교, 불교, 이슬람교 등등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나름대로 진리를 전파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믿게 된 어떤 분이 자신이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실수로 우물에 빠졌는데,
그 우물의 깊이가 너무 깊어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사람 살려! 사람 살려!”라고 외쳐댔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이것을 보고 “아이고, 이 일을 어찌할꼬.
아무래도 당신은 전생에 죄가 많아서 이렇게 된 모양이니
참회하고 저승으로 가시오.”라고 말하고 안타까워하며 지나갔습니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그 곁을 지나가다가 우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사람은 누구나 아차하면 실수하는 법이지.
이번 일을 거울 삼아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게나, 쯧쯧." 하며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깊은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점점 굳어오고 온 몸에 힘이 빠져
물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또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사람이 우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급히 어디론가 달려가 사다리를 구해가지고 와서
우물 밑으로 내려가 거의 다 죽게 된 이 사람을 살려냈습니다.
이 이야기는 비유로, 첫 번째 사람은 석가모니를 말하고,
두 번째 사람은 공자를 말하며,
세 번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왜 범죄했느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느냐,
“어떤 죄를 범했느냐”라고 절대로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책망하시지도 않으시며 조목조목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대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마 11:28).
그리고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계 3:20).
예수님은 죄가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묻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이 열리기만을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마음의 문은 결코 바깥에서 열 수 없기 때문에 본인이 문을 열어줄 때까지
주님은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보면,
비록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다 쓰고 돌아온
이 아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무조건 받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라고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나오기만 하면, 예수님께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는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참 회개는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오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죄를 이길 힘을 주시고,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오시라고 권하면 “술 끊고 가겠다.”
혹은 “담배를 끊고 가겠다.” 혹은
“지금의 죄된 생활을 좀 정리하고 교회에 가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앞서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우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도저히 자기 힘으로 살아나올 길이 없습니다.
내 힘으로 죄를 버리고, 내 힘으로 바르게 살고,
그 다음에 교회 가겠다는 사람은 영원히 교회에 나오지 못합니다.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가 있는 대로, 허물이 있는 그대로,
부족하지만 무조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한 성도가 됩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기만 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임마누엘의 복을 받게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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