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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장로교회

 

1. 아일랜드는 처음에 패트릭에 의해 복음화되어 켈틱 교회(Celtic Church)라 불려졌다. 1170년 로마교회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면서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2. 종교개혁 때 헨리8세가 수장령을 선포하여 영국교회의 교권을 장악하자 아일랜드는 반대하였다. 제임스1세 때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이 되었고, 이 때 프란시스 베이컨의 조언에 따라 영국과 스코틀랜드 접경의 청교도들이 이 곳에 이주되면서 북아일랜드는 스코틀랜드화된다.

 

3. 열렬한 로마교회의 신자들이었던 원주민들은 영국과 스코틀랜드인의 유입에 분개하였고, 1641년에 폭동을 일으켜 장로교도들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계통의 장로교회가 이 곳 아일랜드에서 1642년 최초의 노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1660년에는 10만명의 신자와 80여개의 교회로 성장하였다.

 

4. 이 후 찰스2세와 제임스2세의 박해 가운데서도 꾸준히 성장하였고, 1683년에는 미국에 이민을 간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통의 이주민들을 위해 미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란시스 매케미를 파송하였다.

 

 

 화란개혁교회

 

1. 당시 모든 유럽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로마교회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화란이 개혁교회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존 칼빈의 영향이었다. 제네바에서 칼빈을 통해서 교육을 받아 목사가 된 기도 드 브레가 고국에 돌아와서 1559년 벨직 신앙고백서를 작성한다. 이 고백서는 안트베르프에서 1563년 비밀리에 모인 대회에서 화란교회의 신앙고백서로 채택이 된다.

 

2. 스페인의 식민지배하에 있었던 화란은 계속되는 종교재판과 학정에 항거하였다. 화란은 북부 7개주가 연합하여 독립을 선포하고, 윌리엄 오렌지 공을 공화국의 왕으로 세웠다(1584년). 그리고 오랜 투쟁 끝에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한 독립하였다(1608년). 이로써 화란의 개혁교회도 로마교회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었다.

 

3. 화란 개혁교회는 스페인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는데, 1568년 베젤에서 교회규칙을 제정하고, 다시 1571년 엠덴에서 다시 교회 규칙서를 채택하는데, 이때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제네바교리문답을 사용할 것을 채택한다. 그러다가 알미니우스파의 주장은 결국 1618-19년의 도르트 총회를 모이게 하였고, 여기서 도르트 신경과 도르트 교회질서가 탄생하게 된다. 이때부터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도르트 신경은 화란개혁교회의 일치신조가 된다.

 

4. 도르트회의 이후 18세기 말까지 화란은 잠시 경건주의의 영향에 들어간다. 그리고 19세기 초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화란을 합병하였으나(1810) 화란이 나폴레옹을 격퇴하고 오렌지의 윌리암 프레데릭을 왕위에 앉힌다(1813). 윌리암 1세는 개혁교회를 화란의 국교로 선포했으나 영국 망명생활 중에 영국국교회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1816년 교회질서를 장로체제에서 귀족정치로 바꾸었으며, 또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이는 것을 개인의 자유에 맡겨버렸다.

 

5. 이런 상황에서 헨드맄 드 콕 목사는 도르트 신경을 고수하였는데, 이로 인해 자기가 목회하고 있던 교회의 당회로부터 면직을 당한다. 결국 콕 목사는 1834년 10월 14일 분리를 선언했고, 또 이사야8:11-15을 본문으로 윌리엄 1세를 아합 왕에 비교하여 설교한 일로 추방된 핸리 스홀트 목사가 지도하는 교회와 함께 1840년에 암스텔담에서 대회를 열었고, 또 1869년 미델부르크 대회에서 십자가 아래에 있는 개혁 교회(Reformed Congregations Under Cross)라는 교회와 합동하여 기독개혁교회를 조직하였다.

 

6. 1886년에 아브라함 까이퍼에 의해서 또 다시 분리가 이루어졌다(돌레앙티, 고소).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 그는 얀 헨드맄 카이퍼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에 모자라는 아이로 취급받았지만, 레이든 대학을 졸업할 때는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했다. 대학시절에는 종교 자유주의자였다가 신앙을 회복하면서 정통 개혁파 신학자가 되어 기독교 사회 건설에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는 1864년부터 국가개혁교회의 비스트, 우트레히트, 암스텔담에서 목회하였고, 1870년에는 종교 주간지 De Huraet 의 편집인이 되었고, 1872년에는 화란이 당면한 문제를 개혁주의 신앙의 입장에서 조명하기 위하여 일간신문 ‘드 슈탄다르트’를 편집하였다.또 그는 프린스터러가 창당한 반혁명당을 재결성하여 1874년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880년에 자유대학을 설립하여 교수가 되었고, 후에 화란의 수상이 되기도 하였다(1901-1905).

 

카이퍼가 정치에 참여할 때 목사가 아닌 장로로서 암스텔담 교회를 섬겼는데. 그때 카이퍼를 비롯한 암스텔담 교회의 당회는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금하였다. 이 일로 1886년 교회당국은 카이퍼와 다수의 장로들을 제명 처분하였고, 이 징계 파동으로 카이퍼를 중심으로 200여 교회가 국가개혁교회를 떠나 돌레앙티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는 앞서 분리한 기독개혁교회와 1892년에 연합하였다(“화란개혁교회들”). 이 연합에 합류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대로 (기독개혁교회)라고 한다.

 

7. 후에 카이퍼에 의해 이루어진 교회의 다원성 문제, 일반은총 문제, 가정 중생설 문제가 1942년 총회에서 결정되었고 이를 반대한 흐레이다누스와 스킬더 등 많은 교수와 목사 장로들이 면직되면서 1944년 8월 새로운 교회가 분리된다. 이 교회는 화란자유개혁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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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의 역사와 신앙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역사의 주류를 형성해 온 신학사상은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신학이었다. 칼빈주의 신학이란 칼빈의 가르침이 그 전부가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루터주의와 구별되는 것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서 발전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종종 칼빈주의 신학으로 부르는 것은 개신교의 형성에 있어서 칼빈의 탁월한 영향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인 언약신학사상이 칼빈 이후에 생긴 것이기는 하나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가르침들은 개혁신학을 규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서구 사회에서 교회 체제나, 교회의 기능 및 교회법, 교회 직분자들을 세우는 것 등 교회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들 뿐 아니라 시민들의 생활 문제까지 깊은 영향을 준 것이 칼빈주의 사상이다.

 

장로 교회사를 배우는 것은 적어도 세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장로교가 성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구약 성경에서부터 장로회 제도를 언급하고 있고 신약성경에서도 교회의 중요한 정치제도로 설명하고 있는 장로교에 대한 자부심을 장로교 목사와 신학생들이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더구나 우리는 개혁교회이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가르치고 성경대로 살자고 하는 신학을 따르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은 성경에 기록된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 66권을 주셨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장로 교회사를 공부하는 것은 우리를 알자는 것이지 교회사의 한 부분을 더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알아도 되고 알지 못해도 상관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둘째로, 장로 교회사는 교단적인 정체성 확립에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도 집안에 귀족이면 귀족일수록 족보를 따지고 뿌리를 중요시하는데, 하물에 아브라함의 후손이랴! 단순한 지식의 한 축적이 아니라 기초를 든든히 다진다는 차원에서 장로교회사를 배우는 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교회의 외적 모습은 신학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장로교회의 외형 역시 개혁신학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아닌지 점검하는 입장에서도 장로교회사는 매우 중요한 과목이다. 장로교회의 뿌리를 찾아 우리 선조들이 지니고 있었던 고위한 신앙과 신학적 전통을 새롭게 정립하고 발전시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본 장로 교회사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적어도 성경에 가장 근접한 교회의 외적 형태가 장로교회 그것도 개혁주의 사상에 뿌리는 둔 개혁 장로교회라 한다면 장로교회의 원리가 무엇이며 실체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배워야 하는 것이다.

 

셋째는 장로 교회사는 교회 역사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장로 교회 역사를 빼놓고 교회사를 논하는 것은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로 교회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 흐름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 오셨는지를 아는 중요한 자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를 바탕으로 하여 필자는 장로회주의(Presbyterianism), 또는 장로 제도가 성경에 근거한 가장 오래된 제도(모세 시대 때부터 존재했음)라고 확신하다. 따라서 본 책을 통하여 성경에서 가르치는 장로회주의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세운 칼빈의 가르침과 장로회주의의 원리를 한 국가에 구체화시킨 존 낙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 다음에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원리를 보면서 개혁된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리고 장로회제도를 없이하려 했던 왕정정치의 모든 탄압에서 벗어난 교회가 새롭게 장로회주의를 정립하는 18세기 초엽의 역사와 그 뒤에 찾아온 고등 칼빈주의 사상의 여파로 인하여 메로논쟁(Marrow Controversy, 1718-23)1)으로 이어진 교회의 갈등과 분열 및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일으킨 부흥운동의 면모를 조명하려고 한다. 이어서 19세기 장로교회의 대 분열의 역사와 자유주의 신학 논쟁을 살펴보며 20세기 교회 역사를 간략하게 다루고자 한다.

 

또한 미국으로 건너간 장로교회의 생성과정과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조명하고 한국교회의, 특별히 개혁주의 한국 장로교회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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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예배를 향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찬송하는 것을 좋아하실까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찬송에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찬송을 좋아하실까?”라는 질문 다음에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은 어떻게 찬송하는 것을 좋아하실까?”라는 질문이다. 아마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서 깊이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성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곡을 선정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찬양의 방식을 정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기준이 되었다.

 

종교개혁은 찬양의 방식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라틴어 찬양에서 모국어 찬양으로 바뀐 것이다. 중세 시대에 찬송은 거의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그 당시의 관점에 따르면 라틴어는 서방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신적인 언어였다. 옛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히브리어를, 신약교회를 위해서는 헬라어를, 서방 유럽교회를 위해서는 라틴어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모국어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것은 수준 낮은 예배 행위로 인식되었다. 조선시대에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였을 때 유림들이 반대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라틴어로 찬송했기 때문에 성도들은 찬송을 제대로 부를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찬송을 부른다고 하더라도 무슨 뜻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따라서 중세 시대에 성도들은 찬송 시간에 찬송을 부르기보다 찬송을 감상했다고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찬송의 곡조를 감상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설프게 저급한 영어(독일어, 프랑스어)로 찬송하는 것 보다는 품위있는 라틴어로 찬송하는 것이 더 하나님께 열납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러분들이 유투브에서 그레고리 성가를 찾아 듣다 보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선율의 아름다움에 금방 반할지도 모른다.

 

라틴어 찬송이 주가 되다 보니 찬송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소수의 성가대가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가사가 라틴어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곡조도 아주 어려웠기 때문에 따라 부른 것이 쉽지 않았다. 중세 시대에 전 참석자가 함께 부르는 회중 찬송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더 나아가 소수에 의한 성가대 찬양은 구약의 예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변호가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찬송의 관습 속에는 하나님께서는 품위 있는 언어로 작성되고 고도의 아름다운 선율로 작곡된 찬송을 더 좋아하신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와 같은 중세의 방식은 종교개혁가들에 의해서 큰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찬송이 신자들에게 미신을 조장한다고 생각하였다. 무엇보다 믿음은 분명한 지식에 근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찬송과 기도는 공적인 예배 시간에는 반드시 알아듣는 언어로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구체적으로 정리되었다(213). 루터파의 경우 라틴어 찬송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개혁파는 모국어 찬송만을 받아들였다.

 

회중찬송이 가능하기 위해서 모국어 가사와 더불어 곡조의 단순화가 필수적이었다. 심지어 그 당시 잘 알려진 민요들이 찬송가 안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멜로디는 계속 부르다 보면 별로 재미는 없을 수 있겠지만 가사에 집중할 수 있게 하고 모든 성도가 함께 찬송을 부를 수 있도록 하는 장점이 있었다. 이와 같은 변화의 배경 속에는 하나님께서는 화려하고 고난도의 선율에 의한 성가대의 특별찬송보다는 단순하고 담백한 선율에 따른 회중찬송을 더 좋아하신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찬송을 점검해 보자. 요즘 CCM의 특성 중의 하나는 따라 부르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박자가 곡조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찬양팀은 최신 노래를 연주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좌석에 앉은 회원들은 찬송을 부르기 보다는 찬송을 듣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다. 이것은 특별히 대형 수련회의 경우에 그러하다. 앞에서는 아주 열정적으로 찬양팀이 노래하고 있지만 뒤에는 대다수가 팔짱을 끼고 듣거나 심지어 자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찬양이 일부 매니아들을 위한 시간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CCM의 문제는 부르는 이들에게 가사에 대해서 별 관심을 가지지 않게 한다. 예를 들어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찬송을 부른 이들에게 그 의미를 물어 보면 대부분 제대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뜻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가사의 내용이 아니라 곡을 통해서 경험한 느낌이다. 대부분의 CCM 노래가 1절로 되어 있고 그것을 느끼고 경험할 때까지 여러 번 계속 반복적으로 부른다. 이것은 정확히 타락한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영성과 그대로 일치한다. 믿음이 분명한 지식에 근거한다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점차 우리 교회 안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특송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특송은 특별찬송의 준말이며 이것은 보통찬송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특송을 좋아하실까? 성가대의 찬송도 일종의 특송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 사라진 전통이 우리 한국교회에 다시 자리를 잡고 있다. 성가대의 찬송 시간에 성가대는 열심히 아름답게 노래하고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것을 듣고 있다. 끝나고 나서 아멘!”이라고 화답하기도 한다. 소수는 노래하고 다수는 경청하는 찬송 방식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참고로 필자는 음악에 관심이 있는 좀 있는 편인데 성가대의 찬양이 정말 은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것은 아마 음악에 대한 수준이 높을수록 더욱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찬송의 방식에서 가장 논쟁이 된 부분은 악기 사용에 관한 것이다. 초대교회는 기본적으로 예배 시간에 악기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오늘날도 그리스 정교회는 악기를 대부분 사용하지 않는다. 종교개혁가들 중에서도 악기 사용을 반대한 대표적인 사람이 쯔빙글리였다. 칼빈도 악기 사용에 대해서 대단히 신중한 입장을 취하였다. 심지어 수천 곡이 넘는 찬송을 작사하였던 요한 웨슬레도 악기 사용에 반대하였다. 이와 같은 입장은 악기의 사용이 찬송에 도움 보다는 해가 될 가능성이 더 많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는 오르겐 사용과 관련하여 큰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불리는 교파는 아예 악기파와 무악기파가 존재하고 있을 정도이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불과 2-30년 전만 하더라도 기타나 드럼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기성세대는 상당히 거부감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이제 교회마다 기타나 드럼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교회의 쇠퇴로 인하여 기타나 드럼이 방치되어 가고 있는 교회도 적지 않다. 이제는 그와 같은 악기를 다룰 사람이 교회에 없는 실정이다. 악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교회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 신대원생들의 경우 음악이 없으면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

 

악기를 사용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좋아하시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적어도 확실한 것은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악기사용을 명하신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기 사용에 대해서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하겠다. 과연 오늘날 과도한 악기의 사용이 정말로 찬송에 도움이 되는지를 진지하게 질문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에 찬송을 부르는 방식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시편과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마음에 감사함으로(with grace in heart)”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권면한다(3:1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5). “마음에 감사함으로는 찬송 방식의 대 원칙이 되어야 하고 이것을 기준으로 우리의 찬송 방식을 판단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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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종교 개혁(宗敎改革, 영어: Protestant Reformation)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여 시작된 사건으로, 부패한 교회를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새롭게 변혁시키고자 했던 신학운동이다. 종교개혁 운동의 결과, 모든 기독교는 개혁교회와 개신교(루터교,침례교,성공회 등)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로 구분되어 발전해 오고 있다.
95개조 반박문

개요
루터
로마 가톨릭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신부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으며, 신약성서와 구약성서를 독일말로 번역하여 누구나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95개조 반박문을 교회 정문에 못 박았다는 것에 대해서 역사적 상상력에 불과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루터의 반박문을 증명하는 유일한 문서인 요하네스 슈나이더(Johannes Schneider)의 육필원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517년 루터는 엘베 강변 비텐베르크에서 대학의 오랜 관습에 따라 모종의 명제를 논쟁용으로 제출했으나, 너무나 조심스러운 형태라서(modeste) 누군가를 비방·중상할 의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따르면, 신앙개혁은 가톨릭 체제에 대한 급진적인 도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심스러운 형태로 촉발되었을 것이으로 보인다.
칼뱅
독일에서 루터를 중심으로 개혁 운동이 일어남과 더불어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제네바에서는 칼뱅의 세속적 신앙운동이 꽃을 피웠다. 칼뱅의 제자였던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개혁교회(Reformed Church) 신학을 전함으로써 스코틀랜드에 장로회 전통을 심었다. 지금도 스코틀랜드의 국가 신앙은 장로회이다. 가톨릭의 십자가를 통한 신앙이 세속과 권력이 대신하게 되면서 세계의 역사는 달라지게 된다.
토머스 크랜머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때부터 신앙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는 1549년 영문 성공회 기도서를 작성하고, 아침, 저녁기도와 감사성찬례 때마다 라틴어 성서가 아닌 영문 성서를 쓰도록 하여서 성공회 신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가 집권하여 영국의 국가 신앙을 로마 가톨릭으로 다시 바꾸고, 그에 따라 성공회와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지자, 크랜머 대주교는 휴 레티머,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등과 함께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신앙 개혁 전통은 세계 성공회 공동체 성격 형성에도 영향을 주어, 현재 각 지역 성공회 교회들은 자신들이 속한 지역말로 만든 성공회 기도서와 성서를 사용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개혁의 영향
이렇게 유럽이 점차적으로 교황청의 억압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면서 인문주의도 더 활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문예부흥을 불러왔다. 신학의 시녀로서 빛을 보지 못했던 철학이 과학적인 방법의 도입과 더불어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서 무조건적인 신앙의 강요가 호소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서 박해 받던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 탈출의 기회가 마련되었으며, 지금까지 억압받던 노동자와 농민들이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조용한 시위를 일으키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새로운 양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공격을 받은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는 조용하게 자신들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서 프로테스탄트에 반격할 수 있는 철갑을 더욱 단단히 함으로써 내부 개혁을 실시해 쇄신하였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굳건하게 지키고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고 파괴하기 위해 예수회가 창설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로 프로테스탄트는 수백 개의 다른 파로 분열되었고, 그로 인해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사이의 갈등을 가중시켜 신앙상 혼란을 일으켰다는 비판을 프로테스탄트 개혁파에게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개혁자들의 사상
개혁자들의 신학적 사상은 다섯 솔라(Five Solas)로 요약된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 진리냐 아니냐의 최종 권위는 오직 성서에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성경만이 그리스도 교리의 유일한 원천이며 성서 밖에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십자가에서 억조창생의 죄값을 다 받고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덧입는 것뿐이라는 뜻이다.
Sola Gratia (오직 은혜) : 구원에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써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뜻이다.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믿음은 구원의 은총를 받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며 행위의 '대가'로 구원을 받지는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 교리는 인간의 신앙적 행위를 강조하는 업적의를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다.
Sola Fide (오직 믿음) :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Soli Deo Gloria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 :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내용이다.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은 개혁자들의 양심과 지성에 뿌리를 둔 교회개혁운동이었다. 마르틴 루터등의 개혁자들은 옳지 못한 것을 보고 분노를 느끼는 단순한 정의감이 아닌, 로마 가톨릭의 문제점들을 논박할 수 있을만큼 뛰어난 신학실력을 갖춘 지성인들이었다.실제로 마르틴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회(아우구스투스 수도회)에서 신학과 성서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얻은 신학적 지식으로 교회를 정면 반박하며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16세기의 신앙개혁의 모습을 보면 루터만이 아니라 예전에도 그런 조짐을 보였다. 예전에도 수도원 운동을 통해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방탕한 생활을 지탄하며 금욕적 생활을 추구했다.

도덕적 요인

교회가 구원을 돈 받고 파는 장사를 하면서도 그것을 성경에 나오지 않은 내용임에 불구하고 교황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합리화 시키려 할 때 루터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 외에도 성직매매가 성행했고 성직 매매로 얻은 수익도 교회의 타락에 박차를 가할 뿐이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신부는 독신으로 생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적으로 방탕해 음란한 생활과 사회의 지탄을 받는 생활을 했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은 일부 수녀나 주교들이 교회 개혁을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정식으로 건의하기에 이르기까지 했다.

지적인 요인

르네상스는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고대 문학에로의 복귀, 개인주의적 각성, 몽골 제국의 서진과 지리상의 발견에 따라 동서 문화의 교류, 봉건 제도의 붕괴에 뒤따른 상업인구의 격증, 스콜라 철학의 퇴조와 함께 득세한 신학자 오캄의 사상의 득세, 이 모든 것들이 중세의 사상적 기초를 흔들었다. 북유럽에서는 인문주의가 대학가를 휩쓸었다.

르네상스에 뒤따른 새로운 학문열은 바울등의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들인 속사도들과 더불어 초대교회의 교의를 세운,그래서 교회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교부들의 신학과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를 장려했으며,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여 주었다. 중세의 지식사회는 성서적 인문주의의 세찬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사회적 요인

십자군 이후 봉건 사회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업의 발달로 농업 경제가 상업 경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에 변화가 생겨났다. 국가주의의 등장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오게 되고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로 인한 교황권의 몰락은 교회 개혁을 가속화했다. 교황청이 부과하는 조공의 상승과 지나친 사치는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했고 루터가 개혁의 봉화를 들자 독일의 농민들은 일제히 봉기했다.

 

?독일의 개혁

독일의 개혁은 먼저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각종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루터의 외침이 독일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세속 제후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청으로부터의 경제적·정치적 자유를 얻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 이전의 독일의 정치적 상황

개혁 이전의 독일의 상황은 다른 나라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교황청이 위치한 나라로 십자군 전쟁 이후로 도시의 발달과 봉건 제도에 도전하는 단계에 있었다. 프랑스는 십자군 파견으로 전쟁 이후의 세력권에서 크게 부상하였다. 스페인은 1492년 이래로 통일 왕국 시대를 맞이해서 해상무역권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스페인의 위성 국가였으며,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의 위성국가로서 힘은 발휘하지 못했으나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청의 힘이 가장 강력히 미칠 수 있었던 곳은 독일뿐이었다. 그리고 독일인들의 보수적인 기질마저 겹쳐져서 교황청의 시녀 노릇을 자처하였다. 각종 세금성 헌금을 바치는 등 독일은 교황청의 재정적 수입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통치 아래 대봉건 영주들의 총회의를 두고서 제국을 통치하였다. 공동의 주전법으로 화폐를 통일시키고 관세법을 통일시킴으로써 하나의 의회 아래에서 통일 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운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8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던 막시밀리안이 15191월에 죽고 부르군디의 필리프의 아들이며, 스페인의 왕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의 손자인 카를 5세가 15196월 선제후들의 손에 의해서 새로운 황제로 선출되었다. 카를 5세는 독일계 스페인 사람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교황청의 착취

문예부흥과 더불어서 각종 예술의 부흥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교회도 예술적인 감각을 도입하였다. 역대 교황들은 취임과 더불어서 자신의 임기 동안에 거대한 성당과 궁전을 짓고 그 곳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을 일생의 보람과 업적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큰 사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 자금원은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세속 제후들이었다.

루터가 그의 논문 "독일 그리스도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통하여 독일 내에서 개혁되어야 할 폐단 27종류를 열거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이러한 로마 교황청의 수탈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폐해가 컸던 초입세, 팔리움, 보류권, 사라센세 등은 각종 공물 제도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밖에도 조달비, 공석금, 기부금, 십자군 자금 등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교황청은 십일조를 강요하였다. 이때 건축되거나 제작된 작품 중 유명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그림 등과 함께 로마 교황청의 베드로 대성전이다. 종교개혁자들의 눈에는 이러한 광경이 신의 이름으로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흡입기를 제도화 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

95개조 명제 발표까지

대사 논란

종교개혁의 기폭제는 대사(indulgentia)(이른바 면벌부)에 대한 논박이었다. 대사는 교회가 고해성사의 보속을 면제받는 것을 뜻한다. 초대교회에서는 배교, 우상 숭배, 살인, 간통등의 죄를 지으면 성만찬에 참여할 수 없고, 교회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런데 박해를 받은 신자들이 배교를 하는 일이 생기자 교회에서는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교회에서 부과하는 형벌을 받으면 다시 교회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고해성사를 실시하였다.

중세교회에서는 고해성사가 개인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면, 사제가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기도, 금식,자선, 교회에 대한 기부등의 일정한 벌을 주는 보속(Satisfacio)를 하도록 한 개인고해로 바뀌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해성사의 형벌 즉 보속을 다 이루지 못하고 죽으면, 연옥에서 벌을 받아서 죄를 정화한 후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보속이 면제되는 것이 흔히 면벌부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대사이다.

대사는 일정한 조건을 완수하면 주어지며, 대사를 얻은 사람은 보속이 면제된다. 이러한 행위는 오늘날의 가톨릭교회에서도 존재하며, 주로 기도나 성지순례 등이 대사의 조건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11세기 말부터 '헌금으로 인해 주워지는 대사'가 본격적으로 출현했고, 르네상스 시대에 극에 달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1506년 헌금을 통한 대사를 선포하였으며특히 독일 지방에 선포된 다음 조건들이 논란에 휩싸였다.

1. 지은 죄를 회개하고 다시 죄짓지 않기로 마음먹은 뒤 사제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

2. 적어도 지정된 일곱 개 성당을 순례하여야 하며, 순례할 때마다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여 주신 주 예수의 오상(양손,양발,옆구리)을 기념하고 공경하는 뜻으로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다섯 번씩 열심으로 바치거나 또는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0)을 바쳐야 한다.

3. 성 베드로 성당 건축비로 응분의 헌금을 바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하늘 나라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다 같이 갈 수 있도록 열려 있으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헌금 대신 기도와 대재로 대사를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세번째 조건이다. 이 조건만 본다면 헌금은 의무가 아니며, 교황 역시도 "헌납자는 각자의 형편에 따라 헌납해야한다"라고 언급하였으나, 일부 성직자들이 대사를 이용해서 부를 축적하였고, 대사 전문 판매원이 등장하는 등 많은 폐단이 발생하게 된다. 한편 세번째 조건의 헌금이 강제였다는 오해가 많이 퍼져있으나 원칙적으로는 자발적인 헌금이였고, 루터의 비판 역시도 '대사의 강제성'이 아닌 '대사의 효력'에 대한 것이다.

이 시기 대사 전문 판매원의 예로 다음 사례를 들 수 있다. 독일의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그의 초입세를 납부하기 위해 대사 수입에 열을 올렸다. 알브레히트의 대사 판매원인 도미니크회의 수도사 테첼을 시켜서 대사를 팔게했다. 테첼은 "단순히 대사를 산 사람만의 죄가 아니라 그의 부모 친지의 영혼조차 대사를 산 돈이 금고에 떨어져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옥으로부터 튀어나온다"는 식의 과대선전을 하면서 대사 판매에 열을 올렸다.

테첼과 같은 대사 판매원들은 "대사 헌금을 내는 순간 그만한 교회의 영적인 은혜를 얻기 때문에 자기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설교를 하였고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대사를 살 수 있으며 이때도 고해성사나 회개의 필요가 없이 오직 돈만을 가지고 오면 연옥의 영혼이 구제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종교개혁 직전의 당시에 대사가 엄청난 숫자로 팔렸으며 이는 당시의 교인들의 신앙심과 미신적인 요소에 대해 측정을 가능하게 하는 지표가 되었다.

결국 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초래했다.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교회가 현세의 소유와 권리를 포기해야 하며 초입세와 대사 판매, 십자군 전쟁세, 등 부조리한 관행을 없애야 한다고 선언했다.

95개조 명제

대사_(가톨릭)로 구원을 거래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타락에 분노한 마르틴 루터는 15171031일 대사_(가톨릭) 판매에 반대하는 95개 조항이 담긴 서신을 작성하여 마데부르크의 알브레히트 주교에게 건의하였다. 그가 보기에 "모든 주교는 하느님의 백성이 복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배우도록 도와야 하는" 사람이었다.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을 당시 관습에 따라 성 교회의 북쪽 문에 붙였는데 이 날이 1031일인지는 논란이 많다.

루터는 대사 판매, 교황청의 수입원이었던 고해성사의 문제점을 논박하고 교황의 권위도 부정함으로써 로마 가톨릭 교회를 유지시키던 기존 질서에 대해 투쟁하였다. 그의 혁명사상은 14일안에 95개조 논제가 독일 전역에 깔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 사람들의 찬성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루터가 위험한 인물임을 알고는 아우구스부르크에 소환하여 심문하였고, 1521년 보름스 국회로 불러들여 루터의 책들이 불온서적임을 시인하라고 강요하였다.

95개조 논제의 주요내용

루터는 95개조 논제에서 회개를 강조하였다. 루터는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회개한 신자는 십자가를 멀리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구원을 돈을 주고 사는 대사의 값싼 은혜가 아닌,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수난과 죽음을 통한 값비싼 은혜를 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라는 주기도문의 내용에 따라 일생동안 회개를 함으로써 육신의 정욕을 억누르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고 보았으며, 회개한 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징계의 뜻으로 주시는 형벌이 부과되지 면제되지 않는다고 논박했다.

라이프치히 논쟁

1519년 에크와 루터 사이에 라이프치히 신학 논쟁이 개최되었는데,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반박하였고, 콘스탄스 공의회(1414 - 18)가얀 후스를 잘못 정죄한 것을 들어 교회의 공의회조차도 과오를 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제2바울 서신인 즉,기독교가 예수 운동(Jesus Movement)에서 직제를 형성한 제도적신앙으로 발전하면서 바울의 이름을 빌려서 등장한 서신인 에베소서 1:22-23을 논거로 하여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오직 만물의 우두머리이신 그리스도뿐이라는 논박을 하였다. 그는 교회의 권위보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자신의 주장이 가톨릭(보편적)이라고 확신했다.

마침내 루터는 교황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며 교황에게 반감을 가진 독일의 기사 및 시민들이 그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이날 이후로 루터는 확고한 신념으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교황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탄압받았던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 적 그리스도(Anti-Christ)의 상징이며, 가장 악마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다. 당시 독일의 정세는 루터의 개혁을 단순히 영적 차원에만 국한시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상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소집한 제국의회에 루터가 소환될 정도로 확대된다.

보름스 회의

루터는 자신의 개혁 사상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인 보름스 회의에 참여하여 1521418일 독일의 황제 카를 5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보름스 회의로 추방령이 내려진 이후 루터는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로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해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에 임하며, 당시 그의 신약성서 번역은 독일 문학사와 특히 현대 독일어 발전에 주춧돌이 된다. 루터의 과격한 설교와 저서는 곧 독일 교회를 혼돈으로 빠뜨리게 된다.

독일 농민 전쟁과 루터의 좌절

어떠한 일에든지 돌발적인 현상이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다가 시간이 되면 뜻밖의 현상인 것처럼 돌출하기 마련이다. 루터 개인이 보름스회의에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뒷일을 멜란히톤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신해 있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의 분위기는 예상 밖에도 칼슈타트가 주도하면서 시위적 양상이 곁들어 들자 지배계급들의 억압과 착취에 맞선 민중항쟁이 일어난다.

독일 농민혁명

14세기부터 16세기의 대변혁기에 이르기까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농민들이 자신들의 권리 회복을 부르짖기 시작했는데 이는 농민들이 지배계급으로부터 착취를 받으며, 신분상 농노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농민들의 사회개혁의지가 루터의 힘을 얻고 1524년 터져 나왔다. 독일 농민들이 지배계급의 착취에 맞서 투쟁한 독일 농민혁명은 더욱 거세게 몰아치면서 도시의 빈민층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루터의 보수반동적인 모습

그러나 사회개혁 운동에 농민들이 가담함으로써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다름 아닌 루터였다. 지금까지 루터가 교회 개혁을 주도하는 데에는 프리드리히의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 편에서 프리드리히는 착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힘없는 농민들보다는 힘 있는 선제후들을 지지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지지자들을 잃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로마 가톨릭측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우구스부르크 협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주장이 여러 동조자들과 함께 수정되어서 제출되는 등 혼자의 힘으로 개혁운동을 이끌어 갈 수 없게 되었다.

1524년 혁명을 일으킨 농민들은 파리코뮌같은 근·현대 사회주의 운동처럼 정치, 사회적 비평사상을 가지고 단결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대한 분노때문에 짧은 시일 내에 결성된 모임체였다. 그래서 내부적인 결속력이 없었으므로 농민혁명 자체나 외부의 대항 세력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었다. 농민들의 혁명은 독일 북부로부터 진압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526년에 거의 진압이 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농민군의 사망 수는 100,000-150,000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였다. 루터는 농민들이 잠잠해짐으로써 원하는 독일교회의 개혁이 달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소요 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농민 운동을 당장 그만두라고 하였다. 이것이 실패할 경우 자신의 신앙개혁 운동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 여행을 떠났으며, 이 기간 동안에 그토록 자신을 지지했던 프리드리히가 사망했다.

루터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농민들로 이루어진 살인과 도적 떼를 반대하며"라는 소책자를 발표했다. 심지어 루터는 이 책자에서 제후들이 농민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제후들, 특히 선제후 프리드리히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선무 설교 여행까지 감행했던 것을 볼 때에 손을 씻은 빌라도를 연상케 된다. 아무튼 농민 소요가 루터에게 치명타를 가한 것은 사실이다.

'루터의 개혁' 평가

사회문제에 대한 보수성

현실권력인 로마 가톨릭에 저항한 루터를 믿고 혁명에 나선 농민들에게 "인간은 신 앞에서는 평등하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는(현실에서 차별은 있다고 하는 의미) 고사에서 알 수 있듯이 루터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와 상관없이 귀족 기반의 개혁을 추진하게 된 관계로 일반 민중들에게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종교개혁의 원천,신학

루터의 종교개혁은 정의감에 근거한 열정이 아닌,체계를 갖춘 신학에 근거한 것이었다. 만약 그가 단순히 정의감만으로 나섰다면 탄탄한 신학과 교의로 무장한 로마 가톨릭에 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위스의 개혁

스위스는 역사적으로 유럽의 오지에 속하는 척박한 땅으로써 산업이 발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자유를 원하는 농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자주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다 각종 박해받던 신앙인들이 몰려들게 되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1291년 연방체계로 발전하였다.

스위스는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으며, 서쪽의 프랑스어 사용권 지역과 북쪽의 독일어 사용권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개혁 즈음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의 박해를 피해서 많은 프로테스탄트신도들이 피난 와서 슈트라스부르크를 중심으로 이민사회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제네바도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산업의 발달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나, 지리적인 조건 아래에서 단련된 신체적 강인함으로 인해서 스위스인들은 오래전부터 교황청의 용병으로 일해서 재정적 수입을 충당하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용병제도는 프랑스의 아비뇽 교황청 시절에 양쪽으로 용병이 팔려가는 바람에 민족 간에 편이 갈려 전투를 했던 고난을 겪었으며,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의 전투에 다시 한 번 용병으로 팔려가서 동족끼리 살상하는 모순을 겪었다. 그래서 스위스의 개혁은 용병제도의 근절이라는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크게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츠빙글리의 개혁

울리히 츠빙글리

츠빙글리는 독일의 개혁자 루터와는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개인의 구원의 확신을 위한 영적 투쟁으로부터 출발해서 복음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다음에 로마 가톨릭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는 순서를 밟았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처음부터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고서 이것들을 에라스무스적인 풍자와 학문적인 공격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츠빙글리는 개인의 구원과 말씀 안에서의 구원의 확신이 처음부터 약했다. 그렇지만 그는 나중에 목회자로서의 경륜이 쌓여감에 따라서 교회와 교인들의 요구 사항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으며, 본인도 점차적으로 복음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복음 이해는 인문주의적인 합리적 요소가 끝까지 있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재세례파 사람들이 취리히를 중심으로 반기를 들면서 재세례를 베푸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츠빙글리는 과격 재세례파 사람들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 고통이 있었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루터보다 훨씬 강하였다. 그는 용병으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는 한 사람의 동족의 생명을 더욱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의 개혁은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이라는 고육책으로 모범을 보이는 데서 인정을 받았다. 츠빙글리는 루터만큼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글은 개혁교회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복음 이해와 화체설에 반대하는 영성체 신학을 확립시켰다.

그러나 47세라는 인생의 황금기에 죽음으로 인해서 자신이 벌여 놓았던 많은 일과 사업의 뒷마무리를 후배인 칼뱅에게 양보하고 말았다. 이러한 면에서 같은 인문주의자로 출발해서 개혁주의로 바뀌었던 칼뱅은 가장 적절한 후계자이며, 또한 완성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제네바의 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제네바는 1387년 이래로 도시의 군주로서 주교, 도시의 소유자로서 사보이 가문의 백작, 그리고 자유 시민들로 이루어진 3원 체제에 의해서 통치되어 오다가 1444년 이후로는 사보이 가문에서 주교까지 세습적으로 계승함으로써 자연히 자유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네바의 시민들은 스위스의 자치주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프라이부르크와 제휴하였지만 베른은 이에 동의하지 않아서 적잖은 대결상태를 유지했다.

이렇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제네바 시는 소의회와 대의회 제도로 바뀌었으며, 모든 중대사는 대의회에서 결정하였다. 베른은 제네바가 개혁되기를 바라는 눈치였으나, 공개적으로 요구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현수막 사건이 발생 했다. 현수막에는 "누구든지 자신이 죄를 회개하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진실하게 믿으면 모든 죄에 대한 완전 대사를 수여 받을 수 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로 인해서 1532년 가을에 제네바에 도착해서 조용하게 가정집에서 설교하던 파렐, 사우니어, 올리베탄은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파렐은 제네바를 포기할 수가 없어서 프로망을 불어선생의 자격으로 제네바에 잠입 시켜서 불어교습과 더불어서 개혁적 복음주의를 설교케 하였다. 그러다가 점점 수적 불어난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주의자 사이에 시민전쟁을 방불케 하는 격렬한 몸싸움도 있었다. 여기에서 윌리라는 이름의 가톨릭 사제가 희생되었다.

가톨릭 측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려고 하였으나 베른은 복음주의자 편에 서서 옹호하고 나섰다. 프로망의 활동으로 가톨릭 수도자와 공개 토론회가 실시되었으며 파렐은 공개 토론회 참가자로서 15321220일 에 다시금 제네바에 발을 딛을 수 있었다. 그래서 15332월에는 최초의 복음주의식 세례를 베풀었으며, 31일부터는 공개적으로 복음주의식 예배를 드렸으며, 수도원의 교회를 빌려서 사오천 명씩 한꺼번에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제네바시는 기사도 정신에 뛰어난 프랑스인 파렐을 맞이해서 개혁을 이끌어 갈 준비를 마쳤다. 이제는 길이 닦인 도로 위에 복음주의 마차를 이끌어갈 마부가 필요하였다. 바로 이러한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 준 사람이 바로 칼뱅이었다.

칼뱅의 개혁

시작

15371월에 칼뱅은 제네바의 대의회 앞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하였다. 성만찬, 공중 예배에서의 찬양, 어린이의 종교 교육, 결혼 등 4가지였다. 성만찬은 가급적으로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적인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합당한 자는 주님의 몸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출교에 관한 치리를 제정해서 참여치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회중에게는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목회자가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결혼은 지금까지 악하고 비성경적인 교황청의 법에 의해서 이루어 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칼뱅의 새로운 제안은 교회의 행정에 관한 조항으로서 소의회와 대의회를 통과하였다. 성만찬은 일 년에 4차례 집행하며, 결혼광고는 예식거행에 앞서서 3주 동안 광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제네바시는 칼뱅과 그의 동료 파렐의 가르침에 따라서 종교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개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81월에 시의회는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성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였으며, 2월의 시의회 선거에서는 칼뱅과 파렐을 반대하는 4사람이 특별 평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른시의 간섭과 더불어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와 손을 잡았으며, 파렐과 칼뱅은 아리우스주의자 이며, 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베른 의회는 제네바를 위시한 전지역을 그들의 손에 넣으려고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연약한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이르러서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태변화 가운데서 코로우, 파렐, 칼뱅은 제네바시를 떠날 것을 명받았다.

파렐과 칼뱅은 제네바를 떠났으며, 칼뱅은 허탈감에 빠져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간 파렐과 더불어서 3년 동안 개혁을 시도 하였던 모든 일이 허사로 끝난데 대한 분노와 갈등을 이겨 내면서 연구와 동시에 프랑스 난민들을 돌보는 목회일에 전념하였다.

다시 돌아온 칼뱅과 그의 개혁

파렐과 칼뱅이 떠난 제네바의 상황은 예전보다 좋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악화되는 것 같았다. 새로 부임한 목회자를 특별평의원들은 자기의 종같이 부렸으며, 모든 가장들에게 교회에 참석토록 하는 의무규정을 부과 하였으며, 주의 만찬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도시의 도덕적 수준은 날로 저하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평의원들은 인기가 떨어지고 다음해 선거에서 재당선하지 못했다. 이때로부터 칼뱅을 다시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53910월 대의회에서 대표자를 보내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칼뱅은 보름스의회에 참석 중이었기 때문에 답장을 유보한 채 번민에 있었다. 이때 파렐의 충고가 크게 작용하였다. 파렐은 제네바가 차지하는 지역적인 중요성을 들어서 제네바가 개혁되면 인근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의 복음화가 가속화 된다고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칼뱅은 3년여 동안 제네바를 떠나 있다가 1541913일 다시금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네바 교회규범을 제정해서 의회에서 통과 시켰다. 이제는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엄격한 훈련과 경건생활 실천을 위한 각종제도와 이단을 색출해서 처리하는 데 이르기까지 칼뱅은 정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제네바의 개혁 추진과 칼뱅의 신학

칼뱅은 제네바에서 소위 말하는 외국인이었다. 이런 그가 제네바에서 세력을 얻어 확장시키기까지의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다시 돌아온 칼뱅과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임없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칼뱅의 사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하였다. 마치 루터에게 농민전쟁이 예기치 않는 결과를 초래하였듯이 칼뱅도 이들을 맞이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제네바의 현지인과 자유주의자.

칼뱅의 개혁은 이단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데에서 다른 사람과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단성이 있는 것은 정죄하였으며, 자유주의자들을 맞이해서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칼뱅의 신학

칼뱅 역시 신앙 본래의 모습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미사를 폐지하였고, 교계제도를 장로제도로 바꾸었으며, 교회의 성 미술을 우상이라며 배척하고 파괴하였다. 그의 신학은 저서 신앙강요에 잘 나타나고 있다. 칼뱅과 그의 신앙강요만큼 기독교 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예는 드물다. 개혁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개신교회의 신학은 점차 칼뱅 쪽으로 수렴되었고, 지금도 개혁의 전통을 고수하는 신학적 유파를 가리키는 개혁주의라는 말은 칼뱅주의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칼뱅주의의 핵심 주장은 '칼뱅주의 5대 강령'이라는 다섯 가지 요점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칼뱅이 만든 것은 아니고 훗날 개혁주의에 반대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이론에 반박하기 위해 도르트 총회에서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칼뱅주의의 사상을 잘 요약하고 있다.

전적 타락 :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은 그 질()이 달라서 그 중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유()의 믿음도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으되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전적 무능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의할 것은 그 '무능력'이라고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로 보건대 하나님이 참된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못 믿는다는 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 앞의 '전적 타락'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제한 속죄 : 앞의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사람이 결국 '구속에 언약' 또는 '은혜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불가항력적 은혜 :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로 보건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의 언약'과도 연관이 있다.

성도의 견인 :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로 보건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구속의 언약'과 연관이 있다.

이들 주장은 개혁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프로테스탄트 종파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또한 장로회도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에서 완화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신학적 관점 차이로 처형시켰다는 오해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칼뱅을 만나기 전 이미 스페인과 프랑스의 로마교회 재판소로부터 공석 상태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칼뱅이 있던 제네바에서 체포되었으나 제나바 시의회의 재판을 다시 받게 된다.

프랑스인으로서 시민권이 없던 칼뱅은 신앙회의(이단 심문은 아님)에서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재판에 다른 영향력이 없었다.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세르베투스를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화형에 처했고, 이리하여 세르베투스는 칼뱅 생전에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 당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칼뱅과 신정정치

제네바는 본래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였고 자유가 강조되는 도시였다. 그러나 칼뱅은 타락한 사람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생활규범과 훈련이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부임하자마자 4가지 개혁안을 부르짖었으며, 그는 신학이 사회권력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상은 제네바 행정 사법에 영향을 주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 도박, 주정, 술집 출입의 횟수, 방종, 사치, 접대 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 음란하거나 비신앙적인 노래 등에 금지, 혹은 비난, 구금형을 가하였다.

심지어는 잔치집의 접시까지 세며 규제했다. 주민들의 교회 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 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1년에 한 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 하였으며,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이상과 같은 엄격한 규율은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의 퓨러턴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의 주된 윤리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칼뱅의 개혁' 평가

칼뱅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 받는 것은 개혁 운동의 신학이 사상적 체계를 잡는 데 그가 미친 영향이다. 이것은 그의 저서 신앙 강요가 갖는 의미라 해도 무방하다. 개혁을 이끈 많은 인물들이 있었지만 결국 개혁교회의 신학은 점차 칼빈 쪽으로 수렴되었고, 지금도 개혁의 전통을 고수하는 개혁주의 신학은 칼뱅주의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고 있다. 장 칼뱅의 사상은 유럽교회사에 영향을 주어 불란서,스코틀랜드,네덜란드,잉글랜드등에 영향을 주었다.

칼뱅에 대한 비난 중엔 그가 자신과 이념을 달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종교적인 비관용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루터와 칼뱅이 신학적으로 차이가 있었음에도 서로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운다.

영국의 개혁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정치적 동기

헨리 7세는 잉글랜드 내부의 결속을 어느 정도 다진 다음에 종주국이었던 에스파냐와의 우호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에스파냐 왕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 사이의 셋째 딸인 카타리나를 맞이해서 큰아들 아더와 결혼시켰다.

15011114일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15024월에 신랑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사벨라는 강력한 압력을 가해서 아더의 동생 헨리 8세와 재혼시킬 것을 요구했다. 만일 듣지 않으면 결혼 지참금을 회수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캐서린은 1509년 시동생인 헨리 8세와 결혼하였다.

철이 들면서 헨리 8세는 어쩔 수 없는 결혼이었지만 아들을 낳아서 왕위를 계승하려고 했으나 캐서린과의 사이에는 딸만 낳았고 그것도 다 죽고 오직 메리 튜더만 살아남았다. 왕자가 없이 딸만 있다는 것은 자칫 영국이 후계자 문제로 외세의 간섭을 받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과정에서 헨리 8세는 궁녀 앤 볼린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아이를 갖고 만다. 그래서 자신과 캐서린의 결혼은 근친혼을 금지한 성서에 어긋나는 결혼이므로 혼인을 무효화하고 앤과 결혼하기를 원했다. 월시 추기경은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떠난다.

그러나 헨리 8세의 혼인무효 요청은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불허로 거부되었다. 이에 월시는 그 책임을 물어 실각되고 그의 뒤를 이어 토머스 크랜머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Thomas Cranmmer)가 영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토머스 크랜머는 헨리 8세의 요구에 따라 교황권 제한령과 사전 보호법을 발동시킨다. 이 두 가지 법으로 로마교회 지도자 교황의 권한이 영국 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국왕의 허가 없이 교황에게 항소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헨리8 세와 앤과의 결혼이 적법하다고 공포되고 앤은 왕비가 되었다.

왕위지상권

15339월 앤이 공주 엘리자베스를 낳았으며, 1534년에는 왕위지상권(Royal Supremacy, 흔히 수장령이라고 잘못 말한다.)이 잉글랜드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왕위지상권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이 루터사상의 영향에 따라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국가권력을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신성한 것으로 이해한 루터의 영향이 잉글랜드 교회가 왕위지상권으로써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왕위지상권은 "신앙상의 권위 또는 잉글랜드 성공회 교구가 개혁 또는 수정을 시도할 경우, 그 과오, 이단, 죄악을 검열하고 개혁과 수정을 가하여 근절한다"는 권리가 왕권에 있다는 선언이며,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교회가 세속 정치권력을 갖고 있거나 정치인들과 곁탁한 당시 유럽교회에서 왕위지상권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으므로, 민주주의에 익숙한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수도원 해산

1536년에는 부패의 온상이던 수도원을 해산시키는 수도원 해산법을 통과시킴으로써 6세기이후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던 잉글랜드 성공회는 로마교회에서 독립하였다.이에 교황청은 격노하여 헨리 8세를 비롯해 앤 볼렌, 크랜머 등을 파문하였다.

왕위계승법

앤의 두 번째 임신과 더불어서 왕위 계승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누구든지 왕자를 낳으면 계승권을 가지고 그 다음으로는 메리,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엘리자베스라고 명기하였다.

1536년 앤이 두 번째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 8세는 간통죄를 적용해서 처형시키고 그의 눈길은 세 번째 여인인 제인 시무어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고서 죽고 만다. 그 후 헨리 8세는 클리브즈의 앤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한다.

그러자 보수파에서 캐서린 하워즈를 왕비로 내세우면서 로마 가톨릭 6개 조항을 발표시켰다. 그러나 보수파도 얼마가지 못하여 헨리 8세는 캐서린 하워즈를 간통 혐의로 처형하고서 마지막이자 여섯 번째 부인인 캐서린 파아와 결혼하였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음으로써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른다.

중도노선

헨리 8세는 6번을 결혼하면서 각 권력의 암투에 휘말리면서 개혁보다는 권력 유지에 부심했다. 즉 개혁을 향한 의지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래서 영국 성공회는 신앙적 극단을 피하는 중용(Via Media)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성공회는 신앙적 극단을 피하는 중용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에드워드 6

1596년판 성공회 기도서

개신교 노선의 종교개혁

에드워드 6세는 너무도 어린 나이인 10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히 외척이 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삼촌이었던 헤르포드의 백작은 섭정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서머셋 공작으로 승진 하여서 국가의 총사령관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서머셋은 프로테스탄트 추종자였다. 따라서 잉글랜드 성공회는 프로테스탄트 사상에 따라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진행하였는데, 당시 개혁방향은 다음과 같다.

로마 가톨릭 6개 조항을 파기시킴과 더불어서 로마 가톨릭과 관련된 모든 법을 파기했다.

국회는 성만찬 집전시 보혈과 성체(聖體)의 분배를 허용하였으며,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는 법령을 무효화 시켰다.

에드워드 제1기도서가 작성되었다.

금서로 지정되어 있던 영문성서의 출판과 판매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에드워드 제2기도서가 마련되었다.

잉글랜드 성공회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42개 조항이 발표되었다. 이 헌장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에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조로 대체되기는 하였으나, 영국 성공회의 근본적인 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헌금법을 발동하여서 교황청으로 가던 모든 헌금을 국왕의 수입으로 돌려 놓았다.

 

 

유럽 종교개혁자들의 영향

이상과 같은 변화가 영국에서 일어나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탄압을 피해 유럽으로 피난 갔던 개혁추진파들이 급거 귀국하였으며 동시에 유럽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으로 망명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대륙으로 피난하였던 사람들이 새로운 학문과 개혁적 전통을 영국 교회에 소개하기 시작함으로써 영국의 대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메리 1세의 반동

토마스 크랜머

에드워드 6세의 사망은 영국의 왕위 계승 문제를 야기시켰다. 영국인들은 메리에게 눈길을 돌렸으며 왕위에 오른 메리는 자연스럽게 영국의로마 가톨릭화를 추진하였다. 메리 1세는 한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그래서 그녀는 헨리 8세의 시절과 에드워드 6세의 시절 법령을 상당 수 번복하였다.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적법한 것이었으며, 메리 자신은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고 선포하였다.

에드워드의 6세의 모든 신앙적 법안을 폐기시켰으며, 헨리 8세 시절의 반-교황적인 법을 무효화 시켰다.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서 메리 1세는 중세적인 예전을 그대로 복구하였으며, 성공회의 감사성찬례가 아닌 로마 가톨릭 미사를 다시금 실시하였다.

메리 1세는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와 결혼하였다. 그와 동시에 로마교회 성직자들이 속속 복귀하였으며, 교황청 사절이 공식적으로 다시 파견되었다. 교황청 사절은 순종법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이단 규제법도 발동시켰다. 이때부터 개신교 신자와 성공회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메리 1세는 피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과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휴 래티머 주교 등의 성공회 성직자들을 처형하였다. 역사학자 앙드레 모로아의 영국사에 따르면, 휴 래티머 주교는 순교를 앞두고 "오늘 영국은 하느님의 빛, 영원히 꺼지지 않을 영원한 빛으로 밝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는 성공회 전례와 성사의 기준인 성공회 기도서를 1549년 작성한개혁자였다. 그는 휴 래티머 대주교가 순교한 뒤에 순교하였는데, 정부의 공작에 의해 한때 성공회 신앙을 버렸다. 하지만 자신의 비겁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신앙을 버리지 않았음을 공언하였으며,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순교 당시 크랜머 대주교는 신앙철회서에 서명한 자신의 오른손을 불태웠다.

엘리자베스 1세의 수습

엘리자베스 1

=중도노선

엘리자베스 1(1559- 1603)의 즉위 이전부터 영국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개신교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1559115일 대관식을 거행하고서 왕위에 올랐다. 엘리자베스1세는 매우 지혜로운 여왕이었다. 그는 1603년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영국 성공회를프로테스탄트쪽으로 이끌어 갔으나 어느 한 쪽으로도 과도하게 흐르지 않았다. 종교 개혁 이후의 대립을 막기 위해 엘리자베스 1세는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간의 극단을 피하는 중용노선(Via Media)을 걷기 시작했다.

청교도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이에 불만을 가졌는데, 이들을 청교도라고 한다. 청교도들은 장 칼뱅의 개혁 사상을 따르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잉글랜드 성공회의 로마 가톨릭 잔재들을 청산하기를 바랐으며, 청아에서 만든 역사책인 영국사에 따르면 성공회 교회안에서 활동한 청교도들과 성공회 교회밖에서 활동한 청교도들이 있었다.

통일법

엘리자베스 1세는 여러 번의 반대를 물리치고서 429일 여왕의 영국 교회 지존법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서 모든 성직은 여왕에 종속되었다. 이 권한을 바탕으로 영국 교회 통일법을 통과시켜, 사제나 주교등의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의 예복과 교회의 장식을 비롯한 모든 것을 통일시켰다.

칼뱅주의 사상의 영향

엘리자베스 1세는 1563년 두 번째 의회 소집으로써 제2차 통일령을 통과시켰는데 이번에는 훨씬 더개혁을 강하게 추진하였으며, 많은 점에서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1556년 매슈 파커 캔터베리 대주교에 의해, 에드워드 6세의 42개 조항을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조로 개정하였는데,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받아서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 대해서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분열

그러나 1563년 두 번째 의회는 영국 성공회의 통일법을 놓고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통일법에 저항한 청교도 측의 패배로 끝났다. 교황청은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시켰으며 여기에 맞선 엘리자베스 1세는 반 교황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585년 예수회 사람들을 영국에서 강제로 추방하였다.

중도노선

엘리자베스 1세는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써 교황권과 로마주의로부터 영국을 보호하였으며, 동시에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화려한 대영제국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 종교 개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실천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종교분쟁을 해결하고자 노력한 지혜로운 정책이었다고 생각된다.

 

과격파 개혁

종교개혁은 루터회, 장로회, 그리고 성공회로 대변되는 3대 보수적 개혁과 재세례파, 성령주의파, 그리고 반 삼위일체파로 이어지는 3대 급진적 종교개혁이 있다. 후자에 속하는 종교개혁을 흔히 과격파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전자가 이룬 개혁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며, 성서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보수파들에게도 배척을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한시적인 운동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온건한 보수파들에게서 볼 수 없는 신선함이 있었고, 이들은 집단적인 공동체를 거점으로 해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운동이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재세례파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개혁의 분파를 지칭하며, 유아세례를 받은 이는 재세례를 통해야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교회와 국가 사이에 상호 긴장 관계 수립, 정치 참여 금지 등을 설교하여 국가를 신뢰하지 않았다.

재세례파의 주요 분파는 다음과 같다.

스위스 형제단

재세례파의 활동의 시작은 스위스로부터 일어났다. 콘라도 그레벨은 츠빙글리의 개혁안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형제단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그들은 예배와 신학과 교회 행정에서는 초대교회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라는 용어를 배제하고 공동체라는 용어로 대체하였고, 찬송가도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 반대하였다. 이들은 유아세례의 반대, 세속적인 직업 거부, 정치 참여 금지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다보니 로마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회 그리고 스위스의 개혁교회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모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비폭력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죄 회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그리고 거듭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했다.

뮌스터의 은거자들

호프만은 본래 루터교회에 입문했다가 츠빙글리를 거쳐 재세례파로 옮겼다. 그는 초대교회의 영지주위에 가까운 이론을 가르쳤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론과 묵시적인 종말론을 가르쳤다. 그리고 예수는 스트라스부르에 재림해서 새 예루살렘을 건설한다고 하였다. 이런 소문이 네덜란드까지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 당국은 멜기호프를 감금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를 처형하자 이제는 장소를 뮌스터로 옮겨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설교하였다. 이렇게 전개되자 도시 밖의 재세례파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도시 내의 재세례파 종말론자는 로마 가톨릭 전통의 모든 유산들을 파괴하고 소각하고 도시 내의 비 재세례파 사람들을 축출하였다. 급기야는 전쟁으로 번져서 남자들의 죽음으로 일부다처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불만을 품은 내부 반동자들이 교황청에서 파견한 군대와 내통하고서 성문을 열어 주었으며, 결국 그들은 무참히 살해되어 갔다.

메노나이트

메시몬스는 네덜란드 출신의 로마 가톨릭 사제로 일하다가 재세례파에 가담한 사람으로서 기독교 교리의 기초라는 일종의 변증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과격파가 부르짖었던 칼(폭력), 일부다처제도 등을 반대하면서 재세례파의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였다. 뒤에 메노 시몬스의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을 메노나이트(영어: Mennonite) , 메노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스위스형제단과 관점이 유사하며 원하는 자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교인들의 성서 중심적인 훈련을 강조하였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며, 비신자와는 결별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했고 공직을 거부하게 했다.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과 고행을 실천하는 길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서 부름을 받았으므로, 폭력이외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기독교 평화주의에 근거, 전쟁과 폭력에 반대했다. 그래서 메노나이트는 병역을 사회봉사로 대신하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평화주의를 실천해오고 있다.

유아세례를 반대함으로써 재세례 금지법을 어겼으며,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교회와 세상을 분리했다. 메노나이트에서 자의적인 세례를 통해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오해이다. 교회역사속의 메노나이트는 인간의 공로가 아닌 믿음을 강조했으며, 세례를 베푼 것도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유아세례에 반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성령주의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로부터 종교 개혁이 한창 무르익을 때까지 개인적인 영적생활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교권적인 기도문에 의한 형식적인 기도보다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으로 영적인 교제를 바람으로써 자연적으로 반() 교회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종교 개혁의 대원리인 성서와 은총과 믿음을 거부하고서 대중 속에 파고들어서 조용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신령주의자가 토마스 뮌처이다. 토마스 뮌처는 루터의 오직 성서(라틴어: Sola Scriptura)를 비판하며, 그리스도인이 직접 성령을 경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면,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직접 경험하면 충분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 토마스 뮌처의 견해였다.

이들은 성서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에서 얻은 영감 즉, 주관적 종교경험을 더욱 권위 있는 것으로 보면서 기록된 성서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오직 각 개인이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주관적 종교경험을 가장 가치 있게 보았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므로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부인하는 쪽으로 흐르기 쉽다. 어떤 면에서는 이들은 합리주의적인 면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로서 캐스타슈벵크펠트(1489-1561), 세바스티안 프랑크(1499-1542), 후안 데 발데스(1490-1541)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체계적인 교권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신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내면적인 영적인 교제는 언제나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었으므로 어떠한 면에서는 이들이 19세기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반삼위일체파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겠다고 처음부터 부르짖은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면에서 루터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예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시행되고 있는 면을 바로잡자고 외쳤을 뿐이다. 그런데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혁의 바람을 타고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기본 교리를 부인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유럽의 자유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폴란드, 모라비아 지역으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를 거쳐서 영국으로까지 퍼졌으며,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미국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이들의 신학적인 이론은 "라코비안 요리문답"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들의 신학적 구조는 속죄론에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속죄설을 부인하는 틀 안에서 삼위일체를 부인한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의 대속적인 희생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을 반대하고, 예수가 도덕적인 스승으로 뛰어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신적인 능력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도덕적 스승으로서의 예수의 삶의 모범을 따라서 거룩한 생활을 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배제하였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자가 아니라 일위일체론자였다. 흔히 유니테리언이라고 부른다.

반삼위일체론자들은 인격적으로 매우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높은 학식과 지식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도덕적으로 칭찬 받을 만하였다. 이런 도덕적인 윤리관 덕택에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전락시켜 초대교회의 에비온주의와 비슷한 면이 있다는 비판도 있다. 여기서 에비온주의는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며, 하느님께서 그를 양자로 삼음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본 고대교회의 이단종파를 뜻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응

종교개혁은 단순하게 신앙적인 개혁에 그치지 않았다.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온통 뒤바꿔 버린 분기점이었다. 유럽의 각 나라들이 로마 교황청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었으며, 예술에서도 인문주의와 더불어서 신앙적인 주제를 떠나서 인간을 중심으로 삼았으며, 과학에서도 신앙적인 면에서 벗어나서 합리적인 요구를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종교 개혁은 각 나라의 경제적 자립을 확보해 줌으로서 교황청의 재정적 압박과 더불어서 권위를 상실케 하였다.

교황청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해야만 했다. 이러한 절대적인 필요성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하였으며, 새롭게 조직된 예수회라는 종단의 창설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쇄신 운동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시도에 그쳤다. 그것은 개혁을 주도해야 할 교황이 교회 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세속 문제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오스만 제국 등 이슬람 세력의 유럽 침공에 반격하기 위해 십자군을 조직해야 했고 유럽 각 나라들의 정치적 분쟁에 일일이 개입하여 중재해야만 했다.

게다가 157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개신교를 신봉하는 용병들이 교황령에 쳐들어 와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의 일로 가톨릭교회도 그에 따라 종교개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오히려 태도가 강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가톨릭교회는 자유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1869-1870년의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더욱 더 보호망을 강하게 하였다가 1962-1965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보호막을 벗어 버리고 개방을 허락함으로써 비로소 종교 개혁에 도전장을 던졌다고 말할 수 있다.

로마 가톨릭의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식에서 옵서버로 참석한 비가톨릭 종교자들에게 가톨릭이 기독교의 분열의 책임을 함께 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

15451213일에 교회 개혁을 수행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닌 교황 바오로 3세의 주최 아래 트리엔트에서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18년 동안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는 세 시기 즉, 교황 바오로 3세 치세에 속하는 제1(1545-1547), 교황 율리오 3세가 속개한 제2(1551-1552), 교황 비오 4세 치세 때 열린 제3(1562-1563)로 구분된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목적은 개신교가 점차적으로 강성해 가는 것과 교회 내부의 부패상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주교들의 태만으로부터 야기되었다고 밝히며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교회의 증가하는 부패는 영적 이상의 상실, 교리 문제에 관한 신학적인 불명확성, 그리고 교황청의 타락에 그 원인이 있었다. 따라서 회의에서 교회 개혁에 관한 중요 안건으로는 교회의 무능, 성직자 중임제, 그리고 감독 소홀 등이었다. 교리 문제에서는 불가타판 성서를 정경으로 재확인하였다.

그런데 15521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주선으로 회의장에 도착한 개신교측 사절들은 새로운 공의회 소집, 이미 결의된 신앙 교리의 취소, 교황 수위권 거부, 공의회 우위사상의 인정과 같은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게다가 루터교회를 신봉하는 독일인 기사들이 갑자기 회의장 안으로 난입해 난동을 일으키자 교황은 공의회를 서둘러 중단하였고 더 이상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대화는 있을 수 없게 되었으며 기독교 세계의 분열만 두드러졌다. 결국 트리엔트 공의회는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짓고 예수회를 앞세워 개신교를 수백년간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예수회의 창설

영성가 로욜라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피레네 산맥에 접한 로욜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문의 출세와 명예를 위하여 일찍부터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하고나서 그는 성서와 여러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영적 지도자로서의 꿈을 끼웠다. 그리고 영성 훈련과 은둔 생활, 고행, 대학에서의 공부, 신학 공부를 하였다.

수도회

1541414일 예수회는 로욜라를 공식적인 대표자로 선출하고 422일 새로운 수도회로 출발하였다. 예수회의 창설 목적은 분명했다. 헌장에서 밝히는 대로 종교 개혁으로 인해서 실추된 교황의 절대권 회복을 위해서 싸우는 군대 교단이 될 것과 해양 개척으로 인해서 발견된 신대륙에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선교 집단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붙인다면 학문을 발달시킴으로서 선교의 사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군대적인 절대 복종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지혜로운 선교방식

예수회는 신앙의 토착화라는 새로운 선교 방법을 개발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고, 원주민들과 의식주를 함께하면서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언어로 교리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예수회의 토착화 선교는 선교지역의 전통을 존중함으로써 원주민들의 반발을 줄이는 매우 지혜로운 선교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종교재판

한때 중세 유럽에 유행했었던 종교재판을 16세기에 자신들의 전제적 통치에 일대 위협을 느낀 교황청이 강경일로로 돌아서서 개신교 박멸의 수단으로 부활시켰다. 용의자로 지목되기만 하면 교황청에서 파견된 심문관의 철저한 고문으로 강요한 고백이 강요된 후 정죄되면 세속 정권에 의하여 형이 집행되었다. 재산 몰수, 투옥, 유배 및 사형 등의 형이 내려졌다. 교황 바오로 4세의 영도 아래 소위 '거룩한 이단심문소(Sanctum Officium Sanctissimae)'라 불리는 악명 높은 신앙교리성성이 모든 나라들의 종교재판 중심기관으로 설립되어 수많은 이단심문관들을 양성하여 전 유럽의 개신교 탄압의 기수로 삼았다.

끝내면서

15171031일을 계기로 일어난 유럽의 이른바 종교개혁 운동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일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은 긍정적 시각에서 보는 이들도 있는 반면,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들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위클리프, 후스를 위시한 신학적 도전은 중세 기독교의 기초에 균열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신비주의 개혁자들의 집단적 운동은 점차 하나의 범시민 운동으로 번져서 교황청의 단일 체제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거기에다 교회의 위신은 교황청의 분열로 이어져 땅에 떨어졌으며, 교황청의 지나친 과세는 일반 시민들의 원망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부조리는 16세기 유럽 대륙 중에서 독일의 경우가 제일 심했다. 또한 독일은 연방제이므로 교황의 세력이 왕권을 통하여 직접 미치기가 힘들었으며, 르네상스를 통한 인문주의의 영향이 지성인들 사이에 컸기 때문에 어느 곳보다도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날 루터의 개혁운동을 보다 폭넓은 동기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루터 개인의 입장에서는 종교적 관심에서 출발했던 교회 개혁 운동으로만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어떻든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동기는 결코 종교적 신념과는 큰 관계가 없고 정치적 동기가 더욱 강하게 작용했으며, 칼뱅의 개혁은 경제적 동기가 주요한 동기가 되어 그의 개혁에 참여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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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개혁의 역사 – 고대 교회로부터 16세기까지

 

“개혁된 교회는 또 다시 개혁되어야 한다.” (Reformed Church Should Be Reformed)

 

2000년 교회 역사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주제가 있다면 그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개혁”(혹은 교회의 갱신)이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 교회와 미국의 한인 교회 역시 교회 개혁이라는 화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이들은 목회자의 자질 문제로부터 교회의 갱신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며, 어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열정이 다시금 새로워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교회가 처해 있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환경을 분석하며 교회의 개혁과 갱신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주장했던 어느 역사학자의 경구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신학으로서의 역사 공부는 오늘날 우리 시대가 직면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해법 찾기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 결국, 16세기 종교개혁을 공부하는 것 역시 21세기 개신교 목회자인 우리에게는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통찰력을 얻기 위함이다.[1] 개신교 목회자라는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살펴보는 것만이 아니라, 개신교 신학의 강조점을 살펴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당면한 “교회 개혁”이라는 화두를 접근함에 있어서도 그렇다.

 

이 글에서는 그레고리우스의 시대로부터 16세기 종교개혁의 시기까지, 교회의 개혁(갱신)을 위한 노력들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본다. 짧은 글에 그 오랜 시기의 사건들을 정확하게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교회를 개혁하려 했던 중요한 움직임을 대략적인 개관하며 그러한 움직임을 유형론(typology)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교회 개혁이라는 화두에 대한 보다 창조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대(大) 그레고리우스

 

그레고리우스가 로마의 주교로 재위하던 시기(590년 9월 3일부터 604년 3월 12일까지)에는 서방 기독교 공동체에 많은 위기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고트족 왕국이 되었다가 비잔틴 제국에 속주로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치러진 수많은 전투로 국토가 피폐하였다. 그런데 조금 후에는 롬바르드족에게 짓밟혔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교회를 불태우고 성직자들을 학살하고 수도원을 약탈하고 수녀들을 범하고 잘 경작된 밭들을 황무지로 만들어 놓았다. 로마는 약탈에 노출되었고, 전염병과 기근에 시달렸다. 유럽 전체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혼돈에 빠져 있었다.

 

부유한 원로원 가문에서 탄생했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도원의 수사가 되었던 그레고리우스는 본인의 강력한 고사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단과 원로원과 백성의 만장일치로 로마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이 된 뒤에도 수도원 시절과 다름없이 매우 검소하게 살았으며 위기에 처한 기독교 공동체를 새롭게 세우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쉬지 않았다. 조촐한 음식을 차려놓고 식사를 하려다가도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나면 그 음식을 그들에게 보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들과 고아들을 위해서 항상 개입했다. 노예들과 포로들을 속량해 주었고, 축성(祝聖)된 그릇들을 자선의 목적으로 판매하도록 허용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교회 의식을 체계화하고 완성했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새로운 찬송 형식으로써 미사와 예배의 형식을 개선했다. 능력 있는 설교를 했으며, 당시의 재앙들을 근거로 겸손과 경건을 역설했다. 선교사들을 독려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서방 세계의 수장으로서 이탈리아 ․ 갈리아 ․ 스페인 ․ 브리타니아의 교회들을 보살폈고, 몇몇 수도대주교들에게 팔리움(대주교가 착용하는 영대<領帶>)을 보냈다. 하지만 법적 관할권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의무에 태만하거나 범죄를 저지른 주교들을 견책하고 면직시켰다. 당대에 만연하던 성직 매매 관행을 단호히 반대했으면, 성직자들에게 사역의 대가로 수수료를 징수하거나 혹시 주더라도 받지 말라고 경고했다.

 

보쉬에(Bossuet) 주교는 그레고리우스의 공적 생애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하였다. “이 위대한 교황은 황제들에게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음에도 롬바르드 족을 굴복시켰고, 로마와 이탈리아를 구원했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들의 느닷없는 교만을 꺾었고, 자신의 교리로써 온 교회를 깨우쳤고, 겸손이 뒷받침된 열정으로 동방과 서방을 지도했으며, 세계에 교회 정부의 완벽한 예를 남겼다.”

 

또한 박스만은 이렇게 평가했다.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 전역에서 동요와 불안을 일으키는 가운데 한 사람이 영원한 도성에서 자신의 지위에 굳게 서서 아무리 높은 파도가 휩쓸고 지나가도 요동하지 않았다. 루터가 유언에서 자신을 가리켜 천국과 지상과 지옥에서 그 이름이 잘 알려진 하나님의 대변자라고 부르듯이, 그레고리우스의 비문에는 그가 하나님의 집정관(consul Dei)으로 다스렸다고 적혀 있다. 그는 교회 공화국의 수석주교이자 라틴 교회의 다른 유력한 신학자들과 기둥들인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제롬에 이어 제 4대 교회 박사(doctor ecclesiae)였다. ‘의식의 아버지’(pater ceremoniarum), ‘수도원의 아버지’(pater monachorum), ‘대’(the Great)라는 칭호가 그에게 부여되는 것이 정당하다. 그는 이전 시대의 라틴 교회가 교회 정치와 교의, 목회와 예배에 관하여 쌓아놓은 것을 집대성하여 다음 시대를 위해서 어지간해서는 빗나가지 않은 규범들을 세워놓았다.”

 

그레고리우스는 롬바르드족이 로마를 점령하던 시대, 곧 서방의 기독교 공동체가 그 근거지를 유린당하고 있던 시대에 교회와 수도원을 바른 원리와 규칙에 따라 통치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롬바르드족을 정통 가톨릭교회의 교인이 되도록 하는 한편, 군대를 양성하여 롬바르드족과 평화협정을 맺으며 기독교 공동체를 보호하였다. 그레고리우스의 활약으로 위기에 빠진 기독교 공동체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의 눈부신 활약이 중세 교황권의 확립으로 이어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이때부터 중세 가톨릭교회는 교황 수위권 및 교황 무오설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샤를마뉴의 카롤링 제국

 

그레고리우스 시대 잠시 로마를 점령하였던 롬바르드족 왕국은 743년 아스톨프가 왕위에 오르면서 다시금 로마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자카리아스 교황은 754년 프랑크족의 왕 피핀에게 거룩한 기름부음으로 임명하며 그에게 기독교의 심장 로마를 롬바르드족으로부터 구하도록 요청하였다. 피핀은 군대를 이끌고 직접 이탈리아까지 출정하여 롬바르드족을 격퇴했다. 그가 돌아간 뒤 롬바르드족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자, 교황은 그에게 거듭 서신을 보내어 베드로와 하나님의 성모의 이름으로 로마 시를 저 지긋지긋한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달라고 훈계도 하고 명령도 한 뒤, 만약 신속히 순종해 준다면 이생에서의 장수와 내세에서의 영광스러운 거처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755년 피핀은 군대를 이끌고 다시 알프스를 넘어 롬바르드족을 격퇴하고 그들에게 빼앗은 영토를 교황에게 넘겨주었다. 피핀의 뒤를 이어 프랑크 왕국을 통치한 인물이 샤를마뉴(r. 768-814)이다.

 

샤를마뉴는 콘스탄틴을 그의 모델로 삼았다. 콘스탄틴이 통일된 로마제국을 기독교 위에 세웠듯이 샤를마뉴 역시 유럽 대륙을 교황의 영적 통치와 긴밀히 연결된 자신의 세속적 통치 아래서 통일시키려는 포부를 품었다. 그는 평생을 전쟁으로 보내다시피 했다. 군대를 직접 지휘하기도 하고 참모들을 보내기도 하면서 그는 53번이 넘는 정복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프랑크 왕국은 카롤링 제국이 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서 교역을 장려했고, 도로를 개설했으며 마인 강과 도나우 강을 운하로 연결했다. 제국에 질서를 정착시켰으며 이교도들과 이슬람교의 침공과 약탈로부터 유럽대륙을 보호하였다. 샤를마뉴의 출현으로 기독교 공동체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강력해졌다.[2]

 

샤를마뉴의 업적은 이교도들에 대한 정복전쟁만이 아니었다. 그는 교육과 종교에 많은 열정을 쏟았다.[3] 라틴어 성경의 오역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를 취했으며, 신학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신학자들과 학자들과 시인들과 사기들을 불러보아 곁에서 지내게 했다. 그는 궁정 학교와 수도원 학교들을 세웠으며, 자신이 직접 학교들을 방문했다. 그가 제정한 법률 가운데는 모든 남자 어린이들에게 보통 교육을 실시하도록 명하는 법률도 있었다.

 

샤를마뉴는 성직자들에게 매우 관대했다. 제국 전역에서 거둬들인 십일조를 그들에게 주었고, 자격을 갖춘 사람을 주교와 대수도원장으로 임명했고, 교회들에 기부했고, 화려한 대성당을 지었다. 그가 성직자들에게 품은 존경은 로마 주교를 성 베드로의 계승자로 존경한 데서 절정에 달했다. 그는 교황들에게 큰 선물을 셀 수 없이 많이 보냈다. 그가 재위 기간 내내 품었던 간절한 소원은 자신의 보호와 영향 하에 로마 시의 옛 권위를 재확립하고, 성 베드로의 교회를 방어하고 보호하며, 자신이 비용을 들여 그 교회를 다른 어떤 교회들보다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었다.

 

476년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한 이후 324년이 흐른 800년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의 왕관을 받았다. 샤를마뉴는 위기의 중세 기독교 공동체를 정치적 황제의 위치에서 보호하고 부흥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세속 정치인을 기독교의 수호자로 인정하였던 콘스탄틴 황제의 모델은 이미 고대 교회에서 실패를 경험하였다. 샤를마뉴의 카롤링 제국은 잠시 기독교 공동체의 강력한 보호막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카롤링 왕국을 의존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교회 공동체는 자신 스스로를 정화하려는 노력보다는 세속 권력을 활용하려는 정치적 노력에 더 집중하였다.

  

중세 수도원 운동

 

그레고리우스는 수도원의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한 때였다. 유럽 사회가 온통 혼란과 격동에 휩싸여 있던 9-10세기를 지나면서 수도원의 기강도 해이해졌다. 근면하고 고결한 삶의 보상으로 축적된 수도원의 많은 재산이 악의 올무와 뿌리가 된 경우가 허다했다. 탐욕스러운 평신도들이 그것을 가로챈 뒤 가산으로 물려주었다. 심지어 공주들조차 대수녀원장의 직함과 수당을 받았다. 이러한 혼돈과 탐욕의 시기에 수도원 운동 안에서 새로운 몸부림이 등장하였고, 이러한 움직임은 가톨릭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중세 대표적인 수도원 운동을 꼽으라면 첫째는 프란치스코를 선봉으로 한 프란시스칸 수도회요, 둘째는 도미니쿠스를 선봉으로 한 도미니칸 수도회이다.

 

프란치스코가 활동하던 시기(1181-1226)는 교황청의 전성기였다. 그 정점에 있었던 교황 이노센트 3세는 하나님께서 태양과 달을 창조하시어 낮과 밤을 각각 주관하도록 하셨듯이, 이 세상을 다스릴 두 개의 빛, 곧 교황과 황제를 창조하셨다고 주장했다. 태양이 달보다 위대한 존재인 것처럼, 영혼을 지배하는 교황은 육체를 지배하는 왕실보다 존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듯 황제의 권한이 왕권을 넘어 서유럽 전체를 뒤덮고 있을 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게 된다. 그는 한평생 스스로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돌보는 전도여행을 떠났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구걸승단의 목적과 실천의 초점을 선교에 맞추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누비면서 설교했다. 그는 이슬람교 지역에도 선교하기를 원했고, 성지여행도 원했으나 파선으로 좌절되었다. 그는 모로코로 들어가려고 스페인으로 갔고, 이곳에서 최근 기독교 영주들의 연합세력에 의해서 패배하여 피난하고 있는 이슬람교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1210년의 수도회칙과 프란치스코의 유언에 따르면 프란체스코회 수사들은 구체적인 규율들로 얽매인 폐쇄 조직이 되기보다, 복음적 청빈과 사도적 실천에 헌신하는 자유로운 형제회가 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도미니쿠스(1170-1221)는 10년 동안 팔렌시아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는데,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전해진다. 1217년 그는 수사들을 보내 수도원을 세우도록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수도회는 파리와 볼로냐, 로마 같은 대도시들에 뿌리를 내렸으며 파리 대학교의 유명한 교회법 교수 레지날이 그 수도회에 가입했다. 이처럼 도미니쿠스는 프란시스코에 비하여 학문의 전당인 대학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그가 세운 도미니칸 수도회는 학문 연구를 분명한 과업으로 채택한 최초의 수도회였다. 프란시스칸들과는 달리 도미니칸들은 처음부터 설교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일과 학문연구를 강조했다. 로마 가톨릭의 신앙을 지적으로 체계화시킨 토마스 아퀴나스가 바로 이 승단 출신이다. 도미니칸들은 청빈의 삶을 영위했지만, 프란치스코와 그의 추종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세상적인 좋은 것을 몽땅 거부하는 수도원적 삶의 이상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프란시스칸과 도미니칸은 서로 성격이 달랐다. 프란시스칸이 청빈과 선교를 강조하였다면, 도미니칸은 학문 연구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중세 기독교 공동체의 영성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풍성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프란시스칸과 도미니칸과 같은 수도원은 당시 세속 권력과의 투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던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에게 복음의 역동성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프란시스칸이나 도미니칸과 같은 수도원 운동은 교회 조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 복음의 능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

 

교황청의 전성기로 평가받는 이노센트 3세의 시대 이후 약 100년이 흐르면 교황청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이른바 교황청의 바빌로니아 유수 혹은 아비뇽 유수이다. 약 70년 동안(1305-1378) 교황청이 로마를 버리고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하였다. 아비뇽 교황청은 기독교 세계에서 교황에 대한 존경을 뿌리째 흔들었다. 교황청이 프랑스의 일개 기관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아비뇽 체류 기간 교황청의 도덕상은 유럽 전역에서 악명이 높았다. 세속 군주의 궁정과 다름없이 시기와 경쟁으로 분열되었고, 각종 음보로 시련을 겪었다. 이 시기, 교회의 타락은 단지 교황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이란 16세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가리킨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가들은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이 존재했음을 상기시킨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존 위클리프(1324-1384)이다. 위클리프는 대체로 옥스퍼드대학에서 학생시절과 교사시절을 보냈다. 위클리프가 개혁자로 나선 것은 그의 생애 마지막 8년 혹은 9년 동안의 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국가 권력에 관하여 글을 썼는데, 여기서 모든 것의 소유주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재산을 개인에게 허락하시는 이유는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같은 이론을 고위성직자들과 고위공직자들에게 적용했다. 특히 그는 고위성직자가 재산을 남용했을 경우 세속 권력에 의하여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속화된 교황을 이단으로 보고 그를 교황직으로부터 축출시켜야 할 것을 주장했다. 아비뇽 교황청의 세입징수로 골치를 앓던 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위클리프의 주장들을 환영했다.

 

위클리프는 그의 신념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라틴어로 된 불가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고 믿었고, 주교들과 사제들이 이 성경을 익히 알아야 하고, 심지어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이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복음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순회 설교자들을 많이 파송했다. 이들은 누구에게든 자신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디에서든 설교했다. 많은 사람들이 위클리프의 글을 읽었고, 순회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었다. 어떤 이들은 위클리프와 순회 설교자들이 당시의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패를 비판했기 때문에 그들을 따랐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일상 언어에 성경을 많이 인용했기 때문에 저들을 따르기도 했다. 주교들은 기성 가톨릭교회의 교리과 행습을 뿌리째 흔들고, 주교 자신들의 교권에 정면 도전하는 위클리프와 순회 설교자들의 운동의 확신을 두려워했다.

 

보헤미야의 종교개혁을 주도한 인물은 후쓰(1367-1415)였는데, 위클리프의 작품들이 이 종교개혁에 가세하였다. 보헤미아는 영국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후쓰가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위클리프의 작품들이 자유롭게 보헤미아로 유입될 수 있었다. 프라하의 가톨릭 대주교는 교황으로부터 모든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소각하고 후쓰를 잠잠케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후쓰는 순응하기를 거부했다. 급기야 요한 23세는 후쓰를 공식적으로 파문시켰고 프라하에서의 모든 활동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그는 1425년 7월 6일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프란시스칸이나 도미니칸이 교회 밖에서 영성수련을 통하여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면 위클리프나 후쓰는 교회 안에서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바로잡아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4세기와 15세기에는 아직 그들의 개혁이 성공을 거둘만한 배경이 형성되지 못하였다. 1519년 루터의 개혁 운동이 시작되면서 교회 개혁은 새로운 불길을 내뿜기 시작하였다. 평신도들이 성경과 복음의 능력을 스스로 깨달으면서 비로소 기독교 공동체가 중세의 터널을 빠져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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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ames Whitehead와 Eaton Whitehead는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 목회자가 아닌 신학자들에게 신학 수업을 받기에, 신학적 지식에 대한 목회적 적용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고 분석한 바 있다. “Generally, ministers are educated not by ministers, but by scholars whose tools of inquiry and criteria of effectiveness pertain more to academic theology than to theological reflection in ministry.” James D. Whitehead and Evelyn Eaton Whitehead, Method in Ministry, Theological Reflection and Christian Ministry (San Francisco: Harper & Row, publishers, 1980), 32.

[2] 샤를마뉴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It is my duty, with the help of the divine Mercy, to defend the Holy Church of God with my arms, everywhere.”

[3] 샤를마뉴의 이러한 업적을 “Carolingian Renaissance”라고 부르기도 한다.
출처: 창골산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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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의 영혼은 죽을 때 어디로 가는가(중간기 상태에 대하여)

중간기 상태란?


사람이 죽은 후 몸의 부활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의 영혼이 머무는 장소와 그 영혼의 상태를 의미한다.

성도들의 영혼은 죽을 때 어디로 가는가?
성경은 신자들이 죽을 때 가는 곳을 "낙원", "천국", "아브라함의 품", "아버지의 집", "주님이 계신 곳" 등 여러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다(눅24:42; 히9:24; 눅16:22; 고후5:1,8; 빌1:23; 요14:2,17:24; 고후12:2,4; 히11:10,16 시73:24,25) 위에서 말하는 표현들은 각기 다른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천국을 묘사하는 여러 가지 표현일 뿐이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의식이 있는가?
초기교회에서는 영혼수면설을 주장한 자도 있었다. 즉 영혼이 부활할 때까지 무의식적인 수면 상태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시대에는 일부의 재세례파가 영혼 수면설을 옹호하였는데, 칼빈은 그 주장이 잘못됨을 반박하는 논문을 썼었다. 19세기에는 어빙파 중 일부의 사람들이 이 그릇된 교리를 지지했다. 지금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드은 존재의 멸절까지 믿으며 그렇게 발전시켰다.
이러한 그릇된 주장의 근거는 인간의 의식은 감각과 인상에 의존한다는데 있다. 더 이상 보고, 듣고, 접촉할 수 없다면 사고나 감정의 작용도 멈추게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즉 영혼이 뇌의 활동을 떠나서는 의식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는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성구들에 두고 있다. 성경에는 죽은 자들에게 의식이 없다고 말하는 구절들이 아래와 같이 있다(시30:9; 115:17, 146:4; 전9:10; 사38:18,19).
그러나 성경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잔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인간의 영은 신체적인 감각기관에 의존해서만 의식이 가능한 단순한 감각의 도구나, 감각 작용에서만 파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신체적 감각 작용에 의한 경험을 떠나서도 영의 작용이나 의식은 존재할 수 있다. 천사들은 몸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인간보다 탁월한 의식을 갖고 있다.
죽음을 자는 것으로 비유한 것은 영혼이 잔다는 뜻이 아니고 죽은 자는 떠난 세상에서의 활동이나 수고가 중지 되었다는 뜻이다. 잠잔다고 한 것은 영육으로 된 인간의 활동이 죽음으로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음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죽는 자들은 영광스런 깨어남(부활)이 있음을 가리켜 잔다고 한 것이다.

천국에 있는 영혼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천국에 있는 영혼들은 최종적인 영화 상태로 있지는 않지만 상당히 영화로운 상태에서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행복한 상태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될 지체들의 구원 완성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몸의 부활로 완성될 최종적 영화를 기다리고 있다.

계7:9-17의 말씀이 구속 받은 자들의 현세적 삶과 최후의 영화로운 상태의 영생에도 적용될 수 있지만 중간기 상태의 묘사로도 볼 수 있음은 현세적 삶과 중간기 상태와 최종적 영화 상태는 각기 단절된 것이 아니고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는 영혼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1) 쉰다(계14:13참고)
(2) 그리스도의 얼굴을 뵙는다.(계22:4참고). 천국에 있는 성도들의 눈은 항상 그리스도께만 향하고 있다.
(3) 듣는다. 계시록에 있는 영광과 합창과 찬미의 소리를 들으며 그리스도와 구속받은 성도들과 천사들이 말해주는 것을 듣게 된다.
(4) 일한다(마25:21참고) 몸이 없는 동안 영혼들은 천사들처럼 구속해주신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봉사의 일을 하게 된다(계6:10참고)
(5) 기뻐한다.(마25:21참고)
(6) 살아 있다
(7) 찬송하며(계14:3, 15ㅣ2-4) 위로를 받는다(눅16:25).

죽은 자와 신자의 직접적인 접촉이 있는가?
강신술자들은 죽은 영혼들과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직접적인 접촉이 실제로 발생된다고  믿고 있다.
로마카톨릭은 성모 마리아와 세상을 떠난 성자들이 살아 있는 자들의 기도를 들을 수 있고 또 중보의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이것도 일종의 죽은 자와 직접 접촉설을 지지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일부 개신교도들도 죽은 자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우리의 말을 다 들으며, 우리의 하는 일을 정확하게 다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이것도 죽은 자와 산자의 직접 접촉설을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신념을 지지해 주지 않고 오히려 배격한다.(욥10:21,7:9,10; 삼하12:23; 신18:11; 레20:6;사8:19).
특히 신명기 18장을 참고하라. 삼상28:3-25에 나온 사무엘의 영혼은 실제 사무엘의 영혼이 아닌 사무엘을 가장한 마귀다. 악령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 할 수 있다.

천국에서도 진보와 성장이 계속되는가?
천국에서는 회개를 통한 진보는 있을 수 없다. 비록 성화를 이룸에는 진보가 없을지라도 다른 면의 진보와 성장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 믿는 것, 사랑하는 것, 소망하는 것은 영원히 있게 된다. 소망할 것이 영원히 있게 다함은 진보하는 것이 영원히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새 노래를 부른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갈수록 새로워지고 기쁨이 점점 더 새롭고 충만해 진다는 뜻이라 볼 수 있다. 성장과 진보는 완전과 조화될 수 없다고 하지만 완전한 아이는 자라는 아이인 것 같이(눅2:52참고) 천국의 삶도 여러 면으로 더욱 충만해지는 삶일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진보나 성장이 없는 절대적, 불변적 무한적 완전이나 인간의 완전은 천국에서도 성장할 수 있는 무한한 목표를 가진 유한한 완전인 것이다(사40:25, 26, 44:6, 54:5).
천국에 가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영원히 다 해아릴 수 없다.

음부란 어떤 곳인가?
음부(구약에서는 스올, 신약에서는 하데스)라는 말은 항상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스올은 구약에서 60회이상 나온다. 70인역에서와 신약에서는 "스올"을 일반적으로 "하데스"로 번역하고 있다.
스올은 "무덤" 또는 단순히 "죽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지만, 또한 분명히 악인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으로 번역해야 바른 번역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신32:22; 시9:17,55:5. 잠15:24등참고).
단순히 죽음의 상태를 의미하거나(이 경우 의인들에게도 해당) 아니면 지옥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하데스"란 어떤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가?
(1) 죽은 자들의 처소
(2) 형벌의 장소
(3) 지옥
(4) 가장 낮은 장소 또는 상태라는 뜻을 가진다(마11:23; 마16:18; 눅16:23ㅣ 계1:18, 6:8 참고)

앞에서 본바대로 음부는 신앙의 인물들도 가는 곳으로(참42:38; 눅16:23; 행2:27,31)말하기도 하고, 악인들이 가는 곳으로 말하기도 한다(시9:17; 눅16:24). 성경에서 음부를 다양한 의미로 쓰고 있음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결과로 "음부"를 천국도 지옥도 아닌 죽은 자들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기다리는 중간기 처소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구약의 "스올" 또는 신약의 "하데스"라는 말이
(1) 무덤
(2) 단순한 죽음의 상태
(3) 지옥이란 의미로 쓰여지고 있음을 알았더라면..

음부를 천국도 지옥도 아닌 제 3의 처소라든지 죽어 소멸되는 상태로 오해도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출처: 개혁주의조직신학(송용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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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성화는 가능한가? 


완전 성화는 가능한가? / 박영돈목사님

제2의 축복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 은혜를 체험한 후에는 우리가 다시는 죄와 침체의 수렁으로 미끄러져 떨어질 수 없는 영적 고봉에 계속 머무르게 될 것처럼 말한다. 마치 영 단번에(once-and-for all) 약함과 패배와 탄식의 삶이 능력과 승리와 기쁨의 삶으로 바뀌게 될 것같이 말한다. 과연 그러한 삶이 가능한 것인가? 전통적인 입장은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칼빈은 “거듭난 자 안에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탄 재와 같은 악이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그를 죄 짓도록 유혹하고 자극한다”고 했다. 그래서 신자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는 성령의 은혜를 받았지만, 그는 결코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와 모든 약함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단계에 이를 수는 없다. 신자의 최선의 행위도 여전히 죄의 자국으로 얼룩져 있기에, “이생의 가장 탁월한 최상의 상태마저도 오직 하나의 과정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런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칼빈주의 신앙고백서들은 성화의 불완전성을 크게 부각시켰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십계명을 자세히 해석하면서 신자는 이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강조해 온 것을 깡그리 부인하기라도 하듯이 이렇게 결론짓는다. “자신의 힘으로나, 이생에서 받은 어떤 은혜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우리 모두는 매일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이것을 범할 뿐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이와 비슷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생에서는 가장 거룩한 사람일지라도 이 순종의 미미한 시작만을 했을 뿐이다.”
  이런 표현은 성화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것처럼 들린다. 자연히 많은 의문과 반론을 불러일으킨다. 안토니 후크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표현방식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이렇게 반문한다. “만약 가장 거룩한 사람마저도 다만 순종의 작은 시작밖에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신자가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크마의 지적대로, 이런 신조의 진술에 의하면 거룩함의 성취도와 죄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낮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아무리 힘써도 지키지 못 할 것을 애써 지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꼭 있느냐는 자포자기적 심리를 조장할 수 있다. 교육심리학적으로 매우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을 낮은 윤리적 수준에 만족하게 하며, 거기에 안주케 하기 쉽다. 더불어 거룩함을 간절히 추구하는 이들은 이런 전통적인 가르침에 실망하여 좀 더 나은 성화론을 찾아 방황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웨슬리라고 할 수 있다.
 
완전주의
  웨슬리가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하게 된 배경에는 성화의 불완전성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교리에 대한 그의 불만이 깔려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불완전 교리가 거짓된 삶을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남용되는 것을 염려하였다. 칼빈주의에서 가르치듯이 하나님의 계명을 결코 온전히 지킬 수 없으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고정관념은 “우리의 부패한 마음에 온갖 종류의 합리화”를 제공한다. “얼마나 우리 마음은 항상 준비된 핑계로서 이 ‘어쩔 수 없음’(inevitability)에 초점을 맞추기가 쉬운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을 자신감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계속 추구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웨슬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절대 무오한 완전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온전한 성화의 은혜를 경험한 이도 연약함과 무지와 실수가 있으며, 그에 대한 용서의 은혜가 필요함을 인정하였다. 그는 생의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내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온 세상에 말해왔다.… 나는 내가 묘사한 성품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웨슬리는 성화를 점진적인 과정으로 보는 칼빈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까지 말했다. “칼빈이 그랬던 것과 꼭 같다. 이 점에서 나는 그와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다.”
  웨슬리는 칼빈주의 입장에서 볼 때 불완전한 상태에 불과한 성화의 수준을 완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묘사함으로써 큰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 외에도 그의 견해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내재해 있다. 그중에 하나는 죄를 “아는 계명을 고의로 범한 것”으로 정의한 점이다. 그런 식으로 죄를 규정함으로써 웨슬리는 죄가 신적계명의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요구보다 인간의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인식 여부에 근거하여 결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아가, 칭의 후 ‘즉각적 성화’(instantaneous sanctification)가 일어난다는 그의 가르침은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이단계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성결운동과 케직 사경회가 강조한 제2의 축복과 오순절운동이 주창한 중생 후 성령세례의 가르침에 초석을 제공한 셈이 되었다.
‘이미’와 ‘아직도’의 균형
  '완전에 대한 추구’는 웨슬리에게만 특유한 것이 아니다. 죄에서 자유하여 온전히 거룩하게 사는 것은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바이다. 칼빈 또한 웨슬리 못지않게 거룩에 대한 열망과 온전한 삶에 대한 염원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렇게 같은 성화에 대한 관심과 갈망을 가졌음에도 그들의 성화론은 대조적인 특색을 띤다. 칼빈은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갈망이며 목표이지만 그 소원은 오직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뿐이며, 그 전까지의 신자의 삶은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주 불완전한 삶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반면에 웨슬리는 성령의 은혜는 신자를 죄의 결박에서 획기적으로 자유케 하는 ‘완전 성화’(entire sanctification)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강조점의 뚜렷한 차이는 그들이 성화론을 썼던 상황에서 직면했던 요구와 도전과 대적이 다른데서 기인했다고 본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과의 논쟁 속에서 성화의 불완전성을 크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면, 웨슬리는 불완전교리가 남용되는 상황 속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추구를 새롭게 불러 일으켜야 할 사명을 느꼈다.
  웨슬리의 완전성화론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는 현재 실현된 것과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것 사이에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하지 못한 점이다. ‘이미’(already) 쪽으로 편중되므로 과장된 승리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극복하지 못했다. 대조적으로, 칼빈은 ‘아직도’라는 종말론적 포커스를 통해 성화를 고찰함으로써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완전주의적 망상과 영적 우월주의를 추방해 버린다. 동시에 성화의 참된 다이내믹인 겸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안에 계속 내재하는 죄성에 대한 강조는 우리의 죄와 불완전에 대해 좀 더 사실적인 안목을 갖게 하며 그로 인해 경성하는 삶의 자세를 취하게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영적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자신의 부패성에 점점 더 예민해짐을 의미한다. 더 거룩해지고 은혜가 충만해질수록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결의 높은 수준을 더욱 선명하게 보게 되며, 동시에  상대적으로 자신이 이룬 거룩함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은혜 안에서 성숙한다는 것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더 깊이 절감하며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겸손의 밑바닥으로 점점 내려가는 것이다. 만약 ‘겸손을 통해서 거룩해진다’(holiness through humility)는 역설적인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쉽게 영적교만과 자기기만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의 측면, 즉 신자의 죄성과 불완전에 역점을 둔 칼빈의 가르침은 간혹 그 문맥 속에서 이해되지 못하고 칼빈의 본래의도와는 달리 성화에 대해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로 오도되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불완전 교리가 온전히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하는 신자의 중대한 의무를 교묘히 회피하는 좋은 구실로 남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불순종의 삶을 살면서 그것을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하기 십상이다. 현대교회는 칼빈이 불완전을 강조해야만 했던 종교개혁의 상황과 대조적인 국면에 처해있다. 지금은 웨슬리가 가졌던 관심과 강조점이 필요한 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웨슬리가 치우친 또 다른 극단적 오류를 답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통적인 교회가 성령안의 승리와 역동적인 성화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는 한, 이러한 도전을 통해 우리 신앙의 ‘불완전’과 ‘완전’, ‘이미’와 ‘아직도’사이의 균형을 회복하는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자료출처: 선지동산 49호 게재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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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개념과 의의

 

1.종교개혁의 의의

 

종교 개혁’ (Religious Reformation)16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이후 유럽 전역에 걸쳐 종교뿐아니라

문화, 사회의 변화를 가져온 새로운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종교라는 말은 오늘날 원초적 존재나 가능성에 대한

영적인 이해와 추구를 일컫는 보편적인 개념어이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에서 종교는 기독교 제한적으로 사용된

용어였다. 이 용어는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람직한 믿음과 삶의 태도를 의미했다.

개혁이란 우선적으로 표면적인 부분이 아닌 근본적인 부분의 변화를 의했다. 개혁이란 새로운 창조나 과거에 대한

무조건적인 폐기가 아닌 회복’(Recovery)을 의미했다. 결론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의 의견을 존중한다면, 16세기 유럽의

종교 개혁은 일차적으로 성경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에 충실했던 초대 교회의 모습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신앙생활 전반을 바른 모습으로 회복하려 했던 운동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2.루터의 이신칭의 사상

 

15171031일 독일의 작은 대학 도시 비텐베르크 근방에 면죄부를 판매하기위해 찾아온 테첼을 향해 대학의 한교수가 면죄부 판매가 과연 장당한지 신학적 쟁점들을 놓고 공개적으로 토론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이 유명한 95개조의

반박문이였다 당시 로마교황청의 새로운 교황궁전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파는 교황청의 조치는 독일 제후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누구 한사람 먼저 나서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을 때 획기적인 사건이였으며 그로인해 제후들과

지식인들은 이 내용을 근거로 면죄부 판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루터는 그들과 타협하지 않고 성경본분 연구와 강의를 통해 정립한 자신의 구원론을 정립했다. 루터는 이 성경본분에서 구원은 카톨릭이 가르치는 것처럼 면죄부 구입이나 고해성사와 같은 성사에 참여하는 등의 행위의 공로로 획득해 완성해 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 것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는 것임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곧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이신칭의교리이다.

 

3.칼빈의 예배 개혁 사상

 

루터에 비해 자신의 개인사를 잘 말하지 않았던 칼빈은 1509년 프랑스에서 출생했다. 그는 젊은 시절 파리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해 유능한 법학자이며 인문학자로 성공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를 종교개혁자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자신의 학문적 재능을 활용해 1538년 종교개혁의 개요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한 기독교강요를 출판함으로써 유능한 종교개혁의 사상가로 주목을 받았다. 칼빈은 그해 가을 우연히 방문한 스위스 제네바에서 선배 목회자

파렐의 강권으로 이 도시의 목회자가 되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종교개혁의 목적은 특히 칼빈의 예배와 교회 개혁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당시 로마 카톨릭은

미사에서 사제가 떡을 예수님의 몸으로 바꾸어 주고 신도들에게 먹게하는 행위를 통해 예수님의 몸이 가진 신비한 능력이 누적된 죄를 처리한다고 가르쳤다. 종교개혁자들이 볼 때 이와 같은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매주 성찬대 위에서 희생제사로 죽이는 모독적인 행위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류의 죄와 그 책임을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이를 확증하셧다. 그러므로 매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지 않으면

죄가 남아 연옥까지만 갈 수 있다는 주장은 성도들의 양심을 속박하기 위한 허위였다. 칼빈은 미사를 부인하고

예배를 개혁하기 위해 말씀이 중심이 되는 예배를 실천하려 했다. 그는 복음과 교회를 위해 교회와 직분들이 있는 것이 교회와 직분자들 위해 예배와 복음이 이용당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4. 종교개혁의 의의와 한국교회의 적용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와 구호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제대로 그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로 종교개혁을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종교개혁의 다섯가지’sola’를 언급하면서 난해한 교리를 나열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오직 하나님의 영광은 16세기 종교개혁의 맥락

속에서 정확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 현장에서 종교개혁의 세 가지 과제들과 그 개혁과 회복 과정에서 강조된 원리들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첫째, 바른 가르침의 회복이 필요하다. 둘째,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셋째, 교회 제도가 회복되어야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통치하실 수 있도록 모든 구성원들은 지체로서 낮아져야 한다.

 

5. 결어

 

16세기 서유럽의 종교개혁은 몇 사람들이 특정 지역에서 교회의 몇 가지 문제들에 불만을 가지고 변화를 시도한

운동이 아니였다. 또 다른 교회 성장과 영향력 확대를 위한 프로그램이나 단회적 이벤트도 아니였다.

그들은 가르침과 예배외 제도의문제를 개혁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삼아 성경의 가름침대로 회복함으로써

당시 기독교의 신앙 전반을 새롭게 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성취나 업적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말씀하시고 드러나기를 소원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에 신실하게 응답하여 담대하게 순송하며

복음을 증거하고 다음 세대에 전할 때에만 한국교회의 회복을 소망할 수 있다.

  출처 : 총회 목회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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