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예배를 향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찬송하는 것을 좋아하실까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찬송에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찬송을 좋아하실까?”라는 질문 다음에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은 어떻게 찬송하는 것을 좋아하실까?”라는 질문이다. 아마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서 깊이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성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곡을 선정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찬양의 방식을 정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기준이 되었다.

 

종교개혁은 찬양의 방식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라틴어 찬양에서 모국어 찬양으로 바뀐 것이다. 중세 시대에 찬송은 거의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그 당시의 관점에 따르면 라틴어는 서방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신적인 언어였다. 옛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히브리어를, 신약교회를 위해서는 헬라어를, 서방 유럽교회를 위해서는 라틴어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모국어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것은 수준 낮은 예배 행위로 인식되었다. 조선시대에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였을 때 유림들이 반대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라틴어로 찬송했기 때문에 성도들은 찬송을 제대로 부를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찬송을 부른다고 하더라도 무슨 뜻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따라서 중세 시대에 성도들은 찬송 시간에 찬송을 부르기보다 찬송을 감상했다고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찬송의 곡조를 감상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설프게 저급한 영어(독일어, 프랑스어)로 찬송하는 것 보다는 품위있는 라틴어로 찬송하는 것이 더 하나님께 열납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러분들이 유투브에서 그레고리 성가를 찾아 듣다 보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선율의 아름다움에 금방 반할지도 모른다.

 

라틴어 찬송이 주가 되다 보니 찬송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소수의 성가대가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가사가 라틴어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곡조도 아주 어려웠기 때문에 따라 부른 것이 쉽지 않았다. 중세 시대에 전 참석자가 함께 부르는 회중 찬송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더 나아가 소수에 의한 성가대 찬양은 구약의 예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변호가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찬송의 관습 속에는 하나님께서는 품위 있는 언어로 작성되고 고도의 아름다운 선율로 작곡된 찬송을 더 좋아하신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와 같은 중세의 방식은 종교개혁가들에 의해서 큰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찬송이 신자들에게 미신을 조장한다고 생각하였다. 무엇보다 믿음은 분명한 지식에 근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찬송과 기도는 공적인 예배 시간에는 반드시 알아듣는 언어로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구체적으로 정리되었다(213). 루터파의 경우 라틴어 찬송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개혁파는 모국어 찬송만을 받아들였다.

 

회중찬송이 가능하기 위해서 모국어 가사와 더불어 곡조의 단순화가 필수적이었다. 심지어 그 당시 잘 알려진 민요들이 찬송가 안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멜로디는 계속 부르다 보면 별로 재미는 없을 수 있겠지만 가사에 집중할 수 있게 하고 모든 성도가 함께 찬송을 부를 수 있도록 하는 장점이 있었다. 이와 같은 변화의 배경 속에는 하나님께서는 화려하고 고난도의 선율에 의한 성가대의 특별찬송보다는 단순하고 담백한 선율에 따른 회중찬송을 더 좋아하신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찬송을 점검해 보자. 요즘 CCM의 특성 중의 하나는 따라 부르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박자가 곡조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찬양팀은 최신 노래를 연주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좌석에 앉은 회원들은 찬송을 부르기 보다는 찬송을 듣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다. 이것은 특별히 대형 수련회의 경우에 그러하다. 앞에서는 아주 열정적으로 찬양팀이 노래하고 있지만 뒤에는 대다수가 팔짱을 끼고 듣거나 심지어 자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찬양이 일부 매니아들을 위한 시간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CCM의 문제는 부르는 이들에게 가사에 대해서 별 관심을 가지지 않게 한다. 예를 들어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찬송을 부른 이들에게 그 의미를 물어 보면 대부분 제대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뜻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가사의 내용이 아니라 곡을 통해서 경험한 느낌이다. 대부분의 CCM 노래가 1절로 되어 있고 그것을 느끼고 경험할 때까지 여러 번 계속 반복적으로 부른다. 이것은 정확히 타락한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영성과 그대로 일치한다. 믿음이 분명한 지식에 근거한다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점차 우리 교회 안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특송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특송은 특별찬송의 준말이며 이것은 보통찬송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특송을 좋아하실까? 성가대의 찬송도 일종의 특송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 사라진 전통이 우리 한국교회에 다시 자리를 잡고 있다. 성가대의 찬송 시간에 성가대는 열심히 아름답게 노래하고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것을 듣고 있다. 끝나고 나서 아멘!”이라고 화답하기도 한다. 소수는 노래하고 다수는 경청하는 찬송 방식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참고로 필자는 음악에 관심이 있는 좀 있는 편인데 성가대의 찬양이 정말 은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것은 아마 음악에 대한 수준이 높을수록 더욱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찬송의 방식에서 가장 논쟁이 된 부분은 악기 사용에 관한 것이다. 초대교회는 기본적으로 예배 시간에 악기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오늘날도 그리스 정교회는 악기를 대부분 사용하지 않는다. 종교개혁가들 중에서도 악기 사용을 반대한 대표적인 사람이 쯔빙글리였다. 칼빈도 악기 사용에 대해서 대단히 신중한 입장을 취하였다. 심지어 수천 곡이 넘는 찬송을 작사하였던 요한 웨슬레도 악기 사용에 반대하였다. 이와 같은 입장은 악기의 사용이 찬송에 도움 보다는 해가 될 가능성이 더 많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는 오르겐 사용과 관련하여 큰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불리는 교파는 아예 악기파와 무악기파가 존재하고 있을 정도이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불과 2-30년 전만 하더라도 기타나 드럼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기성세대는 상당히 거부감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이제 교회마다 기타나 드럼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교회의 쇠퇴로 인하여 기타나 드럼이 방치되어 가고 있는 교회도 적지 않다. 이제는 그와 같은 악기를 다룰 사람이 교회에 없는 실정이다. 악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교회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 신대원생들의 경우 음악이 없으면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

 

악기를 사용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좋아하시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적어도 확실한 것은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악기사용을 명하신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기 사용에 대해서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하겠다. 과연 오늘날 과도한 악기의 사용이 정말로 찬송에 도움이 되는지를 진지하게 질문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에 찬송을 부르는 방식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시편과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마음에 감사함으로(with grace in heart)”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권면한다(3:1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5). “마음에 감사함으로는 찬송 방식의 대 원칙이 되어야 하고 이것을 기준으로 우리의 찬송 방식을 판단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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