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예배] 자매에게 하듯 하라: 7계명과 성농담(음담패설)
최근 서울대 의대 교수가 간호사에 대한 성희롱으로 다시 성희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번 사건의 특이한 점은 대부분 이러한 성희롱 사건이 있으면, 당사자들이 대부분 부인하는데 반해서 본인 스스로가 그러한 혐의들을 시인했다는 것이다. 안 했다고 오리발을 내밀 수도 있었을 텐데, 그 교수가 그렇게 한 것은 그 만큼 그의 행위가 광범위하고 노골적이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사실, 그 교수의 성희롱을 보면, 어떻게 그런 행위가 오랫동안 지속되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심각하였다. 그 교수는 긴장이 흐를 수밖에 없는 수술실에서 분위기 전환을 위해 성적 농담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이야 말로 우리 한국 사회에서 음담패설이 죄의식 없이 퍼져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상당수의 목사들에게서도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음담 패설은 성도와 목회자들에게서도 적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음담패설은 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할까? 음담패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내숭" 떠는 것 보다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덜 위선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악한 것을 피하기 위해서 더 악한 것을 택하는 방법이다. "내숭"은 그대로 음담패설을 즐기면서도 죄책감이라도 가지는 것이지만, 음담패설 자체를 말하는 것은 죄를 공개적이고 뻔뻔스럽게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교회는 일반적으로 성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려해 왔다. 그래서 공식 석상에서 이야기되기 보다 몇몇 아는 사람들의 사적인 모임에서 이야기를 하게 되고 또한 그러한 이야기들은 종종 음담패설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마침내 성희롱으로 발전하게 된다. 성도들이 이러한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성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언뜻 보기에 성경은 성행위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성경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냥 "동침하니라"라는 구절로 끝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만약 성경이 영화 시나리오라면, 성경의 수많은 "동침하니라"는 구절 뒤에 수많은 수식어가 붙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이 성 행위 자체에 대해서도 분명한 지침을 주고 있으며, 그 지침은 우리가 성을 어떻게 이야기 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규범이 되어야 한다.
성에 관한 한 우리에게 참된 길잡이가 되는 가장 중요한 성경은 아가서이다. 아가서가 물론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오직 그러한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 점에서 아가서를 아담의 노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에 대한 주석으로 보는 것은 하나의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다음 구절을 읽어 보자.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구나." 아가서가 만약 성경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단지 연애시 정도로 이해되거나 더 나아가 고대 시대 판의 포르노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가서는 여호와의 이스라엘, 나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인 부부의 참된 모습을 그리기 때문에 정경에 포함되었고, 우리는 아가서를 통해서 부부만이 가지는 성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성경은 "성"을 유모어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을 하나의 우스개 소리로 만드는 음담 패설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성경은 성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컨텍스트는 부부이다. 따라서 가정의 관점에서 떠나 성을 이야기하게 되면, 성의 고귀함은 사라지고 성적 농담이 될 가능성이 매우 많다.
"비둘기"는 여전히 내가 집사람을 집에서 부를 때의 애칭이다. 물론 이 단어는 아가서에서 빌려 온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떤 지 모르지만, 이 애칭은 우리 부부 사이의 친밀감을 훨씬 높여 준다. 즉, 성에 대한 표현은 똑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부부와 성을 즐기면서 아내에게 키스가 얼마나 좋은 지를 표현하는 것은 서로에게 성적인 큰 즐거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말이라도 부부관계를 떠나게 되면, 그것은 우스개 소리가 될 가능성이 훨씬 많아진다. 예를 들면 섹스를 즐기다가 부인에게 "당신 젖가슴은 쌍태 노루 같애"라고 말하면, 부인이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그런데 그런 말을 어떤 모임에서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더욱이 그 표현이 "당신(2인칭)"에서 "어떤 여자(3인칭)"로 바뀌게 되면, 여자에 대한 모욕이 된다. 왜냐하면, 여성의 신체에 대한 표현은 여자를 비하시킬 위험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하는 것이라고 분명한 가르침을 주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음욕을 음담패설로 아예 드러내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더 왜곡시키는 것이다. 더구나 음담패설은 종종 성희롱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음담패설과 성희롱의 차이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하는 것이니 믿음의 남성들은 어떻게 하여야 할까? 어떤 나이든 목사님에게서 "여자를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권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그 말의 뜻은 이해가 가지만 너무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한다. 이 부분에서 디모데전서 5장 2절은 중요한 원칙을 우리에게 준다. 바울은 목사 디모데에게 "젊은 여자를 일절 순결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명한다. 이것은 젊은 여자를 대하는 모든 목사들에게 중요한 교훈이다. 성희롱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 사람의 말이 정말로 성희롱이었는지 아닌지의 기준은 자신이 한 말이 자기의 여동생이나 누나에게 말하였을 때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 교회와 사회에 만연한 성적인 표현들은 대부분 "성희롱"의 카테고리에 들어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매에게 하듯 하라"는 명령은 모든 법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판사는 성폭행이나 성희롱에 대해서 너무 관대하다. 바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는 원칙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희롱을 판사의 여동생이나 아내가 당하였다고 생각해 보라. 그에게서 어떤 판결이 나겠는가?
남자들에게는 자기 누나나 여동생의 순결을 지키려고 하는 본능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여동생 주위에 모르는 남자가 접근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게 그 남자에 대해서 공격적이 된다. 심지어 상대방이 깡패인 줄 알면서도 덤비기도 한다. 목사들은 바로 젊은 여자들을 대할 때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즉, 목사들은 젊은 여성들을 대할 때, 그들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비율이 많고 여성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진다. 그 사이에서 목사는 여성들과 성농담을 할 위험성도 많아진다. 만약 그 이야기를 자신의 여동생에게 말하여도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 말은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말은 거두어 들여야 한다.
한국 사회와 교회는 성 농담과 음담패설을 은근히 즐김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음란의 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 점에서, "자매에게 하듯 하라"는 모든 믿음의 남성들에게, 특히 목사들에게 주는 엄숙한 주의 명령이다. 고신신앙의 모토는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이다. 순결에 대한 사랑은 목사에게 있어서, 특히 교회의 젊은 여성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나야 한다. 이런 것이 바로 고신 정신을 진정으로 오늘날 이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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