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WCC 투쟁의 역사

본지에 ‘배본철 교수의 성령론 Q&A’를 연재 중인 배본철 교수(성결대)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관련, WCC의 태동과 그 역사적 배경, 신학적 실체 등을 분석한 글을 본지에 보내왔습니다. 배 교수는 “현재 WCC 논쟁이 과다한 정치적 논리와 교계 분열의 양상으로 치닫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학문적이고도 교회사적인 입장에서 차분하게 WCC를 비평해 정리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임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이 글은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는 아니며,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며 “오직 바람이 있다면 한국교회가 바른 복음적 의식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이라고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① 교회연합운동의 태동
② 세계대전의 격랑 속에서 
③ WCC 창립 총회와 Missio Dei 
④ 왜곡된 복음의 뒤안길을 걷다
⑤ 간과될 수 없는 역사적 과오

1910년 에딘버러 회의는 그 동기와 목적에 있어서 복음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 이후 WCC가 창설되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제설혼합주의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본다. 그 주된 배경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교회는 인간의 실존 문제와 국가의 평화 등의 논제에 깊이 몰두하게 된 점을 들 수 있다. 이 글은 WCC가 거쳐 온 이러한 고민과 투쟁의 과정을 살펴보려 하는 것이다.

 

1910년 에딘버러 회의가 오늘날 에큐메니칼운동의 기점이긴 했으나, 이로부터 38년이 지나서야 WCC는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에딘버러 이후 20세기 중반까지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약사(略史)는 다음과 같다; 1921년에는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를 창설하였다. 이 모임은 에딘버러 회의가 남긴 가장 두드러진 결과였다. 1925년에는 생활과 활동(Life and Works)이 창설되었다. 이 운동은 기독교 신앙을 인간생활 전반에 적용시키려는 관심에서부터 시작했다. 1927년에는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가 창설되었다.

 

에딘버러 대회 이후 국제선교 협의회(IMC),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생활과 활동(Life and Works) 등 세 단체가 각기 나름대로의 모임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1937년에는 에딘버러(Edinburg)에서 이 세 가지가 하나로 묶어져야 한다는 제안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 이행은 WCC가 창립되던 해인 1948년까지 지연되었다. 그러면 1910년 이후 WCC가 창설되기까지의 에큐메니칼운동의 역사를 제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살펴보자.

1. 제 2차 세계대전 이전(1918-1939)

 

제 1차 세계대전의 종전(終戰)은 세계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그것이 기독교 세계에 영향을 준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교회연맹(League of Churches)을 형성하게 된 점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국제선교협의회, 신앙과 직제, 신앙과 활동 운동도 그와 같은 영향 아래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것은 이제부터의 교회운동은 개교회(個敎會), 개교파(個敎派)의 운동의 차원을 넘어야 한다는 것을 교회 지도자들이 발견했다는 것을 뜻한다.

 

1919년에 이미 쇠더브롬(Söderblom) 대감독은 어떤 형태의 에큐메니칼 조직을 제안했으며, 1920년 올드햄은 IMC운동의 규약을 작성하고 있었다. 1925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생활과 활동 위원회에서 벨(G. K. Bell) 교수는 국제기독교연합회의 조직을 제의한 바도 있었다. 1930년 첵스브레스(Chexbres)에서 모인 생활과 활동 계속위원회는 보편적교회협의회(Universal Christian Council)란 이름으로 모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조직되고 모임을 갖던 기독교 여러 단체들 가운데서 신앙과 직제, 생활과 활동 두 위원회는 1930년대에 와서 따로 모일 이유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두 위원회의 대표들이 대부분 같은 사람들이었으며, 같은 교회의 재정적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위원회는 ‘교리는 교회를 분열시키나, 봉사는 교회의 연합을 가져온다’(Doctrine divides, but Service unites)는 정신 아래서 신앙 또는 신학의 문제가 현실의 실제적인 문제를 떠나서 연구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신학이 추상적인 이론에 치우쳤음에 대한 반성의 시작이 된 것이다.

그래서 1934년에 두 위원회는 ‘교회와 세계’(The Church and the World)라는 주제를 내걸고 함께 모임을 가진 바 있었다. 이때 세계는 이미 제 2차 세계대전의 조짐이 보이고 있던 때였다. 독일의 나치즘, 이태리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軍國主義)가 세계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때 세 나라에 있던 교회들은 에큐메니칼운동 같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들은 정치적인 강요에 의해서 국가주의(國家主義) 또는 민족주의(民族主義)를 강조해야 했었다. 그러므로 교회도 민족주의를 위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반면에 그와 같은 위기를 감지한 세계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난국(難局)이야말로 오히려 교회의 세계성(universality)을 강조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교회의 본질, 즉 ‘교회란 무엇이냐?’ 또는 ‘교회는 무엇을 위해 있느냐?’는 문제를 묻게 되었다. 이와 같은 흐름에 의해서 1937년 생활과 활동 위원회 옥스포드 모임은 그 주제를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라’(Let the Church be the Church)라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교회가 비교회적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 비교회적인 것으로부터의 교회의 해방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s semper reformanda)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원리의 재발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에큐메니칼운동, 즉 교회일치운동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지 첨가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재발견속에서 에큐메니칼운동의 일차적 동기는 교회들 사이에 일종의 영적 일치를 창조하거나 교회들 사이에 협동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교회의 하나됨과 보편성과 사도성과 그리고 예언자적 증인(its oneness, its universality, and its apostolic and prophetic witness)이라는 참된 본질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되었다. 1936년에 올드함은 “현 세계를 깊이 살펴보면 볼수록, 교회의 일치적 본성을 더욱 깊이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고 하였다.

 

1937년에 에딘버러에서 모였던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서 템플(William Temple) 감독은 개회연설에서 “하나의 거룩한(Una Sancta) 교회를 선포해야 함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교회들이 저들의 공동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서로 도우며 다른 교회들과 완전한 영적 교제들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이보다 2년 전인 1935년에 미국을 방문하여 IMC 지도자들과 프린스톤에서 만났을 때, “모든 교회들이 초교파적이며 초국가적인 교회 회합을 가져야 할 때가 바야흐로 돌아왔다. 이 회합을 통하여 오늘의 세계 모든 단체들이 국제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에큐메니칼운동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할 기회가 온 것이다”고 말했다. 여기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개하는 문제는 결코 한 교회나 한 교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교회의 과제임이 인식되게 된 것이다.

 

1936년 7월 영국 런던에서는 생활과 활동, 신앙과 직제, IMC운동의 대표자 35명이 모여 에큐메니칼 협의회(Ecumenical Consultative Group)를 구성했고, 이 모임에 YMCA, YWCA, WSCF 대표들도 함께 참석을 했다. 이때 모인 대표들은 세계 모든 교회들이 공동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나의 영구적인 기관으로서의 세계교회연합회를 조직할 때가 되었다는데 일치하였다. 이 모임의 중심인물은 템플, 올드햄, 브라운(W. A. Brown), 카버츠(S. M. Caverts) 등이었고, 지금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의 명칭은 당시 미국교회연맹 총무였던 카버트의 제안에 의한 것이다.

 

이 런던 회의에서 초안된 WCC의 원칙적인 규정이 후에 WCC 창립총회에서 채택되었는데, 중심되는 정신은 ‘이 협의회는 모든 교회를 감독하는 법적 권리를 가진 기관이 아니며, 또 모든 교회들의 동의 없이는 어떤 일이든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 원칙이 1937년 7월 12일부터 26일까지 있었던 생활과 활동 모임인 옥스포드 회의에 상정되었다. 템플 주교와 다른 여러 명의 위원들은 이 새로운 계획의 채택을 권유했다. 주교는 the Voice of non-Roman Christiendom에 도움을 줄 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모든 에큐메니칼 운동이 교회 자체 위에 근거를 두고 있음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제안은 단지 두 명의 반대자를 가진 가운데 채택되었다. 1937년 8월 3일부터 18일에 있은 신앙과 직제 에딘버러 회의에서도 곧 채택되었고, 각 위원회에서 14명의 위원이 선출되어 그 원칙에 의해 일을 추진하도록 했다.

 

이 14인 위원회는 WCC 창립을 위한 전권위원회였다. 14인 위원회의 첫 번째 모임은 1937년 8월 런던에서 개최되었으며, 세계교회협의회의 본질과 구조 그리고 구성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 이들은 WCC의 헌장에 명시된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14인 위원회를 도와줄 특별자문기관을 함께 소집하기로 했다. 1938년 5월에 우트레헤트에서 제 2차 모임을 가졌으며, 이때 토의의 초점은 앞으로 조직될 WCC의 권위와 그 기초에 관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구조적 의문은 권위와 협의회의 헌장에 관한 것이었다. 권위에 관해서는 어려움 없이 완전히 동의에 이르렀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초교회(Super- Church)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했다. 이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후에 다시 확인되고 강조되었다. 이 모임에서 템플 감독은 “WCC는 일반적인 성격의 연맹이 아니다. 그 총회와 중앙위원회는 그 지지하는 회원들을 헌법적으로 제지하는 아무런 권위도 갖지 않는다. 그것이 가진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들이 지혜롭게 처신하도록 조언을 준다는데 있다”고 했다.

 

헌장에 관한 이견은 그리 쉽게 합의되지 못했다. 신앙과 직제가 소집된 신학적 기초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요 구세주라고 하는 신앙고백 - 가 대체로 WCC를 위한 기초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것이 공식화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많은 연설가들은 신앙과 직제 공식의 채택을 원했다. 그 때문에 이것은 실로 교회 모임을 위한 적합한 기초임이 입증되었다. 우트레크트에서 그헌장은 채택되었고, 제 1차 WCC 총회에서 확정되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요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교회들의 친교이다’(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is a fellowship of churches which accept our Lord Jesus Christ as God and Saviour).

 

5월 13일 우트레크트에서 열린 첫 번째 회의에서 의장에 템플 대주교가, 그리고 비서트 후프트(W. A. Vissert Hooft)가 임시위원회의 대표 총무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WCC의 창설 준비가 신앙과 직제, 생활과 활동 두 위원회의 대표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을 때, WCC와 IMC와의 관계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 문제가 1938년의 IMC 회의에서 토의되었을 때, 패톤(W. Paton)은 말하기를, “여러 교파 간에는 조직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살아있는 동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우주적인 교제가 여러 교회들 간의 참된 교회의 상징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이는 점에서 WCC의 위치가 중요하며..... 또한 IMC는 우리의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대한 책임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위치가 중요하다”고 했다.

 

1939년 1월 준비위원회는 두 번째 회의를 게르마인(Germain) 성에서 개최하였다. 정치적 긴장과 전쟁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 모임은 미래를 기대하였다. 잠정적으로 1941년 8월을 WCC 창립총회를 위한 날자로 결정지었다. 이때 독일에서는 나치 정권과 대립하여 싸우는 독일교회의 투쟁의 역사가 있었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나치 당에 유착되어 교회를 정치 권력의 도구화로 만든 독일 기독교당이 있었다. 독일 기독교당은 초국가적, 국제적인 교회기구는 어떤 것이든 간에 거부한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WCC 창립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WCC 준비위원들은 인종, 국가, 성의 차별 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영적 연합을 가진다고 선언함으로서 독일 기독교당의 입장에 대항했다.

 

1939년 7월 24일부터 8월 2일까지 암스텔담에서는 기독청년 세계대회가 개최되었으며, WCC 준비위원들은 72개국에서 모여든 청년 대표들과 세계교회 대회 문제를 토의했다. 이때는 이미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운(戰雲)이 짙어가고 있을 때였다. 이 대회의 메시지 속에는 “오늘날 세계 모든 나라의 민족들은 서로 나누어지게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한 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함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분열되어 싸움이 시작되는 세계 속에서 하나를 지향해 간다는 것은 분명히 세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는 모습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서 1941년에 모이려던 WCC 창립총회는 부득이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2. 전쟁 기간(1939-1945)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모처럼 무르익어가고 있던 세계교회연합운동에 크나큰 시련을 가져 주었다. 만일 세계교회운동의 지도자들이 그 시련을 극복하지 못했었다면, 오늘의 WCC는 창설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은 세계교회운동을 보다 강하게 해주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쟁 중에 교회 지도자들은 ‘이 전시(戰時)에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어떤 이는 침략과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에 대해 강력한 저항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템플 같은 이는 교회가 적대국가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교회들은 정치를 떠나서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길을 모색하였다. 전쟁에 의한 시련은 교회들로 하여금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긴밀하게 관계를 갖게 하였다. 베그라브(Berggrav) 감독은, “이 시련기에 우리는 서로 더욱 친밀하게 지냈으며, 우리는 더 많이 기도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였고, 우리 마음은 더욱 굳게 한데 뭉쳤다”라고 술회하였다.

 

전쟁 기간에 교회들은 세계적인 교회(Universal Church)를 파괴하는 힘을 공동의 적으로 인식하면서, 그 힘을 저지하고 파괴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하였다. 교회는 피난민을 구호하는 일, 포로들을 돌보는 일들을 통하여 ‘하나의 거룩한 교회’임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각국 교회 지도자들은 제네바를 통하여 연락하고 만났으며, Ecumenical Press Service 지를 통하여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전시에 교회가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교회 지도자들이 이미 마음에 다짐하고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활과 활동 위원회의 옥스포드 대회(1937년)는 그 메시지에서,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교회는 무엇보다도 참으로 교회가 되어야 한다. 비록 그 나라는 다른 나라와 싸우고 있다 해도, 교회는 적국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전쟁 당시 독일 국가 사회주의 당국은 교회의 에큐메니칼협의회를 위험시했고, 그 협의회의 활동을 방해하고 있었으나, 독일교회는 적국의 교회들과도 친교를 나누고 연락을 하고 있었다. 본훼퍼(Ditrich Bonhoeffer)는 제네바와 스톡홀름을 방문하여 미래 국가질서에 대해서 교회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토의하기도 했다.

 

전쟁이 한 고비를 넘기고,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게 유리하게 전세가 바뀌어감에 따라 1942년 미국의 카버츠(Caverts)는 제네바를 방문하여, 전후의 재건과 교회의 원조 문제를 토의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교회는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과 시련 속에서도, 그것을 오히려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끔 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 기간에 교회는 에큐메니칼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을 잃었다. 로잔(Lausanne) 대회 이후 신앙과 직제 모임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으며 IMC운동과 1937년 옥스포드 대회의 메시지를 작성한 템플, 패톤(W. Paton), 신앙과 직제 그리고 생활과 활동 위원회를 하나로 통합하는데 공을 세운 브라운(W. A. Brown), 그리고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등이 모두 전쟁 기간에 타계했던 것이다.

3. 전쟁 이후(1945-1948)

 

이 전쟁은 교회에 큰 교훈을 남겨주었다. 교회는 전쟁 중에 ‘역사의 비극 속에서도 성도들이 그 종파나 교리나 신학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교제하고 이해하고 또 협조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땅에 선포함에 공동으로 보조를 취하는 것이 얼마나 긴요하고 귀한 일인가’ 하는 것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전쟁의 종말이 결정적으로 가깝게 다가왔음을 알게 되었을 때, WCC 준비위원들은 뉴욕에서 소모임을 갖고 전후의 문제를 논의했다. 그들은 복구사업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는데 일치했으며, 세계의 모든 교회가 이 일에 함께 동참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교회가 강한 에큐메니칼 연대의식(Ecumenical solidarity)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1945년 5월에 모인 뉴욕 회의에서는 ‘적과 동지의 차별 없이 주를 섬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간에는 허심탄회하게 의견이 교환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룩된 하나님과 사람의 화해를 통하여 사람과 사람사이의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고 확인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10월에 WCC 준비위원들의 대표들이 독일교회 대표자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이때 독일교회는 ‘슈투트가르트 고백선언’(Stuttgart Declaration)을 했던 것이다. 그 선언은 교회는 죄책을 깨닫고 고백하고 스스로 그 책임을 지는 인간들의 공동체인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1946년 2월에 WCC 준비위원회는 제네바에서 모임을 갖고 WCC 창립총회를 암스텔담에서 1948년에 모일 것과 그 총회의 주제를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계획’(Man's Disorder and God's Design)으로 결정했다. 1947년 WCC 준비위원회는 대회 초청장을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대회의 목적을 간결하게 밝히고 있었다;

 

과거 수년간의 시련과 환란, 박해의 경험에서 교회는 새로운 친교의 의식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인간의 무질서를 막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새로운 소식 보다는 교회의 갱신(更新)과 참된 교회의 재생(再生)이다. 그러므로 WCC의 임무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알게 하고, 또 언제나 하나 되어 피차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우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공동의 회원 의식을 가지고 값있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4. 비평

 

1910년 에딘버러 회의는 진보적인 신학의 씨를 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대회는 교리적인 정립이 되어 있지 않은 지도자들이 과거의 일들을 비평하면서, 더욱 포괄적인 신학, 더 넓고 포용성 있는 대회를 주장하여 진보적인 신학과 종교혼합주의(宗敎混合主義)로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된 것이다.

 

1928년 예루살렘 대회는 에딘버러 회의의 결과로 1921년에 조직된 국제선교협의회(IMC)의 최초의 세계대회였다. 이들은 복음의 선포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행위가 선포에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복음적인 의미에서의 영혼 구원의 관점보다는 그 대신 사회복음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책임으로서의 죄(罪) 관념을 상실했다. 또한 이들은 타종교에도 어느 정도 구원의 빛이 있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배제된 것이 분명하다. 이 대회는 복음전도에 있어서 성서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증거의 수단으로서 교회의 사업이나 조직적인 일치를 필요하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선언문의 내용은 이 대회에서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 분명한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빛의 완전한 광채가 모든 사람에게 비치시는 빛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그 같은 빛이 그를 알지 못하거나 또는 거절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비치는 것을 발견하고 기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증거 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과 비기독교인들 개인과 조직들의 모든 훌륭한 특성들이 그 아들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한층 더한 증거임을 환영한다. 따라서 다른 종교들의 영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지 않고 단지 예를 들어왔었다.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 추구에 무관심한 사람들에 대하여서와,

 예배의 엄격함으로 유명한 이슬람교과,

세계의 비참함에 대한 연민과 해탈의 길을 위한 무아(無我)를 추구하는 불교와,

영을 통한 궁극적 실재와의 접촉을 소원하는 힌두교와,

우주의 도덕적 질서에 대한 믿음과 도덕적 실천에 대한 논리를 강조하는 유교 등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진리의 한 부분으로 인식한다.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이슬람에서 여성인권은 무엇인가?

 

이슬람 지역에서 여성에 대한 반인권적 상황이 수시로 벌어져 세계를 경악케 하고 있다. 지난 2월 수단에서는 에티오피아 출신 10대 소녀가 결혼해 임신 3개월째의 몸으로, 수단에서 남성 7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소녀는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이슬람 축제기간이라는 이유로 수사에 착수하지 않았고, 사건 6개월 뒤 가해 남성이 범행 장면을 휴대전화로 찍었던 것을 SNS를 통해 공개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졌으나, 오히려 소녀를 간통혐의로 몰아 구속하고, 사형당할 위기에 놓였다.

 

또 지난 4월 14일에는 나이지리아 과격 이슬람 단체인 보코하람(알카에다 연계조직-‘서양교육은 죄’라는 말의 뜻이 있고, 본래는 자마스 알리스 순나 리디와티 왈지하드-Jama’atu Ahlis Sunna Lidda’awati wal-Jihad로 ‘선지자의 가르침과 지하드의 성전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의미)이 크리스천 여자중학교를 급습하여 276명의 여학생을 납치하여, 일부 여학생은 한 명에 약 14,000원을 받고 다른 나라에 팔고, 또는 극단주의 조직원들과 강제 결혼을 하게 하였고, 일부는 보코하람의 조직원들과 1:1 맞교환 조건에 이용하려고 한다고 전해진다.

 

이에 대하여 5월 22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보코하람을 이슬람 테러 단체로 규정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려 무기 금수(禁輸)와 자산 동결 등의 제재를 가하기로 만장일치 결의하였다.

 

보코하람은 그 이후에도 지난 5월 20일 여학생들을 납치했던 나이지리아에서 3개 마을을 공격하고 차량폭탄 테러를 일으켜, 118명이 사망케 하는 등 극단적 테러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난 5월 15일 수단에서는 20대 여성이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수단 법원에서 태형 100대를 선고 받았다. 이는 사실상 사형에 해당한다. 미국 시민권자인 다니엘 와니와 결혼한 28살의 마리암 야흐야라는 여성은 이슬람에 대한 배교 혐의를 받고, 기독교인 남편과 결혼한 것도 법적인 효력이 없다고 한다. 이에 미국, 캐나다, 영국, 네덜란드는 공동 성명을 통해 수단에 대하여 ‘종교의 자유를 가질 권리를 존중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슬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왠일인지 이슬람 지역에서의 테러는 더욱 가속되고 있고, 특히 여성들에 대한 반인륜적이고 천인공노할 범죄는 더욱 늘어나고 있으며, 인권유린은 그 도를 더하고 있다.

 

이렇듯 이슬람 지역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인권 유린에 대하여 이집트 출신이면서 여성 언론인, 저술가인 노니 다르위시(Nonie Darwish)는 ‘여성에 대한 반인권적 행위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기인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 즉 이슬람이 ‘샤리아’를 달리하지 않는 한, 이슬람권에서의 여성 인권 유린과 살상/폭력사태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 한국에서도 이슬람이 8대 종단에 들어오기 위하여, 지난 2010년부터 ‘이슬람 다가서다’라는 주제로 2013년까지 총 4회에 걸쳐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주최는 KCRP(한국종교인평화회의-7개 종단이 가입-NCCK, 불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 유교, 한국민족종교협의회)와 한국이슬람중앙회가 맡았고, 후원은 문화체육관광부로 되어 있다.

 

내용은 이슬람을 긍정적으로 보이기 위한 노력들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슬람을 단순히 이웃종교로 보기보다는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점과 정체성을 바로 알아야 한다. 특히 국내에서도 무슬림 남성들과의 국제결혼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여성들의 인권유린 사례가 계속 접수되고 있어서, 그 심각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에 의한 여성들에 대한 인권유린 사건은 이슬람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이 같은 반인륜적인 일들을 개선하고 근절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과 함께, 국내에서도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스웨덴의 이슬람,무슬림  현재 상황을 진단한다

 

 


한국인들이나 전세계인들이나 가장 살기좋은 나라로 인식되고 있는 북유럽의 한 국가 코눙아리케트 스베리예(스웨덴 왕국을 의미함) 스웨덴은 지금도 베르나도트 왕조 아래에서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복지 혜택이 우수하여, 물론 그 복지가 보편적이라 폐단도 크지만 하여튼 이 때문에 전 세계인이 가장 살기좋은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그 속은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 과도한 복지로 인해 삶의 의욕도를 줄인 것이 문제가 되겠지만 이슬람 출신이 스웨덴으로 유입하면서부터 스웨덴은 본격적으로 헬스웨덴이 되려 하고 있다.

 

 

이 사진이 현재 스웨덴의 상황을 잘 설명해주는 것 같다, 스웨덴은 이슬람 출신들에 의해 무고한 국민들까지 피해를 주는 것이다. 무슬림의 과도한 광신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이렇게 된 것이니..

 

 

이들 이슬람인들은 스웨덴의 국기를 태우는 등 국기에 대한 모욕적인 행위를 가하고 있다.

 

 

 

 


"이슬람을 모욕하는 자는 목을 베어버려라' 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스웨덴 안에 있는 이슬람인들, 이들의 이중잣대적인 행동은 자기네들이 모욕할 짓을 했다는 점인데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슬림인들은 집단 구역에 모여서 Sharia(이슬람의 율법) 구역을 만들었는데, (일명 샤리야 콘트롤드 존)
말 그대로 저 구역에 들어가면 자국 법보다 이슬람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의 이러한 행위는 국가의 법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노출되는 옷,담배,술,음악,콘서트,돼지고기 등등 이슬람이 금지하고 있는 기본적인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스웨덴에서만 국한된게 아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이러한 지역이 많아지고 있고 프랑스에만 해도 750여개 이상은 넘는다고 한다.

 


기도하는 스웨덴 무슬림들의 모습이 담겨진 사진이다.
차가 돌아댕기고 있는 도로에서 저렇게 단체로 모여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중이다, 비이슬람 사람 입장에서는 꽤나 큰 민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또한 무슬림들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여성 폭력도 스웨덴에서도 일상화가 되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에서도 보았듯이 무슬림으로 인해 스웨덴 백인 여자에 대한 폭행,강X  70세 고령의 노인으로부터 어린 아이까지 이들 무슬림은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슬림으로 인해 피해본 사진은 더이상 올리지 않겠다, 혐오를 유발할수 있기 때문에..

하여튼 이런 문제를 스웨덴 정부에서도 이들의 폭력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방관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범죄를 일으킨 무슬림에게 비판을 하면 이슬람 혐오자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2014년 12월부터 이민자를 모욕하면 이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까지 통과시켰으니 스웨덴 정부는 범죄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스웨덴 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국가에서도 무슬림에 의한 범죄가 많아지고 있는 상태다, 옆동네 노르웨이도 이슬람 이민자로 인해 수많은 여성을 비롯한 피해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여자만 그런게 아니라 남자를 포함한 비무슬림에게도 종교를 강요하면서 이슬람 율법을 안따르면 폭력을 정당화 시키까지도 한다.

 

스웨덴에 수많은 이슬람 이민자가 유입되면서 스웨덴의 상황은 완전 지옥 수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들의 수는 적은 수도 아니고 너무 많아서 막을 수도 없는 상황.. 그리고 이들이 저지르고 있는 범죄에 대해 저항하거나 비판을 가하면 이슬람 혐오자로 취급당하기 까지 하다니 앞으로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스웨덴은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닌 그냥 개지옥이 되버리고 만다.

스웨덴의 복지가 너무 관대해서 그런지 이들 이슬람 이민자에게도 너무 관대함을 베풀어주고 있는 상황이니, 사실 스웨덴에서만 이짓거리가 일어난게 아니라 다른 유럽국가들도 상황이 마찬가지라 앞으로의 유럽의 미래는 참담해질거라 예상한다.

필자는 이슬람 자체를 증오하진 않는다, 그들 이슬람의 역사는 찬란했던 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중세에 이슬람의 과학은 진보했었고 약간 관대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슬람의 역사도 잔인한 점이 많았으니 이를 부정할수는 없다.

그러나 요즘 무슬림의 극단적인 와하비즘 행동으로 인해 전 세계인들이 피해를 보고있다, 미국의 911테러, 파리 테러, 브뤼셀 테러 이거 전부다 무슬림이 일으킨 테러리즘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둬야 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이슬람 희화화한 '죽어야 사는 남자', MBC 공식사과

시청자 과잉반응일까? 몰이해로 인한 실수일까?

 

자신과는 다른 이질적 관습과 문화를 희화화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흥미롭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의 관습과 문화를 폄훼한다면 사디즘적인 취미랄 수 있다.

 

이슬람 문화와 관습을 놓고는 특히 그렇다. 수년 전부터 코미디 프로그램에 등장시켜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자연스럽고 재밌는 소재라고 넘어갔었지만 근래 이슬람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그들을 의식한 과잉반응이랄 수도 있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에 타인의 문화와 관습에 공감을 못하더라도 그들을 우리의 시각만으로 과장되게 표현하고 폄훼하는 것은 부주의한 면도 없지 않다.

 

MBC 수목드라마 '죽어야 사는 남자'(극본 김선희 연출 고동선)가 이슬람 문화를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이 SNS 상에서 논란이 되자 MBC는 지난 21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사과했다.

 

'죽어야 사는 남자'는 히잡을 쓰고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여성이 등장하는 장면 등으로 인해 이슬람 문화를 희화화했다는 비난에 휩싸인 바 있다. 또한 무슬림 남성이 코란을 펴놓고 그 앞에서 다리를 올리고 있는 모습에 대해선 “무슬림에게 코란은 몹시 소중하다”며 “제대로 된 조사도 안했다”고 지적했다.

 

 

드라마의 포스터도 도마에 올랐다. 코믹한 연출의 배우 모습들에 최민수 앞에는 코란이 펼쳐져 있는데 이는 이슬람 아랍 세계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란 것이다. 무슬림들도 코란을 만질 때는 꼭 손을 깨끗히 씻고 만져야 하며 코란을 읽다가 잘못 읽으면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 할 만큼 성스런 것인데 포스터부터 금기사항을 건드렸다는 지적이다.

 

이에 '죽어야 사는 남자' 제작진은 공식사과문을 통해 “'죽어야 사는 남자'는 가상의 보두안티아국을 배경으로 제작되었으며, 등장 인물, 인명, 지역, 지명 등은 픽션”이라며 “아랍 및 이슬람 문화를 희화하거나 악의적으로 왜곡할 의도는 없었다.”고 밝혔다. 또한 “촬영 과정에서 부족했던 점을 엄밀하게 검증하고 더욱 주의를 기울여 제작에 임하겠다.”고 사과했다.

[출처] http://blog.naver.com/hosabi55/221057728460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이슬람 이야기 / 황태연 지음

 

안녕하세요~

좋은땅 출판사 입니다!

현대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다양한 소식들을 SNS와 각종 매체를 통해 접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유럽,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발생하는 자살폭탄테러, 기독교인 학살, 여성 비하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담겨있는 내용들이 다수인데요.

​그러나 이렇게 단면적인 부분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는 이슬람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 대중들은 이슬람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이해하고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야 편견 없는 정확한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보다 쉽게 이슬람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슬람 제대로 알기!

기독교인을 위해 쉽게 쓰인 이슬람 이야기

 

현대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다양한 소식들을 SNS와 각종 매체를 통해 접하고 있다. 그 내용은 유럽,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발생하는 자살폭탄테러, 기독교인 학살, 여성 비하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담겨있는 내용들이 다수다. 그러나 이렇게 단면적인 부분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는 이슬람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슬람권에서 무슬림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했던 『이슬람 이야기』(좋은땅 펴냄)의 저자 황태연은 다른 사람들보다 이슬람에 대한 정보와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이슬람을 몰랐다”고 고백한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신이 아는 많은 것들이 착각이었고, 본질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슬람에 대한 단편적인 소식들로 이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대중들은 이슬람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이해하고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편견 없는 정확한 견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만들어진 책이 바로 『이슬람 이야기』(좋은땅 펴냄)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보다 쉽게 이슬람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다소 어려운 전문적인 이슬람의 단어들과 아랍어들을 가능하면 배제하고, 이슬람의 핵심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보다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향의 내용으로 기술된 책이다. 독자들은 이슬람에 대한 깊이 있는 학문적 지식보다, 보편적이나 포괄적이며 섬세한 정보들로 이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이슬람 이야기 > 황태연 지음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이슬람 경전 한글꾸란입니다.

다운받아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다운 받기 여기를 클릭하세요 glory quran!.pdf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이슬람 강좌 (이슬람과 이슬람문화 ) Islamic culture

 

이종화 명지대·아세아신학대 강사

 

복식문화

남녀간, 지역간, 기후의 차이에 따라 의복의 형태는 각각 다른 특징을 보인다. 남성의 전통적 의복은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나 대개 위 아래가 하나로 된 긴 장옷 형태가 일반적이다. 이 의복은 ’‘갈라비야’‘다쉬다쉬등으로 불리며 사르왈이라는 바지 위에 입기도 한다. 장옷을 입은 허리에는 다양한 장식을 한 단도를 차는데, 이것으로 남성다움을 과시한다. 또한 단도의 형태와 색깔 그리고 재료에 의해 신분과 부족을 구분하기도 한다.

 

머리에는 다양한 줄무늬로 디자인한다. ‘구트라라는 천을 쓰는데 이깔이라 부르는 머리끈으로 머리에 고정된다. 구트라와 이깔은 단지 머리에 쓰는 용도뿐만 아니라 부족간 구별과 통치 가문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구트라의 무늬와 이깔의 형태와 색을 보고 그 사람의 출신 부족과 신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머리에 터번을 두르기도 하는데, 터번은 끊어지지 않은 하나의 긴 천을 머리 부분에 정성스럽게 두른 것으로, 흰색·검은색·청색 등으로 채색되어 있다. 어깨에는 비쉬트라 불리는 직사각형의 망토를 장옷 위에 걸치는데, 이것은 옷의 기능뿐만 아니라 온도차가 매우 심한 밤의 사막 여행에서 휴식과 수면을 위해 몸을 덮는 담요의 기능까지 겸하고 있다.

 

여성의 의복은 꾸란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밖으로 나타내는 것 이외에는 유혹하는 어떤 것도 보여서는 아니 되니라. , 가슴을 가리는 수건을 써서 남편과 그의 부모, 자기 부모, 자기 자식, 자기의 형제, 형제의 자식, 소유하고 있는 하녀, 성욕을 갖지 못하는 하인, 그리고 성에 대해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 이외의 자에게는 아름다운 곳을 드러내지 않도록 해야 되니라.’(2431)

 

따라서 여성의 전통 의복은 온몸을 덮어 가족 이외의 사람들로부터 신체와 장신구들을 가리기 위한 것이다. 여성의 몸을 가리는 이러한 의상은 히잡’(머리나 몸을 덮는 의상) ‘부르끄으’(얼굴 가리개) ‘니깝’(얼굴 전체를 덮는 검은 베일) ‘차도르’(머리 덮개)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또한 여성 의상의 모양과 색깔은 지역, 종교적 성향, 계층, 연령, 취미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걸프 지역의 여성들은 검은색 히잡을 쓰고 온몸을 가리지만, 북아프리카의 여성들은 흰색이나 다양한 색의 히잡을 선호하며 얼굴을 내놓는 두건 형태의 히잡을 쓰거나 아예 쓰지 않기도 한다.

 

또한 종교적 믿음이 강한 보수적 성향의 여성들은 온몸을 가리는 히잡을 착용하는 반면, 개방적인 여성들은 두건 형태의 히잡을 쓰거나 아예 쓰지 않기도 한다. 연령에 따라서도 젊은 여성들은 원색 계통의 화려한 히잡을 좋아하고, 나이 든 여성들은 단색 계통의 히잡을 선호한다.

 

음식문화

   

무슬림들의 주식은 역시 빵이다. 유목민들에게 구운 빵은 이동중에도 쉽게 먹을 수 있고 보관도 용이해 매우 간편한 음식이다. 빵과 더불어 주요한 음식으로는 육식이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사용되는 양고기는 무슬림들이 가장 좋아하는 육류이고 닭고기·쇠고기·낙타고기 등을 먹는다. 하지만 돼지고기는 엄격히 금한다. 요리 방법은 주로 불에 구워 먹는데, 육류구이 요리의 대표적인 것은 케밥이라는 음식이다. 케밥은 양고기를 작은 크기로 잘라 주로 소금과 후춧가루로 양념해 구운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코프타라는 음식이 있다. 코프타는 잘게 다진 양고기에 여러 가지 양념과 재료를 섞어 버무린 다음 소시지 모양으로 만들어 구운 것이다. 또한 일종의 샌드위치인 샤와르마라는 음식도 즐겨 먹는다. 이것은 큰 꼬챙이에 수직으로 켜켜이 쌓인 양고기나 쇠고기를 가스 불판 앞에서 돌리면서 굽는 것이다. 구운 고기는 얇게 잘라 빵 사이에 오이피클이나 샐러드와 함께 넣어 샌드위치를 만드는데 이것이 샤와르마다. 또한 요리할 때는 기름을 즐겨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이 비만한 체구의 무슬림 남녀를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무슬림들이 즐겨 마시는 음료는 주로 커피와 차다. 커피는 무슬림들이 커피 수출로 유명했던 예멘의 모카 항구를 통해 인류에 보급시킨 음료다. 커피가 무슬림들의 기호식품으로 이슬람 세계에 퍼져 나가게 된 것은 15세기 중반부터다. 예멘의 수피 수도사가 에티오피아 지방을 여행하다 열병에 걸려 앓아 누웠을 때 원주민들이 커피 가루를 물에 타 먹여 회복했다고 한다. 이 수도사에 의해 예멘 지방에 커피가 알려지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이슬람의 신비주의 종단인 수피종단에서 수도사들이 모여 앉아 설교를 들을 때나 명상중에 잠을 쫓을 때 커피를 즐겨 마셨다. 기록에 의하면 이미 1511년 이슬람의 성지 메카에서 성지 순례자들에게 커피를 팔았던 것으로 전한다. 곧이어 커피는 성지 순례자들에 의해 이집트·시리아·이란·터키 등지로 퍼져 나갔다. 무슬림들은 커피가 정신을 맑게 하고 피로를 회복시키며 열을 내리게 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여 즐겨 마셨으며 도시 곳곳에 커피점이 성행했다.

 

 

커피가 이처럼 빠른 속도로 전 이슬람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술을 금지하는 이슬람법 때문이다. 이슬람에서는 음주를 금하기 때문에 술을 대신할 음료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곧 커피였으며 선술집과 같은 사교장소를 대신한 곳이 커피점이었다.커피와 함께 차도 무슬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기호식품이다. 차는 19세기 이후부터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과 더불어 소개돼 이슬람 세계에 널리 퍼졌다.

 

 

무슬림들은 샤이라고 불리는 차를 우리처럼 한 잔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보통 두세잔을 계속해서 마신다. 차는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끓이는 시간과 첨가하는 재료가 다르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박하 잎을 넣어 박하향을 나게 하는 나으나으. 보통 차에는 많은 설탕을 넣어 달게 마시는데, 이것은 설탕이 더운 날씨에 지친 몸의 피로를 회복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 돼지고기를 금하는 이유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힌두교도에게는 쇠고기가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힌두교도들은 인도에 있을 때, 즉 자기들의 공동체 안에 살고 있을 때는 이 계율을 철저히 지키지만 무슬림들은 자기들의 공동체 안에서나 밖에서도 돼지고기를 철저히 먹지 않는다. 또한 힌두교도는 쇠고기를 먹지는 않지만 농가에서는 흔히 소를 사육하며 경작에 이용하기도 하나 무슬림들은 돼지를 사육하는 일조차 전혀 없다.

  

이슬람에서는 왜 돼지고기를 그렇게 철저하게 금지했을까? 수많은 학자들이 이슬람에서 돼지고기를 금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해석하지만, 같은 질문을 이슬람 신학자에게 질문한다면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꾸란을 통해 지시하셨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꾸란에서는 돼지고기뿐 아니라 먹을 수 없는 음식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이슬람에서 규정한 금지된 음식은 어떤 것들일까?

   

이슬람에서 허용된 것은 할랄이라고 하고, 금지된 것은 하람이라고 부른다. 어느 것이 하람인지는 꾸란에 자세히 명시되어 있다. 그래서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슬람의 율법이 복잡하고 금하는 것이 많은 까다로운 종교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꾸란이나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에서는 특별히 금지된 것들을 제외한 모든 행위는 허용된다고 말하고 있다.

   

선지자 무함마드는 초기 이슬람 신자의 질문을 받고 할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하람은 금지하신 것이나 꾸란에 아무런 언급이 없는 사항은 모두 너희에게 허락되어 있느니라하고 대답했다. 따라서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처럼 보이는 이슬람 율법은 몇가지 금기사항만 유의하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관대한 법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꾸란에서는 명쾌하게 허용된 음식과 허용되지 않는 음식을 정의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믿는 자들이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부여한 양식 중 좋은 것을 먹되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만을 경배하라.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그러나 고의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먹을 경우에는 죄악이 아니라고 했으니 하나님은 진실로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신 분이니라.’(꾸란 2172~173)

 

 

꾸란 제53절에서는 먹을 수 없는 육식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 하나님의 이름으로 잡지 않은 것, 목 졸라 죽인 것, 때려 잡은 것, 떨어뜨려 죽인 것, 서로 싸우다 죽은 것, 다른 야생동물이 먹다 남긴 고기, 우상에 제물로 바쳤던 고기, 화살로 점을 치기 위해 잡은 것 등이다. 이처럼 꾸란에서는 동물에 관하여 돼지고기와 죽은 고기, 피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죽인 동물의 고기만 금지사항으로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선지자 무함마드는 하디스에서 뾰족한 엄니나 독치를 가진 동물과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맹수 그리고 독수리··송골매·솔개 등의 조류를 모두 먹어서는 안될 동물로 규정해 놓았다. 결국 양··염소·낙타 등과 같은 초식동물을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동물로 한정해 놓았지만 먹을 수 있도록 허용된 동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고 잡지 않은 고기는 먹을 수 없도록 규정한 것이다.

   

반면 해양동물은 모두 정당하게 먹을 수 있다. 동물에는 육지의 것과 바다의 것이 있다. 바다에서 사는 동물은 어디에 있었던 것이든, 살아 있는 것이든 죽은 것이든, 또한 무슬림이 잡든 비무슬림이 잡든 모두 정당하게 먹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꾸란에서 바다의 사냥과 그 음식은 너희와 여행자들을 위해 허용하니라.’(꾸란 596)라 했고, 선지자 무함마드 또한 바닷물은 깨끗한 것이며 그 안에서 죽은 동물 또한 먹어도 좋은 음식이니라.”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이슬람에서는 육식을 하는 데 여러 가지 제한을 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가피한 상황의 경우에는 언제나 허용의 길도 열어놓는 것이 이슬람의 특성이다. 위에서 인용한 꾸란 구절에서 보았듯 고의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먹을 경우는 죄악이 아니라고 했다. 다시 말해 누구든 굶주렸거나 강제에 의한 경우에는 이를 불가항력으로 간주해 아무 고기나 먹을 수 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돼지만은 특별히 언급해 먹지 말라고 명령했을까?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의학자들은 돼지고기가 보유한 여러 가지 선충들이 인간의 몸에 해롭다든지, 또 어떤 학자들은 돼지의 습성이 나쁘다든지, 돼지고기는 사막 기후에 부패하기 쉬워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 등이다.

 

그러나 이슬람 신학자들은 꾸란을 통해 하나님께서 금했기 때문에 무슬림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며,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다고 생각한다.

   

주거문화

 

 무슬림들은 생활방식에 따라 유목민, 정착 농경민, 도시민의3부류로 나뉘는데 이들은 각각 특징적인 생활방식에 따라 주거문화를 발달시켰다. 유목민의 주거문화는 그들의 옛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데 주로 천막을 이용하는 것이다. 자주 이동하는 유목민이 가진 특징에 따라 조립과 해체가 편리한 천막의 주거문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정착 농경민의 주거문화는 기후 조건과 가용의 건축자재에 따라 발달했다. 산악지대에서는 돌을 주로 사용하여 건축하는 반면 찰흙이 풍부한 강 유역에서는 잘게 썬 짚을 진흙과 반죽하여 만든 찰흙벽돌을 사용하여 건축한다. 찰흙벽돌은 열을 잘 차단하기 때문에 외부의 온도가 아무리 올라가더라도 실내는 쾌적하고 시원한 상태를 유지시킨다.

 

 

도시의 주거문화는 메디나로 불리는 도심권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메디나는 성벽으로 둘러쌓여 요새화되어 있으며 이 안에 상업지역, 공공지역, 주거지역이 함께 있다. 상업지역인 수끄는 좁은 거리와 골목길이 교차되는 복잡한 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의 비슷한 형태를 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직종별, 취급품목별로 동일한 가게들이 몰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공공지역은 종교와 통치의 중심지역으로 모스크와 이슬람 학교가 있어 종교의 중심지가 되며 또한 관청이 모여 있어 통치를 관장한다. 주거지역은 좁은 골목길이 사방으로 얽혀 미로를 이루고 거의 동일한 형태의 집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로 담은 없으며 집과 집이 서로 맞닿아 담의 역할을 대신한다. 집의 구조는 거리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집안 마당이나 정원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있는 방들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가정생활의 중심은 집안 마당이 된다.

 

 

주거지역 안의 대부분의 거리들은 너무나 협소하여 자동차가 다닐 수 없고 단지 보행자와 짐을 실은 당나귀만 다닐 수 있다. 하지만 19세기 말부터 전통적인 도시를 재보수하고 재건축하려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대도시들은 서구식 도시계획과 건축술의 도입으로 인해 고유의 전통을 잃고 급격하게 변모하고 있다.

   

이슬람 건축의 백미, 모스크

   

인류의 종교에 대한 애착과 열정은 세계적으로 많은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유산으로 남겨 놓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유럽의 대성당들이 이러한 건축물들이다. 마찬가지로 이슬람에서도 무슬림들의 종교적 열정으로 인해 모스크라고 불리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종교건축물들이 많이 건축되었다. 부드럽게 속삭이다 거칠게 포효하는 듯한 돔의 둥근 선과 첨탑의 날카로운 선. 이슬람 세계를 여행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지평선 위에 그려진 이 둥근 선과 직선의 신비로운 조화에 한번쯤은 넋을 잃고 바라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돔과 첨탑이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의 대표적 건축양식이다.

 

  모스크 중앙의 둥근 지붕은 영어로는 돔, 아랍어로는 꿉바라고 하며, 뾰족하게 솟은 첨탑은 미나렛이라고 부른다. 사실 돔이나 첨탑과 같은 건축양식이 이슬람 초창기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이슬람공동체가 점차 확산되고 정복을 통해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주변의 비잔틴이나 페르시아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 특유의 모스크 건축양식이 탄생한 것이다.

   

모스크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인 돔은 대부분 학자들이 비잔틴 건축양식의 영향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랍 민속학자들은 이미 이슬람 출현 이전에 아랍 유목민들이 낙타의 등 위에 싣고 다니던 조그만 가죽 천막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완만한 선이 의미하듯 모스크의 돔은 평화를 상징한다. 돔의 끝은 보통 초승달로 장식하는데 초승달은 샛별과 함께 이슬람의 대표적 상징이며 진리의 시작을 의미한다. , 무함마드가 최초로 계시를 받을 때 초승달과 샛별이 한데 어울려 떠 있었다고 전해지며 그때부터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에게 내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모스크 건축양식의 또 다른 특징인 첨탑은 기능면에서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하루 다섯차례의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해 무앗찐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이 첨탑 위에 올라가 아잔을 외쳤다. 높은 데 올라가 소리칠수록 멀리까지 잘 들리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기능은 이방인들에게 그 지방의 모스크 위치를 쉽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높은 첨탑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길을 모르는 외지인이라도 이 첨탑을 보고 모스크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첨탑 양식은 역사적으로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시리아·북아프리카·안달루시아(스페인·포르투갈 지방) 지방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사각형이었고, 이라크 지역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건축양식을 모방해 나선형이었으며 이란·터키 지방은 원통형이었다. 모스크에 따라 첨탑의 수도 다양하지만 일정한 규정도 없다. 1개나 2개가 보통이었지만 오스만터키 제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첨탑의 수가 권력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그 한 예로 술탄 아흐마드 1세는 이스탄불에 자신의 이름으로 모스크를 건립할 때 6개의 첨탑을 세우게 했다. 그러나 이슬람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모스크가 6개의 첨탑인 것을 알고 경비를 대 메카의 모스크에 하나의 첨탑을 더 세우게 했다.

 

  돔과 첨탑 등 화려한 외부구조와 달리 모스크 내부구조는 극히 단순하다. 돔이 받치는 내부구조는 기둥이 필요 없기 때문에 운동장과 같은 넓은 공간이 펼쳐지며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모스크들은 단순하나마 일정한 구조물을 갖추고 있다. 사방의 벽면 중 한쪽 벽면에는 아치형으로 움푹 패인 벽감이 있다. 이를 미흐랍이라고 부르는데, 예배를 보는 방향 다시 말해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방향을 나타낼 뿐 별다른 의미는 없다. 따라서 전세계의 모든 모스크들은 메카 방향을 향해 모스크가 건립된다.

 

  미흐랍의 바로 오른쪽에는 계단 형식의 설교대가 있어 민바르라고 부른다. 금요일 합동예배 전에 카팁이라고 불리는 설교자가 이 설교대에 올라가 설교한다. 한편 여성들을 위한 공간은 모스크의 양 측면이나 뒷면 혹은 2층에 마련되어 있는데 보통은 커튼이나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다.

 

 

모스크 내부 장식 중 특이한 것은 인물이나 동물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 인물이나 동물의 조각은 물론이요, 인물이나 동물을 묘사한 모자이크나 프레스코 벽화도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은 꾸란 5924절의 하나님만이 진정한 창조주로서 인간이나 동물을 만들 수 있다는 데 근거한 것이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조각이나 그림은 자칫 잘못하면 우상숭배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에서의 우상숭배 경계 때문에 모스크 내부 장식에서는 인물상 및 동물상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아름다운 문양의 아랍어 꾸란 장식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위 아라베스크라고 불리는 꽃 문양에 기초한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이 모스크 벽면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다. 결국 이슬람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계 때문에 회화는 발달하지 못했지만 대신 서예와 조형미술이 발달한 셈이다.

   

이슬람의 출생 의례

 

어느 문화권, 어느 사회나 아이의 출생은 대단히 경사로 여기며 이에 대한 축하 의례를 행한다. 이슬람 사회도 다른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아이의 출산은 아이들이 없는 집안은 축복받지 못한다는 하디스의 기록이 있을 정도로 매우 기쁜 일이다. 아이의 탄생은 신의 은총이며 사회적으로는 가계의 승계, 노동력의 증가, 전사의 확보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슬람의 관점에서는 임신 순간부터 출산에 이르는 산모의 전 과정을 성스러운 투쟁으로 묘사한다. 심지어 출산중에 목숨을 잃은 산모는 순교자로 간주하여 천국에서의 보상을 약속한다. 출산이 임박해 오면 공동체 내에서 평판이 좋고 노련한 조산원을 고용해 작은 칼과 명주실 등 필요한 출산 준비를 한다. 임신한 부인은 조산원으로 활동하지 못한다. 아기의 옷가지를 준비하고, 꾸란을 주머니에 넣어 아기가 태어날 방의 벽에 메카 방향으로 걸어둔다. 이때 아기용품도 꾸러미를 만들어 그 속에 참깨를 뿌리고 호적과 꾸란 밑에 나란히 건다.

 

 

출산 때는 남성은 격리되고 조산원과 이웃 여인들이 꾸란의 개경장과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며 출산을 돕는다. 꾸란 구절 가운데 마리아의 예수 출산과 지진에 관한 부분을 계속해서 낭송한다. 산모는 음식이 금기되며, 박하차 같은 뜨거운 음료를 마신다.

 

 

조산원이 출산 소식을 전하면 아버지는 첫번째 의식으로 아기 머리가 메카 쪽으로 향하도록 안고 오른쪽 귀에 아잔’(예배를 알리는 낭송), 왼쪽 귀에 이까마’(아잔과 비슷한 내용으로 모스크 내에서 예배 직전에 낭송된다)를 불러주며 알라에게 아기의 탄생을 고하고 알라의 은총을 구한다.

 

 

아잔을 부르고 난 후에는 아기의 강건함을 기원하는 의미로 신선한 대추야자 열매를 씹어 그 액을 아기의 입에 넣어주는 의식을 치르는데, 이것을 타흐리크라고 한다. 갓 태어난 아이는 처음 이틀 동안은 꿀이나 설탕물을, 세번째 날에는 식물성 식용유 한 스푼을 먹이고 산모의 젖을 빨게 한다.

 

  특히 남아를 간절히 고대하던 산모가 남아를 출산하면 조산원은 그가 냉정을 되찾을 때까지 여아를 출산했다고 거짓 알려주는 지혜를 발휘한다. 이는 산모가 남아 출산을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혼절하는 사태를 막기 위함이다.산모는 여아를 생산한 경우 즉시 가사에 복귀할 준비를 해야 하지만, 남아를 출산한 경우 최소 36일간 침대에서 산후조리를 하며, 그 뒤 40일간 휴식을 취한다. 산모는 출산후 40일이 되는 날 신부 옷을 꺼내 입고, 신부와 같은 대접을 받으며 남아 출산에 따른 보상을 받는다.

 

  그리고 일상으로 복귀한다. 출생 의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생후 7일째 행해지는 탄생 축제와 작명 의식이다. 성대한 잔치가 병행되는 작명 의식 때에야 비로소 가까운 이웃이나 친지들이 선물을 준비하고 처음 아기를 보러 온다. ‘하렘’(여성거주 공간)에 여인들이 들어오면 조산원은 아기 침대에 묶어둔 소금 주머니를 풀어 뿌리면서 예언자의 은총을 받지 못한 자의 눈 속에 소금이 들어가기를또는 사악한 자의 눈 속에 더러운 소금이 함께 하기를이라고 중얼거린다.

 

  소금을 뿌리는 행위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부정하고 사악한 것, 특히 손님 중에 숨어 들어올지 모르는 악귀의 해악으로부터 아기와 산모를 보호해 달라는 기원의 표시다. 이때 여인들은 자수 손수건의 한 귀퉁이에 금화를 싸서 선물로 아기 침대 위에 올려놓고 아기에게 덕담을 한다. 덕담 내용은 주님이여, 우리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복되게 하소서이다. 이때 만약 아기의 모습을 이례적으로 칭찬하면 주인은 기겁을 하고 즉시 부정하면서 혹시 질투의 기운이 아기에게 미칠까봐 의혹의 눈길로 상대를 바라본다.

 

  축제가 시작되면 상류사회에서는 여성 가수와 밴드가 동원되어 산모를 위로하며, 아기의 출산을 위해 직간접으로 관계했던 여인들이 한바탕 함께 즐긴다. 탄생축제는 생후 1주일부터 5주째까지 매주 각각의 독특한 의례가 이어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1주일째의 작명 의식이다. 작명은 전통에 따라 일정한 형식을 취하지만, 많은 지방에서는 아직도 아이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상당기간 동물이나 곤충의 이름, 혐오스러운 표현, 발음하기 어려운 낱말을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생후 7일째 작명하는 날 아기의 머리털을 정수리만 남기고 자른 다음 그 머리털의 무게에 해당하는 금이나 은을 가난한 사람에게 희사한다. 이러한 의식은 작명과 함께 새로운 삶과 세계로의 입문을 의미한다. 그런 다음 주인은 손님들을 초대하여 동물들을 희생한다. 보통 남아인 경우에는 양 2마리를, 여아인 경우에는 양 1마리를 잡는다.

   

아끼까의식은 생후 7일째뿐만 아니라, 지방에 따라서는 14일째와 21일째에도 행한다. 이 의식은 부모가 그의 자식들을 위해 희생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그 자식이 곧 죽게 되거나 최후의 심판일에 자식이 부모를 변호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인한다. 희생 제물은 일반적으로 3등분하여 한 몫은 집안에서 요리하여 손님들을 대접하고, 한 몫은 가까운 친지나 친구·조산원에게 나누어 주고, 또 한 몫은 가난한 이웃에게 희사한다. 이러한 3분 희사 방식은 여러 다른 희생의식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이슬람 사회에서 할례의 시기는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아랍사회에서는 작명 의례를 행한 직후인 생후 8일째 할례를 행한다. 그러나 아랍권 일부에서와 비아랍권에서는 생후 40일째 또는 아이가 좀더 성장한 후인 57세때 할례를 행한다. 상류층 자제가 할례할 때는 가진 자의 비용으로 수십명의 고아와 가난한 자의 자식들이 함께 할례를 행하는 것이 미덕으로 되어 있다. 성대한 잔치와 할례복 준비에 많은 경비가 소요되기 때문이다.

 

  성장에 따른 의례

   

아이는 의례적인 무수한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성장해 간다. 첫번째 이가 났을 때, 첫 걸음마, 첫돌 의식 등이 그것이다. 산모는 꾸란의 규정에 따라 만 2년 이상 모유로 양육할 책무를 진다. 건강상의 이유로 수유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남편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런 경우 우유나 분유 대신 유모를 고용한다. 모유의 신성함 때문에 같은 유모의 젖을 빨았던 유아들은 후일 아무런 인척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이 엄격히 금지된다. 유아기의 성장에는 어머니의 역할이 특히 강조된다. 이슬람은 자신의 자식을 샤하다를 암송할 수 있는 나이까지 잘 키워 부모에게 복종하고 신을 경외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든 어머니에게 천국을 보장한다.

 

  자식이 갖는 소중함과 의미가 크면 클수록 부모는 질병을 유도하는 사악한 기운이나 흉안(凶眼)의 해악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하고자 미신에 가까운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한다.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아이의 몰골을 지저분하게 하거나 현란한 장식을 달아 흉안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다. 터키 동부나 쿠웨이트·시리아 일부 지역에서는 남아를 여장(女裝)시켜 악귀의 눈을 피하기도 한다. 가난하고 지저분한 아이보다 부유층 자제가, 여아보다 남아가 더욱 흉안의 시기를 받기 쉽다고 믿기 때문에 왕족이나 상류층 자제는 거의 취학 연령에 도달할 때까지 하렘에 칩거하면서 외부인과의 접촉을 제한했다.

 

  할례 이후부터는 아버지에게 절대적 복종과 존경심의 바탕에서 예절, 사회의 관습과 관례, 종교적 지식 등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게 된다. 이때 쉐이크라는 가정교사를 고용하기도 한다. 말하기 시작할 때 처음 받는 교육은 신앙의 고백, 샤하다를 외우며 무슬림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5세 때부터 세정과 예배의식을 행하고 어머니나 할머니로부터 선조의 영웅담이나 신화적 전설을 전해 듣는다.

   

7세가 되면 남녀가 유별하여 하렘에 함부로 왕래할 수 없으며, 여아는 바깥 출입시 베일을 쓴다. 이때부터 남자는 서당이나 학교에서 꾸란과 하디스를 배우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된다.이에 비해 여아는 교육 혜택을 덜 받는 경우도 있다. 일류 상류층에서는 여교사를 초빙하여 가정에서 글자를 익히고 꾸란 낭송 및 종교적 교육을 받게 하지만, 대부분의 집안에서는 엄격한 통제 속에 수예·방직·카펫 짜기 등의 기술교육을 익히게 한다.

 

  결혼 의례

   

의심할 바 없이 결혼은 모든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로 간주되며 이슬람 세계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결혼 의례는 각 문화권의 전통과 관습 또는 종교에 따라 행하여지는데 이슬람에서의 결혼은 도덕틀의 유지를 통한 사회의 결속과 가족의 연대를 강화하는 기능, 그리고 성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본능을 제도화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슬람권의 혼례가 다른 문화권의 혼례와 확연히 구별되는 것으로는 신분과 직업에 상응하는 중매혼, 일부다처의 허용, 결혼지참금제도, 사촌간 결혼, 남성 위주의 결혼생활 등이 있다.

   

이슬람 전통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적 문제라기보다 가족이나 혈연공동체 모두에게 관련되는 공통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연애결혼은 거의 상상할 수 없다. 남자 1820, 여자1618세의 적령기에 도달하면 흔히 그 마을에서 가장 명망이 높고 평판이 좋은 사람이 중매쟁이가 되어 양가의 사회적 신분, 재산, 직업, 결혼 당사자의 교육 정도나 됨됨이를 고려해 신랑·신부의 혼담을 진행한다. 연애결혼이 허용되지 않는 아랍 전통사회에서 카타바’(중매쟁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사회적 신분이란 그 가계의 혈통이 예언자 무함마드와 관련이 있는지, 종교적 헌신도나 신앙의 정도,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후 몇세대가 지났는지, 재산, 가정의 도덕적 규율상태 등을 살핀다. 쉬아파와는 달리 순니파에서는 남자는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속한 가문의 여자와 결혼할 수 있으나, 여자의 경우에는 자신보다 비천한 가문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일부 지역에서는 유아기에 이미 양가 사이에 약혼을 하는 관례가 강하게 남아 있다. 또 아무런 인척관계가 없더라도 어릴 때 같은 유모의 젖을 공유한 남녀의 결혼은 관습적으로 금지하는 점이 서아시아 사회에서의 젖의 신성함과 관련하여 매우 특이한 점이다.

 

  신랑감은 아버지가, 신부감은 어머니가 고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배우자의 최종 결정권은 아버지가 갖는다. 신부에게 아버지가 없는 경우에는 남자 형제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한다. 여자는 부모가 선택해준 신랑 후보를 거절할 수 있으나, 본인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할 권리는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결혼 후보는 부모나 후견인과 함께 신랑·신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혼례일까지 상대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이 금지되는 근친의 범위는 어머니··여자형제·배다른 누이·숙모·고모·이모·외숙모·조카·질녀·장모·의붓딸·아버지의 다른 부인들·며느리 등이며, 두 자매와의 동시 결혼, 같은 유모의 젖을 공유했던 사람, 노예와의 결혼도 금지된다. 또한 남녀 공히 부부생활을 위협하는 지병이나 신체적 결함이 없어야 하고, 남자는 4명의 아내를 갖지 않은 상태, 여자는 이혼한 후 전남편과의 관계가 청산되고 재혼 금지 기간을 충족한 상태여야 한다. 부족에 따라서는 처가 사망한 경우 처제나 처형과의 결혼이 보편적이고, 형제가 사망하는 경우 형수나 제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수계혼(嫂繼婚) 제도가 성행하기도 한다.

   

종교적인 제한으로는 무슬림 남자는 이교도 여인 중 기독교도나 유대교도와의 결혼이 허용되지만, 무슬림 여자와 이교도 남자의 결혼은 허용되지 않는다. 결혼은 허용되어도 이교도인 아내는 개종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남편의 유산상속권을 갖지 못한다.

   

결혼조건이 충족된 상태에서 쌍방의 합의가 이루어지면 신랑·신부는 보호자와 각각 두사람의 증인이 참석한 가운데 까디(판관)’에 의해 결혼의 합법성이 공표된다. 전통 관습법은 서면양식 없이 판관에 의해 쌍방의 합의가 공동체에 공표됨으로써 효력을 발생했으나, 지금은 여성 보호 차원에서 모든 조건을 세부적으로 명시한 혼인계약서가 작성되어 공개된다. 성혼(成婚)의 절차는 주례인 판관에 의해 결혼계약의 구체적 사실이 확인되고 동의된 다음 결혼의 의미와 이슬람적 가르침에 대한 설법이 있은 후 신랑·신부가 오른손 엄지를 세워 서로 누르며 손수건으로 그 위를 덮는다. 그리고 신랑·신부가 꾸란의 개경장을 함께 낭송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러한 법적 절차와 함께 관습적 절차의 충족도 결혼의 성립에 매우 중요한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부의 처녀성 문제다. 이는 흔히 첫날밤을 지낸 후 하얀 천에 묻은 혈흔을 대중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처녀성이 증명되고 그 결혼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절차로 나타난다. 그러나 요즘은 혈흔을 직접적으로 공개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슬람권의 결혼이 다른 문화권의 결혼과 가장 다른 차이점은 역시 일부다처제다. 이 제도는 남편이 다수의 아내를 공평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는 조건 하에 4명까지 결혼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아랍사회의 권장된 결혼 관습 중 하나는 사촌결혼이다. 사촌 중에서도 부계 사촌(父系四寸), 즉 숙부의 딸을 신부로 맞이한다. 부계 사촌 누이동생에 대한 남자의 권리와 의무는 거의 절대적이어서 본인이 사촌 누이동생과의 결혼 의사를 포기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반면 신랑이 가족들의 압력에 의해 부계 사촌누이와 내키지 않는 결혼을 했을 때는 자신의 의사로 두번째 부인을 얻음으로써 그 보상을 얻기도 한다.

   

사촌결혼 풍습은 크게 가족간 연대의 강화, 상속에 따른 재산권 보호, 결혼 후의 원만한 가족관계의 기대, 과다한 결혼지참금 지불이라는 경제적 압박 해소라는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남녀가 철저히 분리되고 교제가 통제된 사회구조에서 사촌누이는 내외하지 않고 자유로이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근친 이성이라는 현실적 측면도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는 대가로 신부측에 일정한 재화를 지불하는 마흐르제도는 이슬람 이전 아랍사회에서도 잔존하던 유습이다. 애초에 마흐르는 부족이나 가문간 연대 표시를 위한 기능이 강했으나, 이슬람 이후 이 제도는 종교적인 강제규범으로 승화되어 순수하게 이혼이나 재해시에 여성을 위한 최소한의 복지금의 의미로 정착되었다. 따라서 마흐르는 남편과 함께 사는 동안에는 친정에서는 관리하고, 필요시에 여성에게 전달된다. 친정에서는 이 돈을 임의로 처분할 수 없도록 이슬람법으로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이슬람에서의 죽음과 장례

   

이슬람에서의 죽음이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과정으로 간주되어 영원한 삶에 이르는 교량으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본다. , 내세는 이승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차원적 삶의 양태가 보장되는 곳이다.

   

이처럼 이슬람교에서 죽음은 이승과 저승의 매듭이고, 새롭고 영원한 삶에 이르는 교량이다. 따라서 죽은 자를 화장하는 경우 영혼의 안식처가 소멸된다고 보아 매장하여 무덤이라는 영혼의 거주공간을 만들어 주도록 가르친다. 나아가 영혼이 분리된 이후에도 육체와 영혼간의 사랑은 끝나지 않고 그후로도 상당기간 지속된다고 보기 때문에 사체(死體)에 대한 손상이나 무덤 위를 밟고 다니는 행위는 금기시된다. 이런 이유에서 이슬람사회에서의 장례의 특징은 빠른 매장(보통 24시간 이내), 간단하고 엄숙한 상례(喪禮), 내세에 대한 강한 믿음 등으로 규정된다.

   

자신의 죽음을 인지한 자는 세정의식을 행하고 얼굴을 메카 방향으로 향한 상태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샤하다’(신앙고백)를 낭송한다. 그럴 만한 기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가족이나 친지들이 샤하다를 낭송하여 들을 수 있게 한다.

 

 

사자(死者)는 얼굴이나 머리를 메카로 향하게 한 다음 우선 눈을 감기고 입을 다물게 한다. 발목을 묶고 두 손은 가슴 위에 놓는다. 가족이나 무가실’(장의사)이 사체를 향료를 넣은 비눗물로 세정한 후 염()을 한다. 이때 남편이 아내의 시신을 혹은 아내가 남편의 시신을, 세정하는 것은 허용된다. 고인의 머리털과 체모를 깎는 풍습이 일반적이다. 그런 다음 솜으로 입과 귀·코 등을 막으며 염습을 하고 하얀 무명천이나 자루를 이용해 한 겹 또는 여러 겹으로 둘러싼다. 이때는 하나의 천을 사용하며 천을 서로 연결해 쓰지 않는다. 흰색이나 초록색 수의를 입히기도 한다.

  

임종 순간에는 통곡으로 애도가 시작된다. 죽음을 알리기 위해 즉시 부고를 하되, 큰 소리로 울거나 비탄에 젖어 울부짖거나 뺨을 때리고 옷을 찢는 등의 행위는 이슬람 이전의 관습으로 금기시된다. 다만 조용히 흐느끼는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는다.

 

 

장례 절차는 아침에 시신(屍身)이 집을 나설 때 모든 친지와 이웃이 상여꾼이 되어 모스크까지 간다. 가까운 모스크에서 홀수 열을 만들어 보통 낮예배에 이어 장례예배를 마친 다음 장지로 향한다. 상여꾼을 별도로 고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것은 강력한 사회연대 의식의 표현이다. 영구행렬의 맨 앞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샤하다를 읊으며 걸어가고 그 뒤로 죽은 사람의 친구들과 초대된 사람들이 따르며 그 뒤에 까리(꾸란 독경사)들이 장례와 관련된 꾸란 구절들을 낭송하며 따라가고 마지막으로 어린아이들과 관 그리고 곡하는 여자들이 뒤를 따른다.

   

시신이 도착할 때가 되면 이미 무덤은 매장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고, 시신은 관 없이 매장한다. 사람 키 높이로 비교적 깊고 넓게 판 묘실에 얼굴을 메카 방향으로 향하게 안치하고, 하얀 천으로 싼 시신 위에는 아무 것도 덮지 않은 상태에서 공간을 두고 그 위를 큰 돌이나 석판으로 덮는다. 그리고는 흙을 다져 봉분 없이 지표면보다 약간 높게 평분을 만들고 표식을 한다. 비문을 세우기도 하는데, 여자의 경우 남편의 이름 대신 친정 아버지의 이름을 표시한다. 그런 다음 장례행렬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하나씩 묘지 위의 흙을 어루만지며 고인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눈다.

  

화장하지 않고 매장하는 풍습은 내세에서 영혼과 함께 육신도 부활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묘실은 3~4명을 매장할 정도로 넓게 파는데, 한 세대가 지나면 한 무덤에 또 다른 가족을 매장하는 복장(復葬) 관습 때문일 것이다. 묘소에 집을 짓고 비석을 세우는 것은 일반적으로 금지되었는데, 후일 아랍 이외의 지방에서 왕묘나 성자들의 묘소에 대규모 묘당을 짓는 유행이 생겨났다.

  

장례식 당일에는 고인의 집에서 일절 음식을 만들지도, 대접하지도 않는다. 음식은 모두 동네 사람들이 분담하여 만들어 온다. 장례후 첫 3일간 밤새 꾸란을 낭송하는 관습이 일반적이고, 지역에 따라 3일째, 40일째, 1년째 가족들이 고인의 추모집회나 기도 의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매장후 3일째 되는 날 무덤에 가서 꾸란을 외우는 추모의식을 갖기도 한다.

   

다음날은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무덤을 방문하고 그 음식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추모의식을 반복한다. 이러한 행위는 장례후 하루가 되면 영혼은 육체를 완전히 떠나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대기 장소로 이동하지만, 처음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자신의 무덤으로 되돌아온다는 민간신앙 때문이다. 그 영혼들은 주로 금요일 오후예배 이후 무덤으로 돌아와 육체에 접목돼 밤새 지내다 일출과 함께 돌아간다고 믿고 있다.

   

통상 장례식후 40일간 추모의례가 다양한 형태로 지속된다. 유족들은 화려한 차림을 피하면서 주로 금요일에 가족과 친지가 모여 음식을 장만하고 꾸란을 독경하는 주기적인 추모의식을 행한다. 1주기가 돌아올 때까지 가족들은 근신하는 자세로 경건하고 검소한 일상을 보낸다. 추모 기간 동안 집에서 음주가무는 물론 축제, 결혼식 같은 세속적인 모든 즐거움은 유보되며 붉은색 옷이나 진한 화장, 천박한 행동은 삼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여 1주기 추모식을 치름으로써 고인을 위한 일련의 통과의례는 끝난다.

 

이슬람 세계의 축제문화

   

이슬람 세계의 축제와 명절은 아랍 이슬람권이나 비아랍 이슬람권, 순니나 쉬아 등의 종파나 정파에 관계 없이 모두 이슬람력에 따라 정해진다. 나라마다 고유의 국경일이 있으나 모든 무슬림들이 함께하는 휴일과 명절로는 금요일의 집단예배일, 이슬람력 9월 라마단월의 단식이 끝난 후인 101일에 시작되는 단식을 깨뜨리는 축제인이들 피트르축제, 그리고 이슬람력 12월 성지순례를 끝내고 양을 희생시켜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는 축제인 이들 아드하축제가 있다. 특히 위의 두 축제는 종교적 의무의 수행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무슬림들의 사회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 피트르축제는 이슬람의 5대 의무 가운데 하나인 단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 달의 한달간을 종교적 의무의 수행을 위해 단식을 행한다. 라마단 성월의 단식이 끝나면 3일 간의 명절이 이어지는데, 이 축제가 바로 단식을 마치는 것을 축하하는 이들 피트르이다.

   

축제 첫날 무슬림들은 목욕재계하고 가장 좋은 외출복을 찾아 입고 아침 일찍 가까운 모스크로 향한다. 축제 예배에서 설교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준비한 성찬을 들며 단식을 마무리한다. 이 기간중 친척과 친지들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고 선물을 교환하는 방식은 우리의 명절과 너무도 흡사하다. 또 이때 대규모의 귀성이 이루어지고 조상의 묘를 찾아 추모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모든 무슬림은 이 라마단달에 평상시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내며 종교적 수행을 게을리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단식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무슬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또 이슬람으로 맺어진 공동의 유대감과 결속력을 느끼게 된다.‘이들 아드하축제는 이슬람의 한 기둥인 성지순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성지순례는 경제적 능력과 신체적으로 건강한 무슬림이면 남녀를 막론하고 일생에 한 번은 반드시 실행해야 할 의무사항이다.

 

  성지순례는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있는 하람성원에 가서 순례 의식을 행함을 말한다. 성지순례는 이슬람력으로 10월부터 1210일까지 행해지는데 실제 의식은 128~10일 이루어진다. 이 기간 외에 행하는 성지순례는 우무라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의무사항이 아닌 자발적인 종교행위이다.성지순례를 통하여 세계의 모든 무슬림들은 형제애와 평등사상의 실현을 목격하게 된다. 각 국가, 사회 각계 각층에서 창조주의 부름에 응하여 성지순례에 나선 무슬림들은 같은 색깔과 같은 형태의 의복을 입고 같은 규정, 같은 예식, 같은 시간, 같은 목적을 하나님께 간구한다. 이 기간에는 빈부의 구별, 상하의 구별, 지위의 구별 없는 보편성과 평등사상이 고취되며 서로를 함께 느끼는 형제애가 조성된다.

   

성지순례달인 핫즈달 10일에 순례객은 메카에서 그리고 세계의 모든 무슬림들은 가정에서 양이나 다른 동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희생시키게 된다. 이 날을 이들 아드하라 하며 무슬림들에게 가장 큰 축제의 날이 된다. 이 축제를 통해 무슬림들은 형제애와 공동체적 연대감, 평등사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슬람권의 양 축제는 종교적, 사회적인 면에서 이슬람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라마단월의 단식기간을 맞이하여 대부분의 관공서나 직장의 근무시간이 단축됨에 따라 생산량도 줄어든다. 이와 반대로 가족과 친척들 간의 빈번한 왕래와 식사로 인해 소비는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 소비와 생산의 불균형이 물가상승이라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렇게 오른 물가는 라마단월이 끝난 후 예전의 물가로 다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상승한 상태로 계속 유지되기 때문에 라마단달의 물가상승률이 이슬람국가에서의 1년간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척도다.

 

 

이들 아드하축제는 성지순례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한 희생의 재물로 양을 잡아 바친 것을 본받아 모든 성인 남자 무슬림들은 각자 양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게 된다. 따라서 이슬람국가에서 축제에 소요되는 양의 수는 실로 엄청나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 축제를 통하여 농촌경제는 큰 활력을 얻게 된다는 점이다. 매년 한차례에 걸쳐 도시의 돈이 농촌으로 유입되며, 농촌은 이 시점을 기준으로 1년간의 경제생활을 계획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도시와 농촌간의 경제적 교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손님 접대문화

 

 

이슬람에서는 손님이 방문했을 때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대접하는 것을 무슬림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랍 유목민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으로, 유목민들의 손님에 대한 환대는 숭고한 덕목으로 간주되며 극진한 환대를 베푸는 것이 자신의 품격과 위신과 명예를 높인다고 생각한다. 환대의 관습은 사막이라는 절박한 환경에서 누구나 길을 잃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될 때를 대비해 길 잃은 자에게 환대를 베풀어 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재앙을 피해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

 

 

환대의 규율에 따라 도망자라 할지라도 손님이 되면 주인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를 지켜 주어야 한다. 주인은 객을 맞이하여 그의 체력 회복을 돕고 보호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아랍인들의 집이나 가게 앞에는 물이 가득 든 항아리와 컵을 놓아두어 목마른 자들로 하여금 마시게 하는데, 이는 이러한 손님 접대문화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환대의 관습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전통으로 유지돼 친지나 친구 간의 상호방문이 매우 빈번하고 정해진 약속 없이도 비교적 자유로이 이루어진다. 찾아온 손님에게 주인은 최선을 다해 환대하며 자신이 급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손님에게 불쾌한 기분을 주지 않기 위해 손님과의 시간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이러한 손님 환대에 대한 관습은 집의 구조에서도 잘 나타난다. 무슬림 가정의 대부분은 커다란 홀을 가지고 있다. 이 홀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것으로써 가족들의 방보다 우선하여 비중을 두고 있다.

 

 

손님 접대문화는 타인에게 물질을 베푸는 관습을 낳게 되었는데, 흔히 사다까로 불리는 헌금은 무슬림들에게 흔한 일이며 길거리나 사원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또한 결혼·장례·할례·라마단 때의 식사시간, 그리고 희생제 등 여러 행사를 맞이하여 주인이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타인에게 물질을 베푸는 관대함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아직까지 이슬람사회가 부의 불균형한 분배가 만연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제스처 문화

 

 

무슬림들은 받은 인사말과 같거나 더 좋게, 또는 더 길게 답하여 성의껏 인사를 나눈다. 인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답하는 것을 큰 미덕으로 여기므로 상대방의 첫 인사에 답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임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한 인사 말고도 무슬림들은 제스처를 통한 인사를 자주 하는데 그들과 빠른 시간 안에 거리감을 줄이기 위해 이 제스처를 이용한 인사법은 매우 유용하다. 인사법은 문화권마다 다양한데 아랍인들의 인사법은 동작이 큰 것이 특징이다. 오랜만에 남자 친구나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는 껴안고 양 볼에 입을 맞춘다. 이러한 제스처는 친밀감을 표시하는 인사법이다.

 

 

또한 무슬림들은 대화중에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에 관한 표시를 나타내려고 할 때가 많다. 특히 외국인과 이야기할 때는 자신의 생각을 인상지우려고 노력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큰 목소리로 말하며 크고 과장된 몸짓을 사용한다. 또한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을 주시하거나 상대방의 어깨를 두드리며 팔을 잡거나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대화 상대와 몸이 접촉되기를 원한다.

 

 

아랍인은 한국인들과 달리 허리를 굽히거나 머리를 굽혀 인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랍인들의 종교적 배경에서 관습화된 것으로, 하나님 외에는 허리나 머리를 굽히거나 엎드려 절하지 않는다. 또 아랍인에게 왼손을 내밀어서는 안 된다.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서는 오른쪽은 선과 행운, 왼쪽은 악과 불행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있다.

 

 

만약 왼손을 내밀면 그것은 당신의 눈은 사시가 된다는 불길한 뜻을 전하는 것이므로 삼가야 한다. 이와 더불어 음식을 먹거나 마실 때, 선물을 주고받을 때 등 좋은 일일 때는 오른손을 사용하고, 소변이나 대변을 마친 후 그곳을 청결히 할 때나 코를 풀 때 등 더러운 일일 때는 왼손을 사용한다. 따라서 인사할 때는 반드시 오른손을 사용해야만 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1. 이슬람(Islam)이란 무슨 뜻인가?

신의 뜻에 절대 복종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무슬림 (복종자란 의미로 이슬람교도를 통칭)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2. 알라(Allah)는 무슨 의미인가? 

 
유일한 창조자라는 뜻이며 아랍어의 중성(中性) 보통명사. ‘알라신(神)’이라고 부르면 동어반복(同語反復)이다. 
  
3. 이슬람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역사적 실체로서 이슬람의 원년(元年)은 무하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해(헤지라) 신앙공동체를 만든 622년이다. 무하마드는 610년에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 
  
4. 흔히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이슬람은 어떤가? 
평화의 종교라 할 수 있다. 이슬람의 어원인 '살라미(salami)'는 평화란 뜻이다. 
  
5. 무하마드는 어떤 인물인가? 
서기 570년쯤 아라비아의 꾸라이쉬족(族)에서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다. 어머니도 6세 때 죽었다. 삼촌 집에서 양육됐고 25세 때 40세 부자 과부 카디자와 결혼했다. 40세부터 알라의 계시를 받아 포교활동을 하다가 632년에 숨졌다. 
  
6. 이슬람의 예언자(預言者)란 무슨 뜻인가? 
알라의 말씀을 인간에게 설명하고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이슬람에선 모두 12만4000명의 예언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중 28명이 코란에 기록되어 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의 성경(聖經) 인물과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무하마드가 주요 예언자다. 
  
7. 헤지라(Hijra)란 어떤 것인가? 
무하마드가 지역 부족들의 탄압을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추종자 70여명을 데리고 622년에 이주한 사건으로 ‘성스러운 이주’를 뜻한다. 
  
8. 무하마드는 메디나에서 움마(Ummah)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무슨 의미인가? 
무하마드가 신도들을 모아 만든 형제애적인 신앙공동체. 그후 이슬람 메시지를 전파하는 사명을 지닌 신도들의 공동체란 의미로 움마란 단어가 사용됐다. 
  
9. 무하마드는 부인을 몇 명이나 두었나? 
모두 11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4명 이상은 두지 않았다. 코란의 규칙을 지킨 것이었다. 
  
10. 무하마드의 후계자라는 칼리프는 어떻게 선출되었나? 
무하마드는 아들이 없었고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후계자는 신도들이 협의해 투표로 선출했다. 제1대 칼리프는 무하마드의 동료이자 장인이었던 아부 바크르였다. 
  
11. 코란은 언제 완성됐으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무하마드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받은 계시를 그의 제자들이 모아 644~656년에 완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두 114장으로 되어 있으며 각 장을 수라라고 한다. 알라가 1인칭으로 말하는 형식을 취했다. 
  
12. 코란은 왜 아랍어로만 읽어야 한다고 하는가? 
알라가 내려준 언어인 아랍어만이 가장 아름답고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고 본다. 
  
13. 하디스(Hadith)는 무엇인가? 
무하마드의 언행 및 전승을 기록한 책으로 종교예식과 일상생활 세칙을 모두 담고 있다. 
  
14. 술탄은 무엇인가? 
칼리프의 위임으로 이슬람 세계의 일부 내지 전역을 지배하는 세속적 권력자의 칭호. 
  
15. 이슬람은 특히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보나? 
이슬람은 예수(이사라고 부름)가 훌륭한 예언자지만 신성(神性)은 없으며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본다.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16. 교리적으로 보아 이슬람은 유태교 및 기독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무하마드는 초기 시리아와 아라비아 쪽으로 흘러나온 기독교 이단인 단성론(單性論)과 유태교 이단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쪽 교리를 채택했다. 상당수 주변부 교리나 풍습도 유태교와 기독교에서 가져간 것으로 본다. 
17. 기독교에서는 이슬람을 어떻게 보는가? 
사이비 기독교 종파가 아랍 토착종교와 결합하여 발생한 전혀 별개 종교로 본다. '알라'는 아라비아 부족의 월신(月神)에서 유래됐으며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다르다. 
  
18. 예루살렘과 이슬람의 관계는? 
이슬람의 3대 성지(聖地)중 하나. 코란엔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단지 무하마드가 예루살렘 성전산에서 천상(天上)여행을 다녀왔다는 전설에 따라 성전산에 바위사원이 세워졌다. 
  
19. 이슬람에도 원죄(原罪)의 개념이 있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란 개념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죄없는 선한 상태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20. 이슬람의 종파에는 어떤 것이 있나? 
수니(Sunni)파가 다수파로 초기 칼리프들을 무하마드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한다. 아라비아, 이집트, 터키 등에 널리 퍼져 있다. 시아(Shiite)파는 2대 종파로 암살당한 무하마드의 사위 알리를 정통 후계자로 본다. 이란이 본거지이고 이라크, 시리아 등에 분포한다. 이밖에 타 종교와 혼합한 드루즈파, 시아파에서 갈라져 나온 이스마일파 등이 있다. 
  
21. 이슬람의 율법이라는 '샤리아'는 어떤 것인가? 
법적이면서도 종교적인 내용이 많아 결혼이나 식사방법, 기도 방법이나 기도 시기 같은 주제를 담고 있다. 
  
22. 이슬람의 율법은 법을 공개 집행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보복법 집행을 한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정의를 실천한다는 이유로 전통적으로 그렇게 실시해 왔으나 최근에는 종파와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23. 이슬람 사회에서 일반법률은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나? 
사우디 아라비아, 수단, 이란 등에선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가 헌법이다. 하지만 터키를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일부 이슬람 제국에서는 샤리아를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폐지하고 유럽이나 다른 국가의 법 제도를 채택했다. 
  
24. 이슬람교도(무슬림)들에게는 '육신(六信)'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것인가? 
유일신이자 창조주인 알라를 믿는다. 예언자들을 믿는다. 거룩한 책들(코란 포함)을 믿는다. 천사들을 믿는다. 심판과 부활을 믿는다. 알라의 법칙과 정명론(定命論)을 믿는다. 
  
25. 무슬림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5가지 기본적인 의무는 무엇인가? 
'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무하마드는 알라의 사도다'라는 신앙고백(샤하다), 하루 다섯번의 기도(사라트), 구제(자카트), 메카 순례(하지), 라마단 금식(禁食)(사움)이다. 시아파는 여기에 성전(聖戰)(지하드)을 추가한다. 
  
26. 이슬람교도들이 예배를 할 때 메카를 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하마드는 처음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라고 했다가 유태인과 기독교인들이 '구약도 제대로 모른다'며 자신을 비웃자 630년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을 기도 방향으로 정했다. 
  
27. 예배는 꼭 정해진 시간에 보아야 하나? 
태양의 위치에 따르도록 돼 있기에 정확한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28. 모스크는 어떤 곳인가? 
아랍어로 '엎드리는 곳'이란 뜻의 마스지드에서 나온 말로 이슬람의 예배당을 일컫는다. 
  
29.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엔 반드시 몸을 씻는 이유는? 
예배 전 몸을 씻는 것을 '우두(wudu)'라 하는데, 알라에 대한 예의 차원이기도 하지만 코란에도 '청결하지 않은 몸으로 행하는 예배는 받지 않겠다'고 되어 있다. 
  
30. 모스크에 딸려 있는 미나렛의 역할은? 
예배시간을 육성으로 알리는 역할(아잔ㆍadhan)을 하며, 이를 행하는 사람은 '무에진(muezzin)'이라 한다. 
  
31. 무에진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나? 
크고 청아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으면 누구나 될 수 있다. 
  
32. 모스크 안에서도 남녀는 따로 앉아 예배를 보나? 
남녀가 따로 앉되 남자가 앞에 앉는다. 좁은 공간에서 생길 수 있는 불편한 점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33. 이슬람에는 성직자를 두지 않는다고 하는데, 탈레반의 최고지도자인 오마르를 '물라'라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신과 인간 사이에 중매자를 두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중매자만 보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이슬람에선 성직자가 없다. 물라는 종교지도자, 율법학자란 뜻이다. 
  
34. 이슬람을 흔히 정교(政敎)일치 종교라고 하는데, 왜 그러한가? 
코란은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생활 전반을 망라하기에 성속(聖俗)을 구별하지 않는다. 성과 속을 구별할 경우 정신생활이 물질생활에 종속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35. 이슬람에서 모든 사람은 알라 앞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슬람은 지위나, 명성, 부와 같은 세속적인 것들이 알라와의 만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36. 이슬람 사회의 '슈라(shura)'는 무엇인가? 
'협의'를 뜻하는 말. 무하마드도 무슨 결정을 할 때는 슈라를 거쳤다. 지금도 쿠웨이트, 아프간 등 이슬람국가 중에는 슈라를 국회와 같은 기구로 활용하고 있다. 
  
37. 이슬람 종교학교(마드라사)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이슬람의 고등교육 시설을 말하나 전통적으로는 '울라마(율법사)' 양성이 주목적이다. 
  
38. 이슬람이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유는? 
알라가 유일신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가 바로 우상숭배 금지이기 때문이다. 
  
39. 이슬람교도들은 금요일에 예배를 보는데 왜 그런가? 
이슬람에선 금요일에 태양이 떠올랐고 아담이 창조됐으며 심판이 일어나기 때문에 금요일을 가장 훌륭한 날로 여긴다. 
  
40. 지금도 아랍지역에서 기독교가 활동하고 있나? 
일부 아랍지역에서 극소수 기독교 신도가 있으나 계속되는 탄압과 사회적 소외로 제대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마저 대개 단성론자나 정교회(正敎會) 계통으로 서방 기독교와는 차이가 난다. 
  
41. 무슬림들이 많이 쓰는 '인샬라'는 무슨 뜻인가? 
'신의 뜻에 따라'라는 아랍어로 무슬림들이 일상 생활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한다. 
  
42. 이슬람에선 하루를 무엇으로 기준하여 계산하는가? 
유태인과 같이 하루 해가 지면 새로운 날로 간주하고 아랍쪽도 그런 관행이 있어 결혼식 등 중요 행사를 밤에 열곤 했지만 지금은 대체로 하루 계산이 서구와 비슷해졌다. 
  
43. 라마단은 무엇이고 왜 단식(斷食)을 규정하고 있나? 
무하마드가 알라의 계시를 받은 달(대략 음력 9월경)을 라마단으로 정하고 단식을 한다. 초기엔 24시간이었으나 10일로, 다시 한달로 연장됐다. 올해 라마단은 11월 17일에 시작한다. 단식으로 지옥의 문이 닫히고 천국의 문이 열린다며 속죄의 의미를 강조한다. 
  
44. 라마단 기간 중에 이슬람교도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해가 떠 있는 동안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면 안된다. 부부관계를 해도 안되며 남을 비방하는 말을 삼가야 하고 향수 냄새를 맡거나 화를 내서도 안된다. 다만 13세 미만의 어린이, 노약자들, 여행자, 생리 중인 여자 등은 단식이 면제된다. 
  
45. 무슬림들은 반드시 메카순례를 해야만 하나? 
모든 무슬림들은 자유로운 성인으로 온전하고 건강하며 적당한 재산이 있다면, 그리고 순례하는 동안 가족의 생계에 지장이 없다면 일생에 한번 메카 순례를 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에서 예외이면 면제가 되기도 하고 대리인을 보낼 수도 있다. 기업체에는 메카 순례를 위해 회사가 돈을 적립해주기도 한다. 
  
46. 메카의 카바 신전이란 어떤 곳인가? 
원래 아라비아 다신교(多神敎)의 우상숭배 장소였으나 무하마드가 '아브라함과 그의 서자인 이스마엘이 알라에게 예배드린 곳'이라며 이곳을 성지(聖地)로 삼았다. 카바란 입방체란 뜻. 
  
47. 성지순례시 메카에서 하는 의식으로는 어떤 것이 있나? 
보통 카바 신전을 7바퀴 돌고 내부의 검은 돌에 키스한 뒤 '잠잠'이란 우물 주변에 있는 99개 예언자들 무덤과 성자들의 무덤을 방문한다. 그리고 이블리스(사탄)라고 하는 돌기둥에 돌을 던지며 코란 구절을 외운다. 또 메카에서 25㎞ 떨어진 아라파트 언덕을 오르고 6㎞ 떨어진 미나에서 양과 낙타로 희생제사를 드린다. 
  
48. 이스마엘과 이삭은 모두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서로 어떤 관계인가?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자 여종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 나중에 본처인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이 이삭이다. 서자(庶子)인 이스마엘은 쫓겨나‘아랍인의 조상’이 됐고, 적자(嫡子)인 이삭은 유태인의 조상이 됐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약속의 아들’로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49. 이슬람교도들은 왜 턱수염과 구렛나루를 기르나? 
예언자 무하마드가 턱수염을 길게 길렀다 하여 그에 따르려는 행동인데, 여기에 유목민 고유의 연장자 우대 전통과 어울려 더욱 확산됐다. 
  
50. 이슬람권 국가의 여성들이 집 밖에 나설 때마다 '차도르'(머리를 덮어싸는 보자기로 이란에서는 ‘히잡’이라고 함)를 쓰는 이유는? 
남녀가 상대의 육체(겉모습)만 보고 인격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의미에서 시작됐다. 남자의 경우도 맨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공중목욕탕에서도 꼭 팬티를 입는다. 
  
51. 흔히 성전(聖戰)으로 일컬어지는 지하드(jihad)는 무엇을 의미하나. 
지하드는 외부의 공격에 대한 항거 등 자기 방어의 목적을 갖고 있다. 또 내부적으로도 부패에 찌든 사회, 도덕적으로 황폐해져 가는 자신을 지키는 일도 이에 포함된다. 지하드가 악용 내지 남용될 소지가 있으나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52. 아프간 여성들이 외출할 때면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는 '부르카'는 어떻게 생겼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감싼다. 내놓는 것은 손 뿐인데 그것마저 망사로 쳐 외부에선 누구인지를 알아 볼 수 없다. 
  
53. 이슬람 지역 여성들은 어릴 때 할례를 해야 한다는데, 그 이유는? 
할례란 성기의 일부를 도려내는 작업으로 그걸 하면 성에 대한 욕구가 절제된다고 한다. 아랍이나 아프리카의 토착 풍습. 순결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여성에게만 요구한다는 차원에선 여성 차별이라 말할 수 있다. 
  
54. 이슬람 사회에는 명예살인이라는 것도 있다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나? 
여성이 혼전에 순결을 잃는다거나 결혼 후에 간통을 하게 되면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 해서 그 아버지나 오빠가 당사자를 죽이거나 병신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명예살인이라 부른다. 따라서 명예를 더럽힌 남자도 이 사회에선 발을 붙이지 못한다. 
  
55. 이슬람 지역 여성들이 손발을 치장하는 헤나(henna)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헤나란 꽃가루와 나뭇가루, 식물성 기름 등을 한데 섞어 만든 검은 색 계통의 안료를 말하는데 이를 이용해 아랍, 인도 여성들은 손등과 손바닥, 발등에 식물의 줄기나 잎, 나비 등을 예쁘게 그려 치장한다. 남성의 시선을 끌기 위해생겨난 풍습. 
  
56. 아랍지역에도 찻집이 있나? 
물론 있다. 서양의 '오픈 카페'처럼 주로 길거리에 있는데, 남성들만 출입한다. 여기서 물담배, 체스 등을 즐긴다. 
  
57. 아랍과 이슬람, 중동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아랍은 인종, 언어 등 문화적인 요소를 일컫고, 이슬람은 알라를 믿는 종교를 말하며, 중동은 지리적 개념으로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지칭한다. 
  
58. 중동 평화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팔레스타인은 어디인가? 
현재 이스라엘 영토 및 점령지역인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합친 지역. 
  
59.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종종 벌어지는 인티파다(Intifada)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에 저항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땅을 되찾기 위해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벌이는 무차별 과격 무장 봉기를 뜻한다. 
  
60. 아프간의 실질적인 정부인 탈레반은 어떤 조직인가? 
구도자란 뜻. 이슬람학교에서 코란을 공부하는 학생을 가리키기도 한다. 1994년 10월 동남부 칸다하르의 이슬람학교 학생운동가들이 세웠다. 96년 9월 이슬람 조직간의 내전에서 승리, 국토의 90%를 장악했다. 종파간 자치형식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지만 UN은 합법적인 정부로 간주하지 않는다. 
  
61. 이슬람의 교리에 폭력을 인정하거나 찬미하는 부분이 있나? 
공식적으로 폭력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다만 원리주의자들은 '지하드(聖戰)'를 언급한 코란 구절들을 자주 동원한다. 하디스에는 지하드가 두 차원에서 진행되는데 첫째 순수한 포교활동이며 둘째 신앙의 방어로 필요하다면 물리적인 방법으로 수행하게 된다고 밝혔다. 
  
62. 이슬람 부흥운동은 무엇인가? 
이슬람의 정신적 쇠퇴를 비판하고 무하마드의 '움마 정신', 즉 순수 이슬람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다. 반서구적, 반체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 
  
63. 이슬람 원리주의 또는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현재의 사우디 왕국을 세운 와하브의 와하비주의(主義)가 이슬람 원리주의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다. 사우디는 친(親)서방적이지만 국민들은 와하비주의에 기반한 엄숙주의, 배타주의, 그리고 혁신을 반대하는 극도의 보수주의를 지킨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샤리아가 지배하는 사회를 목표로 한다. 이란이나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이 사례가 될 수 있다. 
  
64. 원리주의자들은 왜 테러를 일삼고, 서구에 증오감을 갖고 있나? 
서구의 물질주의가 이슬람 정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서구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 특히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이를 분쇄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테러리즘이 증폭됐다. 
  
65. 이슬람교에서는 원리주의 테러리스트들을 용인하고 있는가? 
테러리스트로 이슬람의 명예가 실추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반 이슬람 사회에서는 지하드와 관련해 그들이 공개적 또는 잠재적으로 존경받기도 한다. 
  
66. 이란에 이슬람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부패한 친미(親美) 팔레비 정권이 이란을 서구화하는 과정에서 이슬람의 전통과 정신이 훼손되자 호메이니를 비롯한 물라(율법학자)들이 왕정을 끈질기게 비판, 왕정 타도로 이어졌다. 
  
67. 이슬람권 '반미(反美)'의 뿌리는? 
터키의 경우 근대화와 세속화에 어느 정도 성공해 세계체제에 순조롭게 편입했다. 하지만 나머지 중동 국가들은 이교도(異敎徒) 국가인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끌려 다니는 것이 못마땅한 데다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 페르시아만 전쟁 등으로 반미운동이 확산됐다. 
  
68. 서구의 이슬람공포증은? 
이슬람공포증(Islamophobia)은 유럽에 이슬람이 전파되기 이전부터 형성되었다는 게 정설. 강한 군대를 몰고 다니며 ‘코란이냐 칼이냐’를 외치는 이슬람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적대의식과 두려움이 생겨났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11세기 십자군이 일어났다. 
  
69. 이슬람 무장단체에는 어느 지역에 어떤 것이 있나. 
1928년 이집트에서 시작한 무슬림형제단이 본격적인 불을 지폈다. 현재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이집트의 자마아트 이슬라미야, 알제리의 무장무슬림그룹, 여러 나라에 걸쳐 있는 빈 라덴의 알 카에다 등이 있다. 
  
70. 이슬람에서 음주와 돼지고기의 식용을 금지하는 이유는? 
음주는 정신을 흐리게 한다는 이유로 이집트를 제외한 이슬람 국가에서 금지된다. 돼지고기는 불결한 음식으로 보고 있으며 다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허용된다. 
  
71. 양(羊)은 어떤 방식으로 잡는가? 
이슬람법에 따라서 희생제를 맡는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고 '알라의 이름으로' '알라는 위대하다'라고 말한 뒤 단숨에 양의 목을 자른다. 피는 동맥을 통해 완전히 뺀 다음 고기를 도려낸다. 
  
72. 이슬람권에서 술을 마실수 있나? 
음주는 코란에선 우상숭배·도박과 함께 금지하고 있는 사항 가운데 하나다. 마실 수도 없고 제조할 수도 없다. 
  
73. 이슬람에서는 남자에게 부인을 4명까지 둘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데,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인가? 왜 여성은 4명의 남편을 둘 수 없나? 
코란의 규정에 의해 경제적 능력과 부인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는 자에 한해서만 4명의 부인을 둘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복수의 남편을 거느릴 수 없다. 여자는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 보아 그랬을 것이다. 
  
74.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는 신부가 될 여자에게 마흘이라는 것을 지불한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의미인가? 
신랑이 결혼과 함께 신부집에 지불하는 돈으로 남자의 경제적 능력을 증명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 돈은 이혼을 하더라도 여성의 몫이다. 
  
75. 코란에서 별도로 금지하고 있는 결혼도 있나? 
어머니, 여형제,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이모, 고모, 형제 자매의 여아, 유모,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여자, 장모 등과는 결혼할 수 없다. 
  
76. 이슬람사회에서도 이혼은 가능한가? 
남자는 언제든지 이혼 청구가 가능하지만 여자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다. 
  
77. 이슬람사회에도 창녀가 있나? 
순결과 가정을 중시하는 이슬람이라 원칙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주 은밀하게 존재한다. 
  
78. 이슬람의 남녀 분리 사회생활은? 
원칙적으로 남녀의 공간이 분리돼 있다. 공공장소에서는 물론 집안에서도 그러하다. 사람과의 접촉이 많은 직종은 그래서 남자들이 한다. 그러나 서구 문물의 영향으로 그러한 전통이 허물어지고 있다. 
  
79. 왜 이슬람 국가에서는 손으로 밥을 먹는가? 
이슬람만의 습관은 아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도 그러하다. 손은 남의 것과 섞일 염려가 없어 가장 위생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80. 왜 무슬림들은 오른손을 신성시하나? 
하늘에서 알라의 오른쪽이 왼쪽보다 높은 곳이며, 순교하면 바로 그 오른쪽에 앉을 수 있다고 믿는다. 
  
81. 아랍인들의 주식은 무엇인가? 
'쿠브즈'라 부르는 우리의 빈대떡 크기 만한 식빵이다. 
  
82. 이슬람 지역에도 대중목욕탕이 있나? 
큰 도시의 시장에는 반드시 '함맘(hammam)'이라 부르는 대중목욕탕이 있다. 둥근 천장에는 구멍이 뻥뻥 뚫려 있고 바닥은 대리석이다. 그러나 욕조는 없다. 물을 수조에서 받아 씻을 뿐인데, 때를 벗기지 않는다. 팬티 차림으로 목욕한다. 
  
83. 이슬람 전통 도시를 흔히 메디나(medina)라 부르는데, 어떤 특성을 갖고 있나?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에 모스크와 마드라사(종교학교), 함맘(대중목욕탕), 수크(시장) 등이 들어서 있다. 길가의 집은 대개 가게를 겸한다. 메디나의 외곽은 외부 공격에 대비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84. 이슬람 지역의 시장은 어떠한가? 
수크(souq, 페르시아나 터키에선 바자)라고 하는데, 없는 게 없다. 매력은 흥정에 있다. 따뜻한 정이 오고 가는 매우 인간적인 만남의 공간이다. 
  
85. 유태인, 화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상인'이라고 하는 아랍인들의 상술은 어떠한가? 
돈을 버는 일에 종사하나 돈버는 데만 급급하지 않는다. 마케팅에 열을 올리지 않으며 대체로 향락산업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86. 이슬람교는 초기부터 포교가 빨랐다. 그 비결은? 
우선 이들에 맞설 만한 세력이 없었고 단순한 교리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데다 종교적 열정이 매우 강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87. 아라베스크 문양이란 어떤 것인가? 
살아 있는 것들은 그리지 말라는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식물의 형상, 기하학적 도형, 코란의 서체(書體) 등을 이용하여 문양을 그렸는데 이를 아라베스크 문양이라 부른다. 
  
88. 모스크가 대체로 돔 구조로 되어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반구형(半球形)의 돔은 천상의 하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알라에 바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89. 이슬람교도들은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짓나? 
아이가 태어난 뒤 7일째 되는 날에 일가 친지들을 모아놓고 코란을 낭송한 다음 축하연을 베푼다. 이름은 맨 앞쪽이 그 아이 이름이고 뒤로 갈수록 먼 조상의 이름이나, 이름의 길이는 가문에 따라 다르다. 
  
90. 이슬람의 장례는 어떠한가? 
유족들은 사자를 위해 매장하나 대개의 경우 묘는 작게 만든다. 장례식은 모스크에서 치른다. 
  
91. 이슬람에선 3개의 시계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건 무슨 뜻인가? 
그들은 원래 헤지라 역(曆)을 쓴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선 서력을 무시할 수 없게 돼 두 개의 시계가 필요하다. 여기에 일출과 일몰에 의해 시간이 결정되는 예배 때문에 또하나가 필요하다. 
  
92. 이슬람교도들은 금요일에는 무엇을 하고 지내나? 
금요일은 이들에겐 안식일이다.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게문도 닫는다. 모스크를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남는 시간은 코란을 읽으며 하루를 지낸다. 
  
93. 물에 대한 특별한 원칙 같은 것이 있나? 
물은 알라가 준 것으로 개인이 독점할 수 없으며 누구나 마실 수 있도록 청결하게 이용해야 한다. 도시의 길거리에 설치된 물독의 물도 절대 헛되이 쓰지 않는다. 
  
94. 이슬람교도의 숫자는 어느 정도인가? 
세계 180여 개국에 12억명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무슬림인 국가 수만도 55개나 된다. 
  
95. 현재 서구에서도 이슬람은 포교되고 있는가? 
아랍 및 아프리카인들의 유럽 또는 미국으로의 이주에 따라 서구에서도 이슬람교도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인구 5800만의 프랑스의 경우, 개신교도가 70만명인 데 비해 이슬람교도는 300만명이나 된다. 
  
96. 한국과 이슬람 지역은 언제 어떻게 교류하기 시작했나? 
이슬람과 우리와의 교류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9세기 때의 아랍측 기록에 신라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데다 서역인이라 부르는 석상이 신라인들에 의해 세워지기도 했다. 교역에 따른 인적 교류인 것으로 보인다. 
  
97. 현재 한국의 이슬람교 사원과 신도는 어느 정도인가. 언제 들어왔나? 
6ㆍ25 때 터키군의 파병으로 이슬람이 우리에게 다시 알려졌는데, 최초의 모스크는 오일쇼크 때인 1976년 서울 이태원에 세워졌다. 현재는 전국 5곳에 사원이 있으며, 신도는 주로 이슬람국가에서 일자리를 찾아 온 근로자들이다. 
  
98. 현재 한국에서 이슬람교 포교활동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나? 
적극적인 포교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이슬람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99. 한국에서도 이슬람 또는 아랍음식을 맛볼 수 있나? 
서울 이태원동의 해밀튼호텔과 중앙성원 주위에서 아랍·인도음식을 즐길 수 있다. 차와 향료 등도 구할 수 있다. 
  
100. 덕수 장씨가 아랍인의 피를 물려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13세기 원나라 제국공주의 시종관으로 고려에 와서 높은 벼슬에 올랐던 아랍인 삼가(三哥)가 고려 여인과 결혼하여 한국사회에 동화되었는데, 덕수 장(張)씨가 바로 그 후예라고 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향후 5-7년 후면 세계1위 종교는 ‘회교’

미주회교도 10만(1970년)에서 900만명(2008년)으로 급증
 
 
미래의 세계는 회교가 지배할 것이라는 추산과 우려가 나왔다. 세계가 온통 바뀌면서 인구학적으로도 변하고 있어 우리의 자녀가 대물림할 시대는 오늘날과는 엄청 다를 것이라는 전제 아래, 이를 산정해 본 스테이시 데임스의 충격적인 분석 평가를 뜯어본다.

한 문화가 25년간 종속하는 데는 적어도 1가족당 2.11명의 자녀가 필요하다는 것이 연구 결과이다. 1.9명으로 문화가 반전/회복된 예가 없고 1.3명으로는 불가능하다.

문화 개조엔 80-100년이 걸린다. 만약 2쌍의 조부모 세대가 각 하나씩의 자녀를 낳아 서로 결혼시킨 차세대가 또 다시 한 자녀만 출산한다면, 손자/손녀세대는 조부모 세대의 4분의1규모로 축소됐다는 뜻이다. 만약 2006년에 1백만 명의 아기가 태어났다면, 2026년에 성인 200만명을 갖기가 힘들다.

 

인구가 줄어들면 문화도 위축된다.

지난 2007년 유럽 각국 출산율은 프랑스 1.8, 영국 1.6, 그리스/독일 1.3, 이탈리아 1.2, 스페인 1.1 등.

유럽연합 31개국들의 평균 출산율은 겨우 1.38이었다.

역사적으로 이 상태로는 반전이 불가능하며, 현재 모습대로의 유럽이 존속할 기간은 불과 6년이다.

그런데도 유럽 인구가 감소하지 않는 이유는 주로 회교계 이민자들 때문이다.

1990년 이래 유럽 인구 증가의 90%는 이들의 몫이었다.

전술한 대로 프랑스 출산율은 (가족당)1.8인데 프랑스 회교이민자들의 출산율은 아이러니하게도 숫자를 뒤집은 8.1이다!

 

세계에서 가장 성당이 많은 곳의 하나였던 남부 프랑스에 이제는 모스크가 더 많다.

이곳 20세 이하 인구중 30%는 회교도이며, 니스/마르세이유/파리 등 대도시에서는 45%이상이다.

2027년에는 프랑스 인구의 5분의1이 무슬림이 된다.

앞으로 39년만 있으면 프랑스는 회교 공화국이 된다!

영국의 회교 인구는 지난 30년간 8만2천에서 250만으로 30배 급증했다.

모스크 수는 약 1천개. 상당수는 옛 교회당들이다.

 

네덜란드의 경우 현재 신생아들의 50%는

무슬림 자녀이며 15년내로 인구 절반은 무슬림이 된다.러시아엔 2천300만 무슬림이 있어 인구 5분의1을 차지한다.

러시아 군대의 40%는 곧 회교도로 구성된다.

 

벨기의 경우, 현 인구 50%, 신생아의 25%가 그 들이다. 불과 17년 후인 2025년까지는 온 유럽 신생아들의 3분의1이 회교 가정에서 태어나게 된다.

최근 독일 발표에 따르면, 독일 (백인)인구 감소율은 멈추지 않고 있어

반전 가능성이 없으며 2050년까지는 회교국이 될 공산이 크다.

 

리비아의 카다피는“알라 신께서는 유럽에서 이슬람에 칼과 총/대포, 정복전 없이 승리를 주실 조짐이 보인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들, 자살폭탄도 필요없다.

불과 수십 년 내로 5천만 유럽회교도들이 유럽을 회교대륙으로 만들 것이다”고 말했다.

유럽엔 현재 5200만명의 무슬림들이 있어, 20년내로 1억400만명이 된다.

미대륙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캐나다의 출산율은 프랑스처럼 1.8이다.

2001-2006년 인구 증가는 160만명인데,

그 가운데 120만은 이민자들이다.

미국의 출산율은 1.6이며 현 문화유지에 필요한 최저치인 2.11명을 유지하는 것은 라틴계 때문이다.

1970년에 10만이던 미국 회교도들이 2008년 현재 900만이다.

수년전 시카고에서 20여 회교단체들이 모여 정치/저널리즘/교육을 통한 미국의‘회교복음화’플랜을 상세히 짰다.

그들은“30년내로 미국 무슬림 인구가 5천만이 된다는 현실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http://christiantoday.us/sub_read.html?uid=20694&section=sc73&section2=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이슬람의 세계전략과 한국 침투를 막는 길

 

이슬람은 아랍뿐 아니라 전 세계에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신장성을 넘어서 서안까지 이슬람 사원이 세워져 있고

이슬람의 동진(東進)은 계속되어 이제 한국에도 다양한 형태로 침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최근 뉴스가 된 이슬람 신봉자들이 한국의 여성들과 결혼하고 이슬람을 강요하여 어렵게

된 경우와 서울대에 장학금지원, 큰 사회 문제가 된 모 방송의 '신의 길 인간의 길'지원등

다양한 형태로 이슬람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슬람의 세계 전략과 한국 침투를 막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것인지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걱정과 우려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1. 이슬람을 알자

 

우선 적을 알아야 대적을 분별하고 막을 수 있습니다.

이슬람이 신봉하는 교리와 그들이 믿는 신과 그들의 경전인 '꾸란', 마호멧과

무슬림(이슬람을 믿는 무리들)의 생활과 삶등을 면밀히 연구하고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라크 파슈툰 족에 대해서 면밀히 알고 단기선교를 준비하고 실행했다면 2007년 두 희생자를

막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2. 이슬람의 전략을 알아야 한다

 

이슬람은 단지 종교 이상의 세력이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의 쌍동이 빌딩을 비행기로 무너뜨린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을 정치적인 힘으로

이용하여 미국과 미국을 지원하고 협력하는 모든 사람을 '''사탄'으로 규정, 성전(聖戰,지하드)에 나설 것을 이슬람과 아랍권에 촉구하며 세계를 이슬람대 기독교의 대결구도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탈레반은 그 하부 조직의 하나일 뿐이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자행되는 테러기술자 훈련과 전 세계에서 자행되는 자살폭탄 테러의 배후에 빈라덴과 그의 투사(전사)들이 수천명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그들을 평화적으로 이해하고 위험지역에 들어가 선한 활동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모험적인 일입니다.

 

이란과 미국은 오랜 동안 숙적으로 남아 있고 주요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과 인도네시아,그외 전세계의 무슬림국가들은 내심 미국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미국의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어린시절 무슬림 국가에서 자랐기에 다소 무슬림에 대한 경계심이 소홀할 수도 있고 자칫 평화공존의 무드로 흘러서 기독교 선교가 위축될 우려도 있습니다.

 

천주교와 이슬람의 화해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음녀와 같은 바벨론인 천주교 바티칸과 은밀히 진행되는 종교간 협상은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와 교회의 선교를 위협하는 요인이 됩니다.

 

아울러 최근 한국의 김수환 추기경의 사망으로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간다는 생각-공적신앙-이 개신교의 신앙과 교리에 위협을 주거나 교회의 잘못된 현상-교회 비대,돈 많은 목사,교회 아들에게 물려주기등-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개신교 선교의 위축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영적인 흐름 가운데 우리는 이슬람이 우리의 빈 마음과 방황을 엿보아 사탄처럼 치고 들어와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버리게 할 위험도 적지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울 힘써 자신을 지키고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하며 시험을 이기고 목회자들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슬람의 선지자 마지막 선지자이고 마호멧이 받은 계시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해도 우리가 전한 복음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1,6~8)는 바울의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우선 개인이 신앙으로 더욱 무장해야 한다.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마음으로 항상 깨어있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유럽의 교회가 이미 박물관이 되어 버렸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무신론을 선전하고 있는 영국, 예배당 건물이 술집과 스탠드바로 바뀌고 있는 스코틀랜드, 수많은 선진 서구에서 기독교 신앙은 화석화되었다. 미국에서도 동성애 안수등 예민한 문제에서 기독교 신앙은 퇴조하고 부시 대통령 8년 동안 복음주의 진영에 대한 날카로운 평가로 자유주의 진영에 정권이 넘어갔으므로 향후 미국은 상당히 진보적인 생각-낙태 찬성,동성애 허용등-들이 충돌할 가능성이 높으며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을 내세워 다원주의와 종교간의 통합, 연합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때에 우리는 더욱 힘써 우리가 받은 기독교 신앙의 가치들을 지켜야 한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고, 교회 생활에 더욱 힘쓰며,

새벽기도와 금식등을 통해서 날마다 거룩함에 이르고 전도와 사회 봉사를 통해서

불신자들과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교회적으로는 이슬람에 대한 연구와 세미나, 선교사를 초청한다든지 하여

이슬람의 내부와 세계 전력등에 대해서 강연을 듣고 경각심을 주는 방향으로 목회를 진행한다.

이 일에 대해서 교단이나 선교단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중동선교회같은 단체들에서 발행하는 이슬람의 신앙 내용이나 현실들을 알아서 알리고 홍보하여

그 지역들에 선교사를 보내거나 단기선교등 활동을 하기 전에 충분한 숙고와 연구, 기도가 필요하다.

샘물교회가 당한 사건은 일차적으로 교회의 판단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기에 개인적으로 대처할 문제만이 아니며 개인의 신앙과 순교는 때때로 공동체(가정,교회,국가)에 크나큰 영향을 주므로 영웅주의적 선교 접근은 지양해야 한다. 정확한 정보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가진 극악무도한 단체에 잡히면 협상도 불가능하며 오직 희생양이 될 뿐이다. 이 점에서 교회의 지도자(담임목사와 장로,선교담당목사)들은 청년들이 순수한 믿음을 이용해서 그들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교단과 선교단체는 이런 점들을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는 국제적인 넷트웍을 가져야 한다. 전문적인 선교단체라도 현지 상황이나 사정을 현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나 의사, 국제적인 활동가들보다는 모를 수 있으므로 국내에서 계획했던 대형집회나 운동(movement)등도 현지의 사역자와 긴밀히 협의하고 실행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장기적인 대책은 역시 하나님의 이슬람에 대한 계획을 알고

계속해서 어떻게 선교를 효과적으로 할 것인가를 기도하면서 고민해야 할 것이다.

현대는 정보전쟁의 시대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퇴라는 말은 항상 맞는 말이다. 파슈툰 지역의 문화와 사람들의 생각, 극단적인 테러단체들의 동향과 계획을 미리 알았다면 우리는 그들이 쳐 놓은 그물에 걸리지 않도록 대처할 수 있었으며, 온 세계가 온 나라가 떠들썩한 일을 목도하지 않고도 은밀한 가운데 이슬람 지역을 선교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김바울 선교사)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