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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유대교 (탈무드, 카발라)

성경의 유대인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을 좋게 여기고, 우리와 친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유대인에 대한 예언을 낙관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하지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유대인의 타락을 보여줄 뿐, 회개했다는 기록이 없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버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하 23:2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호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한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졌다!'고 선언했습니다. 

행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유대교는 구약성경대로 믿는 신앙이 아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유대교는 주후85년 바리새파의 얌니아 회의 이후에 노선이 결정된 바리새파 전통을 따르는 랍비종교를 말한다. 
‘유대교의 경전은 율법, 지도자는 랍비, 모이는 곳은 회당’으로 알려졌지만, 유대교는 혼합종교이고, 율법보다는 탈무드와 카발라를 더 중시한다. 랍비는 율법전문가가 아니라 탈무드전문가이고, 유대회당의 건축양식이나 사용하는 문양에 사탄숭배적인 것들이 많다. 

태양 마차를 타고 있는 헬리오스(태양신)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된 12별자리의 상징(점성술)은 이스라엘에 남아있는 7개의 고대 회당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유대교의 종교혼합을 보여준다. 

 


 
두 기둥, 태양창, 아치 등 프리메이슨 양식으로 지어진 유대교 회당

자력구원을 가르치는 생명나무 문양의 파로켓(성경두루마리 보관함 가리개)

두 기둥 양식으로 지은 회당 ? 육각성 창문, 원과 두 돌판과 아치 디자인 창문  ?

Magen David Synagogue, Kolkata ? 체크무늬 바닥, 중앙의 제단은 사탄을 숭배하는 프리메이슨 로지와 같다.


유대교 심벌 - 육각성(사탄)은 정삼각형(남신, 태양, 하늘)과 역삼각형(여신, 달, 땅)이 합해진 것이다. 이는 카발라가 가르치는 자력구원을 설명하는 '생명나무 세피로드'를 기호로 나타낸 것이다. 

탈무드는 바벨론에서 본 종교들과 사상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율법을 해석한다. 그래서 혼합종교문서이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결론을 내리고, 성경과 반대되게 가르치기도 한다. 
'유대인이 유대교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최종목표'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단일종교와 NWO(신세계질서)가 나왔다.

카발라는 여러 종교들과 사상들의 영적인 가르침을 종합한 혼합종교 문서이다. 여호와 대신에 ‘아인 소프(무한자)’를 최고존재로 가르친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얻는 방법을 가르친 도표가 생명나무 세피로드다. 

생명나무 세피로드

세 기둥이 되는 생명나무

육각성이 되는 세 기둥

생명나무 세피로드를 건축물로 표현한 것이 두 기둥, 첨탑, 탑이다. 두 기둥이 건물에 합해진 형태가 고딕 양식이다. 

힌두교 심벌 - 육각성 속에 십자가 있다. 십자가 교회의 기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유대교 심벌이 힌두교처럼 육각성인 것은 내용이 같다는 뜻이다. 생명나무 세피로드를 기호로 나타낸 것이 육각성이다. 생명나무 세피로드가 힌두교의 구원관과 같다는 뜻이다. 

카발라는 종교다원주의체제다. 카발라의 가르침이 헤겔철학에 반영되었다. ‘정반합, 절대정신, 제일원인’은 모두 카발라의 가르침이다. 

카발라는 현재 사탄숭배자들이 지침서로 쓰고 있다. 

종교다원주의, 종교통합(단일종교)운동, 단일정부운동이 모두 유대교(유대인)에서 나왔다. 
신약성경은 유대인들의 타락을 말할 뿐,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해놓지 않았다. 이를 이해해야, 유대인들이 왜 주님을 죽이고, 복음전파를 그렇게 방해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의 이스라엘과 지금의 이스라엘은 다르다.
성경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룬 나라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벌로, 나라가 망하고 지도자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기도 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징벌로 파괴된 후, 재건되었고, 개축한 후, 다시 파괴되었다. 성전파괴는 하나님께서 '그런 타락한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신 뜻임을 보여준다. 

 



주후70년에 로마에 의해 유다가 망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유대땅을 떠나 디아스포라가 되어 2,000여 년을 이방에서 떠돌며 살았다.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탈무드의 가르침을 따라 유대인우선주의를 추구하며 비윤리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했다. 신앙과 윤리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이를 ‘핍박당했다.’고 주장한다. 정치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불이익을 당하고 재산을 뺏겼으므로, 그런 면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성경이 금하는 고리대금업이나 정착농업인들이 하지 않던 상거래로 재산을 축적했다. 

혈통적으로 가장 정통성이 있는 유대인들은 프리메이슨 국가인 미국에서 살면서 미국과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시오니즘운동으로 재건된 현재의 이스라엘은 순혈 유대인이 아니라 혼혈 또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 유대교인들로 구성되었다. 출신배경에 따라 신분차별이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건국초기에 형성된 집단농장(기부츠)은 사회주의방식부터 자본주의방식까지 다양하다는 것은 잘 알려졌다. 하지만, 시오니즘운동의 주축세력이 러시아에서 볼세비키혁명을 일으킨 공산사회주의자들이었고, 그로 인해, 재건된 이스라엘은 공산사회주의 체제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노골적으로 사탄을 숭배한다. 

두 개의 삼각형을 겹쳐서 만든 사탄을 상징하는 6각성을 국기로 쓴다. - 사탄숭배국이란 공식표시다.

로스 차일드 가문의 재정지원으로 건축한 안팎으로 사탄적 상징이 가득한 이스라엘의 대법원 청사

이스라엘 에일라트에 있는 프리메이슨 피라미드와 두 기둥, 전시안

이스라엘 제1도시 텔아비브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세계최대의 동성애축제로 유명하다. - 동성애자들의 육각성과 이스라엘국기의 육각성이 같다. 

현재,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장악하고 사탄숭배체제로 만드는 일에 힘쓰는 프리메이슨의 핵심지배세력이 유대인 자본가들이며, 프리메이슨의 모든 행동원리를 탈무드와 카발라가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을 미화하고,‘탈무드를 가르치자!’ ‘유대인의 교육법인 하브루타(토론학습법)를 도입하자!’ ‘유대문화가 부럽다!’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을 사랑하라!’거나 ‘본받아라!’고 하시지 않는다. 
성경은 구약에서 신약까지 '유대인들이 타락했고, 하나님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안타까워한 이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는 것만 말씀하신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만 섬길 때 베푸실 은혜이지, 지금처럼 사탄숭배에 빠진 유대교를 붙잡고 있는 한은 안 될 것이다.

이스라엘에 ‘성지순례(聖地巡禮)’를 가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의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답사(踏査)'하는 것은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데 유익한 일이지만, 현재의 이스라엘은 결코 성지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위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아야 하거나, 성경에 나오는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지’라 부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미화하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순례(巡禮)’는 ‘종교상의 특정장소를 찾아가 참배(參拜)하는 것’을 말한다. 즉, 우상종교의 예배행위이다. 
‘성지순례(하즈)’는 이슬람교도의 기본의무로, 모든 이슬람교도는 평생에 한 번은 반드시 그들의 성지인 메카를 찾아가 참배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왜 그들의 용어를 쓰면서, 그들의 행위를 따르고 있는가? 

심지어, 스페인에 있는 카톨릭의 '산띠아고 길' 순례를 미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그 길을 찾아가 걸으면, 천국에 다다르는가? 카톨릭이 가르치는 구원에 유익한 '공덕'을 쌓는 일일 뿐이다. 

중세 카톨릭은 '구원에 이르는 공덕'을 내걸어 사람들을 십자군에 동원했다. 


산띠아고(=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 길 870km 약도

가리비는 비너스(아세라의 그리스식 이름)를 상징한다.  가리비 위의 빨간 십자는 '산티아고(=야고보) 십자가'라고 하는데, 뜨레스 디아스에서도 쓴다. 예수회가 만든 프로그램이라는 증거다. 


'꾸르시요'는 '짧은 코스(단기강습회)'란 뜻으로, '뜨레스 다아스(3일)' 프로그램의 원래 이름이다. 


산띠아고 길 순례완료 증명서

인장은 빛을 발하는 태양이다. 예수회의 심볼도 태양상이다. 

 


선교사 언어 교육원 (선교사들 외국어 교육하는 곳)

30개 언어 동영상의 문법과 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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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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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유대교(탈무드, 카발라), 이스라엘 이해하기

 

 

 

성경의 유대인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을 좋게 여기고, 우리와 친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유대인에 대한 예언을 낙관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하지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유대인의 타락을 보여줄 뿐, 회개했다는 기록이 없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버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하 23:2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호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한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졌다!'고 선언했습니다.

행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유대교는 구약성경대로 믿는 신앙이 아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유대교는 주후85년 바리새파의 얌니아 회의 이후에 노선이 결정된 바리새파 전통을 따르는 랍비종교를 말한다.
‘유대교의 경전은 율법, 지도자는 랍비, 모이는 곳은 회당’으로 알려졌지만, 유대교는 혼합종교이고, 율법보다는 탈무드와 카발라를 더 중시한다. 랍비는 율법전문가가 아니라 탈무드전문가이고, 유대회당의 건축양식이나 사용하는 문양에 사탄숭배적인 것들이 많다.

태양 마차를 타고 있는 헬리오스(태양신)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된 12별자리의 상징(점성술)은 이스라엘에 남아있는 7개의 고대 회당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유대교의 종교혼합을 보여준다.
 
두 기둥, 태양창, 아치 등 프리메이슨 양식으로 지어진 유대교 회당

자력구원을 가르치는 생명나무 문양의 파로켓(성경두루마리 보관함 가리개)

두 기둥 양식으로 지은 회당 – 육각성 창문, 원과 두 돌판과 아치 디자인 창문  ​

Magen David Synagogue, Kolkata – 체크무늬 바닥, 중앙의 제단은 사탄을 숭배하는 프리메이슨 로지와 같다.


유대교 심벌 - 육각성(사탄)은 정삼각형(남신, 태양, 하늘)과 역삼각형(여신, 달, 땅)이 합해진 것이다. 이는 카발라가 가르치는 자력구원을 설명하는 '생명나무 세피로드'를 기호로 나타낸 것이다.

탈무드는 바벨론에서 본 종교들과 사상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율법을 해석한다. 그래서 혼합종교문서이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결론을 내리고, 성경과 반대되게 가르치기도 한다.
'유대인이 유대교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최종목표'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단일종교와 NWO(신세계질서)가 나왔다.

카발라는 여러 종교들과 사상들의 영적인 가르침을 종합한 혼합종교 문서이다. 여호와 대신에 ‘아인 소프(무한자)’를 최고존재로 가르친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얻는 방법을 가르친 도표가 생명나무 세피로드다.

생명나무 세피로드

세 기둥이 되는 생명나무

육각성이 되는 세 기둥

생명나무 세피로드를 건축물로 표현한 것이 두 기둥, 첨탑, 탑이다. 두 기둥이 건물에 합해진 형태가 고딕 양식이다.

힌두교 심벌 - 육각성 속에 십자가 있다. 십자가 교회의 기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유대교 심벌이 힌두교처럼 육각성인 것은 내용이 같다는 뜻이다. 생명나무 세피로드를 기호로 나타낸 것이 육각성이다. 생명나무 세피로드가 힌두교의 구원관과 같다는 뜻이다.

카발라는 종교다원주의체제다. 카발라의 가르침이 헤겔철학에 반영되었다. ‘정반합, 절대정신, 제일원인’은 모두 카발라의 가르침이다.

카발라는 현재 사탄숭배자들이 지침서로 쓰고 있다.

종교다원주의, 종교통합(단일종교)운동, 단일정부운동이 모두 유대교(유대인)에서 나왔다.
신약성경은 유대인들의 타락을 말할 뿐,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해놓지 않았다. 이를 이해해야, 유대인들이 왜 주님을 죽이고, 복음전파를 그렇게 방해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의 이스라엘과 지금의 이스라엘은 다르다.
성경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룬 나라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벌로, 나라가 망하고 지도자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기도 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징벌로 파괴된 후, 재건되었고, 개축한 후, 다시 파괴되었다. 성전파괴는 하나님께서 '그런 타락한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신 뜻임을 보여준다.

주후70년에 로마에 의해 유다가 망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유대땅을 떠나 디아스포라가 되어 2,000여 년을 이방에서 떠돌며 살았다.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탈무드의 가르침을 따라 유대인우선주의를 추구하며 비윤리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했다. 신앙과 윤리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이를 ‘핍박당했다.’고 주장한다. 정치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불이익을 당하고 재산을 뺏겼으므로, 그런 면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성경이 금하는 고리대금업이나 정착농업인들이 하지 않던 상거래로 재산을 축적했다.

혈통적으로 가장 정통성이 있는 유대인들은 프리메이슨 국가인 미국에서 살면서 미국과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시오니즘운동으로 재건된 현재의 이스라엘은 순혈 유대인이 아니라 혼혈 또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 유대교인들로 구성되었다. 출신배경에 따라 신분차별이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건국초기에 형성된 집단농장(기부츠)은 사회주의방식부터 자본주의방식까지 다양하다는 것은 잘 알려졌다. 하지만, 시오니즘운동의 주축세력이 러시아에서 볼세비키혁명을 일으킨 공산사회주의자들이었고, 그로 인해, 재건된 이스라엘은 공산사회주의 체제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노골적으로 사탄을 숭배한다.

두 개의 삼각형을 겹쳐서 만든 사탄을 상징하는 6각성을 국기로 쓴다. - 사탄숭배국이란 공식표시다.

로스 차일드 가문의 재정지원으로 건축한 안팎으로 사탄적 상징이 가득한 이스라엘의 대법원 청사

이스라엘 에일라트에 있는 프리메이슨 피라미드와 두 기둥, 전시안

이스라엘 제1도시 텔아비브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세계최대의 동성애축제로 유명하다. - 동성애자들의 육각성과 이스라엘국기의 육각성이 같다.

현재,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장악하고 사탄숭배체제로 만드는 일에 힘쓰는 프리메이슨의 핵심지배세력이 유대인 자본가들이며, 프리메이슨의 모든 행동원리를 탈무드와 카발라가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을 미화하고,‘탈무드를 가르치자!’ ‘유대인의 교육법인 하브루타(토론학습법)를 도입하자!’ ‘유대문화가 부럽다!’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을 사랑하라!’거나 ‘본받아라!’고 하시지 않는다.
성경은 구약에서 신약까지 '유대인들이 타락했고, 하나님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안타까워한 이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는 것만 말씀하신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만 섬길 때 베푸실 은혜이지, 지금처럼 사탄숭배에 빠진 유대교를 붙잡고 있는 한은 안 될 것이다.

이스라엘에 ‘성지순례(聖地巡禮)’를 가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의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답사(踏査)'하는 것은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데 유익한 일이지만, 현재의 이스라엘은 결코 성지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위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아야 하거나, 성경에 나오는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지’라 부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미화하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순례(巡禮)’는 ‘종교상의 특정장소를 찾아가 참배(參拜)하는 것’을 말한다. 즉, 우상종교의 예배행위이다.
‘성지순례(하즈)’는 이슬람교도의 기본의무로, 모든 이슬람교도는 평생에 한 번은 반드시 그들의 성지인 메카를 찾아가 참배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왜 그들의 용어를 쓰면서, 그들의 행위를 따르고 있는가?

심지어, 스페인에 있는 카톨릭의 '산띠아고 길' 순례를 미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그 길을 찾아가 걸으면, 천국에 다다르는가? 카톨릭이 가르치는 구원에 유익한 '공덕'을 쌓는 일일 뿐이다.

중세 카톨릭은 '구원에 이르는 공덕'을 내걸어 사람들을 십자군에 동원했다.


산띠아고(=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 길 870km 약도

가리비는 비너스(아세라의 그리스식 이름)를 상징한다.  가리비 위의 빨간 십자는 '산티아고(=야고보) 십자가'라고 하는데, 뜨레스 디아스에서도 쓴다. 예수회가 만든 프로그램이라는 증거다.


'꾸르시요'는 '짧은 코스(단기강습회)'란 뜻으로, '뜨레스 다아스(3일)' 프로그램의 원래 이름이다.

 

인장은 빛을 발하는 태양이다. 예수회의 심볼도 태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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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관하여 알아야 할것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한다. 이는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을 주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 묵상하며 경건히 보내고자 하는 절기이다.

 

40이란 수는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심, 40일간 시내산에서의 모세의 금식, 이스라엘의 40년간의 광야 생활, 예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경에 여러 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등장한다. 이에 고난 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의 구속을 위해 수난을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의의를 살펴보며 자신의 신앙을 재 각성하고자 비교적 긴 40일간의 절제 기간을 갖는 것이 바로 사순절이다. 사순절은 항상 수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이 날은 재의 수요일, 성회 수요일, 속죄일 등으로 불리워진다.

 

사순절의 유래

 

사순절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준비하며, 주님이 겪은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진 금식을 행하던 것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유월절 전에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님께서 제공하신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했던 것이다. 또한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되는 성도의 성례식이 있게 되는데, 세례 예비자들은 이때 세례와 입교(入敎)를 받기 위하여 두 주간의 준비기를 두고 금식과 기도로 신령한 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사순절의 식사로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 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가면서 이 규정은 많이 완화되기 시작해 14세기에는 금식 기도 대신에 절식 기도가 행해졌으며 ,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관습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collation)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 해위는 여전히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 것,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 호화 생활 등도 자제되었다. 대신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이 권장되었다.

  

사순절의 풍습
 
 

▶ 종려나무의 재로 이마에 십자가 그리기

 

종려나무를 태운 재 혹은 숯으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풍습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에 행해지던 풍습이다. 이때 사용되는 재는 지난해 종려 주일에 사용했던 종려나무를 태워 만든 것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대속의 죽음으로 이끌었던 인간의 죄에 대한 참회의 표시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이는 또한 아름다운 풀과 꽃이 잠깐 후면 마르고 시들 듯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잠시 잠깐 후면 사라지고, 한 줌의 흙에서 왔던 우리도 또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엄숙한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다. 또한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우리의 삶의 자세를 정비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 금식 기도

 

금식은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금식의 기간과 그 엄격성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기리고 하늘나라의 백성됨을 감사하며 그 백성 된 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돌이키게 하는 금식 기도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행해졌었다. 오늘날 행해지는 금식 기도는 엄격했던 초기의 형태에서 많이 변형되어 절식(節食) 기도의 형태로 행해지고 있다.

  

▶ 구제와 선행 베풀기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위한 구제와 자선이 행해졌다. 특히 사순절에 행해지는 금식 기도를 통해 주님의 고난에의 동참, 불의한 자신에 대한 회개뿐만 아니라 불우한 이웃의 배고픔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실천에 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을 본받아 이를 실천함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 할 것이다.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의 금요일에 죽어 장사되신 주님은 삼일만인 일요일, 곧 주일날 스스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하셨다. 부활절은 이를 기념하는 주일날을 가리킨다.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절을 '파스카'(Psacha)로 불렀다. 이는 구약의 유월절(Passover)을 뜻하는 히브리어 '페사흐'( j s p )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구약의 초대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유월절 양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구속 희생을 당한 사실에 근거하여 구약의 유월절을 예수의 부활 기념일로 변용시켜 기념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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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 아랍 대 이스라엘 전쟁

 

 

 

아랍 대 이스라엘 전쟁이라고도 한다.
긴 역사적 배경과 복잡한 국제적 관계가 얽혀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중동지역에 끊임없는 긴장을 몰고 왔으며,
4차에 걸친 전쟁까지 겪어야 했던 이 중동분쟁은 아랍·이스라엘 양민족의 숙명적인 대립에서 유래한다.
즉, 기원전 팔레스타인 땅에 건국한 유대인은 망국 후 유랑의 민족으로 전락하였으나 조상의 땅인 가나안의
언덕으로 돌아갈 것을 민족의 비원(悲願)으로 삼아 왔다.

이 '시오니즘(Zionism)'은 후에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재건하려는 정치운동으로 전환해 갔다.


한편 예루살렘은 636년 이슬람에게 공략되었고,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에 의해
점거됨으로써 이슬람교도에게도 성지(聖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전쟁수행을 위해 시오니즘을 지지함과 동시에 독일측인 오스만 투르크의 후방교란을
위해 아랍인의 협력을 요청하였고, 양자에 대해 팔레스타인을 내주겠다는 모순된 언질(아랍에 대해서는
맥마흔선언, 유대에 대해서는 밸푸어선언)을 주었던 것이 이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 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갔으며, 밸푸어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국가재건을 약속받은
유대인이 내주(來住)하면서 이곳에 정착하고 있던 아랍인과 충돌이 생기게 되었다. 
 

 c) 1차 중동전쟁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대 난민의 대량 유입으로 분쟁이 격화되자 영국은 분쟁의 해결을 국제연합에 위양하였다.
1947년 제2차 국제연합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의 쌍방에 분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은 영국군의 철수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5월 16일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측 약 2만의 병력이 팔레스타인에 침입, 전세는 당초 아랍측이
우세하였으나 이스라엘의 공세로 아랍측은 패퇴를 거듭하였다.

이 사이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조정관 백작 B.W.베르나도테가 유대인 과격분자에게 암살되는 불상사도 있었으나
국제연합의 조정으로 1949년 2월 휴전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 결과 10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고 이른바 아랍게릴라가 조직되었다.  
 

d) 2차 중동전쟁

제1차 중동전쟁의 휴전 후에도 사태는 악화를 거듭하여 쌍방은 군사력 증강에 광분하였다.
1952년 7월 이집트에서는 혁명이 발발, 왕제가 붕괴되고 공화제가 실시되었다.
1956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G.A.나세르는 그해 7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의 통항을 거부하고 티란해협을 봉쇄하였다.

이로써 큰 타격을 입게 된 영국 ·프랑스는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침공한 2일 후에 수에즈운하를
공격하였다.
전세는 3국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미국의 압력, 소련의 위협, 국제여론의 악화 등으로 영국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리하게 되었다.

국제연합은 긴급특별총회를 소집하여 11월 14일 즉시 철수와 유엔군 파견 결의를 채택, 정전(停戰)과 감시를
위한 유엔긴급군을 편성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사태는 진정되었고, 영국 ·프랑스는 연내에, 이스라엘은 1957년 3월에 점령지로부터 철수하였다. 
 

e) 3차 중동전쟁

제2차 중동전쟁 후 1964년경부터 아랍게릴라의 활동이 시작되어, 게릴라의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이스라엘은 1967년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해 붕괴에 직면한 아랍의 결속강화를 이스라엘과의 대결에서 회복하려는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대군을 시나이반도에 투입, 유엔긴급군의 철수를 요청하고 아카바만(灣)의 봉쇄를 선언하였다.

6월 5일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전투가 개시되었고, 전란은 시리아 ·요르단으로 확대,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서전의 기습공격으로 아랍측 공군력을 괴멸시킨 이스라엘군은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4일 만에 시나이반도를
점령하였으며, 요르단강 서안(西岸)지역, 시리아 국경의 골란고원을 공략하였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6일 즉시 정전을 결의하였고, 쌍방의 수락에 의해 6월 9일 정전이 실현되었다.
또한 안전보장이사회는 그해 11월 중동분쟁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결의 242호를 채택하였다. 
 

f) 4차 중동전쟁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전력의 재건을 서둘렀고, 아랍게릴라는 1969년경부터 파괴활동을 격화하였다.
요르단에서는 1970년 9월 화평에 반대하는 게릴라와 정부군 사이에 내전이 있었다.
1970년 9월 28일 대통령 나세르의 급사로 M.A.사다트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사다트는 이스라엘 기습을 계획하여 1973년 10월 6일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이스라엘 공군과 탱크대를 소련제
미사일과 로켓으로 격파, 서전을 승리하였으나, 북부에서는 시리아군이 패퇴하여 전선은 고착화되었다.

이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22일 미 ·소공동제안에 의한 즉시정전, 1967년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42호의
이행 등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이 채택되고, 당사국의 수락을 얻어 같은 날 정전을 성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연말에는 제네바에서 중동평화회의가 개최되고, 1974년 1월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병력격리협정이 조인되어
그 이행을 감시하기 위한 유엔군이 파견되었다.

이 전쟁 중에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는 석유전략을 발동, 생산제한과 금수(禁輸)를 실시했기 때문에
세계는 심각한 석유위기를 겪어야 했으며, 각국 경제는 막심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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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후회 없는 부르심

로마서 11장 29∼32절
 
모든 사람은 살면서 후회합니다. 지난 일을 돌아보며 괴로워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약속을 저버릴 때 왜 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후회합니다. 인생은 크고 작은 후회의 연속입니다. 믿음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실망스러우실까.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여전히 교만하고 순종하지 않는 우리의 행동에 얼마나 후회하실까. 그러나 이는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결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후회하고 실망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부르신 데 대해선 후회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우리를 보고 후회하지 않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른 건 무엇을 바라고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긍휼하심으로 은총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연약함을 아는 주님이 우리를 측은히 여기고 사랑으로 안아주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긍휼하심으로 주님은 사역하셨습니다. 소외당하고 죄인 취급 받던 사람에게 자유를 주심으로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연약한 인생에 베푸신 하나님의 가장 큰 긍휼이요 구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할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께서 우리 인생을 바라볼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도 오늘날 자신들의 은사를 선용하지 못합니다. 다투며 미워하고 불순종하는 우리도 주님 보시기에는 그저 불쌍히 여김을 받을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은 연약한 우리 인생이 다 알 수 없고 그 긍휼하심의 깊이도 다 알지 못합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긍휼의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를 드러냄으로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불순종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불순종은 곧 불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주님은 그 불순종과 불신앙마저도 구원의 기회로 삼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연약한 우리를 부르고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은총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으로 인해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을 정당화하고 주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마십시오.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남을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참된 신앙과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을 본받아 긍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불순종과 불신앙이 판친다 해도 흔들리지 말고 긍휼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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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역사 1장 장로회의 기원과 교회의 조직

Chapter 1

1장 장로회의 기원과 교회의 조직

장로교회란 무엇을 말하는가? 장로교회란 장로회 정치제도하에 유형 교회의 통일성을 이루는 교회 형태를 말한다. 이 제도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것처럼 칼빈이나 낙스에 의해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구약성경에 이미 나타나 있는 제도였다.

1. 성경에 나타난 장로회의 기원

A. 구약에서의 사용: 구약에서는 장로라는 말이 백번 이상 사용되었다. 그 중 모세 오경에만 절반 이상이 사용되었는데 그 어의들을 보면 두 단어로 집약된다.

 

) 손윗사람, 형이란 뜻으로 원래는 큰, 위대한, 대단한, 등의 의미를 지닌 말로서 나이가 많은 사람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 )10:21, 27:42, 삼상18:17, 왕상2:22, 16:64, 61, 23:4

 

)연장자, 장로, 수염 있는 등의 뜻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말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한정적인 형용사로 쓰일 때 주로 젊은 자와 구별되는 늙은 사람을 지칭 할 때 사용되었다. (19:32, cf. 렘애 5:12). 이렇게 성경은 노인을 존중하며, 백발은 노인의 영화요 자녀들은 그의 면류관이라고 하였다(20:29, 17:6).

 

그러나 자켄이 실명사로 쓰일 때는 전문적인 용어로서 그 문맥에 따라 한 사람의 장로를 가리키기도 하며 또 장로회라는 지역통치기구를 지칭하기도 한다. 50:7, 시편 105:22, 삼하1 2:17, 22:4,7, 9:11 등에 나타난다.

 

모세 오경에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는 것을 목격한 증인들이었고(2:16,18:12,17:5-6). 광야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70인의 장로들을 데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일이 있는데(24:1-9) 이러한 현상들은 장로회란 바로 통치기구의 성격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증거인 것이다.

 

장로들은 바벨론 포로기간 중에서도 계속하여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29:1, 8:1, 14:1, 20:1). 또 포로 이후에도 장로의 권한은 여전히 존재하였다(10:8, 14). 그들의 역할은 회당에서도 존재하였고 신약시대 까지도 존재하고 있었다. 구약에서의 장로회제도는 민의(民意)를 수렴하는 의회제도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래의 장로직은 구약에서 종교적인 제사제도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고시행정과 관계있는 것으로 언제나 민의(民意)를 표현하는 자치 (또는 代議)기구의 대의원의 역할을 하였다. 이스라엘에서의 장로직의 존재와 그 영향은 자치성의 원리와 습성을 배양시켰던 것이다.

   

B. 신약에서는 70인역이 번역되면서 구약의 자켄을 πρεσβύτερος 번역하여 사용하였는데 그 의미는 손윗사람, 공직에 있는 사람, 영광을 얻을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장로라는 말은 주로 교회와 연관되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교회직분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여기서 장로 혹은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라는 말이 파생된 것이다. 장로의 기능을 의미하는 말은 έπίσκοπος라는 말로 이것은 감독하다또는 치리한다는 의미이다. 이 단어에서는 감독교회 (Episcopalian Church)라는 말이 나왔다.

 

2. 초대 교회의 시작과 조직

 

초기 기독교의 시작은 이미 앞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유대교회 배경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구약시대부터 유대인들이 대망하여 온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로부터 시작된 교회는 오순절 사건을 통하여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 우리는 예수의 사역의 시작과 더불어 기독교가 이방에까지 진출하는 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관계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초기 기독교의 출현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유대교로부터 기독교의 분리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바른 해석과 아울러 불순종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였다. 무엇보다도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입으로만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라야 하며 또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초기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수의 이러한 새로운 가르침을 유대교적인 틀 안에서 어디까지 수용해야 되는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대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교훈이 가장 훌륭한 유대교회의 진수와 다른 것이 아닌 윤리적 근본원리들로 받아들였고 또 예수 자신도 율법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려 왔다고 선언하심으로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인 이 예수를 다른 유대인들에게 전해 주어야 할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은 단순히 순교자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순종을 보이는 자에게 충만한 생명을 주시는 구속의 죽음이었고, 이 죽음을 통하여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게 해 주는 길을 연 것이다. 또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며 무릇 살아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함을 전하는 것이다(cf. 3:16, 11:25-26). 그러므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종교적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두가 다 하나인 것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 사이의 다툼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오순절 사건은 해리보더가 그의 책 초대교회사에서 지적하고 있는 대로: 신약의 교회는 성전과 회당에서 모였던 엄밀한 이스라엘의 성전중심에서 벗어나 회중 중심의 색채를 띠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국수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국제적이고 우주적이어야 함을 보여주었으며, 설교자가 제사장을 대신하였고 강단은 제단을 대신하여 선포의 사역을 강하게 부각시킨 것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핍박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교회에 가해진 핍박이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신자들을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것이 복음의 확장을 꾀하게 된 것이다. 빌립은 사마리아로 베드로는 욥바와 가이사랴지역에까지 갔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유대의식을 버리지 못하였고 또 이방교회를 자기들 수하에 두려고 했다.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의 태도는 결국 팔레스타인 안에서 기독교회의 쇠퇴를 가져왔다. 유대의식을 과감하게 떨쳐버리지 못한 그들의 모습은 복음의 능력을 제한시켰고 교회의 힘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단호히 선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66년경에 벌어진 독립운동과 같은 유대인들의 반란은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것이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를 크게 갈라놓은 것이 되었다.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기독교인들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독립을 위한 반란에 가담해 주지 않은 기독교인들을 유대인 국수주의자들은 저주하였으며, 결국 이것이 기독교회와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갈라서게 된 원인이 되었다.

 

2) 초대 교회의 생활과 조직

 

오순절 사건 이후 초대교회의 생활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도들의 지도 하에 성장해갔다. 이 때는 어떤 특별한 조직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매일 늘어감에 따라 조직의 필요성이 교회 안에 부각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7명의 대표선출이다. 이들은 집사들이 아니었다. 후에 바울이 목회서신에서 교회 직분자들에 대한 자격을 논할 때 언급한 부분이 7명의 평신도 대표들이 한 역할과 유사한 것 때문에 대부분 집사라고 부르지만 스데반이나 빌립과 같은 사람은 집사로서 역할을 한 것보다 도리어 전도자로서 사역을 감당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외적 성장에 따라 사도들의 명령과 인준에 의한 직분자 선출 문제는 오늘날 사도들이 없는 현실 교회에서는 사도들이 남겨놓은 신약 성경을 통해서 직분자 세우는 근거를 가져야 하며 반드시 주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선출되어야 한다는 대원칙이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초창기의 예루살렘 교회에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움직여져 특별한 조직의 형태는 갖추지 않았으며 오직 7명의 대리인들을 선출하여 사도들이 감당해왔던 구제의 임무를 맡겼을 뿐이다.

 

그러나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명을 망각하였기에 예루살렘교회에 일어난 핍박이 그들을 사방에 흩어지게 만들었고, 각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지교회에 필요한 직분자들을 임명하게 되었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각 서신에서 언급한 직분자들을 고찰하면서 성경에 명시된 초대교회의 조직과 직분자들의 기능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3) 교회의 직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일과 관련하여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교회의 직분(Office)이다. 직분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직임에 해당되는 기능(Function)’ 문제가 자연스럽게 대두된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여 유기체적인 측면에서 볼 때 기능적인 차원을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기능적인 측면에서 신약성경에 의거한 교회의 직분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전통적으로 개혁교회가 언급해온 직분은 크게 목사, 장로, 집사 세 가지이다. 사도는 초대교회의 특별직으로 보로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의 항존직(桓存職)1)에 해당하는 장로와 집사직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1)장 로(presbyter or elder)

 

초대 교회에서의 장로직은 사도행전 11:30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예루살렘교회 형제들의 기근 문제로 말미암아 구호품을 전달하고자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에게 보냈다. 또 사도행전 14:23절 이하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교회에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 장로들을 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초대교회의 기록을 보면 예루살렘교회에서부터 장로직은 교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해당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장로직이 어떻게 하여 생기게 되었는가? 신약성경은 그 시작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처음부터 교회의 대표격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 회당제도에 근거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유대인의 장로들은 회당에서 주로 행정적인 업무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신약교회가 설립된 이후 사도들의 설교사역을 통해서 제사장들을 비롯하여 허다한 무리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었는데(6:7) 그 중에는 회당에서 행정적인 업무들을 맡아보았던 장로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명칭이 신약에서 공직에 있는 자 손윗사람, 존귀한자의 뜻을 지닌 πρεσβύτερος이고 이들의 기능을 의미하는 말은 έπίσκοπος이다. 이 뜻은 감독한다또는 치리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장로들은 감독들이었고 감독은 치리하는 일을 맡은 장로였다.

 

신약교회에서 장로를 말할 때 다음 다섯 가지 직무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장로는 하나님의 교회의 목자들이다(20:28, 벧전 5:2), 이 용어 사용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내 양을 치라"(21:15절 이하)명령하신 말씀에 그 근원을 둔다.

 

둘째, 장로는 감독자이다(20:28 cf. 1:1, 딤전 3:2).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를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셋째, 장로는 감독직과 더불어 치리자이다(딤전 3:5, 5:17, 벧전5:3, cf. 13:7), 그러므로 장로란 잘 다스리는 자격을 요구하는 것이다.

 

넷째, 장로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다(1:7). 청지기직이란 하나님의 것을 위임받아 수행하는 자를 말한다. 위의 세 가지 기능은 성도들을 돌보는 직책에 더 초점이 있다면 청지기직은 하나님의 자산을 잘 관리하는 임무에 더 강조점이 있다.

 

다섯째, 장로는 그의 직임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잘 가르치는 교사이며 권위자이다(딤전 3:2, 5:17, 1:9). 모든 장로는 잘 다스려야 하며 잘 가르쳐야 하되 모든 장로가 다 잘 가르치는 장로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목사와 장로라는 구분은 역할분담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직위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목사와 장로는 다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위치에 서 있으며 단지 기능면에서만 서로 주된 업무가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초대교회에서 7명의 대표인들을 선출했을 때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사도들이 구제하는 일까지 취급했었던 것처럼 목사는 잘 다스리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다.

 

바울도 장로회에 대하여 언급하였다(딤전 4:14). 이렇게 장로들을 임명할 때 장로회에서 그들을 안수하여 세웠다. 안수행위는 신령한 은혜와 복을 내리며, 은사를 수여할 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cf. 9:18, 19:13, 6:5, 7:32, 8:23, 13:13, 8:17, 9:12, 17, 13:3, 19:6, 딤전 5:22). 초대교회의 7명의 대표들을 뽑을 때도 그들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함으로 확정지었다. 그들은 회중에 의하여 선출되었고, 사도들 앞에 세워졌을 때 사도들이 안수하였다. 사도행전 20:28에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서 엄숙히 장로직, 감독직에 대하여 말한 것을 보면 교회를 돌보고 감독하는 임무야말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장로들이 명심해야할 것은 그들 역시 대 목자장인 그리스도의 감독과 지도를 날마다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집 사 (deacon)

 

집사라는 말은 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12:26, 13:4, 고전 3:5, 고후 6:4, 11 :23, 3:7, 살전 3:28, 딤전 4:6). 집사직은 διακονία 라는 추상명사에서 독특성을 찾는다. 이 단어는 집사로서 잘 섬기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딤전 3:10, 13). 교회의 처음 조직이 생긴 사도행전 6장에서 구제하는 일과 먹이는 일을 7명의 대표들을 통해서 집사란 용어를 사용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양들을 돌보는 일, 특히 가난한 성도들을 돌보는 일은 교회의 가장 중점 되는 사업 중 하나였기 때문에(15:25-26, 2:10), 자연스럽게 집사직이 교회 안에 형성된 것 같다. 따라서 바울은 장로직을 말하면서 집사의 의무를 말하기보다는 집사의 자격을 언급하였다. , 장로직과 집사직이 이미 초대교회에서 명확히 구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집사직의 자격은 무엇보다도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딤전 3:9)여야 했다.

   

3. 교회 정치 형태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교회조직이나 직분자들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세움을 입은 자들이며, 주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은 자라야 회중들이 은사의 됨됨이와 신앙인격을 보고 선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 우리는 현존하는 각 교파의 정치 제도를 살펴보려고 한다. 현존하는 각 종파의 정치형태는 교리적인 차이와 성경 해석적인 이견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서 크게 나누어 감독정치, 회중정치 또는 독립정치및 장로정치이다.

 

1) 감독정치

 

흑자는 교황정치와 감독정치를 구분하지만(장로교화사 오덕교저, pp. 14) 교황정치는 감독정치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감독정치란 대주교, 주교 사제, 부주교, 집사 등의 여러 직분자들에게 교회를 통솔하게 하는 권력기반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통 로마 카톨릭과 성공회 등에서 유지하고 있는 정치제도이다. 다만 이 둘의 차이는 전자는 모든 권력이 교황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그가 지상의 모든 카톨릭교회를 통치하는 것이요 후자는 교회의 수장권이 군주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감독정치는 한 사람의 최고 통치권자 밑에 여러 계층의 직제에 의하여 움직이는 교회정치이다. 이러한 정치제도는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인본주의적 정치인 것이다. 교회의 모든 직분자는 위치상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며 다만 기능상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며 직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운 자들이요 회중들의 선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2) 회중 정치 또는 독립 정치

 

독립정치를 지향하고 있는 회중교회의 정치인 회중정치는 교회의 계층구조에 대한 반발로 생긴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성경적인 교리나 가르침을 그들의 공식문서에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하며 회중에 의한 목사 청빙과 교회운영 및 지교회의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내세운다.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장로회’(딤전 4:14)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든 외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일에 개교회의 결정이 최고의 결정이 최고의 결정이기 때문에 이것은 곧 개 교회의 무흠한 능력으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 소지가 많은 것이다.

 

3) 장로 정치

 

이것은 지금까지 앞에서 직분자들을 다루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장로정치라고 본다. 장로정치제도는 교회와 교회 및 직분자들과 직분자들 사이에 계급구조를 인정치 않으며 회중교회의 정치의 자율과 평등사상을 수용하지만 모든 지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는 연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장로회주의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 정치형태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감독주의나 교황의 통치권에서처럼 교회가 성경을 판단하고 인정하는 원리가 아니라 성경에 의하여 교회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다스리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장로회주의는 개교회의 당회와 지교회의 연합을 이루는 노회, 일정 지역권의 노회를 의미하는 대회와 전국적인 총회로 나누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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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유태인의 격언

 

두툼한 돈지갑이 반드시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빈지갑이 좋은 것도 아니다.

돈은 벌기는 쉽다. 하지만 돈을 쓰기는 더 어렵다.

돈은 기회를 만들어 준다.

가난하기 때문에 바르고, 부자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돈이란 악함도 저주도 아니며, 인간을 축복하는 것이다.

돈이란 결코 모든 것을 좋게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썩게 하지도 않는다.

돈이란 인정없는 주인이기도 하지만, 반면 유익한 심부름 꾼일 수도 있다.

돌처럼 굳어진 마음은 황금망치로만 풀 수 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파는 것은 상술이 아니다.

부자를 칭송하는 사람은 그 부자보다는 돈을 칭송하는 것이다.

필요한 돈을 빌리는 것은 마치 가려운 곳을 긁는 것과 같다.

많은 것을 가진 부자에게는 자식이 없고 상속인만이 있다.

돈이란 선인에게는 좋은것을, 악인에게는 나쁜것을 안겨준다.

재물이 많으면 그만큼 걱정거리도 늘어나지만, 재물이 전혀없으면 걱정거리가 더 많다.

돈이란, 옷이 우리에게 베푸는 역할 밖에는 해 주지 못한다.

가난함은 수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명예로움도 아니다.

가난한 사람에게서 돈을 차용하는 것은 마치 추녀에게 키스하는것과 같다.

매춘부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년는 비가 온다고 말한다.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에는 증인을 세우고, 적선할 때는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하라.

금전과 속담

 

2. 마음의 양식

 

하늘과 땅을 웃기려면 먼저 고아를 웃겨라. 고아가 웃으면 하늘과 땅도 웃을 것이다.

이보다 더한 불행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라

일생동안 울고 허송해서도 안 되고, 웃고만 보내서도 안된다.

이미 끝나버린 일을 후회하기 보다는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한것을 후회하라.

하나님은 밝은 사람을 축복해 준다. 낙관하는 마음은 자기 뿐만 아니라 남들까지도 밝게 해 준다.

행복을 얻으려면 만족에서 멀어져야 한다.

어차피 같은 햄을 먹는 것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먹어라.

남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마치 향수를 뿌리는 일과도 같다.

남의 강요에 의해 베푼 자선은 스스로 한 자선의 절반의 가치밖에 없다.

모르는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은 천사에게 베푸는 친절과 같다.

가장 훌륭한 지혜는 친절함과 겸허함이다.

만약 손님이 기침을 하면 수저를 내 놓아라.

자신의 결점을 찾아내는데 힘쓰는 사람은 남의 결점을 찾지않으며, 남의 결점만 찾아내는 사람은 자기 결점을 찾지못한다.

강철 보다는 강한 반면 파리보다도 약한 것이 인간이다.

마음을 가는 것은 두뇌를 가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

무거운 포도송이일수록 아래로 늘어진다.

신의 천지창조의 마지막 날 인간을 만드신 것은 인간의 오만함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몸을 닦는 것은 비누고, 마음을 닦아내는 것은 눈물이다.

사람들은 길에서 넘어지면 먼저 돌을 탓한다.

이미 행해진 행동은 변하지 않고 남게 되지만, 그러나 인간은 날마다 변해 간다.

신은 인간의 마음을 먼저 보고, 그 다음 그의 두뇌를 본다.

내일 일어날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라. 오늘 현재의 앞일도 모르면서...

매일매일 자기 자신을 죽여가는 자는 이승도 저승도 갈 곳이 없다.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는 것은 순간적인 일이나, 반대로 불행을 행복으로 가꾸는 데는 오랸 시간이 필요하다.

신은 바르게 사는 자를 시험해 본다.

마음의 양식에 관한 격언

3. 교육의 길

 

이상이 없는 교육은 미래가 없는 현재와 같다.

금전의 차용은 거절해도 좋으나 책을 빌려 달랠 때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책으로부터 지식을 배우고, 인생에서 지혜를 배운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을 피하고 도망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지식이란 흐르는 물과 같다.

기도 시간은 짧게 하고, 학문에는 오랜 시간을 보내라.

예루살렘의 멸망은 잘못된 교육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은 지식이다.

신은 인간이 만든 마을과 탑을 보기 위해 왔다.

자기 혀한테 '모른다'는 말을 열심히 가르쳐라.

옳은 것을 배워 나는 것보다 옳은 일을 몸소 행하는 것이 낫다.

자기 결점을 쉽게 고치지 못하더라도 자기 향상을 위한 노력은 계속하여야 한다.

생물 가운데 웃는 것은 인간뿐이다. 그 중에서도 영리한 사람이 웃는다.

세 종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적당히 어리석은 자는 완전히 어리석은 자보다 더 어리석다.

산양이 수염이 있다 하여 랍비가 될 수는 없다.

당나귀가 예루살렘에 가도 역시 당나귀인 것이다.

자녀를 가르치는 최선의 교육은 자기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아들에게 근면함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는 아들에게 절도를 가르치는 거와 다를 게 없다.

신은 항상 어느곳에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어머니를 창조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어른이 되지 않는다. 다만 아이로서 나이를 한살씩 먹을 뿐이다.

어린 아이일 때는 두통을 안겨 주지만, 크면 심통을 안겨 준다.

어리석은 자의 노년은 겨울이지만, 현자의 노년은 황금기이다.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젊은이의 노후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교육에 관한 격언

4. 남녀간의 교제

 

사랑이 아무리 멋저도 테니스에는 무용지물이다.

신은 새 부부가 생길 때마다 새로운 말을 해 준다.

금과 은은 불에 달궈진 다음에야 빛을 낸다.

뜨거운 정열로 결합하지만, 정열이란 결혼만큼 오래 가지 않는다.

결혼식의 연주 음악은 군악대의 음악처럼 활기차다.

정열은 불이다. 그래서 없어서는 안 되지만, 또 그만큼 위험하다.

사람은 쨈과 같이 달지만, 빵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질투는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한개의 눈도 올바로 보이지 않는다.

보드라운 흙으로 빚은 남자를 기쁘게 하는 것이, 딱딱한 뼈로 빚은 여자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 쉽다.

결혼이란 굴레는 무척 무겁다. 부부뿐만 아니라 자식 까지도 함께 운반해야 하니까.

좋은 말에 채찍이 있고, 현자에게 충고가 있다.

자식이 결혼할 때는 신부에게 혼인 증서를 주고, 어머니에게는 이연장을 주어야만 한다.

결혼할 때는 이혼까지도 예상해야 한다.

초혼은 하늘에 의해서, 재혼은 인간에 의해 맺어진다.

결혼을 위해서는 걷고, 이혼을 위해서는 달려라.

섹스는 냇물과 같다.

이상적인 남자는 남자의 강인함과 여자의 부드러움을 함께 갖고 있다.

남자는 두 볼 사이와 두 다리 사이에서 명성이 결정된다.

여자와 싸우는 것은 우산을 받쳐들고 샤워하는 것과 같다.

남녀 교제에 관한 격언

5. 입과 혀의 재앙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사람은 대문이 닫히지 않는 짐과 같다.

새장으로부터 도망친 새는 붙잡을 수가 있으나, 입에서 나간 말은 붙잡을 수가 없다.

당나귀는 긴 귀로써 알아보고, 어리석은 사람은 긴 혀로써 알아본다.

당신의 혀에는 뼈가 없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라.

입보다 귀를 상석에 앉혀라

어리석은 수다는 초상집에 즐거운 음악이 울리는 것과 같다.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곧 배우나, 입을 다무는 것은 어지간해서 배우기 힘들다.

겉치레 인사는 고양이처럼 핥는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진실 중에도 말해서는 안된는 것이 있다.

거짓말 쟁이는 뛰어난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가장 큰 고통은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누에이다. 그들은 항상 입을 놀리고 있다.

당신의 친구는 친구를 가졌고...

물고기는 언제나 입으로 낚인다. 인간도 역시 입 때문에 걸려든다.

입과 혀에 대한 격언

6. 교제하는 방법

 

아무리 친한 벗이라도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고 가까와지면 작아지게 된다.

애매한 친구보다는 차라리 분명한 적이 낫다.

술집 여자와 키스를 하였거든 꼭 당신의 이빨을 세어 보아라.

술집에 간다고 하여 선인이 악하게 될 수는 없다.

늙은이가 젊은 아내를 맞으면, 늙은이는 젊어지고 아내는 늙는다.

꿀을 치다 보면 조금은 꿀맛을 볼 수가 있다.

향수 가게에 가면 향수 냄새가 옮는다.

손님과 생선은 사흘만 지나면 악취가 난다.

소문은 가장 좋은 소개장이다.

밀가루 장수와 굴뚝 청소부가 싸움을 하면...

서로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낯선 사람의 백 마디의 모략보다도 친구 한 마디의 말이 깊은 상처를 남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남의 웃음을 사지 않는다.

신 앞에서 울고, 사람 앞에서는 웃어라.

표정은 분명히 밀고자다.

음식은 냄비 속에서 만들어지나 , 사람은 접시를 칭찬한다.

투박한 항아리 속에도 귀한 술이 들어 있다.

지성만으로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려 하는 것은...

교제에 관한 격언

7. 삶의 지혜

 

꽃양배추에 사는 벌레는 꽃양뱌추를 자기 세상으로 생각한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책의 앞면과 뒷면같은 것이다.

길을 열 번 물어보는 것이 한 번 길을 헤매는 것보다 낫다.

휴일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지, 사람이 휴일에 주어진 것은 아니다.

단번에 바다를 만들려고 해서는 안된다.

0에서 1까지의 거리가 1에서 100까지의 거리보다 길다.

매일을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오래 앉아 있으면 치질이 걸리고...

유태 민족이 안식일을 지켜온 것이라기보다는 안식일이 유태인을 지켜온 것이다.

이상 주의란...

우물에 침을 뱉는 자는 언젠가 반드시 그 물을 마시게 된다.

기적을 바라는 것은 좋지만 그 기적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행운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의지해서는 안된다.

운 없는 사람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등을 쳐도 코가 부러진다.

선행에 대한 가장 큰 댓가는 무엇인가?

선보다 악이 빨리 번진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사람들은 돈을 시간보다 소중하게 여기는데...

정원을 보면 그 집의 정원사를 알 수 있다.

악한 사람은 눈과 같아서 처음 만났을 때는...

위대한 학자가 창시자가 될 수 없듯이...

아무리 길고 훌륭한 쇠사슬이라도 고리 하나가 망가지면 못쓴다.

사람은 자기 고향에서는...

술이 들어가면 비밀은 밖으로 나온다.

식사는 자기의 기호에 맞추고 옷차림은 사회의 풍조를 따르라

자물쇠는 정직한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

아무리 비싼 시계라도 바늘이 가르키는 한...

따분한 사람이 방을 나가면 누군가 방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성공의 절반은 인내심이다.

성공의 문을 열려면 밀거나 당기거나 해야 한다.

삶의 지혜와 격언

돈의 가치 / 마음의 양식 / 교육의 길 / 남녀간의 교재 / 입과 혀의 재앙 / 교재 하는 방법 / 삶의 지혜

유태인의 격언

돈의 가치 / 마음의 양식 / 교육의 길 / 남녀간의 교재 / 입과 혀의 재앙 / 교재 하는 방법 / 삶의 지혜1. 돈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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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나 선교사님 또는 신자분들 중에 주님의사역을 하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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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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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600만명이 살해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나?

 

 

본문말씀에 "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답변입니다.

해 아래의 부조리한 현실은 하나님이 부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숨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상과 같이 인간의 지식과 기대와 형상에 제한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 나뭇조각으로 조각된 신상이 아닙니다.

유한한 형상이 무한한 하나님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종교개혁가들은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스스로 숨어 계십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지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동행한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시내산에서 여호와께서 임재하실 때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온 산이 크게 진동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20:21). 하나님의 계신 암흑은 바로 죄인인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스스로 숨어 계신 하나님 자신을 말합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도 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중세나 동방교회의 삼위일체 성화를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주위에서부터 가운데로 가면 갈수록 점차 어둡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하나님의 범접할 수 없는 신비를 묘사한 것입니다. 일찍이 종교개혁가 루터는 중세 카톨릭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십자가신학을 부르 짖었습니다. 그는 중세 카톨릭교회가 하나님을 창조세계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 권능. 지혜, 선함만을 말함으로써 십자가의 고통과 모욕 속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도 물론 창조세계에 보여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부인하지는 않았 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후서 46"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찬란하게 빛난 곳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슬픔의 얼굴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연적 이성이 신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영광과 권능이 아니라, 영광의 신성의 정반대인 인간예수의 모욕, 가난, 고통, 번뇌, 어리석음, 약함 그리고 죽음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계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은 계시 속에서도 스스로 숨어 계신 하나님이시라 했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영적인 소경인고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그의 지혜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은 이 세상에서는 은폐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은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곧 무능과 비천함 속에서 계시된다. 이미 메시아가 이사야 53장에 예언처럼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고,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고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고 사람들이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는 그런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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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Q,A] 교회 일 하다 편입 실패… 신학교로 바꿀까 고민

 

더 큰일을 위해 준비하는 것도 주의 일… 편입 성공해 많은 것 담는 큰 그릇 되길


[Q] : 제가 출석하는 교회 청년부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4개월 정도 공연 준비를 했습니다. 저는 대학 편입시험을 앞두고 있었지만 주의 일이 우선이다 싶어 준비에 매달려 공부를 소홀히 했습니다. 그 결과 성적은 떨어지고 편입에 실패했습니다. 기도 중 신학교에 가라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고민이 크고 갈등이 심합니다.
 

[A] : 주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리고 선교 공연에 참여하고 헌신한 것도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공연 준비 때문에 편입시험에 실패한 것은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신학교 진학의 경우도 대학 진학에 실패했기 때문에 고려한다면 그것도 잘못입니다.


바울의 경우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아버지 덕에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말리엘 선생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했고 베냐민 지파에 속한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부르시고 선교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에 비해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의 어부였습니다. 정통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제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바울은 신약성경 절반에 가까운 책을 썼고 네 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기독교의 유일성을 변증했습니다. 준비된 사도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학문이나 신분이 주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준비가 미비한 사람과 준비가 철저한 사람은 사역의 중량이 다릅니다.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헌신하십시오. 그렇다고 대학도 포기하고 직장도 포기하고 가정도 포기하고 사회생활도 포기한 채 주의 일을 하겠노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신학교 재학 중인 사람이 어느 날 신학교를 그만두고 모 선교단체에서 주의 일을 하겠다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에게 “신학교 수업도 주의 일이다. 신학 수업을 계속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탈북 후 신학교를 다니던 사람이 저를 찾아와 북한으로 들어가 순교하겠다고 했을 때 “순교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착실하게 공부하고 목사가 되라. 그리고 때가 되면 북한교회를 재건하고 섬기라”고 타일렀습니다.


세상만사에 때가 있습니다. 더 큰일을 위해 준비하고 자아를 개발하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도상 일반대학을 졸업한 후 신학교에 진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 입학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응답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대학에 편입하십시오. 철저하게 준비하십시오. 마음의 준비, 신학 준비, 기도 준비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작은 그릇은 작은 양을 담고 큰 그릇은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신학을 탈출구로 삼지 말고 사역의 출발점이 되게 하십시오.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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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기도는 힘든 것인가 ?    


누가복음 11장 1∼4절

여러분들은 기도가 어렵고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 순서라도 맡으면 부담을 느끼고 예배에 불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성도께선 “목사님 저는 아무개 장로님처럼 은혜롭게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저 기도시키지 말아주세요”라고 신신당부합니다.

기도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 말씀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주기도문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라며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눅 11:2)면서 가르침을 주십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데서 시작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어린이가 아빠 엄마를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도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복입니다.

아빠를 부르듯 ‘아버지여’라고 하나님을 부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이 기도의 시작이며 핵심입니다.

 

유창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은혜롭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힘들고 지치고 괴롭고 절망스러우며 어느 누구도 의지할 수 없을 때

‘아버지’라며 간절히 고백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달려오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허례의식이 강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시며 온 만물을 창조하시고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이시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세 살짜리가 아버지에게 “능력 많으시고 인격자이시며

훌륭하신 아버지여 과자 하나만 주시옵소서”라고 말한다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기도는 어린이가 아버지를 부르듯 자연스럽고 솔직하고 꾸밈없이 나의 마음을 담아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마르틴 루터의 명상의 시간’이라는 책에서

기도할 때 “무릎을 꿇거나 서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은 하늘을 향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당신 개인의 필요와 관심이어야 하는가? 아니다!”라며

하나님의 계명에서부터 시작하라고 합니다.

한때 가톨릭 사제였던 그는 ‘중언부언하는 것’(마 6:7),

다시 말해 뜻 없이 말만 늘어놓거나 쓸데없이 중얼거리며

시간을 채우려는 잘못된 기도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9절부터 더욱 적극적인 기도 생활을 강조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한 행동이며 기도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찾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찾게 하실 것입니다.

두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고

늘 응답받아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경회 제자들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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