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꿈꾸며 살아가야 할까?  

마태복음 6장 19∼34절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가 무엇일까요? 상호 신뢰 없이는 살아가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사회를 신용이 필요한 사회, 신용사회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현금보다 편리한 카드 사용이 일반화되기까지는 개인과 기업의 신용이 담보되어 있습니다. 신용이 무너지면 부도가 나고 파산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같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나를 정말 신뢰하느냐?” 살아계시며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모든 일에 믿음이 없어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문제 대부분이 먹고사는 것과 관련된 게 아닐까요? 그러나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믿음 없는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고백한다면 먹고사는 일에 얽매이는 삶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분의 뜻대로 살아갈까를 고민하며 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을 향한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창 15:6, 롬 4:3).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게 가장 소중한 보물을 하늘에 쌓아 그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 가길 원하십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있기에 나의 마음과 순종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보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도록 요청하십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사로잡혀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의를 이루어가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내가 무엇을 바라보며 꿈꾸는가에 따라 보물의 위치가 결정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 하십니다. 눈이 나쁘면 어둠이요,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입니다. 무엇을 보며 꿈꾸는가에 따라 내 몸이 밝기도 하고 어둠에 갇히기도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마음을 빼앗기면 온몸이 어둠에 갇히며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온몸이 밝을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겨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히 11:26). 모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민족의 지도자로 출애굽의 큰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우리도 눈을 들어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상 주시는 하나님을 소망합시다(빌 3:14). 우리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온 몸이 밝아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같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내게 있어 보물은 무엇인가요? 출세입니까? 돈 명예 권력입니까? 나를 입히시고 먹이시며 필요를 채우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의 아버지로 믿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봅시다.

내 삶의 모든 것을 드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내 삶의 주인이 출세나 돈이나 명예와 권력과 같은 먹고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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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예수가 빛이다   

  

마태복음 4장 12∼23절

이사야서의 전체적인 배경은 ‘흑암’과 ‘어둠’입니다. 이사야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흑암과 어둠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절망하는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실존하는 인간,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절망합니다.

‘믿음 없음’이 곧 절망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절망합니다. 절망은 곧 죄입니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흑암과 어둠은 믿음 없이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사야가 이들에게 비쳐올 것이라고 예언한 빛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가장 먼저 “빛이 있으라”(창1:3)고 하셨습니다. 그 빛으로 어둠을 밝히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보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그 로고스(말씀)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빛이 비치는 곳마다 생명이 싹트게 하는 참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캄캄하고 공허하고 절망적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정치 지도자들이 미덥지 못하거나 범죄자들이 들끓어서인가요.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지 않아서인가요. 그런 것도 한몫하겠지만 근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밝기는 달라집니다. 흑암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빛이고 소망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고,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가르치셨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수많은 무리들이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이후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성난 군중이 됐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돌변한 이유는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 위에 뿌려졌습니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잔인함은 흑암이라 말할 수 있으나 그들의 순교는 결코 흑암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 속에 감춰진 십자가의 영광이며, 그 영광의 빛은 지금까지도 우리를 강하게 비춥니다.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순교한 이들의 삶 속에서 빛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빛을 발했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주현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4:16)는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지어다.

김동진 목사 (맑은샘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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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복음의 비밀은 영광의 소망     

 

골로새서 1장 27절

세상의 소망은 꽃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헛된 영광을 좇아 시기하고 다투며 살아갑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이 세속화되는 이유는 하늘의 영광을 소망하지 않고, 이 땅의 재물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해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복음의 비밀은 그리스도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복은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광입니다. 사람은 죄를 범해 거룩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영광을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으로 받습니다. 이 유업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비밀입니다. 이 비밀은 복음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망은 믿음이 신실한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충성함으로 하늘에서 받는 아름다운 지위와 상급입니다. 이를 사모하는 사람은 거룩하고 흠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구약시대 믿음의 선진들은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큰 민족을 이루고, 가나안 땅을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번성해 왕들이 나올 것이며, 가나안 온 땅을 영원한 기업이 되리라 언약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일부는 여호수아시대에 이루어졌고, 왕들에 대한 약속은 다윗시대에 이루어졌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는 믿음의 선진들이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고 기뻐하며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증거합니다.

참 복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장막에 거한 것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 하늘에 새 예루살렘 성을 예비하십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명예는 달란트입니다.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됩니다. 구약시대는 복음의 빛이 희미했어도 믿음의 선진들이 하늘의 기업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의 소망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과 하나님 앞에 가서 상을 받기에 합당한 삶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장(22장)에서는 예수님 재림의 목적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얻게 되는 하늘의 기업은 생명보다 귀합니다.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이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신앙의 목적을 알지 못해 방황하거나 죄악에 얽매이면 안 됩니다. 주를 향한 소망을 분명하게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게 되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됩니다.

지극히 영화롭고, 아름다운 영광의 자리에 참여합시다. 이 영광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갈망하며 영광의 보좌에 계신 주님 앞에 흠 없는 자녀로 서도록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갑시다.

황혜연 목사 (인천 세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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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어두운 시대의 희망    

 

사무엘상 3장 1~10절

선민사상이 투철한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도 자기의 나라를 부를 때 ‘거룩한 땅(Holy land)’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보다 그 땅이 기름지고 윤택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메마른 땅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땅을 거룩한 땅이라 칭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땅은 불완전한 요소가 많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약속한 축복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의 기초 위에 민족의 공동체가 이루어졌고,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 말씀대로 살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이 형통이요, 복이라는 증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는 시대였다고 증언합니다. 그것은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희귀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소망이 없는 시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려고 아이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이 부름 받은 시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를 구가하던 시대였습니다. 여인들은 포도주에 취하고, 제물을 드리는 때에 황소 한 마리를 드릴 수 있었음을 보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는 질서가 파괴됐던 시대였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처럼 성적으로 타락하였고, 관리들은 뇌물을 받아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재판이 횡행했으며, 군사적으로는 주변 나라들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힘을 잃었던 시대였습니다. 다 돌아보면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의 정의를 바로 선포하여야 함에도, 자신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며 살며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이 땅에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정치적으로 이념 대결이 심화되어 있고, 경제적으로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불균형이 너무도 심각합니다. 무엇보다 더구나 종교적으로는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은 증발돼 사라지고, 제 각자의 이권을 추종하는 작금의 현실은 암담할 따름입니다. 때가 이러한데도 겉보기에 그럴듯하여 살 만하다는 생각에 속기도 합니다.

어려운 시대에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이 일어나 외쳐야 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하며 백성을 꾸짖듯, 엘리야가 아합을 책망하며 백성에게 권고하였듯,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진리의 말씀으로 힘껏 외쳐야 할 때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이 시대를 보지 말고, 이 땅의 문제를 제대로 통찰해야 합니다. 말씀이 홍수같이 쏟아져도 그 말들이 사람에게서만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다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전해야 합니다. 넘쳐흐르는 축복의 말씀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정의의 말씀도 외쳐야 합니다.

이제 영적 침체를 걷어내고 이스라엘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사무엘 같은 주의 종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모두 두려워 떨리라 이는 엘리가 그의 아들들의 죄악을 엄히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주님의 음성이 다시 울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영적 수준을 높여, 어두운 시대의 희망이 되어야 할 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멘.

이선규 목사(서울 금천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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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사람은 신이 아니다     


사도행전 12장 20∼23절

이스라엘에 헤롯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두로와 시돈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대단히 미워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헤롯의 영토에서 식량을 공급받고 있었는데 왕의 미움을 샀으니 큰 불이익을 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왕과 화친하기 위해 헤롯왕의 침소를 담당하고 있는 관리를 설득한 다음 그 힘을 빌려 헤롯에게 화평을 청했습니다.

 

헤롯은 정한 날에 용포를 두르고 옥좌에 앉아 두로와 시돈 사람에게 연설했습니다. 연설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이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다”라고 외쳐댔습니다. 물론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한 아부성 외침이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을 신으로 착각했고, 사람들 앞에서 신처럼 행세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치니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이따금 신으로 자처하면서 신처럼 행세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네로, 프랑스의 루이 14세, 그리고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았던 일본의 히로히토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신처럼 보이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완전하고 특출한 자로 위장해야만 했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부자유스러움과 불안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역사에 큰 혼란의 소용돌이를 일으켰고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왔습니다.

 

사람은 신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완전하거나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잘못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완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언젠가 회의와 실망을 맛보게 될 것이며, 순수한 자기 삶의 즐거움을 상실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완전한 척하는 사람, 허물이 전혀 없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남을 속이고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사람, 잘못을 시인하는 사람, 미숙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 인격자이며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보다 조금 앞서 간다고, 남에게서 몇 마디 칭찬을 들었다고 자신을 신처럼 특출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신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임을 항상 명심하며 인간다운 순수성을 지니도록 힘써야 합니다.

 

내가 신이 아니듯 다른 사람도 신이 아닙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서 신적인 완전성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완전한 자로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자로 인식할 때 이해와 용서가 가능하며 거기에 평화와 행복이 깃들게 됩니다. 사람을 신격화하는 어리석음에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좀처럼 달성하기 어려운 업적이나 성과를 이루어냈다고 신처럼 여기는 것은 우상숭배의 시작입니다. 존중은 필요하나 숭배는 금물입니다.

 

사람을 신처럼 숭배하면, 반드시 상대를 교만에 빠트려 패망에 이르게 할 것이며, 자신은 스스로 사람의 노예가 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하물며 정신병자처럼 스스로 신이나 구세주로 자처하는 사이비 교주들을 신처럼 믿고 추종하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오직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만 하겠습니다.

최윤식 목사(익산 울밖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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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무릎 꿇자 
    


다니엘 6장 10절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정해 놓은 시간이 되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다니엘은 한결같았습니다.

하루 세 번의 기도는 성경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그랬고 고넬료가 그랬습니다. 초대 유대인 성도들도 대부분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세 번이란 숫자는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무엇이든 세 번만 하면 후회하지 않을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겨루기를 할 때도 삼세판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지면 불만이 없습니다. 이기면 제대로 된 승리라고 자부합니다.

다니엘의 기도에서 세 번이라는 수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신에게 무릎을 꿇으면 죽인다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다리오 왕은 조서에서 30일 동안 왕 외에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겠다는 금령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 금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신이 보낸 사람’을 보면서 다니엘을 생각했습니다. 영화에서는 핍박 속에서 신앙을 지켜가던 사람들이 죽이겠다는 위협에는 두 손을 듭니다. 그만큼 목숨을 내놓고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무릎은 큰 도전이 됩니다. 다니엘의 무릎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다니엘의 무릎은 하나님보다 더 크신 자가 없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도 하나님보다 더 크신 이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생명에 위협이 닥쳐도 다니엘처럼 무릎을 꿇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겠다고 결심하지만 자주 포기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사실 하찮습니다. 죽음의 위협도 아닙니다.

 

직장 상사의 위협, 거래처의 위협, 부모의 위협, 형제의 위협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 그렇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위협에 기도하기를 포기합니다.

이유는 하나님보다 이들을 더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나의 생존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무릎은 감사의 고백입니다. 다니엘은 형통하지 않았지만 감사했습니다.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죽음도 불사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도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감사해야 하고, 하나님이 계신 것에 감사하고 출석할 교회가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2014년 사순절을 보내며 저마다 무릎을 꿇고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을 다른 것에 양보하거나 대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목숨에 위협이 와도 이 시간만큼은 고수하겠다는 결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고 하나님의 손은 기도가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무릎 꿇기를 바랍니다. 무릎이 우리 삶의 막강한 에너지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는 다니엘의 모습이 2014년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 교회의 모습이기를 소망합니다.

이강춘 목사(이천 늘푸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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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밑바닥 인생에서 

 
요나서 2장1∼10절

인생을 살다 보면 밑바닥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심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외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만 밑바닥 인생을 살 때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죄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죄와 상관없이 고난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1·4절).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내 고집 내려놓고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 환경과 내 운명에 매여 있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밑바닥 인생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 요나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고통이 자신의 죄로 인해 생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요나는 그 고통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모든 고통이 죄로 인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밑바닥 인생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점검해 볼 수 있는 영성을 지녀야 합니다.

둘째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감사로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9절).

하나님의 백성은 가장 크게 실패했을 때 가장 크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실패 속에서도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라고 했습니다.

지금 고난을 겪고 계십니까?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오셨습니까?

이제 환경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회복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오른손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

 

이 순간의 예배는 나의 눈물과 회개와 헌신이 담긴 최상의 예배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서원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9절).

요나는 자신이 지금 왜 배 밖으로 던져졌고, 물고기 뱃속에 처해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고요하던 바다가 왜 풍랑이 심하게 이는지, 선원들이 제비를 뽑았는데 왜 요나 자신이 뽑혔는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는데 왜 큰 물고기가 자신을 집어삼켰는지, 다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전도자로 쓰시려고 집요하게 붙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이제 요나가 하나님의 그 명령에 순종할 때가 왔습니다.

9절에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요나서 3장을 보면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니느웨 백성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땅을 용서하셨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새 인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하여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감사하고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정수 목사(이수성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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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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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글  /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우리는 풍랑이 이는 바다에 던져진 요나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습니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4절) 이 다급한 상황에서 우리는 전혀 상반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5절)

사공들은 지금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폭풍우 속에서 배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배의 파손을 막기 위해 배 안에 있는 짐을 바다에 던집니다. 그리고 각기 지금까지 자신들이 섬겼던 신에게 기도를 합니다. 그 신이란 사람이 만든 신이요 거짓된 신입니다. 하지만 사공들은 비록 헛된 일이라도 자신들이 지금까지 믿었던 신에게 의지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에 내려가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이 폭풍우의 원인이 요나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잠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기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침체에 빠진 것입니다.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만 보면 헛된 신을 부르는 이방인만도 못한 모습입니다. 오히려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6절).

잠만 자고 있는 요나는 이방인에게 책망을 듣습니다. 이방인 선장은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요.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그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그냥 있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사명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폭풍을 만난 요나가 이제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9절에서 말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요나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나와 같이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요나는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말하고 이어서 폭풍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면서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그리고 단호한 결단을 내리고 선원들에게 말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12절)

요나는 생명을 드립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 버립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자 풍랑이 곧 그쳤습니다. 요나가 드려짐으로 바다가 평정을 찾았고 배가 안정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폭풍 속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는 헌신된 자들을 통해서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는 헌신적인 소리가 한국교회의 함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인호 목사(성남 창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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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소원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각자 소원이 있을 줄 압니다.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솔로몬이 왕이 되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의 소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그에게 주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위대한 신앙인 사도 바울의 소원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는 것”(빌 1:20)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작사한 찬송가가 450장 1절입니다.

이 찬송가는 “내 평생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 왕처럼, 사도 바울처럼, 어떻게 하면 성경에 나오는 이들처럼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4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장 먼저 주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영어 성경 굿뉴스 바이블에는 “Seek your happiness in the LORD, and he will give you your heart’s desire”(시 37:4)라고 돼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대신에 “주 안에서 여러분의 행복을 찾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나의 행복을 찾는 일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또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 길을 그에게 맡겨야 합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5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이 무조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소원은 사람에게 있지만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시 145:19).

하나님은 당신을 기뻐하는 자들의 마음의 소원을 묵살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악인이 형통하며 번영하도록 방치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의 소원에 따라 공의로 불의한 자들에게 갚으십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실 것입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의 소원은 남북통일입니다. 평화로운 통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가이오를 향한 마음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요한3서 1:2).

진정 우리 성도들의 소원은 재림하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종찬 목사(수원성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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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오늘 본문은 세상 권력자들의 홈그라운드인 예루살렘에 들어온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지만 창조주를 영접하지 않는 자기 폐쇄적 인간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에게 있어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극복의 대상입니다. 이런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신이 왕성하게 활동합니다(요 14:30, 요 15:19, 고후 4:4, 엡 2:2∼4; 6:10∼17). 세상 신에게는 죄인을 들뜨게 만드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제국의 신들은 가장 현세적이고 욕망 분출적인 신이었습니다. 이를 믿는 그리스와 로마는 정복욕과 음란, 권력욕과 호전성을 충족시키는 데 열정을 다 바치는 세상이 돼 버렸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1∼10권이 잘 보여주듯 로마는 지극히 호전적이고 음란했으면서도 신을 경배하는 종교적 열기로 가득 찬 세상이었습니다.

 

세상 신은 죽음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무기로 휘두르며 사람을 지배합니다. 일찍이 광야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절대 권력과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약속한 사탄을 책망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로마제국의 군사력을 무력화할 강한 하늘군대를 동원할 생각도 해보셨습니다. 강한 메시아가 되고 싶은 열망을 잠시나마 느낀 것입니다. 그러나 무기력하고 연약한 사람들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무능한 메시아로 죽임당하는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절대 갑’ 로마제국의 통치를 거부하는 ‘절대 을’ 유대인이 강요하는 십자가 처형을 받아들여 절대 갑을 이기는 연약한 메시아가 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죽음의 공포와 혈투를 벌였고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이로써 로마제국과 이기기 위해 그보다 더 강한 제국의 군주가 되겠다는 열망을 극복했습니다. 절대적 고독감과 무기력감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득 채운 하나님의 인격적 현존을 맛보았습니다. 연약한 이들의 메시아가 돼 십자가를 메기로 결단함으로써 힘으로 세상을 이기는 ‘강력한 메시아’의 욕망을 이겼습니다.

세상의 환란은 우리에게 이해타산적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기보다 당장 자가 구원의 방책을 강구하라 다그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은 심지어 하나님께도 버림받는 길이라며 그런 고독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겁줍니다. 다소 불의하더라도 든든한 인맥 안에 머물러야 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혼자 버려진 그 순간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득 채운 시간임을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긴 방법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인 것도 신앙의 승리라 볼 수 있지만 절정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홀로 버려진 것처럼 보였지만 3일 만에 부활하면서 자신을 죽인 세상 권력자들을 영구적으로 패배케 하셨습니다.

 

혹시 세상에 혼자 내버려진 것 같습니까? 흔들리지 않는 신적 평안을 누릴 때 우리는 세상을 이깁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는 자, 그가 바로 세상을 이긴 자입니다.

김회권 목사(숭실대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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