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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의 헌신으로 있게 된 한국교회    

 

파이오니아 스티브 리처드슨 목사, CTS뉴스 출연

 

 

▲파이오니아 대표 스티브 리처드슨 목사. ⓒCTS 제공


순수복음방송 CTS기독교TV(이하 CTS)가 19일 CTS뉴스에서 파이오니아 대표 스티브 리처드슨 목사(이하 리처드슨 목사)를 초청했다.

40년전 리처드슨 목사 장인인 테드플레쳐에 의해 설립된 파이오니아는 시편 2장 8절 말씀인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를 붙들고 30년간 미전도종족과 전 세게복음전파에 힘쓴 국제선교단체다. 현재 100개가 넘는 나라에 300개 선교팀, 3,000명이 넘는 사역자가 있다.

특히 파이오니아는 ‘미전도종족’ 선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1만개가 넘는 종족이 있고, 6,900개의 언어가 있는 가운데 4,000개의 종족이 ‘미전도종족’으로 분류되어 있다.

리처드슨 목사는 “이 사역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 충만하고, 언어 습득에 탁월한 일꾼”이라며 “아직도 수많은 미전도종족에 선교팀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또 리처드슨 목사는 “한국교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복을 주셨는지 안다”며 “선교사들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현재 한국교회는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 이전 세대의 선교 열매임을 잊지 말고 이 열매를 전 세계에 나누고, 전파하는 한국교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김신의 기자 ewhashan@gmail.com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원본링크]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20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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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평양 대부흥운동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일어나 전국 교회로 확산된 한국 교회의 대표적 부흥운동. 이 부흥운동은 1월 6일(주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양 시내 네 교회 연합집회 형태로 시작되었다. 교회 장소가 협소하여 여자 교인은 자기 교회에, 남녀 중학생과 소학생들은 자기 학교 강당에 모였고, 남자 교인들만 2천여 명이 장대현교회당에 모였다.

이때만 해도 한국인 목사가 없어 부흥회는 선교사들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한 주간 동안 길선주 장로(당시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음)는 한국 최초의 새벽기도회를 통해 큰 은혜를 끼쳤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아간'과 같은 죄인임을 고백하며 회개했고, 이를 계기로 수많은 교인들의 회개가 터져나왔다. 1주간 내내 회개가 계속되자 소문을 들은 방은덕(方恩德)이라는 순포(경찰)가 흉악범을 잡으러 집회에 참석했다 자신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일화도 있다.

무르익은 집회는 1월 14일 월요일 저녁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블레어(W.N. Blair)의 설교로 절정에 달했다. 고린도전서 12장 27절 말씀으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는 블레어 선교사의 설교가 끝나고

 수백 명의 성도가 통성으로 기도할 때 성령의 큰 역사가 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대중 앞에서 구체적으로 자복하며 눈물로 회개했다. 반목과 질시하던 자들이 껴안고 화해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이런 감동적인 회개 역사는 새벽 2시까지 지속되었다.

이를 목격한 한 여자 선교사는 "입으로 고백하기 어려운 상상할 수 없는 무섭고 추한 죄악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지옥 지붕이 젖혀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고 술회했다. 또, 당시 런던타임즈는 "마치 밖으로부터 뭔가 물밀듯 밀려드는 강력한 힘의 임재에 압도당한 듯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역사는 화요일 아침 숭의여학교에서, 수요일 아침에는 숭덕학교에서도 일어났다. 김찬성 조사가 설교할 때 어린 학생들이 큰 은혜를 받고 수업을 중지한 채 오후 1시까지 통회 자복의 기도회가 지속되었다. 각 곳의 여자중학교와 부녀자들의 모임에서도 이런 역사는 계속되었다.

선교사들만 모이는 정오 기도회에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기도회를 30분간 연장하여 오후 2시까지 할 정도였다. 이 놀라운 평양 대부흥회는 그 해 봄 길선주 장로의 서울 집회에서도 나타났고, 이런 부흥의 불길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 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과 더불어 경건하고 건전한 부흥운동의 모델을 제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를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출처 : 교회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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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예수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유석성 서울신학대총장, "예수 이름 팔아 정당 조직" 직격탄
"정당 정치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 실천해야"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한국 교회가 기복주의, 물질만능주의, 맹목적 반(反)지성주의에 빠져 인간의 욕심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해버렸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물질, 권력, 명예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개교 100주년을 맞은 서울신학대의 유석성 총장은 31일 취임 1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교회의 현실과 최근 일부 목사들의 정치 참여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유 총장은 "예수님의 정신은 3가지 단어로 요약해 말할 수 있는데 사랑과 정의와 평화"라면서 "사랑은 정의로 구체화되고 정의를 행함으로써 평화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한국 교회는 너무 풍성해지고 부자가 돼 중세 교회처럼 제도화되면서 병폐가 나타났다"면서 "물욕, 명예욕, 권세욕이 한국 교회의 병폐이며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예수의 정신, 희생정신이 한국 교회의 치유제이자 정화제이며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유 총장은 "한국 교회가 시작할 때부터 잘못됐다"면서 "한국 교회가 개화기부터 사회봉사, 의료 등 큰 역할을 해왔지만 개인의 영혼 구원만 강조하다 보니 천당 가기까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70-80년대) 경제 성장과 맞물려 교회 성장이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사람만 많이 모으면 성공한 목회자가 됐다"면서 "이러한 교회 성장주의가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 사태', 교회 세습, 교회 내 목회자 간 알력"이라고 말했다.

최근 일부 목사들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유 총장은 "기독교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비(非)정치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교회, 목사, 신도, 신학자는 있을 수 없다"면서 "정치 참여를 하되 정당 정치가 아니라 사회적 예언자적 기능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당 창당 등의 방법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일부 목사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지탄을 받는 분들이 선거철만 되면 예수의 이름을 팔아서 정당을 조직하는 것은 시의적절치 않고 방법도 올바르지 않다"면서 "철새처럼 나타났다가 선거철만 끝나면 사라지지 않겠느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나는 보수도 진보도 아니며 복음적"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유 총장은 "(정당 창당은) 원론적으로 할 수 있으며 독일에도 기독교 민주당이 있지만 다종교 국가(한국) 안에서 (기독교 정당을 조직하는 것은) 지금으로는 성공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유 총장은 그러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실천을 강조했다.

그는 "사랑은 진공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실천하지 않는 사랑은 의미가 없다"면서 "독재 정권 시절 자신은 비정치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독재 정권을 유지, 옹호, 확대,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또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의 90%가 기독교인이었는데 어떻게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죽일 수 있었느냐는 반성에서 독일의 정치 신학이 나왔다"면서 교회가 사회적, 공적인 책임을 다하자는 것이 정치 신학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독일의 '행동하는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전문가로, 한국본회퍼학회장인 유 총장은 "정치 신학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본회퍼"라면서 "본회퍼는 기도하는 것과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되는 두 가지 조건이라고 했으며 '기도'와 '사회 정의'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 3월 13일 개교 100주년을 맞은 서울신학대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 소속으로, 한국의 전설적인 부흥사 이성봉 목사, 한국 교회의 대표적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 여성독립운동가 백신영 전도사 등 많은 개신교계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개교 100주년을 맞아 예수의 정신인 사랑과 정의, 평화를 실천하는 인물 양성을 목표로 신입생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를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는 등 인문 교육, 현장 중심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유 총장은 "예수님의 정신으로 사랑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인물, 한국 교회를 치유할 수 있는 인물을 키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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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종교 아닌 기독교 이단’ 경계하되 긍휼 대상으로 이해
 불링거 “거짓 선지자 무함마드는 교활하고 위선적 …
꾸란은 고대 교회 모든 이단의 거짓을 모은 것에 불과” 질타

 


▲ 유해석 선교사(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 전문위원)

종교개혁은 유럽사회가 로마 가톨릭교회 중심의 중세적 질서체제에서 근대적 민족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한편 이 시기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을 향한 군사적 팽창과 영토 확장이 최고조로 달했던 순간이었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구교와 신교의 갈등이 고조되던 16~17세기는 오스만 제국에게 유럽으로 영토확장을 위한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종교개혁 직후인 1520년 오스만 군대는 헝가리를 침공하여 중부유럽을 장악했고, 여세를 몰아서 1529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오스트리아 빈까지 포위했다. 오스만 군대의 빈 공략은 유럽 전체가 공포에 휩싸일 정도로 가공할만한 사건이었다. 또한 이 무렵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그 어떤 시기보다 고조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심지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기독교인들이 줄을 잇는 것을 보면서 이슬람의 유럽 점령이 가시화 된 것뿐만 아니라 이슬람화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이슬람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루터, 칼빈, 쯔빙글리, 불링거와 같은 신학자들이 있었지만 가장 이슬람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이슬람 책을 저술하였던 신학자는 불링거(Johann Heinrich Bullinger, 1504~1575)였다. 그는 스위스 취리히의 종교개혁자로서 40년 이상 교회를 효과적으로 이끈 탁월한 지도자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혼란했던 시기에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신학자요, 설교자요, 상담가였다.

1. 이슬람에 대한 불링거의 이해

 

첫째, 불링거의 저서 <터키>(Der Tuergg)를 통해 본 이슬람

불링거는 1567년에 <터키>(Der Tuergg)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여기에서 터키란 당시 오스만 터키라는 의미와 함께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내용상 ‘이슬람’이라고 써도 무방하다. 이 책은 이슬람에 관한 불링거의 가장 중요한 책이다. 그는 이 책의 표지에 요한계시록 9장 16절과 17절을 실었다.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이 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그는 그 시대에 터키인들이 유럽으로 물밀 듯이 쇄도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루터처럼 어떤 종말적인 분위기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책의 첫 장의 제목이 ‘이슬람의 신앙과 거짓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하여’이다. 그 책의 첫 문장을 “터키인들의 신앙은 무함마드의 신앙이다”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바로 이어진 문장에서 그는 무함마드를 교활하고(listig), 비열하고(dueckisch), 위선적(glychssnerisch)이라고 특징지었다. 이 책의 둘째 장의 제목은 ‘기독교 신앙만이 참된 신앙이며 그렇게 남아 있다’인데, 첫 문장이 “한 마디로 하나의 오래되고 참되고 거룩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신앙이 세상의 시작부터 있었는데”라고 하여 기독교 신앙의 진리성을 천명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무슬림의 신앙과 삶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이다. 특별히 불링거는 디모데전서 4장과 골로새서 2장을 인용하면서 무함마드와 그와 같은 교훈들을 심지어 ‘사탄의 교훈’(tuefeles leeren)이라고까지 불렀다.

 

둘째, 이슬람은 기독교 이단

불링거는 이슬람을 타종교가 아닌 기독교 이단으로 보았다. 그가 1566년에 펴낸 것으로 여겨지는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에서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하면서 이슬람의 가르침을 ‘잘못된 가르침’(Irrlehren)이라고 하였으며 이슬람교도들을 가리켜 이단자라고 칭하였다.

뿐만 아니라 꾸란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삼위일체와 같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특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부정하고 유일한 중보자로서의 존재도 부정하는 이단이라고 생각했다. 이슬람의 이단성을 처음 연구한 사람은 현재의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살았던 비잔틴 신학자 요한네스(Johannes)였다. 그는 무함마드가 죽은 지 약 20년 후에 태어났다. 만수르(Mansour)의 명문가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이슬람군주 무아위야 1세(Muawiyah1, 602~680) 아래에서 재무부장관을 지냈다. 무아위야 1세의 뒤를 이은 왕이 기독교에 적대적인 정책을 펴자 요한네스는 예루살렘 근처의 마르사바(Mar Saba)수도원에 은신하여 이슬람을 연구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저술인 <지식의 근원> ‘제2부 이단에 관하여’ 에서 이슬람을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그 이유는 “무함마드가 이단이였던 아리우스파 수도사로부터 정보를 받아서 이슬람이 시작되었으며, 꾸란에서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며, 영으로 언급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이단이다”라고 하였다. 불링거는 요한네스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셋째, 불링거의 꾸란에 대한 이해

불링거에게 꾸란은 고대 교회의 모든 이단들의 거짓을 모은 것에 불과하다. 꾸란의 기원을 하나님이 아니라 무함마드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더불어 꾸란에 담겨있는 이단적인 요소들을 지적하였다. 무함마드가 신에게 받았다고 하는 계시와 비전(Vision) 역시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꾸란은 이단 사제의 도움과 완고한 유대인과 잘못된 기독교인의 조언이 섞였으며 아리안(Arians), 마케도니안(Macedonians), 네스토리안(Nestorians)과 같은 이단들에 의하여 부패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꾸란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유일한 중보자 되심도 부인한다. 이같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부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기독교 신앙의 주된 교리의 부인한다. 불링거는 금식, 기도, 구제, 알라와 이슬람을 위하여 싸우다 죽음으로서 모든 죄에서 해방된다는 교리를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을 무함마드에게 묻는다. 또한 영생, 예배, 결혼 등에 대한 꾸란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았다.

 

넷째, 이슬람 지배 아래서 기독교인의 태도

불링거는 1551년 헝가리의 이슬람 정권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헝가리 기독교 지도자들의 편지에 대하여 1551년 6월에 선명하고 원론적인 답신을 보냈다. 성경의 신자들이 사도시대에 우상을 숭배하는 로마제국 아래서도 살았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의 통치 아래서 바벨론 포로가 된 상태에서도 살았다. 이러한 신뢰 속에서 불링거는 헝가리 신자들에게 예레미야의 가르침을 근거로(렘 29:7) 평안 중에 삶이 유지될 수 있도록 무슬림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특별히 불링거는 헝가리와 동유럽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우리 모두의 죄악과 관련된 것임을 밝혔다.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의) 회초리를 벌었다.” 불링거는 헝가리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이슬람 종교로 인한 고통을 탓하기 전에 그들 자신들을 먼저 살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링거는 헝가리 교인들에게 핍박이 올지라도 하나님이 금지하신 이슬람의 신앙과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불링거 역시 루터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침략을 하나님의 징계로 보았고, 이와 관련하여 헝가리 기독교인의 회개와 경건회복이 요청된다는 것을 편지에 언급하였다.

 

2. 불링거가 주는 교훈

이슬람에 대한 불링거의 견해를 다루면서 우리에게 주는 두 가지의 교훈이 있다. 하나는 분별의 척도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기독교 입장에서 보았을 때, 많은 부분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우리 신앙의 근간이 되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이슬람에서 유일신에 대한 고백은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대한 고백은 없다. 또한 우리 신앙에 있어서 핵심적인 내용은 대속의 은혜인데, 예수의 주 되심을 부인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대속이 없고 공덕에 의한 구원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한 점에 있어서는 당연히 경계의 대상이다. 우리 시대에 그들이 아무리 미사여구의 평화의 말로 접근해 올지라도 그들의 정체를 바로 알고 경계해야 한다. 또 하나는 이슬람에 대하여 경계할 것은 경계하되 그들 역시 선교의 대상으로 여기며 긍휼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불링거는 하나님의 백성 밖에 있는 자들의 믿음과 삶에 대하여 보다 긍정적인 암시를 제공한다 즉 무슬림 또한 전도와 선교의 대상이란 점에 있어서 긍휼의 여지는 있다. 특히 이 점은 불링거에게 있어서 돋보이는 점이다.

 

3. 이슬람에 대한 불링거의 적용

종교개혁 당시와 같이 다시 한번 21세기 거대한 종교로 우뚝 선 이슬람은 국제사회를 공포와 위협으로 압박하며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다. 한국 또한 박근혜 전 대통령 때 구체화된 친 이슬람정책으로 인하여 작년 한 해 동안 이슬람 관광객 1백만 명이 우리나라를 다녀갔으며 할랄 시장의 확대 등 정부는 이슬람 인구를 맞이할 준비로 분주한 듯하다. 이슬람은 더 이상 중동의 종교가 아니다. 전 세계 이슬람 인구의 3분의 2가 아시아에 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이슬람 인구가 많은 나라는 국민의 80%가 무슬림인 인도네시아(약 1억9000만) 두 번째, 인구의 96%가 무슬림인 파키스탄(약 1억7000만) 그리고 인구의 89%가 무슬림인 방글라데시(약 1억5000만) 등이다. 이 나라 이외에도 이슬람 국가인 우즈베키스탄과 키르키스탄 등 5개국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는 인력 송출국 속에 포함되어 우리나라에 정착하고 있다. 또한 한국인 이슬람 인구도 성장하고 있다. 1956년 208명이었던 한국 이슬람인구는 1970년 3700명, 2009년에는 9만1000명으로 성장하였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슬람의 도전 앞에 이슬람을 철저히 연구하였고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에 따라서 더 이상 이슬람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밀려오는 이슬람의 도전 앞에 한국교회는 응전을 준비해야 한다. 이슬람이 세상을 뒤흔든다고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수단에 불과하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이해 위에서 세상을 보고, 교회의 역할을 권고했다. 지금 세대에도 동일한 눈을 가진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전진되기를 바란다. 한국교회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이슬람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이슬람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며, 이슬람을 무조건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루터나 칼빈, 불링거처럼 객관적이고도 정확한 이해를 통해서 무슬림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전도해야 하는 대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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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상 英선교사, “한국교회의 회복, 전도 실천에 그 길이 있다” [2017-12-17 20:43]


전도안내書 ‘회복해야할 사명, 전도’ 출간

 

 

▲최종상 선교사


“한국교회의 회복, 전도 실천에 그 길이 있습니다.”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에서 17일 만난 암노스유럽선교회 대표 최종상(65·영국) 선교사의 말이다.

최 선교사는 최근 ‘회복해야할 사명, 전도’(성서유니온, 386쪽)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에 던지는 회복과 실천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는 “전도에 대한 대부분의 방법은 교회가 상당한 교세를 갖고 있고 불신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을 때 만들어졌다”며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자신의 삶으로 그리스도인의 진정성을 보이지 않으면,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성경적 분석을 많이 했지만 이 책은 전도 이론서도 아니고 어떤 신학적 견해를 강력하게 주장하지도 않는다. 또한 몇몇 전도 사례를 담았지만, 전도 간증집도 아니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이 책은 성경적 원리와 현장의 전도경험에서 배운 진리 및 원리를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소망을 엮은 것”이라고 소개했다.


권성수 대구동신교회 목사는 추천사에서 “이 책은 전도 실천을 통한 선교의 활성화라는 관점에서 획기적인 공헌을 할 것”이라고 했다.

김병선 인도네시아 선교사는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전도의 당위성을 깨닫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전도를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게 될 것”이라며 “특별히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읽고 사역에서 전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하게 되길 기대한다“며 추천했다.


김용훈 미국 열린문장로교회 목사는 전도가 부담스럽고 불편한 이에게 이 책을 권했다.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는 “한국교회가 힘을 잃은 이유는 전도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다시 말해,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만한 분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하나님이 최 선교사를 통해 다시 이 땅에 전도의 사명을 불러일으키신다”고 했다.

김 목사는 ”잃어버린 한 영혼을 사랑하는 저자의 진솔한 마음을 담은 책“이라고 평했다.

 

최 선교사는 1995년 로마서 연구로 런던바이블칼리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모교에서 신약학 연구교수와 객원교수 등으로 활동했다.

이후 이스트버리교회를 개척, 영국인 성도가 100여명인 교회로 성장시켰다.

OM국제선교회 로고스호가 1978년 부산과 인천항을 방문했을 때 자원봉사자로 4주간 봉사했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 로고스호에 승선, 5년간 전도 사역에 힘썼다.

특히 둘로스호 단장으로 50여 나라에서 모인 350여 선교사들의 공동체와 사역을 이끌기도 했다.

사역을 마친 뒤엔 급격한 교회 감소 추세를 이어지고 있는 영국과 유럽의 재복음화를 위해 영국에 암노스유럽선교회를 설립했다.

암노스 교회개척학교 학장으로 섬기면서 영국 사역자들이 건강하게 목회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있다

2015년부터 매년 어라이즈 전도활동을 주관하면서 여러 영국교회에 전도 인력을 지원하고 있다.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출처] 국민일보
[원본링크]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1987195&code=61221111&sid1=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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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인 틀을 다지는 한국교회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그 해 최초의 독노회가 결성됨으로써 한국장로교회는 명실상부하게 민족교회로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 남북감리교회가 하나로 합동하여 협성신학교와 별도로 운영해오던 여자신학교를 합해 감리교 신학교를 태동시키게 되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조직은 19053월 처음으로 개강하게 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설립과 신학교로서의 견실한 틀을 갖추어 가면서 구체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평양신학교를 주도한 선교사들은 마펫(마포삼열), 언더우드, 클락(곽안련) 등이었다. 이들은 19076월에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송이서, 방기창, 이기풍 등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해서 그해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했다.

 

평양신학교는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관련하여 설립되고 육성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성경공부와 사경회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평양신학교가 명실상부한 신학교로서의 자리를 잡아가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한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하면서 1907년 가을 독노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독노회가 결성되면서 한국교회는 소위 12신조로 알려진 장로교신앙에 기초한 신앙고백을 채택한다.

 

초기 한국교회 해외선교는 살펴보면 대한예수교장로교는 1907년 첫 졸업생인 이기풍을 선교사로 제주에 파송함으로 시작된다. 평양에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에게 돌을 던지며 복음을 방해했던 이기풍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복음의 불모지인 제주도에 선교사로 떠나리라는 것을 누구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선교의 역사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해외선교 열을 강하게 불어넣는 전기가 되었고 그 결과 일본으로 확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열정이 멀리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선교까지 이어졌고 만주와 중국선교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간도까지도 복음의 열정이 전해지게 되었는데 그곳은 중국인보다 더 많은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간도는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의 선교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한국교회가 이곳으로 사역자를 파송하여 복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신앙의 모델을 보여 준 곳이다. 그리고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중국 시민으로 귀화하거나 혹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동족만이 아니라 중국인 선교에도 유익하게 작용하여 만주선교는 곧 이어 진행된 중국선교를 위한 초석이 되도록 했던 곳이었다.

 

한국 장로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선교에 힘쓰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흘린 복음의 선혈이 이런 선교의 열정이라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복음에 빚진 자.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복음에 빚진 자이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복음에 빚진 자이다. 그리고 지형학적인 위치에 있어서도 유라시아로 출발하는 전초 기지의 역할을 감당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좋은 곳이다. 21세기 한국 교회의 사명은 바로 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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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과 성도의 교제

 

성찬에 대한 피상적이해는 교회의 쇠퇴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성찬에 대한 몇가지 단상을 쓰고자 한다. 이 글을 통해서 성찬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

 

1.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사귐[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원문으로는 communio sanctorum이라고 표기되는데 이것은 성도의 사귐이라고 번역될 수 있고 "거룩한 것에 참여"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초대 교회에는 거룩한 것에 참여라는 것이 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참고:여기에 대한 최고의 권위서는 Werner Elert, Eucharist and Church Fellowship in the First Four Centuries] 따라서 성도의 사귐은 단지, 친교의 의미를 넘어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며, 이것은 그 자체가 구원이다. 그렇다면, 성찬을 지금보다 현저하게 자주 시행하는 것은 한국 개혁교회의 과제라고 볼 수 있다.

 

2. 세례와 성찬. 우리는 이 2가지 성례만을 인정하는데, 세례는 한 번만 시행하고 성찬은 계속적으로 시행한다. 왜 그럴까? 세례는 칭의에 성찬은 성화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세례가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주어진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성찬은 이 언약에 참여한 성도가 계속적으로 누리는 복이라고 할 수 있다.

 

3. 왜 목사만 성례를 집행할 수 있는가? 목사를 말씀의 종이라고 한다. 말씀은 들리는 말씀인 설교와 보이는 말씀인 성찬과 세례로 구별할 수 있다. 따라서 보다 구체적으로 목사는 말씀과 성례의 종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목사들은 명백하게 직무 유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성도들이 1년에 2-3번 정도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영적으로 부요한 삶을 누릴 수 있겠는가? 이제 말씀의 사역자들은 보이는 말씀에 보다 관심을 많이 기울여야 한다. 세례 교육을 강화하여야 하고 성찬식을 자주 시행하여야 한다. 성찬식을 자주 시행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을 돌아보는 것, 즉 심방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생각해보라. 예식 만을 따진다면, 일반 성도들도 세례나 성찬을 베풀지 못할 이유가 없다. 몇번만 연습하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세례나 성찬이 목사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성찬과 세례가 단지 그 예식 자체 뿐만 아니라 그 예식을 위한 목양, 즉 세례문답교육과 심방(권징)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3. 떡과 포도주가 각각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유월절에는 떡(무교병)만 사용된 반면 신약의 유월절인 성만찬은 포도주를 첨가시키고 있다. 주로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와 연결이 되고 따라서 포도주는 생명과 쉽게 연결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물이 아니라 포도주를 사용했을까? 또한 포도주가 생명을 지칭한다면 생명을 지칭하는 빵과 포도주의 궁극적인 차이점은 무엇일까?

 

최근에 Bread of Life, Cup of Joy라는 책이 나왔는데, 말 그대로 떡은 우리의 생명을 지칭하고 포도주는 기쁨을 지칭한다. 즉 빵과 포도주는 각자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성찬 설교 때, 우리는 단지 성찬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본문만을 다룰 것이 아니라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 오병이어의 사건, 시편에 나오는 "구원의 잔을 들고"라는 구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축사하시는 장면, 등등을 통해서 얼마든지 성찬을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기쁨을 회복시키는 메시야로 나타내셨다. 그리고 이것은 이사야 55장에 나오는 "너희는 와서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말씀의 성취로 볼 수 있다.

 

4. 기쁨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오늘날 장례식과 비슷한 성찬식은 또한 극복되어야 한다. 주로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성찬식이 제정된 사실때문에 한국교회는 너무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것은 구속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성찬식은 십자가 전이지만, 우리는 부활 이후를 살아가는 성도이다. 제자들 역시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에 성찬식을 하지 않고, 부활하신 날 성찬식을 베풀었다. 그렇다면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동시에 고려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신약 교회에서, 성찬식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누릴 식탁 교제를 지금 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영적 임재설에 대한 오해. 많은 사람들이 개혁파 성찬론은 영적 임재설이라는 것은 알면서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기념설과 비슷하게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영적 임재설은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떡과 포도주에 임한다는 말이 아니다. 영적 임재설을 풀이한다면, 예수님의 참된 몸과 피가 성령에 의하여 떡과 피에 임한다는 뜻이다. 다시말하면, 영적 임재설은, 성령적 임재설, 혹은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의 참된 임재를 뜻한다.

 

여기서 다른 견해들과 비교를 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카톨릭: 떡과 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완전하게 변함. 이것은 사제(신부)의 중보적 역할의해 가능함. 보라! 사제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 떡을 예수님의 살로 변화시킨다.

 

루터란: 예수님의 진짜 살이 떡 "위에, 아래에, 그리고 떡과 함께" 임한다고 본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루터란의 독특한 기독론에 근거한다. communicatio idiomata라고 부르는데 그리스도의 양성, 즉 신성과 인성이 교류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실제 몸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 때문에 어느 곳에나 편재(ubiquity)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 루터교의 성찬론의 핵심은 기독론에 있다.

 

쯔빙글리 및 복음주의: 성찬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시키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실천적인 면에서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6. 다른 교리들과 비교해 볼 때, 개혁주의 성찬론은 성령론이 핵심인 것을 그대로 알 수 있다. 개혁주의 성찬론의 최고의 이론가는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예수님의 참된 살과 피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성찬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인간이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하시면, 우리 육신의 입은 떡을 먹지만 우리의 영혼은 그 양식을 영혼의 입인 믿음을 통해서 먹는다고 말하였다. 그야말로 성찬은 spiritual meal인 것이다. , 성찬식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참되게 혹은 정말로 참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다.

 

7. 카톨릭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과 루터란의 공재설[consubstantiation]은 서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지상으로 끌어내린다는 것이다. 반면, 개혁파 이론은 우리의 영혼을 예수님이 계신 하늘로 올리는 이론이다. 그래서 개혁파는 오랫동안 교회의 성찬에서 사용된 성찬용어 Sursum Corda [내 마음을 들어 올립니다]를 핵심적인 위치에 놓았다. 엄밀히 말해서 떡과 포도주에 주의 살과 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들어 올려져서 하늘에 계신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다.

 

8. 참고로 루터란과 카톨릭은 Altar[제단]라는 말을, 개혁파는 table[식탁]이라는 말을 쓴다. 이 점에서 한국교회의 성찬은 카톨릭을 더 닮았다. 이것 또한 극복되어야 한다. 성찬은 카톨릭의 미사가 아니라 식사(Lord's Supper)이다. 식사의 시간은 즐거운 교제의 시간이다.

 

카톨릭이 성찬을 주로 sacrifice [희생제]로 보는 반면에 개혁파는 eucharist [감사제]로 본다. 성찬에 있어서, 카톨릭은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개혁파는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받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카톨릭에 있어서 성찬은 공로 [무엇을 드리는 것]이라면, 개혁파에 있어서 성찬은 은혜 [우리가 받는 것]로 이해된다.

 

9. 우리는 정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가? 아니면 주일날 앵무새 처럼 외우기만 하는가? 더 나아가 우리의 삶과 예배 속에서 이 고백이 어떻게 실천되고 경험되고 있는가? 성찬론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의 교회를 다시 회복시키고 부흥시킬 수 있는 실천적인 이론이다. 우리의 고백이 실천으로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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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인 틀을 다지는 한국교회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그 해 최초의 독노회가 결성됨으로써 한국장로교회는 명실상부하게 민족교회로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 남북감리교회가 하나로 합동하여 협성신학교와 별도로 운영해오던 여자신학교를 합해 감리교 신학교를 태동시키게 되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조직은 1905년 3월 처음으로 개강하게 된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설립과 신학교로서의 견실한 틀을 갖추어 가면서 구체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평양신학교를 주도한 선교사들은 마펫(마포삼열), 언더우드, 클락(곽안련) 등이었다. 이들은 1907년 6월에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송이서, 방기창, 이기풍 등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해서 그해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했다.

 

평양신학교는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관련하여 설립되고 육성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성경공부와 사경회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평양신학교가 명실상부한 신학교로서의 자리를 잡아가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한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하면서 1907년 가을 독노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독노회가 결성되면서 한국교회는 소위 12신조로 알려진 장로교신앙에 기초한 신앙고백을 채택한다.

 

초기 한국교회 해외선교는 살펴보면 대한예수교장로교는 1907년 첫 졸업생인 이기풍을 선교사로 제주에 파송함으로 시작된다. 평양에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에게 돌을 던지며 복음을 방해했던 이기풍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복음의 불모지인 제주도에 선교사로 떠나리라는 것을 누구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선교의 역사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해외선교 열을 강하게 불어넣는 전기가 되었고 그 결과 일본으로 확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열정이 멀리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선교까지 이어졌고 만주와 중국선교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간도까지도 복음의 열정이 전해지게 되었는데 그곳은 중국인보다 더 많은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간도는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의 선교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한국교회가 이곳으로 사역자를 파송하여 복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신앙의 모델을 보여 준 곳이다. 그리고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중국 시민으로 귀화하거나 혹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동족만이 아니라 중국인 선교에도 유익하게 작용하여 만주선교는 곧 이어 진행된 중국선교를 위한 초석이 되도록 했던 곳이었다.

 

한국 장로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선교에 힘쓰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흘린 복음의 선혈이 이런 선교의 열정이라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복음에 빚진 자.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복음에 빚진 자이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복음에 빚진 자이다. 그리고 지형학적인 위치에 있어서도 유라시아로 출발하는 전초 기지의 역할을 감당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좋은 곳이다. 21세기 한국 교회의 사명은 바로 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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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 언어교육원 중국선교 사명자)

 

중국교회와 한국교회를 통한 세계복음화 운동

                         

서론


중국의 선교 전략과 활동을 논의하는 것은 2가지 이유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첫 번째 중국은 엄청나게 큰 땅과 많은 인구 그리고 복잡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서 현대 중국선교에 대한 모순적인 증언들이 모두 옳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중국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고 가정교회들에 대한 박해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증언이다.

예를 들어서 베이징의 대형 가정교회(쇼우왕교회)는 2011년 4월에 중국정부에 의해서 폐쇄되었고 교회 건물을 몰수되었다. 담임목사였던 진 티안밍과 다른 목회자들은 모두 가택 연금되었다. 반면에 다른 지역의 가정교회들과 신학교들 특히 중국 남부에는 제한적인 종교적 자유 속에서 다양한 활동을 위해 공개적으로 모일 수 잇다.

두 번째, 외국인 교회 지도자들은 보안상의 이유로 인해서 공개적으로 중국교회를 논할 때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인 시진핑의 체제 아래서 많은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감옥에 갇혔고, 외국인 선교사들, 특히 많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최근에 중국에서 추방되었다. 이론적으로 중국에는 외국인 선교사가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중국 정부가 선교사 비자를 발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에는 수천명의 선교사들이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는 세계 선교에 있어서 중국교회의 중요성을 지적하기 원한다. 그 이유는 앞으로 중국교회가 세계복음화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경제성장과 더불어서 교회의 급격한 성장으로 중국은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인이 살고 있다. 중국교회의 역할을 특히 이슬람 세계의 복음화에 매우 중요하다.

본 논문의 주요 논지는 현대 중국교회의 핵심 사안이 중국의 성장하는 교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위한 지도자 교육이다.

중국교회가 물질주의에 물들기 전에 앞으로 10-20년동안 700개의 신학교를 위해서 수백 명의 중국인 신학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중국의 신학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개혁주의 교회들 중에서도 기독교 교육을 특별히 강조하는 한국 장로교회는 중국의 지도자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할 필요가 있다.

비록 중국의 모든 개신교 교회들이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라는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지지만 미래에는 여러 교단들이 세워질 것이다. 한국의 개혁주의 교단들은 중국교회의 지도자 훈련과 외국인 선교 동원이라는 두 가지 주요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Ⅰ. 중국 교회 역사


A. 5번의 기독교 선교의 시도

중국교회의 역사에서 19세기 초반에서부터 시작된 2번의 개신교 선교를 포함하여 5번의 주요한 기독교 선교가 시도되었다.


1. 네스토리우스파 선교(7세기)


역사적으로 5세기에서 6세기에 네스토리우스파가 중국에 접근하였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증거들이 있다. 예를 들면, 셀레우시스-크레시포네의 대주교인 알치우스(411-415)와 네스토리우스파의 총대주교인 실라스(505-520)는 중국에 수도좌를 세웠다. 하지만 고고학적인 첫 번째 발견은 1625년 다아나라의 수도인 시안에 있는 네스토리우스파 비석이다. 비석에는 631년에서 681년까지 중국에 네스토리우스파 선교가 있었음을 역사적으로 보여준다. 비석은 시리아인 선교사, 아로펜이 635년 중국에 왔으며 당나라의 화제인 태종(627-649)에 의해서 받아들였으며 중국에 경교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도교를 신봉하는 우종 황제는 845년에 기독교인과 불교도들을 박해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두 번째 전래는 13세기에 몽골의 침략기 중에 이루어졌다. 9세기 중엽과 13세기의 두 시기 사이에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눈에 띄게 사라졌으며. 거의 정보가 남아있지 않다. Kenneth S. Latourette 박사는 네스토리우스 교회가 사라진 세 가지의 이유를 제시한다.

1) 중국에서 기독교는 외국 민족의 종교로 인식되었다.

2) 당시에 중국은 특별히 외국의 종교를 받아들여야 할 만한 필요가 없는 시기였다.

3)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은 고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2. 로마카톨릭 수사들(13세기)


교황 이노센트 4세는 중국에 수사들을 보내서 몽골의 황제를 살피고 복음을 전하도록 했다. 플라노 카르피니의 요한은 1245년 3월에 “고울의 리옹을 떠났다. 그는 ”몽골의 역사“라는 책을 썼는데 몽골인은 비록 많은 우상을 가지고 있고 해, 달, 불, 물과 같은 자연을 숭배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일신교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1247년 3월에 칼피니가 교화에게 돌아왔고, 1253년에 플레밍의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수도사인 루브룩 윌리암이 몽골 위구르와 중국 서부인 타타르로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수많은 네스토리우스파 사제들을 보았다.

몽골인들은 강력한 이슬람 세력이 몽골인들이 유럽과 접촉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과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윌리엄은 몽골의 황제 만구와 황비가 교회에 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1294년에 이탈리아의 수사 몬테카비노 요한과 그의 네 명의 동료들은 캄발루크(북경)에 가서 2개의 교회를 세우고 6,0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마르코 폴로는 24시간 24년간(1271-1295년)의 긴 여행을 통하여 중국을 방문하여서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을 보았다. 그리고 “중국 남부에는 망기라고 부르는 700.000 가구가 이 법(그리스도의)을 따르고 있다”라고 말했다.

 

3. 예수회의 선교(16세기)

 

마테오 리치는 1599년 북경에 도착해서 유교를 믿는 상류층 사이에서 사역을 하였다. 1599년과 1601년에 기록한 그의 책 “Commentari” 에는 그의 선교사역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616년에 포르투갈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가 680명이고 유럽에서 온 선교사가 740명이었다. 그들의 사역은 중국의 교육 영역에 특히 효과적이었다. 예수회의 마지막 선교사는 1814년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그 외에 프란시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의 선교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조상숭배에 대한 논란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조상숭배를 허용하였지만 다른 로마 카톨릭 수상들은 조상숭배를 반대하여 천주교에 혼돈을 가져오게 되었다. 교황 피우스 12세가 1939년 조상숭배를 용인함으로 이 문제를 매듭짓게 되었고 현재까지 천주교는 조상숭배 형식을 허용하고 있다.

 

4. 개신교의 선교(1807-1949)

 

중국의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는 런던선교회의 로버트 모리슨이다. 그는 1807년 홍콩에 도착해서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1834년까지 그곳에서 사역하였다. 허드슨 테일러는 1853년 중국에 입국하여서 1863년 중국내 지선교회를 세우고 1905년까지 중국에 머물면서 사역을 하였다. 모택동 주석이 1949년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중국에는 중국내지선교회 선교사가 1300명이 있었으며, 외국인 선교사를 모두 합하면 거의 6000명에 가까운 선교사가 있었다.

중국에는 북미에서 온 유명한 장로교 선교사들이 있었다. 북장로교회 선교사, 존 네비우스(1829-1893)는 1854년 상해에 들어와서 1877년 산동지역으로 들어갔다. 네비우스가 산동 지역에서 사역을 하는 도중에 1900년 6월 한국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들의 초청으로 한국에 들어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자치, 자립, 자생)을 선교사들에게 소개했다. 이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한국 교회의 급격한 성장에 주춧돌이 되었다.

미국 의학박사인 존 그래스고 커(1824-1901)는 1856년 홍통에 들어와서 1858년 광저우에 병원을 세웠다. 이 병원은 중국에 초기 현대 병원들 중에 하나이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인 칼빈 마틸(1836-1908)은 1864년 산동 지역에 도착하였으며 기독교 교육 영역에서 사역을 하였다. 그는 신학과 법학에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에 기독교 교육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 주석이 중국을 차지할 무렵 중국에는 1,811,100명의 개신교 기독교인(0.67%)과 11,470개의 교회, 48개의 신학교, 21개의 성경학교, 18개의 기독교 종합대학, 70개의 기독교 병원이 있었고 3백 3십만의 로마카톨릭 신자들이 있었다. 이후로 중국 교회들은 공산주의 아래서 엄청난 박해를 경험하였고 중국 정부는 정부가 통제하는 삼자교회를 통해서 기독교를 통제하였다.

 

5. 근대화 속에 중국교회(1979-)

 

1979년 등소평 주석이 중국을 차지하고 네 가지 영역에서 중국의 근대화를 주장하였다. 네 가지 영역은 농업, 산업, 교육, 국방력이었다.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문을 열기 시작해서 병든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수천 명의 선교사들이 비록 중국 정부가 선교사 비자를 발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곳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다.

 

3가지의 긍정적인 요인이 기독교와 관련하여 중국 사회에 나타났다.

 

1) 중국 공산 정부는 중국 교회로부터 서구 식민적인 선교사의 영향을 분리하였다. 중국 교회는 외국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2) 중국의 많은 학생들이 북미, 유럽, 호주/뉴질랜드 그리고 아시아에 그들의 교육을 위해 나가서 처음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듣기 시작했다.

3) 18세가 되기까지 공산주의 교육 아래서 무신론자로 교육을 받은 중국인들이 윤리적 기준의 중요성과 영적인 가치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B.중국 기독교의 고통

 

중국의 개신교인의 인구는 1949년 이전까지 약 140년의 선교에도 전체 인구의 1%를 넘기지 못했다. 1948년 전에는 “거북이 교회성장” 이라고 불렸던 것이 현재에는 “들불 교회성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몇 가지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1. 서구 식민주의 “서양 마귀들”

 

청나라(1644-1912) 시대에 거대한 국가였던 중국은 여러 지역을 다스리는 여러 영주들로 인해서 지방 분권화된 국가로 변화했다. 청나라는 1860년에서 1894년 사이에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엽에 영국의 군대는 중국에까지 미쳐서 첫 번째 아편전쟁(1839-1842)을 일으켰다. 1852년에 영-불 군대는 두 번째 아편전쟁에서 중국을 물리쳤다. 중국은 외세에 의해서 조각으로 나뉘었다. 상해의 공원 입구에는 “중국인과 개 입장금지”라는 푯말이 걸리기도 했다.

중국 정부의 양쯔강 유역은 영국 식민 지역이었다. 중국 남부의 위난 지역은 프랑스 군대에 의해서 통제되었고 중국 동부의 산동 지역은 독일이 그리고 중국 북부의 몽골 지역은 러시아가 차지하였다. 외국 특히 서양의 마귀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폭발은 1900년에 55일 동안 베이징을 포위했던 의화단 사건을 야기시켰다. 의화단은 236명이 외국인 선교사들과 130명의 개신교 선교사들을 포함하여 23,000명의 중국 기독교인을 살해하였다. 의화단은 기독교가 서구 식민제국의 선두주자라고 믿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중국 상류층 사람들은 기독교를 거부하였다.

일본의 군대 역시 중국에 진출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을 한국에서 벌여서 중국을 물리쳤다. 일본 군대는 1918년 만주와 시베리아를 침공하면서 중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였으며, 1937년부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중국을 침공하였다. 이것이 중국인들이 당시에 기독교를 포함해서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외세와 국민당을 이끌던 장개석 대통령의 수하에 비리 공직자들을 대적하고 모택동의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역사적 이유이다.

 

2. 공산주의의 기독교 박해

 

중국은 1951년까지 모든 외국인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삼자 교회의 지도자들인 우야중 목사(YMCA의 총서기)와 중국기독교협회 총무 등광훈 목사를 선두에 내세우고 삼자교회를 강화시키며 반삼자교회들을 박해하였다. 삼자교회를 반대하는 어떤 기독교 지도자라도 바로 구금되었다. 위치만 리와 왕명도는 박해로 인해서 고통을 받았다. 셀 수 없이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박해로 고통을 받았고 강제노동수용소로 쫓겨났다.

현재 가정교회와 삼자교회의 급격한 성장은 지난날 공산정부 치하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받았던 고난의 결과이다. 북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의 터툴리안(170-220)은 사형집행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 1979년 이후로 구금되었던 지하가정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부분적인 자유가 주어지면서 중국교회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다. 전 세계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중국의 고통받는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의 시간과 재정을 들여서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선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3. 가정교회 VS 삼자교회

 

가정교회와 삼자교회 간의 수십년 동안의 해묵은 갈등과 불신은 많은 가정교회의 지도자들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으며, 이러한 갈등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문제는 1937년 한국교회에 있었던 신사참배를 떠올리게 한다.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교회의 지도자들은 수감되었지만 일본정부의 요구에 응했던 지도자들은 그들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다. 감옥의 성자들과 타협자들의 갈등은 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면서 발생하였다. 결과적으로 1951년 수감되었던 지도자들은 한국장로교회 내에 새로운 교단(부산의 고려파)을 세우게 되었다.

삼자교회는 중국의 국가종교사무국의 철저한 통제 아래에 있다. 모택동의 시대(1948-1976)에 중국정부는 모든 주요 기독교 활동을 관리하였다. 삼자교회는 교회 내에 공산당의 앞잡이라고 가정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삼자교회는 가정교회의 지도자들을 박해했다. 중국정부가 가정교회를 박해하는 동안에는 이 두 공동체간에 갈등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과거에 중국의 가정교회들은 교육수준이 낮은 시골의 주민들 사이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비등록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적은 숫자가 모이지만 생동감이 있고, 감격이 있으며, 그들의 신앙은 살아있다. 현재 가정교회는 중국 전역의 도시들 가운데서 확산되고 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중국의 수도인 북경에 존재하는 3000개의 가정교회를 포함해서 중국 전역에 80000개의 가정교회가 있다고 보고했다. 가정교회들 중에 많은 수는 중국 외부의 다양한 기독교 단체와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할 경우에 가정교회 가운데 다양한 종류의 교단들이 세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Ⅱ. 중국 교회에 대한 바울의 선교전략

 

역사는 발전을 겪으면서 종종 반복된다. 역사에 대한 동양적 관점은 삶을 순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런 의미 없이 출생하여서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생, 노, 병, 사의 역사관”이었다. 반면에 역사에 대한 서구의 세속적인 관점은 “나사모양의 역사관”으로 농경사회에서 봉건사회를 거쳐서 자본주의와 현대주의 그리고 결국에는 후기현대주의에 이르기까지 문명이 발전한다는 것이다.

1세기의 사도 바울의 선교전략은 21세의 선교전략가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준다. 1세기의 교회와 사회는 중국 교회와 사회의 현재 상황과 매우 중요한 유사점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만약 사도 바울이 현재에 살았더라면 그는 분명히 에베소를 주목하고 에베소교회를 위한 그의 선교전략을 중국교회의 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1. 현대 중국과 1세기 에베소의 유사점 

 

1) 많은 인구 : 500,000명

에베소는 1세기경에 커다란 항구와 시장과 도서관을 갖은 소아시아의 가장 큰 도시였다. 에베소는 상업적, 문화적, 교육적으로 중심도시였다. 마찬가지로 중국은 13억 인구를 가지고 있다. 에베소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사도 바울에게 엄청난 선교의 도전이었던 것처럼 중국의 소수 기독교인(5%)이 대다수인 93%의 비기독교인 인구에 다가가는 것은 엄청난 선교의 도전이다.

2) 종교적 도시 :

아테미(그리스 식)이라고 불리는 여신 다이애나(로마식)의 거대한 신전은 에베소의 외각에 위치해 있었다. 이 신전은 높이가 342피트, 넓이가 164피트였으며, 높이가 56피트인 여러 기둥들에 의해서 지지되었고 빛나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제단이 있었다. 아테미 여신은 신전 안에 모셔져서 숭배되었다(행 19:27-28).

마찬가지로 중국의 전통, 종교인 불교, 도교, 유교 그리고 조상숭배가 오늘날 되살아나고 있다. 무신론 공산주의 정부는 지난 65년간 중국에 수많은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을 만들어냈다.

3) 죄악의 도시 : 윤리적 가치의 상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부도덕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그들이 감각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9). 마찬가지로, 불의, 뇌물, 모든 종류의 부도덕함은 오늘날 중국 사회에 만연해있다.

4) 박해 :

사도행전 19장 23절에 에베소에 아테미 여신상을 만들어서 돈을 벌던 은장색 데메드리오는 에베소인들을 동원하여서 “에베소의 위대한 아테미여!”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사도 바울과 그가 전한 복음에 대항하여 농성을 벌였다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았고 “카타콤의 기독교인들”로 불렸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중국의 문화혁명(1967-1976) 당시에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아시아의 기독교인 박해는 우리에게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313년)을 통해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기 전까지 초대교회가 경험했던 극심한 박해를 떠올리게 된다.

 

2. 에베소 복음화를 위한 사도 바울의 선교 전략

 

그 외에도 에베소 교회와 중국 교회의 사이에는 수많은 유사점들이 존재한다.

첫째로, 중국에서 13억 명의 인구에서 기독교인이 아주 적은 소수(5%)를 차지하는 것처럼 에베소 교회도 아주 적은 수의 기독교인이 있었다.

두 번째, 에베소 교회에서 할례당(유대인)과 무할례당(이방인) 기독교인들 간에 불화가 있었던 것처럼(엡 2:11) 중국 교회에는 많은 방언과 지역주의, 지역 간에 격차로 인해서 불화가 있다

세 번째, 에베소 교회는 영적인 아이를 낳을 훈련과 교육이 부재했다(엡 4:14). 중국 교회에도 오늘날 숙련된 기독교 일꾼들이 너무나 부족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에베소 교회에 대한 선교 전략은 교회의 지도자(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 교사의 영적 은사를 강조함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훈련된 영적인 지도자들은 전도와 학생 사역, 사회운동 그리고 많은 다른 사역들을 일으키기 위해서 그들의 교회 일반 성도들을 동원해야 한다. 그것이 지역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현대적인 “제자훈련 프로그램”이다.

어떻게 중국의 소수인 기독교인들이 절대 다수인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다가갈 수 있을까? 사도바울의 선교 전략인 지역 교회의 지도자 훈련이 바로 정답이다. 현대 중국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이 말씀으로 양육되어야 한다. 영적인 열정으로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불신자들과 효과적으로 나눌 수 있다.

   

Ⅲ. 중국 교회의 중요 사랑

 

1. 중국, 기독교인들에 의한 “중국의 기독교화”(민족복음화운동)

 

중국인들에 의한 “중국의 기독교화”라는 개념은 중국 기독교인들은 자국민의 전도에 대한 우선적인 책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에 전통적인 서구의 선교 지도자들은 종종 서구의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세계 선교를 하는 것을 목표로 강조하였다. 비록 그들은 현재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성경 교육기관과 신학교들을 세우기는 했지만, 세계복음화를 위한 “민족복음화운동”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그들은 21세기에 제3세계 선교사들이 서구의 선교사들의 숫자를 넘어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외국 선교사들과 중국 교회의 관계도 과거의 “부자지간”과 같은 관계에서 “동역자”의 관계로 그리고 현재의 “원주민교회 산하”로 전환되었다.

선교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더 많은 선교사들을 보낸다고 해서 항상 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일본은 45년이 넘는 선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1억2천7백명의 인구 중에서 641,351명의 개신교 기독교인(0.4%)을 포함해서 오직 110만 명(0.8%)이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교해 볼 때 일본은 33개의 나라, 245개의 선교단체에서 파송된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3,500명) 있다. 추가적인 선교사 파송은 일본을 복음화하기 위한 해답은 아니다. 해답은 8,023개의 교회에서 백만 명이 넘는 일본 기독교인들을 세워서 자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민족복음화운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민족복음화” 의 문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수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중국 교회의 지도자 양성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중국 기독교인들은 정부의 선교사 비자 거부 때문에 외국 선교사에게 의존하지 않고 일반 자국 자신의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중국교회는 여전히 자국민을 전도해야 하는 엄청난 과업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국내에 13억의 세계 최대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71,385,700명의 중국민족이 전 세계에 살고 있다. 미국에 1,215개, 홍콩에 1,250개, 대만에 3,728개의 교회들 합쳐서 총 9,609개의 중국교회들이 화교 중국인들 사이에 존재한다. 홍콩에 있는 세계 선교 중국 협력센터(CCCOWE)는 6개의 대륙에 있는 중국교회의 연합사역을 하고 있다. 해외 중국 기업과 함께 하는 오늘날의 중국의 경제력과 전 세계에 퍼져있는 중국 교회들은 중국 교회의 세계 선교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수의 기독교 인구를 나타내고 있다. 중국에는 6천만 명의 개신교 기독교인들이 있다(1천6백만 삼자교회 성도들을 포함). 80,000개의 가정교회 또는 36,000명의 사역자들이 모일 수 있는 교회가 있다. 중국에서 매일 기독교로 회심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2만 명이다. 이 환상적인 교회의 성장은 하나님께서 모택동 주석의 공산주의 법에 의한 통제에서 박해당하고 순교한 많은 기독교인들의 열매를 수확하시는 것이다. 확실히 지금은 하나님께서 중국에서 일하셔서 수많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계시는 때다.

저자는 중국 교회와 한국 교회가 기독교인이 겪은 고난과 빠른 교회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여러 가지 유사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교회성장 폭발”, "들풀교회 성장"은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한국교회 성장 폭발”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장로교)와 호레이스 아펜젤로(감리교)는 1885년에 한국에 함께 들어왔다. 그들은 다른 많은 선교사들과 함께 교회를 세우고, 인기 있는 남학교와 여학교를 세우고, 병원과 고아원을 세웠다. 그들은 기독교 대학과 신학교를 통해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했고 한국 교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일제 식민시대(1910-1945)와 한국전쟁(1950-1953) 시간에 고통스러운 박해의 경험은 수천 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위해서 감옥에 갇히고 사형을 당하게 했다. 그들은 일본의 신사참배와 공산주의에 저항하였다. 한국 교회는 “고통당하는 교회”로 알려졌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결과적으로 순교자들로부터 열매를 수확하였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민족복음화운동”을 강조하고 한국 기독교인들이 한국의 복음화에 중대한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1990년에는 1천2백만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한국 CCC의 설립자인 김준곤 목사는 “민족복음화 운동”의 핵심 운영자다. 서구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의 토대를 닦았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조국을 복음화 시키는 주된 책임을 갖게 되었다.

중국 교회는 40년 전의 한국 교회로부터 배울 점이 잇다. 1970년대에 일어났던 한국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은 빠른 경제 성장과 세속주의로 인해서 1990년대부터 쇠락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교회를 떠나는 젊은 세대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최근에 서울에서 어떤 한국 목사가 설교 중에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영국을 이미 떠나셨고, 현재 미국을 떠나고 있으며, 한국을 떠나려고 준비 중이시다.” 그러나 다행이도 한국 교회가 종교의 자유를 바탕으로 이미 250개의 신학교로 많은 수의 사역자들을 키웠다는 점에서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 교회의 정치적 상황은 한국 교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2. 연장신학교육(TEE)을 통한 교회 지도자 양성

 

분명히 지금은 중국교회 안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으로 수많은 중국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고 있는 때이다. 중국교회는 나날이 성장하는 세속주의와 물질주의로 말미암아 중국의 교회성장이 가로막히기 전에 수많은 가정교회들이 필요한 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을 제공하고, 그들을 양육시켜야 하는 때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다”(마9:37). 학식 있는 신자가 있는 도시에서 더 많은 가정교회가 성장하는 이때에 중국교회는 말씀으로 제대로 훈련된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해야 한다. 이것이 가정교회와 삼자교회의 공통된 화두 중에 하나이다. 지도자 훈련은 두 가지 갈래로 구분된다. 일반 평신도 수준에서 지도자 훈련을 하는 것과 사역자들(목사, 선교단체 지도자, 신학 교수)을 위한 훈련이다.

연장신학교육(TEE) 훈련 프로그램 또는 장거리 교육(Distant Education)은 매우 중요해졌다. 냉전 기간(1950-90) 중에 TEE는 공산국가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광범위하게 조직되었다. TEE 프로그램에 따르면 성경교사는 매주 소그룹을 만나서 준비된 연장교육 교과서(Programmed Instruction Materials)를 사용하여 성경말씀을 가르쳤다. 이 PIM 교과서는 각자 다른 수준의 학위에 맞도록 준비되었다. 오늘의 TEE사역은 현대 매스미디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과 수많은 종류의 교육 자료(문서, 인터넷, DVD, 라디오, 스마트폰)를 갖게 된 것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OMF, WEC, SIM과 같은 많은 전통적인 선교단체들은 중국을 포함하여 접근제한국가(Restricted Access Nations)에서의 교회개척을 매우 강조해 왔다. 그러나 앞날의 선교전략은 숙련된 기독교 사역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 사역이다. 그러므로 많은 선교단체들은 중국의 TEE사역과 신학교육을 도모하는 좀 더 영적이고 학문적인 자질을 갖춘 선교사들을 모집해야 한다.

 

3. 신학 교수들에 대한 간절한 필요

 

홍콩의 국제중국성경신학교의 학장인 토마스리 박사는 2012년에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선교협회(Asian Society of Missiology) 세미나에서 중국에는 21개의 삼자교회의 다양한 수준의 신학교를 포함하여 총 700개의 신학교와 성경학교들이 있다고 말했다. 많은 가정교회 신학교들이 도시에 있으며, 그들의 교육 사역을 공개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반면에 최근 5년간(2008-2012) 삼자교회는 240만 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5,195개의 교회를 세웠고 1,057명의 목사에게 안수를 주었으며, 482명의 견습 목사를 세우고 1,443명의 장로를 세웠다. 21개의 삼자교회 신학교에는 292명의 교수가 가르치며 4,36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신학 학위를 가진 신학 교수들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은 중대한 문제이다. 오늘날 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중국에서 가르치고 있는 중국인 신학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중국 외부에서 많은 중국신학자를 양성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 소요될 것이다.

최근 중국의 많은 가정교회 신학교들이 그들의 학문적인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Asia theological Association(ATA) 인가를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학위가 아시아와 서양의 다른 신학교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10-20년은 중국교회에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 중국교회는 성장하고 있는 교회의 수요에 맞춰서 중국 내, 외부에서 더 많은 교수와 목사를 훈련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내면에 물질주의가 싹트기 전에 수많은 목회자와 신학 교수들을 배출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와 중국교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중국의 공산주의 정부는 종교적 자유를 제한한다는 점이다. 지금은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 그리고 필리핀에 있는 신학교들이 중국 목사와 신학자들을 훈련시켜야 하는 시기이다. 해외에 있는 중국 신학교들, 특히 북미와 호주, 뉴질랜드에 있는 신학교들은 더 많은 중국인 신학자들을 배출하기 위해서 아시아 신학교들과 같이 협력하여 동역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에, 신학박사 학위나 기독교교육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한국 신학자의 수가 2,000명 이상이다. ATA 인증 재평가 팀은 2013년 10월에 4개의 신학교(총신 신학대학원,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횃불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백석 대학교)를 방문하였다. 총신 신학교(합동)의 사당동 캠퍼스에 700명의 대학원생(Ph.D., D. Ed., Th. M.)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대학교에는 Ph. D과정(20명), Doctor of Theology(10명), Doctor of Biblical Studies(3명), Doctor of Lifelong Edcation(28명)이 있다. 횃불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대학교에는 40명의 Ph.D. 과정 학생들이 있었다. 백석대학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는 Ph.D. 학생(56명), Th.D. in Ministry(35명), Th.M.(71명)이며 지금까지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졸업생이 Ph.D.(34명), Th.D. in Minstry(49명), Th.M.(72명)이 배출되었다. 이 외에도 적어도 10개의 다른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진행 중인 학생이 적어도 400-500명이 될 것이다.

지금은 한국인 신학자들이 박사 학위를 가지고서도 한국에서 교수직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교회에는 목사와 신학교 교수들이 풍성하게 공급할 수 있는 반면에, 중국과 타 아시아 교회들은 자질을 갖춘 목사들과 신학자들을 찾고 있다.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은 지역 교회들을 동원해서 25,000명의 한국인 선교사들을 170개의 나라에 파송했지만 신학교와 신학 교수 사역에 대한 선교비전은 아직 유아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한국인 신학자들을 대상으로 신학교수 선교대회가 필요하며 또한 신학 교수와 기독교대학 교수들을 위한 선교단체가 세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 성장하고 있는 가정교회 신학교들은 ATA 인증을 받아서 그들의 학문적 수준을 향상시키고 아시아의 다른 신학교들로부터 학위를 인정받으려 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아시아의 ATA를 비롯한 6개 대륙(아프리카, 남미, 중미, 유럽, 북미, 호주/뉴질랜드)의 신학교 인증협회로 구성된 국제복음신학교육협회 (International Council of Evangelical Theological Education-ICETE)로부터 인정을 받기 원한다. ATA는 중국의 정치적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중국 신학교들이 국제 신학교들과 협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 이유는 중국교회와 신학교들은 국제기독교 사회와 아주 오랜 시간동안 고립되어 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네 가지 신학 학위(Ph.D, Ed.D, D.Min, Th.M)를 수여할 수 있는 중국 아시아 신학대학원(AGST-Chinese)을 세울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As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 (AGST)는 1984년 홍콩의 ATA 이사회에서 창립되었다. 1985년부터 AGST-Philippines, AGST-Japan, AGST-Alliance 그리고 AGST-Indonesia에서는 200명이 넘는 졸업자들을 배출하였다.

AGST-International(한국)은 2013년 조직되었으며 1972년에 하와이에 창설된 Hawaii Theologicl Sminaary 에서 관활하게 되었다. ATA가 인증하는 11개의 한국 신학교가 협력하고 있다. 아시아 각 나라의 AGST 프로그램은 ATA의 인증을 받고 있다.

 

4. "Back to Jerusalem" 운동

 

"Back to Jerusalem Movement(BJM)"의 기원은 1921년 중국 산동 지역의 예수 가족 공동체의 ‘징띠엔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중국전역의 가정교회 운동으로 퍼졌다. BJM의 기본 신념은 1세기에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중세기를 지나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거쳐서 17세기에 북미로 건너가고 18세기에 서구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를 거쳐서 제 3세계를 복음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BJM은 이제 중국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다시 중동과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중국서부에 있는 신장성 지역에 1천6만의 위구르를 포함에서 2천5백만 이상의 무슬림(2%)이 살고 있다. 중국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대사명에 따라 중국내에 무슬림들과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한 비전을 품어야 한다.

제4회 BJM 국제선교대회가 1910년 에딘버그 선교대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2010년 6월 1-4일 예루살렘에서 개최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화교선교단체(The Great Commission)의 창립자이니 토마스왕 박사와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Ambassador for Christ 의 총무 데이빗주 박사 외 많은 중국교회 지도자들이 BJM을 열렬히 후원하고 있다. BJM 예루살렘 선교대회의 선언문의 7가지 사항 중 하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무슬림과 유대인, 타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아마도 사도 바울이 직면했던 것과 비슷하게 영적인 갈등이 더 심각해 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빌 1:30)

BJM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중국신학교들이 선교비전을 품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생들에게 선교를 가르치고 중국교회에서 선교를 촉진시킬 더 많은 중국인 선교학 교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서 중국교회가 많은 수의 선교사들을 해외로 파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삼자교회와 가정교회 모두에 선교를 강조해야 하는 때가 찾아온 것이다.

 

Ⅳ. 중국복음화를 위한 한국교회 선교전략

 

현재 중국기독교의 급속도 성장과 더불어 중국교회의 시급한 문제는 영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목회자와 신학교 교수를 충분히 배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 지도자 양성의 과제는 중국교회 내에 물질주의와 세속주의가 침투하기 전에 앞으로 약 10-15년 내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수천만 명의 중국기독교인이 충분한 신학적으로 훈련받은 목회자와 신학교교수가 부족하게 된다면 중국교회는 혼돈과 교회분열과 이단교리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한국과 중국은 수 세기에 걸쳐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교회와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 유사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중국이 한국의 이웃에 있는 대 국가이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중국교회와 함께 동역해야 한다.

예를 들어, 총신대 신학대학원과 신학원은 3백만 성도와 11,456교회, 140노회, 19,829명의 목사 2,600 선교사의 규모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이 장로교 합동교단에 속해 있다. 총신의 재학생은 700명의 대학원생과 1,700명의 M.Div학생, 4,000명의 대학생이 있고 모두 합해서 6,400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다. 이 신학교는 한국에서 뿐 아니라 아시아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 신학교다.

한국의 다른 대형교단 신학교들도 수많은 교역자와 신학교수를 배출하였다. 한국장로교(통합)는 280만 신도와 8,305 교회를 소유한 한국의 제2대 교단으로 이 교단에 속한 장신대신학 대학원은 3,000명이 넘는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현재 한국내 Ph.D/Th.D 학위를 소유한 한국 신학자의 수가 2,000명이 넘으며, 이제는 한국 내에서 교편을 찾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다. 한국의 신학교수들은 선교의 비전을 갖고 특별히 중국신학교육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선교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1. 한국교회에 드리는 제안

 

1) 큰 교단신학교들은 중국어 신학교 프로그램을 설치하기를 원한다. 현재 한국에 중국 학생을 위하여 중국어로 강의하며 M.A.,M.Div. 학위를 수여하는 신학대학원이 2개가 있다. 서울중국신학교(안성)와 세계선교신학교(수원)는 2014년 9월에 Asia Theological Association 인가심사를 받았다. 양평에 있는 ACTS도 우심화 교수를 중심으로 중국 연구원이 개설되었고, 대전에 있는 침신대에서도 2014년 중국어 M.Div. 프로그램을 설치하려고 노력했으나 한국정부의 비자 문제로 연기되었다. 총신(합동)도 중국어 신학프로그램을 시작할 계획을 갖고 있다.

장신대, 백석대, 서울신대, 횃불트리니티 신대 외 다른 신학교와 기독교대학들도 표준 중국어 신학교육 프로그램을 설치하기를 제안한다. 현재 제주도는 중국인이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으므로 중국신학교육을 위한 유일한 장소로 사용될 수 있다.

2) 외국에서 신학교육을 받는 신학생들을 위하여 As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AGST) International(한국)이 2013년에 창설되었고 4개 학위(M.A. Th.M., Ph.D., D.Min.)를 수여하게 되었다. AGST International은 하와이에 있는 Hawii Theological Seminary가 ATA인가를 받은 한국 신학교들과 협조해 운영되고 있다. AGST International이 중국어 신학프로그램을 개설해 최고 수준의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신학교육을 한국과 중국에서 마련하기를 제안한다.

3) 한국과 북미에 있는 한국 신학교들은 연장신학교육(TEE)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신학교수 및 선교사들과 협조해 TEE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하고, TEE 교육자료(책,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넷, 커리큘럼 등)을 개발해야 한다.

4) 한국에 250개 신학교와 북미에 100개 한인신학교가 존재하고 있다. 이 많은 신학교와 기독교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 선교의 비전을 가져야 하는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한국교회 선교는 지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고 신학교 레벨에서는 대단히 미약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교 교수를 위한 선교대회가 필요하며 한국에서는 KWMA, 북미에서는 KWMC/KIMNET과 협조하여 선교대회를 격년에 걸쳐서 매번 다른 신학교에서 개최하기를 원한다. 한국의 GMS, OMF, SIM과 같이 신학교 교수들로 이루어진 선교단체를 조직하여 신학교와 기독교대학에서 선교의 동력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5) 한국의 대형교단 신학교에서 Korean International Mission for Church growth Institute-KIMCHI(한국 교회 성장과 선교세미나)를 마련해 중국의 중요 신학자와 교회 지도자를 한국에 초청해 한국교회의 성장, 신학교육, 선교운동을 소개하며 친교를 갖기를 제안한다. KIMCHI는 충현교회 전 담임목사 이종윤 박사가 창설했으며, 매년 외국교회 지도자를 국가별로 약 30명 초청해 1주일간 한국교회 성장을 소개했다. 비용은 중국대표단이 이동경비를 부담하고 한국 신학교에서 숙식비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2. 북미 한인교회에 드리는 제안

 

1) 한국교회와 중국교회의 협조를 도모하기 위하여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와 월드미션동서센터(East West Center for World Missions)는 북미에 있는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국신학생을 풀러에 정기적으로 초청해 한국교회를 소개하는 세미나를 갖도록 제안한다.

예를 들어, 보스턴 근처에 있는 고든코넬 신학교(Gordon Conwell Theological Seminary)는 2014년 5월26-29일 북미의 13개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약 50명 중 중국신학생을 초청해 세미나를 가졌다. 이러한 세미나를 통해 장래 중국교회 지도자가 되는 중국신학생에게 한국교회의 성장, 신학교육, 선교활동을 소개하며 한국교회와 친교를 나눠 아시아 복음화에 동참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2) 북미에 있는 4,00개 한인교회와 1,300개 중국교회의 동반자 관계를 도모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북미의 중국교회는 CCCOWE-북아메리카와 연결되어 있으며 홍콩에 본부를 두고 있는 전 세계중국교회협의회(Chinese Churche Coordination Office for Works Evangelization-CCCOWE)와 연결돼 있다. 북미에 두 개의 중요한 중국선교단체를 소개하기를 원한다. 캘리포니아(Sunnyvale)에 있는 The Great Commission Center(Thomas Wang)과 Pennsylvania(Paradise)에 있는 Ambassdor for Church(David Chor)이다 북미의 한국교회 지도자와 중국교회 지도자의 긴밀한 동반자 관계는 특별히 중국교회 지도자 양성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

 

역사적으로 한국교회는 기독교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현재 중국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은 훈련된 사역자와 신학교 수의 심각한 부족으로 인해서 교회 지도자 영성과 같은 강력한 개혁주의 전통의 힘이 필요하다. 즉, 한국의 개혁주의 장로교회는 중국교회(가정교회와 삼자교회)와 함께 동역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신학교육과 해외선교에 있어서 중국교회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중국교회가 세계적으로 많은 수의 기독교 인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 복음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국교회와 중국교회는 모두 박해와 고난을 경험했고 최근에 폭발적인 교회의 성장도 경험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와 중국교회를 사용하셔서 45억 아시아인(전 세계의 60%)과 다른 대륙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하실 것이다.

 

/노봉린 박사(ATA International Senior Advisor, Th D) 

/미주크리스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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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난 극복 위한 60일 기도 운동] 이 나라가 주님 손에 붙들려 열방의 빛 되게 하옵소서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북핵의 위협과 부패로 대한민국이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국가 위상이 높아져 스스로 강대국이라 자부하며 콧대를 높이던 자존감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실상은 구한말같이 열강 사이에 끼여 약소국의 설움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지 130년이 넘었고 1000만 가까운 성도가 있는데도 분열하며 미성숙 속에 있습니다. 

 
주님, 우리 모두에게 요나 선지자를 통해 선포하신 니느웨성의 회개를 허락해 주옵소서.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로 믿게 하시고 주께 나아오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모든 강포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하시고 공의와 사랑이 넘치는 나라, 화합을 이루는 대통령 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한국교회는 이를 위해 기도하게 하옵소서. 고통과 슬픔, 수고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야베스처럼 주님을 신뢰하는 대통령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선하신 뜻대로 대한민국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제 모든 국민들이 신임 대통령을 위해 한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지역과 정당, 특정 후보를 앞세웠던 우리 마음을 내려놓게 하시고,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케 하옵소서. 


살아있는 나무가 햇빛을 받으면 더 무성해지고, 죽은 나무가 햇빛을 받으면 점점 더 말라갑니다.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끝까지 붙잡는 살아있는 나무로 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지혜롭고 복 있는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손에 굳게 붙들려 열방의 빛으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하나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단호한 믿음의 결단을 내리게 하옵소서. 여호수아의 결심같이 오직 나와 내 집은 주님만 섬기겠노라 당당히 고백하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스며든 불신앙의 죄와 오염된 마음을 주님의 선명한 보혈로 씻겨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임우성 목사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사무총장)
[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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