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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전도를 위한 내부자


운동에 관하여


이슬람이 날로 폭력적으로 변함에 따라 선교사들이 무슬림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갈수록 어렵게 되었고 선교의 열매를 얻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제까지 행해왔던 평범한 방법으로는 이슬람권에서 더 이상 전도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 소위 내부자 운동(Insider Movements)으로서,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그들에게 굳이 이슬람 사회를 떠나지 말고 계속 무슬림으로 남아서 예전과 똑같이 꾸란을 읽고, 샤하다(이슬람 신앙고백)를 고백하고, 모스크 활동에도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비밀로 간직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무슬림 공동체 안에서 동료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슬림들이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피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줌으로써 거부감 없이 무슬림들과 교제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내부자 운동을 옹호하는 자들은 이것이야말로 21세기에 마지막 남은 이슬람권 선교의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현재 이슬람국가에서 사역하는 많은 선교사들이 실제로 내부자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상당수의 한국 교회 및 선교 단체들도 내부자 운동을 지지하거나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위클리프/SIL의 성경번역에서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가 무슬림들에게 공격적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이유로 다른 용어로 대체되자 한 선교단체협의체가 사이트에서 반대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내부자 운동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성경책이 적당하지 않았는지 무슬림 전도를 위한 새로운 성경을 번역 출판하였다. 위클리프 언어학 연구원(SIL)은 수백만 달러를 모금하여 무슬림들을 위한 아랍어 성경을 “선지자들의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아버지’라는 단어 대신 ‘주’라는 말로 바꿨으며, 하나님의 ‘아들’ 대신에 ‘메시야’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프론티어스가 제작하고 SIL이 배포한 마태복음 터키어 번역본에는 하나님 ‘아버지’ 대신에 ‘보호자’로, 하나님의 ‘아들’ 대신에 ‘대리인’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신앙을 부정하며 삼위일체가 다신론을 섬기는 우상숭배요 신성모독이라고 여기는 무슬림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내부자 운동을 상황화의 한 형태로 이해하기도 한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상황화라는 방법은 매우 유익하다. 전도하려는 대상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영혼 구원이라는 대 전제를 위해서 문화의 옷은 얼마든지 갈아입어도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상적인 상황화이며 복음 전파에 있어서 반드시 적용되어야 하고 그 효과 또한 매우 긍정적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상황화를 적용함에 있어서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복음의 핵심만은 절대로 양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부자 운동은 어떤 점에서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났는가? 첫째, 십계명의 첫번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내부자 운동을 하는 자들은 무슬림들의 마음을 얻고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도 알라를 믿는 무슬림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알라=하나님, 무슬림=하나님께 복종하는 자, 라는 공식이 들어있다. 그래서 사실은 기독교인이지만 하나님께 복종하기 때문에 자칭 무슬림이라고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자기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알라와 전혀 다른 신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알라는 메카 지역의 꾸라이시 종족이 섬기던 우상의 이름이었다. 그 우상은 아라비아의 최고신으로 불렸으며 라트(Lat), 우짜(Uzza), 마나트(Manat)라고 불리는 세 딸이 있던 신이었다. 무함마드는 알라와 세 딸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알라(Allah)를 기독교와 유대교인들이 섬기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신이라고 주장했지만, 무함마드와 동시대에 살던 아랍인들과 그 조상들은 그들을 알라의 딸들이라고 불러왔었다는 사실을 꾸란에서 인정하고 있다.(꾸란53:19-23)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알라를 믿는 무슬림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에 대한 신앙고백 행위인 것이다.


두 번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대속을 부인하는 것과 다름 없다. 내부자 운동을 하는 자들은 무슬림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이싸 알 마씨를 통해서 알라를 섬기는 무슬림’이라고 한다. 이싸는 예수라고 번역되고 알 마씨는 그리스도로 번역되고 있는 아랍어다. 즉,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라를 섬기는 무슬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싸 알 마씨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단지 무슬림들의 그럴듯한 설득에 속은 것이다. 아랍권의 크리스천들은 예수를 이싸(Isa)라고 부르지 않고 야슈아(Yashua)라고 부른다. 야슈아와 이싸는 다른 인물이다. 성경의 야슈아는 알라로부터 책을 받은 일이 없는데 꾸란의 이싸는 태어날 때 책을 받았다고 한다.(꾸란19:30) 야슈아는 유다 지파에 속한 마리아의 몸에서 났지만, 이싸는 레위 지파에 속한 모세와 아론의 누이 마리얌의 몸에서 났다.(꾸란19:28) 야슈아는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인류 구원을 완성하신 인류의 구세주이지만, 꾸란의 이싸는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고 부활하지도 않았다.(꾸란4:157-158) 다만 구약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하고 장차 아흐마드(무함마드와 같은 뜻)가 올 것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보내진 알라의 사도(꾸란61:6)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꾸란의 이싸는 알라의 종이며(꾸란19:30) 무슬림이었다. 무슬림들은 꾸란에 나타난 이싸를 근거로 기독교의 대속 신앙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고 공격한다. 그런데 내부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꾸란의 이싸 알 마씨를 통해서 알라를 믿는 무슬림들이라고 소개한다고 하니,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품은 알곡을 생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셋째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다. 내부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무슬림이라고 말할 때 무슬림의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무슬림이란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그 첫째는 알라와 무함마드를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자, 둘째는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 자, 셋째는 생명과 재산을 바쳐서 지하드(불신자들을 죽이는 전쟁)하는 자이다. 이런 자들만이 진정한 무슬림이라고 이슬람의 경전 꾸란에 정의하고 있다.(꾸란49:15)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무슬림들에게 신임을 얻기 위해서 예수의 신성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며 삼위일체까지 부인한다. 이들은 교회를 멀리해야 하고 교회 대신에 모스크에 나가야 한다. 구원의 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모두 부인하는 꾸란을 거룩한 경전으로 인정하며,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면서 그를 칭송할 때 함께 동조한다. 무슬림들이 모여서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하여 기도할 때는 같이 줄서서 기도를 한다. 무슬림들의  기도의 내용은 오직 한 가지다. 알라의 진노를 받은 유대인들이나 방황하는 기독교인들이 가지 않는 옳은 길로 인도해 달라고 비는 것이다.(꾸란1:6-7) 자신이 기독교인이면서 무슬림처럼 엎드려 그들과 같이 기도하면서 기독교인들을 방황하는 무리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내부자 운동 요원들은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도바울과 예수님의 성육신을 예로 든다.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자고 했는데 왜 우리는 무슬림을 얻기 위해서 무슬림의 모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면 안 되느냐고 질문한다. 또는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하늘 보좌를 떠나서 육신을 입고 죄인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는데, 우리는 왜 무슬림들 가운데로 들어가서 무슬림들처럼 살면서 복음을 전하면 안 되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무슬림들 속에 들어가 무슬림처럼 되는 내부자 운동은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분들은 문화의 옷은 바꿔 입었지만 복음의 본질은 변질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고 돌에 맞기도 하고 태형을 맞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 교권자들과 복음을 타협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부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양보한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와 예수님의 신성, 대속죄물 되심을 부인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는 꾸란을 거룩한 책으로 인정하고, 그렇게 가르친 무함마드도 거룩한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한다. 하루 다섯 번의 무슬림 기도와 모스크 출석을 한다. 무슬림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완전한 무슬림처럼 의식주를 따라하면서 턱수염까지 기르고 여성은 차도르를 쓰고 살아간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을 무슬림으로 확신시키려는 자들이 어떻게 무슬림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음을 설득하려고 한다. 복음을 위해 기꺼이 모든 고난과 핍박을 감수했던 사도바울과 얼마나 대조되는 모습인가!


개종한 기독교인들을 무슬림 사회 밖으로 빼오지 말고 그 안에 그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 내부자 운동의 핵심이라면, 이것이야 말로 성경과는 정반대의 이론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왜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라고 하셨나? 그 땅이 우상숭배의 땅이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출애굽해야 했나? 애굽이 타락했기 때문이었다. 이슬람권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거짓 진리가 지배하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하는가? 아니면 신앙적인 신념을 굽히고 타협하면서 머물러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할 때 이 동네에서 핍박하면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하셨지(마10:23) 적당히 타협하고 그 땅에 머무르라고 하지 않으셨다.


최근에 여러 나라 무슬림 출신의 기독교인 학자들이 내부자운동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묶어『크리슬람(Chrislam)』이라는 책을 펴냈다. ‘크리슬람(Chrislam)’이란 기독교와 이슬람을 혼합하여 전도하는 선교전략을 의미한다. 그들은 소위 내부자 운동가들이 진리의 말씀을 기독교도 아니고 이슬람도 아닌 신종합성종교로 변조시키고 있는데 대해 분노한다. 내부자 운동은 결코 선교의 열매가 있을 수 없는 허구일 뿐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무슬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슬림들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극히 소수의 예외는 있겠지만 보통 무슬림들은 외국의 기독교인이 그들 가운데 사는 것에 대해서 전혀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외국인이 무슬림이 되어서 자신들과 함께 살고 있다면 매우 신기하고 이상한 현상으로 생각한다. 무슬림 종교지도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이슬람이 기독교보다 더 훌륭한 종교라는 증거”로 이용하고 싶어 한다. 성경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고 말씀하신다. 또한 저희가 무슬림 모양으로 억지로 무슬림 율법을 지키며 살라고 하는 이유는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갈6:12)

 

이만석/무슬림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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