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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종교 아닌 기독교 이단’ 경계하되 긍휼 대상으로 이해
 불링거 “거짓 선지자 무함마드는 교활하고 위선적 …
꾸란은 고대 교회 모든 이단의 거짓을 모은 것에 불과” 질타

 


▲ 유해석 선교사(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 전문위원)

종교개혁은 유럽사회가 로마 가톨릭교회 중심의 중세적 질서체제에서 근대적 민족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한편 이 시기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을 향한 군사적 팽창과 영토 확장이 최고조로 달했던 순간이었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구교와 신교의 갈등이 고조되던 16~17세기는 오스만 제국에게 유럽으로 영토확장을 위한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종교개혁 직후인 1520년 오스만 군대는 헝가리를 침공하여 중부유럽을 장악했고, 여세를 몰아서 1529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오스트리아 빈까지 포위했다. 오스만 군대의 빈 공략은 유럽 전체가 공포에 휩싸일 정도로 가공할만한 사건이었다. 또한 이 무렵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그 어떤 시기보다 고조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심지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기독교인들이 줄을 잇는 것을 보면서 이슬람의 유럽 점령이 가시화 된 것뿐만 아니라 이슬람화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이슬람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루터, 칼빈, 쯔빙글리, 불링거와 같은 신학자들이 있었지만 가장 이슬람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이슬람 책을 저술하였던 신학자는 불링거(Johann Heinrich Bullinger, 1504~1575)였다. 그는 스위스 취리히의 종교개혁자로서 40년 이상 교회를 효과적으로 이끈 탁월한 지도자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혼란했던 시기에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신학자요, 설교자요, 상담가였다.

1. 이슬람에 대한 불링거의 이해

 

첫째, 불링거의 저서 <터키>(Der Tuergg)를 통해 본 이슬람

불링거는 1567년에 <터키>(Der Tuergg)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여기에서 터키란 당시 오스만 터키라는 의미와 함께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내용상 ‘이슬람’이라고 써도 무방하다. 이 책은 이슬람에 관한 불링거의 가장 중요한 책이다. 그는 이 책의 표지에 요한계시록 9장 16절과 17절을 실었다.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이 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그는 그 시대에 터키인들이 유럽으로 물밀 듯이 쇄도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루터처럼 어떤 종말적인 분위기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책의 첫 장의 제목이 ‘이슬람의 신앙과 거짓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하여’이다. 그 책의 첫 문장을 “터키인들의 신앙은 무함마드의 신앙이다”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바로 이어진 문장에서 그는 무함마드를 교활하고(listig), 비열하고(dueckisch), 위선적(glychssnerisch)이라고 특징지었다. 이 책의 둘째 장의 제목은 ‘기독교 신앙만이 참된 신앙이며 그렇게 남아 있다’인데, 첫 문장이 “한 마디로 하나의 오래되고 참되고 거룩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신앙이 세상의 시작부터 있었는데”라고 하여 기독교 신앙의 진리성을 천명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무슬림의 신앙과 삶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이다. 특별히 불링거는 디모데전서 4장과 골로새서 2장을 인용하면서 무함마드와 그와 같은 교훈들을 심지어 ‘사탄의 교훈’(tuefeles leeren)이라고까지 불렀다.

 

둘째, 이슬람은 기독교 이단

불링거는 이슬람을 타종교가 아닌 기독교 이단으로 보았다. 그가 1566년에 펴낸 것으로 여겨지는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에서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하면서 이슬람의 가르침을 ‘잘못된 가르침’(Irrlehren)이라고 하였으며 이슬람교도들을 가리켜 이단자라고 칭하였다.

뿐만 아니라 꾸란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삼위일체와 같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특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부정하고 유일한 중보자로서의 존재도 부정하는 이단이라고 생각했다. 이슬람의 이단성을 처음 연구한 사람은 현재의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살았던 비잔틴 신학자 요한네스(Johannes)였다. 그는 무함마드가 죽은 지 약 20년 후에 태어났다. 만수르(Mansour)의 명문가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이슬람군주 무아위야 1세(Muawiyah1, 602~680) 아래에서 재무부장관을 지냈다. 무아위야 1세의 뒤를 이은 왕이 기독교에 적대적인 정책을 펴자 요한네스는 예루살렘 근처의 마르사바(Mar Saba)수도원에 은신하여 이슬람을 연구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저술인 <지식의 근원> ‘제2부 이단에 관하여’ 에서 이슬람을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그 이유는 “무함마드가 이단이였던 아리우스파 수도사로부터 정보를 받아서 이슬람이 시작되었으며, 꾸란에서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며, 영으로 언급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이단이다”라고 하였다. 불링거는 요한네스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셋째, 불링거의 꾸란에 대한 이해

불링거에게 꾸란은 고대 교회의 모든 이단들의 거짓을 모은 것에 불과하다. 꾸란의 기원을 하나님이 아니라 무함마드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더불어 꾸란에 담겨있는 이단적인 요소들을 지적하였다. 무함마드가 신에게 받았다고 하는 계시와 비전(Vision) 역시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꾸란은 이단 사제의 도움과 완고한 유대인과 잘못된 기독교인의 조언이 섞였으며 아리안(Arians), 마케도니안(Macedonians), 네스토리안(Nestorians)과 같은 이단들에 의하여 부패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꾸란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유일한 중보자 되심도 부인한다. 이같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부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기독교 신앙의 주된 교리의 부인한다. 불링거는 금식, 기도, 구제, 알라와 이슬람을 위하여 싸우다 죽음으로서 모든 죄에서 해방된다는 교리를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을 무함마드에게 묻는다. 또한 영생, 예배, 결혼 등에 대한 꾸란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았다.

 

넷째, 이슬람 지배 아래서 기독교인의 태도

불링거는 1551년 헝가리의 이슬람 정권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헝가리 기독교 지도자들의 편지에 대하여 1551년 6월에 선명하고 원론적인 답신을 보냈다. 성경의 신자들이 사도시대에 우상을 숭배하는 로마제국 아래서도 살았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의 통치 아래서 바벨론 포로가 된 상태에서도 살았다. 이러한 신뢰 속에서 불링거는 헝가리 신자들에게 예레미야의 가르침을 근거로(렘 29:7) 평안 중에 삶이 유지될 수 있도록 무슬림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특별히 불링거는 헝가리와 동유럽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우리 모두의 죄악과 관련된 것임을 밝혔다.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의) 회초리를 벌었다.” 불링거는 헝가리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이슬람 종교로 인한 고통을 탓하기 전에 그들 자신들을 먼저 살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링거는 헝가리 교인들에게 핍박이 올지라도 하나님이 금지하신 이슬람의 신앙과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불링거 역시 루터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침략을 하나님의 징계로 보았고, 이와 관련하여 헝가리 기독교인의 회개와 경건회복이 요청된다는 것을 편지에 언급하였다.

 

2. 불링거가 주는 교훈

이슬람에 대한 불링거의 견해를 다루면서 우리에게 주는 두 가지의 교훈이 있다. 하나는 분별의 척도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기독교 입장에서 보았을 때, 많은 부분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우리 신앙의 근간이 되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이슬람에서 유일신에 대한 고백은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대한 고백은 없다. 또한 우리 신앙에 있어서 핵심적인 내용은 대속의 은혜인데, 예수의 주 되심을 부인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대속이 없고 공덕에 의한 구원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한 점에 있어서는 당연히 경계의 대상이다. 우리 시대에 그들이 아무리 미사여구의 평화의 말로 접근해 올지라도 그들의 정체를 바로 알고 경계해야 한다. 또 하나는 이슬람에 대하여 경계할 것은 경계하되 그들 역시 선교의 대상으로 여기며 긍휼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불링거는 하나님의 백성 밖에 있는 자들의 믿음과 삶에 대하여 보다 긍정적인 암시를 제공한다 즉 무슬림 또한 전도와 선교의 대상이란 점에 있어서 긍휼의 여지는 있다. 특히 이 점은 불링거에게 있어서 돋보이는 점이다.

 

3. 이슬람에 대한 불링거의 적용

종교개혁 당시와 같이 다시 한번 21세기 거대한 종교로 우뚝 선 이슬람은 국제사회를 공포와 위협으로 압박하며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다. 한국 또한 박근혜 전 대통령 때 구체화된 친 이슬람정책으로 인하여 작년 한 해 동안 이슬람 관광객 1백만 명이 우리나라를 다녀갔으며 할랄 시장의 확대 등 정부는 이슬람 인구를 맞이할 준비로 분주한 듯하다. 이슬람은 더 이상 중동의 종교가 아니다. 전 세계 이슬람 인구의 3분의 2가 아시아에 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이슬람 인구가 많은 나라는 국민의 80%가 무슬림인 인도네시아(약 1억9000만) 두 번째, 인구의 96%가 무슬림인 파키스탄(약 1억7000만) 그리고 인구의 89%가 무슬림인 방글라데시(약 1억5000만) 등이다. 이 나라 이외에도 이슬람 국가인 우즈베키스탄과 키르키스탄 등 5개국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는 인력 송출국 속에 포함되어 우리나라에 정착하고 있다. 또한 한국인 이슬람 인구도 성장하고 있다. 1956년 208명이었던 한국 이슬람인구는 1970년 3700명, 2009년에는 9만1000명으로 성장하였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슬람의 도전 앞에 이슬람을 철저히 연구하였고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에 따라서 더 이상 이슬람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밀려오는 이슬람의 도전 앞에 한국교회는 응전을 준비해야 한다. 이슬람이 세상을 뒤흔든다고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수단에 불과하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이해 위에서 세상을 보고, 교회의 역할을 권고했다. 지금 세대에도 동일한 눈을 가진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전진되기를 바란다. 한국교회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이슬람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이슬람을 올바로 이해해야 하며, 이슬람을 무조건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루터나 칼빈, 불링거처럼 객관적이고도 정확한 이해를 통해서 무슬림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전도해야 하는 대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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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믿음이냐 행함이냐

 

찬송 : ‘구주 예수 의지함이’ 542(340)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갈라디아서 216, 야고보서 217

 

말씀 : 아득한 옛 추억입니다. 교회학교 고등부 시절, ‘믿음이냐’ ‘행함이냐’ ‘바울이냐’ ‘야고보냐하는 주제를 놓고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섞어가며 밤늦도록 토론하던 일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믿음행함을 상호 대립 관계로 보고 양자택일을 강요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바울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평가절하했습니다.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에서 야고보서는 유다서 히브리서 요한계시록과 함께 정경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알고 보면 루터가 종교개혁의 근간으로 삼았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씀도 4복음서와 히브리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입장은 중세 가톨릭의 공로신학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그의 신학적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 우리는 믿음행함’, 그리고 바울야고보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충적 관계임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상호 보충적 관계라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선 바울은 선교사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선교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 얻는 믿음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그의 목회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사랑의 행함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믿음과 행함이 야고보가 주장하고 있는 믿음과 행함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예수를 믿어 구원 얻는 믿음입니다(2;16). 반면 야고보가 주장하는 믿음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유일신관을 말합니다(2:19). 또한 바울이 부정하고 있는 행함은 구원을 위한 율법의 행위입니다(2:16).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구원을 얻기 위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인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 문제에서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랑의 행위는 무의미합니다. 또한 사랑의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공허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위해 상호 보충적 관계여야 합니다.

 

기도 : 거룩하신 주님, 믿음과 행함이 조화를 이루는 온전한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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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기도는 힘든 것인가 ?    


누가복음 11장 1∼4절

여러분들은 기도가 어렵고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 순서라도 맡으면 부담을 느끼고 예배에 불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성도께선 “목사님 저는 아무개 장로님처럼 은혜롭게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저 기도시키지 말아주세요”라고 신신당부합니다.

기도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 말씀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주기도문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라며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눅 11:2)면서 가르침을 주십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데서 시작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어린이가 아빠 엄마를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도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복입니다.

아빠를 부르듯 ‘아버지여’라고 하나님을 부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이 기도의 시작이며 핵심입니다.

 

유창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은혜롭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힘들고 지치고 괴롭고 절망스러우며 어느 누구도 의지할 수 없을 때

‘아버지’라며 간절히 고백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달려오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허례의식이 강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시며 온 만물을 창조하시고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이시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세 살짜리가 아버지에게 “능력 많으시고 인격자이시며

훌륭하신 아버지여 과자 하나만 주시옵소서”라고 말한다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습니다.

기도는 어린이가 아버지를 부르듯 자연스럽고 솔직하고 꾸밈없이 나의 마음을 담아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마르틴 루터의 명상의 시간’이라는 책에서

기도할 때 “무릎을 꿇거나 서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은 하늘을 향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당신 개인의 필요와 관심이어야 하는가? 아니다!”라며

하나님의 계명에서부터 시작하라고 합니다.

한때 가톨릭 사제였던 그는 ‘중언부언하는 것’(마 6:7),

다시 말해 뜻 없이 말만 늘어놓거나 쓸데없이 중얼거리며

시간을 채우려는 잘못된 기도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9절부터 더욱 적극적인 기도 생활을 강조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한 행동이며 기도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찾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찾게 하실 것입니다.

두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고

늘 응답받아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경회 제자들루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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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기독교강요

 

칼빈의 주요저서로 종교개혁 신앙의 표준적인 진술이 된 성서신학개요이다. 이 책은 개신교 신학의 고전으로 종교개혁 시대에 가장 체계적인 신학서로 평가받는다. 칼빈이 1536년 바젤에서 라틴어 초판 간행(6장). 초판을 발행한 뒤 칼뱅 자신이 개정하고 보완하여 1559년에 80장으로된 최종 결정판이 나왔다.

 

기독교강요 초판이 1536년 세상에 나왔을 때, 이 걸작은 기독교계를 뒤흔들었고 역사를 움직였다. 당시의 로마교회는 기독교강요를 두려워했다. 또한 개혁교회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체계가 잡히고, 당당하게 참 교회를 향한 길을 갈 수 있었다. 이 책으로 죤 칼빈은 일류 신학자로 인정받았다.

 

1559년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의 초판을 내놓았을 때, 주님께서 무한한 은혜로 그와같은 성공을 거두게하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내가 더 분발하도록 격려해주신 여러분들의 열렬한 평가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여 미력이나마 보답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 큰 배은망덕이라고 생각한다"(독자에게 드리는 글 중에서).

 

기독교 강요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2.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3. 그리스도의 은혜를 수용하는 방법, 4.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다.


⑴ 칼빈이 26세 때 쓰고 다음 해 1536년 3월 스위스 바젤에서 초판이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8절판 520페이지의 라틴어 판이었고 목적은 ①변증과 ②교육이었다. 모두 6장으로 되었는데 ①법(십계명) ②사도신경 ③ 주기도문 ④성례(세례와 성찬) ⑤잘못된 5성례 ⑥그리스도인의 자유. 이 순서는 루터의 요리문답서를 닮았다. 이 책은 즉각적인 성공이었고 곧 매진되었다. 재판이 요구되자 개정판을 내기로 하였다. 이때 벌써 국제적 명망을 얻게 되었다.

 

⑵ 1539년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라틴어 개정판을 출간하였다. 모두 11장이었고 그 중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 "신구약 비교", "예정과 섭리", "그리스도인의 생활"등 세 장이 들어가고 여기 부서의 영향이 크게 보인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생활"장은 부서의 "영혼의 참된 치유"(The True cure of Souls)의 영향을 입었다.

 

⑶ 1541년 불란서어 판이 나오다. 불란서어 문장에 큰 영향을 끼침.

 

⑷ 1543년에는 전 21장으로 증보함, 1545년 재간, 1550, 1553, 1554 수정판(1545, 1551 불란서어판)

 

⑸ 1559년 최종 라틴어판, 전 4권이며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랐다. ①성부 ②성자 ③성령 ④거룩한 공회

 

⑹ 성격 : 성경의 진리를 단순(Simplicity) 명료(Clarity) 조직(System)적으로 설명하려 하였 으며 여러 차례의 개정판을 내었으나 근본적 원리는 변치 않았다.

 

목적 : 신학생들에게 성경공부를 위한 준비를 시키려함.
(to prepare students of theology for the reading of the Divine Word) 이 책은 칼빈 자신의 친구보다 책을 통해 전세계에 더 많은 친구를 만들어 내었고 개신교의 신학 교과서 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총론(Summa Theologica)에 비견되며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에서 100년간 신학 교과서로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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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라마단 금식(Muslim Fasting Month)

 

 이슬람교의 교리 중에 신앙고백, 기도, 금식, 자선 그리고 순례가 있다. 이슬람교를 연구하고 있는 비 무슬림 학자들은 그것들을 일컬어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이번호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 기둥인 금식과 자선에 대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무슬림은 일년 중 이슬람력(Hegira)으로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에 금식을 한다. 한달동안 계속되는 금식의 시간은 동트기 전부터 해가 질 때까지이다. 병자, 여행자, 임산부, 아기 엄마 그리고 어린아이를 제외한 모든 남녀 무슬림이 그 시간에는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면 안되고 흡연도 삼가 해야 한다. 그 금식을 일명 ‘라마단 금식’이라고 한다.

필자가 사우디에 가서 처음 목격하게 된 라마단 금식은 아주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러나 12년이 지나는 동안 라마단 금식이 봄철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되었다. 헤지라(Hegira)의 계산 방식이 음력인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음력과는 달리 윤달이 없어서 매년 라마단 달이 9일씩 빨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헤지라는 계절에 무관한, 오직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달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매년 라마단 달에 15억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 금식의 유래는

무함마드가 히라 동굴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명상을 하다가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게 된 것을 기념하고, 예언자의 고행에 동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 후 이슬람 신학자들은 금식의 12가지 의미를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반포하였다.

1. 금식은 사랑의 원칙을 가르쳐 준다. 2. 창조적 희망감과 낙천적 인생관을 갖게 해 준다. 3. 진정한 덕을 심어 준다. 4. 건전한 양심을 배양한다. 5. 인내심과 비 이기심을 고취시킨다. 6. 절제와 의지력의 효과적인 실습이다. 7. 투명한 영혼으로 초월의 경지에 들게 하고 맑은 정신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하여 경쾌한 몸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한다. 8. 현명한 저축과 건전한 가게 예산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9. 노련한 적응 기술을 터득시킨다. 10. 심신 단련과 건전한 생존의 기초를 닦아준다. 11. 사회적 귀속, 화합과 형제애, 알라와 법 앞에서 참다운 평등의 정신을 진작시킨다. 12. 자기 안정과 자제,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 보존, 승리와 평화를 위한 알라의 처방이다.

 

필자는 이슬람 신학자들이 라마단 금식을 통해서 구도자가 체험하게 될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훈련과 공동체에 미칠 장점들은 언급하고 있으나 매년 행하는 라마단 금식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매년 라마단 금식에 참여하는 사우디 무슬림들에게서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라마단이 오면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금식에 참여한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음식과 물을 금하고 담배를 피지 않는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열심히 모스크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

규칙적으로 하루 세끼의 식사를 하던 사람이 음식을 금하니 얼마나 배가 고프고 힘이 들겠는가?

특히 현장에서 뜨거운 태양을 온몸에 받으며 중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주로 삼국인들임)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금식기간에 몸이 야위고 건강을 상실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식에 참여하는 그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그들은 알라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알라를 기쁘게 하고 그분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 금식한다. 오직 알라를 생각하여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웃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을 할 때에 박탈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인내한다. 그들은 금식을 통해 자신의 정욕을 훈련하고 육체적인 유혹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숙해 간다.

그러나 성서적인 관점에서 바라 볼 때 라마단 금식은 바른 금식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금식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저녁(해가 지면서 해가 뜨기 전까지)에 두 세 차례의 식사를 한 후 아침 예배를 드리고 낮에 잠을 자는 식으로 생활 패턴이 바뀐 것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금식 기간에 식품이 더 판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둘째, 금식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데 라마단 금식은 강제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 기간에는 비 무슬림도 무슬림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 신고가 되면 구속이 되고 추방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찰학교를 짓던 공사 현장에서 한 미국인이 라마단 금식 기간에 담배를 피우다가 자기 수하에서 일하던 사우디인이 신고하므로 추방되는 일이 있었다. 셋째, 외도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라마단 기간에 많은 현지인이 해외 여행을 한다. 그들은 주로 유럽과 동남아를 여행하며 즐긴다. 그 기간에 각 항공사의 비행기 표를 구하기가 어려운 사실이 이를 묵시적으로 증명해 준다.


축제의 향연

 라마단 금식이 끝나면 그들은 ‘이드’ 축제를 가진다. ‘이드’ 축제는 금식을 무사히 끝낸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향연이다. 3일 동안 계속되는 축제를 위해 집집마다 수양을 잡아 요리(갑싸)를 해 놓고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은 초청하여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우애를 다진다. 때로는 외국인을 자기 집에 초청하는 경우도 있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현지인과의 이런 유대 관계는 사역에 아주 중요한 교량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나심이라는 동네에서 살 때에 마음씨 착한 30대 초반의 현지인이 앞집에 살고 있었다. 그는 부인 둘을 거느리고 있는 가장이었는데, 어느날 필자의 대문을 두드려서 나가보니 그가 큰 고기 덩어리를 하나 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필자에게 건네 주며 ‘이드’ 축제를 위해 잡은 양고기인데 먹으라고 했다. 그가 준 고기는 값으로 환산하면 얼마 되지 않는 것이었으나 그 선물에는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정이 배어 있었다. 그 후 우리는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그날 선물 받았던 고기는 냉동고에 잘 보관해 두었다가 양고기 요리를 잘하는 유집사님(지금은 한국에서 목사로 사역하고 있음)께 드렸다.

축제 기간에 무슬림들은 연 수입의 2.5%를 구제금으로 사회에 환원을 한다. 이를 자카트(Jacket)라고 한다. 자카트는 종교성을 통해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이웃에게 구제금으로 전달되기도 하고 개인이 이웃을 돕기도 한다. 그들의 자카트는 단순한 구제나 자선이 아니라 의무 사항으로 되어 있다. 무함마드가 자카트를 종교적인 의무로 강조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터넷 한국일보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에 거지가 많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러나 필자는 사우디 아라비아에 체류하는 동안 거지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다만 라마단 금식이 끝난 후 이드 축제 기간에 구걸을 하는 사람들은 목격한 적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이드 축제 기간에 구걸을 하고 돕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가난한 여인들이 차도르를 쓰고 가가호호 방문을 하며 구걸을 하고, 길거리에 좌판을 벌려 놓고 장사를 하기도 한다. 그 여인들은 가난한 과부들과 대부분 성지 순례를 왔다가 사우디에 체류하고 있는 아프리카인 들이라고 알려 지고 있다.

자카트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 현지인 인데, 경제 사범으로 장기 복역 중에 있던 한국 사람(무슬림)이 자카트의 혜택을 입고 출옥하여 귀국한 경우도 있었다.

무슬림들이 자카트를 죄 사함과 심판 때에 구원을 받는 수단으로 믿고 행하지만,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기독교인의 금식 기도는 어떠한가? 현대 크리스천들은 금식 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 문화적인 경향이라고 본다. 현대 문화가 사람들을 편하고, 급하게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한번 클릭하면 자기가 원하는 모든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무엇 때문에 금식 기도를 하겠는가? 그들은 물질이 필요하면 하나님보다 먼저 파워 볼 티켓을 생각할 것이다.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영적으로 부패하고 어둡던 시대(중세)에 “금식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 금식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

만약 루터가 지금 우리 가운데 살아 있다면, 물질 문명은 이루었으나 중세기보다 더 영적으로 무질서하고 도덕적으로 타락되어 재난과 질병과 사고가 많은 이 시대에 금식하지 않는 성도들을 바라보며 장 탄식을 할 것이다.

성경에는 금식에 대한 교훈과 실례가 많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소원과 재난이 있을 때마다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예를 들면, 에스더는 유대민족의 구원을 위해 3일 동안 금식 기도를 했고(에4:16), 다윗은 병든 아들의 회복을 위해 7일을 금식 기도했으며(삼하12:16-18), 다니엘은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21일을 금식 기도했다(단10:2-3). 그리고 모세는 언약의 돌판을 받기 위해 40일을 금식 기도했고(신9:9), 예수님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 40일 금식 기도를 하셨다(마4:2).

성경은 금식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천명했다(사58:6). 어떻게 금식 기도를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첫째, 금식 기도의 대상이 분명해야 한다. 금식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기도의 대상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소개하셨다(마6:9).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금식 기도의 목적은 영적인 승리여야 한다. 이사야는 금식의 목적을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고 했다. 성도는 매일 매일 영적 전쟁에 직면하며 살고 있다.

성도는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 이면에 자신을 억압하고, 넘어뜨리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사탄이 진을 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금식 기도하여 영적 권능을 힘입고 강력한 진들을 파하며, 삶 속에서 빛의 영역, 자유의 영역을 넓혀 가야 한다. 셋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사야는 “또 주린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7)라고 했다. 금식 기도를 하면서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공복의 아픔과 박탈의 경험을 통해서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이웃의 아픔을 이해하고 감싸 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금식 기도를 드리는 구도자에게 너무나 귀한 축복들을 약속하셨다(사58:8-11)

금식 기도의 목마름과 갈증을 갖자. 금식 기도를 통해 영성을 회복 받자. 그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자(고전10:31).

조완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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