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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예배설교  / Special Worship Preaching

 

 

 

제 목 : 내 영혼이 주를 찬양

말 씀 : 눅1:46-50

1.은혜의 포로가 된 사람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중의 하나인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강림하사’ 3절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다.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

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여기서 사슬이란 쇠줄 즉 체인(Chain)을 말한다. 즉 주님의 은혜의 쇠사슬로 나를 주님께 꽁꽁 묶어서 완전히 주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어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살게 해달라는 고백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고백인가?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면 주님의 은혜의 쇠사슬에 꽁꽁 묶여 완전히 주님의 포로가 되어 살기를 노래했겠는가?

또 사실 세상의 그 무엇이 우리가 완전히 포로가 될 만한 것이 있겠는가? 돈의 포로, 권력의 포로, 지식의 포로, 세상 향락의 포로 그 어떤 포로가 행복을 노래 할 수 있을까? 그 어떤 포로가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 주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어야 한다. 돈이든 명예이든 권력이든 세상 즐거움이든 세상적 사랑이든 다른 어떤 것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주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는 사람이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은혜의 포로가 된 자의 찬양이다. 그는 바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다. 마리아는 예수님 수태고지를 받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때 마리아는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눅1:38절을 보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나는 주의 여종입니다. 포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될 종입니다. 영광의 나라를 위한 종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황송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런 고백인 것이다.

이것은 마리아로서는 엄청난 모험이다. 그냥 평범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알콩달콩 사느냐 아니면 파혼을 당하든지 파혼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칼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경험해야 하는 중대 기로에 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일을 통해서 이룰 구원의 역사가 얼마나 더 크고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알았기에, 주님의 은혜의 사슬에 묶여 순종했고, 그래서 드디어 영광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주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은혜의 사슬로 나를 주님께 묶어 버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주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2.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함.

마리아는 먼저 자신을 돌보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48절 말씀을 보라.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돌아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필요한 것들로 공급해 주셨다는 말이다. 잘나지도 거룩하지도 아름답지도 대단하지도 못한 우리를 인도하셔서 이렇게 귀한 인생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말이다.

사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 될 만큼 대단한 존재는 아니었다. 물론 신실한 믿음과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감히 주님의 모친이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권적인 은혜로 마리아를 택하여 주님의 모친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사실이다. 주님이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그 사역을 감당케 하셔서 우리가 누릴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우리가 살아 숨쉬는 모든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인 것이다. 안 그런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어떻게 믿겠는가? 어떻게 주신 사명 감당하겠는가?

그래서 마리아는 오늘 46,47절에서 고백한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나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돌아보셔서 이 엄청난 은혜를 주셨는지 도무지 그 은혜를 감당할 수 없어서 그저 기뻐 찬양하노라며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해주셨고, 죄의 사슬에서 풀어 주셨고, 구원을 주셨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없는 엄청난 축복이고 은혜이고 영광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우리를 돌보신 하나님, 은혜를 주신 하나님,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자. 그 은혜의 포로가 되어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3.크신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함.

또한 마리아는 49절에서 크신 일을 행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여기서 큰일은 무엇인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다. 이 엄청난 일을 자신을 통해서 행하심에 영광과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말하면 뭐 하겠는가? 이런 엄청난 일이 어디에 있는가? 누군가가 전 세계 만국을 다 통일하여 전쟁이나 기근이나 싸움이나 기아나 미움이나 갈등이 전혀 없는 완전한 평화의 왕국을 건설해 준다해도 주님께서 하신 일보다 클 수는 없다. 모든 질병이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해도 이보다 더 큰 일일 수는 없다. 만분의 일, 억분의 일도 안된다. 그래봤자 천국까지는 못간다. 또 죽는다.

그러나 주님은 마귀 사탄의 권세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것이다.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먼저 내가 그 반열에 들어왔음에 감사해야 한다. 그 은혜를 찬양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이 곳에 있음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찬양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50년 이룬 역사를 인하여 감사해야 한다.

나는 솔직히 50주년 행사를 끝내고 아쉬운 게 있다. 물론 여러분들이 많이 수고하셨고 여러모로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신 것 감사드린다. 그러나 좀 아쉬운 것은 이 귀한 행사를 하는데 감사헌금 한 사람이 불과 몇 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 교회가 50년 전 이곳에 세워져 이룬 복음의 역사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것이라면, 내가 이 교회를 통하여 얻은 은혜가 너무나 큰 것이라면, 이 일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감사한 일이라면 감사헌금은 했어야 되지 않았을까? 우리 육신의 부모님의 회갑이나 칠순행사를 한다면 어땠을까? 교회는 내 아버지집이 아니던가? 내 아버지집에 이런 경사스런 일이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가겠는가?

이건 결코 헌금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과 마음의 문제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 대한 사랑과 생명의 역사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의식의 문제이다.

여러분, 크신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크신 일을 인하여 내가 은혜 받고 구원받았음에 감사하고 그 은혜를 찬양하기 바란다. 하나님께 이 어둡고 완고한 땅에 이루신 이 큰 역사를 인하여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고 그 은혜를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4.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함

다음에 마리아는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셔서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오늘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55절의 말씀이다.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여기서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물론 아브라함에게 하신 많은 약속이 있지만 특별히 창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그 말씀이다.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메시아를 보내주시고 그 메시야를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들이 구원받고 복을 받게 된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오심을 이미 약속하신 대로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구원의 약속대로 메시야를 보내셨고 그 메시야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그 약속 안에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에게 구원의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까지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런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그 약속대로 영광의 나라가 완전히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로 인하여 소망가운데 즐거워하며 그 은혜를 누리며 마음껏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 그런가? 우리에게 이 기쁨이 있는데, 이 소망이 있는데, 이 영광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 엄청만 축복을 받았는데 어찌 찬양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것을 제쳐두고 세상의 무슨 다른 은혜를 구하겠는가? 다른 무엇 때문에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이 은혜의 사슬에 묶여 살자.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자인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과 자부심으로 주님의 역사에 참여하며 마음껏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여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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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목회와 성경에 나타난 여성지도자 상

 


 
성경에 나타난 여성지도자 상(像)
-잉태와 해산의 고통으로 담금질된 여성 지도자-
김회권 목사(일산두레교회)

성경의 역사에서 여성들은 위기의 순간마다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에덴동산에서 "산 자의 어머니"로 칭송된 하와에서부터 남자를 알지 못한 숫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하는 위태로운 사명을 감당한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구속사(救贖史)는 여성들의 순종, 고난, 믿음으로 결정적인 반전(反轉)을 이루며 진행되었다. 여성의 지도력은 한 마디로 잉태와 해산의 지도력이다. 잉태는 창조를 위한 고통의 감수를 의미한다. 해산은 그 고통을 통하여 완전히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한다. 성경의 여성 지도자들은 현대적인 페니미스트(여권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고 과격하였는데 그들의 급진성과 과격성은 자신들의 의지를 하나님 나라의 대의아래 쳐서 복종시키는 급진성이며 과격성이었다. 오늘 우리는 유대인 역사의 가장 위태로운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지도력을 선보인 여성 지도자 에스더의 신앙적 지도력을 공부하고자 한다. 에스더를 통하여 우리는 성경 전체에 나타난 여성 지도력의 한 전범(典範)을 연구하고자 한다. 여성 지도력은 투쟁적이고 호전적이며 권력지향적인 남성위주의 문화를 능히 초극하는 포용과 오래 참음과 견고한 연대성으로 특징지워지는 "살림"(하와)의 지도력이다. 21세기 남성 중심의 호전적이고 경쟁적인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 지도력이다. 여성은 오래 그리고 질긴 슬픔과 흐느낌을 가지고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칼날에 저미어진 가슴을 안고 참담하게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배회하는 오열과 해소되지 않은 슬픔의 여인들이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는 은혜를 덧입는다. 여성들의 지도력은 직관적이고 충동적일 정도로 행동적이며 위태로운 환난의 시기에 힘을 발하는 지도력이다. "죽음"을 조롱하는 지도력이다.

                      성서의 여성지도자들:
구약성경의 여성 지도자들-여러가지 유형들의 지도력
1. 하와: 모든 산 자의 어머니. 죽음의 형벌을 선언하고도 하나님의 은혜로 남자아이를 낳고 산 자의 어머니가 되는 지도력. 사망 한 복판에서도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 지도자(심판/사망 중에서 생명을 잉태하는 지도자).

2. 드보라: 이스라엘 지파들이 갈릴리-므깃도-에브라임 산지를 가나안 족속들로부터 빼앗아 이스라엘의 영토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위대한 전사이자 지도자. 뿔뿔히 흩어진 지파들을 하나의 목표 아래 결집시키고 스스로 위험한 전장으로 내달렸던 살신성인의 지도자(두려움과 분열주의를 극2복하는 여걸형 지도자).
3. 한나: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인 불임의 세월 속에서 몰락해 가던 사사시대를 넘어 이상왕이 다스릴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고 선취(先取)하는 여성지도자(개인적 슬픔과 원한을 공적인 지도력의 에너지로 승화시킨 지도자).

4.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사무엘상 3-4장): 이가봇이라고 외치며 장렬하게 죽어간 여인. 행주산성 정신의 여성 지도자(비운의 역사가 겪은 상처와 절망을 앓다가 외치며 사라지는 지도자).

5. 나오미와 룻: 절망과 극한 가난 속엣 인애와 진실로 하나님과 사람을 감동시킨 지도자. 쓰라린 일상생활 자체가 여성 지도력이 발휘되는 가장 전형적인 공간임을 알려준 지도자(일상생활의 쓰라림 속에서 담금질되는 지도력의 소유자. 몰락하는 가문을 세우는 희망의 지도자).

6. 라마에 울부짖는 라헬(렘 31장):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젊은이들의 포로 유배행렬(전쟁에서의 패배)을 바라보면 위로받기를 거절하며 오열하던 지도자들(국가의 몰락을 자신의 아들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어머니형 지도자) .

7. 에스더: 남성의 성적 노리개감이 되기를 거절하여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간 신여성형 왕후 와스디 대신에 왕후가 된 에스더는 페르샤 궁궐 안에서 누리는 안정성과 행복을 포기하고 학살위기에 내몰린 민족의 굴욕적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고 고난받는 민족과 동일시한다. 지도자는 동일시의 능력이 예민하게 탁월한 사람이다(목숨과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결단의 지도자).

8. 엘리자베스와 마리아: 개인적인 명예와 관련된 하나님의 명령과 계획을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인 지도자들이다. 엘리자베스의 신령한 믿음과 통찰력은 세례요한을 잉태하고 해산하였고 마리아의 절대순종은 개인적인 불명예(?)와 수치감을 초극하는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 결정적으로 사용된다(자신의 불명예를 감수하는 지도자).


                    여성지도자로서의 에스더

 에스더는 페르샤의 황제 아하수에로 치하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하려는 하만의 음모로부터 모르드개와 동족 유대인을 구출한 여성지도자다. 자신의 왕후의 위치는 물론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한 요청받지 않은 왕 알현을 감행한 에스더는 지도자의 이상적인 덕목을 발휘하고 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라든지 야웨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은 섭리하시는 주로 역사의 장막 저 편에 숨어 계신다. 에스더서는 유대인들이 아주 의미깊게 송축하는 부림절(Purim, 제비뽑기, 운명의 대역전 축일)의 기원을 말해준다.     

I.   아하수에로 황제의 왕후로 간택되는 절세의 정결 미인 에스더
 남성들의 노리개감이 되기 싫다고 신하들에게 아름답게 치장하고 나가는 것을 싫어한 와스디 대신에 에스더는 왕후로 선택된다(1:1-2:23). 삼촌 모르드개의 양녀(피후견자) 에스더는 역사적 공인이 되면서 동족의 고난 한 가운데로 이끌려간다.
A. 폐위되는 와스디: 와스디는 왕의 즉흥적 결정에 반발함으로써 왕후의 지위를 상실한다(1:1-22).  
 1. 왕의 위대한 향연. 권력자의 자기과시와 오만(1:1-9).
 2. 와스디의 몰락(1:10-22): 왕후 와스디는 감연히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왕의 측근 자문관들은 와스디의 폐위를 건의한다. 
B. 에스더의 왕후 등극: 고조되는 위기 가운데 왕후 에스더의 존재(2:1-23). 
 1. 에스더의 왕후 등극(2:1-18).
- 새 왕후 물색과 간택(2:1-4) 
-에스더의 피택과 왕후 선발 과정(2:5-11; 2:12-14; 2:15-18).
 2. 에스더의 신실한 인품. 모르드개와 여전히 신실한 관계 유지(2:19-23).
에스더는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왕을 모살하려는 음모로부터 왕을 구하는 데 공을 세운 모르드개의 공적이 역사서에 기록되게 한다.  

II. 모르드개와 유대인을 학살하려는 하만의 음모(3:1-15).
 A. 모르드개의 절개어린 태도가 하만의 적개심을 자아낸다(3:1-6). 하만은 으스대는 권력자로서 모르드개의 기개로 인하여 상처를 입는다.
B.  제비뽑기에 의하여 선택되고 왕에 의하여 승인된 복수의 날(3:7-15).

 III. 에스더를 통하여 유대인들을 구출하려는 모르드개의 계획(4:1-17).
왕의 대궐 밖에서 재를 뒤집어쓰고 베옷을 입은 채 유대인 학살 명령에 대한 응답하는 모르드개의 에스더의 권세를 이용하려고 한다. 왕에게 이 기막한 음모를 고하여 유대인들을 학살될 위기에서 건져달라고 절규한다. 에스더는 처음에는 거절한다. 
A.  모르드개의 개인적 응답(4:1-3)
 B. 에스더의 첫 반응(4:4-12).     
 C. 에스더의 첫 반응(4:13-17).      

 IV. 운명의 대역전-모르드개는 존귀케 되고 하만은 몰락하다(5:1-8:2).
 A.  에스더의 향연 초청들과 첫 향연(5:1-8). 
 B. 모르드개에 대한 하만의 음모는 계속되다(5:9-14).  
 C. 굴욕당하는 하만(6:1-14) 
 1. 모르드개의 공적에 대한 우연한 발견(6:1-5). 
 2. 영예롭게 된 모르드개(6:6-11)
 3. 하만의 아내가 그의 몰락을 확증하다(6:12-13).  
 4. 두 번째 잔치에 소환된 하만(6:14)
 D. 두 번째 향연(7:1-10): 탄로나는 하만의 음모 
E. 모르드개의 승진과 영화(8:1-2) 

 V.  두 번째 위대한 운명의 대역전-원수를 압도하는 유대인들의 대역전승(8:3-9:19)

 VI. 결어: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결단은 잉태와 해산의 지도력이다((9: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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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종교적 의미 줄고 ‘쇼핑절’로 변질되는 성탄절

 

 

미국 성인 대상 설문조사 결과

입력 :  2017-12-18 00:00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교회는 성탄예배 준비로 분주해지고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 퍼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수보다 산타와 선물로 대표되는 소비문화가 더 주목받으며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적인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국민들도 이전만큼 크리스마스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설문조사가 나와 눈길을 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인 퓨리서치 센터는 성탄절의 종교적 의미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하는 미국 성인의 비중이 절반을 뛰어넘었으며 그중 많은 숫자가 그런 상황이 별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퓨리서치 센터가 지난달 29일부터 4일까지 미국 성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성탄절에서 종교적 의미가 예전보다 덜 강조되고 있다”는 비중이 56%에 달했다. 또 그렇게 대답한 이들 중 약 45%가 “그래도 문제가 없다”고 대답했다. “거의 비슷하다”고 대답한 비율은 30%, “예전보다 종교적 의미가 오히려 강조되고 있다”고 말한 비율은 12%였다.


더 큰 문제는 성탄의 역사성마저 의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다거나 천사들이 예수의 탄생을 알린 일 등이 사실이라고 믿는 미국 성인이 2014년에 비해 약 7∼8% 포인트씩 하락했다. 그 결과로 “예수님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한다”는 비율은 2014년 65%에서 57%로 크게 하락했다.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인사였던 “메리 크리스마스(행복한 성탄을)!”라는 인사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 분위기다. 퓨리서치 센터는 자영업자들 중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할 것”이라고 대답한 비율이 32%로 2005년 43%에 비해 11% 포인트 떨어졌다고 밝혔다. “송년·신년 인사로 대체할 것”이라고 밝힌 자영업자는 15%였으며 “상관없다”고 대답한 비율은 52%에 달한다.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제 다시 백화점 직원들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게 할 것”이라고 말한 것과는 온도차가 있어 보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겨울 축제(Winterval)는 무시하고 교회로 향하라’는 제목으로 칼럼니스트 팀 스탠리의 글을 지난 3일 게재했다. 스탠리는 “우리가 성탄 시즌 TV에서 보는 모습은 분명 성탄절이 아니라 겨울축제의 모습”이라며 “하지만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면 백화점이 아닌 값없이 주는 소중한 선물들이 있는 교회로 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현우 기자 base@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

[출처] 국민일보
[원본링크]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868146&code=23111111&sid1=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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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수요저녁설교  가까이 감의 능력 (September,Wednesday Worship Sermon)

 

제목/가까이 감의 능력

성경/ 빌1:8-11  

 

●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 맹자의 어머님이 맹자를 위해 세 번 이사한 이야기/ 무덤가, 시장통, 서당옆 = 어디에 서 있느냐가 중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의 발이 어디에 서 있는가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8-11절 말씀을 중심으로 가까이 감의 능력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8절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 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립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하는 바울의 사랑의 표현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기도하노라” 가족을 사랑한다면,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교회를 사랑한다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필수적인 사랑의 표현은 “기도”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기도 없는 사랑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린 사랑의 표현입니다. (앙꼬 없는 찐빵)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사할 것도 많고, 자랑할 것도 많지만 무엇보다 기도할 것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해야 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9절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기도의 내용이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기서 “지식”이란 단순한 앎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야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부부간의 경험, 체험을 뜻합니다. 아주 구체적인 경험입니다. 창세기에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였다라고 할 때 “동침”이란 단어가 바로 “야다”입니다. “총명”이란 “지식을 통한 바른 판단력”을 뜻합니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는 말씀은 한마디로 “지식이 있는 사랑이 풍부”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있는 사랑”을 통하여 “더 많은 기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지식이 어떤 체험적 지식이겠습니까? 당연“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풍부할 때 우리는 더 많은, 그리고 더 큰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 그럼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풍부하게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공부를 많이 하면 됩니까? 물론 성경공부를 통하여 하나님을 많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기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너무 커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확실하게 우주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술이 그 만큼 발달하지 못하였기에 사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망원경을 통해 보는 것입니다. 허블우주망원경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라도 가까이 하여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아주 멀리 떨어진 별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 또한 아주 작아 볼 수 없는 미생물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가까이 가면 됩니다. 전자 현미경을 통해서 봅니다. 가까이 갈 때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고, 가까이 갈 때 느낄 수 없는 것들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체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부지런한 발로, 기도 자리에 가고, 예배 자리에 가고, 전도 자리에 가고, 봉사 자리에 가고, 말씀이 있는 자리에 가면 하나님을 많이 경험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더 풍부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가까이 갈수록 잘 보이고,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이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만 보입니다. 그러면 다른 많은 문제들은 작게 보입니다.

 

시편 속에 다윗이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므로 하나님만 그에게 보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라.”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문제는 작아지고 해결됩니다. ▶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무리들이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서 옷자락을 만진 여인만이 혈루병의 고침을 받았습니다. ▶ 예수님을 가까이 하여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마리아만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그녀를 기념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 야고보서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 시편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 그렇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므로“지식이 있는 사랑의 풍부함”으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무엇 하기를 기도합니까? 10-11절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첫째는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합니다.

둘째는 진실하여 허물이 없게 하라고 합니다.

셋째는 의의 열매를 가득히 맺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진실하게, 정직하게 살아야 함은 당연합니다. 언제까지 그러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 삶을 통해 “의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부지런한 발이 필요합니다.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 전도의 자리, 봉사의 자리, 선교의 자리에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므로 지식이 있는 사랑을 통해 선한 것을 분별하며, 진실하여 의의 열매를 많이 맺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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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카톨릭체제의 문제- 마틴 로이드존스 / 천주교 배교집단 /extra ecclesiam nulla salus /베드로 수위권 /

교황의 절대무오성 화체설 /신인협력 연옥 사제


 

로마 카톨릭 사상 평가

 

 


마틴 로이드 존스

by Martyn Lloyd JonesOriginally Printed in Great Britain at The Burlington Press, Foxton, Near Cambridge

 

너희가 마귀의 속임수를 능히 대항하여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에 베소서 6장 11절, 권위역).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사건들은 모든 크리스천 지성인들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로마 카톨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主義)와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에 화해(和解)를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여러 운동들이 일어나고, 숱한 회의들이 개최되는가 하면, 이같은 일을 환영하는 자들은 우리(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상호존중(相互尊重) 하에 협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니며, 크리스천 정신의 경이로운 구현(具現)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바로 이같은 일련의 움직임 때문에, 현 국면(局面)을 바르게 파악해야 할 당위성(當爲性)이 있는 것이며; 앞 날을 내다볼 때 사태의 긴박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반드시 직면하게 될 모종의 개연성(蓋然性) 때문인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현재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머지않아 카톨릭의 비중이 절대다수(絶對多數)를 차지하게 될 국가들은 전세계적으로 상당수에 달할 것이며; 그럴 경우, 로마 카톨릭은 ‘다수결 원칙’(多數決 原則)을 따르고 있는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占有)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로 인해 야기될 모종(某種)의 개연성을 예상(豫想)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영국)라고 해서 수년 내에 그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保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우리가 이같은 입장을 점검해 보고, 우리가 직면하게 될 엄청난 사실을 예의주시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이 일은 싫고 좋고를 떠나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성격의 어떤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소속된 적도 없고, 그같은 주제로 강단에서 설교해 본 적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 카톨릭주의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代案)은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외에 이 문제를 능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 소극적인 프로테스탄트는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지금껏까지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로마 카톨릭 교세(敎勢)가 각 나라에서 실질적인 증가추세를 보이는 반면, 소극적인 프로테스트의 온갖 노력들은 무기력해 보입니다. 본인은 로마 카톨릭주의의 이러한 확산이 자기의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무지(無知)함과 무기력(無氣力)함에 전적으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본인이 시간을 투자해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으로 인해 부득불 본인은 이 문제-곧 주권과 권능,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및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의 활동들인, ‘마귀의 속임수’에 대해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쨋든 좋습니다,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하기로 할까요? 여기에서 본인은 개개인에 관해서는 고려치 않음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물론, 카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크리스천인 개개인들도 존재합니다. 즉 여러분이 카톨릭 교인이면서도 크리스천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인의 전반적인 의도는, 카톨릭 내에서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체제(體制) 때문이 아니라 그 체제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로마 카톨릭 교회 내에서도 개인(個人)이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개인에 대해서는 고려치 않을 것이며, 또한 정치적 관점에서도 이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지금껏 그것이 엄청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해 왔습니다. 우리는 카톨릭 체제에 대한 역사기록을 알고 있고, 정치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카톨릭의 주장들이 정치적인 힘으로 발전된다는 사실도 알며,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정치적 측면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부분에 대해 고려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기독교 평신도들과 기독교 정치인들의 소관(所關)으로 보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오히려 영적인 측면에 관심이 있는데,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우리 앞에 제시하고자 하는 관건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I․로․마․카․톨․릭․체․제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까요? 우선 ‘하나의 체제’란 관점에서 살펴볼 때; 본인으로서는 로마 카톨릭주의로 알려진 이 체제야말로, ‘마귀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이라고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체제는 크리스천의 믿음과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離脫)된 종교단체이므로, 본인은 주저없이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더불어, 이 체제를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 단언하는 바입니다. 이제 이 점에 대해 분명히 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배교를 기독교의 진리로부터 전적으로 이탈한 기독교라고 정의합니다. 혹자는, “글쎄요, 당신은 직접적으로 로마 카톨릭을 지칭하는 겁니까?” 라고 반문하겠지만, 여기에 대해선 무척 신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에 카톨릭을 배교집단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진실 그 자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경우엔 진리에 대한 ‘부인’(否認)의 문제라기 보다는, 차라리 진리에 대한 ‘첨가’(添加)로 말미암아, 마침내 진리로부터 이탈하게 된 경우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설명하자면  이것(진리에 대한 첨가)이야말로 온갖 교활함이 들어오는 곳이요, 마귀의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란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무심코 바라보게 되면, 세상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만큼 정통(正統)인 교회가 없다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人格)과 같은 교리적 측면을 고려해 볼 때는, 로마 카톨릭의 정통성에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나사렛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드님이시라고 믿으며; 예수님의 처녀탄생(處女誕生)을 믿으며; 예수님의 성육신(聖肉身)을 믿으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믿으며;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대속(代贖) 사역과 그분의 육체적 부활(復活)을 믿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昇天)하셔서 하늘나라에 앉으신 사실도 믿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인격적 측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절대적으로 정통이며  애석하게도, 로마 카톨릭이 종종,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훨씬 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그토록 소름끼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한 측면을 가지고 카톨릭을 보더라도, 카톨릭의 정통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은혜(恩惠)의 원리’에 대해 고려해 보면, 그것이 그들의 중심 교리(敎理)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영감(靈感)과 권위(權威)에 대해서도 그들은 같은 입장을 고수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더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카톨릭을 단지 일반적인 접근방식으로 바라본다면, 카톨릭은 세계에서 가장 정통적 교회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점에서 교활함이 들어오고 어려운 문제들이 야기됩니다. 카톨릭은 이 모든 것에다 ‘저주받을 더하기’로써, 전적으로 비(非)성경적인 것들과, 사실상 성경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들을, ‘첨가’(添加)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결국에 가서는 우리가 거짓말을 믿는 위치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카톨릭의 교리는 일종의 모조품(模造品)이며, 성경에 명시된 대로, 카톨릭은 다름아닌 ‘매춘부’(賣春婦, 음녀) 그 자체입니다.

 

과연 이 문제가 지극히 교활한 것이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교활함’, 즉, 마귀의 속임수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활함이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서를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모든 사람에게 어떠한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카톨릭 체제는 무척 방대하고, 그녀의 교활함은 실로 커서 거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와도 같습니다. 무작위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틀림없이 여러분이 여러 번 접한 경우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들어온 바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혼(離婚)을 용납하지 않으며, 카톨릭 교인 중 누가 이혼했을 경우, 그는 교회로부터 제명(除名)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문 지상에서 돌연 일부 독실(篤實)한 카톨릭 신도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고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라고 반문하게 됩니다. 글쎄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결코 진실된 결혼이 아니었다”고! ... 그들은 어떤 것이든지 해명해낼 수 있고, 어려울게 하나 없습니다.

 

  그들의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체계가 그러하며, 고도의 논법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의 대응이 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달리 얘기해서, 로마 카톨릭이 실상으로  얼마나 많은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이 나라(영국) 안의 카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또 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을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미합중국에서의 카톨릭을 살펴 본 다음, 남아메리카에 있는 몇몇 라틴 국가들의 카톨릭을 살펴보게 되면, 그들이 동일한 체제라고 믿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및 기타 유사한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 보고, 독일이나 그 주변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와 대조해 보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같은 카톨릭 체제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도, 사실은 같은 카톨릭 체제입니다. 카톨릭은 얼마든지 그 색깔과 모습, 형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디서든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카톨릭입니다, 흡사 카멜레온과 같이 ......여러분은 마귀가 자신을 광명(光明)의 천사로 변모(變貌)시킬 수 있는 것이 마귀의 특징(特徵) 중의 하나라고 우리에게 알려 준,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카톨릭의 ‘위장술’(僞裝術)에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카톨릭이 고도의 지성적인 형태로 나타나서, 카톨릭 교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장합니다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며, 비(非)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미신(迷信)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관용적이고, 기꺼이 들어주며, 토론도 하고 양보도 하며, 매우 친근한 모습을 취합니다만; 그러나 다른 후진 국가에서는 아주 완고하며, 이교(異敎)에 대해 사악하고도 비열한 방법으로 핍박을 가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요, 동일한 카톨릭 체제이며, 동일한 카톨릭 교도들로서 존재합니다. 나는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 카톨릭 교회가 마귀의 걸작품(傑作品)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한 거대한 조직과 체제가 있어, 수십세기 동안 간간이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바로 이 일을 행하고 있으니 -- 곧 온갖 교활함과 속임수 가운데서, 성경의 표현대로 “온갖 불의의 속임수로써”, 마귀의 속임수를 그대로 드러내 왔습니다. 이 모두가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두 번째 장에서 이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 내용이 이 예언에 대한 유일한 설명구절은 아니지만; 그 중의 하나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이 체제가 ‘발흥(發興)한’, 말하자면, 권력을 장악하게 된 사실을 확인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이미 이 조직이 활동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것이 계시록 13장의 두 번째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고; 계시록 17장의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음녀(淫女)’의 그림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듯이, 바로 로마 카톨릭이 그러하며 언제나 그같이 행해 왔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어 왔으니, 이런 식으로 이렇게 성취되어 왔습니다. 여기 은밀히 유입되어 들어와 한 때 기독교 전체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어떤 체제가 있습니다. 바로 로마 카톨릭이 천천히, 교활하게 스며들어와, 자신의 방식으로 변질시켰고, 그 결과 카톨릭의 영향력은 거의 보편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II․로․마․카․톨․릭․의․중․대․한․오․류․들

 

  로마 카톨릭이 행한 일은 어떤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 적절히 다루자면 여러 달이 걸릴 것입니다. 이 한 설교에서 필자가 규명하고자 하는 관심사의 전부는 본인의 주장이 진실임을 보이기 위한 몇몇 머리글들을 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본 내용을 세 가지 주요 표제글로 나누고자 합니다.

 

1. 첫째는 로마 카톨릭이 어떻게 우상숭배와 미신행위를 도입하는 죄를 범해 왔는지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偶像崇拜)만큼 신랄하게 정죄받는 행위도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조각한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로마 카톨릭은 형상(形象)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카톨릭은 신도들에게 형상들을 숭배하도록 가르치고 있으며; 그들은 동상들과 조형물들과 초상화들을 숭배합니다. 여러분이 거대한 천주교 성당에 가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보십시오. 거기에 사도(使徒) 베드로를 기념하는 동상(銅像)이 있는데, 그 동상의 발가락 부분을 보면, 그 부분이 많이 닳아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구요? 로마 카톨릭의 그릇된 가르침에 희생된 수많은 가련한 희생자들이 그 발가락에 입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절하면서, 형상들과, 동상들과 유물들을 숭배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성인의 유물들과, 뼈 조각들과, 사용했던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어떤 특별한 장소에 안치하여, 그것을 숭배하며 그 앞에 절을 합니다. 이 정도는 그들이 행하는 우상숭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두 번째 커다란 오류는 카톨릭의 전 체제와 가르침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차단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오류들 중 가장 끔찍한 오류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 카톨릭 교회 자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카톨릭 교회 자체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extra ecclesiam”,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nulla salus”. 즉 카톨릭 교회가 절대적인 필수요건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혼 사이에 카톨릭 교회를 끼워 넣고 있습니다. 카톨릭은 그녀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가 됨을 사칭(詐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약 성경의 어디에서도 그같은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되; 단지 로마 카톨릭주의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녀 자신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녀가 진리를 묘사하고, 그녀만이 진리에 대해 정의내리며 진리를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당연히 그와 정 반대로, ‘전(全) 신자의 보편적 성직자(聖職者) 체제’를 가르치며, 각 사람마다 스스로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고, 성령님의 조명(照明) 하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 사실을 절대적으로 철저히 부정합니다. 로마 카톨릭, 오직 로마 카톨릭만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스스로 ‘지속적인 계시(啓示)’를 받아왔노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은, 참 프로테스탄트 크리스천들이 믿는 바와는 달리, 계시가 신약성경과 함께 끝났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에다 첨가해야 옳다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반면, 카톨릭이 덧붙인 카톨릭의 전통(전승, 傳承)도 성경과 동일하게 권위가 있고, 구속력(拘束力)을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카톨릭적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성경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것을 카톨릭의 전통(전승)에다 첨가시킨 다음, 거기에 근거(根據)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활함이 기어들어오는 곳이 이 부분입니다.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하게 되면 카톨릭은 우리에게 전체주의적(全體主義的) 충성을 강요합니다. 그녀는 우리가 믿는 것, 행하는 것까지 지배하려 듭니다. 그녀는 스스로 우리의 영혼과 구원(救援)을 책임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일러준 대로, 가르쳐 준 대로 절대적으로 철저히 굴복(屈伏)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로마 카톨릭은 전체주의적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인권을 유린(蹂躪)하는 것이나, 히틀러가 그의 잔혹한 체제 안에서 했던 행위만큼이나, 카톨릭이 신도들의 혼을 절대적으로 얽어매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이 전체주의적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절대권위(絶對權威)를 행사하며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드러난 두 번째 증거로서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지만, 로마 교황(敎皇)과 교황에 대한 온갖 가르침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로 일컬어집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의 영적인 직계 후손으로서, 사도적 계승(使徒的 繼承)을 통해 사도 베드로의 모든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말합니다. 나 자신 베드로 수위권(首位權)에 의문을 제기함으로 곁길로 빠지고 싶진 않지만, 그것이 그들의 주장 그대로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 교황을 ‘거룩한 아버지’(성부, 聖父),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부릅니다. 비록 성경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땅 위의 어떤 사람도 ‘아버지’(Father)라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아버님뿐이다.”고 말씀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추기경(樞機卿) 회의에서 ‘권좌(權座)로부터’ 선언한다고 하면서 교황이 “절대무오(絶對無誤)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1870년에 교황의 절대무오성 교리를 규정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그것을 믿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규정됨으로써, 그가 선언하는 것들은 절대무오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곧 하나님의 말씀처럼 절대무오하고, 그리스도 자신처럼 절대무오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여러분이 알다시피, 교회의 권력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처럼” 말하는 이 한 사람의 권위 아래로 모아지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고; 그들은 그 앞에서 절하며,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질 수 없는 경의(敬意)를 그에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드러난 증거는 사제직(司祭  職)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들은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성직체계를 믿지 않습니다.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카톨릭 교회에서 훈련받고, 교회의 성직수임(聖職受任)을 받아, ‘사도적 계승’에서 나오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은 우리 모두가 성직자들이라고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 선택받은 세대요, 왕가의 성직자 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직자들의 왕국(王國)’이란 말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당신들은 단지 평신도(平信徒)일 뿐, 결코 성직자가 아니며, 오직 카톨릭에서 수임을 받은 사람만이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제들에게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독특한 권능을 부여해 줍니다. 바로 여기에서 심각하고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사제가 하나님의 은혜가 물에 임하도록 세례(洗禮)에서 사용되는 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의 만찬(晩餐)에서 빵과 포도주와 연관된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그같은 능력을 ‘화체’(化體)라고 부릅니다. 빵은 더이상 그냥 빵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고 그들이 말하는데; 겉모습과 색깔은 잔상(殘像)으로 남지만, 내용물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화체(化體)된다고 하며, 이러한 기적(奇蹟)은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권능을 소유한 사제에 의해서라야 수행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같은 주장은 당연히 성례전(聖禮典, 성사)에 관한 교리 전체로 이어집니다. 카톨릭엔 일곱 성사(성례전)가 있지만, 본인은 이 중 특히 세례성사(洗禮聖事)와 성체성사(聖體聖事) 대해 관심이 있으며, 그들은 이 두 성사에 기적이 역사한다고 서슴없이 가르칩니다. 그들의 이론은 이러하니, 즉 사제의 역할에 의하여 물과, 빵, 포도주에서 기적이 역사하게 되며, 그 결과 이것들에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부여되는데, 그같은 기적적인 역사는 거의 자동적(自動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현상을 그들은 “ex opere operato”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더이상 그냥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된 물이므로, 그 물을 어린아이 위에 부으면, 어린아이 안에서 기적이 역사(役事)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은 성찬식(聖餐式)에서 여러분이 빵을 취하게 되면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포도주는 마시지 못하게 하지만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것은 마귀의 교활한 속임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첨가’된 것으로서, 거기에 대해 신약 성경에 단 한 단어의  언급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사제에 대한 언급을 마치기 전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니, 곧 로마 카톨릭의 사제는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가 우리 죄들을 고백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 사제는 면죄(免罪)를 선언하고, 우리에게 죄사함을 베풀 수 있는 권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특별한 능력을 할당받은 사제직(司祭職)에 속한 사람들 외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죄(허물)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고, 거듭난 크리스천들의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사제들’에게 고백하라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또 하나의 드러난 증거가 있습니다. 본인은 카톨릭 체제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죄를 고백하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지만, 카톨릭 교도들은 사제들에게 갑니다.

 

  네 번째의 증거로 들어 가겠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를 가장 경악스럽게 하는 터무니 없는 궤변(詭辯)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 카톨릭주의의 마리아 숭배가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일컬어지며, 그녀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찾아가야 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성당들 가운데서 성모(聖母) 마리아 상(像)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 의해 가려져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여기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훨씬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다가오며;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하고 강력하며 권위 있으신 반면; 너무 엄격하십니다”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며, 마리아 숭배에 대한 설명의 전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도 엄격하기에 우리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모 마리아가 거기에 함께 계시는데 그녀는 사랑이 넘치시며; 더욱이 그녀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영향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중보(仲保)해 주시도록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바로 우리 영혼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드님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계십니다. 로마 카톨릭은 점증적으로 마리아의 권능에 뭔가를 ‘첨가’해 왔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1854년에 마리아의 ‘무염시태설’(無染始胎說)을 교리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의 무염시태설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이 태어나셨듯이, 성모 마리아도 또한 그렇게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마리아의 몽소승천’(蒙召昇天)의 교리를 발표했는데, 그 의미는 마리아가 여타의 일반인들과는 달리 결코 죽지 않았고 묻히지도 않았으며, 그녀의 아드님처럼 문자 그대로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가르침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세워주며, 그녀를 두드러지게 부각시킴으로 그리스도 자신은 아예 시야에서 가려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 숭배에 뒤이어 ‘성인’(聖人)들 숭배가 추가됩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습니까? 자, 그들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현세에서도 완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일부의 성인들이 현세에서 그렇게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산 결과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공덕’(功德)을 획득하고 쌓아올리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공덕을 과다히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과 내가, 공덕이 아무리 턱없이 모자라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성인들에게 가서 기도하여 간청하면 그들의 과다량의 상당부분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것을 ‘적공’(積功, 공을 쌓는 일)이라 칭하는데, 곧 성인들이 우리를 위해 중보할 수 있고, 우리가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있음이 발견되면 그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공덕의 잉여분을 우리에게 전가(轉嫁)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여러분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그들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만으로는 충분치가 않고, 여분(餘分)으로 상당량의 공덕이 추가로 보충(補充)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으로 카톨릭의 전반적 체계 및 제도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자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오는지에 대해 간단히 다섯 가지 요점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한 신성을 부여하고 성육신, 동정녀 탄생 및 정통교리들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같은 일들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귀의 온갖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한편으로는 로마 카톨릭이 뭐든지 옳은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문제는 그 다음에 ‘첨가’(添加)시키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그릇된 나머지, 도대체 옳은 것 중에서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아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3. 계속해서 세 번째 오류는, 로마 카톨릭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을 강탈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구원의 영광과 완전성(完全性)과 충분성(充分性)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칭의(稱義)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문제와 관련된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첫 번째 예를 들어봅시다. 루터가 말했듯이 이것은, “교회가 일어설 것인지 넘어질 것인지의 테스트”요  프로테스탄티즘을 존재하게 만든 동인(動因)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영광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의롭다함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요? 나는 이따금씩 우리 곧 프로테스탄트들이 과연 우리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아해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의롭다함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할 때, 로마 카톨릭주의가 성장해 간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단지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동안에 카톨릭주의는 성공(成功)을 보장받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


  로마교의 가르침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 데 있어 스스로 기여할 부분이 있으므로, 죄투성이인 인간이라도 선행이나 공적을 쌓는 행위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우리 프로테스탄트는 “의인(義人)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와 같으며”, 혹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하였듯이, “배설물”(똥)과 같아서 거부해야 할 것이요, 무가치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극구 부인하며, 사람의 의는 가치가 있고 중요하며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카톨릭이 궁극적으로는 세례(洗禮)를 통해 의롭게 된 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는 다른 모든 교리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는 여러분의 죄를 사해줄 뿐 아니라, 여러분 안에 의를 주입시켜 주므로, 여러분이 세례에 의해 의롭게 된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비록 의식(意識)이 없는 영아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되지 않으며, 그들도 세례로 의롭게 되고, 그들의 원죄가 세례로 말살(抹殺)되며, 그들에게 이같은 적극적인 의가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의가 아니며,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례받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의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입지 않고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을 위험한 이단(異端)교리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펴보셨듯이 카톨릭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안되게끔 만들어 버립니다. 회개(悔改)하고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救援)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오직 사제가 베푸는 세례(洗禮)를 통해서만이 구원의 역사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에서 교회와 사제의 권위가 절대적이며 필수적이 됩니다. 그들 없이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며, 여러분의 운명은 오직 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으며, 반드시 이들 중보자들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오직 한 분의 중보자(仲保者)가 있을 뿐이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 교황, 사제들 및 모든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들, 이들 모두가 필요하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이토록 중차대한 칭의(稱義, 의롭다함)의 교리에 있어서 그들은 거짓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 생활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여기에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곧 경건한 삶보다는 의식(儀式)과 의례(儀禮)의 준수에 더 역점을 두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거룩을 추구하고 성화(聖化)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보다는, 미사에 참석하고 사제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告白)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야 할 책임과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착념(着念)하여 그대로 실행하도록 권면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규율(規律)에 전폭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종 의식을 지켜야 하고, 그들이 하라고 일러준 대로 행해야 합니다: 특정한 절기에는 금식(禁食)해야 하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하며, 사제 앞에 나아가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일단 미사에 참석한 다음에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됩니다. 여러분의 죄는 덮어졌고, 다시 올바르게 교정되었으니 계속 여러분의 길을 가십시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룩한 삶의 간단 명료함 대신에, 여러분에게는 의식(儀式)들과 의례(儀禮)들과 절기(節氣)들이 있습니다.


  또다른 심각한 오류(誤謬)는 카톨릭이 ‘구원의 확신’(구원의 보장성)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否定)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確信)의 교리만큼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서도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증거하십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없는데도;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는 확실성(確實性)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구원의 확신(보장성)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그들의 반박이며, 이는 매우 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로마 카톨릭 체제가 마귀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며; 적어도 이같은 비범한 천재성으로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킬만한 존재는 마귀 외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받을 때 여러분의 원죄(原罪)가 말소되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됩니다. 아 좋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후 죄 문제, 즉 세례받은 이후에 범한 죄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이 받은 세례는 세례 후에 지은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대해 어떡하시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젭니다.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전히 우리를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며;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나의 과거의 죄들, 현재의 죄들, 미래의 죄들을 덮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충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세례 후 죄 문제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대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만 하며; 오직 그만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라고해서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하게 되면, 이들 세례 이후의 죄 문제와 함께 지옥과 처벌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 때 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여기에 고해성사(告解聖事)가 있습니다. 사제 혼자서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베풀 수 있으며, 그는 능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받게 되고, 사제에게 특별 고백을 하게 되며 여러분은 면죄를 받게 됩니다.

 

  그것으로 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안됩니다! 거진 다 왔지만,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남아있게 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 다행스럽게도, ‘연옥’(煉獄)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한 세례 후의 죄가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죄를 씻기 위해 그곳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자, 여전히 남아있는 나의 친척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하며 그렇게 하면서 돈을 지불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는 온갖 ‘면죄부’(免罪符)들과 온갖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들’과 온갖 촛불들과 지불한 돈이 있게 됩니다. 돈을 더 많이 낼수록 이러한 죄들이 연옥에서 더 빨리 처리되며 이 사람은 연옥에서 더 빨리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같은 주장을 성경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전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카톨릭이 지금까지 주장해 온 추가계시(追加啓示)의 일부분이며, 이것이야말로 첨가 그 자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충분치가 못하고, 이 모든 방식들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즉 내가 이같은 로마 카톨릭을 배교집단(背敎集團)이라고 말한다 해서 지나쳤단 말입니까?


III․결․론

 

  이 모든 것들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카톨릭 교도들은 무지 속에 감금되어 있으며 미신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결과 이 나라에서 이따금씩 칭하는 바 ‘대륙의 일요일’ 중심의 생활방식에 점차 젖어들게 되는데, 그 의미는 여러분이 일요일 아침에 성당에 가서 미사만 드리면, 그 나머지 시간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미사 시간만 끝나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스포츠와 행락으로 그날을 즐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한다 해서 놀랄만한 일이 못되는 것은, 개인은 고려하지 않아도 되며 관심 밖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교회가 일러준 대로 순종하고, 그 자신을 내맡기기만 하면, 그가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이요, 나머지는 교회가 책임지고 그들의 영혼을 돌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마침내, 그들이 진리의 길을 걷는 자들에 대해 잔혹한 핍박을 가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역사를 통해 로마 카톨릭 체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뿌렸고, 여전히 도처에서 기회만 주어지면 그런 일들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며,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시간낭비를 해왔을까요? 꼭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만 했을까요? 마땅히 로마 카톨릭주의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모두가 크리스천으로서 함께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그 사실에 기뻐해서는 안된단 말인가요? 여러분이 직면해야만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 자신은 여기에 대해 답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가 전적으로 공산주의보다도 훨씬 위험한 체제인 것은, 그 체제가 기독교로 날조(捏造)된 체제이면서도,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빛 여자’이며, 가장 끔찍하고도, 더럽기 짝이 없는 속임수인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또다른 얼굴은 공공연하고도 명명백백한 무신론적 불신앙(不信仰)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改革者)들은 결코 고집스런 열심당원들이 아니었으며, 결코 바보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열어주신 양눈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루터가 그러했고, 칼빈이 그러했으며, 낙스도 그러했고, 개혁자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눈이 열리면서, 보았습니다. 바로 성경에서 경고하면서 묘사하고 있는 이 끔찍한 괴물을 보았으며, 죽음의 위기(危機) 속에서도 이 괴물에 맞서서 프로테스트했습니다.

 

  그들은 그 괴물이 진리(眞理)가 아니라고 말했고, 그리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성경이 절대적이고, 최종적(最終的)이며, 정확한 권위임과, 모든 믿는 자들의 성직자 체계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같은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자들이 그 진리를 위해 순교(殉敎)당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엄숙히 경고하는 바, 여러분이 만일 로마교를 인정하는 접근을 더 기뻐하신다면, 여러분은 순교자들의 흘린 피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로마교의 가르침을 수용(受容)한다면 결코 스미스필드 근처에 가지 마십시오. 그곳 스미스필드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존 브래드포드와 그 외의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카톨릭주의를 부인한 이유 때문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부인하고 있고, 그들에 대해 등을 돌리면서, 그들이 잘못한 것이었어, 그들의 실수였어,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를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이들의 허울좋은 논쟁(論爭)에 말려들지 마십시오.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이유는 무선통신과 텔레비전 때문입니다. 매스 미디어에 비치는 이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공손하고, 친절하며, 또한 훌륭한 인품을 자아내며, 무척 융통성 있어 보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종종 프로테스탄트보다 훨씬 멋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저질적으로 비난하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하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그렇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단지 카톨릭의 과거만 들춰내려 하고, 마치 16세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지금 당신은 20세기에 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본인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거만한 허풍(虛風)이 바로 이것이며, 로마 카톨릭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Semper eadem.” 어떻게 로마 카톨릭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녀가 달라진다면, 그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셈이 되겠지만, 오히려 그녀는 여전히 말하기를,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무오(絶對無誤)하며 교황은 바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결코 실수를 할 수 없으신 분이시다, 고 합니다. 만일에 로마 카톨릭이 추호라도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카톨릭의 핵심주장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녀는 결코 변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혹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진 것뿐입니다. 그녀는 16세기에 그녀가 가르쳤던 교리에서 교황의 절대 무오성과 같은 교리들을 오히려 추가시켰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이 지구상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교회가 존재해 왔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나머지 모든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집어 삼켜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어려울게 하나도 없으니;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 모조품이요, 가짜이며; 가장 사악한 매춘부요 가장 마귀적인 집단입니다. 실로 적(敵)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거절해야 하고, 고발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대적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녀를 대적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서두(序頭)에서 말했듯이, 성경적인 교리(敎理) 위에 서 있는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오라” 혹은 “예수님께로 나오라” 라고만 설교하는 기독교의 모습으로는 잠시라도 로마 카톨릭 교회와 맞설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의 숫자만 불리워 주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집회를 할 때 “아, 당신은 로마 카톨릭 신자시군요, 당신의 교회로 돌아가십시오.” 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게 경고해 주어야만 합니다. 이 소름끼치는 모조품(模造品)에 대항해서 맞설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르침과, 단 하나의 권능이 있으니; 성경의 오늘 본문말씀에서 칭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신약성경의 진리를 성경적이고 교리적이며 신학적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16 세기에도 동일하게 사용했던 무기입니다. 루터는 단지 피상적인 복음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막강한 신학자였고; 또한 칼빈도 그러했으며; 그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을 침식시키고 로마 교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역사(役事)된 위대한 진리의 체계였던 것입니다. 현 상황에 대처하는 적절한 방법으로서 이것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책임(責任)이 막중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아야만 하며, 진리를 이해해야만 하며, 거짓된 가르침을 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과 같은 거짓 기독교에 미혹(迷惑)되고 있는 순진한 사람들에 대해 바로 여러분이 책임이 있으니, 그들의 눈을 열어주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견고하게 설 때에야 비로소, 성령님의 복이 우리 위에 임하시도록 열정(熱情)과 확신(確信)을 가지고 기도할 자격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위에 굳게 서고,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설 때, 본인이 믿기로는, 하나님의 영님께서 우리 위에 강력한 부흥(復興)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같은 강력한 부흥만큼 이 가증한 체제, 곧 스스로 로마 교회라 칭하는 저 큰 ‘매춘부’(賣春婦)를 쓰러뜨릴만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빛을 주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를 분별(分別)하게 하시며, 너무 늦기 전에 우리를 흔들어 깨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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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신앙의 주요인물 30인

 

1 고넬료(Cornelilus) - 뜻: 뿔

 

로마군대의 백부 장이었으며 이방인었으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함으로서 최초의 이방인으로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 된 자. 고넬료는 가이사라에 살고 있는 군대의 백부 장이었다.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으며 늘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욥바에 사는 베드로를 청하여 들으라고 한다. 또한 베드로에게도 계시가 있어 가이사랴에서 찾아오는 이방인의 청을 거절하지 말고 청에 응해라 하니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초대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수 님에 대해서 말할 때 성령이 임하여 그 방에 있는 모두가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의 높임을 듣게 되었다. 베드로가 우리 함께 성령을 받았으니 어찌 이들에게 물로 세례를 안줄 수 있느냐하며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그리하여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며칠 더 묵어가기를 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이는 유대인이 아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고넬료의 믿음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2 나사로(Nazarus) - 뜻: 하나님의 도움

 

나사로는 신약 성경에서 두 사람이 나타난다. 1. 하나는 베다니의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로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살려낸 참으로 행복한 나사로 이고(요 11:4) 2. 또 한 나사로는 비유로 가르치실 때 쓴 거지 나사로도 부자는 지옥으로 가고 나사로는 천국에 갔다고 말씀하셨다.(눅 16:22-23)

 

첫 번째 베다니의 나사로는 예수 님이 죽음에서 살리신 나사로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나 비유로 말씀하신 나사로는 예나 지금이나 빈부의 차이가 극심한 것을 생각하면 부자와 가난한자의 비유로 우리한테 주는 시사가 많다.

 

나사로는 부자가 버린 음식찌거기로 연명하였으며 몸도 엉망이어서 전신이 곪아터진 상태이었다가, 둘 다 죽어서 나사로는 천국의 아브라함 품에 안겨있고 부자는 음부에서 뜨거운 불꽃가운데에서 고통 받고 있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렇게 뜨거운데 에서 고통 받고 있으니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뭍여 내혀를 적시는 일이라도 할 수 있게 청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도 허락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 16:25)

 

스스로 다 위로 받음으로 인해 하나님이 위로할 일이 없도록 우리는 너무나 욕심이 많지 않은지 생각해 볼일이다.

   

3 노아(Noah) - 뜻: 위로, 휴식

 

아담의 8세손으로 당세의 의인이며 완전한자이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관영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를 선지자로 삼아 120년 동안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류를 멸하시었다. 노아만이 의로운 사람이며 순종하였음으로 방주를 만들게 한후 40일 동안 비를 내리게 하여 방주 안에 있는 생물이외는 모든 생물은 다 멸해버리었다. 1년 10일 동안 방주에서 생활한 모든 생물이 모든 생물의 새로운 조상이 되었다. 홍수 때 구원받은 사람은 노아 부부, 아들 셋, 며느리 셋, 도합8명이다. 노아는 그 후 350년 더 살다가 950살에 죽었다(창 9:) 시대가 악하여(눅 17:27) 홍수로 진멸하시고자 할 때 오직 노아만이 의로운 고로 방주를 만들고 피하라 미리 지시하였다.

   

4 니고데모(Nicodemus) - 뜻: 이긴 백성

 

바리새교인이며 유대 율법사이며 산해드린 공회 회원이었다. 예수님께 밤에 직접 찾아와 도를 물을 때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 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라고 말씀하심.

 

(요 3:2-3)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오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 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 다윗(David) - 뜻: 사랑하는 자

 

아브라함의 14세손 이새의 여덟째아들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위대한 통치자. 베들레헴의 양치는 소년이었으나 물맷돌을 들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쟁에 나아가 블레셋 대장 골리앗을 쳐 죽이고 승전하였다(삼상 10:10-13). 후에 사울 왕에 이어 이스라엘의 2대왕이 되어 이스라엘이 왕정국가로서의 정치체제를 정비하고 대외적으로 국권을 떨친 이스라엘 왕이다(삼상 16:1-13). 다윗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고 그 분의 말씀 데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비록 인간적인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하나님은 그를 크게 쓰셨던 점이다.

 

 

6 드보라(Deborah) - 뜻: 벌

 

랍비 돗의 아내로서 이스라엘의 유일한 여 선지자겸 사사(*왕정이전에 이스라엘 통치자)의 일을 겸임하였다. 그때는 가나안 왕 야빈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그의 군대장관 시스라에 의해 이스라엘이 심히 학대받고 있었다. 그런데 드보라가 여호와의 명을 받아 바락을 시켜 납달리 자손과 스볼론 자손 일만 명을 모으게 하고 다볼산에 미리 오르게 하고 시스라의 군대를 유인케 하여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시킨다. 이같이 드보라는 비록 여자였지만 통찰력과 판단력이 예민하고 정확하였고 영감이 풍성하여 백성들의 어려운 문제를 잘 재판하였다. 사사기 5장에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을 노래하며 기록한 시는 "드보라의 노래"로 히브리 인의 산문시중에서 유명한 시가 되었다.(삿 5:) 다음은 드보라의 노래의 일부이다.

 

(삿 5:1-3) “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 2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양하라 3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7 디도(Titus) - 뜻: 공경한다

 

헬라인으로서 신실한 성도의 표상이며 바울의 동역 자요 초대교회의 목회자. 파울의 두터운 인간적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의 복음사역에 크게 기여한 신앙의 사람이며 영적 지도력과 자상함을 겸비한 신앙의 표본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디도를 보내면서 편지(고린도후서)를 보내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디도를 설명하는 내용을 보면 디도에 대한 바울의 믿음을 알 수 있다.

 

(고후 8:23-24) 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 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24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

 

디도서는 디도가 그레데 섬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바울사도가 직접 디도에게 보낸 목회서신이다.

 

 

8 디모데(Timothy) - 뜻: 하나님을 공경한다

 

소아시아의 루가오니오 사람으로 바울과 함께 소아시아, 마게도니아 로마등지에 순회전도하니 바울이 그를 가리켜 나와 함께 동행하는 자라 하였고 내 귀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 하였다(고전 4:17). 바울의 후임으로 에베소에서 사역하였으며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이 디모데 전.후서이다.

 

 

9. 라합(Rahab) - 뜻: 넓다

 

여리고에 있는 가나안의 기생으로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그의 일가도 함께 구원을 받은 신앙의 용사로 인정되었으며 예수의 선조의 한 사람이 된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여리고 성의 사정을 정탐하기 위하여 파송된 정탐꾼을

기생 라합이 숨겨주고 살려 보내 줌으로서 구원을 얻었다(수 2:1-6)

 

10 마리아(Mary) - 뜻: 높여진 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 목수 요셉의 부인 예수님 이외에 야고보, 유다, 요셉, 시몬과 여러 명의 딸을 둠.

 

(눅 1:30-35) “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저가 큰 자가되고 지극히 높은 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11 마리아(Mary)

 

주께 헌신한 믿음의 여인. 예루살램 교외의 베다니 출신. 마르다의 동생이며 예수 님께서 무덤에서 살리신 나사로의 누이(요 11:1) 예수가 마리아 집에 방문했을 때 그의 발치에서 말씀을 경청하여 예수 님의 칭찬을 받았으며 (눅 10:38-42), 나사로를 살리시었을 때는 감사의 표시로 예수의 머리와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아드려(요 12:3:마 26:7) 이는 장차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것이라고 예수가 말함(마 26:12-13).

 

(요 12: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가라 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두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2 마르다(Martha)

 

헌신적인 봉사의 여인. 예루살렘 교외의 베다니 출신. 마리아의 언니이며 예수 님께서 무덤에서 살리신 나사로의 누이로 실질적인 가장역할을 함. 예수가 마르다의 집에 방문했을 때 그의 동생 마리아가 자기의 일을 돕지 않는다고 불평하다 오히려 예수 님께 꾸중을 들음(눅 10:38-42). 나사로를 살리시었을 때는 감사의 표시로 잔치를 베풀어주고 예수님만이 나사로는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짐(요 11:1-44). 같은 자매이지만 성격은 다르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 말씀에 대한 사모의정은 들다 컸다.

 

(요 11:38-41)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3 막달라 마리아(Mary)

 

은총에 감사한 여인. 갈릴리 서쪽 막달라 지방에 거주하였으며 상류계층으로 풍요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시달림을 당하다가 예수에 의해 치유 받음(막 27:56 : 막 16:9). 귀신이 쫓겨나자 예수께 감사하고 이후로는 예수를 뒤에서 늘 따르고 예수님이 가시는 데에는 언제나 막달라 마리아 있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뒤를 항상 따랐으며(마 27:56) 빌라도의 법정, 갈보리산의 십자가형과 예수의 임종, 무덤에서 시체가 매장 당하는 것까지를 다 지켜보았다. 죽은 지 삼일 후에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갔다가 최초의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이를 베드로 요한 등 사도에게 알리게 된다(마 28:1-9:막 16:9: 요 20:1-16). 이같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후로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예수께 헌신한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다.

 

(마 28:1-10) 1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우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새 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 사대 평안 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가라 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14 모세(Moses) - 뜻: 물에서 건져 냄

 

통속적인 설명으로는 "건져 낸다"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아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노예 생활에서부터 구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인도한 위대한 종교 지도자이며 정치가이다. (애굽을 나온 것은 1290년 경). 모세는 레위 족속 아므람과 요베겟 사이에서 낳으며 미리암과 아론의 동생이다. 당시 애굽의 박해로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물에 띄웠는데 마침 애굽의 왕녀가 발견하고 데려다가 양자를 삼고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유모로 들어가 바로의 궁전에서 40년간 양육 받으며 애굽의 학술에 통달하였다(행 7:22).

 

40세 때 동족을 학대한 애굽인을 살해한 후 미디안으로 도망하여 은거하여 있다가 80세에 호렙산에서 여호와의 부름을 받고 형 아론의 도움을 약속받아 애굽으로 돌아와 6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급의 파란만장한 대 자정을 이끈 이스라엘 역사의 지도자. 이로부터 40년간 이스라엘 지도자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는 역사적인 지도자로 활약. 120세에 여호수아에게 대권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남 (출 12:51: 3:10).

 

(출 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5 바나바(Barnabas) - 뜻: 권위자, 위로의 아들

 

기독교 최초 개종한 한 삶의 이름이다. 레위 사람으로 본명은 요세이다. 성품이 온유하고 재능이 다양하여 당시 사람들이 바나바를 권위자라고 불렀다. 성신을 받은 후에 토지를 팔아서 사도들에게 바쳐 구제 사업에 쓰게 하였다(행 4:36-37). 사울이 회개한 후 예루살렘에 가서 교우들을 만나고자 하나 모두 핍박자로 알고 두려 워 만나지 않을 때에 바나바가 데리고 가서 잘 소개하였다(행 9:26 -27). 5년후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가 왕성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시찰차 파송하였다(행 11:20). 다소에 가서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에 와서 같이 전도하여 대 부흥을 일으켰다 (행 11:25-26). 주후 45년 바울과 같이 안디옥 교회에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오 는 길에 생질 마가를 데리고 왔다(행 11:30, 12:25). 특히 바나바는 사도바울의 난처함을 돌보아 주는 것을 통해 위로의 아들임을 보여준다(행 4:37:9:26-27)

 

(행 9:26-27)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16 바디메오(Bartimaeus) - 뜻: 디메오의 아들

 

예수님이 여리고성 근처를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뛰어나와 구원을 청한 소경으로 눈 고침을 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46)

 

(막 10:46-52) “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17 삭게오(Zacchaeus) - 뜻: 순결

 

여리고성의 세리장(세무서장)으로 키가 작았다. 부정 축제로 큰 부자가 되었으나 그의 직업과 그의 불의한 행동 때문에 동족들의 멸시를 받게 되었다. 예수님이 여리고 성을 지나가실 때에 삭개오도 군중들 틈에 끼어 예수를 만나려 했으나 키가 작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마침 옆에 뽕나무가 있어 위에 올라가 예수를 보았다. 이때 예수님은 뽕나무 아래서 발을 멈추시고 삭개오를 불러 내려 그의 집에 묵어가시겠다고 하였다. 그날 밤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철저하게 회개하고 자기가 지금까지 축적한 제산 중에 억울하게 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노라 군중 앞에서 선포하였다(눅 19:1-10)

 

 

18. 에스더(Esther) - 뜻: 별

 

죽으면 죽으리라! 는 비장한 각오로 자기 민족을 구원한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 본명은 하닷사인 것을 왕후의 위에 오를 때 에스더라고 고쳤다. 아비하일의 딸로서 어렸을 때 조실 부모하고 4촌 오빠인 모르드개의 양육을 받아오던 중 왕후 와스디가 폐출 당한 뒤 전국에서 모여온 수많은 아리따운 처녀 중에 내시 헤개의 추천으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간택되어 왕후가 되었다 (에 1:19, 2:7-9, 16-18).

 

총리 하만이 자기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모르드개에게 분노하여 전 유대 민족을 죽 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모르드개가 이것을 알고 에스더에게 편지하니 에스더가 왕에게 고하여 그 일을 뒤엎고 전날 왕을 암살하려던 자를 알려 주어 화를 면케한 공로가 있는 모르드개로 총리를 삼고 유 대인을 칙명을 취소하는 동시에 유대인에게 자유권을 주고 적대 행동을 하려던 자를 다 죽였다(에3:5,6, 4:1, 7:-8:).

 

(에 4:1-17) “1.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2.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 옷을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 3.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4.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나아와 전하니 왕후가 매우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어 그 굵은 베 옷을 벗기고자 하나 모르드개가 받지 아니하는지라 5. 에스더가 왕의 어명으로 자기에게 가까이 있는 내시 하닥을 불러 명령하여 모르드개에게 가서 이것이 무슨 일이며 무엇 때문인가 알아보라 하매 6. 하닥이 대궐 문 앞 성 중 광장에 있는 모르드개에게 이르니 7. 모르드개가 자기가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왕의 금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액수를 하닥에게 말하고 8.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보여 알게 하고 또 그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9. 하닥이 돌아와 모르드개의 말을 에스더에게 알리매 10. 에스더가 하닥에게 이르되 너는 모르드개에게 전하기를 11.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12. 그가 에스더의 말을 모르드개에게 전하매 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15.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17.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가 명령한 대로 다 행하니라”

 

 

 

19 엘리사 (Elisha) - 뜻: 하나님의 구원

 

소명 : 아벨므홀라인 사밧의 아들로 소 12겨리로 밭을 갈고 있을 때 엘리야가 지나 가다가 겉옷을 벗어던지며 부르니 농구를 불살라 소 한 겨리를 잡아 백성에게 주어 먹이고 엘리야를 따라가 제자가 되었다(왕상 19:16-21). 8년 후 엘리야가 승천하려 할 때에 세 번이나 작별 인사를 하여도 듣지 않고 끝까지 따르매 "네 요구가 무엇이냐"고 물은즉 당신의 영감을 배나 달라고 구하여 받아 가지고 또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어가지고 돌아와서 선지자의 직분을 행하였다.

 

이적 : 이스라엘 왕 여호람부터 요아스 시대까지 그가 행한 이적은 다음과 같다.

 

(1)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으로 요단 강물을 쳐서 갈라지게 하고 건너왔다(왕하 2:13-14).

 

(2) 불결한 몸에 소금을 넣어 음료수를 만들었다(왕하 2:20).

 

(3) 벧엘로 가는 길에서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조롱할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여 암곰 두 마리가 숲에서 나와 42명의 아이들을 찢었다(왕하 2:23-24).

 

(4) 유대와 에돔이 동맹하여 모압왕과 싸울 때 물이 없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물을 내어 그 지경에 가득하게 하였다(왕하 3:20)

 

(5)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에게 기름을 만들어 주어 빚을 갚게 하였다(왕하 4:7)

 

(6) 사렙지방 여인에게 아들을 낳게하고 그 아들이 죽은 것을 다시 살렸다(왕하 4:17,35)

 

(7) 우물물의 독을 제거하였다(왕하 4:41).

 

(8) 바알살리사에서 보리떡 20개로 백명을 먹이고 남았다(왕하 4:40-44)

 

(9)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 주었다(왕하 5:24 눅 4:27).

 

(10) 자기 종 게하시에게 문둥병을 주었다(왕하5:27)

 

(11)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하였다(왕하 6:6).

 

(12) 자기 사환의 눈을 밝게 하여 불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호위한 것을 보여 주었다(왕하 6:17).

 

(13) 아람 군사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마리아로 인도하고 그 눈을 다시 밝게 하여 사마리아 성중에 있는 것을 보게 하였다(왕하 6:18-20).

 

(14) 엘리사가 죽은 다음 해에 어떤 사람이 죽은 시체를 엘리사의 무덤에 던져 놓았더니 그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는 순간 다시 살아났다 (왕하 13:2-21)

 

예언 : (1) 아람군사가 사마리아를 포위했을 때 물가가 폭동하여 배가 고파서 자식을 잡아먹는 자가 생겼다(왕하 6:24-29)

 

(2) 엘리사가 곡가가 폭락할 것을 예언하였더니 주가 아람군대에게 병거와 병마의 소리와 군대의 큰 소리를 들리게 하시니 그 소리에 놀라 다 도망가니 예언대로 곡가가 폭락 하였다(왕하 7:1-7,16)

 

(3) 하사엘이 아람왕이 되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것을 예언함(왕하 8:1-15)

 

(4) 선지자의 생도 중 한명을 불러 길르앗 라못에 가서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될 것을 예언하게 하였다(왕하 9:1-10)

 

(5) 임종에 이르러서도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아람을 세번쳐서 이길 것을 예언한 후 별세였다(왕하13:18) 그는 천성이 청렴 강직했고(왕하 5:15-16), 엘리야는 왕가의 핍박을 받으면서 지냈으나 그는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한 관계로 왕가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았다. 그가 엘리야를 따른 것은 베드로와 비슷하고 이적을 많이 행한 것은 예수님의 비교할 수 있다.

 

엘리사는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뜻이다. 엘리사의 사역은 엘리야의 사역을 계승한 구국과 애족의 선지자였다. 엘리사는 여리고 지역의 폐수를 소 금을 섞어 양질의 물로 변화시켰다. 그 후 여리고 지역은 농산물과 식수의 염려가 없게 되었다. 그 외에도 신비한 기적을 어느 선지자보다도 많이 경험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초자연적인 사역을 크게 나타낸 선지자였다.

 

그 중에서도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자가 되었을 때 요단강에 일곱 번 씻게 하여 그의 병을 고쳐준 사건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왕하 5장). 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냈고 나라의 체통을 세웠으며 아무런 예물을 받지 아니하므로 선민의 품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한 아람군 대가 엘리사를 체포하기 위해 도단 성을 포위했을 때 아람 군대보다 하나님의 군대(불 말과 불 병거)가 더 많은 것을 확인시킨 일도 있었다.

 

그 뒤 아람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포위했을 때 기근으로 주려 죽게 될 무렵 엘리사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왕하 7:1) 한 예언과 같이 병거소리와 말소리, 큰 군대의 소리로 인해 아람군대가 도주하여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 엘리사는 66년간 큰 선지자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다.

 

교훈과 적용 : 첫째, 선지자는 선견자일 뿐만 아니라 한 시대와 한 민족을 깨우치고 지도하는 영적인 안내자이다. 둘째, 엘리사의 권고를 듣지 않은 북조 이스라엘이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권고를 듣자.

 

 

20 엘리아 (Elijah) - 뜻: 여호와는 하나님

 

[1] 이스라엘의 예언자 중 가장 무서웠던 예언자. 북왕국 아합왕(B.C. 876-854)과 아하시야왕 시대에 걸쳐 사역하였다.

 

(1) 디셉 사람(왕상 17:1).

 

(2) 아합 왕에게 예언하기를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리라 하고 그릿 시가에 숨어있을 때 여호와가 까마귀를 시켜 조석 식물을 날라다 주게 했다(왕상 17:1-7)

 

(3) 사르밧 과부집에 유숙하는 중에 한줌의 보리가루와 적은 기름으로 여러 날을 먹었어도 없어지지 않게 하고 그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을 다시 살려 주었다(왕상 17:8-24)

 

(4) 아합 왕 때에 왕과 백성이 바알우상과 아세라 우상을 숭배함으로 견책하고 아합왕에게 참신과 거짓 신을 가려내자 하여 바알선지 4백 명과 아세라의 선지 4백5십 명을 데리고 갈멜산에 올라가 송아지로 재물을 삼고 각기 자기의 신에게 기도하여 불로 응답함을 보자 하여 먼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 850명이 정오가 지나도록 외쳤으나 응답이 없고 엘리야가 여호와한테 부르짖을 때 불이 내려와 제물과 도랑의 물까지 모두 태워 버렸다. 즉시 백성들을 시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 850명을 기손 시내로 끌고 내려가 모두 죽였다.(왕상 18:19-40)

 

(5) 왕후 이세벨이 이 소식을 듣고 엘리야를 죽이려하므로 주의 천사가 어루만지고 식물을 주고 호렙 산굴에 있을 때는 여호와가 강한 바람과 지진과 작은 소리의 세 가지로 보이시고 명령하시기를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대신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셨다(왕상 19:1-6)

 

(6) 농부 엘리사가 경작하고 있을때 자기 겉 옷을 던져 따라오게 하였다 (왕상19:19-21)

 

(7) 아합이 나봇을 돌로 쳐 죽이고 포도원을 뺏었을 때 왕 앞에 나타나서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으리라 하였다(왕상 21:17-19)

 

(8) 이스라엘왕 아하시야가 사자 50명씩 두 번 보내어 오라 하는 것을 천화로 사루게 하고 세 번 째에야 가서 왕이 죽을 것을 예언했다(왕하 1:9-16)

 

(9) 승천하게 되어 엘리사에게 세 번이나 작별 인사를 하였으나 떠나지 않으므로 무엇을 구하느냐 물으니 당신의 영감을 배나 원한다 하므로 내가 승천하는 것을 보면 성취하리라 하고 겉옷을 떨어뜨리고 홀연히 불 수레와 불 말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다(왕하 2:1-11)

 

(10) 그의 심정과 재능이 세례 요한과 비슷하다 하였다(눅 1:17)

 

(11) 예수님이 변화하실 때에 모세와 같이 나타나서 주님과 말씀하셨다(마 17:3)

 

(12) 야고보는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하여 주신다고 엘리야를 비유로 권면하였다(약 5:17)

 

*그는 험상한 모습과 탈속한 옷차림, 비호같이 빠른 걸음, 기근도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건장한 모습, 굴에서도 살 수 있는 억센 습관이 그의 특색이었다. 여호와 신의 예배에 절대적인 선지자였고 국가 운명에 대하여 예민한 통찰과 염려를 한 애국적인 인물이며 구약 선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21 여호수아(Jehoshua) - 뜻: 여호와의 구원

 

[1] 사사 여호수아.

 

(1) 에브라임지파 눈의 아들로서 본명은 호세아다(민 13:8).

 

(2) 모세의 수종자가 되어 항상 회막곁에 있었다(출 33:11)

 

(3) 가나안에 보낸 12정탐꾼 중의 한 사람으로 10지파의 정탐을 보고 할 때에 민중을 낙담케 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으나 여호수아는 갈렙과 같이 강경히 말하기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그들의 신은 그들의 신은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니 두려워 말고 쳐들어가자고 하였다(민 13:1-14:10)

 

(4) 그래서 여호와가 20세 이상 된 자로 여호와를 원망한 자를 모두 광야에서 죽게 하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에 들어가리라 하셨다(미 14:26-32)

 

(5) 여호와의 명령으로 제사장 엘르아살이 회중의 목전에서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모세의 후계자를 삼았다(민 27:18-23).

 

(6) 여호아가 여호수아에게 너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개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같이 있으리라 하셨다(신 31:23)

 

(7) 모세가 죽은 후에 싯딤에서 두 사람의 정탐꾼을 여리고에 보냈다(수 2:1)

 

(8)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12인을 택하여 언약궤를 메우고 요단강을 육지같이 건너서 길갈에 진치고 여리고 성을 쳐서 취하는 동시에 전일 2인의 정탐꾼을 숨겼다가 돌려보내준 기생 라합을 구원하였다 (수 3:11-17, 5:10-15, 6:20-27)

 

(9) 아이 성을 치다가 패하자 그 장본인 아간을 잡아 아골 골짜기에서 돌로 쳐 죽인 후 아이성을 다시 쳐서 불살라 황폐케 함(수 7:4-29)

 

(10) 계속 가나안 7족을 멸하여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분배하고 자기는 에브라임산지 딤낫세라를 받아 그 성읍을 증건 하고 거기 거하였다(수 19:49-51)

 

(11) 살인한자를 위하여 요단강 동편과 서편에 도피성을 셋씩 건설하고 임종시에 백성을 세겜에 모으고 성실과 진정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권면한 후 별세하니 110세 였다. 딤낫세라에 장사 하였다 (수 19: 수 20: 24:1,14,19,20; 행 7:45)

 

[여호수아]("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 는 그 이름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평생토록 헌신한 하나님의 종이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 눈의 아들로 태어난 여호수아의 본래 이름은 [호세아]("구원"이란 뜻)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혹독한 학대를 받으며 노예 생활을하고 있을때 태어나 자유를 구가할 해방의 날을 고대하며 성장하였다.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는 애굽의 억압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이스라엘 백성의 숨통을 죌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룬 모세를 따라 귀향길에 오른 여호수아는 모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무려 40년간이나 모세의 부관으로 있으면 여호수아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연단을 받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긍정적인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는 탁월한 군사적, 정치적 역량까지 갖추어 민족의 지도자로서 쓰임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계속되는 고난과 역결 속에서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믿고 소망을 잃지 않는 여호수아는 결국 모세의 후계자로 지목받게 되었다.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감당하기에 부족함을 아는 여호수아는 두렵고 떨릴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권면과 약속의 말씀으로 큰 힘을 주시고 백성들까지도 지원하여 순종을 약속함으로 여호수아는 강하고 담대한 지도자로서 첫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성령 충만하여 지혜가 뛰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였다. 오직 야훼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믿음의 행력 앞에 요단강이 갈라지고 철옹성 같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무장한 여호수아의 군대는 가나안 족속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하나님께 약속받은 땅을 점령해 나갔다.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이 야훼의 성전임을 아는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시에 복종함으로써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여호수아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해와 달의 운행까지도 변경시키시고 그의 백성과 함께 전쟁에 임하시므로 이스라엘이 거두는 승리의 전과는 차라리 당연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믿음과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을 치루고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 여호수아는 각 지파별로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자신의 몫에 욕심 을 내지 않고 먼저 백성들에게 공정하게 토지를 분배해 준 여호수아는 자신을 위해서는 작은 산지만을 차지할 정도로 청렴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처럼 훌륭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인 여호수아도 두 가지 실수를 보였다.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기브온 거민들과 언약을 맺음으로 훗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는 씨앗을 남겼다. 또한 후임자를 육성치 못함으로 인하여 사사시대에 이르러 혼란을 야기케 하였다.

 

그러나 85세에 민족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아 110세에 죽음을 맞기까지 자신은 물론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강조하며 스스로 본을 보인 여호수아의 생애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어떠한 위험이 다가와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순종하며 강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약속의 땅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성경: 출애굽기 33장11절.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본명은 호세아였고 에브라힘 지파의 눈의 아들이었습니다(민 13:8). 일찍부터 모세의 수종자가 되어 측근에서 그를 도왔으며 모세의 감화를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종교심이 강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맡은 일에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청년기에 이미 영적인 사람으로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회막을 떠날 줄을 모르고 기도하였다는 성경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출33:11) 또한 12명의 정탐꾼을 각 지파에서 선발하여 가나안땅에 파송하였을 때 여호수아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때에 열 사람의 불신앙의 보고와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의 보고는 유명한 간증이 되었습니다. 결국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허락 속에 모세의 안수를 받고 그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민 27:18-23). 그 후 가나안 7족속을 진멸하고 그 땅을 12지파에게 분배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지도자의 궁핍을 느끼지 못 할 만큼 여호수아는 모세의 자리를 잘 지켰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선민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는데 자기들의 사명을 만족스럽게 바로 감당했고 선민의 지도자의 자질을 잘 갖춘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교훈과적용 : 첫째, 여호수아는 영적인 자질도 좋았고 성막을 떠나지 않는 영적인 갈급함이 하나님의 큰 종이 되게 하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둘째, 12정탐꾼을 대신했던 그의 믿음은 그 민족을 대신한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22 요나단 (Jonathan) - 뜻: 여호와께서 주심

 

여기 소개하는 요나단은 사울왕의 아들이며 다윗의 친구 요나단을 말한다. 사울왕이 군사 일 천명을 선발하여 요나단에게 맡긴 후 베냐민 기브아에 주둔 케하여 블레셋의 침공을 막도록 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 군대의 용사로 다윗처럼 오직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운 신앙의 용장이었다. [요나단이 자기 병기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 14:6)

 

어떤 날 사울왕은 블레셋과 싸워 승리하기 전에는 아무도 음식을 먹어서 안된다는 금식령을 선포했다. 요나단은 이 선포를 듣지 못하고 지팡이로 꿀을 찍어 입에 넣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사울왕은 맹세코 요나단을 죽이려 했으나 백성들의 탄원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삼상 14:27-52).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렸을 때 요나단은 그의 무용과 신앙에 감동되어 그를 영원한 벗으로 받아들이고 생사를 같이할 것을 맹세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나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 이었더라](삼상 20:17) 다윗은 요나단의 우정으로 인하여 몇 차례 위기에서 구원받게 되었으며 이 은공의 보답으로 다윗은 요나단이 길보아산에서 전사한 후 그의 절뚝발이 아들 므비보셋에게 극진한 후의를 베풀었다(삼하 9:1 -13). 이들의 우정은 창공의 태양 같고 황야의 꽃처럼 맑고 아름다운 것으로 참 신앙인들만이 쌓을 수 있는 금자탑과도 같은 것이었다.

 

교훈과 적용: 첫째, 사욕이 없는 사랑의 봉사는 그 자손에게까지 축복의 조건이 된다. 선한 일에 부요하자. 둘째, 다윗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 은혜는 우정에 대한 의리였다. 은혜를 갚아야 한다.

 

 

23 요셉(Joseph) - 뜻: 그는 더하실 것

 

요셉은 라헬의 첫 번째 아들이며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그는 성품이 온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대단히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통해 만득자로 얻은 아들이어서 아버지의 총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해와 달과 별들이 자기에게 절하고 열한 단의 곡식 단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말함으로써 형들의 미움과 시기가 날로 더해갔습니다(창 37:3-11).

 

그 형들이 도단에서 양을 칠 때에 그들의 안부를 알기 위해 형들의 목장을 찾아갔습니다. 이때에 형들이 의논하여 요셉을 죽이기로 결의하였고 르우벤의 제의에 따라 구덩이에 넣게 되었으며 다시 유다의 제의로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20을 받고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진행되는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함께 포함되고 있음을 그림을 보듯이 깨닫게 됩니다.

 

요셉은 애굽의 장관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보디발의 아내가 끈기있게 유혹하였으나 단호하게 거절하자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됩니다. 결국 이렇게 반복되는 고통은 애굽의 총리가 되는 첩경이 되었습니다. 자기가족을 애굽 고센 땅에 이주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을 애굽의 국장같이 치렀고 요셉도 1백10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모세가 그 유골을 들고 나와 세겜에 안장되었습니다(수 24:32)

 

교훈과 적용 : 첫째, 거듭되는 고난 속에서도 충성되게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받은 축복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힘든 유혹을 물리쳤을 때에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24 모르드게(Mordecai)

 

바벨론 신 마르닥에서 유래된 이름일 것으로 추측된다. 에스더의 사촌 오빠이며 양아버지(에 2:7).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가족은 여고니아와 같이 포로가 되었다(에 2:5-6). 아하수에로 왕 암살음모를 미연에 방지하였다(에 6:1-11). 여기서 우리는 모르드게가 에스더의 오빠로 알려저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으며 에스더의 믿음이 워낙 두드러지게 이야기됨으로 모르드게는 그저 에스더의 오빠로서만 알려지고 있슴이 진정한 모르드게의 신앙이 무시되는 듯한 느낌이 있어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에스더 4장에 보면 처음부터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결심을 한 것이 아니고 그의 오빠 모르드게가 에스더에게 네가 왕비가 된 것도 다 이를 위하여 된 것이지 너와 네 가족의 안녕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압력이 있었기에 에스더가 그러한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됨을 다음의 두절에서 극명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모르드게의 믿음과 지혜가 에스더에 못지않음을 알 수 있다.

 

(에 4:13-14) “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14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25 서위렴2세( William Hamilton Shaw)

 

한국의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마친 미 해군대위- 그의 아버지 서위렴 선교사가 그의 아들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목산채플을 건축하여 봉헌하니 이가 바로 목동캠퍼스에 있었던 대학교회였다.

 

 

26 아브라함(Abraham) - 뜻: 열국의 아버지

 

본래는 아브람 이었으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이라 고쳐주었다.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음. 신앙의 아버지라고 함.

 

 

27 이삭(Isaac) - 뜻: 웃음

 

아브라함이 100세에 사라에서 얻은 아들 이삭을 얻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슴. 40세에 외종형 부두엘의 딸 리브가를 아내로 취하여 60세에 쌍둥이를 낳으니 곧 에서와 야곱이다((창 20:1-5, 22:2-13).

 

 

27 나오미(Naomi) - 뜻: 나의 즐거움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의 아내, 룻의 시어머니.

 

28 룻(Ruth) - 뜻 : 자손

 

[1] 셈의 아들(창 10:22)

 

[2] 모압 여자로 시어머니에게 효성한 한 여자(룻 4:13, 마 1:5).

 

룻기 1장15-17절. 룻은 "우정"이라는 뜻이다. 룻은 모압여자로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모압에 이주해 사는 기간 그의 아들 말론과 결혼한 나오미의 며느리(룻1:4) 이후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고(룻1:5) 효성스런 며느리로(롯 1:6-18), 보아스와 재혼하고(룻 4:9-13), 오벳을 낳았다(룻 4:17). 그의 이름은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다(마 1:5-16).

 

 

29 한나 (Hannah) - 뜻 : 자비

 

(1) 엘가나의 두 아내중 한 사람으로 사무엘의 어머니.

(2) 기도를 드려 사무엘의 얻어 하나님에게 바침 (삼상 1:1).

(3) 삼상 2:1-10의 한나의 찬가는 눅 1:46-55의 마리아의 찬가와 비교 된다.

 

[한나] ("은총"이라는 뜻)는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의 두 아들 중 하나인 선지자 사무엘의 모친이다. 그녀는 남편 엘가나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므로 다른 아내로부터는 미움을 받았다. 즉 브닌나가 한나를 시기한 것은 한나가 갑절이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대한 반항이었다. 한편 한나는 나이가 넘도록 자식이 없었으므로 매년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제사드릴 때에 " 만일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 평생에 그를 야훼께 드리고 삭도를 그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다니다"라고 서원 기도를 드렸다.

 

유대인은 무자함을 일종의 저주로 비관했지만 한나는 누구를 원망치 않고 하나님께 하소연했던 것이다. 그리고 엘가나는 한나를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라고 위로하였다. 엘리 제사장은 한나의 기도하는 것을보고 술에 취한 줄 오해하였지만 한나의 중심 소원을 들은 후 그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를 응답하시길 소원하였다. 한나의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져 아들을 얻게 되는데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으며 하나님께 약속한대로 아들을 바쳤던 것이다(삼상 1장). 사무엘은 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다. 여기서 몇 가지 한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교훈을 배울 수 있다.

 

 

30 바울(Paul) - 뜻 : 작은 자

 

1) 출생과 교육 :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으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 열심 있는 자이며(행 22:3) 청결한 양심으로 선조 때부터 섬기던 하나님을 섬기고(딤후1:3) 할례를 받았고 자랑할 만한 베냐민 지파요 율법으로는 바리세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의 선두에서 핍박하던 사람이니 바리세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도무지 결점이 없는 사람이었다(빌 3:5-6).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었다(갈 1:14).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다(행 22:26-28).

 

(2) 성격: 논리의 힘과 능력의 결합 즉 이성과 영력이 일치된 것이 특색이다. 결점이 있다면 너무 성급하여 후회하는 일이 있었던 점(행 15:39, 23:4-5). 자기 몸에 가시가 있다고 말한 것은 성격의 나무람 같다(교후 12:7).

 

(3) 회개: 기독인들이 율법을 경히 여기고 성전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었다(행 6:31). 스데반 죽이는 일에 가담한 것은 의분심에서 였다(행 7:5-4:3). 그 후 기독교인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향하였다(행 9:1-2).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여 크리스천이 되었다(행 9:1, 22:4, 26:9).

 

(4) 선교활동: 공중 앞에서 회개한 사실을 간증하고 전환된 마음을 수습하고 앞날을 위한 준비로 아라비아에 은퇴하여 더욱 힘을 얻고 돌아와 유대 인에게 예수가 기다리던 그리스도임을 전파하였다(갈 1:16-18, 행 9:22).

 

신약성서 27권중 서신(Epistle) 혹은 "편지"(Letter)의 형태로 된 글이 21개나 있다이 중에서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것이 13개이다. 이를 다시 바울 한사람으로만 발신된 것으로는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가 있고 고린도후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는 "바울과 디모데" 두사람의 이름으로, 또한 고린도전서는 "바울과 소스테네" 두 사람 이름으로 발신되었고,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는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 세 사람의 이름으로 기록된 편지이다. 이를 편의상 아래와 같이 구분해서 연구한다.

 

(1) 초기 서신들 : 데살로니가 전서, 후서

(2) 주요 서신들 :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3) 옥중 서신들 :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4) 목회 서신들 :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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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과 기독교의 가르침의 차이점>

구분

이슬람(무슬림)

기독교(크리스챤)

1. 믿음의 대상

유일신 알라(Allah) - 절대 자존하며 인간과 그 어떤 언약도 맺지 않음,

기독교의 하나님과 완전히 다른 신

삼위일체 하나님(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2. 구원에 이르는 길

(1) 선행과 알라에 대한 충성도

(2) 성전(Jihad)를 통해 죽어야 함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음

3. 경전의 성격

가브리엘의 계시를 무함마드가 

구술함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4. 경전의 지위

무함마드를 통해 단 23년 동안 

주어진 알라의 메시지

유일무이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진리

5. 선지자의 자리매김

독점적 지위를 갖는 선지자(Prophet) 이면서 단순한

 메신져로서의 무함마드

구원의 유일한 길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6. 삼위일체에 대한 시각

알라, 예수, 마리암

(Maryam 혹은 Marium)

성부, 성자, 성령

6. 죄에 대하여

알라의 징벌을 피할 수 없는 요소. 회개의 개념은 단순한 실책에 대한 용서, 알라의 자비를 구하는데 초점

회개를 통해 ‘죄사함’을 입음

7. 천국관의 차이

여자는 갈 수 없음. 선행이 무거울 때, 알라의 가르침에 성실했을 때, 성전(Jihad)를 통해 알라와 무함마드를 위해 죽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영접했을 때

8. 신 앞에서의 사람의 지위

종(Servant). 언제나 신의 자비를 

구해야 하는 종속적 존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림

9. 생활에서의 신앙

외식적이고 드러내는 경건생활

인격적 변화는 관심 사항 아님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중심이 됨

10. 남녀의 지위

여자는 남자에게 속하는 종속물이자 소유물. 성적인 유희의 대상임

동등한 영적 지위를 누림

11. 신으로부터의 

사랑의 성격

조건적 물질적 자애로움

(알라-주인, 인간-종)

무조건적 영적 사랑

(독생자의 보혈로 인간을 구원)

12. 축복에 대하여

조건부 축복, 알라의 일방적 권위에 불과함

축복의 언약을 지키시는 거룩한 영

13. 사람에 대한 섭리하심의 정의

종에 대한 주인의 심판과 권세, 인간에 대한 절대적 권위 강조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인내하시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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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기독교 비교

믿는 대상

기독교

이슬람

신은 하나의 신으로 통합되는 셋이다 . 이 한 명의 신은 소위 삼위일체라 불린다 .

삼위일체의 각 신들은 모두 동등하며 똑같이 영원하고 같은 존재다 .<o:p></o:p>

이러한 이유로 이 교리는 하나의 신비로써 설명된다 .

신은 오직 한 분이며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하며 기초적인 단어다 . 그 분은 자식이나 부모가 없으며 어느 것과도 동등하지 않으시다 . 이슬람에서 신은 알라 , 자비로우신 분 등  99 가지의 이름으로 불려진다 . 

예수

삼위일체의 두 번째 신으로 삼위 일체의 첫 번째 신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모든 면에서 완전한 신이다 .

신의 사도 중 한 명으로 매우 높이 평가된다 . 

성령

삼위일체의 세 번째 신으로 모든 면에서 완전한 신이다 . 

천사 가브리엘을 가리킨다 .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정결하고 신앙심 깊은 여인으로 모든 면에서 완전한 전지전능한 신인 예수를 낳았다 . 

정결하고 신앙심 깊은 여인으로 세상의 모든 여성 중에서 선택되어 신의 명으로 아버지 없는 의로운 선지자 예수를 낳았다 . 

말씀

신의 일부분이지만 또한 완전한 신으로 신의 아들인 예수가 되었다 .

신의 말씀  '있어라 '는 마리아가 남성의 개입 없이 예수를 낳게 한다 .

예수 이전의 예언자들

모두 존경하며 믿는다 .

모두 존경하며 믿는다 . 

성경

100% 모두 신의 오점 없는 말씀으로 여겨진다 . 

무슬림들은 모세에게 계시된 토라 , 다윗에게 계시된 자부르 , 예수에게 계시된 인질 ,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꾸란을 비롯하여 예언자들에게 계시된 모든 성서의 존재를 믿는다 . 그러나 꾸란을 제외한 모든 성서들은 인간의 손으로 수정되었으며 성경은 오직 꾸란에 의해 확증되는 부분만 옳다고 믿는다 . 꾸란의 절과 확연히 상반되는 내용들은 인간의 손으로 쓰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

무함마드

다양한 믿음이 산재한다 . 어떤 이들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거짓 메시아라고 믿는다 .

전 인류에게 보내진 신의 마지막 사도다 . 그 분이 신의 첫 계시를 받기 전에는 진실되며 신뢰받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 그 분은 모든 생명체에 신의 자비로써 보내졌다 . 

꾸란

성경의 복사본이라는 믿음에서 무함마드가 쓴 책이라는 것까지 다양한 믿음이 산재한다 . 또 어떤 이는 무함마드와 공모한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작품으로 믿기도 한다 . 

신이 인류에게 계시하신 마지막 성서다 . 꾸란은 신으로부터 보호받아 인간의 개입으로 수정되지 않은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 꾸란의 문학적 위치는 어느곳에서도 그 비등함을 찾을 수 없다 . 오늘날까지 아랍어로 쓰인 어떤 위대한 작품이라 해도 꾸란에 견줄 수 없다 . 꾸란은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의 지도서로써 심판의 날까지 인간의 개입으로부터 안전히 보호될 것이다 . 

예수의 메시지

신에 의해 보내진 예수는 아담의 죄로부터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 그의 희생 없이는 전 인류가 아담의 죄로 파멸되는 운명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 그의 십자가 죽음 이후 인류에게 남겨진 것은 선행 없는 믿음이다 .

예수는 신에 의해 유대인에게 보내진 한 명의 사도이며 모세의 순수한 참종교를 회복시키고 고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규범의 일부를 경감시켜 주고자 했다 . 예수는 유대인에게 믿음 뿐만 아니라 선행도 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 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 . 

예수가 

죽은 자를 

살리고 장님과 나병환자를 치료한 것

모두 믿는다 . 예수는 이 기적들 모두를 행했다 . 신의 아들이며 또한 동시에 완벽한 신이며 신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

모두 믿는다 . 이 기적들은 신의 뜻으로 행해졌다 . 마치 모세나 노아 , 고대의 다른 예언자들이 신의 뜻에 의해 기적을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

십자가 죽음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넘겨졌다 . 유대인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그의 몸에 상처를 내고 굴욕을 주며 십자가에 못박았다 . 예수는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었다 .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학대당하고 살해되지 않았다 . 단지 사람들에게 그런 것처럼 보이게 꾸며졌을 뿐이다 . 신은 예수를 그 분 가까이로 승천시켜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구제했다 .  

예수의재림

현재 예수는 세기말 무렵에 도래할 것이라 기대된다 . 

예수는 죽지 않고 신에 의해 승천했다 . 그는 심판의 날 직전 지구에 내려와 거짓 메시아를 없애고 평화와 정의를 설립할 것이다 . 예수는 돼지를 죽이고 십자가를 부수며 전 인류를 이슬람으로 초대할 것이다 . 

원죄

전 인류는 아담의 죄를 안고 태어난다 . 오직 신의 죄 없는 자손의 죽음만이 원죄를 제거할 수 있다 . 단 하루만을 살았던 사람이라도 깨끗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 오직 예수의 죽음에 대한 믿음과 세례만이 원죄의 운명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 . 

원죄 따위는 없다 . 인류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 인간이 불신하여 신의 자비를 거절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천국으로 가도록 운명지어졌다 . 인간의 죄가 하늘의 높은 곳을 전부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라 해도 신은 쉽게 그 죄를 용서해 주신다 . 신에게 있어 용서의 문제는 매우 간단한 것이다 . 신은 우리가 보고 듣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고 그 이상의 일들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 신은 피조물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기 좋아하며 가장 사소한 선행에도 커다란 보상을 주신다 . 신의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을 갖고 선행을 해야 한다 . 

아담의 회개

아담의 죄는 너무나 큰 것으로 신은 단순하게 그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았다 . 아담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오히려 죄없는 순수한 신인 예수의 피를 필요로 했다 . 

아담은 그의 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며 회개했다 . 주여 저희가 저희 스스로를 욕되게 하였나이다 당신께서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지 아니 하시고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아니 한다면 저희는 잃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o:p></o:p>

신은 아담을 용서해주셨다 .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면 모두 임종 시까지 용서의 문이 열려있다 . 인간과 신 사이에는 어떤 중재자도 있을 수 없다 . 사람들이 신에게 진심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며 마지막 시간이 오기 전에 악행을 멀리한다면 신은 그들을 용서하신다 .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만큼 신이 좋아하시는 것은 없다 .  

구원의길

물려받은 아담의 죄에 대한 예수의 보혈의 피를 믿는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 . 오직 믿음만이 필요할 뿐이다 .

신을 믿고 그 분의 사도들을 믿고 그 분의 명에 순종한다면 신은 사람들이 행하는 조그마한 선행을 몇 배로 늘려주시며 악행을 지워 주신다 . 심판의 날까지 신의 자비는 사람들의 선행이 악행을 압도하도록 이끌어 주시며 천국과 기쁨으로 이르는 길을 열어 주신다 . 천국은 상상을 뛰어 넘는 훌륭한 곳으로 영원히 그 곳에서 거주하게 된다 . 천국에서는 더 이상의 선행은 필요 없고 오직 보상만이 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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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두려울 때 -옥한흠 목사 -




(요한복음 12장 1절-11절)

1.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자 중에 있더라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오늘의 설교


사람이 두려울 때 -옥한흠 목사 -





오늘의 추천 찬양


주여 임하소서 찬양전도사 이래미( 미션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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