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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잘 경청하는 선지자, 아모스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라는 메시지를 선포한 선지자로 유명한 아모스. 1장 1절로 가늠해볼 때, 그는 대략 주전 763년부터 753년 사이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출신지는 남유다에 속한 드고아였지만, 사역은 북이스라엘에서 이루어졌다.

 

아모스, 그는 자신이 활동한 시대와 어떤 면에서 어울리지 않는 선지자라고 할 수 있다.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당시 북이스라엘에 선지자나 제사장이라는 공적으로 세워진 성직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모스의 등장은 어울리지 않았다.

 

둘째는 아모스 스스로가 밝혔듯이 그는 분명한 직업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모스의 말씀 선포 사역을 보면서 그를 대적하던 자들과 논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해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7:14)라고 밝혔고, 동시에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미 성직의 조직이 갖춰져 있었고, 아모스는 해야 할 일이 많은 목자요, 농부였기에 그가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 그것도 심판의 말씀을 선언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색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그것을 또 선포하라는 소명 앞에 순종했던 아모스를 통해 우리는 이미 기독교에 대해 널리 알려져 있고, 교회가 곳곳에 세워져 있고, 목회자가 넘쳐나는 시대일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가 소명자가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아모스의 소명이 더욱 도전이 되는 이유가 있다. 아모스가 자신의 사역 시기에 대해 ‘지진 전 이 년’(1:1)이라고 하는 것을 두고 학자들은 그가 적어도 2년 이상 활동했겠지만 그리 길게 선지자로서 사역한 것 같지 않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아마도 원래 하던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일도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모스는 왜 어쩌면 한시적이었을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이 해야 할 많은 일과 손해를 감수하면서 심판과 멸망을 전했을까? 왜 환대는커녕 ‘왕을 모반한다’(7:10)는 강력한 저항에 휘말려 억울하기 그지없는 길을 갔을까? 아모스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이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커다란 도전을 받게 된다.

 

 

이제 아모스의 사역을 살펴보자.

 

첫째, 그는 거대한 힘의 논리 및 거침없이 횡행하는 힘의 현실을 거슬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무자비함의 극치요 쾌락에 사로잡히게 하는 힘의 세상, 이방 나라들에 대해 아모스는 힘의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말씀을 선포했다(1장).

 

 

둘째, 그는 돈의 힘을 거슬러 선포했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8:4, 참조 2:6~7)라는 말씀처럼 당시 이스라엘은 한 마디로 ‘돈의 맛’을 아는 세상이 되었다. 사실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며 활동하던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버금갈 정도로 영토를 회복했다. 또 경제적으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호황을 누리던 시대였다. 그만큼 돈의 힘은 더욱 위력을 발휘했고, 사람들은 돈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아모스는 이처럼 요즘 식으로 말하면 경제 양극화가 심해진 것을 여과 없이 지적했다.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8:6).

 

 

셋째, 아모스는 진리를 떠난 관습과 관행 및 생명이 없는 전통과 맞서 싸웠다. 여전히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고(5:22) 성직자도 있었지만(7:10), 실제로는 진리를 떠나 있었고 아무런 진정성이 없는 그야말로 관행이요 죽은 전통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 따라서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2:4)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2:7) 세상을 거슬러 그들의 실상을 드러내며 거침없이 말씀을 선포했다.

 

 

이와 같은 사역에서 아모스의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사람됨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이러한 선포가 필요한 이스라엘 백성의 본질적인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음’이며(5:8)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임을(8:11)을 알았던 영성의 인물이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뿐 아니라 그것을 마치 아비의 심정으로 “돌아오라, 돌아오라”고 반복하여 간곡하게 눈물어린 호소를 하는(4:6~11) 긍휼의 영혼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지금도 우리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5:6, 참조 5:4, 8).

 

- 날마다 솟는 샘물 박삼열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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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바라본 꾸란의 오류와 모순들(2)

 

1. 성경의 변형들

 

1) 남자 갓난아이를 죽이라는 파라오의 칙령: 꾸란은 이스라엘의 남자 갓난아이를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령이 모세의 사역 도중 내려졌다고 말한다. “파라오 백성들의 우두머리들이 말하더라 폐하(파라오)는 모세와 그의 백성들이 지상에 해악을 퍼트려 폐하와 폐하의 신들을 우롱하도록 둘 것입니까?’라고 말하니 그(파라오)가 대답하였더라. ‘그들의 아이가 남아이거든 우리는 살해하여 단지 그들의 여자만 살아남게 하여 그들을 지배할 것이니라”(꾸란 7:127) 그러나 성경은 이 명령이 모세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려진 것이라고 말한다(1:16; 2:1-2).

 

2) 이집트에 내린 재앙들: 꾸란은 하나님이 이집트에 내리신 재앙들에 대해서도 성경과 다르게 말한다. 첫째, 10가지 재앙 중 일부만을 언급하고 있다. 둘째, 언급된 일부의 재앙들마저 성경과는 다른 순서로 등장한다. 셋째, 성경에 없는 재앙인 홍수를 언급하고 있다. 아랍어 타와판”(tawafan)은 문자 그대로 홍수를 의미하며, 다른 어떤 뜻도 담고 있지 않다.

 

3) 모세가 내리친 바위와 열두 개의 우물들: 꾸란은 모세가 돌을 치자 열두 개의 우물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는 열두 지파와 상응하는 수의 우물이었다(꾸란 2:60; 7:160). 그러나 엘림에서 있었던 일을 호렙에서 있었던 일과 섞어 놓은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먼저 엘림에서 묵었고, 그곳에서 그들은 12개의 우물과 70그루의 야자나무를 발견했다(16:1). 그리고 그들은 신광야에 도착할 때까지 여정을 계속했다. 그곳은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곳이었다(16:1). 그들은 르비딤에 도착할 때까지 여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그들은 물이 필요했다(17:1). 그들은 목이 말랐고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모세가 바위를 쳤을 때, 그 바위는 물을 뿜어냈다(17:5-6). 열두 개의 우물은 엘림에 있었고, 바위에서 물이 솟아난 것은 호렙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4) 언약의 궤: 꾸란은 언약궤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다(꾸란 2:248). 먼저 꾸란에는 언약궤 안에 사키나”(Sakinah)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사키나라는 뜻의 아랍어와 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그러나 이 아랍어 단어는 히브리어 쉐키나”(Shekinah)를 그대로 음역한 것일 뿐이다. “쉐키나”(Shekinah)는 언약궤 위에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 영광의 임재를 일컫는 단어이다. 두 번째로 꾸란은 언약궤가 모세와 아론의 가족들의 유품들도 담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언약궤는 십계명이 적혀 있는 두 개의 돌판을 담고 있었다(왕상 8:9). 또한 히브리서 94절을 보면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셋째로 꾸란은 언약궤가 천사들에 의해 운반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성경의 내용과 다르다.

 

3. 꾸란 안에서 모순되는 내용들

 

1) 사람이 어떤 물질에서 창조되었나?: 꾸란은 사람이 어떤 물질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하여 모순이 있다. “알라는 흙에서 너희를 창조하사 정액에서 너희를 재창조하셨으니”(꾸란 35:11) 어떻게 알라가 인간을 먼저 흙으로 만든 후에 정액으로 다시 만든단 말인가? 이 내용은 다음과 같이 변한다: “우리(알라)가 인간을 창조하사 검고 묽은 진흙으로 만드셨고”(꾸란 15:26) 그런데 다른 구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알라)는 그들을 진흙으로부터 창조하였느니라”(꾸란 37:11) 그런데 진흙에서 추가된 다른 구절에는 그분(알라)은 도기를 만들듯 인간을 흙에서 창조하였으며”(꾸란 55:14). 인간이 한 방울의 정액 또는 응혈로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있다(꾸란 16:4). “또한 인간이 물로 만들어졌다.”(꾸란 25:45) 그렇다면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는가 아니면 정액으로만 만들어졌는가? 흙으로 만든 다음에 다시 정액을 혼합해서 만들었나? 진흙으로 만들었는가? 아니면 묽은 진흙으로 만들었는가? 아니면 물로 만들어졌는가? 이에 대한 혼란이 꾸란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2) 이집트의 파라오는 바다에서 익사했나, 아니면 살았나?: 꾸란은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 바다로 간 파라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있다. 어떤 구절들에서는 파라오가 그의 군대와 함께 수장당했다고 말한다(꾸란 17:103; 28:40; 2:50). 반면 어느 한 구절에서는 이상하게도 파라오가 알라에 의해 살았으며, 다른 이들에게 알라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 우리(알라)가 너를 구해 줌으로써 네 이후에 오는 자들에게 예증이 되도록 함이라”(꾸란 10:92) 그러나 사실상 꾸란에 기록된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3) 꾸란은 아랍어로만 기록되어 있는가?: 꾸란에는 꾸란이 순수한 아랍어로만 기록되었다고 돼 있다. “한 인간이 그를 가르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그들을 우리(알라)는 알고 있나니 그들은 외래인이 그(무함마드)를 가르친 것이라 하더라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아랍어이라”(꾸란 16:103) “우리(알라)는 꾸란을 아랍어로 계시하나니”(꾸란 12:2)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란은 많은 비()아랍어를 담고 있다(꾸란 16:103; 12:2; 41:44). 여러 예를 들 수 있다: “파라오”(Pharaoh) 이집트어; “아담, 이브”(Adam and Eve) 아카드어; “아브라함”(Abraham) 시리아어; “하루트(Haroot), 마르트(Marroot), 시라트(Sirat), 후르 안인(Huwariyeen), (Jinn), 피르다우스(Firdawa)”모두 페르시아어; “히버(Heber), 투라트(Turat), 게한님(Gehannim)” 모두 히브리어; “인질”(Injeel) 그리스어 등, 아랍어가 아닌 외래어가 이 외에도 꾸란 안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유해석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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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가 아는 기쁨

 

♡시 128:5,6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손자인 잭의 결혼식에서 있던 일입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기 때문에 결혼식은 예배 형식으로 진행됐고, 스티브 로헤드 목사님이 주례를 맡으셨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이 결혼식에서 대표 기도를 맡았는데,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기도로 하객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에 감동을 받은 로헤드 목사님은 자신의 저서에 카터 대통령의 기도를 실을 정도였습니다.
“주님, 저는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을 하고 축복된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특별히 매일 함께 식사를 하는 시간은 저희에게 더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오늘 결혼하는 제 손자인 잭과 그의 아내 주디가 함께 식사를 할 때마다 이와 동일한 기쁨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내가 체험하지 못하고서 남에게 축복을 해줄 수는 없습니다. 기도를 할 때도 그럴싸한 말보다는 진실한 체험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먼저는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기쁨을 체험하기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체험한 기쁨으로 이웃에게 나누고 또 축복하십시오. 반드시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예수님을 더욱 알기 원하고 아는 만큼 진실하게 전하게 하소서!
주님의 기쁨을 체험한 순간을 노트에 기록해 보십시오.

큐티/김장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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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철야예배설교] 지금 어렵다면 믿음의 삶이다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지금 어렵다면 믿음의 삶이다
본문 / 신명기 32:10~12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신앙은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신앙과 고난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굉장히 밀접한 관계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문제를 빨리 해결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고난이 다가왔을 때, “문제가 천천히 해결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정보다 결과에 집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과정을 통해 일하기 원하십니다. 과정은 믿음이 단련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과정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난이 왔을 때에 우리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금방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바다에 풍랑이 일었습니다. 제자들은 죽는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자들은 깊이 잠들어계신 주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주님은 일어나셔서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는 풍랑을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니, 처음부터 풍랑이 일지 않게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풍랑이 일기 전에 풍랑이 일지 않게 하셨다면 좋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아슬아슬하게 보내는 것을 은근히 즐기시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에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지금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지 말고, 아예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을 일으키시는 분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같은 분으로 여겨질 때, 우리에게 혼란이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의 삶을 어렵고 힘든 상황 속으로 몰아넣으시는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죽도록 기도해야 마지못해 들어주시는 분으로 여겨집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늑장대응하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굉장히 늑장을 부리시는 것 같습니다.
요셉이 고난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섰습니다. 뒤에서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옵니다. 얼마나 아슬아슬한 순간입니까. 앞에는 길이 없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마병들이 몰려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은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는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았습니다. 부도직전에 있는데, 은행마감 시간은 다가오고, 돈이 준비되지 않아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은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위기의 상황에 내몰릴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시시각각 닥칩니다.

우리는 쉬운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편안한 삶,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문제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나님의 사랑을 덜 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힘들지 않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산을 오를 때, 4륜구동의 힘이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단숨에 올라가기를 원하십니까? 걸어서 땀 흘리며 힘들게 올라가기를 원하십니까?
자동차를 타고 산을 오른다면, 쉽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산에 올라가면,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힘들지 않고 정상(頂上)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혹입니다.
쉽고 빠른 길은 많습니다. 그러나 쉽고 빠른 길을 걷다 보면, 경험할 수 없는 세계가 있습니다. 정상에 쉽게 오른다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걸어서 산을 오를 때에 경험할 수 있는 비경(祕境)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산을 오른다면, 쉽게 정상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걸어서 올라갈 때, 순간순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올라가는 동안 다리의 근육이 단련됩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타고 정상에 이른 사람이 느끼는 기쁨과 걸어서 정상에 이른 사람이 느끼는 기쁨은 다릅니다.

요즘 세상이 척박합니다. 갈수록 경쟁이 심해집니다. 사는 것이 전쟁 같습니다. 살다 보면, 고난이 성난 파도처럼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청소년들 중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역경지수가 없습니다. 머리가 좋고, 실력이 있고, 능력은 있는데, 역경지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역경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우울해집니다. 일이 잘 되지 않는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실패해도 인생이 끝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삶을 포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편안한 삶을 사는 것보다 강해지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하게 하시기 위해 그들을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본문 11~12절에 보면,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해서 새끼들을 떨어뜨립니다. 새끼가 어릴 때에는 어미는 새끼의 보금자리를 아주 포근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조금만 지나면, 보금자리를 어지럽혀서 그곳에 있지 못하게 만들어서 새끼를 밀어내어버립니다.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내모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금자리에서 떨어지는 독수리 새끼처럼 죽는다고 소리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하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내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시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편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라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출 14:11).

노년이 되어 살아온 삶을 회고할 때, 무엇이 기억날 것 같습니까? 여행가고 편하게 살았던 것이 기억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이 기억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이 기억날 것입니다.

삶이 힘든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힘든 삶을 통해 우리가 강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이 힘들수록 얻는 혜택이 있습니다. 삶이 힘들수록 강해집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하다가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좋았던 순간은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굉장히 힘들었던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보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람이 기억에 남습니다.
힘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 매달리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그 일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열심히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힘들지 않고 강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강해지려면 힘든 순간을 반드시 보내야 합니다. ‘그래도 편안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은 편안하게 살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반드시 어려움이 오게 되어있습니다. 풍랑이 치게 되어있습니다. 위기가 오게 되어있습니다. 문제가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약한 상태로 있으면, 당할 수 있습니다. 죽을 수 있습니다.
운동할 때에 힘이 들어야 제대로 운동이 됩니다.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운동은 숨쉬기운동밖에 없습니다. 숨을 몰아쉬고, 근육이 고통을 느낄 정도로 운동해야 제대로 운동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강해져야 합니까? 강해져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수리 새끼들이 보금자리에서 떨어져 바닥을 치기 전에 어미 독수리는 자신의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습니다.
독수리 새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독수리 새끼가 높은 벼랑에서 떨어지며 날갯짓을 할 때에는 거의 죽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죽지 않으려고 날개를 퍼덕거립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어미가 새끼를 벼랑에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새끼는 수직으로 떨어집니다. 새끼가 살려고 날갯짓을 하지만, 아직 날개에 힘이 없어 계속 떨어집니다. 그때 새끼는 죽는다고 소리칩니다.
그런데 어미는 이것을 한 번만 하지 않습니다. 한 번만 해서는 독수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미는 수없이 반복해서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새끼는 최악의 상황을 수없이 경험하게 됩니다.
바람을 가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독수리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죽을힘을 다해 퍼덕거린 새끼만 독수리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닭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독수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닭은 주인이 잘게 부셔서 던져주는 것만 집어먹습니다. 닭은 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입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편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위험 앞에서 도피적인 삶을 살고, 수동적인 삶을 살고, 안일하고 편안한 삶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어려움이 생겨도 죽는다고, 힘들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독수리들은 벼랑 끝에 집을 지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새끼들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실 때에 벼랑 끝을 사용하십니다. 사람은 벼랑 끝에서 강해집니다. 그래서 더 이상 밀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에게서 괴력이 나옵니다.

독수리 새끼가 둥지에 있는 동안에는 독수리에게서 괴력이 나올 수 없습니다. 벼랑 끝에서 떨어질 때, 독수리에게서 괴력이 나옵니다.
둥지 안에서 “날 때는 이렇게 나는 것이다. 1초에 날갯짓을 몇 번 해야 한다.”라고 훈련받는다고 해서 괴력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 새끼가 벼랑에서 떨어지면, 죽을힘을 다해 날갯짓을 합니다. 새끼가 떨어져서 바닥을 칠 때까지, 어미는 새끼를 돕지 않습니다. 어미가 새끼를 도우면 안 됩니다. 도울 것 같으면, 떨어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미는 새끼가 날갯짓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새끼를 내버려둡니다. 날갯짓을 통해 새끼는 독수리가 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힘들다면, 그것이 정상(正常)입니다. 힘들지 않고 편안한 삶은 비정상입니다. 힘든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갑니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의 믿음의 날개가 강하게 작동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힘든 순간이 우리에게는 반갑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을 통해 나를 나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습관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쉬운 것에 무릎 꿇는 것도 반복하면 습관이 됩니다. 아주 쉬운 일에 쉽게 포기하고 무너지는 것도 여러 번 반복하면 습관이 됩니다.
힘든 일을 이겨내는 것도 반복하면 습관이 됩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 쉽게 무릎 꿇어버리면, 거기서 인생이 멈추어버립니다. 어려움이 왔다고 해서 무릎 꿇어버리면, 거기서 인생이 끝납니다.

어려운 일을 이겨내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이기는 것이 습관이 됩니다. 죽을 것 같아도 계속해서 날갯짓하다보면, 날개에 힘이 생깁니다. 이기는 것이 습관이 되면, 삶이 강력해집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기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입니다. 어려움을 통해 자신이 점점 강해져간다는 것을 느낍니다.
맨바닥에서 생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환경을 통해 믿음이 점점 강화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맷집이 생깁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잘 감당하게 되어 자신이 강해졌음을 느끼게 됩니다.
문제가 생기면, 전에는 반쯤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문제가 생겨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죽을 것 같은 때에는 하나님께서 받쳐주시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려움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통해 강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편안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되면, 우리의 기도는 늘 맴돌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기도하고, 힘들어서 못 살겠다고 기도하게 됩니다. 늘 골골거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일어난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비상(飛上)하게 하십니다. 그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편안함이 오늘날 우리에게 최고의 유혹입니다. 사람들은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미 그 속에 감염되어있습니다. 편안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편안한 삶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적입니다. 편안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립니까? 우리는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립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성공하면, 부모로부터 독립합니다. 부모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다릅니다.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영적 독립선언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유혹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련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독립’이라는 은밀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면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 도와주세요. 문제를 해결해주세요.”라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기도를 멈춥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원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문제가 해결되기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 교회에 나오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으십니까? 당면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찾으러 교회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쉬운 길을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를 지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백성들을 먹이실 때에도 매일 하루분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틀분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 위해서는 이틀분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만나와 메추라기를 모으지 못하게 하시고, 매일 하루분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구하지 말고, 하늘로부터 매일 먹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면, 세월이 흐를수록 삶이 점점 더 쉬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처음에는 어렵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쉬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어도, 나중에는 편안해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문제가 끝나고, 아쉬움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풍족해지면, 하나님을 잘 섬기고, 믿음 생활을 잘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많이 주셔서 넘치게 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족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힘듦과 어려움을 겪게 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그것이 결정됩니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만이 형통은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돌아가는 것이 형통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대로 돌아가는 것이 때로는 형통입니다.
내 생각대로 돌아가는 것이 형통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형통입니다.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형통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요셉을 보세요.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9장에 보면,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창 39:2).
모든 것이 자신의 꿈과 다르게 돌아갔습니다.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이 흘러가는데, 창세기에는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도 기쁨과 평안을 유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는데,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십니다.

욥기에서 욥이 발견한 것이 그것입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욥 42:5).
욥은 하나님께서 물질을 회복시켜주셔서 감격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 한 분 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지금 삶이 어렵고 힘든가, 편안하고 풍족한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고, 하나님을 얼마나 찾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갈망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지금은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만을 앙망하고 붙들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복된 삶입니다. 시련이 닥치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더욱 신뢰함으로 믿음이 자란다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문제를 제거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면, 그 후에 어떤 문제가 닥쳐도, 하나님만 의뢰하게 됩니다. 시련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운 사람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9절에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원망합니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구하지 마시고, 믿음이 자랄 수 있는 기회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이 올수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전혀 없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 삶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평안하게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어려움이 없도록 기도할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라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면, 어려움이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종종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는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어렵게 하십니까?”라고 기도합니다. 문제에 걸려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반면,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기도를 배우기 원하고, 기도가 깊어지기 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으로 하여금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기도를 배우고 원하고, 기도가 깊어지기를 원한다고 기도했지, 어려움을 달라고 했습니까?”라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깊어지기를 원하는 것이나 어려움을 달라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기도가 깊어지고, 기도가 성숙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어려움을 달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언제 기도합니까? 벼랑 끝에서 기도합니다. 생존의 문제가 걸렸을 때에 기도합니다. 언제 죽기 살기로 기도합니까? 죽을 만큼 어려움이 닥쳤을 때, 죽기 살기로 기도합니다.
생사(生死)를 건 기도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편안할 때에는 이런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죽을 만큼 강력한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사(敎會史)를 살펴보면, 기도의 깊은 경지에 이른 분들은 고난의 깊은 골짜기에서 기도를 배운 분들입니다.

아무나 기도를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기도의 맛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기도를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아무리 강조해도,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려고 애쓰는데도 기도의 줄이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죄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묘함과 간교함으로 인해 우리는 조금만 배불러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도를 통해 나타납니다. 기도의 강도(强度)를 보면, 얼마나 절박한 상태에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간절히 찾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필요를 구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구하는 것과 가진 것을 하나 더 구하는 사람은 기도의 태도가 다릅니다. 한 끼를 굶은 사람과 1주일을 굶은 사람의 기도가 같겠습니까. 먹을 양식을 구하는 사람과 명품 가방을 구하는 사람의 기도가 같겠습니까.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지 않아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우리의 태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필요를 놓고 기도하든, 절망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하든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위기가 찾아오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고,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을 바꾸기 원합니다. 상황이 바뀌면, 행복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변하는 상황을 바꾸려고 하지 마시고, 변함없으신 하나님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문제가 끝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리와 관련된 문제에 사로잡혀 있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쉽게 잊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야단법석을 떨어서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비슷하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을 종종 막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앞에 서게 하셨습니까? 왜 사면초가의 상태에 빠지게 하십니까? 왜 광야와 같은 불편한 곳으로 몰아가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는 상황으로 이끄셔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고, 관록이 붙고, 경험이 쌓이고, 계급장과 훈장이 늘어나면, 우리의 눈에 무엇이 보입니까? 오직 하나님만 보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모세는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라고 말했습니다(출 14:13).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닌데, 모세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습니까? 무엇을 해도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때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서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 붙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몇 개의 줄을 붙들고 있습니까? 하나님만을 붙잡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붙들고 있는 여러 가지 줄을 잘라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들이 다 헛된 것임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고난을 통해 우리가 붙들고 있는 줄들을 모두 잘라버리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줄만을 붙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자랑을 모두 버리게 하시고, 헛된 야망을 모두 포기하게 하시고, 우리가 붙들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음을 믿게 하십니다.

누가 지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별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기도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 기도생활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기도해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더 힘들어질 때, 기도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향해 나아갑니다.
여러분이 당한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이깁니다. 그때 문제는 작아지고, 하나님은 점점 커집니다.

지금 우리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렵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은 점점 어려워져갑니다. 힘들지 않은 인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고난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갑니다. 삶이 힘듭니다. 사람들은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평안하고 어려움 없이 살기를 구한다면, 그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은 위기를 넘나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위기 속에서 기도를 배우고, 위기 속에서 믿음이 자라고, 날아오르는 법을 배웁니다.
어려우면 기도하십시오. 끝까지 기도하세요. 기도를 포기하지 마세요. 어려움을 통해 기도를 배워야 할 사람이 기도를 멈춘다면,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기도했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와도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끝에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세상의 환경이 바뀌어도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함께하셨습니다.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위기는 축복입니다. 위기는 우리를 우리 되게 합니다. 지금 어렵고 힘드십니까? 신앙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정상입니다. 당연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벼랑 끝에 계십니까? 앞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본래 삶은 위험한 것입니다. 위험이 없다면, 기적도 없습니다. 어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고난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길이 없어 방황하고 헤매다가 길 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공허한 이야기를 들으며 방황하다가 진리 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는데, 인생의 끝에서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전부가 되십니다.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지금 힘든 것이 정상입니다. 힘들어야 합니다.
힘들지 않은 일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세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믿음을 강화하여 믿음의 날갯짓을 통해 비상하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시련이 왔을 때에 점점 더 강력하게 피어오릅니다. 믿음을 통해 환난을 통과하기 때문에 가라앉지 않고 솟아오릅니다. 아름다워집니다. 겉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 속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왜 삶의 시련 속에서 절망합니까? 무엇을 바라봅니까? 어려움이 없어지기를 기도하지 마세요. 하나님만을 신뢰하세요.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절망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절망을 무릎 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정확하게 개입하십니다. 때를 따라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도 때도 없이 팔을 내미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를 벼랑에서 떨어뜨린 후, 새끼를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확한 순간에 날아가서 새끼를 받아 올립니다.
새끼 독수리가 벼랑에서 떨어지면서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도 어미 독수리는 가만히 있습니다. 새끼 독수리가 바닥을 치기 직전에 어미 독수리는 총알같이 날아가 새끼 독수리를 받아서 올립니다.
중요한 것은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등에 업는 것이 아닙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를 벼랑에서 떨어뜨렸다가 받아 올리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서 새끼 독수리를 독수리가 되게 만듭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새끼가 죽지 않도록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벼랑으로 떨어지는 새끼 독수리를 등으로 받아 올리는 것은 새끼 독수리를 살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다가오는 수많은 환난과 시련 앞에서 굴하지 않고, 날아오르는 독수리가 되게 하십니다.
어려움이 와서 기도했는데도 응답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길 수 있습니다.

독수리는 자기 마음대로 날아다닙니다. 언제든지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습니다. 악천후(惡天候) 속에서도 가고 싶은 대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참새, 비둘기와 다릅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새들은 어디론가 숨어버립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 높이 날아오릅니다.

믿음의 삶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와도 돌진하는 것입니다. 독수리와 같습니다.
독수리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갑니다. 바람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기의 날개로 자기가 방향을 정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갑니다.
시련과 어려움이 와도, 방해가 있어도, 그것 때문에 멈칫하지 않습니다. 날개를 펴고 날아갑니다.
자유롭게 날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수리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인생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수리 되게 하셔서 날아오르게 하십니다.
우리가 독수리가 되면, 그 순간부터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생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 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어려움이 와도 상관없습니다. 고난이 오고, 시련이 와도, 그것 때문에 멈칫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빠지지 않습니다. 날아오릅니다.
끙끙 앓으며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날갯짓을 통해 강해져서 오직 여호와만을 앙망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실 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한 분 만이 우리가 바라볼, 유일한 대상이십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삶에 다가오는 고난과 시련, 역경 앞에 무릎 꿇지 마시고, 오히려 역경을 무릎 꿇게 만드는,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날아오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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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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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관련 예화모음] 

 

♠ 주여 감사합니다.
어느 중년 성도가 대학 병원의 한 수술실에서 혀의 암 때문에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마취주사를 손에든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며 "마지막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라고 했다. 글로 쓸 수는 있겠지만 혀를 사용하는 언어는 이것이 최후이다. 간호원 조수, 견습 의사들… 둘러선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가는 심각했고, 잠시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저마다 만일 나라면, 만일 내게 한마디 언어만 남아 있다면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생각해 본다.
드디어 입이 움직이고 두 줄기 눈물이 흐르더니 "주 예수여 감사합니다"라고 세번 되풀이 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끼리만 아는 비밀인 것이다.

♠ 신앙적 사고방식
사람은 늘 된다고 생각하고 되려고 노력하면 노력하는 대로 되는 경우가 많다 "이이고 죽겠다", "다 틀렸다", "나는 죽었다"하는 식의 부정적 사고 방식과 언어 습성부터 고쳐야 우리 민족의 의식 혁명이 이루어질 것 같다. 민수기 13장의 열 두 정탐 가운데 열 명은 자신들은 가나안 족속의 눈에 매뚜기로 보이고 자신들 눈에도 자신들이 거인 앞의 메뚜기처럼 보이더라고 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했다. 전자는 불신앙적 사고를 했고, 후자는 신앙적 사고를 했다. 전 이스라엘군은 블레셋의 골리앗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떨었으나 소년 다윗은 골리앗을 신앙의 눈으로 볼 때 그의 밥이었다. 신앙적 시야, 신앙적 사고의 습성을 길러야 겠다.

♠ 전심(全心)의 신앙 생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너희가 점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히스기야 왕은 병들어 꼭 죽게 됐을 때 평소에도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던 그는 전심으로 기도하여 15년을 더 사는 축복을 받았다(사38장) 솔로몬은 전심으로 지혜를 구했다. 성경의 간구들은 전심으로 생명을 건다. 야곱의 기도, 모세의 기도, 엘리야의 기도, 에스더의 기도, 사도행전의 인물들은 전심 전력 지성을 다했다. 누가복음 18장의 과부의 기도도 한 맺힌 기도였다. 철저히 믿자, 산 순교자가 되자.

내 가슴에 타는 사랑의 불
내 가슴 한복판에 십자가를 세우고 속죄의 불타는 사랑을 담자. 불로 하나님을 불같이 사랑하고 이불로 사람을 불같이 사랑하자. 내 가슴에 타오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불길로 이 더러워진 거리 구석 구석을 태우리라
이것이 나의 종교이다. 나의 종교는 교리가 아니다. 예배가 아니다. 가슴에 타오르는 예수의 사랑의 불길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지 교리나 의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랑없는 기독교는 울리는 꽹과리이며, 휴지같이 쓰레기통에 버릴 것들이다.(고전13장)

크리스찬과 시기심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는데 남이 잘되고 잘하는 것을 보고 불행해서 못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는 것 같다. 시기심은 교만과 함께 악마의 죄, 가인의 죄, 예수님을 죽인 죄, 인간의 가장 원색적이고 보편적인 죄이다. 남을 중상, 험담, 비난하는 행동처럼 인격의 야비성과 살인성을 드러내는 행동은 없다. 비난 자체가 비난하는 대상자의 어떤 행동보다 자신에게 남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 대하여 악덕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남의 처지와 상황을 다 알지 못하고, 설혹 안다 하여도 내가 그것을 정죄할 만큼 깨끗하지 못하다.
비난할 할 때마다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평가 절상과 남에 대한 평가 절하가 다른 사람을 나쁜 놈이라 할 때 내가 더 나쁜 놈이 된 것이며, 개자식이라 할 때 내가 먼저 개자식의 자격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남이 잘되기를 진실로 바라고 사랑할 때 비판하라.

재산
어느 선상(船上)에서의 이야기다. 선객은 모두 부자인데 그 가운데 랍비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부자들은 서로 자기의 재산을 견주고 있었다. 그러자 랍비는 {내가 제일 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부를 여러분에게 지금 보일 수는 없소이다}했다.
해적이 배를 습격했다. 부자들은 저들의 재산을 모두 잃었다. 해적이 사라진 뒤 배는 간신히 어느 항구에 닿았다. 랍비는 항구 사람들에게 교양 높음을 이내 인정받아 학교에서 학생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랍비는 배로 함께 여행했던 이전의 부자들과 만났는데, 모두 영락하여 처량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확실히 선생이 옳았어요. 교육을 가진 자는 온갖 것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군요}했다.
이래서 지식은 늘 빼앗기지 않고 가지고 다닐 수 있기 때문에 교육이 제일 귀중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생겼다.

회개란?
예수께서 공생애 메시야의 사역을 시작했을 때 제일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회개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어떤 분은 "회개"란 정권 교체이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다스려 왔습니다. 내가 내 왕국의 왕이었습니다만 내가 다스리는 나는 밤낮 짜증이 나고 실망과 한숨과 허무와 불안 속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나는 정권을 교체하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왕국의 왕으로 모시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회개입니다. 내가 나를 지배하던 삶에서 내가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은총바탕
믿음은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지적으로 동의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죽으신 십자가 앞에 내 생애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은 나의 죽음입니다. 내가 죽을 죽음을 그분께서 대신 죽어 주셨습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나의 의를 의해서 다시 사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때 내 모든 죄가 내 삶 속에서 완전히 씻기는 용서와 사죄의 은총을 경험 합니다.

겸손이 낳은 상대성 이론
아인슈타인은 겸손한 사람이었다. 상대성 이론 발견으로 크게 성공한 다음에도 대자연 앞에서 자신은 미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어느날 제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선생님, 선생님의 그 많은 학문, 전문적인 지식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라고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실험 기구에 있던 물에 손가락을 적신 뒤 한 방울의 물을 똑 떨어 뜨리며 말했다. {나의 학문은 바다에 비하여 이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죄수
두 사람의 젊은이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 청년은 그 곳에서 시를 쓰고 창문을 내다 보며 소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름을 보면 구름과 같이 자유로울 날이 오겠지, 바람이 불면 나도 바람과 같이 자유로운 날이 오겠지, 비가 오면 나도 마음껏 흘러 내릴 수 있겠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청년은 벽만을 바라보며 실망과 절망으로 가득했습니다. "나는 갇혔다. 나는 쓸모가 없게 되어 버렸다"고 푸념만을 늘어 놓으며 나날을 보냈습니다. 훗날 두 사람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희망적인 청년은 작가가 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절망적인 청년은 정신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예수님 안에서 기쁨과 소망과 감사가 있어야 겠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
여객선 아일랜드 여왕호가 침몰했을 때 승객 중 구세군 사관 백 삼십명 가운데 백명이 사망했는데 죽은 시체에는 구명대를 입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구명대를 양보하고 대신 죽어 준 것이다. 제임스 칼비트가 야만인 지역에 선교사로 가려고 양국 상선에 승선 했는데 선장이 거기 가면 죽으려 가는 길이라 했더니 "나는 이미 여기 오기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했다. 노예가 아니면 갈 수 없었던 토마스 섬에 노예 신분을 자청해서 간 선교사도 있었다. 격리된 나환자 수용소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사신이 되어 갔던 다미엔이 나환자들에게 "나의 형제 나의자매"라고 부를때는 거리감이 있더니 나환자가 되어 "우리 나환자들"이라고 부를때 그는 우리 죄와 죽음의 위치에 대신 서 주신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은 사람들이다(갈2:20)

우리의 삶의 표준
삶의 표준을 어디에 정해 놓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과 모든 삶이 결정되어 진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의 만족과 쾌락과 부에 표준을 두고 내세도 하나님도 없는 삶을 사느냐? 이성과 합리성에 삶의 표준을 두고 살아가느냐? 양심과 도덕적 표준을 따라서 살아가느냐? 사회 분위기에 삶의 표준을 정해서 살아가느냐? 물질과 육체를 경멸하고 자학하면서 금욕에다 표준을 두고 살아가느냐? 성경을 표준으로 살아가느냐? 어떤 사람은 성경을 표준으로 삼되 율법적인 표준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성경을 표준으로 삼되 기독교적 복음적 표준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절망은 죽음을 낳고
러시아 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철도국에서 일하는 한 직원이 냉장고 화차 속에 들어간 후에 실수로 문이 밖에서 잠겨져 버렸습니다. 아무리 빠져 나가려고 해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소리를 질러도 힘껏 두드려 보아도 냉장고 화차의 단단한 시설로 인하여 문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듣질 못했습니다. 혹시 누가 와서 우연히 문을 열어서 구원 받는 길 한 가지만이 희망이었고 얼어죽게되면 죽는 수 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모든 희망을 포기하다시피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그의 몸이 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의 상태를 화차의 벽에다 기록해 나갔습니다.
"점점 몸이 차가워 진다… 그래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나는 점차로 몸이 얼어옴을 느낀다… 나는 이제 몽롱해진다… 아마도 이것이 나의 마지막일는지도 모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후 다른 직원들이 그 냉장고 화차의 문을 열었을 때에 이미 그는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단히 놀라운 사실은 그 냉장고 화차는 오래전부터 고장이 나 있었던 것이요. 공기도 충분하고 실내 온도가 화씨 오십육도(섭씨 십삼도)의 쌀쌀한 온도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실존적 의미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나신 것이 역사적 절대 사실이라면 ①그가 하나님인 것이 절대 사실이고 ②그이 피가 우리 죄를 대속 하시고 의롭다 함을 얻게 된 것이 절대 사실이고 ③그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 되는 일과 영생 얻는다는 사실을 절대 보장한 것이며 ④새 생명, 풍성한 생명을 주신다는 절대 보장이고 ⑤나를 보호하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넘치도록 주시고(빌4:19) ⑥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⑦성령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평안과 기쁨을 주시며 ⑧몸의 부활과 재림의 약속의 절대 보장이시고 그의 말씀은 절대 진리임을 절대 보장하신 것이다.

나는 무엇을 심고 있는가?
가라지를 심고 보리를 기대하지 말라. 악습을 심으며 어떤 날 우연히 고매한 품성의 인물이 되리라고 기대하지 말라. 사기와 증오를 심으며 우정과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 뱀의 알을 품고 병아리가 깨일 것을 기대하지 말라. 중상과 모략을 심고 선의로 갚아지기를 기대하지 말라. 남의 인격을 멸시하는 사람아 그대가 존경받을 것을 기대한다면 탱자를 심고 감귤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게으른 사람이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심지 않은 밭에서 곡식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심은 대로 거두리라. 이것은 인과의 자연 철칙이요. 하나님의 법칙이다. 지식을 뇌 속에 입력한 만큼 유식할 것이며 선수는 연습한 만큼 챔피언이 될 것이다. 육으로 심은 것은 육이요. 영으로 심은 것은 영이니 내 인생의 밭에 영원한 하나님을 심어 양질의 영원한 생명을 거두자.

두려워할 것은 죄
신앙을 부인하도록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로마 황제가 크리소스톰을 체포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가 이 크리소스톰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신하들과 의논했다. "이 놈을 깜깜한 지하실에 가둘까? " 신하 중에 하나가 말하기를 "아닙니다. 그놈은 자기가 믿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하실에 같히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조용한 장소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놈을 사형을 시킬까?" 역시 신하가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그 놈은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 놈은 말하기를 죽는 순간에 주님 앞에 간다고 했습니다." 왕이 묻기를 "자,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그 놈에게 해야 할까?" 신하가 대답하기를 "죄를 짓게 하십시오. 그는 죄 이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죄가 가장 두려운 것이다.

불로소득
어느 학교 교실에서 시험이 치러지고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남의 시험지를 열심히 보고 쓰고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그 학생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야지 불로소득으로 살아가면 되겠나" 이 학생은 이 말을 새로운 삶의 충격으로 받아들여 그때부터 열심히 살아가기 시작해 자신의 삶의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지금 큰 병원의 구매 과장이 되었고 얼마 전에는 담임 선생님을 초청해 대접을 융숭히 했습니다. 그때 자기 마음과 지금 자기 마음을 말하며 "자신을 절대로 불로소득으로 살아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혹시 예수님의 사랑을 불로소득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진실한 삶 진실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들의 삶은 여행길.
우리들의 삶은 여행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이 바로 인생의 긴 여행의 과정이라면 기차역 구내의 안내 표지판 같은 것으로 확실하게 표시가 된 것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다음에 내릴 역은 어디에 어디쯤에서 인생의 길이 바꾸어진다고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인생을 정확하게 안내하는 안내판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갈 때 방황하지 않고 확실한 삶의 여행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위 바위 보
어린 시절에 누구든지 가위 바위 보를 많이 해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든지 바위가 가위를 이기고 가위는 보(보는 종이, 보자기의 뜻)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약한 것만 같은 보가 제일 강한 바위를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범한 어린이들의 놀이에 나타나 있는 살아 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부드러움이 필요하며 먼저 찾아가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독특성
세계의 모든 종교 중에 기독교의 독특성을 말할 때 우리는 이런 것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그 종교의 교주의 가르침이 제일 중요하나 기독교만이 예수의 가르침보다도 예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를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은 예수의 진리를 믿으므로 영생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므로 영생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보다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더 중요합니다. 유교도 공자보다는 공자의 가르침이 더 중요합니다. 이슬람교도 마호메트의 가르침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순히 가르침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입니다.

좁을 길
그 길은 좁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걸을 수 있는 넓이는 됩니다. 그대가 예수와 함께 걸을 수 있고 주님은 그대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그대가 오히려 넓은 길에서 주님을 잃을 것입니다. 무리들이 양 옆에서 밀어붙이니 오직 좁은 길에서만 마음으로 그분을 의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대의 눈이 그분의 눈과 마주칠 수 있는 것은 좁을 길에서입니다. 다른 조언자가 필요치 않습니다. 도움은 오직 그분에게만 오는 것입니다. 오! 축복 받은 좁은 길이여, 거기에는 두 사람의 여유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와 함께 걸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분이 그대와 함께 걷는 것입니다.

주(主) -퀴리오스-
신약 성경에 600여회 불려지고 기록된 이 "주"라는 칭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상처를 자기 손으로 만져 보고야 믿겠다는 도마에게 상흔(傷痕)을 내 보이며 만져 보고 믿으라 할 때 도마의 입에서 터져 나온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한 이 신앙고백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고 마음으로 부활을 또한 네입으로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고 마음으로 부활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롬10:9) 지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인 것을 시인하고 고백하며 의지적으로 그 예수가 나의 주 인 것을 수락하여 그가 나의 전 생애, 전 소유, 전 행위, 나의 의지와 시간의 절대적 주권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주여, 주여 헛되이 염불하듯 하는 부름이 아니라 마음의 왕좌에 모신 주, 이 주라는 말은 한 글자로 요약한 신앙고백인 것이다.

예수 없는 절망
1. 내게 두 가지 절망이 있다. 하나는 무슨 일들이 마음대로 안되는 절망이고, 하나는 마음대로 된 이후에 오는 절망이다(버나드 쇼)
2. 인간 속에는 본질적인 모순이 있는 것 같다. 풍요 지수와 지식 지수와, 예술 지수와 쾌락 지수가 높을 수록 불안 지수, 절망 지수, 자살 지수, 허무 지수, 광기 지수, 불쾌지수가 더 높아진다. 2퍼센트만 일하고 98퍼센트는 놀고먹는 오토메이션 시대가 오면 권태 지옥이 된다는 말이 옳을 것 같다.
풍성한 생명(요10:10). 배에서 생수의 강이 터지는 생명(요7:38). 만나도 만나도 영원한 첫 사랑 같은 새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십자가 사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었던 우주 최대의 러브 스토리이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예수는 사랑의 화신이며 성경은 사랑의 편지이고 성령은 사랑의 영이시다. 또 우리는 그 사랑의 삼일성(三一性)속에 빨려 들어온 사람이다.
성도의 기도란 사랑의 밀어(密語). 전도는 사랑의 전달, 사랑의 중매. 찬송은 사랑의 노래, 그리고 십자가는 사랑의 드라마의 절정, 사랑의 고백, 사랑의 심장 파열 시건 이다.
십자가는 예수가 하나님과 나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다가 죽은 곳 예수가 한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또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사랑의 심장이 터진 곳이 십자가이다.

절대 은총의 손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갈4:9)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나니(요15:16).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였음이라(요일4:19)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내가 예수를 택한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나를 택했고 내가 그를 안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알고 그가 먼저 사랑하고 그가 믿음을 주었다. 아기가 아버지의 손을 붙잡은 게 아니라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원숭이는 새끼가 어미 몸을 네 발로 붙잡고 다니지만 고양이는 어미가 새끼를 물고 다닌다. 우리 구원의 주체와 확실성의 근거는 고양이처럼 주님의 은총의 절대성에 있다.

엑스트라
우리는 무관심한 사람들. 표정 없는 사람들이 많은 이 시대에서 표정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삶 속에서 희로애락을 재대로 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욱 인간적입니다. 우리는 영화 속에 주인공에게만 박수를 보내고 주인공에게만 시선을 주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엑스트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구경하듯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지나쳐보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가며 가끔씩 자신이 엑스트라라는 생각이 들 때면 우주 착잡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에 주인공입니다. 우리들은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성경 배우는 태도
바리새 교인과 서기관은 성경 전문가이다. 성경 해석을 위해 태어나서 성경 실천을 위해 살다 죽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성경의 주인, 성경의 성육신이신 예수에게 그렇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무지할 수가 없었다. 엠마오 도상으로 가는 두 제자는 부활한 예수에게 예수 부활 사건을 모르느냐고 따지며 예수에 대해 설교하여 예수로 꽉 차 있고, 예수와 함께 가면서도 예수를 모르고 몸은 예루살렘과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멀리 떠나고 있었다. 예수에게 눈이 어두웠다. 한편, 삭개오는 비(非)예수의 외모를 가졌으나 재산의 반이라도 나눠주고 토색한 것은 4배나 갚을 실천과 순종의 마음으로 예수를 보았을 때 예수가 그의 구주로 보였다.
예수와 예수의 말씀인 성경은 연구 대상이 아니다. 예수는 예수 따라 실천하며 배울 분이며 성경은 알아지는 책이다.

믿음의 조상들의 반열(班列)
명문 가정에서 조상들의 초상화와 족보를 자랑스럽게 소장하듯이 크리스찬들은 히브리 11장에 기라성처럼 수록된 믿음의 조상들을 생각하고 자신의 신앙의 계보와 순도를 가다듬는다.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103:1-2)"이 말씀은 내 개인에게 베푸신 은혜뿐 아니라 믿음의 조상들에게 베푸신 모든 은택도 내게 베푸신 것처럼 잊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삭을 격려하실 때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아루는 하나님인 것을 상기 시켰고(창26:3-4) 야곱에게 나타나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인 것을 상기 시켰고(창28:3) 광야를 헤메는 모세에게 나타나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임을 상기 시켰고(출3:4-6) 여호수아에게는 모세의 하나님임을 상기 시켰다(수1:2-5).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와 다윗의 하나님,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진짜 진짜 사랑하는 아버지이다.

뱀의 독보다 더한
독사들은 누군가를 물 때 독침과 같은 역할을 하는 송곳니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침"을 통해서 적의 몸에 치명적인 물질을 보내어 즉심한 통증을 느끼게 합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은 즉시 의사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뱀만이 그들의 입에서 독을 내뽑는 피조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조심하지 않고 하는 말이 더 위험스런 독이 됩니다. 사람들은 뱀의 독보다도 더 해로운 거짓말을 하고, 소문을 퍼뜨리며 험담을 합니다. 하나님은 뱀보다도 표독스런 혀를 가진 우리에 대하여 더 염려하고 계십니다.

성경 식욕
식욕은 건강의 시금석이라고 한다. 식욕이 떨어지면 건강의 적신호이다. 식욕이 왕성하면 젊고 건강한 징조이다. 크리스천에게는 성경이 영의 양식이다. 아기 때는 젖을 먹고 크면 밥을 먹는데(고전3:2). 아기 신자는 스스로 성경에서 밥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교사들이 젖을 먹여 준다. 신자가 성경을 먹고 살 정도가 되면 다 큰 징조이다. 성경에서 멀어지면 사단에게 가깝고 성경에 가까워질수록 하나님께 가깝다. 성경에 손 때가 묻을 수록 마음이 깨끗하고 그의 성경이 깨끗할 수록 마음이 더럽다는 말도 있다. 배고픈 사람처럼 목마른 사람처럼 성경 식욕과 성경 갈증이 클수록 영이 건강한 증거이다.

겸손의 덕목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의 제일 되는 덕목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겸손"이라 대답했다. 그러면 두 번째로 큰 덕은 무엇이냐는 물음에도 역시 "겸손"이라고 했다 다시 세 번째로 큰 덕은 무엇이냐는 질문에도 한결같이 "겸손"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만인들에게 성자라고 한창 존경을 받을 때에 여지없이 자신의 허물과 죄상을 고백한 <참회록>을 썼다. 겸손에 반대는 교만이다. 교만은 악덕 가운데 제일 근본이 된다. 교만은 악덕의 어미이다. 크리스찬의 겸손은 비굴하거나 굽실거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능력과 자신감에서 나온다. 사람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기보다는 스스로 높임으로써 상대적으로 남을 업신여기기 쉽다. 그래서 이웃간에 갈등, 미움, 분쟁을 낳는다. 예수님은 가장 크고 높으신 분이면서 가장 낮아지셨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시고 죽기까지 겸손하셨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부모를 공경하라
이 말을 들으면 상당히 고리타분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옳은 것이다"라고 분명히 명령하고 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에게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부모를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존경하며 자랑한다는 것이다.
요즈음 십대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들의 사진을 오려서 자기 방에 붙이기도 하고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 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 네 부모님을 그렇게 따르고 순종하고 좋아하는가? 부모님이야말로 인간 자신에게 가장 존경받아야만 하는 위인이며 어른이며 스타이다. 다시 음미해 보자 "네 부모를 공경하라"(엡6:1-2).

은혜
은혜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은혜는 은혜로 받는 자에게만 은혜가 되는 것이다. 철없는 소리 같기도 하고 장난 비슷한 말로 "우리 어머니 날 곱게 낳아서 이 모양 이 꼴 되라고 하셨나요?"하는 자기 한탄 조의 표현을 듣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말이며 은혜를 전혀 생각지 못하는 말이다. 인생이 태어나는데 있어서 선택권을 가진 사람이 누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아무렇게나 태어나는 인생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삶은 가장 귀한 하나님의 생명의 은총 속에서 주어진 고귀한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곧 감격이며 감동이다. 이 좋은 계절 모두에게 은혜의 감사가 있고 충만한 기쁨이 있기를…

가난한 심령 예수 천국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팔복 중 제 1복이다. 산상수훈을 천국 헌장이라고도 하므로 이 말씀은 천국 헌장 제1장 1조인 셈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지배를 의미한다. 윤리 문제이기보다는 영의 문제이다. 영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 하나님과 통하는 지성소 같은 곳인데 그 곳이 비어 있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지배하신다. 예수님은 천국의 시금석인데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영 속에 그를 받아들일 빈 자리가 없었다. 잘못 해석된 율법과, 자아의 교만으로 가득차 있었다. 헬라인들이 플라톤의 철학으로 가득 차 있었듯이 현대인은 과학과 온갖 사상과 우상 같은 자아의 욕심으로 교만해 있다. 영의 포만증에 걸린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가난한 것과 헐벗은 것을 모르는 영적 교만을 경계해야 한다. 세리 삭개오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로 입맞춘 죄 많은 여인 같은 가난한 심령을 회복하자.

사랑의 약탈자
사람 같은 하나님 하나님 같은 사람, 예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수를 굶주린 사람에게 생명의 떡을, 고달픈 사람에게 안식을, 불안한 사람에게 평안을,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병든 사람에게 치료를,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싸움이 있는 곳에 화해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죽음이 있는 곳에 부활을 심어 준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주장했던 그에게 인류의 존경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헌신을 다해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모든 것의 모든 것입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약탈자 생명의 약탈자라는 평도 받는다.

십자가의 3시제
신앙은 3가지 시제를 가지고 있다고 에밀 브루너는 말했다. 즉 신앙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다. 신앙의 과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곧 나의 죽음이며 나의 부활이라는 과거의 확실한 극점을 회고하는 것이다. 신앙의 영원한 기초는 거기에서 출발한다. 우리들 신앙의 절대 보장이 곧 십자가 사건이다. 우리는 2천년전 골고다 산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시간과 공간으로 존재하는 사건이다. 내가 십자가의 예수를 믿을 때 그것의 성령의 시제라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소망 중에 영원한 미래를 믿고 바라본다. 예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에게 신앙의 과거, 현재, 미래를 허락하신 거룩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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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절대성
1.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이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사49:15-16)"
2.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사43:1)"
3.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8:32-39)"

부자 교만과 거지 교만
헬라의 거지 철인(哲人) 디오케네스는 어느 날 귀족 부자요 철학자인 플라톤의 궁전 같은 집을 방문했다. 그 집의 응접실에 깐 호화스런 양탄자 위를 걸어가면서 디오게네스는 마치 생물을 밟아 죽이는 제스처로 짓이기며 플라톤의 교만을 짓밟았다.
다음에는 플라톤이 디오게네스의 가난을 과시하며 사는 비가 새는 집을 방문했을 때 누더기 양탄자 위를 뱀의 머리를 밟아 죽이는 모션으로 그 방을 거닐면서 디오게네스의 성탐(聖貪)과잉 의식의 교만을 짓밟아 주었다.
성자는 자신이 성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성자가 아니다. 성지마다 참회록을 쓰고, 천주 주님 앞에 설 때 잘한 것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해 주신 은총을 만 입이 있어도 못다 찬송하는 상하고 깨어진 마음과 감루(感淚)속에 대한다. 우리는 모두 설익은 플라톤 바리새든가 디어게네스 바리새가 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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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여러분의 두 손과 무릎의 희생덕분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장마와 폭염의 고통에도 여러분의 헌신에 최선을 다하지만 부족함은 여전합니다.

고국의 소식은 가끔 지나서 듣고 있습니다. 고국의 폭염은 이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일40도에 체감온도는 더 높게 느끼면서 사막한가운데 떨어뜨려놓은 주님의 계획에 묵묵히 그리고 감사하며 이기고 있습니다. 그 힘과 능력은 주님이시지만  후원의 손길인 여러분이 있기에 더욱 힘이 됩니다.

이곳은 이스라엘민족의 대부분 40년 광야생활이 요르단 땅이기에 체험하며 훈련과정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70년간의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통과도로 요르단,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의 고난의 길목입니다 구약의 역사와 신약이 공존한 땅입니다.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 이 땅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사명 자들과 함께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동역자 들이기에 주님의 은혜가 풍성할 것을 믿습니다. 모두들 영과 육이 강건하시길 두 손 모읍니다.  요르단광야에서 (죤.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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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어원과 역사 (islamic history)

 

<어원>

 

이슬람의 어원은 아랍어 어근싸리마인데, 이 말은 특히 평화, 청결, 순종, 복종을 뜻한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이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법에 복종을 뜻한다. 이 말의 원래 의미와 종교적 의미 사이의 관계는 깊고 명백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법에 복종하므로써만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고 청결을 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 알라라는 말은 간단하나 지극히 단호하게, 온 세계의 창조자, 주중의 주, 왕 중의 왕이신 유일무이하고 영원한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슬람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유일한 죄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일상예배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을 다음에 들어둔다: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역사>

 

이슬람은 서기 610년 무함맏(마호멧)40세에 최초로 알라(유일신,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이래 약 23년간에 걸쳐 계시 받은 꾸란(코란)이 그 경전이다.

 

초기 이슬람은 무함맏이 그의 출생지이며 최초 계시를 받은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그와 몇몇 소수의 교우들에 의해 포교되기 시작했으나 다신교적 분의기의 지역 부족들이 그들의 정치, 종교, 경제적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박해한다.

 

이 박해를 피해 서기 622년 메디나라는 도시로 근거지를 옮기는데 이를 "히즈라" (성천,聖遷)이라고 합니다. 이를 기준으로 이슬람력 (히즈라력)이 생겼습니다.히즈라 이후 메디나에서 교세를 확장한 이슬람은 다시 메카로 진격하고 사우디 반도를 통일한다.

 

무함맏은 그의 나이 63세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계승한 칼리프 (계승자) 시대가 시작된다. 칼리프는 실제로 신정일치의 이슬람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로 만장일치에 의해 선출되며 세습되지 않았다. 선출에 의한 칼리프가 나라를 다스린 시기를 4대 칼리프 시대라 한다. 이후 칼리프의 구가는 동서 칼리프로 나누어지며 세습에 의한 왕조의 형태로 변질된다.

 

이 시기에 이슬람은 북으로 시리아를, 서로는 마그립(지금의 모로코)까지 진출하며 다시 바다를 건너 스페인으로 영역을 넓힙니다. 동으로는 이라크 지역과 페르시아, 다시 중앙 아시아를 거쳐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이슬람의 급격한 확장에 자극받은 중세 유럽은 10961차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이후 1365년까지 아홉 차례, 25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며 이슬람에 일격을 가한다.

 

이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이슬람은 그 확장세가 뚜렷이 둔화됨은 물론 과학과 철학, 동서 교역 등등 찬란히 발달했던 그들의 문화도 사그라진다. 물론 이슬람 문명은 암흑기 중세 유럽에 인본적 사상과 과학문명을 전하여 르네상스를 촉발 시키고 유럽 시민 문화와 산업 발달의 단초를 제공했다.

 

14세기 이후 이슬람 제국은 소아시아(터키) 지역에서 일어난 오스만 제국으로 그 중심이 옮겨간다.

오스만 제국은 비잔틴을 정복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여 16세기에는 파키스탄과 이집트까지 확대되어 실질적인 이슬람 제국을 형성한다. 이집트를 근거로 했던 압바스 왕조로부터 칼리프의 칭호를 이양받은 오스만은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역과 흑해 연안까지 점령하고 지중해 해상권까지도 획득한다.

 

오스만 제국은 17세기를 지나 18세기에 이르러 쇠퇴의 길에 접어드는데 유럽 국가의 남진 정책과 프랑스의 이집트 점령, 아랍 각 지역의 반 오스만 운동과 이슬람 부흥 운동, 이란 페르시아의 새로운 왕조 성립등이 그 이유였다.

 

19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점령과 식민 정책 이후 오스만은 현저히 쇠퇴 하였으며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고 오스만은 패전국이 되어 영국과 프랑스의 아랍 지역에 대한 분할 통치가 실시된다.

 

20세기 이슬람은 2차 대전 후 각 아랍국의 독립과 이스라엘의 건국 등으로 아랍.이슬람 세력과 이스라엘.서구의 세력 대결 구도로 편성되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영토 분쟁, 석유 개발에 따른 미국과 유럽, 옛소련의 대결로 세계의 전장이 되었다.

 

이스라엘을 앞세운 미국과 아랍국 간의 수차에 걸친 중동 전쟁, 그로 인한 석유 무기화, 1,2차 석유 파동 등 이슬람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전쟁 지역이 되고 만다. 결국 석유를 둘러싼 아랍 이슬람 지역에서의 우위 확보를 위해 미국의 대 아랍. 이슬람 정책이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불러 오면서 미국에 대한 저항의 결과가 과격 테러로 이어지며 걸프 전쟁, 911 사건, 이라크 침공 등 분쟁이 계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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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해의 원인.

 

1)정치적 원인.

 

이스라엘 남북왕조 멸망 후 세계 각지로 계속하여 흩어져 이주해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로마에도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 후 1세기경의 로마정부 기록을 보면 로마시내에 12개정도의 유대교회당들이 있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로마통치 하의 전 지역에서 매우 뜨거운 감자였다. 유대인들은 유일신앙을 고수하여 로마의 종교정책에 정면으로 항거했다. 그들은 특히 자신들의 예루살렘 성전을 시온성전이라고 불렀고 자신들의 종교적 사상을 시오니즘이라고 주장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거나 성전 보수에 사용될 헌금을 보냈는데 그 헌금 액수가 과다 하여 때로는 한 지방의 경제사정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때문에 로마통치 하에 있는 각 지방의 통치자들은 유대인들을 미워했고 때때로 그와같은 사정을 로마정부에 보고하여 어떤 특별조치를 내려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로마정부로서는 유대인들을 함부로 홀대할 수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탁월한 상술을 통하여 각 지방의 경제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경제가 악화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황제숭배라던가 만신전 봉례행사 같은 종교적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행사에 소용되는 막대한 비용들을 헌금하는 것은 거절하지 않았으며 각종 빈민구제와 병자 치료 및 장례에 부조하는 등등의 사회적 봉사를 많이 했다. 때문에 로마정부로서는 그들을 탄압하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로마정부는 그들이 특별한 반란적 행위를 하지 않는 한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유대인들의 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기독교도 유대교의 그늘 아래에서 어느정도의 편의가 제공되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간 초창기에 로마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같은 종교의 분파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구분이 이루어지고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심지어는 폭력이 수반된 충돌이 계속되자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를 탄압하게 되었다. 특히 유대 본토의 마카비우스가<家>에 의한 폭동에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이 독립자금을 보내거나 반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됨에 따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2)종교적 원인.

 

로마제국 정부는 로마의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종교를 이용했다. 로마정부는 식민통치 하에 있는 여러 지방에서 유입되어지는 민족들의 종교들을 모두 인정하고 연합시키는 정책을 펴 나갔다. 로마정부가 종교 다원화 정책을 세운 것은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로마의 종교적 자존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로마는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했다. 로마는 그 어 떤 신도 배타하지 않고 섬기는 다신론적 종교 국가였다. 원래 로마는 전통적으로<쥬피터><마르스><퀴리노스><다이아나><넵튠><쥬노><플라멘다알리스>등등의 신을 최고의 신으로 받들어 섬겼다. 로마정부는 정부 산하에 승원이라는 종교기관을 신설하고 승려제도를 만들어 종교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로마가 세계정복에 나섰을 때 그들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일정한 소수의 신들만을 구별하여 섬겼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한 반면에 자신들은 신들을 구별하여 섬기지 않고 모든 신들을 다 함께 섬겼기 때문에 그 많은 신들이 자신들을 승리하게 도와주었다고 믿었다. 따라서 로마정부는 정복지 주민들이 로마에 이주해 살면서 들여온 그들의 신들을 배타하지 않고 모두 수용하였다. 로마정부는 모든 신들이 결국은 하나의 최고적 신들 밑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들이라는 논리를 세웠다. 그리하여 만신 전을 만들어 모든 신들을 그곳에 모신 후 사람들이 자유롭게 신들을 선택하여 섬기게 했다. 그러나 이때에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러한 로마정부의 종교정책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하 나님만을 섬기었으며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았고 신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로마정부 당국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다 함께 불순종하는 무리로 간주했다. 그러나 로마정부는 아직은 그것 때문에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앞장에서 이미 논증한바 있듯이 아직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분파로 인식하 고있 었던 반면에 유대교를 함부로 다스리는 것보다는 그들의 종교를 인정해 주는 것이 오히려 로마의 이익이 된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로마정부가 기독교를 탄압하게 된 것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완전히 구분되어진 후에 발생 한기독교에 대한 부도덕한 소문들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 유대인과 유대교 유대인으로 구분되어진 후에 기독교에 대한 아름답지 못한 소문이 로마에 퍼지기 시작했다.

 

로마의 탄압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로마정부의 눈길을 피하여 주로 새벽이나 깊은 밤에 지하 동굴이나 카타콤<Catacombs-지하묘지>등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그것이 새로운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로마정부는 기독교의 비밀집회를 정치적 차원에서 우려했다. 유대인들이 비밀지하결사대를 만들어 폭동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의심한 것이다.

 

3)사회적 원인.

 

로마인들은 로마제국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로마는 곧 자신이었으며 종교였다. 그들의 로마사랑은 애국차원을 넘어서 신앙이었다. 그러한 로마인들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고집하며 군대복무를 거부하고 때로는 로마제국과 황제까지도 거부하는 기독교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로마인들은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기독교인들의 불충성에 대한 신의 노여움이라고 믿었다.

 

한편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증오한 이유 중에는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사생활도 포함되었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향락과 사치를 추구했으며 노예제도를 실시했고 특히 노예들을 검투사로 양성하여 검투사 시합을 즐겼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노예제도에 반대했고 특히 노예들이 검투시합을 통하여 속절없이 죽어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기독교인들은 또한 성적으로 부도덕한 로마인들의 삶을 거부했으며 절대적 가부장제도 하에서 실시되는 각종 부도덕한 악행<예를 들면 여자아이를 낳았을 때 가장이 그를 싫어하여 내다 버리는 관습이나 아내를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관습>들을 거부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차원 높은 윤리적, 도덕적 삶은 로마인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렸고 그것이 기독교를 증오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4)황제들의 음모.

 

로마정부가 처음에 종교 다원화정책을 세운 것은 로마 거주민들이 종교적인 문제로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인 책략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이 나중에는 종교들을 하나로 묶는 정책으로 바뀌었다. 로마정부는 만신전의 신들 위에 로마황제를 좌정시켰다. 즉 로마황제가 신들 중의 신으로서 최고의 신이며 따라서 모든 신들은 로마황제의 통치 하에 있는 하급신이라는 종교체계를 세운 것이다. 로마가 이러한 종교적 체계를 세운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로 전해진다. 하나는 고대 애굽의 바로 왕조가 시행했던 정치체제를 모방한 것으로서 황제를 신격화 하여 신정치 체제의 제국을 건설하려한 것이고, 두 번째는 모든 신들 위에 황제를 좌정시킴으로서 로마제국의 종교적인 통합을 이루려 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정부의 종교정책은 로마집권자들의 정치적 계략에서 산출된 것이었다. 당시의 로마는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를 옹호하는 정치세력과 원로원 위주의 공화정치를 옹호하는 정치세력간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원로원 위주의 공화정치 체제를 원하는 정치세력들은 황제의 군주정치가 독재적일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로마제국을 붕괴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황제에 의한 군주 정치체제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이에 반하여 사사건건 황제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원로원들에 대한 불만이 있는 황제와 황제의 측근들은 원로원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또는 아예 원로원 자체를 붕괴시키고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 체제를 세우려고 했다. 황제와 황제의 측근들은 이러한 계략 하에서 황제의 신격화를 주장했고 드디어는 황제의 신적 지위를 만신전 위에 둠으로서 로마 전역에 대한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원로원은 처음에 황제의 신격화를 단호하게 반대했으나 황제의 강압적인 권위에 눌려 그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 대신에 황제가 신으로 추대되는 것은 황제 생존시에는 불가하고 황제가 죽은 후 원로원의 결의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그것을 받아들여 원로원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황제들은 계속하여 원로원을 몰아 부치어서 황제들이 생존시에 신으로 추대하게 하였고 황제들의 무력적 권위 앞에 원로원은 어쩔 수없이 굴복했다. 로마시내 전역은 물론이고 로마통치 하의 모든 지역에는 수많은 황제<신>들의 동상들이 건립되었으며 사람들은 그 앞에서 분향하고 경배해야 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황제숭배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차라리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결코 황제를 신으로 받들어 섬기거나 경배하지 않았다. 때문에 황제는 그러한 기독교도들에 대하여 크게 분노하였고 그것이 기독교를 탄압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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