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관련 예화모음]
♠ 주여 감사합니다.
어느 중년 성도가 대학 병원의 한 수술실에서 혀의 암 때문에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마취주사를 손에든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며 "마지막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라고 했다. 글로 쓸 수는 있겠지만 혀를 사용하는 언어는 이것이 최후이다. 간호원 조수, 견습 의사들… 둘러선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가는 심각했고, 잠시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저마다 만일 나라면, 만일 내게 한마디 언어만 남아 있다면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생각해 본다.
드디어 입이 움직이고 두 줄기 눈물이 흐르더니 "주 예수여 감사합니다"라고 세번 되풀이 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끼리만 아는 비밀인 것이다.
♠ 신앙적 사고방식
사람은 늘 된다고 생각하고 되려고 노력하면 노력하는 대로 되는 경우가 많다 "이이고 죽겠다", "다 틀렸다", "나는 죽었다"하는 식의 부정적 사고 방식과 언어 습성부터 고쳐야 우리 민족의 의식 혁명이 이루어질 것 같다. 민수기 13장의 열 두 정탐 가운데 열 명은 자신들은 가나안 족속의 눈에 매뚜기로 보이고 자신들 눈에도 자신들이 거인 앞의 메뚜기처럼 보이더라고 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했다. 전자는 불신앙적 사고를 했고, 후자는 신앙적 사고를 했다. 전 이스라엘군은 블레셋의 골리앗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떨었으나 소년 다윗은 골리앗을 신앙의 눈으로 볼 때 그의 밥이었다. 신앙적 시야, 신앙적 사고의 습성을 길러야 겠다.
♠ 전심(全心)의 신앙 생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너희가 점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히스기야 왕은 병들어 꼭 죽게 됐을 때 평소에도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던 그는 전심으로 기도하여 15년을 더 사는 축복을 받았다(사38장) 솔로몬은 전심으로 지혜를 구했다. 성경의 간구들은 전심으로 생명을 건다. 야곱의 기도, 모세의 기도, 엘리야의 기도, 에스더의 기도, 사도행전의 인물들은 전심 전력 지성을 다했다. 누가복음 18장의 과부의 기도도 한 맺힌 기도였다. 철저히 믿자, 산 순교자가 되자.
내 가슴에 타는 사랑의 불
내 가슴 한복판에 십자가를 세우고 속죄의 불타는 사랑을 담자. 불로 하나님을 불같이 사랑하고 이불로 사람을 불같이 사랑하자. 내 가슴에 타오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불길로 이 더러워진 거리 구석 구석을 태우리라
이것이 나의 종교이다. 나의 종교는 교리가 아니다. 예배가 아니다. 가슴에 타오르는 예수의 사랑의 불길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지 교리나 의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랑없는 기독교는 울리는 꽹과리이며, 휴지같이 쓰레기통에 버릴 것들이다.(고전13장)
크리스찬과 시기심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는데 남이 잘되고 잘하는 것을 보고 불행해서 못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는 것 같다. 시기심은 교만과 함께 악마의 죄, 가인의 죄, 예수님을 죽인 죄, 인간의 가장 원색적이고 보편적인 죄이다. 남을 중상, 험담, 비난하는 행동처럼 인격의 야비성과 살인성을 드러내는 행동은 없다. 비난 자체가 비난하는 대상자의 어떤 행동보다 자신에게 남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 대하여 악덕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남의 처지와 상황을 다 알지 못하고, 설혹 안다 하여도 내가 그것을 정죄할 만큼 깨끗하지 못하다.
비난할 할 때마다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평가 절상과 남에 대한 평가 절하가 다른 사람을 나쁜 놈이라 할 때 내가 더 나쁜 놈이 된 것이며, 개자식이라 할 때 내가 먼저 개자식의 자격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남이 잘되기를 진실로 바라고 사랑할 때 비판하라.
재산
어느 선상(船上)에서의 이야기다. 선객은 모두 부자인데 그 가운데 랍비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부자들은 서로 자기의 재산을 견주고 있었다. 그러자 랍비는 {내가 제일 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부를 여러분에게 지금 보일 수는 없소이다}했다.
해적이 배를 습격했다. 부자들은 저들의 재산을 모두 잃었다. 해적이 사라진 뒤 배는 간신히 어느 항구에 닿았다. 랍비는 항구 사람들에게 교양 높음을 이내 인정받아 학교에서 학생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랍비는 배로 함께 여행했던 이전의 부자들과 만났는데, 모두 영락하여 처량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확실히 선생이 옳았어요. 교육을 가진 자는 온갖 것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군요}했다.
이래서 지식은 늘 빼앗기지 않고 가지고 다닐 수 있기 때문에 교육이 제일 귀중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생겼다.
회개란?
예수께서 공생애 메시야의 사역을 시작했을 때 제일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회개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어떤 분은 "회개"란 정권 교체이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다스려 왔습니다. 내가 내 왕국의 왕이었습니다만 내가 다스리는 나는 밤낮 짜증이 나고 실망과 한숨과 허무와 불안 속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나는 정권을 교체하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왕국의 왕으로 모시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회개입니다. 내가 나를 지배하던 삶에서 내가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은총바탕
믿음은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지적으로 동의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죽으신 십자가 앞에 내 생애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은 나의 죽음입니다. 내가 죽을 죽음을 그분께서 대신 죽어 주셨습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나의 의를 의해서 다시 사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때 내 모든 죄가 내 삶 속에서 완전히 씻기는 용서와 사죄의 은총을 경험 합니다.
겸손이 낳은 상대성 이론
아인슈타인은 겸손한 사람이었다. 상대성 이론 발견으로 크게 성공한 다음에도 대자연 앞에서 자신은 미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어느날 제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선생님, 선생님의 그 많은 학문, 전문적인 지식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라고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실험 기구에 있던 물에 손가락을 적신 뒤 한 방울의 물을 똑 떨어 뜨리며 말했다. {나의 학문은 바다에 비하여 이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죄수
두 사람의 젊은이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 청년은 그 곳에서 시를 쓰고 창문을 내다 보며 소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름을 보면 구름과 같이 자유로울 날이 오겠지, 바람이 불면 나도 바람과 같이 자유로운 날이 오겠지, 비가 오면 나도 마음껏 흘러 내릴 수 있겠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청년은 벽만을 바라보며 실망과 절망으로 가득했습니다. "나는 갇혔다. 나는 쓸모가 없게 되어 버렸다"고 푸념만을 늘어 놓으며 나날을 보냈습니다. 훗날 두 사람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희망적인 청년은 작가가 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절망적인 청년은 정신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예수님 안에서 기쁨과 소망과 감사가 있어야 겠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
여객선 아일랜드 여왕호가 침몰했을 때 승객 중 구세군 사관 백 삼십명 가운데 백명이 사망했는데 죽은 시체에는 구명대를 입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구명대를 양보하고 대신 죽어 준 것이다. 제임스 칼비트가 야만인 지역에 선교사로 가려고 양국 상선에 승선 했는데 선장이 거기 가면 죽으려 가는 길이라 했더니 "나는 이미 여기 오기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했다. 노예가 아니면 갈 수 없었던 토마스 섬에 노예 신분을 자청해서 간 선교사도 있었다. 격리된 나환자 수용소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사신이 되어 갔던 다미엔이 나환자들에게 "나의 형제 나의자매"라고 부를때는 거리감이 있더니 나환자가 되어 "우리 나환자들"이라고 부를때 그는 우리 죄와 죽음의 위치에 대신 서 주신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은 사람들이다(갈2:20)
우리의 삶의 표준
삶의 표준을 어디에 정해 놓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과 모든 삶이 결정되어 진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의 만족과 쾌락과 부에 표준을 두고 내세도 하나님도 없는 삶을 사느냐? 이성과 합리성에 삶의 표준을 두고 살아가느냐? 양심과 도덕적 표준을 따라서 살아가느냐? 사회 분위기에 삶의 표준을 정해서 살아가느냐? 물질과 육체를 경멸하고 자학하면서 금욕에다 표준을 두고 살아가느냐? 성경을 표준으로 살아가느냐? 어떤 사람은 성경을 표준으로 삼되 율법적인 표준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성경을 표준으로 삼되 기독교적 복음적 표준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절망은 죽음을 낳고
러시아 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철도국에서 일하는 한 직원이 냉장고 화차 속에 들어간 후에 실수로 문이 밖에서 잠겨져 버렸습니다. 아무리 빠져 나가려고 해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소리를 질러도 힘껏 두드려 보아도 냉장고 화차의 단단한 시설로 인하여 문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듣질 못했습니다. 혹시 누가 와서 우연히 문을 열어서 구원 받는 길 한 가지만이 희망이었고 얼어죽게되면 죽는 수 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모든 희망을 포기하다시피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그의 몸이 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의 상태를 화차의 벽에다 기록해 나갔습니다.
"점점 몸이 차가워 진다… 그래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나는 점차로 몸이 얼어옴을 느낀다… 나는 이제 몽롱해진다… 아마도 이것이 나의 마지막일는지도 모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후 다른 직원들이 그 냉장고 화차의 문을 열었을 때에 이미 그는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단히 놀라운 사실은 그 냉장고 화차는 오래전부터 고장이 나 있었던 것이요. 공기도 충분하고 실내 온도가 화씨 오십육도(섭씨 십삼도)의 쌀쌀한 온도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실존적 의미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나신 것이 역사적 절대 사실이라면 ①그가 하나님인 것이 절대 사실이고 ②그이 피가 우리 죄를 대속 하시고 의롭다 함을 얻게 된 것이 절대 사실이고 ③그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 되는 일과 영생 얻는다는 사실을 절대 보장한 것이며 ④새 생명, 풍성한 생명을 주신다는 절대 보장이고 ⑤나를 보호하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넘치도록 주시고(빌4:19) ⑥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⑦성령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평안과 기쁨을 주시며 ⑧몸의 부활과 재림의 약속의 절대 보장이시고 그의 말씀은 절대 진리임을 절대 보장하신 것이다.
나는 무엇을 심고 있는가?
가라지를 심고 보리를 기대하지 말라. 악습을 심으며 어떤 날 우연히 고매한 품성의 인물이 되리라고 기대하지 말라. 사기와 증오를 심으며 우정과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 뱀의 알을 품고 병아리가 깨일 것을 기대하지 말라. 중상과 모략을 심고 선의로 갚아지기를 기대하지 말라. 남의 인격을 멸시하는 사람아 그대가 존경받을 것을 기대한다면 탱자를 심고 감귤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게으른 사람이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심지 않은 밭에서 곡식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심은 대로 거두리라. 이것은 인과의 자연 철칙이요. 하나님의 법칙이다. 지식을 뇌 속에 입력한 만큼 유식할 것이며 선수는 연습한 만큼 챔피언이 될 것이다. 육으로 심은 것은 육이요. 영으로 심은 것은 영이니 내 인생의 밭에 영원한 하나님을 심어 양질의 영원한 생명을 거두자.
두려워할 것은 죄
신앙을 부인하도록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로마 황제가 크리소스톰을 체포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가 이 크리소스톰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신하들과 의논했다. "이 놈을 깜깜한 지하실에 가둘까? " 신하 중에 하나가 말하기를 "아닙니다. 그놈은 자기가 믿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하실에 같히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조용한 장소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놈을 사형을 시킬까?" 역시 신하가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그 놈은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 놈은 말하기를 죽는 순간에 주님 앞에 간다고 했습니다." 왕이 묻기를 "자,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그 놈에게 해야 할까?" 신하가 대답하기를 "죄를 짓게 하십시오. 그는 죄 이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죄가 가장 두려운 것이다.
불로소득
어느 학교 교실에서 시험이 치러지고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남의 시험지를 열심히 보고 쓰고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그 학생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야지 불로소득으로 살아가면 되겠나" 이 학생은 이 말을 새로운 삶의 충격으로 받아들여 그때부터 열심히 살아가기 시작해 자신의 삶의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지금 큰 병원의 구매 과장이 되었고 얼마 전에는 담임 선생님을 초청해 대접을 융숭히 했습니다. 그때 자기 마음과 지금 자기 마음을 말하며 "자신을 절대로 불로소득으로 살아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혹시 예수님의 사랑을 불로소득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진실한 삶 진실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들의 삶은 여행길.
우리들의 삶은 여행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이 바로 인생의 긴 여행의 과정이라면 기차역 구내의 안내 표지판 같은 것으로 확실하게 표시가 된 것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다음에 내릴 역은 어디에 어디쯤에서 인생의 길이 바꾸어진다고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인생을 정확하게 안내하는 안내판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함께 갈 때 방황하지 않고 확실한 삶의 여행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위 바위 보
어린 시절에 누구든지 가위 바위 보를 많이 해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든지 바위가 가위를 이기고 가위는 보(보는 종이, 보자기의 뜻)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약한 것만 같은 보가 제일 강한 바위를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범한 어린이들의 놀이에 나타나 있는 살아 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부드러움이 필요하며 먼저 찾아가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독특성
세계의 모든 종교 중에 기독교의 독특성을 말할 때 우리는 이런 것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그 종교의 교주의 가르침이 제일 중요하나 기독교만이 예수의 가르침보다도 예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를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은 예수의 진리를 믿으므로 영생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므로 영생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보다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더 중요합니다. 유교도 공자보다는 공자의 가르침이 더 중요합니다. 이슬람교도 마호메트의 가르침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순히 가르침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입니다.
좁을 길
그 길은 좁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걸을 수 있는 넓이는 됩니다. 그대가 예수와 함께 걸을 수 있고 주님은 그대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그대가 오히려 넓은 길에서 주님을 잃을 것입니다. 무리들이 양 옆에서 밀어붙이니 오직 좁은 길에서만 마음으로 그분을 의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대의 눈이 그분의 눈과 마주칠 수 있는 것은 좁을 길에서입니다. 다른 조언자가 필요치 않습니다. 도움은 오직 그분에게만 오는 것입니다. 오! 축복 받은 좁은 길이여, 거기에는 두 사람의 여유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와 함께 걸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분이 그대와 함께 걷는 것입니다.
주(主) -퀴리오스-
신약 성경에 600여회 불려지고 기록된 이 "주"라는 칭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상처를 자기 손으로 만져 보고야 믿겠다는 도마에게 상흔(傷痕)을 내 보이며 만져 보고 믿으라 할 때 도마의 입에서 터져 나온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한 이 신앙고백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고 마음으로 부활을 또한 네입으로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고 마음으로 부활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롬10:9) 지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인 것을 시인하고 고백하며 의지적으로 그 예수가 나의 주 인 것을 수락하여 그가 나의 전 생애, 전 소유, 전 행위, 나의 의지와 시간의 절대적 주권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주여, 주여 헛되이 염불하듯 하는 부름이 아니라 마음의 왕좌에 모신 주, 이 주라는 말은 한 글자로 요약한 신앙고백인 것이다.
예수 없는 절망
1. 내게 두 가지 절망이 있다. 하나는 무슨 일들이 마음대로 안되는 절망이고, 하나는 마음대로 된 이후에 오는 절망이다(버나드 쇼)
2. 인간 속에는 본질적인 모순이 있는 것 같다. 풍요 지수와 지식 지수와, 예술 지수와 쾌락 지수가 높을 수록 불안 지수, 절망 지수, 자살 지수, 허무 지수, 광기 지수, 불쾌지수가 더 높아진다. 2퍼센트만 일하고 98퍼센트는 놀고먹는 오토메이션 시대가 오면 권태 지옥이 된다는 말이 옳을 것 같다.
풍성한 생명(요10:10). 배에서 생수의 강이 터지는 생명(요7:38). 만나도 만나도 영원한 첫 사랑 같은 새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십자가 사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었던 우주 최대의 러브 스토리이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예수는 사랑의 화신이며 성경은 사랑의 편지이고 성령은 사랑의 영이시다. 또 우리는 그 사랑의 삼일성(三一性)속에 빨려 들어온 사람이다.
성도의 기도란 사랑의 밀어(密語). 전도는 사랑의 전달, 사랑의 중매. 찬송은 사랑의 노래, 그리고 십자가는 사랑의 드라마의 절정, 사랑의 고백, 사랑의 심장 파열 시건 이다.
십자가는 예수가 하나님과 나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다가 죽은 곳 예수가 한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또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사랑의 심장이 터진 곳이 십자가이다.
절대 은총의 손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갈4:9)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나니(요15:16).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였음이라(요일4:19)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내가 예수를 택한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나를 택했고 내가 그를 안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알고 그가 먼저 사랑하고 그가 믿음을 주었다. 아기가 아버지의 손을 붙잡은 게 아니라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원숭이는 새끼가 어미 몸을 네 발로 붙잡고 다니지만 고양이는 어미가 새끼를 물고 다닌다. 우리 구원의 주체와 확실성의 근거는 고양이처럼 주님의 은총의 절대성에 있다.
엑스트라
우리는 무관심한 사람들. 표정 없는 사람들이 많은 이 시대에서 표정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삶 속에서 희로애락을 재대로 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욱 인간적입니다. 우리는 영화 속에 주인공에게만 박수를 보내고 주인공에게만 시선을 주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엑스트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구경하듯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지나쳐보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가며 가끔씩 자신이 엑스트라라는 생각이 들 때면 우주 착잡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에 주인공입니다. 우리들은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성경 배우는 태도
바리새 교인과 서기관은 성경 전문가이다. 성경 해석을 위해 태어나서 성경 실천을 위해 살다 죽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성경의 주인, 성경의 성육신이신 예수에게 그렇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무지할 수가 없었다. 엠마오 도상으로 가는 두 제자는 부활한 예수에게 예수 부활 사건을 모르느냐고 따지며 예수에 대해 설교하여 예수로 꽉 차 있고, 예수와 함께 가면서도 예수를 모르고 몸은 예루살렘과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멀리 떠나고 있었다. 예수에게 눈이 어두웠다. 한편, 삭개오는 비(非)예수의 외모를 가졌으나 재산의 반이라도 나눠주고 토색한 것은 4배나 갚을 실천과 순종의 마음으로 예수를 보았을 때 예수가 그의 구주로 보였다.
예수와 예수의 말씀인 성경은 연구 대상이 아니다. 예수는 예수 따라 실천하며 배울 분이며 성경은 알아지는 책이다.
믿음의 조상들의 반열(班列)
명문 가정에서 조상들의 초상화와 족보를 자랑스럽게 소장하듯이 크리스찬들은 히브리 11장에 기라성처럼 수록된 믿음의 조상들을 생각하고 자신의 신앙의 계보와 순도를 가다듬는다.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103:1-2)"이 말씀은 내 개인에게 베푸신 은혜뿐 아니라 믿음의 조상들에게 베푸신 모든 은택도 내게 베푸신 것처럼 잊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삭을 격려하실 때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을 아루는 하나님인 것을 상기 시켰고(창26:3-4) 야곱에게 나타나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인 것을 상기 시켰고(창28:3) 광야를 헤메는 모세에게 나타나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임을 상기 시켰고(출3:4-6) 여호수아에게는 모세의 하나님임을 상기 시켰다(수1:2-5).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와 다윗의 하나님,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진짜 진짜 사랑하는 아버지이다.
뱀의 독보다 더한
독사들은 누군가를 물 때 독침과 같은 역할을 하는 송곳니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침"을 통해서 적의 몸에 치명적인 물질을 보내어 즉심한 통증을 느끼게 합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은 즉시 의사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뱀만이 그들의 입에서 독을 내뽑는 피조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조심하지 않고 하는 말이 더 위험스런 독이 됩니다. 사람들은 뱀의 독보다도 더 해로운 거짓말을 하고, 소문을 퍼뜨리며 험담을 합니다. 하나님은 뱀보다도 표독스런 혀를 가진 우리에 대하여 더 염려하고 계십니다.
성경 식욕
식욕은 건강의 시금석이라고 한다. 식욕이 떨어지면 건강의 적신호이다. 식욕이 왕성하면 젊고 건강한 징조이다. 크리스천에게는 성경이 영의 양식이다. 아기 때는 젖을 먹고 크면 밥을 먹는데(고전3:2). 아기 신자는 스스로 성경에서 밥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교사들이 젖을 먹여 준다. 신자가 성경을 먹고 살 정도가 되면 다 큰 징조이다. 성경에서 멀어지면 사단에게 가깝고 성경에 가까워질수록 하나님께 가깝다. 성경에 손 때가 묻을 수록 마음이 깨끗하고 그의 성경이 깨끗할 수록 마음이 더럽다는 말도 있다. 배고픈 사람처럼 목마른 사람처럼 성경 식욕과 성경 갈증이 클수록 영이 건강한 증거이다.
겸손의 덕목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의 제일 되는 덕목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겸손"이라 대답했다. 그러면 두 번째로 큰 덕은 무엇이냐는 물음에도 역시 "겸손"이라고 했다 다시 세 번째로 큰 덕은 무엇이냐는 질문에도 한결같이 "겸손"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만인들에게 성자라고 한창 존경을 받을 때에 여지없이 자신의 허물과 죄상을 고백한 <참회록>을 썼다. 겸손에 반대는 교만이다. 교만은 악덕 가운데 제일 근본이 된다. 교만은 악덕의 어미이다. 크리스찬의 겸손은 비굴하거나 굽실거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능력과 자신감에서 나온다. 사람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기보다는 스스로 높임으로써 상대적으로 남을 업신여기기 쉽다. 그래서 이웃간에 갈등, 미움, 분쟁을 낳는다. 예수님은 가장 크고 높으신 분이면서 가장 낮아지셨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시고 죽기까지 겸손하셨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부모를 공경하라
이 말을 들으면 상당히 고리타분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옳은 것이다"라고 분명히 명령하고 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에게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부모를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존경하며 자랑한다는 것이다.
요즈음 십대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들의 사진을 오려서 자기 방에 붙이기도 하고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 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 네 부모님을 그렇게 따르고 순종하고 좋아하는가? 부모님이야말로 인간 자신에게 가장 존경받아야만 하는 위인이며 어른이며 스타이다. 다시 음미해 보자 "네 부모를 공경하라"(엡6:1-2).
은혜
은혜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은혜는 은혜로 받는 자에게만 은혜가 되는 것이다. 철없는 소리 같기도 하고 장난 비슷한 말로 "우리 어머니 날 곱게 낳아서 이 모양 이 꼴 되라고 하셨나요?"하는 자기 한탄 조의 표현을 듣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말이며 은혜를 전혀 생각지 못하는 말이다. 인생이 태어나는데 있어서 선택권을 가진 사람이 누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아무렇게나 태어나는 인생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삶은 가장 귀한 하나님의 생명의 은총 속에서 주어진 고귀한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곧 감격이며 감동이다. 이 좋은 계절 모두에게 은혜의 감사가 있고 충만한 기쁨이 있기를…
가난한 심령 예수 천국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팔복 중 제 1복이다. 산상수훈을 천국 헌장이라고도 하므로 이 말씀은 천국 헌장 제1장 1조인 셈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지배를 의미한다. 윤리 문제이기보다는 영의 문제이다. 영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 하나님과 통하는 지성소 같은 곳인데 그 곳이 비어 있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지배하신다. 예수님은 천국의 시금석인데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영 속에 그를 받아들일 빈 자리가 없었다. 잘못 해석된 율법과, 자아의 교만으로 가득차 있었다. 헬라인들이 플라톤의 철학으로 가득 차 있었듯이 현대인은 과학과 온갖 사상과 우상 같은 자아의 욕심으로 교만해 있다. 영의 포만증에 걸린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가난한 것과 헐벗은 것을 모르는 영적 교만을 경계해야 한다. 세리 삭개오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로 입맞춘 죄 많은 여인 같은 가난한 심령을 회복하자.
사랑의 약탈자
사람 같은 하나님 하나님 같은 사람, 예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수를 굶주린 사람에게 생명의 떡을, 고달픈 사람에게 안식을, 불안한 사람에게 평안을,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병든 사람에게 치료를,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싸움이 있는 곳에 화해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죽음이 있는 곳에 부활을 심어 준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주장했던 그에게 인류의 존경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헌신을 다해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모든 것의 모든 것입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약탈자 생명의 약탈자라는 평도 받는다.
십자가의 3시제
신앙은 3가지 시제를 가지고 있다고 에밀 브루너는 말했다. 즉 신앙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다. 신앙의 과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곧 나의 죽음이며 나의 부활이라는 과거의 확실한 극점을 회고하는 것이다. 신앙의 영원한 기초는 거기에서 출발한다. 우리들 신앙의 절대 보장이 곧 십자가 사건이다. 우리는 2천년전 골고다 산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시간과 공간으로 존재하는 사건이다. 내가 십자가의 예수를 믿을 때 그것의 성령의 시제라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소망 중에 영원한 미래를 믿고 바라본다. 예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에게 신앙의 과거, 현재, 미래를 허락하신 거룩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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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절대성
1.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이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사49:15-16)"
2.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사43:1)"
3.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8:32-39)"
부자 교만과 거지 교만
헬라의 거지 철인(哲人) 디오케네스는 어느 날 귀족 부자요 철학자인 플라톤의 궁전 같은 집을 방문했다. 그 집의 응접실에 깐 호화스런 양탄자 위를 걸어가면서 디오게네스는 마치 생물을 밟아 죽이는 제스처로 짓이기며 플라톤의 교만을 짓밟았다.
다음에는 플라톤이 디오게네스의 가난을 과시하며 사는 비가 새는 집을 방문했을 때 누더기 양탄자 위를 뱀의 머리를 밟아 죽이는 모션으로 그 방을 거닐면서 디오게네스의 성탐(聖貪)과잉 의식의 교만을 짓밟아 주었다.
성자는 자신이 성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성자가 아니다. 성지마다 참회록을 쓰고, 천주 주님 앞에 설 때 잘한 것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해 주신 은총을 만 입이 있어도 못다 찬송하는 상하고 깨어진 마음과 감루(感淚)속에 대한다. 우리는 모두 설익은 플라톤 바리새든가 디어게네스 바리새가 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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