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 생기 넘치는 인생 (Sunday Sermon)

말씀 : 창2:4~7

제목 : 생기 넘치는 인생

 

1.생기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생기가 넘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이나 행동에 활력이 있고, 생동감이 있고, 얼굴이 밝아야 하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걸어 갈 때에도 활기가 넘쳐야 하고, 찬송도 좀 힘차게 기쁨에 넘친 모습으로 부르고, 예배를 드릴 때도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할 사람들입니다. 계22:5절을 보십시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보세요.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왕노릇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만 왕노릇하고 지금 여기서는 거지 노릇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만 왕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벧전2: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보세요. 우리가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왕같은 제사장이 뭡니까? 제사장은 제사장인데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겁니다. 왜 제사장입니까?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며 거룩한 모습으로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제사장이기도 합니다.

그럼 왜 왕입니까? 일단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왕인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인 우리는 왕자이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이길 수 없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로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비롯한 모든 어둠의 세력들과 상황과 환경과 사람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왕같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생명의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혹시 삶의 현실 속에서 우리를 좀 힘들게 하는 일들이 있더라도 성령의 능력으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무엇이냐, 너의 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이기느니라하면서 큰소리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빌4:1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보십시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힘센 장수라도 내가 힘이 없어 못 당하면 그 장수보다 힘이 열배나 강한 장수를 데려오면 이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그러니 하나님이 내 편이시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왕성한 생명력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활기차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힘차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씩씩하게 용감하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좀 힘들어도 까짓것 힘들면 얼마나 힘들겠느냐하면서 당당히 맞서 싸우며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어느 부모가 자녀가 조금 힘들다고 죽을상을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근심 걱정 탄식하며 세상 다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한숨이나 푹푹 내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자녀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그러나 자녀가 좀 힘들어도 당당히 맞서 싸우며 활기차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놓이고 대견스럽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로써 하나님의 백성,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시민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더욱 활기차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뭔가 마음과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있어도 모든 어둠의 권세를 이미 이겼고, 또 이후로 다가올 모든 어둠의 세력들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의지하며 활기차고 용감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생기를 충만하게 공급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활기찬 삶을 살려면 생명의 에너지를 충만하게 공급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뭔가를 이기려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뭔가를 힘차게 움직이게 하려면 그것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우리 앞에 있는 벽을 무너뜨리려면 그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 있든지 장비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또 자동차가 힘차게 움직이려면 기계적 성능도 좋아야 하지만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기름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인생도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장벽을 무너뜨리고 더 나아가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힘차게 달려가려면 그렇게 달려가게 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허우대만 좋다고 벽을 무너뜨리고 힘차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벽을 무너뜨리고 힘차게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육체에 힘을 주는 양질의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체에 필요한 영양소들이 육체에 공급이 되고 일부는 산소와 만나 산화작용을 일으키면서 신체 각 부분에 에너지를 공급함으로 비로소 몸에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앞에 놓여져 있는 벽을 무너뜨리고 힘차게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올바르게 깨끗하게 아름답게 진실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올바르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정신적인 양식을 충분하게 계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윤리적 도덕적 철학적 교육도 받아야 합니다. 올바르고 진실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것들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계속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올바른 인격형성에 필요한 에너지를 계속 공급받아야 비로소 올바른 인격을 갖추어 어려움도 이겨내고 선과 진리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태를 보면 이런 올바른 인격에 필요한 에너지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죽어라고 부자 되고 높아지고 편하게 쉽게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기술만 공급합니다.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맨 날 공부 잘해라. 1등해라. 높아져라. 돈 많이 벌어라. 이런 따위 들입니다. 그래서 고작 한다는 인사가 부자 되라는 것입니다. 그게 최고의 축복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라고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가지고 노는데 게임들이 대부분 싸우고 죽이고 빼앗고 정복하고 높아지고 폭력적이고 선정적이고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것들입니다. 그렇게 늘 폭력적 선정적 이기적 배타적 물질적 에너지만 공급되니까 사람들이 결국 폭력적 선정적 이기적 배타적 물질적 성향이 강한 인생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며칠 전 뉴스에 보니까 열일곱살배기 소년이 스물한살날 친누나를 칼로 수차례 찔러 중상을 입혔는데 이 소년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폭력적인 컴퓨터 게임을 주로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그날도 4시간동안 폭력적 게임을 한 후에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 폭력적 에너지만 잔뜩 공급받으니까 인성이 마비되고 아름답게 사랑하며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게 하는 에너지는 점점 줄어들고 폭력적 부정적 반항적 에너지가 자꾸 축적되고 그런 부정적 에너지를 조절할 수 있는 자율신경이 제 기능을 잘 못하게 되니까 그런 끔찍한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우리 생명을 아름답게 하고 깨끗하게 하고 참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귀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영적으로는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자연인은 그러지 않아도 죄로 말미암아 영성이 거의 죽어있기 때문에 영혼에게 생명을 주고 올바르고 진실하게 아름답게 거룩하게 감사와 기쁨으로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에너지를 듬뿍 공급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뭡니까? 그게 바로 오늘 7절에서 말씀하는 생기입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만들 때에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물론 흙으로 만든 육체는 생명도 기쁨도 감격도 능력도 없는 그냥 흙덩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생명력 없는 흙덩이가 어떻게 살아 움직이게 되었습니까?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생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생기가 뭡니까? 영적 육체적 정신적 생명력을 가지고 살게 하는 생명의 기운입니다. 그러면 생령은 뭡니까? 살아있는 영혼, 즉 생명과 기쁨과 감격과 은혜와 사랑 속에서 뭔가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영혼인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 즉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축복과 희망과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살게 하는 그 생명의 기운이 우리가 가운데 들어올 때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고 그 생기가 충만해 지면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생들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이 생명의 에너지를 거의 상실함으로 하나님께서 본래 주셨던 생명의 은총이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끝내 이것을 회복하지 못하는 인생은 영원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과를 도말하시고 나아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사기(死氣) 즉 죽음의 기운을 제거하고 생기(生氣) 즉 생명의 기운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고 따르는 자들은 생기가 다시금 우리 영혼 속에 들어옴으로 진정하고 영원한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믿고 그 생기를 받았다고 하는 우리들조차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도리어 축 처져서 살 때가 많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살지 못하고 도리어 근심 걱정 원망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도리어 미워할 때가 많습니다.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가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니며 심지어 악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거룩하고 의롭고 고귀한 삶을 살지 못하고 도리어 추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를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충만하게 공급받아야 하는데 겨우 목숨을 부지할 만큼만 받아 그나마 다행으로 죽지는 않았는데 생명의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육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육신이 계속해서 왕성하게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밥을 먹어야 하는데 한번 먹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육신을 힘 있게 움직이게 하는 생명의 에너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영양가 높은 음식을 공급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또 식물도 잘 자라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하려면 식물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데 필요한 수분과 영양분이 떨어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영혼도 그런 것입니다. 영혼이 생명을 유지하고 왕성하게 움직여서 풍성한 영적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생기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충만하게 공급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혼에 생기가 있고 힘차게 움직이고 그래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생기를 계속해서 공급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예배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신앙적 행위가 먼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요, 나아가서는 우리 영혼이 정말 생기 있게 풍성하게 아름답게 힘차게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는 영적인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일이요, 생명의 산소를 공급해 주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시1:1,2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래서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하신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 영혼에 양질의 양식을 공급할 때에 죽어있는 영혼들이 살아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영혼 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기로 가득차고 그러면 그 생명의 에너지가 우리 속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솟아나게 하여 생명력이 넘치게 나아가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게 힘차게 나아가게 함으로 생명의 풍성하게 맺게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 속에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데 어찌 그 삶이 힘차게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심령가운데 생명과 기쁨과 감사와 평강과 소망의 기운이 넘치는데 어찌 그 삶이 활기차지 않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생명과 진리와 선의 에너지가 넘치는데 어찌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지 않겠으며,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때에 어찌 생명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그러한 생명의 에너지를 풍성하게 공급받을 수 있는 교회에 열심히 나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쓸 때에 생기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생기의 통로를 막고 있는 찌꺼기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우리는 생기가 충만한 곳을 가까이해야 하는데 그때에 한가지 더 유념해야 할 것은 생기가 흘러들어오는 통로를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기를 받는데 방해가 되는 찌꺼기 같은 것들을 제거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생기가 넘치는 곳을 찾아와도 그 생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좁아져 있거나 막혀 있으면 어떻게 생기를 충만하게 받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심장이 아무리 힘차게 펌프질을 해서 피를 내보내도 혈관에 진득진득한 것이 달라붙어 있어서 혈관이 좁아졌거나 막혀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수지에 아무리 물이 가득해도 수로가 막혀 있으면 어떻게 논에 물을 대겠습니까?

영적으로도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아무리 생기가 가득해도, 그래서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생기를 공급해 주는 교회를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우리 영혼에 생기를 공급하는 통로가 좁아져 있거나 막혀 있으면 생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거나 두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조금 밖에 들어오지 못하면 근근이 생명을 유지한다해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요, 만약 완전히 막혀 있다면 그 영혼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우리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찌꺼기들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찌꺼기가 뭡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이 죄와 무지와 어둠 속에 있는 세상에 살면서 굳어진 왜곡되고 잘못된 생각들과 가치관과 경험과 지식과 인본주의와 물질주의와 이기주의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왜곡된 가치관으로 말미암아 우리 심령 속에 자리잡고 있는 시기나 질투나 거짓이나 분노나 염려나 이기심이나 이런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생기의 통로를 막아버리는 찌꺼기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생기가 영혼 속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좁게 만들거나 막아버림으로 생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생기를 충만하게 받으려면 그 생기를 받을 수 있는 교회를 열심히 찾는 것과 더불어 그러한 모든 왜곡된 경험과 지식과 이성과 욕심과 악과 미움과 그 밖의 모든 왜곡된 가치관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6:24절에서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고, 엡4:22절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얼마나 죄와 무지와 어둠과 한계 속에 있는 존재인지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존전에 열심히 찾아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찾아 나오되 내 생각 이성 경험 지식 다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주님의 생기가 충만하게 영혼 속에 흘러들어옴으로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은혜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기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생기 넘치는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 도 )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하심에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이다.

그러하오나 주님이시여, 저희가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여 주님께서 주신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온전히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나이다. 오, 주님이시여,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진실로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생기의 통로를 막고 있는 모든 인간중심적인 생각들, 물질만능주의적인 사고들, 그로 인한 모든 욕심과 시기와 질투와 모든 어두운 모습들을 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섬김과 겸손의 삶으로 생명의 통로가 활짝 열려 하나님의 생기를 충만하게 덧입어 온전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며 이 땅 모든 이들에게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소망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축 도) 이제는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운을 막고 있는 모든 세상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주님의 생기를 충만하게 덧입어 주님의 그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그 생명의 기쁨을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과 저들의 가정과 저들의 경영하는 모는 일들 위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인도 교통 역사 충만케 하시는 은사가 이제로 영원까지 함께 하시옵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봉헌기도) 영화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이 아름다운 계절, 이 생명력이 넘치는 계절을 우리에게 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은총을 덧입어 이 생명과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시오니 영광과 존귀를 돌리나이다.

오 주님이시여, 지금 이 시간 우리가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며 적은 예물 드리나이다. 주님의 그 은혜와 사랑과 인도하심에 감격하여 믿음으로 예물 드리는 손길 위에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것 거룩히 구별하여 십일조 예물 드리는 손길위에 더욱 축복하셔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더욱 풍성하고 강건한 은총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하며 감사예물 드리는 손길에도 복을 주셔서 더욱 감사와 은혜가 가득한 복된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예물을 통하여 주님의 생명의 역사가 더욱 힘 있게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성탄절설교:빛으로 오신 예수님(요1:9-14)


제목 :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

말씀 : 요1:9-14

1.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

오늘 이 거룩하고 복된 성탄절을 맞이해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위에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함께 인사 나누시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정말 메리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과 사랑과 은혜와 평강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복된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탄절은 세상의 그 어떤 날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기쁜 날이고, 가장 복된 날이고, 가장 거룩한 날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위대한 사건도 감히 갖다 댈 수 없는 위대한 사건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도대체 성탄절이 어떤 날이기에 그렇게도 위대하고 복되고 기쁜 날입니까? 물론 너무 잘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통해 주님 오신 참뜻을 다시한번 되새겨 볼때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오늘 9절에 보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말씀그대로 주님은 이땅에 참빛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빛이 뭡니까? 말할 것도 없이 빛은 생명, 은혜, 기쁨, 사랑, 희망, 소망, 평안 등의 모든 긍정적인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어둠은 죽음, 미움, 절망, 불안, 염려 등등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주님을 참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빛은 진짜 완전한 빛이라는 뜻입니다. 진짜 빛이란 영적, 정신적, 물리적, 질적으로 영원히 완전한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은혜를 주는 빛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영적, 정신적, 물리적, 질적으로 완전고도 영원하게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은혜를 주는 유일한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참빛이십낟. 세상에 많은 빛이 있지만 그 어떤 빛도 이런 완전한 참빛이 없습니다. 태양도 좋은 빛이긴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나 영혼을 소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나 학문이나 철학이나 과학이나 문명들도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도 인간의 정신적, 이성적인 무지와 어둠을 깨우쳐 주는 빛이긴 하지만 영원한 생명의 길로, 진리의 길로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서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기에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물리적, 정신적, 영적인 빛을 100% 완전히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빛을 받으면 모든 어둠이 걷히고 참된 진리를 알게 되고 영혼이 살아나고 마음이 살아나고 육신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빛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영적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영원한 생명과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성탄예배를 드리면서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빛이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을 더욱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빛이 가져다주는 그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은혜와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그렇다면 여러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참 빛이란 어떤 빛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선은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주는 빛입니다. 먼저 요8: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므로 이 빛이 우리 가운데 임하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모든 자연인은 누구나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하고 어둠속에 방황하다가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두운 영혼 속에 예수님의 빛이 임하는 순간 사태는 완전히 반전됩니다. 그 완전한 생명의 빛, 은혜의 빛이 임하는 순간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죄와 더럽고 추한 것들이 낱낱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죄를 보게 되고, 무지를 알게 되고, 인생의 출발을 알게 되고, 종착역을 알게 됩니다. 인생의 가야할 길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 앞에 엎드리게 되고, 주님 앞에 엎드리면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과 권세로써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와 무지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던 천국이 보이게 됩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2절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께서는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더욱 온전히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그 생명의 빛을 더욱 듬뿍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어둡고 칙칙한 것들을 다 몰아내고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소망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빛을 받으면 죄와 무지속에 있던 영혼이 살아나 영광의 나라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과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류의 소망이 빛이 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왜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합니까? 왜 이만큼 잘 살게 되었는데도 자꾸만 힘들다, 어렵다, 못살겠다고 합니까? 왜 자꾸 가진 자들은 더 가지려고 합니까? 왜 있는 자들이나 없는 자들이나 맨날 그렇게 싸우고 빼앗고 속이고 죽이고 합니까?

간단합니다. 진짜 소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세상 즐거움을 소망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많이 가져야 행복할 줄로 압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 많이 더 크게 더 좋게 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좇아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얻기는 얻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1인당 국민소득 이만불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약50년전만해도 국민소득이 몇백불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때보다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해졌습니까? 국민소득 천불 할 때보다 이만불하는 하는 이 시대에 왜 오히려 범죄율과 자살률과 이혼율이 훨씬 높아졌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은 결코 우리의 소망이나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물론 필요합니다.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게 좋은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공부도 많이 하고 돈도 많이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동물이라면 몰라도 전인격적인 존재인 우리 인간에게는 그런 것들이 결코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가 그런 썩어 없어질 것들에 소망을 둘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행복과 기쁨과 은혜를 보장해 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완전한 소망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반드시 영원히 썩지 않고 변치않는 생명과 은혜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완전하고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장받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 그 나라를 알고 누리며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도 완전한 소망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집이나 이런 것들의 많고 적음이나 크고 작음은 관계없습니다. 언제나 소망과 기쁨과 평안과 은혜와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1:1절에서는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완전한 소망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분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어둡고 절망적인 것들을 다 이기고 소망과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치유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 인생의 완전한 치유의 빛이십니다.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는 세상에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온갖 종류의 질병과 상처와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인류는 이런 질병과 상처와 고통을 치료하기 위하여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해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나름대로 많은 질병과 상처와 고통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학이 아무리 눈부시게 발전해도 결코 인류는 질병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어떤 항생제를 써도 듣지 않는 수퍼박테리아가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되었다며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요즈음 가축 구제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관계당국을 긴장시키고 많은 축산 농가에게 아픔을 주고 있습니다. 암을 정복하는 일도 아직은 요원하고 심지어 감기 바이러스에는 약도 없습니다. 정신과적인 병은 여간해서 고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 영적인 질병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해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그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는 강력한 치유의 빛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강력한 치유의 빛을 받으면 모든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영적 질병과 상처와 고통이 다 치유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세포가 완전히 파괴되어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명령 한 마디로 치유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귀먹은 자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근 이만명이 되는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영적으로 영원한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영적 정신적 육체적 어둠과 상처와 고통을 치유해 주시는 완전한 치유자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말4:2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인류를 완전히 치유해주셔서 외양간에 나온 송아지처럼 마음껏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기뻐 춤추며 살아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전인격의 치유자이십니다. 그분앞에서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는 물러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질병과 약한 것들과 어둠과 상처와 고통은 다 물러 갈 수 밖에 없습니다. 혹시 이 땅위에 사는 동안 완전하게 물러가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에는 완전하게 100%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속에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그 온전한 치유의 빛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속에 있는 모든 영적 정신적 육체적 질병과 상처와 약한 것들과 부정적인 것들이 온전히 치유되어 더욱 생명의 기쁨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사랑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요, 소망의 빛이요, 치유의 빛이심과 동시에 사랑의 빛이십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충만해져서 우리도 진정한 사랑과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왜 많은 사람들이 갈등과 분쟁과 불화 속에 미워하고 증오하고 분개하며 살아갑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죄와 무지 속에서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고 어찌하든지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대해서도 사랑의 대상으로 보기 보다는 자신을 위한 도구로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역시도 두말할 나위도 없이 예수님을 모셔 들이면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이 낮고 낮은 땅에 오셔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의 은총을 누리게 되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의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면 주님의 사랑의 빛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됩니다. 그 사랑의 빛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되면 우리의 심령속에 자리잡고 있는 온갖 추하고 더러운 것들과 원망과 미움과 증오와 불평이 물러가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세상 속에 사랑과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3:3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감사하고 기쁘고 복된 성탄절을 맞이해서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소망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치유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속에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분명히 반드시 여러분과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이 사회속에 생명의 은총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소망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모든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어둠과 약함과 죄악들을 물리치고 승리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생명의 빛, 소망의 빛, 치유의 빛, 사랑의 빛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우리 모두가 진정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낮예배설교:성령을 좇아 행하라(갈5:16-24)

제목 : 성령을 따라 행하라

말씀 : 갈5:16-24

1.육신의 지배 속에 사는 인생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살인사건, 성폭행사건, 폭력사건, 강도사건... 또 국가 간에도 전쟁과 억압과 착취와... 심지어 옛날에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노예를 삼아 짐승처럼 부려 먹기도 하고.... 하기야 요즘에 보니까 어떤 섬에서는 외국인들을 데려다가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임금도 제대로 안주고 부려 먹기도 한다는 군요. 하기야 남나물 콩나물 할게 뭐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편이 갈라져 쌈박질이나 해대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왜 비 인간적이고 비 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육체에게 지배당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신과 영혼이 심각하게 병이 들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 육신의 소욕의 노예가 되어 인간이하의 삶을 영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19-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마땅히 영혼이 마음과 몸을 다스리며 아름답고 가치있게 살아가야 하는데 정신과 영혼이 죽어 있어 육신의 지배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온갖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체’라는 단어입니다. 이 육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savrx(사르크스)인데 이 말은 단순히 육체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몸과 더불어 거기에 깃들여져 있는 어떤 육체적, 정신적 욕망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라고 말할 때 육체의 일이란 단순히 몸으로 하는 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육체의 정욕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바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한 것 등등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인생에게 발생되는 문제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일들이 저질러지고 있느냐하면 우리 인간이 육신의 정욕에 지배당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마땅히 육신과 정신이 영혼의 지배를 받아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되는데 영혼이 죽어 있어 육과 정신이 미쳐서 엉뚱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인간으로서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기쁨과 고귀함을 누리지 못하고 무가치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인생은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21절 하반절 보세요.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어떻게 된다고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영혼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다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로봇은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 안에서 움직일 때만이 올바른 기능을 하게 됩니다. 로봇을 구성하고 있는 몸체들이 제작자가 구성한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때에 로봇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가 고장나 로봇의 몸체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이 로봇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고쳐서 쓸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끝까지 말썽을 부리면 폐기처분 당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몸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 움직일 때 인간은 올바르게 제 기능과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되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고장난 로봇과 같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음행과 술수와 우상숭배와 원수 짓는 것과 분쟁과 술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수많은 죄악들이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시대의 이 문제의 핵심이 육체의 소욕이 영혼의 지배를 떠나 제멋대로 움직이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결코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삶이 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이 주셨던 그 순수한 영혼이 여러분을 지배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혼이 우리의 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올바르게 이끌어 감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주님이 주시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복을 가져다 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영혼의 지배를 따라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16,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우리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죄된 본성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를 끊임없이 죄의 길로 내 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에게도 죄된 육신의 소욕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음으로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이 죄된 육신의 소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끊임없이 자신 쳐서 복종시켜 성령의 소욕을 따르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지요. 죄된 본성이 우리에게 있고, 그것이 우리를 자꾸만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게 하는데 그러기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하겠는데 그 놈의 죄된 본성 때문에 그게 잘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어찌하든지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을 채워서 죄된 본성을 쫓아내서 그것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는 무엇이 나를 사로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내 안에 가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전자에 맑은 물이 들어 있으면 맑은 물이 나오고, 흙탕물이 들어 있으면 흙탕물이 나옵니다. 단물이 들어 있으면 단물이 나오고, 쓴 물이 들어 있으면 쓴물이 나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들어 있으면 사랑이 나오고, 미움이 들어 있으면 미움이 나옵니다. 원망과 불평이 들어 있으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감사가 들어 있으면 감사가 나옵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으면 성령의 행실이 나오고, 세상의 영이 가득차 있으면 세상의 행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5:17,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육체를 따라 세상의 엉뚱한 것을 따라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님이 충만하니까 당연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잘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성령을 좇아 행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려면 어찌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생활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지배 속에서 의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갈 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과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의 모습.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지배가운데 들어가면 이제는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전에 육체의 지배를 받던 삶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존재, 새로운 가치, 새로운 목표, 새로운 방향, 새로운 방법을 가지고 인생을 영위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삶인 것입니다.

고후5: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나를 억누르고 있던 옛주인 마귀사탄이 쫓겨나가고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새 주인이 되므로 육신의 소욕을 따르던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임하시면 전혀 새로운 인생이 전개됩니다. 과거에는 사탄의 권세 아래서 내가 주인 노릇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사탄이 주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속아 내 이성과 지성과 경험대로 살면 내가 왕노릇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대로 행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길로 갔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습니다. 내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했습니다. 세상이 가는대로 갔습니다. 세상의 조류를 따라 흘러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고 죽어라고 그 길이 맞다고 여기며 고집을 피우며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게도 도리어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멸시하며 심지어는 핍박하며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인 바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죄의 노예로 살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생명의 영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은혜의 영이신 성령이 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쫓겨가고 죄의 권세가 물러갑니다. 마귀사탄의 역사로 내 안에 들어와있던 죄와 어둠과 죽음과 권세가 물러갑니다.

그런 죄와 어둠과 마귀의 권세가 물러가니 영혼과 마음과 눈과 귀가 밝아집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바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 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추악한 모습들이 밝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천국과 지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광이 나라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드디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됩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 집니다. 그래서 드디어 생명의 열매,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육신의 소욕을 물리치면 세상의 온갖 죄되고 잡다한 것들이 물러가고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령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열매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거듭남입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알고 믿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면 죄사함과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이 핵심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은 결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새생명을 얻게 되면 그 새생명을 가진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함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바랍니다.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묵상하며 열심히 찬양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빛의 은혜를 받으려면 빛을 가까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물을 마시려면 물가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곳으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어디에 임재하십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하는 곳에 임재하시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기를 힘쓸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았습니까?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말씀을 전할 때에 그 가정에 성령이 임재하지 않았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을 정말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성령충만함을 받아은 생활과 열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임과 동시에 어버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충만 받은 것을 방언받고, 병고치는 은사받고, 예언하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만약 거기서 끝난다면 그건 성령 충만 받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지배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당연히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마땅히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부모님 공경이 인간에 대한 계명 중 첫 번째 계명입니다.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러므로 부모님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제아무리 기도 잘하고 찬양 잘하고 예배 잘 드려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 관계에 대하여 주신 첫 번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며 어찌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다시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성령 충만함은 결코 기도와 찬양과 말씀과 예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의 삶속에 접목시켜야 합니다.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가정생활, 사회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이며 동시에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며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래로 사람들을 잘 섬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충만히 맺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웃을 사랑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함께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낮예배설교 / 은혜받기 원하십니까? (Sunday Sermon)

말씀 : 막10:46-52

제목 : 은혜받기를 원하십니까?

 

1.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유명한 찬송가 작시자 ‘화니 제인 크로스비’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맹인이 되어 교회에 다니긴 했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여 때때로 낙심과 좌절감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30세가 되던 해 뉴욕에서 한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이 집회에서는 집회 내내 죄와 허물속에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찬송가143장)을 계속 불렀습니다. 그러자 참석한 모든 회중들에게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되었고, 그녀도 어느 순간 큰 은혜를 체험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주님, 나같이 천하고 쓸모없는 소경이 무엇이 그렇게 귀하다고 날 위해 돌아가셨습니까?’ 라고 혼자 되 뇌이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렇게 앞을 볼 수 없는 천한 몸도 무언가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그때 그녀의 귓가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무슨 말이냐? 내가 너에게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는 지혜를 주지 않았느냐?’ 이러한 주님의 음성에 그녀의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그대로 있었지만 심령의 눈이 활짝 열려 예수님이 보였고,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과 감격이 마음 가득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녀는 곧바로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처음 작사했던 것이 찬송가531장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인애하신 구세주여’, ‘나의 갈길 다가도록’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비롯하여 무려 8,000여곡의 주옥같은 찬송시를 써서 그중에 24편의 시가 찬송가에 들어오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게 있습니다. 여러분, 화니 제인 크로스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이나 후에 외견상으로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육신의 눈은 여전히 감겨져 있어 사랑하는 사람도 아름다운 꽃도 그 밖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돈이 생긴 것도 아니고 출세를 한 것도 아니고 건강이 회복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그녀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천국백성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낙심과 좌절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감사와 기쁨과 희망과 사랑과 은혜와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어둠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활짝 떠졌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떠지자 자신이 갇혀 있었던 어둠의 세계에서 해방되어 빛의 세계, 생명의 세계로 나아와 하나님과 천국을 확실히 보면서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대부분이 자꾸 하나님께 요구만 합니다. 하나님, 건강하게 해주세요. 부자 되게 해주세요. 자식이 잘되게 해주세요. 경제가 활성해되게 해주세요. 물론 그것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설령 그런 것들을 얻는다해도 마음의 눈과 영혼의 눈이 떠지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그래봤자 계속 죄와 무지와 원망과 근심과 불평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의 눈이 떠지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러면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진짜배기를 볼 수 있습니다. 진리를 보고, 하나님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고,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바르게 보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은혜 속에 살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상이 얼마나 복된 세상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6:22,23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주신 눈, 신령한 눈, 은혜의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면 올바른 분별력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육신의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면 어둠속에서 방황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꾸만 인간의 그 작고 편협되고 어둡고 한계 속에 있는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지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을 활짝 뜨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밝히 보며 주님의 음성을 바르게 분명하게 들으며 주님과 동행함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자신의 상태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눈을 떠서 주님을 보고, 영원한 세계를 보려면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어둠속에 갇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알아야 교만하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야 겸손하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그래야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다 알고 다 보고 다 할 수 있다고 여기면 교만하게 자기마음대로 삽니다. 주님을 찾지도 않고 찾아오시는 주님도 거부함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9:41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자신이 소경, 즉 다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무지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죄사함의 은총을 얻었을 것인데 자기가 다 본다고, 다 안다고 제멋대로 했기 때문에 구원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무지한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지 맹인 바디매오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경이요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알습니다. 그래서 그는 풍요로운 도시 여리고에 살고 있었지만 그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하고 비굴하게 엎드려 동전 몇 닢 얻어서 무시당하고 천대받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도 그렇게 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마침내 자신을 그런 처지에서 해방시켜 줄 분이 나타난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자기 앞에 지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사생결단하고 구원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4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뭐라고 예수님이 오셨다고? 그러면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 분이 오셨으면 난 죽어도 그분을 만나야 된다는 심정으로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 불쌍한 인생을 불쌍히 여시고서. 나는 어둠속에 있는 인생입니다. 나는 무시받고 천대받으며 사는 인생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은 당신 뿐입니다. 그러니 저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십시오. 제 어둠을 밝혀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살겠나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를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이와같이 자신의 죄됨과 어두움과 한계와 무능함을 아는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예수님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다 아는 것처럼, 다 보고 있는 것처럼,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맞고, 내경험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면 비웃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제일 똑똑하니까요. 그래서 자기 이성으로는 천국과 지옥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제 잘났다고 제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교회에 다니면서도 은혜가운데 살지 못합니까? 왜 10년 20년 30년을 교회에 다녀도 생명력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와 연약함과 한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가치나 경험이나 지식들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삽니다. 왜요? 자기가 똑똑하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간절함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지 않고 그야말로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적용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생은 부족하고 연약하고 무지하고 어둠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깊은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 별거 아닙니다. 우리 생각, 이성, 잣대 옳지 않은 것 너무 많습니다. 우리 경험, 지식 정말 작은 것입니다. 시73:22절 보십시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설마 짐승같기야 하겠습니까만 그러나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고 죄가운데 있고 한계와 약함과 허물가운데 있는 것이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이걸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걸 인정한다면 제발 그 알량한 내 생각과 지식과 이성과 경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죄와 어둠과 무지와 연약함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간절히 주님을 부르짖어 찾으며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께서 역사하심으로 정말 새 생명의 은총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께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일단은 자신의 죄와 무지와 작음을 인정하였으면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와 엎드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 인생의 죄와 무지와 연약함과 한계를 해결해 주셔서 온전한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실 분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어두움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인생의 무지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 인생의 현재와 영원한 미래에 대하여 답변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과 구원하심 밖에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거지 맹인 바디매오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라는 고백 속에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결국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47절 말씀 다시 보겠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여러분,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는 ‘나사렛 예수’가 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 여러분, ‘나사렛 예수’와 ‘다윗 자손 예수’는 천지차이입니다. 나사렛은 빈민촌과 같은 곳으로 나사렛 사람은 가난하고 무식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것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의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비하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란 하나님께서 일찍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즉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한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주이심을 믿었기에 그야말로 사생결단하고 요청을 했습니다.

48절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보세요.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너 같은 더럽고 추한 거지가 어딜 감히 예수님께 가까이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존귀하신 예수님이 너 같은 것은 거들떠 볼 시간이 없으니 저리 꺼지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니들이 뭐라 그래도 좋다. 날 무시하고 욕하고 천대해도 좋다. 그러나 난 저분을 붙잡아야 된다. 저분만이 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다 하면서 더욱 큰 소리를 질러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야 합니다. 나오는데 그냥 나오는 둥 마는 둥, 나오면 나오고, 아니면 말고 하는 어정쩡한 태도로 주님 앞에 나오면 은혜받기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 아니면 나는 죽습니다. 은혜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삽니다. 이런 각오로 누가 뭐래도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죽어도 예수님 만나 은혜 받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기어이 받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나올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바로 그랬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시하거나 말거나 욕을 하거나 말거나 그냥 죽자사자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49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드디어 구원의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모든 것 다 팽개쳐 버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이때 예수께서 선포하십니다.

5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간절한 요청을 듣고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말씀한마디에 날 때부터 몇십년 동안 감겨져 있던 눈이 떠져 모든 어둠이 물러간 것입니다. 모든 멸시와 천대와 고통도 사라진 것입니다. 어둠과 좌절과 멸시 속에서 살던 인생이 은혜와 기쁨과 감사 속에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으로 완전히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죄와 무지와 한계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는 진정하고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일한 구세주이시오,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우주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쳐 주십니다. 어둠과 절망과 낙심과 원망과 불평을 없애 주십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시고 생명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살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오늘 바디매오처럼 예수님께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나의 지식도 경험도 이성도 얼마나 작은지요. 그런데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그 알량한 지식과 경험과 이성에 의지해서 살아왔습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소서. 나를 받아 주소서. 오직 주님만이 나의 생명, 나의 기쁨, 나의 구원이십니다. 그러므로 나 이제 오직 주님만을 따르겠사오니 저를 받아주시고 인도하여 주소서하면서 그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의 성령께서 여러분의 심령 속에 임하실 것입니다. 눈이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천국이 선명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어둠과 약한 것들과 추한 것들이 물러갈 것입니다. 오늘 바디매오에게 임했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변화되고 생명의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곳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 크게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이런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낮예배설교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Sunday Sermon)

제목 : 함께 삶의 축복

말씀 : 전4:9-12


1.좋은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인간은 함께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함께 하지 않고는 존재 그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제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지혜가 많고 능력이 많아도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만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가족과 이웃과 사회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본적으로 생존이 가능하고, 문화생활도 가능하고, 물질문명도 발달시킬 수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가족이 없이 어떻게 인류가 존재할 수 있습니까? 이웃과 사회공동체가 없이 인류가 어떻게 이 많은 것을 이룰 수가 있었겠습니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근자에 보면 너무나 개인 이기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남이야 어떻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여기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편한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왜 내가 남을 위해서 희생해야 하느냐, 왜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왜 하기 싫은 일을 남의 이목 때문에 해야 하느냐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편안함만을 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은 생각하지 않고 교회가 무엇을 해 주기만을 바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모습들은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들의 왜곡된 가치관이지 결코 옳고 아름답고 귀한 가치관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이 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가정도 교회도 직장도 사회도 아름답게 유지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갈등과 시기와 분쟁 속에서 상처와 고통과 슬픔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살줄 알아야 합니다. 함께 살려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손해 보아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남의 눈치도 보아야 합니다. 양보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적극 참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이고 그게 우리 사회를 유지하며 우리가 함께 평화롭게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길입니다.

물론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교회공동체는 이 원리가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공동체입니다. 왜냐하면 마귀사탄은 교회공동체를 와해시키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전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과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유혹하여 진리의 길, 생명의 도를 외면하게하고 나아가서는 진리 안에 있는 자들을 핍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탄의 방해공작과 핍박과 도전을 이기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는 것은 물론 더욱 하나 되어 협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탄의 역사를 이기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 가실 때에 특별히 헌신된 사람을 세워주심과 동시에 많은 동역자들을 세워 함께 그 역사를 이루어가게 하셨습니다.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과 갈렙과 여호수아와 같은 훌륭한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요압과 아비새와 후새와 같은 동역자들을 세워 주셨습니다. 바울에게는 바나바와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등의 많은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열 두 명의 제자를 세워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이든 마을이든 회사이든 교회이든 우리는 함께 해야 합니다. 좋은 동역자,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공동체가 아름답게 세워져가고 그럴 때 우리 각 개인이 평안과 자유와 부요함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반대로 그저 자신만을 생각하며 자신의 평안함과 안일함과 유익만을 구한다면 자유와 평안과 번성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갈등과 시기와 분쟁과 상처와 아픔만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9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함께 수고함으로 더 좋은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다 부족하고 허물 많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며 먼저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되 그러나 우리가 서로 하나되어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할 때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아름답게 세워지고 그래서 결국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가정이든 교회이든 직장이든 기타 다른 어떤 공동체이든 결코 분열을 조장하고 공동체의 평화를 와해시키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좋은 협력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협력자가 되어 함께 수고함으로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사회를 아름답게 세워감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주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협력이 그토록 절실하게 요청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론 앞에서 개괄적으로 말씀드렸지만 본문의 내용을 통해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혼자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뭐 사실 말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함께해야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던 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쉽게 말하면 힘을 모으고 뜻을 모아 함께 수고할 때에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그게 바로 함께 함의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뭐 사실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일이라도 여러 사람이 함께 하면 훨씬 능률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도 두 사람이면 할 수 있고, 두 사람이 못하는 일도 세 사람이면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100Kg의 물건은 천사장사라면 모르겠지만 웬만한 사람은 혼자서는 자신의 힘만으로 들어 옮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옮길 수 있습니다. 세사람이라면 더 쉽게 옮길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인 협동의 원리인 것입니다. 비단 물리적으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지적 감정적 정신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한사람의 지식과 지혜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열사람의 지식과 지혜를 모으며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함께 하면 서로 힘과 위로와 격려와 용기와 의욕을 줌으로 몇 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마 많인 들어본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기러기들은 먼 거리를 이동할 때 보통 V자 형태로 날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형태로 무리를 지어서 날아가면 혼자서 날아갈 때 보다 70%의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뒤에서 날아가는 기러기들은 앞에서 날아가는 기러기들이 날개짓을 하면서 일으킨 바람을 타고 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앞의 기러기가 에너지를 방출하여 일으킨 기류를 다른 기러기가 활용하여 날아감으로 다른 기러기는 최소의 에너지를 가지고 멀리 날아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에 있는 기러기가 당연히 먼저 지치겠지요. 그러면 다른 기러기가 교대하여 앞에서 인도하는 방법으로 멀리 간다는 것입니다. 참 대단하지요.

인간의 삶도 동일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마음과 힘을 합하여 일하면 서로 상승작용을 하게 됩니다. 서로 격려가 되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의욕을 주고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같은 일도 훨씬 쉽고 효과적으로 기쁨으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무슨 일을 하든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협력하지 않으면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지 않고 심지어는 열심히 함께 하는 일에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반대하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맥이 빠지고 의욕이 꺽이고 힘 빠지게 만들어 점점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도 안하고 남도 못하게 만드는 심각할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어느 집단에 있든지 좋은 협력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마을과 사회에서 결코 공동체를 분열시키거나 갈등관계를 조장하거나 걸림돌이 되지 말고 좋은 협력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세워주고 그래서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힘든 사람을 세워 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협력의 또 다른 유익은 서로를 세워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세워줌으로 가정이든 교회이든 다른 어떤 공동체이든 결국 공동체를 잘 세워 나감으로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보겠습니다.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말씀 그대로입니다.

만약 길을 가다가 제법 깊은 곳에 떨어져 큰 상처를 입었는데 옆에 아무도 없어 도와줄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행자가 있어서 이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고, 얼른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해 준다면 생명을 보존하고 온전히 회복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꼭 육체적으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큰 시련으로 절망가운데 있을 때 그와 함께 하는 사람이 없다면 이 사람의 절망감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와함께 하며 그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위로하며 격려와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 주면 절망감은 축소되고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자살하는 사람들의 80%는 자살을 시도하기 수개월 전부터 어떤 형태로든 자살의 징조를 보인다고 합니다. 이런 낌새를 바로 알아채고 누군가 곁에서 도움을 주면 대부분의 자살은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의 사람들이 이를 잘 알아차리지를 못함으로 실제로 자살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함께 함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니겠습니까?

죄의 유혹을 받을 때도 그렇습니다. 죄의 유혹 속에 갈등하고 있을 때에 아무도 그와 함께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를 권면하고, 만류하고, 통제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쉽게 죄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함께 하며 그의 잘못된 생각들을 진정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해 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 준다면 죄의 구렁 속에서 헤어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도 때로는 절망감에 빠지거나 원망과 불평 속에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때 그와 함께 하는 신실한 신앙인이 없다면 자칫 불신의 늪으로 빠져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그를 위해 기도하며 권면하며 위로할 때 그는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함께 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좋은 동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마을에서나 좋은 동행자, 좋은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 주고, 위로자가 되고, 기도해주며, 돌보아주며, 감싸주며, 용기를 북돋아주고, 희망과 소망을 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정말 아름다울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공동체는 아름답게 세워지고 그 가운데서 우리의 삶도 더욱 평안하고 가쁨과 은혜와 소망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느 곳에 있든 좋은 협력자, 동행자가 되어 가정과 교회와 이웃과 직장과 다른 모든 공동체를 아름답게 세워나감으로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려드리고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도 아름답게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함께 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함께 함의 또다른 유익은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사랑과 기쁨과 은혜가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이 말씀은 팔레스틴 지역의 기후적 특성에서 나온 경험담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팔레스틴 지방은 광야가 많는데 광야지역은 낮에는 매우 뜨겁고 덮지만 일단 해가 지고나면 무척 쌀쌀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광야에서 여행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밤이 되면 함께 모여서 일부의 겉옷은 아래에 깔고 일부는 함께 덮고 자곤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침구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게다가 서로의 체온 때문에 밤의 추위를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하면 따뜻합니다. 단지 몸만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몸도 마음도 영혼도 따뜻해지고 기쁨과 은혜가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혼자 있으면 어떻습니까? 혼자서는 기쁨도 사랑도 환희도 열정도 갖기 어렵습니다. 육체적으로 따뜻하지 않습니다. 마음적으로도 외롭습니다. 영적으로도 뜨거운 열정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장작불은 모여 있을 때에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마음적으로 영적으로 여럿이 함께 할 때에 열정과 기쁨과 감격을 느끼기 쉽습니다.

여러분, 가정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정에 부부가 있고 자녀가 있고 그러면 얼마나 보기가 좋습니까? 그런 곳에 이야기가 있고 웃음이 있고 기쁨이 있고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으면 얼마나 적적하겠습니까? 몇 년 전에 우리 집 양반이 병원에서 3주 입원해 있는데 나 혼자 집에서 자려니까 얼마나 적적한지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러니 가족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한 일입니까?

또 교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교회에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옆에 계신 분들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존재들입니까? 이렇게 고맙고 소중하고 감사한 존재라면 우리가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서로를 세워주고 위로와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면서 더불어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되새기며 정말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그래서 함께 하면서 좋은 동행자로 협력자로 살아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함께 하면 어려움을 이깁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함께 함의 또 하나의 유익은 난관에 봉착해도 실망하지 않고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혼자 하다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일도 여럿이 하면 어렵고 힘든 일도 포기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잖아요. 어떤 이일을 추진하다가 난관에 봉착했어요. 물론 우리는 그때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혼자할 때는 잘 안될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고 용기를 줄 때 다시금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힘써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여러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마귀는 바로 그렇게 혼자 할 때를 공격의 기회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는데 함께 하는 자가 없고 기도도 위로도 격력도 용기도 주지 않으면 자칫하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마귀는 이렇게 약한 때를 이용하며 더 수작을 부립니다. 거봐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공연히 헛수고하지 말고 그만둬라. 그리고 또 솔직히 네가 뭐라고 그렇게 열심히 하려고 하느냐? 대충해라. 그냥 적당히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살아라. 그게 네 신상에 좋다. 하면서 온갖 수작을 부리며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무기력하게 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믿음의 동행자가 있어서 기도해주고 격려해주고 힘을 주고 용기를 주면 다시금 힘을 얻어 믿음의 길로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나아가 결국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가정이든 교회이든 직장이든 기타 다른 어떤 공동체이든 결코 분열을 조장하고 공동체의 평화를 와해시키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좋은 협력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협력자가 되어 함께 수고함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사회를 아름답게 세워감으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나라도 이루어가며 주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설교( 설날)  /복된 동행, 복된 인생(Sunday Sermon)

제목 : 복된 동행, 복된 인생

본문 : 창5:21-24

 

1.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복된 인생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민족의 명절인 설날을 맞이하여 모든 성도 여러분과 고향을 찾은 모든 성도여러분의 가족과 일가친척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귀한 설 명절을 맞이하여 온 가족 친지들이 함께 모여서 정말 하나님 앞에 큰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혈육간에도 진정 아름다운 사랑과 은혜를 마음껏 나누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저는 명절 때면 가끔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저희 집은 가난해서 초가 삼 칸에 살았는데 우리 이웃에는 안채는 커다란 ㄱ자 기와집이고 사랑채도 우리 집보다 훨씬 좋은 기와집인데다가 큰 대문이 있는 부잣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집을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집에는 제 또래의 예쁜 소녀가 살고 있기도 해서 가끔 그 집 대문 안을 기웃거려 보곤 하였습니다. 그 집 안뜰에는 화단도 잘 가꾸어져 있었고 여기저기 꽃나무도 심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명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성대하게 제사도 지내는 등 그 집은 저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때는 제가 어린 마음에 철도 없고 예수님도 몰랐기 때문에 부러워하긴 했는데 그게 정말 부러움의 대상일까요? 물론 뭐 그런 것도 좋은 것이긴 하지요. 가난하고 초라하게 사는 것보다야 기왕이면 좋은 집에서 좋은 옷 입고 좋은 것 먹으며 좋은 환경에서 사는 게 좋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그러한 외적인 환경들이 우리를 정말 아름답고 귀하고 가치 있고 복되고 위대한 인생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귀하고 아름답고 대단하고 멋있는 인생은 말할 것도 없이 완전히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며 그 뜻대로 바르게 아름답게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생의 가치가 있고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대궐같은 집에서, 명절이면 시커먼 승용차가 몇 대씩 몰려오고, 뭐 가문에서 장관이 나고, 판검사가 나고 그래서 집안에 큰 일이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는 것들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여러분, 그런 것들 정말 별거 아닙니다. 암만 그래봐야 그런 것들이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가치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하여 거짓과 편법을 행하기 쉽고 그래서 상처와 고통을 주기 쉽고, 시기와 질투를 유발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런 것들 바라보다가 하나님과 멀어지고 그래서 결국 영원한 진노를 당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떵떵거리며 잘먹고 잘사는 것이 멋있고 가치있고 위대한 삶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건 죄와 무지와 왜곡된 가치관속에 있는 인생들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정녕 중요한 것은 우주 만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며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시며, 생명의 주관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 안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주님과 동행하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이라야 지금 여기서도 정말 아름답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인생이요, 나아가서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인 것입니다.

잠4:7~9절을 보겠습니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 보세요. 지혜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도를 따르는 것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지혜를 얻고 지혜를 높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영화로운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의 도를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복된 설명절에 오늘까지 하나님안에서 살아온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에 정말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그렇게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귀하고 복된 인생이 되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생명이시고 기쁨이시고 평안이시고 영광이신데 그 주님과 동행하면 그 은총을 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총을 주지 못하는 것들과 동행하면 어찌 그 은총을 누리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에녹이라는 사람은 온전히 주님과 동행함으로 놀라운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인간적으로는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것도 아니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도 없습니다. 22절 말씀 보세요.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므두셀라는 그냥 보통 사람으로 밥먹고 일하고 결혼해서 아기 낳아 기르면서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에녹에게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 이래로 오직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에녹과 선지자 엘리야, 이 두 사람에게만 주어졌던 너무나 영광스럽고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육체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24절을 보겠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말씀그대로 에녹이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니까 그를 산채로 데리고 가셔서 세상에 있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황홀했겠습니까? 산채로 그 몸이 영화의 몸이 되어 두둥실 떠올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꿈속에서 가끔 새처럼 날아다닐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속된 말로 기분이 얼마나 째집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건 속된 말로 새발의 피도 안됩니다. 에녹은 더 이상 세상의 시간과 공간과 모든 힘들고 약하고 어려운 것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화의 몸이 되어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올라간 것입니다. 한번 그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슴이 벅차오르고 황홀했겠습니까? 너무나 감격스러워 할렐루야! 할렐루야가 저절로 터져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에녹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까요? 그것은 앞에서 보았던 22절과 24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게 뭡니까?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에녹은 365년을 살면서 온전히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가는 특별한 은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면 분명히 은혜를 충만하게 받습니다. 당연하잖아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신뢰와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죽어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믿음이 있다면 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이 안되는 것은 자꾸 세상에 뭐 다른 좋은 것은 없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좋은 것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요? 하나님 안에 정말 좋은 게 있는데 왜 한눈을 팔겠습니까? 그런데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들이 자꾸 다른 것을 바라봅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즐거움을 바라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동행이 잘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면 곤란한 거예요. 이건 결국 하나님을 잘 못믿는 거예요. 안 그래요? 아니 하나님 안에 생명과 기쁨과 진리와 은혜와 사랑과 평안과 축복이 있는데 왜 그걸 놔두고 엉뚱한데 가서 기웃거리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직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상황에서도 이걸 잊지 말고 그저 갓난아기처럼 사나 죽으나 하나님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잘났다고 내 생각이나 가치관이나 경험이나 지식을 따라 내 눈에 보이는대로 살아가지 말고 주님이 가시는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까짓 별것 아닌 세상의 돈이나 명예와 권세나 지식이나 이런 것들 따라가지도 말고 오직 우리의 유일한 생명이시며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의 목표와 방향을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으나사나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데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목표에 우리의 뜻과 우리의 뜻을 일치시켜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려면 하나님과 뜻이 같아야 하고, 방향과 목표가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울이 목표인 사람과 부산이 목표인 사람이 함께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의사가 되려는 사람과 축구선수가 되려는 사람이 같이 공부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목표와 내 목표가 다르면 결코 동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과 목표와 방향이 일치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내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하나님의 목표와 방향과 뜻에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 안에 생명과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와 무지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고 배운 것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향과 나의 방향이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이걸 일치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날 따라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데,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나의 뜻보다 높고 깊고 완벽하신데 하나님께 나를 따라오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요10:2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목자이신데 거기에 생명과 평안과 안식이 있는데 무얼 따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말씀 듣고 기도하며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과 목표와 방향을 고집하지 말고, 자꾸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목표와 방향에 맞추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과 온전히 동행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과정과 방법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목표와 뜻이 같더라도 방법이 다르면 동행할 수 없습니다. 안 그래요? 같이 제주도가 목적지라해도 한 사람은 비행기 타고 가고 한 사람은 배타고 가면 동행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백두산에 오르면서 한 사람은 중국 쪽에서 올라가고, 다른 사람은 북한 쪽에서 올라가면 동행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려면 목표와 뜻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과정과 방법까지도 하나님의 뜻과 동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물질만능주의, 과학지상주의, 개인이기주의 풍조가 만연된 세대에서는 우리는 이점을 특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돈도 많이 벌고, 출세도 하고, 권력도 얻고, 문명의 이기도 가능한 많이 누려야 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문화적 혜택을 보다 많이 누리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공부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을 벌고, 지식을 쌓고, 권력을 얻고, 문화생활을 즐기되 그러한 것들을 획득하고 누리는 과정이나 방법들도 하나님 뜻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만한 방법과 과정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도 얻고 또 얻은 것들을 사용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현대인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무엇인가를 얻는 과정에서도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방법과 과정을 무시한 채 얻으려고 할 때가 많고 또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사용할 때에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해야 하는데 그저 자신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진정한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할뿐더러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고 시기와 질투와 갈등과 싸움을 유발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은 결코 성공할 수도 없고 진정한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설령 인간적으로 성공을 한 것처럼 보여도 결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면 설령 많은 것을 가졌어도 물거품이 될 것이요, 더 나아가서는 결국 심판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11:9절을 보십시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목표와 방향을 하나님의 뜻에 맞춤과 동시에 그것을 이루는 방법과 과정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추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설령 돌아가는 일이 있어도, 설령 늦게 성취하는 한이 있어도, 설령 성취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오직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그저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생각대로 어떤 일들을 추진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그렇게 해서 얻은 것들을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하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동행하는 삶을 위하여 또 하나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에녹은 무려 300여년 간이나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연합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해 있으면 자연히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어떻게 동행이 가능합니까? 연합되면 가능한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영적으로 서로 한 덩어리로 묶여져 있으면 온전한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면 기분이 좋고 사이가 좋고 상황과 환경이 좋으면 어느 정도 동행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뭔가 좀 상황과 환경이 좋지 않다거나 둘 사이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동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묶여져 있으면 기분과 환경과 상황에 관계없이 함께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완전히 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절대 분리되면 안됩니다. 주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인과 종으로 연합된 것 아닙니까? 그렇게 주인과 종으로 연합되었으면 이제는 당연히 주님이 생각하는대로 생각하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말하고, 주님이 가시는 곳에 가고, 주님이 하시는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합된 관계요 그러면 자연히 동행하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 15:5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과 온전히 연합되어 주님을 멀리하거나 따로따로 놀거나 세상의 것을 바라보며 엉뚱한 것과 동행하지 말고 오직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그래서 내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주님께 맞추시기 바랍니다. 그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여러분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도 오직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주님과 온전히 연합되어 동행할 때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주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기쁨과 감사와 위로와 평안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낮예배설교 /  세상을 이긴 사람들 (Sunday Sermon) 

제 목 : 세상을 이긴 사람들

말 씀 : 요16:31~33

 

1.자신의 무지를 알아야 합니다.

금번 설날에 저도 87세 되신 어머니가 계셔서 고향에 가서 하룻밤 자고 왔는데요, 저녁 때 쯤에 저희 형님이 바둑을 좋아하셔서 바둑 TV에서 프로 9단끼리 두는 바둑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보고 있더니 ‘에이, 저건 아무래도 너무 과했다.’ 그러는 거예요. 내 참 기가 차서.... 지금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몇단 이라고요? 프로 9단. 우리 형님은 아마 3급쯤 되는 것 같아요. 바둑에서 프로 9단이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서 입신이라고 하는데 아마 3급 주제에 감히 입신들이 두는 바둑을 보면서 과했다니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아도 유분수지 감히 누구 앞에서 판단을 하는 겁니까? 정말 가소롭지 않습니까? 아마 3급짜리하고 프로 9단하고 맞바둑을 두면 아마 살아 남을 게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 감히 판단을 하다니 정말 가소롭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쩌면 그게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실상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고 배워서 아는 세계는 정말 쥐꼬리 만큼도 안되는데 마치 세상 모든 걸 아는 양 말하고 행동할 때가 너무나 많다는 거죠. 여러분, 안 그래요? 이 무한한 우주공간속에서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아니 우주 공간은 고사하고 지금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 것들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게 부지기수입니다.

지금 우리 눈 앞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먼지들이 떠다니고 있고, 음파, 전자파, 바이러스, 세균들을 비롯한 별의 별 것들이 다 떠다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시고 있는 공기 중에는 질소, 산소, 아르곤, 이산화탄소, 탄산가스, 네온, 헬륨, 메탄, 크리프톤, 수소, 아산화질소, 키세논 등 12가지의 물질들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들이 하나나 보입니까?

여러분, 소리는 얼마나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인간의 가청 주파수는 20hz~20Khz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귀가 아주 밝을 경우이고 보통은 그 절반인 50hz~10Khz대의 음파만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즉 귀가 아무리 밝아봐야 세상에 존재하는 소리의 몇백분의 일, 몇천분의 일도 못 듣고 있고, 눈이 아무리 밝아봐야 우주공간 속에 우리가 볼수 있는 것은 몇억분의 일도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는 것도 그렇고 경험한 것도 그렇습니다. 모르는 것이 백배 천배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세상 일 다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도 없고 천국도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떠듭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죽어라고 안 믿습니다. 또 어떤 분은 성경을 보면서도 이건 도대체 말이 안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여러분, 이런 모습들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저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조용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냥 아멘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달리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거예요.

고전1:25절 말씀보세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은 어리석은 것도 없고 약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 만에 하나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사람의 가장 똑똑하고 잘나고 강한 것보다 하나님의 약하고 어리석은 것이 천만배 강하고 똑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된 말로 까불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잠3:5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약함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아멘으로 화답하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모든 능력과 생명과 기쁨과 평안의 근원이신 주님의 은총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하나님 안에 온전한 승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해하지 못하고 믿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경험과 이성을 내려놓고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셔서 결국 진리의 길로 달려가게 되고 그 대에 진정한 승리자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우리가 좀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있는데요, 33절 말씀 보겠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이 뭐가 이해가 안가냐? 그것은 이 말씀을 주실 때의 상황을 알면 왜 이해가 잘 안가는 말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때의 상황은 32절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같이 보실까요?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너희가 곧 흩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 혼자 있을 거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런 말씀이지요. 즉 이때는 예수님이 곧 체포당하시고 십자가의 처형의 때가 가까운 시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말이 안 되잖아요. 이제 곧 군인들에게 잡혀서 온갖 조롱과 핍박과 멸시와 침 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채찍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분이 세상을 이겼다니 이게 말이 되냐구요?

그러나 결과는 어땠습니까? 물론 당연하지만 예수님 말씀처럼 결국 이기셨습니다. 무지한 로마병정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조롱과 채찍과 침뱉음과 십자가 죽음의 권세를 다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내 안에 있는 너희도 이길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 너희에게도 반드시 승리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제자들도 그 말씀대로 믿음으로 승리하고 영원한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 작은 지식과 이성과 경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뜻을 살피고 주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답이 보이고 길이 보입니다. 승리의 길이 열립니다. 인생의 승패는 외적인 환경이나 상황에 의하여 의하여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인생의 승패는 오직 믿음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 알량한 지식이나 경험이나 이성을 의지하는 자는 100% 실패합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과 복과 은혜와 평안의 근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100% 완전한 승리자가 됩니다. 그래서 요일5:4에서는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자신의 생각과 이성대로 판단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 때에 진정한 승리자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32절)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은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32,33절 다시 보십시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너희가 나를 버리고 떠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떠날지라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따라서 나는 반드시 승리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의 그 능력과 지혜와 권세와 사랑과 은혜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할 것이다. 때로는 환난과 핍박이 있겠지만 그것은 패배가 아니다. 결국 너희들은 영광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따르는 너희들에게도 나와 함께하는 내 아버지께서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께서 함께하시는 한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아버지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너희들의 사명을 감당하거라. 이런 말씀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이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승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망할래야 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망할 수 없습니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고 하였지만 용기는 가상하지만 교만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있습니다. 실패가 있습니다. 낙심과 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런 따위는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오직 승리와 기쁨과 생명과 은혜와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영원무궁하십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는 그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반드시 승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니 안 그래요? 어떻게 집니까? 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한번 말씀해보세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는데 져요?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져요? 어떻게 져요? 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이깁니다.

롬8:37~39절 보세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인 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혹시 어려움이 있어도 잠시 잠깐입니다.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뭔가 그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지금에 눈에 보이지 않아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이요 부족함이요 어리석음이지 결코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혹시 인생의 여정에서 무언가 앞이 좀 어둡다고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원망하거나 근심하고 좌절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 앞에 기도하며 주님을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시든지 능력과 지혜와 용기를 주셔서 이기게 하시든지 여하튼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에서도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33절)

여러분, 우리가 승리할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와 평강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33절 다시 보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러분, 보세요.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비록 지금 육체적으로는 너희를 떠나지만 그러나 영으로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너희가 나와 함께 하면 내 안에 있는 은혜와 평안이 너희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고 감사와 기쁨으로 너의 일을 하라. 그러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그냥 함께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평강은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므로 그 안에 있는 자는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게 되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100%이깁니다.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식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승리가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거기에 성공한 사람은 성공한 인생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런 것들 바라보고 거기서 인생의 성공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100% 실패합니다. 당연하잖아요? 사람이든 물질이든 지식이든 사람에게서 오는 것은 다 불완전하고, 다 한계가 있고, 다 죄에 오염되어 있고, 썩어지고 사라지는 것들 아닙니까? 그러니 그런 것들이 어떻게 우리를 지켜줍니까? 지켜주기는커녕 그런 것들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듦으로 죄사함의 은총을 얻지 못하여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하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완전합니다. 끝까지 나와 함께 합니다. 아니 끝이 없습니다. 100% 확실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 구애되지도 않습니다. 모든 조건과 환경과 상황과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토록 우리에게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요14:27절을 보세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 안에 있으면 세상이 주는 것과는 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완전히 다른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와 평강을 주셔서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완전한 평강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약합니다. 어리석습니다. 모자랍니다. 미련합니다. 죄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서는 반드시 집니다. 마귀사탄과 나 혼자 싸우면 절대로 승리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십니다. 은혜와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100% 승리합니다. 감히 사탄이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믿음으로 살았던 우리의 위대한 신앙의 선진들은 모두가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노아는 그러한 믿음으로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120년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며 노아의 가족을 무시하고 조롱하였고, 그 배를 짓느라고 수없는 어려움과 힘든 일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구원의 날을 바라보며 방주를 지어 결국 그 가족 여덟 식구가 구원받아 최후의 승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조건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말씀을 듣고 고향을 떠나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기고 부인을 빼앗길 뻔하기도 하고 아들 이삭을 그것도 백살에 낳은 외동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도 안되는 명령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생각이나 세상적인 척도가 아닌 오직 주님을 믿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바울은 수없이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지만 그러나 결국 믿음으로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에게도 여러 가지 기가 막힌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사울에게 쫓겨 다른 나라로 도망가 몇 년동안 고통의 세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자식에게 쫓겨 도망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범죄로 선지자에게 혼나고 자식이 죽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결국 가장 위대한 성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일희일비하지도 말고, 내 생각이나 지혜나 경험으로 판단하지도 말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고 인생 끝난 것처럼 좌절하고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누구도 무엇도 당할 수 없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상황과 환경이 좋지 않아도 주님의 방법을 따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용기와 지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진정한 승리의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낮예배설교 /향기로운 인생 (Sunday Sermon)
제목 : 향기로운 인생

말씀 : 고후2:14-17

1.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일제 시대에 한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이때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잡아 가 때려서 놓아주기도 하고 주동자들을 잡아가두기기 하던 때였습니다. 물론 이 장로님에게도 일본 순사들이 와서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끝내 거부하셨습니다. 그래서 몇 번 매를 맡고 풀려나곤 했는데 어느 날 다시 일본 순사가 와서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장로님은 “내 믿음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썩어 냄새가 나면 이런 똥파리 같은 것들이 달라붙느냐?”면서 통곡을 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나를 유혹해 온다면 유혹하는 그 사람을 나무라기 전에 내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얼마나 내가 만만하고 우습게 보였으면 나를 유혹하겠습니까? 나에게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지 않고, 거룩한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까 자꾸 나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저도 회사에 다닐 때 술도 한잔씩하고 담배도 좀 피웠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교회에 다니기 시작할 때는 회식 자리에 가면 동료들이 의례히 저에게 술을 권했습니다. 아직 저에게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세월이 좀 지나고 내 입에서 찬송가가 흥얼거리며 나오고 회사생활도 뭔가 모르게 달라지기 시작하고 일체 술담배를 끊어버리자 다음부터는 누구도 술을 권하지 않고 콜라를 따라 주었습니다. 이건 진짜 예수쟁이가 됐구나하는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사탄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 안에 온전히 들어가서 예수님의 말과 생각과 가치관과 삶의 모습을 가지고 예수님의 향기를 발하며 살아가면 사탄 따위가 나를 만만하게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냄새가 나지 않고 자꾸 사람 냄새가 나고 돈 냄새가 나면 사탄이 우습게 여깁니다. 그래서 유혹합니다. 사람 냄새 돈 냄새가 나면 그걸 이용해서 우리를 농락합니다. 그러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사람 냄새는 더욱 진동하고 악취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은 좋다고 낄낄거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조롱하고 욕하고 비난하고 공격하고 그래서 내 꼴도 우습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막아버리는 어리석고 미련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냄새를 풍겨야 합니다. 향기가 나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군인은 사복을 해도 어딘지 모르게 군인 냄새가 나고, 형사는 어딘지 모르지만 형사라는 표가 나고, 깡패는 왠지 모르게 깡패 느낌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예수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나를 대할 때에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 이 사람이 목사쯤 되나보다. 장로나 집사나 권사쯤 되나보다. 이런 생각을 갖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옛사람은 죽고 새로 태어나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깨끗하심과 진실하심과 성실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닮아가며 예수님의 가치관과 목표와 방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면 당연히 예수님의 냄새가 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15절 보세요.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우리는 믿는 자들에게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나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주님의 은총을 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려주어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살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주님을 영접하여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난 사람들로서,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옛 생각과 가치관과 삶의 모습을 버리고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깨끗하심과 진실하심과 사랑과 은혜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속에서 주님의 향기가 남으로 주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사람들에게 기쁨과 은혜를 주며 여러분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존중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그리스도 안에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향기를 발할 수 있는 제일의 조건은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겠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보세요.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그리스도안에서’ 이김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게 하셨음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거듭나고 예수님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말할 것도 없이 오직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거듭나고 그래야 새로운 가치와 목표를 갖게 되고 그래야 온전한 생명을 얻고 새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온전히 주님께로 들어가고 주님이 온전히 우리 안에 들어오시지 않으면 어떻게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새 새람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주님의 향기를 발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주님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여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가치관과 이성과 경험과 지식을 다 내려놓고 주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나의 구세주로 모셔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먼저 죄사함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나게 됩니다. 동시에 주님의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덧입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능력과 은혜와 지혜로 악한 것들의 유혹과 도전을 이기고,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를 이기고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하고 성실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나도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우리의 그 알량한 지식이나 경험이나 이성이나 자기 생각들일랑 다 내려놓고 온전히 주님을 심령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온전히 거듭나 새생명을 얻는 것은 물론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이 되어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의 은총 충만하게 누리며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주 안에서 라는 말씀 속에서 또 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주님 안에 있다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정말로 예수님 안에 있는 생각인지 아닌지, 내 말이 정말 예수님이 기뻐하고 인정할 말한 말인지 아닌지,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려면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실 일인지 아닌지, 무슨 계획을 세우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인지 아닌지, 어디를 가려면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실 일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삶의 기준이요, 근거요, 방향이요,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까? 전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주인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주인이 되었으면 이제는 내 맘대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오직 주인이신 예수님 마음대로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예수님이 나를 지배하니 이제는 입만 벙긋하면 그리스도가 나와야 하고, 무언가 생각하려고 하면 벌써 예수님이 떠올라야 합니다. 무언인가를 결정하려고 하면 벌써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라야 합니다. 무언가를 말 하려면 먼저 예수님이 생각나야 하고 무언가 행동하려고 하면 그리스도가 그 앞에 계셔야 하고, 어디를 가려고 하면 그리스도를 앞장 세우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역사하고 예수님의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덧입게 되고 그러면 나에게서 정말 예수님의 냄새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감히 사탄 따위가 대들지도 못하고 대들어도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어둠의 세력들이 자꾸 달려드는 것은 무언가 나를 만만하게 보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될 성 싶으면 달려들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언가 나에게서 어두운 냄새가 나기 때문에 어둠의 세력이 친구하자고 자꾸 덤벼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가 상대방이 자신보다 쎄 보이면 어떻게 합니까? 꼬랑지를 팍 내립니다. 그래서 호랑이가 오면 개는 오줌을 질질 싸면서 오금도 펴지 못하고 꼼짝도 못합니다. 그러나 개도 뭔가 자심보다 약해보이면 꼬리를 바짝 치켜들고 사납게 대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하고 있으면 사탄이 꼼짝 못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능력은 없고 세상 냄새 사람 냄새를 풍기면 사탄이 꼬랑지를 치켜세우고 사납게 덤벼듭니다. 똥이 있는 곳에 똥파리가 똥냄새를 맡고 꼬여들 듯이 사람에게서 구린내가 사탄이 똥파리처럼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영적인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향기가 나고 예수님의 향기가 나면 똥파리가 꼬이지 않습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들도 쫓겨납니다. 모든 육신의 욕망과 이기심과 탐심과 염려와 근심과 원망과 불평 이런 것들이 쫓겨나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과 환경과 여건과 조건을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향기도 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면서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강만이 가득한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 온전히 들어가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그리스도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으로 예수님의 향기를 발하고 모든 어두운 세력들을 이기고 예수님의 생명과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신앙의 지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려면 일단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 안에서 분명한 신앙의 지조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향기가 될 수 있고, 그래야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16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뭡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안에 생명이 있음이 확실히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냄새도 같은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예수님 믿지 않으면 지옥가는 게 사실인가 보구나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할 것도 없이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환경 속에 있어도 오직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오직 주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선과 거룩함으로 감사와 기쁨과 은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죽어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진리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어떤 환경 속에서도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심지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과연 천국이 있기는 있나보다, 정말 지옥이 있기는 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생명의 냄새가 되고 한편으로는 사망의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오직 예수님의 능력을 덧입어 신앙의 순수성과 지조를 지켜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거기서 무슨 예수님의 냄새가 나겠으며 무슨 생명의 냄새가 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데 거기서 무슨 진리를 발견하겠습니까? 그러나 죽으나 사나 심지어는 목숨을 내놓고 믿음을 지키며 선과 진리와 의의 길을 달려갈 때에 아, 과연 저기에 무엇이 있구나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신앙의 순수성은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한마디로 말씀따라 가는 것입니다. 오늘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쉽게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 세상의 것을 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나 경험이나 지식이나 세상의 풍조나 가치관이나 무슨 이해타산이나 그 어떤 것도 희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갓난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고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진실로 예수님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게 생명이고 선이고 진리입니다. 그게 인생의 등불입니다. 오직 그걸 따라가야 합니다. 이게 구별된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지식과 이성과 경험과 돈과 명예와 세상 즐거움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그건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죽음의 길입니다. 다 썩어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 따라가면 썩은 냄새가 납니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거짓과 속임과 싸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은혜도 누리지 못하고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는 삶이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 죄과로 영벌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걸 따라가면 안됩니다.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그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자기들과 같은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먹고 마시고 놀아주면 좋다고 할 것 같지만 마귀의 속임수 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속으로 나나 별로 다를 것 없네. 니나 내나 뭐 똑 같네. 그럴 바에야 공연히 돈받쳐 시간받쳐 예수 믿을 필요가 뭐 있냐? 니나 내나 똑 같을 바에야 일요일 날 어디 놀러나 다니지, 헌금할 돈 있으면 취미생활이나 실컷 하지 뭐하러 교회에 가서 설교나 듣고 앉아 있을 필요가 뭐 있냐 그럽니다. 그러나 정말 오직 말씀 안에서 순수한 믿음 가운데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서 사랑과 소망과 은혜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어, 내가 정말 잘못 사는 건가? 저들이 주장하는 게 정말 맞는 건가 하면서 뭔가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내가 만약 우리 교회 옆에 사는 불신자라면 우리 교회에 오고 싶은 마음이 있을까? 나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에 오고 싶은 마음이 들까? 여러분은 생각은 어떠신지요? 우리 교회 주변의 사람들이 지금 우리 교회에 오고 싶은 마음이 있을까요? 또 여러분을 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때문에 교회에 오고 싶은 마음이 있을까요? 어떤 며느리가 그랬다지요? 우리 시어머니가 가는 천국이라면 나는 절대로 안가겠다고.......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아니 서글픈 정도가 아니라 이건 결국 우리가 천국문을 막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정말 좋은 모습, 아름다운 모습,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고 선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주님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향기를 맡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해야 합니다. 교회에 가보고 싶은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생명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네가 다니는 교회라면 나도 정말 가보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안에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야 합니다. 오직 주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도 기쁘시게 해드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고 우리들 자신도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면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중받으며 주님의 귀한 역사도 이루어가는 복되고 귀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낮예배설교 /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인생( Sunday Sermon)

 

말씀 : 계1:1~3

제목 :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인생

1.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여러분, 방송에서 북한에 대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참 가관이지 않습니까?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서 김정은 앞에서 열광하는 모습이나 모란봉 악단이니 무슨 악단이니 하는 것을 만들어놓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김정은을 찬양하는 모습이나 김정은의 측근들이 손자뻘 되는 김정은 앞에서 안절부절하면서 무릎을 꿇고 아부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오죽하면 저러겠나 하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저 짓을 하고 있나하면서 정말 딱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아마 둘 중에 하나일 겁니다. 하나는 진짜로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나 김정은을 위대한 지도자로 알기 때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거기 붙어서 아부하며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겠죠.

그러면 여러분,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뭐 좀 생각나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 보세요. 북한 주민들 중 어떤 사람들은 김정은을 위대한 지도자로 생각하며 저렇게 열광적으로 찬양을 하고 복종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저런 망나니 같은 김정은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얼마나 영광을 돌리고 얼마나 열광적으로 찬양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고작해야 육신의 생명을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 권력자 앞에서도 저렇게 두려워서 벌벌 떨고 어쩔 줄 몰으며 복종하고 있는데 하물며 영혼을 천국에도 보내고 지옥에도 보내는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며 순종하며 살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바르게 안다면 정말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고, 경외한다면 마땅히 순종해야 합니다. 아니 진짜 안 그렇습니까? 세상의 별것 아닌 권세에도 그렇게 두려워 떠는데 어찌 그것과는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는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저 어리석고 무지 몽매하고 악한 인간에게 속아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그 앞에 순종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그 능력과 사랑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은혜와 구원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안다면 어찌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며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마8장에 보면 유명한 로마의 백부장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중풍병에 걸려 몹시 괴로워하는 하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 백부장을 가상히 여겨 흔쾌히 가서 고쳐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가 뭐라고 합니까? 마8:8절을 한번 보실까요?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여러분, 정말 얼마나 순전한 믿음입니까? 여러분, 여기에 보면 두 가지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은 우주만물의 절대적인 주권자로서 나 같은 인간은 주님의 종노릇 할 자격도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는 것은 그런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주님은 우주만물의 절대적인 통치자이기 때문에 주님이 굳이 가실 필요없이 그냥 말씀 한마디면 그까짓 중풍병은 물러갈 수 밖에 없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경외심과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을 때 주님께서 그 믿음에 감동받아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고 하시면서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하시니까 즉시 중풍병이 나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경외심과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을 아는 자의 올바른 태도이고 바로 그럴 때 능력이 임합니다. 은혜가 임합니다. 당연하잖아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전적인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고 따라가는데 주님이 왜 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은혜와 능력을 주시면 불가능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믿음으로 그 앞에 겸손히 엎드리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정말 그 알량한 지식 경험 이성 생각 가치관 그거 좀 고집하지 말고 진심으로 경외하며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아, 정말 어떤 때 답답할 때가 있어요. 정말 인간의 생각 경험 이성 지식 먼지 만도 못한 건데 왜 그걸 내려놓지 못하고 자꾸 그걸 따라가려고 하는지. 그래서 하나님과 경외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교회 생활하고.....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덧입겠습니까? 여러분, 꼭 겸손히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경외하며 따라감으로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은총과 그 안에 있는 구원과 생명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안 그래요? 거기 생명이 있고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고 그래서 그 안에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는데 어찌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잖아요. 그 좋은 것을 놔두고 무엇하러 다른 곳에 뭐 좋은 것이 없을까하면서 기웃거리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아니 안 그래요? 빛을 가까이 해야 빛의 은혜를 누릴 것 아닙니까? 좋은 것을 가까이 해야 좋은 것을 누릴 것 아닙니까? 능력 있고 멋있고 훌륭하고 인자하고 사랑이 풍성한 사람을 가까이해야 좋은 것을 얻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런 존재가 누굽니까? 뭡니까? 하나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게 뭡니까? 가장 기본적으로 말씀과 기도와 찬양입니다. 곧 예배입니다. 이게 기본입니다. 물론 그러고 나서 삶속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 까지 해야 되지만 일단 하나님의 교회를 가까이하고 예배와 기도와 찬송과 말씀 생활에 힘쓰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의 기본이고, 이 기본이 올바르게 잘되면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온갖 풍성한 은혜들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과 같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나게 마련입니다. 안 그래요? 주님 안에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이 있는데요, 생명이 있는데요,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는데요. 그러면 주님을 만나 이것을 경험하게 되었다면 어찌 주님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요? 하나님 안에 있는 그 굉장한 맛을 보았는데 어찌 가까이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집에 자꾸 가려고 하면 집에 꿀단지 묻어놨나 왜 자꾸 가려고 하느냐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 안에 꿀단지와는 비교도 안되는 게 있는데 어찌 자꾸 하나님을 향하여 가까이 가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고 직접 경험하며 늘 찬양하며 살았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시19:8~10절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여러분, 이게 바로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의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그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그래서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의 눈을 밝게 하여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의 맛이 얼마나 단지 꿀보다 더 답니다. 꿀보다 더 단 말씀의 맛을 본 사람은 그 인생이 꿀 같은 인생이 됩니다. 감사와 기쁨과 사랑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향기를 발하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함으로 진정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기쁨으로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물론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주님을 만난 사람은 우리는 정말 주님의 종노릇 할만한 자격도 없는 존재라는 걸 아는데 어찌 그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에 겸손히 귀 기울이며 아멘으로 화답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에 어찌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느헤미야 8장에 보면 제사장 에스라에 의하여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온 백성을 수문 앞 광장에 모아 놓고 제사장 에스라를 초빙하여 말씀을 읽고 해석을 해주는데 그러니까 곧 설교겠지요. 이 때 백성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새벽부터 오정까지 무려 여섯시간동안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데 그냥 듣는 게 아니라 에스라가 말씀을 선포하는 동안에 그들은 계속 아멘아멘하면서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를 하면서 들었습니다. 느8:6절을 봅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그러자 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온 백성들은 다 어찌할꼬 하는 마음으로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던 모든 모습들을 청산하고 말씀대로 살기를 다짐합니다. 그리하여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그들에게 민족적 큰 숙원 사업이었던 성벽 중건 사업을 성공리에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평안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승리가 어디서부터 옵니까? 진정한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기쁨이 어디서 옵니까? 은혜가 충만한데서 옵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환경이나 상황을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이기게 됩니다. 마귀사탄이 아무리 역사해도 사탄의 역사를 바르게 분별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쳐 버립니다. 모든 시험과 유혹과 도전과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습니까? 물론 기도할 때도 은혜를 받습니다. 찬송할 때도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니 뭐니뭐니해도 은혜와 능력의 근원은 말씀입니다. 자신의 죄와 연약함과 무지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엎드려 말씀 들으며 아멘으로 화답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할 때에 그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인하여 지혜를 얻게 되고 능력을 얻게 되고 힘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어두운 것들이 물리치고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20:32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듣는 일에 정열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읽고 듣되 그 알량한 자신의 생각이나 이성이나 경험이나 지식 따위는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의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 심령 가운데 일어날 때에 여러분의 영혼이 살아나고 풍성해 짐으로 더욱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단 말씀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에 마땅히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아멘 했으면 다음에는 순종해야 합니다. 안 그래요? 아멘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러면 누구 말 맞다나 립서비스 밖에 안되는 것이지요. 물론 기왕이면 립서비스도 안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좋지만 그러나 립서비스만 하면 그건 아부가 되니까 립서비스만 하면 안되지요. 실제 행동으로 해야 그게 진짜배기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로만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자칫하면 버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좋은 케이스가 있지 않습니까? 누굽니까?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입니다. 그는 키가 아주 크고 외모가 훤칠했으며, 게다가 처음에는 겸손하기도 했고, 하나님도 잘 섬기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후 그는 초심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권력과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보다는 인간적으로 어떻게 하면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에 연연하였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치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진멸시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좋은 양과 소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오직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사무엘이 빨리 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자신이 직접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무시하는 사울의 왕위를 폐하고 다윗을 왕으로 삼기로 결정하시고 사무엘 선지자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사울왕을 찾아가 이렇게 꾸짖습니다. 삼상15:22,23절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당신 멋대로 행하여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와는 반대되는 사람은 다윗과 아브라함입니다. 그들은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조건 떠나라,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시자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어불성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늘의 별과같이 땅의 티끌과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100세에 겨우 아들 하나 달랑 줘 놓고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명령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합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아내 사라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이삭을 밧줄로 묶어 번제단의 위에 올려놓고 잡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높이 듭니다. 이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께서 되레 깜짝 놀라 다급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래서 그는 결국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되었고, 결국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경외한다면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이자 본분입니다. 왜요? 그분이 창조주이시니까요. 거기에 생명과 능력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복과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축복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생명과 진리와 은혜와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유일하게 우리를 생명의 길로 진리의 길로 영생복락의 길로 인도해 줍니다. 그래서 그 말씀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생명의 능력과 사랑과 은혜와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세상의 모든 어두운 것과 왜곡된 것을 이기고 상황과 환경을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나 영원한 천국에서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며 그 그 말씀을 존중히 여기고 사모하며 읽고 듣고 아멘으로 순종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금요철야예배설교]  고난에 응답하라 Friday Night Sermon

고난에 응답하라
본문 / 로마서 5:3~6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사람은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뉴스를 보면, 하루도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온갖 고난의 이야기가 들립니다.
마치 온 세상이 고통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고통의 바다, 고해(苦海)인 것 같습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똑똑한 사람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능력이 있든지 없든지 고통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별별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고난이 없는 무풍지대(無風地帶)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이 성도들 중에도 많습니다.
교역자들이 제출한 심방보고서를 보면, 성도들이 경험하는 여러 가지 삶의 문제를 알 수 있습니다. 아픈 사연들이 매우 많습니다. 아픔, 시련, 고난 등의 문제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도 고난은 있습니다. 지금은 고난이 없어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들에게만 고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중ㆍ고등학생들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이 많습니다. 찌르면 눈물을 쏟습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네가 걱정할 게 뭐가 있냐”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중ㆍ고등학생들을 만나보면, 인생은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따라 인생이 결정됩니다. 고난이 우리를 지옥과 같은 곳으로 끌고 갈 수도 있고,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축복의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고난이 우리의 삶을 갈라 지옥과 같은 삶을 살게 하던지 천국과 같은 삶을 살게 합니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행동이 매우 중요합니다. 고난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두 종류의 행동이 나타납니다.
reaction과 response, 두 종류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두 가지 모두 ‘반응’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reaction은 반응이라 할 수 있고, response는 응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반응하는 것은 본능입니다. 고난이 찾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힘들어하고 절망합니다. 때로는 분노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벽을 치기도 합니다. 이것은 reaction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힘들어서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이것이 reaction입니다.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본능적인 것입니다.
먼저 그들은 하나님께 반응했습니다. 그것이 reaction입니다. 인간의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고난이 닥치면, 누구나 이렇게 행동합니다. 어려운 상황이 갑자기 몰아닥치면, 처음에는 누구든지 당황하여 인간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힘듭니다. 죽고 싶습니다. 고통이 클수록 절망이 큽니다. 고통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삶을 한 순간에 뒤집어엎어버립니다. 고난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뒤엉켜버립니다.
reaction은 상황에 대한 원초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reaction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response해야 합니다. 고난에 응답해야 합니다.
response는 reaction과 다릅니다. reaction은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이고, response에는 자신의 의지가 들어갑니다. 자신의 주관이 들어갑니다. 자신의 해석이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response는 반응하는 것이 아니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response는 우리의 의지가 담긴, 믿음의 행동입니다.

reaction은 본능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원망하고 불평하고 분노하고 좌절하는 것은 reaction입니다.
response는 reaction과 다릅니다. response에는 믿음이 들어갑니다. 의지적인 행동이 따릅니다. 본능적인 행동을 거부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도적입니다. 믿음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의지적으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반응(reaction)과 응답(response)은 전혀 다른 인생을 만듭니다.

신자는 고난에 대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고난에 대해 체념해서도 안 됩니다.
고난에 대해 반응하기만 하면, 궁지(corner)에 몰리게 됩니다. 반응(reaction)은 상황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악화시킬 뿐입니다.

신자는 고난에 적극적으로 맞서야 합니다.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해야 합니다. 고난 자체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해 react하는 것이 아니라, response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을 봅시다. 다니엘은 포로로 붙잡혀 바벨론으로 갔습니다.
다니엘의 삶은 용광로를 통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를 시기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고난의 풀무불 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고난에 react하지 않고, response했습니다. 그는 고난에 믿음으로 응답했습니다.

고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더욱 강해집니다. 진짜 믿음은 용광로 속에서 더욱 진짜가 됩니다. 그것이 고난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열어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고난 속에서 죽겠다고 한 것이 아니고, 고난에 응답했습니다.

고난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려면, 상황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해석을 잘합니다. 잘 해석하면, 해석의 과정 속에서 고난의 덩어리가 작아집니다.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해석하면, 고난을 다루어서 고난에 대해 응답할 수 있습니다.

상황을 어떻게 재해석하는가가 핵심입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면, 고통이요 절망입니다. 그러나 상황을 재해석하려면, 우리의 믿음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상황을 다르게 볼 줄 압니다. 오랫동안 믿음생활하다 보면,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angle)이 달라집니다. 관점이 다양해지고 넓어집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다 보면, 다른 눈이 열립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믿음생활하다보면, 우리의 시야가 점점 넓어집니다. 사물 하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둘러싼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물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많은 것과 연결되어있으며, 하늘에 닿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의 때에 왜 원망하고 불평합니까?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큰 고난을 당하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는 과정에 바로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아가는데,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왔습니다. 길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변하여 모세를 향해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기 직전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길이 없습니까? 길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길이십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하나님께서는 어디에서든 길을 내실 수 있으십니다.
믿음의 시각(視覺)을 가지면 자유로워집니다. 믿음은 큰 그림을 보게 합니다. 상황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을 보게 합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생애가 그러했습니다. 그의 삶은 고난으로 가득했고, 모든 것이 꼬일 대로 꼬여있었습니다. 요셉은 고난에 react하지 않고, response했습니다.
요셉이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해 react했다면, 그의 인생은 굉장히 불행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 부지런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렌즈(lens)를 고난에 맞추면, 고난에 집중하지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고난에 response하게 됩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눈이 열려야 합니다.
고난 때문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불을 걷어차고 교회에 나와 말씀을 듣고 찬양을 부르고 기도하다 보면,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고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렌즈가 바뀌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환난과 시련에 대해 react하는 것이 아니라, response하라는 의미입니다. 시험이 오는데 기쁘게 여기는 것은 믿음으로 응답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하면, 고난은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에 대해 응답하면, 우리는 고난의 피해자(被害者)가 아니라, 고난의 수혜자(受惠者)가 됩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올 수 있는 수많은 고난에 의해 떠밀려 다니지 않고, 오히려 고난으로 인해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고난에 react하지 않고, response할 수 있을까요?
첫째, 고난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 자체를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한 관점은 바꿀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은 무엇입니까? 고난을 하나님의 징벌이라 생각합니다. 고난은 불행이요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가, 하나님은 왜 나를 버리시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해 성경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로마서 5장 3~4절에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표현입니다. 환난이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해갑니다. 환난 자체는 힘듭니다.
그러므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표현입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 자주 발견되는 표현입니다.

성경에서는 고난과 시련을 부정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환난과 시련에 대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가집니다. 이것은 고난에 대한 응답입니다.
환난 중에 즐거워한다는 것은 환난 자체를 즐거워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환난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자체는 힘들지만, 인내하며 연단 받는 가운데 마침내 이루어질 긍정적 결과를 기대하며 즐거워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난 자체는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연단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연단이 끝났을 때에 소망이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고난 자체를 보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축복의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떠나버리시고, 밀쳐버리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멀리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가까이 오시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고난은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 번이나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고난을 당한 것은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을 싫어하셔서 바울에게 고난을 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습니다. 바울이 약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더 가까이 계셨습니다.
바울의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강함이 그에게 머물러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고후 12:9).
바울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응답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더욱 깊어졌습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 react하지 않았습니다. response했습니다. 고난에 응답했습니다.
본문 로마서 5장 3절에 보면, 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고난에 대한 response입니다.

시편 119편 71절에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배우고 익히면, 그 후에는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것의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제대로 배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는 말씀을 다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이 오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통과하면서 체득한 말씀은 우리의 영혼에 제대로 박힙니다. 그것이 진짜입니다. 그것이 제대로 배운 말씀입니다.
그 외의 것은 알 듯 모를 듯합니다. 삶에 체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으로 인하여 말씀에 눈을 떴습니다. 성경공부를 한다고 말씀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배우는 말씀은 머리에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오면, 다 사라져버립니다.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지식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고난이 왔을 때, 내 편이 되지 않습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했는데, 고난을 통하여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으면, 삶이 새로워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보다는 오히려 멀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인간의 한계이자 축복입니다.

고난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질문이면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결코 간단한 질문이 아닙니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고난의 문제는 하나님의 편에서는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쉽습니다. 하나님께 어려운 문제가 있겠습니까.
고난의 문제가 우리의 편에서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편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에 대해 설명해주셔도 우리는 고난에 대해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 잘못된 관점과 견해를 가지고, 고난 속에서 회의(懷疑)에 빠져 어려움을 당합니다.

세상은 고난이고, 신자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의문의 고난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고난 속에서 헤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갈등을 겪으며 신앙의 딜레마(dilemma)에 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고난을 다 없애버리시지는 않으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고통에 대해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인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response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선택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신 방식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시고 죽으신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통 가운데 계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고통을 경감시켜주시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의 마지막 쓴 잔 한 방울까지 다 마시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끝까지 고통 속에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고통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왜 십자가를 선택하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을 지시고, 우리의 고통을 안으시고, 고난의 한가운데 들어가심으로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 받을 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고난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슬픔에 동참하심으로 우리의 고통을 다루시고, 고난의 바다를 우리와 함께 건너가십니다.
십자가는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되셔서 최고의 고통을 경험하심으로 온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고통의 가운데로 뛰어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서서 팔짱을 끼고 지시하시거나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을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겪으심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의 한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을 이해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과정을 지나가게 하십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요, 우리를 복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독특한 축복이 고통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우리를 강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당해 넘어지지 않고, 고난을 통해 강하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보면,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이겨내는 가운데 우리에게 영적 근육이 생기게 하십니다.

나이가 들면, 근육이 약해집니다. 근육이 없으면, 서있을 수 없습니다. 관절염이 생기는 이유는 근육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근육이 받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뼈를 받쳐주는 것이 근육인데, 근육이 생기려면 운동해야 합니다. 청소년들은 특별히 운동하지 않아도 많이 움직이기 때문에 몸이 단단합니다. 그런데 근육이 없으면, 몸이 물렁물렁합니다.

역기나 아령을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근육(muscle)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근육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근육은 고통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역기나 아령을 들면, 고통을 통해 근육에 미세한 파열이 일어나면서 근육질이 됩니다.

고통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래야 근육이 생깁니다.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영적 근육이 필요합니다.
역기를 들 때, 처음부터 무거운 것을 들 수는 없습니다. 꾸준히 들다 보면, 무거운 것을 들 수 있게 됩니다. 포기하고 싶지만, 이겨내야 합니다.
무거운 것을 들고 나면, 처음에는 몸살을 앓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계속해서 들다 보면, 더 무거운 것을 들 수 있게 됩니다. 조금 무게가 달라져도,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고통 없이는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힘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근육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편안하게 살면, 성인병에 걸립니다. 먹고 운동하지 않으면, 활동하지 않으면, 몸이 약해집니다. 근육이 풀어져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서있을 수도 없습니다. 근육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뼈는 있지만, 근육이 없습니다. 뼈를 받쳐주는 근육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고난은 필요합니다.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믿음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든 못하는 사람이든 고난은 찾아옵니다. 설명할 수 있는 고난, 설명할 수 없는 고난, 불가해(不可解)한 고난 등 별별 고난이 찾아옵니다.

고난은 고난을 통해 이겨내야 합니다. 고난을 이겨내면서 만들어진 영적 근육이 또 다른 고난을 이겨내게 만듭니다. 우리가 믿음의 순례의 길을 걸어갈 때, 고난을 통해 만들어진 영적 근육이 필요합니다.
일평생 별별 사건과 수많은 시련과 고난과 시험이 닥치는데, 우리는 그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우리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이라는 아령으로 영적 근육을 계속해서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이라는 단백질을 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에 맞서 reaction하는 것이 아니라 response해야 합니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영적 근육이 조금씩 생깁니다. 영적 근육은 한꺼번에 생기지 않습니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면역 체계는 한꺼번에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순례의 길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며 고난을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영적 근육이 만들어집니다.

시련과 환난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은 그 시간을 통해 더 강해집니다. 30대 때에 매우 깊은 시련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 받고, 능력을 받고, 영적 근육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사람은 40~50대가 되면 어떤 고난도 가볍게 지나갈 수 있습니다. 웬만한 고난에는 믿음으로 response합니다.
그런데 살아오면서 고난을 전혀 경험하지 않고, 아주 편안하게 산 사람에게 어느 날 고난이 밀려오면,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영적 근육이 만들어진 사람들은 담력이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믿음이 자랍니다. 고난 속에서 믿음이 깊어집니다. 고난 속에서 성품이 다듬어집니다.
고난을 통하여 천국의 소망이 깊어집니다. 우리 안에 있던 불순물이 고난을 통해 제거되어 순결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순금 같이 됩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만 닮아가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영적으로 강해지고, 담대해집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의 과정 속에서 영적 근육이 만들어지면, 어떤 시련과 환난에도 즐거워하며 소망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유토피아(utopia)가 아닙니다. 고난의 무풍지대에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집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은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고난은 고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고난은 저주요 고통이요 불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렌즈로 보면, 고난이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궁극적 승리를 약속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거꾸로 매달로 죽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십자가의 끝에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집니다.

여러분에게 고난이 와도 분명한 것은 끝에는 승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난의 과정 속에서 별 일이 다 일어날 것입니다. 우여곡절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익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이루게 하시고, 우리를 순금 같이 빚으시고, 우리를 성화(聖化)시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게 하실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고난을 이겨낸 사람과 믿음으로 고난을 통과한 사람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後者)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에 react한 사람들은 고난으로 인해 한이 맺혀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가해자(加害者)가 아닙니다. 성경의 인물을 보면,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일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을 보세요. 사탄이 그에게 시비를 걸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하시고, 욥에게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욥기의 피날레(finale)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욥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주실 때에는 고난을 통해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줄 것을 믿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고난이 오면 힘듭니다. 그러나 무조건 ‘할렐루야’라고 반응해야 합니다. 고난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고난을 인내함으로 영적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영적 근육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인내를 통하여 response함으로 영적 근육을 만들어야 합니다.

친구가 나를 위해 아령을 든다고 해서 내 몸에 근육이 생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근육을 만들려면, 내가 운동해야 합니다.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고통을 겪으며 내가 운동해야 내 몸에 근육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옮기실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고통의 바다를 건넘으로 영적 근육을 키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오면 인내해야 합니다.
만일 인내하기를 포기한다면, 지상(地上)에서 살 수 없습니다. 고난에 떠밀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을 보세요. 그는 고난을 통해 고난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고난마저도 관여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적 근육맨이 된 것입니다.
그는 고난에 적극적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난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난까지도 도와줄 수 있는 강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난이 없기를 바라면, 힘든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통과하되 바르게 통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고난을 믿음으로 다루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영적 근육이 강화되면, 고난을 감당할수록 강력해집니다. 그리고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집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의도하신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통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적 근육이 생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더 큰 고난이 왔을 때,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관점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어떠한 고난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고난을 믿음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고난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경험입니다. 남의 고난에 대해서는 아무리 들어도 내가 고난을 당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몸이 아파도 당사자가 아픈 것이지, 내가 아픈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저 위로할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경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고난의 참관자이지, 고난의 참여자는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난의 바깥에서 고난을 해석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러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통을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봤습니다.

단순히 지식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머리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믿음은 힘이 없습니다. 생동감이 없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어도, 가슴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볍습니다. 기도도 가볍습니다. 묵상도 가볍습니다.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기도와 찬양은 다릅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이 있습니다. 단순히 은혜로운 찬양이 아닙니다.
고통의 밑바닥에서부터 나오는 찬송은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묵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의 깊이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깊은 고난의 밑바닥까지 갔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의 강도(强度)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저주가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 만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배고픔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밥은 절실하지 않습니다. 식사 때가 되어 먹을 뿐입니다. 그러나 끼니 문제로 고통을 경험해본 사람이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우리의 신앙은 사변적으로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피부에 와 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상관없는 말씀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나는 배부르고, 아무 문제가 없는데, 말씀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지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식적 지식과 경험적 지식이 있습니다. 인식적 지식은 머리로 아는 지식입니다. 이것은 큰 힘이 없습니다. 여기에 생명을 걸 수도 없습니다.
경험적 지식은 경험을 통해 체득한 지식입니다. 고난을 통해 경험한 지식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실제를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식 중에 중요한 것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책상에서 배운 하나님은 추상적인 하나님입니다. 가까운 하나님이 아니라, 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더 배우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에 대해 말하며 측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언제 그것을 경험했습니까? 바울은 십자가를 통해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바울은 고난을 통과하면서 십자가를 만났습니다.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계속해서 십자가를 말한 이유를 아십니까? 십자가와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 한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언제 십자가를 깊이 경험하게 됩니까? 평소에는 십자가를 깊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고난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을 때, 십자가를 만나면, 그 속에 농축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죄인인 나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버립니다.

본문 로마서 5장 5절에 보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이 가슴이 꽂힐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릅니다.
본문 로마서 5장 6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무너지고 깨어집니까? 예수님께서 고난을 경험하시고 난 후에 우리를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식으로 우리를 만나주신 분이 아니십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하나하나가 뼈 속 깊이 파고드는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가 아프다고 할 때, 우리의 아픔이 무엇인지 매우 잘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아신다는 것은 인식적으로 아시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적인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의 한가운데 밀고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체득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의 노른자위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응어리가 풀리고, 아픔이 치유되고, 고통에 대한 답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는 독특한 사건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려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저주요, 실패의 상징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저주는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실패는 없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이 십자가와 만나면, 그 고통은 다른 사건으로 변합니다. 고통이 축복이 되고, 고통이 아름다운 스토리(story)로 변합니다.
십자가 없이 우리가 홀로 당하는 고통은 저주와 같지만, 십자가를 만나면 고통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사람들마다 다른 고통을 안고 십자가를 만납니다. 우리가 당한 고통은 십자가 안에서 다양한 색깔로 변하여 영롱하게 빛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진리를 경험하고, 고난을 통해 십자가를 깊이 만나면, 그 속에서 우리의 고난은 새로운 색깔로 변화되고,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고난의 세계 안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할 때, 십자가의 의미를 일부분이라도 깨닫게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엄청난 위력이 됩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십자가는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반전됩니다. 완전한 승리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십자가와 연결되면, 실패가 아닙니다. 부활로 연결됩니다. 부활로 완성됩니다. 놀라운 영광으로 결론 맺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영적 경험이 쌓일 때, 믿음이 자랍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은 그냥 자라지 않습니다.
믿음은 교실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책상 앞에서 자라지 않습니다. 책을 통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소파 위에서, 따뜻한 카페에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서 치열한 싸움을 하는 가운데 십자가를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경험의 끝에서 믿음이 자랍니다.

고난 끝에서 십자가를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믿음은 무적의 믿음입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십자가로 맞서고, 고난에 응답할 때, 우리의 인생이 멋진 인생이 될 것입니다.
힘들고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풀리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미 다른 세계에 와 있습니다.

고난은 선물이요 축복이라는 말이 처음에는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하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오기 이전에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세계가 얕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의 한가운데서 만난 하나님은 다릅니다. 이론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실재(實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머리로 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온몸으로 경험한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온몸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때, 어떤 고난이 와도 응답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난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거나 답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믿음으로 재해석하고, 고난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응답하는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고통을 겪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통 당할 때에 도우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에 주님과 함께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더 가까이 다가오시고, 우리를 더 깊이 만나주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으로 인해 피해자가 되지 마시고, 수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통해 십자가를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경험하심으로 영적으로 더욱 강력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불가피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영적 근력을 키워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우리가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로마서 5장 3~4절에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난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세요. 믿음으로 응답하세요. 믿음으로 맞서세요. 그러면 고난은 반드시 축복이 될 줄 믿습니다.

고난은 반드시 우리를 유익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반전시키실 줄 믿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길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고난 속에서 십자가를 만나면, 부활로 이어질 것입니다. 고난에 react하는 것이 아니라, response하시기 바랍니다.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